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권-【15. 정리】 (16/26)

  【15. 정리】

똑똑똑.

노크 소리에 승건은 잠시 이곳이 어디인지 생각해야 했다. 지금은 점심시간이었고, 자신은 사업 미팅으로 이른 점심을 먹고 돌아와서는 휴게실에서 잠시 쉬는 중이었다.

그리고 잠깐 눈을 감고 조는 사이에 11년 전의 기억을 하나 되찾았다.

꿈에서 자신은 열아홉 살의 고등학생이었다. 여름 방학이 끝나고 며칠 지나지 않아 학교 냉방 시스템이 고장 나고 말았다. 9월 초였지만 늦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학교장은 정규 수업 후에 하교를 결정했고, 뜻하지 않은 자유를 얻은 학생들은 물론이고 선생님들도 환호했다.

물론 3학년들은 마냥 좋아하지 못했다. 수능이 100일밖에 남지 않은 시점에서 자습을 대신할 장소를 찾아 떠돌아다녔다.

승건은 채훈과 함께 학교 근처에 위치한 카페를 찾았다. 승건이 살고 있는 빌라는 에어컨 설비가 완벽했다. 하지만 남태호가 커피를 쏜다며 카페로 가자고 선동했고, 채훈을 비롯한 다른 녀석들이 가자고 환호해 버렸다. 승건도 모르는 척 따라갔다.

전교 1등을 거의 놓치지 않는 채훈은 굉장한 집중력으로 문제집을 풀어갔다. 그리고 채훈의 맞은편에 앉은 승건은 3일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예정과 다른 이른 러트가 찾아온 것을 모르고 등교를 했던 승건은 고열로 쓰러지고 말았다. 약을 먹어도 상태가 좋아지지 않아 양호실에 누워 심정민을 기다렸다. 그리고 점심시간이 끝날 때쯤에 찾아온 채훈이 도둑 뽀뽀를 하려다 말고는 돌아가 버렸다.

꿈을 꾼 건 아니었다. 입술이 뺨에 닿으려고 하는 순간에는 정신이 멀쩡했기 때문이었다.

아파서 잠들어 있는 사람의 뺨에 뽀뽀를 하려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강채훈은 최승건을 좋아했다.

채훈의 호의는 사람을 가리지 않고 한결같았다. 채훈은 제 주변 사람들에게 헌신적인 성격이었다. 전학생인 승건을 꼼꼼히 챙겼고 그러다 친해지면서 이제껏 어울렸다.

열아홉 살의 승건은 이제껏 채훈에게서 딱히 특별한 신호를 느끼지 못했다. 그랬기에 맞은편에 앉은 채훈을 바라보며 복잡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때의 기분과 동화된 서른 살의 승건은 채훈이 자신을 좋아한다고 말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갓 발현한 오메가의 페로몬을 잔뜩 뿌려대던 채훈의 모습이 너무 선명했다.

그렇게 꿈과 현실의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는데 다시 한번 더 노크 소리가 울렸다.

“들어오세요.”

소파에 기대어 있던 승건은 느릿하게 상체를 일으켜 바로 앉았다. 이 시간에 약속을 잡은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예상대로 심정민이 문을 열고 나타났다.

“혹시 제가 깨운 겁니까?”

승건이 눈가를 누르고 있자 심정민이 걱정스럽게 물어 왔다. 최근 승건의 수면 시간은 아슬아슬할 정도로 줄어 있었다. 하루에 채 세 시간을 자지 못한 기간이 한 달쯤 되었다. 수면제도 소용없었다. 이동 중에, 휴식 시간에 쪽잠을 잤지만 그것도 채 10분 내외가 전부였다.

잠이 부족해지면 사람은 바짝 말라간다. 승건의 체중도 수면 시간에 비례해 줄어들었고, 심정민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잘 만큼 잤습니다. 보고서부터 주세요.”

승건이 손을 내밀자 심정민이 황색 종이로 된 서류 봉투를 건넸다. 묵직한 무게의 봉투에서 두꺼운 서류를 꺼내던 승건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제일 위쪽에 첨부된 채훈의 사진이었다.

파란 하늘 아래 제트 스키를 타고 있는 채훈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어제 오후에, 여행사에 연락을 해서 귀국 일정을 늦춰달라고 했습니다. 원래라면 다음 주 화요일 비행기로 돌아올 예정이었는데, 한 달을 더 하와이에서 머무를 것 같습니다.”

“한 달이라…….”

한 달이라는 시간을 가늠하며 승건은 재빠르게 보고서를 읽어나갔다. 별다를 건 없었다. 채훈은 하와이에서 잘 지내고 있었다.

몇 장의 사진을 더 살피던 승건은 인상을 썼다. 제트 스키를 타고 샌드위치를 먹고 있는 채훈의 옆에는 같은 얼굴의 남자가 계속 보였다.

이름은 김경민. 스무 살의 대학생. 그리고 알파였다. 김경민과 그의 친구들은 채훈과 같은 민박집에 묵으면서 하와이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하…….”

승건은 저도 모르게 헛숨을 내쉬었다. 사람 속을 까맣게 타들어가게 만들어놓고는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을 보자니 뭐라 말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미국으로 출장을 가 있는 동안, 채훈에게서 아무런 연락이 없었을 때는 그럴 수 있다 싶었다. 서로에게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한국으로 돌아왔더니 채훈이 사라지고 없었다. 병원은 이미 퇴사 처리된 상태였다. 오피스텔에는 물건이 그대로 남아 있었지만 사람이 오랫동안 드나들지 않은 모습이었다. 휴대폰은 내내 꺼져 있었다. 그의 가족들도, 그리고 서주명도 채훈이 멀리 여행을 떠났다고만 했다. 목적지가 어디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승건은 고민 없이 채훈의 카드 사용 내역을 뒤졌다. 여행사가 가장 눈에 띄었다. 그리고 7월 중순 이후로는 미국 하와이에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거기까지 알아내는 데 딱 5일이 걸렸다. 그리고 채훈을 찾는 것에는 그로부터 일주일이 더 필요했다.

채훈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냈지만 승건은 당장에 하와이로 날아갈 수 없었다. 최소 이틀이라는 시간을 통째로 비울 만한 여유가 생기지 않았다.

그렇게 다시 일주일이 지나는 동안에 채훈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에 대한 정보들이 지금 승건의 손에 들려 있었다.

계획적으로 도망쳤다고 보기에는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신용카드 사용 내역이나 출국 기록 등은 개인 정보이긴 했지만, 조금만 수고를 들이면 알아보는 건 손쉬웠다. 자신에게는 그럴 힘이 있었고, 채훈이 그걸 모를 리 없었다.

자신을 골탕 먹이기 위해 일부러 여행을 갔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장기 출장을 간 시기를 고른 것도 그렇고, 휴대폰이 꺼져 있는 것도 그랬다. 그러고는 다음 주 화요일의 귀국을 뒤로 미루었다.

보란 듯이 시위를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것도 젊다 못해 어린 알파 옆에서 말이다.

승건은 속으로 혀를 찼다. 지금 자신은 채훈의 문제에 관해서는 제정신으로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채훈이 의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믿고 싶었다.

질투의 색은 탁하다는 것을 얼마 전에 깨달았다. 서주명과 써니가 채훈의 주위에서 얼쩡거리는 것이 신경에 거슬렸다. 그러나 이번에는 질투가 아니었다. 제 것을 잃어버린 기분이었다.

얼마 전까지 채훈에 관한 승건의 입장은 한결같았다. 채훈을 좋아하고 그로 인해 감정적인 동요가 있음을 인정했지만, 그랬기에 계약 기간까지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젠 달랐다. 더 이상 이해득실을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것이었다.

오메가의 페로몬이 알파를 어떻게 미치게 하는지 이번에 처음 알았다. 발현으로 인한 고열에 끙끙 앓고 있는 채훈을 보고 있자니 본능이 명령했다. 저 오메가가 내 것이라고 말이다. 이성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명령에 혼란스러웠다. 자신의 상태를 인정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계약을 파기한 건 채훈이 힘들어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려고 했다.

계약 같은 거 없이, 자유롭게 만나기를 바랐다.

그런데 채훈이 도망쳐 버렸다. 자신이 쉽게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빤히 알면서도 지구 반대편으로 훌쩍 날아갔다.

어린 알파와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사진을 한 번 더 확인한 승건은 인상을 구겼다.

“다음 주 주말에 제가 직접 하와이에 갈 겁니다. 스케줄을 조정해 주세요. 일요일에……. 늦어도 월요일 오전에 돌아올 수 있게 하고, 그리고 경호팀은 최소한만 대동하겠습니다.”

“한창 바쁘시지 않습니까. 그것보다 사람을 보내어 강채훈 씨를 데려오는 게 어떻습니까?”

다음 주까지 승건의 스케줄은 빡빡했다. 태화 그룹 창립 기념일에 맞춰 은둔 중인 정규완 회장이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낼 예정이었다. 정규완 회장을 수행하게 될 승건은 준비할 게 많았다. 그래도 기념일만 지나면 어느 정도 시간을 낼 수 있었다.

“이렇게 정성스럽게 도망갔는데, 직접 가야죠. 계속 지켜보고 이동 경로를 파악해 두라고 하세요.”

승건의 뜻이 강경하자 심정민이 알았다고 하고는 물러났다. 아직 점심시간이 꽤 남은 상태였다. 승건은 남은 보고서를 몇 장 더 넘기다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짧은 기억을 되찾았다. 최근 잠이 줄어든 이유 중의 하나는, 잃어버린 기억이 하나씩 떠오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채훈이 도둑 뽀뽀를 할 때까지, 그가 자신을 좋아하는지 눈치채지 못했다. 그리고 서른 살이나 먹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나름 예민한 편이라고 자부했는데도 채훈이 직접 좋아한다고 말하기 전까지 까맣게 몰랐다.

매주 만나 몸을 섞었어도 채훈은 언제나 거리를 재며 벽을 확인했다. 샐쭉하니 웃으며 안겨 있다가도 손쉽게 훌쩍 떠났다. 그런 그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했을 때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아니, 미리 알아차렸더라도 달라질 건 없었다. 귀찮아했든가, 무시했거나, 혹은 채훈의 말대로 헤어졌을 터였다. 고백의 시기가 공교로웠다. 그게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지금에서야 아무래도 좋았다.

두통을 참지 못한 승건은 진통제를 챙겨 먹고는 눈을 감았다. 진통제 외에도 수면제, 신경 안정제까지 먹고 있지만 효과는 별달리 없었다.

승건은 지난 10년 동안 자신이 겪은 상상 각인의 부작용이 경증이라는 것을 이번에야 알았다. 각인한 상대와 장기간 떨어져 있는 것은 신체 기능 자체를 떨어트려 놓았다. 채훈을 하루빨리 붙잡으러 가야 할 이유 중 하나였다.

