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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고백 후】 (15/26)

  【14. 고백 후】

일요일 오후였다. 날씨는 오랜만에 화창했고 세상은 이제 여름이었다.

3일 만에 병원에서 퇴원한 채훈은 자신의 오피스텔이 아니라 승건의 집에 서 있었다. 아직 최진수가 붙잡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퇴원을 도와준 심정민이 조심하는 게 좋다고 했을 때 채훈도 동의했다.

커다란 거실에서 주인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은 낯선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거기서 강영환의 수다를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박광호, 그 새끼도 미국 간다고 해서 망설였는데, 그냥 미국으로 가기로 했어. 동부하고 서부하고 거리가 멀잖아. 영국도 고민해 보긴 했지만 미국이 나을 것 같아. 영국은 날씨가 거지 같거든. 방학 끝나기 전에 다 준비해 준대. 반년은 어학연수부터 하고 내년에 시작해서 2년 과정이야. 아, 그래. 엄마하고도 이야기해 봤는데, 그런데 엄마는 유학이고 뭐고 가지 말래. 안 엮이는 게 좋다고. 하지만 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치면 병신이지. 엄마가 유학 보내주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무조건 갈 거라고 하니까, 엄마도 따라간대. 난리 났어. 안 그래? 형? 듣고 있어?

“듣고 있어.”

―형. 형 애인이랑 가능한 한 오래 사귀어. 3년은 보장해 준다고 하지만, 그게 화장실 가기 전이랑 후랑 같을 수가 없잖아. 내가 진짜 정신병원에라도 집어넣을까 봐, 완전 벌벌 떨었거든. 형도 알 거 아니야. 이쪽 바닥이 인정사정없다는 거. 그런데 맨손으로 쫓아내지도 않고 유학을 보내준다니. 형 애인이 진짜 돈이 많은가 봐.

발랄하게 떠드는 강영환의 목소리가 귀에 울렸다. 채훈은 금요일에 승건이 말한 경고가 유학이라는 사실을 퇴원하는 길에 심정민에게서 전해 들었다. 재벌들이 말 안 듣는 자식을 밖으로 내쫓는다고 하더니 그걸 강영환에게 하고 있었다.

대학에서 미술사를 전공하고 있는 강영환은 1학년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유학을 가겠다고 부모님을 졸라댔다. 주변 동기들이 다들 유학을 준비하고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오메가인 막내가 가족 하나 없는 외국에 혼자 나가는 것을 반대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어머니의 반대는 더욱 단단해졌다. 물론 강영환은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강영환은 쫓겨난다는 것을 알면서도 염원했던 유학을 가게 된다는 사실에 좋아하고 있었다. 반면에 채훈은 안에서 새는 바가지가 밖에서도 샌다는 속담을 떠올리고 말았다. 녀석이 제대로 공부를 할까 싶기도 했다.

어머니가 함께 간다면 괜찮기는 할 테지만, 그래도 걱정부터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가서 열심히 해. 지금처럼 놀지만 말고.”

―형. 내가 얼마나 유학 가고 싶어 했는지 알잖아. 딴 건 몰라도 영어 공부는 열심히 했단 말이야. 가서 공부는 따로 해야겠지만. 그런데 최진수, 그 자식은 언제 잡힌대? 호텔도 좋지만 너무 갇혀 있는 것 같아서 싫어. 유학 가기 전에 친구들도 만나야 하는데.

“곧 잡히겠지. 끊어야겠어. 엄마한테서 전화 온다.”

―나 유학 가는 거, 반대 안 한다고 해. 알았지?

“그래. 알았어. 나중에 다 같이 모여서 한번 이야기하자.”

그렇게 강영환과의 통화를 끊은 채훈은 얼른 어머니의 전화를 받았다. 예상대로 어머니는 강영환의 유학 이야기부터 꺼냈다. 어머니는 강영환이 사고를 쳐서 가족 모두 경호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막내아들이 한국에서 내쫓긴다는 사실은 몰랐다.

갑작스러운 유학을 걱정하면서도 본인이 따라가야겠노라고 하는 것까지 채훈은 모두 들어주었다. 그리고 당장에 보자는 어머니와 내일 본가로 찾아가서 자세한 이야기를 하기로 약속하고 통화를 끊었다.

긴 통화로 뜨거워진 휴대폰을 내려다보던 채훈은 애매하게 입매를 당겼다. 가족들과 멀어지기 위해 먼 곳으로 떠날 생각까지 했었는데, 어느 순간에 가족들이 모두 외국으로 나가게 되었다.

베트남으로 간 형에게서는 연락 한 번 오지 않았지만 어머니에게서 전해 들은 바로는 잘 지내고 있다고 했다. 형이 떠났을 때는 속이 시원했는데, 동생이랑 어머니까지 미국으로 간다고 하니까 기분이 이상해졌다.

어차피 다들 저마다 자기 인생을 찾아가는 법이다. 이제 남은 것은 자신뿐이었다. 딱히 하고 싶은 게 없는데,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무엇을 해야 할지 잘 떠오르지 않아서 왠지 초조해졌다.

채훈은 거실 창 너머로 여름 정원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반사적으로 승건을 떠올렸다. 감금이냐며 농담을 섞어 문자를 보냈지만 승건은 답이 없었다. 그가 보고 싶다가, 만나면 섹스를 하게 되나 생각했다.

뒷머리의 거즈는 제거한 상태였다. 자세만 조심하면 어떻게든 섹스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섹스만 생각하고 있네.”

채훈은 자신의 상태가 정상이 아닌 건가 의심했다. 며칠 전부터 계속 열이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약을 먹어도 그때뿐이었다. 몸살감기가 온 것 같은 약간의 고양감은 성적인 흥분과 닮아 있었다.

승건이 환자랑은 섹스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펠라만 하고 떠났던 그때부터 계속 이랬다. 조금만 방심하면 생각이 그쪽으로 쏠렸다.

“열 때문에 안 한다고 하려나.”

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짚은 채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손바닥이 뜨거워서 열이 나는지 안 나는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었다.

의사는 계속되는 미열 증상은 스트레스 때문일 수도 있다고 했다. 종합검진으로 감염 등의 병증을 알 수 있으니 그전까지는 약을 잘 챙겨먹으라는 말도 더했다.

점심을 먹고 해열제를 먹었는데도 들뜸이 가라앉지 않았다. 이래서야 정말 발정이라도 난 게 아닌가 하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것 같았다.

사실 섹스는 승건을 만나는 가장 중요하고 유일한 이유였다. 만약에 더 이상 섹스를 못 하게 되면 계약도 끝나게 되는 건가 궁금해졌다.

거기까지 생각을 이어가던 채훈은 자신이 계속 끝을 바라고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냥 이대로 계속 아무렇지 않게 지내는 게 맞았다. 하지만 반년 후에 웃으면서 헤어질 자신이 점점 없어졌다. 승건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숨기는 게 힘들어졌다. 아니, 정확히는 그도 자신을 좋아해 주기를 바랄 정도로 마음이 커졌다.

제일 안 좋은 짝사랑 방식이었다.

10년 전에도 혼자 좋아하고 말았는데, 이제는 그게 아니었다.

감정이 깊어졌다. 헛된 바람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스스로 멈출 수가 없었다.

“좋지 않아.”

채훈은 한숨을 내쉬면서 머리를 내저었다. 승건을 좋아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가 잔뜩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꾸 더 좋아졌다. 더 좋아지는 것까지는 괜찮았다. 그러나 승건이 자신을 좋아하기를 바라는 것은 가망이 없었다.

때마침 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이 진동했다. 승건의 메시지였다.

[오늘 늦을 거야. 저녁 준비되어 있으니까 챙겨먹어.]

그렇게 기다렸던 승건의 메시지는 별거 없었다. 자연스럽고, 무심하고, 또 다정했다. 조금 전까지 다 끝내버리고 싶었는데도 불구하고 메시지를 보니까 기뻐졌다.

기분도 마음도 오락가락했다. 보고 싶다. 끝내고 싶다. 양극단의 감정이 저울 위에 올라간 채로 시소를 탔다.

승건을 생각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졌다. 인생이란 길고 감정은 삶의 모든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전부인 것 같았다.

“바보. 멍청이.”

스스로를 자책하며 뺨을 치던 채훈은 오싹함을 느끼며 부르르 떨었다. 냉방이 잘되어 있는 실내가 서늘하긴 했다. 거기에 열 때문에 오한이 들었다.

