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4. 대립】 (5/26)

  【04. 대립】

봄 햇살이 화창한 수요일이었다.

외근을 나갔던 채훈이 병원으로 돌아온 것은 점심 시간이 반쯤 지나고 난 다음이었다. 구내식당에서 재빨리 점심을 해결한 채훈은 탕비실에서 커피를 챙겨 자리로 돌아왔다.

사무실에서는 오늘 있었던 주주총회에 대한 이야기가 한창이었다. 며칠 전부터 태화 그룹의 정기 주주총회는 핫이슈였다. 이번 주주총회를 기점으로 태화 그룹의 계열사 분리가 시작될 거라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태화 그룹의 주식도 요동쳤다.

계열사 분리도 주식에도 관심이 없었던 채훈은 이야기를 대충 흘려들었다.

“그러게 말이야. 그럼 대표이사가 몇 살인 거야?”

“어리겠죠. 손자라는데. 아무리 나이를 따져도 마흔은 안 됐을걸요?”

“내가 알아. 서른 살이야.”

컴퓨터를 부팅하고 커피를 마시던 채훈은 대표이사가 서른 살이라는 말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와. 정 회장님이 그렇게 되고 다 끝난 줄 알았는데.”

“그러게 말이야.”

“누구는 닭 쫓던 개가 되었겠네.”

외근을 나간 탓에 채훈은 이야기의 맥락을 따라가지 못했다. 이번 주총이 꽤나 중요해서 대충의 배경은 알지만 서른 살의 대표이사는 뜬금없었다.

손자에 대표이사라는 말에 채훈은 반사적으로 승건을 떠올렸다. 혹시나 싶은 마음에 채훈은 옆자리에 앉은 이 대리를 향해 슬쩍 몸을 기울였다.

“이 대리님. 주총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요?”

“아, 강 주임은 외근 나가서 모르겠구나. 반전이 일어났어. 반전이.”

“반전이요?”

채훈이 운을 떼자 이 대리가 신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번에 MK에서 지분 갈라먹겠다고 완전 기세등등했었잖아. 그런데 정 회장 손자가 딱 등장한 거야. 이사들을 어떻게 설득했는지 모르겠는데, 대표이사로 뽑혔대.”

“손자요? 손자가 대표이사가 됐어요?”

“그래. 완전 금수저지. 아니, 다이아몬드수저인가?”

금수저라는 이 대리의 말에 채훈은 그렇다고 대답하지 못했다. 태화 그룹 정 회장의 하나뿐인 아들이었던 정세혁에게는 후사가 없었다. 그래서 서른 살의 손자라고 불릴 만한 사람은 승건뿐이었다. 출생만으로 따지자면 승건은 금수저가 맞았다. 그래도 이 대리의 말대로 반전은 반전이었다.

태화 병원의 창립 역사는 광복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처음 시작은 분명히 병원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각종 이권 사업에 뛰어들면서 태화 그룹은 대한민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재벌이 되었다. 병원 외에도 건설, 전자, 제약, 선박, 미디어, 식품, 유통 등등, 경제 전반에 태화 그룹의 손길이 닿아 있었다.

대한민국 재벌이 흔히 그렇듯이 태화 그룹 역시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총수 아래에서 성장했다. 하지만 그룹을 한 손에 쥐고 흔들던 정규완 회장이 9개월 전에 갑자기 쓰러지면서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공룡인 태화 그룹은 정 회장의 하나뿐인 아들이 죽고 난 다음에 아직 후계자를 정하지 못했다. 그런 상황인지라 정 회장이 쓰러지고 난 후부터 여기저기서 잡음이 들려왔다.

특히 회장의 둘째 동생이 칼을 갈고 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계열사 분리를 미끼로 주주들의 지지를 얻고 다닌다는 소리가 채훈의 귀에까지 들려왔다.

그런데 회장의 손자가 나타나서 대표이사직을 꿰찼다니 놀랄 만한 일이었다. 지금껏 계열사 분리를 꿈꾸던 이들을 다들 물 먹이는 것이니 말이다.

계열사 분리를 꿈꾸던 사람들 중에는 태화 병원의 이사장도 있었다. 그는 태화 병원이 더욱 발전하기 위해서는 독립을 해야 한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다니면서 반회장파로 찍힌 지 오래였다. 그런 이사장에게 서른 살짜리 대표이사의 등장은 악몽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악몽인 대표이사가 바로 승건이었다.

채훈은 승건이 그동안 왜 그렇게 바빴는지 이해했다. 아무리 정 회장이 지지해 준다고 하더라도, 미국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무 기반도 없는 상태에서 대표이사가 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말이야. 그것 때문에 위쪽에 비상 걸렸어.”

“그렇겠죠?”

“우리 이사장님. 반회장파로 찍혔으니까 자리 지키기 어려울 거야. 임기도 얼마 안 남았잖아. 한동안 몸 사리고 있어야겠어.”

채훈의 추측에 이 대리가 쐐기를 박았다.

