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생일】
태화 그룹의 대표이사인 승건의 하루 스케줄은 분 단위로 쪼개졌다. 대부분은 회의와 업무 보고, 비즈니스 미팅으로 채워져 있었다.
사이사이 비는 시간은 보고서를 읽고 처리하는 데 모두 썼다. 최종 결정권자인 그의 손을 거쳐야 하는 결재 서류의 양은 적지 않았다. 또한 그룹 전반의 사업 계획을 파악하기 위해 찾아봐야 하는 자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승건을 피곤하게 하는 것은 방대한 양의 서류도, 끝없이 이어지는 회의도 아니었다. 바로 사람이었다. 특히 집안 어른들을 상대하는 것이 제일 까다로웠다.
―금요일쯤은 어떠냐?
“시간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잠시만요. 지금 확인해 보겠습니다.”
―주말도 괜찮다. 이번 주는 넘기지 않는 게 좋겠구나.
승건의 통화 상대는 셋째 작은 외할아버지인 정재완이었다. 사무실 책상 위의 전화기에서 울리는 정재완의 목소리는 느긋했지만 그 내용은 다급했다.
승건은 태블릿으로 스케줄 표를 불러냈다. 금요일 저녁과 토요일이 통째로 비어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채훈을 만나기 위해 일부러 비워놓은 것이었다. 그 시간을 뺄 수 없으니 남은 것은 일요일뿐이었다. 일요일에 저녁에 약속을 잡고 정재완과의 통화를 끊은 승건은 입매를 당겼다.
어제 오후, 정재완이 보낸 그림이 승건의 앞으로 도착했다. 그리고 오늘은 만날 약속을 잡았다. 모두 사과의 제스처로, 열흘 전에 승건의 집을 흙발로 침범한 일에 대해 수습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었다.
서른 살에 외할아버지를 등에 업고 태화 그룹의 대표이사가 된 승건은 회사 업무만큼이나 복잡한 이권 관계를 조율하는 데 신경을 써야 했다. 태화 그룹은 거대했고 외할아버지의 형제들이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는 계열사들의 문제가 조금씩 가시화되고 있었다.
경영권을 방어하기 위해 다섯 명의 작은 외할아버지 중에 셋을 편으로 끌어들이고 둘을 대척점에 두었다. 그러나 동맹은 그다지 견고하지 않았다. 승건이 어리고 제대로 된 기반이 없다는 이유로 이리저리 자기들 마음대로 휘두르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그들은 승건의 결혼 문제에 심하게 간섭했다.
승건은 결혼을 할 생각이 없었다. 태화 그룹을 이어받을 생각 역시 없었다. 하지만 작은할아버지들은 젊은 날의 객기라고 여기면서 코웃음을 쳤다.
말이 통하지 않으면 실력 행사뿐이었다. 승건은 동맹을 상대로 전면전을 벌이지는 않았다. 대신 본보기를 전시했다.
지난 주말에 걸쳐 태화 병원의 이사장인 넷째 작은 외할아버지의 비리와 추문이 한꺼번에 터졌다. 계열사 분리를 주장하며 반회장파의 가장 선두에 섰던 그의 몰락은 예정된 상태였다. 배임 횡령으로 형사 고발을 당하다 못해 운이 나쁘면 실형까지도 살 수 있었다.
며칠 사이에 상황이 급변하자 정재완의 태도가 바뀌었다. 그림을 선물로 보내고는 승건의 마음을 달래려고 애쓰고 있는 것이었다.
모두 저마다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한 기업의 수장쯤 되면 털어서 나오는 것은 먼지가 아니라 비리들이었다.
태화 그룹의 회장인 정규완은 적들은 물론이고 가족들의 약점까지도 모두 손에 쥐고 있었다. 정규완은 그것을 언제든지 쓸 수 있다고 암시를 주면서 권력을 휘둘렀다. 그리고 그건 승건 역시 마찬가지였다.
권력 교체기였다. 노회한 할아버지들을 상대하려면 암시가 아니라 직접 행동해 눈으로 보여줘야 했다. 그런 의미에서 태화 병원을 흔드는 것은 아주 효과적이었다.
실력 행사를 해도 못 알아먹는 놈들이 있지.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불구하고 앞으로의 일들이 순조롭지 않을 것을 예상하던 승건은 가볍게 인상을 썼다.
“귀찮아.”
승건은 스스로를 향해 말했다. 한국에서는 2년 정도 생활할 것으로 생각하고 귀국했었다. 외할아버지의 예후는 좋은 편이었다. 재활도 잘 이루어지고 있어서 올해 안에 대외적인 활동을 할 예정이었다.
외할아버지가 현역에 복귀한다고 해도 승건이 당장에 미국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외할아버지는 나이가 너무 많았고, 후계자로 키워지고 있는 동생은 너무 어렸다. 동생은 열일곱 살이었다. 승건이 징검다리 역할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칼을 휘둘러 불온한 싹을 잘라내고 신뢰할 수 있는 전문 경영인을 찾는다고 해도 결국엔 시간이 문제였다.
그 일에 대해서는 이미 외할아버지와 합의를 끝낸 상황이었다. 외할아버지는 원한다면 태화 그룹을 네가 가져도 좋다고 했지만 승건은 딱 잘라 거절했다.
승건은 자신이 사람과 부대끼며 유대감을 형성하는 성격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사람의 호불호나 손익을 따질 뿐, 관계 그 자체에 의미를 두지 않았다. 태화 그룹이라는 대기업의 대표이사로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성격이었다.
대표이사로서의 일 자체는 어렵지 않았지만 권력욕이 없으니 여러 가지 것들이 그저 귀찮을 뿐이었다. 그나마 미국으로 돌아간다 해도 딱히 하고 싶은 일이 없기에 묵묵히 한국에서 제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중이었다.
승건은 다시 서류를 읽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점심시간이 여유로웠다. 점심시간은 보통 업무 미팅을 하곤 했으나, 오늘 만나기로 한 상대가 급성 장염으로 입원하는 바람에 시간이 비었다. 식사는 도시락으로 대신하고 남은 시간은 온전히 서류에 집중했다.
그리고 점심시간이 끝날 무렵에 심정민이 찾아왔다. 그의 손에는 백화점에서 픽업해 온 보석 상자가 들려 있었다.
“사이즈와 각인은 제가 직접 확인했습니다.”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네요.”
“사이즈 조절 때문에 그랬을 겁니다. 그것보다…… 진짜 강채훈 씨에게 선물하실 생각이십니까?”
“네.”
단호하게 대답한 승건은 심정민에게서 받은 보석 상자를 그 자리에서 열었다. 다이아몬드팔찌가 5월의 햇살에 영롱하게 빛났다.
한 달 전쯤에 주문한 것이었다. 감기로 쓰러졌던 채훈이 뭐든지 다 받겠다고 했을 때 손목에 팔찌를 채우면 어떨까 떠올리자마자 행동으로 옮겼다.
다이아몬드가 알알이 엮여서 매듭처럼 장식되어 있는 팔찌는 여성 예물용이었다. 그래도 승건은 망설임 없이 주문했다. 채훈이 착용할 수 있게 사이즈를 늘리고 이니셜을 각인하느라 한 달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승건은 팔찌를 들어보았다. 반짝거리는 다이아몬드팔찌는 카탈로그에서 본 것만큼이나 화려했기 때문에 무척 만족했다.
자존심이 강한 채훈은 팔찌를 받아 들고 미간을 구길 것이다. 어쩌면 취향이 고약하다고 한마디 할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못한 얼굴로 팔찌를 손목에 거는 모습이 기대되었다.
오랫동안 꾸준히 운동을 한 채훈은 전체적인 몸 선이 예쁜 편이었다. 손목에서 손끝까지 이어지는 모양도 실력 좋은 화가가 그림으로 그려놓은 듯 완벽했다.
처음에는 그저, 채훈이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는 것이 신경 쓰였을 뿐이었다. 그에게 손목시계가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한 게 전부였다. 그러다가 채훈에게서 손목 페티시가 있냐는 질문을 받고 나서야 자신의 취향을 깨달았다. 또한 사람을 꾸미는 것에 흥미가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승건의 외할머니가 어린 손자들을 멋지게 꾸미기를 좋아했다. 어쩌면 외할머니를 보고 자란 것이 아마도 영향을 끼친 것 같았다.
30년 만에 깨달은 자신의 취향은 조금 특이했지만, 따지자면 아주 온건한 축에 속했다. 채훈 말고 다른 사람을 꾸밀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저 반짝이는 팔찌가 채훈에게 잘 어울릴 거라고 확신했다.
“생일 선물치고는 조금 과하지 않겠습니까?”
“생일이요?”
