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진담】
“이거 너무 뻣뻣하잖아.”
열일곱 살이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유찬혁이 셔츠 목깃을 불편한 듯 만지작거렸다. 혼잣말에 가까운 푸념이었기 때문에 승건은 말을 받아주지 않고 태블릿에 시선을 고정했다. 연말이라 일이 자꾸 밀려들었다.
“넥타이는 답답해서 싫은데. 꼭 매야 하나.”
이번에는 넥타이를 만지작거리며 투덜거리는 유찬혁은 승건의 동생이었다. 큰 키에 이국적인 외모 때문에 열일곱 살처럼 보이지 않았지만, 하는 행동은 영락없이 애였다. 하지만 승건은 굳이 그 사실을 지적하지 않았다. 열일곱 살이면 목이 죄이는 넥타이가 싫을 만도 했다. 그래도 오늘만큼은 참아야 했다.
12월 첫째 주 토요일. 오늘은 가족사진을 찍는 날이었다. 매년 12월이 되면 가족끼리 모여 사진을 찍는 것이 연례행사였다. 외할아버지가 매년 결혼기념일에 사진을 찍기 시작했었는데, 외할머니가 손자들의 성장 기록 사진을 찍는 취미를 가지면서 규모가 커졌다.
승건은 미국에 있을 때도 12월이면 그해 맞춘 가장 좋은 정장을 차려입고 전문가에게 사진을 찍어 외할머니에게 보내곤 했었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온 작년부터 행사에 참석하게 되었다.
외할머니의 사진첩에는 일곱 살의 승건부터 스물아홉 살까지의 승건이 사진으로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었다. 물론 승건은 그 사진첩을 직접 눈으로 본 적이 없었다. 다만, 외할머니로 인해 제각각 성씨가 다른 네 명의 사람이 그럭저럭 가족처럼 지내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외할아버지는 외할머니밖에 몰랐다. 외할머니가 아니었다면 아들딸과 손자에게 최소한의 관심조차 주지 않았을 것이다. 사랑을 찾아 외국으로만 돌아다니는 승건의 어머니가 외할머니의 생신만큼은 꼬박꼬박 챙기는 것도 같은 이유였다.
그래서 승건도 유찬혁도 손자들을 말쑥하게 챙겨 입히는 것을 좋아하는 외할머니를 위해 귀찮은 가족 행사를 참아냈다. 유찬혁이 넥타이가 불편하다고 연신 꿍얼거리면서도 제 손으로 풀지 않은 것은 그런 이유였다.
“그런데 형. 어디 아픈 건 아니지?”
드디어 유찬혁이 승건을 불렀다. 승건은 그제야 태블릿에서 눈을 떼서 유찬혁을 보았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먼저 스튜디오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중이었다. 그사이 승건과 유진혁은 휴게실에서 대기했다. 짙은 푸른색의 더블 버튼 재킷을 입고 메이크업까지 받은 유찬혁은 화려하게 생긴 미남이었다. 딱딱하게 꾸민 휴게실과는 그림체가 달랐다.
승건은 아버지가 다른 형제와 그다지 가깝지 않았다. 미국에서도 같이 산 기간은 채 3개월뿐이었다. 그 이후로 1년에 얼굴을 마주하는 것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나마 유찬혁이 넉살 좋고 스스럼없는 성격이라 그럭저럭 형제처럼은 지냈다. 승건도 열세 살이나 차이 나는 어린 동생에게 적당히 예의를 갖췄다.
“아픈 데는 없어. 왜?”
“왜긴 왜야. 살이 엄청 빠졌으니까 그렇지. 두 달 전에 봤을 때보다 10㎏은 빠진 것 같은데. 혹시 병이야?”
“아니야.”
“그렇다면 다행인데. 화장을 했는데도 얼굴이 퀭해. 여기서 더 마르면 해골이 되겠어. 할머니는 뭐라고 안 하셔? 많이 걱정하실 텐데. 그리고 아프다고 소문이 날 거야.”
어린아이처럼 툴툴거리던 유찬혁이 이번에는 어른스럽게 말했다.
태화 그룹의 창립 기념일에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정규완 회장은 아직 현업에 복귀하지 않았다. 그리고 대외적으로 얼굴을 알린 승건이 태화 그룹의 차기로 언론에서 언급되었다. 그런 그가 와병 중이라는 소문은 이미 퍼졌다. 주가가 한 번 출렁이기도 했었다.
그러나 승건은 딱히 아픈 곳이 없었다. 병도 아니었다. 먹는 것도 전과 다름없이 먹었고 생활 패턴도 그대로였다. 다만 수면 시간이 극단적으로 짧아졌다. 3년 치의 잃어버린 기억이 무작위로 돌아오면서 불면의 밤이 계속 이어졌다. 원래부터 밤잠이 많은 편이 아니었기에 정신적으로는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다만 몸이 버텨내지를 못했다.
각인한 오메가의 페로몬에 장기간 노출되지 않은 탓에 여러 신체 기능이 떨어졌다. 거기에 수면 장애까지 겹치면서 체중이 줄어들었다. 유찬혁의 말대로 여름부터 지금까지 약 10㎏ 가까이 몸무게가 줄었다. 이제 완벽한 저체중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계속 나빠질 예정이었다.
한국에서 새로 찾은 주치의는 이러다가 갑작스럽게 쓰러질 거라고, 가능한 한 빨리 각인한 오메가의 페로몬에 접촉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채훈이 자신을 부정 각인 하기는 했다. 그러나 그의 페로몬에 노출되는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보고서에 의하면 채훈은 이제 페로몬을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 신체적 접촉이 제일 확실했지만, 같은 공간에 있지 않아도 페로몬에 닿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승건은 채훈이 무사히 아이를 낳을 때까지 어떤 시도도 할 생각이 없었다. 이제 겨우 임신 5개월이 지난 채훈은 건강했다. 우성 오메가이기에 알파의 도움 없이도 아이를 낳을 수는 있었다. 하지만 부정 각인이라는 것이 어떻게 작용할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했다.
아이는 무조건 낳아야 했다. 그래야 자신과 채훈 사이에 연결 고리가 생긴다.
이제는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채훈을 보며, 승건은 절실히 깨달았다. 아이라는 연결 고리라도 없이 헤어지기라도 한다면 채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제 갈 길을 갈 게 뻔했다.
채훈을 붙잡을 방법은 있었다. 무릎을 꿇고 매달릴 수도 있었고, 혹은 족쇄를 채워 감금하는 것도 가능했다. 승건은 뭐든 할 수 있었다. 다만, 많지 않은 선택지 중에서 파국이라는 결말만큼은 피해야 했다.
아니,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몰린다면 파국도 상관없긴 했다. 사랑하기에 보내준다는 말은 헛소리였다. 그저 조금 더 온건한 미래가 있기에 지금을 인내하는 것뿐이었다.
“해결 안 된 문제가 있어서 그래.”
“진짜 병은 아니지?”
“응.”
“알았어. 빨리 문제나 해결해. 할머니도 엄청 걱정하실 테니까. 아, 그래. 형. 형은 이번에 스위스 가? 할머니가 써니 누나네 별장에 놀러 가도 된다고 했거든. 형도 가냐고 물어보니까 모르신대. 바빠서 못 가? 겨울 휴가 없어?”
유찬혁이 금방 화제를 바꾸었다. 해가 바뀌고 1월이 되면 친하게 지내는 육촌 형제들 몇몇이 스위스에 있는 별장에 스키를 타러 가기로 계획이 잡혔다. 정확히는 써니가 자기 사촌들과 함께 놀러 가는데 유찬혁을 끼워준 것이다.
“언제인지 모르지만, 못 갈 거야. 요즘 바빠.”
“형이 제일 바빠. 써니 누나도 가는데.”
외할아버지는 형제들 중에 장남이었고 이른 나이에 결혼했다. 따라서 같은 항렬의 육촌 중에서 승건이 가장 나이가 많았고, 또 가장 놀 수 없는 직책을 맡고 있었다. 스위스까지 왕복할 휴가를 만들어낼 수는 있었다. 그래도 나이 어린 육촌들이랑 부대끼는 것은 사양이었다.
재미있게 잘 놀다 오라고 하는데 테이블 위에 올려둔 승건의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는 심정민이었다.
심정민은 오늘 채훈을 만나러 제주도에 내려갔다. 벌써 3시였다. 이미 제주도에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혹시 채훈에게 문제가 생겼나 싶어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유찬혁이 이상한 눈으로 보는 것을 무시하고는 휴게실을 나서 사람이 없는 조용한 곳을 찾았다.