다시는 도망가지 못하게 채훈을 지하감옥에 가두거나 족쇄를 채워두는 상상을 하다가 관뒀다. 잘 어울리기는 하겠지만 아직 정신이 멀쩡했기 때문에 그래서는 안 된다는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채훈을 붙잡을 방법이야 많고 많았다.

“하와이라.”

하와이까지 도망간 채훈이 자신의 얼굴을 보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아주 기대되었다.

*

*

익숙하고도 낯선 풍경이었다.

10월의 가을밤이었다. 승건은 고등학생인 채훈과 나란히 걷고 있었다.

승건은 직감적으로 그날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자신이 기억을 잃어버린 그날 말이다.

수능이 채 3주도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런데 채훈은 아버지 때문에 등산을 가야 한다고 했다. 전교 1등을 도맡아 하는 채훈이었다. 하루쯤 쉰다고 수능을 망칠 리는 없었다. 하지만 만약이라는 게 있다. 밤낮으로 싸늘하다 못해 차가운 바람이 부는 겨울이었다. 만에 하나라도 감기에 걸리거나, 혹은 다리라도 삐끗해 버린다면 큰일이었다.

채훈의 부모님이 무신경하다고 종종 생각하긴 했었지만 오늘만큼은 진짜 화가 났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등산화를 빌려주겠다고 나서버렸다. 채훈이 의아해하긴 했지만 낙상사고를 방지하려면 운동화보다는 등산화가 나았다.

서른 살의 승건이 열아홉 살의 승건과 동조하며 채훈의 아버지에게 화를 내는 동안에 대화가 이어졌다.

“수의사가 되고 싶다고 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제 수의사는 싫어?”

“수의사도 괜찮지만, 경찰이 먼저야.”

“혹시나 모르니까 수능 치고 지망하는 학교의 수의대에 원서 따로 넣어봐.”

“음, 그건 생각해 봐야겠네.”

채훈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며 승건은 자신이 답지 않게 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채훈은 경찰대를 지망했다. 그의 성적이라면 무난하게 합격하긴 하겠지만 경찰 간부는 채훈과 어울리지 않았다.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지만, 특히 경찰과 같은 공권력 집단에서는 높은 곳으로 올라갈수록 능력만으로는 살아남지 못했다. 넉살 좋고 사람 챙기기를 좋아하지만 자신만의 원칙이 있는 채훈은 버틸 수 없었다. 경찰보다는 확실히 수의사가 어울렸다.

그러나 자신의 조언은 온전히 채훈을 위하는 마음만은 아니었다.

지망 대학에 따라 고등학교 친구들은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경찰대는 기숙사 생활을 했다. 지금처럼 매일 만나기는커녕 한 달에 한두 번 보기도 힘들어질 수밖에 없었다.

만약에 채훈이 경찰대를 가지 않으면 자신과 같은 대학에 입학할 거라는 유치한 생각도 있었다.

“저기야.”

“집 좋네.”

건널목 앞에 선 승건은 자신이 살고 있는 빌라를 가리켰다. 그러자 채훈이 이쪽을 보며 활짝 웃었다. 열아홉 살의 승건은 채훈의 미소에 넋이 나갔다. 그날의 기억을 관조하던 서른 살의 승건은 떨리는 가슴을 느끼며 잠시 숨을 멈췄다.

모든 감정은 논리로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그 순간이 그랬다. 반짝이는 호의가 담긴 미소를 보자 아무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저 정확하게 확인하고 싶어졌다. 그때 뺨에 입맞춤을 하려던 게 맞는지, 나를 좋아하는 게 맞는지 채훈의 입으로 들어야 했다.

“채훈아.”

“응? 왜?”

“너, 나 좋아하지?”

승건은 충동적으로 물었다. 눈을 크게 뜨며 당황하던 채훈이 해사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당연히 좋아하지. 안 좋아하면 너랑 친구 하겠냐?”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훈이 좋아한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건 승건이 바란 대답이 아니었다. 무어라 더 물을 순간에 타이밍 좋게 승건의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인은 외숙부의 개인 비서였다. 그의 연락은 결코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저도 모르게 인상을 쓰는데 그사이에 채훈이 전화를 받으라며, 자신은 샤프심을 사러 간다며 편의점 쪽으로 달려가 버렸다.

휴대폰을 손에 쥔 승건은 채훈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다가 욕설을 내뱉었다.

“미친…….”

미친 짓을 했다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다. 수능이 며칠 남지 않은 녀석을 뒤흔들려고 하는 거냐고 스스로를 호되게 질책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아무렇지 않게 회피해 버린 채훈 때문에 속상했다. 좋아한다는 고백을 받는 게 더 난감한데도 그랬다.

열아홉 살의 승건은 자신이 얼마나 애매한 위치에 놓여 있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재벌 3세라고 하지만 외할아버지는 자신에게 딱히 관심을 두지 않았다. 반대로 외숙부는 자신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며 악질적으로 괴롭혀댔다.

승건의 미래는 거의 정해져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적당히 자수성가하거나, 혹은 우성 알파라는 명목으로 정략결혼을 하게 될 것이다.

거기에 채훈이 끼어들 자리는 없었다. 그런데도 아쉽고 속상한 이유는 명백했다.

채훈이 자신의 뺨에 입맞춤을 한 그날부터 계속 의식하고 있었다. 채훈을 보면 가끔 숨이 막혔다. 옆에 있는데도 그리웠다. 이전까지는 아무렇지 않던 접촉에 혼자서 떨었다. 편안하고 좋아서 계속 함께 있고 싶었다.

어느 순간부터 채훈을 눈으로 좇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채훈을 떠올리며 간지럽고 시린 감각에 밤잠을 설치기도 했다. 사랑에 빠진 것처럼 구는 자신이 처음에는 한심했지만, 부정하지는 않았다.

채훈도 같은 마음인지 확인하고 싶긴 했지만 이렇게 아무 준비 없이 저질러버릴 줄은 스스로도 몰랐다. 민망하고, 부끄럽고, 그리고 격정적인 마음이 마구 뻗어나갔다.

편의점에서 돌아오는 채훈에게 키스를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까지 해버리는 바람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이런…….”

날것의 감정에 승건은 당황하고 말았다. 그래서 불길한 소리를 내며 달려오는 승합차의 존재를 뒤늦게 알아차렸다.

승합차에서 남자 셋이 뛰어내려 순식간에 승건을 둘러싸고는 다짜고짜 가방을 잡아당겼다. 승건의 신체적 조건은 뛰어났지만 성인 남자 셋을 상대할 수는 없었다.

잠시 저항하기는 했지만 중간에 채훈이 끼어들지 않았다면 그대로 끌려갔을 것이다. 하지만 아슬아슬한 균형은 한 남자가 칼을 꺼내 들면서 무너졌다.

승건은 채훈을 향해 칼을 휘두르는 남자 앞을 막아섰다. 칼날은 짧았지만 찔린 곳이 나빴다.

그것으로 전세는 순식간에 불리해지고 말았다. 우악스러운 손길에 끌려가면서 승건은 채훈을 걱정했다. 이렇게 무모한 납치를 시도한 사람이 누군지는 대충 짐작 갔다. 혼수상태로 누워 있는 아버지의 유산 때문에 친가 쪽 친척들이 예민해져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채훈은 이번 일과 아무 관련도 없는 사람이었다.

“빨리. 빨리!”

납치범의 다급한 외침에 승합차가 재빠르게 출발했다. 승건은 채훈만큼은 살려야 한다 생각했지만 다친 상처 때문에 자신을 내리누르고 있는 무게를 떨쳐내지 못했다. 무력감에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은데 채훈이 먼저 움직였다.

엄청난 소리와 함께 승합차가 전봇대를 들이박고 멈췄다. 충격이 승건의 온몸을 두드려댔다. 정신이 하나도 없는 와중에 채훈의 손에 이끌려 승합차 밖으로 나왔다.

바닥에 주저앉은 승건은 어지러운 와중에도 채훈의 이마에서 피가 흘러내리는 것을 알아보았다. 붉은 피가 오른쪽 얼굴을 적시는 것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승건아, 괜찮아?”

“너, 머리에서 피 나.”

“괜찮아. 이거 별로 안 아파. 너는……. 아니, 아니지. 119부터.”

그 와중에도 채훈은 괜찮다고 하면서 휴대폰을 들고 허둥거렸다. 그러나 헛손질만 하던 채훈이 그대로 승건 쪽을 향해 고꾸라지고 말았다. 얼떨결에 채훈을 붙잡고 안은 승건은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채훈아. 강채훈.”

승건은 힘이 없는 목소리로 채훈을 불렀다. 흔들어보기까지 했지만 채훈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대로 채훈이 죽을 것 같았다. 사람의 생명은 끈질겼지만, 또 허무하기도 했다. 차가운 두려움이 엄습했다.

손가락에 묻어나는 붉은 피가 시야를 어지럽혔다. 시각과 촉각, 그리고 후각까지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특히 이상하게도 피냄새가 끔찍했다. 옆에서 괜찮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의 목소리와 119에 전화하는 외침이 멀리에 울려 왔다.

채훈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이 멍한 머리에 가득 찼다. 하지만 제 몸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의식이 멀어지고 있었다. 자신의 상태도 썩 좋지 못하다는 것을 겨우 알아차리는 사이에 시야가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차갑고 소름 끼치는 밤의 끝은 피로 엉망이 된 채훈의 옆얼굴이었다.

*

*

경련을 하면서 잠에서 깬 승건은 그대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헉. 헉.”

어둠 속에서 승건은 숨을 헐떡였다. 겨우 꿈을 꾼 것뿐인데 전력 질주를 한 것처럼 심장이 뛰고 숨이 찼다. 손바닥이 젖은 것은 물론이고 식은땀이 온몸에 흘렀다.

멍한 기분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곳이 11년 전의 겨울 거리가 아니라 자신의 침실이라는 것을 천천히 알아차렸다.

그건 꿈이자 기억이었다.

그때 승건은 채훈이 죽는 줄 알았다. 지금, 머리로는 채훈이 멀쩡히 살아 있다는 것을 아는데, 그날의 충격이 너무 생생해서 떨리는 심장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아니,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가 지금도 맡아지는 것 같았다. 한 달 넘게 채훈을 보지 못해 아무런 향기를 맡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피냄새가 가득했다.

11년 전에 받았어야 할 충격에 승건은 눈을 감았다. 과거의 일이라고 몇 번이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채훈이 죽은 게 아니라고, 살아 있다고, 하와이로 도망갔다고 해도 심장은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지금 내 손에 없으니 죽은 거나 다름없다고 느꼈다.

