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타협】
컨디션이 바닥이었다.
모니터를 보며 숫자를 입력하고 있던 채훈은 열이 오른 눈을 손으로 눌렀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눈에 화상을 입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감기였다. 지난 일요일 밤에 비를 맞고 화를 냈기 때문인지 몸살이 왔다. 월요일 아침에 잠에서 깰 때 평소보다 몸이 무겁고 아픈 것이 전조였다. 유비무환으로 출근하는 길에 몸살감기약을 사서 먹었다. 약발은 그다지 없었다. 오후가 될수록 증세가 심해졌지만 잔업 때문에 병원에 갈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감기약만 먹고 다음날을 기약했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 일어나니 목이 부어 있었다. 그래도 낮 동안에는 그럭저럭 버틸 만했는데, 오후가 되자 열이 심해졌다. 크게 앓을 거라는 느낌이 왔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칼퇴를 하고 병원에 가야 했다. 감기는 주사를 맞으면 2주고, 병원에 안 가면 14일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그래도 약발을 받아 증세가 호전되어야 출근이라도 하지, 아니면 앓아누울 판이었다.
“쿨럭쿨럭.”
이제는 기침까지 했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아이고. 죽겠다.”
“강 주임. 심해졌는데? 괜찮아?”
채훈이 앓는 소리를 내며 서랍에 있던 마스크를 쓰자 옆자리에 앉은 이 대리가 말을 걸어왔다.
“약을 먹었는데도, 더 심해지네요.”
“퇴근하면 병원부터 가.”
“오늘은 무조건 칼퇴합니다.”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대한민국에서 제일간다는 병원에서 일하고 있지만 의사 한 번 만나기가 하늘의 별 따기 같았다. 이럴 때는 이런저런 인맥으로 외래 진료를 잡을 수도 있지만 오늘은 여러모로 운이 나빠서 시간이 생기질 않았다.
불행 중 다행히도 퇴근까지 채 20분도 남지 않은 상태였다. 얼른 일을 마무리해야 했다.
한 번 더 기침을 내뱉고 있는데 갑자기 사무실로 뛰어든 홍보팀 직원 한 명이 직통으로 과장님 책상까지 향했다. 곧이어 차장님이 커다랗게 소리쳤다.
“대표이사님이 오신다고?!”
대표이사란 소리에 사무실이 한 번 술렁거렸다. 그리고 채훈도 놀라서 고개를 돌려 차장님을 바라보았다. 대표이사라면 지난번에 새로 뽑힌 정 회장의 외손자를 의미했다. 바로 승건이었다.
차장님이 허둥지둥하더니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을 나가버렸다. 홍보팀 직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자마자 여기저기서 웅성거림이 일었다.
“이거 시작부터 불길한데?”
“그러게요.”
채훈은 옆에서 조용히 말하는 이 대리의 의견에 동조했다.
태화 그룹은 재벌이라고 불리는 거대 기업으로, 유명한 계열사가 많았다. 그런데 대표이사가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태화 병원부터 방문했다. 그것도 예고도 없이, 퇴근 시간 20분 전에 말이다.
태화 그룹의 대표이사쯤 되면 사전에 약속을 잡고 방문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리고 대표이사가 방문하기 전에 병원은 청소 지옥에 빠진다. 대표이사가 어디로 가자고 할지 모르기 때문에 어디든 번쩍거릴 정도로 만들어놔야 했다. 물론 지금껏 대표이사가 병원을 방문한 적이 없긴 했지만, 다른 높으신 분들 때문에 채훈도 청소에 동원된 적이 있었다.
어쨌든 대표이사의 깜짝 방문은 일종의 어떤 신호라는 것을 못 알아차릴 총무부 직원은 거의 없을 것이다.
승건을 개인적으로 오랫동안 만나온 채훈도 일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승건이 주의를 주었고 채훈도 묻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무엇이 어떻게 터질지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채훈은 다시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지금 당장은 도표를 완성하는 게 먼저였다.
다시 숫자에 집중하려는데 이번에는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는 어머니였다. 어지간해서는 업무 시간에 연락하지 않는 분이었다. 무슨 급한 일이라도 생겼나 싶었다. 지난 주말에 투자자들에게 모든 돈을 갚긴 했지만, 변수란 언제 어디서든 생기니까.
채훈은 이 대리에게 전화를 받으러 가겠다고 말하고는 휴대폰을 챙겨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복도에 나가자마자 전화를 받았다.
“응. 전화 받았어. 무슨 일이야?”
―아직 퇴근 안 했지?
“아직 15분 남았어.”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오늘 집에 와라.
“오늘? 갑자기 왜?”
―할 이야기가 있다니까.
업무 시간에 전화를 해서 할 이야기가 있으니 집에 오라고 하면 꽤나 중요한 일이 있다는 의미였다. 보통은 어려운 부탁을 할 때였다. 하지만 목소리가 달랐다. 화가 난 듯 딱딱한 걸 보니 부탁은 아닌 것 같았다.
“알았어. 그런데 어디 들렀다 가야 해서 조금 늦을 거야.”
―급한 거 아니면 빨리 와. 수찬이가 돌아오기 전에 끝내야 하니까.
강수찬이 가게 문을 닫는 것은 8시였다. 그때까지라면 병원에 들렀다 갈 시간이 아슬아슬했다. 채훈은 알겠다고 하고 통화를 끝냈다.
무슨 일인가 싶은데 복도에 부는 바람에 몸이 떨렸다. 입맛이 없어서 점심을 대충 먹었더니 속이 쓰리고 어지러웠다. 얼른 일을 마무리하고 병원부터 가야 할 것 같아서 채훈은 부지런히 움직였다. 작성하던 도표를 완성하고는 6시가 되자마자 인사를 하고 나섰다.
평소 출퇴근은 후문을 이용했지만, 오늘만큼은 정문이 빨랐다. 종종걸음으로 로비를 나서려는데 한 무리의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대부분 안면이 익은 사람들이었다. 특히 행정부장과 과장 사이에 승건이 껴 있는 게 너무 명확하게 보였다.
채훈은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20분 전에 대표이사가 온다면서 뛰쳐나간 차장이 승건을 상전으로 모시는 모양새로 이동하는 것이 웃겼다. 바로 며칠 전에 만났던 고교 동창이자 섹스 파트너가 상관들의 상관이라니 눈으로 보아도 현실감이 없었다.
빤히 바라보고 있는데 어느 순간에 승건과 눈이 마주쳤다. 승건은 놀라는 기색도 없이 그대로 시선을 돌려버렸다. 마치 모르는 사람처럼 말이다.
순간 가슴 언저리가 욱신거렸다.
당연한 일이었다. 승건과 채훈의 공식적인 인연이란 고등학교 동창이라는 것이 전부였다. 이곳에서 알은척을 할 수 있는 사이는 아니었다.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기분이 꽤나 이상했다.
채훈은 승건이 사라진 쪽을 한 번 더 바라보다가 인상을 썼다. 어차피 9개월 후면 사적으로도 만나지 않을 사이였다. 그러니까 이게 맞았다.
그렇게 정의를 내리고 있는데 다시 휴대폰이 진동했다. 이번에도 어머니였다. 이번에는 좀 더 다급한 목소리였다. 방금 두 사람의 통화 내용을 강수찬이 듣고는 무슨 일이냐고 캐묻는 바람에 일이 커졌다는 것이었다.
사건의 발단은 어제 하루 종일 조미혜가 강영환에게 전화를 할 때마다 휴대폰이 꺼져 있었던 것이었다. 조미혜는 학교에서 돌아온 강영환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처음에는 휴대폰 배터리가 없어서 그랬다고 했다가, 다음에는 고장 났다고 하다가, 조미혜가 얼마나 고장 났는지 켜보자고 하니까 그러지 말라며 강영환이 막았다.
수상함을 느낀 조미혜가 살살 달래가며 이것저것 물었더니 강영환은 작은형이 무서워서 꺼두었다고 설명했다. 자신이 실수한 게 있는데 형이 계속 화내고 있다면서 억울함을 토로했다. 휴대폰도 바꿀 거라고 하더니 결국 오늘 바꿨다는 메시지가 조미혜에게 왔다. 작은형에게는 새로 바뀐 번호를 알려주지 말라고 신신당부까지 덧붙였다.
그에 답답해진 조미혜가 무슨 일인지 알아보기 위해 채훈을 보자고 한 것이었는데, 강수찬까지 나선 상황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돌아가신 아버지 대신에 집안을 건사하고 있는 강수찬은 형제들 문제에 적극 개입하려고 했다.
―도대체 왜 그랬어? 친구들 불러다가 방 좀 어지른 게 무슨 문제라고. 걔가 악의가 없는 건 너도 다 알면서. 하나뿐인 동생을 그렇게 몰아붙여야겠어? 수찬이까지 알았으니 큰일 났다. 진짜.