각인까지 꼼꼼하게 확인하던 승건은 뜻밖의 단어에 고개를 들어 심정민을 보았다. 여기서 생일이라고 할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강채훈 씨 생일이 오늘입니다.”
승건은 기억을 더듬었다. 보고서를 읽기는 했지만 생일이 언제인지는 눈여겨보지 않았다. 생일에 예물용 다이아몬드팔찌를 내민다면 채훈이 제대로 화를 낼 수도 있었다. 그래도 상관없긴 했다. 하지만 생일 선물은 따로 챙겨줘야 했다.
“생일 선물은 따로 준비하죠. 빈티지 와인으로.”
술을 좋아하는 채훈을 위해 와인이 떠올랐다. 채훈이 즐길 만한 빈티지 와인을 몇 개 지목하고는 심정민에게 오늘까지 준비해 달라고 했다. 알았다고 대답한 심정민이 사무실을 나가는 것을 보며 승건은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원래 수요일인 내일 만날 약속이 잡혀 있었지만 생일은 생일날 축하해 주는 게 맞았다.
[내일 말고 오늘 만나자. 8시.]
[미안한데, 8시는 힘들어. 10시는 어때? 본가에 가야 해서.]
채훈에게서 답장은 금방 왔다. 생일이라서 본가에 가는 거라고 추측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10시도 괜찮아.]
[다행이다. 그때 보자!]
느낌표가 붙은 채훈의 메시지는 힘이 넘쳤다.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짓던 승건은 의식적으로 입술을 당겼다. 최근 들어 웃음이 늘었다는 것과, 그것이 채훈에게서 기인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승건은 무심한 성격이었다. 천성적으로 그랬고 주변 환경이 그의 성향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었다.
어려서부터 승건은 자신에게 목적을 가지고 다가오는 사람들을 민감하게 알아차렸다. 자신의 가치는 시시때때로 변했고, 그때마다 호의의 미소 뒤에 숨겨진 기만과 욕망을 읽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타인의 기만과 욕망에 예민하게 반응하지 말라고 배웠다. 호인처럼 웃는 것은 성격에 맞지 않았다. 무관심이 가장 편한 대응이었고 지금껏 그렇게 살아왔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아무 이유 없이 같은 교실에서 물리적으로 가깝다는 것만으로 친구가 된 것은 채훈이 처음이었다. 아니, 평범한 친구라고 부를 만한 존재가 채훈뿐이었다.
처음에는 아무렇지 않게 다가오는 그의 호의를 경계했지만 채훈에게는 정말 아무 의도가 없었다. 자신이 알파라고 알려지고 난 다음에도 그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어려워하지도 신기해하지도 않았다. 어쩌면 오메가 동생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강채훈은 최승건에게 언제나 한결같았다.
10여 년이 지나고 재회한 다음에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재벌 3세라는 것을 알고도, 태화 그룹의 대표이사가 되고 난 다음에도, 그게 뭐냐는 식으로 굴었다. 만남이 의무인 것처럼 굴다가도 오랜 친구처럼 스스럼없이 막말을 하곤 했다.
감정이 얽히지 말아야 한다고 계약서에 명시한 것은 쓸데없는 트러블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몇 번 섹스를 하다 보면 특별한 관계가 되었다고 착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자신의 증상이 호전되지 않더라도 채훈과 만나는 것은 1년이 한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웃기게도 4개월이라는 시간이 흐른 지금, 자신은 채훈과의 만남을 기대하고 있었다.
“감정이라.”
승건은 책상 위에서 반짝이는 다이아몬드팔찌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애증과 필요 사이에 있던 채훈에게 다음을 기대하는 건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아직 계약 종료까지는 8개월이나 남아 있었지만 당장에라도 후유증이 고쳐지면 채훈과 만나지 않는 게 옳았다.
러트 주기가 변한 것은 고무적인 징조였다. 돌발적인 러트에 채훈이 고생하긴 했다. 그래도 그와의 만남이 무의미하지 않다는 의미였다.
러트의 순간을 떠올리던 승건은 살짝 인상을 썼다. 숨 막혔던 열과 쾌감이 잔상과 같이 피어올랐다.
다른 알파들과 달리 승건은 러트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러트는 1년에 한 번씩 찾아오는 귀찮은 독감과 같은 것이었다. 대부분은 약에 의존했고 만나는 사람이 있다면 섹스도 했지만 그뿐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허겁지겁 이성을 잃고 덤벼든 것은 처음이었다. 채훈이 베타이기는 했지만, 상상 각인을 한 상대이기 때문일 수 있었다.
승건은 건조하게 사람을 만났다. 자신의 선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은 한 손에 꼽고도 남았다. 채훈이 지금 그 경계에 서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한순간의 감정에 복잡한 일을 만드는 것은 바보나 하는 짓이었다. 거래는 거래일 뿐이었다.
간결하게 결정을 내린 채훈은 보석 상자를 챙겨 넣고는 다시 서류에 집중했다.
* * *
그날은 채훈의 생일이었다. 어렸을 때야 생일 파티와 선물에 들떴겠지만, 나이를 먹고 직장 생활을 한 이후로는 딱히 특별할 게 없었다.
오늘도 시작은 어제와 다름없이 평범한 하루였다. 아침 일찍 일어난 채훈은 헬스장에서 운동을 한 다음에 조금 빠르게 출근했다.
총무과 사무실 분위기는 어수선하기 짝이 없었다. 전날 저녁 9시 뉴스에 태화 병원에서 일어난 의료사고가 대대적으로 보도되었기 때문이었다.
2년 전, 응급실에서 당직 중인 의사의 오진으로 70세 노인이 뇌출혈을 일으켰다는 뉴스였다. 노인은 다행히 무사했지만 문제는 당직 의사가 음주 상태였다는 것이었다. 환자 가족들의 항의에도 의사는 아무런 징계를 받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아무런 보상조차 없었다는 것이 내용이었다.
대한민국에서 제일간다는 병원에서 일어난 의료사고에 사람들이 분개한 것은 당연했다. 뉴스가 방영된 이후에 검색 포털 실검 1위가 태화 병원일 정도였다. 그리고 당시 응급실 당직 의사가 병원 이사장의 막내아들이라는 것까지 알려지면서 더욱 시끄러워졌다.
당장 아침부터 병원으로 항의 전화가 빗발쳤다. 총무과까지 항의 전화가 흘러들어 오면서 오전 내내 업무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점심시간이 되어서야 겨우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북적이는 구내식당에서도 의료사고가 화제였다. 대부분 음주 진료를 한 전공의를 욕했지만 다른 관점으로 사건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사내 정치에 관심이 있는 이들은 다른 의견을 냈다.
직원 휴게실에 모인 총무과 선임들은 노골적으로 속삭였다.
“이번에는 진짜로 할 모양이네.”
“어디까지 하려나.”
“이사장 측에서 반격하지 않을까?”
“에이. 규모가 다른걸.”
채훈은 언제나처럼 선임들이 하는 말을 묵묵히 들었다. 병원 이사장이 찍혀 나갈 거라는 것은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그 시기가 언제냐가 문제일 뿐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시끄러워질 줄은 아무도 몰랐다.
의료사고뿐만이 아니었다. 지난 금요일에는 이니셜로 처리된 제약 회사와의 리베이트가 일간지에 실리기도 했다. 태화 병원의 이름이 대놓고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저격이 분명했다.
이사장이 방만하게 병원을 운영한 것은 사실이었다. 응급실에서 의료사고를 일으킨 의사가 이사장의 막내아들이라는 것도 모두가 알았다. 그 외에도 그의 친인척들이 병원 요직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비밀도 아니었다. 작정하고 털면 먼지가 수북하게 떨어질 게 뻔했다.
“불똥이 어디까지 튈까.”
“걸린 게 한두 개여야 말이지. 재원 쪽하고 얽힌 건 유명하잖아. 그것도 터지려나.”
저마다 어디까지 일이 커질지 걱정하고 있는 것을 들으며 채훈은 승건을 떠올렸다. 승건은 자세하게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병원이 시끄러워질 거라는 말을 했었다.
반회장파라고 알려진 태화 병원의 이사장과 승건은 각을 세우며 대립하는 위치였다. 높으신 분들의 싸움은 말단인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다만 채훈은 10일 전에 있었던 일들의 파장을 걱정했다.
채훈의 정체를 알아내고 접근하는 사람은 없었다. 혹시나 해서 승건에게 물었더니 계약대로만 하면 괜찮다고 했다.
그것보다 채훈을 난감하게 하는 것은 승건의 선물 공세였다.
테일러 샵에서 맞췄던 슈트가 지난 주말에 모두 도착했다. 아직 서주명이 집을 구하지 못해서 같이 살고 있는 상황이었다. 채훈은 옷장에 잔뜩 늘어난 양복을 들킬까 봐 꽤나 긴장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승건은 여름 슈트를 맞출 거라며 테일러를 불렀다. 외국의 유명한 맞춤 슈트 브랜드라는데, 아는 게 없는 채훈은 그러려니 했다. 슈트와 어울리는 커프스링크와 넥타이핀도 여럿 받았다.
