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파워게임】
섬세한 장미 문양이 찍힌 초콜릿은 은은하고 장미향이 났다.
[예쁜 만큼 맛도 있음. 감사.]
승건에게 감사의 메시지와 함께 사진도 보낸 채훈은 초콜릿을 하나 더 입에 넣었다.
승건에게서 답장은 오지 않았지만 채훈은 별달리 신경 쓰지 않았다. 이미 외출 준비는 완벽하게 마쳐둔 상태였다. 달리기로 땀을 흠뻑 흘렸지만 샤워까지 마치고 새로 산 속옷으로 갈아입은 다음에 다시 슈트를 입고 승건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도착했다는 전화만 오면 튀어나갈 수 있었다.
무엇보다 지금 고교 친구들이 모인 단체 채팅방에 중요한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채훈의 생일이 딱 10일 후였다. 10여 년 동안 친구들과 인연이 계속 이어진 원동력 중의 하나가 서로의 생일을 챙기는 것이었다.
별로 거창하지는 않았다. 생일 전후로 다 같이 모여 밥과 술을 먹었다. 1년에 네 번. 개인 사정에 따라 참석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기도 했고, 날짜가 아주 미뤄지기도 하고, 아주 가끔은 주인공이 빠지기도 했었지만 모임 자체가 무산된 적은 없었다.
서로 각자 사는 게 바쁘다 보니 모임 날짜를 정하는 게 중요했다. 그 일은 꼼꼼한 성격인 신유진이 했다. 모임 날짜를 정하자고 말을 꺼낸 것도 신유진이었다.
날짜는 다다음주 금요일로 잡혔다. 남은 것은 메뉴였다.
[소갈비.]
[고기 말고 딴 거.]
[뭐?]
[회.]
[초밥?]
[그냥 회.]
[소갈비라고.]
[전에 먹었음.]
남태호가 고기를 외쳤고 서주명이 회를 밀어붙였다. 다들 식성이 비슷해서 먹는 걸로 싸우지는 않았다. 그저 뭘 먹느냐가 문제일 뿐이었다.
채훈이 곱창은 어떠냐고 슬쩍 끼어들었지만 다들 무시했다. 생일의 주인공은 그날 지갑을 열지 않는 대신에 발언권이 없었다.
“승건이 녀석, 곱창 먹으려나.”
결국 활어회로 결정 난 채팅창을 보면서 채훈은 승건을 떠올렸다. 초콜릿은 너무 달고, 마카롱은 식감이 이상하고, 브라우니는 밀가루 맛이 난다고 혹평을 한 녀석에게 곱창은 난도가 높았다. 무엇보다 반듯한 도련님인 승건과 곱창은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도 모르니까 나중에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도어락이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TV를 켜놓고 있기는 했지만 전자음을 잘못 들을 리 없었다.
“벌써 왔어?”
채훈은 현관 쪽을 바라보았다. 차가 밀린다고 한 지 5분도 지나지 않은 상태였다. 설마 놀리려고 거짓말을 했나 싶은 생각에 반가움이 밀려들었다.
그러나 곧 승건의 얼굴을 볼 거라는 기대감은 거실로 들이닥친 일련의 무리로 인해 사라져 버렸다.
남자만 셋이었다. 그중에 검은 양복을 입은 두 명은 한눈에 봐도 경호원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눈에 띄는 미남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상기된 얼굴의 남자가 우아하게 눈썹을 찡그렸다.
“베타야?”
다짜고짜 남자가 반말을 했다. 그것도 시비조였다. 채훈은 발끈하는 대신에 침착하게 생각했다. 승건의 성격이라면 손님을 초대했다는 사실을 숨길 것 같지 않았다.
“당신이야말로 뭐야?”
“취향 한번 독특하네. 베타라니.”
“집주인이 초대하지는 않았을 텐데.”
“곧 결혼을 할 텐데, 초대 따위야 필요 없지.”
눈을 곱게 접으며 웃은 남자가 당당하게 말했다. 그래서 채훈은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묻지 못했다.
머리가 빨리 움직였다. 승건이 오늘 낮에 맞선을 강요받았다고 한 것이 기억났다. 아마도 오메가일 이 남자가 그 맞선 상대일 것이다. 승건은 결혼 생각이 없다고 했지만 남자는 그렇지 않은 듯했다.
“뭐, 베타라면 정부든 애인이든 상관없긴 한데.”
“……?!”
“그래도 오늘은 아니야. 치워.”
나른한 어조로 혼잣말 아닌 혼잣말을 하던 남자가 웃으면서 명령을 내렸다. 채훈이 흠칫하며 자세를 잡는 사이에 경호원들이 덮쳤다.
팔을 잡아채는 힘에 반사적으로 저항을 하다가 주먹으로 관자놀이를 얻어맞았다. 잠깐 멍해지는 와중에 목이 팔에 감겨 왔다.
갑작스러운 기습에 채훈은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다. 나름 운동을 했다지만 전문가인 경호원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한 명 정도라면 어떻게든 대거리가 가능했겠지만 두 명이었다. 체격도 무게도 차이가 컸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을 빠르게 내렸다. 힘을 빼자 팔이 뒤로 꺾인 채 순순히 제압당했다. 그 자세 그대로 현관까지 끌려가서는 신발도 신지 못한 채 복도로 쫓겨나고 말았다.
채훈이 자세를 바로잡고 어떻게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문이 열리고는 신발과 휴대폰, 재킷이 복도에 내던져졌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채훈은 한숨을 삼켰다. 난데없는 봉변이라는 말은 이럴 때 어울렸다.
베타. 결혼. 정부. 애인. 치워.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온 단어를 다시 떠올린 채훈은 머리를 흔들고는 차분히 움직였다. 신발을 신고 재킷까지 입은 다음에 휴대폰을 들었다.
복도에서 서성이는 게 웃겨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까지 내려갔다. 찬바람을 맞고 조금 열이 식고 나서야 승건에게 전화를 걸었다.
―무슨 일이야?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승건의 목소리를 듣자니 울컥했다. 그의 잘못이 아니라는 건 아는데 욕이 나올 것 같았다.
채훈은 크게 숨을 들이쉬고는 단숨에 말했다.
“그게. 어떤 사람이 아파트에 찾아왔는데, 쫓겨났어.”
―너무 짧잖아. 자세히 말해 봐. 다친 데는 없고?
“문이 열려서 네가 빨리 왔나 싶었는데, 모르는 남자더라고. 이름은 몰라. 통성명은 안 했어. 어쨌든, 막을 새도 없이 갑자기 들이닥쳐서는……. 하아. 나가라고 해서 버텼는데 경호원 같은 사람들에게 잡혀서 쫓겨났어.”
―이런.
승건의 헛웃음 소리가 들렸지만 채훈은 따라 웃지 못했다.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설명하면서 격한 말이 나오는 것을 겨우겨우 참았다.
어른이 되고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별별 일을 다 겪기 마련이었다.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진상 손님을 만나 곤욕을 치러보기도 하고, 직장 상사가 내던진 서류 더미에 맞기도 했었다. 그건 숨을 길게 들이쉬고는 참으며 넘어갈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이름 모를 남자와 채훈 사이에는 승건이 있었다.
남자가 결혼할 사이라고 했다는 것을 말하려다가 참았다. 승건은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 했으니 그걸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었다. 어쩌면 외할아버지에게 결혼하라는 명령을 들었다고 해버릴까 봐 무서웠다.
이름 모를 남자가 채훈의 약한 곳을 제대로 넘겨짚었다. 그가 말한 것과 달리 자신은 정부도 애인도 아니었다. 그저 돈으로 만난 사이에 불과했다.
오늘 그걸 다시 한번 깨달았다.
“나 돌아간다. 아니, 돌아가고 있는 중이야. 나머지는 네가 알아서 해.”
―가까운 호텔을, 전에 만났던 H호텔을 잡아둘 테니까, 거기 가 있어. 심 실장님이 메시지 보낼 거야.
이 상황에서도 보자는 승건의 목을 조르고 싶어졌다. 기세등등한 그 남자와 과연 어떤 해결을 하고 올지 상상하기 싫었고, 따지고 싶은 힘도 없었다.
“꼭 봐야 해?”
―강채훈.
“네 잘못 아닌 건 아는데. 아, 진짜. 기분이 좀 그래. 그냥 오늘만 좀 보지 말자.”
―설마, 다쳤어?
다쳤다. 얻어맞은 얼굴은 욱신거렸고, 자신의 바보짓을 자각한 머리가 아팠다. 그게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멀쩡해. 괜찮아. 이제 끊는다. 연락하지 마. 전화 안 받을 거야.”
채훈은 승건이 무어라 하기 전에 통화를 끊었다. 재빠르게 무음으로 바꾸는 것도 잊지 않았다. 몇 초 지나지 않아 승건의 이름이 액정에 떴지만 무시해 버렸다.
짜증 나고, 화나고, 그리고 기분이 그랬다.
지금껏 채훈은 굴곡 없는 연애만 했었다. 웬만한 건 채훈이 상대에게 맞춰줬기 때문에 크게 싸울 일이 생기지 않았다. 다른 연인들처럼 투닥거리기는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그래서 두 번은 무난하게 헤어졌다. 둘 다 거리가 문제였다. 한 명은 유학을 갔고, 또 한 명은 제주도 지사로 발령을 받으면서 멀어졌다.
마지막이 최악이었다. 양다리를 걸치던 놈에게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받았다. 나중에야 양다리라는 것을 알고 분노했지만, 이미 3개월이나 지난 시점이라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애인도 아닌데 양다리를 걸친 거냐고 따지는 것도 웃겼다. 만약에 승건이 결혼을 한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1년의 계약을 들먹이면 별수 없이 그와 계속 만나야 했다.
자신이 어떤 처지인지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이런 취급을 받고도 어디에도 화를 내지 못한다는 사실이 답답했다. 승건을 좋아한다고 자각을 해버린 지금에는 억울하기까지 했다.
택시를 잡기 위해 걸음을 옮기는데 이번에는 심정민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전에 승건과 만났던 H호텔의 방갈로를 자신의 이름으로 예약해 두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괜찮냐는 안부도 덧붙여 있었다.
“미친 새끼.”
채훈은 기어코 호텔을 예약한 승건을 향해 욕을 했다.
“내가 갈 거 같아?”
이런 기분으로 그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얼굴을 보자마자 한 대 때릴 것 같았다. 만에 하나라도 승건이 계약대로 섹스를 해야 한다고 강요한다면 정말 비참해질 것 같았다.
최악의 상상에 채훈은 얼굴을 구겼다.
오늘은 꽤나 괜찮은 하루였다. 데이트 같다며 어젯밤부터 설렜었다. 그냥 혼자 좋아하는 걸로 인정하고는 즐기기로 했다. 그런데 마지막이 엉망이었다.
몇 번째일지도 모를 한숨을 삼킨 채훈은 굳은 얼굴을 손으로 쓸었다. 술이 필요했다.
*
*
채훈은 편의점에서 산 맥주와 소주를 양손 무겁게 들고 원룸에 도착했다. 현관문을 닫고 신발을 벗는데 막 욕실에서 나온 서주명과 마주쳤다.
서주명은 지금 막 씻은 듯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닦고 있었다.
“너 외박하는 거 아니야? 벌써 돌아왔어?”
서주명이 놀란 듯 물었고 채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데이트를 하러 간다고 잔뜩 티를 내고 외출을 했는데 우중충한 얼굴로 돌아왔으니 서주명이 놀랄 만도 했다.
