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권-【11. 계약 연애】 (12/26)

  【11. 계약 연애】

계절이 바뀌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있다. 인도 위에 어지럽게 널린 노란 은행잎을 밟거나, 혹은 두꺼운 패딩이 거추장스럽다고 느껴질 때 그랬다.

6월 초. 에어컨을 틀어 놓은 쾌적한 자동차 안에서 비가 내리고 있는 도심의 풍경을 보고 있다가, 여름이 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루 종일 비를 맞은 가로수는 무성한 녹음을 뽐내고 있었다.

벌써 여름이었다.

“차가 밀리네요. 시간이 아슬아슬하겠습니다.”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채훈은 심정민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심정민의 말대로 도로는 차로 꽉 들어찬 상태였다.

“혹시나 모르니까 도련님께 연락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네. 제가 할게요.”

채훈은 승건에게 차가 밀려서 늦을 수도 있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겠다는 답장이 왔다.

자선 와인 경매라는 생소한 이름의 행사가 있었다. 승건의 작은 외할아버지 중에 한 분이 와인 애호가였고, 매년 한 번씩 자선 행사를 개최한다는 명목으로 와이너리를 자랑하는 게 취미라고 했다. 승건이 태화 그룹의 대표이사가 되었을 때, 와인을 선물한 것도 그였다.

나이 드신 어른들이 와인에 대한 지식과 재력을 뽐내는 자선 경매 행사는 어느 순간부터 잘난 아들, 손자를 선보이는 자리로 변모했다. 그 자리에 승건이 참석하는 것은 주최자가 그의 작은 할아버지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채훈은 승건의 애인 자격으로 발을 걸쳤다.

계약 연애도 연애이니까 말이다.

벌써 20일쯤 전의 일이었다. 사귀자는 승건의 말에 채훈은 한참 동안이나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잠시만. 혹시나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어서 물어보는 건데, 사귀자고 한 거 맞아?’

‘맞아. 공개적인 사이가 되었으니까 사귀는 게 맞겠지.’

‘아……. 계약 연애를 하자고?’

채훈은 그제야 승건이 무엇을 하자고 하는지 이해했다. 승건의 말대로 공개적인 사이가 되었다. 서로의 주변 사람들이 모두 사귄다고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단순히 그냥 만나는 게 아니라 사귄다고 해야 하는 게 맞았다.

그런데 승건이 애매하게 인상을 썼다. 뭔가 불만이 있어 보였지만 채훈으로서는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조금 더 반응을 기다리니까 승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계약 연애가 맞겠지.’

‘그런데 지금이랑 달라지는 게 있어?’

‘계약서를 수정해. 나는 애인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지 않아. 지금까지는 누구를 만나든 상관하지 않았지만, 앞으로는 아니야.’

채훈은 승건의 설명에 납득을 하면서도 조금 상처받았다. 계약 연애라고 해도 주변 사람들을 속이려면 다른 사람을 만나지 않는 게 맞았다. 그러나, 승건의 이 말은 지금까지는 아무래도 좋았다는 의미였다. 또한 승건이 자신 말고 딴 사람을 만났을 수도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거기까지 생각하자마자 가슴이 시렸다. 미술관 개관 행사에서 봤던 광경이 반사적으로 떠올랐다. 우성 알파에 재벌 3세, 그리고 영화배우 못지않게 잘생긴 승건은 인기가 많았다.

승건은 여태 얼마든지 가볍게 하룻밤을 즐길 수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그걸 알 방법은 없었다. 아니, 알았더라도 하더라도 그러지 말라고 할 자격 자체가 없다는 것이 맞는 말이었다.

그러나 계약 연애를 하면 그러지 말라고 할 수 있었다.

‘그건 너도 마찬가지인 거 알지? 나도 애인이 양다리 걸치는 거 싫어.’

‘주변부터 정리해.’

‘너야말로.’

채훈은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자신이야 정리할 것도 없지만, 승건은 다를지도 몰랐다.

‘서주명이부터 내보내.’

‘……걔가 왜?’

뜻밖의 이름이 언급되는 바람에 채훈은 의아했다. 주변을 정리하라는데 왜 서주명의 이름이 나오는지 알 수 없었다.

‘마음에 안 들어.’

유치한 이유였다.

‘친구인데 왜 그래?’

‘네 옆에 딴 놈이 얼쩡거리는 거 싫어서.’

채훈은 오해하기 딱 좋은 말이라고 생각했다. 승건을 좋아했기 때문에 의미심장한 단어 하나에 두근거렸다. 그래도 서주명을 당장에 내보낼 수는 없었다. 진짜 애인이라도 그러는 거 아니라고 하자, 승건은 싫은 티를 팍팍 냈다.

명색이 애인을 작은 오피스텔에 살게 하는 것도 체면에 서지 않는데, 동거인까지 있는 건 용납이 되지 않는다는 말로 채훈의 기대와 오해를 와장창 무너뜨렸다. 서주명이 나가지 않으면 새로 집을 구해주겠다는 승건을 말리느라 애를 먹었다. 그러다 결국 새롭게 계약서를 썼다.

그날 저녁에 있었던 일을 떠올린 채훈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단순했던 지난 계약과 달리 이번에는 세세한 내용이 몇 개 덧붙여졌다.

계약 연애라고 해도 바뀐 건 없었다. 여전히 승건이 주는 것은 모두 받았다. 주중과 주말에 한 번씩 만나 섹스를 했다.

달라진 게 있다면, 오늘처럼 승건이 필요할 때 애인으로서 공식적으로 얼굴을 내비쳐 주는 것이었다.

오늘도 반차를 내고 심정민의 손에 이끌려 스타일리스트를 만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광을 냈다. 또다시 사람들의 주목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속이 쓰려 왔다.

채훈은 별다른 특징이 없는 평범한 삶을 살아왔다. 그런데 최근 들어서 뭔가 자꾸 일이 복잡해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특히 가족 관계가 그랬다. 형에게서는 아무 연락도 없었다. 지금껏 어떤 식으로든 싸우고 나면 채훈이 먼저 형에게 숙이고 들어갔다. 자신이 잘못한 것이 아니더라도 그냥,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여겼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자 남보다 못하게 되었다.

어머니가 사정을 알았는지, 형의 헛소리에는 신경 쓰지 말라고 전화가 왔다. 귀가 얇은 데다가 우선은 형의 편을 들고 보는 어머니가 무슨 일인가 싶었다. 그러나 바로 다음에 승건이랑은 너무 깊게 엮이지 않는 게 좋다는 충고 때문에 대충 납득해 버렸다.

그러다가 바로 어제, 형이랑 화해하는 게 좋지 않겠냐며 중재에 나섰다. 좀 더 지켜보겠다고 하자 알아서 하라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강영환도 미술관 개관 파티에서 만난 이후로 연락이 뜸해졌다. 생일 축하한다고 케이크 쿠폰을 보내고는, 수찬이 형이랑 싸웠냐며 물어본 게 전부였다.

허무했다. 화를 내고 소리쳤더니, 먼저 화해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더니 허무하게 떨어져 나가버렸다. 지금까지 자신이 아등바등해 온 것이 뭐였을까 싶었다.

사람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노력이 필요했다. 그건 가족이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저 그게 너무 당연해서 신경 쓰지 않을 뿐이었다. 그러나 나이를 먹고 한 번씩 당연한 일에 브레이크가 걸리곤 했다. 바로 오늘처럼 말이다.

“이런…….”

채훈은 작게 중얼거렸다. 비가 와서 그런가, 자신답지 않게 우울해졌다.

기분을 전환하기 위해 뺨을 문지르려다가 화장을 했던 것을 깨닫고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그사이에 심정민이 목적지에 도착했음을 알렸다.

“다 왔습니다.”

대로에서 골목길에 접어든 차가 멈춘 곳은 딱딱해 보이는 건물 앞이었다. 발레파킹을 맡긴 심정민이 우산을 펼쳐 채훈이 비를 맞지 않도록 해주었다.

자선 행사라지만 비공식적인 것이었다. 비가 오는데도 불구하고 입구에서부터 가드들이 잔뜩 지키고 있었다. 건물 안도 보안이 철저했다. 초대장 확인은 물론이고, 소지품 검사와 문으로 된 금속 탐지기까지 통과해야 했다.

별문제 없이 보안 검색을 지난 채훈은 심정민과 함께 2층에 있는 행사장으로 향했다. 계단을 한참이나 올라가서야 잘 꾸며진 행사장이 나타났다.

행사장은 입구에서 몇 개의 계단을 내려가야 하는 구조였다. 그래서 한눈에 내려다보기 좋았다.

한껏 차려입은 사람들이 가득한 행사장의 분위기는 무르익어 있었다. 약간의 소음과 함께 와인향기가 훅 밀려들었다. 밖에 비가 내려서 그런지 향이 진했다.

채훈은 수많은 사람 사이에서 단번에 승건을 찾아냈다.

그는 역시 인기가 많았다. 전과 달리 이번에는 나이 드신 아저씨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이번에도 저걸 어떻게 뚫고 다가가야 하나 망설이고 있는 순간에 승건이 우연처럼 이쪽을 바라보았다.

거리가 멀지 않았기 때문에 서로를 알아보는 것은 당연했다. 승건이 주변 사람들에게 무어라 말을 하더니 이쪽을 향해 다가왔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행동에 채훈은 감동하면서 계단을 내려섰다.

“시간 맞춰 왔네.”

“마지막에 정체가 풀렸어.”

“표정 관리 하고.”

승건의 차가운 경고에 반사적으로 웃으며 대답하던 채훈은 그대로 얼굴을 굳혔다. 웃기게도 머리에 묻은 물기를 털어내는 승건의 손길이 다정해서 기분이 묘해졌다.

채훈은 자신이 일하러 온 것임을 되새겼다. 그래도 할 말은 있었다.

“널 보고 웃는 건 괜찮지 않아? 이렇게, 널 보니까 반가워서 말이야. 오늘따라 더 잘생겨 보이기도 하고. 누구 애인일까 부럽네.”

채훈은 일부러 생긋 웃어보았다. 그러자 승건이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괴괴한 표정을 지었다. 반응이 신선해서 재미있었지만 더 이상 놀리는 것은 무리였다.

“됐어. 농담한 거야. 얼굴 펴.”

“저번처럼 하면 돼.”

“알아.”

지난번처럼이라면 웃지 않고, 이름 말고는 아무런 정보를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건 어려울 게 없었다.

“조금 있다가 2부 경매가 시작될 거야. 그때 꽤 괜찮은 빈티지들이 나오는데, 팸플릿을 보고 마음에 드는 걸 골라.”

“와인은 잘 몰라서.”

“나도 잘 몰라. 감으로 찍어.”

채훈은 무책임한 발언을 하는 승건을 째려보았다. 최소한 몇백만 원은 할 와인을 감으로 찍으란다.

