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04. 일상】
금요일 늦은 밤이었다. 축제 첫날밤을 맞이한 한국대는 들뜬 열기에 휩싸여 있었다. 해가 지고 밤이 찾아온 야외 공연장에서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법한 유명한 노랫가락이 웅웅 울려 퍼졌다.
사람의 발길이 뜸한 광장 구석진 곳에 선 채훈은 목소리를 높여야 했다.
“오긴 뭘 와. 언제 끝날지 나도 모른단 말이야.”
―기다리면 돼.
“안 돼. 너, 내일 출장 가잖아.”
―강채훈.
승건이 경고의 의미로 이름을 불렀지만 채훈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8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내일 부산까지 가야 하는 녀석에게 몇 시간이고 기다리라고 할 수 없었다.
“네가 와도 같이 못 놀아준다고. 기다리지 말고 일찍 자. 자정까지는 꼼짝도 못 해.”
―내가 알아서 할게.
“내 생각도 좀 해주라. 여기서 널 알아보는 사람 있으면 어떻게 하려고.”
―알아서 눈치 보겠지.
승건의 말대로 알아서 눈치는 볼 테지만 그 다음이 문제였다.
“나도 눈치 봐야 하거든. 날 위해서라도 오늘만은 좀 참아줘.”
―너…….
“전에도 말했지만, 학교는 조용히 다니고 싶다고.”
―알았어. 출발하면 연락해. 그때 데리러 갈 테니까.
“내가 알아서 갈 거니까 그냥 자. 나 이제 일하러 가야 해. 끊는다.”
채훈은 할 말만 하고는 전원 버튼을 눌렀다. 휴대폰을 한참 동안 쥐고 있었지만 다행히 승건으로부터 전화는 오지 않았다.
“삐진 것 같은데.”
심상치 않은 승건의 반응을 걱정하며 채훈은 인상을 썼다. 아무래도 느낌이 좋지 않았다.
지난 수능에 수학에서만 1개를 틀린 채훈은 결국 대학에 지원했다. 안정적인 전문직을 목표로 신중하게 원서를 써서 한국대학교 약학과에 합격할 수 있었다.
채훈은 대학을 직장처럼 다녔다. 오전 8시에 등교해서 오후 6시가 되면 집으로 돌아갔다. 저녁이면 아이와 시간을 보내고 밤늦게 남은 공부를 했다. 학과생들과의 관계는 적당히 유지했다. 약학과의 신입생들 나이는 천차만별이었다. 재수나 삼수생도 적지 않았고, 채훈처럼 사회생활을 하다가 수능을 쳐서 정시로 입학한 이들이 둘이나 더 있었다. 그래도 신입생들 중에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은 채훈이었다.
나이가 나이인 만큼 열두 살이나 어린 아이들과 어울리고 놀만 한 접점이 거의 없었다. 채훈은 학업 부분에서 신뢰할 수 있는 어른을 목표로 잡고는 반쯤 자발적으로 아웃사이더로 지냈다.
그런 채훈이 대학 축제의 학과 주점 주방에 서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채훈에게 중간고사 족보를 알려준 나이 어린 선배가 학과 학생회 소속이었다. 학과 주점은 예과 2학년이 주도하고 예과 1학년은 노동력을 제공하는 형식으로 운영했는데, 일손이 부족하다며 하루만이라도 도와달라는 선배의 부탁을 채훈은 매몰차게 거절하지 못했다.
자발적인 아웃사이더로 지낸다고 하더라도 원만한 대학 생활을 위해 동기나 선배와 적당히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필수였다. 어느 대학이나 비슷하겠지만 특히 약학과는 족보와 연줄이 중요했다. 결국 축제 3일 중에 첫날만 주점 주방에 서기로 했다. 채훈이 기혼자에 아이까지 있다는 걸 미리 밝혔기 때문에 하루로 끝낼 수 있었다.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다년간의 자취로 주방 일을 하는 것은 익숙했다.
문제는 승건이었다. 승건은 처음부터 채훈이 주점 주방에서 일하는 것을 못마땅해했다. 녀석을 설득하느라 꽤나 시간을 들였는데, 오늘 갑자기 주점까지 찾아오겠다며 억지를 부렸다.
채훈은 적극 반대했다. 태화 그룹의 대표이사인 승건은 뉴스에 몇 번 얼굴이 방송된 적이 있었다. 둘이서 밖을 돌아다니다 보면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조용한 학교생활을 위해 채훈은 만약의 가능성이라도 원천 차단하고 싶었다. 승건이 이해를 한 것 같기는 한데, 아무래도 기분이 상한 모양이었다.
평소에 승건과는 크게 싸울 일이 없었다. 서로 무던한 편이었고, 의견이 맞지 않으면 시간을 두고 이야기했다. 그래도 무심하고 딱딱한 승건 때문에 울컥할 때가 한 번씩 있었다. 승건 역시 심상찮은 기운을 풍기며 기분이 나쁘다는 티를 팍팍 내기도 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세상 무표정한 얼굴로 삐진단 말이지.
정확히는 마음 상해서 부루퉁하게 구는 거지만 같은 의미였다. 그 모습이 귀여울 때도 있지만 그래도 오늘은 좀 심각하다는 촉이 왔다.
“형님. 여기서 뭐 해요. 주방에서 찾아요.”
오늘 채훈을 주방에 밀어 넣은 원흉이 뛰어왔다. 본과 1학년으로, 학과 대표인 정준익은 요즘 흔히 말하는 인싸였다. 성격이 좋아 여러 사람과 두루 친하고, 인망도 있고 통솔력도 있었다. 이번 중간고사에 그가 준 족보 덕을 톡톡히 보긴 했는데, 그것 때문에 코가 꿰였다.
“형. 얼른요. 손님 잔뜩 왔어요.”
“나 없어도 괜찮아. 애들이 몇 명인데요. 선배님.”
“형 없으니까 안 돌아가요. 다들 버벅거리고 있어요. 지금.”
대학 축제 주점이야 대동소이하지만 별다른 경험이 없는 학생들이 운영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결국 오랜 자취와 아르바이트 경험이 있는 채훈이 주방을 총괄하게 되었다.
“선배. 내일 나 없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서 말인데, 내일도 나와 주시면 안 돼요? 상일 선배는 내일 못 온대요.”
“상일 선배가?”
“방금 전에 연락됐는데, 할머니가 쓰러지셨다고 연락 와서 대전 내려가야 한대요. 진짜인지. 에이.”
차마 욕을 하지 못한 정준익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윤상일은 사회생활을 하다가 편입 시험을 치고 올해 본과 1학년으로 입학했다. 채훈보다 나이가 한 살 많은 그는 학과 전체를 통틀어 가장 나이가 많은 축에 속했다.
자발적 아웃사이더가 되기로 한 채훈과 달리 윤상일은 학생회에 들어가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윤상일의 평은 썩 좋지 않았다. 큰소리 내고 나서는 건 좋아하는데 책임질 일은 하지 않고 뺀질거린다는 것이었다. 성격이 급하고 다혈질이라서 나이 어린 선배들과도 마찰이 꽤 있다고 했다.
지금 주점에서는 학과 회장과 부회장까지 번갈아 가며 계산대에서 일하고 있었다. 윤상일의 할머니가 진짜로 쓰러졌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까지 그의 행적을 보자면 정준익이 한숨을 쉬는 것은 당연했다.
채훈 역시 윤상일에 대한 인상이 나빴다. 채훈은 정시로 예과 1학년에, 그리고 윤상일은 편입으로 본과 1학년에 입학했다. 나이 많은 신입생이라는 공감대가 있어서 윤상일이 먼저 말을 걸어왔을 때는 채훈도 예의 바르게 받아주었다.
하지만 윤상일이 채훈이 찬 손목시계의 브랜드를 알아보고는 이상하게 시비를 걸기 시작하면서부터 거리를 두었다. 이제는 선배라고 깍듯하게 존칭하며 인사를 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교류를 하지 않았다. 자고로 진상은 멀리해야 하는 법이었다.
