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03. 가족】 (21/26)

  【외전 03. 가족】

피아노 선율이 은은하게 울렸다. 연회장은 샹들리에 불빛에 환히 빛났다. 그 아래, 하얀 턱시도를 입은 두 명의 남자가 서로 마주 보며 춤을 추고 있었다. 퍼스트 웨딩 댄스였다.

채훈은 신기한 기분으로 두 사람의 춤을 지켜보았다.

화려한 피로연이었다.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호텔은 뉴욕에서도 인기가 많은 결혼식 장소라고 했다. 유명한 해외 스타의 결혼도 몇 번 있었고, 영화의 배경으로도 자주 나왔다며 강영환이 자랑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채훈이 강영환의 결혼 소식을 전해 들은 것은 한 달 전의 일이었다. 결혼식 날짜는 10월 첫째 주 토요일이었다. 하나뿐인 동생의 결혼식에 채훈은 당연히 참석하기로 했다.

강영환의 결혼 상대는 중국계 미국인이었다. 이름은 스티븐 첸. 서른 살에 능력 좋은 변호사로, 키가 크고 잘생긴 알파였다. 집안도 좋다고 했다. 고조부가 운영하던 정육점에서 시작해 지금은 커다란 운송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는 것이 어머니의 설명이었다.

중국계 집안이라서 그런지 피로연의 장식에는 붉은색과 금색이 많았다. 본식을 하기 전에 한국의 폐백과 비슷한 티 세리머니라는 중국 전통 예식도 했다.

미국에서 열리는 결혼식은 한국과 달랐다. 결혼 선언을 하는 본식은 간단했다. 오히려 하객과 함께 어울리는 피로연이 훨씬 성대하게 열렸다. 특히 본식도 피로연도 참석할 하객들을 정확하게 파악한 다음에 앉을 자리를 지정해서 불청객을 막았다.

거기에 새신랑들이 연회장 한가운데서 춤을 추는 모습을 보자니 문화의 차이가 느껴졌다. 이런 결혼식도 있구나 싶은데 옆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아니나 다를까 승건이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채훈이 강영환의 결혼식에 참석하겠다 결정하자 승건 역시 같이 가겠다고 했다. 첫 공식 가족 행사에 채훈 혼자 보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채훈은 승건의 동행이 여러모로 다행이라고 여겼다. 가족과 친척들을 만나게 되자 승건이 옆에 있어주는 것이 너무나 든든했다. 2박 4일 동안의 시간을 내기 위해 승건이 고생한 것을 생각하면 더더욱 고마웠다.

아직 신랑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채훈은 눈이 마주친 승건을 향해 무슨 일이냐고 입만 벙긋거렸다. 그러자 승건이 이쪽을 향해 슬쩍 몸을 기울이며 속삭였다.

“뭐가 재미있어서 그렇게 보는 거야?”

“아……. 이렇게 춤추는 건 영화에서나 봤는데, 진짜로 하는 줄 몰랐어.”

“마음에 들면 우리도 할까?”

“뭘?”

“결혼식 말이야. 이렇게.”

“아니야. 괜찮아. 안 해도 돼. 안 할 거야.”

채훈은 열심히 고개를 저었다. 승건이 괜찮다는 말을 좋아하지 않았기에 정확한 설명도 덧붙였다.

지난 5월에 채훈의 부정 각인이 풀리고 결혼 약속을 하자마자 승건은 재빠르게 움직였다. 제일 먼저 채훈의 어머니인 조미혜에게 연락해서 결혼 허락을 받아냈다. 채훈이 승건의 외조부모님과 인사를 할 수 있는 자리도 금방 만들었다. 그렇게 부정 각인이 풀린 지 5일 만에 혼인신고를 하고 같이 살기 시작했다. 결혼식은 없었다. 혼인신고 후에 양가 어른들과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여 식사하는 것으로 끝내버렸다.

채훈은 결혼식에 별다른 환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건 승건 역시 마찬가지라고 했다. 그런데 이제 와 갑자기 결혼식을 하자고 하면 놀랄 수밖에 없었다.

“결혼식이 싫어?”

“이제 와서 할 필요는 없잖아.”

“그래?”

가볍게 반응한 승건이 더 이상 대화를 잇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채훈 역시 춤을 추는 신랑들을 바라보았다.

승건과 결혼을 하고 부부가 되었다고 해서 모든 게 좋아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서로 몰랐던 것을 알게 되면서 맞부딪힐 때가 많았다. 덕분에 두 사람 사이에 암묵적인 규칙이 생겼다. 한쪽이 싫다고 하면 왜 그러냐고 따져 묻지 않는 것이었다.

때로는 나중에 이야기하자고 하는 것으로 서로 의견이 일치하지 않음을 피력했다. 나중이라는 단어가 나오면 열에 세 번 정도는 신경전을 벌였다. 이번에는 그냥 넘어갔으니 가볍게 꺼내본 말인 것 같았다.

채훈은 결혼식이야 아무래도 좋았다. 해도 그만이고 안 해도 그만이니까 승건이 하자는 대로 뒤늦게 식을 올릴 수도 있었다. 다만 왜 이제 와서 갑자기 결혼식을 하자고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던 채훈은 뭔가 문득 깨달았다.

설마 강영환의 결혼식에 자극받은 건 아니겠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채훈은 승건을 보았다. 무심한 표정으로 앞을 보고 있는 녀석의 생각을 읽을 수는 없었다.

채훈은 승건과의 결혼식을 떠올리다가 관뒀다. 채훈에게 승건은 고등학교 동창이자 배우자였다. 하지만 그의 대외적인 직함은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재벌 기업의 대표이사였다. 결혼식에 참석할 사람들의 면면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았다. 축복받아야 할 결혼식이 살벌한 권력 과시의 자리가 될 확률이 높았다.

지금도 그랬다. 강영환의 결혼식에는 외가와 친가의 친척들이 몇몇 참석했다. 그들 모두 채훈의 결혼 상대가 태화 그룹의 대표이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친척들은 모두 승건을 어려워했다. 예의를 갖춰 서로 인사를 하는 것을 끝으로 어느 누구도 승건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건 조미혜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머니는 승건을 무척 정중하게 대했다. 대신에 잔소리와 하소연은 모두 채훈의 몫이었다.

특히 결혼 허락을 받고 난 다음이 최절정이었다. 왜 그렇게 중요한 일을 지금까지 입 다물고 있었냐고 말이다. 그렇게 대단한 집안과는 안 엮이는 거라고 누누이 말하지 않았냐고도 했다.

다행히 전화로 들을 수 있는 잔소리에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에는 이왕 이렇게 된 거, 어른들에게 이쁨받고 잘 살라고 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지난번에 가족들끼리 인사를 하기 위해 만났을 때도, 그리고 이번에도 같은 소리를 했다. 자식들이 잘되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평범한 잔소리였다. 

확실히 거리가 멀어진 만큼 서로의 간섭도 줄어들었다는 게 체감되었다. 이제 다들 저마다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었다. 동생은 결혼해서 미국에 정착했다. 새로 사귀는 사람이 생겼다는 어머니는 제2의 인생을 준비하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시원섭섭한 것이 기분이 이상했다.

채훈은 반사적으로 이 자리에 없는 강수찬을 떠올렸다. 강수찬이 사망한 것은 지난 6월의 일이었다.

채훈과 승건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서로의 집안 어른들과 가족들끼리 모이던 자리에 강수찬도 참석했다. 그리고 그는 다음날 클럽에서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친구의 차에 탔다가 사고를 당했다. 그의 친구는 만취 상태로 운전을 하다가 그대로 전봇대를 들이박았다. 안전벨트도 매지 않았던 강수찬은 그 자리에서 즉사해 버렸다.

인연을 끊은 강수찬과는 그동안 개인적인 연락 한 번 하지 않았다. 그래도 가족의 죽음은 슬펐다. 만약에 강수찬이 죽지 않고 이 자리에 앉아 있다면 제대로 대화조차 하지 않았을지도 몰랐지만 지금은 죽은 사람에 대한 기억은 좋은 것만 남았다.

생각을 이어가다 보니 감상적인 기분에 빠지고 말았다. 채훈은 일부러 뺨을 문지르며 정신을 차렸다.

그사이에 퍼스트 웨딩 댄스가 끝났다. 하객들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새신랑들을 향해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채훈 역시 마찬가지였다.