그것 말고도 승건은 또 하나의 시계를 내밀었다. 지난 주말에 있었던 여러 가지 사건에 대한 사과의 의미랬다. 승건이 주는 것은 거절하지 않기로 마음먹었기에 고맙다고 하고 받아들였다.
승건에게 받은 시계만 아홉 개로 모두 값비싼 거였다. 여차하면 시계를 팔아 목돈을 만질 수도 있을 정도였다.
값비싼 것들을 잔뜩 받았지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초콜릿이었다. 불청객들의 침입으로 제대로 먹지 못했던 초콜릿이 새로운 상자째로 쥐어졌을 때의 기분이란 묘하다는 말로 부족했다. 승건이 그날 초콜릿을 제대로 못 먹었을 테니 새로 사 왔다는 설명을 덧붙이는 바람에 더욱 그랬다.
초콜릿 따위는 생각도 나지 않았는데, 굳이 챙겨주는 승건의 행동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질 정도였다.
딴생각에 빠져 있던 채훈은 휴대폰 진동에 정신을 차렸다. 이럴 때면 타이밍 좋게 승건이 메시지를 보내곤 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메시지를 확인한 채훈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안녕하세요. 강채훈 씨. 써니예요. 지금 병원 1층에 있는 보틀 카페에 있어요. 5분 내로 오지 않으면 쳐들어가요. :D♥]
정중한 말투로 된 협박 끝에 붙은 미소 이모티콘과 검은 하트의 괴리가 엄청났다.
채훈은 써니에 대해 잘 몰랐지만, 써니라면 그녀의 말대로 쳐들어올 것 같았다. 총무과 사무실에 오려면 직원 카드로 열리는 보안문을 지나야 했지만 만약을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채훈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움직였다.
*
*
“5분 안에 왔네요. 어서 앉아요. 커피 마시겠어요?”
카페 안쪽에 앉은 써니가 채훈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셔츠에 카디건, 청바지를 입고 머리를 늘어뜨린 그녀의 모습은 지난번과 또 달랐다.
채훈은 조심스럽게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무슨 일입니까?”
“직구네요. 보기만큼 딱딱한 성격인가 봐. 별거 아니에요. 병원에 온 김에 얼굴도 보고, 이야기도 하고, 볼일도 보고. 겸사겸사. 같이 점심이라도 먹으면 좋은데, 오늘 하루는 금식이라서 안타깝네요.”
“어디 아픕니까?”
“아. 그냥 건강검진이요.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역시나 다정하네.”
채훈은 빙그레 웃고 있는 써니를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를 만난 것은 겨우 두 번뿐이었다. 활달하고 어떤 위협도 보이지 않았지만, 승건이 멀리하라고 한 충고가 자꾸 생각났다.
“너무 경계 안 해도 돼요. 나는 사람 사귀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라 쉽게 친해지고 쉽게 멀어져요. 사람 보는 눈이 괜찮은 편인데 채훈 씨는 느낌이 괜찮아서 친해지려고요. 승건 오빠가 살짝 무섭기는 하지만, 뭐, 어때. 그런데 그거 알았어요? 승건 오빠가 작은할아버지, 그러니까 여기 이사장님이랑 싸우는 거 말이에요.”
써니의 입에서 빠르게 흘러나오는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던 채훈은 마지막 질문에 얼굴을 굳혔다.
“그게 왜 궁금합니까?”
“아, 말해 줬나 보네. 아니면 아니라고 할 것 같은데. 그렇죠?”
“저는 말을 돌려 하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채훈은 온건하게 경고했다. 써니의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는 만큼 경계심을 풀 수가 없었다. 그런데 써니의 대답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승건 오빠 욕 좀 하려고요.”
“……?”
“시작하면 시작할 거라고 말이라도 해줄 것이지. 이번 일 때문에 들고 있던 주식이 박살 나버렸거든요. 돈이 얼마나 날아갔는지. 채훈 씨에게 하소연이라도 해야 속이 풀릴 것 같아서요.”
“제가 아니라 승건이에게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이빨이라도 들어가야 말이죠.”
활짝 웃는 얼굴로 이를 갈던 써니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단번에 들이켰다. 그리고는 채훈이 동의할 수밖에 없는 승건의 욕을 했다. 냉정하다느니, 혼자만 잘났다느니, 다른 사람 생각은 잘 안 한다느니 하는 말에 채훈은 고개를 끄덕이고 싶은 것을 참았다.
“아. 속이 시원하네. 채훈 씨는 승건 오빠에 대해 불만 없어요? 비밀로 해줄게요.”
“없습니다.”
“철벽이네. 괜찮아요. 처음부터 친해지는 건 아니니까. 사실 오늘 찾아온 이유는 따로 있어요.”
써니가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가방에서 가죽으로 된 명합첩을 꺼내 들었다.
“이거 받아요.”
채훈은 써니가 내민 명함을 거절하지 않고 받았다. 이전에 써니가 줬던 명함과는 달랐다. 고급스러운 종이 앞면에서는 이수진이라는 이름이, 그리고 뒷면에서는 휴대폰 번호가 찍혀 있었다.
“이수진이 당신 이름입니까?”
“아니요. 나는 정서희예요. 그래서 써니. 그리고 명함의 주인은 우리 큰할머니예요. 승건 오빠의 외할머니죠.”
“……?!”
뜻밖의 이름에 채훈은 명함을 든 채 그대로 얼어버렸다.
승건의 외할머니라고?
채훈은 승건이 외할머니 손에 자랐다는 것 정도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평범한 할머니는 아니었다. 그녀는 태화 그룹 정 회장의 부인이었다. 왜 그녀가 자신에게 명함을 주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큰할머니가 힘든 일 있으면 전화하래요.”
써니가 채훈의 소리 없는 질문에 답을 주었다. 그런데도 채훈은 이해할 수 없었다.
“제가 잘 몰라서 그런데, 보통 이렇게 합니까?”
“음, 우리 할머니라면 당장에 얼굴부터 보자고 했을 텐데. 큰할머니가 점잖으신 거죠. 제가 미국에 유학 갔을 때, 승건 오빠랑 같은 지역에서 학교를 다녔어요. 몇 번 만난 적은 없긴 하지만, 그쪽 커뮤에서 승건 오빠는 꽤 유명했죠. 얼굴도 잘생기고 몸매도 잘 빠진 우성 알파인데, 오메가는 거들떠보지 않았거든요. 베타하고만 만났어요. 그것도 거의 대부분 단발성이었고. 그거 알아요? 애인이라고 소개한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라는 거?”
“아니요. 몰랐습니다.”
어느 순간에 화제가 바뀌었다. 채훈은 써니의 설명에 설레고 말았다. 마치 자신이 특별하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큰할머니가 관심이 많은가 봐요. 승건 오빠 성격이 좀 그래서 평생 혼자 사는 게 아니냐고 걱정이 대단하셨거든요. 명함은 일종의 보험이라고 생각해요.”
긴 설명과 그래서 사이에 많은 것들이 생략되어 있었다. 채훈은 붉은 입술을 끌어 올리며 웃고 있는 써니를 보며 같이 웃을 수 없었다. 승건과 진짜 사귀는 것도 아닌데 왠지 일이 커지는 기분이었다.
“아, 그리고 내가 줄 것도 있어요. 생일 축하해요.”
이번에 써니가 가방에서 꺼낸 것은 포장이 된 작고 납작한 상자였다. 써니는 채훈 앞으로 그걸 쭉 밀어놓았다. 채훈은 상자와 써니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생일인 건 어떻게 알았습니까?”
“그 정도야 조금만 조사하면 금방 나와요.”
채훈은 써니 역시 승건과 같은 집안 사람이라는 것으로 납득했다.
“안 받는 게 좋겠습니다.”
“별거 아니고 지갑이에요. 부자가 되라고 골랐어요. 친해지려고 그러는 거니까 거절은 거절이요. 이제 볼일 다 봤으니 가볼게요. 예약 시간이 다 됐거든요. 큰할머니 명함은 승건 오빠에게 비밀이에요. 그건 만약을 위한 거니까.”
제 할 말을 모두 다 한 써니가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채훈 역시 그녀를 따라 움직였다. 써니가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까지 지켜본 채훈은 느린 걸음으로 사무실로 향했다.
왠지 일이 복잡해지고 있는 것 같았다. 승건과 공식적인 관계가 되면서 여러 가지를 걱정했지만, 그의 외할머니로부터 명함을 받을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나마 불러내서 헤어지라고 하지 않는 게 다행일 수도 있었다.
