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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05. 상실】 (23/26)

  【외전 05. 상실】

채훈은 학생회관 1층에 위치한 카페에 앉아 리포트를 쓰고 있었다.

노트북은 있었지만 사용하지 않았다. 복붙을 방지하기 위해 몇몇 교수들은 손으로 쓴 리포트를 요구했다. 최신 네이처지에 실린 논문을 읽고 요약해서 A4 용지 양면을 빡빡하게 채우는 일은 단순 노가다 이상이었다.

마지막 마침표를 찍은 채훈은 혹시나 잘못 적은 게 없나 한 번 더 점검하고는 시간을 확인했다. 3시 10분이었다. 다음 수업은 4시였지만 조별 발표 준비 때문에 일찍 모이기로 약속이 잡혀 있었다. 채훈은 교양관 건물까지 이동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생각하며 가방을 챙겼다.

10여 년 전에 대학을 다닐 때는 과제에 치여 살았지만 지금은 널널했다. 예과 1학년 1학기라고 하지만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여유가 있었다. 물론 실험 실습도 있었고 발표 수업도 2개 있었다. 전공 수업의 난도는 전문 용어만으로도 최상을 찍긴 했다. 그래도 과거 대학 생활에 비교하자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선배들의 이야기를 종합해보자면 예과 1학년 때 많이 놀아야 한다고 했다. 학년이 올라가면 과제 지옥에서 살 거라고 괴담 아닌 괴담을 말해주었다.

두 번째 대학 생활은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어린아이들 틈에 섞여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경험은 새로웠다.

돈이 있어서 가능한 거지.

채훈은 속물적이고 냉정하게 판단했다. 정우를 돌봐주는 보모가 2명이나 되었고, 집안일도 따로 해 주는 도우미가 있었다. 이 나이에 대학을 다닐 수 있는 것은 모두 물질적인 여유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용돈으로 쓰라고 건물을 넘긴 승건과 이수진이 고마울 수밖에 없었다. 물론 금전 감각이 오락가락하게 되는 부작용이 있기는 하지만, 그건 부수적인 결과였다.

“어? 채훈이 형?”

황금만능주의에 대해 고찰하며 마지막으로 필통을 챙기던 채훈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동기와 선배를 모두 통틀어 채훈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은 몇 없었다. 그래서 다들 채훈을 형이나 오빠, 아저씨, 혹은 후배님이라고 불렀다.

바로 앞에 서 있는 남자는 학과 사람이 아니었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지만 채훈은 남자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재작년에 하와이에서 만났었던 김경민이었다.

“경민이?”

“네. 형. 오랜만이에요.”

김경민이 활짝 웃으며 다가왔다. 2년 만에 만나는 김경민을 보며 채훈은 깜짝 놀랐다. 하와이에서 승건에게 쫓기는 와중에 헤어지고는 김경민의 얼굴을 본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귀국하고도 몇 번 메시지를 주고받기는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겼다. 그렇게 스쳐 가는 인연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곳에서 만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오랜만이다.”

자리에서 일어난 채훈은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했다. 김경민이 열정적으로 악수를 하고는 손을 놓았다.

“형. 여긴 어떻게 온 거예요?”

“아, 여기 다녀. 이번에 입학했거든.”

“편입했어요?”

“아니, 수능 쳐서. 정시야.”

자연스럽게 대화를 하던 채훈은 문득 김경민이 알파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페로몬 향기는 나지 않았지만 느낌이 그랬다.

채훈은 굳이 알파냐고 묻지 않았다. 예의도 아니었고, 그가 알파라고 짐작할 만한 것이 몇 개 있었다. 기억을 뒤져보면 하와이에서 김경민은 승건이 우성 알파라는 것을 알아보았었다. 그건 형질자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수능이요? 편입이 아니라? 어느 과에요?”

“약학과. 그러는 너는?”

“저는 경영이요. 이번에 법원에서 공익 끝내고 2학기에 복학할 거예요. 와. 진짜 반가워요.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는데. 어떻게 지냈어요? 아, 시간 있어요? 차라도 한 잔 마실까요?”

김경민에게서는 반갑다는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채훈은 환하게 웃는 김경민이 덩치 큰 리트리버와 닮았다고 생각해버렸다. 하와이에서도 그랬지만 그는 넉살이 좋아서 사람을 편하게 했다.

“미안. 시간이 없어. 곧 수업 들어가야 해.”

“그래요?”

“나중에 밥이나 한번 먹자.”

“이번에는 제가 한턱 쏠게요. 지훈이랑 태용이도 부르고. 걔네들도 제대했거든요. 번호 안 바뀌었죠? 저는 그대로인데.”

“나도 그대로야. 연락할게.”

“형. 잠시만요. 제가 메시지 보낼게요.”

김경민이 그 자리에서 메시지를 보내자 채훈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그렇게 다음을 기약한 채훈은 인연이란 신기하다고 생각하며 김경민과 헤어졌다.

*

*

수업을 모두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채훈은 무거운 책가방을 내던지고 어린 아들을 품에 안았다. 채훈은 정우와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해 가능하면 모든 과제를 학교 내에서 마무리하고 귀가하려고 노력했다. 대학을 직장 다니듯이 하는 것도 그런 이유였다.

이제 15개월을 꽉 채운 정우의 에너지는 폭발적이었다. 쉬지 않고 움직이는 정우와 같이 놀아주던 채훈이 먼저 체력이 방전되었다.

“아이고. 아빠 힘들다.”

채훈은 과장된 몸짓으로 쓰러졌다. 그러자 정우가 다가와서는 채훈의 뺨을 툭툭 두드리고는 미끄럼틀로 쌩하니 가버렸다. 채훈이 바닥에 쓰러지는 것은 일종의 약속이었다. 아이는 그때 혼자 놀 줄 알았다.

그렇게 푹신한 매트에 널브러진 채로 채훈은 정우가 노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제 겨우 돌이 지난 아기와 놀다가 체력이 털리는 것에 아직 익숙해지지 않았다.

대학을 다닌 이후로 하루에 정우랑 함께 하는 것은 겨우 서너 시간에 불과했다. 그것조차 밥을 먹고 볼일을 보면 더 짧아졌다. 거의 하루 종일 붙어있었던 때와 비교하면 얼굴만 잊어먹지 않게 확인하는 수준이었다. 정우가 꼬박꼬박 아빠라고 불러주는 게 고마울 정도였다.

그렇기에 아주 가끔씩, 이 나이에 정우를 두고 대학에 다니는 게 너무 욕심을 부리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채훈이 대학에 다니기로 결정한 이유는 여럿이었다. 우선은 수능을 너무 잘 쳐 버렸다. 그리고 전문직에 대한 욕심도 생겼다. 나중에 정우에게 백수가 아니라 번듯한 직업을 가진 아빠로 보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승건은 차라리 작은 사업을 하라고 했지만, 채훈은 자신의 역량을 잘 알았다. 어쨌든 목표는 전문 면허를 손에 넣는 거였다.

모든 건 시기가 있었다. 파릇파릇한 대학 신입생들에 비해 나이가 한참 많기는 했지만 상황은 나쁘지 않았다. 정우를 돌보는 보모가 있었기 때문에 육아에 대한 걱정이 적은 건 행운이었다.

그래서 직장에 다니는 보통의 아빠들처럼 귀가 후에는 온전히 정우에게 시간을 투자하려고 노력했다. 아이랑 놀다가 쉽게 지쳐 드러누워 버리는 것은 보통의 아빠들과 닮았다.

“아빠. 이거.”

미끄럼틀을 타던 정우가 상자에서 장난감 자동차를 들고 오는 바람에 채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받아든 장난감 자동차는 정우가 제일 좋아하는 것이었는데, 겉은 멀쩡했다.

“이거 왜?”

“이거.”

이거라고 한 번 더 말한 정우는 다른 요구 없이 다시 미끄럼틀로 가버렸다. 장난감을 손에 든 채훈은 어리둥절했지만 곧 그러려니 했다.

아이의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소용없었다. 특히 이 시기에 아이들은 하루하루가 달랐다. 어제까지는 이유식을 받아먹던 아이가 오늘 아침에는 수저를 들고는 제 입으로 집어넣었다.