인사를 한 새신랑들이 퇴장하자 분위기가 전환되었다. 사회자가 이제 축사가 있을 거라고 알려왔다. 동시에 웨이터들이 일사불란하게 나타나서 빈 잔에 샴페인을 채웠다. 신랑의 할아버지가 연회장 가운데 서서 부부의 행복을 빌어주며 잔을 들어 올렸다.

채훈 역시 강영환과 배우자의 행복을 빌어주며 샴페인을 마셨다. 기포가 보글거리는 황금색 샴페인은 복숭아와 살구 향이 나면서 꽤나 맛있었다.

“승건아. 이거 마셔봐. 맛있어.”

승건에게 슬쩍 몸을 기울인 채훈은 샴페인을 권했다. 승건이 순순히 샴페인을 조금 마시고는 내려놓았다.

“써. 향기는 괜찮지만.”

술을 마시지 못하는 승건의 평은 가차 없었다. 미각이 돌아왔어도 승건은 여전히 적게 먹었다. 맛에도 민감했다. 술은 거의 입에 대지 않았다.

채훈의 작은 소망 중의 하나는 승건과 마주 앉아 맥주를 캔으로 마시는 일이었다. 소망은 영원히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채훈은 그러려니 했다. 승건이랑 같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이 있었다.

같이 살기 시작한 지 4개월이 넘었다. 매일 같이 생활하자 그에 대해 모르는 것을 많이 알게 되었다.

적게 먹기는 했지만 편식은 없었다. 채소주스는 끔찍하게 싫어하면서도 생채소는 곧잘 먹었다. 잠귀는 밝은 편이었다. 그리고 전에 없던 잠버릇도 하나 생겼다. 예전에는 반듯이 누워 자던 녀석이 최근에는 채훈을 꼭 껴안고서야 잠이 들었다.

그리고 꾸준하고 인내심도 강했다. 채훈이 스쿼시에 익숙해질 수 있을 때까지 몇 달을 끈질기게 가르쳤다. 어설프게나마 둘이서 게임을 할 수 있게 되자 승건이 활짝 웃으면 좋아했다.

오늘 밤에 덮쳐야겠어.

승건의 사랑스러운 점을 떠올리던 채훈은 엉뚱한 결론을 내렸다. 장거리 이동에 행사에 신경 쓰느라 그간에는 가볍게 만지는 것이 다였다. 하지만 오늘로 결혼식은 끝났으니까 이제 상관없었다. 내일이면 열네 시간 동안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가야 헸지만, 그건 내일 문제였다. 오후 4시 비행기니까 쉴 수 있는 시간은 충분했다.

그렇게 마음먹은 채훈은 자리에 앉았다. 이제는 저녁 식사 시간이었다. 식전빵과 샐러드, 그리고 샴페인과 함께 와인도 잔에 채워졌다.

채훈은 와인을 길게 들이켰다. 과감한 밤을 위해서는 술이 필요했다.

* * *

10월의 서울 하늘은 오랜만에 청명했다. 붉은 벽돌로 된 높은 담장에는 가을 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었다. 대문이 열리고 검은 승용차가 부드럽게 멈춰 섰다.

승건은 재빨리 차에서 내려 창백한 얼굴의 채훈을 부축했다. 멀미 때문에 채훈은 제대로 균형도 잡지 못하고 있었다.

뉴욕에서 인천까지 열네 시간 동안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공항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채훈이 멀미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괜찮다고만 하던 녀석이 나중에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토하지는 않았지만 결국 중간에 한 번 차에서 내려 쉬어야 할 정도였다. 뉴욕까지 수행원으로 따라온 심정민이 약국에서 사 온 멀미약을 먹었지만 채훈의 상태는 여전했다.

승건은 겨우겨우 걷는 채훈을 부축해 거실 소파에 앉혔다. 드넓은 집은 텅 비어 있었다. 정우는 김혜진과 함께 이수진에게 맡겨진 상태였다. 하우스 키퍼 역시 일찍 떠난 탓에 내부는 조용했다.

캐리어를 옮겨준 운전기사와 심정민을 배웅한 승건은 부엌에서 시원한 물을 챙겨 와 채훈에게 내밀었다.

“물 마셔.”

“고마워.”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잔을 받아 물을 마신 채훈이 결국 소파에 드러눕고 말았다. 몸을 동그랗게 말고 옆으로 누운 모양새가 애처로워서 승건은 속으로 조용히 혀를 찼다.

“아직도 어지러워?”

“그냥 힘이 없어. 멀미는 모르고 살았는데. 왜 이러는지 몰라.”

“실장님이 그러셨잖아. 피곤해서 그럴 거라고.”

멀미는 사람마다 정도가 달랐다. 그리고 컨디션에 좌우되기도 했다. 승건이 알기로도 채훈은 멀미를 하지 않았다. 오늘 이러는 것은 심정민의 말대로 컨디션 문제일 확률이 높았다.

에너지가 넘치던 녀석이 아이를 낳고 난 후로 체력이 나빠졌다. 제 딴에는 다시 운동을 열심히 하고 있지만 오메가로 발현한 다음이라 근육이 전만큼 생기지 않았다.

승건은 보약이라도 지어 먹여야겠다고 생각하며 부엌에서 포장 초콜릿을 몇 개 챙겨 왔다. 수능 공부를 하는 채훈이 간식으로 먹을 수 있게 승건이 사다 놓은 것이었다. 채훈이 살찐다고 자주 먹지 않아서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채훈에게 먹으라고 주자 이번에도 고맙다고 하면서 냉큼 초콜릿을 먹었다. 단 게 들어가니까 채훈의 얼굴이 대번에 좋아졌다.

“씻을래?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면 나아질 거야.”

“응. 부탁해.”

“물 받아놓고 올 테니까. 좀 쉬어.”

승건은 기꺼이 시중을 자처했다. 어지간해서는 앓는 소리를 내지 않는 녀석이 끙끙거리고 있는 것을 보면 정말 상태가 안 좋다는 의미였다. 2층에 있는 메인 침실의 욕실로 올라가면서 승건은 심정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채훈에게 보약을 지어줘야겠다고 하자 심정민이 단번에 알아들었다. 실력 좋은 한의사를 알고 있다면서 시간을 잡아놓겠다고 했다.

욕조에 자동으로 물을 받아놓은 승건은 다시 1층 거실로 내려왔다. 어느새 채훈은 잠들어 있었다.

승건은 채훈을 깨우는 대신에 소파 끝에 걸터앉았다. 그러고는 가만히 채훈이 잠든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검은색 가죽소파에 대비된 하얀 얼굴에는 피곤의 그림자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2박 4일 동안의 강행군이었다. 승건은 단둘이 하는 짧은 여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가족과 몇 개월 만에 재회한 채훈은 신경 쓸 게 많았다. 특히 제 가족과 친척들 사이에서 의연하게 구느라 고생했다는 것을 승건도 알고 있었다.

채훈의 친인척들은 태화 그룹의 대표이사인 승건을 어려워했다. 대신 상대적으로 만만한 채훈를 찔러보았다. 한 번 받아주기 시작하면 끝이 없으니 처음부터 단호하게 끊으라고 조언했다. 채훈은 조언대로 잘했지만, 대신 뒤에서 여러 욕을 먹었다. 그딴 건 신경 쓰지 말라고 해도 채훈의 성격상 그러질 못했다. 그는 제 사람에게는 약했다.

“쓸데없이 마음만 여려가지고는.”

가볍게 혀를 찬 승건은 조심스럽게 채훈의 뺨에 손등을 대었다. 얼굴은 창백했지만 뺨은 따뜻했다.

채훈이 눈을 감고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온갖 기억이 오버랩되었다. 가장 끔찍한 것은 출산 후 혼수상태에 빠져 있던 때였다. 미쳐 있었던 그때의 감정이 되살아났다. 믿지도 않는 신에게 빌었다. 제발 살아 있어달라고 말이다.

서늘하고 무서운 감각이 발밑에서부터 스멀스멀 기어올라 왔다. 승건은 본능적으로 햇살의 향기를 맡기 위해 몸을 숙였다. 채훈의 목덜미에 코를 묻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채훈이 무의식적으로 발산하는 페로몬향기와 함께 그에게 잔뜩 묻어 있는 자신의 페로몬향기가 동시에 맡아졌다.

먼 여행을 대비해 채훈의 전신에 잔뜩 마킹을 해두었다. 강영환의 상대인 스티븐 첸이 알파였기 때문인지 결혼식장에는 알파가 몇몇 보였다. 대부분은 채훈에게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세상에는 룰을 지키지 않는 놈들이 꼭 있었다. 다른 알파의 페로몬을 뒤집어쓴 오메가만 노리는 이상한 성격의 알파도 존재했다. 그중에 한 명이 채훈에게 접근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훈은 강영환이 결혼하는 상대 집안의 친척에게 친절하게 굴었다.