“예. 심 실장님. 무슨 일이 있습니까?”
―아, 그게. 비행기가 방금 제주도에 도착했는데, 김태천 실장님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김 실장님께서 채훈 씨에 대해 물어봤습니다. 웬만한 건 다 알고 있었습니다. 제주도에 살고 있는 것까지요.
“이런.”
승건은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내고 말았다. 김태천은 외할아버지를 오랫동안 모셔 온 개인 비서였다. 그가 채훈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은, 외할아버지 역시 채훈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제게는 확인차 전화하셨다고 합니다. 대충 얼버무리기는 했지만, 채훈 씨의 존재에 대해서 부정하지는 않았습니다. 방금 통화를 끝내고, 도련님께 연락드리는 겁니다. 이제 어떻게 할까요?
심정민의 물음에 승건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승건은 꽤나 정성스럽게 채훈의 존재를 감췄다. 하와이에서 돌아온 채훈이 제주도에서 살기를 원했기에 그곳에 집을 구해주었다. 심정민이 채훈의 생활 전반을 관리하고 있었지만, 승건은 그에게 연락 한 번 하지 않았다. 대외적으로 승건은 채훈과 헤어진 상태였다.
그러나 승건의 체중이 꾸준히 줄어들고 있는 것이 외할아버지의 관심을 끌었다. 결국 승건은 채훈의 이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것을 외할아버지에게 알렸다. 자신이 오메가를 각인했고, 오메가는 자신의 아이를 임신했고, 그리고 오메가가 자신을 부정 각인했다는 복잡한 관계를 말이다.
덧붙여 승건은 아이는 반드시 낳을 것이라고, 문제가 생긴다면 언제든 대표이사 자리를 내놓고 미국으로 떠날 테니까 자신의 오메가와 아이에 대해서는 어떤 간섭도 하지 말라고 통보했다.
승건은 태화 그룹에 미련이 없었다. 하지만 외할아버지만큼은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았다. 정규완은 재계의 거물이었다. 이제는 기력이 빠졌다고, 이빨 빠진 호랑이라고 누군가 말하기도 했지만 다 틀린 말이었다. 태화 그룹을 대한민국에서 손꼽는 기업으로 만들어놓은 정규완은 여전히 피도 눈물도 없는 사업가였다.
만약 정규완이 채훈과 아이의 존재가 태화 그룹에 피해를 준다고 판단하면 모든 것이 위험해졌다. 그래서 언제든 말하기만 한다면 사라져 주겠다고 확실하게 말해 두었다.
솔직히 승건은 외할아버지가 강경하게 나오지 못할 거라고 예상했다. 지금 상황에서 자신 말고는 딱히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할아버지가 현역에 복귀하기 위해서는 아직 시간이 조금 더 필요했다.
승건의 예상대로 외할아버지는 한 발 물러나 주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을 알았다. 외할아버지의 성격이라면 임신한 오메가가 누구인지 뒤를 캘 것이 뻔했다.
외할아버지에게 승건과 각인한 오메가의 존재를 알린 것이 벌써 한 달이 넘은 시점이었다. 이제 와 채훈의 정체를 알아냈다면 조금 늦은 편이었다.
“할아버지께는 제가 직접 말하겠습니다. 혹시 모르니까 제가 연락할 때까지 심 실장님께서 채훈이를 지켜봐 주세요.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짧게 통화를 끝낸 승건은 잠시 숨을 들이켰다. 외할아버지가 소리 소문 없이 채훈에게 손을 쓰지 않고, 김태천과 심정민을 거쳐 현 상황이 자신의 귀에 들어오도록 만든 것에는 분명히 어떤 의도가 있었다.
승건은 상대의 수읽기에 능하지 못했다. 그래서 상대보다 먼저 움직이거나, 또는 만약을 대비해 다양한 플랜을 짜고 대비해 두는 편이었다.
최악의 상황이면 채훈을 데리고 그대로 미국으로 떠나면 그만이었다. 그래도 외할아버지가 무슨 꿍꿍이인지는 알아봐야 했다. 그게 조심스럽게 채훈의 뒤를 캐고 있다는 걸 일부러 알려준 외할아버지에 대한 예의였다.
그렇게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촬영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와중에 비서실 팀장에게서 연락이 왔다. 케이블 뉴스 채널에서 승건의 와병 의혹을 방송으로 내보냈다는 것이었다.
예전에 창립 기념일 행사에 모습을 드러낸 승건의 얼굴을 확대 편집해 방송한 그곳이라고 했다. 가볍게 다루었다고는 하지만, 월요일이 되면 당장에 주식 시장에 영향을 미칠 게 뻔했다. 승건은 속으로 혀를 찼다. 아무 말 없이 그냥 넘어갔더니 쉽게 본 모양이었다.
대응책과 관련된 보고를 하러 오겠다는 팀장과 약속을 잡았다. 촬영 이후에는 가족들과 저녁 식사를 함께하기로 했지만 아무래도 불가능할 것 같았다. 통화를 끊자 스튜디오 스태프가 촬영 준비가 끝났다고 승건을 찾아왔다.
토요일이었지만 승건은 여전히 바빴다.
*
*
최승건과 정규완은 살가운 조손 사이가 아니었다. 둘 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랬기에 지금까지 날 선 대립을 하지 않기 위해 적당히 서로 조심하는 편이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승건의 예상대로 정규완은 채훈의 거취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승건에게 아주 단순하고 직관적인 충고를 했다.
“얼른 가서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라. 그게 맞아.”
승건은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정규완을 보았다. 조금 전에 유찬혁이 앉아 있던 의자를 차지한 정규완 역시 딱딱하게 꾸며진 휴게실과 장르가 다른 그림체였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수완 좋다 못해 무자비한 대기업의 회장님께서 손자에게 빌라고 충고하는 것은 특이했다.
“그런다고 부정 각인이 풀리지는 않습니다.”
“네 오메가의 마음은 누그러지겠지.”
“……?!”
“평범한 아이더구나. 모질지 못하고, 욕심도 그다지 없고. 부정 각인을 했는데도, 네 아이를 낳는다고 한 걸 보면 말이다. 그러니 출산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무릎으로 기어가서 살려달라고 빌면 불쌍하게 봐줄 게다.”
대한민국에서 손꼽는 기업을 일구어낸 사업가인 정규완이 사람을 보는 눈은 정확하기 짝이 없어서 승건은 소름이 끼쳤다. 확실히 채훈은 마음이 약했다. 무릎을 꿇고 살려달라고 빌면 마지못해서라도 도와줄 것이다. 어쩌면 진짜 자신을 불쌍하게 여길지도 몰랐다.
하지만 승건은 그러기 싫었다. 불면의 밤과 무미건조한 낮이 삶을 갉아먹고 있기는 했다. 그래도 아직은 버틸 수 있었다. 자존심은 오래전에 내다 버렸지만 그래도 채훈에게 한 약속만큼은 지켜야 했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네가 그와 결혼을 하든 말든 상관하지 않겠다. 손댈 생각도 없고. 하지만 네가 쓰러지기라도 한다면 네 할머니가 먼저 무릎을 꿇을 건데, 내가 그 꼴을 볼 것 같으냐?”
“할아버지.”
“너랑 척질 마음도 없다. 일 복잡하게 만들지 말고, 네 오메가에게 가서 빌어.”
정규완이 아주 간단하게 결론을 내렸다. 거기에 승건은 더 이상 반박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네 오메가라는 지칭이 묘하게 승건의 가슴을 울렸다.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도 남에게 들은 것은 처음이었다.
“문제가 없도록 하겠습니다.”
승건은 가서 빌겠다고 대답하지 않았다. 정규완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썼지만 더 이상 재촉하지 않았다.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승건이 인사를 하고 휴게실을 나서자 이수진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중에 이야기하자고 하면서 그녀가 승건을 대신해 안으로 들어섰다.
그사이에 승건의 품 안에 있는 휴대폰이 오랫동안 울리다가 멈췄다. 승건이 휴대폰을 꺼내 확인하자 부재중 발신인으로 심정민의 이름이 떠 있었다.
혹시 채훈에게 무슨 일이 있나 싶어 승건은 재발신을 누르려다가 참았다. 급한 일이라면 다시 전화가 올 터였다. 마음이 다급해지긴 했지만 괜히 통화 중이 되어 서로 엇갈리는 것보다는 나았다. 아니나 다를까 심정민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심정민의 성격이라면 어지간한 일이 아닌 이상에는 다시 전화를 하기보다는 메시지를 보냈을 것이다. 지체 없이 다시 연락을 한 걸 보면 꽤나 급하다는 의미였다.