조미혜의 한탄 어린 추궁에 채훈은 기가 막혔다. 강영환이 제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말하지 않은 게 분명해 보였다. 잘못을 인정하고 수습하는 대신에 회피하는 데 급급한 강영환의 근시안적 행태에 한숨이 나왔다.
그리고 강영환의 말만 믿고 모든 것을 채훈의 탓으로 돌리는 어머니에게는 섭섭하기까지 했다. 채훈이 강영환에게 전화를 한 건 일요일 밤을 포함해도 다섯 번밖에 되지 않았다. 메시지도 비슷했다. 휴대폰이 꺼져 있어서 통화는 하지 못했고, 메시지에는 제대로 사과하지 않으면 다시는 원룸에 오지 말라고 적어놓았다. 그런데 동생을 몰아붙인 게 되어버렸다.
“영환이가 다른 건 말 안 하고?”
―다른 거? 아니. 왜? 또 뭐 있어?
“내가 겨우 어지른 것 때문에 화내겠어? 그리고 휴대폰 꺼두고는 미안하다고도 안 했단 말이야.”
―그래도 휴대폰을 바꿀 정도면. 아이, 몰라. 얼른 오기나 해. 수찬이가 아까부터 기다리고 있어.
조미혜가 말을 돌렸다. 그녀도 채훈이 어지간해서는 강영환에게 화를 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또한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강영환이 휴대폰을 바꾸고 형에게 말하지 말라고 한 것도 이상했다. 하지만 이번 일은 그녀의 손을 떠난 지 오래였다.
채훈 역시 어머니가 아니라 큰형 강수찬을 상대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빨리 갈게.”
―얼른 와.
채훈은 한숨을 삼키며 전화를 끊었다. 사고를 친 건 강영환인데, 왜 수습은 자신의 몫인지 알 수가 없었다.
*
*
채훈은 정시에 퇴근했지만 진료는 받지 못했다. 태화 병원과 가장 가까운 개인 병원의 문턱은 밟았다. 그러나 봄철 환절기에 감기 환자가 대기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병원은 8시까지였지만, 대기 시간만 한 시간이 넘게 걸릴 거라는 안내에 채훈은 결국 진료를 포기하고 본가로 향했다.
병원에서 본가까지는 퇴근 정체 때문에 한 시간 가까이 걸렸다. 본가에 도착하자 조미혜의 말대로 강수찬이 거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조미혜도 옆에 자리했다.
“이야기 좀 하자. 여기 와서 앉아라.”
채훈은 강수찬이 가리키는 소파에 앉았다.
“영환이한테 뭐라고 했기에, 애가 휴대폰을 바꿔?”
“제대로 사과하라고 했어. 사과 안 하면 집에 오지 말라고.”
“너 없을 때, 친구 불러 술 마셨다면서. 그게 그렇게 화낼 일이냐?”
“그건 말고 다른 것도 있으니까―”
“다른 게 있든 말든, 네가 참으면 되잖아.”
아버지도, 그리고 강수찬도 막내인 강영환을 아꼈다. 가부장적인 아버지는 형이 동생을 아끼고 동생은 형을 존경해야 한다는 위계를 강조했다. 하지만 강수찬의 경우는 무조건 강영환의 편만 들었다. 강영환은 준재벌가에서도 중매가 들어오고 있었다. 강수찬은 강영환에게 좋은 모습만 보이려고 했다.
엄격한 가풍 때문에 형의 말이라면 무조건 따라야 했다.
어렸을 때라면 억울해도 내가 잘못했다고 먼저 숙였다. 조리 있게 말도 못 하기도 했고 아버지 말이 옳다고 여길 때도 있었다. 하지만 나이를 먹고 나자 한 번씩 시시비비를 가려 따졌다. 그렇지 않으면 이대로 계속 자신의 탓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에 이르러서는 이렇게 따지는 게 무슨 의미일까 하는 체념이 들었다.
그래서 네가 호구라는 서주명의 잔소리가 떠올랐다. 서로의 집안 사정을 잘 아는 서주명은 참는 게 능사가 아니라고 채훈에게 매번 주입시켰다.
가족이라는 환상에 기대하고 깨지고를 반복하면서 채훈은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거리를 두려고 노력했다. 그래도 도리는 다하려고 했지만, 가끔씩 이런 일이 생겼다. 자신만 참고 넘어가면 조용히 아무 문제 없이 넘어갈 일들 말이다.
채훈은 어떻게 할까 잠시 고민했다. 강수찬은 강영환에게 약했지만 그래도 편을 들어주지 않는 경우가 하나 있었다.
강영환이 대학 신입생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강수찬의 빈 자취방에 애인과 와서 놀다가 섹스를 하고는 도망친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히트가 왔다는 강영환의 말을 믿어주었다. 그리고 강수찬은 분통을 터트렸다. 하필이면 엉망이 된 자취방을 자신의 여자친구와 함께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여자친구와 헤어지게 된 강수찬은 아버지가 강영환의 편을 들어준 것을 두고두고 원망했다. 채훈은 강수찬이 같은 일을 당한 자신에게 참으라는 소리를 할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집을 어질러놓고 사라졌으면 미안하다고 한마디는 해야 참든지 말든지 할 거 아니야. 형도―”
“엄마. 나 왔어. 성호도 같이 왔는데, 우리 치킨 시켜 먹을 거야. 저녁을 안 먹었―”
채훈이 다른 건 몰라도 사과는 받아야겠다고 입을 떼는데,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강영환의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채훈과 강수찬, 조미혜의 시선이 모두 현관 쪽을 향했다. 당장에 거실로 뛰어들던 강영환과 그의 친구인 김성호가 모두 멈칫했다.
“어, 형 왔네.”
“영환이, 너도 여기 와서 앉아봐. 성호는 잠시 영환이 방에 올라가 있고. 가족들끼리 이야기할 게 좀 있어서 그래.”
상황을 정리한 것은 조미혜였다. 강영환이 주춤거리며 조미혜 옆에 섰다. 성호가 계단으로 올라가는 소리가 사라지자 조미혜가 입을 열었다.
“형 말로는, 친구랑 술 마신 거 말고 또 뭔가 했다며?”
“내가 뭘.”
“아무것도 안 했어?”
“별거 아냐.”
“별거 아닌데, 휴대폰은 왜 바꿔?”
“그거야 형이 계속 화내니까. 미안해. 형. 내가 그러지 말아야 했어.”
조미혜의 추궁에 강영환이 마법의 단어를 말해 버렸다. 강영환이 미안하다고 하면 어지간한 일은 다 끝나버렸다.
채훈은 애처로운 표정을 짓는 강영환을 보며 한숨을 삼켰다. 강영환도 일이 이렇게까지 커질지 몰랐을 것이다. 채훈이 아무리 화가 났더라도 형제인 이상에야 시간이 흐르면 흐지부지되기 마련이었다. 나중에 어물쩍하고 넘어갈 수 있었던 일이 부모님이 끼어드는 바람에 서로 꼬이고 말았다.
그래도 채훈은 어설프게 회피만 하려는 강영환이 괘씸했다.
“어지른 거 안 치우고 갔다고 뭐라 하지는 않아. 그래도 주인도 없는 곳에서 애인을 끌어들이는 건 너무하잖아. 형도 같은 일로 화냈으면서 참으라고만 하지 마.”
채훈은 미안하다는 사과에 알았다고 하지 않았다. 그냥 참고 사는 게 능사만이 아니었다. 강수찬이 얼굴을 구기고는 강영환을 노려보면서 그게 진짜냐고 물었다. 잘못한 게 있는 강영환은 이번에도 히트 때문이었다고 변명했다.
강수찬도 이번만큼은 강영환의 편을 들지 않았다. 그래도 억제제는 장식으로 들고 다니냐는 호통 한 번으로 끝나버렸다. 조미혜는 전과 마찬가지로 다음부터 그러지 않으면 된다고 강영환을 달랬다.
그사이에 채훈은 몇 번째일지도 모를 한숨을 삼켰다. 피곤하고, 몸이 아팠다.
*
*
“꼭 그렇게 망신을 줘야겠어? 그냥 덮어줘도 되잖아.”
집을 나선 채훈을 따라온 강영환이 투덜거렸다. 9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해는 이미 져서 마당은 어두컴컴했다.
채훈은 어둠 속에서 입을 삐죽거리는 강영환을 보며 웃지도 화내지도 못했다.
“미안하다며. 뭘 잘했다고 큰 소리야?”
“에이, 그러지 마. 내가 잘못한 거 안다니까.”
“그러게 왜 전화를 안 받아. 잘못한 거 알면 알아서 해야지.”
“당황해서 그랬어. 술 마시다가 그렇게 되었는데. 뭐, 그건 됐고. 어쨌든 정신 차리니까 엉망이고, 치우려니까 막막한데 형이 나타날까 봐 마음이 급해져서. 뭐 그래서. 한 번 사과할 타이밍 놓치니까 혼날 게 무서워지더라고. 그래서 그랬어. 미안. 진짜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 응?”