막장으로 치닫는 자신의 상상력에 피식 웃고 있는데 휴대폰이 진동했다. 이번에는 승건의 메시지가 맞았다.
[내일 말고 오늘 만나자. 8시.]
원래 약속은 내일이었다. 약속을 취소한 적은 있었지만 바꾼 것은 또 처음이었다.
채훈은 인상을 살짝 썼다. 채훈의 어머니인 조미혜는 생일이라면 당연히 미역국이 함께 하는 생일상을 받아야 한다는 신조를 가지고 있었다. 본인의 생일은 아들들과 함께 외식을 하면 그만이었지만 아들들의 생일만큼은 직접 미역국을 끓였다. 그래서 채훈은 독립한 이후에도 매년 생일이면 본가를 찾았다. 올해도 마찬가지였다.
[미안한데, 8시는 힘들어. 10시는 어때? 본가에 가야 해서.]
혹시나 싶어 승건에게 양해를 구했다. 자존심이고 뭐고 생일상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안 된다고 하면 오늘 생일이라고 밝힐 의향도 있었다. 그러고도 계약서 운운한다면 욕을 하고 정을 떼겠다고 단단히 마음먹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승건은 달리 반대하지 않았다.
[10시도 괜찮아.]
[다행이다. 그때 보자!]
채훈은 오늘 저녁의 동선을 생각했다. 퇴근 후에 본가에 들렀다가 호텔까지 가려면 이동 시간만 두 시간 넘게 걸렸다.
10일 전에 있었던 사건 이후에 승건은 계속 호텔 방갈로에서 지내고 있었다. 보안 문제 때문이었다. 일반 주택을 사서 리모델링 중이라며 2주 안에 이사를 할 거라고 들었다.
이런 게 나비효과인 것 같았다.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이 난입한 것뿐인데, 연쇄 반응으로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채훈은 반사적으로 강영환을 떠올렸다. 가장 먼저 시끄럽게 굴어야 할 녀석이 무슨 일인지 조용했다. 정신을 차렸거나, 혹은 자존심이 상했을 수도 있었다. 강영환의 성격을 보자면 아마도 후자일 듯했다.
오늘 본가로 돌아가면 아마 무슨 소리든 나올 게 뻔했다. 불길한 상상은 하기 싫었지만, 올해 생일은 조금 시끄러울지도 몰랐다.
*
*
“태화 그룹의 대표이사랑 사귀고 있다며? 정 회장님의 외손자라던데. 맞아?”
미역국을 떠먹고 있던 채훈은 놀란 눈으로 맞은편에 앉은 강수찬을 바라보았다. 그는 아주 진지한 얼굴이었다.
조미혜는 채훈의 생일상을 거하게 차렸다. 미역국에 채훈이 좋아하는 잡채와 돼지갈비가 식탁 위에 올랐다. 강영환은 대학교 일이 바빠서 빠졌다. 채훈의 생일은 조미혜와 강수찬과 함께 했다.
저녁 식사는 평범하게 흘러갔다. 여름이 오기 전에 뒷마당에 있는 창고를 정리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오갔다.
그러던 중에 강수찬이 물었다.
채훈은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10일 전, 미술관 재개관 행사에서 강영환을 만난 이후로 이렇게 되지 않을까 막연히 예상은 했었다.
평소라면 귀찮을 정도로 전화를 해서 승건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었을 강영환이 이번에는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았다. 웬일로 이렇게 조용한가 싶었는데, 그사이에 가족들에게 알린 모양이었다.
이미 승건과는 이야기가 끝난 상태였다. 공식적으로 애인 사이가 되었으니 적당히 알아서 정리하라고 했다. 사실 적당히가 제일 어려운 법이었다.
“영환이가 말해 줬구나. 사귀고 있는 거 맞아.”
채훈은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굴었다. 이미 강영환이 말했다면 거짓말은 소용없으니 사실대로 대답했다.
“10년 전에. 채훈이 너랑 납치……. 아니, 교통사고 난 그 애 맞지? 태화 그룹의 외손자 말이야.”
“응, 맞아.”
이번에는 조미혜가 물었고 채훈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부모님은 납치 사건에 대해 입을 다무는 조건으로 태화 그룹에서 많은 돈을 받았다. 그래서 부모님은 그때의 일을 언급할 때면 교통사고라고 했다.
“그럼 네가 정 회장도 구하고, 정 회장 외손자도 구한 거야?”
“아니. 그때 승건이를, 그러니까 정 회장 외손자만 구했어. 채권자들의 빚은 그가 갚았어. 가짜 회장님이라고 속인 건, 그가 정체를 드러내고 싶지 않아 했거든. 복잡한 일이 생긴다고.”
승건의 존재가 드러난 만큼 더 이상 가짜 회장님은 필요 없었다. 채훈은 계약을 제외한 나머지 것들을 모두 사실대로 말했다.
“그럴 줄 알았다. 그런 운 좋은 일이 일어날 리 없지. 어이구. 그 인간들 여전하네. 자기들 이름 나오는 거 끔찍이 싫어하는 거. 그런데 그 애는 알파라며? 왜 너랑 사귄대?”
“내가 마음에 든대.”
“그래도 결혼한다거나 그럴 생각은 아니지? 넌 베타잖아. 걔는 알파고.”
“어…….”
조미혜의 질문에 채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승건을 좋아하기는 했지만 잘될 생각은 없었다. 결혼은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그래도 막상 네가 베타니까 승건이랑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을 듣는 건 기분이 좀 그랬다.
“어휴. 수찬이도 영환이도 너무 욕심이 많아. 서로 집안의 격이 어느 정도 맞아야 결혼을 하지. 재벌이면 다 좋은 것도 아닌데.”
“엄마.”
조미혜의 말을 막은 것은 강수찬이었다. 그러나 조미혜는 역정을 냈다.
“그런 집안이랑 엮이는 거 아니라니까.”
“내가 다 알아서 할게. 채훈이 너는 나중에 나랑 따로 이야기 좀 하자.”
분위기가 단숨에 살벌해졌다. 채훈은 눈치가 아주 나쁜 편은 아니었다. 조미혜가 왜 결혼을 언급하는지 대충 알 것 같았다.
불길한 예감이 사라지지 않았다.
* * *
[조금 늦을 거야.]
[난 도착했어. 기다릴 테니까 조심해서 와.]
승건이 보낸 메시지에 답장을 보낸 채훈은 휴대폰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브랜디가 담긴 잔을 집어 들고는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얼음이 달각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윽한 향이 코끝을 맴돌았다. 한 모금 마시자 목구멍을 타고 흘러가는 맛은 독했다. 살짝 인상을 쓴 채훈은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호텔 방갈로의 거실 창 너머로 잘 꾸며진 밤의 정원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우울했다. 정확히는 멘탈이 박살 났다.
채훈은 자신의 정신력이 제법 강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대학 입시의 실패도, 장학금 문제도, 취업으로 받는 압박감도 잘 이겨냈다. 인간관계도 썩 괜찮았다. 가끔씩 우울할 때도 있었지만 금방 나아지곤 했다. 큰 욕심도 없었기에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그러다 최근에 스트레스가 심해진 일이 여럿 있었다. 대부분 승건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의 존재는 채훈의 인생에서 튀어나온 못과 같았다. 8개월 후면 사라질 못이 너무 잘난 게 문제였다.
승건이 태화 그룹의 대표이사라는 것을 알게 된 강수찬은 꽤나 노골적으로 나왔다. 언제부터, 어떻게 만났는지 꼬치꼬치 캐물었다. 그러고는 돈도 많으면서 겨우 18억으로 생색냈느냐고 비웃었다. 사실을 숨긴 채훈을 비난하기도 했었다.
채훈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대꾸를 해도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참았다. 강수찬이 그 말을 할 때까지 말이다.
‘네가 양보해라.’
채훈은 처음에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베타인 네가 뭘 할 수 있겠어. 결혼을 해도 영환이가 낫지. 네가 애를 낳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태화 그룹의 대표이사잖아. 결혼만 하면 우리도 떵떵거리며 살 거야. 그러니까 네가 좀 나서서 도와.’
채훈은 강수찬의 말을 몇 박자 늦게 이해했다.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고 절로 외쳤다. 그러나 강수찬은 비굴할 정도로 뻔뻔했다. 모두를 위해서는 그게 맞다고 채훈을 어르고 달래다가, 나중에는 결국 언성이 높아졌다. 채훈은 정말 오랜만에 형과 대판 싸우고는 그대로 본가에서 나왔다.
같은 부모님에서 난 형제들이지만 서로 성격이 다른 것은 당연했다. 특히 강수찬은 성공에 대한 열망이 강했다.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청년 사업을 한다고 판을 벌인 것도, 투자자들을 끌어모아 부동산에 투자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채훈은 형의 욕망에 동조하지는 않았지만 사람 사는 모습은 저마다 다른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다를 줄은 몰랐다.