승건은 재빨리 전화를 받았다.
* * *
12월 첫째 주 토요일. 제주도의 날씨는 맑고 화창했다. 서울에 비해서는 기온이 높은 편이었지만, 아침에 비가 약간 내린 탓에 어제보다 온도가 훅 떨어졌다. 거기다 바람이 심상찮게 불었다.
창 너머로 동백나무 이파리가 바람에 파라락 떨리는 것을 보며 채훈은 이번 겨울 처음으로 패딩을 입고 외출하기로 결정했다. 원래 추위도 더위도 그렇게 타지 않았는데 임신한 이후로는 추위를 견디지 못하게 되었다.
옷장에서 패딩을 꺼내어 팔에 꿰고 있는데 탁자 위에 올려둔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인은 서주명이었다.
채훈은 스피커폰으로 돌려서 전화를 받았다.
“어. 왜?”
―너, 집 주소가 어떻게 돼?
“집 주소는 갑자기 왜?”
―엄마가 김치 보내시겠대. 갓김치. 내일 김장하시거든. 너 그거 좋아하잖아.
“괜찮아.”
서주명의 말대로 채훈은 갓김치를 좋아했다. 특히 서주명의 어머니가 담근 갓김치는 일품이었다. 채훈이 독립을 한 이후로 종종 서주명의 집 냉장고에서 썩어가고 있는 갓김치를 얻어 오곤 했다. 하지만 일부러 김장김치를 받을 수는 없었다.
―너는 괜찮겠지만, 나는 안 괜찮아. 메시지로 주소 찍어서 보내. 그리고 딴 거 더 먹고 싶은 거 없어?
“없어. 여기서도 잘 먹고 있어.”
―그럼 갓김치랑 김장김치만 보낼게. 네가 임신했다고 하니까 엄마가 먹고 싶은 거 없냐고 물어보라고 자꾸 뭐라고 해서.
“정말 고맙다고 했다고 꼭 말씀드려. 나도 나중에 따로 연락드릴게.”
서주명과의 통화를 짧게 끝냈다. 그사이에 패딩을 모두 다 입은 채훈은 휴대폰을 집어 들면서 웃었다.
제주도에서 살기 시작한 이후로 채훈은 한 번도 서울로 가지 않았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사정을 설명한 것은 지난달의 일이었다.
오메가로 발현하고 임신을 했다는 이야기에 친구들은 제각각의 반응을 보였다. 아기 아빠인 알파는 어디 갔냐고 화를 낸 것은 남태호였다. 신유진은 지자체에서 지원하는 임산부 지원 프로그램을 알아봐 주었다.
마지막으로 서주명은 바쁜 와중에도 제주도까지 날아와 채훈의 등짝을 모질게 때렸다. 그런 일이 있었으면 얼른 말을 해줬어야지 왜 숨겼냐고 잔소리를 엄청 들었다.
녀석에게는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아이의 아버지는 승건이 맞고, 여러 가지 복잡한 사정이 있어서 혼자 살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서주명이 화를 내기 전에 승건이 결혼을 하자고 했는데 거절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다들 좋은 친구들이었다. 특히 서주명이 이것저것 많은 것을 신경 써주었다. 그래서 제주도에서의 생활이 그렇게 쓸쓸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서주명에게 주소를 보낸 채훈은 바로 서주명네 어머니에게 전화했다. 고맙다고 인사하고, 귤을 보내드리겠다고도 하고, 나중에 한 번 찾아뵙겠다고도 하고는 통화를 끝냈다. 그리고 뒤이어 귤과 천혜향 등을 주문해 서주명네 본가로 보냈다.
채훈이 기억하기로는 서주명도 그의 어머니도 모두 귤 종류를 좋아했기 때문에 괜찮은 선물이었다.
“이제 출발할 시간이에요.”
주문을 모두 마치고 나자 마침 김혜진이 반쯤 열린 안방 문 너머에서 말을 걸어왔다. 내년이면 쉰 살이 된다는 김혜진은 채훈의 살림살이 전반을 도와주는 하우스 키퍼였다. 그리고 채훈의 운전기사이자 보호자 노릇도 하고 있었다.
채훈이 제주도에서 살기 시작한 것이 3개월이 훌쩍 넘은 상태였다. 원래는 서울에 있는 오피스텔로 돌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승건이 대리인인 심정민의 입을 빌려 편하게 집을 구해주겠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바람에, 그럼 제주도에서 살겠다고 해버렸다.
하와이에서 지냈던 기억이 너무 좋기도 했고, 승건에게서 물리적으로 멀어지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승건은 편의시설이 많은 서울이 좋다고 한 번 더 설득하긴 했지만, 채훈의 말에 반대하지는 않았다. 이사와 관련해서는 심정민이 모든 것을 처리해 주었다.
그렇게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시작된 제주도 생활은 쾌적했다. 집은 넓었고, 살림살이는 물론이고 생활 전반을 도와주는 김혜진까지 있었다. 못 하는 게 뭔지 궁금할 정도로 모든 일에 능통한 그녀는 오늘도 채훈과 함께 산부인과까지 동행하기로 했다.
“준비 다 끝냈어요. 곧 나갈게요.”
큰 목소리로 대답한 채훈은 서둘러 움직였다. 오늘은 할 일이 많았다. 산부인과에서 정밀 초음파 검사를 받은 다음에 심정민을 만나야 했다. 한 달에 한 번씩 제주도를 찾는 심정민은 아기의 초음파 사진과 검사 결과 등을 받아갔다. 그를 만난 후에는 서점에 들러 문제집을 몇 권 살 예정이었다. 하루 꼬박 바쁘게 돌아다닐 테니까 패딩을 잘 골랐다고 웃은 채훈은 그대로 방을 나섰다.
*
*
손바닥보다 작은 사진에 있는 아이의 얼굴과 손발이 모두 선명했다. 산부인과의 대기실 구석에 있는 의자에 앉아 초음파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채훈은 기분이 묘해졌다.
임신 21주째, 정밀 초음파 검사가 있는 날이었다. 오늘 처음으로 아이의 성별이 남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이는 평균보다 살짝 작았다. 그리고 건강했고, 예뻤다.
채훈은 지금까지 계속 아이의 존재에 복잡한 기분을 느꼈다. 임신 초기, 채훈은 자신이 임신 중이라는 사실이 혼란스러웠다. 아이를 낳기로 결정을 했지만 머리와 몸과 감정이 임신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정도에서 서로 박자가 달랐다.
아이의 태명은 락이라고 지었다. 벼락처럼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이름을 부르고 애정을 가지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감정 기복이 심해지자 SF영화에 볼 수 있는 장기수면 장치 같은 데 들어가서 출산하고 깨어났으면, 하고 바라게 되었다.
베타 남성으로 살아오다가 오메가가 되자마자 임신한 것이 천천히 충격으로 다가왔다. 결국 가벼운 우울증 증세로 정신과 상담을 받아야 했다. 상담의 효과는 드라마틱하지는 않았다. 낯선 사람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는 게 어려웠다.
아직 미래는 불안했다. 채훈은 제주도에 살기 전부터 일자리를 찾았다. 하지만 어지간한 곳에는 임신한 것 때문에 지원조차 할 수 없었고, 결국 지금 백수로 지내고 있었다.
4년 동안 직장 생활을 해서 모은 돈과 퇴직금, 그리고 승건이 준 돈이 고스란히 통장에 남아 있었다. 거금을 들여 하와이로 여행을 갔다 오기는 했지만 아직 여력은 충분했다. 거기다 제주도에서 지내는 비용은 승건이 모두 지원하고 있었다. 그는 아이를 낳고 기르는 비용은 자신이 책임진다고 공언했다.
먹고 사는 데 문제가 없다고 해도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그렇구나 하고 넘어갈 수가 없었다. 특히 채훈은 마냥 노는 것을 버티지 못했다. 직장이야 나중에 찾으면 그만이었지만 지금 당장이 문제였다.
우울증 치료의 일환으로 토익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고도 시간이 남아서 수능 인강을 들으며 문제집을 풀어댔다.
운동을 못 하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가벼운 달리기는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채훈은 숨을 헐떡일 때까지 땀을 뻘뻘 흘리며 달리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그걸로 스트레스를 풀었다. 과도한 운동이 금지되자 삶이 더욱 불만족스러워졌다. 그렇게 하루하루 자신을 추스르는 데 급급했다.
하지만 오늘은 수면 장치가 생각나지 않았다. 사진을 보고 있자니 정말 아이가 태어나는구나, 자신이 아버지가 되는 거구나 하고 현실감이 훅 밀려들었다.
