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마킹】
“끝까지 들어봐. 내가 영상 하나 가지고 있거든. 네 걸로. 재벌 3세의 탈선은 이제 인터넷 뉴스거리도 안 되겠지만, 너네 할아버지한테는 먹힐 거 아냐? 안 그래? 박 회장님 꼰대로 유명하잖아. 약 하면 쫓아내는 거. 맞지?”
“씨발. 그걸 어떻게! 내가 가만히 있을 거 같아?!”
“그래? 어떻게 가만히 안 있을 건데? 응? 새끼야. 내가 같이 하자고 할 때 기어들어 와.”
박광호는 능글맞게 웃고 있는 최진수를 보며 이를 꽉 깨물었다. 같이 일을 하자고 해놓고는 기어들어 오라고 하는 게 속셈이 뻔했다. 이건 명백한 협박이었다.
박광호의 할아버지는 권력을 가진 꼰대였다. 집안의 힘으로 군면제를 받아도 그 기간만큼 사회 경험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다 여자와 술에 빠져 사는 것에는 기회를 줬지만, 도박과 약을 하다 걸리면 한 번에 아웃이었다. 최진수가 가지고 있다는 영상이 풀리면 자신은 끝장이었다.
이렇게 일이 꼬일 줄은 몰랐다.
최진수는 승건의 사촌이었다. 10여 년 전에 있었던 승건의 납치 미수 사건 이후로 최진수의 집안이 풍비박산 난 것은 유명한 일이었다. 그리고 최진수가 승건과 정 회장에게 악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 또한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았다.
박광호의 계획은 아주 간단했다. 최진수가 강영환의 형, 강채훈이 승건의 애인이라는 것을 알면 어떻게든 손을 쓸 거라고 예상했다. 그래서 적당히 소개만 시켜주고 자신은 발을 뺐다. 박광호는 딱히 승건을 어떻게 해볼 배짱이 없었다. 그저 채훈을 괴롭히기 위해, 그의 가족인 강영환이 망가지기를 바랐다. 최진수가 데리고 논 오메가의 끝이 다 좋지 않았기에 어느 정도는 확신했다.
솔직히 최진수에게 강영환을 소개해 준 다음에는 반쯤 잊고 있었다. 그저 잘 익은 과실이 땅에 떨어지면 구경하면 그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이렇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박광호는 맹렬하게 머리를 굴렸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 나중에 몸을 빼내더라도 지금은 적당히 맞장구를 쳐줘야 하는 상황이었다.
“씹. 알았어. 그 새끼들 처리는 잘 하는 거지?”
“이래서 네가 큰물에서 못 놀아봤다는 거야. 이런 건 업자가 있어. 돈만 주면 알아서 다 처리해 준다고. 그리고 우성 오메가는 오히려 돈을 주지.”
비열하게 웃는 최진수의 모습에 박광호는 겨우 따라 웃었다. 대외적으로 녹음실을 운영하는 최진수는 뒤로 약을 취급했다. 그런 최진수가 사람을 처리하는 업자를 알고 있을 수는 있었다.
그쪽 세계와는 전혀 인연이 없었던 박광호는 깊게 엮였다가는 좋은 꼴을 못 보겠다는 느낌이 왔다. 어차피 사업이야 투자를 명목으로 돈을 뜯길 게 뻔하니까 얼른 손절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아, 그래. 여우 새끼랑 그 형을 여기 가둬뒀는데. 형이라는 새끼한테 유감 있다고 하지 않았었나? 지난번에 그놈한테 된통 얻어맞았다지? 업자가 오려면 시간이 남았는데. 어때? 한번 볼래? 동업자가 된 기념으로 말이야.”
“하아. 씨발. 맞아. 형 말대로 그 새끼 면상은 좀 봐야겠어.”
채훈이 갇혀 있다는 말에 박광호는 이를 갈았다. 이 모든 일이 채훈 때문이었다. 비싸게 굴던 녀석이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한번 구경해야겠다 싶었다. 채훈이 그랬던 것처럼 한껏 내려다보면서 한껏 비웃어줄 생각을 하자 기분이 좋아졌다.
최진수가 컨트롤 룸에 딸린 문을 잡아 열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고 사람이 한 명 튀어나왔다. 그에게 일방적으로 얻어맞은 최진수가 앞으로 고꾸라지는 것은 눈 깜빡할 순간이었다.
박광호는 상대가 채훈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어리둥절한 상황에도 박광호는 채훈의 공격을 막으려고 팔을 들었지만 한 박자 늦고 말았다.
강한 충격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결국 박광호도 반쯤 정신을 잃다시피 하면서 뒤로 주저앉고 말았다. 그사이에 채훈이 제 동생을 잡고 뛰쳐나갔다.
박광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저, 저 새끼 잡아!”
놓치면 끝이었다. 엉금엉금 기다시피 몸을 일으켰지만 그게 전부였다. 채훈 일행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박광호는 절망감에 눈을 감았다.
* * *
지하 녹음실을 빠져나오는 것은 순조로웠다. 강영환의 말대로 컨트롤 룸을 빠져나가자 텅 빈 라운지와 출입구가 바로 보였다. 헤맬 필요도 없이 바로 내달렸다. 계단을 반쯤 올라갔을 때 저기 있다는 외침이 뒤에서 울리면서 사람들이 쫓아왔다.
추격전은 오래가지 않았다. 녹음실과 번화가는 가까웠다.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간이었지만 술집 대부분은 아직 문이 열린 상태였다. 채훈은 그중에 규모가 있어 보이는 막창 집으로 뛰어들었다.
폐점 시간인지 손님은 없고 종업원들이 뒷정리를 하고 있었다. 당장에 눈에 보이는 사람만 다섯 명이 넘었기 때문에 채훈은 안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채훈을 뒤따라 남자 서넛이 가게 안으로 들어와 칼을 휘두르며 얼른 나오라고 위협했다. 비명이 난무하는 가운데 채훈은 의자를 집어 던져 가게 유리창을 깼다. 누군가가 경찰을 불렀다고 외치자 남자들이 욕을 내뱉으며 더 덤벼들었다.
하지만 채훈은 끝까지 버텼다. 결국 경찰이 오기 전에 그들은 도망갔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주인에게 대충의 사정을 설명한 채훈은 경찰이 오기 전에 가게 전화를 빌려 승건에게 연락을 시도했다. 아무래도 심정민이 낫겠지만 애석하게도 그의 휴대폰 번호는 기억나지 않았다.
연결음이 오래 울렸다. 혹시나 모르는 전화번호라고 안 받는 건가 하고 걱정이 들 때쯤에 잠에서 깬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누구십니까?
심정민이었다. 채훈은 자신이 번호를 헷갈렸나 의아했다.
“심 실장님? 저 강채훈입니다. 이거 승건이 폰 번호 아닌가요? 실장님이 어떻게……?”
―도련님 휴대폰에 저장되어 있지 않은 번호는 다 저한테 오게 되어 있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강채훈 씨 휴대폰은요?
채훈은 승건이 아니라 심정민이 받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동생과 함께 납치를 당했다가 도망친 것과, 범인이 박광호와 승건의 사촌이라는 최진수라는 것도 알렸다.
박광호와 최진수의 이름을 들은 심정민이 최악의 조합이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무사해서 다행이라고 하면서 채훈이 해야 할 것들을 알려주었다.
정식으로 신고를 했기 때문에 경찰서까지는 조용히 따라가야 한다고 했다. 가게 주인에게는 합의를 해주겠다고만 하고는 다른 상황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좋다는 조언도 덧붙였다.
자신이 금방 간다고, 이태원까지는 금방 가니까 조금만 기다리는 심정민과 통화를 끝낸 채훈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심정민에게 알렸으니 어떻게든 될 것 같았다.
“형. 이제 된 거야?”
채훈이 뒤를 돌아보자 강영환이 불안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 뒤로는 날벼락을 맞은 가게 주인이 얼굴에 힘을 꽉 주고는 채훈과 강영환을 노려보고 있는 중이었다. 웬 미친놈이 난입해서 의자를 던져 유리창을 깨버렸으니 걱정이 될 만도 했다.
휴대폰이나 지갑이 있었다면 바로 합의가 가능했겠지만 아무것도 없는 채훈은 심정민이 올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채훈은 가게 주인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꼭 보상을 하겠다는 약속과 함께 경찰을 기다렸다.
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
채훈이 심정민의 얼굴을 본 것은 통화를 끝내고 30분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심정민이 나타나자 일사천리로 문제가 해결되었다. 가게 주인은 거액의 합의금을 받고 물러났다. 경찰이 괴한에게 쫓긴 이유를 궁금해했지만, 채훈은 심정민의 조언에 따라 길거리에서 시비가 붙어서 상대가 누군지 모른다고 둘러댔다. 조용히 무마하고 싶다고 하자 경찰은 미심쩍어하면서도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주중 새벽인데도 불구하고 파출소에 취객들과 시비를 붙은 사람들이 넘쳐났던 탓이 컸다.
파출소를 나오자 입구부터 경호원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채훈은 강영환과 함께 심정민의 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이것저것 설명을 들었다.
안전을 위해 한동안 집이 아니라 호텔에서 지내야 한다고 했을 때는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에게도 경호 인력을 배치한다고도 하자 당황하고 말았다.
심정민이 만약을 위한 것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채훈은 아무렇지 않게 굴기 어려웠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무엇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어서 더 혼란스러웠다. 다행히 심정민이 차분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사람이 크게 상하지 않는 이상에야 보통은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한다고 했다. 박광호의 경우는 배경이 워낙 튼튼하니 외국으로 쫓겨날 테고, 최진수는 감옥에 가거나 혹은 도망 다니는 길밖에 없었다. 거기서 더 일을 키우면 목숨을 보장할 수 없으니 알아서 몸을 사릴 거라는 말에 채훈은 살벌한 세계라고 생각했다.
심정민이 도착한 곳은 태화 그룹 계열사인 투얼린 호텔이었다. 방 두 개와 거실이 따로 있는 객실에서 심정민이 경호원들을 소개시켜 주었다. 두 명씩 번갈아가면서 하루 종일 경호할 거라고 했다.
빠르면 내일이면 끝날 테고, 길어야 3일은 넘지 않을 거니까 협조를 부탁했다. 특히 강영환에게는 객실에서 벗어나지 않는 게 좋다고 한 번 더 주의를 주었다.
“더 필요한 것은 없으십니까?”
“휴대폰이요. 놈들에게 뺏긴 것 같은데, 새로 개통하기보다는 원래 쓰던 걸 찾았으면 좋겠어요. 아, 그리고 지갑도요. 제 것만 아니라 동생 것도, 둘 다 뺏겼어요. 그리고 내일 변호사 만나야 하는데…….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는 게 낫겠네요.”
“예. 우선 강채훈 씨는 저랑 잠시 나가시죠. 도련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
채훈은 도련님이 승건이라는 것을 반 박자 늦게 알아차렸다. 새벽 4시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녀석이 왜 왔을까 하다가, 보고 싶은 마음이 넘쳤다. 잠시 버벅거리고 있는데 지금까지 조용히 있던 강영환이 채훈의 팔을 잡아 왔다.
“잠시만요. 형이랑 할 이야기가 있어요. 형. 나랑 이야기 좀 해. 응? 급하게 할 말이 있어. 오래 걸리지 않아. 잠깐이면 돼.”
강영훈이 간절하게 매달리는 바람에 채훈은 소리 없이 심정민에게 양해를 구하고 메인 침실로 들어섰다. 야무지게 문을 닫은 강영환을 보며 채훈은 또 뭔가 있나 싶었다.
“왜? 무슨 일인데?”
“형. 지금 애인 만나러 갈 거지?”
“응.”
“그게, 내가 부탁할 게 있는데…….”
“무슨 부탁.”
“내가, 그러니까 그 새끼가 내 영상을 하나 가지고 있어. 휴대폰으로 찍었는데, 또 어디에 저장했는지는 모르겠어.”
“영상? 설마……?”
영상이라는 단어에 채훈은 최진수가 박광호를 협박했던 것이 떠올랐다. 약을 하는 영상이라고 했다.
