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급류】
날카로운 시선이 와 닿았다. 사람을 재단하고 평가하는 눈빛은 저급하면서도 그 어느 것보다 폭력적이었다.
승건은 자신에게 머무는 시선을 예민하게 느꼈지만 개의치 않았다. 익숙한 것이었다. 그리고 딱히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어렸을 때는 부러 무시했지만 나이가 들어서는 그런 것에 휘둘리지 않았다. 다만 지금의 상황이 조금 짜증 날 뿐이었다.
대한민국 최고의 공연이 열리는 예술회관에서 국립 발레단의 여름 정기 공연 중 하나인 ‘백조의 호수’가 개막되었다. 공연 시작 전에 VIP를 위해 마련된 라운지에는 예술에 관심이 있는 정재계 인물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승건의 옆에는 외할아버지인 정규완이 앉아 있었다. 뇌졸중으로 쓰러진 정규완은 은둔 중이었지만, 비공식적인 외출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페도라를 눌러쓰고 지팡이를 짚고 있는 그가 정규완이라는 것을 알아보는 사람은 많았다.
오래전부터 정규완과 친분이 있는 UK 그룹의 회장은 거침없이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오랜만에 본다. 무탈하냐. 자연스러운 인사가 끝나자 각자 데리고 온 손자들을 소개시켜 주는 수순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박 회장님.”
“그래. 오랜만이군. 여전히 신수가 훤해. 여긴 내 손자인 박성진이고. 처음 만나는 건가? 이 나이가 되니까 요새는 기억력이 가물가물해서 말이야.”
승건은 UK 그룹의 회장을 공적으로, 사적으로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다. 키가 작고 통통한 할아버지는 정규완 못지않게 거대한 재벌 그룹의 회장이었다. 깍듯하게 인사를 하자 그가 능청스럽게 옆에 선 손자를 인사시켰다.
“최승건입니다.”
“박성진입니다.”
서로의 이름을 말하며 가볍게 목례한 두 사람은 그것으로 더 이상 나설 일은 없었다. 오랜만에 만난 두 회장님의 덕담과 수다를 옆에서 지켜보는 게 전부였다.
승건은 상대의 눈에서 무심함을 읽었다. 서로 원치 않는 자리에 나온 것이 분명했다. 박성진은 오메가가 아닌 베타였다. 박 회장이 그를 소개시킨 것은 아마도 자신의 애인이라고 알려진 채훈의 존재 때문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발레에 관심이 없는 승건이 예술회관을 찾은 것은 정규완이 급히 불렀기 때문이었다. 외할머니는 승건의 동생과 함께 외출을 한 상태였다. 그리고 정규완은 오래전부터 후원해 온 학생이 오늘 국립 발레단에서 처음 무대에 오른다며 승건과의 동행을 부탁했다.
그때부터 승건은 이런 순간이 올 것을 예상했었다. 미리 알고 있었다고 해도 기분이 별로인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눈에 빤히 보이는 외할아버지의 수작은 물론이고, 무엇보다 갑작스러운 호출로 채훈과의 약속을 취소한 것이 제일 불쾌했다.
승건은 채훈의 존재가 정규완을 움직였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정규완은 채훈이 아니라 눈앞의 남자와 가깝게 지내는 것이 이득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정규완은 은둔 중에도 이런 식으로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것도 설명하거나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 예고도 없이 눈앞에 들이밀었다.
그러나 승건은 자신의 가치 역시 잘 알고 있었다. 태화 그룹을 집어삼킬 수 있는 젊은 후계자라는 타이틀에 자신의 몸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아무리 어린 동생이 뒤를 이을 거라고 말을 해도 그걸 믿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승건은 권력의 욕망에 휩쓸릴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부모님이 이혼을 하고 제각각 살길을 찾아 떠나버리자, 승건은 그저 이름뿐인 재벌 3세였다. 외할머니가 거두어 키우지 않았더라면 상황이 더 나빠졌을지도 몰랐다.
자신의 존재가 조금씩 부각된 것은 외숙부인 정세혁이 결혼을 하고 10년 넘게 아이를 가지지 못하면서부터였다. 10년 사이에 한 번 이혼을 하고, 이혼한 부인이 아이를 두 명이나 낳는 동안에도 정세혁은 후사가 없었다.
알파는 왕성한 정력을 상징했다.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재벌 그룹의 후계자이자 알파인 그에게 아이가 없다는 사실이 어떤 곳에서는 비웃음거리가 되었다. 그리고 그즈음 승건이 우성 알파로 완전 발현을 하면서 외숙부의 견제 아닌 견제를 받게 되었다.
외숙부는 승건을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특히 승건이 외할머니의 비호를 받으며 본가에서 자라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 승건이 그의 자리를 노리고 있다며 이를 갈았다.
승건이 고등학교 2학년 때 외할머니가 암으로 고생하신 적이 있었다. 그때 외숙부는 할머니의 심신 안정을 이유로 외할아버지를 부추겨서 승건을 본가에서 내보냈다. 그리고 승건의 친가 쪽 친척들을 충동질한 것도 외숙부였다.
당시 승건의 친아버지는 재혼을 해서 아들을 하나 두고 있었다. 그런데 불운하게도 교통사고로 부인과 아들은 죽고 본인은 식물인간이 되어 사망 선고를 앞둔 상태였다.
그는 대한민국에서 한 손에 드는 제약 회사의 오너였다. 태화 그룹보다는 못하지만 엄청난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죽으면 모든 재산은 승건이 물려받을 수순이었다. 그 유산을 친척들이 욕심냈고, 외숙부가 손을 더하면서 납치 미수 사건이 일어났다.
사고로 기억을 잃고 후유증까지 생긴 승건이 미국으로 간 것은 겉으로는 치료 목적이었다. 하지만 반쯤은 쫓겨난 것이고, 또 반쯤은 안전을 위한 도피였다.
승건이 그 사실을 안 것은 외숙부가 심근경색으로 죽고도 4년이나 지난 다음이었다. 승건이 복수를 하고 싶어도 남은 사람이 없었다. 외숙부는 이미 죽고 없었고, 친가 쪽 친척들 역시 외할아버지의 손에 의해 가진 걸 대부분 잃었다.
사실 승건은 외숙부에 대한 감정이 희미했다. 고등학교 때의 기억이 모두 사라졌으니 본가에서 나왔을 때 그에 대해 어떤 마음을 가졌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전의 기억을 뒤져보면 그저 불쾌한 눈빛으로 자신을 노려보던 것만 떠올랐기 때문에, 그의 죽음에 애석함이나 통쾌함을 느끼는 대신 그저 과거의 일로만 받아들여졌다.
이제 승건은 친아버지의 유산은 물론이고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재벌 그룹을 손에 쥐었다. 그러나 그건 승건에게 딱히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시기와 질투, 혹은 호기심이 담긴 시선을 아무렇지 않게 여길 수는 있었다. 그러나 손에 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파워게임을 벌이는 것은 성향에 맞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정규완이 오늘 벌인 일 역시 달갑지 않았다.
승건은 두 거물의 대화에 집중하면서도 채훈을 떠올렸다. 점심을 같이 먹을 때 고달프게 산다고 했던 이상한 위로가 귓가에서 울리는 듯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고 생각하라는 것도 함께였다.
귀찮고 짜증 나지만 결국 지나가면 그만이라는 세상의 진리에 동감하고 있던 승건은 어느 순간에 세상이 무감해졌음을 알아차렸다. 공기 중을 떠도는 냄새가 사라졌다. 알파와 오메가가 갈무리하지 못한 역한 페로몬 향기만이 맡아졌다.
승건은 속으로 혀를 찼다. 채훈의 마법은 아직도 3일이 한계였다. 당장에 채훈을 만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있는데 때마침 공연이 곧 시작한다는 알림이 울렸다.
라운지에 모인 사람들이 천천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박 회장 역시 인사를 하고는 먼저 움직였다.
정규완의 거동이 아직 조금은 불편했기 때문에 승건은 마지막까지 기다렸다. 사람이 몇 남지 않고 나서야 정규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떠냐?”
“할아버지답지 않으십니다.”
승건은 정규완의 질문에 적당히 대꾸했다. 정규완이 아무리 자신의 힘을 과시하길 좋아한다 하더라도 의미 없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승건이 싫어할 걸 알면서도 이런 자리를 마련했다는 것은, 다른 꿍꿍이가 있다는 소리였다.
“박 회장이 워낙에 졸라서 말이다. 정식으로 맞선 보자는 거 눈도장만 찍게 했다. 친구가 욕심을 부렸군. 저쪽도 영 마음이 없어 보이는데 말이다. 쯧. 그래도 박 회장이랑 잘 지내는 건 좋은 일이지.”
“예.”
“고집은. 세상이 내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 않느냐.”
“압니다.”
“욕심이 너무 없는 것도 좋은 일이 아니다.”
승건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정규완이 다시 한번 혀를 찼다. 정규완은 승건의 능력을 높이 샀다. 승건이 단순한 연결고리가 아니라 후계자 자리를 꿰차길 바랐다. 승건도 그걸 모르지 않았다. 또한 그것이 정규완과의 권력 관계를 규정하는 핵심이라는 것 또한 알았다.
자신이 태화 그룹을 탐내지 않았기 때문에 적당한 줄다리기가 가능했지, 아니었다면 정규완이 하라는 대로 하고 살았을 것이다. 자신은, 굳이 따지자면 욕심이 없는 게 아니라 아주 많았다. 책임과 의무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사는 것은 엄청난 욕심쟁이만이 바랄 수 있는 것이었다.
친하지 않은 조손의 대화는 거기에서 끝났다. 승건은 정규완과 함께 움직여서 지정된 좌석에 앉았다. 곧 사위가 어두워지면서 무대의 막이 올랐다.
승건은 인간의 육체로 빚어내는 극한의 우아함을 감상할 소양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발레 감상보다는 채훈과 함께 있지 못한다는 게 불만스러웠다.
발레를 좋아하는지 물어봐야겠군.
왕자의 성인식 연회 장면을 바라보면서도 승건은 계속 채훈을 떠올렸다. 나이가 들어서 미술관은 처음이라는 채훈은 외향적인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보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는 몸을 움직이는 것을 좋아했다.
둥근 공이랑 친하지 않은 것은 여전해서 스쿼시는 헛손질만 했다. 공들여 지은 스쿼시 코트는 채훈에게 찬밥 신세였다. 대신에 지하 체력 단련실을 엄청 애용했다. 대련에도 열을 올렸다. 힘도 체격도 상대적으로 밀리지만 반사 신경과 기술이 뛰어나서 승건도 방심할 수가 없었다.
전적은 승건이 조금 앞섰다. 채훈은 승률이 반반은 되어야 한다며 호승심을 숨기지 않았다. 덕분에 요즘은 만날 때마다 체력 단련실에서 서로를 넘어뜨렸다.