“아무거나 골랐다고 뭐라고 하지 마.”

채훈은 승건이 내민 팸플릿을 받아 펼쳤다. 2부 경매에 출품되는 와인들의 이름은 하나같이 외국어로 되어 있었다. 그것도 영어가 아닌 게 많았다. 길지 않은 목록을 쭈욱 훑어본 채훈은 제대로 읽기를 포기했다.

그사이에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직접적으로 다가오지는 않았지만 호기심 어린 눈빛이 따끔할 정도로 피부에 와 닿았다. 의식적으로 얼굴에 힘을 줘야 했다. 아마도 지난번과 같은 상황이 일어날 것이다. 별것 아닌 것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아직 내공이 부족했다.

“3시 30분에 2부가 시작돼. 천천히 골라.”

채훈은 고개를 돌려 승건을 보았다. 얼음 심장을 가졌다는 녀석은 이럴 때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건 대단한 것 같았다.

“골랐어?”

시선이 마주치자 승건이 눈을 휘며 물었다. 얼굴 근육에는 큰 변화가 없는데 부드러운 눈빛은 웃는 게 분명했다.

네가 그렇게 웃어주니까 설렌다고 속으로만 투덜거린 채훈은 자연스럽게 물었다.

“기분이 좋아 보여.”

“그래?”

“응.”

몇 번의 경험으로 무슨 일이냐고는 묻는 대신에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승건은 어딘지 모르게 들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가 자신의 상태를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 잘 모르겠는걸.”

본인이 잘 모르겠다는데 채훈이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채훈은 고민하지 않고 팸플릿을 접어 다시 승건에게 넘겼다.

“이름이 제일 긴 거랑 짧은 걸로 할게. 그럼 되겠지?”

채훈은 시험 칠 때 찍은 적이 거의 없었다. 그래도 요령은 알았다. 오래 고민해도 답이 없으니, 재빨리 찍고 고민을 털어버리는 것이었다.

그러자 승건이 진하게 웃었다. 이번에는 눈은 물론이고 입술과 얼굴 근육까지 모두 움직였다. 지금껏 승건을 알고 지낸 채훈도 처음 보는 미소였다.

“기준이 이상하잖아.”

“그래서?”

“아냐. 잘 골랐어.”

채훈은 속으로만 따라 웃었다. 아무래도 오늘 승건의 기분이 제대로 업된 모양이었다. 꼭 낙찰받아 주겠다고 승건이 말하는 사이에 2부 경매가 시작된다고 알려왔다. 채훈은 승건과 함께 나란히 움직였다.

*

*

자선 행사라는 타이틀답게 와인 경매는 꽤 화기애애하게 진행되었다. 물론 특정 빈티지를 두고 불꽃 튀는 경쟁이 벌어지기는 했지만 매번 있는 해프닝이라고 했다. 채훈이 아무렇게나 고른 두 병의 와인은 승건이 낙찰받았다. 주목을 받지 않는 것이라서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렇게 2부 경매가 끝나자마자 채훈은 승건의 손에 이끌려 행사장을 빠져나왔다. 값비싼 와인을 사줬으면 됐지, 남아서 착한 종외손자 노릇은 하기 싫다는 승건의 의견을 채훈은 적극 존중해 주었다.

비가 내리는 도로는 여전히 밀렸다. 느릿느릿 움직이는 차량의 행렬을 바라보며 채훈은 진이 빠지는 기분에 눈을 감으며 승건의 어깨에 기대었다.

일종의 어리광이었다. 그래도 승건이 밀어내지 않았기에 은근히 친근함의 표현을 즐겼다.

10여 년 전에는 짝사랑을 들킬까 봐 마음을 졸였는데, 지금은 나이를 먹었다고 능글맞아졌다. 어쩌면 잘 안 될 게 뻔하니까 지금 이 순간을 즐기자는 자포자기의 마음일 수도 있었다. 그래도 설레고 안타까운 것은 여전했다.

“몸이 안 좋아?”

더욱이 승건이 무겁다고 싫은 소리를 하는 대신에 괜찮냐고 물어오니 기쁘기까지 했다. 그는 자신이 조금만 컨디션이 안 좋은 티를 내면 아픈 게 아니냐고 걱정했다. 감기 때문에 쓰러진 효과인지, 승건에게 자신의 이미지는 아무래도 연약한 걸로 찍힌 것 같았다.

자존심 때문이라도 채훈은 일부러 씩씩하게 굴었다. 그저 정신적으로 지친 것뿐이었다.

“그냥 이름만 보고 몇백만 원짜리 와인을 골라버린 게 충격이라서 그래. 그런 건 처음이었어.”

“다 괜찮은 빈티지야.”

“이건 순전히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이렇게 하면 내가 방패막이가 되기는 해?”

채훈은 승건의 어깨에 기댄 채 불쑥 질문을 던졌다. 둘의 사이를 모두 알고 있는 심정민이 운전을 하고 있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맞닿은 몸에서 승건이 소리 없이 웃는 게 느껴졌다.

“글쎄? 그래도 소문이 나긴 한 모양인지, 베타 남자를 몇 번 소개받았어.”

“아하.”

“귀찮아.”

귀찮다고 단언하는 승건의 감상을 들으며 채훈은 써니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승건은 오메가가 아니라 베타를 만났다고 했다. 베타가 승건의 취향일 수도 있었다.

문득 아주 단순한 의문이 생겼다.

“어, 음. 이건 캐묻는 건 아닌데. 좀 민감한 질문이긴 해.”

“말해 봐.”

“결혼에 뜻이 없다는 건 아는데, 결혼 제도에 대한 불신 말고 다른 이유는 없어?”

호기심에 가볍게 물어본 것이었다. 그런데 차 안의 분위기가 일순 냉랭해지는 것을 느꼈다. 계약을 변경하며, 승건의 일신에 대해 캐묻지 말라는 조항이 없어졌다. 그래도 채훈은 우선은 사과했다. 승건이 싫어하는 듯하니 얼른 질문을 취소하는 게 좋았다.

“미안. 곤란하면 대답하지 않아도 돼. 진짜 캐물으려고 하는 거 아니었어.”

“괜찮아. 딱히 비밀일 것도 없어. 너도 알고 있을 테니까.”

“모르는데?”

채훈은 몸을 바로 일으켜 승건을 보았다. 바보처럼 보이기는 싫었지만 모르는 건 모른다고 해야 했다.

시선이 맞부딪히자 승건의 눈빛이 차갑게 빛났다.

“외할아버지의 나이가 일흔이 넘은 지 오래인데, 외숙부는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경영에 관심이 없으셔. 직계는 나랑 동생뿐이지. 일단 공식적인 후계자는 동생이긴 한데, 아직 어려. 열일곱이거든. 그건 알고 있을 건데?”

“동생이 있다는 건 최근에 알았어.”

“걔가 제 몫을 하려면 10년은 더 있어야 해. 나는 중간에 연결고리일 뿐이야. 그런데 내가 결혼해서 아이라도 생기면 후계 문제가 복잡해져. 잘못했다가는 이 골치 아픈 일을 평생토록 해야 한다고. 평생을 이렇게 살고 싶지는 않아.”

마지막은 승건의 진심이 담겨 있었다. 채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승건은 밤도 주말도 없이 바빴다. 평생을 그렇게 일만 하며 살아야 한다고 하면 확실히 싫을 만도 했다.

또한 승건이 자신을 선택한 이유도 알 것 같았다. 남자에 오메가도 아니었다. 베타라도 여성이라면 아이를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은 우연이라도 아이가 생길 수 없는 상황이었다. 질척이지 않게 감정이 얽히지 말아야 한다는 조건만 지켜진다면 깔끔하게 즐기고 헤어질 수 있었다.

그제야 자신이 마음에 든다고 계약을 하자고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꽤나 오랫동안 궁금했던 것을 알게 되었는데도 기쁘지가 않았다. 수단으로 쓰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기쁠 수가 없었다.

채훈은 울컥 솟아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면서 그대로 승건의 어깨에 다시 머리를 기울였다. 기대했다가 포기하기를 반복하려니까 속이 상했다. 이러니까 짝사랑은 하는 게 아니었다.

“너는?”

“……응?”

갑자기 머리 위에서 들리는 반문에 채훈은 반 박자 늦게 반응했다.

“너는 결혼할 생각은 있어?”

“어……. 독신주의자는 아니지만.”

“아니지만?”

“사랑하는 사람이랑 결혼하면 좋겠다고 생각을 하고 있긴 한데, 현실적으로는 어렵다는 걸 깨달았다고 해야 하나?”

모든 건 다 진심인데, 대답이 두루뭉술해졌다.

연예인이나 유명인 중에 동성 커플이 많았고 그들의 결혼도 자주 이슈가 되었다. 동성혼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동성 결혼 전에, 이 사람과 결혼을 해야겠다고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세 번의 연애 중에 두 번은 대학교 때 했고, 나머지 한 번은 사회생활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깨졌다.

어느 정도 나이를 먹고 나서는 결혼 자체가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주변의 기혼자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결혼은 현실이라고 말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나 돈이었다. 그러나 그것 말고도 미래를 함께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 우선은 사는 게 바빠서 연애를 할 에너지도 없었다.

그냥 지친 거지. 그리고 하필이면 사랑에 빠진 상대가 이 녀석이고.

고개만 살짝 튼 채훈은 승건을 보았다. 그냥 잘생긴 얼굴을 보려고 한 행동이었다. 그런데 승건이 아까부터 이쪽을 보고 있었던 모양인지 눈이 마주쳤다.

여전히 승건의 생각을 읽을 수는 없었다. 다만 미간이 구겨져 있는 것을 보니 기분이 별로인 것 같았다. 자신이 무슨 못 할 소리를 했나 기억을 더듬어봐야 했다.

왜?

채훈은 소리 없이 입만 뻐끔거리며 물었다. 그러나 승건은 대답 없이 고개를 돌려버렸다. 괜히 찝찝한 기분이 들었지만 채훈은 딱히 뭐냐고 더 묻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비가 내리는 도로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좌회전을 하는 차량 때문에 정신이 들었다. H호텔에 가려면 우회전을 해야 했다. 혹시나 차가 밀려서 돌아가는 건가 싶은데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저기, 우리 어디 가는 거야? 이 길은 H호텔 가는 길이 아닌데?”

다시 자리에 바로 앉은 채훈은 승건을 보며 물었다. 아직 5시밖에 되지 않았으니까 저녁을 먹기에도 시간이 빨랐다.

“나 이사했어.”

불청객들이 승건의 아파트를 습격한 것이 벌써 한 달 전이었다. 승건은 보안 문제 때문에 호텔에서 생활하면서 새로운 집을 구하고 리모델링을 하고 있었다. 그게 다 끝난 모양이었다.