터무니없는 생각이었다. 승건은 자신이 미친 것 같았다. 그래도 필사적으로 기억을 찾은 반동이라고 몇 번이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한참을 그렇게 억지로 숨을 고르고 나서야 맥박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미쳤군.”

승건은 방금 전에 꾼 꿈을 되새기며 읊조렸다.

최근에는 자주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았다. 하지만 방금 전의 것은 특별했다. 기억을 잃어버리게 된 계기가 된 사건이었다. 사건의 경위는 이미 보고서로 몇 번이나 읽어두었다. 그러나 생생한 현실감은 활자로 적힌 것과 달랐다.

채훈의 피투성이가 된 모습이 최진수에게서 탈출한 후에 쓰러졌던 그때와 오버랩되었다. 괜찮다는 건 알아도 심장이 딱딱하게 굳어버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린 것이 얼마나 충격이었는지 몸은 물론이고 정신도 자신의 의지와 달리 제멋대로 반응했다.

무엇보다 환한 미소를 짓는 채훈의 얼굴이 계속 어른거렸다.

열아홉 살의 자신이 채훈을 좋아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생소했다. 지금보다 더 순수해서 간지러울 정도로 달큰한 감정이었다.

채훈에게 키스를 하는 상상만으로 얼굴을 붉혔다. 그래도 수능이 끝나면 고백하고 사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경찰대를 포기시키고 같은 대학에 진학할 수 있게 하는 방법도 고민했다.

물밀 듯 밀려드는 기억에 서른 살의 승건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과거에 사로잡히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낯설고, 새롭고, 그러면서도 익숙한 감정에 승건은 머리끝까지 잠겨 들었다.

* * *

하와이 주도, 호놀룰루의 남쪽 해안가 풍광은 세계의 낙원도시라는 별명에 걸맞게 아름다웠다. 시리도록 푸른 바다와 맞닿은 하늘은 마치 그림과도 같았다.

해안가에 위치한 카페 테라스에 앉아 샌드위치와 아이스커피를 해치운 채훈은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채훈은 대학생 때 방학 동안 아르바이트한다고 이렇다 할 여행을 다니지 못했다. 졸업을 하고도 마찬가지였다. 4년 동안 직장인으로 부지런히 살았다.

딱히 고달프다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쳇바퀴 돌아가듯 매일 반복되던 일상에서 탈출했더니 자신이 얼마나 지쳤는지 알 수 있었다.

출퇴근 걱정 없이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이렇게 즐거울 줄은 몰랐다. 생산성 없는 삶이 최고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였다.

하와이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관광지였다. 편의시설도 맛집도 잔뜩 있었고, 각양각색의 관광객이 넘쳐났기 때문에 평범한 동양인 남자 한 명쯤은 눈에 띄지도 않았다. 영어는 간단한 회화만 겨우 할 수 있는 정도였지만 유명 관광지답게 별다른 어려움은 없었다.

채훈은 적당한 한인 민박집을 거점으로 삼은 다음에 게으르고 느긋하게 관광을 즐겼다. 하루는 트레킹을, 또 하루는 스노클링을 하러 다녔다. 그 외에도 제트 스키와 무동력 글라이더를 탔다. 해변으로 나가 수영만 할 때도 있었다. 모든 게 귀찮아질 때면 느지막하게 일어나 산책을 하고 주변 맛집을 찾아다니면서 시간을 보냈다.

이방인이 되어 낯선 거리를 걷는 것은 특별한 경험이었다. 모든 게 새롭고 신기해서 하루하루 즐기고 놀았더니 1개월이 훌쩍 지나 있었다. 원래는 1개월만 머물 예정이었는데, 여기가 너무 좋아서 일부러 항공권을 한 달 뒤로 바꾸었다.

아직 돌아갈 날이 한참 남았다. 현금도 넉넉하게 가져왔고 카드도 있었기 때문에 돈 걱정은 하지 않았다. 숙박비를 제외하면 큰돈이 나갈 일이 없었다.

그래도 9월이 되면 한국으로 돌아가서 현생을 살아야 했다.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하나도 세워두지 않았다. 한 달을 넘게 바닷바람을 맞고 지내다 보니 가능하면 제주도에서 일자리를 구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전부였다. 고민은 한국으로 돌아가고 난 다음에 해도 늦지 않았기 때문에 느긋하게 굴기로 했다.

“날씨 좋다.”

채훈은 컵에 남은 얼음 몇 개를 입에 넣고는 구름이 피어오르는 먼바다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출국하면서 전원을 꺼버린 휴대폰은 캐리어 깊숙한 곳에 넣어두고 완전히 잊어버렸다. 한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이곳에 와서 산 선불폰으로 서주명에게 연락처를 넘기면서 문제가 생기면 알려달라고 부탁해 놓았다. 서주명에게서 아무런 연락이 없는 걸 보면 별일 없겠거니 했다. 자신이 없어도 세상은 잘 굴러가고 있었다.

생각을 이어가던 끝에 반사적으로 누군가가 떠오르려고 했다. 채훈은 휘휘 머리를 내저었다. 이렇게 좋은 날에 그 녀석 생각 하고 싶지 않았다.

이럴 때는 달리는 게 최고였다. 낯선 거리를 달리다가 길을 잃어버려도 문제없었다. 휴대폰의 전자지도가 숙소까지의 길을 정확히 알려주었다.

문명의 이기를 찬양한 채훈은 얼른 백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

*

이곳저곳을 걷고 달리면서 시간을 보낸 채훈은 저녁까지 해결한 다음에 숙소에 도착했다.

와이키키 해변에서 도보로 20분 거리에 위치한 한인 민박집은 한국의 하숙집의 느낌과 비슷했다. 1층에는 공용 부엌과 식당, 거실, 세탁실이 있었고, 1층 일부와 2층은 모두 방이었다. 대부분의 방마다 개인 욕실이 따로 붙어 있고 친절한 관리인이 상주하고 있는 것이 장점이었다.

채훈은 숙소에서 가장 오랫동안 체류하고 있는 숙박객이었다. 트레킹이나 캠핑으로 1박씩 비울 때도 있었지만, 3주 동안 2층 동쪽 끝에 위치한 1인실은 채훈의 방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거실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채훈을 반겨주었다. 민박집의 관리인은 물론이고 이곳에 머무르고 있는 숙박객 대부분이 거실에 모여 있는 것 같았다. 다들 커다란 피자조각과 맥주병을 양손에 하나씩 들고 만찬을 즐기고 있는 중이었다.

“어, 형. 시간 맞춰 왔네. 메시지 봤죠? 형도 얼른 와서 피자 먹어요. 막 뜯었어요.”

민박집의 숙박객 중에 가장 나이가 어린 김경민이 채훈을 불렀다. 관광지의 숙소는 사람이 모였다가 흩어지는 장소였다. 그래도 마음이 맞는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재수 끝에 올해 대학에 입학했다는 김경민은 넉살이 좋았다. 군대에 가기 전에 친구들과 의기투합해 하와이에 왔다는 그는 분위기 메이커였다. 채훈에게도 스스럼없이 형님이라고 부르더니 어느 순간부터 형이라고 호칭이 바뀌었다.

김경민은 또래 아이들답지 않게 예의도 바르고 또 스스럼없이 먼저 다가오는 성격이라 채훈도 편하게 대했다. 특히 활동적인 운동을 좋아하는 게 잘 맞았다. 그래서 채훈은 서핑과 스노클링, 그리고 캠핑을 모두 김경민 일행과 어울려 했다.

채훈은 김경민이 손짓하는 대로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지훈이가 즉석 복권에 당첨되어서 쏘는 거예요. 형도 어서 드세요.”

“잘 먹을게.”

박지훈은 김경민의 친구 중 한 명이었다. 150달러짜리 즉석 복권에 당첨되었다는 그에게 채훈은 잘 먹겠다고 인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거실 탁자 위에는 커다란 피자 박스가 몇 개 쌓여 있었다. 그중에 채훈은 파인애플피자를 하나 골라 접시 위에 놓았다. 그러자 김경민이 호들갑을 떨었다.

“형. 형도 파인애플피자 먹어요?”

“응. 왜?”

“그거 괴식이잖아요.”

“맛있는데.”

채훈이 맛있다고 하자 김경민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피자를 쏜 주인공인 박지훈이 파인애플피자가 뭐가 어떻냐고 한마디 했다. 그 바람에 저마다 피자를 즐기던 사람들도 자기 의견을 피력했다. 열 명 중에 호불호가 딱 반반으로 갈렸기 때문에 결국 서로의 취향을 존중해 주는 것으로 끝났다.

“콜라랑 맥주 중에 뭐 마실래요?”

“콜라…….”

잠시 고민하던 채훈은 콜라를 선택했다. 이곳에 와서는 일부러 술을 멀리하고 있었다. 혼자에 외지라서 조심해야 하는 마음도 있었고, 무엇보다 분위기에 휩쓸려 과음이라도 했다가 충동적인 행동을 할까 봐 그랬다.

지금까지 술에 취해서 전 애인에게 연락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거기다 승건은 전 애인조차 아니었다. 그러나 어느 정도 나이를 먹고 깨달은 게 있다면, 사람 일이란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아직 승건의 휴대폰 번호를 기억하고 있었다. 혹시나 만약의 일이라도 일어나 버리면 이불을 걷어차는 흑역사로 끝날 게 아니었다. 선불폰인 만큼 승건이 아니라 심정민이 전화를 받겠지만, 여하튼 조심하는 게 좋았다.

피자와 함께 맥주를 맛있게 마시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한 잔쯤은 괜찮지 않을까 마음이 살짝 흔들렸다. 그래도 꾹 참고는 콜라를 홀짝거렸다.

서로 좋아하는 피자를 하나씩 먹고 있는 사이에 숙박객 중 한 명이 생레몬 하나를 슬라이스해 와서는 맥주잔에 집어넣었다. 이번에도 사람들이 그게 맛있냐고 물어보면서 맥주를 한 모금씩 마시고는 반응이 갈렸다. 몇몇은 괜찮다면서 레몬 슬라이스를 맥주에 넣었다.

채훈 역시 레몬을 콜라에 넣었다. 신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편인데, 요즘은 레몬과 라임이 맛있었다. 탄산수를 마실 때도 일부러 레몬을 넣었다. 콜라에 첨가해도 괜찮았다.

그렇게 피자에 술이 들어가자 사람들은 말이 많아졌다. 초등학생들이 포함된 4인 가족이 어제 한국으로 돌아가면서 민박집 숙박객들은 채훈을 제외하고는 전부 20대였다. 나이대가 비슷해서 활발하게 대화가 오갔다. 대부분은 여행 정보였다. 그러다가 좋아하는 가수나, 배우, 드라마, 영화 등으로 주제가 확확 바뀌었다.