“그렇게 됐어. 약속 없지?”
“어, 응.”
“잘됐다. 같이 마시자.”
“뭐야? 그거 다 술이야? 애인이랑 싸웠어?”
“안주도 있어. 치킨이라도 시킬까?”
애인이랑 싸웠냐는 말에는 대답하지 않은 채훈은 탁자 위에 맥주와 소주를 늘어놓았다. 물에 젖은 머리를 말리며 서성이던 서주명이 눈을 크게 떴다.
“어? 너 얼굴에 그거 뭐야?”
“왜?”
“왼쪽 눈 밑이 빨개.”
채훈은 반사적으로 왼쪽 눈 밑에 손을 대었다가 욱신거리는 아픔에 인상을 썼다. 조금 전에 경호원에게 맞은 부분이었다. 조금 전까지는 그다지 아프지 않았는데, 다쳤다는 걸 인지하니까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맞은 거지? 설마 애인이 때린 거야?”
서주명이 엄청난 오해를 하는 바람에 채훈은 얼른 정정해 주었다.
“아니야. 다른 사람이랑 시비가 붙었어.”
“네가 얻어맞고 다닌다고?”
“그냥 그렇게 됐어.”
채훈은 적당히 말을 돌렸다. 입을 다물겠다는 뜻을 내보이자 서주명도 끈질기게 묻지는 않았다.
“어휴. 술 대신에 약부터 바르자. 약은 어디 있어?”
“심해?”
“멍든다. 백 퍼.”
“그럼 안 되는데. 약통은 TV 서랍에 있어.”
서주명이 서랍을 열고 이거냐며 막 약통을 들어 올릴 때였다.
딩동.
현관에서 초인종이 울렸다. 채훈은 현관과 서주명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주명아. 너 치킨이라도 시켰어?”
“아니.”
“잘못 찾아온 사람인가?”
채훈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복도식 오피스텔 건물이라서 종종 호수를 잘못 알고 초인종을 누르는 사람이 있었다. 혹시나 싶어 채훈은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누구세요?”
―나야.
여기서 들릴 리 없는 목소리였다. 바로 승건이었다. 채훈은 순간 멍해졌다.
녀석이 왜 여기에 있나 싶었다. 그것도 이렇게나 빨리 말이다. 택시를 잡는 거랑 편의점에 들러 술을 산 게 꽤나 시간을 잡아먹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감안하더라도 승건이 왜 자신의 집에 찾아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설마. 안 만나겠다고 해서?
채훈이 이유를 번뜩 머리를 스치는데 도어락이 풀렸다. 감기에 걸렸을 때 이후로 도어락 비밀번호를 바꾸지 않은 것이 떠올랐다. 문이 열리고 나타난 사람은 역시나 승건이었다.
“강채훈.”
“왜 여기까지 와.”
채훈은 날카롭게 따졌다. 승건의 멀끔한 얼굴을 보자 좋은 소리가 나오지 못했다.
“호텔로 가라고 했잖아.”
“오늘은 좀 안 봤으면 좋겠다고.”
“다쳤어?”
전실로 한 발자국 들어온 승건이 인상을 쓰며 물었다. 채훈은 반사적으로 왼쪽 눈 밑을 만지려다가 손을 내렸다.
“그냥 한 대 맞은 것뿐이야. 괜찮아.”
“괜찮기는―”
“어. 승건이 아냐?”
대화를 하는 도중에 서주명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채훈은 뒤를 돌아보았다. 서주명이 약상자를 든 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둘이 연락하고 지내는 거야?”
“아니. 그게.”
“나와.”
서주명의 질문에 채훈은 적당한 대답을 찾지 못했다. 그리고 승건이 명령을 내렸다. 서주명과 승건 사이에 끼인 채훈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승건은 당장에라도 채훈을 끌고 갈 듯 몸을 긴장시키고 있었다.
“지금은 네가 져야 해. 강채훈.”
여기서 더 크게 일을 벌이지 않으려면 알아서 하라는 소리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채훈은 이를 갈았다.
“아니면 끌고 가기라도 하게?”
“그래.”
“미친 새끼.”
무력행사도 불사하겠다는 소리에 채훈은 드디어 승건의 면전에서 욕을 해버렸다. 문제는 승건이 한다면 하는 놈이라는 것이었다.
“채훈아?”
채훈은 자신을 부르는 서주명을 돌아보았다. 서주명이 어리둥절한 눈을 하고 있었다. 여기서 서주명을 끌어들였다가는 더 복잡해질 게 뻔했다.
“미안. 가봐야겠어.”
“무슨 일이야?”
“싸워서 그래.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할게. 미안.”
복잡하게 꼬인 상황을 설명하기 힘들었다. 나중이라고 하자 서주명이 심각한 얼굴을 한 채 다가왔다.
“야, 말로 해. 말로.”
“말로 할 거야.”
“따라갈까?”
“아니. 괜찮아.”
채훈은 따라오려는 서주명을 극구 말리고 승건과 함께 집을 나섰다. 문이 닫히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채훈은 승건을 보며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너 지금 뭐 하자는 거야?”
“따라와.”
승건이 다짜고짜 채훈의 팔목을 낚아챘다. 채훈은 그걸 뿌리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억울함에 기분은 더 바닥을 쳤다.
“내가 지금 따라갈 것 같아?”
“네가 무엇 때문에 화가 났는지 아는데, 지금은 그냥 따라와.”
“야, 최승건.”
채훈은 끌려가지 않으려고 버티고 섰다. 그러자 승건이 턱을 잡고 입을 맞춰 왔다. 혀를 밀어 넣진 않았다. 그러나 입술을 깨물고 뺨을 비비는 행동은 일방적인 애무와 다름없었다. 채훈은 승건에게서 벗어나려고 몸을 비틀었지만 단단히 붙잡히고 말았다. 결국 승건의 얼굴을 코앞에 두고 외칠 수밖에 없었다.
“너 미쳤어?! 도대체,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오늘 하루는 내 시간이지. 그게 계약인데. 안 그래?”
여기서 또 계약 이야기가 나왔다. 채훈은 속이 뒤집어지는 게 뭔지 느꼈다.
“그래서? 여기서 박기라도 하게?”
“그렇게까지 미치지는 않았어.”
“그럼 놔.”
“따라와.”
“너 정말 이럴 거야?”
“아니면 끌려가든가 네 발로 걸어가든가 하겠지.”
턱을 잡은 채 선택권을 내민 승건의 위협은 진짜였다. 코앞에서 번뜩이는 승건의 눈빛은 물론 그의 모습은 흉흉하기 짝이 없었다. 시리고 뜨거운 감정이 채훈의 가슴을 가득 채웠다.
내 기분은 생각도 안 하는 거냐.
사귀는 사이에나 나올 법한 질문을 애써 삼켰다. 그건 자존심 문제였다. 승건의 입에서 다시 한번 더 계약이라는 소리가 나오면 더 빡치고 짜증 나고 슬플 것 같기도 했다.
무엇보다 채훈은 조용한 복도를 의식했다. 이곳 건물은 다른 건 다 좋은데, 복도 방음이 별로였다. 문 안쪽에서 잔뜩 긴장하고 있을 서주명이 걱정이었다. 또한 한 층에 20개에 가까운 방이 있어서 언제 다른 사람을 만날지도 몰랐다.
뒤는 생각하지 않고 승건과 화려하게 대판 싸우는 선택지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결국 손해를 보는 것은 자신이었다. 승건의 말대로 끌려갈 확률이 높았다.
“내 발로 간다. 씨. 손이나 놔.”
채훈은 될 대로 되라 싶은 심정으로 진저리 치며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턱이 잡힌 걸 풀렸지만 손목을 잡힌 것은 그대로였다. 채훈은 승건이 이끄는 대로 움직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올 때까지 대화 한마디 나누지 않았다. 건물 입구로 나가자 멋진 세단 옆에 심정민이 기다리고 있었다. 심정민이 고개를 살짝 숙이며 알은척을 했지만 채훈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승건에게 계속 손목이 잡힌 채 차에 올라탄 채훈은 열이 오른 눈을 감았다. 불편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승차감 좋은 세단이 부드러운 진동과 함께 내달렸다. 그리고 승건이 붙잡은 손이 타들어 가는 듯 뜨거웠다.
모든 신경이 손에 집중되는 것 같았다. 슬그머니 손을 빼내려고 몇 번 시도했지만 그 때마다 승건이 잡은 손에 힘을 주고는 놓아주지 않았다. 고집스러움까지 느껴지는 승건의 행동에서는 어떤 의지까지 읽혔다.
이 상황에서 먼저 말을 하는 건 왠지 지는 것 같아 채훈은 입을 꾹 다물었다.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화가 났다. 결정적인 순간마다 계약을 언급하는 녀석 때문에 속도 상했다.
별것 아닌 일이었다. 원래 그렇게 하기로 하고 만나는 것이었다.
그렇게 스스로를 설득하고 위로해 보아도 억울하고, 짜증 나고, 슬퍼졌다.
* * *
소리 없는 기싸움이 계속 이어지는 와중에 차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채훈은 주변의 풍경을 보고 도착한 곳이 H호텔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렸다. 그리고 이전에 승건과의 계약을 위해 만났던 방갈로로 향하고 있다는 것도 눈치챘다.
차가 멈춰 서자마자 채훈은 승건의 손에 이끌려 차에서 내려야 했다. 익숙한 방갈로 앞에는 이미 호텔 직원이 대기하고 있었다. 흉흉한 분위기에 호텔 직원은 별다른 말없이 문을 열어주었다.
뒤에 남은 사람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상관하지 않은 승건이 그대로 침실로 직행했다. 그리고 채훈은 그에게 끌려가다시피 움직였다. 그들을 따라오는 사람은 없었다. 거실을 가로지르는 사이에 문이 닫히는 소리가 울렸다.
물 흐르는 듯이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상황에 채훈은 설마 이대로 섹스를 할까 싶었다. 그러나 설마 하는 의문이 무색하게 침실 문턱을 넘자마자 승건이 다시 입을 맞춰 왔다.
조금 전과 달리 이번에는 뜨거운 혀가 입술 사이를 파고들었다. 거절하지 못하게 뒷목까지 단단히 붙잡은, 지독히도 무례한 키스였다.
기본적으로 돈으로 계약을 하고 섹스를 하는 관계였다. 고등학교 동창이라는 인연 때문에 편하게 대하기도 했지만 건조하게 섹스만 하고 헤어질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때조차 지금처럼 일방적이지 않았다.
정확히, 자신의 기분이 이렇게 바닥이지는 않았다. 승건도 매너 있게 굴었다. 그래서 의무적으로 해치워야 하는 섹스라는 행위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은 분명 선을 넘었다.
채훈은 황망함과 분노에 휩싸여 혀를 깨물었다. 가차 없었기 때문에 승건이 떨어져 나갔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잡은 손은 놓지 않았다. 채훈은 여전히 승건에게 붙잡힌 채 으르렁거렸다.
“너 뭐 하는 짓이야?”
“안 하려고?”
승건 역시 사납게 물었다. 채훈은 지지 않았다.
“너야말로 내가 싫다고 하면 강간이라도 하게?”
“강채훈.”
“하려면 제대로 해. 네가 원하는 건 들어준다고 했지만, 이렇게는 아니야.”
머리끝까지 열이 오른 채훈은 잔뜩 목소리를 낮췄다. 섹스 따위야 하면 그만이었지만 이런 식으로는 싫었다. 제대로 설명했는데도 못 알아먹는다면 이판사판 싸울 각오를 다졌다. 승건을 노려보고는 자유로운 오른손에 주먹을 쥔 채 긴장했다. 턱부터 후려갈기기 위해 다리 한쪽에 힘을 실었다.