승건은 필사적으로 연차를 써서 채훈과 함께 미국으로 향한 스스로의 선견지명을 칭찬했다.

채훈의 페로몬은 무척이나 매력적이었다. 주관적인 생각이지만 채훈이 마음만 먹는다면 어지간한 알파는 다 유혹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그런 일이 일어나게 놔둘 생각이 없었다. 그전에 채훈을 아무도 볼 수 없는 곳에 가둬버릴 테니까 말이다.

위험한 상상에 승건은 쓴웃음을 삼켰다.

각인한 알파의 집착은 이렇게나 심각했다. 자신은 각인을 했는데, 채훈은 각인을 하지 않아서 더욱 마음을 졸이게 된다.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부정 각인이 풀린 지 겨우 5개월밖에 지나지 않은 상태에서 각인은 욕심이었다.

깊게 숨을 들이쉰 승건은 상체를 일으켜 다시 채훈을 바라보았다. 복잡한 마음과 달리 그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절로 느슨하게 풀어졌다.

기묘한 기분이었다. 이렇게나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감정이라는 게 존재할 줄은 몰랐다. 정신없이 빠져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손에 쥐었는데도 만족스럽지 못했다. 곁에 있어도 안타까웠다. 결혼을 하면 나아질 줄 알았는데, 더 심해졌다.

“큰일이군.”

자조적으로 중얼거린 승건은 채훈의 작게 벌어진 모양 좋은 입술에 시선을 뺏겼다. 아니라는 것을 아는데도 채훈의 페로몬향기가 유혹의 의미로 다가왔다. 본능적으로 다시 몸을 숙여 입술을 맞댔다.

가볍게 채훈의 아랫입술을 물었다가 슬쩍 혀를 밀어 넣었다. 조금 전에 채훈이 먹었던 초콜릿 맛이 오묘하게 느껴졌지만, 곧 익히 알고 있는 달콤함이 번졌다.

곤히 잠든 사람에게 할 짓이 아니라는 자각은 있었다. 그래도 한 번 시작하자 조금만 더, 라는 욕심이 생겨서 멈출 수가 없었다.

“……어……?”

혀를 빨자 채훈이 잠에서 깼다. 승건은 아쉬운 마음에 목구멍 깊숙이 혀를 넣어 핥고는 입술을 뗐다.

“깼어?”

“……어, 응.”

채훈이 어설프게 대답하며 눈을 깜빡거렸다. 그러다 무슨 상황인지 이해를 했는지 팔을 뻗어 안아달라는 몸짓을 했다. 신뢰하는 사람에게만 보여주는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승건은 작은 감동을 느끼며 채훈을 가볍게 안아 일으켜 세웠다.

“씻을 수 있겠어? 더 잘래?”

“왜, 키스를 하다 말아?”

“깼으니까.”

“깨라고 키스한 거야? 다른 마음은 없고?”

아직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속삭인 채훈이 그대로 입술을 맞대 왔다. 승건은 거부하지 않았다. 가볍게 시작된 키스는 곧 진해졌다.

혼인신고를 하고 같이 살기 시작하자 많은 것이 달라졌다. 특히 초반에는 서로 눈만 마주치면 덤벼들었다. 흔히 금실 좋은 신혼부부들이 그러듯이 말이다.

채훈은 욕망에 충실한 편이었다. 한계를 넘지 않은 선에서 무리 없이 즐기는 것을 좋아했다. 오메가로 발현한 후에 느끼는 쾌락이 이상하다며 몇 번 말하기는 했지만 성향이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처럼 한 번 불붙으면 꽤나 적극적으로 굴었다.

승건은 키스만 하고는 채훈을 2층 욕실로 올려보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채훈의 손이 옷자락을 파고들며 맨살의 등을 쓸어 오는 바람에 이성이 흔들렸다. 훅 하고 열이 머리까지 치밀어 올랐다. 겨우 입술만 살짝 뗀 승건이 속삭였다.

“씻어야지.”

“나중에 해도 돼.”

이번에는 채훈이 입술만 맞대는 것이 아니라 페로몬까지 풀어버렸다. 승건은 채훈에게서 오메가의 페로몬이 매혹적인 유혹이라는 것을 배웠다. 각인까지 해버렸기 때문에 어지간한 인내심이 아니라면 버틸 수가 없었다. 물론 지금은 채훈의 유혹에 순순히 넘어갔다.

승건은 채훈이 약한 곳을 모두 알고 있었다. 등이 민감한 편이라 척추뼈를 따라 더듬으면 간지럼을 타면서 자지러졌다. 유륜을 긁어주는 것도 좋아했다. 오메가로 발현하고 난 다음에는 구멍을 직접 자극하는 것으로 제일 많이 느꼈다. 그래서 전희에 공을 많이 들였다.

승건은 채훈을 소파 위에 쓰러뜨리면서 키스를 퍼부었다. 혀를 얽고 빨면서 니트 아래로 손을 집어넣어 날씬한 배를 쓸었다. 뾰족하게 솟은 유륜을 긁자 채훈이 발발 떨었다.

채훈이 빨리 하라며 등을 긁어댔지만 승건은 서두르지 않았다. 차근히 채훈을 흥분시키면서 바지를 벗겼다. 덜덜 떨리는 채훈의 허벅지를 붙잡아 벌리고는 벌써 흠뻑 젖어버린 구멍에 검지와 중지를 밀어 넣었다. 손가락이 델 듯이 뜨거운 안은 엄청나게 조여들며 손가락을 삼켰다.

“으읏…….”

허리를 들썩이며 몸을 떤 채훈이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한 손으로 가렸다. 흥분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 하는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승건은 채훈의 손을 치우면서 손가락을 구부려 본격적으로 안을 긁어댔다.

“으읏. 아. 아아……. 흣.”

눈을 꼭 감은 채훈이 기어코 억눌린 신음을 내뱉었다. 오메가로 발현한 이후 채훈은 뒤로 더 잘 느꼈다. 손가락만 쑤셔도 허리를 흔들며 졸라댔다. 아주 가끔은 손가락만으로 절정에 이르기까지 했다. 하지만 승건은 적당히 쾌락의 완급을 조절했다.

언젠가 채훈이 말했던 것처럼 자신의 취향은 고약한 편이었다. 자신에게 깔린 채훈이 자지러지며 울먹거리는 것을 좋아했다.

지금도 그랬다. 채훈의 아이보리색 니트는 가슴 위까지 밀려 올라간 탓에 부어오른 유륜이 눈에 띄었다. 벌거벗은 긴 다리는 소파 등받이에 걸린 채 떨렸다. 얼굴은 물론이고 목덜미까지 벌겋게 달아오른 채 어쩔 줄 몰라 하며 쾌락에 허덕이는 모습은 도착적이기까지 했다.

쾌락에 젖은 눈으로 간간이 자신을 원망스럽게 노려보는 눈빛에 열이 훅 올랐다.

“이제, 이제 넣어……. 하읏. 이제 넣어.”

채훈이 승건의 어깨를 쥐어뜯듯이 움켜쥐었다. 승건이 봐도 채훈은 한계였다. 구멍에서는 애액이 줄줄 흐르고 잔뜩 발기한 성기는 프리컴으로 젖어 있는 상태였다. 거기다 페로몬도 엄청났다.

승건은 안을 한 번 크게 휘저은 다음에 손가락을 빼내고,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니트와 셔츠를 벗었다. 기대에 젖은 채훈의 시선을 느끼며 벨트와 버클을 풀고 지퍼를 내렸다. 이미 흥분할 대로 흥분한 상태였다. 메마른 입술을 본능적으로 혀로 적시며 드로어즈를 끌어내리자 팽팽하게 발기한 성기가 툭 튀어나왔다.

“나도 이제 한계야.”

“응. 알아. 그러니까 빨리……. 아……. 읏.”

재촉하는 채훈의 발목을 잡아 든 승건은 그대로 구멍 안으로 성기를 밀어 넣었다. 진입은 느렸지만 거침없었다. 몇 번의 작은 치받음 끝에 성기를 뿌리 끝까지 채워 넣을 수 있었다. 채훈이 신음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덜덜 떠는 것을 느끼며 승건은 낮게 숨을 토해 냈다. 삽입만으로 눈앞이 흐려지려고 했다.

“팔을 감아.”