“없는 게 낫다고 생각해. 싸움이라도 나면 말리는 게 더 문제야.”
“형은 가끔 핵심을 찌른다니까요. 그러니까 저 좀 도와주세요. 형. 제가 알바비에다가 수고비 얻어 드릴게요. 예?”
“안 돼요. 선배님. 잘못하다가는 나 집에서 쫓겨나게 생겼어. 방금도 찾아와서 엎어버리겠다는 거 말렸거든.”
“에이, 차라리 형님 부군께 놀러 오라고 하세요. 매상도 올려주시면 좋죠. 제가 서비스도 팍팍 드릴게요.”
정준익이 능글맞게 웃으며 대답했다. 채훈은 자신이 오메가라는 것을 직접 말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선배들 중에 알파가 있어서 채훈이 오메가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알았다.
승건에게 놀러 오라고 하면 좋아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모두의 평화를 위해서는 안 오는 게 좋았다.
“내가 장담하는데, 진짜 난리 난다니까.”
“그러니까 더 보고 싶은데요?”
“가자. 바쁘다며.”
“맞다. 맞아. 얼른 가요. 왜 안 데려오냐고 욕먹겠네.”
정신을 차린 정준익이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채훈도 얼른 그 뒤를 따랐다. 분수대 광장과 그 주변 도로에는 모두 학과 천막이 줄지어 서 있었다. 대부분 주점인 천막에서는 각양각색의 음식 냄새가 솔솔 풍겨왔다.
이제 8시였다. 초대 가수가 공연장에 나타날 시간이라 손님들이 많이 빠졌다. 그래도 축제 분위기를 즐기며 주점을 찾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10여 년 전에 이미 축제를 경험한 채훈에게는 익숙한 광경이었다. 그때도 선배들의 꾐에 빠져 서빙을 하느라 고생했다. 이미 한 번 경험했던 것이지만 그래도 나이를 먹고 상황이 달라져서 그런지 많은 것이 새로웠다.
물론 그때는 배우자가 없었다. 채훈은 아마도 삐졌을 배우자를 달랠 방법을 생각하다가 관뒀다. 그건 직접 얼굴을 맞댄 다음에 해도 늦지 않았다.
*
*
축제 첫날밤을 맞이한 한국대 후문은 늦은 새벽이 되도록 혼란스러웠다. 축제의 여파로 가게는 평소보다 늦게까지 불을 밝혔다. 새벽 2시가 가까운 시간에도 거리는 삼삼오오 몰려다니는 취객들이 꽤 있었다.
채훈은 20여 분이나 헤맨 끝에 빈 택시를 잡을 수 있었다. 뒷좌석에 앉아 집 주소를 부른 채훈은 한숨을 내쉬며 시트에 기댔다.
술 자체는 얼마 마시지 않았다. 하지만 맥주에 소주, 그리고 양주까지 섞은 폭탄주를 몇 잔 삼켰더니 취기가 확 올랐다. 힘든 일을 하고 난 다음이라서 더 그런 것 같았다.
“후.”
채훈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택시의 시계를 확인했다. 새벽 2시가 훌쩍 지난 상태였다. 이렇게까지 늦을 거라고는 채훈도 예상하지 못했다.
운이 나빴다. 그것도 많이 나빴다.
아마추어들이 운영하는 주점에서는 작은 사건 사고들이 연달아 일어났다. 주문한 음식이 잘못 나온다든가, 늦어진다든가, 혹은 그릇을 깨먹는다든가 하는 것들이었다. 10시에 초대 가수 공연이 끝난 후, 손님들이 몰려들고 정신없이 바빠지면서 취객들끼리 시비도 붙었지만 큰 소란은 없었다.
자정이 되자 손님들도 슬슬 빠져나가고 마감을 하자는 분위기가 형성될 때쯤이었다. 더 이상 손님을 받지 말자고 하고 있는데 전공 교수 몇 명이 양주를 들고 나타나서는 늦게까지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그들 중에서 주수길 교수는 선배들 사이에서 악명이 자자했다. 강의 능력은 그저 그런 편인데, 처세가 좋아 학과 내에서 발언권이 센 편이었다. 특히 취업과 논문 등으로 대학원생들을 노예처럼 부려 먹는다고 알려져 있었다.
학과생들도 한번 찍히면 어떻게든 이유를 만들어 낙제나 낙제에 가까운 학점을 줬다. 같은 조원들이나 같이 어울려 다니는 친구들까지 한데 묶어서 재수강을 하게 만들었다. 그것도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졸업할 때까지 두고두고 괴롭혔다. 졸업 직전 전공 수업에서 30여 명에게 F를 줬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있었다. 반대로 줄만 잘 서면 막 퍼주기 때문에 평이 극과 극이었다.
신입생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채훈은 어떤 의미로든 눈에 띄었다. 청소를 하던 그는 주 교수에게 지목을 받고 술자리에 앉았다. 예과 1학년은 주 교수 수업을 들을 일은 없었다. 그래도 앞으로의 대학 생활을 생각하면 얌전히 버티는 것이 최선이었다.
채훈은 주 교수가 주는 폭탄주도 세 잔이나 마셔야 했다. 그러다가 교수 한 명이 술에 취해 고꾸라지면서 겨우 술자리가 겨우 마무리되었다.
“하아.”
한 번 더 한숨을 내쉰 채훈은 휴대폰을 확인했다. 승건에게 마지막으로 메시지를 보낸 것이 새벽 1시경의 일이었다. 교수들 때문에 늦을 거라고 메시지를 보냈는데 아직도 답장이 없었다. 읽기는 읽었는데, 씹었다는 것은 꽤나 화가 났다는 의미였다. 지금까지 승건이 읽씹을 한 것은 결혼 문제 때문에 싸웠던 그때뿐이었다.
채훈은 택시를 타고 들어가는 중이라고 메시지를 작성하다가 지워버렸다. 내일 출장을 가야 하는 녀석이지만 자고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지금 메시지를 보내는 것은 왠지 더 화를 돋울 것 같았다.
어떻게든 되겠지.
채훈은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미안하다고 납작 엎드려 사과하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있는 사이에 택시가 집에 도착했다.
* * *
새벽 2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라 채훈은 직접 대문을 열었다. 천천히 마당을 지나 집 안으로 들어섰다.
집 안은 조용하기만 했다. 거실에도 인기척이 없었다. 채훈은 발소리를 죽여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승건의 성격이라면 안 자고 기다리고 있을 것 같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기대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심호흡을 한 채훈은 조심스럽게 침실 문을 열었다. 예상대로 잠옷 차림의 승건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책을 손에 들고 있는 것이 지금까지 읽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마치 언제 문이 열릴지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바로 승건과 눈이 마주치는 바람에 채훈은 헛숨을 들이쉬었다. 그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기분이 최악이라는 것을 알아보는 것은 너무 쉬웠다.
“안 자고 있었어?”
미안했기 때문에 목소리는 절로 작아졌다. 몸에서 나는 냄새가 신경 쓰여서 침실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했다.
저녁 내내 주방에 섰더니 기름에 절은 냄새와 음식 냄새가 몸에 뱄다. 술은 몇 잔 마시지 않았지만, 주 교수가 바지에 술을 쏟는 바람에 술 냄새도 장난 아니었다.
반면에 침실에서는 좋은 냄새만 풍겨왔다. 디퓨저는 쓰지 않았지만 언제나 깔끔하게 정리된 침실은 청결했다. 거기에 승건의 페로몬 향기까지 더해졌다. 승건은 페로몬 조절이 완벽했지만, 그래도 공기 중에 남아 있는 것까지는 어떻게 하지 못했다. 아마도 화가 나서 한 번 폭발을 한 모양이었다.