숨결이 느껴질 만한 거리에서 서로를 노려보았다. 사나운 표정의 승건은 좀처럼 채훈을 잡은 손에서 힘을 빼지 않았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승건이었다.
“하아. 씨발. 이게 무슨.”
거칠게 욕설을 내뱉은 승건이 자유로운 손으로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렸다. 그러고는 그대로 채훈을 끌어안았다. 예상하지 못한 전개에 승건을 후려갈길 기회를 놓친 채훈은 곧이어 옥죄듯이 끌어안는 힘과 뜨거운 열기에 놀랐다.
“진짜 엉망이야.”
승건의 거친 목소리가 채훈의 귓가에서 울렸다. 채훈은 승건의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그가 잔뜩 인상을 쓰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뭐가? 설마, 너 아파? 열이 심해.”
승건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어리둥절하던 채훈은 승건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서로 옷을 겹겹이 껴입은 채 마주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승건의 몸은 뜨거웠다. 승건은 대답 대신에 맞대어 부비다 채훈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는 길게 숨을 들이쉬었다.
채훈은 난감했다. 커다란 손이 등을 쓰다듬는 것이나 뺨과 목덜미에 닿는 숨결은 애무나 마찬가지였다. 거기다가 빈틈없이 끌어안긴 탓에 흥분한 승건의 성기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방금 전까지는 욕하면서 화를 냈는데, 지금은 그게 자극이 되었다. 그래도 승건의 열이 걱정이었다.
“최승건. 너 아픈 거 아니야?”
“러트야.”
“……?!”
“러트의 열이야.”
승건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채훈의 뺨을 타고 울렸다.
알파의 러트는 가장 기본적인 내용 중의 하나였다. 오메가의 히트와 알파의 러트는 통칭 수태기나 발정기라고 불리는 페로몬 폭발 기간이었다.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히트와 러트는 약을 먹거나 섹스를 통해 진정시킬 수 있었다. 섹스를 할 경우 상대는 형질자든 일반인이든 가리지 않았지만, 보통은 알파와 오메가의 상성이 좋다고 알려져 있었다.
승건은 알파였고 러트가 오는 게 이상하지 않았다. 거기까지 생각한 채훈은 그의 열을 떨어트릴 방법을 더듬거리며 말했다.
“러트면, 약을―”
채훈은 채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승건의 입술이 두 번째로 닿았다. 처음처럼 입술만 핥고 떨어졌다가 다시 닿았을 때는 진짜 키스가 되었다. 뜨거운 혀가 느릿하게 파고드는 감각에 채훈은 등을 떨었다.
베타인 채훈은 러트가 온 알파의 절박함을 알지 못했다. 그래도 지금 승건이 섹스를 원한다는 건 알았다.
이래서야.
채훈은 승건을 거부하지 못했다. 그러기는커녕 키스에 응하며 승건의 목을 끌어안았다. 키스가 깊어지며 숨을 몰아쉬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승건이 입술을 떼더니 채훈을 밀쳐냈다.
“가.”
“뭐?”
“가라고. 가서 심 실장님을 불러.”
승건이 인내심을 모두 쥐어짜듯이 내뱉었다. 잔뜩 날을 세운 승건의 모습에 채훈은 순간 섭섭해졌다. 그러나 본인이 싫다면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실장님을 불러올게.”
채훈이 한 발 뒤로 물러나면서 돌아서려는데 팔이 잡혔다. 어느새 승건이 다가와 붙잡은 것이었다.
채훈은 흔들리는 눈으로 승건을 쳐다보았다. 뜻밖의 상황에 혼란스러운 자신만큼이나 승건 역시 그런 듯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
“너랑 해야겠어.”
승건의 목소리가 오만하고도 절박하게 울렸다. 상기된 뺨과 대비되게 눈동자는 형형하게 빛났다.
“오메가랑 해야 하는 거 아니야? 나는 베타야.”
“베타라도 상관없어. 아니, 널 원해.”
이 상황에서도 채훈은 승건을 때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이건 반칙이었다.
가라고 했다가 널 원한다고 붙잡으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러트가 온 알파의 변덕이라도 상관없었다. 승건의 눈앞에 자신이 아닌 딴 사람이 있어도 마찬가지였을 거란 생각도 멀찌감치 치워버렸다.
“내게 선택권은 있는 거야?”
“……싫으면 날 뿌리쳐.”
잠시 멈칫한 승건이 채훈의 팔을 붙잡은 손에서 힘을 뺐다. 채훈은 자신을 끌어안으려다 꾹 참고 있는 승건을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잡은 팔을 뿌리치라고 할 게 아니라 놓으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굳이 놓지도 않고, 끌어안지도 못하고,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에 괜히 마음이 울렁거렸다.
이건 진짜, 반칙이라고.
승건을 좋아하기에 작은 행동 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흔들리고, 끌리고, 기쁘고, 설렌다.
채훈은 자신의 팔을 붙잡고 있는 승건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덮었다. 약간의 사감을 담아 꽉 쥐는 것도 잊지 않았다.
승건의 손은 여전히 뜨거워서, 그 열이 옮겨지는 것 같았다.
“뿌리치기 전에 네가 놓으면 되겠네.”
“강채훈.”
“그냥 해. 원래 섹스하려고 만난 거니까, 제대로 하면―”
분위기에 어울리는 멋진 말을 하고 싶었지만 어딘가 허술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그래도 승건의 시선을 마주하며 배짱을 부리고 있는데 세 번째로 승건의 입술이 닿았다. 이번에는 제대로 된 키스였다. 승건이 허리를 끌어안아 오면서 부드럽게 입술을 삼키더니 깊게 혀를 섞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 키스가 사납게 변했다. 채훈은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승건의 뜨거운 몸에서 열기가 훅 밀려드는 것을 느꼈다. 호흡을 훔쳐가는 키스와 목덜미를 단단히 붙잡은 손길에 다리에 힘이 풀리려고 했다.
밀어붙이는 기세에 밀려서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는데 입술을 살짝 뗀 승건이 뺨을 부비며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이제 못 참겠어.”
그건 경고이자 선포였다. 심상치 않은 승건의 분위기에 채훈은 잔뜩 긴장했다. 그러나 턱과 목덜미에 닿는 승건의 입술은 부드럽기만 했다.
채훈은 승건이 미는 대로 침대 위에 쓰러져 누웠다. 다리 사이에 자리 잡은 승건이 벨트에 손을 댔다.
“원래는 이렇게 심하지 않아.”
“어…….”
알파의 러트가 어떤지 모르는 채훈은 어설프게 대답했다. 그사이에 벨트가 풀리고 승건의 손이 바지 속을 파고들었다. 뜨거운 손이 성기를 강하게 붙잡았다. 직접적인 자극에 흥분하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큰 자극은 열기와 욕망에 휩싸인 승건의 얼굴이었다.
채훈은 승건의 섹스 취향이 상대를 흥분시키고 그것을 지켜보는 것임을 알았다. 처음에는 고약한 취향이다 싶었지만, 이렇게 자신을 핥아 먹을 듯이 내려다보고 있는 것을 보면 기분이 묘해졌다. 특히 오늘은 절박해 보이기까지 했다. 승건이 자신을 원한다는 것을 온몸으로 깨닫자 아랫배에 열이 확 몰렸다.
섹스는 기분 좋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채훈은 그냥 휩쓸릴 생각이 없었다. 시트를 붙잡고 있던 손을 승건의 목에 감으면서 상체를 일으켜 입을 맞췄다. 키스는 끔찍하게도 달콤했다. 젖은 키스에 열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채훈은 승건의 손에 사정했다.
절정 끝의 나른함에 늘어져 있을 새도 없이 바지와 속옷이 벗겨졌다. 구두도 양말도 침대 밖으로 던져졌다.
승건이 채훈의 다리를 제 어깨에 걸며 허리를 띄우게 했다. 정액으로 젖은 승건의 손가락이 구멍을 파고들었다. 느끼는 곳만 집중적으로 문지르고 휘젓다가 금방 빠져나갔다.
채훈은 자신의 다리 사이에서 빠져나가는 승건의 손이 움직이는 것을 눈으로 좇았다. 승건은 스스로 벨트를 풀고 묵직하게 커진 성기를 손으로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삽입을 시도하려는 듯 성급하게 자신의 다리 사이로 성기를 들이미는 것을 보며 채훈이 반사적으로 승건의 어깨를 밀었다. 겨우 몇 번 휘저은 것만으로 부족했다.
“자, 잠깐!”
“한계야.”
강경한 승건의 태도에 채훈은 이를 갈았다. 평소라면 흐물흐물해질 정도로 뒤를 풀어주던 녀석이 어지간히도 다급한 모양이다 싶은 것과 별개로 삽입의 고통에는 욕이 나오려고 했다.
“아. 으읏.”
허리가 꺾이고 다리가 높이 들린 탓에 눈앞에서 승건의 흉흉하게 발기한 성기가 천천히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겨우 끝만 삽입했는데도 몸이 반으로 벌어지는 감각에, 채훈은 승건의 어깨를 잡은 손에 잔뜩 힘을 주었다.
“아파.”
아프다고 해도 승건의 태도는 변함없었다. 채훈은 고통에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꾹꾹 안을 밀고 들어오는 부피감을 버티느라 온몸이 덜덜 떨렸다.
영원할 것 같은 순간은 승건이 끝까지 밀고 들어와서야 끝났다. 작은 탄성을 내지른 승건이 인상을 썼다.
“잠시, 웃. 너무 조여……. 힘을 빼.”
“그러게 누가― 우웃.”
누가 네 좋을 대로 하라고 했냐고 한마디 해주려는데 승건이 몸을 숙였다. 허리가 꺾이고 자세가 바뀌면서 고통이 밀려들었다. 그러나 신음은 승건의 입에 막혀 삼켜졌다.
삽입된 채로 키스에 이어 귀를 애무당했다. 귀는 민감한 성감대였다. 숨결만으로도 움츠러드는 곳에 혀가 닿자 간지러움을 닮은 흥분에 자지러졌다.
“그, 그만해. 귀가 약한 건, 웃, 알면서.”
“괜찮아.”
“괜찮기는 뭐가 괜― 아. 흐으읏. 흣.”
아래에서는 고통이 치밀어 오르는데 등줄기는 오싹거리며 발가락이 곱아드는 기분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이상했다. 그 와중에 승건이 아래를 슬쩍 쳐올려 왔다. 아픔은 여전했다. 필사적으로 승건에게 매달려 고통과 소름을 참고 있는데, 어느 순간부터 아찔한 자극이 찾아들었다.
“응. 아, 아흐. 읏.”
승건은 채훈이 느끼는 곳만 푹푹 찔러댔다. 고통만 주던 행위가 한순간에 쾌락을 동반했다. 거칠고 난폭한 움직임에 배 속이 울렸다.
채훈은 속으로 욕을 했다. 그건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승건뿐만이 아니라, 그에게 휩쓸려 제대로 느끼고 있는 자신을 향한 것이기도 했다. 이렇게 받아주면 안 된다는 후회와 반성은 오래가지 못했다. 뚝뚝 끊기던 생각은 한순간에 휘발되었다.