승건은 상체를 숙여 가죽시트를 꽉 부여잡고 있는 채훈의 손을 자신의 목에 두르게 했다. 모든 자극에 채훈은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긴 다리를 허리에 감을 수 있도록 사제를 바꿀 때도, 달큼한 숨결을 삼키며 입술을 머금을 때도 자지러졌다. 그리고 그때마다 채훈의 내부가 요동치며 성기를 조여댔다.

이제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승건은 채훈의 혀를 빨며 아래를 강하게 박았다.

*

*

몇 번의 사정 끝에 소파를 엉망으로 만들고 나서야 섹스가 끝났다. 저녁은 외식하기로 했기 때문에 두 사람은 빠르게 뒤처리를 하고는 외출 준비를 마쳤다.

시간을 보내기 제일 좋은 곳은 대형 쇼핑몰이었다. 월요일 오후였지만 쇼핑몰은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일이 바쁜 승건이었지만 그래도 주말이면 채훈과 단둘이 외출을 하려고 노력했다. 단순히 외식만 하고 끝낼 때도 있었고, 밤바람이 부는 강변을 산책하거나, 혹은 평상복을 입고 쇼핑몰이나 백화점을 돌아다니곤 했다.

데이트 코스 중에 가장 많이 찾는 장소는 바로 서점이었다. 엄청난 속도로 문제집을 풀어나간 채훈은 대부분의 책을 인터넷 서점에서 구입했다. 그러나 때로는 직접 보고 사면서 분위기를 전환하려고 했다.

수능이 한 달 정도 남은 시점이었다. 서점에는 한 달, 파이널, 따라잡기, 3년 기출 등등의 제목을 단 문제집이 잔뜩 깔려 있었다. 승건은 기출 문제집을 신중히 살피는 채훈을 내버려 두고 서점을 한 바퀴 돌았다.

나이가 들면서 유명한 베스트셀러만 읽던 승건은 채훈과 함께 서점에 들를 때면 마음이 가는 대로 책을 한 권씩 집어 들었다. 그러나 오늘 승건이 발걸음을 멈춘 곳은 잡지 코너였다. 얼마 전에 준공식에 참석했던 정규완의 사진이 커다랗게 박혀 있는 경제 주간지가 아니라 웨딩 잡지가 승건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바로 하루 전에 있었던 채훈과의 대화를 떠올린 승건은 애매하게 입매를 당겼다. 채훈은 결혼식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피로연 도중이었기 때문에 승건은 조용히 물러났다. 그 이후로 적당히 취해 과감해진 채훈과 침대에서 뒹구느라 결혼식에 대해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리고 다음 날에는 귀국 준비로 잠시 잊었다.

“결혼식이라.”

승건은 사랑과 결혼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불행했던 부모님의 결혼생활의 영향을 받았다. 주위에서 보고 자란 것도 돈과 권력에 좌우되는 정략결혼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결혼식이라는 겉치레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둘의 결합을 법적으로 등록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겼다. 채훈 역시 결혼식에 대해 의미를 두지 않아서 둘이서 조용히 기념일을 챙긴 것이 전부였다.

그러다 강영환의 결혼식을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화려하고 요란한 결혼식을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채훈에게 하얀 턱시도를 입혀보고 싶은 마음이 제일 컸다. 퍼스트 웨딩 댄스를 추자고 하면 녀석은 손발이 오그라들겠다면서 질색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것조차 좋았다.

자신의 성격이 좋지 않다는 것을 인정한 승건은 웨딩 잡지를 하나 꺼내 들었다. 내용은 대부분 최근 유행하는 드레스와 결혼 콘셉트와 관련된 기사였다. 그것 외에도 드레스와 예물 관련 광고가 많았다. 승건이 눈여겨본 것은 유색 보석으로 된 팔찌였다.

승건은 이번 채훈의 생일에 팔찌를 선물했다. 다이아몬드가 아닌 커다란 루비가 장식된 여성용 예물 팔찌를 받아 든 채훈은 기어코 크게 웃으며 좋아해주었다. 전처럼 팔찌만 차고 섹스도 했다. 그러나 다음 생일 선물로 팔찌는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승건은 알겠다고 대답했지만, 막상 이렇게 보면 생일 선물이 아니라 기념일 선물로 팔찌를 주는 건 어떨까 싶어졌다.

“스위티 웨딩? 아……. 결혼식?”

어느새 채훈이 바로 옆에 다가와 있었다. 문제집 한 권을 손에 든 채훈의 시선이 잡지에 닿았다가 승건을 향했다.

승건은 말간 채훈의 얼굴을 보며 불쑥 물었다.

“정말 생각 없어?”

“응.”

채훈이 너무 담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승건은 이유를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

“이제 와서 하는 거 이상하잖아. 굳이 할 필요성을 못 느끼겠어. 식을 안 한다고 해서 너랑 내가 부부가 아닌 것도 아니고.”

단호한 대답이었다. 바로 며칠 전까지는 승건도 채훈과 같은 입장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닌데 그럴듯한 이유를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그거 구겼으니까 사야겠다.”

“뭐?”

“잡지 구겨졌다고.”

채훈의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숙인 승건은 자신의 손에 들린 웨딩 잡지가 구겨져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무의식중에 손에 힘이 들어간 모양이었다.

“줘봐. 내가 계산하고 올게.”

승건은 채훈이 내미는 손에 잡지를 넘겼다. 멍한 기분으로 채훈이 계산대로 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럴 때면 자신에게 말재주가 없는 것이 통탄스러웠다.

* * *

하늘은 어제의 화창함을 잊은 듯 아침 일찍부터 비를 뿌려댔다. 오후가 되어도 도시는 여전히 비에 젖어가고 있었다. 넓은 사무실에 앉아 회색빛 도시의 전경을 바라보고 있던 승건은 날씨만큼이나 우울한 감상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였다.

정확히는 바보 멍청이가 된 기분이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하얀 턱시도를 입은 채훈의 모습을 보면 좋겠다는 가볍고도 간단한 바람이었다. 춤을 추면 좋겠다고도 생각했지만 진지하지는 않았다.

그러다 채훈에게 두 번이나 거절당하자 더 욕망이 커져 버렸다. 채훈에게 하얀 턱시도를 입히고 만인 앞에서 부부라고 알리고 싶어졌다. 문제는 자신에게 채훈을 설득시킬 말재간이 없다는 것이었다.

채훈은 고집이 강한 편이었다. 어지간해서는 다 받아주는데, 한 번 아니라고 결정 내린 것을 되돌리기란 어려웠다.

오래전에 건물을 안 받겠다고 선언한 녀석은 결혼을 하고도 여전했다. 결혼 선물로 무슨 빌딩이냐고 고개를 내저었다. 승건은 채훈에게 배운 대로, 꼭 선물로 주고 싶다고 간절히 말했지만 이번에는 먹히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승건에게는 방법이 없었다. 강경하게 나가면 채훈 역시 강하게 반발했다.

하얀 턱시도를 입은 네가 보고 싶다는 욕망은 스스로가 생각해도 터무니없는 이유였다. 결혼식을 하지 않겠다고 두 번이나 거절한 채훈의 마음을 되돌릴 어떤 것이 필요했다. 하지만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혼인신고 1주년 기념으로 웨딩 사진만 찍는 것은 어떨까 하고 대안을 떠올렸지만, 그건 승건의 욕망을 충족시키지 않았다.

“헛살았어.”

승건은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별것 아닌 고민거리였다. 그냥 포기하고 나중을 기약하면 그만인데, 한 번 집착하기 시작하자 쉽게 놓아지지가 않았다.

그래도 지금은 아니었다. 마음은 급했지만, 결혼식에 관해서는 채훈이 수능을 치고 난 다음에 다시 이야기하는 게 맞았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승건은 모니터 화면에 시선을 주었다. 영문으로 된 보고서에는 강영환과 그의 배우자를 조사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보고서를 읽다가 자연스럽게 결혼식에 대해 떠올리는 바람에 이룰 수 없는 욕망에 대한 고뇌에 빠졌다.

몇 줄 더 내용을 읽던 승건은 손끝으로 가볍게 책상 위를 두드렸다. 강영환의 결혼 소식에 승건은 가장 먼저 사람을 시켜 뒷조사부터 시켰다. 강영환의 상대가 사기꾼이 아닌지 알아보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강영환의 결혼 상대인 스티븐 첸은 중국계 미국인이었다. 4대 전에 미국에 정착한 그의 집안은 미국 동부에서 의류를 배달하는 운송 회사를 운영 중이었다. 회사는 꽤나 건실했다. 세무도 투명한 편이었다. 고조부와 증조부가 차이니즈 마피아와 연이 닿아 있었던 것 같지만 지금은 별다른 교류가 없었다.