채훈은 속으로 혀를 찼다. 술 때문에 기분이 말랑해졌고, 오늘따라 승건의 냉랭하게 가라앉은 미모가 더 눈에 들어왔다. 거기에 승건의 페로몬 향기는 감미롭다 못해 자극적이어서 훅하고 열이 치솟았다.
“안 들어오고 뭐 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승건이 조금 가까이 다가오며 물었다. 그의 움직임은 어색하지 않았지만 그래서 채훈은 더 긴장했다.
자신에게서 나는 악취에 가까운 냄새를 승건이 맡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 냄새가 좀 많이 나서. 주방에서 일했더니…….”
“술 냄새도 나. 술 마셨어?”
채훈은 속으로 혀를 찼다. 거리가 꽤나 떨어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냄새가 날 정도면 정말 심한 모양이었다.
“어, 응. 교수님이 권하셔서.”
“많이 나는데?”
“바지에 술을 쏟아서 그래.”
“교수가?”
“응.”
날카로운 승건의 질문에 채훈은 모든 걸 교수 탓으로 돌렸다. 술을 권한 것도, 술을 바지에 쏟은 것도 모두 교수가 맞았다. 그러면서도 침실 안에 들어서지 못하고 문밖에서 미적거렸다.
“차는?”
“택시 타고 왔어. 음주운전을 할 수는 없잖아, 냄새가 많이 나니까, 얼른 씻고 올게. 그러니까, 1층에서.”
“여기서 씻어.”
냄새가 많이 신경 쓰였다. 그래도 고집을 부리면 더 싸울 것 같아 채훈은 잽싸게 욕실로 향했다. 씻는 것은 금방이었다. 살짝 흥분한 상태라서 마지막에는 찬물로 헹궈냈다. 잠옷으로 갈아입고 머리는 대충 말린 상태에서 침실로 돌아왔다.
승건은 자기 쪽 스탠드를 끈 채 이미 침대에 자리 잡고 누운 상태였다. 채훈은 차마 말을 걸지 못하고 자기 자리로 가서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샤워를 하는 내내 어떻게 사과할까 고민했다. 그러나 고민이 무색하게 분위기가 얼어붙어 있었다.
채훈은 고개만 슬쩍 돌려 승건을 보았다. 반듯하게 누워 눈을 감고 잠을 청하고 있는 승건은 대화를 거부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도 혹시나 싶어 채훈은 입을 열었다.
“미안. 나도 이렇게 늦을 줄은 몰랐어.”
“피곤할 테니까. 자고 나서 이야기해.”
승건의 목소리는 딱딱했다. 조용히 입 닥치라는 뜻으로 해석한 채훈은 입을 꾹 다물었다. 미안하다고 숙이고 들어가려는데 대놓고 무안을 주니 괜히 억울해졌다.
두고 봐라. 내가 이제 사과하는지.
채훈은 속으로 툴툴거리며 몸을 돌려 승건을 등졌다. 평소에는 나중에 이야기하자고 해도 결국 대화로 잘 해결했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아예 대화할 의지가 없어 보이는 녀석은 처음이었다.
사실 결혼하기 전에 승건과 이런 식으로 기 싸움을 한 적은 여러 번이었다. 승건이 주는 카드를 못 쓰게 만들었을 때도, 파워 게임에 휘둘리는 건 질색이라고 한마디 했을 때도 분위기는 사나웠다.
그때는 승건이 무슨 반응을 보이든 그냥 뒤돌아 헤어지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나니 꿉꿉한 기분으로도 한 침대에서 같이 자야 했다. 이래서 부부 싸움하면 각방을 쓰는 거구나 하고 순간 깨달았다.
나쁜 놈. 미안하다고 할 때 받아주지.
채훈은 등 뒤에서 존재감을 뿜어내는 승건을 향해 속으로 욕을 했다. 여러 가지 감정이 제멋대로 뒤섞였다. 울컥하다가, 민망하다가, 화가 났다가, 난감해졌다.
무엇보다 페로몬 향기가 문제였다. 아주 연하게 남아 있는 승건의 페로몬 향기에 몸이 반응했다. 평소라면 그냥 기분 좋게 잠들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미묘한 자극으로 다가왔다. 마음먹고 냉수욕을 한 게 무색할 정도였다.
기분이 이렇게나 엉망인데도 가볍게나마 흥분한 것이 이상했다. 승건이 저렇게까지 냉랭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든 들이대고도 남았다.
진짜 술이 문제였다. 아니, 술을 강권한 주 교수가 문제였다. 주 교수는 사회생활을 한 채훈이 시범을 보여야 한다며 폭탄주를 세 번이나 내밀었다. 정우를 낳은 후로는 반주 정도로만 술을 즐겼다. 오랜만에 각 잡고 마셨더니 제대로 몸에 받은 모양이었다.
눈을 감고 애국가를 불러봤지만 헛수고였다. 한번 신경 쓰기 시작하니까 잠이 오지 않았다. 마음은 상했는데 승건에게 사과하면서 들이댈까 하는 과격한 충동까지 치밀어 오를 정도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채훈은 한 번 더 냉수욕을 할 마음으로 침대를 빠져나왔다.
“왜 그래?”
비척거리며 걸음을 떼자 승건이 민감하게 알아차렸다. 베개에 머리가 닿으면 금방 잠드는 녀석이었지만 옆자리가 비는 것은 금방 눈치챘다. 그냥 무시할까 하다가 어설픈 변명을 중얼거렸다.
“냄새……가 나는 것 같아서. 한 번 더 씻으려고.”
“냄새?”
“한번 신경 쓰니까, 거슬려서.”
쌀쌀맞은 너를 덮치고 싶은데, 그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서 도망친다는 말은 죽어도 할 수 없었다. 채훈은 승건을 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욕실로 들어갔다. 옷을 훌훌 벗고 샤워기 앞에 섰다가 거울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승건과 얼굴을 안 마주해서 다행일 정도였다. 승건을 생각하자 반사적으로 몸이 떨리는 것과 동시에 무의식적으로 페로몬이 흘러나왔다.
“아이고.”
채훈은 앓는 소리를 냈다. 원래부터 욕망에 솔직한 성격이었고 술을 마시면 과감해졌다. 그러다 오메가가 되자 승건을 유혹하기 위해 페로몬을 들이미는 버릇이 생겼다. 물론 의식적으로 조절이 가능했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자제력을 잡아먹는 술이 문제였다.
침대를 박차고 나온 것은 훌륭한 선택이라고 스스로를 칭찬하며 채훈은 샤워기를 틀었다. 몸에서 열이 나는 것과 비례해 차가운 물이 닿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반쯤 부풀어 오른 성기가 쪼그라들었다. 효과는 좋았지만 대신에 몸이 차가워졌다.
똑똑똑.
이러다 감기 걸리겠다 싶었는데 욕실 문이 울렸다.
“채훈아?”
당연히 승건이었다. 말도 안 섞으려고 하던 녀석이 왜 욕실까지 따라왔나 싶었다.
“응? 왜?”
“괜찮아? 속이 안 좋아?”
승건의 목소리가 왠지 다급한 것 같아서 채훈은 애매하게 웃었다. 확실히 자신의 행동이 이상하긴 했던 모양이었다. 찬바람이 쌩쌩 부는 녀석에게 서운함이 들다가도 이런 점 때문에 마냥 미워할 수 없었다.
찬물 세례와는 별개로 괜히 울컥해졌다.
“아……. 응. 괜찮. 크음. 괜찮아.”
괜찮다고 하는데 목소리가 튀어서 이상하게 들렸다. 말이 끝나자마자 예고도 없이 욕실 문이 벌컥 열렸다. 깜짝 놀란 채훈은 흉흉한 얼굴을 한 승건과 눈이 마주쳤다.
알몸을 보인 것은 아무렇지 않았다. 그것보다는 승건의 존재에 다시 열이 훅 치솟는 것을 느꼈다. 채훈은 냉수를 틀어 놓은 스스로를 다시 칭찬했다.
“뭐야? 괜찮다니까.”