찬바람이 불 것 같은 얼굴을 한 녀석이 대련을 할 때면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눈을 빛냈다. 생기가 돌다 못해 사나운 미소를 짓고 있는 얼굴은 섹스를 할 때와 비슷했다. 평범하게 섹스를 좋아한다는 채훈은 침대 위에서는 꽤나 적극적이었다.
빨갛게 달아오른 채훈의 얼굴을 자연스럽게 떠올리다가 가볍게 흥분해 버린 승건은 살짝 인상을 썼다. 흥분한 것까지는 괜찮은데 심장이 크게 뛰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승건은 가슴 부근을 살짝 눌렀다. 이상을 느꼈던 심장은 다시 제 속도로 뛰고 있었다. 고개를 한 번 갸웃거린 승건은 흥분한 탓이라고 여기며 그냥 넘겼다.
그러나 승건은 인터미션을 포함해서 145분의 공연 시간 동안 몇 번이고 자신의 가슴을 꾹꾹 눌러봐야 했다.
* * *
하루 종일 쏟아지던 빗줄기는 해가 질 무렵에는 가느다래지더니 어느 순간부터 다시 폭우로 바뀌었다. 늦은 밤에도 하늘에서는 여전히 비를 흩뿌렸다.
승건의 집 거실 소파에 앉아 있던 채훈은 멍하니 비가 떨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수요일 오후는 승건과 만나는 날이었다. 원래는 같이 저녁을 먹기로 했었는데 승건에게 갑자기 일이 생기는 바람에 약속이 취소되고 말았다. 채훈은 혼자서 대충 저녁을 때운 다음에 일찍 승건의 집에 도착해서 그를 기다렸다.
습도와 온도가 완벽하게 조절이 되는 집에서 비가 내리는 정원을 바라보는 느낌은 각별했다. 특히 정원 곳곳에 작은 조명을 켜두어서 비와 어우러지는 야경이 운치가 있었다.
최근에 와서 채훈은 자신이 습기에 약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비가 와서 그런지 왠지 모르게 축축 처졌다. 어쩌면 피곤해서인지도 몰랐다. 최근에 신경 써야 할 것들이 확 늘어났다.
며칠 사이에 일어난 일들을 떠올리던 채훈은 한숨을 삼키며 눈가를 눌렀다. 이사장의 비리가 연이어 터지면서 병원 자체 감사가 실시되고 있었다.
뉴스 보도는 더 이상 없었고 업무도 평소와 다름없었지만, 경찰이 이사장의 자택과 사무실을 압수 수색했고, 거기에다 국세청이 개입될 수도 있다는 소문이 돌면서 분위기는 살벌해졌다.
하루하루 지날수록 예민해지고 신경질이 늘어가는 상사들 때문에 채훈 역시 빡치는 일이 한둘이 아니었다.
가족의 일도 마찬가지였다. 지난 주말에 형, 강수찬이 베트남으로 떠나버렸다. 베트남에서 성공한 선배에게서 좋은 제안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또 사기가 아니냐며 걱정했지만 강수찬은 재빨랐다. 베트남에 갈 거라고 말한 시점에 이미 가게를 팔고 은행 대출도 정리한 다음이었다. 더 나이 먹기 전에 새로운 시도를 하고 싶다고 하고는 그대로 짐을 싸고는 베트남으로 향했다.
논의고 뭐고 할 시간도 없었다. 채훈은 거의 통보를 받는 수준이라 배웅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형이랑 인연을 끊겠다고 한 지 겨우 보름이 지난 시점이었다. 너무 공교로운 타이밍이었지만 채훈은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내가 뭘 하든 상관하지 않겠다고 한 게 너 아니냐면서 형이 설명 자체를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첫째가 또 베트남 병이 도졌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형이 사라진 뒷수습은 채훈과 어머니가 해야 했다. 그제야 채훈은 조명 가게가 겨우 적자를 면할 수준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형에게서 생활비도 제대로 못 받았다는 어머니는 은행 대출 이자가 나가지 않는 것만으로도 좋아했다. 보험설계사인 어머니는 아직 현역이었고 아버지의 연금도 받고 있었다.
형이 은행 대출을 갚고 난 후의 목돈을 대부분 두고 갔기 때문에 당장에 생활의 어려움은 없었다. 그저 베트남으로 간 강수찬이 사고만 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어휴.”
채훈은 짧게 숨을 들이쉬었다. 집안일도 직장 일도 어느 것 하나 쉬운 게 없었다. 그게 인생이라고 해도 요즘에는 너무 헛헛한 기분이 들었다. 평범한 나날인데 이럴 때면 혼자만 망망대해에 덩그러니 남겨진 기분이었다.
“상담이라도 받아야 하나.”
멘탈이 강하다고 자부하고 있지만, 그것만 너무 믿어서는 안 되는 법이었다.
그래도 지금 당장은 지하 체력 단련실에서 달리기나 하자 싶어 휴대폰을 들고 일어나려는데, 메시지 앱에 확인하지 않은 메시지가 있다는 숫자 1이 붙어 있었다. 혹시나 승건인가 싶어서 확인해 봤더니 흔한 광고 메시지였다.
기대가 식어버리자 또다시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러다가 메시지 목록 상단에 있는 승건의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창을 열었다.
그대로 자리에 앉은 채훈은 오늘 퇴근 시간이 되기 전에 급한 약속이 생겼다는 메시지부터 역순으로 확인했다.
[휴대폰은 다 고쳤어?]
승건에게서 먼저 온 메시지였다. 이틀 전의 일이었다. 채훈의 휴대폰이 걸려오는 전화를 인식하지 못했다. 전화를 했는데도 계속 부재중이라는 승건의 메시지를 보고서야 휴대폰이 고장 났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업무상 연락을 휴대폰으로 할 때가 종종 있어서, 다음날 바로 오전 반차를 내고 휴대폰을 고쳤다. 그리고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들어가기 전에 잠시 커피를 마시고 있을 때 승건에게서 메시지가 날아왔다.
[접속 불량이라서 금방 고쳤어.]
[점심은?]
[먹었어. 너는?]
[먹으러 가는 중이야.]
[조금 늦었네. 맛점해.]
그날의 메시지는 고등학교 시절에나 썼던 줄임말로 끝났다. 스크롤을 위로 조금 더 올리자 당근과 오이 스틱 사진이 보였다. 채훈은 승건을 기다리면서 먹은 간식 사진을 가끔씩 찍어 보냈다.
승건을 만나면서 밤늦게 계속 초콜릿이나 케이크 등을 먹는 게 버릇이 되고 말았다. 모두 다 맛있고 입은 즐거운데, 아무래도 설탕은 적당히 줄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더 이상 안 먹겠다고 했더니, 승건이 그럼 뭘 원하느냐고 물었다. 채소 스틱 정도는 괜찮다고 하자 냉장고에 당근과 오이 스틱이 준비되어 있었다.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사진을 찍어 보냈다. 그러나 초점이 흐린 사진은 자신이 봐도 못 찍었다.
그다음은 그날 있을 대련에 관한 이야기였다. 승건이 이사한 이후로 지하 체력 단련실에서 일대일 대련은 계속되고 있었다. 서로 적당히 견제만 하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자존심을 걸고 싸웠기 때문에 그만둘 수가 없었다.
그래도 채훈은 승건이 많이 봐주고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채훈이 운동을 했다고 하더라도 직장인인 만큼 몸이 무뎌지지 않을 정도로만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승건 역시 비슷했다.
문제는 체격 차이였다. 키와 팔다리 길이, 그리고 몸무게는 승건이 앞서 있었다. 게다가 우성 알파의 선천적인 체질은 운동선수의 그것과 다름없었다. 특히 힘에서 많이 차이가 났다. 순수한 힘으로는 채훈은 절대 승건을 이길 수가 없었다.
채훈의 필승 전략은 승건의 힘을 역이용한 되치기였고, 그래서 승률은 반반 정도였다. 매번 끝날 때마다 다음에 두고 보자고 악당처럼 말해야 했다.
최근 한 달 동안에 오간 메시지들을 쭈욱 확인한 채훈은 휴대폰을 쥔 채 눈을 감았다.
승건과의 관계는 계속 변하고 있었다. 일방적으로 만날 날짜와 시간을 보내오던 몇 달 전과 비교하자면 놀라울 정도였다. 특히 계약 연애를 하고부터는 정말 많은 게 달라졌다. 진짜 연애를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그래도 부질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대하고 만다.
이대로라면 뭔가 달라지지 않을까.
쟤가 날 좋아한다는 신호가 아닐까.
그저 서로에게 익숙해지고 있는 거일 뿐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했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이 반복했다. 짝사랑은 한 번밖에 안 해봤지만, 이 정도면 중증이었다.
사랑에 빠지면 상대방의 작은 행동 하나에 신경을 곤두세우게 된다. 그리고 그게 짝사랑이라면 거기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졌다.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그의 곁에 있고 싶었다.
가능하면 계속, 아니면 오래, 그것도 아니라면 계약한 기간만큼이라도.
한껏 부풀어 오른 소망은 한 단계씩 작아져 최소한의 덩어리가 되었다. 고백할 생각은 원래 없었는데, 관계가 파탄 나지 않으려면 고백은커녕 제대로 마음을 숨겨야 했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아도 어느 순간에 욕심이 커진다. 먼저 보내오는 메시지 하나에, 다정한 배려에, 혹시나 하고 기대가 피어올랐다. 오늘 저녁 약속이 취소되었으니까 금요일이나 토요일에 같이 외식을 하자고 했으면 좋겠다고 바라고 있었다.
최고와 최악의 순간을 번갈아 상상하면서 마음이 요동치는 것이 짝사랑의 묘미이자 특권이자 삽질이었다. 그게 싫으면서도 좋은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진짜 쓸데없어.”
몹쓸 짝사랑이라고 혼자 웃고 있는데 다시 액정이 까맣게 변한 휴대폰이 울렸다. 이번에는 써니였다.
[내 생일이 7월 7일이에요. LUCKY SEVEN×2 생일 파티에 초대할게요. 초대장은 우편으로 보냈어요. 승건 오빠랑 같이 와요. 술이 무제한이에요. :D♥]
써니의 시그니처와 다름없는 스마일 이모티콘과 검은 하트에 채훈은 피식 웃고 말았다.
채훈이 써니랑 알게 된 것은 2개월여밖에 되지 않았다. 직접 얼굴을 대면한 것은 그녀가 승건의 외할머니, 이수진의 명함을 전해줄 때가 마지막이었다. 하지만 그 이후에 계속 써니의 일방적인 어프로치를 받으며 기묘한 친분을 쌓아가고 있었다.