문제는 스티븐 첸이었다. 스티븐 첸은 전형적인 바람둥이 알파였다. 약혼녀 둘과 모두 그의 바람기 때문에 헤어졌다. 그쪽 집안에서는 강영환이 아들 단속을 단단히 해주기를 바라고 있는 듯했지만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스티븐 첸은 며칠 전까지도 애인들을 정리하지 않았다. 그는 가정을 꾸리지 않으면 지원을 끊겠다는 조부의 강경한 태도에 서둘러 결혼을 했다는 것이 2차 보고서까지의 내용이었다.

오늘 도착한 3차 보고서를 보면 강영환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는 것 같았다. 혼전 계약서의 내용을 보면 스티븐 첸의 외도가 이혼 조건이 될 수 없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보고서에 첨부된 혼전 계약서를 확인한 승건은 속으로 혀를 찼다. 강영환이 채훈에게 경쟁심을 불태우고 있음을 눈치채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채훈이 우성 오메가로 발현하고 결혼까지 하자 그 정도가 심해졌다. 그의 질투가 눈을 멀게 했다. 강영환이야 가장 좋은 남자를 고른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몇 년 안에 빈털터리로 이혼할 확률이 높았다.

과도한 욕심이 스스로를 집어삼키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강영환은 그걸 몰랐다. 마치 강수찬처럼 말이다.

승건은 강수찬에게 많은 것을 주었다. 베트남에서 번듯한 사업체를 차리고 사장님 소리를 듣게 만들었다. 비록 경영권이 거의 없는 이름뿐인 사장 수준이었지만, 본인은 그걸 몰랐다. 그는 그저 많은 돈을 벌고 쓸 수 있다는 사실에 만족하며 향락에 탐닉했다. 여자와 도박, 그리고 마약에까지 손을 댄 강수찬은 빠르게 망가졌다.

채훈의 결혼 소식에 가장 환호한 것도 그였다. 친구들에게 동생이 재벌가에 시집간다면서 자랑을 해댔다. 그러나 그는 재벌 인척의 덕을 보지 못하고 음주 운전 사고로 죽어버렸다. 부검 소견을 보니 강수찬은 물론이고 운전을 한 강수찬의 친구 모두 술과 마약에 절여져 있었다고 했다.

강수찬의 사고 소식에 신혼여행으로 제주도에 가 있었던 채훈과 승건은 그대로 서울로 돌아와 장례식에 참석해야 했다. 채훈은 제 형의 죽음에 애석해했지만 승건은 자업자득이라고 여겼다.

그런 의미에서 형제들의 어머니인 조미혜가 가장 현명했다. 그녀가 사귀는 남자는 꽤나 건실한 사업가였다. 조금 심심한 성격이었지만 평판도 좋았고 괴벽도 없었다. 둘의 사이는 꽤나 좋은 편이었다. 남자가 조미혜에게 결혼 이야기를 꺼냈지만 그녀는 섣불리 응하지 않았다. 신중함과 조심성은 그녀의 장점이자 단점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사고 칠 확률은 지극히 낮았다.

승건은 혈연에 큰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다. 남보다 못한 사이는 흔했다. 그는 욕심만 부리는 인간들을 채훈에게서 멀리 떨어트려 놓았다. 그들이 원하는 것을 손에 쥐여 주고는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낭떠러지로 걸어가는 것을 굳이 말리지도 않았다.

그나마 그들이 채훈의 가족이기에 조금 번거롭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수단을 썼다. 아니었다면 좀 더 과격한 방법이 동원되었을 것이다.

냉정하게 채훈을 둘러싼 인간관계를 돌이켜본 승건은 입매를 당겼다. 마음 약한 녀석이 독해지기를 기다리기보다는 자신이 직접 컨트롤하는 게 나았다.

그렇게 정리한 승건은 보고서를 삭제해 버렸다.

다시 업무에 집중하려는데 때마침 책상 위에 올려둔 휴대폰이 울렸다. 휴대폰 목록에 저장되어 있지 않은 번호는 비서실이나 심정민에게 넘어갔다. 직접적인 연락이 오는 곳은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였다. 승건은 당장에 메시지를 확인했다. 채훈이었다.

[나 이제 집으로 돌아가. 오늘 많이 늦어?]

평범한 일상 메시지였다. 승건은 시간을 확인했다. 자신과 채훈이 미국에 가 있는 동안에 외할머니가 정우를 돌봐주었다. 오늘 채훈이 정우를 데리러 본가에 갔는데, 지금쯤이면 헤어졌을 시간이었다.

자신도 채훈도 메시지를 자주 이용하는 편이 아니었다. 그래도 채훈은 가끔씩 집으로 돌아간다고 알렸다. 심심할 때 종종 그랬는데,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서로의 스케줄은 일주일 단위로 공유했다. 채훈은 특별한 스케줄이라고 할 게 없었다. 하지만 승건의 경우 출장도 종종 있었고, 늦은 시간에 만날 사람도 적지 않았다. 오늘은 외국에서 온 귀빈들과의 미팅과 만찬 스케줄이 있었다. 만찬 스케줄을 알고 있는 채훈이 많이 늦냐고 묻는 것이, 뭔가 있었다.

승건은 메시지를 보내는 대신에 전화를 걸었다.

―응. 승건아.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랬지? 차 탔어?”

―조금 있으면 도착할 거야.

“오늘 많이 늦을 것 같은데. 무슨 일이야?”

―그게……. 할 말이 있는데, 많이 늦으면 못 기다릴 것 같아서. 잠이 모자라거든.

채훈이 가볍게 말하기는 했다. 하지만 할 말이 있다고 하면 승건은 당연히 조바심이 날 수밖에 없었다.

“심각한 거야?”

―아니. 전화상으로는 할 이야기가 아니라 그래.

승건은 채훈이 한순간 머뭇거렸다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래도 당장에 말하라고 재촉하는 대신에 집으로 돌아갈 시간을 가늠했다.

“아마 자정 전에는 돌아갈 거야. 더 늦으면 내가 연락할게.”

―응. 알았어.

통화는 짧게 끝났다. 승건은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살짝 인상을 썼다. 심각하지 않은 할 말이란다. 외할머니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한 연락이라 더욱 의미심장했다.

결혼이라는 것은 당사자들만의 결합이 아니었다. 특히 승건의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는 많은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승건네 집안의 최고 어른이라고 할 수 있는 정규완은 채훈에게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처음 만난 채훈에게 너희들끼리 잘 살면 그만이라는 덕담 아닌 덕담을 하고 끝났다. 그 이후로도 딱히 얼굴을 보겠다고 한 적이 없었다.

반대로 이수진은 채훈을 좋아했다. 그녀는 기억과 미각, 후각을 잃고 건조하게 사는 손자를 늘 걱정했다. 그런데 연애를 한답시고 난리를 치다가 채훈을 만나 정착을 했으니 당연히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증조할머니가 된 것도 감격스러워했다.

시집살이를 시키는 시할머니가 될 수는 없다며 이수진은 아주 조심스럽게 채훈과 접촉했다. 직접적으로 연락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선물은 승건과 심정민의 손에 들려 보냈다. 따로 정우와 채훈을 만난 것도 딱 한 번뿐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뭔가 달랐던 모양이었다.

승건은 당장에 외할머니에게 전화부터 걸었다. 많이 아는 것은 힘이었다. 또한 만약을 위한 최소한의 대비이기도 했다. 바보 같은 실수로 채훈을 잃을 뻔한 기억이 승건을 더욱 집요하게 만들었다.

연결음이 길게 이어지는 동안에 승건은 자신이 의처증에 걸린 남편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인정했다. 세상 무엇보다 채훈이 중요했다.

*

*

모든 일정을 마친 승건이 집으로 돌아온 시각은 자정 직전이었다.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불이 환하게 켜진 집 안은 조용했다. 정우와 정우를 돌보는 김혜진은 이미 잠들고도 남은 시각이었다. 그러나 승건이 의아한 것은 따로 있었다. 기다린다고 했던 채훈이 없었다.

이제 출발한다는 메시지를 보냈을 때 채훈은 알았다는 답장을 보냈었다. 평소라면 문이 열리기도 전에 현관에서 마중 나와 있을 녀석의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1년도 훨씬 전의 기억이 승건을 다급하게 만들었다.

“설마…….”