강영환의 장점은 솔직하고 뒤끝이 없다는 점이었다. 혼나는 게 무서워서 피해 다니고, 마지막까지 미루다가 막상 닥치면 깔끔하게 인정하고 몸을 숙였다. 그래서 채훈도 크게 화를 낼 수 없었다.
“상대가 성호는 아니지?”
“어? 어. 응. 뭐, 괜찮아. 걔는 그런 거 신경 안 써.”
부모님들은 김성호를 강영환의 대학 친구로 알고 있었지만, 둘이 사귄 지는 꽤 오래되었다. 김성호는 형질자가 아니라 베타였고, 그래서 채훈도 그냥 지켜만 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사정이 어떤지 채훈도 알 수 없었다. 다만 강영환이 다른 상대를 만나고 다녀도 김성호가 암묵적으로 눈감아주고 있는 듯했다. 동생의 연애사에 채훈이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었기에 그것도 그러려니 했다.
“이제 원룸에 오지 마.”
“형. 너무하잖아.”
“네가 한 짓을 생각해. 양심 있으면 앞으로 얼씬도 하지 마.”
“알았어.”
제 잘못을 알고 있는 강영환이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풀이 죽은 모습이었다. 그래도 채훈은 괜찮다고 하지 않았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또 아무렇지 않게 얼굴을 들이밀 게 뻔했다.
같은 실수를 아무렇지 않게 반복하는 동생과의 연을 끊어버릴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당분간만이라도 안 봤으면 했다. 속 좁은 행동이었지만 어쨌든 그랬다.
“이제 들어가.”
“아, 형. 내가 나중에 한턱 쏠게. 큰 걸로.”
“됐어.”
“이불은? 이불은 어떻게 했어? 그것도 새 걸로 사줄게.”
“이미 주문해 놨어. 나 간다.”
채훈이 필요 없다고 해도 강영환이 두고 보라고, 다 갚아주겠다고 호언장담을 하고는 집으로 들어갔다.
혼자가 된 채훈은 가족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잘 해결된 것 같은데,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다.
* * *
채훈이 원룸으로 돌아왔을 때는 10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월요일에 주문해 놓은 침구 세트를 경비실에서 받아 왔지만 당장에 정리할 기운이 없었다. 채훈은 외투도 벗지 않고 소파에 앉아 축 처졌다.
며칠 동안 계속 하루가 길었다. 일요일은 두말할 것도 없었고, 어제는 잔업이 있었다. 꾸준히 하던 운동도 며칠 동안 완전히 멈춰버리고 말았다. 이대로 계속 오후에 시간이 나지 않는다면 퇴근 전에 새벽 운동을 해야 할 것 같았다. 다행히 일찍 일어나는 건 자신 있었다.
눈을 감고 앞으로의 계획을 생각하던 채훈은 몸을 떨었다. 열이 나다 못해 오한이 들었다. 팔다리는 무거웠고 목도 따가웠다. 징조가 나빴다.
약을 먹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나서야 집 안에 먹을 게 없다는 걸 깨달았다. 냉동실에 얼려둔 밥이 있기는 했지만, 죽이라도 끓이지 않는 이상에야 삼킬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요리를 할 기운은 없었다. 배달을 시키려고 어플을 켰는데, 하필이면 죽집의 영업시간이 10시까지였다.
아침도 먹는 둥 마는 둥 했고, 점심도 몇 술 뜨지 않았다. 저녁까지 안 먹으면 하루 종일 거의 굶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사탕을 먹긴 했지만 그게 끼니가 되지 않았다.
운이 나쁘다고 중얼거린 채훈은 휴대폰을 손에 쥔 채 그대로 눈을 감았다. 사실 먹는 것도 귀찮았다. 그것보다는 그냥 이대로 자버리고 싶었다.
그래도 살려면 맹물에 약이라도 삼켜야 했다. 오랜 경험에서 나오는 생존의 지혜였다. 채훈은 억지로 눈을 뜨고 몸을 움직였다. 그러나 다리가 휘청거려 일어나지 못하고 다시 소파에 주저앉고 말았다.
“이러다가 쓰러지겠는걸.”
한숨이 푹푹 나왔다. 모든 게 다 귀찮았지만 억지로 팔다리를 움직여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약을 먹었다. 저녁은 포기했다.
옷을 갈아입은 후에 대충 씻고는 침대에 누웠다. 잠이 슬슬 온다 싶었는데 휴대폰이 손 안에서 진동했다.
[내일. 수요일. 8시.]
여전히 짧고 재수 없는 스타일의 메시지를 확인한 채훈은 인상을 썼다. 감기는 내일 더 심해질 것이다.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아도 섹스는 무리였다.
일요일에 싸웠기 때문에 일부러 승건을 피하고 있다는 인상은 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채훈은 감기 때문에 약속을 미루자는 메시지를 보내려고 했다. 하지만 머리가 멍해서인지 손이 떨려서인지 자꾸 오타가 났다. 결국 채훈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연결음이 꽤나 오래 울리고 나서야 승건이 전화를 받았다. 다행이었다.
―강채훈?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냐고 묻는 승건의 목소리는 꽤나 낮았다.
“통화할 수 있어?”
―그래.
“내일 말이야. 그러니까 내가 감기에 걸렸거든. 좀 심해. 내일 말고 주말이나. 아니, 주말도 안 되겠다. 감기가 옮을 수도 있으니까. 다 낫고 보자.”
채훈은 가능한 한 열심히 설명했다. 그런데 승건의 대답이 늦었다. 설마 의심하는 건가 싶었다. 아까 만났을 때는 그럭저럭 멀쩡한 상태이긴 했었다. 지금도 목소리만큼은 스스로가 듣기에도 별 이상이 없었다.
“진짜야. 정말 안 좋아.”
―비를 맞아서 그렇군.
“아마도 그런 것 같아. 쿨럭. 쿨럭.”
채훈은 이제야 나오는 기침이 반가웠다. 그러나 기침 때문에 머리가 심하게 울렸다.
―병원은?
“응?”
―병원은 갔어?
“어……. 그러니까 일이 있어서 못 갔어. 내일 갈 거야. 내일 가야 해.”
채훈은 같은 말을 반복했다는 것을 반 박자 늦게 알아차렸다. 약기운이 도는지 멍한 게 심해졌다.
―버티지 말고. 응급실에 가.
“그 정도까지는 아니야.”
감기에 응급실까지 가는 건 너무 과했다. 약도 먹었으니 괜찮아질 것이다. 그렇게 덧붙이고 싶었는데 힘이 없어서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열은 쟀어? 얼마야?
“열은…….”
채훈은 열은 안 쟀다고 대답하려고 했다. 하지만 저도 모르게 눈이 감겼다. 손 안에서 휴대폰이 미끄러진다고 느껴지는 순간에 의식이 끊겼다. 그래서 멀리서 들리는 승건의 부름에 대답하지 못했다.
―강채훈?
*
*
“땀이 많이 나면, 옷을 갈아입히는 게 좋습니다. 물은 자주 마시게 하고, 덥다고 해도 이불 못 차게 하시고요.”
“그 정도는 저도 압니다.”
“그냥 제가 간호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내일 스케줄도 많으신데.”
“괜찮다니까요. 채훈이 깨어나는 것만 보고 돌아갈게요.”
심정민과 승건의 대화를 들으며 채훈은 가물거리는 의식을 되찾았다. 짧게 인사를 한 심정민이 마지막까지 감기 환자에게는 차가운 거 먹게 하면 안 된다고 주의를 주었다.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채훈은 힘겹게 눈을 떴다.
열 때문에 흐릿한 눈을 몇 번 깜빡이자 침대로 다가오는 승건이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놀란 듯 물었다.
“깼어?”
“최……승건?”
“열이 심한데, 괜찮아?”
채훈은 어리둥절했다. 자신은 원룸의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런데 승건이 어떻게 여기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꿈이라도 꾸는가 싶었지만, 뭔가 리얼했다.
“왜……? 네가?”
“기억 안 나? 통화하다가 아무 말도 없어서. 다시 전화를 걸어도 안 받고. 잘못 쓰러졌나 싶었지.”
“문은?”
“관리인을 불러서 열었어.”
“깐깐한 분인데.”
“통화하다가 끊겼다고 문을 열어달라고 했지. 설명하는데 시간이 꽤나 걸렸어.”
짧은 질문에 승건이 잘 대답해 주었다. 멍한 머리로는 잘 정리되지 않았다. 그래도 통화를 하다가 정신을 잃었던 것은 기억났다. 그걸 승건이 걱정했나 보다.
뭘 더 물어봐야 하나 고민하던 채훈의 눈에 수액 주머니가 들어왔다. 링거대에 걸려 있는 주머니와 연결된 줄의 끝이 자신의 손에 꽂혀 있었다.
“어……. 이건?”
“포도당이랑 이것저것.”
“네가?”
“아니. 실장님이. 의사 면허 있으시거든.”