“하아.”
한숨을 내쉰 채훈은 브랜디를 한 모금 더 마셨다. 갑자기 담배를 피우고 싶어졌다. 호주머니에 담배가 있었다면 몇 달 동안의 금연이 깨어져 버렸을 것이다. 그만큼 심란했다.
강수찬은 주변 사람들에게 평판이 좋았다. 허세가 있기는 했지만 그만큼 배포가 컸고 주위의 사람을 티 나게 챙겼다. 그러나 자기중심적인 성격이었다.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믿었고 동생이라면 응당 자신을 따르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다. 마치 군대 선임처럼 말이다.
어렸을 때는 몰랐지만 나이를 먹고 나서야 그것이 불합리하다는 것을 알았다. 만약에 가족이 아니라 타인이었다면 가까이에서 친해지고 싶은 사람이 아니었다.
가족이라고 모두 화목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래도 적당히 참고 맞춰주면서 큰 소리 나는 일이 없도록 했다. 그게 모두를 위한 길이라고, 그래도 가족은 내 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제 목소리를 내지 않고 참고 버틴 게 잘못이었을까? 그게 아니라고 따지고 싸웠어야 했을까?
채훈은 자신을 탓했다. 언제나 최선을 다한 것은 아니었다. 맞서고 설득하는 게 지치고 힘들면 때로는 적당한 선에서 포기했다. 그래도 제 자리를 지키려고 노력했는데 지금은 그저 도망치고 싶었다.
어디론가 멀리. 아무도 찾지 못하는 곳으로.
빌딩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는 낯선 도시와 아무것도 없는 넓은 초원을 떠올리던 채훈은 쓰게 웃었다.
제 삶의 기반은 모두 이곳에 있었다. 가족도, 친구도, 추억도. 그것을 모두 두고 떠날 용기가 없었다. 아니, 지금 기분으로는 어디든지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디로든 가고 싶었다.
“진짜 떠나버릴까.”
멍하니 거실 창을 바라보던 채훈은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렸다. 꼭 외국으로 갈 필요는 없었다. 물리적으로 거리가 먼 제주도나 부산도 괜찮았다. 직장을 찾는 게 어렵겠지만 통장에 있는 1억 6,000만 원이 떠올랐다.
도시를 정하고, 집을 구하고, 그러면서 직장도 찾으면 정신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상상을 구체화시키자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물론 상상을 현실로 옮기려면 승건과의 계약이 끝나기를 기다려야 했다. 그사이에 형과의 사이는 최악으로 치달을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독하게 마음먹어야 했다.
“뭘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복잡하게 헝클어진 생각을 정리하고 있던 채훈은 뜻밖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승건이 거실에 서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지 못했던 채훈은 놀랐다가 곧 웃고 말았다. 우울했는데 잘생긴 승건의 얼굴을 보자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늦는다더니 일찍 왔네.”
“그걸 다 마신 거야?”
가까이 다가온 승건이 턱끝으로 탁자 위에 있는 브랜디 병을 가리켰다. 커다란 브랜디 병은 반 넘게 비어 있는 상태였다. 승건의 말대로 그건 모두 자신의 배 안에 들어와 있었다.
“응. 마셨어.”
“너는 과음하는 경향이 있어. 평균 이상으로 술을 좋아하고.”
“맞아. 그래도 오늘은 마시고 싶어서.”
“기분 상한 일이라도 있었나 보군.”
마지막 남은 브랜디를 한입에 머금던 채훈은 미소를 지었다. 정말 귀신같은 눈치를 가진 녀석이었다. 무뚝뚝해 보이는 주제에 어떤 면은 놀랍도록 예민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실망을 해버려서.”
형과 싸웠다고 솔직히 말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승건을 보고 있자니 좀 더 근원적인 속마음이 흘러나왔다.
두 살 차이 나는 강수찬과는 좋은 추억도 나쁜 추억도 잔뜩 있었다. 지금은 우애 깊은 형제라고 할 수 없지만, 평생을 함께하다시피 한 가족에게 실망하다 못해 환멸해 버린 것이 아팠다.
어울리지 않게 너무 감성적이었다. 술 탓이라고 여기고 있는데 승건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은 게 눈에 들어왔다.
“너는―”
“……?”
채훈은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어버린 승건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냐고 눈으로 묻는데 승건이 대답 대신에 머리를 쓸어 올리더니 다른 손에 들고 있던 검은색 종이가방을 내밀었다. 얼떨결에 가방을 받은 채훈은 가방 안에 네모난 물체의 묵직함을 느꼈다.
“시계야?”
“아니. 생일 선물은 따로 준비했어. 그건 이전에 따로 주문해 두었던 거야.”
“내 생일인 걸 알았어?”
“알아. 열어봐.”
승건이 자신의 뒷조사를 했다는 것을 떠올린 채훈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보다는 선물을 받았다는 게 조금 들떴다. 생일 선물은 따로 준비했다고 하지만 손목시계가 아닌 다른 게 뭔지 궁금했다.
검은색 종이와 붉은 리본으로 된 포장을 벗겨내자 붉은 가죽으로 된 상자가 나왔다. 손보다 살짝 작은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거기에는 반짝거리는 팔찌가 자리 잡고 있었다.
예상하지 못한 존재에 채훈은 놀란 눈을 하고는 승건과 팔찌를 번갈아 보다가 웃어버렸다. 손목시계에 이어서 팔찌였다. 여성용 팔찌인데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저 승건의 취향이 너무 확고하다고 깨닫자 웃음이 나왔다.
“너, 진심이구나. 이거 여성용인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버려. 단 내 눈에 안 보이는 곳에서.”
“자꾸 버리라고 하지 마. 다 받는다니까. 그리고 이건 마음에 들어. 지금 착용할까?”
무표정해서 더 사나워 보이는 승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채훈은 왼쪽 팔에 차고 있던 손목시계를 풀고 팔찌를 찼다. 여성용이라 작지 않을까 싶었는데, 딱 맞았다. 무색투명한 보석이 알알이 이어진 팔찌는 형광등 불빛에 영롱하게 반짝거렸다. 하지만 자신의 각진 손에는 썩 어울리지 않았다.
“별로 안 어울린다.”
“어울려.”
“그래?”
채훈은 승건을 향해 팔찌를 찬 손을 들어 보였다. 그러자 승건이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와서는 손을 잡았다.
소파에 앉아 있는 채훈은 승건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팔찌가 아니라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눈이 마주쳤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에 날카로운 눈빛이 차가웠다. 평소에 속을 알 수 없는 녀석이긴 하지만 그래도 기운을 읽어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너야말로 기분이 별로인 것 같은데.”
지난번 러트의 기억을 지우려는 듯이 그동안 승건은 꽤나 정중하게 굴었다. 낮에 있었던 업무가 피곤하다고 한마디씩 하기는 했지만 얼굴에 이렇게까지 드러낸 적은 없었다.
“별거 아니야.”
기분이 나쁜 것을 부인하지 않는 승건의 목소리는 분명히 감정을 담고 있었다, 거기에 미간의 주름이 더해졌다.
채훈은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묻는 대신에 승건의 손을 맞잡고는 힘을 주었다. 웃는 것도 잊지 않았다.
“키스해도 돼?”
“……?”
“섹스하자고.”
승건의 구겨진 미간이 조금 더 진해졌지만 채훈은 개의치 않았다.
사실 채훈의 기분은 여전히 바닥을 치고 있었다. 심란함에 빠지기 전에 다른 것에 몰두하고 싶었다. 섹스가 현재 상황에서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느껴지는 것은 술에 취한 탓이었다. 그래서 웃음이 나오고 과감하게 굴고 있었다.
“술에 취했어.”
“맞아. 그래서 싫어?”
도발적으로 웃은 채훈은 승건의 손바닥을 가볍게 간질였다. 손바닥은 의외로 예민한 곳이었다. 승건이 애매하게 인상을 썼다. 싫은 기색은 아니었다.
“싫지 않아.”
“그럼 잠시만 기다려.”
채훈은 승건을 자신이 앉아 있던 소파에 앉힌 다음에 침실로 향했다. 침대 옆에 잇는 협탁 서랍에서 익숙한 종이상자를 꺼내 들고는 다시 거실로 돌아왔다. 브랜디 병, 잔, 종이가방, 포장용지 등이 어지럽게 널려 있는 탁자 위에 종이상자를 올려두자 승건이 살짝 놀란 얼굴을 했다.
채훈은 그러거나 말거나 상자의 뚜껑까지 열어서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상자 안에는 콘돔과 젤, 청결제 등이 들어 있었다. 즐거운 섹스 생활을 위해 호텔 측에서 준비한 것들이었다. 좋은 서비스였다.