8개월 미숙아로 태어난 정우는 큰 병치레 없이 잘 자라고 있었다. 이유 없는 고열에 시달리기도 했고, 기침을 하다가 경기를 일으킨 적도 있었지만 다행히 씩씩하게 견뎌냈다. 지금껏 아이를 여럿 돌봤다는 김혜진의 말에 따르면 원래 크고 작게 아프고 한다 했다. 오히려 정우의 경우는 양호한 편이라며 베테랑의 면모를 보였다.

여전히 채훈은 초보 아빠였고, 아이가 클 때마다 하나씩 배워가고 있었다. 어쩌면 장난감 자동차는 쓰러진 채훈을 위한 정우의 선물일 수도 있었다.

장난감 자동차를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탁자 위에 올려둔 휴대폰이 진동했다. 승건의 메시지였다.

[저녁 먹었어?]

[아니, 조금 있다가 먹을 거야. 너는?]

[이동 중.]

승건은 이동 중에 종종 메시지를 보내곤 했다. 이유는 물어보지 않았지만 아마도 심심해서 그런 것 같았다.

이동 중이라면 메시지가 아니라 직접 통화하는 게 더 편했다. 채훈은 전화를 걸어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었다. 승건은 업무와 관련된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 대신에 채훈이 조별 발표 수업의 무쓸모를 열심히 피력했다. 오래 지나지 않아 승건이 목적지에 도착했다고 알려왔다.

―오늘 늦을 거야. 연락 못 할 수도 있으니까, 자정 넘으면 기다리지 말고 그냥 자.

채훈은 승건의 스케줄 중에 퇴근 시간 정도만 공유했다. 최근 승건은 대표 이사직을 그만두기 위해 이런저런 일을 마무리하느라 바빴다. 업무 미팅 외에도 접대성 외식이 많이 늘어서, 일주일에 두세 번은 밖에서 저녁을 먹었다.

오늘 승건은 그의 둘째 외할아버지와 저녁 약속이 잡혀 있었다. 술을 좋아하는 상대는 단순히 저녁만 먹고 헤어지지 않고 꼭 2차까지 갔다.

채훈은 문득 얼마 전에 있었던 승건과의 실랑이가 떠올랐다.

“늦으면 내가 데리러 갈까? 그럼 작은 회장님도 빨리 보내주실 것 같은데?”

―그러지 말고, 일찍 자.

“서운해지려고 하네.”

지난 축제에서 승건이 했던 것처럼 한 번 더 강짜를 부려보았다. 물론, 웃음기가 섞여 있는 것은 숨기지 못했다.

―가능하면 일찍 돌아갈게. 이제 끊어야겠어.

“응. 나중에 봐.”

가벼운 농담으로 통화를 끝냈다. 그러자 미끄럼틀을 내려온 정우가 바로 다가왔다.

“아빠.”

이번에는 정우가 채훈을 부르고는 양손으로 자기 입을 막았다. 아이가 몸짓으로 보내는 시그널이었다.

“정우야. 목말라? 물 마실래?”

“응.”

정우는 물이라는 단어를 말할 수 있었지만 때때로 자기 입을 양손으로 막는 것으로 목이 마르다는 것을 어필했다. 왜 그러는 건지 이유는 모르지만 자기 의사를 확실하게 표현하는 것은 좋은 것이랬다.

“물 마시러 가자.”

“안아 줘.”

채훈이 일어서자 정우가 안아 달라며 팔을 벌렸다. 열심히 놀아서 힘이 빠진 게 분명했다.

아직 아이라 지구력이 없었다. 대신에 충전은 금방이라 저녁을 먹고 나면 다시 에너지가 넘쳤다. 밤에 깨지 않고 자게 하려면 저녁에 한 번 더 놀아주거나 마당 산책이라도 해야 했다. 그다음에 씻기고 재우는 것이 최근의 루틴이었다.

채훈은 정우를 안아 올렸다. 또래보다 살짝 작은 정우는 가벼웠다. 작고, 따뜻하고, 폭신하고, 말랑한 정우에게서는 아기 냄새가 났다. 삶의 시름도, 고단함도 아이를 안으면 모두 사라졌다.

생의 가장 큰 기적에 감사하며 채훈은 정우의 정수리에 코를 박고는 웃었다.

*

*

채훈은 승건이 워커홀릭이라기보다는 유능한 완벽주의자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막중한 책임을 져야 하는 자리는 귀찮아하면서도 한 번 맡은 일은 성실하게 해냈다.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대기업인 태화 그룹의 대표이사는 많은 일을 처리해야 하는 자리였다. 물론 일반 직장인처럼 6시에 칼퇴근을 하거나 혹은 점심시간이 지나 중역 출근을 한 적도 몇 번 있었다. 하지만 그건 정말 아주 가끔 있는 일이었다.

아주 바쁠 때는 거짓말 하지 않고 분 단위로 스케줄이 있었다. 업무가 과중했고 무엇보다 대외적인 활동이 끊이질 않았다. 달에 한두 번은 국내든 국외든 출장이 있었다. 그리고 승건은 별다른 불평도 불만도 없이 제 할 일을 해냈다.

고단한 직장인으로 살았던 채훈은 가능하면 밤늦게 귀가하는 승건을 마중하려고 노력했다.

승건이 돌아온 것은 자정이 되기 직전이었다. 씻고 잠들기 전까지의 얼마 없는 시간을 알뜰히 이용하기 위해 채훈은 승건과 함께 드레스 룸에 들어갔다.

“그럼 이제 백수 되는 일만 남은 거야?”

채훈은 승건에게서 재킷을 받아들며 물었다. 승건은 드디어 대표이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다음 주에 열리는 임시 주총에서 새로운 대표이사를 뽑기로 했다.

잡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승건의 둘째 작은 외할아버지가 반대했다. 정규완 회장이 쓰러졌을 때 경영권 방어에 도움을 준 그는 승건의 지지자라고 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잘해 왔으니 자리를 지켜 기반을 다지라는 그를 설득하느라 승건이 마지막까지 정성을 쏟았다. 오늘로 확답을 받았다고 했으니 승건에게는 백수가 될 일만 남아 있었다.

“목요일에 사무실 뺄 거야. 임시 주총이 금요일이거든.”

“오, 좋아. 놀러 갈 일만 남았네.”

일주일짜리 여름휴가도 아니고 3개월 동안 온전히 쉴 수 있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일부러 맞춘 것은 아니지만 승건의 백수 기간은 채훈의 방학과 겹쳤다. 여행 계획은 벌써 세워두었다.

채훈이 바다가 보이는 섬에 가자고 주장한 덕분에 7월 초에 코타키나발루에 가기로 했다. 대학 동기들은 벌써부터 랩실 보조로 들어가려고 여기저기 신청하고 있었지만 채훈은 이번 여름 방학만큼은 여유롭게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아, 그래. 혹시 김경민이라고 기억나? 예전에 하와이에서 나랑 같이 있었던 대학생 말이야.”

“……걔가 왜?”

넥타이를 풀던 승건이 잠시 멈칫했다. 그러나 재킷을 옷걸이에 걸고 있던 채훈은 승건의 반응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오늘 학생회관에서 만났거든. 경영학과 다니고, 이번에 복학할 거라고 학교에 잠깐 왔대. 그때 잠깐 메시지를 주고받다가 말았는데, 다시 보니까 신기하더라. 이것도 인연인가 싶고.”

“우연이지.”

“나중에 애들이랑, 그러니까 경민이랑 하와이에서 같이 만났던 경민이 친구들이랑 같이 만나서 밥 먹기로 했어.”

“그래?”

이번에는 승건이 심드렁히 반응했지만 채훈은 그러려니 했다. 대신에 승건에게서 넥타이를 받으면서 말을 이었다.

“그때는 몰랐는데, 경민이가 알파더라.”

“몰랐어?”

“응. 그때는 냄새도 별로 안 났고. 음……. 났을 수도 있지만 그게 그거인지 몰랐던 것 같아. 아예 의식도 못 했으니까. 이번에 보니까 알파더라고.”

“김경민이 티를 내?”

“아니. 그냥 알게 되었어. 페로몬 향은 안 났는데 그냥 느낌이 들더라고. 그리고 하와이에서 너를 보고 우성 알파라고 했던 게 기억나서 알파구나 했지.”

채훈은 반사적으로 하와이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승건에게 쫓겼던 순간은 가장 강렬한 기억 중에 하나였다. 김경민이 승건의 앞을 가로막았다가 무력하게 물러나고 말았다. 형질자들 사이에서 우성 알파가 깡패라고 불리는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기도 했다.