“와…….”
채훈은 순수하게 놀랐다. 심정민이 유능하긴 했지만, 그래도 의사 자격증은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전문의가 아니더라도 의대에서 6년을 공부하고 시험을 쳐서 합격해야 했다. 면허만 있으면 일반의로 개업할 수도 있었다.
“왜 병원에서 일 안 하신대?”
“직접 여쭤봐.”
승건의 성격은 한결같았다. 자신의 이야기도 남의 이야기도 잘 하지 않았다. 10년 전에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때도 마찬가지였었다.
지금 와서 보면 10년 전에 녀석에 대해서 뭘 알고 있었나 싶었다. 취향, 말투,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공부도 운동도 잘하고, 말수가 적고, 진중하면서도 고집도 센.
마구잡이로 떠오른 생각이 채훈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계속 승건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더욱 그랬다.
썩 유쾌하지도 편안하지도 않았다.
“이제 괜찮으니까, 돌아가. 내일도 스케줄 있을 거 아니야.”
“바늘은 정리하고. 잘못하면 다쳐.”
“오래 걸릴 텐데.”
“한 시간 정도면 될 거야.”
한 시간이면 길었다. 채훈은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협탁 위에 있는 전자시계를 확인하려다가 포기했다.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지금 몇 시인데? 쿨럭!”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기침이 길게 이어지는 바람에 채훈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가슴도 뻐근하고 목도 따가웠다. 겨우 숨을 고르자 승건이 12시라고 하면서 생수병을 건네주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물을 마신 채훈은 어지러움에 눈을 감았다.
“다시 자.”
“어.”
눈을 감으니 절로 잠이 쏟아졌다. 채훈은 흐려지는 의식을 붙잡지 않았다. 그러나 깨다 잠들기를 반복하며 깊게 잠들지 못했다.
채훈은 깨어 있는지 잠들어 있는지 애매한 상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열이 나는 머리는 멍하고, 몸은 천근만근 무거운데, 목은 따가웠다.
감기에 걸려 이렇게까지 크게 앓은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대학에 다닐 때는 기숙사 생활을 했었고, 그리고 취직 후 독립을 하면서 아플 겨를이 없었다. 어렸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채훈보다 일곱 살이 어린 강영환은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약했다. 반면에 강수찬도 채훈도 건강 체질이었다. 평범하게 다치고 병에 걸리곤 했지만 쉽게 털고 일어났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병원을 오가며 고생하는 부모님에게, 어느 순간부터는 아프다는 소리를 할 수 없게 되었다. 몇 년에 한 번씩 이벤트처럼 감기에 걸리면 약을 먹고 하룻밤 앓았다고 깨어나는 것으로 충분했다.
이렇게 아플 때 누군가가 옆에서 간호해 주는 건 처음이었다.
처음인가.
채훈은 가물거리는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아주 어렸을 때는 알 수 없지만, 기억하는 한 처음인 것은 맞았다. 그래서 신기했다. 간호 같은 것은 제대로 해본 적 없는 것 같은 승건이 야무지게 땀을 닦아주는 것도 그랬다.
선잠을 자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이어가던 채훈은 어느 순간부터 승건이 자신의 손등을 가볍게 만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정확히는 수액 바늘을 꽂고 있는 왼손의 손등과 손목이었다.
채훈은 힘겹게 눈을 뜨고는 승건을 보았다. 침대 옆 바닥에 앉아 있는 승건은 태블릿으로 뭔가를 읽고 있었다. 그리고 자유로운 손으로는 채훈의 손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중이었다. 완전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저 녀석이 왜 저러나 싶던 채훈은 손목시계를 떠올렸다. 카드를 건네며 휴대폰으로 시간 확인하는 게 보기 좋지 않다면서 손목시계를 사라고 했다. 그게 무산되자 값비싼 손목시계를 직접 사다가 안겼다.
왜 저렇게 손목시계에 집착을 하는 건가 궁금했었는데, 뭔가 알 것 같았다.
“너 말이야…….”
“……?”
잔뜩 낮아진 목소리로 부르자 승건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너, 손목 페티시 같은 거 있어?”
채훈은 질문을 하고 나서야 아차 했다. 아무리 정신이 없다고 해도 너무 아무 말이나 한 것 같았다.
“아. 미안. 너무 무례했어.”
채훈은 얼른 사과부터 하고 봤다. 그런데 승건은 그게 무슨 헛소리냐고 하지 않았다. 잠시 인상을 쓰더니 진지한 얼굴로 채훈의 손목을 보다가 다시 시선을 주었다.
“모양 좋은 손을 좋아하기는 해.”
“…….”
승건이 순순히 인정하는 바람에 채훈은 어리둥절했다. 손목 페티시는 아닌데 손은 좋단다. 뭐, 그건 평범한 취향이긴 했다. 예쁜 손은 채훈도 좋아하는 편이었다.
그러면서도 채훈은 자신의 손이 이쁜가 하고 의문을 가졌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던 거라 객관적인 판단이 내려지지 않았다.
“그런데 그게 왜?”
“아, 그게. 음. 손목시계에 집착하는 것도 그렇고, 방금 전까지 손 만지고 있었던 것도 그렇고, 그래서 그러지 않을까…… 싶어서.”
채훈은 자신이 이렇게나 무모한 인간인 줄은 몰랐다. 술만이 아니라 감기 역시 사람의 자제력을 떨어트리고 충동을 강하게 만들어버렸다. 쥐구멍에 들어가 숨고 싶었는데, 그러나 한편으로는 될 대로 되라 싶은 마음도 있었다. 열에 취해 헛소리를 하면서 궁금한 걸 물어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승건이 아무 말도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쪽을 바라보는 눈빛이 진지하기만 했다. 어쩌면 어이없어하는 중일 수도 있었다.
“이건 그냥 잊어버려. 내가 열 때문에 헛소리했어.”
“네 말이 맞는 것 같아. 그 이유도 있었을 거야.”
헛소리했으니까 잊어버리라고 하는 와중에 승건이 맞다며 인정했다. 그 이유도 있단다. 또 한 번 욱하고 치밀어 올랐다.
“넌 말하는 방법이 나빠.”
“내가?”
“그냥 선물이라고 하면 됐을 텐데. 아니, 그 전에 신용카드부터 내미는 게 어디 있냐. 감정이 얽히지 않아야 한다면서. 악감정도 감정이야.”
채훈은 마지막 문장을 거의 속삭이듯 말했다. 말을 길게 했더니 숨이 찼다. 하고 싶은 말은 다 한 것 같은데, 조리 있게 말했는지는 자신이 없었다. 그래도 미간을 찡그린 승건을 보자니 괜히 뿌듯해졌다.
감기를 핑계로 무모하게 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도 이렇게라도 해야 앞으로의 관계가 조금이나마 나아질 수 있었다.
“시계는?”
“……?”
“손목시계는 어떻게 했어?”
뜬금없는 질문에 채훈은 당황하면서도 되물었다.
“왜? 버렸으면 다시 사주려고?”
“응.”
설마 싶어 물었는데, 승건이 진지하게 그렇다고 하는 바람에 채훈은 기가 막혔다. 한두 푼도 아닌 것들을 턱턱 사준다고 하는 녀석을 때려주고 싶었다.
“걱정하지 마. 잘 모셔놨어. 그렇게 비싼 건 함부로 못 버려.”
“마음에 안 들어?”
“마음에 들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기분 문제야. 너랑 그렇게 싸우고 난 다음이라 쳐다보기도 싫어서. 게다가 그거 너무 비싸고.”
“더 비싼 것도 많아.”
승건의 말대로 세상에는 비싼 게 많았다. 집 한 채 값이 되는 자동차도 있었고 시계도 있었다. 채훈도 알고 있었지만 그런 걸 선물로 받고 싶지는 않았다.
“그게 핵심이 아니거든.”
“네 말대로 내 화법이 나빴어.”
“……?”
“내가, 음…….”
뭔가 말을 하려던 승건이 입을 다물었다. 해야 할 말을 고르고 있는 듯한 자세에 채훈은 쓴웃음을 지었다. 화법이 나쁘다고 인정하더니 신중해진 모양이었다.
채훈은 가물거리는 눈을 깜빡이며 승건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제 와 선물이라고 하기에는 늦었지만, 어떻게 하면 선물이 될까?”
이번에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 승건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채훈은 당장에 이해가 되지 않아 잠시 생각하고는 입을 열었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네 마음의 문제라며?”
채훈은 혀를 찼다. 그러니까 자신의 마음을 돌려서 꼭 시계를 차는 모습을 보고 말겠다는 소리였다. 집요한 녀석이었다.
“너, 집요해.”
“알아. 그런 소리 많이 들어.”
욕을 해도 인정해 버리는 바람에 채훈은 김이 빠졌다. 사람 기분 나쁘게 한 건 승건이었다. 그런데 해답을 내놓으란다.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고, 부드럽게 말하면 돼. 심장에 내리꽂는 날카로운 말보다는 듣기 좋은 게 좋잖아. 네게 어울릴 것 같아. 마음 상해하지 말고, 한 번 착용해 봐. 라고 하면 되나?”