채훈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신음의 온도가 바뀌었다. 헛숨이 나올 정도로 깊은 삽입에, 커다랗게 안을 휘젓는 움직임에, 몸무게를 실어 박아 넣을 때마다 채훈은 자지러졌다. 머리가 달아올라 눈앞이 번쩍거리는 순간에 승건을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며 반사적으로 뒤를 조였다. 그러고는 서로를 잡아먹을 듯 탐했다.
숨이 막힐 것 같은 쾌락 속에 먼저 절정에 이른 것은 채훈이었다. 승건 역시 채훈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으며 곧 파정했다.
한참을 그렇게 몸을 굳히고 서로를 끌어안은 채 헐떡이며 숨을 골랐다. 채훈은 쥐어뜯을 듯 붙잡고 있었던 승건의 머리칼을 놓고는 슬슬 문질렀다. 그러자 승건이 채훈의 턱과 뺨에, 그리고 이마에 입술을 꾹꾹 눌러왔다.
눈물이 맺힌 눈을 깜빡거리자 승건의 입술이 눈꺼풀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다정해서 간지럽기까지 한 후희의 동작이었지만 채훈은 승건이 한 번만으로 만족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러트라니 더욱 그럴 것 같았다. 시야를 맑게 해서 승건을 바라보자, 아니나 다를까 욕망이 가시지 않은 눈이 코앞에서 번뜩거렸다.
눈이 마주치자 승건이 입을 맞춰 왔다. 채훈은 키스에 응하면서 지금 자신의 꼴이 우습다고 생각했다.
바지와 속옷만 벗고 일을 쳤다. 승건도 겨우 재킷만 벗었을 뿐이었다. 지난주에 새로 산 양복이 엉망이 되고 말았다. 승건이 사준 거긴 하지만, 그래도 아까운 건 아까운 거였다.
멍하니 생각을 하는 동안에 키스가 깊어졌다. 그리고 몸 안에 들어와 있던 승건의 성기가 다시 부풀어 올라 존재감을 드러냈다. 동시에 승건의 뜨거운 손이 셔츠 안으로 파고들면서 맨살을 어루만져 왔다. 식어가는 열기가 되살아나는 것은 금방이었다.
채훈은 키스에 빠져들며 승건의 허리에 감은 다리에 힘을 주었다. 엉망진창인 섹스였다. 양복은 여전히 벗지 못한 상태였고, 키스를 하는 입술은 부어 쓰렸고, 구겨진 허리는 지끈거렸다. 그런데도 승건이 무작정 박아 드는 아래에서 치고 올라오는 저릿함이 천천히 몸을 지배해 나가고 있었다.
황홀한 열기에, 숨 막히는 헐떡임에, 아득해지는 번뜩거림에 곧 집어삼켜질 거라는 기대감에 채훈은 눈을 감으며 승건을 꽉 끌어안았다.
*
*
“흐으. 으아……. 아, 앗.”
굵고 뜨거운 성기가 아래를 깊게 박아 넣을 때마다 채훈은 억눌린 신음을 내뱉으며 바르작거렸다. 순간순간 눈앞이 하얗게 변하면서 의식이 멀어졌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온몸이 줄줄 녹아버리다 못해 미쳐버릴 것 같은 느낌에 진저리치면서 시트를 붙잡았다.
엎드린 팔이 몸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고 꺾인 지는 오래였다. 엉덩이만 들어 올리고는 승건에게 단단히 붙잡힌 채 옴짝달싹 못하게 짓눌린 상태에서 섹스가 이어졌다.
벌써 몇 번이나 절정에 이르렀는지 채훈은 세지도 못했다. 앞도, 뒤도, 그리고 다리 사이도 흠뻑 젖었다. 시트 역시 엉망이었다. 엎드린 채 몸을 비비는 것조차 자극이 되다 못해 쓰라릴 정도였다. 절정에 이르러도 말간 액만 나올 정도인데도 삽입의 쾌감이 오감을 자극했다.
“이제……. 흐윽. 읏.”
이제 그만하자는 소리를 하려는데 눈물로 부연 시야의 높이가 달라졌다. 아니나 다를까 상체를 끌어안은 승건의 팔에 의해 몸이 들려졌다. 어리둥절할 새도 없이 승건을 뒤로 두고 타고 앉은 자세가 되고 말았다.
“으……. 너무 깊어.”
자세가 바뀌자 안에 들어찬 성기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깊이 들어왔다. 승건은 채훈이 상체를 세운 채 후배위로 하는 것을 좋아했다. 곧 섹스가 끝날 것을 예감한 채훈은 자신의 허리를 꽉 감싸 안은 승건의 팔을 부여잡고 버텼다.
아래에서 위로 쳐올리는 강한 삽입에 허벅지가 부들부들 떨렸다. 목덜미는 깨물리고 젖꼭지를 잡아 비틀리며 짓눌리는 손길에는 전기에 감전된 듯했다.
“허윽. 읏.”
이제는 신음조차 조각났다. 땀과 열, 그리고 감당할 수 없는 쾌감이 승건을 다시 덮쳤다. 그러나 승건의 팔에 감싸여 옴짝달싹할 수 없는 채훈은 그저 도리질만 치는 게 전부였다.
번쩍거리던 머릿속에 어느 순간 벼락이 내리꽂혔다. 그리고 승건이 퍽 소리가 날 정도로 강하게 삽입하면서 몸을 굳혔을 때 채훈은 드디어 끝났다고 생각했다.
헉헉거리는 거친 숨소리 말고도 제멋대로 뛰는 심장 소리가 귀에 울렸다. 눈을 깜빡거리며 부옇게 번진 시야의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승건이 귀를 깨물어 왔다. 이제는 정말 작은 자극조차 진저리쳐졌다.
“귀는 깨물지 마.”
“미안.”
“뭐, 뭐가?”
미안하다는 승건의 낮은 목소리가 불길하게 들렸다. 이대로 또 할 건가 싶어 바르작거리는데 승건이 배를 더듬거리다가 지긋하게 눌렀다. 안 그래도 깊이 삽입되어 있던 승건의 성기가 점막으로 선명하게 느껴지는 것 같은 느낌에 채훈은 진저리쳤다.
아니. 이게 느껴지는 건가.
안이 억지로 벌어지는 감각에 채훈은 자신의 배를 누르는 승건의 손을 붙잡았다.
“흣. 이게 뭐, 뭐야.”
“노팅이야. 노팅을 했어.”
승건의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귀가 아니라 온몸으로 울렸다. 채훈은 아연함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노팅이란다.
흔히 듣는 단어는 아니었다. 노팅은 알파가 오메가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이고 직접적으로 압도하는 행위였다. 히트의 오메가가 알파를 유혹하는 것처럼, 러트의 알파는 노팅으로 오메가를 자극해서 가임 확률을 높였다. 알파는 자신의 페로몬을 오메가에게 덧씌우면서 동시에 자신의 아이를 가지게 하는 것이었다.
채훈은 베타였기 때문에 알파의 페로몬 따위는 조금도 느낄 수가 없었다. 그저 뜨거운 열기와 함께 섹스 후의 진득한 체향이 훅 맡아질 뿐이었다.
그러나 아래에 박힌 성기가 노팅으로 엄청나게 부풀어 오른 것만큼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알파의 노팅은 짐승의 그것처럼, 성기가 부풀어 올라 구멍을 틀어막고, 정액이 흘러나가지 못하게 했다.
노팅에 대한 온갖 정보가 채훈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앓는 소리가 흐느낌처럼 흘러나왔다.
“나는, 나는 베타라고. 흐읏. 읏. 오메가가 아니라.”
“오메가가 아니라도 노팅은 할 수 있어.”
“그게, 윽. 아. 하으. 앗.”
“조금만 움직일 거야.”
“미쳤……. 으읏. 아. 으. 읏.”
목덜미를 짓이기듯 씹은 승건이 한껏 으르렁거리는 바람에 채훈은 잔뜩 겁먹었다. 이 상태라면 찢어지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승건은 쳐올리려는 시도하지 않았다. 꽉 맞물리다 못해 꼼짝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휘젓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저 뭉근히 허리를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채훈은 자지러졌다. 배를 눌러 오는 손은 자비가 없었다. 성기를 잡고 흔드는 손길에는 다시 쾌감에 사로잡혔다.
열과 어지러움에 채훈은 아득함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정신을 잃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
*
채훈은 다시금 의식을 차렸을 때는 눈을 뜨지 못했다. 다만 승건이 누군가와 대화하는 목소리만 들었다. 거리가 멀어서 정확한 대화는 알아듣지 못했지만 상대는 아마도 심정민인 듯했다. 낮인지도 밤인지도 알 수 없는 몽롱함에 채훈은 그대로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은 목이 말라서 깼다. 이번에는 눈을 떴지만 시야가 엉망이었다. 눈이 부었고 머릿속도 부은 듯 멍했다. 몸 상태도 엉망이라는 것을 알았다.
“정신이 들어? 물 마셔.”
물을 찾기도 전에 어느새 다가왔는지 승건이 물 잔을 내밀었다. 채훈은 비몽사몽간에 물을 받아 마셨다. 물은 시원했지만 정신은 맑아지지 않았다.
퉁퉁 부은 눈은 깜빡거리기도 힘들었지만 그래도 날이 밝았다는 건 알아보았다. 그리고 흐릿한 시야에 승건의 모습이 안개처럼 맺혔다.
어젯밤의 기억이 아지랑이처럼 떠올랐다. 그렇게 정신을 잃고 나서도 녀석은 계속 몸을 탐해 왔다. 알파의 러트라는 것이 그렇게나 무시무시한 것인 줄 몰랐다.
“열이 많이 났어. 안은 붓기만 했고. 안 찢어졌어.”
“미친…….”
미친놈이라고 욕을 하려는데 목에서는 바람 소리가 섞여 나왔다. 그것조차 짜증이 나서 인상을 쓰는데 승건의 손이 얼굴을 덮었다. 그의 손은 시원하기보다는 미지근했다.
“화내는 건 나중에 하고, 더 자.”
환한 시야가 강제로 가려지면서 어두워졌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던 채훈은 승건의 손을 치우는 대신에 몸에 힘을 뺐다. 의식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세 번째는 강제로 눈을 떠야 했다. 승건이 일어나라고 깨우는 바람에 정신이 돌아왔다. 아까보다 정신은 조금 더 맑아졌고 눈도 많이 가라앉았다.
채훈은 승건이 내민 죽을 몇 번 떠먹지 못했다. 결국 남사스럽게 승건의 손을 빌려 죽을 받아먹고 난 후에, 약까지 챙겨 먹고는 다시 잠들었다.
*
*
마지막에는 저절로 눈이 떠졌다. 정신은 맑았고 시야도 괜찮았다. 채훈은 눈을 깜박거리며 초점을 맞췄다. 크림색의 낯선 천장을 보다가 옆을 돌아보았다.
햇살을 등지고 의자에 앉은 승건이 심각한 얼굴로 태블릿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여기까지 와서도 일인가 싶었다. 그러다가 어젯밤에 짐승같이 덤빈 놈과 차분한 분위기의 그가 같은 인물이라는 것에 의심이 들었다. 러트가 온 알파가 무슨 짓을 할 수 있는지 알지도 못하고 덤벼든 자신도 바보 멍청이였다.
노팅이라니.
그때의 아연함을 회상하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았다. 배 안이 가득 차다 못해 부풀어 터질 듯한 감각은 지금도 무서웠다.
반사적으로 배를 쓰다듬던 채훈은 자신이 샤워 가운만 입고 있다는 걸 알았다. 속옷도 입지 않은 상태였다.
“깼어?”
천천히 몸을 일으켜 자리에 일어나 앉는데 승건이 시선을 주었다.
