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점심보다는 아직 아침에 더 가까운 시간이었다. 창 너머로 햇살이 환하게 들어오는 방 안에 그림처럼 잘생긴 미남이 부루퉁한 얼굴을 하고 앉아 있었다. 삐딱한 자세, 구겨진 미간과 일자로 굳은 입매를 보면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그도 그럴 것이, 미남의 손목에는 묵직해 보이는 수갑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무시무시하게도 수갑의 반대쪽은 미남 옆에 있는 침대 헤드의 나무장식 살과 연결된 상태였다.
제주에서 가장 규모가 큰 H호텔의 스위트룸에는 침실이 두 개 있었다. 그중 작은 방에 승건이 마치 죄인처럼 손목에 수갑을 찬 채였다.
채훈은 이미 심정민에게서 승건이 어떤 상태인지 전해 들었다. 하지만 듣는 것과 직접 눈으로 보는 것에는 차이가 컸다. 채훈은 마치 커다란 맹수가 목줄을 하고 묶여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안녕.”
“그래.”
인사를 하자 승건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승건의 모습이 심각해 보였기 때문에 채훈은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꾹 참았다.
어젯밤에 승건을 도와주기로 하고는 각각 따로 저녁을 먹고 난 다음에 이곳에서 다시 만났다. 페로몬을 간접적으로 접촉하는 방법 자체는 간단했다. 자신이 밀폐된 공간에 페로몬을 잔뜩 풀어두고는 사라진 다음, 승건이 접촉하는 것이었다. 물건에는 제대로 묻지 않는 페로몬은 공기 중에 꽤나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결과는 꽤나 성공적이었다. 승건이 아홉 시간 가까이 푹 잤다면서 심정민이 알려주었다. 다만 아침에 일어난 승건이 충동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면서 방법을 강구했다고 했다. 그런데 그 방법이 수갑이라니 상상을 초월했다.
“수갑은 어디서 난 거야?”
“심 실장님이 구해주셨어.”
채훈은 옆에 선 심정민을 힐끗 보았다. 그러자 그가 온화하게 웃으면서 비밀이라고 했다. 비밀을 굳이 캐물을 생각은 없었다. 채훈은 다시 승건에게 집중했다.
승건의 오른 손목과 침대 헤드는 수갑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입고 있는 옷은 어제 그대로였다. 머리도 세팅하지 않고, 넥타이도 없이 와이셔츠를 단추를 풀고 있는 모습이 러프했다.
잘생긴 남자가 묶여 있으니 그것 또한 그림이라고 생각하며 채훈은 웃었다.
“잘 잤어?”
“응.”
이번에도 승건이 짧게 대답했다.
“다행이네. 그런데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해? 너무 극단적인 거 아니야?”
“침대 살을 부수는 건 쉬워. 이건 일종의…… 안전장치 같은 거야. 신경 쓰지 말고 네 할 일을 하면 돼.”
원목으로 된 침대는 튼튼해 보였지만 승건이 마음만 먹는다면 부술 수 있을 것 같았다. 승건이 아주 적극적으로 신경 쓰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채훈은 그렇게 하기로 했다.
“언제 돌아가?”
“11시 50분 비행기야.”
“같이 점심은 못 먹겠네.”
“안 먹는 게 나아. 접촉 후에는 지금처럼 참을 자신이 없어.”
“어떻게 될 것 같은데?”
혹시나 해서 물어봤더니 승건이 인상을 쓰면서 노려봤다. 이번에는 확실히 사슬에 묶인 맹수 같았다. 여기서 더 도발하는 건 안 된다는 촉이 왔다. 채훈은 얼른 화제를 전환했다.
“알았어. 안 물을게. 그것보다 다른 게 궁금한데. 효과가 괜찮다면 내가 서울로 이사 가는 게 낫지 않을까? 3개월 만에 다시 이사하는 게 미안하지만. 그래도 네가 계속 왔다 갔다 하기에는 너무 멀고, 나도 임신 말기가 되면 움직이기 힘들어질 테니까.”