“걔랑 언제 만나?”

“아직 몰라. 기말고사 기간이잖아. 시험 끝나고 약속 잡아야지. 음, 여행 가기 전에는 만날 것 같긴 한데. 왜? 싫어?”

순간 채훈은 잽싸게 물었다. 평소에 눈치가 나쁜 편은 아니었는데, 오늘은 승건의 미묘한 반응을 조금 늦게 알아차렸다. 벨트를 풀다 말고 미간을 구긴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네가 알파를 만나는 게 싫어.”

아니나 다를까 승건이 싫다는 말을 서슴없이 했다. 확실히 승건은 자신이 다른 알파랑 만나는 것을 노골적으로 싫어했다.

“단둘이 만나는 것도 아닌걸.”

“술 마실 거면 심 실장님이나, 경호원 불러 동행해.”

“뭘 그렇게까지. 택시를 타거나 대리를 부를게.”

“아니면 내가 가고.”

최후의 통첩처럼 말을 한 승건이 벨트를 풀기 시작했다. 만나지 말라고는 못 하니 승건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양보를 한 것이었다.

저놈의 성격은 여전하지.

채훈은 입술을 끌어올리며 소리 없이 웃었다. 승건의 반응이 질투 때문인지 불안감 때문인지는 애매했다. 혹은 안전 때문일 수도 있었다. 어쨌든 아직 자신의 눈에서 콩깍지가 떨어지지 않은 덕분에 그 모습이 귀여웠다.

“네가 데리러 오면 되겠네.”

“농담하는 거 아니야.”

“네가 괜찮다면, 서로 인사 한번 하고. 내 배우자가 잘생겼다는 거 자랑 좀 하게. 어때?”

분위기를 가볍게 하려고 너스레를 떨던 채훈은 말을 하다가 욕심이 생겼다. 생각해보면 승건을 누군가에게 소개한 적이 거의 없었다. 승건도 마음에 들었는지 굳은 얼굴을 풀고는 옅게 웃었다.

나중에 딴말하지 말고, 만날 날짜를 알려달라고 한 승건이 속옷만 남기고는 모두 벗었다. 그 광경을 모두 지켜보던 채훈은 속으로만 웃었다.

승건의 육체는 채훈이 생각하는 이상형이었다. 키가 크고, 팔다리가 길쭉하고, 군살 없이 단단한 근육이 자리하고 있었다. 멋진 복근, 그리고 근사한 등과 팔뚝은 환상적이었다. 하루걸러 한 번은 야근을 하는 와중에도 체력 단련을 잊지 않은 녀석의 몸은 근사하다는 말로 모자랐다. 채훈이 승건에게 부러운 게 하나 있다면 바로 멋진 몸이었다.

그런 승건의 탈의 광경을 지켜보는 것은 꽤나 도착적인 취향이었다. 승건이 채훈에게 예쁘고 멋진 옷을 입혀 꾸미는 것을 좋아한다면, 자신은 반대였다. 승건을 마중하고 옷시중을 드는 것도 눈 호강이라는 불순한 동기가 있었다. 확실히 침대 위에서 보는 알몸과는 느낌이 달랐다.

채훈이 자신의 취향을 고찰하는 사이에 승건은 잠옷을 챙겨 욕실로 향했다. 드레스 룸을 벗어나 파우더 룸을 지나는 승건의 뒤를 채훈이 뒤따랐다.

“같이 들어가려고?”

막 욕실 안으로 들어가려던 승건이 채훈을 돌아보며 물었다.

“어……, 아니.”

딴생각을 하고 있던 채훈은 한 박자 늦게 고개를 저었다. 2주 전에 욕실에서 있었던 섹스가 반짝하고 떠올랐다. 그때와 상황은 다르지만 어쨌든 한동안 승건과 단둘이 욕실에 있는 것은 피하고 싶었다.

“눈빛이 너무 노골적이야.”

“내가 한두 번 이랬나. 씻고 나와.”

“기다리고 있어.”

“……응?”

“따라 들어오지는 말고.”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 승건이 욕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홀로 남은 채훈은 잠시 상황을 파악해야 했다.

설마, 어제 했는데?

결혼을 하고 같이 살기 시작했을 때는 눈이 마주치고 손가락만 스쳐도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히트와 러트가 오면 하루 종일 침대에서 벗어나지 않은 적도 있었다. 수능을 앞두고도 자제하지 않다가, 시험을 마친 이후에는 더욱 불타올랐다. 그러다가 겨울에 채훈의 살이 훌쩍 빠져버리는 바람에 승건이 먼저 절제하기 시작했다. 물론 횟수가 줄어든 것뿐이고 질적으로는 농밀해졌다.

채훈은 뺨을 문지르며 애매하게 웃었다. 자신은 평범하게 섹스를 좋아했다. 먼저 하자고 덤벼든 적도 꽤 있었다. 하지만 애초에 체력적인 측면에서는 승건과 비교할 게 아니었다.

오메가로 발현한 이후로 예전처럼 근육이 잘 생기지 않았다. 보약도 먹고 영양제도 먹고 있었지만 극적인 효과는 없었다.

결론은, 섹스는 좋았지만 이제 결혼 초기처럼 막 덤벼들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다. 특히 대학을 다니면서 시간 분배와 함께 체력이 중요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어제 무리를 한 덕분에 오늘도 허리가 꽤나 아파서 의자에 오래 앉아있는 건 힘들었다.

“그때도 비슷한 고민을 했었는데.”

언젠가 승건에게 100을 넘지 말라고 했던 적이 있었다. 사람의 고민거리란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한 채훈은 걸음을 옮겨 욕실 문을 두드렸다.

“문 열게.”

채훈은 승건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문을 열었다. 거품을 씻어내고 있던 승건이 드물게 눈을 크게 뜨고는 이쪽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야?”

“오늘 섹스 안 해.”

“…?!!”

“섹스 안 할 거라고. 그냥 잘 거야.”

공격은 최선의 방어라고 했다. 먼저 선수를 쳐서 승건에게 확답을 받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었다. 승건은 자신이 내뱉은 말을 지켰다.

일방적인 통보였고 타협 따위는 없을 거라는 눈빛을 보내자 승건이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알았어. 그렇게 안 노려봐도 돼.”

“안 노려봤어. 눈에 힘을 준 거지. 이제 씻어.”

한마디도 지지 않고 대꾸해 준 채훈은 문을 닫고는 그대로 뒤돌아섰다. 승건이 나오기 전에 얼른 침대에 누워 자는 척이라도 해야 했다.

* * *

8차선 도로는 차들로 가득 들어찼다.

택시 뒷좌석에 앉은 채훈은 초조한 기분으로 신호등이 바뀌는 것을 지켜보았다. 퇴근 시간 정체로 인해 신호등이 초록색으로 바뀌어도 차들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달려갈까? 뛰면 30분이면 도착할 것 같은데.

채훈은 답답하게 막힌 도로를 확인하며 몇 번이고 고민했다. 바로 앞 사거리에서 꼬리 물기를 한 차들이 뒤엉켜 있었다. 도로 정체는 쉽게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여기서 태화 병원까지 멀죠?”

“걸어가시게요? 1시간은 걸릴 텐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봤더니 택시 기사가 정색을 했다. 차로 10분 거리였지만 천천히 걸으면 1시간은 걸렸다.

채훈은 그래도 지름길이 없나 휴대폰으로 지도를 확인하려고 했다. 하지만 떨리는 손은 제대로 [태화 병원]이라는 이름을 제대로 터치하지 못했다.

괜찮을 거야.

휴대폰을 꼭 쥔 채 마법의 주문을 속으로 외쳤지만 잔 떨림은 가라앉지 않았다. 안 괜찮을 것임을 이미 예견하고 있었다.

심정민의 전화를 바로 받지 못한 것은 기말고사 때문이었다. 오후 4시부터 6시까지 내내 시험을 쳤고, 휴대폰은 전원을 끈 채 제출했다. 중간의 쉬는 시간에는 귀찮아서 휴대폰을 찾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그 사이에 심정민에게서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가 잔뜩 와 있었다. 메시지에는 승건이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적혀져 있었다. 일단 무사하기는 하지만 꼭 전할 말이 있다는 말에 채훈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심정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반대편 차선에서 삼중 추돌 사고가 났는데, 튕겨 나온 승합차를 미처 피하지 못했습니다.’