“너야말로 뭐 하는 짓이야? 페로몬도 그렇고, 거기다 샤워를 냉수로 해? 지금 입술이 파란 건 알아?”
“아, 그러니까 별로 안 추워.”
채훈이 버벅거리는 사이에 승건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러고는 샤워기 버튼을 조작해 온수가 나오도록 했다. 미지근한 물인데도 피부에 닿자 따끔거렸다. 하지만 채훈은 아픔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물에 젖은 승건의 잠옷 소매가 더 눈에 들어왔다.
“잠옷 젖었어.”
채훈은 저도 모르게 승건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승건이 흠칫 놀라다가 인상을 쓰면서 천천히 손을 떼 놓았다. 채훈은 그게 사뭇 서러웠다.
“너, 취했어.”
“어, 응. 그런 것 같기는 해.”
“씻고 나와.”
“화났어?”
채훈은 조금 전에 하지 못한 대화를 시도했다. 욕실에서, 자신은 벌거벗은 채, 그리고 승건은 잠옷이 젖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서 서로를 마주 보고 있는 상황이 웃겼다. 그래도 다시 찬바람 부는 승건과 어색하게 침대에서 누울 바에야 깨지더라도 부딪히는 게 나았다.
“……조금.”
“키스할래?”
역시나 충동적으로 떠오른 생각을 내뱉은 채훈은 순간 아차 싶었지만 후회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취했으니까 아무 말이나 해도 괜찮았다. 무엇보다 승건의 얼굴이 곤란함과 당혹스러움에 굳어버리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너는 술 마시면 안 되겠다.”
“술이 뭐 어때서.”
“섹스로 상황을 모면하려는 것은 나쁜 버릇이야.”
“그래서 싫어?”
싫다는 놈에게 매달릴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래도 진짜로 싫다고 하면 두고 보자는 경고의 의미로 눈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물에 젖고 상기된 뺨을 하고 있는 모습은 의도와 전혀 달랐다.
“진짜, 너는…….”
“내가 뭘.”
싫으면 관두라고 하는데 승건에게 입술이 삼켜졌다. 드디어 키스였다.
채훈은 승건의 잠옷이 젖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양팔로 목을 감았다. 그러면서 한껏 페로몬을 풀어냈다. 순간 끌어안은 승건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승건의 페로몬 역시 욕실 내부를 잔뜩 채웠다.
반쯤 흥분한 상태라 키스만으로 다리가 풀리면서 뒤가 젖어가고 있었다. 거기에 페로몬에 휩싸이자 머리가 어질거렸다.
“이렇게 도발해서 어쩌려고.”
엉덩이를 와락 움켜잡은 승건이 입술을 떼어내며 속삭였다.
“흐윽…….”
손가락 하나가 불쑥 구멍 안으로 파고드는 바람에 채훈은 승건에게 매달린 채 부르르 떨어야 했다. 그저 손가락 하나인데도 불구하고 절로 뒤가 조여졌다.
욕실에서 몇 번 섹스를 한 적이 있었다. 같이 씻으러 욕조에 들어갔다가 뒤엉키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렇게 서서 하는 것은 처음이라서 그런지 더 흥분이 되는 것 같았다.
“채훈아.”
“응, 이대로 할 거야?”
샤워기 밑에 서서 쏟아지는 물줄기를 고스란히 맞고 있는 상태였다. 장소도 상황도 섹스하기에 적절하지 않았다. 그러나 승건은 단단히 버티고 서서는 구멍을 자극했다. 안을 깊게 쑤셔대는 손가락은 마치 성기의 삽입과 닮아 있어서 안달 났다.
“여기서 해 볼 수 있겠지. 할까?”
“으응…….”
채훈이 별다른 고민 없이 대답했다. 사실 길게 생각할 정신도 없었다. 승건의 행동은 재빨랐다. 귓가를 지분거리는 애무에 신음하던 채훈은 승건의 손에 의해 몸이 돌려세워져 벽을 짚었다.
커다란 손이 엉덩이를 잡고 벌렸다. 뜨겁고 단단한 성기가 입구 주름을 밀고 들어오자 채훈은 덜덜 떨었다. 충분히 풀어주지 않았지만 뒤는 어렵지 않게 승건의 성기를 받아들였다. 그저 입구만 찔렸는데도 뒷머리가 쭈뼛 섰다.
승건이 음낭과 성기를 크게 움켜쥐며 깊은 삽입을 시도했다. 안을 천천히 채워가는 느낌에 숨도 쉴 수 없는 쾌감이 번졌다.
“아…….”
“채훈아. 너무 조여. 힘을 빼.”
승건이 귓가에서 으르렁거렸지만 채훈은 힘을 빼고 말고 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다리에 힘이 빠져서 휘청거리지 않으려고 힘을 주고 버티는 것만으로도 힘들었다.
“진짜, 네 몸이 너무 야해.”
평소에는 별 말을 하지 않던 녀석이 허리를 꽉 붙잡고는 단숨에 꿰뚫어버렸다.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린 채훈은 입을 벌렸다.
“아……!”
그때부터 승건은 말없이 허리를 움직였다. 거의 끝까지 빠져나갔다가 깊게 파고들기를 반복하자 쾌락이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일정한 속도로 찔러 드는 힘에 의해 채훈은 앞으로 밀려갔다. 허리가 단단히 잡힌 덕분에 다리는 무너지지 않았지만 벽을 짚은 팔이 접혔다. 차가운 욕실 벽타일에 머리와 가슴이 닿았다.
차가운 타일에 열이 오른 이마가 닿자 정신이 잠시 돌아왔다가 사라졌다. 오히려 승건이 밀어붙일 때마다 타일에 유륜이 눌리면서 또 다른 자극이 되었다.
승건을 원하는 몸이 환희에 젖어 들었다. 아무렇게나 벌어진 입술 사이로 달뜬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 아앗……. 흐으.”
채훈의 머리가 벽을 찧자 승건이 손으로 감싸왔다. 상냥한 손길이었다. 그러나 아래를 박아 오는 힘은 사납고 강했다.
순간 채훈은 키스를 하고 싶어졌다. 아래를 가득 채우면서 혀를 빨면 황홀할 것 같았다.
“승, 승건아……. 키스. 으흥. 키스하고 싶어. 하윽. 으.”
“키스?”
“응. 키스. 아니면, 흐윽. 읏. 손, 손가락이라도.”
채훈은 홀린 것처럼 아무 말이나 내뱉으며 자신의 뺨을 감싼 승건의 손바닥을 핥았다.
“사람 홀리는 데는 선수야.”
승건이 상체를 밀착하자 채훈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잡아먹힐 듯 입술이 삼켜졌다. 자세가 나빴지만 키스는 예상대로 황홀하고 끝내줬다.
키스에 몰입해 무아지경에 빠졌다가 아래를 푹푹 찔러 드는 쾌감에 정신은 현실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모든 것이 좋았다. 빈틈없이 꽉 껴안은 팔의 압박감도, 탐욕스러운 키스도, 깊은 삽입도 모두 죽을 것 같은 쾌락을 선사했다. 특히 쏟아지는 승건의 페로몬 향기는 이성을 앗아갔다.
하지만 키스를 이어가기에는 자세가 나빴다. 밀어붙이는 힘에 입술이 떨어져 나가자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아. 앗……. 으응. 앗.”
어느 순간부터 오로지 쾌락만이 가득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는 순간에 채훈의 구멍이 승건의 성기를 꽉 조이며 절정에 이르렀다. 낮게 신음한 승건이 허리를 꽉 부여잡고는 몇 번을 거세게 박아 넣더니 몸을 떨며 뜨거운 것을 쏟아냈다.
뜨거운 것이 내벽에 채워지는 것 같은 감각에 채훈은 눈을 질끈 감았다. 원래라면 알 수 없는 것인데 오메가로 발현한 이후에는 이상하리만치 생생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질식할 듯 온몸을 감싼 승건의 페로몬 향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천천히 숨을 고르자 쾌락만을 느끼던 오감이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귀의 이명과 쿵쿵거리는 심장, 헐떡이는 숨결, 그리고 샤워기에서 떨어지는 물줄기 소리가 한꺼번에 인지되었다.