승건이 오기 전에 채훈은 이미 샤워까지 끝낸 상태였다. 샤워 가운만 입고 승건을 기다리기 싫어서 입고 왔던 옷을 다시 입었지만, 재킷과 베스트, 넥타이, 양말까지 벗고 가벼운 차림이었다.
“준비는 다 됐어.”
“여기서 하려고?”
“소파는 별로야? 침대로 갈까?”
아까와는 위치가 반대로 채훈이 승건을 내려다보게 되었다. 미소를 지은 채훈은 승건의 뺨을 잡고는 허리를 숙여 입을 맞췄다. 부드럽게 맞닿은 입술 사이로 혀를 밀어 넣자 승건이 곧 응했다.
채훈은 오랜만에 주도권을 쥔 키스를 했다. 부드럽고 다정하게 혀를 빨고 입 안을 휘젓고는 입술을 뗐다. 승건의 구겨진 미간은 여전했다.
“술 냄새가 많이 나나 봐. 이 닦고 와?”
“괜찮아.”
괜찮다고 했기 때문에 채훈은 다시 키스를 시도했다. 승건의 목을 껴안으며 방금 전보다는 조금 더 질척하게 혀를 엮었다. 그의 손이 넉넉하게 허리를 안아 왔다.
채훈은 순순히 끌려가는 대신에 승건을 소파 위로 살짝 밀고는 벌어진 다리 사이에 무릎을 집어넣었다. 소파가 넓었기 때문에 등받이 깊숙이 기댄 승건이 반쯤 눕다시피 했는데도 자리가 넉넉했다.
“내가 기분 좋게 해줄게.”
“뭘 하려고?”
“전에도 말한 것 같은데, 내가 술을 마시면 과감해지거든.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데.”
채훈은 통보에 가까운 말을 하면서 승건의 넥타이와 셔츠를 차분하게 풀었다. 거부의 의사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깨끗하게 흰 목덜미에 입술을 댔다.
흔적이 남지 않을 정도로 가볍게 이를 세우고 잘근거렸다. 그리고 살냄새를 들이마시며 혀로 핥기를 반복했다.
채훈은 술에 취하면 과감해지는 성격이었다. 적극적인 애무로 욕구를 키워가는 것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승건의 반응이 영 애매했다. 움찔하고 떠는 것은 처음뿐이었다. 어디라도 만지며 달려들어야 할 녀석이 손을 놓고 있었다.
의아한 기분에 입술을 뗀 채훈은 승건을 보았다. 열기를 품은 눈빛은 언뜻 냉정한 것 같기도 했다.
“별로야?”
“아니.”
“좋은 것 같지 않은데. 그만해? 싫으면 관두고. 혼자 이러는 것도 웃기잖아.”
혼자 흥을 내는 것만큼 꼴사나워 보이는 것은 없었다. 그래도 미련이 남아 혹시나 하고 계속 여지를 두고 묻자 승건이 피식 웃었다. 무엇에 기분이 꼬였는지 모르지만 풀린 모양이었다.
“새가 쪼는 것 같아서.”
“그 말을 후회하게 해주지.”
재미없는 농담에 채훈 역시 웃으면서 다시 가볍게 입을 맞췄다가 떨어졌다. 그러고는 승건의 재킷과 베스트, 셔츠 단추를 차례대로 풀어헤쳤다.
“새는 단추 같은 거 못 푼다고.”
채훈은 벌어진 옷자락 사이로 손을 집어넣었다. 승건은 셔츠 안에 속옷을 입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손 안에 따끈하고 매끄럽고도 단단한 맨살이 닿았다. 몸이 좋은 녀석은 만지는 느낌도 좋았다. 채훈은 의도적으로 승건의 눈을 마주하며 그의 몸을 쓸었다.
살짝 내려다보는 위치여서 승건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똑똑히 보였다. 무심한 얼굴에 조금씩 감정이 번지는 것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는 게 즐거웠다.
표정 변화가 크게 없는 녀석이었다. 그가 쾌락에 젖어 허덕이는 모습을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아주 멋질 것이다.
“너를 한번 울려보고 싶은데.”
속마음이 소리가 되어 나왔다. 그러자 승건이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물었다.
“어떻게 울리려고?”
“그러게. 방법이 생각 안 나.”
채훈은 시답지 않는 농담을 하면서 바지 위로 솟아올라 있는 승건의 성기를 살짝 감싸 쥐었다. 성기는 바지와 함께 손 안에서 순식간에 부피를 키워갔다. 좀 더 힘주어 잡자 승건이 인상을 쓰면서 손을 막았다.
“어디까지 할 거야?”
승건의 낮은 목소리에는 거친 숨이 섞여 나왔다. 녀석이 흥분했다. 뺨만이 아니라 목까지 붉어진 것을 보면 확실했다.
“내 손에서 가는 게 싫어? 완전 꿈틀꿈틀하는데.”
“싫어.”
“그럼 내가 올라타는 건?”
“성격이 변했어. 왜 이렇게 적극적이야?”
“술도 마셨고, 하고 싶어서. 새로운 자세로. 싫으면 싫다고 해. 나 좀 무겁거든.”
평범하게 섹스를 좋아하는 채훈은 이것저것 시도해 보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도 상대의 취향은 존중하는 편이었다. 기승위라고 불리는 자세는 서로에게 부담이 많이 갔다. 아래에 깔리는 쪽이 무게를 버티는 것이 관건인데, 이것 역시 취향 문제였다.
채훈은 승건의 의사를 물어보면서도 성기를 쥐고 있는 손에 슬그머니 다시 힘을 주었다. 동시에 활짝 웃으면서 도발했다.
“……하고 싶은 대로 해봐.”
승건이 한 박자 늦게 대답하며 손을 거두었다. 채훈 역시 승건의 성기 대신에 양쪽 어깨를 붙잡고는 자세를 바꿨다. 소파 위로 무릎으로 버티고 서서는 승건의 허벅지에 올라타다시피 했다.
조금 전에 풀어헤친 승건의 옷자락 안으로 손을 집어넣으면서 입을 맞췄다. 그러고는 허리를 밀어붙여 사타구니끼리 맞부딪혀 슬쩍 비벼댔다. 작은 자극만으로 짜릿함이 피어올랐다. 또한 손바닥에서 승건의 근육이 움찔거리며 튀어 오르는 것이 느껴져서 흥겨웠다.
숨이 허덕일 때까지 키스를 하면서 몸을 어루만지며 흥분을 키웠다. 한참 만에 입술을 떼자 승건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다시피 말했다.
“술에 취하면 이러는 거야?”
“가끔은? 술주정하는 거 아니야. 좀 더 과감해지는 거지.”
“그게 아니라…….”
말을 하다 만 승건이 다시 미간을 찡그렸지만 채훈은 그의 반응을 일일이 살피지 않았다.
“집중해 줘.”
채훈은 승건을 손을 잡아끌어 손가락을 입에 물었다. 펠라를 싫어한다고 딱 부러지게 말한 승건이었다. 손가락을 빨면 어떨까 싶었다.
검지와 중지를 느리게 핥고 강하게 빨자, 당장에라도 채훈을 잡아먹을 듯이 무시무시한 눈으로 바라보던 승건이 손가락을 움직였다. 혓바닥을 지그시 누르다가 입천장을 살짝 간질였다. 그리고 채훈은 그 손을 잡고 손끝을 살짝 깨물었다.
“너 진짜…….”
무어라 한마디 하려던 승건이 빠르게 움직였다. 채훈의 바지와 속옷을 끌어 내리고는 두 손 가득 엉덩이를 붙잡았다. 성급한 손길이 엉덩이 사이를 파고드는 것을 채훈이 막으며 젤을 쓰라고 요구했다. 승건이 얌전하고 재빠르게 상자 안에 들어 있는 튜브를 집었다.
젤이 듬뿍 묻은 손가락이 애널을 파고들 때 채훈은 몸을 떨며 승건의 입술을 찾았다. 키스는 달콤했지만 아래에서 한 개씩 늘어가는 손가락은 무자비했다. 어느새 세 개가 된 손가락이 춤을 추듯 안을 헤집었다. 약한 곳만 자극하는 탓에 미칠 것 같았다.
채훈은 키스를 하면서 승건의 바지 벨트를 붙잡았다. 그러나 몸이 너무 바짝 붙어 있는 데다 자극 때문에 정신이 없는 탓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이젠. 흣. 이젠 하고 싶어.”
참을 수 없을 때까지 버티던 채훈이 애원하듯 말했다. 그러자 승건의 손에 의해 채훈의 바지가 벗겨졌다. 채훈 역시 승건의 바지를 끌어 내렸다.