이곳에 와서 굳이 한국 소식을 찾아보지 않았던 채훈은 주로 이야기만 들었다. 한 달 전쯤에 개봉한 블록버스터 영화가 대박을 친 모양인지 안 본 사람이 없었다.

“아, 그래. 그거 봤어요? 그거. 태화 그룹 후계자 영상.”

영화를 본 것도 오래라고 생각하고 있던 채훈은 누군가가 불쑥 꺼낸 화제에 마시던 콜라를 뿜을 뻔했다. 채훈이 알기로는 태화 그룹의 후계자라고 불릴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으로, 바로 승건이었다.

무슨 영상인가 싶어서 채훈은 집중했다. 다들 채훈만큼이나 어리둥절한 가운데 부산에서 왔다는 여학생이 맞장구쳤다.

“나도 그거 봤어요. 정규완 회장 옆에 앉아 있던 남자 맞죠?”

“맞아요. 그거. 진짜 잘생기지 않았어요? 영화배우라고 해도 믿겠다니까요.”

재벌 3세가 영화배우를 할 만큼 잘생겼다는 말에 다들 관심을 가졌다. 내일의 핫뉴스로 동영상을 검색해 보라고 알려주는 바람에 채훈도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1년 전에 뇌졸중으로 쓰러진 정규완 회장이 태화 그룹의 창립 기념일을 맞이해 공식 석상에 드러난 것이 뉴스를 탔다. 내일의 핫뉴스에서는 정규완 회장의 왼쪽 뒤를 따라다니는 승건의 모습만 따로 편집해 보여주고 있었다. 승건이 태화 그룹의 대표이사이며 정규완 회장의 외손자라는 설명과 함께, 멋진 외모가 눈에 띈다는 말도 붙어 있었다.

영상에 달린 댓글의 반응은 뜨거웠다. 재벌 3세인데 저렇게까지 잘생기면 반칙 아니냐, 신이 너무 많은 걸 줬다 등등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그건 같은 자리에서 영상을 지켜본 숙박객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야. 진짜 잘생겼는데.”

“서른 살이래요. 그런데 대표이사라니. 그것도 이 얼굴로.”

“배우 말고 아이돌 해도 됐었을 얼굴인데.”

승건의 외모를 칭찬하는 소리를 들으며 채훈은 쓴웃음을 삼켰다. 확실히 승건의 얼굴은 다른 사람의 눈에도 잘생겨 보이는 모양이었다. 채훈은 자신이 승건을 좋아했던 이유 중의 하나가 잘생긴 얼굴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작은 휴대폰 화면인데도 불구하고 승건의 얼굴은 이목구비가 뚜렷해서 한눈에 들어왔다. 실물보다 영상이 못한 것 같기도 했다.

기분이 묘해졌다. 2개월 만에 보는 것이었다. 정규완 회장이 1년 만에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자리라고 해도 승건을 굳이 미디어에 노출한 걸 보면 뭔가 사정이 있는 듯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마른 얼굴이 눈에 밟혔다. 2개월 전보다 확실히 말랐다.

거기까지 생각하던 채훈은 의도적으로 영상을 꺼버렸다. 전 애인이 어떻게 지내는지는 모르는 게 좋았다. 특히 헤어지고 얼마 안 되었을 때는 더더욱 그랬다.

다행히 화제는 금방 바뀌었다. 다시 대박을 친 블록버스터 영화와 배우에 관한 이야기가 이어지는 동안에 맥주가 떨어졌다. 몇몇은 가까운 바로 가서 더 마시겠다고 했고 나머지는 민박집에 남았다. 채훈은 후자였다. 먹은 것을 치우고 2층 방으로 올라가려는데 김경민이 말을 걸어왔다.

“형. 우리는 내일부터 마우이에 갈 건데, 형은요?”

“아마 여기서 어슬렁거리고 있지 않을까? 오후에는 쇼핑을 갈 것 같아.”

“그럼 여기 다시 오면 볼 수 있는 거죠?”

“그래. 돌아가기 전에 연락해. 밥 한번 먹자. 내가 살 테니까.”

김경민 일행과는 열흘 넘게 어울렸다.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밥 한 끼 사주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러자 옆을 지나가던 박지훈이 끼어들었다.

“진짜요? 그럼 형, 술은요? 전 술이 더 좋아요.”

“그래. 술도. 밥도 술도 다 사줄게.”

“얏호!”

채훈이 크게 쏜다고 하자 박지훈이 환호하며 좋아했다. 김경민 역시 좋아하면서 내일 떠나기 전에 인사를 하겠다고 하더니 잠시 머뭇거렸다.

“저기…….”

“응? 왜?”

“이거, 이거 진짜 부담 주려고 하는 거 아닌데. 형 휴대폰 번호가 임시잖아요. 선불폰이니까. 저기 진짜 번호 좀 알려주시면 안 돼요? 한국 가서도 연락하게요. 이거 진짜 별거 아니고. 저도 서울 사는데, 기회가 되면 제가 밥 사드릴게요.”

더듬거리던 김경민이 단숨에 말했다. 김경민과는 마음이 맞았기에 며칠 동안 어울리며 같이 돌아다녔다. 그 나이대의 아이들에 비해 말도 행동도 예의 발랐다. 그래서 채훈은 휴대폰 번호를 알려주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알려줄게. 전원이 꺼져 있어서 지금은 연락이 안 될 거야. 네 휴대폰을 줘봐.”

“여기, 여기 있어요. 형. 여기에 번호 찍어주세요.”

채훈은 김경민이 내민 휴대폰에 자기 번호를 찍어주었다. 전화를 걸어 휴대폰이 꺼져 있다는 안내멘트까지 확인하고는 김경민에게 돌려주었다.

“고마워요. 형. 제가 꼭 연락할게요.”

“그래. 나도 연락할게.”

빨개진 얼굴로 활짝 웃은 김경민이 다시 한번 고맙다고 하고는 박지훈과 함께 1층 끝에 있는 그들의 방으로 향했다. 채훈은 여행지에서의 인연을 기대하며 2층으로 올라갔다.

김경민의 호의는 분명하고 노골적이었다. 하지만 채훈은 김경민의 배려심 깊은 호의가 자신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눈치도 없었고, 또한 서로의 나이 차이가 열 살이나 났다.

그래서 싱글벙글 웃고 있는 김경민이 친구들에게 축하와 응원의 말을 듣고 있다는 것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

*

*

김경민과 헤어지고 샤워까지 야무지게 한 채훈은 일찍 잠자리에 누웠다. 오후 내내 걷고 뛰기를 반복한 탓에 몸이 많이 지쳤기 때문에 채훈은 금방 잠이 들 줄 알았다. 하지만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

몇 번이고 뒤척이던 채훈은 인상을 쓰고는 자리에 일어나 앉았다. 불면의 이유는 분명했다.

“헤어졌다고.”

자조적으로 중얼거린 채훈은 체한 것처럼 뭔가로 꽉 막힌 듯한 가슴을 툭툭 두드렸다.

하와이에 와서 이틀 동안은 거의 죽은 듯이 잠만 잤다. 그러면서 종종 승건을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고 여러 가지 일에 집중할 때면 승건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때로는 하루 종일 이름조차 떠올리지 않기도 했다.

한 달쯤 지나자 어떤 계기가 있어야만 그가 생각났다. 바로 오늘처럼 말이다.

불면은 우연찮게 본 승건의 영상 때문이었다.

“다 끝났다고.”

짝사랑이었다. 그리고 좋아한다고 고백하면서 관계를 박살 낸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후회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구질구질하게 굴지 말라고 스스로에게 세뇌 아닌 세뇌를 반복했다.

괜찮을 거라는 마법의 단어보다는 현실을 깨우쳐 줄 채찍질이 필요한 때였다.

“끝났어. 강채훈.”

이제껏 끝났다는 말을 100번도 넘게 했다. 그리고 앞으로 100번은 더 해야 할 것 같았다. 채훈은 자신이 칼같이 끊어버리지 못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만 생각하고 싶어도 머리는 계속 그를 떠올렸다.

“바보. 멍청이.”

아직 승건의 그림자를 떨쳐버리지 못한 채훈은 자기 자신에게 욕을 퍼붓고는 다시 침대 위에 누웠다.

승건 때문에 밤잠을 설치는 것은 아직 미련이 남았다는 의미였다.

절대 그런 거 아니라고 고집스레 눈을 꼭 감은 채훈은 곧 잠에 빠졌다.

* * *

감은 머리를 수건으로 닦으며 밖을 내다보던 채훈이 남자를 알아본 것은 우연이었다.

며칠 전에 하숙집 앞을 지나치다가 마주친 중년의 남자는 특별할 게 없었다. 관광객인지, 아니면 거주민인지는 애매했지만 하얀색 폴로셔츠에 베이지색 면바지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것이었다. 그가 쓰고 있는 챙이 짧은 밀짚모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만 남자의 왼팔에 있는 붉은 화상 흉터가 신경 쓰였다. 흉터의 흔적이 꽤나 넓었기 때문에 많이 아팠겠구나 생각하고는 넘어갔었다.

그 남자가 민박집 건너편 길가에 서 있었다. 오늘은 하얀색 폴로셔츠가 아니라 남색 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러나 멀리서도 확인할 수 있는 화상 흉터가 특이했기 때문에 남자를 기억해 냈다.

뜻밖의 기억력에 채훈은 자신에게 조금 뿌듯함을 느꼈다. 하지만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무언가를 조작하고 있던 남자가 고개를 들고는 똑바로 자신이 서 있는 창문을 바라보았을 때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눈이 마주치자 남자가 황급히 고개를 돌리더니 다급하게 번화가 쪽으로 걸어가는 것을 보며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채훈이 묵고 있는 민박집은 번화가와 가까웠다. 집과 집 사이의 거리는 멀리 떨어져 있는 편이었다. 그래도 집 앞의 거리는 늘 관광객들이 지나다녔다. 낯선 사람을 보는 일은 흔했다. 그래도 남자의 행동은 뭔가 의심스러웠다.

“감시 같은데.”

남자가 사라진 쪽을 바라보던 채훈은 범죄 스릴러를 상상하다가 피식 웃었다. 굳이 영화 취향을 따지자면 블록버스터와 추리였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나가버렸다. 한 번 납치를 당하고 났더니 뭐든 의심하게 되었다. 채훈은 그냥 우연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오늘은 마우이에서 돌아온 김경민 일행을 만나 밥을 사는 날이었다. 정확히는 낮술을 마시면서 과한 안주를 먹기로 했다. 모레면 한국으로 돌아가는 그들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오늘이 마지막 날이었다. 점심을 먹고 그들과 함께 쇼핑도 할 예정이었다. 일찌감치 친구들에게 줄 선물을 하나씩 사둘 생각이었다.