“이사? 언제? 주택이라고 했지?”

“주택 맞아. 어제 들어갔어.”

“어…….”

집들이 선물은 뭐가 좋을까 생각하던 채훈은 말문이 막혔다. 평범한 친구라면 작게는 두루마리 화장지나 작은 가전제품이라도 챙겨줬을 건데, 상대가 승건이니까 그럴 필요가 없었다.

“왜 말을 하다 말아?”

“응. 축하해, 라고 하려다가 뭔가 좀 이상한 것 같아서. 집은 어때?”

“마당이 넓어.”

“오.”

“거기에 코트도 만들었어. 스쿼시 코트.”

“그거 실내에서 하는 거 아니야? 그게 돼?”

“건축 허가를 따로 받아야 해서 시간이 걸렸어.”

들뜬 승건의 목소리는 평소와 확연히 온도가 달랐다. 그제야 채훈은 승건이 평소보다 기분이 좋은 이유가 스쿼시 코트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거기다 자랑을 하고 싶어 하는 것도 눈치챌 수 있었다.

아이고. 귀엽잖아.

세상 무심하고, 차가운 녀석의 속마음을 알아내는 것은 어려웠다. 때로는 머리든 속이든 까뒤집어 보고 싶기도 했다. 그런데 오늘은 좋아하는 장난감을 선물받은 아이처럼 굴고 있었다.

그의 무심한 언행에 상처받았다가도 이럴 때면 기분이 좋아졌다. 자신에게만 보여주는 모습이 아닐까 해서였다. 혹은 자신이 아주 소수의 존재에 들어간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구경시켜 줘. 얼마나 잘해놨는지 궁금해.”

채훈은 승건의 기대에 호응해 주었다. 그러자 승건이 너도 스쿼시를 배우라고 하는 바람에 한참 동안 투닥거려야 했다.

* * *

그건 수묵화였다.

가로로 긴 화선지 위에는 안개가 낀 시골길 풍경이 그려져 있었다. 웅장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흔하다면 흔한 그림이었다.

그럼에도 채훈은 그 앞에서 떠나지 못하고 계속 서 있었다.

성인 남자의 평균 키보다 세로로도 긴 그림은 넓은 벽면 한쪽을 온전히 차지했다. 상하로 비어 있는 공간은 그림과 함께 특별한 공간으로 변했다.

채훈은 마치 그림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마치 축축한 억새풀을 헤치며 홀로 걷고 있는 것 같았다.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고 그림을 보고 있자니 어느새 다가온 승건이 물었다.

“그림이 마음에 들어?”

“응. 아침 안개 속에 있는 것 같아.”

채훈은 꿈에서 깨어나는 기분으로 대답했다. 그림 하나가 이런 기분을 들게 할 수 있는지 처음 알았다.

주말에 교외로 외출을 한 것은 오랜만이었다. 그리고 학교 과제 때문이 아니라, 아무 이유 없이 미술관을 방문한 것은 처음이었다.

승건은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관람하는 것이 취미라고 했다. 한 달 전쯤에 미술관에 가기로 했다가 무산된 후에 오늘에서야 겨우 시간을 냈다.

몸을 움직이는 스포츠를 좋아하는 채훈은 그림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다. 사실 새로운 것을 경험하는 마음으로 미술관을 둘러보고 있었다. 지루한 감도 없지 않았는데, 이 그림을 발견하고는 그냥 넋을 놓고 말았다.

“이거 줄까?”

채훈은 요즘 자신의 귀에 이상이 생기거나, 혹은 이해력에 문제가 생긴 건가 하고 의심하는 순간이 자주 있다고 생각했다.

저걸 준다고?

혹시나 하고 승건을 향해 고개를 돌렸더니 이쪽을 보고 있는 그의 표정은 진지하기만 했다. 진심인 것이다.

“……뭘? 이걸? 이 그림이 네 거야? 아니잖아. 여긴 KL 그룹 거 아냐?”

“사면 돼. 아니면 다른 거랑 교환해도 되고.”

“산다니? 비싼 걸 텐데. 아니다. 안 줘도 돼. 필요 없어. 네가 줘도 저걸 둘 곳도 없어.”

채훈은 혹시나 승건이 진짜 그림을 준다고 할까 봐 얼른 수습했다. 전부터 생각했던 거지만 녀석은 뭔가를 계속 주려고 했다. 주는 것을 거절하지 않겠다고 했던 것은 자신이지만, 그래도 승건은 그 정도가 심했다.

그래서 계약서를 다시 쓰면서 몇 가지 조항을 더 추가했다. 그중의 하나가 승건이 주는 것은 동산으로 한정한다는 것이었다. 부동산은 천문학적인 금액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림은 분명 동산이었지만 채훈에게는 그림을 걸어둘 공간이 없었다. 채훈은 그 점을 분명하게 했다.

“그림을 걸 수 있는 집도 줄게.”

“왜 자꾸 뭘 주려고 해. 그리고 부동산은 안 받는다고 했어.”

“집에 저 그림이 걸려 있으면 어떨까 생각해 봐.”

하수의 꼬드김이었다. 원래부터 물욕이 그다지 많지 않았던 채훈은 넘어가지 않았다.

“그림이라면 여기서 보면 돼.”

“그럴 줄 알았어.”

다행히도 승건은 더 이상 주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채훈은 다시 그림을 보았다.

“나는 지금까지 그림이 좋은 이유를 몰랐는데, 이걸 보니까 알겠어. 근데 웃긴 거 알아? 다른 수묵화는 딱히 별 느낌이 안 들어.”

“김산의 다른 그림을 보면 알 수 있겠지. 화가와 맞을 수도 있는 거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김산은 채훈이 보고 있던 그림의 화가였다. 채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승건을 다시 보았다.

“넌 어떤 그림을 좋아해?”

“굳이 꼽는다면 정물화와 역사화. 특히 시대상을 알 수 있는 역사화를 좋아해.”

“그래서 방마다 정물화가 걸려 있었구나.”

채훈은 승건의 집에 걸려 있는 그림들을 떠올렸다. 휑하기 짝이 없는 승건의 집에서 유일하게 인테리어라고 볼 수 있는 것이 그림이었다. 크고 작은 그림들이 대부분 정물화라는 것을 떠올린 채훈은 웃었다.

승건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또 잘 어울렸다.

“커피 마시러 가자. 커피. 목말라.”

이미 미술관 한 바퀴를 다 돌았다. 계속 그림 앞에 서 있을 수는 없었다. 이제는 돌아갈 때였다.

*

*

녹음으로 둘러싸인 커다란 호수에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광경은 한 폭의 그림을 닮아 있었다. 미술관에 딸린 작은 건물에 자리한 카페의 커다란 테라스 창가에 앉아 비가 내리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채훈은 기분이 묘해졌다.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공개 행사에 참석하는 것이 아니라 승건이 보고 싶어 하는 전시회에 왔다는 점이 확실히 데이트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이번에는 혼자만의 바람이 아니라 데이트가 맞았다.

계약 연애지만, 연애니까 데이트 맞지 뭐.

채훈은 자신 멋대로 결론을 내렸다. 이런 걸로 맞다 아니다 고민하는 것은 에너지 낭비였다. 좋아하니까 이런저런 망상 좀 할 수 있는 법이었다.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삼킨 뒤, 카페 밖의 테라스에 서 있는 승건을 눈으로 좇았다. 토요일인데도 업무 전화를 받아야 하는 그는 여전히 바빴다. 오늘 저녁도 업무 관련으로 만날 사람이 있다고 했다.

주말이면 배터리 충전을 하듯 쉬어야 주중을 버틸 수 있는 평범한 직장인인 채훈은 바쁘게 사는 승건이 안쓰러워 보였다. 남들이 간절히 바라마지 않는 권력을 손에 쥐고도 귀찮아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저렇게 사는 것도 아무나 못 하는 거라고 생각하며 채훈은 승건을 계속 바라보았다.

고지식한 클래식 슈트가 아닌 조금 더 편한 캐주얼 슈트를 입은 승건은 옆모습도 잘생겼다. 미술관에서 마주친 어떤 여성은 혹시 신인 배우냐면서 이름을 물어보기도 했었다. 확실히 승건의 미모는 그런 오해를 받고도 남을 정도였다.

다만 잘생긴 턱 아래쪽에 선명한 푸른색 멍이 자리 잡고 있는 게 흠이라면 흠이었다. 반사적으로 멍이 생긴 과정을 떠올린 채훈은 쓴웃음을 삼켰다.

“미안하네.”

승건의 턱에 생긴 멍은 채훈의 작품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채훈과 승건의 합작품이었다.

채훈은 어제의 기억을 천천히 되새겼다. 승건이 장담한 대로 넓은 마당에 지어진 붉은색 벽돌의 스쿼시 코트 건물은 아주 훌륭했다. 시합용 사이즈로 지어진 스쿼시 코트 건물에 비해 집 자체에는 그다지 개성이 없었다. 내부 인테리어는 여전히 휑했고 필요한 가구만 자리하고 있었다.

오히려 채훈이 인상 깊었던 공간은 반지하에 꾸며놓은 체력 단련실이었다. 널찍한 공간의 한쪽 벽면은 거울이었다. 그리고 러닝머신 외에도 웨이트를 할 수 있는 여러 운동 기구가 자리했다.

그러다가 반대편 벽에 헤드기어와 보호대가 걸린 것에 눈이 갔다. 승건이 호신술을 배울 때 쓰는 거랬다. 그게 시발점이었다.

처음 설명을 들었을 때는 그러냐고 넘어갔다. 냉장고에 준비되어 있는 저녁을 먹으면서 호신술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둘이 싸우면 누가 이기느냐로 설왕설래하게 되었다.

꾸준히 운동을 해온 채훈은 제대로 싸우면 승건을 이길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승건 역시 자신이 질 리 없다고 자신했다. 그냥 웃어넘기면 될 일인데, 어느새 자존심 문제가 되어서 결국 한 판 붙어보기로 했다.

장소는 바닥에 매트리스가 깔려 있는 반지하 단련실이었다. 솔직히 처음에는 단순히 서로의 실력을 가늠하는 정도였다. 분위기는 부드러웠고 서로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데 집중하기로 했다. 그러나 교본대로 몇 번 주고받기를 하다가 어느새 진심이 되어버렸다.

채훈은 자신보다 키가 훌쩍 큰 승건에 비해 신체적 조건이 불리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 번 잡히면 끝장이었기 때문에 자신에게 덤벼드는 승건의 품에 파고들어 팔꿈치로 턱을 후려갈기고 말았다.

퍽 하는 불길한 소리에 채훈은 사과부터 했다. 팔꿈치에 전달된 충격의 정도가 상당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승건은 사과를 받지 않고 눈을 번뜩이며 두고 보자고 이를 갈았다.