“어……. 응.”
대답을 하려다가, 목소리가 여전히 뻑뻑해서 채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사이에 승건이 태블릿을 내려놓고 다가와 침대에 걸터앉았다.
“열은 내렸어. 컨디션은 어때?”
채훈은 승건의 손등이 뺨에 닿았다 떨어지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보았다.
“그럭저럭.”
대답하는 목소리가 바람 소리처럼 샜다. 어젯밤에 오랫동안 비명에 가까운 신음을 내지른 탓이었다. 허리도 엉덩이도 욱신거렸다. 그래도 아주 나쁘지는 않았다.
“좀 더 잘래?”
“아니. 그런데 너는 괜찮아?”
“괜찮아. 약을 먹었어.”
“어……. 약은 왜?”
“열이 가라앉지 않아서.”
승건의 대답을 조금 늦게 이해한 채훈은 아연해졌다. 어젯밤의 섹스는 하드했고 노팅까지 했었다. 몇 번이나 사정을 한 끝에 마지막에는 아무리 쥐어짜도 희멀건 물밖에 나오지 않았다. 정말로 섹스를 하다가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걸로는 모자랐다는 소리였다.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았지만 채훈은 눈빛만으로 어이없다는 감정을 전했다. 그것을 알아차린 모양인지 승건이 난처한 듯 헛기침을 했다.
“오후에 스케줄이 있어서, 미리 먹었어.”
“러트인데, 취소 안 해?”
채훈은 혹시나 해서 물어보았다. 러트가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면 약을 먹더라도 쉬는 게 맞았다. 알파와 오메가는 각각 러트와 히트를 다르게 보내기는 하지만 증상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강영환의 경우만 해도 진정제를 먹은 것만으로는 일상생활에 바로 복귀하지 못했다.
“너는 어때? 움직일 만해?”
승건이 대답 대신에 오히려 되묻는 바람에 채훈은 의아했다.
“어, 컨디션은 나쁘지 않아. 그런데 왜?”
“같이 갈 곳이 있어.”
“어디를?”
“네 존재를 노출시키려고. 내 옆에 네가 있다는 게 알려졌으니, 사람들이 접근할 거야. 공식적인 관계라고 하고 얼굴을 드러내는 게 여러모로 이득이야. 나는 물론이고, 너도.”
채훈은 승건의 설명을 반 정도만 알아들었다. 공식적으로 얼굴을 드러낸다는 게 뭔지는 알 것 같은데, 이유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저기, 그냥 조용히 있는 게 낫지 않을까? 공식적인 관계라고 하면…… 네가 곤란해질 것 같은데.”
“내가 너를 인정하지 않으면, 쓸데없는 문제가 생겨.”
“문제가 생긴다고?”
“극단적인 예를 들면, 누군가 네 가족을 미끼로 중요한 계약 정보를 빼내라고 할 수 있지. 그래. 종종 일어나는 일이야. 하지만 공식적인 관계가 되면 그럴 시도를 못 해.”
그제야 채훈은 승건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대충 알아들었다.
“파워게임인지 뭔지에 나도 참가한다는 거네.”
“맞아. 잘 이해했네.”
“내가 싫다면?”
채훈은 이번에도 자신에게 선택권이 있는지 물었다. 이유가 있다고 해도 사람들 앞에서 공식적인 관계가 되는 건 싫었다. 그것이 가짜라서 더욱 그랬다.
“네 의지랑 상관없어. 소문은 이미 났을 거야. 목격자가 여럿 있으니까.”
채훈은 어젯밤에 승건의 아파트를 찾아온 사람들을 떠올렸다. 그중에 채훈을 치우라고 명령한 남자의 적의는 확실했다.
승건이랑 만나는 것이 이렇게까지 심각해질 줄은 몰랐다. 자신이 호랑이 권력을 등에 업은 여우인지, 아니면 고래 싸움에 등이 터지는 새우인지는 헷갈렸다.
그래도 승건의 말을 따라야 한다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공식적인 관계라면…… 어떤 거?”
“애인이라고 하는 게 낫겠지. 맞선을 거절할 수도 있고, 작은할머니에게 복수할 명분도 되고.”
애인이라는 단어에 잠시 설렌 채훈은 명분이 될 거라는 소리에 쓴웃음을 삼켰다. 작은 것 하나에 일희일비하는 건 좋지 않은데도 기분이 이상했다.
“알았어. 네 말대로 할게.”
“나는 게임에서 이기는 거 좋아해.”
“……?”
“다시는 그 인간들이 제멋대로 굴지 못하도록 할 테니까. 음, 네 얼굴을 그렇게 만든 녀석은 어떻게 해줄까?”
승건은 아주 진지했고, 그래서 채훈은 아연해졌다. 눈 밑이 멍들기는 했겠지만 심각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승건은 되갚아줘야 한다는 식으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어떻게 할 것도 없어. 별거 아닌걸.”
“별거 아닌 게 아니야.”
“그럼 너부터 좀 어떻게 하자. 내 손목 좀 봐.”
채훈은 어제 승건에게 붙잡혀서 혹사당했던 손목을 들어 보였다. 예상대로 손목 안쪽에 멍이 들어 있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어제 승건이 이를 세운 곳에는 멍울이 잔뜩 생겼을 것이 분명했다.
손목을 확인한 승건이 인상을 썼다.
“미안. 열 때문에 온통 네 생각밖에 안 났어. 자제했어야 했는데.”
승건의 사과는 진지했고, 그래서 채훈은 할 말이 없었다.
어젯밤에 일어난 많은 일들의 원인과 결과는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시작은 이름 모를 남자의 습격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채훈 본인의 문제였다.
승건과의 사이에서 어떤 정의를 내릴 수 없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거기에 마음이 상해서 호텔로 가라는 승건의 말에 반발했다. 승건을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그저 거래라고만 생각했다면 생기지 않았을 일이었다.
채훈은 제 마음을 승건에게 모두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름 모를 남자 때문에 화가 났다고 승건이 오해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뒤엉킨 실타래처럼 풀리지 않은 감정에도 승건이 멍자국에 미안해하는 것을 보니까 기분이 풀렸다. 아무래도 자신은 참 쉬운 남자였다.
“다음부터 그러지 마. 널 후려쳤다가 싸움 날 것 같아서 참았어. 그리고 내 얼굴에 멍자국 낸 사람에게도 별생각 없어. 그냥 둬.”
“그렇게 넘어가는 거 아니야.”
“귀찮아서 그래. 그런 거 일일이 신경 쓰는 성격 아니니까 괜찮아.”
“은근 허술하다니까.”
“내가 뭘.”
평생 꼼꼼하다는 소리만 듣고 살아온 채훈은 승건의 말을 인정할 수 없었다. 승건이 대답 대신에 웃으면서 어깨에 기대 왔다. 이전에는 한 번도 없었던 행동에 채훈은 어리둥절했다. 그러다 승건의 입술이 목덜미에 닿았을 때는 전기에 감전된 듯 떨고 말았다. 애무는 계속되었다.
서로 살짝 빗긴 채 마주 안은 자세였다. 승건의 손이 허리를 슬쩍 감아 몸을 더욱 밀착시켰다. 그의 의도는 명백했다.
“더 못 해.”
“그냥 맛만 보는 것뿐이야.”
“그러다가, 우읏. 그러다가 하잖아. 같이 갈 곳이 있다며. 흐. 읏.”
채훈은 몸을 비틀며 항의했다. 지금까지 패턴은 비슷했다. 승건이 만지고, 자신이 흥분하고, 그리고 섹스로 이어졌다. 지금도 승건이 자신의 샤워 가운 아래로 손을 밀어 넣어 허벅지를 쓸어 올리고 등을 더듬어 왔다.
이대로 하면 오늘 하루 종일 침대를 벗어나지 못할 거라는 이성적인 판단과 별개로, 그의 손길에 몸이 뜨거워졌다. 이대로라면 진짜 끝까지 하겠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채훈은 승건에게 안긴 채로 뒤로 넘어갔다.
채훈은 자신을 꼭 끌어안고 있는 승건을 보았다. 자세 때문에 눈에 들어오는 것은 동그랗게 잘생긴 머리통뿐이었다.
“왜 그래?”
“이대로 좀 있자.”
승건의 낮은 목소리가 목덜미를 타고 울렸다. 채훈은 그가 잔뜩 참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알파의 러트가 이렇게나 힘든 건가 안쓰러워졌다. 저도 모르게 달래듯 승건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약이 별 효과가 없어?”
“효과는 있는데, 충동에 약해져.”
그러니까 섹스를 하고 싶다는 소리였다.
“그럼……. 음, 빨아줄까?”
“……?!”
러트의 열기 때문에 성적으로 긴장한 승건을 자극해서는 안 된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삽입 섹스는 못 해도 펠라는 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자 자신도 모르게 말로 튀어나왔다.
승건의 반응은 소리 없이 격렬했다. 뻣뻣하게 몸을 굳힌 승건이 고개를 들어 채훈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아니, 그게……. 펠라를 싫어하는 건 아는데, 삽입 섹스는 힘드니까. 아니, 아니야. 그냥 못 들은 걸로 해.”
채훈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며 얼른 취소했다. 승건의 이글거리는 눈빛을 마주하자 펠라고 뭐고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살길이라는 강한 직감이 왔다.
“너는…….”
“미안. 내가 잘못했어.”
채훈은 얼른 승건의 말을 가로채며 사과부터 했다. 난처하게 웃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인상을 구긴 승건이 한숨을 쉬면서 머리를 쓸어 넘기더니 벌떡 일어나 침실을 나가버렸다.
침대 위에 홀로 남은 채훈은 승건이 사라진 문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곧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진짜 반성했다. 러트가 온 알파를 함부로 도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웠다.
다시 한번 더 미안하다고 해야겠다고 마음먹으면서 침대에 일어나 앉는데, 승건이 침실 입구에 나타났다. 얼굴이 애매하게 구겨진 상태였다.
“승건아?”
이름을 부르자 승건이 다가와 방금 전에 일어났던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았다. 심상치 않은 기운을 뿜어내며, 승건이 입술을 베어 물 듯이 닿았다가 그대로 속삭였다.
“펠라는 별로야. 다른 걸 해.”
진지하기 짝이 없는 승건의 모습에 채훈은 얼떨떨하면서도 웃고 싶었다. 또래보다 어른스러운 녀석은 과묵했고 결단력이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나이에 어울리게 섹스에 집착했다. 그것도 아주 깜찍하게 말이다.
“너 귀엽다.”
저도 모르게 귀엽다는 소리가 나와버렸다. 그러자 승건이 설핏 인상을 쓰고는 입을 맞춰 왔다. 채훈은 승건의 목을 끌어안으며 키스에 응했다.
섹스에서 삽입과 펠라 말고도 할 수 있는 건 많았다. 무엇보다 승건이 자신을 원하고 있다는 게 마음에 들었다.
아침 해가 떠 있을 때 하는 섹스는 특별하기 짝이 없었다. 채훈은 맨살을 더듬는 승건의 손길에 몸을 떨며, 그렇게 생각했다.
* * *
일요일, 승건의 오후 스케줄은 태화 그룹과 연계된 미술관의 재개장 행사에 참석하는 것이었다.
행사에서 태화 그룹과 관련된 중요 인물들을 다수 만날 거라고 설명한 승건은 채훈에게 스타일리스트를 붙여주었다.