‘세상에……, 그럼 승건이는요? 괜찮아요? 다쳤어요?’

‘도련님께서는 유리에 머리를 부딪쳐 정신을 잃었습니다. 태화 병원이 가까워서 이곳에서 검사를 받았는데, 가벼운 뇌진탕이라고 합니다. 머리가 조금 붓긴 했지만 다른 신체적 이상은 없고, 정신도 금방 차렸습니다. 이제 의식도 또렷한데…….’

채훈은 말을 끝맺지 못하는 심정민의 떨리는 목소리에서 불길함을 느꼈다. 그래서 무슨 일이냐고 그를 재촉했다.

‘도련님께서 예전에 사고 때문에 기억을 잃었다는 것은 알고 계시죠?’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 겨울에 있었던 사고로 승건은 고등학교 시절의 기억을 모두 잃었다. 심정민이 무슨 말을 할지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번에도 3년의 기억을 잃었습니다.’

‘……?!!’

‘큰 사장님을 기억하지 못하십니다.’

그때부터 채훈은 반쯤 넋이 나갔다. 제정신으로 운전할 자신이 없어서 택시를 타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시험이 마지막 수업이었다는 점이었지만, 차가 밀려 도로에서 30분째 붙잡힌 상태였다.

도로 정체가 천천히 풀리는 것을 보고 심정민에게 곧 도착할 거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태화 병원에 정문에 도착하자 심정민이 미리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온화한 인상의 심정민은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피곤해 보였다.

빠르게 걸음을 옮기며 채훈은 전화상으로 말하지 못한 것들을 물었다. 3년의 기억을 잃었다고 했는데, 정확히 언제부터인지 알고 싶었다.

“도련님은 지금 미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직후라고 알고 계십니다.”

“……네.”

덤덤히 대답한 채훈은 암담함을 느꼈다. 미국에서 돌아온 직후라면 채훈과 병원에서 스쳐 지나갔을 때보다도 훨씬 이전이었다. 지금 승건에게는 서로 거래를 했던 것은 물론이고, 결혼도, 정우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머리로 인정하지도 감정적으로 받아들이지도 못했다.

“의사 말로는, 이전에 기억 상실의 전적이 있기 때문에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다고 합니다. 보통 약한 뇌진탕의 경우는 금방 기억을 되찾기도 합니다만, 사람마다 경과가 다릅니다.”

“네.”

“기억을 떠올릴 만한 강렬한 계기가 있는 것이 도움이 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큰 사장님을 불렀습니다.”

그나마 희망적인 이야기였다.

강렬한 계기.

채훈은 자신을 본 승건이 당장에 기억을 되찾는 상상을 했다. 하지만 모든 일이 그렇게 잘 풀릴 리 없었다. 최악을 대비하는 게 옳았다.

처음 만났을 때 승건은 고등학교 때 기억이 아주 조금은 있다고 했다. 제가 뺨에 키스하려다 만 것도 알고 있었다. 아주 모르는 사람 취급은 하지 않겠지만 그 이상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엘리베이터를 타고 이동했다.

“미리 말씀드리는 건데, 기억을 잃은 것 때문에 도련님의 기분이 저조한 상태입니다. 결혼을 했다는 것도 믿지 않으셨고요. 결혼사진도 보여드리고 큰 사모님과 통화를 하시고서야 사실이라고 받아들이긴 하셨지만, 그래도 계속 의심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아…….”

심정민의 경고에 채훈은 시린 것이 가슴을 채우는 감각을 맛보았다. 승건이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되새겼다. 평소와 행동이 다를 건 분명했다.

승건의 외할아버지인 정규완은 이미 왔다 갔고, 외할머니인 이수진은 부산에서 오는 중이라는 이야기를 듣는 사이에 엘리베이터가 VIP 병동에 도착했다. 심정민이 안내한 곳은 VIP 병동의 제일 안쪽 병실이었다.

노크를 한 것은 심정민이었다.

“도착했습니다. 도련님.”

“……들어와.”

대답은 한 박자 늦게 돌아왔다. 승건의 목소리는 흔들림이 없었다.

채훈은 길게 숨을 들이쉰 다음에 안으로 들어섰다.

*

*

따뜻한 색감의 벽지, 나무로 된 작은 조각상. 그림 액자, 커다란 침대와 소파 세트까지. 널찍한 병실은 마치 호텔 객실처럼 꾸며져 있었다. 환자복에 카디건을 걸친 승건은 침대가 아니라 소파에 앉아 태블릿을 읽고 있는 중이었다.

채훈이 병실 안으로 들어서자 승건이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지만 채훈은 승건의 이름을 부르지 못했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서늘한 눈빛만으로 채훈은 깨달았다.

정말 잊었구나.

결혼을 하고도 승건의 무표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래도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면 자연스럽게 반가운 기색을 퍼트렸다. 입꼬리가 미묘하게 풀어지면서 부드러운 인상이 된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과거에, 승건과 날 선 기 싸움을 할 때보다 더 날카로운 시선이었다.

얼굴을 보면 당장에 기억이 돌아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도 차가운 현실을 마주하려니 막막함에 심장이 조여들었다.

“강채훈. 맞지? 고교 동창이었던.”

한참의 시선 교환 끝에 먼저 운을 뗀 것은 승건이었다.

“맞아.”

“네 얼굴은 기억이 났지.”

무감하게 사실을 나열하는 승건의 시선은 여전히 날카로워서 채훈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때 날 구했던 게 너였다고 알고 있어.”

“그래.”

“그리고 결혼도 했고.”

“아이도 있어. 정우. 아들이야.”

아들이 있다고 하자 승건이 미간을 찌푸리며 확실히 부정적인 감정을 표출했다. 그러고는 한참 동안 입을 다물었다.

채훈은 속내를 알 수 없는 승건을 바라보며 조용히 기다렸다. 정말 기억나지 않느냐고, 붕대를 감은 머리는 아프지 않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현명한 행동이 아니었다.

“과거의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겠군.”

“……?!!”

“진짜 결혼을 했단 말이지.”

그건 채훈이 아니라 승건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말이었다. 채훈은 이 순간을 견디기 힘들었다. 마치 이상한 취조를 받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의사가, 그리고 심 실장님과 할아버지가 우선 널 만나보는 게 좋겠다고 했어. 널 보면 기억을 되찾을 확률이 높다고 했는데, 다들 틀렸군.”

“그래서?”

“더 이상 널 볼 필요가 없다는 뜻이지.”

“하지만―”

“나는 너를 몰라. 고교 동창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 외에는 문서상의 기록과 약간의 기억이 전부고. 결혼했다는 것도 믿기지 않아.”

고저 없는 승건의 목소리에는 희미하게나마 짜증과 피곤함이 담겨 있었다. 더 이상 볼 필요가 없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채훈은 승건의 성격이 원래 이랬던 것을 기억해냈다. 최근에야 많이 유해졌지만 처음에는 냉정하고 직설적이었다. 명령조의 말투 때문에 싸우기도 했었다. 그때의 성격이 그대로 돌아왔다.

미리 예상은 했었는데 기분이 말이 아니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을 타인으로 대할 때,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채훈은 혼란한 기분을 감추며 눈싸움을 하고 있다시피 한 승건을 찬찬히 살폈다. 낯익으면서도 낯선 얼굴이었다. 머리로는 물러나야 한다는 걸 아는데,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승건이 각인을 했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기억을 잃은 사실이 각인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알 수가 없었다.

부정 각인 때문에 온갖 자료와 논문을 뒤졌다. 각인 후에 기억을 잃은 사례는 몇 없었지만 대부분 각인이 풀렸다. 과거의 승건이 미각과 후각을 잃은 것은 아주 특이한 경우에 속했다. 기억이 사라졌는데도 상상 각인으로 장애가 나타난 사람은 승건 말고는 없었다.

그런 승건이니까 혹시나 하고 기대하게 된다. 자신의 존재는 강력한 계기가 되지 못했지만 페로몬은 또 다를 수 있었다.

“최승건.”

“할 말이 있어?”

“내가 오메가인 건 알아?”

“심 실장님에게 들었어. 내가 각인을 했다고는 하는데,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기억을 잃으면 대부분 각인은 풀려.”

각인이 풀리더라도 아무렇지 않다는 승건의 반응에 채훈은 초조해졌다. 손끝이, 심장이 떨렸지만 차분히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려고 힘을 주었다.