먼저 잘못한 게 있었던 채훈은 수세적으로 굴다가 결국 승건의 발길질에 발목이 채어 넘어지고 말았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몸을 내리누르는 승건의 굳히기 기술에 항복해야 했다.

대련은 거기서 끝났다. 하지만 승건이 그 자세 그대로 키스를 하는 바람에 그 자리에서 섹스가 시작되고 말았다. 격렬하다는 말이 어울리는 섹스였다.

어젯밤의 기억을 떠올리던 채훈은 열이 오르는 뺨을 문질렀다. 섹스는 체력 단련실에서 끝나지 않고 침실로 이어졌다. 힘도 좋은 승건의 어깨에 짐이라도 된 듯 옮겨진 것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침실에서의 섹스도 평소처럼 질척거렸다. 새로운 침대가 얼마나 넓고 튼튼한지 온몸으로 경험했다.

거기까지는 잘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한 번 더 하자고 덤비는 승건을 발로 걷어차 버렸다.

채훈은 승건에 대한 불만이 여럿이었고, 그중에 짐승 같은 체력과 성욕이 있었다. 채훈도 체력은 나름 자신 있는데 따라가질 못했다.

그건 네가 잘못했어. 어젯밤에 그렇게 하고도 왜 또 아침에 덤벼. 내 허리는 강철이 아니라고.

채훈은 아침에 승건에게 했던 말을 소리 없이 중얼거렸다. 하자는 대로 했다가는 진짜 허리가 남아나질 않을 것 같았다.

세상 하찮은 고민을 진지하게 하고 있던 채훈은 휴대폰 진동에 정신을 차렸다. 통화 가능하냐는 서주명의 메시지에 그렇다고 답장을 보냈다. 그러자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응. 무슨 일이야?”

―괜찮은 방을 골랐는데, 내일 계약할 때 엄마가 같이 가자네. 너는 굳이 같이 안 가도 될 것 같아서, 미리 알려주려고.

서주명이 맡았던 프로젝트가 수요일에 드디어 마무리되었다. 목요일부터 정상적으로 퇴근하던 녀석은 주변 오피스텔 정보를 뒤지더니 오늘 하루 종일 발품을 팔았다.

계약할 때는 채훈이 동행하기로 했었다. 워낙에 똑 부러지는 녀석이긴 하지만 이런 일에는 혼자보다는 둘이 나았다. 그런데 서주명의 어머니가 동행한다면 채훈이 굳이 따라갈 필요가 없었다.

“어. 그럼 다행이네.”

―언제 돌아와?

“오늘 저녁에. 오랜만에 같이 고기 구워 먹을까?”

―그래도 괜찮아? 승건이는?

“일이 있대.”

―바쁘네. 출발하면 연락해.

통화는 짧게 끝났다. 그사이에 돌아온 승건이 맞은편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의 턱에 있는 푸른 멍에 제일 먼저 눈이 갔다. 그렇게 눈에 띄지는 않는데, 자신이 만든 거라서 계속 신경 쓰이고 미안했다.

“누구야? 주명이?”

“응.”

“집은 찾았대?”

“내일 계약한대.”

“잘됐네.”

승건이 노골적으로 좋아하는 바람에 채훈은 웃고 말았다. 어지간한 것은 별것 아니라고 넘어가는 녀석이 유독 서주명을 싫어했다.

“오늘 자고 가. 가능하면 일찍 돌아갈 테니까. 저녁은 같이 못 먹겠지만, 어제 낙찰받은 와인이 도착했을 거야.”

“싫어.”

채훈은 승건의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걸 예상 못 했는지 승건이 한쪽 눈썹을 꿈틀거렸다.

“왜?”

“이유는 세 개인데, 하나만 말할게.”

“말해 봐.”

“네가 손만 잡고 안 잘 거라서. 나 지금 상태 그다지 안 좋아.”

채훈은 조금 피곤한 투로 이유를 말했다. 밤새도록 혹사당한 허리도 엉덩이도 상태가 썩 좋지 않았다. 찔리는 게 있는 모양인지 승건은 손만 잡고 잘 수 있다는 등의 말로 환심을 사지 않았다. 그것만큼은 거짓이 없는 녀석이었다.

“너는 좀 과해. 하다가 말라 죽을 것 같은 기분이야. 그게 싫다는 건 아닌데. 가끔은 감당이 안 돼.”

한낮의 카페에서 깊이 있게 할 말은 아니었다. 그래도 말이 나온 김에 채훈은 그간의 불만을 전했다.

“나는 과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내 기준으로는 과한 거 맞아. 총량이 100이면, 너는 자주 그걸 넘어. 가끔은 아주 심각하게.”

채훈의 기준으로 따지자면 승건의 성욕은 아주 왕성한 편이었다.

자신도 섹스를 좋아하는 편인데 승건을 따라갈 수 없었다. 어제 무리한 때문에 오늘도 정오가 다 되어서야 깰 수 있었다. 그만큼 무리했다는 의미였다.

섹스 파트너든, 혹은 계약 연애든 이런 문제는 서로 이야기를 하고 합의점을 찾아야 하는 법이었다. 혹시 이번에도 승건이 계약이니까 자신의 마음대로 할 거라고 할까 싶어 마음이 졸여졌다. 그에게 실망하지 않기 위해 미리 방어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조금, 기분이 별로였다.

“이틀 연속은 무리라는 거군.”

“뭐……. 비슷해.”

결론이 이상했지만 대충 뜻은 비슷했다. 스스로가 내린 결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승건이 살짝 콧잔등을 찌푸렸다.

콩깍지의 무서운 힘 때문인지 그 모습도 이제 귀여워 보였다. 정말 큰일이었다.

“어? 채훈이 아니야?”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익숙한 얼굴의 남자가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채훈의 대학 선배였다. 보건 행정은 과의 특성 때문에 동기는 물론이고 선후배들 사이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특히 1년씩 차이 나는 선후배들은 많이 부대끼는 편이었다. 남자는 바로 한 학년 위의 과대까지 했던 선배였다.

채훈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서 가볍게 악수를 하며 근황을 물었다. 가볍게 서로의 안부를 묻고 답하는 와중에 선배가 자연스럽게 채훈의 동행인 승건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의 눈에는 호기심이 가득했다.

“누구야?”

“어……. 애인이요.”

채훈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대답했다. 고등학교 동기라고 하려다가, 계약 연애를 하고 있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은 마음에 충동적으로 질러버렸다.

새로 쓴 계약서에는 주변 사람들에게 애인이라고 소개할 수 있다고 되어 있었다. 자신의 성적 취향은 역시 대학 다닐 때 이미 간접적으로 알려진 상태였다. 대학 동기와 사귄 적도 있었다. 문제 될 건 하나도 없었다.

선배가 승건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곧 호탕하게 웃었다.

“애인 잘생겼네. 난 이제 간다. 나중에 연락하자.”

간단하게 인사를 한 선배를 배웅한 채훈은 제 자리에 앉았다. 승건이 시선을 주는 바람에 같이 마주 봐주었다. 그의 표정이 아주 오묘했다.

“왜?”

“아니야.”

뭔가 할 말이 많이 있는 것 같아 보였지만 승건은 아니라고 했다. 그 짧은 순간에 얼굴도 평소처럼 돌아왔다. 제 감정과 표정을 조절하는 데 정말 능숙한 녀석이었다. 하지만 자신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기분이 이상해.”

“네가?”

“눈덩이처럼 불어난 거짓말이 어떻게 될까 무섭거든.”

그런데 또 계약이 끝나면 아무것도 아닐 것 같기도 하고. 마지막 생각은 소리가 되지 못하고 목구멍 너머로 꿀꺽 삼켜졌다. 쓰고도 신, 그리고 무거운 감정이 몸 안쪽 어딘가에 천천히 가라앉았다.

계약 연애와 진짜 연애는 다른 게 여럿이었다. 필요에 의해 주위에 거짓말을 하고 있고, 그리고 끝이 정해져 있다. 시작도 남달랐으니 끝도 아마 진짜와 다를 것이다.

채훈은 승건을 보며 어떻게 끝이 날까 생각해 보았다. 처음에는 그저 1년을 버텨보자고 생각했었다. 그를 좋아하고 나서야 시간이 흘러가는 게 시원섭섭하면서도 안타까웠다.

승건을 처음 만난 것은 차가운 바람이 부는 겨울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여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다시 겨울이 찾아오면 끝이었다.

승건은 처음부터 1년이라고 기한을 두었다. 계약서를 다시 쓰면서도 그것은 변함이 없었다.

겨울이 오면 헤어진다.

무슨 예언 같기도 하고 시의 한 구절 같기도 했다. 그리고 자신답지 않은 감정적인 생각이었다. 어제 오늘 유달리 그랬다. 아마도 비가 내려서 그런 모양이었다.

채훈은 승건을 보며 싱긋 웃었다. 길게 고민할 게 아니었다. 고백은 못 하겠지만 마음껏 좋아하면 그만이었다. 손가락만 빨고 있을 것도 아니고 말이다. 한참을 바라보며 웃자 승건이 또다시 오묘한 얼굴을 했다.

“왜 그렇게 웃어?”

“그냥?”

“뭐야?”

“네 턱에 멍이 웃겨서?”

채훈은 슬쩍 말을 돌렸다. 사실 멍이 웃기기는 했다. 이번에 다시 승건이 부루퉁한 표정을 지었다.

“결국 내가 이겼어.”

“내가 봐준 거거든. 너도 알잖아.”

“나중에 다시 해. 봐주지 말고.”

“이번에는 눈에 멍들게 할까 봐 겁나네.”

“나도 마찬가지야.”

웃음기를 머금은 시시한 잡담이 이어졌다. 마지막에도 이렇게 웃으면서 헤어질 수 있으면 좋겠다고, 채훈은 그렇게 생각했다.

* * *

채훈이 승건의 차를 타고 집에 돌아온 것은 5시가 되기 직전이었다. 접대 미팅이 있는 승건에게 조심해서 가라고 하고는 헤어졌다.

서주명은 볼일이 있어 오피스텔에 없었다. 채훈은 서주명을 기다리며 밀린 집안일을 했다. 빨래를 하고, 싱크대를 청소하고, 먼지를 털어내자 7시가 되는 것은 금방이었다. 그리고 때맞춰 돌아온 서주명과 함께 약속대로 늘 가던 고깃집으로 향했다. 루틴은 한결같았다.

고기를 시키고 잡담을 나누었다. 한 달 동안 매일 보는 얼굴이었지만 서로가 바쁜 탓에 제대로 된 이야기를 나눈 지가 오래되어 이런저런 대화를 했다.