“맞아. 그거……. 그 새끼가 약도 취급했거든.”
“영환이, 너.”
“괜찮아. 형질자에게는 잘 안 통하는 거 알잖아. 특히 우성에게는. 그냥 기분만 좋아지는 거였어. 그만! 때리지 마, 악!”
“바보 아니야? 백해무익하다는 거 알면서 왜 해! 게다가 그걸 또 영상으로 찍는 걸 두고 보고 있었어?!”
“그냥 어쩌다 보니까. 진짜 딱 한 번만 했어. 호기심으로 한 번만. 담배처럼 피우는 거라서, 악! 거기 아프다고!”
채훈은 강영환의 등짝을 두들겼다. 그래도 최진수에게 걷어차였던 곳이라고 비명을 지르는 바람에 손을 내렸다.
영상이 어떤 식으로 쓰일지는 모르지만 일이 커지면 여러모로 문제가 될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것보다 강영환이 엇나가고 있다는 걸 확 깨달았다. 나이 먹은 어른도 사고를 친다. 그리고 본인이 그걸 책임질 수 없을 때 문제가 생기는 법이었다.
“그 영상이 어떻게 쓰일지 모르잖아. 그 새끼 성격 진짜 별로란 말이야. 나 좆 되라고 경찰에 찔러버릴 수도 있어. 요즘에 맞선 보면 신원 조회는 기본이라고. 형도, 형도 그러면 곤란해질 거잖아. 형 애인도. 안 그래? 그러니까 형 애인한테 말해서 그 영상만큼은 어떻게 해줘. 응?”
채훈의 마음이 흔들린다는 것을 아는 듯 강영환이 필사적으로 애원했다. 그러나 채훈은 개인의 안위를 위해 가족은 물론이고 승건까지 끌어들이는 강영환의 모습이 괘씸했다.
“강영환.”
“응.”
“잘못한 거 알지?”
“알아. 다 내가 잘못했어. 그러니까 이번 한 번만 봐주라. 내가 다시는 이러지 않을게.”
뒤끝이 없다는 게 강영환의 장점이었다. 분위기를 잘 읽어서 본인에게 불리하다 싶으면 적당한 선에서 발을 뺄 줄 알았다. 그러나 다시는 이러지 않을 거라는 말은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강영환은 수습 가능한 사고를 잘 쳤다. 괜찮다 싶으면 또 감당하지 못할 일을 저질러버릴 게 뻔했다.
“내가 수찬이 형이랑 인연 끊은 거 알아? 형이 베트남 가기 전에 대판 싸우고는 안 보기로 한 거.”
“어? 아니. 몰라. 왜? 아, 그거 때문에? 아냐. 난 안 한다고 했잖아. 진짜 안 한다고 했어. 그런 거 성공할 리도 없고……. 그렇게 구질구질하게 알파랑 엮이고 싶지 않다고. 나도 자존심이 있단 말이야.”
“자존심이 있다는 놈이 이런 일을 벌여.”
“나도 이럴 줄 몰랐다고 몇 번이나 말해야 해? 잘못했다니까. 사과했잖아.”
“네가 그 욕심 못 버리면 또 같은 일이 일어날 거야. 박광호랑 어울리지 말라고 내가 말했지? 그쪽 인간들 중에 제대로 된 인간 거의 없어. 네가 우성 오메가인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안 통해. 그걸 알아야지.”
충고를 빙자한 잔소리를 하다 보니 채훈은 심한 소리를 하고 말았다. 그래도 지금이라서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나도 알아. 안다고. 내가 바보 멍청이도 아니고. 그냥 가지고 논다는 거 안다고. 하지만 형은 하고 싶은 거 다 하잖아. 형보다 내가 못한 게 뭔데. 왜 나는 하지 말라고 그래.”
채훈은 강영환이 부루퉁하게 입술을 내밀고 화를 내는 모습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강영환의 감정 기저에 깔린 것이 부러움에서 비롯된 질투라는 것이 웃기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했다. 현실은 그렇게 만만치 않았다.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사는 사람이 누가 있어.”
“형은 애인이 다 해주잖아.”
부러움과 시기를 담은 눈빛으로 쏘아보는 강영환의 말투는 뾰족하기 그지없었다. 채훈은 울컥함에 그런 거 아니라고 다 말하려다가 참았다.
“그래서, 너도 계속 하고 싶은 대로 살 거야? 이렇게?”
“안 한다니까. 씨. 나도 우리 집이 빈털터리라는 거 알고, 내가 우성 오메가라고 해도 별거 아니라는 것도 알아. 젠장. 이제 분수에 맞게 살 거라고. 엄마 말이 맞다는 거 아니까, 이제 잔소리 그만해.”
속에 있는 말을 우루루 쏟아낸 강영환이 씩씩거리다가 울지 않으려고 눈에 힘을 꽉 주는 모습에 채훈은 기분이 복잡해졌다.
사고를 치고 다니는 동생이 답답하고 미우면서도 또 때로는 안타까웠다. 이제 다 컸으니까 네가 알아서 하라고 하기에는 많이 미숙하다는 걸 알기에 냉정하게 선을 그을 수가 없었다. 자신도 저 나이에 실수를 많이 했었다.
“영상은 어떻게든 수거할 수 있도록 할게.”
“그래. 그것만 해주면 돼.”
“그리고 그거 안 돌려받고 승건이에게 가지고 있으라고 할 거야.”
“뭐? 왜?”
“네가 사고 치는 거 막으려고.”
“형? 미쳤어?! 그게 무슨 소리야!”
채훈은 버럭 소리를 지르는 강영환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미친 소리는 맞았지만 채훈은 자신의 뜻을 철회할 생각이 없었다.
“네가 분수대로 살 거라며. 그러기만 하면 아무 문제 없어.”
“그 사람을 뭘 믿고?”
“너보다는 믿을 수 있어.”
“형!”
지금으로서는 강영환보다 승건이 훨씬 믿을 만했다. 호랑이의 권세를 빌린 여우 같은 모양새였지만 지금 채훈으로서는 그게 최선이었다.
“날 이해 못 하겠지만, 나도 너 이해 못 해. 우리 죽을 뻔했어. 네가 협박당했다고 해도, 네 잘못이 사라지는 거 아니야. 내가 형이니까 네가 사고를 치면 어떻게든 도와주려고 노력할 거야.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어. 결국 지쳐서 나가떨어질 테니까.”
“알아. 안다고. 그래. 내가 죽일 놈이야. 몇 번을 말해야 해. 됐어. 마음대로 해.”
채훈의 설명에 강영환이 손을 내젓더니 침대 위에 벌렁 누워버렸다. 더 이상의 대화는 하지 않겠다는 의사였다.
흔한 형제 싸움이었다. 싸우고 화해하면서 수많은 갈등을 해결하는 법이었다. 채훈은 지금까지 타의와 자의로 이 과정을 자주 건너뛰었다.
물론 이것으로 모든 게 다 좋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언제나 새로 생겨났다. 지금도 서로 감정의 골이 깊어지기만 했다. 그래도 강수찬과 대화할 때처럼 보이지 않는 벽을 향해 말하는 게 아니라는 점은 그나마 희망적이었다.
“다친 건 괜찮아? 병원은 안 가도 되겠어?”
“빨리도 물어보네. 별로 안 아파. 애인 기다린다며, 이러지 말고 가버려.”
“그러지 않아도 이제 갈 거야. 호텔이면 비상약 구비하고 있을 테니까, 프런트에 연락해. 파스도 있으면 붙이고.”
“내가 알아서 할 거야!”
부루퉁하게 소리친 강영환이 몸을 돌려 이제는 등을 보였다. 말하기 싫다는 뜻이었다. 채훈은 그의 뜻을 존중하는 의미로 조용히 방을 나왔다. 심정민이 지켜보고 있든 말든 문 앞에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에 쉬운 게 하나 없었다.
*
*
심정민과 함께 객실을 나온 채훈은 동생의 영상을 빼내 달라는 부탁을 할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뒤따라오는 경호원들 때문에 단둘이 있을 때를 노리기로 했다.
엘리베이터를 탄 채훈은 한숨을 쉬었다.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어지러웠다.
“도련님은 위층에 계십니다.”
“네?”
정신을 차리려고 뺨을 문지르던 채훈은 심정민의 말을 조금 늦게 이해했다. 심정민이 말하는 도련님이라면 승건을 말했다.
“승건이 여기 있어요?”
“예. 파출소까지 오시겠다는 것을 말리느라 고생했습니다.”
“네…….”
채훈이 어설프게 대답하는 사이에 엘리베이터가 곧 위층에 도착했다. 심정민을 뒤따라 움직이던 채훈은 다시 한번 더 얼굴을 문질렀다. 새벽이었다. 내일이면 바쁘게 일을 해야 할 녀석이 여기까지 찾아왔다는 것은 그만큼 신경을 쓴다는 의미였다.
승건을 만난다는 기대에 심장이 울렁거렸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나 싶은데 심정민이 문을 열었다. 채훈과 심정민이 들어가고 경호원들은 복도에 남았다.
객실의 구조는 아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좀 더 크고 인테리어가 고급스러웠다. 안쪽에 위치한 거실 한가운데 승건이 서 있었다. 넥타이 없는 셔츠와 바지만 입은, 평소와 달리 느슨한 차림이 그가 얼마나 다급히 왔는지를 알려주었다.
채훈은 승건의 얼굴을 보자마자 반가웠다. 분명히 오늘 저녁에 싸우다시피 하며 헤어졌는데도, 달려가서 끌어안고 싶어졌다. 그러나 채훈은 자신의 몰골이 엉망일 거라는 데 정신이 들었다. 창고를 구르고 땀이 나도록 내달리느라 상태가 영 별로였다. 채훈은 얼굴에 힘을 꽉 주며 표정 관리를 하려고 애썼다.
“어떻게 왔어?”
“다쳤어?”
반가운 티를 내지 않으려고 어색하게 인사를 하는데 동시에 승건이 무서운 표정으로 성큼 다가왔다. 기세는 꽤나 흉흉했다. 채훈은 승건이 끌어안아 올까 봐 걱정하면서 진정하라는 의미로 팔을 들어 손을 내보였다.
“안 다쳤어. 괜찮아. 진정해.”
채훈의 말에 승건이 걸음을 멈췄다.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심정민이 마치 맹견을 조련하는 장면 같다는 생각을 했지만 당사자들은 그 사실을 알 수 없었다.
“앉아서 이야기하자. 죽자 살자 달렸더니 다리가 풀리려고 해.”
채훈은 분위기를 가볍게 만들면서 가까이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 하지만 승건이 계속 서 있는 바람에 채훈은 그를 올려다봐야 했다.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승건이었다.
“박광호는 잡혔어. 최진수는 도망쳤지만 곧 잡힐 거야. 걱정하지 않아도 돼.”
걱정하지 말라고 하는 승건의 얼굴은 차갑고 서늘했다.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것 같은 평소의 모습이었다.
“어떻게 할 거야?”
“궁금해?”
“내가 알면 안 되는 거야?”
“앞으로 안 보게 될 거야.”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한다고 했다. 그 적당이라는 기준이 어디까지인지 몰라도 앞으로 안 보게 된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럼 다행이고. 그리고…… 부탁할 게 있는데. 최진수에게 동생과 관련된 영상이 있대. 휴대폰으로 찍은 거고. 다른 데 저장했는지는 모른대. 담배처럼 피우는 약이라는데, 영상이 다른 곳으로 빠져나가지 않게 해줘. 부탁이야.”
채훈은 심정민에게 부탁하려던 것을 승건에게 말했다. 어차피 승건도 알게 될 거였으니 번거로울 필요가 없었다. 알겠다고 한 승건이 손짓을 하자 심정민이 휴대폰을 챙기고는 가까운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영상은 네가 들고 있어. 네 이름을 빌려서 동생 좀 정신 차리게 할 건데, 그래도 돼? 된다고 해주라. 잘될까 모르겠지만 뭐라도 해야겠어.”
“마음대로 해.”