채훈은 감기와 고열이 가져온 무모함과 용기에 스스로 놀랐다. 사실 어지러움 때문에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반 정도는 몰랐다. 그래도 꽤나 낯간지러운 소리를 한다는 자각은 있었다.
“네게 어울릴 것 같아. 마음 상해하지 말고, 한 번 착용해 봐.”
“……?!”
그런데 승건이 그 낯간지러운 소리를 그대로 따라 했다. 그것도 잘생긴 얼굴로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으면서 말이다.
“왜? 부드럽게 말한 거 아니야?”
승건이 이게 아니냐고 되묻는 바람에 채훈은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이 녀석이 다 알고 이러나 싶었다.
“똑같이 따라 하지 말고.”
“까다롭네.”
“성의 문제거든.”
“시계를 떠안긴 건, 반쯤은 오기였어. 화가 났거든. 바보 같은 짓이었지. 그래도 한 번 보고 싶다는 건 진짜 맞아.”
승건답지 않은 솔직함이었다. 채훈은 그럼 신용카드는 뭐였냐고 따지고 싶은 것을 꾹 참아냈다. 좋은 분위기를 망칠 수는 없었다.
“알았어. 시계 안 버리고 가지고 있을게. 으. 말을 많이 했더니 덥다.”
아까까지는 오한이 들었는데 이번에는 얼굴에서 열이 뿜어져 나오는 느낌에 채훈은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러자 승건의 손이 채훈의 뺨과 이마에 닿았다. 부드럽게 닿는 손이 의외로 시원해서 채훈은 웃었다.
“시원해.”
“그래?”
“그런데 손이 차가우면, 혈액 순환이 나쁜 거래.”
뜬금없이 떠오른 수족냉증의 원인이 소리가 되어 나왔다. 그러자 승건이 웃음을 터트렸다. 웃긴 소리를 했다는 자각은 있었기 때문에 채훈은 그냥 따라 웃었다.
“승건아. 손등으로 좀 해봐.”
“열이 높아.”
“어. 그런 것 같아.”
뺨에 닿은 손은 곧 미지근해졌다. 그게 아쉬워진 채훈이 한숨을 내쉬는데 이번에는 승건의 손이 입술에 닿았다. 엄지가 입술을 훑는 동안에 채훈은 멍하니 승건을 바라보았다. 이 녀석이 뭐 하는 건가 싶었는데 이번에는 승건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서로의 입술이 맞물렸다는 것을 혀가 닿고 나서야 깨달았다. 키스는 느릿했다. 채훈은 멍하니 혀를 빨았다. 그것 이상을 할 여력은 없었다.
키스는 길지 않고 짧게 끝났다. 채훈은 눈을 깜박이며 멀어지는 승건의 얼굴을 확인했다.
“하려고?”
키스를 하는 이유는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이 몸으로 하긴 힘들 것 같았다. 이번만큼은 제대로 욕을 해주겠다는 마음으로 물으니까 승건이 인상을 구겼다.
“차라리 욕을 듣는 게 낫겠군.”
“……?”
채훈은 승건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제대로 사고를 할 수 있는 상태였다면, 아픈 사람을 상대로 섹스할 인간으로 보고 있다는 게 욕이나 마찬가지였다는 것을 알아차렸겠지만, 불행히도 그러지 못했다.
“그럴 생각 없어.”
“그럼 왜?”
“키스하고 싶어서.”
“어……. 감기 옮아.”
또다시 건강을 염려하는 말이 나왔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을 안 나올 것 같은 녀석이지만, 그래도 감기는 조심해야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승건이 웃지 않았다.
“그냥 자.”
“그래. 잘 거야. 너도 다 끝나면 얼른 돌아가. 피곤할 텐데.”
“눈부터 감아.”
“매번 명령이야.”
노려보는 눈빛은 하나도 안 무서웠지만 졸렸기 때문에 채훈은 투덜거리면서 눈을 감았다. 잠이 쏟아졌다. 까무룩 하고 잠이 드는 것은 금방이었다.
*
*
채훈은 몇 번이고 눈을 깜빡거리다 고개를 돌려 협탁에서 반짝거리는 전자시계를 확인했다.
6시 10분. 평소 기상 시간보다 일찍 눈이 떠졌다. 보통은 알람 소리에 맞춰 깨는데 오늘은 10분 정도 일찍 일어나고 말았다. 몇 번 더 눈을 깜박인 채훈은 고개를 돌려 원룸 안을 둘러보았다.
이른 새벽의 푸르스름한 빛이 들어찬 실내에는 사람의 인기척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고열에 시달리며 자고 깨기를 반복하다가 어느 순간에 까무룩 잠이 들고 말았다. 그래서 승건이 언제 돌아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텅 빈 원룸에는 그가 왔었다는 흔적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꿈을 꾼 것일 수도 있었다.
“꿈치고는 리얼한데.”
인상을 쓴 채훈은 왼손을 들었다. 링거를 꽂았던 바늘 자국과 테이프 흔적이 어젯밤의 일이 꿈이 아니라는 증거였다. 승건이 진짜 이곳에 왔던 것이다.
채훈은 아무도 없는 실내를 한 번 더 둘러보았다가 손으로 눈을 덮고는 눈을 감았다. 어젯밤에 오갔던 대화가 뒤죽박죽 떠올랐다. 어느 것은 영상처럼 또렷했지만, 또 어느 것은 흐릿해서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화해 비슷한 걸 하긴 했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다 좋아지는 건 아니었다.
‘보통은 카드를 준다고 하더군.’
채훈은 자신이 어떤 말에 기분이 상하고 화가 났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돈으로 계약한 일방적인 관계라는 것을 승건이 무신경하게 언급했다.
아마 승건이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그냥 넘어갔을 것이다.
지난 3개월 동안 사이는 괜찮았다. 섹스뿐인 관계이긴 했지만 유대감이 쌓였다. 간식도 나눠 먹고 시답지 않은 수다도 하면서 웃었다. 감정적으로 가까워졌다.
채훈은 자주 보는 사람에게 정을 주는 스타일이었다. 친구와 섹스 파트너 사이의 경계에서 승건을 대했다. 그러나 승건은 그게 아니라고 말했다.
그런 주제에 감기 때문에 쓰러졌다고 찾아오는 건 또 뭐야.
채훈은 한숨처럼 속으로 투덜거렸다. 사람 속을 잔뜩 뒤집어 놓은 주제에, 걱정된다고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승건의 태도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감정적으로 얽히기 싫다는 승건이야 아무렇지 않겠지만 자신은 달랐다.
첫사랑이자, 고교 동창이자, 이제는 친구는 아닌 승건과 어떤 거리를 유지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이래서 인간관계는 복잡한 법이었다.
“괜찮아.”
원래 그런 거라고 마법의 단어를 중얼거리는데 알람이 울렸다. 침대 밑에서 휴대폰이 소리와 진동으로 자기가 여기 있다고 존재감을 뽐냈다. 출근 시간 알람이었다. 채훈은 천천히 침대를 내려가 휴대폰을 손에 쥐고는 알람을 껐다.
힘은 없었지만 몸은 가벼워졌다. 채훈은 다행이라고 여기며 출근 준비를 했다. 땀을 잔뜩 흘렸기 때문에 샤워를 하고 옷을 챙겨 입었다.
머리를 말리며 채훈은 아침 식사는 어떻게 할까 생각했다. 입 안이 깔깔해서 밥이 넘어갈 것 같지 않았다. 출근하는 길에 편의점에서 죽을 사서 병원 휴게실에서 먹는 게 베스트였다.
그렇게 결정을 내린 채훈이 일찍 나서기 위해 외투를 막 입을 때였다. 현관에서 비밀번호가 눌리는 소리가 났다. 채훈은 당황했다. 중문이 열려 있는 상태라서 옆집이라고 착각할 수도 없었다. 도둑인가 싶어 자세를 잡는데 벌컥 열린 문으로 나타난 것은 승건이었다.
채훈이 놀란 만큼 승건도 놀랐는지 눈을 둥그렇게 떴다.
“벌써 일어났어?”
“어, 어. 근데 웬일이야?”
“차도가 있는지 확인하려고. 실장님도 오셨어.”
대화를 하면서 승건이 신발을 벗고 원룸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뒤따라 심정민이 나타났다.
승건이 들고 온 종이가방을 식탁 위에 올려두었다. 채훈은 종이가방의 정체가 수상쩍었다.
“뭐야?”
“죽. 아침으로 먹으라고. 그런데 출근하려고?”
“응. 이제 괜찮아졌어.”
하룻밤 크게 앓고 났더니 열도 떨어지고 살 만해졌다. 그런데 승건이 가까이 다가오더니 이마를 짚어 왔다. 이상하게도 어젯밤부터 그의 손이 시원했다. 그러다가 혈액 순환이 나쁘다는 이상한 소리를 했던 것도 같이 기억나는 바람에 채훈은 얼굴을 붉혔다.