공식적인 자리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만큼 네 미모를 자랑해야겠다는 승건의 농담이 무엇을 뜻하는지 채훈도 모르지 않았다. 승건의 애인으로 그의 곁에 나란히 서려면 그에 어울리는 모습을 갖추어야 한다고 이해한 채훈은 순순히 스타일리스트에게 몸을 내맡겼다.
어려울 일은 없었다. 스타일리스트는 방갈로까지 직접 찾아왔다. 다만 시간이 꽤나 오래 걸렸다. 머리를 살짝 자른 다음에 세팅하고, 눈 밑의 멍을 가리기 위해 파우더를 바르고, 구겨진 양복 대신에 새롭게 준비된 옷을 몇 번 갈아입기까지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스타일리스트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돌아간 다음에, 거울 앞에 선 채훈은 자신의 모습이 낯설다고 생각했다.
화장한 건 그다지 티가 나지 않았다. 다만 인상이 완전히 달라 보였다. 짧게 자른 머리를 왁스로 고정시킨 것도, 차가워 보이는 얼굴도, 그리고 어딘가 딱딱해 보이는 양복도 잘 어울렸다. 다만 그것들이 모두 채훈을 피도 눈물도 없는 악당처럼 보이게 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그럭저럭 괜찮게 생긴 악당 같다는 것이었다.
“악당 같아.”
“잘 어울리는데.”
옷을 갈아입는 것을 지켜보면서 채훈의 넥타이와 구두를 골랐던 승건이 웃으면서 다가왔다. 그 역시 새로 옷을 갈아입고 난 다음이었다.
스타일리스트의 마법에 만족하며 나름 자신감이 붙었던 채훈은 승건을 보며 마음을 비웠다. 작정하고 꾸민 승건의 얼굴에서는 후광이 비치는 듯했다. 조각같이 잘생긴 녀석의 옆에 서면 누구든 못생겨 보일 게 뻔했다.
미남 악당은 무슨.
채훈은 세상의 부조리를 느꼈다. 돈 많고, 잘생기고, 정력까지 좋은 알파 때문에 자신은 힘이 없어 흐느적거려야 했다. 반면에 삽입과 펠라 빼고 모든 것을 다 한 승건은 컨디션이 아주 아주 아주 좋아 보였다.
자신 있었던 체력조차도 승건이 더 뛰어났다. 삐죽이 튀어나오려는 질투를 억누르며 채훈은 입을 열었다.
“주의해야 하는 거나, 조언해 줄 건 없어?”
이제 곧 출발할 때였다. 태화 그룹과 관련된 사람들이 잔뜩 모인다는 자리에서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지 채훈은 아는 게 없었다. 조용히 승건만 따라다니는 게 최선인지 궁금했다.
“혼자 다니지 마. 이름 이외의 개인 정보는 숨겨. 그리고 웃지 말고.”
“웃지 말라고?”
혼자 다니지 말라는 거랑 개인 정보를 숨기라는 건 알겠는데, 웃지 말라는 건 무슨 소리인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싸가지 없다는 소리를 들어도 되니까 웃지 않는 게 좋아. 겉으로는 화려해 보이지만, 두 발짝쯤 걸어들어 가면 살벌해지는 곳이니까. 이권이 얽히면 더 그렇고. 관련 없는 부외자라면 그럭저럭 괜찮아. 그래도 웃지 않는 건 중요해. 넌 웃으면 착해 보이거든.”
“내가?”
“등쳐먹기 좋은 호구처럼 보여.”
“하하하. 그래?”
살벌한 이야기의 끝에 이어지는 혹독한 평가에 채훈은 웃음을 터트렸다. 착하다는 소리는 많이 들어봤지만 호구처럼 보인다는 소리는 처음이었다.
“너무 참지도 말고. 오히려 성질 나쁜 티를 내는 게 나아.”
“네 체면은?”
“그런 거 안 따져도 돼. 네가 내 애인이라는 거만 과시하는 게 목적이니까.”
승건의 조언은 진지했다. 애인이라는 단어에 채훈은 속으로만 움찔했다. 승건의 입에서 나오는 애인이라는 말은 원래 의미와 다른 것같이 들렸다.
“작은할머니를, 그러니까 어젯밤의 일을 꾸민 주동자를 만날 수도 있을 거야. 도발에 넘어가지 마.”
승건의 충고에 채훈은 눈을 크게 떴다가 곧 웃었다. 욕심이 많다는 작은할아버지를 만난다니 그것 또한 아수라장이 될 것 같았다.
“전쟁터네.”
채훈의 감상은 하나였다. 아무래도 진짜 전쟁터에 끌려가는 것 같았다.
*
*
미술관 메인 홀을 장식한 것은 하얀 장미였다. 그리고 실내악단의 손끝에서 부드러운 4중주가 울려 퍼졌다. 은은한 불빛 아래 멋지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그림을 품평하며 제각각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물론 즐겁지 못한 사람도 있었는데, 그중에 한 명이 채훈이었다. 아는 사람이라고는 없었던 채훈은 어디 돌아다닐 생각 따위는 하지 않고 승건의 옆에 서 있었다.
승건은 인기인이었고 그에게 얼굴 도장을 찍기 위해 사람들이 끊임없이 몰려들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잘 지냈는가.”
“여기에서 만날 줄 알았지.”
식상하고 상투적인 인사말이 오간 다음에는 영양가 없는 스몰 토크가 이어졌다. 날씨, 옷차림, 그림 감상에 이어 주식, 사업, 계약 등등으로 주제가 바뀌었다. 그리고 채훈은 인간 병풍이 되어 아무런 존재감 없이 그들의 대화를 가만히 경청했다.
사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채훈에게 관심을 보였다. 승건이 애인이라고 소개하면 감탄사와 함께 신상 조사를 시작했다. 이름을 묻고, 아버지와 고향을 물었다. 채훈은 승건의 조언대로 자신의 이름 말고는 다른 것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반응이 갈렸다. 절반 정도는 관심을 접었다. 당당하게 말할 수 없는 집안이 배경이라면 볼일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머지 반은 아무 배경도 없이 어떻게 승건과 만나서 사귀게 되었는지를 궁금해했다.
아예 무시로 일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마치 승건의 옆에 채훈이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듯, 말을 걸기는커녕 눈조차 마주치지 않기도 했다.
또 다른 이들은 채훈은 안중에도 없이 승건에게 노골적으로 들이댔다. 나이가 지긋한 중년의 남녀는 동행한 조카나 딸을 승건에게 소개시켜 주기 바빴다.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채훈은 완전히 질리고 말았다.
채훈은 원래 무던한 성격이었다. 직접적으로 부딪혀 오는 게 아니라면 악의를 잘 알아차리지 못했다. 대신에 한 번 신경 쓰기 시작하면 무시하지 못했다.
사람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평가하는 시선은 노골적이었다. 악의라고 하기에는 애매했지만 썩 유쾌하지 못한 관심인 것은 분명했다. 승건이 왜 웃지 말라고 했는지를 몸으로 깨달았다. 이런 분위기에서 웃었다가는 얼굴에 경련이 일어나고도 남았다.
채훈은 승건의 조언을 착실히 따라 무표정한, 싸가지 없는 병풍으로 그 시간을 버텨냈다. 그러나 가만히 입만 다물고 있기 어려운 순간이 찾아왔다.
상대는 승건의 외당숙이라는 남자였다. 승건에게 맞선을 보라고 강요한, 그리고 아파트에 오메가를 보낸 작은 외할아버지의 아들인 남자는 능글맞은 얼굴로 승건에게 시비 아닌 시비를 걸었다.
“적당히 받아주지 그랬어. 어머니 체면도 있는데. 주현이가 완전 겁에 질렸다더라. 국원 제약의 김 회장님이 아끼는 아들인데 그렇게 막 대해서야 쓰나. 그쪽에서 항의하면 어떻게 하려고.”
“남의 집에 흙발로 들어온 건 그쪽이었습니다. 미국이었으면 불법침입으로 총에 맞았을 건데, 조용히 돌려보내 준 겁니다.”
남자는 적반하장으로 승건을 탓했다. 하지만 승건이 딱 부러지게 시시비비를 가리자 남자가 인상을 썼다.
“이런. 서로 좋으려고 그런 건데, 너무한 거 아니야?”
“서로 좋아야 하는데, 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불법침입에 대해서는 이번만 넘어갑니다. 사과할 사람은 따로 있으니까, 번거롭게 연락하지 말라고 전하면 됩니다.”
“이런, 뻣뻣하기는. 이 녀석이 원래 이래요. 이런 성격으로 이렇게 멋진 미인이랑 사귀다니. 잘해줘요? 응?”
갑자기 남자가 채훈을 향해 물었다. 조용히 둘의 이야기만 듣고 있던 채훈은 남자와 승건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해줍니다.”
“오. 그래? 그러니까 사귀는 거지. 그나저나 결혼은 안 하지? 베타잖아. 질리면 넘겨봐. 나도 잘해줄 테니까.”
이번에는 남자가 승건을 보며 이죽거렸다. 채훈은 기가 막히다 못해 욕이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자신이 뻔히 앞에 있는데도 질리면 넘기라고 승건에게 말하는 것에는 분명 저열한 의도가 담겨 있었다. 승건에게 까이니까 옆에 있는 자신을 끌어들여 분풀이를 하는 모양새였다. 너절한 인성질이었다.
“당숙.”
“왜? 이런 애들은 사람 잘 갈아타잖아. 안 그래?”
“잘 안 갈아탑니다. 그리고 당숙은 얘 취향이 아니라 안 됩니다.”
승건이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대답을 했다. 인상을 쓰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던 채훈은 저도 모르게 승건을 봤다. 평온하기만 한 승건의 모습에 채훈은 자신이 뭘 해야 하는지 깨달았다.
“취향이 어때서? 내가 승건이보다 돈이 없어서 그러나? 그래요?”
통성명도 제대로 하지 않은 남자의 시비는 유치하기만 했다. 채훈은 승건의 충고대로 성질 나쁜 티를 내기로 했다.
“돈보다는 얼굴이 별로입니다.”
“뭐? 얼굴?”
남자가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다. 채훈은 남자가 그랬던 것처럼, 그를 위아래로 한 번 훑어봐 주었다.
“승건이 얼굴 보고 사귀는 건데, 그쪽은 아무래도 취향이 아닙니다.”
채훈은 최대한 진지하고 건조하게 말했다. 사실 남자는 그럭저럭 잘생겼다는 소리를 들을 수는 있었다. 하지만 미남 배우의 뺨을 치고도 남을 승건에게 비할 바는 아니었다.
“둘이 천생연분이네. 큰아버지가 이러려고 널 데려왔나 보다. 그래, 알았다. 네 말은 잘 전해주마.”
남자가 끝까지 빈정거리며 자리를 떴다. 짧은 대화에 진이 빠진 채훈은 고래를 절레절레 저었다. 전쟁터라고 농담처럼 말했는데, 진짜 전쟁을 한바탕 치른 것 같았다.
“진짜 전쟁터네.”
“정말 내 얼굴이 취향이야?”
한숨과 함께 짧은 감상을 내뱉던 채훈은 뜻밖의 질문을 하는 승건을 바라보았다. 그는 꽤나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취향을 먼저 말한 것은 승건이었다. 재빠르게 취향이라고 할 만한 것을 떠올리느라 고생했던 채훈은 승건을 놀려줄까 잠시 고민했다.
“왜? 궁금해?”
“응.”
채훈은 밀당 같은 건 없이 직구만 던지는 승건 때문에 웃어버리고 말았다.