물을 끄지 않았구나 하고 멍하니 생각하는데, 승건이 몸을 물렸다. 아직 꼿꼿하게 부풀어 있던 성기가 빠져나가자 뜨거운 것이 울컥하고 흘러내렸다.
익숙해질 리 없는 감각에 눈을 감는데 승건의 손에 의해 몸이 돌려졌다. 이제는 벽에 등을 기대어 섰다.
승건이 입고 있는 와인색 잠옷이 물에 흠뻑 젖어 몸에 달라붙어 있었다.
“너, 잠옷 벗어야겠다.”
무의식적으로 한 말이었는데, 승건이 그대로 잠옷 상의를 벗어재꼈다. 난데없는 눈 호강은 제대로 즐기지 못했다. 재빨리 옷을 벗은 승건이 달려들어 입술을 맞대어 왔기 때문이었다.
승건은 아예 물어뜯을 것처럼 혀를 빨아 당겼다. 채훈 역시 허겁지겁 응하며 승건의 목에 팔을 감았다.
키스를 하면서 몸이 다시 맞붙었다. 단단하게 발기한 승건의 성기가 배를 문질러댔다.
“해도 돼?”
승건이 물었다. 뺨을 스친 입술이 귓가에 닿는 바람에 채훈은 부르르 떨었다.
“더 하려고?”
“하자.”
“침대로, 으읏. 침대로 가.”
“한다고 해.”
침대라는 단어가 승건에게는 안 들리는 것 같았다. 승건의 손에 의해 왼쪽 다리가 잡혀 들어 올려졌다. 한껏 다리가 벌어지자 배를 문지르던 성기가 사타구니 사이로 들어왔다. 당장에 박아 넣을 기세였다.
채훈은 키스를 퍼부으며 밀어붙이는 승건을 밀어낼 수 없었다. 페로몬과 섞인 체향은 달콤하고도 음탕했다. 참을 수 없다는 듯 달려드는 승건이 사랑스러웠다. 잔뜩 발기한 성기가 구멍 입구를 찔러대는 게 감질나고 안달 났다.
“싫어?”
“괜찮. 으읏. 흐.”
괜찮다고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승건의 성기가 단숨에 밀고 들어왔다. 조금 전까지 잔뜩 헤집어졌던 구멍은 탐욕스럽게 삼켜냈다. 다시 한번 빈틈없이 몸이 맞닿으면서 이번에는 채훈의 성기가 승건의 배에 비벼졌다.
“미칠, 것 같아.”
승건이 더운 목소리를 쏟아냈다. 채훈은 승건을 끌어안으며 눈을 감았다. 미칠 것 같은 것은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승건의 손에 잡힌 왼쪽 다리는 한껏 벌려진 채 욕실 벽에 고정되었다. 자세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데도 쾌감이 머리끝까지 관통했다.
“읏. 잠시만. 자세가. 흐. 으응. 승건아.”
느끼는 곳만 찔러댈 때마다 몸이 벽을 따라 밀려 올라갔다. 등 뒤에 벽이 있고, 승건이 단단히 잡고 있기는 했다. 하지만 오른쪽 발끝으로 서서 지탱하는 게 위태로웠다.
“네가 너무, 조여. 힘을 빼.”
“흣. 자세가, 아, 으, 자세가 나쁘다니까. 흐읏. 읏. 승건아. 아, 으읏. 아응. 잠깐만.”
잔뜩 느끼는 것과 별개로 자세가 위태로운 것은 사실이었다. 등을 긁어대며 애원하자 승건이 잠시 동작을 멈췄다. 그리고 벽에 고정시켰던 다리를 승건의 허리에 감게 했다.
자세가 안정되고 단단히 얽히자마자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이미 잔뜩 달아오른 몸은 금방 쾌감에 절여졌다.
흉포한 것이 아래를 짓이길 때마다 채훈은 진저리를 쳤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무시무시한 쾌락에 눈물이 흘렀다. 머리가 녹아내릴 것 같았다. 자신의 신음 소리가 커다랗게 울려 야하게 들려왔다. 하얗게 번쩍거리던 세상이 가장자리부터 부서져 갔다.
무시무시한 성감에 채훈은 승건의 목덜미를 깨물었다. 삽입이 더욱 거세지자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마지막을 예상하며 채훈은 승건을 한껏 끌어안았다. 온몸이 꿰뚫린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절정에 이르렀다. 승건 또한 끝이 다가온 듯, 다시 한번 안쪽에 뜨거운 것이 채워졌다.
채훈은 부들부들 떨면서 헐떡였다. 한참이나 숨을 고르고 나서야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다. 눈물 때문에 뻑뻑한 눈을 몇 번이고 깜빡거리고 시야를 맑게 하자 코 앞에 얼굴을 가져다 댄 승건이 보였다.
잘생긴 얼굴은 뺨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살짝 찌푸린 미간 아래 열을 품은 눈동자가 자신을 향했다.
“이제 못 해.”
얼마나 신음을 질러댔는지 목이 깔깔했다.
“많이 울었어. 눈 붓겠다.”
승건의 입술이 뺨과 눈가에 닿았다. 부드러운 애무였다. 하지만 성기는 아직 몸에서 빠져나가지 않은 상태였다.
“이제 못 한다니까.”
“응. 알아.”
채훈이 말려도 애무는 계속되었다. 섹스는 짐승처럼 하는 주제에 그래도 후희는 달콤하기만 했다. 여기서 한 번 더 했다가는 내일은 자리를 보전하고 앓아눕는 게 확정이었다. 그래도 승건의 행동이 귀여워서 채훈은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
*
부드러운 입술이 발목 안쪽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입술은 점점 위쪽으로 거슬러 올랐다. 발목에서 장딴지, 무릎, 그리고 허벅지 안쪽을 깨물고 핥으며 채훈의 몸을 더듬는 승건의 움직임은 거침없었다.
나체로 침대 위에서 쿠션에 기댄 채 애무를 받는 채훈은 술렁이는 감각에 몇 번이고 몸을 뒤틀었다. 조금 전까지 섹스를 한 탓에 잔뜩 민감해진 몸이 모든 감각을 과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거기다 평범한 애무가 아니었다. 승건의 페로몬을 자신에게 덧씌우고 있는 중이었다. 마킹은 꼭 애무나 섹스일 필요는 없었다. 쌍방 합의가 있으면 성적인 흥분 상태에서 약간의 신체접촉만으로도 가능했다. 마치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는 것과 비슷한 방법이었다. 물론 애무를 동반한 성적인 흥분은 마킹의 질을 높이고 지속 시간을 늘려주었다.
승건은 이 방법을 좋아했지만 채훈은 딱히 선호하지 않았다. 꽤나 오랜 시간 동안 감질나게 승건의 페로몬에 노출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페로몬에 흠뻑 빠져버리면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들기라도 할 텐데 그 정도는 아니었다. 마치 목이 말라 죽겠는데 소주잔으로 물을 마시게 하는 꼴이었다. 가랑비에 옷이 젖는 것처럼 승건의 페로몬에 어느 순간 빠져드는데 갈증은 계속되었다.
“흣.”
채훈은 뜨거운 숨결을 토해내며 열이 오른 눈을 감았다. 잘 마른 맨살이 맞닿는 감각은 깃털이 스쳐 흘러내리는 것과 닮아 있었다. 그렇게 머리가 쭈뼛 설 정도의 소름은 쾌감이나 마찬가지였다.
“전에도 말한 것 같은데……. 고문 받는, 흐읏. 고문 받는 느낌이야.”
당장에 페로몬을 풀고 싶은 것을 참으며 채훈은 투덜거렸다. 마킹을 그만두게 하는 방법은 여럿 있었다. 그래도 삐진 녀석을 달래려고 이러는 거니까 끝까지 참아야 했다.