그녀가 보내는 메시지의 내용은 대부분 별것 아닌 시시한 잡담이었다. 승건이 열이 잔뜩 받았으니 오늘 만나는 거라면 조심하라던 것은 제법 유용했다.
드레스를 입은 사진을 몇 개 보내고는 어느 게 예쁘냐고 물은 적도 있었다. 답장을 주지 않으면 사무실로 꽃바구니를 보낼 거라는 협박을 승건에게 고자질했더니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원망이 돌아왔다.
얼마 전에는 여윳돈이 있으면 모 제약 회사의 주식을 사라고 언질도 받았다. 주식은 사지 않았지만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써니가 추천한 모 제약 회사의 주식이 몇 번이나 상한가로 치솟기는 했다. 써니는 왜 소스를 줘도 받아먹지 못하느냐고 혀를 찼다.
채훈은 써니에 대해 꽤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스물일곱 살이고, 미국에서 공부를 하다가 작년에 돌아와서는 할아버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위스키 수입 사업을 시작했다고 했다. 자선 와인 경매를 연 회장님이 써니의 할아버지인데, 써니가 집안에 유일한 손녀라서 예쁨을 받고 있다고 들었다.
채훈은 써니와 특이한 관계가 되어간다고 느끼고 있었다. 안면만 익히고 인사만 하는 사이라고는 하기는 애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친구라고 하기에도 무리가 있었다.
왠지 써니가 승건을 놀리고 싶어 한다는 느낌이 들기는 했다. 두 사람이 친남매 같아 보인다는 감상을 전하자, 승건은 아주 불쾌해했고 써니는 이모티콘으로 검은 하트만 보내왔다.
지금껏 채훈이 경험하지 못한 방법으로 써니와 친해지고 있다는 사실에 신기해하며 답장을 보냈다.
[미리 생일을 축하드리겠습니다. 혹시 받으시고 싶은 선물 있으시면 리퀘스트 부탁드립니다.]
채훈은 써니에게서 받은 지갑의 포장을 뜯어 내용물만 확인하고는 그대로 오피스텔 TV서랍장 안에 넣어두었다. 지갑의 브랜드는 채훈이 모르는 생소한 것이었지만 가죽의 질은 매우 좋았다.
똑같은 지갑을 선물로 주는 것은 성의 문제였다. 그렇다고 취향을 모르니 마음대로 정하는 것도 애매했다. 센스 없는 남자가 되더라도 리퀘스트를 받는 게 최선이었다.
[선물은 필요 없고, 생일 파티에 와요.]
[초대는 고맙지만, 생일 파티에는 참석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철벽이네. 그럼 선물은 채훈 씨가 직접 골라주세요. 마음을 담아.]
[알겠습니다.]
써니는 두 번을 권하면 끝이었다. 거절하면 적당한 선에서 물러났다. 그래서 그녀의 연락이 부담스럽지 않았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오늘 승건 오빠 맞선을 봤대요. 알아요?]
순간 채훈의 시선은 맞선이라는 단어에 고정되었다.
맞선이라면 결혼을 전제로 상대를 만나는 것이었다. 하지만 승건은 결혼을 하지 않을 거라고 몇 번이나 말했었다. 이유도 명확했다. 한 달 전이랑 상황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승건의 생각이 달라졌을 것 같지는 않았다. 거기다 맞선을 한다고 다 결혼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연애 계약서에서는 결혼에 대한 조항이 없었다. 서로 계약을 하는 기간 동안에 다른 사람을 만나지 않는다는 것이 전제일 뿐이었다.
짧은 순간에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가슴도 협심증이 온 것처럼 우릿하게 아팠다.
[큰회장님 친구분의 자제래요. 오메가는 아니고 베타에 남자고. 미국에 유학 갔다가 여름에 귀국했고. 큰회장님이 오빠랑 채훈 씨랑 사귄다는 거 알고 자리를 마련했다나 봐요.]
[큰회장님은 승건 오빠 할아버지요. 외할아버지.]
[맞선이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다. 그냥 불려간 거니까. 어른들이 잘 그러거든요. 밥 한번 먹자 해서 나갔는데, 건너편에 못생긴 가물치가 앉아 있고 그래요.]
[큰회장님이랑 그쪽 집안 어른이 있는 자리라서 승건 오빠가 꾹 버텼나 봐요.]
[우리 할머니 말이 분위기 진짜 살벌했대요. 원래 승건 오빠가 안 웃기는 하는데, 오늘은 완전 찬바람이 불었다고, 재미있다고 얼마나 웃으셨는지 몰라요.]
[그 친구분이랑 큰회장님이랑 고등학교 동기래요.]
[승건 오빠에게 오늘 뭐 했는지 물어봐요. 나는 이런 거 숨기면 싫더라고요. 오빠가 거짓말하면 화끈하게 싸워요. 나한테 들었다고 하고.]
채훈이 답장을 하지 않아도 다량의 정보를 쏟아내던 써니가 싸움을 부추겼다. 그러나 그건 적절한 조언이 아니었다.
복잡한 마음으로 써니의 메시지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채훈은 한숨을 삼켰다. 서로 사귀는 사이가 아니니까 물어볼 이유도, 싸울 이유도 없었다.
승건의 입으로 베타 남자를 몇 명 소개받았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도 가만히 있었다. 이번에는 승건의 외할아버지까지 나섰다고 하니까 거의 맞선이나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역시나 자신이 나설 수는 없었다.
결혼은 다르다. 만약에 승건이 피치 못할 이유로 결혼이라도 한다면 어떻게 될지 상상하는 게 아프다.
[답장이 없는 걸 보니 충격을 받았나 보네요. 아무튼 맞선 본 거 숨기는 건 아니라고 봐요. 오빠한테 꼭 물어봐요.]
그것을 끝으로 써니의 메시지 창은 조용해졌다.
“하아.”
채훈은 긴 한숨을 내쉬고는 욱신거리는 가슴을 툭툭 쳤다. 마음을 죽이고 죽여도 아픈 건 아픈 거였다. 아니, 짝사랑하고 있으니까 당연한 것이다. 좋아하고 있는 상대가 맞선을 본다는데 화나고 짜증 나고 시무룩해지지 않는 건 더 이상한 일이었다.
초조하고 애절한 짝사랑 따위는 하고 싶지 않은데 자꾸 그렇게 되고 만다.
“짝사랑 싫다.”
지금까지 몇 번이고 반복했던 말을 중얼거리고 있는데, 다시 휴대폰이 울렸다. 이번에는 승건이었다.
[이제 출발했어. 30분 내에 도착할 거야.]
승건의 행적을 알려주는 메시지였다. 생각해 보면 승건과의 관계가 처음과는 많이 달라졌다. 계약 내용도 바뀌었다. 그에게 오늘 무슨 일로 저녁 약속을 취소했냐고 물어보는 것은 어색하지 않았다. 하지만 승건이 진실을 말해도, 혹은 숨겨도 기분이 별로일 것 같았다.
“망해라.”
채훈은 부루퉁하게 중얼거렸다. 짝사랑 때문에 세상은 안 망한다. 어제와 다름없이 잘 굴러간다. 그런데 지금 심정으로는 세상아 그냥 망해버려라 싶었다.
채훈은 질투와 체념과 또 기대가 마구 뒤섞이는 마음을 붙잡으며 얼굴을 문질렀다. 표정 관리를 하려면 멘탈부터 다잡아야 했다.
승건에게 알겠다고 짧게 답장을 보낸 채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잡생각을 사라지게 하려면 움직이는 게 최고였다. 우선은 달리기였다.
*
*
무엇인가가 잠을 깨우고 있었다.
채훈은 비몽사몽간에 턱과 귀를 간질이는 감각을 피하려고 고개를 돌렸다.
열심히 러닝머신을 달리는 도중에 승건에게서 교통사고 때문에 차가 막힌다는 메시지가 도착했다. 천천히 와도 된다고, 비가 오니까 조심하라고 답장을 보냈다. 그래도 조금 있다가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가 허물어지자 힘이 빠지고 말았다.
괜히 기운이 빠져버려서 달리는 것을 그만두고 샤워를 하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휴대폰을 손에 쥐고 뒹굴거리고 있다가 잠시 눈을 감는다는 것이 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
거기까지 기억해 낸 채훈은 자신을 내리누르는 묵직한 무게와 목덜미에 닿는 숨결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물냄새, 젖은 숲의 냄새, 꽃냄새. 체취만 맡아도 알 수 있었다. 남자 향수치고는 달달하다고 가끔씩 생각했었다. 굳이 따지자면 겨울꽃의 향기는 매혹적이었다.
승건이 온 거구나 안심하고 있던 채훈은 커다란 손이 바지 안으로 쑥 파고들어 성기를 잡아채는 바람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뭐야.”
난데없는 봉변에 채훈은 반사적으로 승건을 밀어내려고 했다. 하지만 승건은 밀려 나가는 대신에 성기를 잡은 손에 힘을 더 꽉 줄 뿐이었다. 결국 채훈은 잠을 떨쳐내며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에 바로 코앞에서 웃고 있는 승건의 얼굴이 보였다. 환하게 침실을 밝힌 불빛을 등지고 있는 녀석의 얼굴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기다리지 않고 자?”
“그냥 누웠더니 잠이 와서, 흐읏. 너야말로, 너야말로 이럴 거야?”
성기를 잡고 쓸어 올리는 노골적인 손짓이 강해져서 채훈은 말을 더듬어야 했다. 자다가 깨서 그런지 얼마 안 되는 자극에도 열이 모이다 못해 완전히 발기해 버리고 말았다. 급작스러운 쾌감에 머리도 몸도 따라가지 못했다. 채훈은 버둥거리며 승건의 어깨를 밀어냈지만 이번에도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진짜 놔?”
“정신은 좀 차리게. 우으읏.”
“괜찮아.”
채훈은 하나도 괜찮지 않았지만 뺨에 입맞춤을 해 오는 승건이 괜찮다고 해버리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얼굴에 열이 오르고 호흡이 흐트러졌다. 그리고 그것을 승건이 지켜보았다. 채훈은 승건의 취향이 한결같다고 생각했다.
승건은 재킷만 벗은 셔츠 차림이었다. 돌아오자마자 옷도 갈아입지 않고 덤벼든 것 같았다. 도전적으로 마주 봐주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다.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쾌락에 허둥거리며 헐떡이는 모습은 아무래도 수치스러웠다. 결국 절정에 이르렀을 때는 눈을 감고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절정의 여운에 숨을 고르고 있을 때 승건의 입술이 다시 뺨에 닿았다가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그의 손은 좀 더 아래쪽으로 이동했다.
손가락은 정액으로 젖어 있었지만 첫 삽입은 언제나 쉽지 않았다. 인상을 찌푸리는데 빤히 내려다보는 시선이 느껴져서 채훈은 승건을 흘겨봐야 했다.