서주명이 새로 얻은 오피스텔의 위치와 이사 시기를 따졌다. 채훈은 오늘 본 그림 이야기를 했다. 그 외에도 비가 오래 내린다. 올해는 덥다더라. 이사 가는 오피스텔 에어컨이 잘 작동되는지 확인해라.

특별할 것 없는 저녁 시간이었다. 승건에게서 연락이 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채훈은 진동하는 휴대폰의 액정에 뜬 이름이 승건인 걸 보고 놀랐다. 메시지가 아니라 전화를 먼저 한 것은 오랜만이었다.

채훈은 서주명의 눈치를 보며 전화를 받았다.

“어, 나야. 무슨 일이 있어?”

―뭐 해?

“밥 먹어.”

―서주명하고?

“응. 주명이랑.”

채훈은 서주명을 힐끗 보았다. 작은 눈을 땡그랗게 뜨던 서주명이 곧 웃었다. 통화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챘다는 의미였다.

―어디야?

“고깃집.”

―집 근처지? 상호 불러.

“왜? 설마 오려고?”

―상호나 말해.

설마 싶어서 물었는데 승건이 다시 상호를 묻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여기 제주맛흑돼지야!”

오지 말라고 말하려는 순간에 이쪽으로 몸을 기울인 서주명이 큰 목소리로 상호명을 외쳤다.

―30분 내로 도착할 거야. 어디 가지 말고 기다려.

채훈이 어이없는 눈으로 서주명을 보는 사이에 승건이 제 할 말만 하고 통화를 끝냈다. 달리 어떻게 할 새도 없었다.

“승건이 온대?”

“어.”

“드디어 얼굴 보겠네.”

채훈은 기대감에 웃는 서주명을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고등학교 시절의 기억이 통째로 사라졌다는 승건이었다. 그는 서로 만나면 어색할 테니까 만나지 않을 거라고 단언했다. 물론 지난번에 승건이 서주명과 얼굴을 맞대기는 했지만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었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찾아오겠다고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채훈은 잔에 가득 찬 소주를 한입에 털어 넣으며 고개를 갸웃거려야 했다.

*

*

채훈은 승건이 옷을 갈아입었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업무상 미팅이라고 하더니 평소처럼 각 잡힌 짙은 회색 슈트를 입고 있었다. 고기 굽는 연기가 풀풀 나는 식당과 어울리는 옷차림은 아니었지만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대부분 자신의 테이블에 집중했다. 그 외의 사람들은 승건의 얼굴을 넋 놓고 쳐다보기 바빴다.

새삼 미남 효과가 대단하다고 느낀 채훈은 웃으며 승건을 반겼다. 서주명과 간단한 인사를 한 승건이 둥그런 탁자 한쪽을 차지했다.

이쪽은 거의 식사가 끝난 상태였고 승건 역시 이미 저녁을 먹고 왔다고 했기 때문에 추가 주문은 시키지 않았다. 대신에 소주잔을 하나 더 받아 승건 앞에 두었다.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했지만 그래도 젓가락을 챙겨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서주명이 유난을 떤다는 눈빛을 보내왔지만 채훈은 개의치 않았다.

“미국에서 지냈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어떻게 지냈냐?”

한잔 하자며 승건의 잔에 소주를 채워주던 서주명이 가장 무난한 질문부터 했다. 승건은 술을 받기는 했지만 마시지는 않고 내려놓았다.

“안 마셔?”

“술은 잘 못 마셔.”

“말술을 마시게 생겨놓고는. 억지로 안 마셔도 돼. 아, 그리고 동창회에 왔으면서 왜 그냥 갔어?”

서주명이 방금 생각났다는 듯 물었지만, 채훈은 승건이 온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부터 벼르고 있었다고 확신했다.

“기억이 안 나서.”

“응?”

“나 기억을 잃어버렸어. 수능 직전에 사고를 당해서, 고등학교 시절 기억이 없어.”

“어? 진짜? 기억이 없어? 나도?”

“이름하고 얼굴만 겨우 매치시킬 수 있어.”

“세상에.”

“동창회에서 인사를 못 한 것도 그것 때문이야. 오랜만에 한국에 돌아왔다가 우연찮게 동창회를 한다고 들었거든. 그래서 혹시나 아는 얼굴을 보면 기억이 날까 했는데, 다 낯설더라고.”

“그럼 채훈이는? 둘이 사귄다면서?”

“제일 많이 기억나긴 해. 축구 못하는 거랑 달걀말이 좋아하는 거 같은 거.”

“네가 채훈이랑 제일 친하기는 했지. 인연이네. 기억을 잃었는데도 얘만 기억하는 걸 보면.”

둘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채훈은 인연이라는 서주명의 말에 아무렇지 않은 척 소주를 들이켰다. 이미 승건에게서 한 번 들은 이야기였는데, 제삼자와의 대화로 다시 들으니까 속이 간지러운 기분이었다.

승건이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을 안 서주명은 자세한 질문을 삼갔다.

주말이라 대기하고 있는 손님이 있는 탓에 오래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기 애매했다. 장소를 옮긴 후에 이야기를 이어가기로 결정했다. 간단하게 2차를 할 장소를 정하고 채훈이 화장실에 다녀오자 서주명이 보이지 않았다.

“주명이는?”

“일찍 간대. 눈치 없이 끼어들기 싫다고. 계산도 그 녀석이 했어.”

“눈치가 너무 있네. 그런데 괜찮아? 다 말해도?”

“미리 말해 두는 게 낫지. 우연찮게라도 마주칠 수 있으니까.”

그건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던 휴대폰이 울렸다. 채훈은 액정에 뜬 형의 이름을 보고 살짝 인상을 썼다. 아무래도 승건의 앞에서 받기가 껄끄러웠다.

“안 받아? 아까도 전화가 왔는데.”

“나중에.”

“형이랑 사이가 별로인가 보네.”

나중에 따로 연락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휴대폰을 무음으로 바꾸던 채훈은 승건을 보았다. 서주명이 아니라 녀석의 눈치가 비상했다. 채훈은 가능한 한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싸웠어.”

“심각해 보이는데.”

“형제 싸움이 그렇지.”

“사랑하는데 실망하고?”

“기억력도 좋다.”

채훈은 20여 일이나 지난 대화를 기억하는 승건의 기억력에 혀를 내둘렀다.

그런데 승건이 제법 진지한 얼굴을 했다.

“싫으면 싫다고 해.”

“응?”

“싫다고 하라고. 가족이라도 자꾸 내어주는 버릇은 나빠.”

냉정한 조언은 확실히 승건이 할 법한 말이었다. 가족에게 무르다는 소리는 주명에게도 많이 들었다. 그래도 이대로라면 안 되니까, 싫다는 소리를 해야 하는 것은 맞았다.

“네 말이 맞아. 그래도 그게 쉽지 않아.”

“그래서? 어떻게 하려고”

“멀리 떠날까 싶은데, 그것도 어렵지. 이제 나가자.”

속마음을 잠깐 털어놓은 채훈은 얼른 화제를 전환시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

우산을 챙겨 고깃집에서 나오자 비가 그쳐 있었다. 토요일 저녁의 식당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2차로 가기로 한 치킨집은 옆옆 건물이었다. 채훈은 승건을 돌아보며 물었다.

“어떻게 할래? 주명이 없이 2차?”

“아니.”

“집에 갈 거야?”

“나랑 같이 가.”

“……?!”

채훈은 승건이 데리러 왔다는 주체가 자신이라는 것을 반 박자 늦게 깨달았다. 그러니까 같이 승건의 집에 가자는 것이었다. 눈을 둥그렇게 뜨고 승건을 보았다. 자신이 이해한 게 맞나 의아했다.

“손만 잡고 자지는 못해. 그래도 100이 넘치지 않게 이것저것 시도해 볼 수는 있지.”

낯부끄러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승건의 표정과 목소리는 크게 기복이 없었다. 반면에 채훈은 얼굴을 붉혀야 했다. 삽입 없이 이것저것 잔뜩 했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온 거야?”

“응.”

“너무 밝히는 거 아니야?”

“싫으면 말해. 계약은 주말 하루였으니까.”

반쯤 감동하려다가 계약이라는 단어에 현실감이 들었다. 그래도 기대감이 어린 승건의 얼굴을 보자니 차마 싫다는 소리가 쉽게 나오지 않았다.

확실히 녀석에게 빠져 있기는 했다.

“싫어. 내일 하루는 쉴 거야. 할 일도 있고.”

싫다고 딱 잘라 말하자 승건의 눈이 커졌다. 거절을 당할지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는 반응이었다.

승건에게 반한 상태였다. 원하는 것은 다 들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너무 끌려갔다가는 자신의 마음을 들킬 것 같았다. 무엇보다 내일 해야 할 일들이 많이 있었다.

“너도 들어가. 차는 어디 있어? 기사님 불러. 배웅해 줄 테니까.”

“가라고?”

어딘가 부루퉁한 얼굴을 한 승건이 잠시 인상을 쓰며 물었다. 채훈은 모르는 척하고 웃었다.

“안 갈 거야?”

“너는?”

“나도 집에 가야지. 바로 저기야.”

채훈은 큰길 쪽을 가리켰다. 여기서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바로 앞이었다.

“같이 가자. 차는 저기서 부르고.”

승건이 먼저 몸을 돌려서 어서 가자고 눈짓했다. 잠시 어리둥절하던 채훈은 얼른 그의 옆에 섰다.

천천히 길을 걷자 뭔가 기시감이 들었다. 밤길을 걷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지난번에 클럽에서 돌아와 아파트 주차장에서 일식집에 갈 때는 도로 하나만 건너는 게 전부였다. 오늘처럼 인도를 걷는 것이 언제였을까 기억을 더듬다가 과거의 어느 순간이 툭 떠올랐다.

10여 년 전, 그에게서 등산화를 빌리기 위해 함께 걷던 그날 밤이었다.

그때와는 많은 것이 달랐다. 식당 거리는 오가는 사람도 차량도 많았다. 계절도 겨울이 아니라 여름이었다. 더 이상 열아홉 살도 아니었다.

같은 점이라고는 승건이 자신의 왼쪽에 서 있고, 조금 올려다봐야 한다는 것 정도였다.

그리고 여전히 가슴이 뛰었다.

채훈은 슬쩍 승건을 보았다. 나이를 먹었더니 좀 더 감정을 능숙하게 숨길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짝사랑하는 것을 숨기기 위해 안절부절못하면서도 겉으로는 필사적으로 무던하게 굴었던 그때와 지금이 얼마나 다른지 알 수 없었다.

먼저 사랑에 빠지는 쪽이 약자가 되는 법이었다. 조금이라도 미움받지 않기 위해, 그리고 호감을 사기 위해 최대한 맞춰주는 것은 기본이었다. 감정이 롤러코스터를 탄다.