채훈은 앞으로의 일에 대해 말했다. 제주도는 말 그대로 섬이었다. 서울과 비행기로 한 시간 거리이긴 했지만 접근성이 떨어졌다. 승건은 너무 바쁘고, 자신은 임신한 상태였다. 간접적으로 페로몬 접촉을 하려면 물리적 거리가 가까운 게 낫지 않을까 싶었다.
어젯밤 내내 고심한 제안이었다. 꼭 서울이 아니더라도 주변 도시도 괜찮았다. 하지만 승건이 고개를 저었다.
“한동안은 이게 나아.”
“그런가? 너 많이 바쁘잖아. 주말에도 시간 안 날 텐데.”
“가능한 토요일 밤에 보는 걸로 하자. 그리고 미리 말하는데, 약속을 했더라도 집에서는 안 만나. 혹시라도 내가 집으로 찾아간다 하더라도 심 실장님이 없으면 절대 문을 열어주지 마. 길에서 만나도 도망치고.”
“그게 무슨 소리야?”
이상한 주문에 채훈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승건을 보았다. 집에서 안 만난다는 것은 이해하겠는데, 혼자 찾아오면 문을 열어주지 말라는 것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그건 마치 험악하게 헤어진 구 애인이 찾아올 때의 대처법과 닮아 있었다.
“알파 괴담 같은 게 있어. 그래. 괴담이 아니라 진짜야. 멀쩡해 보이는데 몽유병처럼 정신이 없는 경우랑 비슷해. 좀 더 본능적으로 행동하지. 제정신인 아닌 상태에서 각인한 오메가를 찾아가는 경우도 있어. 그나마 중간에 바다가 있으니까 돌발 상황은 거의 없겠지만, 조심하는 게 좋아.”
“어……. 뭔지 대충 알겠어.”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찾아올 수 있다는 경고였다. 꼭 알파만이 아니더라도 이성을 잃은 존재는 멀리하는 게 옳았다.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던 채훈은 뭔가가 배를 쿡 하고 찌르는 느낌에 저도 모르게 배를 감싸고는 몸을 수그렸다. 크게 아프지는 않았지만 생소한 감각에 깜짝 놀랐다.
채훈이 인상을 쓰고 몸을 숙이자 승건과 심정민이 더 요란스럽게 굴었다. 심정민이 채훈의 팔을 잡고 다급하게 괜찮냐고 물었고, 승건은 수갑을 덜그럭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채훈아?!”
“아, 괜찮아. 락이가, 그러니까 아이가 배를 차서 그래.”
“배를 차?”
“응. 발길질은 처음이라서 좀 놀랐어.”
채훈은 괜찮다고 하고는 천천히 바로 섰다. 임신한 지 21주째였지만, 태동은 처음이었다. 아기의 존재가 선명하게 느껴지는 감각이 이상했다.
지금까지 채훈은 조금 일반적이지 않은 임신 과정을 겪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엄청 고생한다는 입덧도 거의 하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바로 조금 전까지 태동도 느끼지 못했다.
의사 선생님은 산모가 스트레스를 받을 경우 태아가 천천히 자라고 태동도 적게 할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그래도 잘 크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해서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그런데 승건을 만나고 있는 중에 처음으로 아이가 거하게 발차기를 했다. 이게 스트레스를 받았기 때문인지, 혹은 흥분하고 있기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문제 있는 거 아니야?”
“원래 아기들은 발로 차. 아프기도 하고 배도 뭉치고. 얼굴 펴. 별거 아니야.”
승건의 표정이 점점 험악해지는 바람에 채훈은 다리도 붓고, 허리도 아프고, 약하긴 하지만 빈혈도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나마 자신은 증상이 덜한 편이었다.
그저 정보로만 알고 있는 것을 직접 몸으로 경험하는 것이 신기했지만, 그것과 별개로 우울증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얼마나 안 좋은 건데.”