“이상하네.”
채훈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육아 서적은 이것저것 많이 찾아보며 지식을 쌓았다. 아이가 건강하게 태어나기만을 바라다가, 이왕이면 현명하고 씩씩했으면 하는 욕심도 불쑥 끼어들었다. 자신이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을까 걱정도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좋은 아버지가 되고 싶어졌다. 좋은 아버지가 되려면 뭘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아이와 함께 손을 잡고 걸어가는 상상을 처음으로 했다.
육아뿐만이 아니라 양육에 관련된 공부도 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는 와중에, 익숙한 최승건이라는 이름이 들려왔다.
채훈은 저도 모르게 초음파 사진에서 눈을 떼고는 고개를 들었다. 최승건의 이름을 말한 것은 산부인과 대기실 벽면에 붙어 있는 TV 속 앵커였다.
―……외모로 실시간 검색어까지 오른 적이 있는데요. 최근 최승건 대표이사의 와병 루머가 증권가에서 돌고 있습니다. 루머의 진위를 확인해 보시겠습니다.
하루 종일 뉴스만 방송하는 케이블 채널이었다. 정규 뉴스가 아니라 잠시 쉬어가는 코너인 듯 내일의 핫뉴스라는 타이틀이 화면 화단에 달려 있었다.
채훈은 하와이에서 봤던 영상과 같은 제목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태화 그룹의 창립 기념일 행사에 참석한 승건의 얼굴을 집요하게 확대해서 보여주던 거기였다. 태화 그룹 정규완 회장의 외손자가 영화배우 못지않은 미남이라고 칭찬했던 앵커가 이번에는 승건의 와병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초가을부터 암암리에 퍼지고 있다는 루머는 어쩌면 사실인지도 모르겠다는 목소리와 함께 두 개의 영상을 순서대로 보여주었다. 하나는 지난여름에 창립 기념일 행사에 참석한 승건이었고 또 하나는 최근 열린 국제 경제 포럼에 자리한 승건이었다.
“어…….”
채훈은 한숨처럼 앓는 소리를 냈다. 영상으로 볼 때는 설마 했다. 그런데 4개월 정도 차이가 나는 승건의 모습을 좌우로 놓고 비교해 주자 확연히 티가 났다.
여름에 영상을 봤을 때도 말랐다 싶었다. 그런데 그때와 며칠 전의 모습을 사진으로 비교하자 더 극명했다. 왜 와병 루머가 도는지 알 것 같았다. 진짜 마른 게 눈에 보였다.
승건은 체격도 크고 팔다리도 길었고 몸 관리를 잘해서 마른 근육이 붙은 스타일이었다. 최근 영상만 보면 모델핏이구나 싶은데, 4개월 전과 비교하면 살이 빠진 게 심각해 보일 정도였다.
승건의 와병 루머에 태화 그룹과 그와 관련된 주가가 출렁거리고 있다는 앵커의 마무리 멘트와 함께 곧 화면이 전환되었다.
채훈은 망연한 기분에 TV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승건의 주위에는 그의 안위를 살피는 사람이 여럿 있었다. 본인도 건강관리는 철저하게 하는 편이었다. 술도 안 마시고, 담배도 안 피우고, 과식도 안 하는 녀석이라서 적당히 운동만 하면 건강을 해칠 일도 없었다. 그런데 저렇게 말랐다니, 정말 병에 걸린 거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얼마나 아픈 거야…….”
이곳에 없는 사람을 향해 중얼거리던 채훈은 손에 들고 있는 초음파 사진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기분이 복잡했다.
하와이의 병실에서 뒤돌아선 승건을 본 게 마지막이었다. 승건은 한동안 보지 말자는 부탁을 잘 지켜주었다. 직접적인 통화나 메시지도 없었다. 모든 것은 심정민을 통해 전해졌다.
부정 각인을 치료하는 시도도 아이를 낳을 때까지 미뤄졌다. 부정 각인이 채훈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와이에서 들은 대로 부정 각인은 치료 방법이 거의 없었다. 정확히는, 치료 방법으로 알려진 것이 없었다. 부작용이 심각할 경우 영구 장애까지 발생했기 때문에 임신 기간 동안에는 조심하기로 했다.
눈에 보이지 않으니 마음에서 멀어진다는 이야기는 반은 맞았고, 반은 틀렸다. 바쁘게 일상을 살면서 채훈은 승건을 거의 떠올리지 않았다. 그러다 온갖 상념이 끓어오를 때면 승건의 이름이 툭 하고 튀어나왔다.
그저 승건이 아이의 아버지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채훈이 가장 많이 떠올리는 것은 하와이에서 승건을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때였다. 서로의 마음을 알기에는 부족한 짧은 대화가 계속해서 머리 한쪽에 맴돌았다.
승건은 아무렇지 않게 좋아한다며 고백을 해 왔다. 그리고 11년 전에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때 그가 먼저 고백을 했을 거라고도 했다. 충격이 너무 커서 더 따져 묻지도 못했다.
만약이라고 가정하는 것에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럼에도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생각했다. 풋풋하게 사귀었을지도 모른다고 상상하자 어딘가 간지러워졌다.
더 마음을 흔든 것은 승건의 고백이었다. 과거에는 승건의 다정한 행동에 어쩌면 승건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을까 기대하기도 했었다. 이제 와 그의 고백을 온전히 믿기는 힘들었지만, 그래서 더욱 그의 진위를 파악하고 싶어졌다.
채훈은 그냥 인정했다. 아직 완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깔끔하게 잊어버리고 제 살길을 살고 싶었는데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방금 전에 살이 훅 빠진 승건의 모습을 남 보듯 할 수 없었다. 안타깝고, 속이 쓰리고, 왜 저런가 알고 싶어졌다.
“오지랖은…….”
오지랖이라고 스스로를 타박했다. 하지만 이따가 만날 심정민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어는 봐야겠다 마음먹었다. 자신이 알아봤자 도와줄 수 있는 일은 없겠지만, 궁금한 건 궁금한 거였다.
“오래 기다리셨죠? 약국에 사람이 많아서요.”
정 안 되면 승건에게 직접 연락이라도 할까 말까 채훈이 고민하고 있는 동안에 김혜진이 돌아왔다.
채훈도 아이도 모두 건강했다. 하지만 오메가인 임산부는 필수 영양제 말고도 호르몬 문제로 챙겨 먹어야 하는 약이 좀 더 있었다. 의사의 처방전이 있어야 하는 것으로, 초음파 사진을 보고 있는 채훈을 대신해 김혜진이 약국에 갔었다. 상념에 빠져 있던 채훈은 김혜진을 보며 정신을 차렸다.
“고마워요, 여사님. 이제 심 실장님을 만나러 가요. 공항에 도착하셨다고 하니까 곧 오실 거예요.”
“네. 알겠습니다.”
사진을 챙긴 채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심정민이 비밀이라며 알려주지 않는다면 승건에게 직접 전화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 * *
한 달에 한 번, 채훈이 심정민을 만나는 곳은 집과 가까운 프랜차이즈 카페였다. 2층으로 된 카페는 한적한 편이었고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기 좋았다.
채훈은 늘 마시던 아이스티를 시키고는 2층 구석에서 앉았다. 심정민을 기다리는 사이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인터넷에서 승건에 대한 정보를 뒤졌다.
승건은 이미 유명 포털에 사진과 간단한 프로필이 나와 있었다. 그리고 공식적인 활동을 하는 그의 사진을 담은 기사도 적지 않았다. 방금 전에 케이블 방송에서 나온 가십성 뉴스를 그대로 받아쓴 기사도 몇몇 보였다.
가장 최근의 기사를 몇 번 클릭하며 승건의 사진을 찾아본 채훈은 구겨진 미간을 펼 수 없었다. 뉴스에서 보여주었던 사진만큼이나 승건의 체중이 줄어든 게 명백했다.
어쩌나 하는 사이에 약속 시간에 맞춰 심정민이 도착했다. 예의 바른 인사를 나눈 후 채훈은 초음파 사진과 검사 기록을 넘겼다. 그리고 지체 없이 승건의 상태를 물었다.
“심 실장님. 아까 뉴스에서 봤었는데요. 승건이 말인데 어디 아파요?”
“네? 아? 도련님이요? 괜찮으십니다.”
채훈은 심 실장이 당황하면서 즉답을 하지 못한 것을 의심했다.
표정 관리는 잘했지만, 평소의 심 실장이라면 채훈의 질문에 버벅거리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채훈의 손에는 증거도 있었다. 채훈은 휴대폰으로 뉴스 방송을 그대로 받아쓴 기사 사진을 보여주었다.