승건의 허락을 받아낸 채훈은 안도하며 빙긋 웃었다.
“고마워. 아, 그리고 이건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최진수라는 사람이 네 사촌 맞아? 널 싫어하는?”
“맞아.”
“옛날에 벌어졌던 사고 때문에?”
“최진수의 아버지이자 내게는 삼촌이 되는 사람이 10년 전에 있었던 납치 미수 사건의 주모자 중에 한 명이었어. 그 일로 삼촌네 집안이 박살 났지.”
“악연이 돌고 도네.”
지금까지 추측했던 것이 사실이었다는 것을 확인한 채훈은 간단한 감상을 말했다. 확실히 살벌한 곳이었다. 그리고 자신도 거기에 한 발 담그고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면서도 현실감이 없었다.
“계약서 쓸 때, 이렇게 위험할 거라고 말은 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보통 자연재해 이외에 생명의 위협은 계약 파기 조건에 충족되지 않나?”
“미안.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어.”
무거운 분위기를 반전시키려고 가볍게 농담을 꺼냈던 채훈은 예상치 못한 승건의 사과에 놀랐다. 특히 그가 미안해하기보다는 무서운 얼굴로 말해서 더 그랬다.
하지만 오래지 않은 경험으로도 승건이 뭔가 참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이 어떤지 넘겨짚을 수는 없었다. 채훈은 어색하지 않으려고 다음 말을 이었다.
“아니……. 뭐, 반쯤은 내 동생도 엮여 있으니까.”
“앞으로 이런 일은 없을 거야. 박광호랑 최진수가 본보기가 될 테니까. 이번 일은 어떤 식으로든 보상할게. 원하는 걸 말해. 원하는 게 없다면 내가 줄 거야. 이번만큼은 거절하지 마.”
승건의 미간이 구겨지는 것을 보며 채훈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 녀석의 머릿속이 어떤지 궁금할 때가 가끔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해될 것 같았다.
그는 주고받는 데 철저했다. 받았으니 줘야 하고, 주었으니 받아내야 했다. 특히 물질로 해결하려는 성향이 강했다.
승건의 성향을 이해는 했지만 그래도 보상한다는 말이 꽤나 아프게 다가왔다.
채훈은 문득 널 좋아하면 어떻게 되냐고 묻고 싶어졌다. 그러면 그만 만나는 건지도 궁금해졌다. 계약에서 감정이 엮이지 말라는 전제 조건이 달리긴 했는데, 엮이게 되면 어떻게 될지에 대해서는 물어보지 않았다.
헤어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했으니까, 짝사랑도 그만둘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강채훈.”
“……응?”
“딴생각하지?”
“어, 응.”
“내가 방금 뭐라고 했는지는 알아?”
“원하는 게 뭐냐고 물었잖아. 지금 당장 뭐가 좋을지 모르겠어. 머리가 안 굴러가는데……. 아, 그렇지. 건물은 안 받아.”
채훈은 얼른 조건을 환기시켰다. 그러자 승건이 미간을 구겼다. 그 모습조차 그림과 같이 잘생겨서 넋을 놓고 보았다. 확실히 미남 효과는 무시무시했다.
“안색이 나빠.”
“상태가 별로긴 해.”
확실히 더 멍해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승건이 가까이 다가왔다.
채훈은 멍하니 승건을 올려다보았다. 어젯밤처럼 승건의 손등이 이마에 닿는 것을 느끼며 눈을 깜빡였다. 시원한 감각이 좋았다. 다정한 손길에는 설레다 못해 감정이 넘쳤다. 다시 한번 그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작은 손짓에, 걱정 어린 시선에 기쁘고 안타까웠다. 잘생긴 얼굴을 보고 있자니 기분도 좋아졌다.
“열이 높아.”
“있잖아, 나는 네 얼굴을 좋아하는 것 같아.”
말을 하고 나서야 채훈은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아차렸다. 술에 취하지도 않았는데 충동적으로 진심을 내뱉고 말았다. 승건이 구겨졌던 미간을 펴면서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눈썹을 휘었다.
채훈은 실없이 웃었다. 저런 모습조차 잘생겼다.
“무슨 소리야?”
“다 끝내고 싶은데, 네 얼굴 보면 그 마음이 사라져.”
채훈은 승건이 바로 앞에 서 있어서 그를 한참이나 올려다봐야 했다. 마주한 검은 눈동자는 천천히 진위를 파악하고 있었다. 채훈은 숨이 막힌다고 생각하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승건의 말을 기다렸다.
“끝내고 싶다고?”
승건의 말투가 날카롭다고 생각했다. 러트를 같이 보내자는 승건의 제안을 받고 즐기자고 다짐한 것이 그제였다. 몇 시간 전에는 녀석을 한 대 때리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 그냥 놓아버리면 어떨까 하는 충동이 불쑥 일었다.
“이런 일을 겪으면 무섭잖아.”
“다시는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야. 그리고 계약은 아직 반년 넘게 남았어.”
“계약이야…….”
계약이라는 단어에 발끈하던 채훈은 어지러움과 귀울림에 이마를 짚었다.
삐이이이이이익.
마치 노래방 마이크에서 날카로운 기계음이 울리는 것과 비슷한 소리였다. 그건 폭력이나 다름없었다. 채훈은 인상을 쓰면서 귀를 막았다.
“강채훈.”
놀란 승건이 무릎을 꿇고는 눈을 맞춰 왔다. 채훈은 괜찮다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오히려 어지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승건의 손을 꽉 잡았다. 귀울음은 약해졌지만 어지러움은 심해졌다.
“무슨 일이야?”
“어지러워서…….”
더듬더듬 대답을 하던 채훈은 뭔가 떠올랐다. 재즈바에서 뒷머리를 맞고는 기절했었다. 반사적으로 뒷머리를 만지자 그제야 욱신거림이 느껴졌다. 손끝에서 반쯤 말라붙은 피딱지가 묻어 나왔다. 죽자 살자 달리느라 땀 때문에 머리가 축축한 줄 알았는데 피였던 모양이었다.
“피? 왜 이래?”
“그게, 뒤통수를 맞았어.”
“누가? 최진수? 박광호?”
“아니. 재즈바의 사장이. 그러니까 동생이 있다는 룸에 갔다가 뒤통수를 맞고는 기절을 했어.”
채훈은 승건의 물음에 꼬박꼬박 대답하면서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뭐가 이상한 건지 알 수는 없었다.
“별로 안 아파.”
“아픈 게 문제가 아니야. 병원부터 가자.”
채훈은 알았다고 대답하려고 했다. 그다지 아프지 않았지만 머리가 위험한 곳이라는 상식 정도는 있었다. 어지러움도 심상치 않았다. 병원에 갈 거라고 대답해야 하는데 달싹거리는 입술에서는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어지러움을 넘어 세상이 뒤집어지려고 했다.
“강채훈!”
승건이 이름을 불렀지만 채훈은 답하지 못했다. 눈앞이 순식간에 까매졌다. 채훈은 승건의 손을 잡은 채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 *
심정민이 능숙한 솜씨로 복숭아 껍질을 깎았다. 딱딱한 복숭아는 껍질째 먹을 수 있었지만, 심정민이 맡겨두라고 했기 때문에 채훈은 손 놓고 지켜보기만 했다.
지난밤에 정신을 잃은 채훈이 눈을 떴을 때는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고 난 다음이었다. 크림색으로 꾸며진 낯선 곳이 VIP 병실이라는 것은 한눈에 알아보았다. 다행히 태화 병원은 아니었다.
친절한 간호사는 열 시간 만에 정신을 차린 거라고 했고, 뇌진탕이어서 안정이 필요하다고도 알려주었다. 꼬장꼬장한 인상의 의사 역시 같은 말을 했다.
그렇게 깨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과일 바구니와 갈아입을 속옷을 들고 심정민이 나타났다. 채훈은 심정민에게서 여러 일을 전해 들었다.
동생은 얌전히 호텔에 있었고, 어머니도 무사하다고 확인하는 것이 제일 처음이었다. 그리고 최진수는 여전히 도주 중이었다. 발 빠르게 출국을 막아뒀지만 밀항을 시도할 수도 있다고 했다. 중국으로 도망쳐 버리면 잡는 데 너무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골치 아프다는 설명도 이어졌다.
최진수는 가진 것을 모두 잃게 생겼다.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지 않고 보복을 한다고 덤벼드는 게 최악이었다. 그가 잡힐 때까지는 적어도 채훈의 가족들은 경호원을 달고 살아야 했다. 어머니한테도 경호원과 함께 다니라고 말을 한 상태였다. 채훈은 최진수가 얼른 잡히기를 바랐다.
다음은 채훈의 소지품이었다. 지갑은 무사히 돌려받았는데, 휴대폰에 문제가 생겼다.
“유심은 부서뜨렸고, 기기는 망가졌습니다.”
“아직 약정이 1년 넘게 남았는데.”
“새로 사셔야 할 겁니다. 이거 드세요.”
심정민이 예쁘게 잘린 복숭아가 담긴 접시를 내밀었다. 채훈은 복숭아에 꽂혀 있는 포크를 집어 들었다. 제철 복숭아는 달고 맛있었다.
“휴대폰 사려면 밖에 나가야 하는데, 그냥 퇴원할까요? 지금 딱히 불편한 곳은 없거든요.”
뇌진탕은 경미했다. 머리도 얕게 찢어졌다. 쓰러진 김에 오래 잤더니 몸이 가벼웠다. 의사 선생님은 피로가 누적되어 있으니 며칠 입원하라고 했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사실 병실에서 할 일이 별로 없어서 지루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채훈이 병원에 입원한 적은 딱 한 번뿐이었다.
그때도 승건과 연관된 사고였고 머리를 다친 것도, 눈을 뜨니까 모든 검사가 끝나고 별 이상이 없다는 것도 똑같았다. 이상한 우연이었다.
경찰 조사를 받지 않는다는 게 다르긴 하지만, 그래서 너무 할 게 없었다.
“도련님께서 결정하실 겁니다.”
“그럼 퇴원 못 해요? 내가 환자인데?”
“물론 하실 수 있지만, 그래도 혹시나 모르니까 도련님과 먼저 이야기해 보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휴대폰은 제가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신분증이 있으니까 병실에서도 될 겁니다.”
채훈은 나중에 다툴 수도 있다는 심정민의 조언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퇴원할 거라고 우기면 어떻게든 될 것 같기도 한데, 그렇게까지 시끄럽게 굴고 싶지는 않았다.
그것보다는 지금 당장 해결해야 할 일들이 많이 있었다. 특히 변호사를 소개받기로 한 걸 알아보는 게 먼저였다.
“심 실장님. 승건이가 변호사를 소개시켜 준다고 했었거든요. 혹시 이야기 들은 거 있으세요?”
“예. 도련님께 들었습니다. 변호사는 소개시켜 드릴 테지만, 딱히 필요하지는 않을 겁니다.”
“필요가 없어요?”
“조사 결과가 혐의 없음으로 나올 겁니다.”
복숭아를 하나 더 포크로 꽂아 들던 채훈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심정민을 보았다. 그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바람에 채훈은 복숭아를 입으로 가져갔다.
그 문제로 승건과 신경전을 벌였던 게 바로 어제였다. 일을 다 엎어야 하니까 무마해 주지 않을 거라고 해놓고는 이게 무슨 변덕인지 알 수 없었다. 채훈은 지금 눈앞에 승건이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거 덮으려면 곤란해진다고 들었는데, 괜찮아요?”
“몇 개월 동안 준비한 걸 날렸으니 괜찮지는 않습니다만, 다시 해야죠.”
“걔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안 도와줄 것처럼 굴더니.”
“도련님이 채훈 씨를 많이 신경 쓰고 계시는 건 사실입니다.”
푸념처럼 말하자 심정민이 승건의 편을 들었다. 신경 쓰고 있다는 말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었다. 그래도 채훈은 뭔가가 계속 엇나가고 있다고 느꼈다.
입 안에 굴러다니는 복숭아를 와작 씹은 채훈은 복잡한 생각을 털어냈다. 지금 당장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얼마 없었다. 어쨌든 승건을 봐야 했다.