“아직 열이 있어.”
손을 뗀 승건이 정색했다.
“이 정도야 문제없어.”
“안색도 안 좋아. 실장님. 확인 좀 해주세요.”
환자 취급을 받은 채훈은 승건이 왜 이러나 궁금했다. 그래도 심정민이 하라는 대로 식탁 의자에 앉았다.
심정민이 들고 온 가죽가방에서는 의사가 쓸 법한 기구들이 나왔다. 그것들로 채훈의 체온을 재고 눈과 목을 확인한 심정민은 많이 호전되긴 했지만 하루쯤은 푹 쉬는 게 낫다고 조언했다. 하지만 채훈은 괜찮다고 했다. 컨디션은 괜찮았다. 움직일 만했다.
“하루 종일 침대 위에 누워 있으면 지루하거든요. 어제 마무리 못 한 일이 있어서, 우선은 출근부터 했다가 반차 내고 병원에 가려고요.”
“무리하지는 마세요. 찬바람 쐬면 다시 나빠지니까. 찬물보다는 미지근한 물을 마시고, 적게라도 꼭 식사는 하시고, 그것도 안 되면 간식거리라도 챙겨 드세요. 약은 필수입니다.”
“네.”
친절한 의사처럼 주의 사항을 알려주는 심정민을 향해 채훈은 착한 학생처럼 대답했다. 그 때까지 심정민의 뒤에 서 있던 승건이 나섰다. 잠시 자리를 비켜달라는 말에 심정민이 가방을 챙겨 아예 밖으로 나갔다.
심정민이 사라지고 단둘이 되자 채훈은 승건에게서 불편한 분위기를 읽어냈다. 녀석이 꽤나 심각해 보였다.
“무슨 일이야?”
“차라리 하루 쉬어. 무리하지 말고.”
“좋아졌다니까. 겨우 감기인데 무리할 것도 없어.”
“감기로도 사람은 죽을 수 있어.”
채훈은 진지하기 짝이 없는 승건 때문에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 감기 때문에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지만 그런 걱정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너무 진지하잖아. 괜찮다니까. 반차 낼 거야. 자꾸 말 걸면, 죽 먹을 시간이 없어져.”
채훈은 아침을 먹게 자리를 비켜달라는 뜻을 아주 부드럽게 전했다. 빙긋 웃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괜찮다는 제스처였다. 하지만 채훈은 하얗게 질려 아파 보이는 얼굴로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자기 상태가 어떤지 모르는 상태에서 괜찮다고만 하지 마. 버틸 수 있다고 해서 좋아지는 게 아니니까. 어느 순간에 부러져.”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채훈은 소심하게 반발했다.
“악담처럼 들리는데?”
“걱정하는 건데, 네 말대로 내가 말하는 방식이 나쁘다 보니 악담처럼 들릴 수도 있겠군. 돌아갈 테니까 식사해.”
“최승건.”
자리에서 일어난 채훈은 제 말만 하고 돌아가려는 승건을 불렀다. 그러자 승건이 무슨 일이냐는 눈빛을 보내 왔다.
“걱정해 줘서 고마워. 어젯밤에 찾아와 준 것도 고맙고.”
“그래.”
“그리고 전에 주려고 했던 신용카드. 다시 주면 받을게.”
“……?!”
“이제부터 네가 주는 건 뭐든 간에 거절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카드 줄 거지?”
채훈은 확인을 위해 한 번 더 물었다. 승건의 미간이 구겨졌지만 뭐라 다른 설명을 하지는 않았다.
“줄게.”
짧게 대답한 승건이 불만스러운 기운을 풍기며 원룸을 나섰다.
현관문이 닫히고 자동으로 락이 걸리는 소리를 들으며 채훈은 의자에 앉았다.
“이번에는 내가 미쳤구나.”
한숨을 내쉰 채훈은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자신의 판단이 옳은지 그른지 아직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승건과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그가 주는 건 뭐든 다 받을 생각이었다.
회피라는 것을 채훈도 모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일일이 따지는 게 귀찮았고, 무엇보다 승건과 정면으로 맞설 자신이 없었다.
인간의 성격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평생 얼굴 보고 살 것도 아닌데, 마음고생하면서 상대의 딱딱하고 고압적인 성격을 고칠 생각 따위는 안 하는 게 좋았다. 그저 이대로 조용히 1년이 지나가길 기다리는 게 최선이었다.
모든 것을 걸고 덤벼들어야 할 때도 분명 있었다. 하지만 가끔은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조용히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 낫기도 했다.
채훈은 종이가방 안에서 죽그릇을 꺼내 들었다. 이 새벽에 어디서 구해 왔는지 몰라도 스테인리스로 된 도시락 그릇 안에 따끈한 죽이 담겨 있었다. 숟가락 역시 플라스틱이 아니라 나무였다. 김치와 멸치, 그리고 달게 양념된 다시마와 장조림이 반찬이었다. 누가 봐도 신경 쓴 게 분명해 보였다.
채훈은 승건에게 다시 한번 감사하며 죽을 먹기 시작했다. 힘을 내려면 뭐든 먹어둬야 했다.
* * *
신호를 받고 차를 세운 심정민은 룸미러를 힐끗 확인했다.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승건의 모습은 평소와 다름없었지만 기분이 꽤나 별로라는 것을 짐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20년 넘게 모셔온 도련님의 성향은 누구보다 심정민이 잘 알고 있었다.
싸운 건가.
잠시 자리를 비켜달라고 하고는 나중에 나온 승건의 분위기가 썩 좋지 않았다. 아무래도 싸웠거나 그에 준하는 일이 일어난 게 분명했다.
유능한 비서인 심정민은 무슨 일이냐고 묻지 않았다. 다만 오늘따라 승건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정확히는 최근 며칠 동안 그랬다.
승건은 무심하고 냉막한 성격이었다. 제 사람에게 조금 더 인내심과 배려심을 발휘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자청해서 환자를 간호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사람을 썼다. 믿을 만한 사람을 구하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어젯밤에는 승건이 직접 간호를 하다못해 오늘 아침에는 죽을 구해다가 날랐다.
심정민은 반사적으로 채훈을 떠올렸다.
여러 가지 의미로 채훈은 아주 특별한 존재였다. 승건이 채훈에 대해 알아보라고 지시를 내릴 때부터 그랬다.
심정민은 강채훈이라는 이름을 듣고 어딘가 익숙하다고 느꼈다. 그러다가 곧 채훈이 예전 사건에 휩쓸린 승건의 고등학교 동창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납치 미수 사건을 수습한 사람 중 한 명이 심정민이었기 때문이었다.
채훈의 형이 사기를 당해 큰 빚을 지게 되었다는 걸 알아내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승건이 조금 복잡한 방법으로 빚을 갚고 양아치를 치워버리게 한 것은 그러려니 했다. 채훈이 아니었다면 승건은 살아 있을 수 없었을 테니, 은혜를 갚는 거라고 하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승건의 그다음 행보가 이상했다. 채훈을 인신 구속 계약에 묶어두고는 만나고 있었다. 굳이 따지자면 스폰서를 자청했다고 불릴 만한 상황이었다.
이 바닥에서 스폰이야 흔했다. 하지만 심정민은 승건이 그럴 줄은 몰랐다.
스무 살부터 스물아홉 살이 될 때까지 미국에서 지낸 승건은 바른 생활 사나이였다. 부잣집 도련님들의 단골 트러블 메뉴인 마약은커녕 음주나 치정 같은 문제를 하나도 일으키지 않았다. 착실히 공부했고 좋은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해 취직까지 했다.
그런 승건이 한국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고등학교 동창이자 생명의 은인을 찾아 그런 관계가 되는 건 확실히 이상했다. 거기다 한도가 없는 카드를 준비하고, 값비싼 손목시계를 일곱 개나 구입한 것도 그랬다. 특히 시계 디자인은 승건이 없는 시간을 쪼개가며 카탈로그를 직접 보고 골랐다.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짐작 못 할 건 아니었다. 그런 경우도 흔했다. 스폰을 하다가 마음을 주는 거 말이다. 몸을 섞으면 없는 마음도 생기는 법이었다.
채훈은 무표정하면 싸늘한 바람이 불 정도로 차가워 보이는 미남이었다. 그러나 활짝 웃으면 또 분위기가 달라졌다. 거기다 성격도 괜찮았다.
보통은 돈이 얽히면 탐욕스러워지기 마련이었다. 승건이 20억이라는 돈을 아무렇지 않게 쓰는 것을 옆에서 지켜봤으니 이런저런 꿍꿍이를 키울 수도 있었다. 그러나 채훈은 욕심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아직 3개월밖에 지나지 않았으니 좀 더 두고 봐야겠지만 권력이나 재물에 욕심이 많은 타입은 아닌 듯했다.