“단번에 풀리지 않아. 시간이 걸리지.”

“잘 아는군.”

“게다가 너는 상상 각인까지 했었어. 부작용도 겪었고.”

“그것도 알고 있었다니. 정말 결혼을 하긴 한 모양이지. 그럼 그게 진짜 각인이 아니었다는 것도 알아?”

“알아. 그래서 물어보는 건데, 페로몬을 풀어도 될까? 혹시나 모르니까.”

가능하면 담담하게 말하려고 했지만 결국 마지막은 애원하는 것처럼 되고 말았다. 승건의 인상을 구겼다.

“나는 오메가의 페로몬을 싫어해.”

“도련님. 조금 전에 말씀드렸지만 채훈 씨와의 교류로 미각과 후각이 돌아오셨습니다. 각인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으니, 한번 시도해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채훈의 뒤에서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서 있던 심정민이 의견을 내놓았다. 승건을 가장 잘 아는 사람 중에 한 명인 그의 한 마디는 무게가 달랐다.

그래서인지 승건이 잠시 멈칫거렸다.

“심 실장님이 유난히 너를 감싸는 게 신기하네. 그래. 만약의 가능성이라도 있으니 한번 해 봐. 그리고 미리 말하지만, 이게 마지막이야.”

채훈은 선을 긋는 승건의 태도에 이를 꽉 물었다. 정신을 차려야 했다. 승건의 말대로 이건 마지막 기회였다.

길게 숨을 들이쉰 채훈은 아주 조심스럽게 페로몬을 풀었다. 강하게 쏟아내는 것이 아니라 가볍게 향수를 뿌린 것처럼 조절했다.

언젠가 승건이 바삭한 햇살 냄새 같다고 한 페로몬 향기는 봄꽃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넓은 병실에 꽃의 향기가 은은하게 퍼졌다. 채훈은 기적이 일어나기를 빌었지만 승건의 반응은 미묘했다.

차가운 눈빛이 흔들렸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확실히 부작용은 사라진 것 같은데. 기억이 돌아올 것 같지 않아.”

“……그래?”

“이제 미련 없겠지. 난 쉬어야겠으니 자리를 비켜줘.”

차가운 축객령은 보이지 않는 비수가 되어 채훈의 심장에 꽂혔다. 뒤돌아 나가야 하는데 다리가 돌덩어리가 된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승건을 보는 게 최선이었다.

“꺼지라고 해야 알아듣나 봐?”

예상치 못한 날 선 폭언에 채훈은 얼어붙었다. 귀찮다 못해 화가 난 듯한 승건의 모습을 보며 필사적으로 스스로를 설득해야 했다. 그가 자신을 모르니까 이건 당연한 일이었다. 당연한 일이었지만 속이 쓰렸다.

“갈게.”

억지로 인사를 한 채훈은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병실을 빠져나왔다. 복도를 몇 걸음 걷다 말고 채훈은 우뚝 멈춰 서서 길게 숨을 내쉬었다.

“큰 사장님.”

뒤따라 나온 심정민의 부름에도 채훈은 대답하지 못했다. 승건과 결혼을 한 다음부터 주위 사람들이 자신을 부르는 호칭이 바뀌었다. 사모님은 싫다고 하자 작은 사장님이 어떻냐고 심정민이 제안했다. 사업체도 없는데 사장님이냐고 웃고 있는데 승건이 큰 사장님이라고 하는 게 좋다고 하는 바람에 그렇게 결정되었다.

멍한 머리에서 아무 생각이나 마구 튀어나오는 바람에 채훈은 고개를 저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휴게실에서 잠시 쉬는 게 좋겠습니다.”

“기억을, 기억을 되찾지 못할 수도 있는 거죠?”

힘없는 목소리는 마치 바람이 새는 것처럼 들렸다. 의연하고 싶었지만 그게 쉽지 않았다.

“예.”

“기억을, 그러니까 예전에는 어떻게 기억이 돌아온 건지 아세요? 저는, 저한테는 갑자기 돌아왔다고 했어요.”

“저도 같은 설명을 들었습니다. 어느 순간 기억을 되찾았다고 하셨습니다.”

채훈은 몇 번째인지도 모를 암담함을 느꼈다. 자신에게는 더 이상의 방법이 없었다. 야구 방망이 같은 걸로 뒷머리를 후려치면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바보 같은 생각만 떠오를 뿐이었다. 이제는 기약 없이 기다리는 게 전부였다.

그렇게 결정을 내렸지만, 납득까지 했지만, 가슴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했다. 몸도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오늘따라 머리와 몸이, 그리고 마음이 따로 놀았다.

“쓰러지시겠습니다. 얼굴이 창백합니다.”

“괜찮아요. 휴게실로 가서 좀 쉬었다 돌아갈게요.”

괜찮지 않았지만 괜찮아야 했다. 기억을 더듬어 휴게실을 찾아가는데 복도 모퉁이에서 이수진이 나타났다. 부산에서 돌아왔다는 그녀는 정신이 없어 보였다.

“채훈아.”

“할머니.”

채훈은 그녀가 너무 반가웠다. 승건이 이수진에게 약한 것처럼 자신 역시 그랬다. 언제나 배려하고 편을 들어주기 때문이었다.

“얼굴이 왜 이래? 승건이 상태가 많이 나빠?”

“아니요. 승건이는…….”

“기억을 잃었으니 널 알아보지 못했구나.”

“예.”

“이런 일이……. 내가 승건이를 보고 오마. 어디 가지 말고 잠시 기다리고 있어. 심 실장이 채훈이 옆에서 봐줘요.”

이수진이 채훈의 어깨를 두드린 다음에 승건의 병실로 향했다. 채훈은 심정민을 따라 휴게실로 갔다.

VIP 병동 휴게실은 텅 비어 있었다. 심정민이 마실 물을 가져오겠다면서 잠시 기다리라고 하고는 사라졌다.

어디 갈 정신이 없었던 채훈은 뺨을 문지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모두 꿈이면 좋겠다.”

희망 섞인 혼잣말을 중얼거리자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것이 더 생생하게 느껴졌다. 누구를 원망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누군가의 멱살을 잡고 이건 너무하지 않느냐고 하고 싶었다.

오늘은 승건의 마지막 출근일이었다. 곧 백수가 되는 승건과 아침 식사를 하며 여행 이야기를 나누었다. 휴식이 목적이어서 스노클링 외의 레저 스포츠는 지양하기로 했다. 하와이에서 생애 처음 경험했던 스노클링이 정말 감동적이었다고 말하자 승건이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밥을 한 술 뜨면서 다음 휴가는 하와이로 가야겠다는 말을 했다. 너무 귀여운 반응이라 채훈은 그냥 웃고 말았다.

채훈은 그 순간을 모두 기억했다. 미각을 되찾고도 여전히 적게 먹는 승건은 얼마 되지 않는 밥은 다 비웠지만 국은 늘 남겼다. 오늘 처음 식탁에 올라온 삶은 땅콩 조림에 젓가락이 많이 갔다.

땅콩을 좋아하느냐고 물었더니 아마 그런 것 같다고 애매모호하게 대답했다. 그러면서도 마지막 남은 땅콩을 집어 먹었다.

1년이나 함께 살아도 모르는 것이 많았다. 앞으로 더 많은 것을 알아갈 거라고 생각하며 다시 웃었었다.

저녁 약속도 잡았다. 오랜만에 지하 체력 단련실에서 대련을 하기로 했다. 기말고사 공부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던 채훈은 거절하지 않았다. 76승 82패. 뒤처진 전적을 따라잡기 위해 의지를 불태웠다.

평범한, 그리고 아주 조금은 특별한 하루의 시작이었다. 그런데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모든 것이 바뀌고 말았다.

채훈은 뜨거운 눈을 꾹 감았다. 울고 싶은데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 * *

다음날, 채훈은 평소와 다름없이 일어나 움직였다.

승건 없이 아침을 먹고, 시간 맞춰 등교했다. 수업은 들었지만 강의 내용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다.

그러던 와중에 써니에게서 점심을 먹자며 연락이 왔다. 거절하면 강의실까지 찾아갈 거라고 협박 아닌 협박을 하는 바람에 채훈은 그러겠노라고 했다.

써니가 메시지로 보낸 주소는 학교 정문 쪽에 위치한 레스토랑이었다. 시간 맞춰 가자 써니가 이미 도착해 있었다.