*
*
“광호 녀석이 지금 완전 죽을 맛이겠죠. 질질 짜고 있을 광호 얼굴을 직접 봐야 하는데.”
우아한 손짓으로 푸딩을 수저로 뜬 써니의 목소리는 흥겨워서 마치 운율이 담겨 있는 노래를 부르는 듯했다. 채훈은 그저 고개만 끄덕이면서 푸딩을 삼켰다.
채훈이 새로운 휴대폰을 손에 넣은 것은 늦은 오후였다. 심정민이 보낸 사람이 서류를 들고 두어 번쯤 어딘가로 왕복하고 난 다음에 휴대폰을 받았다. 휴대폰 전원을 켜자 여러 곳에서 온 메시지가 쌓여 있었다.
특히 써니는 안부를 묻는 메시지를 잔뜩 보내왔다. 어디서 들었는지 몰라도 입원했다는 것까지 알고 있었다. 괜찮다고 답장을 보내자 써니가 병실까지 찾아왔다. 한 손에는 고급 푸딩이 담긴 종이가방을 들고 말이다.
채훈의 안부를 확인한 써니는 그가 모르는 박광호의 이야기를 알려주었다. 이번 사건의 배후로 찍혀버리는 바람에 한국에서 쫓겨날 날만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채훈은 침대에 앉아, 그리고 써니는 그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아 달콤한 푸딩을 먹으며 할 이야기치고는 살벌했다. 그래도 채훈은 박광호가 어떻게 되는지 알아야 했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납니까?”
채훈은 푸딩을 하나 더 뜯으면서 물었다. 10여 년 전에 승건은 납치 미수 사건을 겪었다. 정확히는 납치가 아니라 죽이려는 목적이었다. 돈 때문에 가족을 죽이는 것은 재벌들만의 일이 아니기도 했다.
“자주 일어났다가는 남아나는 사람이 없을 걸요? 그냥 지분 싸움을 하다가 적당히 제 몫만 챙기고 말죠. 어지간해서는 모험을 안 해요. 그런 의미에서 박광호가 바보 멍청이라니까요. 걔네 할아버지가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맨몸으로 내쫓을 거라는 이야기도 있어요. 그럼 완전 조……. 음, 바르고 고운 말로 표현하자면 개털 되는 거죠.”
“그래도 돌아오겠죠?”
“음. 적어도 광호네 할아버지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한국에 발도 못 붙일 걸요? 아니면 승건 오빠가 대표이사를 하고 있는 동안만큼이라도? 두 그룹이 서로 엮인 게 많은데, 굳이 따지자면 태화 쪽이 좀 더 우세라서요.”
채훈은 써니가 전해주는 정보에 인상을 썼다. 돈과 권력의 세계는 냉혹한 법이었다. 사람을 상하게 했는데도 불구하고 법의 처벌을 받는 대신에 한국 밖으로 쫓겨나는 것으로 무마하는 게 그들의 방식이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입맛이 썼다. 그래서 달콤함이 퍼져나갈 수 있도록 푸딩을 한입 크게 먹었다.
“퇴원은 언제 해요?”
“내일쯤 하지 않을까요?”
“승건 오빠가 맞선 본 날에는 어땠어요? 제대로 물어봤어요? 뭐라고 해요?”
예고도 없이 써니가 훅 치고 들어오는 바람에 채훈은 헛기침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주변에 써니처럼 연애사를 직접적으로 캐묻는 사람이 없어서 신선할 정도였다. 그래도 불쾌하지는 않았기에 씩 웃으면서 대답했다.
“싸우지는 않았습니다.”
“그럼 다행이고요.”
채훈이 적당히 말을 돌렸다. 그러자 써니가 마주 보며 웃다가 화제를 바꾸었다.
“큰할머니 명함은 잘 가지고 있죠?”
“네.”
“그런데 왜 연락을 안 해요? 큰할머니가 기다리고 계실 텐데.”
“도움받을 일이 없어서요.”
힘든 일이 있으면 연락하라고 했다. 그런데 승건의 외할머니인 이수진의 명함은 쓰일 곳이 없었다. 써니가 이를 드러내며 웃음을 터트렸다.
“채훈 씨는 고지식한 사람이죠?”
“제가요?”
“그거 알아요? 큰회장님이 큰할머니한테 꼼짝도 못 한다는 거. 큰할머니가 두 번 말하면 큰회장님은 하늘의 별도 가져다줄 거예요. 채훈 씨가 승건 오빠랑 결혼하려면 큰할머니부터 공략해야 할 건데. 큰할머니가 워낙 승건 오빠를 예뻐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어필은 해야 하잖아요.”
그렇지 않냐면서 눈을 빛내는 써니의 모습에 채훈은 할 말을 잃었다. 맞선만큼이나 결혼이라는 단어가 뒤통수를 내리갈겼다.
결혼이라고?
연애 다음은 결혼이 맞았다. 그러나 그건 자신과 승건에게만큼은 어울리지 않았다. 단지 계약 연애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승건과 결혼하려고 쟁쟁한 집안이 줄을 서 있는데 굳이 자신을 선택할 이유는 없었다.
채훈은 승건을 좋아하기는 했지만 그다음은 생각하지 않았다.
“반응이 이상하네. 결혼할 생각이 없나 봐요?”
“아직은 없습니다.”
정확히는 결혼 자체에 대해 깊이 있게 고민해 본 적이 없었기에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써니가 뭔가 알겠다는 듯이 웃었다.
“흐음. 뭔가 더 있는 것 같기는 한데, 당사자가 아니라고 하니까 그렇다고 할게요. 그래도 연락은 한번 해봐요.”
“뭔가…… 언질이 있었던 겁니까?”
“오, 이제야 눈치챘네. 큰할머니가 아주 관심이 많아요. 채훈 씨에게. 그래도 채훈 씨가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는 거니까. 전에도 말했지만 승건 오빠 심장이 얼음으로 만들어진 건 유명하거든요. 우리 할머니도 그렇고 큰할머니도 그렇고 승건 오빠가 연애 못 할 거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단 말이에요. 그런데 애인이라고 소개한 데다가, 이렇게 요란하게 연애를 하는 것도 처음이라서 큰할머니께서 아주 기대하고 계시죠.”
“네.”
써니의 입에서 쏟아지는 말에 채훈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수저를 입에 문 써니가 애석하다는 듯 한숨을 쉬면서도 웃었다.
“진짜 철벽이네. 보통은 이런 인연 잡고 싶어서 다들 난리인데. 우리 큰할머니가 태화 그룹의 안주인이라고요.”
“제가 보통이 아닌가 보죠.”
“어머나, 채훈 씨가 이렇게까지 자기 얼굴에 금칠을 하는 사람인 줄 몰랐네.”
“감당할 수 없는 것은 욕심내면 안 되는 법이라고 했거든요.”
채훈은 자신의 본심을 슬쩍 드러냈다. 최근에 계속된 사건 사고를 겪다 보니 어머니의 충고가 진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렇게까지 두드리면 친해질 만도 한데. 내가 싫어요?”
“아니요.”
“그럼요?”
“이유는 여러 개가 있는데, 가장 큰 하나만 말하자면, 승건이 싫어해서요.”
채훈은 길게 설명하는 대신에 승건의 이름을 댔다. 써니의 친절이 부담스럽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채훈의 주위에 없는 스타일이었다. 경쾌하고 활달했다. 선을 건드려도 넘지는 않았다. 그래도 몇 번의 경험으로 인해 주변 사람을 경계하라는 승건의 충고를 무시할 수가 없었다.
특히 승건은 써니랑 채훈이 가까이 지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메시지를 주고받는 것을 보고는 코웃음을 치면서도 그녀에게 따로 불려가지 말라고 굳이 충고를 했을 정도였다.
“승건 오빠가 독점욕이 강하긴 하죠. 그래도 친구는 맞죠? 이제 와서 친구도 아니라고 하면 화낼 거예요.”
“네. 친구 맞습니다.”
도전적인 써니의 물음에 채훈은 간단하게 긍정했다. 지금까지 이런 친구는 없었지만, 친구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럼 친구로서 물어보는 건데, 진짜 베타 맞아요? 전부터 궁금했었는데. 그냥 베타처럼은 안 느껴지거든요. 혹시 숨겨야 하는 속사정 같은 거 있어요?”
마치 비밀 이야기라도 하듯이 써니가 몸을 슬쩍 숙이고는 속삭였다. 그녀의 눈은 반짝반짝 빛났다.
“베타 맞아요. 뭔가 이상하다고 느껴지는 건, 제 체질 때문일 겁니다. 페로몬향이 묻거든요.”
“페로몬이요? 베타인데?”
“보통은 맨살끼리 닿으면요. 씻으면 사라져요.”
딱히 비밀이라도 할 게 없었기 때문에 채훈은 사실대로 말했다. 지금까지 만난 몇 명 되지 않은 형질자들 대부분이 자신의 체질을 신기하게 여겼다. 의사도 딱히 이상이 없다고 했고 채훈도 사는데 불편한 게 없었기 때문에 별달리 신경 쓰지 않았다.
“와. 신기한 체질인데. 오메가향도 묻어요?”
“네.”
“그런데 베타라……. 손 좀 줘봐요. 실험 좀 해보게.”
써니가 마치 악수를 하자는 듯 손을 내밀었고 채훈은 얼결에 잡았다. 악수를 하는 것처럼 손을 꽉 쥔 써니가 손을 들어 자신의 코 가까이에 가져다 댔다.
“별거 없을걸요?”
“진짜 내 냄새가 나긴 하네. 그런데 반응은 없고. 뭔가 달라지는 거 없어요?”
“뭐가 달라져야 합니까?”
“정말 못 느껴요?”
정색하며 묻는 써니를 보며 채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에어컨이 돌아가는 병실은 적당히 서늘한 편이었다. 써니가 가져온 꽃다발의 냄새와 달콤한 푸딩과 시럽의 냄새, 그리고 써니의 향수냄새가 희미하게 났다. 그것 말고는 전과 딱히 달라진 게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멀뚱멀뚱거리고 있자 써니 역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픽 웃었다.
“진짜 베타네. 그래도…….”
써니가 뭐라 할 때였다. 닫혀 있던 병실의 문에서 노크 소리가 났다. 저녁 식사 시간은 한참 전이었다. 간호사가 체크하러 온 것인가 싶어서 채훈은 들어오라고 외쳤다. 그러나 문이 열리고 나타난 사람은 간호사가 아니라 승건이었다.
채훈은 승건을 보자 반가움에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승건아?”
이름을 부르며 반기는데 승건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러고는 채훈의 손을 잡고 있는 써니의 손을 단호하게 내쳤다. 그는 표정 없는 얼굴로 딱딱하게 얼어버린 써니를 보았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냉정한 목소리였다. 채훈은 승건과 써니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승건이 화가 난 것 같은데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이렇게 화가 난 승건은 두 번째였다. 두 달 전에 기어코 오피스텔까지 쫓아왔던 그때와 비슷했다. 아니, 오히려 그때보다 기세가 더 날카로웠다. 차갑고 삭막한 눈빛이 써니를 찌르듯이 보고 있었다.
“문병 와서 같이 푸딩 먹고 있었어.”
채훈은 희게 질린 써니가 걱정스러워서 얼른 나섰다. 그제야 승건이 설핏 눈살을 찌푸리며 이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여전히 살벌한 기세였다. 채훈은 당황스러움에 눈을 깜빡거렸다.
“내가 잘못했어. 미안해.”
그사이에 써니가 속삭이듯 사과했다. 승건이 다시 써니를 보았다.
“문병 왔으면 조용히 있다가 돌아가야지. 왜 이런 장난을 쳐? 나랑 싸우기라도 하게?”
승건은 소리치지도, 목소리를 낮게 깔지도 않았다. 오히려 평소보다 조금 더 나직하게 말했다. 그런데도 써니가 난처한 듯이 눈썹과 어깨를 떨어트렸다.