승건은 당장에 신발을 벗고 거실로 향했다. 승건을 기다릴 때면 채훈은 거의 대부분 현관과 가장 가까운 거실에서 앉아 공부를 하곤 했다.

혹시라도 거실에 없으면 어쩌나 하는 무서운 가정은 몇 초 만에 해결되었다. 탁자 위에 채훈이 엎드린 채 잠들어 있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승건은 천천히 채훈에게 다가가서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정신없이 잠든 모습이 안타깝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고, 또 사랑스러웠다. 그러나 잠시 동안 아득함을 느낀 만큼 불규칙적으로 뛰는 심장을 다독여야 했다.

또다시 채훈이 사라지는 것은 상상이 가질 않았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세상에 절대 불가능한 일이란 없었다.

진짜 어딘가에 가둬놓아야 하나 위험한 생각을 하며 승건은 채훈을 흔들어 깨웠다.

“채훈아. 일어나. 여기서 이러지 말고, 침실로 가서 자.”

몇 번 흔들자 채훈이 화들짝 놀라며 깨어났다. 채훈은 바른 생활 사나이였다. 자정 전후로 잠들었고 아침에는 6시쯤에 깼다. 깊게 잠드는 편이라 정신을 차리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아니나 다를까 눈을 깜빡이는 채훈은 잠에 취해 있었다.

“……어, 승건이 왔……네.”

“그래. 나야. 이러지 말고 침대로 가자.”

“아니. 할 말이 있어. 잠시 여기 있어봐. 물 마시고 올 테니까. 정신 좀 차려야겠어.”

채훈이 승건의 부축을 뿌리치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승건은 얌전히 소파에 앉아 기다리는 대신에 채훈을 따라 움직였다.

“기다리라니까?”

“나도 물 마시려고. 목말라.”

“만찬이 있었댔지. 술 마셨어?”

“와인만 조금.”

승건은 순순히 대답했다. 외국 귀빈을 모시면서 와인을 반 잔 마셨다. 미각이 없을 때는 밍밍한 맹물처럼 느껴졌던지라 두어 잔을 마셔도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하지만 독한 알코올 맛이 느껴지는 지금은 몇 모금 마시는 것도 힘들었다. 술은 마실수록 는다고 하지만 자신은 그럴 것 같지 않았다.

채훈이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내 잔을 채웠다. 승건도 채훈도 모두 물을 마셨다.

“할 이야기라는 게 뭐야?”

물을 몇 모금 마신 승건은 채훈이 잔을 모두 비울 때까지 기다렸다가 운을 뗐다. 빙빙 돌려 말하지 않는 성격 때문에 핵심부터 물었다.

빈 잔을 든 채훈이 잠시 미적거렸다. 빈 잔을 내려다보다가 승건에게 시선을 주면서 애매하게 웃었다.

“그게……. 좀 미안한 일이 있어서.”

“미안한 일?”

“오늘 할머니 만났잖아. 정우 데리러 가면서.”

“그래.”

“그런데 할머니께서……. 어, 음. 그러니까 빌딩을 선물로 주신다는 거야. 양도 계약서를 내밀고는 사인하라고 하시고. 처음에는 거절했거든. 그런데 자꾸 권하셔서 사인해 버리고 말았어. 할머니가 너한테 비밀로 하라고 하셨지만……. 아무래도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나중에 네가 알게 되면 화낼 테니까. 아까 말했다시피 미안하기도 하고. 건물은 안 받겠다고 탕탕 소리쳤는데. 결국 이렇게 되어버렸으니까.”

조곤조곤 말을 잇던 채훈이 난처한 표정을 짓는 바람에 승건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외할머니에게서는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채훈이랑 간단한 쇼핑을 하고 헤어졌다고만 했을 뿐이었다.

승건은 외할머니를 이해했다. 자신 몰래 채훈에게 뒷주머니를 채워주시려고 한 것이었다. 그리고 비밀로 해야 할 걸, 채 하루도 지나기 전에 밝힌 채훈이 어떤 마음인지도 알았다. 지금껏 건물은 안 받겠다고 강경하게 굴던 녀석이었다. 그런데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서 먼저 받아버렸으니 미안해할 만도 했다.

거기까지 생각을 이어가던 승건은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싸울 원인을 원천에 없애버린 것은 채훈다웠다. 미리 미안하다고 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모습은 왠지 힘이 빠진 강아지처럼 보여서 속이 간질거렸다.

뭉클한 감동과 별개로 이성적인 머리 한쪽으로는 이게 기회라는 것을 깨달았다.

“할머니한테 받았다면, 내가 주는 것도 받을 수 있겠네.”

“어…….”

“받아. 이번에도 거절하면 많이 섭섭할 거야. 네가 미안해하는 만큼.”

승건은 멋진 말재주가 없었다. 그래도 이럴 때면 솔직한 게 좋다는 것쯤은 알았다. 섭섭하다고 하자 채훈이 다시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제 뺨을 문질렀다.

“왜 자꾸 뭘 주려고 하는지 모르겠어.”

“용돈이 생긴다고 생각해.”

“할머니께서도 같은 이야기를 하셨어. 그래도 15층짜리 빌딩 임대료가 용돈이라니. 너무 부담스럽잖아. 내가 돈 쓸 일이 어디 있다고.”

채훈의 혼잣말에 가까운 투덜거림에 승건은 속으로만 웃었다. 돈 쓸 일이야 차고도 넘쳤다. 유행하는 옷을 걸치고, 값비싼 명품으로 치장하고, 멋진 차를 타고 다니려면 임대료만으로는 오히려 부족했다. 사치와 거리가 먼 채훈이니까 부담스럽다고 하는 것이었다.

승건은 돈이란 많을수록 좋다고 설명하지 않았다. 대신에 확답을 받기 위해 다시 물었다.

“받을 거지?”

“응. 가지고 있으면 나중에라도 쓸 일이 있겠지.”

한 번 결정을 내린 채훈은 망설임이 없었다. 승건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할머니가 다른 말은 안 하셨어?”

승건은 혹시나 하고 물었다. 외할머니가 채훈을 예뻐해도 그냥 빌딩을 줄 것 같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싱크대에 빈 잔을 올려두던 채훈이 애매하게 웃었다.

“별거 아니야. 이미 다 알고 있던 거였어. 네가 할아버지 뒤를 잇기 싫어한다는 거. 할아버지가 내심 네가 해줬으면 하고 바란다는 것은 처음 들었어. 할머니께서 할아버지랑 네가 싸울 수도 있는데, 그때가 되면 내가 네 편을 들어줘야 한다고 하시더라.”

승건은 채훈의 설명에서 외할머니의 신중한 성격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하지만 승건은 이윽고 다른 생각에 빠져들었다.

외할머니의 호소에 한국에 온 것이 2년을 꽉 채워 넘겼다. 외할아버지는 회복했고 복귀는 곧이었다. 최소 2년은 걸릴 거라는 예상이 들어맞았다. 물론 외할아버지가 자신을 쉽게 포기하지는 않겠지만,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할 계획이었다.

그러다 문득 궁금해졌다.

“너는 어때?”

“뭘?”

“태화 그룹의 안주인이 되는 거 말이야.”

예상 못 한 놀라운 이야기를 들은 듯 채훈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생각 없어. 절대, 그런 거 안 바라. 안주인이고 뭐고, 되고 싶은 마음은 요만큼도 없어.”

열심히 손을 내저으며 격렬하게 거절하는 채훈의 모습에 승건은 웃었다. 채훈이 원한다면 태화 그룹을 삼키는 것도 괜찮았다. 하지만 저렇게 격렬하게 싫어한다면 별수 없었다.

“그럼 어쩔 수 없고.”

“지금 놀린 거지?”

“아니. 네가 바란다면 할 거야.”

“확실하게 말하는데, 내게서 이유를 찾지 마. 내가 아니라 네가 원해서 해야 하는 거야.”

“그래. 나도 싫어.”

서로가 싫다니 의견은 일치했다. 승건은 홀가분했다. 드디어 채훈의 손에 건물을 하나 쥐여줄 수 있어서 기뻤다. 이제 남은 것은 결혼식뿐이었다. 이건 또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하나 하고 있는데 채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나도 궁금한 게 있는데.”

“말해 봐.”

“할아버지 뒤를 잇지 않겠다는 건 예전부터 말했고. 대표이사도 그만둘 거잖아? 그러면 그다음에는 어떻게 할 거야? 한국에 계속 있는 건지, 아니면 미국으로 돌아갈 건지 궁금해서. 너한테 이것저것 많이 듣기는 했는데,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에 대해서는 이야기한 적이 없더라고. 결혼한 지 5개월이나 됐는데. 음……. 나야 수능 치고 나서야 무엇을 할지 정할 거긴 한데. 그래도 네가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 알고 싶어. 지금 당장 말 안 해줘도 돼. 부엌에서 이러려니까 웃기다.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우선은 씻어. 피곤할 텐데.”