이대로라면 진짜 감기에 걸리겠다 싶어서 채훈은 스툴 위에 준비되어 있는 여름 담요를 어깨에 두르고는 소파에 앉았다. 약이라도 먹어야 하나 고민하면서 눈을 감았다. 승건에게 답장을 보내야 한다고도 생각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병원에서 푹 잤는데도 불구하고 잠이 쏟아졌다. 이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며 눈을 뜨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채훈은 까무룩 잠에 빠져들었다.

*

*

지잉. 지잉. 지잉.

정신이 든 것은 휴대폰이 요란하게 진동했기 때문이었다. 소파에 누웠다가 잠시 잠이 들었던 것을 깨달은 채훈은 휴대폰을 찾아 들었다. 발신인은 승건이었다. 막 전화를 받으려는데 울림이 멈췄다.

통화를 누르려다가 혹시나 다시 승건에게서 전화가 올까 봐 관뒀다. 잠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자 승건에게서 메시지가 엄청 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답장을 보내라고 하는 것부터, 뭐 하고 있냐는 메시지가 열 개는 와 있었다. 그리고 부재중 전화도 네 통이나 됐다. 뭔가 급한 일인가 정신이 번쩍 드는데 다시금 승건에게서 전화가 왔다.

“응. 나야. 급한 일이라도 있어?”

―너 어디야?

“어디긴? 네 집이지.”

―하아. 왜 전화를 안 받아?

한숨을 내쉰 승건이 따져 묻는 바람에 채훈은 어리둥절했다.

“잠깐 잤어. 왜 그래?”

―답장도 안 하고 전화도 안 받아서 쓰러졌나 싶었어.

지난번에 감기 때문에 쓰러진 것 때문인지 승건이 꽤나 유난스럽게 굴었다. 확실히 이상하긴 했다. 아무리 잠이 깊게 들어도 보통은 한 번 만에 받았다. 부재중 전화가 네 통이 될 때까지 깨지 않은 게 신기한 노릇이었다.

“깊게 잠들었나 봐.”

―왜 그렇게 힘이 없어? 밤에 제대로 못 잤어?

“잠은 잘 잤는데, 아무래도 감기인 것 같아.”

―약 상자 어디에 있는지 알지? 좀 이르지만 저녁부터 먹고 약 먹어. 심 실장님이랑 같이 돌아갈 테니까. 아니다. 심 실장님부터 먼저 보낼게. 거리가 멀어서 좀 걸릴 거야.

“아니야. 그러지 마. 괜찮아. 약 먹을게. 상자 어디에 있는지 알아.”

―사진 찍어……서 안 보내도 되는데, 먹었는지 확인은 할 거야. 껍질 남겨놔.

며칠 전에 명령을 내리지 말라고 했더니 화법이 바뀌었다. 그래도 약 먹었는지 확인할 거라고 엄포를 놓는 것은 여전해서 웃겼다. 너를 걱정하고 있다는 말을 또 다른 방식으로 들으려니 왠지 속이 간질거리는 것 같았다. 갑자기 승건이 너무 보고 싶어졌다.

결국 채훈은 약 껍질을 남겨놓겠노라고 약속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TH 정유의 회장인 작은 할아버지의 칠순 잔치에 참석해야 한다는 승건에게 힘내라고 응원해 주었다.

“힘내. 너한테 노래를 부르라고 시키지는 않겠지만,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힘드니까.”

―별로 어려운 거 아니야.

“딴짓을 못 하잖아. 칠순 잔치는 언제 끝나? 몇 시에 올 수 있어?”

자연스럽게 승건이 돌아오는 시간을 묻던 채훈은 말을 다 하고서야 아차 싶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승건이 언제 올지 물어본 적이 없었다. 그가 보고 싶다는 마음을 혹시나 알아차린 게 아닐까 걱정하다가, 기다리고 있으니까 이 정도 질문이야 할 수 있는 거 아니냐고 뻔뻔하게 마음먹었다. 아니나 다를까 승건의 반응은 평범했다.

―예정대로라면 8시에 끝나. 그러니까 9시 안에는 돌아갈 수 있을 거야.

“알았어.”

채훈은 얼른 오라는 말이 튀어나오려는 꿀꺽 삼켰다. 아무래도 그건 아니다 싶었다. 조금 있다가 보자는 승건의 말을 끝으로 종료를 누른 채훈은 그제야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저 간단한 통화를 한 것뿐인데, 뭔가 아슬아슬했다. 보고 싶다는 마음이 자꾸 커지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채훈은 뺨을 마구 문질렀다. 몸 상태가 영 별로였다. 승건의 말대로 이르게 저녁을 먹고 약을 삼킨 다음에 좀 더 자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마음먹고 일어나는데, 순간 다리에 힘이 빠져 휘청거리다가 탁자를 쳤다. 모질게 정강이를 찧는 바람에 눈물이 나올 것만큼 아팠다.

앓는 소리를 내며 정강이를 문지르는 사이에 바닥으로 떨어진 두 개의 리모컨이 무슨 조화를 부렸는지 TV가 켜졌다. 그리고 채훈이 한 번 더 휘청거리면서 리모컨을 밟자 화면이 컴퓨터 화면의 그것으로 전환되면서 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이런.”

가벼운 몸 개그 끝에 소파에 주저앉은 채훈은 리모컨을 모두 집어 들었다. 승건의 집에서 가끔 TV를 보긴 했지만 사용하는 리모컨이 달랐다. 아마도 지금은 컴퓨터랑 연동되고 있는 것 같았다.

TV 속의 영상은 화상 통화를 녹화한 것인 듯, 의사처럼 보이는 중년의 남자가 커다랗게 보이고 승건의 얼굴이 오른쪽 위에 작은 사각형 안에 있었다. 날씨가 어떻냐는 대화를 들으며 채훈은 TV 전원을 껐다.

거실은 곧 조용해졌다. 그러나 어디선가 나직한 대화 소리가 계속 들려오고 있었다. 채훈은 소리의 근원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2층인 것 같았다.

“컴퓨터인가.”

채훈은 귀신을 무서워하는 편이었다. 특히 조용한 곳에서 의미 없이 들리는 소음을 소름 끼쳐 했다. 그래도 방금 전에 TV에서 나온 영상이 연동된 컴퓨터에서 그대로 재생되고 있지 않을까 하는 합리적인 추론을 할 정도의 이성은 있었다. 2층에는 승건의 서재가 자리했다. 채훈은 컴퓨터를 끄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니까 그건 우연이었다. 채훈이 리모컨을 떨어트려 TV와 연동된 컴퓨터를 켠 것은, 그리고 리모컨을 줍다가 버튼을 잘못 누르는 바람에 영상을 재생시킨 것도 모두 의도치 않은 결과였다.

그래서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라가던 채훈은 서재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별달리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저 몸이 무거우면서도 머리가 멍한 것이 걱정스러울 뿐이었다.

―강채훈 씨와의 관계가 긍정적인 효과를 미치고 있는 게 분명하네.

승건에게 잔소리 듣기 전에 감기약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하던 채훈은 갑작스럽게 들리는 자신의 이름에 우뚝 멈춰 섰다. 반쯤 열린 서재 문 너머에서 분명히 자신의 이름이 들려왔다.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열이 올라 어지럽기는 했지만 채훈은 목소리를 구분할 수 있었다. 방금은 승건이었다. 승건의 말을 낯선 남자가 이어받았다. 아마도 영상에 나왔던 의사일 것이다.

―데이터를 보면 특정 항목에서 변동이 있지. 아마 높은 확률로 러트 주기가 달라질 텐데. 열여덟 살 때와 수치와 비슷하니까, 두 달 주기로 변할 가능성이 가장 커.

채훈은 서재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예상했던 것처럼 책상 위에 올라가 있는 노트북 화면에 영상이 떠 있었다. TV에서 나오던 화면 그대로였다.

―강채훈 씨와 러트를 보내는 것을 추천하네. 알파의 페로몬을 최대로 확장시킬 기회이니까, 가능한 억제제를 먹지 말게나.

―알겠습니다.

―그리고 강채훈 씨에게는 러트가 온 우성 알파와의 섹스가 위험하다는 것을 알리고.

―그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승건이 우려 섞인 의사의 충고를 칼같이 잘랐다. 그러자 장년의 의사가 살짝 얼굴을 찌푸리더니 베타에게 노팅은 무리가 간다며 중얼거렸다.

채훈은 승건이 러트를 함께 보내자고 했던 게 의사의 권유에 따른 것임을 알아차렸다.

―5개월 만에 가시적인 변화가 생겼다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지. 그래도 기한이 1년이라는 것은 너무 짧아. 자네는 후유증을 꼭 고치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이렇게 뚜렷한 변화가 오지 않았나. 강채훈 씨에게 사실대로 알리고 그의 도움을 받는 게 어떤가? 보통의 임상 시험은 1년만으로는 짧아.