그렇게 외출 준비를 마친 채훈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창밖을 내다보았다. 채훈의 방에서는 거리가 잘 보였다. 이번에는 화상 흉터가 있는 남자가 없었다.

“그럴 리가 없지.”

채훈은 피식 웃으면서 백팩을 챙겨 방을 나섰다.

*

*

점심시간, 하와이에서도 유명한 술집은 2층까지 빈 테이블 하나 없이 손님들로 북적거렸다. 2층 창가 자리에 앉은 채훈과 김경민 일행은 저마다 맥주와 각종 안주를 공략해 나갔다. 가게에서 직접 만든다는 맥주는 훌륭했다. 피자와 폭찹 스테이크, 새우 요리 등, 여러 가지 안주도 맛있었다.

성인 남자 네 명이 테이블을 가득 채운 안주를 먹어치우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하와이에 오면 사야 하는 필수 쇼핑 목록 등과 같은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면서 몇 번이나 맥주와 안주를 재주문했다. 다들 과식을 했다며 배를 두드리게 된 것은 한참이나 지난 다음이었다.

“형. 얼마 나왔어요?”

“몰라도 돼.”

채훈이 종업원에게서 영수증을 받아 확인하자 김경민이 슬쩍 물었다. 채훈은 재빨리 몸을 돌려 영수증을 보여주지 않았다.

“여기 비싼 데잖아요. 너무 많이 나왔을 것 같은데. 우리도 낼게요.”

“내가 사준다고 했어. 이 정도는 괜찮아.”

남자 네 명이 마음껏 먹었더니 200달러가 넘게 나왔지만 채훈에게는 큰 부담이 아니었다. 이제 갓 스무 살이 된 꼬맹이들과 달리 자신은 지난달까지 현역 직장인이었다. 물론 지금은 백수지만 당장 돈에 쪼들리지는 않았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내고 싶은데.”

“나가서 아이스크림이나 사줘. 그럼 돼.”

“물론이죠. 후식 맛있는 곳 있어요.”

채훈이 후식을 사달라고 하자 시무룩하던 김경민이 금방 활짝 웃었다. 그의 친구들이 자신들도 사달라고 했지만 김경민이 역시나 웃으면서 거절했다. 그사이에 종업원에게 영수증과 현금을 넘긴 채훈은 나머지 거스름돈은 모두 팁으로 주었다.

“나 화장실을 좀 다녀올게.”

결제 영수증이 나오기 전에 채훈은 화장실에 가려고 했다. 그 때 채훈이 창밖을 둘러본 것은 낮에 보았던 화상 흉터를 가진 남자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번화가에서도 음식점만 따로 모여 있는 거리는 차량 통행이 금지된 곳이었다. 거리 자체가 또 하나의 관광지라서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우루루 몰려다니고 있었다. 그곳에 화상 흉터의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꽤나 예민해진 모양이라고 웃던 채훈의 시야 끝에 뭔가가 걸렸다. 음식점 거리 끝에 검은색 세단 두 대가 멈춰 섰다. 하와이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는 세단이었다. 그러나 채훈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 번째 세단에서 검은색 양복을 입은 남자들이 일사불란하게 내렸다. 그들 중에 몇몇이 왠지 눈에 익은 것 같았다. 그리고 두 번째 세단에서 내린 사람들을 확인한 채훈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세상에.

채훈은 내적 비명을 질렀다. 먼 거리였지만 키가 훌쩍 큰 남자가 승건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혹시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승건이 우연처럼 이쪽을 향해 고개를 틀었다.

승건과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하자마자 채훈은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꿈인 것 같은데, 꿈이 아니었다.

믿을 수 없는 상황에 채훈은 어리둥절했다. 승건이 왜 이곳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부터 떠올랐다.

“미안. 내가 급한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 나중에 연락해.”

채훈은 일방적인 인사를 하고는 그대로 백팩을 집어 들고는 자리를 떴다. 김경민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1층으로 내려가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종업원에게 뒷문의 위치를 물어보고 그쪽으로 빠져나갔다.

상점가 뒤쪽은 화단과 산책로가 완충 지역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열심히 산책로를 내달리던 채훈은 혼란하기만 했다.

승건이 왜 여기에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여기서 그를 본 게 우연은 아니었다. 자신을 찾아온 것 같은데, 이유가 무엇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채훈은 혹시나 자신이 잘못한 일이 있나 기억을 더듬었다. 걸리는 건 하나도 없었다. 깔끔하게 헤어졌다. 질척거리지 않고 한국을 떠나왔다. 혹시나 동생에게 문제가 생겼나 싶었지만 그렇다면 서주명이 먼저 연락했을 것이다.

거기다 승건이 직접 움직이는 것은 여러모로 비효율적이었다. 태화 그룹의 대표이사인 승건은 굉장히 바빴다. 주말조차 일을 해야 하는 녀석이 하와이까지 왕복하려면 최소한 2일은 통째로 비워야 했다. 그리고 오늘은 주말도 아니었다.

“하와이인 건 어떻게 알아서.”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채훈은 가족이나 서주명에게도 멀리 여행을 떠난다고만 말했다. 하와이에 왔다는 것은 아무도 몰랐다. 물론 알아볼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왜라는 물음표가 따라붙었다.

그런데 왜 난 도망치고 있지?

열심히 달리던 채훈은 우뚝 멈춰 섰다. 자신이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승건을 피해 도망치고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거리낄 것 하나 없으니 그냥 당당히 마주 보면 그만이었다.

“채훈이 형. 무슨 일이에요?”

어느새 뒤따라온 김경민이 숨을 헐떡이며 옆에 섰다.

“갑자기 급한 일이 생각나―”

“강채훈.”

김경민을 돌아보던 채훈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김경민의 뒤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오는 승건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더 멀리로는 검은 옷을 입은 경호원들이 우루루 몰려오고 있었다. 뭔가 웃기는 장면이었다.

채훈은 문득 한국을 떠나기 전에 이수진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녀는 승건이 쫓아간다면 어떻게 할지 고민해 보라고 했었다. 그때는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여겼다. 그래서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성큼성큼 뛰어오는 녀석을 보고 있자니 머리가 텅 비었다.

“저 사람이 형을 왜 쫓는 거예요?”

김경민의 물음에 채훈은 정신을 차렸다.

“나도 모르겠어.”

“아는 사람인 건 맞아요?”

“전 애인이긴 한데…….”

전 애인은 아니었지만 달리 승건을 설명할 말이 없었다. 계약 연애를 했다는 것은 비밀이기도 했다.

“헤어진 애인이 쫓아오는 거예요?”

“그런 것 같아.”

채훈은 멍하니 대답했다. 승건의 얼굴을 보자니 반가웠다.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소름이 돋을 정도로 속이 울렁거렸다.

어느새 승건이 바로 앞으로 다가왔다. 채훈은 뒤돌아 도망치지 않았다. 다만 저도 모르게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숨도 헐떡이지 않은 승건이 으르렁거리듯 이름을 불렀다.

“강채훈.”

“당신 뭡니까? 왜 형을 쫓아다녀요?”

얼음처럼 굳어버린 채훈 대신에 김경민이 앞을 막아섰다. 승건이 그런 김경민을 기가 막힌다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형?”

“이런 거 스토커나 하는 짓이라고요. 어? 당신……. 태화 그룹의 그 사람 같은데……?”

“나는 당신이 아니고, 강채훈이랑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비키시죠.”

김경민이 알아보건 말건 승건은 아랑곳하지 않고 채훈에게 다가갔다. 김경민이 지지 않고 다시 사이를 막아섰다. 그리고 채훈은 승건이 거리를 좁힌 딱 그만큼 더 뒤로 물러났다.

“강채훈. 지금 뭐 하자는 거야?”

“오지 마.”

“뭐?”

“거기 있으라고. 지금…… 기분이 이상해.”

한껏 인상을 쓴 채훈은 자신의 몸이 삐꺽거린다고 생각했다. 머리로는 승건이 반가우면서도 왜 저 녀석이 여기에 있나 의문도 들면서 혼란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몸은 얼음물에 잠긴 것처럼 손끝부터 얼어붙었다.

채훈은 몰랐지만 화창한 햇살 아래 그의 얼굴은 탈색이라도 된 듯 하얗게 질려 있었다.

“형? 얼굴이 하얘요.”

김경민이 걱정스럽게 채훈의 팔을 잡았다. 하지만 승건에게 시선이 고정된 채훈은 김경민을 돌아볼 수 없었다. 이상하게 승건의 존재가 무서워졌다.

“그 손 놔.”

잔뜩 낮은 목소리로 위협을 하면서 다가오는 승건 때문에 채훈은 세 번째로 뒷걸음질 쳤다. 어째서인지 그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 싫었다.

명백한 거부의 몸짓에 승건이 차갑게 굳은 얼굴을 했다. 채훈은 뻣뻣하게 굳어버린 손을 쥐었다 폈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서늘한 향기와 함께 차가운 얼음이 머리와 가슴에 가득 들어찬 것 같았다.

“그만해요. 형이 힘들어하는 거 안 보여요?!”

휘청거리는 채훈을 붙잡은 김경민이 외쳤다. 승건이 그런 둘을 지긋이 노려보았다.

“비켜야 하는 건 당신인 것 같은데.”

“젠장. 당신 우성 알파였어?”

“알면 비켜.”

승건이 한 걸음 다가서자 이번에는 김경민이 주춤주춤 물러났다. 채훈은 두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는 싸움을 했다는 것도, 그리고 승건이 이겼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질식할 정도로 밀도 높은 공기 때문에 꼼짝도 하지 못했다.

도망가야 해.

본능이 외쳤지만 돌덩어리라도 된 듯이 몸은 제자리에서 굳어버렸다.

“오지 말라니까!”

채훈은 가까이 다가오는 승건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모든 게 이해가 안 가는 와중에 제일 이상한 것은 자기 자신이었다. 승건에게 헤어지자고 했던 그때는 열병이라도 걸린 것 같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한겨울 찬바람에 얼어버린 듯한 기분이었다. 진짜 병이라도 걸린 게 아닌가 덜컥 겁이 날 정도였다.

“애초에 도망가질 말았어야지.”

승건이 몇 걸음 사이의 거리를 단숨에 좁히며 손을 뻗었다. 도망가긴 누가 도망갔느냐고 속으로 외친 채훈은 승건의 손을 피하지 못했다.

팔이 붙잡혔다. 반사적으로 뿌리치려고 했지만 헛손질만 했다. 힘의 차이뿐만이 아니었다. 팔다리가 동상이라도 걸린 듯 뻣뻣하게 굳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이거, 놔…….”

목소리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아 속삭이는 것처럼 들렸다.

“채훈아. 강채훈. 너 왜 이래?”