“그런 거 아니야. 채훈 씨 체질이 특이해서 확인하다가 그랬어. 내가 사과할게. 아, 맞다. 이거 씻으면 사라진대.”
“선을 넘었어. 이제 채훈이한테 연락하지 말고. 알아서 놀아.”
“유치하잖아.”
“정서희.”
“아, 또 이름 부르고. 알았어. 채훈 씨. 갈게요. 몸조리 잘해요.”
살벌한 승건의 경고에 써니는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별다른 반박은 하지 못했다. 시무룩하게 인사를 한 써니가 그대로 병실을 나섰다.
*
*
순식간에 승건과 단둘이 된 채훈은 어리벙벙했다. 써니가 뭘 잘못했는지, 승건이 왜 화를 내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황당한 마음으로 승건을 올려다보자 그의 미간이 어제만큼이나 구겨져 있었다.
“저기, 지금 뭐야?”
“쟤가 잘못했어.”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
“손이나 줘.”
채훈이 잠시 멈칫하는 사이에 승건이 먼저 손을 낚아챘다. 조금 전에 써니가 잡았던 손이었다. 아플 정도로 손을 꽉 쥔 승건의 손은 뜨거웠다. 그리고 구겨진 미간은 계속 펴지지 않았다.
꽤나 긴장 넘치는 상황이어서 채훈은 당혹스러웠다. 특히 승건이 진지하기 짝이 없어서 더 그랬다.
“젠장.”
승건이 가볍게 욕설을 내뱉는 욕설이 낯설었다. 열이 식어서 그런지 채훈은 오싹한 감각에 몸을 떨었다.
“손을 씻고 와. 아니, 샤워하고 와. 갈아입을 옷은 내가 받아 올 테니까.”
“왜 이러는 거야? 이유는 알자.”
“설명은 나중에 해줄게. 우선 씻어.”
얼른 씻으라는 재촉에 채훈은 유난이다 싶으면서도 속옷만 챙겨 욕실로 향했다.
VIP 병실에 붙어 있는 개인 욕실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찢어진 뒷머리에 거즈가 붙어 있었기 때문에 머리는 감지 못했다. 샤워는 금방 끝났다. 몸을 닦고, 속옷을 갈아입을 즈음에 욕실 문을 두드린 승건이 새 환자복을 내밀고는 벗어둔 것은 걷어갔다.
채훈은 환자복을 갈아입으면서도 이게 뭔가 싶었다.
속옷을 주머니에 잘 접어 넣은 다음에 밖으로 나가자 병실의 창문이 모두 열려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승건은 입구 쪽에 팔짱을 끼고 서서는 아주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는 상태였다.
지난 몇 달간 함께 지내면서 승건에게 약간의 정리벽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넓은 집이 휑하게 느껴질 만큼 물건이 적기도 했다.
승건은 집안일 따위는 하나도 안 하게 생겼으면서 제 손으로 어지른 것은 거의 다 직접 치웠다. 승건의 집은 먼지 하나 없이 늘 반짝반짝했다. 그래도 마치 더러운 병균이라도 쫓아내는 듯한 행동은 너무 과했다.
깔끔하게 씻고 나왔는데도 불구하고 승건의 표정은 누그러지지 않았다. 분위기는 아까보다 나아졌지만 그래도 기분 나빠 보이는 것은 여전했다.
“승건아?”
“머리는 안 감아?”
승건이 보송보송한 채훈의 머리를 보며 말했다.
“뒷머리를 다친 것 때문에 거즈를 붙여놔서. 왜 그래? 무슨 일인지 말해 준다며?”
“써니는 알파야.”
“그건 알아. 전에 말했잖아.”
“걔가 여기에 페로몬을 풀었어. 너는 페로몬이 묻는 체질이고.”
“그게 왜……. 아…….”
그게 무슨 문제냐고 물으려던 채훈은 승건 역시 알파라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알파가 알파를 싫어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알파에게 오메가의 페로몬이 유혹의 뜻이라면 같은 알파의 페로몬은 견제와 힘의 과시였다. 특히 상성이 맞지 않으면 최악이었다.
채훈은 그저 활자로만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래도 승건이 왜 이렇게 민감하게 구는지 이해할 것 같았다. 지난번에 클럽에서 돌아올 때, 차 안에서도 승건이 재킷을 덮고 있으라고 했던 것이 떠올랐다.
“뭔지는 알겠다.”
채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씻는 사이에 시트와 이불, 베개까지 싹 바뀌었다.
“남은 병실이 없어서, 병실은 이대로 써야 해.”
세상에 불만이 많은 듯 중얼거린 승건이 다가왔다. 조금 전까지 써니가 앉았던 의자에 자리 잡더니 손을 다시 내밀었다. 채훈은 순순히 승건의 손을 잡았다.
“내가 베타라서 잘 몰라서 그런데, 그게 그렇게 기분이 나빠? 다른 알파 페로몬이?”
“오물냄새가 나는 놈이 방 한가운데 앉아 있다고 생각하면 돼. 거기다…….”
“응? 왜 말을 하다 말아?”
오물냄새는 너무 심하다고 생각하던 채훈은 말을 하다가 멈춘 승건을 보았다. 거침없는 녀석이 말을 멈추다니, 왜 이러나 싶었다.
답은 바로 이어지지 않았다. 뚫어지게 바라보자 승건이 잡은 손에 힘을 꽉 주었다.
“네가 오메가가 아니라 베타이긴 하지만, 이건 정도를 넘었어. 얼마나 페로몬을 쏟아부었는지, 거의 블라인드를 할 수준이라고.”
“블라인드?”
처음 듣는 단어에 채훈은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형질자 관련으로 채훈이 알고 있는 용어는 기본적인 것들뿐이었다. 블라인드는 처음 듣는 단어였다. 블라인드는 사전적으로 눈이 멀다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그게 페로몬과 무슨 상관인지는 매치가 되지 않았다.
“그런 게 있어.”
“뭔데 그래? 검색하면 다 나오는 거 알지?”
채훈이 별달리 관심이 없어서 그렇지 형질자와 관련된 정보는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어지간한 건 다 찾을 수 있었다. 너 아니어도 다 알 수 있다고 어필하는 것은 중요했다.
“일종의 기술이야. 알파가 가지고 있는.”
“기술?”
“알파의 페로몬을 오메가에 덧씌우는 거지. 다른 알파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말이야. 기능 자체는 마킹이랑 비슷해.”
“그건 알아.”
“써니가 매너 없는 짓을 했어. 넌 오메가가 아니지만 페로몬이 묻으니까, 싸우자고 장갑을 던진 거나 마찬가지야. 써니가 아니라 다른 놈이었다면 주먹으로 맞았어.”
정말 기분이 나빴는지 설명을 이어가던 승건이 다시 손에 힘을 주었다.
베타인 채훈은 형질자들의 룰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그래도 마킹이 어떤 건지는 알았다. 냄새 나는 인간이 내 앞에 서 있다 못해 애인에게 냄새를 묻히면 확실히 화가 날 것 같기는 했다. 자신이 승건의 애인이 아니라는 것은 둘째치고 말이다.
채훈은 마킹이라는 게 일종의 영역표시이지 않냐고 물으려다가 참았다. 승건에게 말하기는 너무 노골적이었다.
“그럼 이제는 냄새 안 나?”
“아직 나. 머리 때문에.”
“아, 머리 감을까? 상처는 잘 말리고 약 바르면 돼.”
“아니야. 머리는 가볍게 스친 수준이야. 숙여봐.”
채훈은 승건이 하라는 대로 머리를 숙였다.
이번에는 승건의 손이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었다. 마치 물 없이 머리를 감기는 것과 닮은 동작이었다. 그의 손길은 부드러웠지만 채훈은 갑자기 머리를 감지 않은 게 굉장히 신경 쓰였다. 어젯밤에 과격하게 달리면서 엄청 땀을 흘렸는데 뒤통수에 거즈를 붙여서 뻣뻣한 머리를 그대로 내버려 두고 있었다.
그렇게 한 번 의식하자 고개를 숙인 자세도 이상한 것 같았다. 오싹한 느낌에 뒷목이 뜨끈해지는 느낌이었다.
“기분은 어때?”
그냥 머리를 감을 걸, 하고 후회하고 있는데 승건이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을 던졌다. 채훈은 잠시 생각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아픈 데는 없어.”
“그리고?”
“병원에 있는 건 지루하고, 써니 씨에게서 들었는데, 박광호가 쫓겨난다니까 꼴좋다 싶고, 그리고 말 안 듣는 동생은 골치 아프고, 네 속은 모르겠고.”
마지막은 그냥 지른 말이었다. 그러자 승건이 손을 멈추고는 떨어져 나갔다. 채훈은 고개를 들어 승건을 보았다.
“어제 화가 난 이유가 뭐야?”
돌려 말하는 법 없이 핵심을 찌르는 승건의 질문에 채훈은 속으로 혀를 찼다. 사람 속을 꽤 잘 넘겨짚는 녀석이 또 어떤 부분에서는 꽉 막혔다.
“전에 말했었지. 넌 말하는 방법이 나쁘다고.”
“그래. 했어.”
“특히 뭔가 권할 때 그래. 카드도 그렇고 시계도 그렇고. 음……. 그러니까, 하는 게 어떠냐고 물어보는 게 아니라 하라고 명령을 내려. 그게 당연한 것처럼. 다짜고짜 수의사가 되라고 학비를 지원해 주겠다고 해도 하나도 안 고마워. 오히려 당황스럽고 짜증 나지. 불법적이나 비도덕적인 게 아니라면 네 요청을 거절하지 않아야 한다고 계약하긴 했지만, 이건 요청이 아니야. 내 인생을 네가 정한 대로 살 것도 아니고.”
속에 쌓인 것을 길게 쏟아낸 채훈은 승건과 이런 식으로 대화를 한 적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계를 두고 실랑이를 벌이다가 화해를 할 때도 가볍게 넘어갔다. 불청객이 난입했을 때도 그랬다.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승건에게 제대로 말해야 했다.
“명령은 아니었어.”
“명령 맞아. 네가 선의에서 그런 건 알아. 하지만 네 마음대로 결정 내리지 않았으면 좋겠어. 아, 그렇지. 심 실장님에게 들었는데, 내사하던 거 다 엎어버렸다며? 그것 때문에 화가 난 거 아니야. 다시 어떻게 안 돼? 시간 오래 걸렸다며?”
“그건 괜찮아.”
“그럼 뭐……. 음.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다음부터는 내 의사부터 먼저 물어봐.”
채훈은 적당한 곳에서 마무리했다. 이 정도까지 했으니 알아먹기를 바랐다. 승건은 속을 알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병원은 계속 다닐 거야?”
“아마도? 월요일에 출근하고 분위기 좀 보고.”
어지간한 사정이 아니고서야 당장에 직장을 때려치울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내사가 무혐의로 끝나더라도 한동안 분위기는 안 좋을 것이다.
“수의사는?”
“생각 없다니까. 옛날에는 수의사 선생님이 굉장히 멋져 보였는데. 지금도 멋지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때처럼 수의사가 되고 싶거나 하지는 않아.”
“그럼 달리 하고 싶은 것은?”
기어코 답을 듣고 말겠다는 의지를 내비치는 승건을 보며 채훈은 속으로 쓴웃음을 삼켰다. 녀석은 확실히 집요했다.
“돈 많은 백수는 만인의 꿈이고. 그것 말고 딱히 이거다 하는 건 없어. 지금 하는 일도 마음에 들고.”
채훈은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보건행정학과에 들어간 것은 자의가 아니었지만, 공부는 재미있었다. 사무직도 적성에 맞았다. 거창한 꿈도 성공에 대한 욕심도 없었지만 지금의 삶에 만족했다.
더 나이가 들기 전에 서핑을 배우고 싶긴 했다. 그 외에는 주식을 공부해야 할 것 같아서 고민 중이었고, 마라톤에 한번 도전해 볼까 하는 소소한 희망 사항과 목표가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승건이 불만스럽게 입매를 당겼다.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 듯 자세를 고쳐 앉은 승건이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독선적이고 오만한 성격이라는 것을 당사자는 모르는 법이지.”