부루퉁한 모습이 귀엽다가, 혹시나 화가 난 게 아닌가 걱정했다가, 그래도 한 번 더 같이 가자고 권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었다.

그래서 짝사랑에 가슴이 너덜거리는 것이다.

뒤죽박죽 섞이는 감정에 한숨을 삼키는데 승건과 눈이 마주쳤다. 그가 천천히 눈을 깜박거렸다. 속눈썹이 만들어낸 그늘 아래 선명한 눈동자가 자신을 향했다.

그런 순간이 있다. 작은 동작 하나가, 아무렇지 않은 말 한마디가 온전히 가슴에 담기는 순간이 말이다.

채훈은 그냥 웃고 말았다. 오늘따라 너무 감상적이었다. 아까 미술관에서도 이러더니 지금도 그랬다. 애틋함이 가득 차다 못해 넘쳐버렸다.

“왜 그래? 아까부터 계속 웃잖아.”

“술을 마셔서?”

술은 적당한 핑계였다. 아니나 다를까 승건도 납득을 한 모양인지 피식 웃고 넘어갔다.

“수요일에 보자. 일찍 와서 연습 좀 하고 있어.”

“연습?”

“안 봐줄 거라며.”

“너야말로 연습해야 하는 거 아니야? 완전 뻣뻣한 거 알지?”

다시 가벼운 잡담이 오갔다. 습기를 머금은 6월의 바람이 불었다. 계절은 이제 여름이었다.

* * *

가게의 간판은 꺼져 있었고 내부의 조명도 최소한만으로 켜져 있었다. 폐점 시간이 지난 가게에는 손님 하나 보이지 않았다.

채훈은 능숙하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조명 가게는 아버지가 운영했을 때와 구조가 크게 바뀌지 않았다. 물건들의 위치가 조금 바뀌었을 뿐이라서 채훈에게는 익숙한 장소였다.

“형. 나 왔어.”

“여기야.”

안쪽에서 강수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채훈은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게 안쪽에 창고와 화장실로 이어지는 문에서 강수찬이 나타났다.

“시간 맞춰 왔네. 밥 먹으러 가자. 오랜만에 고기나 먹을까?”

“아니. 밥 먹으면서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아.”

“하, 폼 잡기는. 그래.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거기 앉아봐.”

파티션으로 가려진 공간에는 손님들을 접대하기 위해 탁자와 의자가 있었다. 채훈은 의자를 하나 빼내어 앉았다.

“할 말이 있으면 해봐.”

강수찬이 담배에 불을 붙이면서 물었다. 채훈은 당장에 대답하는 대신에 지난번의 싸움을 복기했다. 회유와 욕설, 빈정거림의 끝에 튀어나온 것은, 강수찬이 원하는 것은 노골적인 욕망이었다.

강영환에게 승건을 양보하라고 한 강수찬의 계획은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채훈에게 강영환과 승건이 단둘이 있을 상황을 만들어주라고 했다. 둘이 알파고 오메가니까 눈 맞는 것은 금방이라고 떠들어댔다.

우선 애부터 생기면 결혼은 문제없다고, 요새 속도위반은 흠도 아닌 데다가 후계자가 생기는 거니까 그쪽에서도 좋아할 거라면서 혼자 결정을 내렸다. 채훈이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고 따졌지만 말이 통하지 않았다.

임신만 하면 결혼은 하지 않아도 큰돈을 받을 수 있으니까 괜찮다고, 그게 가족을 위한 거라고, 자신이라면 가족을 위해 희생할 거라고, 다들 그러고 산다는 궤변에 채훈은 충격을 받았다.

눈앞에 있는 남자가 지금까지 자신이 알고 있던 형이 맞았나 의심했다. 적당히 맞춰주기만 하면 별 탈 없이 지낼 수 있었던 형이 돈에 눈이 멀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채훈 역시 돈이 필요해서 그리고 가족의 안위를 위해 자신을 팔았다. 승건에게 먼저 제안을 받긴 했지만, 결국 선택한 것은 자신이었다. 그것 말고는 달리 더 좋은 방법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또다시 극단적인 상황에 몰린다면 발버둥 칠지도 몰랐다.

그래도 지금은 아니었다. 당장에 목숨이 위험하지도 않았고, 돈 때문에 가족이 거리에 나앉을 일도 없었다.

“형이 무얼 계획하든, 나는 안 해. 그 말 하려고.”

채훈은 가능한 한 얼굴을 일그러뜨리지 않고 가볍게 말하려고 노력했다. 또다시 싸우고 싶지 않았다.

“무슨 소리 하는가 했다. 겨우 그 말 하려고 보자고 한 거야?”

“어제 형이 찾아오라고 했잖아.”

어젯밤에 승건과 헤어지고 나서 강수찬과 통화했다. 채훈에게 할 말이 있다고 찾아오라고 한 것은 강수찬이었다.

“그래. 네가 정신 차릴 줄 알았지. 이기적인 새끼. 너 혼자 잘 살면 좋아? 가족이라면 서로 돕고 살아야 하는 거 아니야?”

“가족이라도 아닌 건 아닌 거야. 아니, 가족이라서 더 못 하는 거야. 형.”

“뭐?”

“형이 진심으로 부끄럽고 실망스러워.”

“야. 강채훈. 씨발. 내가 뭐?”

차분한 채훈의 비난에 강수찬이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형을 설득 못 하는 거 아니까, 여기서 끝낼게. 앞으로 형이 뭘 하든 상관하지 않을게. 거기에 날 끼워 넣지 마.”

“지금 인연 끊겠다는 거야?”

“형이 그러고 싶으면 그렇게 해. 그리고 엄마랑 이야기 끝났어. 내 마음대로 하래. 영환이도 화를 내던데. 형 혼자 말도 안 되는 계획에 열 내고 있는 거잖아.”

여기에 오기 전에 채훈은 집에 먼저 들렀다. 어머니는 그런 짓을 했다가는 큰일 날 거라고 형을 말리라고 했다. 강영환과는 통화밖에 못 했지만 강수찬의 계획을 전하자 화를 냈다. 그딴 일을 자기가 왜 하느냐고 말이다.

“네가 한다고 해야 시작하는 거잖아.”

“그러니까 안 하겠다고. 말 다 했으니까, 이제 갈 거야. 인연을 끊든 말든 그건 형 마음대로 해.”

최후의 선언까지 한 채훈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씨발. 너는 혼자만 잘났지? 재벌이랑 사귄다고 네가 뭐라도 된 것 같아? 정신 차려. 그 자식이 널 평생 끼고 살 것도 아니잖아! 한철이라고! 한철!”

“나 간다.”

채훈은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는 강수찬에게 인사를 하며 뒤돌아섰다. 등 뒤에서 와장창하며 뭔가 깨지는 소리가 났지만 뒤돌아보지 않고 가게를 나왔다.

하고 싶은 말은 다 했지만 속은 후련해지지 않았다. 술이 필요한 밤이었다.

* * *

“아이고. 어서 오세요. 대표이사님. 시간에 딱 맞춰 오셨네요.”

만면에 미소를 지은 남자는 채훈과 닮은 모습이었다. 섬세하게 생긴 채훈과 달리 선이 굵고 살이 찌긴 했지만, 나란히 앉아 있다면 누구나 한 핏줄이라고 생각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 속에 든 것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가볍게 인사를 한 승건은 천천히 강수찬의 가게를 둘러보았다. 도소매로 조명을 취급하는 가게는 제법 규모가 컸다. 조명 거리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드는 크기였다. 하지만 내실이 부실하다는 보고서를 승건은 이미 읽은 바가 있었다.

수완이 좋았던 형제들의 아버지에 비해 강수찬은 경영에 재주가 없었다. 아직은 그럭저럭 가게를 유지하고 있지만, 아버지와 오래 거래를 했던 손 큰 고객들이 하나둘씩 떨어져 나가면서 형편이 나빠지고 있는 중이었다. 거기다가 허세가 강하고 허술한 성격 탓에 도박성에 가까운 투자가 계속 실패하면서 빚도 잔뜩 진 상태였다.

채훈과 달리 성실함과 거리가 먼 강수찬은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한, 전형적인 기회주의자였다.

승건은 채훈이 형과 돈 문제로 싸웠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처음 거래 이후에 채훈은 형의 빚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값비싼 선물이 아니라 돈으로 달라고도 하지 않았다. 그게 채훈 나름의 자존심을 지키는 방법이라는 것을 승건도 알고 있었다.

그래도 승건은 좀 더 자세한 내막을 알고 싶었다. 조심스럽게 강수찬의 뒤를 캐는 것뿐만이 아니라 심정민을 직접 보내서 미끼를 흔들게 만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강수찬의 반응은 승건의 예상을 빗나가지 않았다. 사람 보는 눈이 꽤 정확한 심정민은 강수찬을 사기꾼에 가깝다고 평했다. 사람 좋은 얼굴로 자기 좋을 대로 아부를 하다가 하소연을 하면서 돈 이야기를 끊임없이 하다가, 마지막에는 채훈의 이름을 들먹이며 승건과 만나야 한다고 매달렸다고 했다. 채훈과 관련해서 중요하게 할 이야기가 있는데, 승건에게 직접 해야 한다고 말이다.

뻔한 수작이었다. 그래도 승건은 강수찬의 장단에 놀아나 주기로 했다. 강수찬이 채훈에 대해 어떤 중요한 이야기를 할지 궁금했다.

물론 진짜 목적은 따로 있었다.

“이쪽에 앉으시죠.”

“채훈에 대해 할 중요한 이야기가 무엇입니까?”

승건은 강수찬이 권하는 자리에 앉으면서 핵심부터 물었다. 맞은편에 앉던 강수찬이 한순간에 당황했지만 미소를 금방 다시 만들어냈다.

“그러지 말고 차라도 한잔 마시면서 이야기하는 게 어떻습니까?”

“그렇게까지 여유롭지 못합니다. 시간도 늦었으니 빨리 끝내죠.”

승건은 강수찬과 길게 이야기를 할 생각이 없었다. 8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수요일이었고, 집에서는 채훈이 기다리고 있었다.

두 번이나 연속된 승건의 거부에 드디어 강수찬의 얼굴이 굳었다.

“우리 채훈이를 많이 아끼시는 것 같습니다. 태화 그룹의 대표이사님께서 여기까지 찾아와 주시다니요. 차가 싫으시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짧게 할 이야기가 아니라서 말입니다.”

“같은 말을 세 번 해야 합니까?”

“아……. 성격이 급하십니다. 그러니까…… 채훈이, 우리 채훈이가 말이죠. 애가 좀 차갑게 보이기는 한데, 사람 챙기기 좋아하고 그런 성격이니까 대표이사님의 마음에 들었겠죠.”

“그렇죠.”

강수찬의 아부가 장황하게 이어지는 것에 적당히 호응했다. 그러자 그가 더 흥을 냈다.