흉흉해 보일 정도로 잔뜩 발기한 성기는 채훈의 손 안에 빠듯하게 담겼다. 평균을 훌쩍 넘는 크기에 몇 번째인지도 모를 감탄을 한 채훈은 콘돔을 씌우고는, 승건의 어깨를 잡은 채 무릎에 힘을 주고 허리를 들었다.
“서두르지 마.”
채훈은 허리를 단단히 붙잡은 승건의 다정하고도 위협스러운 충고에 빙그레 웃었다. 매번 주도권을 쥐고 사람을 쥐어짜며 몰아붙이던 녀석이었다. 당장에라도 잡아먹고 싶어서 안달 난 호랑이처럼 눈을 빛내는 주제에 얌전히 기다려준다는 사실이 좋았다.
반했다는 건, 이런 게 문제였다. 상대의 어떤 행동에든 의미를 부여하고 다 좋게 해석해 버렸다.
쓸모없는 자기비판을 하면서도 채훈은 성난 승건의 성기를 제 몸 안에 집어넣으려고 노력했다.
콘돔과 젤 때문에 끝이 살짝 파고드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승건이 허리를 잡아주는 덕분에 주저앉을 위험 없이 천천히 허리를 내렸다. 뜨겁고, 크고, 딱딱한 것이 꾸역꾸역 밀고 들어왔다. 몸이 벌어지는 감각은 아무래도 익숙해질 게 아니었다.
채훈은 승건의 어깨를 붙잡고 있는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생리적인 아픔에 눈에 물기가 차올랐다. 그래도 이대로 그만둘 수 없었다. 허리를 들었다가 내리기를 반복했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한계까지 벌어진 구멍이 커다란 성기를 삼키고 있을 것이다. 점막이 그것을 감싸며 조였다.
머릿속의 상상과 속살이 밀려나고 딸려 나오는 감각이 뒤섞였다. 그리고 눈앞에서 승건이 미간을 찡그리며 참는 광경이 모두 흥분으로 다가왔다.
끝이 없을 것 같은 삽입이 어느 순간에 끝났다. 배가 꽉 차는 기분에 숨을 골라야 했다.
“전부터 생각한 건데.”
“……?”
“너, 너무 크다.”
말을 하고 나서야 채훈은 자신이 헛소리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괜찮았다. 승건이 미간을 와락 구겼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헛소리 탓인지 아니면 안을 꽉 조인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승건을 당황하게 만들어서 흥겨웠다.
“네가 너무 좁은 거지.”
“어, 응. 그런 것 같아.”
채훈은 아무렇게나 대답하면서 허리를 움직였다. 빡빡하게 꽉 맞물린 탓에 마음껏 움직일 수 없었다. 그래도 조금씩 밀려들고 짓누르는 감각에 간질거리고 저릿한 감각이 퍼지기 시작했다.
이게 아니라 더 강한 쾌락이 필요했다. 아무 생각 없이 온전히 섹스에 집중하고 싶었다. 갈증을 닮은 욕망에 몸을 내맡기며 허리를 흔들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온전하게 채워지지 않았다. 좀 더 거칠고 강한 움직임이 필요했다. 그런데 승건이 호응해 주지 않았다.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자신을 잡아먹을 듯이 바라보면서 허리가 부러져라 잡고 있는 주제에 말이다.
“너, 너 안 움직일 거야?”
채훈은 일부러 엉덩이에 힘을 꽉 주며 말했다.
“나중에.”
“뭘 나중에. 읏. 아!!”
승건이 대답 대신에 채훈의 셔츠 아래로 손을 집어넣고는 유두를 강하게 눌렀다. 그 바람에 채훈은 숨을 삼키며 몸을 떨어야 했다. 아래에서 차오르는 쾌감과 다른 짜릿함에 아찔해졌다.
“움직여봐.”
이번에는 유두를 잡아 비튼 승건이 속삭였다. 승건의 입가에 맺힌 미소에 채훈은 그제야 그가 즐기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흥분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을 좋아하는 녀석이었다. 반쯤 깔린 자세에서 올려다보는 게 흥미로운 게 분명했다.
어차피 즐기는 거니까 그건 상관없었다. 그래도 언제까지 참을 수 있을까 오기가 생겼다. 두고 보자는 마음에 채훈은 승건을 똑바로 바라보며 한 번 더 아래에 힘을 주면서 허리를 움직였다. 하지만 그럴수록 유두를 잡아 비트는 승건의 힘이 더 강해졌다.
독한 놈.
채훈은 승건을 욕하고는 자신이 만들어내는 쾌락에 집중했다.
자세가 바뀌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이 달라졌다. 승건을 깔고 앉은 것도, 그가 올려다보는 눈빛도 모두 자극이었다.
가장 달라진 것은 스스로가 섹스의 강도를 조절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눈앞의 번쩍거림도 허덕임도 모두 좋았다. 그래도 승건이 주도권을 잡았을 때의 숨 막히는 압박감을 떠올렸다. 아쉬움에 끝이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뒤를 자극하는 것만으로도 절정에 이를 수 있었지만, 그래도 잔뜩 발기한 것을 붙잡고 흔들었다. 자극이 몸을 튀어 오르게 만들었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승건이 그걸 막았다.
“내 목에 팔을 둘러.”
상체를 일으킨 승건이 채훈의 팔을 자신의 목에 두르게 했다. 채훈은 발기한 성기가 승건의 옷자락에 닿는 바람에 몸을 떨어야 했다.
“승건아.”
“꽉 잡아.”
잇소리를 낸 승건이 채훈의 엉덩이를 꽉 붙잡고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때부터 채훈은 정신을 하나도 차릴 수가 없었다. 푹푹 찔러 드는 허릿짓은 자신이 바라던 과격함이었다. 헐떡임이 흐느낌이 되었다. 열기와 쾌락이 이성을 앗아갔다. 절정은 금방 다가왔다. 승건 역시 몇 번 더 세게 추어올린 다음에 몸을 굳혔다.
채훈은 잘게 떨리는 승건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섹스가 끝나자 만족스러움과 허탈함이 동시에 덮쳐 왔다. 그리고 모든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이명에, 심장은 뛰고, 덥고, 숨은 거칠어졌다.
젖은 시야에 정액으로 지저분해진 사타구니가 보였다. 승건의 슈트에도 정액이 잔뜩 묻어 있었다.
승건의 러트 때도 이랬다. 둘 다 옷을 제대로 벗지 않고 섹스를 한 탓에 둘 다 슈트가 엉망이 되고 말았다. 특히 채훈의 재킷과 셔츠는 손쓸 수 없어서 결국 쓰레기통에 들어갔다. 다행히 오늘 승건의 슈트는 양호한 편이었다.
“옷이 또 엉망이네.”
채훈은 승건의 어깨에 기댄 채 중얼거렸다. 소리 없이 웃은 승건이 엉덩이를 주물거리면서 괜찮다고 했다.
“옷 입고 하는 거 버릇 들겠다.”
“이제 내 차례지?”
승건이 목을 깨물며 물어 왔다. 부드러운 애무에 채훈은 잠시 생각했다. 자신의 뜻대로 했으니 이제는 승건의 차례가 맞았다.
“어, 응. 맞아.”
그렇다고 대답하자마자 승건이 입을 맞춰 왔다. 질척이는 키스였다.
키스에 빠져든 채훈은 어느새 자신이 승건에게 감싸 안긴 채 소파에 누워 있다는 것을 인지했다. 자세가 바뀐 덕분에, 몸 안에서 빠져나가지 않고 있던 승건의 성기가 각도를 바꾸어 내부를 찔러댔다. 내리누르는 무게에 만족하며 채훈은 승건을 꽉 끌어안았다.
*
*
채훈은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씻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 수면등만 켜둔 실내는 어두컴컴했다.
아직 아침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으며 정신을 수습하고 있는데 비스듬히 누워 있는 승건과 눈이 마주쳤다. 아마도 한참을 그러고 있었던 듯 승건의 자세는 안정적이었다.
“더 자.”
승건의 손이 채훈의 눈을 덮었다가 떨어졌다. 부드러운 손길에 채훈은 눈을 감았지만 곧 다시 떴다.
“시간 얼마 안 지난 거지?”
“10분 정도밖에 되지 않았어.”
“이제 가야겠어.”
“가려고?”
“가야지.”
채훈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주말이면 모르겠지만 주중에는 집에 돌아가는 게 여러모로 마음 편했다.
씻기 위해 침대 밖으로 내려서는데 순간 허리 아래로 힘이 들어가지 않아 주저앉듯 휘청거리고 말았다. 마침 자리에서 일어나 앉은 승건이 붙잡아주지 않았더라면 나동그라졌을지도 몰랐다.
“괜찮아?”
“어. 그냥 다리에 힘이 풀렸어.”