“이게 고문 같아?”
“당연하지. 너도 당해봐야 해. 왜 오메가는 알파에게 마킹을 못하냐고.”
왼쪽 허리 부근을 핥던 승건이 소리 없이 웃는 게 느껴졌다. 채훈은 괜히 울컥하는 마음에 승건의 머리카락을 움켜잡았다.
“진짜, 내가 언젠가 널 묶어버릴 거야.”
“기대되는데.”
“심 실장님에게 수갑을 받아……. 읏.”
승건의 입술이 유두를 깨무는 바람에 채훈은 말을 잇지 못했다. 눈앞에서 번개가 번쩍 치는 기분이었다. 반쯤 부풀어 있던 성기가 완전히 모양을 잡고 섰다. 무엇보다 뒤쪽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축축하게 젖다 못해 자극을 원하며 저릿하게 울려댔다.
오메가로 발현하면서 가장 극명하게 바뀐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지나치게 잘 느낀다는 점이었다. 특히 구멍 입구부터 깊숙한 곳까지가 쾌락만을 좇는, 또 다른 의지를 가진 생물처럼 변했다.
“이제……, 좀.”
“아직 멀었어.”
애원을 해도 승건은 단호하기만 했다. 몸이 완전히 얽힌 탓에 이제는 뒤척이는 것조차 제대로 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덕분에 서로가 얼마나 흥분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발기한 성기가 서로의 배와 허벅지에 닿아 문질러졌다.
결국 참다못한 채훈은 승건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뒷목과 등이 이어진 부분을 만지작거렸다. 나머지 손도 같이 움직였다. 강철 같은 녀석에게도 약한 부분이 있었다. 귀 뒤부터 등까지 이어지는 부분에 간지럼을 탔다.
반응은 금방 왔다. 유두를 길게 핥은 승건이 상체를 일으키고는 오른손을 잡아챘다.
“얌전히 있겠다며.”
승건이 으르렁거렸지만 채훈은 기죽지 않았다.
“그냥 만지는 것뿐인걸. 페로몬도 잘 조절하고.”
“말은 잘하지.”
이번에는 승건이 보란 듯이 손목에 입술을 댔다. 이제 곧 여름이었다. 옷자락으로 가릴 수 없는 곳이라서 아까보다는 무는 힘이 가벼웠다. 커다란 개나 고양이가 애정을 표현하는 것처럼 검지 위쪽을 살짝 물던 녀석이 인상을 썼다.
“이건…….”
“왜?”
“너는.”
무어라 말을 하려고 입술을 달싹거리던 승건이 다시 손가락을 왁 물었다.
“아파.”
“아프라고 물었어.”
“야.”
방금 전보다 아파서 항의를 하는데, 승건이 이가 닿았던 곳을 혀로 쓸었다. 이번에는 확실히 커다란 짐승의 행동을 닮아 있었다. 귀여운 것과 별개로 채훈은 이제 한계였다. 붙잡히지 않은 나머지 팔을 승건의 목에 둘러 끌어당겼다. 그의 뺨에 입술이 닿을 정도로 얼굴을 밀착시켰다.
“이제 화 풀어. 응?”
뺨에 대고 속삭이다시피 말을 하며 입술을 찾아 맞댔다. 혀를 밀어 넣자 승건이 순순히 입술을 열어 주었다.
채훈은 키스가 달콤해질 수 있도록 정성을 들였다. 혓바닥을 문지르고 입천장을 쓸면서 페로몬을 슬그머니 흘렸다. 다행히 승건은 하지 말라고 밀어내지 않았다.
“화가 난 건 아니야.”
입술을 뗀 승건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럼?”
“보통 알파들이 하는 고민을 했지.”
“그게 뭐냐……고. 흐읏.”
허리를 훑고 내려간 승건의 손이 성기를 잡아채는 바람에 채훈은 말을 채 끝맺지 못했다. 음낭을 움켜쥐면서 동시에 선단을 문질렀다. 직접적인 자극에 눈에서 불똥이 튀는 기분이었다. 채훈은 승건의 어깨를 붙잡은 채 쾌락에 떨었다.
쿠션에 기댄 자세였던 채훈은, 승건이 내려다보는 시선을 고스란히 느꼈다. 결혼 후에도 승건의 섹스 취향은 변한 게 없었다. 이럴 때마다 고약한 취향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이제는 그의 시선을 즐길 수 있었다.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지는 못했다. 그러나 집중하고 있는 승건의 모습이 시각적인 쾌락을 주는 것과 비슷할 거라고 생각했다. 상기된 뺨, 욕망을 숨길 수 없는 눈빛이 잘생긴 얼굴과 어우러져 평소와 다른 분위기를 뿜어냈다. 그가 자신을 원하고 있다는 것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것도 좋았다.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승건의 손짓에 몸은 달아올랐지만 이제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채훈은 승건의 어깨를 움켜쥔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이제, 뒤를……. 뒤에 넣어줘.”
“앞으로만 가 봐.”
“그게 맘대로. 흣. 아. 너, 진짜. 아흐. 흣.”
안달이 난 채훈은 페로몬을 쏟아냈다. 이미 잔뜩 발기한 녀석이 넘어올 거라고 생각했지만 오판이었다. 페로몬이 뒤엉켜 모든 게 자극이었다. 한껏 낮은 비명을 지르다가 절정에 이르렀다.
헉헉 숨을 내쉬던 채훈은 티슈로 손을 닦아내는 승건을 노려보았다. 사정은 했지만 전혀 만족스럽지 못했다.
채훈은 팔을 뻗어 승건의 목에 팔을 둘렀다. 얼굴을 내밀어 키스를 하는 척하면서 승건의 허리에 다리를 감아 옆으로 굴려 넘어뜨렸다. 넓은 침대 덕분에 굴러떨어지는 일 없이 승건의 허벅지 위에 올라탈 수 있었다.
승건이 잠시 어리둥절하더니 설핏 웃었다.
“뭐 하려고?”
“좋은 거. 수갑은 없지만.”
심정민의 수갑은 진짜였다. 그게 위험하다면 플레이용 수갑이라도 구해서 이 녀석 손목에 꼭 채워볼 생각이었다. 멋진 상상을 하며 채훈은 반쯤 상체를 일으킨 승건의 얼굴을 붙잡고 뺨과 턱과 입술에 가볍게 입맞춤을 했다. 그러면서 승건의 성기를 가볍게 쥐었다. 이미 그의 것은 단단히 발기한 상태였다.
“이러고 어떻게 참았어.”
한숨처럼 말을 토해낸 채훈은 두툼한 성기에 아래를 맞댔다. 그저 입구에 닿는 것만으로도 희열에 휩싸였다.
빤히 올려다보는 승건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가 당장에 덤벼들지 않는 것은 이 구도를 꽤나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잡아먹을 듯한 시선에 미소를 보내며 무릎에 힘을 주고는 천천히 몸을 내렸다.
뒤는 이미 잔뜩 젖은 상태였다. 오메가가 되면서 삽입은 전보다 훨씬 쉬워졌지만, 승건의 것은 여전히 너무 컸다. 반쯤 삼킨 상태에서 채훈은 천천히 숨을 고르며 뒤를 꽉 조였다.
“강채훈.”
승건이 앓듯이 으르렁거렸다. 허리를 잡은 그의 손에도 힘이 꽉 들어갔지만 채훈은 그저 웃었다. 부드러운 내벽이 한껏 내벌려지는 게 아팠다. 그러나 그것도 좋았다.
“조금만 더 참아 봐.”
채훈은 승건의 어깨를 움켜잡고는 몸을 이완시켰다. 이번에는 단숨에 승건의 것을 삼켰다. 엉덩이 살에 닿은 음모조차도 이제 자극이었다. 뜨거운 것에 꿰뚫린 몸이 제멋대로 떨리며 승건의 성기를 조였다. 길게 숨을 내쉰 채훈은 의도적으로 아래에 힘을 주며 승건을 내려다보았다.