“우리 채훈이가 대표이사님이 부담스럽다고 하더군요. 우리 형제끼리는 우애가 두터운 편인데, 채훈이가 제게 고민 상담을 자주 합니다. 최근에 채훈이 고민이 많은 것 같더라고요.”

“그렇습니까”

“대표이사님이 친절하고 잘 대해준다고 하면서도 그게 부담스럽다고 하는데. 자기는 베타이고 남자인데, 대표이사님과 안 어울린다고 말입니다. 뭐, 그럴 수도 있죠. 걔가 착하기는 한데, 심약한 면이 없지 않아서요. 예전에 감당하기 힘든 일을 껴안고 있다가 스트레스 위경련으로 쓰러진 적도 있고. 이번에는 그 정도까지는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고민이 많더란 말이죠. 자기가 아니라 영환이가 더 잘 어울릴 거라고 말하는데. 아, 그러니까 영환이가 우리 막냇동생인데. 오메가고 스물네 살에 남자에, 이제 곧 대학을 졸업할 겁니다. 채훈이가 말하길 영환이를 대표이사님께 소개시켜 주고 싶은데, 뭔가 방법이 없을까 사담을 하더군요. 그래서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고 대표이사님을 만나 뵈려 한 것이지요.”

승건은 기가 막혀서 할 말을 잃는다는 게 어떤 건지 처음 경험했다. 이딴 걸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강수찬이 제정신인지 궁금해질 정도였다.

1년이라는 기한을 두고 만나는 관계였다. 그것도 시작은 계약 연애조차 아니었다. 자신은 물론이고 채훈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베타라서 알파인 자신이 부담이 된다고 헤어지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는 것은 전제부터 틀린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승건의 주위에도 이런 이들이 많이 있었다. 욕심에 눈이 멀어 아무 말이나 내뱉는 멍청한 기회주의자들 말이다.

“대표이사님?”

“강수찬 씨. 당신 베타죠?”

“그렇기는 한데, 갑자기 그건 왜…….”

“당신이 베타라서 잘 모르는 것 같은데, 당신 동생인 강영환의 향이 그다지 좋은 게 아니야. 채훈이보다 못해. 그리고 난 오메가는 안 만나.”

“……?!”

“거짓말을 하려면 사정을 제대로 알고 해야지. 너무 티가 나지 않습니까.”

한껏 낮은 목소리로 승건은 이를 드러냈다.

형제의 막내인 강영환을 마주친 것은 딱 한 번뿐이었다. 어차피 오메가의 페로몬 향기는 악취로 느껴졌기 때문에 강영환이 어떤 향을 가지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것보다는 그의 눈에 어린 탐욕이 기분 나쁘게 번들거리는 것이 문제였다. 지금 눈앞에 앉아 있는 강수찬처럼 말이다.

거짓말이라고 지적하자 강수찬이 당황했다.

“거짓말이라니요. 채훈이가 분명히―”

“강수찬 씨에게 갚아야 할 은행 대출이 있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물품 대금 상환도 적지 않게 밀려 있고요.”

“아니, 그걸 어떻게…….”

“아직 제 이야기 안 끝났습니다.”

“아? 아. 네. 말씀하시죠.”

“은행 대출은 당장에 갚아드릴 수 있습니다. 밀린 대금도요. 그리고 베트남에서 사업을 할 수 있게 지원해 드리겠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친구들이랑 협업해서 한동안 해외 창업에 열을 올렸다고 알고 있는데. 중간에 사업이 엎어졌다죠? 내 이름을 걸고 3년 동안은 투자금 걱정은 하지 않게 해드리겠습니다. 능력 있고 믿을 만한 설계사도 소개해 드리죠.”

베트남 사업을 지원해 주겠다고 하자 강수찬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강수찬을 조금만 조사하면 그가 한때 해외 사업에 골몰했고, 아직도 그 꿈을 버리지 못했다는 것을 알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무, 무엇을 하면 됩니까?”

승건은 강수찬이 기대와 흥분, 그리고 어쩔 수 없는 탐욕으로 가득한 미소를 짓는 것을 냉정히 지켜보았다. 이런 인간을 다루는 법은 손쉬웠다. 눈앞에서 당근을 흔들면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3년 동안 투자금을 지원해 준다고 했으니까 더욱 그럴 것이다. 하지만 당근만 던져주는 것은 별 효과가 없었다.

“3년 동안 베트남에서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됩니다. 그리고 채훈이 먼저 연락하기 전에는 어떤 접촉도 하지 마시고요.”

“그게 무슨…….”

“윤종현. 그러니까 윤 사장의 윗선을 움직여서 그를 막은 건 강수찬 씨도 알고 있을 겁니다. 베트남으로 가지 않으면 그가 다시 강수찬 씨 앞에 나타날 수 있습니다. 목줄이 풀리면, 전에 못 했던 것을 마무리 짓고 싶어 할지도 모르고요.”

“……!”

윤 사장이 얼마나 위험한 인물인지 직접 경험한 강수찬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거기에 승건이 쐐기를 박았다.

“하라는 대로 하면 아무 일 없을 겁니다.”

“채훈이가 뭐라고 했습니까? 인연을 끊겠다고 하더니. 왜 베트남으로 보낸대? 응?”

채찍으로 밀어붙이자 본색을 드러낸 강수찬이 원망의 화살을 채훈에게 보냈다. 승건은 채훈이 형과 인연을 끊으려고 했다는 것을 알고는 속으로만 웃었다. 강수찬과 같은 인간은 말로만 해서 인연이 끊어지지 않았다.

“차라리 채훈이가 보기 싫다고 했으면 이렇게 귀찮은 짓은 안 하지. 그냥 치워버리면 되거든.”

“씨발. 너 이러는 거 채훈이가 알아?”

“양심이 없는 건 지능이 떨어진다는 건데. 내 말을 못 알아들었나. 채훈이 알아도 상관없는데, 그가 알게 되면 강수찬 씨는 상관있을 텐데.”

베트남에 가지 않으면 죽는다는 말을 돌려 했다. 그러자 강수찬이 겁먹은 개처럼 짖었다.

“재벌이면 다야? 해볼 테면 해봐! 내가 무서워할 줄 알고?!”

승건은 대꾸하는 대신에 손을 들었다. 그러자 가게 밖에서 급발진하는 불길한 소리가 났다. 입구 쪽을 등지고 앉은 승건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직접적으로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반사적으로 가게 밖을 바라보고 있던 강수찬의 얼굴에 경악이 번지는 것은 확인할 수 있었다.

쾅!

얼마 지나지 않아 커다란 충돌음과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가 울리면서 건물이 흔들렸다. 충격으로 인해 길에 주차된 자동차들의 경보기가 요란하게 울렸다.

과격한 방법은 심정민이 추천한 것이었다. 말로 하는 협박이 통할 인간이 아니니까 실력행사를 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것이었다. 그의 말이 맞았다. 확실히 강수찬은 얼굴을 맞대기 역겨운 인간이었다.

승건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은 저 차가 가게 쇼윈도가 아니라 퇴근길을 덮칠지도 모르죠.”

“미친…….”

“보름 안에 가게를 정리해서 베트남으로 떠나면 됩니다. 자세한 것은 심 실장님이랑 이야기하고, 다른 가족들에게도 입조심하는 게 좋을 겁니다.”

일방적으로 통보를 한 승건이 그대로 몸을 돌려 가게를 빠져나갔다. 강수찬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지켜보았다.

승용차가 왼쪽 쇼윈도를 들이박아 버렸다. 유리창은 박살 났고 조명도 부서졌다. 사람의 통행량이 적은 곳이었지만 그래도 구경꾼들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강수찬은 거기에 신경 쓸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이번 일은 시작부터 꼬였다. 채훈은 인연을 끊겠다며 대항했다. 어머니는 엮이지 않는 게 좋다고 몸을 사렸고, 영환이는 연락조차 잘 되지 않았다. 마지막 방법은 최승건을 직접 상대하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그것도 비웃음을 당했다. 모든 것이 다 끝났구나 싶었다.

대출을 갚아주다 못해 베트남에서 사업을 할 수 있게 투자를 해주겠다는 것도 함정이었다. 베트남으로 가지 않으면, 한국으로 돌아오면 저기에 깔리는 것은 자신이었다. 그걸 다시금 깨닫자 소름이 돋았다. 다리가 풀려서 의자에 앉아 있지 않았다면 주저앉았을지도 몰랐다.

갑자기 어머니가 재벌이랑은 깊게 엮이는 게 아니라고 했던 게 떠올랐다. 어쩌면 이런 일을 미리 예상한 게 아닌 건가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

보름, 베트남, 투자, 윤 사장, 입조심. 승건이 했던 말이 우루루 떠오르는 와중에 쇼윈도를 들이박은 자동차 안에서 운전자가 머리를 흔들며 걸어 나왔다. 중년의 남자는 주위를 두리번두리번거리더니 강수찬을 발견하고는 커다랗게 불렀다.

“거기, 사장님? 사장님 괜찮으세요? 어이쿠. 죄송합니다. 차가 갑자기 튀어 나갔어요. 경찰부터 부르겠습니다. 그럼 되죠?”

남자는 천연덕스럽게 굽신거리면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강수찬은 꺼림칙함을 떨쳐버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어쩌면 이건 기회일 수도 있었다. 아니, 기회였다. 베트남에서 사업을 하는 것은 자신의 꿈이었다. 돈이 없고 백도 없어 번번이 실패만 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한국에 3년 정도 들어오지 않는 거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빚도 갚아주고 투자금도 지원해 준다는데 그걸 이용하지 않으면 멍청이였다. 뻣뻣하게 고개를 쳐든 재벌 새끼를 두 번 볼 게 아니니까 상관없었다. 자신은 이런 곳에서 썩을 인간이 아니었다.

그 새끼에게 빨대 꽂아서 베트남에서 성공하면 그만이야.

강수찬은 그렇게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버틸 수 없는 밤이었다.

*

*

소란스러운 사고 현장을 뒤로한 승건은 준비된 차에 올라탔다. 그의 움직임에 따라 심정민도, 운전기사도, 그리고 경호원들도 모두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차가 부드럽게 출발했다.

“어떻게 하시기로 하셨습니까?”

“조 실장님을 붙이고 예정했던 대로 베트남으로 보내면 됩니다. 돈은 아끼지 말고, 보름 안에 뜨게 하세요.”

심정민의 물음에 승건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이미 강수찬의 처우에 대해서는 논의가 끝난 상태였다.

강수찬을 베트남으로 보내는 것은 단순히 채훈에게서 떨어트려 놓으려는 것만은 아니었다. 채훈의 가족이기에 기회를 준다는 의미가 있었지만, 한국보다 베트남이 나락으로 떨어지기 쉬운 곳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저런 인간은 어디서든 사고를 치기 마련이었다.