“분위기 있는 미남이 취향이야. 고등학교 때 좋아했던 애 때문에 눈이 아주 머리 꼭대기에 붙어버렸지.”
“……?!”
“왜 놀래? 궁금하다며?”
승건이 정말 드물게 놀란 얼굴로 무어라 말을 하려고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말았다. 채훈은 웃음을 터트리고 싶은 것을 참았다. 녀석의 말문이 막히는 것을 보니 괜히 속이 시원해졌다.
직구에는 직구가 답이었다. 승건의 얼굴이 취향인 것도, 분위기 있는 미남을 좋아하는 것도, 그리고 첫사랑 때문에 눈이 높아진 것도 모두 사실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잘생긴 미남 효과가 훌륭했다. 오늘따라 승건의 얼굴이 무시무시하게 잘생겨 보였다.
“취향이 고급이네.”
채훈은 그것이 승건 나름의 농담이라는 것을 반 박자 늦게 알아차렸다. 무뚝뚝한 얼굴을 하고 그런 농담을 하는 건 웃기기보다는 귀여웠다.
큰일이네. 귀여워 보이면 진짜 중증인데.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진심을 경계하며 채훈은 별것 아닌 것처럼 대꾸했다.
“응. 고급이야.”
인성 나쁜 남자의 너절한 시비에도 불구하고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그사이에 다시 다른 사람이 승건에게 접근하면서 영양가 없는 대화가 반복되었다.
아직 파티는 끝나지 않았다.
*
*
한바탕 사람들과의 인사가 끝난 후에야 잠시 쉴 시간이 생겼다. 채훈은 실외에 준비된 파티룸의 구석을 찾았다.
서울 외곽의 널찍한 대지 위에 자리한 미술관은 전면은 네모반듯한 현대식 건물이었지만, 후면은 ㄷ 자를 모두 회랑으로 만들고 중앙정원 한가운데는 분수대를 두었다. 외부 이벤트를 대비해 바닥에는 잔디가 아니라 반듯한 돌을 깔아놓았다.
오늘도 비를 대비해 중앙정원 위쪽을 하얀 천막으로 된 지붕으로 덮어두고는 흰 장미 화분과 조명을 곳곳에 두어 봄밤의 분위기를 끌어냈다. 쌀쌀한 날씨 덕분인지 곳곳에 전열기도 있었다.
그림 구경은 안에서, 파티는 밖에서 한다는 동선이었다.
중앙정원의 외진 구석에 외따로 있는 의자에 앉은 채훈은 승건에게 앉으라는 소리를 하는 대신에 앞을 가리라고 했다.
“승건아. 너 여기 서봐.”
파티룸에서도 따라붙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서 채훈은 승건을 가림막으로 썼다. 다행스럽게도 승건은 순순히 따라주었다.
“메인 행사만 보고 돌아갈 거야.”
“어.”
“왜 이렇게 힘이 없어. 열은 없는데.”
채훈은 승건의 손이 이마를 짚었다가 떨어지는 것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정말 쓸데없이 다정했다.
“진이 빠져서 그래. 네가 왜 웃지 말라고 했는지 알겠어.”
“오늘은 양호한 편이야.”
“이 세상은 무대고, 모든 남자와 여자는 배우이다. 맞나? 이런 유명한 명언이 생각날 정도로, 내가 연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아.”
“셰익스피어의 희곡에서 나오는 대사지.”
“오. 셰익스피어.”
“진짜 당신이네. 강채훈. 나 기억해요?”
가볍게 농담을 주고받고 있는데 승건의 뒤에서 익숙하고도 낯선 얼굴의 여자가 나타났다.
발랄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써니였다. 일주일 전에 클럽에서 만났을 때는 어깨가 드러난 레이스 셔츠와 스키니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우아한 검은색 원피스를 입고 머리를 한쪽으로 땋아 내렸다. 완전히 상반된 모습이었지만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예. 기억합니다. 써니. 맞죠?”
유일하게 아는 얼굴을 만난 채훈은 의자에서 일어나서 인사를 건넸다.
“휘유. 승건 오빠가 애인을 데려왔다고 해서 뭔 소리인가 싶었는데, 당신이었네. 제대로 보니까 더 미남인걸. 그거 알아요? 승건 오빠를 그 미모로 꼬신 건지, 그래서 신데렐라가 될 수 있는지 다들 궁금해한다는 거. 당사자 생각은 어때요?”
아무렇지 않게 다른 사람의 말을 끌고 와서 당신 생각은 어떠냐고 하는 것은 어지간히 친한 사이가 아니고서야 하기 힘든 질문이었다.
채훈은 써니가 원래 이런 성격인지, 아니면 싸우자고 시비를 거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이럴 때 입을 열면 실수하기 마련이었다. 승건이 박광호뿐만 아니라 써니 역시 가까이 하지 말라고 한 것도 기억났다.
채훈이 가만히 있자 승건이 대신 나섰다.
“남의 애인에게 관심 끊어.”
“그럴 수야 없지. 빅 이슈잖아. 얼음심장을 가진 오빠가 애인을 사귀다니. 누가 믿겠어. 나도 안 믿기는데. 승건 오빠 별명 알아요? 얼음심장이에요. 얼음심장. 우리 할머니가 그러셨어요. 미인 보기를 얼음같이 본다고 해서 얼음심장. ……어머나? 웃었어. 웃으니까 더 미남이네. 완전 내 취향으로. 진짜 승건 오빠 애인만 아니면 좋을 텐데. 이런. 농담이야. 농담. 무섭게 왜 그래. 워워, 진정해.”
얼음심장이 승건의 별명이라는 설명에 채훈은 저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무심한 승건과 너무 잘 어울렸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써니의 반응이 이상했다. 자신의 취향이라고 눈웃음을 치다가 사색이 된 얼굴로 뒷걸음질을 쳤다.
“이럴 거야?”
“오늘은 농담이 안 통해.”
“그래. 기분 엄청 안 좋아 보이기는 하네. 페로몬이 눈에 보인다면, 오빠 페로몬은 날카로운 칼이야. 칼.”
둘의 대화를 듣고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던 채훈은 어리둥절하기만 할 뿐이었다. 승건과 써니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입을 연 것은 여전히 멀찍이 떨어진 곳에 선 써니였다.
“승건 오빠가 협박했어요. 채훈 씨 옆에서 떨어지라고.”
“……?!”
“우성 알파는 깡패예요. 깡패. 그중에서도 승건 오빠는 정말 힘센 깡패고. 흥. 왜? 애인한테 오빠 욕하니까 싫어?”
채훈은 그제야 승건이 페로몬으로 써니를 위협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오메가의 페로몬이 알파를 유혹하는 것이라면, 알파의 페로몬은 알파나 오메가에 상관없이 힘을 과시하는 것이라는 설명을 강영환에게서 들은 적이 있었다.
둘이서 예쁜 사랑 하라고 투덜거린 써니가 돌아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진행 요원이 나타나서 메인 행사가 곧 있다고 알려 왔다. 채훈은 승건과 함께 안으로 이동했다.
오늘 메인이 되는 그림과 함께 유명한 화가가 소개되었다. 설명을 듣고 박수를 치자 행사가 금방 끝나버렸다.
그 후에 화장실을 갔다 오느라 잠시 자리를 비웠던 채훈은 곧바로 승건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채훈이 잠시 기다리라고 한 자리에 그대로 서 있던 승건이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였다. 특히 젊은 여자의 비율이 높았다. 몇몇은 조금 전에 통성명을 한 이들이었다. 모두 승건에게 집중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채훈은 지금껏 승건이 무슨 일을 하고 다니는지, 누구를 만나는지,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돈 많고 잘생긴 알파니까 인기가 많을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눈앞에서 직접 보는 것은 또 다른 느낌이었다.
화려하고 반짝이는 무대 위에 선 승건을 관객이 되어 지켜보는 기분이었다. 냉담한 표정으로 예의 바른 미소조차 짓지 않고 있는 그는 일견 오만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부나방처럼 향하는 것은 승건이 알파거나 재벌 3세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와 시선을 마주하고 집중할 때면, 깊고도 드넓은 공간을 마주하는 것 같았다. 그것이 온전히 자신을 향했을 때는 특별해지는 기분이 들곤 했다.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것처럼 완벽해 보이는 녀석에게 여유로움과 위태로움이 공존하는 것을 깨달으면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방관자가 된 채훈은 웬 여자가 승건에게 비밀 이야기라도 하는 듯이 몸을 기울여 속삭이는 것을 지켜보았다. 승건과 여자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동시에 떨어지라고 외치고 싶었다.
질투라고 부를 만한 감정이 울렁거렸다. 그나마 승건이 살갑게 대하지 않는 것 같아서 마음이 놓였다. 승건과 자신이 잘되기를 바라지는 않지만, 그래도 애인이라고 소개한 상황에서 딴 사람에게 눈을 돌리면 더 짜증 날 것 같았다.
짝사랑이 싫다.
자신의 처지를 속으로 욕하던 채훈은 조용히 한숨을 삼켰다. 어쨌든 저길 뚫고 다시 승건의 옆에 서야 했다.
“형?”
얼굴에 힘을 꽉 주고 있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옆을 돌아보자 강영환이 서 있었다.
“네가 어쩐 일이야?”
“형이야말로 웬일이야? 와. 오늘 완전 꾸몄는데? 딴 사람처럼 보여.”
채훈을 위아래로 훑어보던 강영환의 눈이 번뜩였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기 때문에 채훈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채훈아.”
이번에는 승건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승건이 바로 옆에 와 있었다. 채훈이 무어라 하기 전에 강영환이 먼저 나섰다.
“안녕하세요. 강영환이에요. 채훈 형에게 이런 멋진 친구가 있는 줄 몰랐어요.”
“최승건입니다. 채훈이와 사귀고 있습니다.”
“그래요? 형은 그런 말 없었는데.”
“가족에게 연애 사정을 말할 필요는 없죠. 채훈이랑 먼저 가보겠습니다.”
채훈이 나서기도 전에 두 사람이 서로 통성명을 해버렸다. 그리고 승건이 먼저 양해를 구하고는 채훈을 끌었다.
승건을 따라 움직이던 채훈은 등 뒤에 꽂히는 강영환의 시선을 애써 무시했다. 거리가 꽤 멀어지고 나서야 승건에게 조용히 물었다.
“동생에게 애인이라고 해도 돼?”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다 그렇게 알고 있어. 왜?”
“동생이…… 널 소개시켜 달라고 할 것 같아서.”
“적당히 끊어내.”
승건의 말대로 적당히 끊어내는 것이 정답이었지만, 채훈은 그게 쉽지 않을 것을 알았다. 강영환은 집요한 성격이었다. 아마도 전처럼 한바탕할 것 같은 예감에 미리부터 속이 쓰려 왔다.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는데 갑자기 왼쪽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휘청거리고 말았다. 넘어질 정도는 아니었지만, 다행히도 승건이 붙잡아주는 바람에 안도할 수 있었다.
“고마워.”
주춤거리며 바로 선 채훈은 승건을 보며 바로 고맙다고 인사부터 했다. 그런데 승건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병원부터 가자.”
“병원은 왜?”
“약을 먹든지 주사를 맞든지 해야겠어. 병원이 싫다면 심 실장님 부르고.”
“괜찮아. 주사는 뭘. 집에 돌아가서 한숨 자면 나아져.”
“호텔에서 주사 맞고, 저녁 먹고 돌아가.”