“뭐?”
“내 이야기야.”
승건이 진지하게 자기 자신을 평했다. 채훈은 굳이 아니라고 하지 않았다. 독선과 오만이 승건과 어울리기는 했다.
“그리고 너는 마음이 약해. 특히 가족들에게. 이미 알고 있겠지만, 책임감이 강한 거랑은 별개야.”
“갑자기 왜 이야기가 그쪽으로 튀어?”
“네가 아니더라도 안 될 건 안 돼. 될 건 되고.”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이래?”
“이건 일방적인 통보가 되겠지만, 내가 따로 네 동생에게 경고할 거야. 최진수의 영상이 없어도 말이야. 이번 일의 인과 관계를 따지자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지만, 그래도 그 나이를 먹었으면 책임이 뭔지는 알아야지.”
채훈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흐름에 당황하다가 인상을 썼다. 어젯밤에 일어난 일을 생각하면 승건의 말에 반대할 수가 없었다.
승건의 말대로 온갖 악연과 욕심이 어우러진 사고였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동생을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는 형이라는 부끄러움과 민망함이 채훈을 후려쳤다. 동생의 영상을 승건에게 맡기면서 그의 이름을 빌려 쓰겠다고는 했지만 승건이 직접 나서는 것은 또 다른 느낌이었다.
“왜? 싫어?”
“아니, 그냥…… 내가 못난 거 같아서.”
“사업병에 걸린 형과 사고만 치고 다니는 동생을 쥐고 흔들 만큼의 힘이 없긴 하지.”
“뼈를 때린다.”
채훈은 씁쓸하게 대답했다. 웃기게도 승건의 말이 모두 맞았다. 형제들 사이에서 어떻게든 아등바등했지만 성격 강한 형제들을 이길 힘이 없었다. 이미 알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지적을 당하자 꽤 많이 아팠다.
“그래도 너 아니었으면 너랑 네 동생은 그대로 팔려갔어. 네 방식대로 동생을 지킨 거야.”
“그건 무섭고.”
병실에 앉아 살벌하고도 진지한 대화를 하려니 이상한 기분이었다.
서주명 말고는 친한 친구들에게도 가족에 대해 자세히 말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승건에게는 모두 까발려지다 못해 그의 손을 빌려 매듭을 짓게 되었다. 거기다 자신의 방식대로 동생을 지켰다는 말을 들으니 또 위로가 되는 것도 웃겼다. 자신은 이런 작은 것에 감동하는 성격이었던 모양이었다.
승건과 이렇게나 깊은 이야기를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전화위복인지, 혹은 그에게 약점이 잡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어젯밤의 일이 내 잘못이라는 건 알았어. 앞으로 조심한다고 약속할게. 그래도 사람이란 쉽게 바뀌지 않으니까, 인내심이 필요할 거야.”
승건이 어젯밤에 한 싸움의 종지부를 찍었다. 인내심이 필요할 거라는 경고에도 채훈은 만족했다. 한 번에 다 되는 법은 아니었다. 이렇게라도 의견 차이를 좁힐 수 있는 게 다행이었다. 아니었다면 정말 실망했을 것이다.
“안 되면 또 싸우지 뭐. 그러고 또 화해하고.”
싸우고 화해하면 되지 않냐고 동의를 구하는데 승건은 대답해 주지 않았다. 대신에 다시금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가볍지 않은 침묵이 병실에 가득 찼다.
채훈은 승건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했다. 그의 또렷한 눈빛이 무엇을 뜻하는지 읽을 수가 없었다. 어색함이 싫어서 뭐라 말을 할까 몇 번 입을 달싹거리는데 승건이 먼저 말을 꺼냈다.
“오늘 새벽에 그만두고 싶다고 했던 기억해?”
“어……. 기억해.”
“계약 기간은 아직 남았어. 위험하다고 생각된다면 경호원을 붙여줄게.”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위험하니까 끝내고 싶다며.”
대화가 한 바퀴 돌아 제자리로 돌아온 바람에 채훈은 인상을 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계약만 언급하는 녀석이 얄미웠다. 다른 대답을 듣고 싶어 하는 자신도 바보 같았다.
얼음 심장에게 뭘 바라.
승건에게 너무 어울리는 별명이라고 속으로만 투덜거린 채훈은 손을 내저었다.
“끝내자고 안 할 테니까, 경호원은 필요 없어. 그런 거 안 데리고 다닐 거야.”
“퇴원하기 전에 최진수가 안 잡히면 데리고 다녀야 해. 안전을 위해서라도.”
“그럼 그때까지만.”
실질적인 위협이 있다면 안전이 먼저였다. 그건 타협을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내일은 못 와. 지방 출장이 있거든.”
“응.”
“그리고 미국 출장이 일주일 앞당겨졌어. 수요일에 떠나.”
“그럼? 해?”
채훈은 반사적으로 물었다. 생각해 보니 오늘은 금요일이었다. 평소라면 오늘 저녁에 만나 섹스를 했다. 그런데 승건이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환자랑은 안 해.”
“그럼 러트는?”
“더더욱 안 해. 너는 날 뭘로 보는 거야?”
“사실대로 말하면 싫어할 텐데?”
채훈은 성욕의 화신이라고 말하는 대신에 은유적으로 돌려 말했다. 채훈의 머릿속에서 승건은 양심 없는 알파였다. 눈빛으로 전한 뜻이 통했는지 승건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하자고 하면 할 거야?”
“아마도? 뒷머리 찢어진 거야 별거 아닌데, 장소가 문제긴 하네. 1인실이지만 그래도 방음 문제도 있고 간호사가 언제 올지도 모르고. 아, 안 되겠다. 스릴 넘치는 섹스는 별로야.”
빙긋 웃으며 별로라고 하자 승건의 얼굴이 묘하게 변했다.
“너는 내가 양심 없기를 바라는 것 같아.”
“그건 아닌데…….”
승건의 반응이 귀여워서 피식 웃던 채훈은 허벅지를 잡아 오는 손길에 말을 끝맺지 못했다.
옷자락 너머로 뜨거운 손이 선명하게 느껴져서 당황하는 사이에 승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채훈은 승건의 얼굴이 천천히 다가오는 것을 보며 키스하기 직전임을 깨달았다.
승건은 입술을 가볍고 핥고는 떨어졌다.
채훈은 코앞에 있는 승건을 마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려고?”
혹시나 해서 물었지만 승건은 대답 없이 다시 입을 맞춰 왔다. 이번에는 느릿한 키스였다. 혀를 빨고 목구멍 안쪽을 핥는 감각에 몸을 떨다가 결국 승건의 목을 끌어안아야 했다. 그에게서는 여전히 좋은 향기가 났다. 그러면서 동시에 탐닉의 열기가 느껴졌다.
한참 후에야 입술이 떨어졌다. 채훈은 뺨과 턱에 입술을 대며 애무하는 승건에게 다시 한번 더 물었다.
“안 할 거라며? 읏, 아파.”
승건이 대답 대신에 채훈의 옷깃을 잡아 벌리고 쇄골에 이를 세웠다. 평소처럼 가볍게 자극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플 정도로 강하게 물어 왔기 때문에 채훈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거기다 승건의 두 손이 상의 안쪽을 파고들어 등을 슥 쓸었다. 소름이 오소소 돋다 못해 반쯤 서고 말았다.
“승건아?”
“아무리 쏟아도 오래 가질 않아.”
“응?”
목덜미에서 들리는 승건의 목소리는 선명했지만 채훈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뭘 쏟아?
채훈은 승건이 화가 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등을 쓰다듬는 손길에 신경이 분산되어서 깊게 생각할 수 없었다.
“삽입 섹스는 말고, 펠라는 어때?”
승건이 귓가에서 속삭였다.
“그거 싫어한다며.”
채훈은 승건이 처음부터 구음이 싫다고 했던 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채훈도 별로라고 했었다. 서로의 취향을 존중해서 지금껏 서로의 성기에 입을 댄 적이 없었다.
“지금 시도해 볼 수는 있지.”
시선을 마주한 승건의 눈빛은 강력했다. 그의 손이 채훈의 바지와 속옷을 끌어 내리면서 반쯤 일어난 성기를 꺼내 쥐는데도 눈을 뗄 수 없었다. 숨이 막혔다.
가볍게 입술을 맞대고 떨어진 승건이 그대로 허리를 숙여 꼿꼿하게 발기한 살덩어리를 덥썩 물었다.
세상에.
승건의 목에 감았던 팔을 풀고 홀린 듯 시선을 아래로 떨구던 채훈은 외설스러운 광경에 질끈 눈을 감았다.
뜨겁고 축축한 감각에 온몸이 떨렸다. 길게 핥아 올릴 때에는 숨을 삼켜야 했고, 빨아 당기는 압력에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구음은 한 번도 하지 않았을 녀석이 어설프기는 하지만 제법 잘해서 의아할 정도였다.
핥고 빠는 소리와 억눌린 신음이 뒤섞였다. 계속되는 자극에 시트를 부여잡고 버티던 채훈은 승건이 성기를 깊게 삼키는 바람에 도리질을 쳤다.
눈을 뜨자 습기로 흐려진 시야에 다리 사이로 머리를 파묻은 승건의 모습이 바로 들어왔다. 정말 심장에 나쁜 광경이었다.
“흣. 무리, 무리하지 마. 이제 됐어. 괜찮아.”
초보자가 하기에는 무리다 싶어서 한 말이었다. 그러나 그걸 신호로 승건이 음낭과 성기를 한꺼번에 쥐고 흔들면서 아플 만큼 빨았다. 마치 잡아먹혀 버릴 듯한 오싹함이 채훈을 덮쳤다. 부끄러움에 밀쳐내고 싶은 마음과 그럼에도 더한 쾌락을 바라는 욕망이 뒤섞였다. 본능적으로 허리가 들썩였지만 승건이 다칠까 봐 최대한 인내심을 발휘해야 했다.
“흐윽. 읏.”
입에서는 끊어진 신음만 흘러나왔다. 다시금 병실의 방음 상태가 신경 쓰이다가 환기를 위해 창문을 열어놓은 것도 기억났다. 제일 꼭대기 층이니까 밖에서 들릴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옆 병실에 문이 열려 있을지 모른다 생각되었다. 채훈은 발가락까지 오므리며 필사적으로 신음을 참았다.
휘몰아치는 자극은 계속되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는 것은 금방이었다.
“이, 이제. 그만. 흣. 그만해. 승건아. 아앗. 쌀 것 같아.”
채훈은 승건의 머리를 잡고 밀쳤다. 손에 힘을 주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만하라고. 미친…….”
당황스러움과 쾌락에 떨며 육성으로 미쳤다는 소리를 하던 채훈은 결국 승건에 입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그때만큼은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채훈은 한참 후에야 숨을 헐떡이며 눈을 떴다. 사타구니에 닿는 승건의 더운 숨결이 느껴지면서, 동시에 와이셔츠 깃에 완고하게 감싸여 있던 그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이는 것이 슬로우 모션처럼 눈에 들어왔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한 박자 늦게 알아차렸다.
“너…….”
혼이 빠져나갈 것 같은 충격에 바람 빠지는 소리만 나왔다. 손등으로 입을 닦던 승건이 힐끗 시선을 주었다. 왜 그러느냐는 눈빛이었다.
“그걸, 왜 삼켜?”
“먹을 만해.”
“내 정신 건강에는 안 좋아.”
당황하는 바람에 아무 말이나 튀어나왔다. 승건이 대꾸 없이 피식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그러고는 침대 옆에 있는 티슈를 뽑아 채훈의 성기를 꼼꼼히 닦아주고는 얌전히 옷도 입혀주었다.
“너는 안 해?”
이대로 끝낼 눈치에 채훈은 혹시나 하고 물었다.
“괜찮아.”
“안 괜찮을 것 같은데.”
승건의 몸에서 열기가 뿜어져 나오는 게 느껴졌다. 앞섶이 어떤지는 보이지 않았지만 흥분했을 것 같았다.