“넌 정말 고약한 취향이야.”
“응. 그래.”
간단히 긍정한 승건이 이번에는 입술을 맞대 왔다. 채훈은 기꺼이 키스에 응했다. 승건의 목에 팔을 감으며 혀를 빨고 집중했다. 그 사이에 아래를 희롱하는 손가락이 두 개로 늘어났다. 짜릿함과 열에 몸이 달아올랐다.
총량 100을 언급한 이후에 섹스의 패턴이 약간 달라졌다. 승건은 전희에 공을 들였다. 이전에도 안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최근 들어서는 사람의 혼을 빼놓을 정도로 아래를 흐물흐물하게 만들었다. 자신이 참지 못하고 어서 해달라고 조르는 것을 꽤나 즐기는 눈치였다. 의견을 들어주면서도 그걸 또 자신의 취향대로 변형하는 것이 승건다웠다.
물론 그렇다고 채훈이 가만히 당하고 있는 것만은 아니었다. 쾌락에 떨면서도 팔을 뻗어 승건의 셔츠 아래로 손을 집어넣었다.
채훈은 승건의 맨몸을 만지는 것을 좋아했다. 자신의 손길에 승건의 근육이 반응하는 것이 정신적인 만족감을 주었다. 채훈은 승건을 만지면서 셔츠 단추를 풀었다가 신음했다가를 반복했다.
달콤한 키스에 헐떡이는 숨결이 번졌다. 안을 헤집는 아래에서는 질척이는 소리가 울렸다. 살갗에 스치는 옷깃과 손짓에 몸이 떨렸다.
채훈은 적극적으로 덤벼들었다. 그러나 주는 것보다 받는 게 더 많은 쾌락의 총량에 결국 흐느끼고 말았다.
“이제, 해…….”
“조금만 더.”
“이제 못 참겠어. 흐으. 읏.”
채훈은 거의 울먹이다시피 애원했다. 마치 삽입 섹스를 하는 것처럼 손가락이 안을 쑤셔대는 바람에 내벽은 이미 징징 울려대고 있었다. 뒤를 자극하는 것만으로도 성기는 다시 한껏 발기했다. 더 강한 자극을 원하는데도 승건은 계속 애만 태웠다.
안을 헤집던 손가락이 빠져나와 엉덩이를 붙잡고는 허벅지를 쓸어왔다. 채훈이 승건의 등을 긁으며 졸라댔다. 그래도 승건이 턱과 목에 이를 세우면서 애무만 퍼붓는 바람에 채훈은 속으로 욕을 했다.
이건 섹스를 하는 게 아니라 고문을 받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악랄하게도 절정의 근처에서 조율하며 매달리게 만들었다.
진짜 취향 나빠.
원망은 언어가 아니라 야한 신음이 되어 채훈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한 번 더 애원할까, 깨물어버릴까 고민하던 채훈은 팔을 뻗어 바지째 승건의 성기를 꽉 쥐었다. 어떻게 참는지 몰라도 손 안에 꽉 차도록 성기가 발기한 상태였다.
채훈의 귓가를 애무하던 승건이 행동을 딱 멈추고는 고개를 들어 시선을 주었다.
“채훈이. 너…….”
승건의 으르렁거림은 탄식과 닮아 있었다. 잡아먹을 듯한 뜨거운 눈빛에도 채훈은 일부러 손에 더 힘을 주었다.
“이런 걸, 어떻게 참아?”
“잘.”
“농담 재미없게 한다.”
이번에는 손에 힘껏 힘을 주자 그제야 승건이 달려들었다.
그다음부터는 딱히 제대로 된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쾌락은 사나운 폭우처럼 채훈을 두들겨댔다. 몸을 가득 채우다 못해 넘치는 쾌락에 뒤틀며 울부짖다가 절정에 이르렀다.
겨우 정신을 차린 채훈은 자신이 승건을 끌어안고는 숨을 헐떡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심장 소리가 귀에서 울리고 머리에 열이 올라 멍한 와중에 승건이 채훈의 눈가에 입술을 누르다가 혀로 핥았다.
“어……?”
“많이 울었어.”
“응.”
다정한 애무에 채훈은 눈을 깜박이며 멍하니 대답했다. 속눈썹이 눈물에 엉긴 게 느껴졌다. 눈을 계속 감았다 뜨는데 승건의 입술이 몇 번 더 닿았다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채훈은 나른한 기분에 끌어안은 팔을 풀었다.
“짜.”
승건이 눈물을 핥은 소감을 속삭였다.
“응.”
“너. 멍하지?”
“멍하기는 해.”
아직도 심장 소리가 귀에서 울렸기 때문에 채훈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승건이 가볍게 웃는 것이 맞닿은 몸으로 울렸다. 여전히 연결되어 있는 아래에 힘이 꽉 들어가는 것도 생생하게 느껴졌다.
승건이 한 번으로 끝내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혹시나 해서 물었다.
“할 거면…….”
“늦어서 미안.”
“어……. 괜찮아.”
순간 채훈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승건이 맞선을 봤다는 써니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그것 때문에 세상 망하라고 부루퉁해 있었다. 민망함과 아쉬움이 동시에 솟구쳤다.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자신할 수가 없었던 채훈은 그대로 승건의 목을 꽉 끌어안고는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채훈아?”
“그러게, 좀 일찍 오지.”
채훈은 일부러 투정을 부리듯 말하면서 승건의 목을 가볍게 물었다. 빈틈없이 껴안고 있는 탓에 승건의 몸이 움칫 떨리는 것을 고스란히 알 수 있었다. 몸 안에 들어와 있는 성기가 빠듯하게 부피를 키우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쐐기를 박기 위해 채훈은 승건의 허리에 다리를 감고 아래를 꽉 조였다. 그러는 것과 동시에 승건이 헉 하고 헛숨을 삼켰다.
“너 진짜.”
“할 거면 그냥 해.”
승건이 으르렁거렸지만 채훈은 도발을 멈추지 않았다. 승건을 끌어안고 이번에는 귀를 깨물었다. 승건이 후회하지 말라며 그대로 덤벼들었다.
채훈은 필사적으로 승건을 꽉 끌어안았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최승건은 강채훈의 것이었다.
*
*
새벽 2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채훈은 침대에 드러눕고 싶은 몸을 억지로 일으켜 집으로 갈 준비를 마쳤다. 수요일이면 늘 그랬다. 아주 늦더라도 자고 가지는 않았다. 승건과 거리를 유지하려는 목적은 희미해졌지만 그래야 할 것 같은 기분은 여전했다. 무엇보다, 이사한 집이 아파트보다 병원이랑 거리가 더 멀어져서 출근이 더 힘들어진 이유가 가장 컸다.
그래서 승건 역시 채훈에게 자고 가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에 귀갓길에 태워주겠다고 하는 것을 말리느라 실랑이를 벌이다가 지고 말았다.
밤이 늦은 시간이면 콜이나 앱으로 택시를 불러야 했는데, 승건의 집 위치가 애매했다. 고급 주택가가 밀집되어 있는 곳이라서 택시가 잘 잡히지 않았다. 한 번은 앉은 자리에서 10분 넘게 기다려도 허탕이라 결국 승건의 차를 얻어 타야 했다.
그 이후로 작은 실랑이 끝에 채훈의 귀갓길은 승건이 책임졌다.
승건의 집에서 채훈의 오피스텔까지는 편도 15분이면 도착했다. 새벽에 차가 막히지 않는 덕분이었다.
비가 내리는 밤의 거리는 조용했다. 보조석에 앉은 채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의자에 기대어 있었다. 자꾸 이런저런 생각이 드는 것을 꾹꾹 눌렀다. 복잡할 때는 머리를 비워야 했다.
“컨디션이 안 좋아?”
“응?”
“아까부터 힘이 없어.”
“어……. 비가 내려서 그렇나 봐. 최근에 좀 그래.”
스스로가 말해 놓고도 허술한 변명에 채훈은 멋쩍어졌다. 승건이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넘어갔기에 안도했다. 그러나 차가 신호를 받고 멈춰 서자 승건이 예고도 없이 팔을 뻗어 이마에 손등을 대는 바람에 놀라고 말았다. 채훈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승건의 손을 멍하니 보았다.
“역시 열이 약간 있는데. 감기 기운 같아?”
“어……. 모르겠어.”
“약 먹어. 감기약 있지?”
“괜찮아.”
“저번에도 괜찮다고 하고는 휘청거렸잖아.”
채훈이 괜찮다고 하자 승건이 잔소리를 쏟아냈다. 휘청거리고 난 다음에 괜찮다고 한 것 같았지만 채훈은 굳이 따지지 않았다. 건강 문제에 관해서만큼은 승건이 아주 깐깐해졌다.
“알았어. 먹을게.”
“먹고 껍질 사진을 찍어 보내.”
“사진을? 네가 감독관이야?”
“넌 확인해야 해.”
“내가 뭘.”
“안 먹어도 된다 싶으면, 안 먹잖아.”
맞는 말이었기 때문에 채훈은 일순 말문이 막혔다. 열이 난다고 해도 별것 아니다 싶을 때에는 그냥 이불 뒤집어쓰고 잤다.
차가 출발하자 승건의 잔소리가 이어졌다. 약물 남용하는 거 아니니까 아프기 전에 먹으라고 한마디 더 했다. 결국 채훈은 항복하고 말았다.
“약속했으니까, 먹을 거야.”
“사진도 찍고.”
“알았어. 꼭 보내줄게. 약속해.”
채훈이 독한 놈이라고 속으로만 구시렁거리는 사이에 오피스텔에 거의 다 도착했다. 두 번째로 신호를 받고 서 있는데 승건이 말을 이었다.
“얼마 전에 호르몬 수치 검사를 받았는데, 러트 주기가 달라질 수도 있다는 결과가 나왔어.”
“……?”
반드시, 꼭, 무조건 집에 돌아가자마자 감기약을 먹고 껍질 사진을 보내겠다고 다짐을 하고 있던 채훈은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에 승건을 보았다. 핸들을 잡은 채 이미 이쪽을 바라보고 있던 승건이 다시 정면을 응시했다.
“사고 이후로 주기가 꽤 길어졌었는데, 이제 예전처럼 두 달에 한 번이 될 수도 있다고.”
“어디가 안 좋대?”
이 순간에 갑자기 러트 주기 이야기를 꺼내는 건지 채훈은 알 수 없었다.
오메가의 히트처럼 알파의 러트도 일정한 주기가 있었다. 다만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오메가의 페로몬에 자극을 받아 시기가 앞당겨지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승건의 러트 주기가 예전처럼 돌아왔다는 것이 좋은 징조인지 아닌지 채훈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최악의 가정을 하자면 어딘가에 이상이 생긴 것일 수도 있었다.