“얼굴이 말도 아니네. 어젯밤에 못 잤어요?”

채훈이 맞은편에 앉자마자 써니가 호들갑을 떨었다. 채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어젯밤에 승건을 만나고 돌아온 이수진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랬다. 시간이 해결해 줄 거라고, 그렇게 믿자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심정민의 차를 타고 집에 돌아왔다. 제정신이 아니었지만 평소처럼 행동했다. 정우와 놀고, 밥을 먹였다. 어제따라 유난히 투정을 부리는 정우를 씻기고 재우고 난 다음에는 시험공부를 하려고 서재에 앉았다. 하지만 공부는 하지 못했다. 책을 펼친 상태로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자리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한숨도 자지 못한 채 날을 새고는 지금까지 깨어 있었다. 피곤하지는 않았지만 집중력이 떨어졌다.

“아침은 먹었어요?”

“네.”

“뭐 먹을래요?”

“아무거나요.”

“아무거나가 제일 어려운 거 알죠? 내 마음대로 시킬 거예요.”

뭘 먹고 싶은 의욕이 없는 채훈을 대신해 써니가 종업원을 불러 이것저것 잔뜩 시켰다. 종업원이 나가자 써니가 다시 입을 열었다.

“조금 전에 승건 오빠 만나고 왔어요. 나 보고 너도 한국에 있었냐고 하는데, 정말 다 잊었나 봐요.”

“네.”

“기억이 곧 돌아올 거라는 낙관적인 말은 못 한다는 거 알죠? 사람마다 경과가 천차만별이라는 거.”

“압니다.”

“그럼, 기억을 잃으면……, 각인이 풀린다는 건요? 알아요?”

딱딱한 표정을 지은 써니가 아주 조심스럽게 물었다. 채훈은 정말로 써니가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써니는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이수진의 전령으로 접근하더니 어느새 친구가 되고 말았다. 승건과 결혼해 인척 관계가 되고 나서는 이전보다 더 가깝게 지냈다. 직설적이고 호탕한 성격만큼이나 자기 사람을 잘 챙겼다. 승건이 기억을 잃은 것뿐만이 아니라 각인도 풀릴 수 있다고 말해주는 것은 경고가 아니라 안타까운 호의였다.

힘든 일이 생기면 이처럼 주변 사람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은 꽤나 운이 좋았다.

“그것도 알아요.”

“그럼 할 말이 없네요. 기다려 봐요. 승건 오빠라면 어떻게든 기억을 되찾을 거니까.”

“그럴지도요.”

채훈은 희망과 체념 사이에서 대답했다. 이수진도 써니와 같은 말을 했었다.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거라고, 마음 단단히 먹으라고 말이다.

“최근에 승건 오빠가 좀 둥글어졌는데, 오늘 보니까 완전히 옛날로 돌아가 버린 거 있죠. 진짜 말 한마디가 칼이에요. 칼.”

“뭐라고 했는데요?”

“‘우리가 병문안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던가?’ 이렇게요. 재수 없다는 건 알았는데, 진짜 기가 막힌 거 있죠.”

써니가 목소리를 깔고는 승건의 말투를 흉내 내는 바람에 채훈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 어제 승건을 만나면서 자신도 같은 생각을 했었다. 거래를 제안하던 승건은 확실히 재수 없는 녀석이었다.

“그래서 승건 오빠가 채훈 오빠랑 사귄다고 했을 때, 얼마나 놀랐는데요. 채훈 오빠가 엄청 착한 사람인 줄 알았죠. 그 성격 다 받아주고 사귀려면 부처님쯤 되어야 할 테니까. 이제 할 말은 다 했으니까, 승건 오빠 이야기는 그만하고. 기말고사 기간이죠? 시험 칠 정신은 있어요? 해준이 알죠? 내 동생. 이번에 대학에 입학했는데, 놀러 다닌다고 출석에 빵꾸가 났대요. 하루만 더 빠지면 F를 받을 거라고 연락이 와 가지고. 아빠가 동생 카드 정지시킨다고 완전 난리예요.”

써니는 화제를 바꾸었다. 입담이 좋고 활달한 그녀는 대화를 리드했다. 그 사이에 음식이 차례로 나왔다. 채훈은 입맛이 없었지만 억지로 배를 채웠다.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마칠 때쯤에 심정민에게서 연락이 왔다. 승건이 퇴원했고 오후에 채훈을 만나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다. 꺼지라는 폭언을 한 녀석의 심경 변화에 조바심이 나려고 하는데 심정민이 돌을 하나 더 던졌다.

―그리고 도련님께서 수곡동 집을 보고 싶어 하십니다. 그곳에서 만나는 것은 괜찮냐고 여쭤보라고 하셨습니다.

“괜찮아요. 괜찮기는 한데,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퇴원하고 호텔에서 지낼 거라고 하셨는데, 이 회장님과 이야기를 나누시고는 큰 사장님을 만나야겠다고 하셨습니다. 두 분이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셨는지는 모르지만, 아마 이 회장님이 따로 연락하실 겁니다.

“네.”

오후 수업은 4시에 끝난다. 이것저것 마무리하고 차가 밀리는 시간까지 계산해서 5시에 약속을 잡았다. 통화를 끝내자 조용히 기다리고 있던 써니가 뭐냐고 물었다.

“승건이가 보재요. 퇴원했다고.”

“벌써 퇴원했다고요? 성격도 급하네. 같이 가 줘요? 내가 편들어 줄게요.”

“편 안 들어 줘도 돼요. 집에서 보기로 했는데, 재수 없게 굴면 내쫓아버리면 되니까요.”

“오, 그거 구경하러 가고 싶은데. 아쉽네.”

가벼운 농담 후에 채훈은 써니와 헤어졌다. 이어진 수업은 하나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온통 승건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갑작스러운 심경 변화가 좋은 징조이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

*

[곧 도착합니다.]

[저도 곧 도착해요.]

채훈은 심정민이 보낸 메시지에 답장을 보내며 초조한 기분으로 앞을 바라보았다.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기로 했는데, 조별 과제 모임을 생각 못 한 탓에 시간이 아슬아슬했다.

택시는 익숙한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100m 정도만 더 가면 집이었다.

어제 승건의 사고 소식에 황망한 정신으로 운전을 할 수가 없어서 학교에 차를 두고 나왔다. 그래서 오늘 등교할 때 택시를 타야 했다. 금요일이니까 차를 가지고 하교해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결국은 어제와 같은 이유로 다시 택시를 타게 되었다.

써니와 헤어지기 직전에 이수진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녀가 전한 이야기는 심정민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승건이 퇴원 후에 호텔에서 지내려고 하는 바람에 집으로 돌려보냈다고 했다. 기억을 되찾으려면 익숙한 곳이 좋으니 채훈에게 허락받아서 그곳에서 지내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승건이 2주가 최선이라고 선을 그었다면서, 못된 녀석이라고 이수진이 화를 냈다. 뻣뻣한 손자를 잘 부탁한다고 마지막까지 편을 들어주는 이수진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며 채훈은 작은 가능성에 희망을 품었다.

초조함으로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는 사이 택시는 금방 집 앞에 도착했다. 아직 승건은 보이지 않았다. 채훈은 대문을 열어두고는 그 앞에서 서성거렸다. 기다린 지 오래되지 않아 검은 세단이 대문 앞에 멈춰 서고는 승건과 심정민이 내렸다.

“어서 와.”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하지.”

“알았어. 따라와.”

채훈은 가능한 차분하게 응대하려고 했다. 어제 입고 나갔던 옷을 그대로 입고 있는 승건은 여전히 찬바람이 부는 듯한 반응이었다. 아직 그게 익숙하지 않아 심장이 시큰거렸다. 채훈은 얼굴에 힘을 주고는 앞장섰다.

대문은 미리 열어두었다. 뒤를 돌아보지 않고 정원을 가로지르려는데, 잘 따라오던 승건이 어느 순간에 멈춰 섰다.

뒤를 돌아보자 승건이 스쿼시 코트 건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진지하기 짝이 없는 분위기에 채훈은 혹시나 기대를 하고 말았다.

특별한 도락을 즐기지 않는 승건의 유일한 취미가 바로 스쿼시였다. 넓은 마당이 있어 스쿼시 코트를 지었다고 자랑하듯 말했었다. 둥근 공이랑 친하지 않은 자신에게 라켓을 쥐게 하고는 기어코 같이 즐길 수 있는 수준으로 만들었다. 어쩌면 스쿼시가 승건을 자극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승건이 턱짓으로 건물을 가리켰다.