―1년이면 충분합니다. 그 이상 오래 끌 생각은 없습니다. 박사님.

―자네 고집이 세다는 것을 내가 잊었군. 이번 러트 후에 어떻게 되는지 지켜보고 말하지.

두 사람의 대화는 조금 더 이어졌다. 의사는 승건이 한국에 간 이후로 상담 기록이 전무하다면서 믿을 수 있는 정신과 상담의를 찾으라고 했다. 승건이 마지못해 알겠다고 대답한 후에 다음 면담 일정을 잡으면서 영상이 끝났다.

서재 안에는 노트북의 작은 소음만이 들렸다. 영상이 멈춘 다음에도 채훈은 숨 쉬는 것조차 잊어버리고는 꼼짝도 하지 못했다.

가시적인 변화, 후유증, 임상 시험. 의사가 말한 단어가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승건이 채훈에게 러트를 함께 보내자고 한 게 의사의 권유이자 실험을 의도하고 있으며, 어떤 효과를 위해서라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채훈은 인상을 썼다. 열이 오른 머리는 잘 돌아가지 않았지만 승건이 자신에게 1년 동안 만나자고 한 이유가 왠지 저것일 것 같았다.

열어서는 안 되는 판도라의 상자가 눈앞에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고 돌아서기에는 많은 것이 궁금했다. 이건 다시없을 기회였다.

길게 숨을 들이쉰 채훈은 떨리는 걸음으로 노트북을 향해 가까이 다가갔다.

*

*

면담 영상이 저장되어 있는 폴더를 찾는 것은 손쉬웠다. 열 개의 영상은 짧게는 5분에서 길게는 20분 길이였다.

모든 영상을 찾아본 채훈은 많은 것을 알아냈다.

주로 한국어로, 가끔은 영어로 진행되는 영상은 원격 진료 면담이었다. 장년의 의사는 미국에서 승건을 오랫동안 진료한 주치의였고, 승건은 그와의 진료를 모두 영상으로 저장해 두었다.

승건이 10여 년 전의 사고로 인해 잃은 것은 기억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사고의 후유증으로 맛을 음미하지 못하고 향기를 맡지 못하게 되었다. 우성 알파이면서도 오메가의 페로몬을 악취처럼 느꼈다. 의사는 그걸 상상 각인 증상이라고도 말했다.

그러나 승건은 채훈과 함께 있을 경우 증상이 호전되었다. 섹스를 하고 난 다음에는 3일 동안 유지되었다.

두 시간여 동안 면담 영상을 모두 본 채훈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하나씩 알아낸 사실이 가리키는 결과는 그다지 충격적이지 않았다.

1년이라는 기간 동안 만나자고 한 것은 자신이 임신할 걱정이 없는 베타 남성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상상 각인의 부작용을 고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아마 후자의 이유가 먼저였을 테고, 더 중요할 거라고 장담할 수도 있었다.

‘그 녀석 때문에 10년이나 고생했던 것을 생각하면 얼굴 맞대기가 거북합니다. 고약한 인연이에요.’

초반 면담 영상에서 승건은 잠깐이긴 하지만 불쾌한 감정을 드러냈다.

채훈으로서는 맛과 향을 알 수 없다는 것이 어떤 건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먹는 것을 즐기지 않는 승건의 성향을 생각하면, 원망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했다. 그런데도 부작용을 없애기 위해 살을 맞대고 섹스를 했다는 사실에 속이 울렁거렸다.

채훈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수단일 뿐이라는 것은 이미 경험하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보다 더 기분이 별로였다. 아니, 엉망이었다.

“나쁜 새끼.”

감정이 격해진 채훈은 뜨거워지는 눈을 손으로 꾹 눌렀다. 억울하고 짜증 났지만 그렇다고 이런 걸로 울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도 승건을 이용했다. 돈을 받고 일신을 팔았다. 그러니까 그를 탓할 일이 아니었다. 이 모든 것은 그저 거래일 뿐이었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말해도 엉망인 기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다정하게 약을 먹으라고 했던 승건의 말조차도 비꼬아 해석하고 싶어졌다.

“아, 진짜 거지 같다.”

왜 사람들이 화가 나면 물건을 집어 던지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뭔가를 파괴하고 싶은 충동이 치밀어 올랐다. 동시에 이 모든 것을 끝내고 싶었다. 승건의 얼굴 따위는 보기도 싫었다.

1년의 계약은 아직 반이나 남아 있었다. 그 기간 동안 아무렇지 않게 승건을 대할 자신이 없었다. 섹스는 더더욱 그랬다. 아니, 할 수는 있다. 그냥 계약이라고 여기면 그만이었다.

그저, 그러기엔 이 모든 것이 끔찍했다.

계약을 어길 경우 어떤 페널티가 있을지에 대해서는 문서로 남겨두지 않았다. 승건도 그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한 적이 없었다. 그래도 그가 어떻게 나올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손발을 자르고 꼼짝도 못 하게 만들 것이다.

완벽하게 끝낼 방법이 하나 있었다. 그것이 현명한 선택인지, 자신에게 지금 옳은 판단을 내릴 만한 이성이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저 그러고 싶었다.

채훈은 아득함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 * *

“강채훈!!”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커다란 목소리에 채훈은 번뜩 눈을 떴다. 승건이었다.

눈을 감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짐작이 가질 않았다. 그래도 해가 지는 시간에 맞춰 불이 들어오게 설정된 실내등이 켜져 있었다. 잠시 눈을 감은 것 같은데 시간이 훌쩍 지난 것만은 분명했다.

멍하니 눈을 깜빡거리던 채훈은 비실거리며 일어났다. 그 잠깐의 움직임에 열이 훅 올랐다. 마치 몸이 익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어지러움에 머리를 쓸어 올리자 이마에 맺힌 땀이 손끝을 적셨다. 아무래도 감기가 제대로 온 모양이었다. 그래도 승건을 봐야 한다는 생각에 억지로 몸을 움직였다.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에 몸이 공중을 걷는 듯, 붕 뜬 기분이 들었다. 몇 번이고 고꾸라지려고 하는 것을 난간을 잡고 버텼다. 그러나 1층에 내려서서 승건의 모습이 시야에 걸리자 갑자기 어지러움이 심해지면서 숨이 막혔다.

결국 벽을 짚으며 쪼그려 앉아야 했다. 술을 마시지도 않았는데 숙취가 온 것처럼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이명과 함께 심장 소리가 머리에서 울리는 것 같았다.

“채훈아. 정신 차려.”

어느새 승건이 다가와 팔을 붙잡았다. 채훈은 승건이 가까워지자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다. 숨 막히는 답답함이 가시면서 흐느적거리며 가라앉던 몸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 같았다.

“괜찮아. 그냥 갑자기 열이 나서…….”

길게 숨을 들이쉰 채훈은 승건을 보았다. 한여름에도 딱딱한 슈트를 빈틈없이 차려입은 그는 어딘가 놀란 것 같았다. 잘생긴 얼굴을 보고 있자니 다시 심장이 딱딱해졌다. 동시에 조금 전에 봤던 영상에서 얻은 정보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고약한 인연이라고 했다. 부작용을 위한 임상 시험이라고도 했다.

승건이 자신을 배신했다고는 할 수 없었다. 이건…… 그저 거래일 뿐이었다. 그리고 이 관계를 끝나기를 원했다.

“괜찮기는 뭐가 괜찮아. 지금 네 상태를 몰라?”

“아니, 그것보다 내가 물어볼 게 있는데.”

채훈은 자신의 팔을 붙잡은 승건의 손을 꽉 잡았다. 자신의 몸이 더 뜨겁기에 그의 손이 상대적으로 시원하게 느껴졌다. 그것이 좋다고 생각해 버린 자신이 바보 같다고 생각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계약할 때, 감정이 엮이지 말아야 한다고 했었는데. 거기에 대한 페널티라면 더 이상 안 만나는 거 맞지?”

“……?!”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승건이 미간을 구기는 모습에 그제야 채훈은 만족스러웠다. 녀석이 당황하는 것을 보고 싶었다. 좋아한다고 고백하면 승건이 화를 내고 헤어지자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냉큼 그렇게 하자고 할 자신이 있었다.

“내가 널 좋아한다고 하면. 이딴 거 다 끝나는 거냐고.”

“그게 무슨 소리야?!”

승건의 낮은 목소리는 으르렁거림을 닮아 있었다.

“무슨 소리긴. 내가 너를 좋아하면, 아니, 좋아해. 좋아한다고. 감정이 생겼어.”