“지난여름이랑 바로 며칠 전이라고 하는데, 얼굴 보면 살이 많이 빠진 거 티 나거든요.”
“아, 그게…….”
“진짜 병에 걸린 거예요?”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특히나 병원에서 일하다 보면 이것저것 주워듣는 이야기가 많았다. 어떤 병은 순식간에 상태가 나빠지기도 한다. 특히 암이 그랬다. 증상이 없다가 갑자기 말기라고 판명되는 경우도 꽤 있었다.
“병은 아닙니다.”
“그럼 왜 이래요?”
다행히 병은 아니라고 하지만, 그래도 이유가 궁금했다. 심 실장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럼 직접 승건이한테 물어봐도 돼요? 제 전화 받아요?”
“채훈 씨.”
“어디 가서 떠벌리지 않을 거 아시잖아요. 그냥 걱정돼서 그래요. 여름에도 살이 좀 빠졌구나 싶었는데, 이번에는 너무 심해서……. 하아. 제가 승건이한테 물어볼게요.”
채훈은 강수를 두었다. 심정민이 아니면 승건이 본인한테 물으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심정민이 말렸다.
“도련님 휴대폰에 채훈 씨 번호가 없습니다. 저한테 전화가 올 겁니다.”
“번호가 없어요? 왜요? 아, 삭제했구나.”
스스로 답을 알아낸 채훈은 얼굴을 와락 구겼다. 한국에 돌아온 채훈은 여러 가지 이유로 승건에게 자신의 번호를 삭제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채훈 역시 휴대폰에 저장된 승건의 번호를 삭제해 버렸다. 승건의 번호를 외우고 있기는 했지만 지금 상태로는 통화를 할 수 없었다.
“진짜 말 못 해주세요? 아니다. 심 실장님 휴대폰으로 승건이에게 전화 거는 방법도 있잖아요.”
어떻게든 이유를 알아내겠다는 의지를 피력한 채훈은 집요했다. 결국 심정민이 졌다.
“각인의 부작용 때문입니다. 채훈 씨를 믿지만, 정말 대외비니까 아무에게도 말하시면 안 됩니다.”
“어……. 그거 이렇게 심한 게 아니지 않았어요? 상상 각인이라고 해서, 제가 알고 있기로는 미각과 후각이 없는 거였는데. 체중이 줄어든다는 이야기는 없었는데요.”
채훈은 미국에 있던 의사와 승건의 면담 내용을 대부분 기억하고 있었다. 상상 각인의 부작용은 미각과 후각이 없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삶의 질이 엉망으로 떨어지기는 하지만, 승건은 제 몸을 철저하게 관리했다. 적게 먹는 대신에 영양제나 보조제를 꼭 챙겨 먹었고, 운동도 열심히 하는 편이었다. 이것저것 따지자 심정민이 한 번 더 난처한 얼굴을 보였다.
“진짜 각인하셨습니다.”
“누구……. 아……. 저요?”
누구를 각인했냐고 묻던 채훈은 심정민의 표정과 눈빛에 그게 자신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설마 했다. 하지만 심정민이 고개를 끄덕이는 바람에 채훈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각인이라고?
채훈은 빠르게 각인에 대한 내용을 떠올렸다. 오메가로 발현한 채훈은 서른 살이 되고 난 다음에야 형질자 기초 교육을 받았다. 말 그대로 기초였기 때문에 일반인들에게 알려진 내용과 크게 다를 건 없었다. 배부받은 책도 동생이 가지고 있던 것에서 조금 개정이 된 것이었다.
그래도 기초 교육 수업보다 책이 더 자세했기 때문에 채훈은 오랜만에 탐독했다. 부정 각인에 대한 내용은 얼마 없었다. 대신, 각인에 관한 것은 꽤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형질자의 각인은, 각인 상대의 페로몬에 아주 강하게 귀속되는 것을 뜻했다. 알파라면 각인한 오메가 이외에 다른 오메가의 페로몬을 거부했다. 다른 오메가들 역시 각인한 알파의 페로몬을 매력적으로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알파는 각인한 오메가의 페로몬에 장기간 접촉하지 못할 경우 몸이 아프다 못해 병이 들었다.
여기까지는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진 내용이었다. 상대만 바라보며, 함께하지 못한다면 병든다는 형질자의 각인은 영원한 사랑의 증명이나 마찬가지였다. 드라마틱한 내용 때문에 영화나 드라마, 소설 등의 대중 매체에서도 소재로 자주 쓰였다. 여러 가지 이유로 각인이 풀리기도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도 있었다.
사실 실제 각인의 부작용은 꽤나 치명적이었다. 1단계는 신경 쇠약, 2단계는 신체 기능 저하와 신경 쇠약으로 인한 병증, 3단계는 영구 장애로 이어지는 부작용으로, 마지막이 사망이라는 점은 부정 각인과 닮았다.
하지만 부정 각인보다 각인이 훨씬 더 고약했다. 부정 각인은 상대를 멀리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각인은 다양한 경우의 수 때문에 문제가 복잡해지곤 했다. 특히 각인 상대가 사망해 버리면 심각했다.
공식 통계에 따르면 한국에서는 각인 상대가 사망했을 경우 영구 장애에까지 이르고 각인이 풀리는 경우가 약 85%였다. 나머지 15%는 그대로 죽어버렸다.
각인의 조건은 사랑이었다. 이 사람이 아니면 죽는다는, 말 그대로 목숨을 내던지는 강한 애정이 전제되어야 했다.
배포 책자에서는 호르몬 활동이 가장 활발한 10대 후반과 20대 초반의 알파와 오메가의 각인에 주의해야 한다고 되어 있었다. 16세 전후로 발현하는 형질자의 특성상, 중고등학생을 자녀로 둔 부모님의 각별한 관심이 필요하다고 특별히 강조했다.
거기에 10대 후반에 각인을 했다가 상대가 죽거나, 혹은 상대가 다른 이를 각인하면서 벌어진 여러 가지 사건사고들이 사례로 덧붙어 있었다.
채훈은 어머니가 동생에게 이것저것 잔소리를 했던 것까지 기억해 내다가 한숨을 삼켰다. 승건이 상상 각인을 했을 때는 미각과 후각을 잃었지만 더 나빠지거나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살이 빠지는 이유를 말씀해 주세요.”
“전체적인 신체 기능이 떨어져서 드시는 것을 잘 소화하지 못합니다. 수면 시간도 적어지셨고요.”
채훈은 미간을 찡그렸다. 그러면서 바보, 멍청이라고 욕하고 싶은 것을 참았다.
당분간 얼굴을 보지 말자고 한 것은 자신이었다. 승건은 안정을 위해 아이를 낳을 때까지 떨어져 있는 게 낫다고 했다. 지금까지 그의 목소리 한마디 듣지 못했다. 그래서 승건에게 이런 문제가 일어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 정도까지 살이 빠지면 도와달라고 해야지.
승건이 각인의 부작용으로 죽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만약이라는 게 있었다. 거기다 지금 상태도 충분히 심각했다. 자신은 냉혈한이 아니었다. 승건을 부정 각인 하긴 했지만, 사정을 말하면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었다.
따져보면 첫 만남부터 그랬다. 승건은 상상 각인의 부작용에 대해서는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승건 정도의 위치에 있다면 약점을 숨기는 것은 기본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 이유일 것이다.
채훈도 이해는 했다. 그래도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처음도, 지금도 승건이 자신을 믿지 못한다고 말한 것 같았다.
거기까지 생각을 이어가던 채훈은 중간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혼자서 지레짐작하는 것은 안 좋은 버릇이었다.
“왜 저한테 도와달라고 안 한대요?”
“저도 권해보긴 했는데, 아이를 낳으실 때까지는 서로 안 볼 거라고 하셨습니다.”
“진짜 고집은 세서.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닌데. 죄송하지만 휴대폰 좀 빌릴 수 있을까요? 승건이한테 연락 좀 하게요.”
“채훈 씨께서 직접 하시게요?”
“네. 할 말이 있어요. 심각한 건 아니고. 도와줄 수 있으면 돕게요.”
채훈은 놀란 눈을 한 심정민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심정민이 부탁한다면서 잠금을 푼 휴대폰을 넘겼다. 화면에는 이미 승건의 번호가 찍혀 있었다. 채훈은 망설임 없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연결음이 한참 동안 울렸다. 그동안 채훈은 바짝 긴장하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빠르게 정리했다. 하지만 승건은 전화를 받지 않았고, 연결음은 부재중이라는 멘트로 넘어가고 말았다.