어깨를 껴안은 승건의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고집스럽게 붙잡은 손길에 채훈은 실랑이를 하려다가 참았다. 몸 상태가 안 좋긴 했다. 그래도 이불 덮고 푹 자면 나아지는데 승건이 너무 과하다 싶기는 했다.
“너랑 같이 있으면 내가 아주 연약한 사람처럼 느껴져.”
“휘청거렸어.”
“누구 때문에 어젯밤에 무리를 했거든. 그런 의미에서 다음에는 억제제 챙겨 먹어. 수액주사 맞자고 하지 말고.”
채훈은 승건을 보면서 빙긋 웃었다. 러트가 온 알파랑 섹스를 경험하는 것은 한 번으로 충분했다. 그런데 애매하게 미간을 찌푸린 승건이 채훈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글쎄. 그건 그때 가보고.”
“……?”
“약보다는 섹스가 훨씬 나아. 너도 좋아했고.”
승건이 마지막에 덧붙인 말에 채훈은 아연했다. 확실히 좋아하긴 했다. 하지만 그건 노팅 전까지만이었다.
한나절을 앓아누운 꼴을 보고도 그럴 거냐?
채훈은 멱살을 잡고 따지고 싶은 것을 참았다.
“나는 양심 없는 알파입니다, 라고 이마에 써 붙이고 다녀. 그럼 나도 생각해 볼게.”
스스로 생각해도 유치한 농담이었다. 그런데 그게 재미있는 모양인지 승건이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폭소였다. 승건이 이런 농담을 좋아했다는 것이 떠오르긴 했다.
“약을 먹어보기는 할게.”
웃음기를 머금은 대답에 채훈은 그나마 만족했다. 그렇게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나누며 채훈은 승건과 함께 홀을 빠져나왔다. 사람들의 시선이 등 뒤에 달라붙는 게 느껴졌지만 애써 무시해 버렸다.
*
*
호텔 방갈로에서 수액주사를 맞고, 죽까지 먹은 다음에 원룸으로 돌아온 채훈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서주명이었다.
채훈은 피곤해 보이는 서주명에게 승건과 사귀고 있다는 거짓말을 했다. 서주명의 반응은 극적이었다.
“둘이서 사귀고 있다고?”
놀란 눈을 한 서주명에게 채훈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어젯밤의 일을 설명하려면 다른 방법이 없었다.
“헐, 언제부터?”
“좀 됐어.”
“왜 말도 안 하고……. 아니, 꼭 말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무어라 따지려고 하던 서주명이 말을 아꼈다. 친구들 중에 채훈의 성향에 대해 아는 사람은 서주명뿐이었다. 그리고 채훈은 자기 연애사를 잘 말하지 않았다.
“어제는 그냥 싸워서 그랬어. 지금은 잘 풀렸고.”
“잘 풀렸다니 다행이네. 그런데 걔는 우리 안 만날 거래? 너랑 깨지면 나중에 보기 껄끄럽기는 하겠지만……. 알아서 해라. 남의 연애사에 끼어드는 거 아니라더라.”
나름대로 결론을 내린 서주명은 더 이상 꼬치꼬치 캐묻지 않았다. 잘해보라고 응원만 하는 것으로 끝났다.
일요일에도 출근을 했던 서주명은 일찍 자리에 누웠다. 그리고 채훈 역시 씻은 다음에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누웠다.
수액주사를 맞았어도 몸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금방 잠이 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눈을 감자 이틀 동안의 기억이 우루루 떠오르는 바람에 정신이 사나웠다.
피곤한 하루였다. 아니, 피곤한 주말이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인생의 쓴맛을 많이 봤지만 이번에는 심했다. 승건을 좋아한다고 인정하자마자 현실이 닥쳤다. 그와 잘될 거라고 바라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저 계약 관계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가슴 시리게 파고들었다.
어젯밤에 승건의 아파트에 침입한 남자는 채훈을 승건의 정부로 여기고, 그렇게 대했다. 그에게 쫓겨난 것보다 제대로 항의조차 하지 못한 것에 화가 났다.
무엇보다 결정적인 순간마다 계약을 언급하는 승건에게는 복잡한 감정이 넘실거렸다. 감정이 얽히지 말아야 한다고 했으면서도 네 편이라고 다정하게 구는 녀석이 원망스러웠다. 그딴 놈을 좋아해버린 자신을 한 대 치고 싶기까지 했다.
길게 한숨을 내쉰 채훈은 눈을 꾹 감았다. 우울한 생각을 멈춰야 했다. 어차피 기간이 정해져 있는 관계였다. 마음고생 하지 말고 즐기는 게 최선이었다.
주는 거 다 받고, 기대 같은 거 하지 말고, 러트가 온 녀석하고는 섹스할 생각 따위는 하지 말고.
무엇보다 짝사랑 따위는 할 게 아니라며 마음을 다잡은 채훈은 억지로 잠을 청했다.
* * *
강영환은 채훈과 승건이 나란히 홀을 나서는 것을 보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채훈의 옆에 있는 알파가 태화 그룹의 대표이사였다.
최승건. 태화 그룹 정 회장의 외손자, 재벌 3세,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기업의 후계자. 우성 알파. 채훈의 애인이라는 남자를 지칭하는 단어들은 하나같이 어마어마했다.
도로 정체로 미술관에 늦게 도착한 강영환은 파티장에서 가장 눈에 띄는 남자에게 집중했다. 남자의 이름과 배경을 알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아름다운 오메가에 둘러싸인 승건과 아무런 인연이 없었던 탓에 다가가지 못하고 지켜만 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형과 사귄다고 하고는, 둘이서 같이 사라져 버렸다.
사람들이 태화 그룹의 젊은 대표이사가 데리고 온 평범한 베타 애인에 대해 떠들어댈 때는 설마 했다. 정말 베타와 알파가 사귀는 건가 의심하면서도 그 상대가 채훈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왜. 알파가.
강영환은 이제는 이곳에 없는 승건을 떠올렸다. 큰 키에 멋진 몸매를 가진 남자는 조각 같은 미남이었다. 그에게서 은은하게 뿜어져 나오는 페로몬은 압도적이었다. 모든 게 완벽했다. 그러나 그의 가치는 외양이 아니라, 미술관에 모인 사람들 중에 가장 강력한 권력자에 속한다는 것에 있었다.
그런 남자가 그냥 오메가도 아니고 베타인 채훈을 만난다니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시기심에서 발로한 분노에 강영환은 현실을 부정했다.
강영환은 어려서부터 자신이 오메가가 될 거라고 알고 있었다. 베타 부모 사이에서 오메가가 태어나는 것은 아주 희귀한 경우여서 많은 관심을 받았다. 열여섯 살에 우성 오메가로 완전 발현한 이후로 강영환의 인생은 어려울 게 없었다. 어디 가도 예쁘다는 소리만 들었다.
공부에는 뜻이 없었지만 머리는 좋은 편이라 이름 있는 대학에 진학했다. 집안이 그럭저럭 살았기 때문에 큰 돈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래도 자신이 가진 가장 큰 재산은 바로 우성 오메가라는 형질이었다. 클럽에서도 사교 모임에서도 언제나 우대를 받았다. 알파들을 턱끝으로 부렸다.
하지만 그것이 우물 안의 개구리라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진짜 위쪽의 세계에서는, 우성 오메가라는 타이틀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곳은 배경이 중요했다. 아무리 우성 오메가라고 하더라도 작은 조명 가게를 하는 집안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물론 우성 오메가를 원하는 곳은 많았다. 준재벌가에서도 선이 들어왔지만 강영환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그의 목표는 높은 곳에 있었다. 그래서 진짜 위에 있는 세계에 진입하기 위해 노력했다. 오늘도 온갖 인맥을 동원하고 나서야 미술관 재개장 행사 파티 티켓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런데 채훈은 자신의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거물을 애인이라며 옆에 끼고 나타났다. 채훈이 입고 걸친 것들은 모두 값비싸 보였다.
특히 시계가 그랬다. 지난주에 했던 것보다 오늘 차고 있는 손목시계가 더 비싼 거였다. 무려 8,000만 원이나 했다. 디자인이 마음에 들어서 전부터 탐내고 있던 것이라 가격이 얼마인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너무 비싸서 엄두도 못 내고 있던 것이 채훈의 손목에서 빛나고 있었다.
부러움과 패배감이 덮쳐 왔다. 무엇보다 이런 감정을 느껴야 한다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공부를 잘하는 것 말고는 별 볼 일 없던 채훈이었다. 그것도 수능을 망치는 바람에 시시한 대학에 진학해서 시시한 일을 하고 있었다. 평생 자신보다 아래에서 살아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에 저만치 위에 있었다.
“아, 진짜…….”
“샴페인 마실래?”
이를 갈던 강영환은 웃는 얼굴로 물어보는 김성호를 보았다. 강영환은 반사적으로 승건과 김성호를 비교했다.
김성호는 오메가와 사귀고 싶어 하는 베타였다. 졸부의 외동아들로 순진하고 헌신적인 성격이라 강영환이 다른 알파를 만나고 다녀도 괜찮다고 했다. 그래서 지금까지 잘 지내왔지만, 그게 전부였다. 그가 아무리 노력해도 이곳 파티 티켓을 얻는 게 한계였다. 태화 그룹의 대표이사와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문득 채훈이 목숨을 구해주었다는 부자 할아버지가 태화 그룹의 회장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인연으로 외손자를 만난 것인지도 몰랐다.
동창은 무슨.
재벌 3세가 평범한 인문계 고등학교를 다닐 리가 없으니, 고교 동창이라는 말은 변명에 불과했다. 부자 할아버지에 대해 필사적으로 숨긴 이유도 알 것 같았다. 가족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뒤에서는 저 혼자만 잘 살 궁리를 하는 채훈의 행태에 욕이 나왔다.
혼자만의 억측이지만 강영환은 그게 진실이라고 믿었다.
“안 마셔?”
김성호가 한 번 더 재촉하며 물었다.
“됐어. 나 좀 혼자 내버려 둬.”
강영환이 가시를 세우자 김성호가 시무룩한 얼굴로 뒤돌아섰다. 그러나 강영환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또 보네. 나 기억해?”
채훈이 사라졌던 입구를 계속 바라보고 있던 강영환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왠지 눈에 익은 남자가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능글맞게 웃고 있는 남자는 지난주 클럽에서 채훈에게 두들겨 맞은 남자였다. 이름도 기억났다. 그에게 이름을 사칭당한 채훈이 욕을 엄청 했었다. 박광호. 그는 열성 알파였다.
“뭐야?”
“재미있는 장면을 봐서. 우리는 같은 사람을 싫어하는 건가 싶은데?”
의미심장한 말에 순간 강영환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박광호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 것 같았지만 강영환은 티를 내지 않았다.
“그래서?”
“너랑 마음이 맞을 것 같아서. 난 당하고는 못 살거든. 너는 어때?”
그제야 강영환은 박광호를 다시 보았다. 열성 알파에다가 채훈에게 두들겨 맞은 그를 비웃었었다. 하지만 그 직전에는 박광호가 입고 걸쳤던 것에 눈이 갔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나도 당하고는 못 살지.”
“성격 있네. 네 도움이 필요한데.”
“……?”
“서로 도와주면, 뭔가 할 수 있지 않을까?”
박광호의 제안은 두루뭉술했다. 그래도 강영환은 이게 기회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정신이 확 들었다. 지금껏 가지고 싶은 것을 손에 넣지 못한 적은 없었다. 알파에게는 베타가 아니라 오메가가 어울렸다. 그게 세상의 법칙이었다.
“좋은 걸 할 수 있겠지.”
강영환은 활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