채훈은 가능하면 웃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힘이 없었기 때문에 가느다란 목소리로 속삭이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면서 한쪽 무릎을 꿇고 쪼그려 앉은 몸이 점점 승건에게 기울어지려고 했다.

승건과 가까워지면서 어지러움과 이명은 사라졌다. 대신에 열과 심장 소리가 비정상적으로 높아지고 커졌다.

머리가 둥둥 울리고 몸이 삐꺽거리는 바람에 고장 난 기계로 변신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무릎과 손이 떨리면서 온몸의 근육이 제멋대로 튀었다. 식은땀이 뒷목에서 등을 따라 흐르는 것이, 피부 아래에서 따끔한 전류가 번지는 것이 동시에 느껴졌다.

감당할 수 없는 열기에 채훈은 각종 위험한 전염병을 떠올렸다. 어떡하지, 혼란스러우면서도 짙은 그늘이 드리워진 승건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날 좋아한다고?”

승건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걸 보며 채훈은 천천히 눈을 깜빡거렸다. 승건이 바로 코앞에 있는데도 그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응. 그러니까 끝내자.”

채훈은 겨우 입술을 달싹거렸다. 순간 팔을 쥔 승건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과 동시에 다시 숨이 막혔다. 말로 형용하기 힘든 감각이 밀려들었다. 그저 열이 동반된 몸살감기 기운이었던 것이 어떤 고양감으로 바뀌었다. 그건 성적인 충동이었다.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싶지 않았던 채훈은 필사적으로 얼굴에 힘을 주었다. 그래서 자신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은 절박하고 비장했다.

그러나 그것도 승건이 열이 오른 뺨을 매만지기 전까지뿐이었다. 승건의 손이 닿은 뺨에서 전기가 번지는 듯한 아찔함에 채훈은 몸을 움츠렸다.

“네가 날 좋아한다고? 어떻게?”

“좋아하면 좋아하는 거지. 읏.”

“네가 날 좋아할 리 없잖아.”

단언하듯 말하는 승건 때문에 채훈은 열기 속에서도 어리둥절했다. 나름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긴 했다. 그래서 그걸 모른단다.

채훈은 가라앉은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승건의 시선에 숨을 삼켰다. 이 상황에서도 저 눈빛에 정말 몸이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그럼 이제라도 알아. 너 좋아해.”

“강채훈.”

승건에게 이름을 불리는 것만으로도 몸이 덜덜 떨리는 바람에 채훈은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미안한데, 그러니까 널 좋아해서 미안한 건 아니고. 지금 상태가 안 좋아. 제대로……. 하아. 말을 못 하겠어.”

한 마디씩 끊어지는 목소리는 스스로가 듣기에도 덜덜 떨렸다. 열 때문에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정신을 잃을 것 같은데도 이어졌다.

“지금 네 상태가 어떤지 모르지?”

뺨을 쓸던 승건이 잇소리를 내며 머리를 넘겨주었다. 정확히는 눈을 가리는 앞머리를 치웠다. 그리고 그것조차 자극으로 다가왔다.

채훈은 자신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았다. 평범한 감기라고 하기에는 이상했다.

오늘 먹은 것이라고는 병원에서 아침과 점심, 커피, 그리고 승건의 집에서 마신 물이 전부였다. 설마 승건의 냉장고에 들어 있던 물에 이상한 약이라도 타놓은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뭔가 잘못되긴 했는데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채훈은 특히 승건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마치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온몸의 신경이 그를 향하고 있었다.

그를 원했다.

“이상하긴 해.”

머릿속에는 온갖 생각이 가득 찼지만 입에서 나온 말은 고작 이상하다는 것뿐이었다. 흥분했다는 말은 죽어도 할 수 없었다.

“미치겠군.”

“……?”

승건이 한탄처럼 억눌린 소리를 내뱉었지만 채훈은 그가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 미칠 것 같은 것은 자신이었다.

“심 실장님에게 약을 부탁해야겠어.”

“가지 마.”

채훈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승건의 손을 반사적으로 붙잡았다. 웅크린 상체를 펴고서야 발기한 성기가 바짓자락에 쓸린다는 것을, 속옷이 축축하게 젖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놀랄 일도 아니었다. 치솟는 욕망에 갈증을 느끼며 채훈은 승건의 흔들리는 눈을, 모양 좋은 입술을 바라보았다.

원하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그를 끌어안고 키스를 하고 싶었다. 쾌락에 꿰뚫린 채 소리 높여 비명을 내지르는 상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본능대로 승건을 끌어당기려던 채훈은 입술을 깨물었다. 끝내자고 해놓고는 이렇게 매달리는 자신이 웃겼다. 가까스로 손을 놓았다. 아니, 놓으려는데 승건이 그대로 턱을 붙잡고는 입술을 맞물려 왔다.

부드럽고 뜨거운 입술이 닿자마자 채훈은 가까스로 붙잡고 있던 이성의 끈을 놓아버렸다. 채훈은 목마름을 채우기 위해 승건의 목을 끌어안으며 혀를 빨았다. 그것만으로 희열에 허리가 흐물흐물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자신의 몸이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열 때문에 미쳐버렸거나, 아니면 정말 약이라도 잘못 먹은 것일 수도 있었다.

채훈은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미칠 것 같은 열기만 가라앉힐 수 있다면 뭐든 상관없었다.

“흐……응.”

키스만으로 그제야 겨우 숨이 쉬어졌다. 그러나 아직 부족했다. 더 만지고 더 닿고 싶었다.

그렇게 생각하던 채훈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승건에게 깔린 채 바닥에 누워 있었다. 땀에 흠뻑 젖은 등이 바닥에 닿자 잠시 시원하다고 느꼈지만 곧 미지근해졌다.

그것보다 채훈의 신경을 온통 곤두서게 하는 것은 셔츠 안으로 파고든 뜨거운 손이었다. 그저 맨살을 매만지고 있는 것뿐인데 미칠 것 같았다. 특히 승건의 체향이 너무 강렬했다. 젖은 숲과 겨울 꽃의 향기가 생각 자체를 마비시켰다.

채훈은 승건을 더 꽉 끌어안고는 키스에 탐닉했다. 불빛이 깜빡거리는 것처럼 순간순간 머릿속과 시야가 점멸했다. 그때마다 기억이 뭉텅뭉텅 사라졌다.

승건의 혀를 빨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바지가 벗겨졌다. 다시 눈을 감았다 떴을 때는 승건이 자신의 성기 뿌리와 음낭을 움켜쥐고는 주무르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아찔해져서 고개가 뒤로 휙휙 넘어갔다. 아래는 이미 팽팽하게 발기한 상태였다. 귀두 끝이 젖다 못해 질질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제……. 흣, 으읏. 그냥, 그냥 넣어.”

무시무시한 성감이었다. 예전에 술에 취해 승건의 아파트 입구에서 일을 쳤을 때도 이렇지는 않았다. 그때는 안달이 나서 달려들었지만, 지금은 거짓말을 조금 보태서는 안 하면 미치거나 죽을 것 같았다.

“도발하지 마. 다쳐.”

“다쳐도 내가 다쳐. 하읏. 아응. 아.”

이번에는 예고도 없이 승건의 손가락이 뒤를 벌리고 들어왔다. 채훈이 바라 마지않던 것이었다. 두 개의 손가락이 평소보다 쉽게 구멍 안에 자리한 것을, 저도 모르게 꽉 조였다.

긴 손가락은 마치 성기라도 되는 것처럼 안쪽 깊숙한 곳을 찔러 들었다. 수치심 같은 것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더한 쾌락을 위해 구멍을 조이며 허리를 흔들었다. 눈물이 고인 시야가 하얗게 부서졌다.

“괜찮아.”

승건이 귓가에서 사납게 속삭였다. 눈물이 번진 눈을 깜빡이던 채훈은 자신이 또다시 정신을 잃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입에서는 울음 섞인 억눌린 신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흑. 으읏. 흐윽. 승건아.”

자신도 모르게 승건의 이름을 부르며 매달렸다. 이미 승건의 성기가 몸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찢어질 듯한 압박감은 힘겨웠다. 그래도 그 어느 것하고도 비교할 수 없는 환희가 몰아쳤다. 퍽퍽 몸을 맞부딪히면서 다시 한번 승건이 괜찮다며 속삭일 때는 귓가에 닿는 숨결만으로 자지러졌다.

채훈은 반쯤 무의식적으로 승건의 허리에 다리를 감으며 졸라댔다. 승건의 성기가 안을 긁어댈 때마다 아득해졌지만 더한 쾌락이 필요했다.

“진짜 미칠 것 같아. 알아? 이런 거 처음이야.”