이번에도 승건은 대답이 없었다. 대신에 몸을 일으켜 채훈의 목과 쇄골에 한 번 더 이를 세웠다. 아까만큼 아프지는 않았지만 따끔했다. 일부러 키스 마크를 남기려고 하는 게 분명했다. 와이셔츠를 입으면 가려질 만한 위치이긴 했지만, 아까부터 승건이 왜 이러는 것인지 채훈은 알 수 없었다.
“아파.”
목 뒤까지 깨물어버리는 승건을 밀어내자 이번에는 아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재킷 안에서 휴대폰이 진동했다. 승건이 전화를 받고는 곧 갈 거라고 말했다.
“가려고?”
“내일 건강검진을 받도록 해. 그러니까, 입원한 김에. 가벼운 뇌진탕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혹시나 모르니까 좀 더 자세하게 검사받아 보는 게 좋아. 심 실장님이 도와주실 거야.”
말하는 방법이 나쁘다고 했던 게 효과를 보는 건지 승건이 길게 이유를 덧붙였다. 채훈은 꼼짝없이 건강검진을 받아야겠구나 싶다가 문득 키스 마크의 위치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검진복을 입으면 그냥 보이고 말 터였다.
“너, 이거 일부러 그랬지?”
“하루 더 입원하고, 퇴원은 일요일에 해.”
“말 돌리지 말고.”
“일부러 한 거 맞아. 알파들이 꽤 보여서.”
당당하기 짝이 없는 승건 때문에 채훈은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알파는 이런 거에 민감하구나 싶었다. 한 번 보고 말 사람들에게 키스 마크를 내보이는 거야 별거 아니었다. 조금 민망하긴 했지만 아무렇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꼼꼼히 창문을 닫고 나중에 보자고 인사한 승건이 병실을 나갔다. 단숨에 조용해진 병실에서 혼자가 된 채훈은 한참이나 닫힌 문을 보다가 그대로 침대 위에 누웠다.
한바탕 요란한 꿈을 꾼 것 같았다. 이렇게나 다정한데 어떻게 안 좋아할 수 있냐고 누군가에게 마구 따지고 싶어졌다. 계약이라는 단어만 꺼내지 않았다면 그냥 날 좋아하는 거구나 하고 오해하고 싶기도 했다. 그러면서 조금 전에 아래를 빨린 감각이 치솟는 바람에 얼굴에 열이 훅 올랐다. 반쯤 선 것 같았다.
“미치겠네.”
채훈은 열이 오른 얼굴을 문지르다 몸을 웅크리며 모로 누웠다. 하루 만에 온갖 사건이 일어났다. 다사다난함에 웃음이 나왔다.
삶은 어떻게든 굴러갔다. 데굴데굴 굴러 아래로 떨어질 것 같으면서도 결국 제자리에 서 있다.
깊어지려는 생각을 털어낸 채훈은 가라앉지 않는 열을 느끼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대로라면 승건을 떠올리며 자위를 해버릴 기세였다. 샤워라도 해서 정신을 차려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연달아 샤워를 두 번이나 한 채훈은 그대로 이불을 뒤집어쓰고 일찍 잠을 청했다.
* * *
태화 그룹의 계열사인 TH 정유를 대표하는 정순철 회장의 취향에 맞춰 꾸며진 칠순 기념 만찬은 웅장하고 화려했다. H호텔에서 가장 큰 그레이트 홀은 사람들로 꽉 들어찼다. 대부분 친인척과 TH 정유의 임직원들이었지만 그들의 면면은 모두 회장님의 힘이 얼마나 막강한지 보여주고 있었다.
써니 역시 그들 중 하나였다.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재벌 가문의 일원으로 셋째 작은할아버지의 칠순 잔치에 참석하고 있는 중이었다.
행사는 훌륭했다.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알 수 있는 유명한 오페라 가수에, 재단에서 후원하는 어린이 합창단과 트로트의 황태자라고 불리는 가수가 번갈아가며 축하 공연을 이었다.
오후 6시에 시작한 잔치는 8시가 조금 지나서 끝났다.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키며 버티던 써니는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치면서 재빨리 승건의 위치를 확인했다. 정순철 회장이 퇴장하자 사람들이 빠르게 흩어지기 시작했다.
써니는 같이 돌아가자는 할머니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얼른 승건을 뒤쫓았다. 걸음이 빠른 승건은 거의 입구에 이르렀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워낙 인기가 많아서 승건을 붙잡고 인사를 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었다. 써니는 승건이 홀에서 빠져나가기 전에 따라잡았다.
“승건 오빠. 나랑 이야기 좀 해.”
“너랑 할 이야기는 없어.”
써니는 단칼에 거절하는 승건의 앞을 가로막았다.
“난 있다고. 내 전화는 이제 안 받잖아.”
“네가 한 짓을 생각해.”
“알아. 그래도 좀 봐줘. 채훈 씨에 관한 거야. 오래 안 걸려. 잠깐이면 된다고. 그만 좀 노려보고.”
이대로 승건을 돌려보낼 수 없었기에, 눈에 보이지 않는 압박에도 불구하고 마주 보았다. 알파는 깡패였다. 특히 우성 알파는 더 그랬다. 페로몬으로 위협하면 같은 알파끼리는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써니가 물러나지 않자 승건이 홀에 붙은 비어 있는 대기실로 향했다. 대기실에는 두 사람만 들어가고 입구는 심정민이 지켰다.
“할 말이 뭐야?”
서늘한 승건의 목소리에 써니는 침착하게 웃었다.
같은 항렬의 6촌들 중에 승건이 가장 나이가 많았고, 그다음이 써니와 박광호였다. 미국으로 유학을 갔던 써니는 승건과 같은 지역에서 살면서 몇 번 만났었다. 그리고 서로 비슷한 시기에 한국으로 귀국하면서 그럭저럭 가깝게 지냈다. 그렇기에 써니는 승건에 대해서는 꽤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승건이 잘생긴 것은 이 바닥에서도 독보적이었다. 거기다 무표정하기까지 해서 태화 그룹을 대표하는 얼굴로는 그럭저럭 괜찮다고 어른들이 한마디씩 하는 것도 들었다.
하지만 그건 겉으로만 보는 것이었다. 대외적으로는 큰회장님의 꼭두각시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승건은 꽤나 무자비한 면이 있었다. 특히나 선이 분명했다. 며칠 전에 제대로 선을 넘어버린 자신은 아마도 상종 못 할 인간이거나 처리해야 할 적쯤으로 분류되어 있을 터였다.
확실히 자신이 잘못했으니 입이 두 개라도 할 말은 없었다. 그러나 이건 다른 문제였다.
“채훈 씨가 오늘 퇴원했다며? 화내지 마. 미리 말하는데, 연락한 거 아니야? 내가 따로 알아봤어. 어제 종합건강검진을 한 걸로 아는데, 혹시 A2 검사도 했어?”
“그걸 왜 해?”
써니는 시큰둥한 승건의 반응을 이해했다. A2는 일명 형질자 심층검사라고 불렸다.
한국에서 형질자 판별검사는 태어나고 며칠 후에, 그리고 초등학교를 입학한 후에 의무적으로 받았다. 종합건강검진에서도 종종 이루어졌다. 그게 A1이었다.
반면 최근에 새로 개발된 심층검사인 A2는 따로 신청을 해야 받을 수 있었다. 비용도 꽤 많이 들었고, 잘 알려지지 않은 탓에 종합건강검진이라고 해도 A2를 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었다.
“오빠는 이상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채훈 씨의 체질에 대해서 말이야.”
“예전부터 그랬어.”
“당연히 예전부터 그랬겠지. 하지만 생각해 봐. 베타에게 페로몬 향이 묻는다고? 세상에 불가능한 일은 없다고 하지만 베타는 그럴 수 없다는 거 알잖아. 그것보다는 차라리 아직 발현 안 한 알파나 오메가라는 게 더 그럴듯하지 않아?”
써니는 며칠 전부터 가지고 있던 의문의 답을 피력했다. 사실 채훈을 처음 봤을 때부터 뭔가 이상하긴 했다. 승건도 그제야 의문이 생겼는지 그녀의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써니는 자신의 합리적인 추리가 마음에 들었다.
“A1으로 판별 안 되는 경우가 거의 없고 서른 살까지 발현 안 하는 경우도 엄청 드문 건 아는데. 그래도 70억 명 중에 한 명쯤은 그럴 수도 있다는 게 더 그럴듯하지.”
승건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써니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채훈 씨가 오메가이면 여러모로 문제가 있지 않아? 아무래도 알파일 것 같지는 않은데.”
써니는 승건을 불러 세운 이유를 말했다. 채훈이 오메가이면 여러 가지로 상황이 꼬일 수밖에 없었다.
큰회장님이 승건을 후계자로 점찍은 게 아니냐는 소문도 나돌면서 승건의 몸값은 정점을 찍었다. 물론 태화 그룹이라는 배경이 없더라도 우성 알파에 친부에게서 물려받은 재산이 어마어마해서 인기가 많았다.
어느 모로 보나 승건은 최고의 사윗감이었다. 하지만 승건 본인이 결혼을 완강하게 거부하고 있었다. 대외적으로는 승계 문제 때문이라고 알려진 상태였다.
승건은 우성 알파이면서도 오메가를 질색하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써니는 미국에서 승건을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하고 있었다. 상류층의 알파와 오메가들이 주로 모인 사교 파티에서였다. 승건은 아름다운 오메가를 돌 보듯 하는 것도 모자라 세 걸음 이상 가까이 하지 않았다. 그나마 베타를 만나기는 했어도 잠깐일 뿐이었다.
우성 알파에, 잘생긴 얼굴, 멋진 몸을 가지고도 수도승처럼 산다는 우스갯소리가 나돌 정도였다.
그런 승건에게 애인이 생겼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 조금 놀랐었다. 그가 누군가를 좋아하고 사귈 만한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써니가 지켜본 승건과 채훈은 썩 잘 어울렸다.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도 채훈을 바라보는 승건의 시선은 온기를 품고 있었다. 채훈이 턱끝으로 부려먹어도 별말 없이 순순히 따르는 승건의 모습을 보고 써니는 이래서 다들 짚신도 짝이 있다고 하는 거구나 생각했다.
승건은 알파답게 애인에게 집착했고, 같은 알파인 자신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것도 그러려니 했다.
냉정하게 따지자면 채훈은 평범했다. 베타에 남자였고, 집안은 내세울 게 없었다. 본인 역시 특별한 재주나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물론 섬세하게 잘생기긴 했지만 미인은 세상에 많았다. 그나마 싸움꾼 기질을 가지고도 평소에는 차분한 것이 특기라면 특기였다. 개성이 넘치다 못해 진상이 넘쳐나는 이 바닥에서는 꽤나 희귀한 매력이었다.
써니는 채훈이 승건의 애인이기에 흥미를 가졌다. 친해지면 어떻게든 쓸모가 있지 않을까 하는 욕심에 접근했다가 반듯한 그가 꽤나 마음에 들었다.
거기에 큰할머니의 특명까지 더해져 팔자에도 없는 염탐꾼 노릇까지 하게 되었다. 써니의 큰종조모이자 승건의 외할머니는 채훈에게 관심이 많았다. 일부러 명함을 주고 낚시를 했는데도 미끼를 물지 않아서 더욱 그랬다.
큰할머니는 승건을 아꼈다. 복잡하고 불우한 과거사를 가진 승건이 좋아하는 사람과 행복하기를 바랐다. 채훈의 면면이 마음에 들었는지, 만약에 결혼을 한다면 적극적으로 도와줄 의향이 있다는 것을 슬쩍 흘리기까지 했다. 채훈에게 강력한 아군이 생긴 것이다.
써니는 큰할머니의 지지를 받는다면 두 사람이 결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채훈이 오메가라면, 거기에다가 발현까지 한다면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긴다. 오메가를 싫어하는 승건의 취향은 별거 아니었다. 핵심은, 남자라도 오메가는 알파의 아이를 가진다는 것이었다. 후계 문제에 민감한 현 상황에서는 반길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승건과 채훈, 둘 사이에서 아이가 생기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승건의 스타일은 사전에 일말의 가능성조차 제거하는 것이었다.