승건은 스멀스멀 기어 나오려는 불쾌한 감정을 억눌렀다. 보기 싫은 인간을 치워버렸는데도 더러운 기분이 가시지 않았다.

채훈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실망했다는 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부터 상대가 누구인지 궁금했다. 평범한 사회인인 채훈의 대인 관계는 특별할 게 없었다. 가까운 사람을 꼽으라면 직장에서 몇 명, 중고등학교와 대학교 동창이 몇 명, 그리고 무도관에서 보는 사람 몇 명 정도였다. 그 외에는 때가 되면 두루 인사하고 안부를 묻는 사이가 대부분이었다.

몇 되지 않은 친인들 중에서 채훈이 사랑하고 실망할 사람을 찾느라 온갖 곳을 뒤졌다.

가장 먼저 의심을 한 상대는 당연히 서주명이었다. 녀석은 바쁘다는 핑계로 채훈의 집에서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채훈 역시 서주명에게 관대했다. 채훈이 다정한 편이긴 했지만 그래도 선은 명확했다. 제집을 오랫동안 내어주는 것은 서주명이 특별하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그가 아니었다. 강수찬의 전화를 받지 않으려는 채훈의 얼굴을 보고 단번에 알아차렸다. 기억 속의 채훈은 가족들과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정확히 따지자면 책임감이 넘쳤다. 그리고 다시 만난 그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큰 빚을 진 강수찬을 위해 제 일신을 팔았을 정도였다.

가족이니까 감싸주고 사랑해야 한다는 마음을 이해할 수는 있었다. 채훈은 그다지 모진 성격이 아니었다. 원만하게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고, 자신이 작은 손해를 보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화를 내기보다는 한 번 참고는 속으로 삭이는 게 전부였다.

그러나 강수찬 같은 놈들은 제 주변의 사람들이 참고 견딘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까맣게 모르는 부류였다. 찍어 누르지 않으면 저 잘난 줄 알고 활개를 치고 다녔다.

“쯧.”

거기까지 생각을 이어가던 승건은 가볍게 혀를 찼다. 보조석에 앉은 심정민이 신경 쓰는 게 느껴졌지만 무시했다.

승건은 자신이 필요보다 흥분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채훈이 사랑하는 상대를 찾으려고 한 것도, 강수찬을 베트남으로 치워버린 것도, 그리고 과격한 방법까지 동원한 것도 모두 과한 행동이었다.

채훈의 곁에서 얼쩡거리는 인간들이 눈에 거슬리는 원인은 명백했다. 그를 자신의 사람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었다. 좀 더 명확하게 구분하자면, 질투를 동반한 애정이었다.

제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녀석이 술을 잔뜩 마시다 못해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언급했을 때는 상대의 목을 조르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생소한 질투의 색깔은 탁했고 폭력적이기까지 했다. 몇 번이고 그 새끼가 누구냐고 추궁할 뻔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채훈이 안과 밖의 경계에 서 있다고 여겼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이렇게까지 훅 다가와 있었다.

승건은 자신의 감정을 부정하지 않았다. 한 번의 깨달음이 그동안 자신조차 이해가 가지 않던 여러 행동에 당위성을 부여했다.

그러나 자신에게 애정이란 쓸모없는 것이었다. 그건 결혼에 대한 믿음이 없는 것과 일맥상통했다.

정략혼이 당연한 이곳에서 승건의 부모님은 열혈한 연애 끝에 결혼에 성공했다. 재벌가 선남선녀의 아름다운 러브스토리였다. 그러나 두 사람의 사랑은 채 3년이 가지 못했다. 승건의 기억 속에 부모님은 얼굴을 맞대기만 하면 싸웠고 결국 서로를 증오하며 헤어졌다. 그리고 제각각 새로운 사랑을 찾았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파국의 이면에는 숨은 이야기가 있었다. 태화 그룹의 배경을 얻기 위해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다는 시시한 내용이었다. 달콤한 사랑은 거짓이었고, 결혼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가 외도를 했다는 것 역시 특별하지 않은 일이었다.

이후의 이야기도 별다를 것 없었다. 외도로 인해 승건의 친권을 어머니에게 빼앗긴 아버지는 태화 그룹과의 인연이 끊겨버렸다. 몇 번의 면접권 교섭을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하자 아예 승건을 없는 자식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어머니는 승건을 친정에 맡기고는 사랑을 찾아 미국으로 떠나버렸다.

승건이 자라면서 보아온 주변의 결혼 생활 역시 부모님의 그것과 크게 차이가 없었다. 관계를 따지며 결합했고 헤어졌다. 다른 게 있다면 조금 더 조용한 것뿐이었다. 물론 서로에 대한 신뢰와 애정으로 묶인 부부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크게 관심이 없었다.

무엇보다 승건은 기본적으로 감정에 휘둘리는 것을 싫어했다. 어려서부터 그랬고, 기억을 잃고 여러 후유증에 시달리면서 더욱 심해졌다. 가벼운 감정 장애에 가깝다고 진단받았다. 일상생활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다만 사람을 믿고 의지하지 않을 뿐이었다.

채훈을 향한 애정을, 사랑을 깨달았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맛있는 것을 먹이고, 어울리는 것을 입히고, 웃는 모습을 보고, 키스하고, 섹스를 하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 확신하지 못했다.

그것보다는 1년이라는 계약 기간이 중요했다. 그사이에 부작용을 치료하고 방패막이로서의 효용이 된다면 그만이었다.

오히려 그사이에 감정을 컨트롤하지 못하고 휘둘리는 것이 걱정이었다. 돌이켜 보면 채훈에 한정해서 몇 번이고 돌발적인 결정을 내렸다. 지금까지 크게 후회할 일은 없었다. 그러나 채훈을 좋아한다고 자각한 이후로 기묘하게 들뜬 기분이 계속되는 것이 이상했다.

지금도 그랬다. 강수찬을 만나 불쾌한 감정이 날아간 지 오래였다. 채훈을 만날 생각에 희열이 뚜렷한 각성 상태로 이어지고 있었다. 사랑에 빠진다면 뭔가 달라진다고 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기분이 좋으면서도 가슴께가 아팠다.

낯선 날것의 감정에 승건은 인상을 썼다. 제 몸이 뜻대로 컨트롤 되지 않는 것은 꽤나 신경에 거슬렸다.

“이런…….”

“불편한 곳이라도 있습니까?”

“아니요. 괜찮습니다.”

심정민의 물음에 진정제를 먹어야 하나 잠시 고민한 승건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진정제를 먹을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그렇게 고민을 하는 동안에 집에 도착했다. 채훈에게서는 이미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받은 상태였다. 차에서 내려 정원을 가로지르는 승건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아파트와 달리 불이 켜진 집이 가시적으로 보였다. 그리고 저곳에서 채훈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자 기분이 이상해졌다.

*

*

집에 들어선 승건은 채훈을 찾았다. 채훈은 지하 체력 단련실에서 러닝머신 위를 달리고 있었다. 속도를 높여 빠르게 달리는 모습은 날랬다.

“어? 왔어?”

이어폰을 꽂고 달리던 채훈이 러닝머신을 멈췄다.

“빨리 왔네. 저녁은 먹었어?”

“응.”

“옷 갈아입고 와. 한 판 붙어야지. 몸 풀 시간은 따로 줄게.”

목에 건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천천히 다가온 채훈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지난 주말에 있었던 대련의 리벤지 매치를 하자고 사전에 약속했었다. 지난 며칠 동안 두고 보자고 메시지도 주고받았다.

“자신만만한걸.”

“당연하지. 이번에는 안 봐준다니까.”

자신만만하게 웃는 채훈에게서 땀냄새가 훅 밀려오는 바람에 승건은 멈칫했다. 역하지 않았다. 그것보다는 하체에 열이 몰렸다. 향기를 맡게 된 이후로는 종종 이렇게 뜻하지 않게 채훈에게 끌렸다. 샤워 후에 풍기는 워시향기, 혹은 그에게서 풍기는 술냄새조차 그랬다. 특히 잠들었을 때 바삭거리는 햇살냄새가 좋았다.

가까이 다가온 채훈이 왜 아무 말도 안 하고 그러고 있냐는 눈짓에 승건은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기습적인 키스에 채훈이 잠시 굳긴 했지만 곧 적극적으로 응했다. 승건은 깊게 혀를 빨면서 채훈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방금 전까지 달리기를 한 채훈의 몸에서는 뜨거운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승건은 자연스럽게 채훈의 트레이닝복 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자, 잠깐.”

입술을 뗀 채훈이 승건의 팔을 붙잡았다. 그리고 다급하게 속삭였다.

“하려고?”

“응. 왜?”

“여기서는 안 해.”

“……?”

“매트리스가 딱딱하다고.”

채훈이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강력하게 주장했다. 체력 단련실에 부상을 방지하기 위해 매트리스가 깔려 있기는 했지만, 제법 딱딱한 편이었다. 승건은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체력 단련실에서 시작한 섹스는 꽤나 격렬했고 다음 날 아침에는 채훈에게 걷어차였다. 총량 100을 넘지 말라고 하던 것도 기억났다.

“글쎄. 네가 날 올라타는 방법도 있는데.”

“그건 술의 힘을 빌려야 가능한 거고.”

“술은 적당히 마시는 게 좋아.”

“알거든. 그러니까 엉덩이 더듬는 건 그만하고. 진짜 할 거면 씻고 올게. 땀을 많이 흘렸어.”

승건은 뒤로 물러나려는 채훈의 허리를 붙잡았다.

“땀냄새도 괜찮아.”

“내가 안 괜찮아.”

힘주어 붙잡지 않았더니 채훈이 쑥 빠져나갔다. 잽싸게 거리를 벌린 채훈은 마치 까다로운 고양이라도 된 듯이 경계를 했다.

“너도 씻어. 나는 1층에서 씻을게. 넌 2층에 가. 옷도 갈아입고. 이대로 하면 또 옷이 엉망진창이 될 거야.”

다급하게 섹스를 하느라 서로의 옷이 엉망진창 구겨지고 찢긴 적이 몇 번 있었다. 채훈의 슈트는 결국 수선하지 못하고 버려야 했다. 승건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지만 채훈은 몇 번 언급한 적이 있었다. 그게 계속 마음에 쓰였던 모양이었다.

그대로 뒤돌아선 채훈이 계단으로 사라져 버렸다. 순식간에 혼자가 되어버린 승건은 텅 빈 손을 내려다보며 인상을 썼다. 손에 잡혔다가 빠져나가는 기분이 별로였다.

“불 끄는 거 잊지 마.”

계단 위에서 채훈의 목소리가 울렸다. 반사적으로 계단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던 승건은 쓰게 웃었다.

손이 비었으면 다시 쥐면 그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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