승건의 으르렁거림에 채훈은 소리 내어 동의하는 대신에 입술을 맞댔다. 혀가 엉겼다. 엉망진창으로 하는 키스인데 숨결과 타액이 모두 달았다. 틈 하나 없이 서로의 몸을 끌어안은 채 키스가 이어졌다.

몸 안쪽에 깊숙이 들어온 성기가 잘게 안을 치받았다. 꺾인 허리가 아팠다. 열 때문에 머리가 익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커다랗고 뜨거운 살덩이가 안을 쑤셔들 때마다 죽을 것 같은 쾌락이 엄습했다.

입술을 뗀 채훈은 승건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는 도리질을 치며 흐느꼈다.

세상이 산산이 부서졌다.

*

*

채훈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침대 위였다. 벌거벗은 채, 무릎을 꿇고 허리를 세운 자세에서 승건에게 끌어안긴 상태였다. 그리고 잔뜩 발기한 승건의 성기가 깊숙하게 꽂혔다가 빠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승건이 좋아하는 체위였다.

“흣. 아. 아앗. 아. 앗.”

승건을 부르려고 했지만 입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신음 소리뿐이었다. 그것도 헐떡이는 숨소리에 섞여, 스스로 듣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애달팠다.

무게와 균형을 잡아야 할 무릎이 자꾸 미끄러졌다. 그나마 승건이 몸을 바짝 붙인 채 겨드랑이 밑으로 팔을 감아 단단히 안아주는 덕분에 무너지지 않고 삽입을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승건의 반대 손이 성기를 꽉 쥐고는 사정을 막고 있었다.

일정한 속도의 리드미컬한 움직임이 계속되면서 채훈의 입에서는 계속 환희에 찬 신음이 이어졌다. 원래는 이렇게까지 소리를 내지르는 편이 아닌데 지금은 참을 수가 없었다.

간간이 승건의 짙은 숨소리와 낮은 신음이 목덜미에 닿을 때면 소름이 돋다 못해 떨어야 했다. 승건의 손이 성기를 꽉 붙잡고 있지 않았다면 그대로 절정에 이르렀을지도 몰랐다.

고개를 내저으며 자지러지던 채훈의 눈에 침대 시트가 엉망으로 구겨지고 체액으로 젖어 있는 것이 들어왔다. 사정을 한 번만 한 게 아니었다.

채훈은 먹먹한 머리로 주어진 정보를 하나씩 파악했다. 그러나 승건이 엉덩이가 아프도록 쳐올릴 때마다 머리가 텅 비면서 생각이 뚝뚝 끊겼다. 모든 게 좋았다. 아니, 너무 과해서 끔찍할 정도였다.

“승건, 흑. 아윽. 윽. 잠깐, 승건아. 윽. 하악. 아.”

성기를 붙잡은 승건의 손을 긁다시피 하며 뭔가 말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강하게 쳐올리는 움직임에 꼼짝도 없이 떠는 게 전부였다.

“이름 부르지 마. 흣. 지금도 많이 참고 있으니까.”

“흐. 으윽. 뭘 참는다고.”

“쉿. 정말 참고 있어. 채훈아.”

섹스 도중에 이름을 불리는 것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채훈은 이해했다. 미친 듯이 뛰고 있는 심장이 찢어지는 것같이 아파 왔다.

눈을 감으며 아픔을 참고 있는 사이에 승건의 손가락이 입 안에 들어왔다. 아무렇게나 혀를 눌러대는 손길은 말을 하지 말라는 의미나 마찬가지였다.

채훈은 괜히 분한 마음에 승건의 손가락을 꽉 깨물었다. 그러자 승건 역시 채훈의 어깨 뒤쪽을 꽉 물면서 퍽 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강하게 찔러 왔다. 채훈의 눈에서는 뜨거운 불똥이 튀었다.

승건에게 꽉 끌어안긴 탓에 채훈은 자지러지면서도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채훈은 자신이 작살에 꿰인 물고기 같다고 생각했다. 몸을 떨며 겨우겨우 숨만 내쉬는 게 전부였다.

그 와중에 승건이 갈구하는 몸짓으로 더욱 안으로 파고들려고 했다. 억누른 탄성을 내뱉는 숨결이 목덜미에 닿을 때마다 채훈은 진저리쳤다. 혀를 희롱하던 손은 어느새 채훈의 젖꼭지를 잡고 세게 비틀었다.

“제발, 승건아. 더는……. 아, 하윽. 윽. 더는 안 돼. 하. 흣, 응. 아.”

채훈은 흐느꼈다. 온몸이 성감대가 된 것처럼 모든 자극을 쾌감으로 받아들였다. 이제 한계였다. 몸이 불타서 녹아버릴 것 같았다. 그러나 승건의 손이 성기를 꽉 잡아 막고 있는 탓에 폭발을 할 수 없었다. 채훈은 제 성기를 잡은 승건의 손을 잡아떼려고 했지만 헛손질로 끝났다.

“아직 멀었어.”

잇소리를 내며 으르렁거린 승건의 허릿짓이 더욱 거세졌다. 마치 먹어치워 버리겠다는 듯 맹렬한 움직임이었다. 잔뜩 벌어진 아래를 젖은 살이 치고 들어왔다가 빠져나갔다. 채훈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입을 벌리고는 신음을 내뱉는 것뿐이었다.

시야가 점멸하면서 다시금 정신이 드문드문 사라졌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이대로라면 미쳐버릴 것 같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드디어 승건이 성기를 놓았다. 채훈은 경련을 하면서 쾌락을 쏟아냈다.

벼락에 맞은 듯한 짜릿함 끝에 채훈은 눈물이 흐르는 눈을 깜빡거렸다. 그사이에 또 정신을 잃은 모양이었다. 어느새 승건도 사정을 끝냈는지 등 뒤에 달라붙어 거친 숨을 내뱉고 있었다. 뜨거운 정액이 몸 안에 가득 채워져 있는 것이 느껴지는 듯했다.

노곤함과 나른함에 채훈은 자신의 심장 소리를 머리로 들으면서 고장 난 인형처럼 추욱 늘어졌다. 승건이 잡고 있지 않았다면 그대로 주저앉아 버릴 정도로 힘이 없었다.

“채훈아.”

채훈의 목덜미에 코를 묻고 등과 어깨에 입술을 찍던 승건이 이름을 불러 왔지만 채훈은 대답하지 못했다. 이상했다. 별다른 움직임은 없었는데 또다시 갈증이 느껴졌다. 사막을 헤매며 물을 찾는 것처럼 목이 바짝바짝 말랐다.

자신이 미친 것 같았지만, 섹스의 여운보다는 몰아치는 쾌락이 필요하다고 온몸의 세포가 술렁이고 있었다. 채훈은 자신의 상태에 당황했다. 승건과 이어진 구멍에서 다시 열이 훅 치밀어 올랐다.

그 와중에 승건이 정액으로 잔뜩 젖은 손을 채훈의 배 위에 올려 지그시 눌러 왔다. 채훈은 그제야 제 안에 들어와 있는 승건의 살덩어리가 줄어들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사정으로 줄어들기는커녕, 더 부풀어 커진 것만도 같았다.

승건이 누르는 손길의 느낌이 이상했다. 뜨겁고 커다란 성기가 점막에 감싸이며 울렁거리는 감각은 이미 한 번 경험한 적이 있었다.

노팅이었다. 그때만큼이나 안을 가득 채운 존재감은 여전했다.

“양심 없는……. 흐윽. 하, 읏.”

채훈은 양심 없는 알파라는 욕을 끝맺지 못하고 자지러졌다. 승건에게 러트가 왔다는 것을 깨닫는 것과 동시에, 영상 속에서 의사가 베타에게 노팅은 무리일 거라고 했던 것이 기억났다.

열띤 몸과 달리 머리가 차갑게 굳었다. 이게 실험의 일부라는 것을 떠올리자 서러워졌다.

나쁜 새끼.

억울함과 슬픔에 기어코 눈물이 나왔다. 쾌락을 이기지 못한 눈물이 아니라 서글픔에 흐르는 것이었다.

“울지 마.”

입술로 귓가와 목덜미를 애무하던 승건이 다정하게 말했다. 그의 손이 젖은 뺨도 닦아주었다. 손길은 쓸데없이 다정했지만 채훈은 고개를 저었다. 마음 같아서는 뿌리치고 싶었지만 몸이 의지를 따라주지 않았다.

“너, 진짜 나쁜 새― 윽. 허읏. 승건아. 그만. 흐아앗. 아응. 앗.”

“이거, 못 멈춰. 크읏.”

겨우겨우 욕을 했지만 승건이 가슴을 쥐어뜯을 듯 움켜쥐는 바람에 채훈은 엉망으로 신음을 내뱉었다. 쐐기가 박힌 듯 구멍과 꽉 맞물린 성기가 뭉근히 쳐올려졌다.