써니는 승건이 과연 어떤 선택을 할지 궁금했다. 피도 눈물도 없이 채훈과 헤어질 것인지, 아니면 사랑에 빠진 알파가 흔히 그렇듯 채훈에게 집착할 것인지 말이다.
신들의 연회에 황금사과를 내던진 불화의 여신이 된 듯한 기분을 느끼며 써니는 숨죽였다. 그녀는 파국으로 치닫는 이야기를 좋아했다.
“그렇다면 문제가 되겠지.”
승건은 느릿하게 대답했다. 충격으로 굳은 머리가 천천히 굴러갔다.
강채훈이 발현하지 않은 오메가라면?
한 가지 가정을 하자, 지금까지 풀리지 않았던 모든 의문이 한 번에 해결되었다. 채훈과 함께 있으면 향과 맛이 돌아오는 이유 또한 단순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웃겼다.
자신이 발현조차 하지 않은 오메가에게 각인했을 수 있다는 것이, 그리고 무미건조한 삶의 원인이 기억조차 못 하는 순간에 이뤄진 각인 때문일 수도 있다는 것이.
가정이 사실이라면, 운명의 장난이 이럴 수도 있나 싶어 기가 막혔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유 없이 초조해졌다.
“별로 안 놀란 모양이야?”
써니가 호기심에 눈을 반짝이는 것을 보며 승건은 속으로 혀를 찼다. 놀라기보다는 충격을 받았다. 그저 그게 티가 나지 않을 뿐이었다. 또한, 아직 확실하게 판가름 난 것이 아니다. 가정일 뿐이었다.
“충분히 놀랐어.”
“어떻게 할 거야?”
“확실하게 사실을 확인할 때까지, 할머니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마. 왜? 네가 할머니 정보원이라는 거 몰랐을까 봐?”
승건은 혼란스러움을 감추며 써니를 빤히 보았다. 은막의 권력자인 외할머니가 채훈을 그냥 두고 볼 리 없었다. 그리고 채훈에게 끈질기게 접근하는 써니가 정보원으로 적합하다고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써니에게서 입을 다물고 있겠다는 확답을 받은 승건은 그대로 대기실을 나와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반갑게 인사를 하며 다가온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말만 하고는 호텔을 빠져나와 준비된 차에 올라탔다.
오늘 낮에 병원에서 퇴원한 채훈이 승건의 집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채훈은 감금이냐면서 툴툴거리는 문자를 보냈지만 돌아가겠다고는 하지 않았다. 빨리 그를 봐야겠다는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 찼다.
“가능한 한 빨리, 빨리 가죠.”
다급한 마음에 승건은 평소라면 하지 않을 요청까지 했다. 알겠다고 대답한 운전기사가 일요일 저녁이라 차가 막히겠다고 덧붙이는 말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심정민이 안색이 나쁘다고 걱정했지만 승건은 괜찮다고 말하고는 생각에 빠졌다.
채훈이 베타가 아닌 오메가나 알파일지도 모른다는 지극히 타당한 의심을 하지 못한 자신이 바보 같았다. 써니의 말대로, 채훈이 알파나 오메가의 페로몬이 묻는 베타라는 것보다는 발현하지 않은 형질자라는 것이 더 논리적이었다.
검사를 받았는데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한 채훈의 말을 너무 쉽게 믿었다. 어쩌면 채훈으로 인해 맛과 향이 돌아온 세계에 만족해서 판단력이 흐려졌는지도 몰랐다.
형질자라고 판정받아도 평생 발현하지 않는 경우가 아주 드물지만 있었다. 하지만 미발현 오메가라고 하더라도, 알파와 몸을 섞고 계속 페로몬에 노출되다 보면 결국 발현했다. 그건 형질자 기초 교육 중에 배우는 것이었다.
만에 하나라도 채훈이 알파가 아닌 오메가라면 발현 전에 헤어지는 게 맞았다. 상상 각인의 부작용이 어떻게 변질될지 알 수 없었다. 임신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도 문제였다. 그로 인해 파생될 혼란을 생각하면 이대로 끝내는 게 맞았다.
거기까지 단숨에 결론을 이끌어낸 승건은 인상을 썼다. 이성적으로는 자신의 판단이 옳았다. 그런데 그러고 싶지 않았다.
감정적인 동요에 이어 심장이 시큰거리며 아파 오는 바람에 승건은 손으로 가슴께를 지그시 눌렀다.
이제는 알았다. 이 통증이 심부전의 전조 증상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에 몸이 반응하고 있는 것임을 말이다.
자신이 채훈에게 집착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부작용의 치료라는 목적 외에도 그와의 섹스에 탐닉했다. 그와 함께하는 시간을 즐겼다.
박광호와 최진수의 농간에 채훈이 휩쓸렸다는 것을 전해 들었을 때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초췌한 얼굴을 한 녀석이 정신을 잃고 쓰러졌을 때는 속이 상하다 못해 화가 났다. 병실에서 써니의 페로몬을 잔뜩 묻히고 있는 채훈을 마주하자 자신이 독점욕의 화신이라고 불리는 알파라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채훈을 좋아했고, 그래서 손에 쥐려고 했다. 아니, 손에 쥐었다. 하지만 그 사실에 높은 가치를 두지 않았다. 오메가로 발현할 그에게서 파생될 여러 가지 문제들을 생각하면 잘라내는 게 맞았다. 그럴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채훈을 다시 보지 못하는 것이 끔찍하게 싫었다. 단순히 맛과 향이 없는 무미건조한 세계로 돌아가기 싫다는 것이 아니었다.
이래서 감정이라는 게 곤란했다.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지 못하게 만들었다.
냉정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잡는데, 갑자기 머리가 아파 왔다. 작은 파문이 균열을 일으키는 법이었다. 두통은 점점 심해졌다.
“심 실장님. 두통약 주세요.”
승건의 두통은 기억을 잃은 부작용 중에 하나로 오랜 지병이나 마찬가지였다. 승건의 차량에는 비상약처럼 진통제가 늘 구비되어 있었다. 심정민이 두 개의 알약을 내밀며 승건을 걱정했다.
“최근 스케줄이 많이 타이트하긴 했습니다.”
“그러게요.”
물도 없이 알약을 삼킨 승건은 이마를 짚은 채 눈을 감았다. 약의 효과는 미미했다. 두통 때문에 깊은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날카로운 아픔과 함께 잔상이 떠올랐다.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채훈의 모습이었다. 그것은 며칠 전, 자신을 붙잡고 정신을 잃던 채훈의 모습과 오버랩이 되었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그것이 기억을 되찾으려는 전조라는 것을 알았다. 최악이었다. 의식이 멀쩡할 때는 그저 머리만 아프고 끝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렇게 두통을 참는 사이에 어느새 집 앞에 도착했다.
*
*
차에서 내려 밤의 정원을 가로지르던 승건은 지끈거리는 두통에 인상을 찌푸린 채 멈춰 섰다. 이래서야 채훈과 제대로 된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었다.
여름밤에 환하게 불이 켜진 집의 전경을 바라보던 승건은 채훈에게 어디까지 말해야 할지 고민했다.
아직 채훈이 오메가인지 알파인지 몰랐다. 어쩌면 형질자가 아닐 수도 있었다. 아주 희귀한 확률로, 정말로 베타인데도 불구하고 페로몬향이 묻는 체질일 수도 있었다.
승건은 자기합리화에 속으로 혀를 찼다. 자기가 믿고 싶은 것만 제멋대로 믿어버리는 바보 같은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그래도 정확하게 판별될 때까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나았다. 사람 일이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법이었다.
마지막까지도 미련을 버리지 못했지만, 웃기게도 그것으로 두통이 가라앉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러다가 아주 뜬금없이 어떤 의문이 떠올랐다.
만약에 채훈이 오메가로 발현한다면, 그의 페로몬향이 역하게 느껴질까.
그저 가정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목이 바짝 마르는 기분이었다.
발현 이후의 기억은 모두 잃었다. 그래서 정상적인 오메가의 페로몬향에 대한 기억 또한 거의 없었다. 어쩌면 채훈에게서 나는 체향이 오메가의 그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했다.
“하하.”
바삭거리는 햇살의 향기를 떠올리던 승건은 떨치지 못한 미련에 헛웃음을 지었다.
머리는 냉정해졌지만, 몸은 욕망에 달아올랐다. 당장에 채훈을 안고 싶었다. 만약에 그가 오메가라면 발현 유무를 떠나서 섹스를 할 수 있는 것은 오늘이 마지막일 터였다.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멈췄던 발이 저도 모르게 움직였다. 채훈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궁금했다. 몸을 움직이기 좋아하는 녀석은 병원에 입원한 게 지루하다며 몇 번이고 메시지를 보냈다. 어쩌면 다친 몸으로 체력 단련실에서 달리고 있을지도 몰랐다.
초조함과 두근거림이 발걸음을 재촉했다. 오늘은 채훈에게 지금 출발했다는 메시지를 보내지 못했다. 예고 없이 나타나면 채훈은 웃으면서 왔냐고 반겨줄 터였다. 승건은 몇 개의 락을 풀고는 현관문을 열었다.
한 걸음 안으로 들어서기도 전에 승건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집 안은 농염한 향기로 가득 차 있었다.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온몸으로 알 수 있었다. 그건 히트에 접어든 오메가의 페로몬이었다.
화사한 햇살과 따뜻한 바람 향기는 승건도 익히 알고 있는 것이었다.
소름이 돋았다. 동시에 모든 감각이 향기의 주인을, 자신의 오메가를 찾아 날뛰었다.
“강채훈!”
승건은 뛰어들어 가고 싶은 것을 가까스로 참으며 채훈의 이름을 불렀다. 2층으로 이어진 계단 쪽에서 채훈이 비칠비칠 걸어 나왔다.
왔냐는 소리는 없었다. 그저 채훈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향이 진해졌다. 열이 오른 얼굴을 하고 있는 채훈은 지금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써니의 불길한 예언은 현실이 되었다. 채훈은 오메가가 맞았다.
승건은 주먹을 꽉 쥐며 이성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했다. 자신의 심장 소리가 귀에서 울렸다.
그러면서 채훈에게 집중된 승건의 감각이 이상한 것을 몇 개 알아냈다. 채훈의 붉은 뺨은 열 때문이겠지만, 충혈되다 못해 부은 눈은 울었다는 의미였다.
무슨 일로 울었는지 의아한데, 힘없이 걸어오던 채훈이 벽을 짚으며 쪼그려 앉아 버렸다.
“강채훈, 정신 차려.”
깜짝 놀란 승건은 신발을 벗고 뛰듯이 채훈에게 다가가 팔을 붙잡았다. 손으로 전해지는 열이 대단했다.
오메가의 발현이었다. 마치 히트가 온 오메가처럼 사방에 페로몬을 뿜어내고 있었다.
발현을 한 오메가에게는 억제제가 필요했다. 아니면 알파와 섹스하는 것이 또 다른 방법이었다.
“괜찮아. 그냥 갑자기 열이 나서…….”
제 상태를 모르고 채훈이 괜찮다는 소리를 했다.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페로몬에 승건은 아찔하면서도 화가 났다.
“괜찮기는 뭐가 괜찮아. 지금 네 상태를 몰라?”
“아니, 그것보다 내가 물어볼 게 있는데.”
채훈이 승건의 손을 꽉 잡아 왔다. 그의 손짓도 바라보는 눈빛도 절박했다. 그리고 간단한 접촉에 승건은 채훈의 열이 자신에게 옮겨붙고 있음을 느꼈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채훈이 속삭이듯 조용히 말을 이었다.
“계약할 때, 감정이 엮이지 말아야 한다고 했었는데. 거기에 대한 페널티라면 더 이상 안 만나는 거 맞지?”
“……?!”
승건은 채훈이 무슨 소리를 하려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널 좋아한다고 하면. 이딴 거 다 끝나는 거냐고.”
으르렁거리는 채훈의 숨결에서는 끔찍하게 달콤한 향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