그제야 이상을 알아차린 승건이 왜 이러냐고 물었다. 채훈은 속으로 욕을 하며 가물거리는 눈을 감았다.

더 이상 버티고 서 있을 수가 없었다.

*

*

채훈은 눈을 뜬 채로 기절한다는 희귀한 경험을 했다. 그래도 의식은 남아 있어서 승건에게 항의를 하던 김경민이 심정민의 설명을 듣고 물러났다는 것을 알았다. 승건이 병원으로 가야 한다고 심정민을 다그치는 것도 들었다.

승건에게 안긴 채 차를 타고 이동하는 와중에 정신을 잃고 깨기를 반복하던 채훈은 어느새 병실에 누워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도 깔끔한 1인실이었다.

하와이 병원에도 다 와본다고 눈을 깜빡이며 주위를 둘러보자 승건이 창가의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평소처럼 태블릿으로 뭔가를 읽고 있었다.

이럴 때조차 승건은 바빴다. 그런 녀석이 왜 하와이까지 왔을까 정말 알 수가 없었다.

채훈은 헛기침을 하는 대신에 가장 궁금한 것부터 물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야?”

스스로가 듣기에도 힘없는 목소리였다. 승건이 고개를 들어 이쪽을 보았다.

“비행기 타고.”

“농담 재미없거든. 오지 마. 거기 앉아 있어. 가까이 오면……. 몸이 안 좋아져.”

채훈은 자리에 일어나서 다가오려는 승건을 향해 황급히 말했다. 그러자 승건이 잠시 멈칫했다.

“몸이 안 좋다고?”

“응. 멀미하는 것 같아. 머리도 아프고. 진짜야. 그러니까 거기 있어.”

지금도 썩 좋은 게 아니었다. 머리가 욱신거리는 것을 참으며 채훈은 진지하게 부탁했다. 심각한 표정을 짓던 승건이 한숨을 삼키며 자리에 앉았다.

채훈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팔다리에 아무것도 붙어 있지 않아서 움직임은 자유로웠다.

“체온이 많이 떨어졌었어.”

“그래? 병명이 뭐래?”

“아직 몰라. 왜 도망친 거야?”

채훈은 도망쳤다고 말하는 승건을 어이없는 눈으로 보았다. 그러고 보니 아까도 도망쳤다고 한 것 같았다.

“뭘 도망가?”

“휴대폰도 꺼두고는 여기 왔잖아. 그것도 내가 출장 간 사이에.”

승건이 한마디씩 씹어먹을 것처럼 이를 드러내며 말했다. 눈빛 역시 차가웠다. 채훈은 다시 체온이 떨어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한숨을 삼켰다.

“그냥 여행 온 거야.”

“행선지도 안 밝히고 잠적한 게 여행이야? 너 찾는다고 내가……. 아니다. 내가 못 찾을 줄 알았어? 출국 조회만 해도 금방 알아낼 수 있어.”

“왜 자꾸 도망갔다고 하는 거야? 너야말로 왜 여기까지 따라온 건데? 계약은 끝났잖아.”

“네가 날 좋아한다며.”

“그러니까 끝내자고 한 건데…….”

뭔가 대화가 진전되지 않고 계속 한 곳만 맴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와중에 노크 소리가 울렸다. 병실 문이 열리고는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가 나타나는 바람에 승건과의 대화가 끊겼다.

“안녕하세요. 레오나 박이라고 합니다. 강채훈 씨의 검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설명은 한국어가 편하실까요? 아니면 영어로 할까요?”

“한국어요.”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 중년의 여성이 유창한 한국말을 했다. 하와이로 이민을 와서 의사를 하고 있다는 레오나는 채훈에게 불편한 것은 없는지, 기분은 어떤지 간단하게 물었다.

“강채훈 씨의 급성 저체온증은 아무래도 임신 때문인 듯싶어요. 하와이에서는 보기 드문 일이긴 한데, 그래도 사람 체질은 다양하니까요. 특히 남성체 오메가는 호르몬 때문에 임신으로 여러 이상 증상이 다양하게 나타나는 편이거든요. 그래서 임신 초기에 조심하셔야 해요.”

채훈은 친절한 레오나의 설명에 어리둥절했다. 자신의 귀가 잘못된 게 아니라면 이상한 단어가 자꾸 들려왔다.

임신? 오메가?

자신이랑 전혀 상관없는 단어들이었다.

“선생님. 잠시만요. 병실을 잘못 찾아오셨거나, 아니면 차트가 바뀐 것 같은데요. 저는 오메가 아니에요.”

“본인 확인하겠습니다. 강채훈 씨 맞으시죠?”

“네.”

“오메가 맞으신데요. 보호자분이 오메가라고 하셨고, 그리고 임신하신 것도 확실합니다. 이건 피검사를 따로 했어요.”

“……?!”

오메가에 임신한 게 맞다는 소리에 채훈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레오나를 보았다. 그녀는 난처한 표정으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라고?

채훈은 자신이 방금 들은 말을 이해해 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머리가 잘 굴러가지 않았다. 꿈은 아닌데, 꿈을 꾸는 것 같았다. 혹시나 싶어서 황급히 손등을 꼬집어보았지만 아픈 건 확실했다.

“저기, 저는 진짜 베타거든요. 지금까지 계속 검사를 받았는데, 그때마다 베타라고 했어요.”

“아주 낮은 확률이지만 검사에서 못 잡아낼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지금까지 쭉 베타였는데…….”

“나이가 들어서 발현하는 경우도 있고요. 최근에 크게 앓거나 하신 적 없으세요? 보통 발현할 때 많이 아파요. 고열을 동반하고요.”

“……?!”

충격에 충격이 이어지는 와중에 채훈은 한국에서 떠나기 직전에 며칠 동안 앓았던 것을 떠올렸다. 그게 섹스 후유증이 아니라 발현 때문이었던 모양이었다.

“짐작 가시는 게 있나 보네요. 보호자께서는 이미 알고 계시던데. 물어보세요.”

레오나가 눈짓으로 가리킨 사람은 승건이었다. 채훈은 천천히 승건을 돌아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총이라도 맞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채훈은 자신이 그냥 오메가가 아니라 임신한 오메가라는 사실이 어떤 의미인지 두 박자 정도 늦게 깨달았다. 아직도 임신을 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러나 인과로 따지면 그날 이후로 섹스를 한 적 없으니, 아이의 생물학적 아버지는 승건이 된다는 소리였다.

곧이어 승건이 후계자 문제로 인해 결혼을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자신이 베타 남자였기 때문에 계약을 하고 관계를 맺어 왔었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순간 다른 남자의 아이라고 해야 하나 고민했다. 하지만 승건이 먼저 선수를 쳤다.

“임신한 지는 얼마나 지났습니까?”

“정확한 건 다른 검사를 더 해야 알 수 있지만, 피검사 수치로는 5주가 됐어요.”

채훈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5주라면 다른 남자의 아이라고 잡아떼는 건 불가능했다. 승건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그의 심각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이번에는 진심으로 도망쳐 버리고 싶었다.

“잠시 둘이서 이야기하게 자리를 비켜주셨으면 합니다.”

“물론이죠.”

승건이 정중하게 부탁하자 레오나가 웃으면서 병실을 나갔다. 승건과 단둘이 된 채훈은 무거운 침묵을 참기 힘들었다. 일이 어디서부터 꼬였는지 갈피조차 잡히지 않았다.

“이것 때문에 도망친 거였어?”

“도망친 거 아니라니까. 몇 번이나 말해야 해. 나는 내가 오메가인지도 몰랐어. 임신을 했을 거라고는 더더욱 몰랐고. 세상에. 내가 임신을 했다니…….”

다급하게 변명 아닌 변명을 하던 채훈은 자신이 임신했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고도 무서웠다.

마치 내일 세상이 멸망할 거라는 소리를 듣는 기분이었다. 무엇보다 승건이 아이의 아빠라는 게 더 믿기지 않았다.

“저기, 아이는…….”

“결혼하자.”

채훈은 아이에 대해서는 생각한 시간을 달라고 하다가 승건과 말이 겹치는 바람에 문장을 채 끝맺지 못했다. 그래도 승건이 무엇을 말했는지는 알아들었다. 결혼하자고 했다.

“결혼?”

“내 아이니까, 결혼하는 게 맞겠지.”

채훈은 단호하게 말하는 승건을 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결혼하자고 너무 쉽게 말하는 모습에 왠지 속에서 뜨거운 게 울컥하고 솟아올랐다. 지금껏 승건 때문에 마음고생을 한 것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네 마음대로 정하지 마.”

“나는 제안을 한 것뿐이야.”

“씨……. 빌어먹을 놈의 제안. 너는 그것밖에 모르지?”

제안이라는 단어에 채훈은 기어코 욕설을 내뱉고 말았다. 이성의 끈이 몇 가닥 우두둑 끊겼다.

“네가 말해 주지 않으면, 무엇 때문에 화가 난 건지 나는 몰라.”

욕설 때문인지 목소리가 커져서인지 승건이 살짝 인상을 썼다. 그럼에도 침착하게 설명하는 모습에 채훈은 심호흡을 했다. 승건의 말이 맞았다. 여기서 일방적으로 화를 내봤자 답이 없었다.

“10년 전에 일어났던 사고 때문에 네가 무슨 후유증을 알고 있는지 알아. 기억을 잃은 거 말고. 맛을 못 느끼고, 향을 못 맡는다는 거. 우연찮게 노트북에 있는 면담 영상을 봤어. 왜 나랑 만나자고 한 건지도 알고.”

채훈은 천천히 서두부터 꺼냈다. 노트북의 영상을 봤다는 말에 승건이 놀란 표정을 짓자 왠지 통쾌해졌다.

“서로 목적이 있어서 계약한 건 아는데. 하아.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널 좋아하니까 더 이상 못 하겠더라. 이제 계약도 끝났고. 감정이 생기니까 계약을 끝냈잖아. 그런데 결혼을 하자는 게 이해되지도 않고.”

“네가 끝내고 싶어 했잖아.”

“그래. 끝내고 싶어 했지. 아니, 이건 됐어. 이제 널 더 이상 좋아하지 않으니까 아무 의미 없어. 아이는…….”

“거기까지만 말해.”

아이는 승건이 달라면 줄 생각이 있었다. 지우라고 하면 고민은 해야 할 것 같았다. 신경 안 쓴다고 하면 낳을 것 같기도 했다. 아이의 친권에 대한 계약서를 작성하라면 그것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승건의 말 한마디에 숨이 막혔다. 낮 동안에 승건과 마주했을 때와 같은 느낌이었다. 싸늘한 감각에 소름 돋고, 속이 울렁거리면서 기분이 나빴다.