몸이 벌어지는 아픔과 함께 전류가 흐르는 쾌락이 열을 키워댔다. 아까처럼 모든 감각이 승건만을 향했다. 알 수 없는 향기에 질식할 것 같았다.

채훈은 펑펑 울면서도 자신이 어딘가 망가진 게 아닌가 의심했다. 두렵기도 했다. 그러나 생각은 이어지지 않았다. 자극을 원하는 몸뚱이는 본능적으로 빈틈없이 들어찬 승건의 성기를 힘껏 조이며 게걸스럽게 쾌락을 탐닉했다.

*

*

채훈은 앓아누웠다.

처음에는 아픈지도 몰랐다. 일요일 밤에 시작된 섹스는 다음 날이 밝도록 이어졌다. 섹스 도중에 쾌감을 이기지 못하고 정신을 잃은 것은 다반사였다. 서로 이어진 채, 혹은 끌어안고 잠들었다가 누군가 먼저 깨기라도 하면 그대로 섹스가 이어졌다.

짐승같이 서로를 갈구하던 섹스가 언제 어떻게 끝났는지 채훈은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했다. 눈을 떴을 때 두 번 연달아 승건이 자신의 옆에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안심하고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앓았다.

목이 부은 것은 끊임없이 신음을 내지른 탓이었다. 눈이 퉁퉁 부은 것도 너무 울었기 때문이었다. 팔다리가 근육통에 떨리고 허리가 아픈 것은 모두 과도한 섹스로 혹사를 한 결과였다.

익숙하다면 익숙한 아픔이었다. 채훈은 노팅을 했던 지난번처럼 한나절 푹 자고 나면 어느 정도 괜찮아질 줄 알았다. 그러나 그건 오판이었다. 하룻밤을 꼬박 눈을 감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채훈은 침대에서 일어나기는커녕 웅크린 채 끙끙 앓아야 했다.

식사는 하지 못했다. 물도 한두 모금 마시다가 정신을 잃었다. 심정민이 수액을 놓았지만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다.

앓아누운 채훈이 잠들었다가 깨어 잠시 정신이 들 때면 심정민과 승건, 그리고 승건의 집에서 살림을 담당하는 하우스 키퍼를 번갈아가며 볼 수 있었다. 그들이 옷을 갈아입혀 주며 채훈을 간호했다.

화요일 오후, 채훈은 하루 정도만 더 앓으면 될 거라는 심정민의 말에 안도했다. 사무실에 연락해서 병가를 냈다고 알려준 것 역시 심정민이었다. 채훈은 이래도 괜찮을까 걱정하다가 정 안 되면 그만두면 된다고 마음먹었다.

승건의 얼굴은 자주 볼 수 없었다. 가끔 볼 수 있는 그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복잡한 눈으로 자신을 지켜보기만 했다. 그래도 땀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는 것은 역시나 승건이었다.

채훈이 인지하기로는 앓아누운 지 이틀째 밤이었다. 눈을 깜박거리며 이곳이 어디인가 의구심을 가지다가, 승건의 집이고, 자신이 아프고, 화요일에서 수요일로 넘어가는 밤이라는 것을 가물거리는 정신으로 기억해 냈다.

채훈은 침대 옆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 앉아 있는 승건과 눈이 마주쳤다. 협탁 위에 스탠드만 켜진 상태였고 승건의 모습은 온전히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그의 존재는 꿈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목말라? 물 마실래?”

승건이 조용히 물었다. 채훈이 뭐라 반응하기도 전에 승건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채훈을 반쯤 일으켜 앉히고는 물을 마시게 도와주었다. 미지근한 물을 삼키고서야 채훈은 자신이 목이 말랐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렇게 한 잔의 물을 다 마시고 난 다음에 채훈은 승건의 도움을 받아 다시 자리에 누웠다.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승건을 보던 채훈은 갑자기 할 말이 기억났다. 그런데 무슨 조화인지 말을 해도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았다.

채훈의 목에서 바람만 새어 나온다는 것을 알아차린 승건이 말렸다.

“힘들면 나중에 말해.”

“독감……야?”

겨우 독감 소리만 아주 작게 흘러나왔다. 심정민에게서 병명에 대해서 들은 것 같기는 한데 기억이 나질 않았다.

“독감은 아니고, 비슷한 거야. 다 낫고 나면 말해 줄게.”

어딘가 복잡해 보이는 승건의 얼굴을 보며 채훈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신이 오락가락해서 지금 들어도 기억하지 못할 것 같았다.

겨우 물을 마신 것뿐인데 기력이 빠졌다. 몸은 아직 더 자야 한다고 피력하고 있었다. 채훈은 자꾸 감기려는 눈을 억지로 뜨지 않았다. 의식이 흐려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끝이라…….”

승건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귀가 멀어버린 듯, 뒤이은 말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가 어딘가 씁쓸한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따뜻한 손바닥이 뺨에 살짝 닿았다가 떨어져 나갔다.

역시나 다정한 손길이었다. 그래서 채훈은 슬퍼졌다.

*

*

정신이 든 것은 한순간이었다.

저도 모르게 눈을 뜬 채훈은 몸이 가뿐해졌음을 느꼈다. 눈을 깜박이며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천천히 되새기며 느릿하게 일어나 앉았다. 어젯밤까지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들었는데 지금은 손쉬웠다. 머리는 맑았다. 몸이 조금 나른하기는 했지만 욱신거리는 근육통은 사라졌고 열도 없었다.

채훈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승건의 침실이었다. 남향과 동향의 창은 암막 커튼이 아니라 일반 커튼으로 가려져 있어서 햇살이 어른거리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마도 한낮인 듯싶었다.

물질문명의 이기를 누리는 현대인답게 채훈은 휴대폰부터 찾았다. 며칠 전에 새로 산 신상 휴대폰은 지갑과 함께 침대 옆의 탁자 위에 잘 놓여 있었다.

채훈은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를 확인했다. 동생, 어머니, 서주명과 사무실의 이 대리 등등의 사람에게서 연락이 온 흔적이 남아 있었다. 대부분의 메시지에는 독감 때문에 연락이 어렵다는 답장이 보내진 상태였다. 자신이 휴대폰을 만진 적이 없으니, 심정민이나 승건이 썼을 터였다.

“독감이 아니라더니.”

채훈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던 어젯밤과 달리 별 어려움 없이 말할 수 있었다. 독감이 아니라면 비슷한 것은 몸살감기 정도밖에 없었다. 아픈지도 모르고 과하게 섹스까지 했으니 앓아눕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날짜를 확인하니까 벌써 수요일이었다. 퇴원한 것은 일요일 오후였다. 하루 밤새도록 섹스를 하고 난 다음부터는 기억이 가물가물하니까, 이틀은 내리 앓았다는 의미였다. 지금까지 이렇게나 크게 아픈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이틀 동안의 기억이 뭉텅뭉텅 사라져 있는 것이 평범한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한동안 그렇게 침대에 앉아 채훈은 멀쩡하게 남아 있는 기억을 더듬었다. 우연히 승건의 노트북에서 영상을 찾아봤다. 그리고 승건에게 끝내자고, 좋아한다고 고백을 해버렸다. 끔찍했던 섹스는 건너뛰고, 어젯밤에 승건이 끝이라고 중얼거리는 것까지 떠올린 채훈은 의도적으로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덮어놓고 일을 저질러버렸다. 좋아한다고 했으니 이제 승건의 결정만 남아 있었다. 어젯밤의 반응을 보자면 헤어지자고 할 확률이 높았다. 그렇게 생각하자 다시 심장이 시리도록 아팠다.

“괜찮아.”

채훈은 스스로에게 힘을 북돋웠다. 괜찮지 않을 건 없었다.

주중 낮이니까 승건은 출근을 했을 시간이었다. 다시 잠들기라도 했다간 퇴근하는 승건과 마주칠 수도 있었다. 한 번은 제대로 이야기를 해야겠지만 좀 더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무엇보다 그의 집에서는 싫었다.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채훈은 자신의 오피스텔로 돌아갈 마음을 먹었다. 입고 있는 것이 승건의 잠옷이었으니, 옷부터 갈아입어야 했다.

몸에 힘은 없지만 침대에서 빠져나와 드레스 룸까지 걸어가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옷걸이에는 지난 금요일에 입었던 옷가지가 깨끗이 세탁된 채 걸려 있었다.

재빨리 자신의 옷으로 갈아입은 채훈은 침실 문을 열고 나왔다. 한 걸음 걷기도 전에 1층에서 사람 소리가 났다. 누군가와 전화를 하고 있는 사람은 승건이 아니라 심정민이었다. 커피를 내리는 듯 냄새가 2층까지 퍼졌다.