진지하게 말을 하던 채훈이 급하게 화제를 전환했다. 승건은 곧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에 반성했다. 대표이사를 그만둘 거다, 태화 그룹을 물려받지는 않을 것이다, 등의 단편적인 이야기는 했었다. 하지만 채훈의 말대로 미래 계획에 대해 제대로 의논한 적은 없었다.

승건은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아직 확실하게 정해진 것이 없었지만, 몇몇 계획은 세워두었다. 채훈에게 그걸 말하는 게 옳았다. 그것도 사실만 전달할 게 아니라 제대로 잘 설명해야 했다.

“할아버지랑은 예전부터 사이가 안 좋았어. 할아버지가 워낙에 냉담한 성격이셨고, 나도 어려서부터 붙임성이 없었거든. 꼭 그게 이유만은 아니지만, 할아버지 뜻대로 하기는 싫어. 일도 너무 많고.”

“일이 많기는 많지.”

“태화 그룹을 물려받지 않아도 먹고살 만은 해. 너한테 자세히 말은 안 한 것 같은데, 돌아가신 아버지가 서온 제약의 오너셨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 재산을 다 내가 물려받았지.”

“……?!”

채훈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놀랄 만도 했다. 서온은 제약 업계에서 세 손가락에 꼽히는 거대 회사였다.

그 모든 것을 승건이 물려받았다. 주식 외에도 건물과 땅, 예금 등이 고등학교를 졸업하지도 않은 승건의 것이 되었다. 먹고살 만한 게 아니라 평생을 떵떵거리며 살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그 사건이 일어났다. 아직 그때까지 아버지는 살아 있었고, 승건만 없으면 재산은 숙부들이 나눠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숙부들이 눈이 뒤집혔고.”

“몰랐어.”

“거기까지는 말 안 했으니까. 내가 성격이 별로기는 한데, 겉으로 보이는 조건만 따지면 괜찮은 배우자야. 돈도 많고, 얼굴도 이만하면 잘생기고, 몸매도 좋고. 안 그래?”

“잘생긴 건 내가 진짜 인정한다.”

가볍게 농담을 하자 진지하던 채훈이 피식거리며 웃었다. 승건은 채훈이 자신의 얼굴에 진심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채훈은 몇 번이나 말했다. 얼굴 때문에 화를 못 낸다고도 했다. 예전에는 별생각이 없었는데, 채훈을 만나고 나서는 얼굴 잘난 게 다행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한국은 안 떠나. 대표이사는 그만두겠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완전히 손 놓기 힘들거든. 내 동생이 어리다고 덤벼들 인간들이 많아서.”

“대표이사를 그만두면 뭐 할 건데?”

“할아버지랑 이야기를 해봤는데, 아마도 이런저런 일을 도와드리게 될 것 같아. 만약을 위해서. 어쨌든 지금보다는 여유로워지겠지. 아직 확실히 정해지지 않았지만 크게 달라질 건 없을 거야.”

“한국에 있는 건 좋네. 미국에 가면 영어는 자신 없거든.”

“잘하던데.”

꾸준히 영어 공부를 한 듯 채훈은 곧잘 영어를 썼다. 그러나 채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간단한 회화만 가능한 거고. 사실…… 네가 워낙 똑 부러지게 알아서 잘하니까 별생각이 없었어. 그러다가 할머니한테 이것저것 듣다 보니 내가 너무 모르는 것 같더라고. 그래서 그런 거니까. 어……. 음. 나중에 상황 바뀌고 그러면 다시 이야기해 줘.”

솔직하게 말하던 채훈은 겸연쩍은 미소를 지으며 시선을 주었다. 발그레한 뺨이 사랑스러워서 승건은 따라 웃고 말았다.

자칫 마음 상할 수 있는 문제를 아무렇지 않게 해결하는 것은 채훈의 능력이었다. 애정을 기반으로 한 신뢰와 믿음을 자연스럽게 드러냈다. 그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이런 순간에 다시금 알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은 꽤나 운이 좋았다. 채훈이 이런 성격이 아니었다면 오래전에 둘의 사이는 끝장났을 것이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깨달음은 새삼스러웠다.

새로운 약속이 생겼다. 이제 앞으로 미래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사랑해.”

승건의 고백은 뜬금없었다. 자정이 넘은 시각에 조용한 부엌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채훈이 환하게 웃었다.

“고백해도 오늘은 그냥 잘 거야.”

“그런 거 아니야.”

“나도 사랑해. 이제 올라가서 씻어. 나도 여기 정리하고 올라갈 테니까.”

승건은 그러겠다고 대답하는 대신에 세 걸음 거리를 걸어가 채훈을 끌어안았다. 돌발적인 행동에 채훈이 흠칫 놀랐다가 금방 풀어졌다. 뭐냐고 한소리 하면서도 마주 안아 왔다.

따뜻함도, 좋은 향기도, 그리고 품에 안기는 묵직함도 모두 좋았다. 승건은 웃으며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

*

승건은 채훈을 오래 끌어안고 있지 못했다. 얼른 씻으라는 채훈의 재촉을 받으며 움직여야 했다. 샤워를 하고 침실로 들어서자 잠옷으로 갈아입은 채훈이 침대 오른쪽을 차지한 채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채훈이 침대의 오른쪽을 차지한 이유는 별거 없었다. 왼쪽이 욕실과 더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일찍 일어나고 늦게 퇴근하는 승건의 동선을 고려해서 채훈이 오른쪽 자리를 먼저 골랐다.

불은 모두 꺼지고 침대 옆에 있는 수면 등만 켜진 상태였다. 주황색 불빛에 감싸인 채훈의 얼굴에 음영이 두드러졌다. 주황빛이 예쁜 얼굴선은 마치 명화의 한 장면과 닮아 있었다.

승건은 이 순간을 사진으로 찍어서 남겨두고 싶다는 생각을 해버렸다.

동시에 벼락같이 깨달았다. 자신이 진짜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말이다.

“뭐 하고 있어? 얼른 와. 자야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서 있는 승건을 향해 채훈이 베개를 툭툭 두드리며 불렀다. 승건은 홀린 듯 다가가서 자리에 앉았다.

“할머니께서는 매년 연말이 되면 가족사진을 찍는 취미를 가지고 계셔.”

승건이 불쑥 말을 꺼냈다. 충동적인 만큼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서두였다. 보고 있던 휴대폰을 협탁 위에 올려두고는 막 자리에 눕던 채훈이 눈빛으로 무슨 소리냐고 물었다.

“스튜디오도 빌리고, 프로 사진사도 고용하고, 완전 본격적이지. 올해는 너도 참석할 거야. 정우도 같이.”

“어, 응.”

“그렇게 찍은 가족사진이 50장 정도 돼. 한 장, 한 장은 그날의 기록인데, 50년쯤 되니까 역사가 되더라고.”

어렸을 때는 외할머니의 취미가 독특하구나 했다. 나이가 조금 먹고 나서는 외할머니가 원하니까 따르는 것뿐이었다. 그러다가 지난봄에 우연찮게 할머니의 앨범을 보았다.

결혼식에서 외할아버지랑 찍은 사진이 제일 처음이었다. 그다음부터 사진 속의 사람은 한 명씩 늘어나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했다. 때로는 그날에 함께 사진을 찍지 못한 사람의 단독 사진이 따로 덧붙여 있었다. 50년이나 이어진 사진은 외할머니만의 역사였다.

그렇게 외할머니의 추억이 기록이 된 것처럼, 자신도 그러고 싶었다.

단순히 채훈이 하얀 턱시도를 입은 모습을 보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추억을 간직하려는 것이었다. 언젠가 나이를 먹고 사진을 들여다보며 그때 이런 일도 있었지, 하고 반추할 수 있도록 말이다.

생각해보면 웃겼다. 자신의 취향은 외할머니를 그대로 빼닮아가고 있었다.

“그래서 결혼식을 하고 싶어. 사진으로 남겨서 나중에 볼 수 있게. 아니면, 웨딩 사진도 괜찮아.”

차근차근 설명하는 것은 채훈을 따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에는 결국 성격이 나오고 말았다.