동생이 오메가이기에 일반인들보다 조금 더 많은 정보를 알고 있었다. 형질자들에게 특화된 여러 가지 약이 개발되고는 있지만 절반쯤은 부작용이 발생했다. 호르몬 이상으로 평생 동안 약을 먹어야 할 수도 했다.
기억을 잃을 정도로 강한 충격을 받은 승건에게도 어떤 이상이 있을 수 있었다.
“그건 아니고. 곧 두 달이 되거든.”
“아…….”
채훈은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예고도 없이 난입한 불청객에 의해 승건의 아파트에서 쫓겨났다. 그리고 승건의 손에 호텔로 끌려가서는 그대로 그의 러트를 겪었다. 그때가 5월 초였다. 그리고 지금이 6월 말이니까 보름쯤 남았다.
“마침 미국 출장일이랑 겹쳐서 애매하긴 한데, 촉진제를 먹어서 시일을 앞당길 수도 있어.”
“그래서?”
“러트를 같이 보내달라고.”
“……?!”
갑작스럽고 놀라운 제안이었다. 채훈은 승건과 러트를 보냈던 날이 어땠는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열 시간은 족히 침대에서 뒹굴었고, 또 열 시간 가까이 잠을 잤다. 미술관 개관 파티 이후에 수액을 맞고는 기절하듯 잠들었다.
승건과 섹스를 한 것은 하룻밤이었다. 하지만 그는 일요일에 약을 먹고 버텼다. 즉 러트가 하루로 안 끝난다는 것이었다.
경험에 의한 반발과 동시에 승건이 자신을 원하고 있다는 사실에 우울했던 기분이 단번에 뛰어올랐다. 그것이 필요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알았어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채훈은 침착한 척 대꾸했다.
“이마에 양심 없는 알파입니다, 라는 쪽지를 붙였어야지.”
“싫어?”
“러트를 며칠 동안 하는데?”
“날짜로 따지면 이틀. 그건 안 변했어.”
혹시나 해서 물어봤더니 이틀이 맞았다. 그사이에 차는 오피스텔 앞에 도착했다.
채훈은 당장에 내리지 않고 승건을 보았다. 눈이 마주쳤지만 승건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싫다고…….”
내가 싫다고 하면 다른 사람을 알아볼 거냐고 물어보려던 채훈은 입을 다물었다. 다른 사람을 만나지 않겠다는 계약 조건을 승건이 어길 것 같지 않았다. 그리고 굳이 그걸 물어보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싫으면 싫다고 해. 그건 계약하지 않은 거야. 네 뜻에 달렸어.”
채훈이 입을 다물자 승건이 재촉했다. 계약을 언급하는 바람에 채훈은 순간 발끈했다. 꼭 이럴 때면 계약을 언급해서 사람 속을 긁어댔다.
“양심이 있으면 약 먹고 하루는 버티고 난 다음에 한다고 해.”
“너랑 하루를 보내고 약을 먹을게.”
“그러다가 내내 해버리는 거 아니야? 전에 약을 먹어도 잘 안 통했잖아.”
“약 먹고도 이틀을 할 수 있지.”
“그러니까 네가 양심이 없다고.”
제자리를 맴도는 대화의 끝은 승건이 양심 없는 알파라는 것이었다. 베타를 상대로 그러고 싶냐고 따지려다가 채훈은 참았다.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다음에 온종일 침대에 누워 있어야 하는 게 아닌지 두려웠다.
“당장 대답 안 해도 되지? 고민은 해볼게. 나 갈게. 조심해서 돌아가.”
채훈은 얼른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렸다. 문을 닫고 인도에 서서 허리를 숙여 승건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가로등 불빛에 승건이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게 보였다. 그러다가 승건이 손을 가볍게 흔들고는 차를 몰고 사라졌다.
어둠 속에서 작아지는 빨간 후미등이 우회전을 하고 사라지는 것을 지켜본 채훈은 웃으면서 뒤돌아섰다.
들뜬 마음에 발걸음이 가벼웠다. 그러나 곧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가슴을 시리게 만들었다.
행복은 짧은 순간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래서 더 애절하고 사랑스러운 법이었다.
이 순간을 즐기자.
채훈은 주문처럼 다짐했다.
* * *
운이 나쁜 날이었다.
어젯밤에 싱숭생숭한 마음을 추스르지 못하고 잠을 설쳤던 채훈은 늦잠을 자고 말았다. 암막 커튼 사이로 새벽의 푸르스름한 기운이 번지는 것을 보고는 잠시 눈을 감는다는 것이 깊게 잠이 든 것이다. 알람 소리도 듣지 못하고 잠들었다가 정말 아슬아슬한 시간에 눈을 뜨고 말았다.
겨우 세수만 한 채로 뛰쳐나갔지만 바로 코앞에서 지각을 면할 지하철을 놓쳤다. 그렇게 5분을 늦는 바람에 과장에게서 한 소리 듣는 것이 시작이었다.
탕비실에서 나오는 직원과 부딪혀서 셔츠에 커피를 쏟고, 오전 내내 작업하던 것을 잘못 덧씌우기 하는 바람에 날리고, 마감 때문에 점심도 먹지 못하고 눈이 빠져라 마무리 작업을 해야 했다.
오후에도 불운은 이어졌다. 맞춤법을 모르는 과장에게 보고서의 맞춤법이 틀렸다고 한바탕 소리를 듣고, 억울함에 속이 쓰린 와중에 바닥에 떨어진 펜을 줍다가 이마를 책상 모서리에 모질게 부딪히는 바람에 멍이 들고 말았다. 덧붙여 바닥에 떨어진 펜은 그 충격으로 펜촉이 상해 더 이상 잉크가 나오지 않게 되었다.
채훈이 겪은 불운을 고스란히 옆에서 지켜본 이 대리가 고생한다고 한마디 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이, 최악은 마지막에 찾아왔다.
*
*
“네. 승건이에게는 심 실장님이 전해주세요. 그럼 부탁합니다.”
심정민과 통화를 끝낸 채훈은 복잡한 심정으로 통화 시간이 깜빡거리는 액정을 보았다. 사람 인생은 새옹지마라고 하지만, 하루아침에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게 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사건은 퇴근 시간 직전에 일어났다. 채훈이 일상 업무를 마무리하고 있을 때 감사팀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채훈과 총무과 직원 한 명에게 고지를 하고는 컴퓨터를 압수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영문을 알 수 없던 채훈은 그대로 감사팀 사람들을 따라 면담실로 불려갔다.
그들은 채훈에게 내부 제보로 인해 조사를 하게 되었다면서 이번 주말까지 연차를 내고는 소명 준비를 하라는 통보를 했다. 계좌 공개는 의무가 아니지만 경찰 수사를 받으면 추적을 받을 거라고도 했다. 컴퓨터에서 증거가 나오면 정식 고발이 있을 거라는데, 어떤 혐의인지는 정확하게 알려주지 않았다. 다만 노조에 가서 도움을 받으려면 받으라고 조언을 했을 뿐이었다.
면담을 마치고 나와 노조 사무실을 찾아갔지만 딱히 큰 도움을 받지는 못했다. 관련 전문 변호사의 명함을 몇 개 받았다. 그것도 6시가 넘은 시점이라도 연락조차 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총무과 사무실에 가자 직원들은 대부분 퇴근한 상태였다. 잔업 때문에 남은 사람들은 채훈과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다. 기다리고 있던 과장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는 주말까지 연차를 냈다. 과장 역시 채훈에게 성실히 조사를 받으라고 할 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등 뒤로 달라붙는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퇴근한 채훈은 가장 먼저 승건과 심정민에게 상황을 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른 건 몰라도 경찰에서 계좌 추적이 들어가면 승건이 입금해 준 1억 6,000만 원이 문제가 될 수 있었다.
병원을 빠져나온 채훈은 오피스텔에 도착하고 나서야 심정민에게 전화를 하고는 상황을 설명했다. 심정민은 한 번 알아보겠다고 하고는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채훈이 받은 돈은 깨끗한 거라고 위로를 덧붙여 주었다.
하루에 있던 일을 복기한 채훈은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는 소파 위로 쓰러지듯 누웠다.
“하아. 진짜.”
경찰이 아니라 회사 내부 감사팀에서 컴퓨터를 압수해 간다는 소리는 인터넷 게시판에서나 본 것이었다. 디지털 포렌식을 해서 내부 정보를 빼돌리거나 불법 프로그램을 깔아둔 것 등을 파악할 수 있었다.
직업 관련 카페나 사이트 게시판에서 찾아보니 비슷한 사례가 여럿 있었다. 대부분 변호사를 고용하라는 조언이 대부분이었다. 불법을 저지르지 않았다면 당당하게 굴고, 만약에 불법을 저질렀다고 하더라도 확실한 증거가 잡히기 전까지는 가만히 있으라는 것이었다.
감사팀 직원 말로는 내부 제보가 있었다고 했다. 그냥 통상 업무만 했는데 어떤 제보로 컴퓨터까지 압수를 했는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의 컴퓨터는 깨끗했다. 사내 규정이 있어 흔한 채팅 프로그램조차 깔아두지 않았다. 그래도 사람 마음이란 혹시나 뭔가 잘못되지 않을까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걱정을 하며 눈을 감은 채훈은 그대로 소파 위에서 깜빡 잠들고 말았다. 어젯밤을 설친 탓이었다. 정신을 차린 것은 테이블 위에 올려둔 휴대폰이 진동했기 때문이었다. 깜짝 놀라 일어나서 발신인을 확인하자 심정민이었다.
“네. 강채훈입니다.”
―심정민입니다. 채훈 씨. 지금 어디시죠?
“집입니다.”
―늦은 시간이기는 한데, 도련님 집으로 오실 수 있을까요? 어떻게 된 건지 알아봤습니다. 일이 조금 꼬였습니다. 더 자세한 설명은 도련님께서 직접 하신다고 합니다.
“심각한가요?”
일이 꼬였다는 말에 채훈의 심장이 덜컹했다.
―그렇게 심각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조금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할 겁니다.
“네. 알겠습니다.”
―도련님께서 조금 늦으실 수 있습니다. 그래도 10시 전에는 도착하실 예정입니다. 그렇게 알고 기다리시면 됩니다.
“네.”
허둥지둥 통화를 끝낸 채훈은 시간을 확인했다. 조금 잔 것 같은데 8시가 넘어 있었다. 채훈은 두 손으로 뺨을 세게 쳤다. 일이 꼬였고, 마음의 준비도 해야 한단다. 정신을 차려야 할 때였다.
*
*
채훈이 승건을 마주한 것은 밤 10시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었다. 장소는 약속대로 그의 집이었다. 거실에 마주 앉은 승건의 설명은 단순했다.
“운이 나빴어.”