“설마, 스쿼시 코트?”

“설마가 아니고 맞아.”

“마당에?”

“네가 지었어. 기억은 안 나겠지만.”

일부러 기억이라는 단어를 언급했지만 승건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것 같은 단정한 얼굴의 미간이 슬쩍 찌푸려진 게 다였다. 마치 자신이 그런 일을 한 게 믿기지 않는다는 눈치였다.

“내가 별짓을 다 했군.”

“스쿼시를 좋아하잖아.”

그제야 건물을 바라보고 있던 승건이 채훈을 제대로 돌아보았다. 여름의 정원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는 승건의 모습은 너무나 익숙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너를 모른다고 말하고 있었다.

일일이 상처받으면 안 되는데.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속은 시커멓게 타들어 갔다. 지금까지 승건과 엮인 수많은 사건들이 둘 사이의 관계를 견고하게 만들었다. 그것을 기억 못 하는 승건은 호의를 보이는 대신에 경계하고 의심했다. 그건 당연하다고 몇 번째인지도 모를 자기 최면을 걸면서 채훈은 마음을 다잡았다.

“들어가자. 아마 정우가 기다리고 있을 거야. 알겠지만 정우는 너랑 내 아들이야. 지난 3월에 돌이 되었고, 네가 기억을 잃었다는 거를 이해할 나이가 아니야. 정우를 안아달라거나 하지 않을 테니까. 그냥…… 그냥, 친절하게 인사만 해.”

“알았어.”

일방적인 통보에도 승건은 순순히 그러겠다고 했다. 채훈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다시 앞장섰다. 현관문을 열자 언제나처럼 김혜진이 정우를 안고 반겼다. 김혜진은 승건의 사고와 기억 상실에 대해 알고 있었다. 오늘 승건이 찾아온다고도 미리 말해 두었다.

눈치가 빠른 김혜진은 어서 오라는 인사 말고는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에게 안겨 있던 정우가 안아 달라고 팔을 뻗었다. 그것도 채훈이 아니라 승건을 향해서였다.

“아빠.”

“응. 아빠가 손 씻고 안아줄게. 승건 아빠는 오늘 감기 걸려서 안 돼요. 너 어떻게 할래? 집을 구경시켜 줄까? 아니면 이야기부터 해?”

채훈은 신발을 벗고 슬리퍼를 신으면서 승건을 보았다. 현관문의 경계를 넘은 승건은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아마도 정우가 그를 복사한 것처럼 닮아서 그런 것 같았다.

이제 15개월을 살짝 넘긴 정우는 승건을 닮아 이목구비가 또렷했다. 아직 선이 곱고 여려서 여자아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였다. 기억에 없는 어린 클론을 바라보는 기분이 어떤지 채훈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이 상황이 슬프면서도 조금 웃겼다.

“승건아?”

“이야기부터 하지.”

“그럼 거실보다는……, 서재도 안 되겠다. 저기 저 끝에 썬룸이 있어. 거기서 잠시만 기다려 줘. 나는 정우 좀 안아주고 갈 테니까. 심 실장님. 승건이랑 썬룸으로 가세요.”

좁은 현관에 모인 인원만 모두 넷이었다. 그들이 흩어질 수 있도록 채훈이 상황을 정리했다. 채훈은 먼저 정우를 안은 김혜진과 함께 움직였다. 욕실로 들어가기 전에 승건과 심정민이 반대편에 있는 썬룸으로 향하는 것을 확인했다.

손을 씻고 정우를 안아 들자 김혜진이 괜찮은 거냐고 걱정스럽게 물었다. 저렇게 쌀쌀맞은 사장님은 처음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채훈은 잘 모르겠다고 대답하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많은 일들이 있었다. 힘들고, 괴로운 일에 지쳐서 엉망이 되기도 했다. 그래도 깨달은 게 있다면 마지막에는 결국 괜찮아진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괜찮아지기 전이었다. 얼마나 구르고 깨져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승건이 기억을 되찾지 못할 수 있었다. 파국을 가정하고 후회가 남지 않도록 해야 했다.

“괜찮을 거야.”

채훈은 정우의 정수리에 코를 파묻으며 중얼거렸다. 괜찮아야 했다.

*

*

승건이 집을 사고 이사를 한 초기에 썬룸은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이었다. 그러다 채훈이 결혼을 하고 정우와 함께 집에 들어와 살기 시작하면서 완전히 바뀌었다. 정우를 보러 온 이수진이 썬룸은 제대로 꾸미는 게 좋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며 전문가를 소개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채훈도 승건도 식물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썬룸을 꾸미는 것도 관리도 모두 전문가에게 맡겼다.

사시사철 푸르른 식물이 가득한 썬룸은 멍하니 시간을 보내기 좋은 곳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넋을 놓고 있다 보면 심신이 회복되었다. 승건이 가져다 놓은 커다란 안락의자에서는 아주 가끔씩 섹스도 했다.

채훈은 승건이 안락의자에 앉아 있으면 웃기겠다고 생각하며 썬룸 안으로 들어갔다. 승건은 안락의자가 아니라 테이블을 앞에 두고 반듯하게 앉아 있었다. 심정민은 채훈을 지나쳐 밖으로 나가면서 문을 닫았다.

“할머니에게 이야기 들었어. 여기서 지내도 돼. 2주라고 했지? 여기 반대편 끝에 손님방이 있어. 욕실도 따로 붙어 있고. 거기 쓰면 돼.”

승건의 맞은편에 앉으면서 본론부터 꺼내던 채훈은 테이블 위에 자리한 서류 봉투를 힐끗 보았다. 흰색 서류 봉투에 관해 강력한 기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게 무엇인지 무척 신경 쓰였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눈싸움을 하는 것처럼 시선이 얽혔다. 그러다 승건이 입을 열었다.

“나는 기억을 꼭 되찾지 않아도 된다는 입장이라는 것을 밝혀두지. 불편하지 않거든. 미각도 후각도 돌아왔고.”

“……?!!”

“그런데 주변 사람들이 더 난리야. 네 말대로 할머니에게 2주를 약속했어. 그 정도 노력은 해야 미련이 없을 테니까. 이것부터 받아.”

승건이 내민 서류 봉투에 채훈은 다시 한번 기시감을 느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서류 봉투를 열었더니 역시나였다. 승건의 도장이 찍힌 이혼 서류와 관련 합의서가 들어있었다. 예상은 했는데 막상 이혼 서류를 받아드니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온몸이 차갑게 얼어붙는 것 같았다. 머리가 뻑뻑해서 잘 돌아가지 않았다.

“2주 동안 극적으로 기억을 되찾을 거라고 기대하지 않아. 미리 준비하는 거야. 금액은 조절할 수 있어.”

건조하게 사실만 전하는 승건에게서는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결혼에 어떤 의미도 없다는 듯이 냉정하게 판단을 내리는 것은 승건다웠다. 특히 합의서 내용이 그랬다. 정우가 태화 그룹의 지분과 경영권에 대해 어떤 요구도 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전제로, 위자료는 물론이고 정우의 친권과 양육권에 관해 꼼꼼히 적혀 있었다.

서글픈 와중에도 웃음이 나왔다. 자신이 사랑한 남자가 원래 이랬다.

“계약서부터 내미는 것은 여전하네.”

“혼전 계약서를 썼어? 아닌 걸로 아는데.”

“혼전 계약서는 안 썼어. 그 전에, 그러니까 결혼하기 전에 네가 계약서를 내밀었지.”

“어떤 계약서였는데?”

“나는 돈이 필요했고, 너는 내가 필요했고. 그래서 교환했어.”

“……?!!”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딱딱한 표정을 짓고 있던 승건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놀랐다는 의미로 해석한 채훈은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다시 생각해봐도 승건과 있었던 일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승건은 기억 못 하겠지만 말이다.

“기억에 없는 이야기를 하는 게 불편하다는 거 아는데, 혹시 궁금한 거 없어?”

“돈으로 거래한 사이라면, 결혼은 어떻게 한 거야?”

“네가 매달렸어. 결혼해 달라고.”

“내가?”

“응. 거짓말 아니야. 못 믿겠으면 할머니께 여쭤봐.”