잘생긴 미간은 찌푸려져 있었다. 상기된 뺨과 목에 솟은 힘줄이, 그리고 사나운 눈빛이 섹시했다. 얼굴 뜯어먹고 사는 게 아니라지만 그래도 잘생긴 건 삶을 윤택하게 만들었다.
“이제 화 풀린 거다.”
“화 난 거 아니라니까.”
“거짓말은.”
채훈은 천천히 허리를 앞뒤로 움직였다. 강하게 박는 것도 좋았지만 느릿하게 휘젓는 것도 취향이었다. 지금은 자신에게 주도권이 있기 때문에 강약을 조절할 수 있었다.
오싹한 감각이 쾌락의 불꽃이 되어 몸을 휘감았다. 기분 좋은 흐느낌이 목 안에서 울렸다. 승건 역시 숨이 가빠지고 있었다.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른 게 눈에 보였다.
“이제, 흣. 이제 움직여봐.”
짧은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승건이 강하게 쳐올리기 시작했다. 한순간에 숨이 턱턱 막혔다.
“으읏. 아.”
승건이 움직일 때마다 쾌감이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무릎에 힘을 주고 버텼지만 자꾸 무너지려고 했다.
채훈은 승건의 어깨를 붙잡은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이제는 모든 게 자극이었다. 엉덩이를 붙잡은 승건이 강하게 박아 넣을 때마다 세상이 사라졌다가 돌아왔다. 이렇게 될 줄 알았지만 그래도 너무 급하고 빨랐다.
“승건아. 천천히. 핫. 으읏. 흐아, 천천히 해. 아흐으.”
천천히 하라는 애원이 통한 듯 승건이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그러나 숨을 한 번 들이쉬기도 전에 자세를 조금 바꾼 승건이 다시 강하게 쳐올렸다.
하얗게 변한 세상이 쾌락으로 녹아내렸다.
*
*
채훈은 널브러진 상태에서 손끝을 멍하니 보았다. 복상사까지는 아니지만 내일 하루는 흐느적거릴 것 같았다.
승건이 이렇게까지 끈질기게 달라붙는 일은 자주 없었다. 아슬아슬하긴 하지만 선을 지키려고 했는데 오늘은 아니었다. 나올 것 하나 없이 쥐어짜인 것은 진짜 오랜만이었다.
“나쁜…….”
힘없이 욕을 중얼거리던 채훈은 겸허히 반성했다. 중간에 도발을 한 건 자신이었다는 것이 기억났다. 승건을 올라타지만 않았다면 세 번으로 끝났을 텐데, 다섯 번까지 가버렸다.
“아이고. 목도 아프네.”
얼마나 소리를 질렀는지 목이 다 아팠다. 내일은 흐느적거리면서 쉰 목소리를 낼 게 확실했다.
“목이 안 좋아?”
“어.”
“물 마실래?”
“응.”
막 씻고 나온 승건이 탁자 한쪽에 준비된 물병에서 물을 가져왔다. 자리에서 일어나 앉은 채훈은 고맙다고 하고는 떨리는 손으로 물을 마셨다. 승건의 취향인 라임수는 차갑지는 않았지만 상큼해서 마시기 좋았다.
“같이 술 마신 교수가 누구야?”
“응? 갑자기 교수님은 왜?”
“학생들 축제에 교수가 참가해?”
“케이스 바이스 케이스인데, 이번에는 그냥 괴롭히는 거지”
“괴롭혀?”
잔을 모두 깨끗이 비운 채훈은 반문하는 승건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무표정한 승건의 속내를 짐작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주 교수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았다.
“주 교수가 진상 중에 진상이거든. 그것도 머리 좋은 진상. 내가 미친 인간 많이 봤는데, 다섯 손가락 안에 꼽아.”
“그래?”
“학점 때문에 애들이 설설 기어. 졸업 직전인데 F를 30명에게 줬대. 전설이야. 전설.”
“아…….”
세상 무뚝뚝한 승건이 인상을 쓰며 탄식을 내뱉었다. 어이가 없는 것이다. 채훈 역시 그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 같은 심정이었다.
“내가 우리 동기들 중에 제일 나이가 많잖아. 본과에도 나보다 많은 사람 몇 없거든. 그래서 주 교수가 날 알더라고. 신입생은 주 교수 수업 안 듣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안 찍히려고 주는 술을 다 받아먹느라고 고생했어.”
채훈은 차마 학과생들에게 할 수 없었던 주 교수 뒷말을 열심히 했다. 늦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승건에게 피력하기 위해서였다. 배우자에게 고단한 일상에 대해 하소연하는 마음도 있었다. 물론 자신의 말이 어떤 파장을 일으킬지는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긴 하소연에 승건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빈 잔을 가져가면서 물었다.
“안 씻을 거면 닦아 줄까?”
“씻을 거야.”
“같이 들어가 줘?”
“됐거든. 잡아주기나 해. 어구구. 허리야.”
같이 욕실에 들어갔다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진이 빠질 정도로 섹스를 하긴 했지만 그래도 혹시나 모를 일이었다. 내일 흐느적거리는 게 아니라 끙끙 앓아누울 걸 피하려면 조심하는 게 좋았다.
채훈은 승건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허리가 아파 어구구 소리를 냈더니 승건이 공주님 안기를 해왔다. 워낙 자주 일어나는 일이라 부끄러울 것도 없었다. 다리에 힘이 없으니 덩치도 크고 힘도 센 배우자가 있는 게 좋았다.
정액이 흘러내리는 감각이 이상하긴 했지만 수건으로 감싼 덕분에 신경 쓰지 않았다. 샤워기 앞까지 온 승건이 정말 도와주지 않아도 되냐고 한 번 더 물었지만 채훈은 미련 없이 쫓아냈다.
당당히 서 있던 채훈은 욕실 문이 닫히고 나자마자 허리를 짚으며 쪼그려 앉았다. 욱신거리고 결리고 장난이 아니었다.
“아이고.”
채훈은 앓는 소리를 냈다. 내일은 흐느적거리겠지만 그래도 승건의 화가 풀려서 다행이었다.
* * *
승건이 시트를 교체하자마자 채훈이 욕실에서 비척비척 걸어 나왔다. 채훈의 머리는 반쯤 젖어 있었다.
“머리 안 말렸어?”
“졸려서. 잘 거야.”
목에 건 수건으로 대충 머리를 닦는 시늉을 하던 채훈이 그대로 침대에 쓰러졌다. 승건은 수건을 손을 들고는 젖은 머리를 닦아냈다.
“보디로션은 발랐어? 샤워만 세 번 했잖아.”
“그런 거 안 발라도 돼. 나 잔다. 말 걸지 마. 로션 바른다고 막 그러지도 말고. 깨우면 화낼 거―”
잠에 취한 채훈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그러다 결국 말을 채 마무리하지도 못하고 까무룩 잠이 들었다.
이불조차 덮지 않은 채, 웅크리고 자는 녀석의 모습은 꽤나 애처로워 보였다.
“진짜 졸렸나 보네.”
가볍게 혀를 찬 승건은 채훈을 반듯하게 눕히고는 꼼꼼히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러고는 서재에서 구급함을 가져와서 채훈의 손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채훈의 손등에는 기름이 튄 상처가 몇 개 있었다. 얕긴 하지만 길게 긁힌 자국도 손가락을 따라 이어졌다.
태권도와 합기도를 배운 채훈의 손에는 크고 작은 흉터가 꽤 많았다. 고등학교 때는 손가락이 찢어졌다며 붕대를 감고 나타나기도 했었다. 털털한 성격답게 채훈은 상처나 흉터에 신경 쓰지 않았다. 피가 나야 약을 한 번 바를 뿐, 어지간해서는 그냥 내버려 뒀다.
기름에 튄 상처는 살갗이 살짝 벗겨진 상태였다. 그런데도 아프지 않은지 티도 내지 않았다.