시작은 태화 병원 이사장의 비리 혐의였다. 아직 이사장의 개인 비리에 집중되고 있는 상황이라 병원까지 불똥이 튀지는 않았지만 경찰이 이미 수사를 하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병원에서도 자체적으로 감사를 하고 있는 와중에 제보가 여러 개 들어왔단다. 총무과와 관련된 제보가 제일 많았는데, 오늘 컴퓨터를 압수한 채훈과 다른 직원이 횡령을 했다는 것이었다. 특히 채훈의 경우는 전과 달리 씀씀이가 커지고 고가의 사치품을 쓰고 있다는 게 이유였다.
이사장이 병원 직원 관리 프로그램에 불법으로 손을 댄 정황이 있는데, 채훈과 다른 직원이 그 사실을 알고는 어떤 수를 쓰지 않았나 의심하고 있다는 것이 승건의 설명이었다.
거기까지 설명을 들은 채훈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보 때문이라니.”
생각보다 단순하고 시시한 이유였다. 채훈은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와 승건을 번갈아 보았다. 승건이 선물한 값비싼 시계와 양복 때문에 병원 돈을 횡령했다는 의심을 받았다는 사실이 기가 막혔다.
“나는 이사장이 불법 프로그램을 썼는지 안 썼는지도 모르거든. 그리고 그건 중앙 서버에서 관리하는 거잖아. 전산실 쪽이나 뒤질 것이지. 난 컴맹에 가까운데. 아무것도 발견 안 될 테니까 별일 없겠지?”
“아니. 문제가 생길 거야.”
“응? 왜? 컴에는 아무것도 없어.”
“있어.”
“어떻게?”
채훈은 컴퓨터를 깨끗하게 썼다고 자부했다. 뭔가 나올 게 없었다. 그러나 승건의 표정은 진지했고 불길하기까지 했다.
“이미 컴퓨터에 증거는 들어 있어.”
“……뭐?”
“너도 알겠지만 총무과에는 내부 비리가 꽤 있어. 이런 일을 대비해서 신입들 컴퓨터에 정기적으로 증거를 심어둬. 희생양으로 만들려고. 제보도 그쪽에서 했을 거야. 최근에 씀씀이가 커졌으니까 딱 맞겠지. 운이 없었어.”
“하지만…… 돈을 빼돌렸다고 하더라도 어디로 빼돌렸는지도 모르고, 내 명의로 된 계좌에서 입출금한 기록이 없잖아. 네가 준 돈도 그대로 남아 있고. 아니지, 그건 출처가 명확하니까…….”
채훈은 자신에게 유리한 증거가 될 만한 것들을 떠올렸다. 사무실 컴퓨터에는 비밀번호가 걸려 있었다. 누군가 몰래 접속했다면 그것 또한 기록에 남아 있을 것이다. 자신의 자리는 출입구를 찍는 CCTV에 잡힌다는 사실도 기억해 냈다. 그러다가 CCTV 영상 기록이 3개월밖에 저장되지 않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좌절했다.
“내가 준 돈은 깨끗해. 하지만 컴퓨터에 남아 있는 증거는 어쩔 수 없어. 적당한 선에서 덮지 않을 거야. 꼬리를 잡아서 거슬러 올라갈 거고, 최종적으로 부원장의 목까지 자를 거야. 그러려고 내사를 시작했고, 너는 거기에 재수 없게 휩쓸렸어.”
승건의 설명을 천천히 이해한 채훈은 무어라 말을 하지 못하고 눈만 깜빡거렸다. 자신은 커다란 판의 장기 말이었다. 그것도 가장 낮은 졸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승건이 이사장과 대립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냈다. 혹시나 하는 의혹을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이거…… 네가 계획한 거야?”
“명령을 내렸지.”
“그럼…….”
채훈은 혹시 네가 도와줄 수 있냐고 물어보려다가 망설였다. 그리고 그걸 승건이 눈치챘다.
“내 선에서 막을 수는 있지만 그러지는 않을 거야. 그랬다가는 다 엎어야 하거든.”
“……?!”
“유능한 변호사를 소개해 줄게. 내부 고발자가 돼. 차장이랑 과장의 비리를 몇 개 확보해 뒀어. 그걸로 거래가 가능해.”
단호한 거절에 이어 예상하지도 못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승건 때문에 채훈은 망연자실해졌다. 물론 일이 복잡해진다면 손을 쓸 수 없을 수도 있었다. 머리 한쪽으로는 이해했지만 원망의 마음이 번졌다. 파워게임인지 뭔지 때문에 자신이 범죄자가 되게 생겼는데, 승건은 그게 아무렇지 않은 듯해서 더 그랬다.
“하지만 그건 내가 저지르지도 않는 죄를 인정하는 거잖아. 횡령에, 내부 고발까지 하면 어디에도 취직 못 해. 이 바닥이 얼마나 좁은데.”
“죄를 인정하라는 게 아니야. 법적으로 네가 잘못될 일도 없어. 재판해서 무죄 받으면 돼. 이참에 다른 일을 해. 수의사가 되고 싶어 했잖아. 경찰대는 무리겠지만 수의대는 네 실력이라면 문제없을 거야. 올해 수능은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내년 수능을 목표로 해. 수의대는 나이대가 다양하니까 서른두 살의 신입생도 이상하지 않아. 학비나 그 외에 나머지 비용도 내가 지원할게. 하고 싶은 걸 해봐.”
채훈은 가만히 승건의 말을 들었다. 승건이 제시하는 미래는 완벽하기까지 했다. 평소라면 솔깃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자신의 죄도 아닌 것을 덮어쓰게 된 상황을 무마해 주지 않겠다고 한 것부터 속이 상했는데, 자신의 인생 설계를 제멋대로 해버리는 모습에 화가 났다.
수의사가 되고 싶기는 했다. 만약 수능을 망치지 않고 제대로 쳤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하기도 했었다. 아버지에게 반항하고는 경찰대가 아니라 수의대를 지원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바꿀 수 없는 과거의 일이었다. 지금 생활에 딱히 불만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평범한 직장 생활도 괜찮았다. 그런데 승건이 제 마음대로 수의대를 가라고 하고 있었다.
승건이 고의적으로 의도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남의 손발이 다 잘린 상태에서 거부하기 힘든 선택지를 제시한 것은 질이 나빴다. 그건 마치 처음에 돈을 제시하고 만나자고 했을 때와 닮아 있었다.
실질적으로 승건의 제안이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그는 최선이라고 여기고 있을 것이다. 혹은 지금 자신이 승건에게 화를 내는 것은 자격지심일 수도 있었다.
화가 났는데도 승건의 입장에서 그의 편을 들어주려고 하는 자신이 싫었다. 그를 너무 좋아해서 실망하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것 같았다.
“왜 그래?”
채훈은 무슨 일이냐고 묻는 승건에게 부탁하고 싶었다. 다 엎더라도 힘을 써주면 안 되냐고 말이다. 없는 죄를 뒤집어쓰기는 싫었다. 하지만 그건 자존심이 또 허락하지 않았다. 승건의 말대로 이건 운이 나쁜 것뿐이었다. 그걸 승건의 탓이라고 하기는 싫었다.
“내 제안이 마음에 들지 않는군.”
채훈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자 승건이 선수를 쳤다. 채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대로 내부 고발자든 뭐든 할게. 그렇지만 그다음의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상관하지 마.”
“왜 그러는 거야?”
“그냥 싫어서.”
“강채훈.”
“우리 계약이 반년 조금 더 넘게 남은 거 알지? 내년에 수능을 치고, 그 후에 대학을 들어가라고? 계약 끝나고 안 보는 거 아니었어?”
채훈은 가능하면 가볍게 말하려고 노력했다. 다행히 의도대로 목소리는 쾌활하게 들렸다. 아마 표정도 그럴 것이다. 반대로 승건이 얼굴을 굳혔다.
“내가 준 카드를 써.”
거짓으로도 미래를 약속하지 않는 승건 때문에 채훈은 속이 상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걸 티 내고 싶지 않았다.
“됐어. 다 끝나고 난 다음에 그럴 수는 없지.”
“뭐가 마음에 안 드는 거야? 꼭 대학을 가라는 말은 아니야. 네가 원하는 걸 해.”
네가 원하는 것을 하라는 승건에게는 악의가 없었다. 오히려 이해를 못 하는 눈치였다.
“그냥 내가 알아서 한다고. 나 간다. 오늘은 약속한 날이 아니니까, 그냥 가도 되는 거지? 변호사는 심 실장님 편으로 알려줘.”
채훈은 더 이상 말을 섞지 않으려고 얼른 인사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승건이 따라 일어났다.
“강채훈. 그냥 가지 마. 할 말 있으면 해.”
“다 했어.”
“화가 났잖아.”
“내가 화난 적이 한두 번이야?”
“그게 뭐냐고 아까부터 묻고 있어.”
침착하게 따지는 승건의 목소리에 채훈은 의도적으로 길게 숨을 들이쉬다가 인상을 썼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굴러가는 현실이 엿 같아서.”
“……?!”
“높으신 분들의 파워게임인지 뭔지에 내 인생이 좌지우지되는 게 별로라고. 너 때문이 아닌 건 아는데. 아니다. 너 때문이기도 하지. 거기까지는 운이 나빴다고 할 수 있는데. 그래도 손발 다 잘린 사람에게 그런 식으로 해결책을 내밀지 마. 기분이 더 엿 같아지니까. 아, 여기서 더 했다가는 진짜 너한테 안 좋은 소리 할 것 같다. 오늘은 얼굴 더 안 보고 싶으니까……. 주말까지는 어떻게든 수습할게.”
머릿속이 복잡한 만큼 횡설수설하고 있다는 것을 채훈도 알았다. 말을 이어갈수록 화가 났기 때문에 적당한 곳에서 끊어야 했다.
“네게 피해를 입히려는 의도는 아니었어.”
“알아.”
“그래도 내 탓이니까 갚아주고 싶어. 보상이라고 생각해.”
“나는 그게 필요 없다고. 됐지? 나머지는 다음에 이야기하자. 진짜 간다.”
대화는 계속 제자리를 맴돌았다. 승건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지만 채훈은 개의치 않고 뒤돌아섰다. 여기서 더 말을 해봤자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할 게 뻔했다.
이번에는 승건도 붙잡지 않았다. 채훈은 등 뒤에 따갑게 와 닿는 시선을 무시한 채 앞만 보았다.
* * *
TV 속에서는 귀여운 다람쥐가 여름의 숲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소파에 반쯤 널브러진 채훈의 눈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승건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온 채훈은 평소처럼 자잘한 집안일을 한 다음에, 씻고 옷까지 갈아입은 다음에 잘 준비를 마쳤다. 소파에 앉아 내일 할 일과 심정민에게 물어볼 것들을 적다가 어느 순간부터 넋을 놓고 말았다.