사실 심정민의 입장에서야 채훈은 아무래도 좋았다. 핵심은 승건이었다. 승건은 감정의 기복이 적고 자기 절제가 강했지만,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었다. 채훈과의 관계가 승건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 수가 없는 것이 걱정이었다.
심정민이 그렇게 오랫동안 모셔온 도련님을 걱정하는 동안에, 신호등이 초록색으로 바뀌었다. 부드럽게 차를 출발시킨 심정민은 다시 룸미러를 확인했다. 이번에는 승건이 눈을 감고는 찡그린 미간을 누르고 있었다.
“혹시 두통입니까?”
“괜찮습니다.”
“진통제를 드릴까요?”
“피곤해서 그렇습니다. 잠시 눈 좀 붙이겠습니다.”
승건은 약 먹는 걸 싫어했다. 우성 알파인 탓에 약의 효과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어지간하면 약을 안 먹고 버티곤 했다. 승건이 눈 좀 붙이겠다고 하자 심정민은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눈을 감은 승건은 의식적으로 입매를 당겼다. 두통의 원인은 간단했다. 과거의 기억이 몇 개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11년 전 늦가을, 납치 미수 사건으로 반년 가까이 혼수상태에 빠졌다 깨어난 승건은 기억을 잃었다. 몸은 스무 살인데, 기억은 열여섯 살 여름의 언저리 부근이었다.
사건 경위를 들은 승건은 자신이 어떤 상황인지 납득은 했다. 기억보다 눈높이가 달라진 것 말고는, 시간의 차이를 받아들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다만, 승건을 당혹스럽게 만든 것은 사고 후유증으로 인한 이상 증상이었다.
칼에 찔린 상처와 장기 손상, 그리고 뇌출혈은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시점에서 모두 다 나은 상태였다. 하지만 후유증으로 미각과 후각이 사라졌다.
증상은 천천히 나타났다. 처음에는 맛이 싱거워지고 향이 옅어졌다. 그러다가 깨어난 지 2개월이 지나자 세상이 무미건조해지고 말았다. 형질자의 페로몬 향기는 맡을 수 있었지만, 그것조차 역한 싸구려 향수처럼 느껴졌다.
원인은 알 수 없었다. 정밀 검사로 신경 손상이 아니라는 진단이 내려졌지만 그것뿐이었다. 사고로 인한 쇼크로 형질자 호르몬이 문제를 일으켰을 거라고 짐작하는 것이 전부였다.
조심스럽게 약물치료를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발작을 일으켰다. 결국 한국이 아니라 형질자 관련 치료 기술이 앞서 있는 미국에서 치료 계획이 잡혔다.
미국에서 1년여 동안 학업과 치료를 병행했다. 치료에는 진전이 없었지만 고등학교 3년의 학업을 1년 만에 따라잡고는 대학에 입학했다.
이후로는 평범하게 살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도 했다. 세상은 여전히 무미건조했지만 그럭저럭 살 만했다. 삶의 자극이란 맛과 향이 아닌 다른 것에서도 느낄 수 있는 법이었다. 가장 열중한 것은 운동이었다. 솟구치는 아드레날린이 자신이 살아 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렇게 미국에서 정착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외할아버지가 쓰러지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태화 그룹은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재벌이었다. 태화 그룹의 회장인 외할아버지가 쓰러지자 당장에 후계자 문제가 거론되었다. 몇 년 전에 하나뿐인 외숙부가 사망하면서, 외할아버지의 핏줄은 승건의 어머니밖에 남지 않았다.
하지만 승건의 어머니는 경영과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다. 그리고 그건 외할머니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가 다른 남동생이 후계자로 자라고 있었지만 아직은 너무 어렸다. 결국 대안은 승건뿐이었다.
승건은 복잡한 집안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지만 외할머니가 간곡히 부탁해 왔다. 외할아버지가 평생 일구어온 결과물이 공중에서 분해되는 것을 볼 수 없다고 했다.
여덟 살에 부모님이 이혼하면서 승건은 외할머니의 손에 컸다. 표면적으로 학업을 위해 미국으로 떠난 어머니 대신에 승건을 키운 외할머니는 늘 정성을 다했다. 승건은 보호자이자 존경하는 스승인 외할머니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한국에서 시작한 생활은 예상했던 것만큼 골치 아팠다. 항상 바빴고, 돈에 눈먼 사람들을 상대하는 일은 피곤하기만 했다.
한국에 온 것을 세 번쯤 후회했을 때 채훈을 만났다. 승건은 눈앞을 지나치는 채훈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미국에서 생활하는 동안, 잃어버린 기억은 아주 조금씩 무작위로 돌아오고 있었다. 재미없는 영화를 보는 것처럼, 벼락을 맞은 것처럼 한순간에, 혹은 감정 이입이 되기까지 해서 떠오르는 기억은 대부분 고등학교 생활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 기억에는 아주 높은 확률로 채훈이 등장했다.
채훈에 대해서는 기억을 떠올리기 전부터 객관적인 정보를 알고 있었다. 고등학교 친구였고, 납치 사건에서 같이 하교를 하던 그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건졌다.
생명의 은인이었지만 승건에게는 고등학교 시절의 기억이 통째로 없었다. 채훈에 대한 고마움은 별개로 그는 그저 활자 속에서만 존재하는 인물이었다. 하나씩 돌아오는 기억 속에서 채훈이 너무 다정하게 굴었기 때문에 새삼스러운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채훈을 태화 병원에서 만난 것은 우연이었다. 한눈에 알아본 것은 기억 속의 그가 꽤나 인상 깊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곳에서 이렇게 만날 수도 있구나 하고 짧은 감탄이 끝나기도 전에 변화를 깨달았다.
VIP 병동은 쾌적한 서비스를 최우선으로 하고 있었다. 그래도 병원인 탓에 특유의 소독약 냄새를 완전히 지우지는 못했다.
승건은 알싸한 소독약 냄새와, 바로 옆에 서 있는 심정민의 향수 냄새가 맡아진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순간 벼락에 맞은 것 같은 전율을 맛보았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채훈을 바라보게 되었다. 조금 전과 달라진 변수란 오로지 채훈뿐이었다.
눈이 마주쳤을 때 채훈은 자신을 알아본 듯했다. 그러나 말을 건넬 시간이 없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채훈이 사라지자 거짓말처럼 세상의 향기가 사라졌다.
기적을 마주한 충격 속에서도 승건은 냉정하게 생각했다.
승건의 이상 증상 중 하나가 형질자의 페로몬 향기가 역하게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보통 특정 상대를 각인하면 나타나는 증상이었는데, 이것을 기반으로 승건의 주치의가 가설을 하나 세웠다. 승건이 누군가를 각인한 게 아니냐는 것이었다.
물론 각종 수치 검사에서는 각인과 관련된 것이 하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따라서 주치의는 각인을 한 게 아닌데 각인을 한 것처럼 몸과 정신이 착각하고 있을 수 있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마치 환상통처럼 말이다.
승건은 그 가설을 처음 들었을 때 재미없는 농담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승건의 외할머니는 생각이 달랐다. 외할머니의 주선으로 승건이 기억을 잃기 전에 알고 지냈던 오메가들 중에 가장 가능성이 큰 이들을 만나보았지만 성과는 없었다. 외할머니는 안달복달했지만, 승건은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세간에서는 형질자의 각인을 영원한 사랑의 맹세라며 낭만적인 장치로 여겼다. 하지만 실상은 감정에 따른 호르몬의 작용일 뿐이었다. 그것도 상대가 받아주지 않으면 여러 가지 장애로 고생만 하다가 결국 각인이 풀리곤 했다. 때론 죽음에 이르기도 했지만 그건 매우 드물었다.
10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고도 상상 각인은 풀리지 않았지만, 죽지도 않았다. 맛과 향을 느낄 수 없는 것 말고는 다른 이상도 없었다. 심각하다면 심각할 수 있는 장애였지만, 승건은 그다지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고 살았다.
그런데 상상 각인 상대가 채훈이었다. 베타라서 목록에 이름조차 올라가지 않았던 그가 자신의 목줄을 쥐고 있었던 것이다.
동창회를 찾아간 것은 다시 한번 제대로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왁자지껄한 소음과 고기 냄새 사이에 앉아 있는 채훈을 보았을 때 그가 맞다는 것을 확신했다.
채훈에게 섹스를 하자고 한 것은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전화를 받기 위해 밖에 나왔다가 골목에서 채훈을 마주했을 때, 섹스를 하면 어떨까 하고 생각했다.
어쩌면 분위기에 휩쓸렸는지도 몰랐다. 어둠이 내려앉은 골목에서 흐르는 매캐한 담배 냄새와, 반가워하면서도 경계하는 채훈의 태도가 호승심을 자극했다.
충동적으로 저지른 섹스의 결과는 기대에 부응했다. 채훈이 같은 공간에 없어도 향을 맡고 맛을 느낄 수 있었다. 단 지속 시간은 채 3일이 되지 못했다.