채훈은 참을 수 없는 구토감에 구르다시피 침대 아래로 내려섰다. 그러나 한 발자국도 제대로 걷지 못하고 쪼그려 앉아버리고 말았다. 아까처럼 팔다리가 굳었다.

“몸이, 왜 이래……?”

몸에 힘이 빠져서 그런지 목소리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원인을 알 수 없어서 무서울 정도였다.

“채훈아?”

“오지…… 말라니까.”

승건이 다가오니까 증상이 더 심해졌다. 팔다리가 아니라 머리까지 얼어버리는 것 같았다. 무어라 소리치는 승건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채훈은 올해가 분명 삼재일 거라고 생각하며 의식을 놓았다.

* * *

“페로몬 거부 반응입니다. 혹시 네거티브 본딩이라고 들어본 적 있습니까? 한국어로 하면 반 각인이나, 혹은 부정 각인이라고 할 텐데.”

“아니요.”

레오나가 말한 단어는 처음 듣는 것이었기 때문에 채훈은 고개를 내저었다. 저체온증으로 다시 기절을 한 후에 정신을 차렸을 때는 팔에 수액 바늘이 꽂혀 있었다. 승건은 자리를 비웠다. 그리고 레오나가 아까보다 조금 더 심각한 얼굴로 저체온증의 원인이 네거티브 본딩이라고 알려주었다.

알파와 오메가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운명적인 관계 증명이 각인이라면, 그 대척점에 존재하는 것이 부정 각인이었다. 정확히는 페로몬 거부 반응의 일종이라고 했다.

통계적으로 알파보다는 오메가에게 많이 나타나는 현상으로, 자신을 혹독하게 배신한 상대의 페로몬을 거부해서 몸에 이상이 생기는 것이었다. 기본적으로 상대에 대한 애정과 신뢰가 충만한 상태에서 생겨난다는 설명에 채훈은 웃지도 못했다.

“대부분 배우자나 파트너 사이에 발생합니다. 상대가 외도를 했을 경우에 가장 흔하게 나타나죠.”

“배신…….”

채훈은 배신이라는 단어를 중얼거렸다. 솔직히 배신까지는 아니었다. 그저 화가 났을 뿐이었다. 승건에게 수단으로 쓰인다는 것에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특히 부작용을 치료하기 위해 의사의 지시를 받고 노팅을 했다는 사실에 제일 실망했다.

레오나의 설명은 이어졌다. 부정 각인은 크게 3단계로 나뉘었다. 1단계는 상대의 페로몬을 역하게 느끼는 것이었고, 2단계는 몸이 발작을 일으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적인 페로몬 접촉이 이어질 경우에는 영구적인 장애까지 발생하는 것이 3단계라고 했다. 심각하면 죽음에까지 이를 수 있었다.

알파와 오메가 사이의 각인에 대해서는 여러 영화나 드라마의 소재로 쓰일 만큼 인기가 많았다. 각인의 경우 상대의 페로몬에 장기간 접촉하지 못할 때 장애가 발생하거나 죽음에 이르기도 했다.

굳건한 사랑의 상징이라고 불리는 각인과 달리 부정 각인은 불신의 증명이었다.

채훈으로서는 모두 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흥미진진하면서도 그게 자신의 일이라는 게 웃기고 신기했다.

“제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혹시 페로몬만이 아니라 물리적으로 거리가 가까워도 부작용이 일어나나요?”

“글쎄요. 본딩과 달리 네거티브 본딩은 최근에 인정받은 이론이라 알려진 것이 많이 없어요. 그래도 심인성 질환이니 얼굴만 봐도 안 좋아질 수는 있죠. 한국식으로 풀이하자면 화병하고 비슷하니까요. 어쨌든 육체적으로 거부 반응이 일어나기 때문에 조심해야 합니다. 특히 네거티브 본딩은 치료 방법이 거의 없다고 알려져 있거든요.”

치료가 안 된다는 소리에 채훈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병실 밖에 있는 승건을 찾았다. 병실 문에 있는 작은 창 너머로 보이는 승건은 심정민에게 무어라 말을 하고 있었다. 그가 이 사실을 알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선생님. 제 보호자도 이걸 알고 있나요? 부정 각인, 그러니까 네거티브 본딩 말이에요.”

“미리 알려드렸습니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아이 아버지가 저기 있는 보호자분이 맞습니까?”

“예. 맞아요.”

채훈은 인정했다. 아이의 아버지가 승건인 건 맞았다.

“임신한 오메가의 경우, 특히 남성체 오메가라면 아이의 아버지가 되는 알파의 페로몬이 여러모로 도움이 됩니다. 그러니까 입덧이나 부종, 그리고 유산 방지 등에 좋아요.”

임산부를 위한 설명에 채훈은 눈을 깜빡깜빡거렸다. 그리고 자신이 임신 중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이해했다. 오메가라는 것도 아직 안 믿겼다. 발현하자마자 임신을 해버려서 그런지 아무런 자각이 없었다.

“네거티브 본딩으로 인해 알파의 도움을 받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환자분께서는 우성 오메가이니까 임신 중의 불안정성은 적을 거예요.”

“제가…… 우성 오메가인가요?”

“보호자분이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한국에서 종합건강검진을 받으셨다고 했는데, 이건 두 분이서 천천히 이야기를 나눠보셔야겠어요. 아, 감정적으로 격해지는 건 환자분과 아이 모두에게 안 좋은 거 아시죠? 가능하면 제삼자와 동석하는 걸 추천합니다. 보호자분께도 조심하라고 말해 두겠습니다.”

“네.”

채훈은 순순히 대답했다. 모르는 게 너무 많았다. 새로 접하는 사실에 정신도 없었다. 그래도 승건과 차분히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데는 동의했다.

“미국에서는 형질자의 이민을 적극 장려하는 편이에요. 특히 아이를 낳은 경력이 있는 가임기의 오메가는 범죄 경력만 없으면 될 정도죠. 정착에 대한 지원도 다양하고요.”

“……?”

“두 분 사정이 어떤지는 알지 못하지만 그런 옵션도 있다는 것도 알고 계시라고요.”

“감사합니다.”

레오나가 호의로 이민 옵션도 있다는 사실을 알려줬다는 것을 깨달은 채훈은 감사하다고 인사를 했다. 그렇게 병실을 나선 레오나가 복도에서 대기하고 있던 승건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채훈은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문제점을 차근히 정리했다.

가장 간단한 해결 방법은 아이를 지우고 둘이서 안전 이별을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채훈은 아직 아이를 어떻게 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리고 결혼을 하자는 승건은 아이를 포기하지 않을 것처럼 굴었다. 후계자 문제에 민감하던 녀석이 왜 그러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건 지금 당장 알아야 할 건 아니었다.

어쨌든 아이 문제만으로 변수는 충분했다. 의견이 일치하지 못하면 쿨한 이별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현명하게 해결해야 했다. 깜짝 놀랄 정도로 결단도 행동력도 재빠른 승건의 뜻대로 휩쓸리기는 싫었다.

승건을 바라보던 채훈은 이불 위에 올려둔 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일부러 손가락도 꼼지락거려 보았다.

엉킨 실타래처럼 꼬인 상황이지만 그래도 순서는 망각하지 않았다. 채훈은 우선 아이에게 집중했다. 아이를 낳아서 잘 기를 수 있을까도 걱정이었지만, 무엇보다 낳기까지 자신의 멘탈이 버틸지 장담할 수 없었다.

채훈은 저도 모르게 판판한 배를 슥슥 문질렀다.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이 안에 아이가 있다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았다.

“강채훈.”

멍하니 딴생각을 하고 있던 채훈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승건이 병실 안에 들어와 있었다.

대신 병실 문은 반쯤 열린 상태였고, 승건은 그 문에서 거의 떨어지지 않은 채 등지고 있었다. 승건의 위치는 채훈의 침대와 가장 먼 거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까보다 물리적인 거리가 가까워지자 다시 소름이 돋았다.

“물어볼 게 있는데, 페로몬……을 내고 있는 건 아니지?”

채훈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말 거리 문제인 건지 확인해야 했다.

“잘 갈무리하고 있어. 왜?”

“부정 각인이 페로몬 문제라고 했는데, 그냥 물리적으로 가까워져도 안 좋아져서.”

“선생님에게 들었어. 그럴 수도 있다고.”

“그렇구나.”

승건이 긍정하는 바람에 채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로는 그를 무서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알고 있는데도, 몸은 의지대로 통제되지 않았다. 그래도 이 정도의 거리는 참을 수 있었다.

“더 뒤로 물러나?”

“아니. 그 정도는 괜찮아. 음……. 뭐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이런 일에는 솔직해야 하니까. 내가 먼저 말할게. 결혼은 안 할 거야. 아이는…… 아직 어떻게 할지 갈팡질팡하긴 한데, 가능하면 낳았으면 해. 넌 어떻게 하고 싶어?”

“결혼을 안 할 거라고? 왜?”

“너랑 결혼하기 싫으니까.”

채훈은 단호하게 말했다. 승건과 결혼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정확히는 결혼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자 딱딱하던 승건의 얼굴이 확실하게 더 굳어졌다.

“결혼을 안 하고 아이를 낳을 거야?”

“꼭 결혼을 할 필요는 없잖아. 아니, 이걸로 다투지 말자. 이유는 묻지 말고. 네가 원하는 걸 말해. 그래야 어떻게 할지 조율을 할 수 있으니까.”

기력이 없는 채훈은 조곤조곤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자신의 패를 다 보여주는 것은 애송이 협상가나 할 법한 짓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자존심보다는 합리적인 협상이 더 중요했다.

채훈은 승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사실 여기서 승건이 제멋대로 군다면 진짜 다 끝내버릴 마음도 먹었다. 그러나 승건의 대답은 예상 밖의 것이었다. 정확히는 대답이 아니라 질문이었다.

“오메가인 걸 몰랐어?”

“왜 또 그걸 물어?”

“대답해. 종합검진 결과표에 나와 있었을 텐데.”

사람을 조용히 압박하는 것은 승건이 잘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대답하기 어려운 게 아니었기 때문에 채훈은 순순히 말했다.

“몰랐어. 결과가 나오기 전에 떠났으니까.”

“도망친 게 아니라고?”

“네 번째로 말하는 것 같은데. 아니야. 그만 물어봐.”

“날 좋아해?”

“아니.”

진짜 뜻밖의 질문이었지만 채훈은 즉답했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더 이상 좋아하기 싫다고 해서 뜻대로 되는 건 아니었다. 지금까지는 그랬다. 승건을 좋아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에게 끌리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한 번 크게 실망하고 나자 미묘한 여운만이 남아 있었다. 설레고 기쁘다기보다는 조금 슬펐다. 그리고 좀 더 냉정하게 승건을 볼 수 있었다.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인상을 쓴 승건이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렸다. 어쩐지 초조한 듯 보였다.