심정민이 심상치 않음을 알았는지 얼른 말을 붙였다.
“지금 사진 촬영 중이실 겁니다. 그래서 못 받으실 수도 있어요.”
“한 번 더 시도해 볼게요. 이거도 안 되면 나중에 또 하죠.”
심정민이 조급하게 굴었지만 채훈은 편안하게 웃어주었다. 겨우 전화 한두 번 안 받는다고 포기할 건 아니었다. 이번에도 연결음은 길게 이어졌다. 정말 나중에 연락해야겠다고 막 휴대폰을 귀에서 떼려는데 목소리가 울렸다.
―네. 실장님.
3개월 만에 듣는 승건의 목소리에 채훈은 해야 할 말을 한순간에 잊어버렸다. 마치 벼락에 맞아 감전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기분이 나쁘다기보다는 바짝 긴장하고 말았다.
―실장님?
“어……. 나야. 강채훈.”
―……!!
채훈은 더듬거리지 않고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다행이라고 속으로 한숨을 삼키는데. 뒤늦게 승건이 낮게 숨을 들이쉬는 게 휴대폰 너머로 들려왔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 정적에 승건이 얼마나 놀랐는지 알 수 있었다.
“여보세요? 들려?”
―들려. 네가, 네가 어떻게 심 실장님의 번호로 연락을 해? 무슨 문제가 생긴 거야?
“아니. 문제는 없어. 너랑 할 말이 있어서 심 실장님 휴대폰을 빌렸어. 번거롭겠지만 내 휴대폰으로 전화 걸어줄 수 있어? 내가 전화 걸면 심 실장님에게 넘어가 버리거든. 아, 그렇지. 지금 바빠? 안 되면 나중에 통화해도 돼.”
깊은 이야기를 하기에는 바로 앞에 앉아 있는 심정민이 너무 신경 쓰였던 채훈은 장소를 옮기려고 했다. 다행히 승건은 나중에 하자고 하지 않았다.
―통화할 수 있어. 내가 전화할게. 잠시만.
“응.”
승건과의 통화를 끝낸 채훈은 심정민에게 휴대폰을 넘겼다. 의아해하는 심정민을 두고는, 잠시 실례하겠다며 휴대폰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에 쥔 휴대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채훈은 서둘러 테라스를 향해 움직였다.
*
*
실외에 있는 테라스로 나오자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채훈은 바람을 피해 테라스 모퉁이에 서서 전화를 받았다.
“응. 나야.”
―무슨 일이야?
긴장한 와중에도 채훈은 승건의 말투는 평생 변하지 않고 그대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버렸다. 분명 놀랐을 텐데도 어느새 평정심을 유지하다 못해 무뚝뚝하기까지 했다.
그런 녀석에게 묻고 싶었다. 왜 목숨을 걸었냐고 말이다.
11년 전에는 죽음의 위기에서 본능이 작용한 것이라고 했다. 그럼 지금은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하와이에서 승건이 좋아한다고 했던 말과 겹쳐져 심란해졌다.
채훈은 불쑥 본심이 튀어나올까 봐 정신을 다잡았다.
“아까…… 아까 우연찮게 너 나오는 뉴스를 봤어. 엄청 말랐더라. 그래서 심 실장님에게 너 어디 아프냐고 물어봤거든. 그러니까 그냥 안 좋은 거라고 하시는데……. 심 실장님이 일부러 거짓말을 하실 때도 있을 거잖아. 그게 좀 찜찜해서. 너 정말 괜찮아?”
―괜찮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채훈은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을 술술 했다. 승건이 뭐라고 하는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승건의 반응은 예상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다. 자존심 때문인지, 혹은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조금쯤은 솔직하기를 바랐다.
“괜찮기는. 그렇게 살이 빠졌는데, 괜찮을 수 없잖아.”
―잠을 못 자서 그래. 기억이 돌아오고 있거든.
“그럼 나한테 할 말은 없어?”
―……없어.
고집스러운 말투에 채훈은 다 알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눈앞에 있었다면 멱살을 잡고 흔들었을지도 몰랐다.
“나랑 좀 보자. 내일 어때? 시간 있어? 바빠? 내가 서울에 갈 테니까, 잠시만 시간 내줘. 길게는 아니어도 괜찮아. 30분 정도?”
―서울에 온다고?
“응. 너 얼마나 말랐는지 얼굴 좀 보려고. 겸사겸사 부정 각인이 어떻게 됐는지 중간 점검도 하고. 네가 싫고 짜증 나고 그러는 건 아니니까 멀리서 얼굴 보는 것 정도는 되겠지. 안 그래?”
―강채훈.
승건이 위협하듯이 으르렁거리며 이름을 불렀지만 채훈은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녀석은 지금 바다 건너 먼 곳에 있었다.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몸은 조금 오싹했다. 아직 부정 각인이 사라진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그래도 채훈은 뻔뻔하게 버텼다. 승건이 경고의 뜻으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기는 했지만, 거기에는 분명 난처하다는 의미도 있었다.
“내일 시간 안 돼? 그럼 모레도 괜찮아. 가능한 한 빨리 보는 게 좋겠어.”
―어떻게 될지 아무도 장담 못 한다는 건 알아? 게다가 넌 임신까지 했어. 더 위험해.
“멀리서 본다니까. 자꾸 그러면 너네 집으로 찾아간다? 비밀번호는 바뀌었겠지만, 대문 앞에서 드러누우면 심 실장님이 알려주시겠지.”
―너…….
“네가 집에 안 오면, 다시 대문 앞에 드러누울 거야.”
승건의 말문이 막히자 괜히 흥겨워진 채훈은 아무 말이나 마구 했다. 얄팍한 협박이었지만 지금의 승건에게는 통할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래도 구석으로 몰아치기만 하기보다는 도망갈 곳을 만들어줘야 했다.
“내일 30분만 시간 내줘. 그거면 돼. 승건아.”
―……내가 갈게.
“응?”
―내가 간다고, 제주도에. 내일―
“아니, 오늘 와. 그러니까, 오늘 저녁에 스케줄 없으면 오라고. 비행기는 9시까지 있으니까. 그래서 내일 아침 비행기 타고 돌아가면 되잖아. 내일 날씨 좋대. 비행기 뜰 거야.”
승건이 온다는 소식에 놀랐던 채훈은 저도 모르게 오늘 오라고 해버렸다. 억지였다. 그래도 어쩌면 내일 승건에게 급한 일이 생길지도 몰랐다.
아니, 다 변명이었다. 하룻밤 자고 나면 자신의 마음이 변할 것 같았다. 이런 일은 마음먹은 김에 빨리 마무리하는 게 좋았다.
―강채훈. 정말 아무 일도 없는 거지? 설마, 오늘 검사 결과가 나빴거나 그런 거야?
심각한 상황을 상상한 승건의 목소리가 너무 다급하게 울리는 바람에 채훈은 웃음을 터트리고 싶은 것을 꾹 참아야 했다. 자신이 너무 이상하게 굴고 있다는 자각은 있었다. 그래도 그걸로 불치병을 떠올리는 승건 때문에 웃겼다.
채훈은 임신 내도록 건강했다. 우울증세가 있는 것 말고는 나머지는 평균 이상이었다. 빈혈은 정도가 약한 편이었고, 입덧도 거의 없었다. 의사가 다른 임산부들에 비하면 축복을 받은 거라고 했을 정도였다. 운동만 좀 더 강도 높게 할 수 있었다면 정말 완벽했을 것이다.
“멀쩡해. 아픈 곳 없어. 그래서 안 올 거야?”
―지금 바로 출발할게.
“몇 시 비행기인지 메시지 보내.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그러지 마.
“안 가르쳐주면 지금부터 기다리고.”
유치한 협박이었지만 채훈은 진지했다. 그리고 승건은 기막혀했다.
―너 오늘 왜 이래?
“너 기다리고 싶어서. 기다리다가 안 오면 마지막 비행기 타고 서울로 가서 너희 집 대문 앞에 드러누울 거야.”
채훈은 앞서 했던 모든 협박을 종합했다. 스스로가 말하고도 살짝 부끄럽기는 했지만 그럴 마음은 넘쳐났다. 휴대폰 너머에서 승건이 소리 없이 탄식했다.
―진짜……. 알았어. 메시지 보낼게. 그래도 공항에서 기다리지 마. 날씨 추워.
“이따가 보자.”
기다리지 않겠다는 말은 꿀꺽 삼켜버린 채훈은 얼른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조금 기다렸지만 승건에게서는 다시 연락이 오지 않았다. 이걸로 공항에서 기다리는 것은 확정이었다.