믿고 의지하는 사람의 무관심한 말 한마디에, 실망스러운 모습에, 혹은 좁혀지지 않은 의견 차이에 속상하고 마음을 다치기도 했다. 꾹 참는 것이 능사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떨 때는 속없는 사람처럼 웃으며 모르는 척 넘어가야 하는 순간이 있었다.
채훈은 제 속마음을 숨기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그러면서도 승건을 원망했다.
나쁜 놈이었다. 보상이라고 일방적으로 제시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끝까지 깨닫지 못했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자신에게 정신적인 여유가 있었다면, 시계를 두고 실랑이를 벌였을 때처럼 그러는 게 아니라고 한마디 했을지도 몰랐다. 다시 시간을 돌이켜서 그러지 말라고 하고 싶었다.
채훈은 탁자 위에 올려둔 휴대폰을 노려보았다. 사납게 싸우고 돌아왔으면서 승건의 연락을 기다리는 자신은 바보 같았다.
“바보 같다. 진짜.”
채훈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제오늘을 포함해 최근에 기분이 널뛴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온몸으로 경험하고 있었다. 컨디션이 오락가락하면서 심장이 다양한 방법으로 아팠다. 오싹함에 몸을 부르르 떤 채훈은 이마를 손등으로 눌러보았다. 왠지 뜨거운 것 같았다.
어젯밤에는 약을 먹고 승건의 주문대로 껍질을 사진으로 찍어 보냈다. 약을 먹어서인지 몰라도 아침에는 아무 이상 없이 건강하게 일어났다. 그런데 또 오늘 밤에 열이 났다. 진짜 감기가 올 모양이었다.
약을 먹어야 하는 건가 가늠하던 채훈은 어젯밤에 약을 먹고 사진까지 찍으라고 했던 승건이 했던 말을 떠올리고는 와락 인상을 구겼다. 약을 안 먹고 버텼다가 진짜 감기라도 들었다가는 주말에 승건을 못 만날 수도 있었다.
그것보다는 이런 기분으로 주말에 아무렇지 않게 만나서 섹스를 할 수 있을지가 걱정이었다.
“어휴.”
몇 번째인지도 모를 한숨을 쉬며 탁자에 엎드리려는데 휴대폰이 요란하게 진동했다. 혹시나 승건인가 싶어 확인하니 강영환의 이름이 액정에 떠 있었다.
“응. 나야.”
―형?
핸드폰 너머에서 들리는 목소리만으로도 강영환이 취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채훈의 형제들은 셋 다 술을 잘 마셨다. 그중에서 강영환이 그나마 술에 약한 편이었다. 그래도 집이 아니면 적당히 즐길 정도로만 마시는 녀석이 웬일로 취했나 싶었다.
“영환아. 취했어?”
―어……. 그게 말이야. 내가 여기 그림을 하나 깼는데, 그거 비싼 거래. 경찰 부른대. 그 전에 먼저 형이 와주면 안 될까? 내가 정신이 하나도 없어.
“주변에 아는 사람 없어? 성호는?”
―걔는 없어. 깨졌어.
“깨졌다고? 언제?”
채훈은 시시콜콜 떠드는 것을 좋아하는 강영환이 김성호와 헤어졌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은 게 놀라웠다. 최근 연락을 잘 안 하기는 했다. 형이 베트남에 가버리고 가족회의를 했을 때도 강영환은 신경 쓰기 싫다면서 알아서 하라고 하고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때는 어지간하다 싶었는데 그런 사정이 있는 줄은 몰랐다.
―몰라. 기억 안 나. 아……. 여기 주인이 바꿔달래. 바꿔줄게.
얼마나 취했는지 힘없이 웅얼거리던 강영환이 휴대폰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었다. 이태원에 있는 재즈바의 주인이라는 남자는 조금 전에 강영환이 했던 말을 조금 더 자세히 풀어주었다.
강영환이 술에 취해서 복도에 걸어둔 그림 액자를 파손시켰다. 액자도 액자였지만 유명 화가의 그림 자체가 훼손되었다는 것이었다. 경찰을 부르려니 강영환이 돈으로 갚겠다며 말리는 바람에 이렇게까지 되었다고 설명했다. 그림값은 한두 푼이 아니고, 강영환이 당장에 갚을 능력도 없어 보이니 적어도 신원 보증을 받아야겠다는 사장의 설명은 합리적이었다.
채훈은 한숨을 삼켰다. 보통 강영환이 사고를 치면 늘상 같이 다니던 김성호가 수습을 하곤 했다. 그것도 아니라면 강수찬이 나섰다. 하지만 김성호와는 헤어졌고 강수찬은 베트남으로 떠났으니 이제 그건 채훈의 몫이었다.
재즈바의 상호명을 듣고 주소를 검색한 채훈은 주인에게 한 번 더 확인까지 한 다음에야 통화를 끊었다. 오늘 하루는 너무 길다고 생각하며 얼른 움직였다.
*
*
강남에 있는 채훈의 오피스텔에서 이태원의 재즈바까지는 택시를 타고 20분이 넘게 걸렸다. 골목 안쪽에 위치한 재즈바 앞에서 채훈이 택시에서 내린 것은 자정이 가까운 시각이었다.
간판을 확인하고 지하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가자 재즈바가 나왔다. 작지 않은 크기의 가게는 아직 영업 중이었다. 그리고 주중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적지 않았다.
채훈은 얼른 강영환을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재즈바 실내가 어두컴컴해서 그런지 보이지가 않았다.
결국 채훈은 서빙 중인 직원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그러자 곧 사장이 나타났다. 키가 크고 덩치도 큰 젊은 남성이 사람 좋게 웃으며 먼저 인사를 했다. 채훈은 같이 인사하며 동생이 어디에 있냐고 물었다.
“제 동생은 어디에 있습니까? 제가 못 찾겠습니다.”
“아, 동생분이 많이 취하셔서 따로 개인 룸으로 옮겼습니다. 주중이라 손님이 없어서 룸이 비었거든요.”
“감사합니다.”
“뭘요.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같이 가시죠.”
채훈은 싹싹한 사장님이라고 생각하며 그를 따라 움직였다. 사장이 안내한 룸은 가게 안쪽 깊숙한 곳에 위치해 있었다. 좁은 복도 사이로 두 개의 문이 마주 보고 있는 구조였다.
“이쪽입니다.”
채훈은 사장이 직접 열어준 문 안쪽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룸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탁자 위에 놓인 반쯤 차 있는 물컵만이 사람이 있었다는 흔적이었다.
“아무도 없는데―”
동생은 어디 갔는지 물어보려고 막 뒤를 돌아보던 채훈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강한 충격이 뒷머리를 강타했다. 그대로 의식을 잃은 채훈은 앞으로 쓰러졌다.
*
*
“조금 곤란하게 만들 거라며! 그런데 이게 뭐야! 이거 놔. 이거 놔. 이거 놓으라고! 뭐 하는 짓― 윽!”
강영환이 커다랗게 소리치며 따지다가 곧 비명을 질렀다. 비명 직전에 주먹으로 후려치는 소리가 채훈의 귀에는 멀리서 울리는 것처럼 들려왔다.
“멍청하네. 이렇게 될 줄 몰랐어?”
“이 새끼가! 아악! 그만. 그만하라고!”
“더 맞기 싫으면 입 다물고 가만히 있어. 그래도 넌 오메가니까, 좋은 곳에 팔려갈 거야.”
“진수 형……? 무슨 소리야?!”
“우성 오메가는 비싼 값에 팔린다고 하는 소리 못 들어봤어?”
“씨발. 이러고도 네가 무사할 줄 알아? 내가 가만히 안 둬, 윽!”
“네가 어떻게 할 건데? 응? 경찰도 어떻게 못 하는 걸 어떻게 할 거냐고? 뭣도 없는 게 입만 살아서는.”
몇 번 더 걷어차는 소리가 났다. 강영환이 맞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채훈은 돌에라도 눌린 듯 움직일 수가 없었다. 모든 상황이 가위에 눌려서 꿈이라도 꾸는 것 같았다.
조용히 있으라고 위협적으로 말한 남자의 발소리가 멀어졌다. 문이 쾅 닫히는 소리도 났다. 그리고 강영환이 소리 죽여 흐느꼈다. 그 모든 것을 들으면서 채훈은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머리는 깨질 것 같고 팔다리는 무거웠다.
“씨발……. 이게 뭐야.”
훌쩍이는 강영환의 울음소리에 채훈은 가까스로 눈을 떴다. 그러자 무릎을 끌어안고 쪼그려 앉아 있는 강영환이 보였다. 그 순간에 기억이 떠올랐다.
강영환을 데리러 재즈바에 왔었는데, 뒤통수를 얻어맞고 정신을 잃었다. 좀 전의 강영환과 이름 모를 남자의 대화까지 더해지면 뭔가 함정이 있었다는 의미였다.
“영환아.”
“어……. 형? 형? 깼어? 괜찮아?”
채훈이 이름을 부르자 벌떡 고개를 든 강영환이 기다시피 다가왔다. 채훈은 강영환의 입술이 찢어지고 손이 케이블 타이로 묶여 있는 것을 확인하며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자신의 손과 발도 케이블 타이로 묶여 있는 상태였다. 그것도 차가운 창고 바닥에 갇혀 있었다. 이건 악몽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울렁이는 머리를 흔들며 채훈은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물었다. 그러자 강영환이 우물쭈물 눈치를 봤다.
“그게…….”
“강영환.”
“진수 형이. 아니, 진수 그 새끼가 형을 불러내라고 해서. 내가 싫다고 했어. 진짜야. 그런데 계속 하라고 협박해서. 그냥 장난친다고만 했는데. 그 새끼가 형의 애인이랑 사이가 안 좋다고, 놀려줄 거라고 해서. 그냥…… 장난일 거라고…….”
자기변명을 하던 강영환이 말을 끝맺지 못하는 것을 보고 채훈은 대충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강영환은 그저 악질적인 장난으로만 알았겠지만, 일이 커진 것이다.
“진수라는 사람은 누군데? 왜 이러는 거야?”
“형 애인의 친척이래. 사촌. 이름은 최진수고.”
“사촌? 친사촌?”
“응. 왜 이러는 건지는 나도 몰라. 형. 그 새끼가 날 팔아버린대. 우성 오메가가 비싸게 팔린다고. 흑. 거짓말이겠지? 그냥 위협하는 거 맞겠지? 우리 사라지면 엄마가 가만히 안 있을 거야. 아빠랑 친했던 윤씨 아저씨가 경찰이잖아. 괜찮을 거야? 그렇지?”