이사장 교체는 단순히 사람이 바뀌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반회장파로 찍힌 이사장이 축출되면 다음은 당연히 친회장파 쪽 사람이 뽑히기 마련이었다. 그렇게 되면 이사장 라인이라고 불리는 병원장은 물론이고 행정부장까지 끝장난다는 소리였다. 그다음은 총무부가 시끄러워지는 순서였다.

사내 정치는 위험했다. 총무과에서 막내나 다름없는 채훈은 이사장 라인과 상관없었다. 만년 대리인 이 대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총무과는 여러 이권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곳이었다. 불똥이 어디로 튈지는 아무도 모르니 조심하는 게 좋았다.

이 대리와의 대화를 그렇게 마무리하고 다시 커피를 마시던 채훈은 막 사무실로 들어오던 박광호와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박광호가 인상을 구긴 채 고개를 돌리고는 제 갈 길을 가버렸다.

지난번에 한 번 대거리를 한 이후로는 서로의 관계가 눈에 띄게 나빠졌다. 특히 박광호는 틈만 나면 사람의 신경을 긁는 시비를 걸어왔다.

대부분 그냥 무시했지만 아주 가끔은 빡칠 때도 있어서 저 새끼 얼른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박광호는 이사장이 백이었다 그가 과연 이사장과 운명을 함께할지 궁금해졌다. 화끈하게 잘리는 것도 좋았다. 근태가 나쁜 박광호가 뻔뻔하게 버티는 것도 모두 이사장이 백이었기 때문이었다.

아직은 오지 않을 미래를 상상하며 흐뭇하게 미소를 짓고 있는데 휴대폰이 진동했다. 승건이었다.

[오늘. 오후 10시.]

날짜와 시간만 적힌 짧은 메시지를 확인한 채훈은 미간을 찡그리지 않기 위해 의도적으로 입매를 잡아당겼다. 서른 살짜리 대표이사님이랑 휴대폰으로 메시지를 보내는 남자가 머릿속에서 따로 놀았다.

승건과 계약을 하고 만난 것이 벌써 3개월이 되었다. 계절은 겨울에서 봄으로 바뀌었다.

10주의 기간 동안 승건의 메시지는 한결같았다. 오로지 날짜와 시간이 전부였다. 장소는 매번 승건의 아파트였기 때문에 따로 적혀 있지 않았다.

채훈은 휴대폰 화면이 대기 시간을 지나 까맣게 변하는 것까지 지켜보았다. 승건이 바라던 대로 둘의 만남은 별다른 감정이 얽히지 않는 섹스 파트너의 그것이었다. 서로 알던 사이였기에 무던하고 자연스러운 만남이 이어지고 있었다.

사실 이렇게 섹스만을 목적으로 특정한 누군가를 장기적으로 만나는 것은 처음이라 이렇게 흘러가는 게 맞는 건지 아닌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승건이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려니 하고 있을 뿐.

승건의 말대로 섹스는 섹스였다. 그는 여전히 정력적이었고 사람이 흥분하는 모습을 지켜보길 즐겼다. 승건이 날카로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바람에 울컥하는 일이 몇 번 있긴 했다. 하지만 그것도 숨을 몇 번 들이켜면 괜찮아질 정도의 것이었다.

확실히 몸뿐인 관계였다. 이대로라면 1년은 금방 지나갈 듯싶었다.

다만 한 가지 곤란한 점이 있다면 주말 중에 하루, 그리고 필요에 따라 주중에 그를 만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주말은 하루 전이라도 스케줄이 잡히는데 주중에는 지금처럼 당일에 보자고 할 때가 종종 있었다.

선약이라도 있으면 취소를 해야 했다. 오늘도 그랬다. 오랜만에 고등학교 친구들이랑 다 같이 모이기로 했는데, 빠질 수밖에 없었다.

승건에게 양해를 구해볼까 잠시 생각했지만 곧 머리에서 지워버렸다. 필요하다면 주중에 하루 시간을 내는 것이 계약 조건이었다. 그것도 20억짜리. 자신의 편의를 위해 계약을 어기는 것은 자존심이 바닥에 떨어진 상황이었기에 더 용납되지 않았다.

승건에게 확인했다고 답장을 보낸 채훈은 고등학교 친구들이 모여 있는 단체 채팅방에 갑자기 일이 생겨서 불참하게 되었다고 알렸다. 무슨 일이냐는 친구들에게 야근 때문이라고 하자 다들 한마음 한뜻으로 병원 욕을 잔뜩 해주었다. 좋은 친구들이었다.

그렇게 일정을 정리한 채훈은 오후 일과를 시작했다. 오늘 하루는 길어질 것 같았다.

* * *

채훈이 승건의 아파트에 도착한 것은 10시 직전이었다. 집에 들러서 저녁을 먹고 오는 바람에 시간이 아슬아슬했다. 채훈은 손에 들고 있는 카드키로 현관문의 락을 풀고 비밀번호 여섯 자리를 눌렀다.

최신식 주상복합 아파트의 보안은 꽤나 철저했다. 승건의 아파트 현관문을 지나기 위해서는 세 번의 인증을 거쳐야 했다. 건물의 주거지역의 출입문을 통과하려면 카드키와 네 자리 비밀번호가, 엘리베이터를 움직이려면 카드키가, 그리고 현관문은 카드키와 여섯 자리 비밀번호가 필요했다.