괜히 민망해진 채훈은 얼른 일어났다.
“붙잡아 줘?”
“그 정도는 아니야.”
채훈은 승건의 손에서 벗어나 얼른 욕실로 향했다.
몇 번이나 썼던 탓에 눈을 감고도 선반 위에 놓인 것들을 찾을 수 있었다. 기계적으로 샤워버튼을 누르자 물이 쏟아졌다. 적당히 따뜻한 물을 맞으며 채훈은 천천히 정신을 차렸다.
술은 이제 완전히 깼다. 그러자 부끄러움과 민망함이 거대한 파도가 되어 밀려들었다. 이마를 욕실 벽에 찧자 차가운 타일의 감촉에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더욱 선명하게 떠올랐다.
승건을 타고 앉아서는 더 해달라고 마구 졸라댔다. 너무 흥분해서 이성의 끈을 놓아버렸다.
채훈은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뺨을 손으로 문질렀다. 만고의 진리대로 술이 문제였다. 그때는 정말로 당연하고, 합리적이고, 문제없다고 확신했지만 시간이 흐르고 정신이 돌아오면 허공에다가 발길질을 할 정도의 흑역사가 되는 법이었다.
채훈은 아직도 팔목에서 반짝거리는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에서 이거 하나만 차고 있었다는 사실에 자괴감까지 들려고 했다. 정말 왜 그랬나 후회했다.
됐어. 이미 볼 거 다 본 사이인데.
이미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을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리고 어차피 이것저것 다 하는 사이인데 뭐든 못 할까 싶었다.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며 채훈은 스트레스가 문제라고 생각했다. 우울함을 떨쳐버리기 위해 섹스를 하는 것은 좋은 버릇이 아니었다.
앞으로는 조심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채훈은 서둘러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
침실은 불이 환하게 밝혀진 상태였다. 그리고 잠옷 바지만 입은 승건이 옷가지들을 챙겨 침대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모두 채훈이 거실에 벗어둔 것들이었다.
채훈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는 옷을 입었다.
그사이에 침실을 나간 승건이 종이가방과 손잡이 줄이 달린 종이상자를 하나 가지고 돌아왔다. 하나는 팔찌를 담았던 거였는데, 길쭉한 종이상자는 처음 보는 거였다.
“생일 선물이야. 생일 축하해.”
“고마워. 이거, 모양을 보니까 술 같은데?”
“응. 와인. 전에 네가 마음에 든다고 했던 거.”
술을 좋아하는 채훈은 승건과 함께 마신 와인 중에 싫었던 게 없었다. 무엇을 마음에 든다고 했는지 기억은 나지 않았지만 승건이 그걸 기억하고 챙겨줬다는 게 중요했다.
채훈은 승건을 보며 활짝 웃었다. 굳이 생일을 챙겨준 것도, 마음에 들어 한 와인을 기억해 준 것도, 어쩌면 만나는 날까지 바꾸어 생일을 축하해 주는 것도 모두 고마웠다.
“고마워. 이건 주명이랑 같이 마셔야겠다.”
“왜 그 녀석이랑 같이 마셔?”
“응? 주명이? 아, 걔가 와인을 좋아해. 같이 살고 있는데 와인을 혼자 마실 수는 없잖아.”
술이면 딱히 가리는 것이 없는 채훈과 달리 주명은 와인을 즐겼다. 좋은 와인을 들고 가면 혼자 마실 수는 없었다. 채훈은 자신의 기준에서 아주 합리적으로 설명했다. 그래서 승건이 얼굴을 구기며 인상을 쓰는 게 의아했다.
“아직도, 그러니까 서주명은 언제까지 같이 사는 거야?”
“아직 멀었어. 걔가 요새 너무 바쁘거든. 이번 달까지는 프로젝트 때문에 야근을 계속해야 된대. 그때까지는 같이 있을 거야. 내가 살고 있는 오피스텔이 제일 편하기는 한데, 여름까지는 빈방이 없다고 하더라고.”
“같은 오피스텔에 방을 구할 거라고?”
“아직 몰라. 그래도 내가 살고 있는 곳이 여러모로 좋아서 여름까지 같이 살까 싶기도 하고.”
침대에 앉아 양말을 신던 채훈은 승건의 표정이 사납게 변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채훈이 고개를 들었을 때는 짧은 순간 승건의 얼굴에 담겨 있던 불쾌한 감정의 흔적은 사라졌다. 그럼에도 그의 얼굴에서는 못마땅한 기색이 사라지지 않았다.
채훈은 고개를 갸웃거리기는 했지만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부지런히 움직여서 손목시계와 지갑, 휴대폰을 챙겼다. 팔찌는 보석함에 집어넣었다.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마무리한 채훈은 승건이 호텔 리무진 서비스를 부르겠다는 걸 말렸다.
“할 말이 있어.”
“사랑하지만 실망한 상대에 대해서?”
냉정하게 사실을 지적하는 말에 채훈은 승건이 강수찬과의 일을 아는 건가 싶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사실 자신이 오늘 유별나게 굴기는 했다. 술을 잔뜩 마시고는 승건을 올라타서 섹스를 졸라댔다. 그래도 승건에게 가족들과의 불화를 구구절절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 일만큼은 자신의 손으로 해결하는 게 옳았다.
“그거 말고. 낮에, 병원에서 써니 씨를 만났어.”
“써니를? 왜?”
승건의 표정이 단번에 사나워졌다. 이렇게 될 거라고 예상한 채훈은 덤덤하게 말했다.
“병원에서 검사받을 게 있었나 봐. 점심시간에 잠시 만났어. 아니면 사무실로 찾아온다고 해서.”
“그 녀석이.”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지만, 네 욕을 했어. 너 때문에 주식이 망했다고.”
“그리고?”
써니가 단순히 욕만 하고 돌아가지 않았을 거라고 확신하듯 승건이 물었다. 채훈은 어디까지 말해야 하나 잠시 망설였다. 써니를 언급한 것은 계약 때문이기는 했다. 그녀가 딱히 승건의 비밀을 캐내려고 하지는 않았지만 조심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승건의 외할머니 명함을 받은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승건은 그의 외할머니와 사이가 좋아 보였다. 괜히 말을 꺼내서 없는 문제를 키우고 싶지 않았다. 아직은 명함일 뿐이었으니 조금 더 지켜보자 마음먹었다.
“생일 선물을 받았어. 지갑이래.”
“그거 버려.”
“선물을 왜 버려?”
“써니가 알파인 건 알아?”
“알파였어? 그런데 그게 왜?”
채훈은 써니가 알파인 것에 조금 놀랐다. 여성 알파는 남성 오메가만큼이나 드물었다. 하지만 써니가 알파인 것과 그녀에게서 받은 생일 선물을 버려야 하는 것에 무슨 상관이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써니와 어울리지 마.”
“그럴 생각이긴 한데, 그래도 병원까지 찾아오면 방법이 없다는 건 너도 알지? 지갑은 내가 선물받은 거니까, 내가 알아서 할게.”
채훈 역시 써니와 어울릴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아직 포장도 뜯지 않은 지갑을 버릴 생각 역시 없었다. 그것을 확실하게 말하자 승건의 얼굴이 또 굳어졌다.
“너는…….”
이번에도 승건이 무어라 말을 하려다 말았다. 굳은 얼굴은 차가워졌다.
“너는 이상한 놈들이 잘 꼬여.”
“그다지?”
채훈은 딱히 자신이 진상을 많이 만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최근 가장 골때리는 것은 박광호였다. 그에 비하면 써니는 적당히 자기주장이 강한 것뿐이었다.
“지갑 따위야 아무것도 아닌데.”
“그러니까.”
“그런데도 쓰레기통에 집어 던지고 싶으니 말이야.”
지갑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고는 이상한 결론을 내는 승건 때문에 채훈은 살짝 인상을 썼다.
“내가 받은 거라니까.”
“그것뿐만도 아니고.”
“……?”
뭔가 대화의 핀트가 자꾸 어긋나고 있는 것 같아서 채훈은 돌아가겠다는 말을 꺼낼 타이밍을 잡지 못했다. 어색한 침묵 속에 시선이 얽혔다.
채훈은 자신을 뚫어질 듯 바라보고 있는 승건의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 봐주었다. 잘생긴 얼굴에서 생각을 읽어낼 수는 없었다.
그래도 그가 눈을 한 번 깜박이는 사이에 복잡한 감정이 정리되는 것이 눈에 보였다.
“강채훈.”
“왜?”
채훈은 승건의 부름에 대답했다.
“나랑 사귀자.”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 승건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바람에 채훈은 눈을 깜빡였다. 4개월 전과 마찬가지로 채훈은, 자신의 귀에 이상이 생긴 것이 아닌가 의심해야 했다.
크로스 마크 3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