승건은 최소한의 물러날 수 없는 선을 제시하며 채훈이 받아주기를 기다렸다. 가만히 시선을 주던 채훈이 눈을 깜빡깜빡거렸다. 마치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되새기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그러다가 자세를 고쳐 바로 누우면서 툴툴거렸다.

“그렇게 말하면 싫다고 못 하잖아.”

“싫어?”

“싫다기보다는 부담스러워서 그래. 네 친척들 면면이 너무 화려하니까.”

“가까운 사람만 초대해서 파티 형식으로 하면 돼.”

“춤은 안 춰. 낯간지럽거든.”

이번에는 채훈이 선을 그었다. 그러나 그건 허락의 의미였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춤을 추지 않아도 할 수 있는 건 많았다.

“식 준비는 내가 할게. 수능 끝나고 적당한 날짜를 잡자.”

“알아서 해……가 아니라, 어떻게 할지 나랑 의논해. 너한테 맡기는 건 불안하거든.”

“불안하다고?”

“무슨 짓을 할지 모르잖아.”

승건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들떠 있었다. 기분대로 했다가는 호텔 연회장을 빌려서 커다란 파티를 열고도 남았다.

“아니라고는 못 하겠군.”

“그러니까. 나 이제 잔다. 누웠더니 진짜 졸려. 자세한 건 내일 이야기해.”

느릿하게 말을 잇던 채훈이 눈을 감았다. 정말로 졸렸던 듯 고른 숨소리를 내며 금방 잠들어 버렸다.

승건은 한참 동안 잠들어 있는 채훈을 내려다보았다. 반듯하게 누워 작게 입을 벌리고 자는 모습은 여전히 귀엽고도 안타까웠다.

“하얀색 턱시도를 입으라고 하면 화를 내려나.”

그날의 한순간이 절로 떠올랐다. 연회장의 메인 장식은 화사한 꽃으로 할 생각이었다. 겨울에도 봄이라고 착각할 수 있게 말이다.

“그것까지는 봐줘.”

채훈에게 나직하게 속삭인 승건은 채훈의 손을 살짝 잡았다. 작은 접촉에 채훈의 손이 움찔거리기는 했지만 깨지는 않았다.

많은 일이 있었다. 그보다 많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너무 평범해서 당연한 일상은 반복된다. 아침에 눈을 떠서 제일 처음 보는 얼굴은 채훈이었다. 밤늦게 집으로 돌아올 때면 채훈의 마중을 기대하게 된다. 너무나도 사소하지만 지금의 삶을 빛나게 해주는 순간은 삶에 스며들었다.

그래도 추억으로 남는 것은 특별한 사건이었다. 채훈을 쫓아 뙤약볕이 내리쬐는 하와이의 거리를 달렸던 일은 마치 어제처럼 떠올릴 수 있었다. 제주도 공항에서 한번 사귀어보자고 하던 채훈의 모습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이제는 기쁘고 즐거운 기억들을 잔뜩 만들어야 했다. 데이트를 하고, 사랑한다고 말하고, 많은 추억을 쌓다 보면 자신이 한 헛짓거리를 채훈이 반쯤은 잊어버릴지도 몰랐다.

“채훈아.”

승건은 채훈의 이름을 가만히 불렀다. 깊이 잠든 모양인지 이름을 불러도 채훈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가벼운 숨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작은 세상은 평화로웠다.

채훈의 손을 놓은 승건은 빙그레 웃으며 자리에 누웠다. 잠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승건은 아주 오랫동안 채훈을 눈에 담았다.

* * *

수능 한파는 올해도 여전했다. 승건은 아주 오랜만에 정시보다 빨리 퇴근한 다음에 고사장 앞에서 채훈을 기다렸다. 그리고 해가 질 때쯤에야 고사장에서 나온 채훈을 그대로 차에 태워 저녁을 먹으러 갔다. 유명한 셰프가 운영하는 레스토랑의 디너 정찬은 훌륭했다. 한나절 만에 얼굴이 반쪽이 된 채훈이 저녁을 먹고 활기를 되찾았다.

집으로 돌아오자 채훈은 바쁘게 움직였다. 씻고, 옷을 갈아입고, 수능 답안지를 출력한 다음에, 2층의 가족실 바닥에 앉아, 경건한 마음으로 채점을 하기 시작했다.

승건은 심각한 표정으로 채점을 하고 있는 채훈을 한 번씩 바라보며 어린 아들과 놀아주었다.

생후 8개월째로 접어든 정우는 이제 겨우 혼자서 앉을 수 있었다. 호기심도 많고 적극적인 아이는 뭐라도 붙잡고 일어나려고 자꾸 용을 썼다. 승건의 무릎에 앉아 옷자락을 붙잡고 들썩거리다가 그것이 놀이가 된 듯 웃음을 터트렸다.

승건은 정우가 뒤로 나동그라지지 않도록 허리를 붙잡으며 채훈을 보았다. 얼마나 집중하고 있는지 정우가 웃어도 고개 한 번 들지 않았다.

아늑하게 꾸며진 가족실에는 종이가 넘어가는 소리와 아이의 웃음소리만 들렸다. 승건은 문득 행복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이렇게 따스하고 평화로운 찰나의 순간이 새삼스러웠다.

“우…….”

이리저리 용을 쓰다가 제 뜻대로 되지 않은 것이 불만스러운지 정우가 씩씩거렸다. 승건은 울상을 지으려는 정우의 등을 다독여주면서 조용히 웃었다.

눈이 커다란 아이는 채훈을 꽤 많이 닮았다. 다른 사람들은 승건을 줄여놓은 것 같다고 입을 모아 말했지만 자신의 생각은 달랐다. 채훈이 어렸을 적 사진과 비교하면 붕어빵 틀에 찍어 나온 듯했다. 해맑게 웃는 것도 비슷했다. 채훈이 우리 아이가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고 말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어렵게 낳아서 그런지 채훈은 정우에게 지극정성이었다. 때로는 그게 못마땅하기도 했지만 어린 아들을 질투할 수 없었다. 그저 자신도 예뻐해달라고 채훈에게 조용히 들이대는 것이 전부였다.

승건은 자신이 훌륭한 양육자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너무 바빠서 아이와 함께할 시간조차 부족했다. 누구에게나 잘 웃어주던 정우는 유난히 승건에게만큼은 낯을 가렸다. 처음 같이 지내기 시작했을 때는 승건을 모르는 사람처럼 대할 정도였다.

그래도 승건은 괜찮은 아버지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화목한 가족에 대한 로망은 없지만, 채훈이 행복하기를 바라기 때문이었다.

승건은 신을 믿지 않았다. 다만 신을 대신해 채훈이 자신의 곁에 있다고 생각했다. 믿고 의지하며, 함께 인생을 걸어갈 사람이었다. 그리고 자신 역시 채훈에게 그런 존재가 되기를 바랐다. 그건 평생을 바쳐 이룩할 만한 목표로 충분했다.

“어, 이게…….”

한참을 정우와 놀아주던 승건은 이상한 소리를 내는 채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시험지를 들여다보고 있는 채훈의 얼굴이 심각했다.

“무슨 일이야?”

“채점을 했는데…….”

“왜? 많이 틀렸어?”

“아니. 2교시까지 하나밖에 안 틀렸어.”

하나밖에 안 틀렸다는 채훈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승건을 보았다. 결과가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잘했네.”

“이거 어려웠다고. 우선은 다 매겨보고 난 다음에, 다시 확인해야겠어.”

자신의 성적에 대해 확신을 가지지 못한 채훈이 다시 시험지를 붙잡았다. 승건은 굳이 말리지는 않았다.

독학을 하던 채훈이 입시 전문가를 찾아 상담을 한 것은 9월 모의고사를 치고 난 다음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0년이 훌쩍 지났건만 채훈은 여전했다. 전문가는 채훈의 실력이라면 웬만한 대학은 골라 갈 수 있을 거라고 했다.

10여 년 전에 수능을 제대로 망친 채훈은 약간의 트라우마가 있었다.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실수하지 않으려고 강박적으로 굴었다. 승건은 기왕에 채훈이 제 실력만큼 점수를 받길 바랐다. 아무래도 채훈이 실망하는 모습은 보기 싫었다.

만약에 채훈이 대학에 입학한다면, 새내기가 된 배우자를 위해 멋진 차를 한 대 뽑아줄 생각이었다. 물론 그전에 결혼식부터 올려야 했다. 상상만으로 즐거운 일이었다.

승건은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며 품에 답싹 안겨 오는 어린 아들을 안으며 미소를 지었다. 모든 것이 완벽한 순간이었다.

크로스 마크 5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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