채훈은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심정민이 노골적으로 궁금해하는 눈을 하고 있었다. 채훈은 심정민의 궁금증을 해결해 주었다.
“승건이 제주도로 올 거예요.”
“네?”
“승건이가 절 각인한 거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안 했어요. 그러니까 심 실장님도 모르는 척해 주세요. 제가 뉴스 사진 보고 승건이 아프냐고 물었는데 심 실장님이 그냥 안 좋다고 하는 바람에 확인차 전화한 거라고 했거든요. 혹시나 알고 있다고 하면 안 온다고 버틸까 봐요. 나중에 제가 승건이 보면 따로 말할게요. 부탁드려요.”
승건이 언제까지 괜찮다고만 할 건지 궁금했다. 다행히 심정민이 도와주겠다고 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런데 무슨 말씀을 하셨기에 도련님께서 제주도에 온다고 하시는 겁니까?”
“안 만나주면 승건이네 집 대문 앞에 드러눕는다고 했어요. 진짜 그럴 생각이었고요. 제가 깽판 치기 전에 심 실장님이 비밀번호 알려주실 테니까요.”
채훈은 별것 아닌 것처럼 말했다. 유치한 협박이었지만 승건에게 잘 통하면 그만이었다. 노련하기 짝이 없는 심 실장조차 무모한 짓이라는 눈빛을 보내왔지만 채훈은 싱긋 웃었다. 이런 일은 오래 고민하기보다는 재빨리 행동으로 옮겨야 하는 법이었다.
“고맙습니다.”
승건을 아끼는 심정민의 인사에 채훈은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승건을 도와주겠다고 한 것은 선의였다. 그가 비쩍 마른 꼴도 싫고, 아픈 것도 싫었다.
3개월 동안 승건과의 관계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승건이 출산 때까지 모든 것을 스톱한 이유가 있었다. 아이의 이름부터, 친권, 양육권에, 결혼이나 주거 문제까지 모두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물론 채훈은 출산 전까지 자신의 입장을 정리해야 했다. 사실 아직 아무것도 결정한 것이 없었다. 그러니까 승건을 도와주는 김에 겸사겸사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어떻게든 마음이 정해지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그렇게 변명거리를 마구 생각하던 채훈은 가슴 한쪽에서 팔랑거리는 설렘을 인정했다.
승건이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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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건의 제주행 비행기 티켓을 예매한 사람은 심정민이었다. 바로 코앞에서 심정민이 예매하는 것을 지켜본 채훈은 승건의 출발 시간을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그래도 승건은 착실하게 출발 시간을 메시지로 보내왔다. 오후 6시 30분 비행기로, 도착은 7시 40분이었다.
심정민은 채훈이 승건의 각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을 숨겨주었다. 그리고 승건은 채훈이 다른 병에 걸린 게 아닌가 의심하면서 검사 결과표를 확인하라고 심정민을 닦달했다. 그것도 채훈의 눈앞에서 통화가 이루어졌다.
모든 상황이 잘 굴러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채훈은 잠시 집에서 쉬었다. 밤에는 더 추워질 거라며 걱정하는 김혜진이 내민 목도리를 칭칭 감은 채 시간 맞춰 공항으로 향했다. 심정민도 김혜진도 모두 함께였다.
차가 조금 막히기는 했지만 공항에서 기다린 지 5분도 지나지 않아 승건이 탄 비행기가 도착했다. 채훈과 채훈의 일행은 입국장 게이트에서 조금 떨어진 자리에 섰다.
전광판에 반짝이는 알림을 보며 채훈은 승건을 부르길 잘했다고 스스로를 칭찬했다. 저 너머에 승건이 있다고 생각하자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반, 보고 싶은 마음이 반이었다. 하루를 더 기다렸다면 밤잠을 설치고 말았을 것이다. 그리고 최악의 컨디션으로 승건을 보기 싫어했을 수도 있었다.
입국장 게이트에서 외국 관광객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우루루 몰려나왔다. 무슨 행사라도 있는 건지 단체복을 입고 있었다. 그 수가 제법 많아서 조금 한적하던 입국장 내부가 금세 북적거렸다.
타이밍이 나쁘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게이트를 나오는 사람들 사이로 키가 훌쩍 큰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채훈은 한눈에 승건을 알아보았다.
큰 키와 잘생긴 얼굴은 확실히 압도적이었다. 짙은 남색 코트도 잘 어울렸다. 그리고 말랐다. TV에서 보여준 영상보다 훨씬 심한 것도 같아서 절로 신경이 쓰였다. 턱도 콧대도 두드러져서 인상이 전체적으로 날카로워 보였다. 미남인데 악당 같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승건과 눈이 마주쳤다.
채훈은 딱딱한 표정의 미남을 향해 웃어주었다. 다만 그에게 다가가는 대신에 가만히 서서 기다렸다. 오히려 승건을 알아본 심정민이 얼른 마중을 나갔다.
승건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자 심장이 두근거리며 크게 뛰었다. 긴장하고 있는 것인지 겁먹고 있는 것인지 구분하기는 힘들었다. 그래도 뒤돌아 도망치고 싶을 정도는 아니었다. 정확하게는 승건을 여기까지 불러낸 자존심 때문에라도 버티고 서 있어야 했다.
가까이 다가온 승건이 채훈과 적당히 거리를 두고 멈췄다. 예닐곱 발걸음 정도의 간격은 얼핏 보면 같은 일행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진짜 왔네.”
“집 앞에 드러누울 거라며. 무슨 일이야? 아니, 여기서 이러지 말고 장소부터 옮기자.”
“여기도 괜찮아. 저기, 잠시만 자리 좀 비켜주세요. 둘이서만 할 이야기가 있거든요.”
채훈이 심정민과 김혜진에게 양해를 구했다. 심정민과 김혜진은 서로의 눈치를 보고 곧 멀찍이 떨어진 곳으로 피했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승건이 인상을 썼다.
“무슨 말을 하려고 이래?”
“나 좋아해?”
조급해하는 승건을 향해 채훈은 짜장면 좋아해? 와 같은 느낌으로 질문을 툭 던졌다. 순간 승건이 괴상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귀에 문제가 생긴 건지 의심하는 눈치였다. 저 순간이 얼마나 당황스러운 건지 아는 채훈은 친절하게 한 번 더 물었다. 분위기가 험악하지 않게 웃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 좋아하냐고 물었어.”
“……그래.”
“그럼 나와 사귈래?”
이번에는 승건이 얼어버렸다. 커다란 망치로 뒤통수를 후려 맞은 것 같기도 했다. 그 모습에 채훈은 눈까지 휘며 활짝 웃었다. 왠지 재회했을 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때는 겨울밤이었다. 컴컴한 식당 골목에서 승건이 자자고 하는 바람에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른다. 지금은 자신이 승건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건 마음에 들었다.
사실은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다. 원래는 각인한 게 맞는지 확인하고는 그를 도와줄 마음이었다. 그런데 승건의 얼굴을 보자 저도 모르게 불쑥 좋아하냐는 질문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진짜 묻고 싶었던 것이긴 했다. 거기다 승건의 반응이 너무 재미있어서 여기까지 와버렸다.
이전만큼 그를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저 호의와 신경 쓰임 정도에서 갈팡질팡했다. 그래도 승건이 좋다고 한다면 제대로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사귀자고.”
“너 왜 이래?”
“사귈 거야? 말 거야? 그것부터 말해.”
“지금은 아니야.”
“나 좋아한다며? 뒤로 미루다가 내가 딴 놈이랑 눈이라도 맞으면 어떻게 하려고.”
반쯤은 농담이었다. 그리고 가능성 희박한 수많은 미래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웃으라고 한 소리였는데 승건이 바짝 긴장했다. 꽤나 떨어진 거리인데도 그의 목과 어깨에,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강채훈. 너는 네가 어떤 상태인지 알고 그러는 거야?”
“널 부정 각인 했지. 완전히 나아지지는 않은 것 같아. 그래도 여기까지는 가능해.”
채훈은 두 걸음 더 승건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여전히 손을 뻗어도 닫지 않을 거리였다. 그래도 이제는 서로 같은 일행으로 보일 정도이긴 했다.
“채훈아. 무리하지 마.”
“괜찮아.”
“네가 괜찮다는 말은 못 믿어.”
“나도 같은 마음인데. 날 각인했잖아. 그래서 살이 빠지고 있고. 왜 도와달라고 안 해?”
“어떻게…….”
승건이 인상을 구기더니 심정민이 있는 쪽을 향해 고개를 휙 돌렸다. 정보가 흘러나갈 곳은 심정민밖에 없었다.