승건의 집에는 드립 커피뿐이었다. 먹는 데 관심이 없는 승건은 좋아하는 기호식품조차 없었다. 가끔 찾아오는 방문객을 위해 티백이나 드립 커피를 겨우 구색 맞춰 갖춰놓았을 뿐이었다.

채훈은 승건이 미각을 잃었다는 사실을 다시금 상기했다. 적게 먹고, 술도 마시지 않고, 케이크가 너무 달다며 인상을 찌푸리던 그의 행동은 모두 사고의 후유증 때문이었다.

필사의 순간에 살아남기 위해 베타인 채훈을 각인해 버린 탓이라고 했다. 상상 각인의 부작용이 승건의 인생에 작지 않은 영향력을 미쳤을 건 분명했다.

그렇게 어지럽게 이어지려는 생각을 채훈은 의도적으로 멈췄다. 대신 승건이 없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갔다. 주방 쪽으로 걸어가자, 때마침 심정민이 커피가 담긴 머그잔을 들고 막 나오고 있었다.

심정민이 채훈을 보고는 놀란 눈을 했다.

“일어나셨군요. 옷도 갈아입으셨고요.”

“예. 이제 혼자서 갈아입을 수 있어요.”

“몸은 어떻습니까?”

“괜찮아요. 아픈 곳도 없고, 멀쩡해요. 그것보다 뜨거운 물 남아 있어요? 저도 커피가 마시고 싶은데.”

채훈은 커피로 힘을 내는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며칠 동안 커피를 마시지 못했던 몸이 카페인을 강렬하게 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심정민이 말렸다.

“지금은 커피보다 죽을 먼저 드셔야 합니다. 며칠 동안 먹은 게 거의 없으신 거 아시죠? 잠시만 기다리세요. 제가 차려드리겠습니다. 식탁에 앉으세요.”

심정민이 부산을 떠는 바람에 채훈은 식탁 앞에 앉아야 했다. 채훈이 깨어날 때를 대비해 미리 죽을 만들어뒀다는 심정민이 냉장고에서 이것저것 꺼내 들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사무실에는 병가를 냈고, 진단서도 떼어놓았다. 내부 조사를 받는 것도 잘 마무리되어서 출근하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그리고 승건은 미국으로 떠난 상황이었다.

“아침 비행기를 타고 가셨습니다. 아직 하늘 위겠네요.”

전자레인지로 죽을 데우는 동안에 심정민이 커피를 내렸다.

향기로운 커피향기에 취해 있던 채훈은 정신을 번쩍 차렸다. 승건이 출장 날짜가 앞당겨졌다고 하기는 했었다. 그게 오늘이었다. 당장에 그를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 다행스러운 것인지 안타까운 것인지 모를 감정에 심란해졌다.

채훈은 표정을 갈무리한 채 심정민에게 궁금한 것을 물었다.

“출장 일정은, 그러니까 승건이는 언제 돌아와요?”

“2주 예정입니다. 급한 일 때문에 원래 일정보다 일주일이나 앞당겨서 출발하셨어요. 저도 오는 주말에 떠납니다. 채훈 씨가 깨어나면 도련님께서 전하라고 하는 게 있습니다. 식사 다 하시고 부르세요.”

채훈 앞에 죽그릇과 반찬, 수저까지 세팅해 준 심정민이 친절하게 웃으면서 자리를 비켜주었다. 채훈은 과연 승건이 전하라고 한 것이 무얼까 생각하다가 멈췄다. 여기서 더 놀랄 건 없었다.

채훈은 모락모락 김을 피우며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죽에 집중했다. 고소한 냄새를 맡으니까 배가 고프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 먹고 살기 위해서 하는 일이고,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고운 법이라고 생각하며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

*

*

거의 일주일 만에 돌아온 오피스텔은 떠나기 직전처럼 깔끔한 상태 그대로였다. 채훈은 에어컨부터 켠 다음에 소파에 앉았다. 며칠 동안 환기도 하지 않고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탓에 먼지가 피어올랐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대신에 앉은 자리에서 손에 들고 있는 서류 봉투를 놓지 못하고 한참 들여다보았다.

죽을 다 먹고 난 채훈에게 심정민이 내민 것은 승건과의 계약서였다. 심정민은 계약이 끝났다는 승건의 말을 그대로 전해주었다.

“끝이라…….”

채훈은 어젯밤에 승건이 했던 말을 그대로 따라 했다. 의도한 것은 아닌데 따라 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돈과 몸을 거래했고, 나중에는 계약 연애로 바뀌었다. 그때마다 적은 계약서는 승건과 자신의 관계를 명시하고 있었다. 그게 지금 자신의 손에 들려 있었다. 관계가 끝났다는 의미였다.

채훈은 서류 봉투를 천천히 탁자 위에 올려두고는 눈을 감았다. 승건에게 좋아한다고 고백할 때부터 이렇게 될 거라는 걸 알았다. 그래도 혹시나, 만에 하나, 하는 기대를 했다. 부작용으로 미각과 후각을 잃은 승건의 유일한 해결책이 자신이었다. 어떻게든 붙잡지 않을까 싶었다.

처음에는 말 그대로 몸뿐인 관계였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서는 친밀해졌다. 승건이 가끔 사람 속을 뒤집는 말을 내뱉기는 했지만, 그에게 악의가 있지는 않았다. 때로는 깜짝 놀랄 만큼 다정했기에 승건 역시 자신을 좋아하지 않나 의심까지 했었다.

그러나 승건은 깔끔하게 자신을 잘라냈다. 마치 네 효용은 다 했다는 듯이 말이다. 예상은 했는데도 기분이 별로였다.

“씨…….”

괜한 억울함에 씨근덕거리던 채훈은 뜨거워지려는 눈을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누가 운다고.”

그를 좋아하는 것과 별개로 여기서 울고 싶지는 않았다. 그건 자존심 문제였다.

이번에는 세상 망해버리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자신이 바라는 대로 되었다. 감당 못 할 정도로 좋아하는 마음이 커지기 전에 헤어지고 싶었다. 오히려 승건이 계약은 계약이니까 1년을 채울 때까지 계속 만나서 섹스를 해야 한다고 하는 게 더 끔찍했다.

채훈은 자신이 며칠을 앓는 동안 최진수가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는 소리를 심정민에게서 들었다. 스스로 목을 매달았다고 했다. 그의 휴대폰은 박살이 난 상태라서 동생의 영상을 빼돌릴 수는 없었다. 자살이라고 판명이 났고 더 이상 경호원을 데리고 다닐 필요가 없어졌다.

실질적으로 위협하던 인물이 사라졌으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승건이 속한 세계가 비정한 곳이라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다. 한 번 삐끗하게 되면 쫓겨나거나 죽음뿐이었다. 그러니까 자신은 안전 이별을 한 것이었다.

“나쁜 새끼.”

채훈은 자세를 바로 하고는 다시금 서류 봉투를 노려보았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스스로를 설득해도 욕이 안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사람을 수단으로 쓰다가 필요 없어지니까 바로 버리는 놈이 나빴다.

나쁜 놈인 주제에 동생의 유학은 여전히 지원해 준다고 했다. 혹시나 해서 심정민에게 물어봤더니 유학은 그대로 진행하라고 했다는 승건의 말이 따로 있었다고 알려주었다. 정말 승건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불쑥,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는 충동이 치밀어 올랐다. 제주도나 부산도 좋았다. 혹은 더 먼 곳이라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승건과 헤어지면 멀리 떠나려고 했다. 가족들이 모두 해외로 나가게 되었지만, 충동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머리가 빠르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돈은 있었다. 병원을 그만둘 타이밍도 괜찮았다. 승건 역시 미국으로 출장을 간 상황에서 자신이 멀리 떠나버리면 한동안 얼굴 마주칠 일은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는 충동을 행동으로 옮길 사정이 여의치 않았지만 이제부터는 아니었다.

“어디가 좋을까?”

채훈은 서울이 아니라 한국에서 가장 먼 곳부터 떠올렸다. 이곳만 아니라면 어디든 좋았다. 복잡한 도시가 아니라 광활한 지평선을 볼 수 있는 곳이면 더더욱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 채훈은 탈출을 꿈꿨다.

* * *

한 번 결심이 서자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금방이었다. 나라를 하나 정하고 여행사를 섭외해서 왕복 항공권과 비자, 그리고 일주일 동안 머물 숙소를 수배해 달라고 맡겼다.