“임신하면 다 나타나는 증상이야. 별로 심각한 것도 아니고. 가끔 네 얼굴을 주먹으로 때려줬으면 하고 바랄 정도? 이건 진심이고. 출산할 때면 아기 아빠 머리채를 쥐어뜯고 싶어진다는데, 나는 수술을 할 테니까 네 머리는 못 뜯을 거야.”
조금 살벌한 농담에 승건의 동공이 말 그대로 흔들렸다. 예상 밖의 모습에 채훈은 속으로 쓴웃음을 삼켰다. 여기서 출산의 위험성까지 피력했다가는 승건이 울 것 같았다. 우는 모습도 한번 보고 싶기는 했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채훈은 작은 방 안으로 발을 디뎌 천천히 승건에게 다가갔다. 승건이 바짝 긴장했다.
“강채훈.”
승건이 다급히 부르지 않아도 채훈은 서너 걸음 떨어진 곳에서 멈춰 섰다. 아직은 여기까지가 한계였다.
“여기까지야.”
“무리하지 말라니까.”
“다음 주에 오면 같이 밥 먹자. 중식 코스로. 여기 옆에 있는 호텔 중식이 맛있어. 커다란 탁자를 가운데 두고 먹으면 괜찮을 거야. 심 실장님이랑, 김 여사님이랑 모두 다 같이.”
채훈은 잔뜩 긴장하고 있는 승건을 향해 다음을 약속했다. 제주도에 와서 일주일에 한 번은 맛집을 찾아 외식을 했다. 김혜진이 요리를 잘하긴 했지만 스트레스 때문에 분위기 전환을 하러 다녔다.
외식을 하자는 건 너랑 다시 시작한다는 신호였다. 승건이 제대로 알아듣기를 바랐다.
“반지를 사 올게.”
“……?”
뜬금없는 대답에 채훈은 눈을 깜빡거렸다. 반지라면 손가락에 끼는 동그란 장신구를 말했다.
“앞으로 반지를 끼고 다녔으면 좋겠어.”
채훈은 승건을 한참 동안 봤다. 반지를 주겠다는 남자는 진지하기만 했다. 반지의 의미를 생각하면 참으로 한결같은 성격이지 않을 수 없었다. 사귀는 거라고 관계를 정립하지는 않으면서 눈에 보이는 것을 만들려고 했다.
그런데 채훈이 입을 다물고 있는 걸 다른 의미로 해석했는지 승건이 초조한 듯 다른 설명을 덧붙였다.
“지금의 넌 마킹을 감당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니까.”
스스로 손목에 수갑을 찬 미남이 하는 말치고는 약했다. 초조하다 못해 조금은 애절해 보이기까지 하는 승건의 모습이 왠지 귀엽다고 생각해 버린 채훈은 속으로만 웃었다. 누군가가 그랬다. 귀엽다고 생각하면 끝이라고 말이다.
“청혼은 아니고?”
“아니야.”
“그렇다고 사귀는 것도 아니고?”
“반지 싫어?”
승건이 살짝 말을 돌렸다. 아무래도 이러다가 바로 결혼을 하려는 게 진심인 모양이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반지 같은 걸로 싸울 생각은 없었다.
“너도 반지를 낀다면. 같은 디자인으로.”
채훈은 적당한 타협안을 내놓았다. 같은 디자인의 반지를 낀다면 사귄다고 명명하지 않아도 사귀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승건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어차피 상대를 완전하게 이해할 수는 없다. 그래도 사람과 사귐이 원래 그랬다. 다투고 화해하고 대화를 하면서 알아가는 것이다.
집착이 심한 녀석은 눈에 보이는 증거를 좋아했다. 자신은 그런 성격은 아니었다. 커플링은 꼭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자신의 손에만 반지가 있는 것은 싫었다.
제안이 만족스러운지 승건이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성공적인 합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