벌벌 떨면서 이것저것 따지는 강영환에게 채훈은 괜찮을 거라고 해주지 않았다. 인신매매는 알파나 오메가, 베타를 가리지 않았다. 다만 그중에 오메가가 더 인기가 많을 뿐이었다. 한때 사회 문제로 대대적으로 뉴스를 타기도 했었다.
거기다 최진수라는 남자는 승건의 사촌이라고 했다. 채훈은 승건이 유산 문제 때문에 친가 쪽 사람들과 트러블이 있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정확히는 납치당해서 죽을 뻔했다. 승건의 외할아버지가 납치에 얽힌 사람들에게 복수를 했다는 것도 기억났다.
최진수가 승건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다면 이건 단순한 납치가 아닐 확률이 높았다. 우성 오메가니까 비싼 값에 팔아버린다고 위협한 것만 봐도 그랬다.
“씨……. 미친 새끼.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형, 난 협박당한 거야. 그 새끼가 형 안 불러내면, 안 불러내면 끝장을 볼 거라고 해서. 진짜 이렇게 될 줄 몰랐어. 씨발. 팔아버린다니. 어떻게…….”
최진수를 탓하던 강영환이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울려고 했다.
“울지 마.”
“어떻게 안 울어.”
“울면 힘 빠져. 시시비비는 나중에 가리자.”
채훈은 길게 생각하지 않고 다리에 힘을 주어 발목에 묶인 케이블 타이를 끊어냈다.
일반적으로 유통되는 케이블 타이는 얇고 약한 편이었다. 채훈의 다리를 묶고 있는 것은 시중에 도는 것들 중에서 살짝 굵은 것이었다. 그래도 성인 남자의 힘이라면, 적당한 요령만 있으면 끊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채훈의 경우 도장을 다니면서 놀이의 일환으로 사람들과 케이블 타이를 끊는 실험도 했었다. 가는 건 두 개까지 채훈의 힘으로 무난하게 끊어낼 수 있었다. 사람을 제대로 구속하려면 적어도 네댓 개는 함께 묶어야 했다.
겁을 먹고 울먹거리려던 강영환이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지만 채훈은 따로 설명하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손목을 묶고 있는 타이도 끊었다.
“타이가 가늘어서 다리는 너도 쉽게 끊을 수 있을 거야. 발을 엑스 자로 꼬아서 힘을 줘봐.”
채훈은 어리둥절해하는 강영환을 재촉해서 발과 손의 케이블 타이를 끊게 했다. 손목을 묶은 케이블 타이를 끊는 데 잠시 애를 먹었지만 곧 자유로워졌다.
그사이 휴대폰을 찾아봤지만 압수해 갔는지 호주머니에 없었다. 지갑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강영환도 마찬가지였다. 남은 것은 강행돌파뿐이었다.
채훈은 창고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드럼 스틱을 하나 집어 들었다. 날붙이 무기나 둔기는 없었지만 드럼 스틱 정도면 그럭저럭 괜찮았다.
“형? 뭐 하려고?”
“여기 어디야? 밖에 사람이 얼마나 있어?”
“나갈 거야?”
“널 팔아버린다고 했다며. 우리가 납치됐는지 누가 알고 도와주러 오겠어. 휴대폰도 없고. 지금이 기회야. 사람은 몇이야? 칼이나 무기 같은 거 가지고 있어? 가능한 한 자세히 말해. 그래야 성공할 수 있어. 너는 달리기 잘하니까 사람 많은 번화가나 가게로 뛰어가. 거기서 난동부터 부려. 뭘 깨도 좋고. 주인이 경찰 부르면 끝나. 그러니까 많이 알아야 해. 여기 몇 층이야? 어디로 나가야 해?”
단 한 번뿐이었던 과거의 경험이 채훈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10여 년 전에, 과감하게 승합차의 핸들을 꺾지 않았다면 아마도 죽은 목숨이었을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내일이면 승건이 자신의 부재를 알아차릴 테지만, 그때까지 무사할 거라고 자신할 수 없었다. 기회가 있을 때 움직여야 했다. 칼만 쓰지 않으면 세 명은 상대할 자신이 있었다.
채훈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자 강영환이 더듬더듬 설명했다.
“그러니까, 여기는 녹음실이야. 래퍼들이 자주 녹음하는 곳인데, 지하 1층이야. 그리고, 그리고, 우리가 있는 곳은 컨트롤 룸에 딸린 창고인데. 컨트롤 룸에 사람이 얼마나 있는지는 모르겠어. 진수, 그 새끼 아지트 같은 곳이라서. 많을 때는 열 명도 넘었지만……. 밖이 조용한 걸 보니 사람은 없을 것 같고. 컨트롤 룸만 나가면 바로 앞이 입구라서 계단만 올라가면 돼.”
채훈은 강영환의 설명을 들으며 출입구 문 옆의 벽에 바짝 붙어 섰다. 녹음실이라서 그런지 방음이 잘되어 있었다. 그래도 철문 너머로 쿵쿵거리는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채훈은 한참 동안 집중했다. 음악 소리 말고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기에 조심스럽게 일자형 손잡이를 아래로 내렸다. 자동 도어락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혹시나 잠겨 있으면 낭패였다. 단번에 손잡이를 부수는 것도 어려웠고 요란한 소리에 이목을 끌 수 있었다. 다행히 문은 잠겨 있지 않았고 아주 부드럽게 열렸다.
열린 틈은 종이 한 장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들려오는 소리가 달라졌다. 사람의 기척을 찾는데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와 함께 커다란 외침이 울렸다.
“그래서 어쩌라고!”
“별건 없어. 그냥 사업 하나 같이 하자고.”
“사업은 무슨. 내가 왜 형이랑 사업을 해?”
채훈은 남자의 목소리가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남자가 형이라고 한 상대는 최진수인 것 같았다.
“당연히 해야지. 말했잖아. 내가 그 형제를 데리고 있다고. 네가 그 여우 새끼를 나한테 넘길 때부터 알아차렸지. 승건이 애인의 동생? 내가 손 쓸 거라고 생각했지? 응? 네가 원하는 대로 내가 처리해 준다니까. 공범자가 된 김에 사업 정도는 같이 해야 할 거 아니야?”
“내가 안 한다면 어떻게 할 건데?”
“안 해?”
“그래. 공범자는 무슨 공범자야. 내가 죽으면 형도 죽어. 그걸 알아야지. 형도 승건이 새끼 무서워서 아무 말 못 할 거 아니야?”
그제야 채훈은 빈정거리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박광호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설마 납치에 박광호가 개입되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대화의 흐름을 보자면 강영환을 최진수에게 소개한 게 박광호라는 소리였다. 그것도 최진수가 사촌인 승건에게 악감정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채훈은 강영환을 보았다. 그는 입을 손으로 막은 채 질린 상태였다. 밖에서 두 사람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이 새끼 웃기네. 믿을 게 승건이 놈이라니. 사내새끼가 쫄기는. 다 같이 죽자는 거 아니야. 사업이나 하자니까.”
“글쎄. 안 한다고.”
“끝까지 들어봐. 내가 영상 하나 가지고 있거든. 네 걸로. 재벌 3세의 탈선은 이제 인터넷 뉴스거리도 안 되겠지만, 너네 할아버지한테는 먹힐 거 아냐? 안 그래? 박 회장님 꼰대로 유명하잖아. 약 하면 쫓아내는 거. 맞지?”
“씨발. 그걸 어떻게! 내가 가만히 있을 거 같아?!”
“그래? 어떻게 가만히 안 있을 건데? 응? 새끼야. 내가 같이 하자고 할 때 기어들어 와.”
박광호가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자 음악 소리만이 채훈의 귀에 울렸다. 둘의 대화만 듣고도 대충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알아차린 채훈은 속으로 혀를 찼다. 박광호는 개새끼였지만, 세상에는 그보다 더한 놈이 있었다.
“씹. 알았어. 그 새끼들 처리는 잘 하는 거지?”
“이래서 네가 큰물에서 못 놀아봤다는 거야. 이런 건 업자가 있어. 돈만 주면 알아서 다 처리해 준다고. 그리고 우성 오메가는 오히려 돈을 받지 아, 그래. 여우 새끼랑 그 형을 여기 가둬뒀는데. 형이라는 새끼한테 유감 있다고 하지 않았었나? 지난번에 그놈한테 된통 얻어맞았다지? 업자가 오려면 시간이 남았는데. 어때? 한번 볼래? 동업자가 된 기념으로 말이야.”
“하아. 씨발. 맞아. 형 말대로 그 새끼 면상은 좀 봐야겠어.”
갑자기 대화의 주제가 창고에 갇혀 있는 채훈과 강영환에게로 넘어왔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래도 채훈은 손잡이를 놓지 않고 그대로 대기했다. 케이블 타이로 묶어놓았으니 방심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문을 여는 순간이 기회였다.
채훈은 다시 강영환을 보았다. 여전히 입을 막은 그는 딱딱하게 긴장하고 있었다. 채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준비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옴짝달싹 못 하게 묶어놨다며 자랑하듯 떠벌리는 최진수의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문고리를 잡고 돌린다고 느껴지는 순간에 채훈은 그대로 힘껏 문을 밀쳤다.
“으억!”
사람과 문이 세게 부딪히는 충격음과 비명이 커다랗게 울렸다. 채훈은 그대로 뛰쳐나가 최진수의 머리를 드럼 스틱으로 힘껏 후려쳤다. 휘청거리는 그의 배를 발로 힘껏 걷어차는 것까지 순식간이었다.
다음으로 채훈은 박광호를 노렸다. 상황을 뒤늦게 파악한 박광호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래도 드럼 스틱을 손으로는 막았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채훈은 박광호의 반대쪽 얼굴을 주먹으로 치고는 다시 스틱으로 내리꽂았다. 턱까지 걷어차자 박광호가 뒤로 주저앉았다.
“얼른 나와.”
창고 입구에 쓰러진 최진수를 한 번 더 후려 찬 채훈은 강영환을 불렀다. 채훈은 창고 안에서 나오지도 못하고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강영환을 잡아 끌어냈다.
“씨발. 어딜.”
그 때 박광호가 꿈틀거리며 일어나려고 했다. 채훈은 그대로 박광호의 머리를 드럼 스틱으로 힘껏 내리쳤다.
죽지만 않으면 어떻게든 될 것 같았다. 채훈은 승건이 이 일을 수습해 줄 거라고 믿었다. 백이 되어준다고 했다. 무엇보다 오늘 일의 발단은 승건이었다. 녀석의 멱살을 잡아서라도 해결하라고 해야 할 판이었다.
두 사람이 쓰러진 걸 확인한 채훈은 강영환의 손을 잡고 그대로 내달렸다.
“저, 저 새끼 잡아!”
바퀴벌레처럼 끈질긴 박광호가 소리쳤지만 채훈은 뒤돌아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