다음 날에는 출근을 해서 바로 사직서를 제출했다. 심정민의 말대로 채훈의 내사는 무혐의로 종결이 된 상태였다. 사무실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친한 직원들이 무슨 오해가 있었던 모양이라고 한마디씩 하며 위로해 주기도 했다.

그래도 채훈은 빠른 퇴직을 원했다. 차장 역시 채훈을 붙잡지 않았다. 후임으로 새로운 사람을 뽑는 대신에 기존에 있었던 계약직 사원에게 다음 주 월요일까지 업무 인계를 하고 화요일에 떠나기로 했다.

그날 오후에는 어머니와 동생을 만났다. 동생은 유학을 떠난다고 들떠 있었고 어머니는 걱정이 대단했다. 그래도 채훈이 아파서 누워 있는 동안에 실력 좋은 유학 코디네이터를 만나 이것저것 상담해서 구체적인 계획을 다 세워둔 상태였다.

채훈은 병원을 그만둘 거라는 것도, 멀리 여행을 떠날 거라는 것도 말하지 않았다. 대신에 본가와 병원이 너무 멀어서 출퇴근하기 힘드니까 전문 업체에 관리를 맡기는 게 좋겠다는 의견을 냈다. 비용은 채훈이 부담하고 주말에 종종 집에 들르는 것으로 대충 이야기가 마무리되었다.

모든 것은 순조롭게 흘러갔다. 여행사에서는 다음 주 목요일에 출발하는 비행기를 찾아주었다. 7월은 극성수기였지만 일반석을 고집하지 않은 덕분에 비즈니스석을 구할 수 있었다.

채훈은 공과금이 등이 빠져나가는 통장을 꼼꼼히 확인했다. 별다른 계획이 없이 충동적으로 떠나는 것이기 때문에 비자가 만료되는 3개월 안에 돌아오는 것으로만 정해뒀다. 오피스텔 계약은 5개월이나 남아 있어서 짐은 남겨두기로 했다. 마지막 출근을 하고, 본가를 관리해 줄 업체를 찾아서 계약도 마쳤다.

월요일에는 송별회가 있었고, 정식으로 퇴사를 한 화요일 저녁에는 서주명을 따로 만났다. 평소처럼 고기를 구워 먹으면서 그간에 일어난 일들을 말했다. 친구들 중에 채훈이 승건과 사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은 서주명이 유일했기 때문이었다.

승건이 태화 그룹 정규완 회장의 외손자이고 적대 관계에 있는 친척 때문에 자신이 납치를 당한 일 때문에 헤어지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더 복잡한 사정이 있기는 했지만 거기까지 밝히기에는 아무래도 무리였다. 특히 계약에 대해서는 비밀 유지 조항이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서주명의 반응은 격렬했다. 영화 한 편 찍었다고 놀라면서도 괜찮냐고 물어봐 주었다. 그리고 남의 연애사에 끼어드는 게 아니니 다른 말은 하지 않겠지만, 자신이 도와줄 게 있으면 말만 하라고 했다.

채훈은 사양하지 않았다. 특히 해외여행에 필요한 비상 연락처를 서주명의 휴대폰 번호로 해두었다고 통보했다.

병원을 퇴직하고 여행을 떠난다고 말하자 서주명이 미쳤다면서 등짝을 때려 왔다. 그래도 마음고생하지 말고 쉬고 싶을 때 쉬라면서 채훈의 편을 들어주었다.

출국 날은 금방 다가왔다. 그리고 그날 채훈은 뜻밖의 연락을 받았다.

*

*

처음에는 낯선 번호를 보고 거래처인가 했다. 만약에 거래처라면 자신은 이제 퇴사를 했다고 알려줘야 했기 때문에 별생각 없이 전화를 받았다.

“네. 강채훈입니다.”

―안녕하세요. 강채훈 씨. 이수진이라고 합니다. 승건이 외할머니요.

채훈은 우아한 목소리를 가진 여성의 정체를 듣고는 잠시 굳었다. 명함에서 보았던 승건의 외할머니 이름이 이수진이라는 것을 기억해 내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리고 왜 그녀가 전화를 했는지 의아했다.

그래도 깍듯하게 인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네. 안녕하세요.”

―미안해요. 갑자기 연락해서 놀랐죠?

“깜짝 놀랐습니다. 그런데…… 무슨 이야기를 하실지 모르겠지만, 먼저 말씀드릴 게 있는데요. 저 승건이랑 헤어졌어요.”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이수진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그녀의 모습이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적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써니의 말에 따르면 승건의 외할머니인 이수진은 자신에게 관심이 많다고 했다. 승건과 결혼을 하려면 그녀를 공략해야 한다고 조언도 해주었다.

하지만 채훈은 승건과 헤어졌다. 그러니까 이수진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먼저 그녀에게 승건과 자신이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게 옳았다.

승건이 미국으로 떠난 지 일주일이 넘었다. 그사이 승건에게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휴대폰을 확인할 때마다 당연한 일이라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그래서인지 승건과 헤어졌다고 말하는 것이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그저 가슴이 조금, 아주 조금 시릴 뿐이었다.

―헤어졌다니……. 이런, 내가 요즘 말하는 진상 할머니가 된 거네요. 미안해요. 그럴 의도는 없었어요.

안타까운 한숨을 내쉰 이수진이 바로 사과를 해 왔다.

“괜찮습니다. 모르셨으니까요.”

―승건이가 잘못했다는 거 알아요. 사실 한 번 만나고 싶어서 연락한 건데. 아무래도 안 되겠네요. 어, 지금 거기 공항인가요?

“……예. 맞습니다.”

승건이 잘못했다고 단언한 이수진이 공항이냐고 묻는 바람에 채훈은 당황했다. 지금 채훈은 인천 공항에 있었다. 수화물을 맡기고 출국 심사까지 모두 마친 다음에 게이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공항에서는 종종 안내 방송을 하니, 이수진이 그걸 들었는지도 몰랐다.

―나도 세상 끝까지 도망친 적이 있어요. 모든 것을 다 버리고.

“……?”

―그런데 그가 세상 끝까지 쫓아와서 무릎을 꿇었죠. 눈물 콧물 흘려가며 매달렸어요. 옛날 일이긴 하지만.

채훈은 자신이 도망치는 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참았다. 그러다가 이수진을 세상 끝까지 쫓아갔다는 그가 태화 그룹의 정규완 회장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놀라고 말았다. 설마 하고 의심하는 와중에 이수진이 다음 말을 이었다.

―강채훈 씨도 고민해 봐요. 승건이가 쫓아가면 어떻게 할지.

“……예.”

뜻밖의 조언에 채훈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대답했다. 승건이 쫓아올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그럼 끊을게요. 인연이 닿으면, 그때 한번 보도록 해요.

짧은 통화가 끝났다. 채훈은 잠시 묘한 기분으로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통화하는 동안 잔뜩 긴장한 탓에 이수진이 한 말을 제대로 음미하지 못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꽤나 놀라운 비밀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승건의 외할아버지이자 태화 그룹의 회장인 정규완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사업가답게 얼굴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승건이 나이가 들어 할아버지가 되면 저런 모습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많이 닮았다. 눈매는 날카로웠고 얼굴은 강직했다. 거기다 사업가로서의 행보도 냉철하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런 회장님께서 세상 끝까지 부인을 쫓아가 눈물 콧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고 매달렸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당사자인 이수진이 말했으니까 아마도 사실일 것이다.

채훈은 이수진이 정말로 자신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음을 알았다. 써니의 말대로 승건이 사귀는 사람이라고 공개한 게 처음이라서 그런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수진은 그게 계약이라는 것을 몰랐다. 그녀가 더 관심을 가지기 전에 헤어져서 다행이었다.

“그러니까 쫓아올 리 없지.”

이수진은 승건이 잘못했을 거라고, 그리고 쫓아갈 거라고 확신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채훈은 기대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어설픈 기대를 하는 게 더 뼈아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쫓아올 거였다면, 지금까지 연락 한 번 하지 않을 리 없었다.

채훈은 휴대폰을 내려다보다가 씁쓸하게 웃었다. 아직도 승건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정말 끝이었다. 채훈은 메시지 프로필을 여행 중과 연락 안 됨으로 바꾼 다음에 휴대폰 전원을 꺼버렸다.

어머니와 동생에게는 승건과 헤어지고 멀리 여행을 떠날 거라고 말해 두었다. 동생이 왜 헤어졌냐고 따졌지만 유학은 아무 문제 없이 갈 수 있을 거라고 하자 입을 다물었다. 이제 정말 떠나는 일만 남았다.

때마침 게이트가 열리고 탑승이 시작되었다. 채훈은 가벼운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탈출이었다.

크로스 마크 4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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