“심 실장님 노려보지 말고. 부작용이 심각하잖아. 그 정도로 살이 빠진 거면.”
“잠을 못 자서 그렇다니까.”
“나 페로몬 조절 잘해. 거의 완벽하게. 나한테서 페로몬향기 안 맡아지지?”
“……?”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냐는 듯 승건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간의 기억을 떠올린 채훈은 일부러 활짝 웃어 보였다.
서른 살에 오메가로 발현한 채훈은 페로몬 조절 따위는 조금도 하지 못했다. 페로몬을 감추지 못하는 것이 예의가 아니라는 것은 알았지만 자신이 그래야 한다는 인식 자체가 없었다.
그러다가 한국에 와서 기초 교육을 받으면서, 형질자가 페로몬을 흘리고 다니는 것이 일종의, 잠자리 상대를 찾는다는 신호로 쓰인다는 설명에 부끄러워 죽을 뻔했다.
임신한 오메가의 페로몬으로는 알파를 유혹하지 못했다. 그래도 필사적으로 페로몬을 조절하는 방법을 배웠다. 자전거를 타는 방법이나 수영을 배우는 것처럼 처음은 힘들었지만 한 번 익숙해지니까 쉬웠다. 그리고 요령이 생기면서 완벽하게 감출 수 있게 되었다.
꽤나 힘든 연습이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여러모로 도움이 되었다. 페로몬 접촉은 대부분 직접적으로 일어났지만 간접적으로도 충분히 가능했다.
“네 입버릇대로, 내가 부정 각인을 했지만 방법은 있어. 그래도 나랑 아무 상관도 없는 알파를 수고롭게 도와주고 싶지 않아.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페로몬 묻히고 다니는 건 별로야.”
“그래서 사귀자고? 너는 나 안 좋아하잖아.”
“옛날만큼은 아니지만……. 너랑 잘해보고 싶기도 해. 이번에는 아무 조건 없이. 계약도 하지 말고. 조심스럽게 만나보다가, 서로 안 맞으면 헤어지면 되니까. 뭐.”
“너는 왜 자꾸 헤어진다고……. 하아.”
승건이 한숨을 쉬면서 커다란 손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다. 피곤해 보이는 몸짓이었다.
“싫으면 싫다고 해도 되는데. 지금은 아니라면 나중에 나랑 잘되고 싶은 마음은 있는 거잖아. 너도 알겠지만 아기도 나도 건강하고. 그리고 내가 기분이 좀 그래. 몰랐으면 모르겠는데, 네가 너무 살이 빠진 걸 보니까 모르는 척은 못 하겠어. 아이를 낳을 때까지 기다려도 버틸 수 있다는 건 알지만……. 에이, 도와주려는 건데. 내가 매달리는 꼴이잖아. 안 사귀어도 돼. 그냥 페로몬 접촉이나 하자. 직접적으로 말고 간접적으로.”
구구절절 설득하던 채훈은 내가 왜 이러고 있나 싶었다. 싫다고 하는 녀석에게 억지로 사귀자고 하는 것도 웃겼다.
잠시 생각을 하던 승건이 똑바로 채훈을 쳐다보았다.
“각인은 잘 깨지지 않아. 집착은 본능이야. 그렇게 생겨먹기는 했지만…… 그것 때문에 널 좋아하는 건 아니야.”
그건 안다. 단지 각인했다고 해서 좋아할 수는 없었다. 특히 승건의 성격이라면 더 그랬다.
“언제부터 날 좋아한 건데.”
머릿속에 맴돌던 의문이 불쑥 튀어나왔다. 하와이에서 승건에게 고백을 받은 이후로 계속 궁금했다. 승건도 자신을 좋아하지 않을까 기대한 적도 있었지만 그래도 정확히 언제부터인지 궁금했다.
“생일 선물로 팔찌를 줬을 때쯤에.”
“그럼 좋아하는 게, 내가 생각하는 방식이 아니라는 건 뭐야?”
“한 번 손에 쥔 건 잘 놓지 않아. 그게 물건이든, 사람이든.”
“집착이 심하다는 소리잖아.”
“맞아. 나도 궁금한 게 있어. 너야말로 언제부터 날 좋아한 거야?”
집착이 심한 건 별로 좋은 성격이 아니라고 생각하던 채훈은 기억을 더듬었다. 확실하게 깨달은 것은 스쿼시를 하러 간다는 승건을 배웅하던 순간이었다. 왠지 낯부끄러운 기억이라 언제인지 특정해서 말하고 싶지 않았다.
“너보다 더 전에……. 그런데 정말 티가 안 났어? 혼자서 바보 같은 짓 많이 했는데. 아니, 이건 됐어. 그것보다 어떻게 할 거야?”
또다시 바보 같은 짓을 할 뻔했던 채훈은 얼른 대화를 수습했다. 샛길로 빠진 건 자신이었으니 바로잡는 것도 자신이어야 했다.
그런데 승건의 대답은 채훈이 예상하지도 못한 것이었다.
“같이 있고 싶어.”
“……?!”
“끌어안고, 키스를 하고, 섹스를 하고, 그리고 내일 아침에 같이 눈을 뜨는 게 당연하기를 바라.”
어떤 수식어도 없는, 노골적인 고백이었다. 밝은 불빛 아래 딱딱하게 서 있는 승건은 더없이 진지하면서도 어딘가 초조해 보였다.
거짓 따위는 없는 고백에 채훈은 다시 귀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예전에는 자신 혼자만 좋아한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아니었다.
그래도 채훈은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사귀기는 싫다며.”
“결혼은 어때?”
채훈은 결혼부터 하자는 승건을 빤히 바라보았다. 계약을 좋아한다는 녀석은 국가 공인 서류에 도장부터 찍으려고 하고 있었다. 성격은 여전했다.
“결혼은 무슨. 왜 자꾸 딴소리야. 사귀자고는 안 할 테니까, 페로몬 접촉부터 해. 안 한다고 하면 너네 집 대문 앞에 드러누울 각오가 있어.”
“왜 자꾸 드러눕는다고 해. 위험하게.”
“그렇다고 딴 알파를 만나고 다닐 거라고는 못 하잖아. 그러길 바라?”
“강채훈.”
승건이 경고의 의미로 이름을 불렀지만 채훈은 아무렇지 않다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유치한 건 알지만 이상한 곳에서 고지식한 녀석을 설득하려면 이게 제일 효과적이었다.
“살이 많이 빠져서 미모가 많이 죽었어. 반짝거리던 피부도 상했고. 난 네 얼굴이 맘에 드는데, 좀 그래.”
스스로 말하고도 유치해서 소름이 끼쳤다. 손등이랑 팔을 긁고 싶은 것을 꾹 참으며 채훈은 진지하게 굴었다.
“너…….”
“그냥 한다고 해. 방법이 있다니까.”
“알았어. 도와줘. 부탁해.”
도와달라는 승건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눈빛도 형형했다. 왠지 나중에 두고 보자고 하는 것처럼 들리는 바람에 채훈은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마치 고등학교 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실없는 농담을 하다가 결국 웃고 넘어가던 그때로 말이다.
“그것 말고 다른 말은?”
“좋아해.”
승건의 좋아한다는 고백에 채훈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다른 말을 듣고 싶었지만 좋아한다고 하니까 설레고 말았다. 왠지 귀가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한 번만 더 말해 봐.”
“널 많이 좋아해.”
“고맙다고도 해줘.”
엎드려 절 받기였지만 그래도 고맙다는 소리는 꼭 듣고 싶었다. 그러자 승건이 웃었다.
“미안해.”
“……?!”
“미안하고, 고마워. 강채훈.”
많은 것이 담긴 울림이었다. 아직 해결해야 하는 문제들이 잔뜩 남아 있었다. 자신은 여전히 승건에게 부정 각인을 한 상태였고,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그런데도 홀가분했다.
삶의 모든 것이 완벽할 수는 없었다.
살다 보면 구르고, 깨지고, 다치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사람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서로 오해하고, 상처를 주고, 밑바닥을 드러낸다. 그래도 결국 여기까지 왔다. 멀리 돌아서 서로를 마주했다.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몰랐다. 서로를 조금씩 이해하고 가까워지다가 또다시 파국으로 굴러떨어질 수 있었다. 혹은 부정 각인이 영원히 풀리지 않을 수도 있었다. 무엇도 확실할 수 없었다.
그래도 구르고, 깨지고, 다치는 길을 승건과 함께 하기를 바랐다.
그 마음을 담아 채훈은 활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