“질문을 정정하지. 날 좋아했어?”

“응.”

“그리고 지금은 아니고.”

“그래. 그런데 왜 그걸 묻는 거야?”

지금 이 상황에서 꼭 그걸 확인해야 하는 건지 채훈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입매를 굳힌 승건이 이번에는 콧잔등을 찌푸렸다.

채훈은 승건이 잘생긴 얼굴이라서 어떤 표정을 지어도 잘 어울린다는 위기감 없는 감상을 해버렸다. 그러면서 왠지 이 상황이 웃기기 시작했다.

“그건 됐고, 결혼이랑 아이를 어떻게 하고 싶은 건지부터 말해.”

멱살을 잡고 싸울지 말지는 승건의 대답을 듣고 난 다음의 일이었다. 채훈은 조용히 기다렸다.

* * *

비장한 표정으로 짓고 있는 채훈을 보며 승건은 속으로 혀를 찼다. 한 달 동안 휴양지에서 햇볕에 그을렸을 채훈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그런데도 제대로 답하지 않으면 물어뜯고 말겠다는 듯 눈을 빛냈다.

승건을 사로잡는 것은 따로 있었다. 바로 채훈에게서 은은하게 뿜어져 나오는 매혹적인 향기에 모든 신경이 곤두섰다.

열아홉 살에 사고로 3년 동안의 기억을 잃은 승건은 오메가에서 어떤 향기가 나는지 알지 못했다. 그 후로 10여 년 동안 승건이 맡아 온 오메가의 향은 역한 오물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알파를 유혹하는 오메가의 페로몬이 무엇인지 온몸으로 느꼈다. 5주 전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한 달 전에 발현한, 그리고 자신이 오메가인지도 몰랐던 채훈은 페로몬을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치 향수를 뿌린 듯 은은하게 채훈의 주위를 감싸고 있는 페로몬이 유혹의 의미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채훈이 지난 한 달 동안 자각 없이 페로몬을 흘리고 다녔을 거라고 생각하면 속이 뒤틀렸다.

임신한 오메가의 페로몬은 다른 알파에게 매혹적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형이라고 부르며 채훈을 따라다니던 놈도 있었다. 그딴 자식들에게 채훈이 자신의 오메가임을 알리기 위해서라도 페로몬을 풀어 마킹을 하고 싶었다. 지금껏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알파의 본능은 생소하기만 했다.

하지만 부정 각인이 문제였다. 자신의 페로몬은 채훈에게 독이었다. 채훈을 뒤쫓으면서 페로몬을 제어하지 못하는 바람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

승건은 운명론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쯤 되면 뭔가 거대한 힘이 제멋대로 일을 꼬고 있다는 것을 믿고 싶어졌다. 자신은 발현도 하지 않은 채훈에게 각인하고, 채훈은 발현하자마자 부정 각인을 해버렸으니 말이다.

빌어먹을 운명이라고 한껏 비웃은 승건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와 계약을 한 건, 네 말대로 후유증 때문이 맞아. 아직 발현 전인 너를 각인했었거든. 상상 각인이긴 했지만. 그리고 계약을 끝낸 건, 네가 계약을 끝내자고 했으니까. 그리고 미리 말해 두는데, 계약을 끝내도 헤어질 생각은 없었어. 난 내 것에 대한 애착이 강해.”

“……?!”

채훈이 놀란 듯 크게 눈을 떴다. 마치 누가 네 거냐며 항의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나는 사람 사이의 감정을 신뢰하지 않아. 변덕스럽고 수명이 짧으니까. 멀쩡한 인간관계가 파국으로 치닫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생각해. 그래서 믿음과 신뢰의 증명을 계약서로 하지. 널 좋아하지만, 그것보다는 한 장의 계약서를 더 믿어.”

“날……, 날 좋아한다고?”

“네가 생각하는 방식은 아닐 거야. 그래서 멍청한 짓을 했어. 아마 앞으로도 할 거야. 변해야 한다는 건 알지만, 쉽게 바뀌기 힘드니까.”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게 좀 말해 봐.”

채훈이 답답하다는 듯 캐물었지만 승건은 곧이곧대로 말할 생각이 없었다.

자신이 채훈을 좋아하는 이유는 여럿이었다. 편해서, 익숙해서, 욕심이 없어서, 향기를 맡고, 맛을 느낄 수 있어서, 다정해서, 화사하게 웃다가도 여기까지로 선을 그어서, 손에 잡혀주지 않아서.

복잡한 감정이 뒤엉킨 끝에, 지금은 아주 강한 소유욕만이 가득 넘쳤다. 어떻게든 손에 넣어야 했다. 그리고 그걸 채훈이 그다지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이성적으로 판단했다.

“결혼은 하지 않아도 좋아. 그리고 아이는 낳기를 바라. 모든 지원을 하겠어.”

“무슨 지원을 한다고.”

“병원을 그만뒀잖아.”

“먹고살 돈은 있어. 임신했다고 일 못 하는 것도 아니고. 새로운 직장 찾으면 돼.”

승건은 내 돈을 받기 싫냐고 유치하게 따지고 싶어졌다. 이럴 때 채훈의 고집은 상당했다. 네가 아니어도 나 혼자서도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고 강조하고 싶은 것 같았다. 그런 모습도 나쁘지 않았지만, 더 이상 강요를 할 수 없는 시점에서는 난감할 뿐이었다.

“직장을 다시 다니는 건 네 마음대로 해. 다만, 너 혼자 낳고 기르려고 하지 마. 나도 친권을 행사할 테니까.”

“음……. 친권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후계자 문제 같은 거 복잡하지 않아?”

“안 복잡해지는 방법을 찾으면 돼.”

방법이야 많았다. 그저 귀찮은 일이 많이 생길 뿐이었다. 결혼 문제도 마찬가지였다. 채훈과의 결혼을 기정사실로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과감하게 언론을 이용하거나 가족이나 친구들을 동원할 수도 있었다.

채훈을 자신의 뜻대로 조종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건 아주 조심스러워야 했다. 둔한 주제에 그런 것에만 눈치가 빠른 녀석의 마음이 상하지 않게 말이다.

“내 마음대로 하지 않는다고 약속할게. 하지만 나도 양보할 수 없는 게 있어.”

“나는…….”

서두를 꺼낸 채훈이 입을 다물었다. 말을 고르는 눈치였다.

“말해.”

“나는 네가 뭘 하고 싶어 하는 건지 모르겠어. 그냥 끝내도 되잖아.”

끝내자는 말을 쉽게 하는 채훈 때문에 승건은 인상을 썼다. 아까도 이제는 더 이상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 때문에 이성이 끊겼다. 그리고 지금은 끝내자는 말에 뭔가 뜨거운 것이 울컥하고 치밀었다.

하고 싶은 것이야 잔뜩 있었다. 다만 그것을 채훈이 동의할 것인가는 별개의 문제였다. 감언이설로 현혹하는 것은 승건의 성격과 맞지 않았다. 그렇다고 널 한입에 집어삼키기 위해 준비 중이라는 진심을 내비칠 생각도 없었다. 그랬다가는 채훈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칠 테니까 말이다.

“하고 싶은 건 많은데, 우선은 부정 각인 문제부터 해결해야지.”

“끝까지 이러면?”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 보고. 넌 어떻게 하고 싶어?”

“한동안 널 안 봤으면 좋겠어.”

한동안이 언제까지냐고 승건은 묻지 않았다. 정확히는 물을 수 없었다. 페로몬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채훈의 창백한 얼굴은 그대로였다. 아마도 도망치고 싶은 것을 참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의 향기는 여전히 자신을 유혹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이럴 때는 밀어붙이기만 하면 역효과였다. 느슨하게 놓아줄 필요가 있었다.

“알았어. 자세한 일정은 심 실장님과 이야기하도록 해.”

“너는……. 아니야.”

무어라 말을 하려던 채훈이 입을 다물었다. 승건은 그게 뭐냐고 묻지 않았다. 대신에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기억이 돌아왔어. 11년 전 가을에, 사고가 났던 그날 밤의 기억 말이야.”

“그래?”

“그때, 나도 너를 좋아했었어. 지금까지 잊고 있었지만.”

“……?!”

승건은 채훈의 눈이 휘둥그레 커지는 것을 보며 웃었다. 열아홉 살의 자신이 품은 감정은 어딘가 어설펐다. 달콤하고 시큼한, 초조한 감정의 기억을 아직도 떠올릴 수 있었다.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아마 내가 먼저 고백했을지도 몰라.”

이미 지나간 일에 만약이라는 가정을 하는 것은 쓸모없는 일이었다. 고백을 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분명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말하고 싶었다. 나도 너를 좋아하고 있었다고 말이다.

얼떨떨한 표정 끝에 인상을 구긴 채훈이 입을 굳게 다물었다. 승건은 그대로 뒤돌아 병실을 나섰다. 혹시나 채훈이 부르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병실을 나와 문을 닫을 때까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승건이 병실을 나오자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던 심정민이 가까이 다가왔다.

“앞으로 채훈이와 관련된 일은 심 실장님에게 일임하겠습니다. 가능한 채훈이가 바라는 대로 해주고……. 그래도 명심하셔야 하는 건, 무슨 일이 있더라도 채훈이와 아이가 무사해야 한다는 겁니다. 한국으로 귀국하는 것도, 장거리 비행기를 타도 괜찮은지 의사의 소견부터 받으시고요. 나머지는 아까 말씀드린 대로 하시면 됩니다.”

“큰회장님께서는 알리셔야죠.”

“당분간 지켜보고요.”

승건의 외할아버지인 정규완은 핏줄에 집착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외할아버지보다는 오히려 외할머니가 더 좋아할 게 분명했다. 집안에 자손이 귀한 데다 결혼할 생각이 없던 승건에게 아이가 생겼다고 하면 반길 것이다. 그래도 그건 조금 더 나중의 일이었다.

심정민에게 몇 가지 더 소소한 것을 지시한 승건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병원 밖으로 향했다.

채훈이 사라진 지난 한 달 동안 심장이 바짝 말라 죽어버리는 줄 알았다. 오늘만 해도 몇 번이나 심정이 덜컹거렸다. 균형을 잃고 휘청거리다가 쪼그려 앉는 모습은 11년 전 그때를 떠올리게 했다.

이대로 돌아가 그를 가지라고 본능이 명령했다. 향기로운 몸을 끌어안고 자신의 페로몬으로 잔뜩 뒤덮이게 하고 싶어서 손이 떨릴 정도였다.

자신의 오메가를 만난 알파의 소유욕이란 이래서 문제라고 혀를 차며 승건은 앞으로의 일을 생각했다.

온전히 채훈을 손에 쥐려면 준비할 게 잔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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