진짜냐고 의심하는 승건을 보며 채훈은 양심에 거리낄 것 없이 당당하게 말했다. 모두 사실이었고 진실이었다. 자신도 결혼할 생각이 있기는 했지만, 어쨌든 매달린 것은 승건이었다.

승건의 구겨진 미간이 펴지지 않아서 채훈은 일부러 힘주어 활짝 웃었다.

“합의서는 딱히 고칠 게 없어 보이네. 그래도 추가할 게 있는지 천천히 읽어볼게.”

“감당할 수 없는 욕심은 부리지 않는 게 현명할 거야.”

직설적인 경고 역시 승건다웠다. 경계와 의심에 마음이 아픈 것과 별개로 과거의 모습이 웃겼다.

여전히 그를 좋아하고 있다. 자신을 잊어버렸어도.

“왜? 태화 그룹이 탐나나?”

즉답을 하지 못하자 승건이 차갑게 물었다. 저 말투 역시 돌아와 버렸다. 속은 엉망진창으로 쓰라렸지만, 그래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예전에, 그러니까 작년 가을쯤에 네가 물었어. 태화 그룹의 안주인이 되는 거 어떻냐고. 내가 뭐라고 했게?”

“싫다고 했겠군.”

“정확히는 내게서 이유를 찾지 말라고 했지. 욕심부리지 않아도 이미 많이 받았어. 태화 그룹 같은 것도 관심 없고. 아, 뭐 받았는지 궁금해?”

“그건 내가 알아보지.”

“그럼 이제야 물어보는 거지만, 반말하는 거 괜찮지? 우리 친구였던 건 안다고 했으니까.”

“……괜찮아.”

승건의 대답이 반 박자 늦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자신이 주도권을 쥐고 휘두르는 모양새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개의치 않고 천천히 설명을 이었다.

“너 오늘부터 백수라는 건 알아? 어제가 마지막 출근이었어. 음, 자세한 건 심 실장님에게 물어보는 게 낫겠다. 이 집에서 지킬 건, 딱 두 개야. 아침 식사 같이하고 정우한테 인사 잘하는 거. 그 외에는 네 마음대로 해. 아, 밤 9시 이후에 돌아오면 초인종 누르지 말고. 보통 내가 깨어 있는데, 그래도 일찍 잘 때도 많으니까. 대문은 열쇠로 열고, 현관은 비밀번호. 열쇠는 심 실장님이 챙겨 두었을 테고, 비밀번호는 가르쳐 줄게. 휴대폰 멀쩡하지? 메시지로 보낼 테니까 확인해. 아침 식사 시간은 7시야.”

채훈은 길게 말장난을 하지 않고 핵심만 전달했다. 아침 식사를 함께하고 정우에게 인사를 하라고 한 것은 최소한의 기본 조건이었다. 승건이 밉살스럽게 말을 하긴 해도 기본적으로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이었다. 싫다고 강짜를 부리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아니나 다를까 승건은 인상을 쓰긴 했지만 싫다고 하지는 않았다. 다만 날카로운 눈빛으로 노려볼 뿐이었다.

“너는 날 잘 아는 모양이군.”

“알 만큼 알지.”

“조건은 그게 전부야? 다른 건?”

“다른 거? 뭐?”

“허리 아래에서 일어나는 일은 제대로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은데. 알파와 오메가가 한집에 있으면 예정된 사고가 일어나기 마련이라. 나는 페로몬에 취해 안달 난 인간들을 경멸해. 물론 그건 나 스스로에게도 해당되는 말이고.”

승건은 빈정거리는 게 아니라 그게 그저 사실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채훈은 순간 진심으로 울컥했다. 너그러운 마음은커녕 이런 녀석을 좋아해 버린 과거의 자신을 마구 욕하고 싶을 정도였다.

뭐라 한마디 하고 싶은 것을 채훈은 꾹 참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도전적인 의미로 활짝 웃었다.

“내게서 페로몬 향기가 나?”

“아니.”

“그런데 뭘 걱정해? 아니지. 그러지 말고 한번 실험해 보면 되겠네. 페로몬 풀어봐.”

“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보자고.”

승건이 기막혀하든 말든 채훈은 의도적으로 페로몬을 한껏 풀어버렸다. 조심스러웠던 어제와 다르게 자제를 하지 않았다.

“너!!”

순간 인상을 쓴 승건이 맞대응을 하면서 썬룸 안이 순식간에 두 사람의 페로몬 향기로 가득 찼다.

채훈은 자신의 것보다 승건의 페로몬 향기를 좀 더 민감하게 알아차렸다. 둘 모두 페로몬 향기는 꽃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그래서인지 썬룸이 꽃이 만개한 화원처럼 느껴졌다.

알파들은 페로몬으로 서로의 힘을 겨루며 기 싸움을 한다고 했다. 하지만 알파와 오메가 사이라면 그것은 서로를 유혹하는 도구로 쓰였다.

페로몬은 코로 맡는 향기였고, 맨살에 닿아 흘러내리는 비단과 같은 촉감이자, 세포에 스며들어 성감을 자극하는 최음제이기도 했다. 그 정도가 심해지면 이성이 아니라 본능이 명령한다. 당장에 달려들어 키스를 하고 옷을 벗겨 그를 탐하라고 말이다.

하지만 서로 잔뜩 경계한 상태에다가 그저 공기 중에 페로몬을 풀어놓은 것이라서 딱히 몸이 달아 어떻게 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약간 흥분은 했지만 거뜬히 참을 수 있었다.

승건이 잡아먹을 듯이 노려봤지만 채훈은 겁먹지 않았다. 오히려 사고를 쳤다는 빠른 후회와, 이미 사고를 쳤으니 갈 데까지 가보자는 마음으로 다시 웃었다.

“됐지? 네가 걱정하는 그런 사고 안 일어났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채훈은 썬룸의 남향에 있는 폴딩 도어를 확 열어재꼈다. 페로몬 향기가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뒤를 돌아보자 승건이 뭐 저런 놈이 다 있냐는 생각을 표정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무례했다는 거 알지만 사과는 안 해. 그 말투에 대해 나름대로 욕을 한 거니까.”

“우리가……, 진짜 결혼을 한 게 맞아?”

“많은 일이 있었어. 궁금해?”

“내가 직접 알아보지.”

“자세한 건 심 실장님께 여쭤봐. 제일 많이 알고 계시니까. 그럼 더 할 말 없지? 난 이제 간다. 혹시나 더 알고 싶은 게 있으면 연락하고.”

탁자 위에 둔 서류 봉투를 챙긴 채훈은 따라붙는 승건의 시선을 무시하고 썬룸을 나왔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심정민에게 들어가 보라고 하고는 2층으로 올라갔다. 서류 봉투를 서재에 가져다 두고는 정우를 찾았다. 김혜진에게 괜찮다고, 2주 동안 승건이 집에서 지내게 되었다고 알려준 다음에 밖으로 내보냈다.

채훈은 혼자서 장난감 자동차를 가지고 노는 정우를 와락 끌어안았다.

“정우야. 아빠 망했어.”

“으응?”

“아이고. 조금 참을걸.”

아무것도 알아듣지 못하는 정우에게 하소연을 할 정도로 채훈의 속은 엉망이었다. 자신의 성격도 여전했다. 승건이 기억을 잃었다는 걸 알면서도 발끈하고 말았다.

텄다. 텄어.

채훈은 반쯤 체념했다. 2주 안에 기억이 돌아오지 않으면 승건은 무조건 이혼을 하려고 할 것이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남남이 되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날 일은 없었다.

“아빠?”

정우의 부름에 채훈은 정신을 차렸다. 활짝 웃고 있는 정우의 얼굴을 보자니 우울했던 마음이 풀어졌다. 승건이 친권과 양육권을 보장해준다고 하니 그것만큼은 다행이었다. 아니었다면 정말 죽자 살자 싸웠을 것이다.

마음이 없는 상대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헤어지지 말자고 하는 것은 서로에게 못 할 짓이었다. 2주 동안 서로 싸우지 않고 지내다가 잘 마무리해야 하는 게 옳았다.

“씨……. 뭐가 옳아.”

채훈은 눈물이 날 것처럼 열이 오른 눈을 감았다. 왜 자신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고, 왜 행복을 주었다가 빼앗느냐고 신의 멱살을 잡고 흔들고 싶었다.

그냥 이게 모두 다 꿈이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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