“쓸데없이 착해서는.”
상처에 연고를 바른 승건은 채훈에게 하지 못한 말을 중얼거렸다. 호의에 약하고 성실한 것은 채훈의 장점 중 하나였다. 그런 채훈의 성격에 가장 많은 혜택을 본 것은 다름 아니라 승건 본인이었다. 그런데도 승건은 최근에 스스로 판 함정에 빠진 듯한 기분을 맛보았다.
채훈에게 대학을 다니라고 한 것은 승건이었다. 병원을 그만둬야 하는 채훈에게 반대급부로 제안한 게 시작이었다. 그러다 수능을 치고 대학을 가겠다는 녀석을 적극 지지했다. 마음먹은 대로 신입생이 된 채훈에게 타고 다닐 승용차도 선물로 주었다. 값비싼 외제차를 탄다 못 탄다 하고 실랑이를 벌이기는 했지만, 결국 채훈은 연수까지 받아 가며 승용차를 애용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밤늦게 귀가하는 것은 별것 아니었다. 무료 노동력 제공도 마찬가지였다. 진상 교수의 비위를 맞추는 거야 사회생활의 일환이었다.
그저 속이 상할 뿐이었다. 특히 자신이 데리러 가겠다고 하자 채훈이 단호하게 그러지 말라고 했을 때 그랬다.
채훈은 요령이 없지는 않았지만 고지식한 편이었다. 가능한 분란이 일어나는 것을 배제하려고 하는 걸 모르지 않았다. 머리로는 아는데, 감정은 그게 아니었다. 자신을 우선해주지 않는 것이 섭섭하고 서운해서 유치하게 티를 내고 말았다.
“애도 아니고.”
채훈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승건은 스스로를 향해 야유를 보냈다. 어려서부터 어른스럽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는데, 채훈과 함께 있다 보면 애처럼 유치해졌다. 믿고 의지할 배우자가 되어야 하는데 속 좁게 굴었다.
바보 같은 행동의 진짜 원인은 따로 있었다. 채훈과 함께 하는 행복은 완벽했지만 언제든 깨질 수 있다는 사실이 승건을 불안하게 했다.
채훈이 대학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함께 저녁을 먹을 때면, 혹은 시간을 보낼 때면 서로 그날 있었던 소소한 일들을 말하곤 했다.
그날도 그랬다. 채훈은 학생회관에 있는 카페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웬 여학생이 다가와서 번호를 따 가려고 했다며 웃음을 터트렸다. 결혼도 하고 아이도 있다고 해도 여학생이 의심을 하는 바람에 정우 사진을 보여줬다는 것이었다.
재미있는 일이었다고 말하는 채훈에게는 조금의 사심도 없었다. 하지만 그 일이 승건을 흔들어 놓았다. 단순한 질투의 영역이 아니라 좀 더 근원적인 불안이 승건을 냉정히 고민하게 만들었다.
주관적인 콩깍지를 최대한 배제하더라도 객관적으로 채훈은 꽤나 괜찮은 남자였다. 잘생긴 외모에, 언행은 반듯했고, 가까운 사람을 잘 챙겼다. 특히 열 살 넘게 어린 아이들 사이에서 채훈의 장점은 두드러졌다.
채훈의 휴대폰 메시지창은 어린 대학생들의 대화로 가득 넘쳐났다. 물론 채훈은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고 있긴 했다.
젊고 철없는 인간들이 넘치는 대학교 한가운데 채훈을 밀어 넣은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덕분에 스스로 무덤을 판 기분이었다.
고지식한 채훈이 바람을 피울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린아이들을 상대로는 더더욱 그랬다. 채훈의 취향은 의외로 까다로웠다. 전 애인들의 면면을 보면 어른스러운 스타일을 좋아했다.
하지만 그는 오메가였다. 결혼도 하고 아이도 있었지만 각인은 하지 않았다.
형질자는 호르몬의 지배를 받았다. 각인이 서로 엇갈리는 경우는 왕왕 있었다. 서로 사랑에 빠져 결혼을 약속했다가 하루아침에 뒤엎어 버리는 것도 승건의 눈으로 직접 보았다. 채훈이 더 매력적인 알파를 만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매일 같이 마킹에 공을 들이고 자신의 페로몬으로 뒤덮어 놓아도 안심할 수 없는 이유가 거기 있었다.
“어디 가둬놓을 수도 없고.”
저도 모르게 본심을 중얼거린 승건은 쓴웃음을 삼켰다. 각인한 오메가를 향한 알파의 집착은 유구한 전통이었다. 오메가 감금 사건은 종종 사회 뉴스가 되곤 했다.
그런 의미에서 쌍방 각인이 가장 안전했다. 하지만 채훈이 언제 자신을 각인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채훈이 죽을 만큼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속이 쓰렸다.
사실 욕심이기는 했다. 부정 각인을 풀고 결혼까지 한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그렇게 스스로를 설득하고 있기에 그나마 버틸 수 있었다. 부정 각인이 계속되었다면 피가 말라 죽었을지도 몰랐다.
새삼 깨달은 사실에 감사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심장을 죄는 불안은 사라지지 않는다. 어째서 외할아버지가 외할머니에게 집착하는지 그는 다시 한번 더 이해했다.
평생 이러고 살 것이다.
불안하고, 초조하고, 그리고 행복해하면서.
시큼하고도 달콤한 감정이 가슴을 채우는 느낌에 승건은 채훈의 머리카락을 일부러 헝클었다. 이렇게 가슴 한쪽이 간질거리는 느낌은 여전히 익숙하지 않았다. 그래도 채훈의 잠든 얼굴을 볼 때면 늘 생각에 빠진다.
승건은 채훈의 말랑한 뺨을 살짝 꼬집은 다음에 자신의 자리에 누웠다. 그리고 자신이 바르게 누인 채훈을 끌어안았다.
자세가 불편하게 바뀌자 채훈이 잠결에 뒤척였다. 승건은 채훈을 도닥이며 잠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평소라면 금방 조용해질 녀석이 오늘따라 끙끙대며 계속 꾸물거렸다.
아픈 곳이라도 있는 건가 덜컥 걱정부터 들었다. 진통제라도 먹여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 사이에 채훈이 먼저 앓는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채훈아. 왜 그래? 어디 안 좋아?”
“어? 응. 목이 말라서.”
졸음이 잔뜩 묻은 목소리로 어설프게 대답한 채훈이 비척거리며 침대를 빠져나갔다. 승건이 말리기도 전에 먼저 탁자로 다가가 물병을 들었다.
“아……. 다 마셨지.”
빈 물병을 가볍게 흔든 채훈이 한숨을 내쉬며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대로 침실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어디 가려고?”
“부엌에……. 물이 없어.”
“내가 갈 테니까. 여기 있어.”
얼른 바닥에 내려선 승건은 채훈을 침대에 앉혀 놓고는 부엌으로 향했다. 승건은 금방 부엌에서 생수병을 몇 개 챙겨 들고 돌아왔다. 침대에 앉은 채훈이 고개를 푹 숙인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채훈아.”
“응……. 아. 고마워.”
승건이 내민 생수병을 받아든 채훈의 손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사막을 헤맨 사람처럼 한 번에 내용물을 거의 다 마신 채훈은 빈 병을 승건에게 건네고는 그대로 뒤로 기어가서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아까처럼 이불도 덮지 않고 웅크린 것은 여전했다.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이불을 덮어 준 승건은 다시 혀를 찼다. 목이 말라 잠에서 깼으면 물을 달라고 하면 될 텐데, 채훈은 도통 그러지 않았다. 기어코 무거운 몸을 직접 움직였다.
제 일은 스스로 하는 성격이었다. 그래도 이럴 때조차 기대지 않는 것이 서운해졌다.
“서운하다는 거 알려나.”
복잡한 심정을 갈무리한 승건은 침대에 누워 채훈을 끌어안았다. 내일은 오랜만에 서점 데이트를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