승건은 인간형 치료제를 어떻게 할지를 두고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주치의가 상상 각인 상대가 베타라는 것을 계속 인식하다 보면 자기 암시를 풀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견을 내놓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잃어버렸던 미각과 후각이 돌아온 세상의 희열은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세상은 향기롭고 감미로웠다.
차라리 몰랐다면 부족한 채 그대로 살았을 테지만, 오감이 주는 평범한 생활이 무엇인지 알아버리자 그냥 지켜보기만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섹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승건은 계속 베타만 만나왔었다. 알파와 오메가는 역한 향기 때문에 애초에 논외였다. 지금껏 섹스가 불만족스럽다고 여긴 적은 없었는데, 채훈과 하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후각과 미각이 섹스에 그렇게나 영향을 미칠 줄은 몰랐다.
승건은 재벌가의 자식으로 태어나 자라왔다. 채훈의 뒤를 캐고, 약점을 잡아, 돈으로 거래하는 데 아무 거리낌이 없었다.
돌아온 기억 중에는 양호실에 누워 있던 자신에게 채훈이 뺨에 입을 맞추려다가 그만둔 것도 있었다. 채훈의 말대로 10여 년 전의 일이었다.
그래도 감정이 얽히는 복잡한 상황만큼은 미연에 방지하고자 했다. 승건에게 필요한 것은 채훈의 존재였지 그의 애정이나 헌신 같은 게 아니었다.
겨우 3개월뿐이긴 하지만, 지금까지는 별 탈 없이 잘 지내왔다.
사실 채훈은 미묘하게 다루기 까다로운 타입이었다. 눈치가 빠르고 질척거리지 않는 것은 큰 장점이었다. 그러나 채훈에게는 자기만의 기준이 있었다. 별것 아닌 신용카드에 화를 낸 것도 그랬다.
승건은 채훈이 받은 대가가 적다고 여겼다. 20억은 목숨을 구해진 값이니 더한 것을 치러야 했다. 그러나 채훈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었다.
첫날부터 네 비위를 맞춰야 하냐고 물은 채훈은 기억 속의 그때처럼 스스럼없이 굴었다. 어떨 때는 친한 친구를 대하듯 했다. 그러나 선은 명확했다.
승건은 어려서부터 목적을 가지고 접근하는 사람들에게 익숙했다. 채훈의 경우는 서로 원하는 바가 명확했기 때문에 거래라는 명목으로 원하는 것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처음부터 더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은 승건이었다.
보통의 사람들은 승건에게서 하나라도 더 받아내려고 했다. 그러나 채훈은 서로 거래를 한 것뿐이니 서로 더 주고받을 게 없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카드와 손목시계를 거절하고 화를 낸 것도 그런 맥락이었다.
거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게 채훈만의 기준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웃으면서 네가 주는 걸 이제 거절하지 않겠다고 한 채훈의 의도를 읽을 수가 없었다. 그건 긍정이 아니라 또 다른 거부의 뜻이었다.
이래서야 어디까지 받을 수 있을지 한번 시험해 보고 싶었다. 손목시계를 사면서도 과연 이것까지 버릴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정말 내던져 버린다면 다음에는 더 비싼 걸 안길 생각이었다.
두고 보자고 앙심을 품는 것은 자신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채훈이 엮이면 어린애라도 된 것처럼 유치해졌다. 다른 사람이 했다면 욕을 했을 행동을 자신이 하고 있다는 사실이 웃기지도 않았다.
사실 자신답지 않은 짓을 여러 번 하긴 했다.
통화 중에 정신을 잃은 채훈을 찾아간 것은 혹시나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감기로도 사람은 죽었다. 그리고 사람을 찾아 시키는 것보다는 직접 가는 것이 번거롭지 않고 빨랐다. 설마 하고 움직인 것이 옳은 선택이었다. 외투조차 벗지 못한 채훈은 소파에 아무렇게나 쓰러진 채 겨우 숨만 내쉬고 있었다.
병원으로 데려가지 않고 심정민을 불렀다. 주사를 맞고 열이 떨어져 숨소리가 편안해지는 것을 확인하고는 원룸을 나섰다.
다시 그곳을 찾을 생각은 없었다. 나중에 심정민만 보내서 채훈의 상태를 확인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가서 잠시 눈을 붙이는 동안에 꿈에서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고 말았다.
고3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채훈이 감기에 걸렸다. 기침감기가 아니라 열감기인 듯 벌게진 얼굴을 하고 등교한 채훈에게 집에서 쉬라고 했더니 동생이 아프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동생이 아파서 어머니가 간호하고 있는데 자기까지 감기로 집에 붙어 있으면 정신 사나울 거라며, 약 먹으면 금방 낫는다고 채훈이 웃었다. 하루 종일 비실거리던 녀석은 점점 상태가 나빠졌지만 끝까지 조퇴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날 퀭한 얼굴로 나타난 채훈은 멀쩡해졌다고 뛰어다녔다.
하지만 채훈의 말과 달리 그는 제 컨디션이 아니었다. 그저 괜찮아졌다고 스스로가 믿고 있었을 뿐이었다. 채훈은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 모르고 있었다.
그때 승건은 채훈의 집안 사정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다. 성격이 괄괄한 형이 있고, 채훈의 부모님이 오메가인 셋째 아들을 더 챙긴다는 것과, 상대적으로 채훈이 소외받고 있다는 것, 그리고 채훈은 그걸 알면서도 눈치 없는 척 굴고 있다는 것 정도만을 알았다.
서주명이 채훈을 향해 착한 아이 병이라고 했던 것까지 떠올리며 잠에서 깨어난 승건은 안타까움과 짜증을 동시에 느꼈다.
그때도 지금도 미련하기 짝이 없는 채훈을 생각했다. 이번에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 심정민에게 연락해서 채훈을 찾아갔다. 아니나 다를까 채훈은 이미 출근 준비를 끝낸 상태였다. 그는 힘없는 얼굴을 하고도 하루쯤 쉬어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고 있었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았다. 아니, 변하기도 했다. 기억 속에서는 다정하고 친절했던 녀석이 실제로는 시니컬하고 고집스럽게 굴고 있었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말썽을 부리지 않는 치료제였다. 몇 번의 실험으로 효과는 이미 파악한 상태였다. 접촉이 없다면 같은 곳에 존재하는 것으로 향과 맛을 되찾았다. 잠깐의 접촉은 몇 분, 키스는 몇 시간, 섹스는 사흘을 넘지 않았다.
승건이 바라는 것은 효과 좋은 즉효성 약이 아니라 완벽한 치료였다. 그를 오래 필요로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상대가 인간인 만큼 변수가 생겨났다.
특히 채훈과 부대끼면서 그와 관련된 기억을 하나씩 되찾게 되었고, 그러면서 두통이 생겼다. 오늘도 그랬다. 심하지는 않았지만 욱신거리는 것이 신경에 거슬렸다.
지잉.
가라앉지 않는 두통에 다시 이마를 누르는데 채훈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죽 맛있다. 잘 먹었어. 빈 그릇은 나중에 만날 때 가져갈게. 시계도 착용하고.]
몇 줄 되지 않는 메시지에 예의 바름과 성실함, 그리고 고집까지 읽혔다. 승건은 휴대폰 화면에 반듯하게 떠오른 글을 한 번 더 읽으면서 웃었다.
“다 받겠다고 했었지.”
“도련님. 무슨 말씀하셨습니까?”
승건의 혼잣말에 심정민이 반응했다.
“채훈이가 내가 주는 건 거절하지 않고 다 받겠다고 했어요.”
“네?”
“어디까지 받을지 궁금하네요.”
깜짝 놀라 반문까지 했던 심정민이 이번에는 입을 다물었다. 승건은 그걸 알고도 모르는 척했다. 소리 내어 말하자 진짜 그럴 마음이 생겼다.
자신이 가진 돈과 권력이 합쳐지면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채훈은 알지 못했다. 보석이 잔뜩 박힌 팔찌를 선물할까 싶었다. 팔찌를 받아 든 채훈이 떨떠름하게 얼굴을 구기는 것도, 또 그의 손목에서 팔찌가 반짝이는 것도 보고 싶었다. 이번에 새롭게 알게 된 취향이 상상력을 자극했다.
“무엇이 좋을까.”
“선물은 신중하게 하셔야 합니다. 당사자가 좋아할 만한 것으로요.”
“선물이 아니라서, 내가 하고 싶은 걸 할 겁니다.”
승건이 하고 싶은 대로 할 거라고 하자 심정민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그러다가 싸움 납니다.”
충실하고 현명한 비서인 심정민이 아주 현실적인 조언을 했다. 그러나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승건은 싸움이 나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채훈이 당황하는 모습은 물론이고 화를 내는 것도 보고 싶었다.
불쾌한 두통 속에서도 기나긴 목록을 단번에 작성한 승건은 조용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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