모두 안전을 위한 장치였다. 이렇게 겹겹이 보안을 강조해도 사건 사고를 완벽하게 막을 수는 없었다.

“흉흉한 세상이야.”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현관문을 열어젖힌 채훈은 현관에 놓여 있는 까만 구두를 보았다. 승건이 먼저 도착한 모양이었다.

슬리퍼를 챙겨 신은 채훈은 안으로 들어섰다. 인테리어 공사를 한 실내는 전보다 따뜻한 색으로 꾸며졌다. 그래도 여전히 빈 공간이 더 많은 거실 한가운데, 승건이 소파에 앉아 태블릿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녀석은 매우 바빴다. 밤늦게까지 일을 할 정도로 말이다.

“나 왔어.”

“잠시만, 이것까지 읽고.”

“천천히 해.”

승건이 힐끗 시선을 주더니 다시 태블릿에 집중했다. 채훈은 별달리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까지 승건이 일을 마칠 때까지 기다린 적이 몇 번 있었다.

목이 말랐던 채훈은 씻기 전에 부엌으로 향했다. 커다란 냉장고 안에는 생수만 들어 있었다. 채훈은 아무것도 없는 냉장고를 볼 때마다 승건이 뭘 먹고 살까 궁금했다.

승건은 아침은 배달이 오고, 점심과 저녁을 모두 밖에서 해결한다고 했다. 아무리 그래도 간단한 간식이나 과일, 기호 식품 정도는 있어야 했다. 하지만 승건의 냉장고는 말 그대로 텅텅 비어 있었다. 먹는 걸 즐기지 않는다고 했던 게 헛말은 아니었다.

삶의 즐거움 중 하나가 맛있는 걸 먹는 것인 채훈은 이해할 수 없었다. 재미없는 취향이라며 물을 마시던 채훈의 눈에 식탁 위에 올려진 수상한 상자가 들어왔다.

직사각형에 제법 부피가 있는 가죽가방이었다. 여행가방치고는 작았고 슈트케이스라고 하기에는 모양이 달랐다. 채훈이 알고 있는 범위 내에서 추측해 보자면 전문가용 화장품 가방 같았다.

“와인이야.”

손을 대지 못하고 빤히 바라보고 있던 채훈은 승건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거실과 부엌이 오픈되어 있는 구조였다. 승건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와인?”

“선물 받은 건데, 같이 마시려고 가져왔어.”

승건은 종종 선물 받은 거라면서 간식거리를 가져왔다. 대부분 고급 과자나 초콜릿 종류였다. 채훈으로서는 구하기 힘든 거라서 아주 맛있게 먹었다. 입이 짧은 승건은 한두 개만 먹고 말았다. 어쨌든 술을 가져온 것은 처음이었다.

“대표이사 취임 축하 선물인가 봐?”

“그걸 알아?”

“병원에 소문이 났는걸. 젊은 대표이사님이라고 말이야. 이거 열어봐도 돼?”

채훈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태화 그룹의 대표이사와 눈앞에 있는 승건은 괴리가 있었기 때문에 별생각이 없었다. 채훈은 상자와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승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거리가 꽤 되었기 때문에 승건의 표정이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꽤나 묘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왜? 마시자며?”

“열어봐.”

“오. 좋아.”

감탄성을 내뱉던 채훈은 두말하지 않고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초록색 와인 병 두 개가 들어 있었다. 그중에 하나를 빼낸 채훈은 라벨을 읽으려고 노력하다가 영어가 아닌 것을 확인하고는 포기했다.

술에 강하고 좋은 술을 마시는 것도 즐기는 채훈은 한때 와인 공부를 열심히 하려다가 포기했다. 너무 복잡했기 때문이기도 했고 전통주가 더 취향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지금은 요리의 재료로 값싼 레드 와인을 구입하는 게 전부였다.

“좋은 거라고 하더군.”

어느새 승건이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그릇장에서 와인 글라스를 꺼내 식탁 위에 놓았다. 그리고 채훈의 손에서 와인 병을 가져가더니 상자에 같이 들어 있는 오프너로 능숙하게 코르크 마개를 땄다. 글라스에 붉은 와인이 가득 찼다.

“받아.”

채훈은 승건이 내민 글라스를 받아 들었다. 향기가 좋았다. 부엌에 서서 마시는 게 아까울 만큼 말이다. 그래도 승건이 꿈쩍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채훈은 그 자리에서 한 모금 마셨다. 향기만큼이나 맛도 훌륭했다. 한 모금씩 마시다가 단숨에 잔을 비워냈다.

“맛있다.”

“이상해.”

만족스럽게 웃던 채훈은 쓰다고 하는 승건 때문에 더 진하게 웃었다. 술을 즐기지 않는다고 하더니 와인도 별로인 모양이었다.

“와인도 별로야?”

“꽃, 나무, 과일 향기와 알코올이 뒤섞여서 이상한 맛이 나.”

와인에서 꽃, 나무, 과일 향기가 나는 건 당연했다. 그런데 승건은 마치 떫은 감이라도 먹은 것 같은 표정을 짓더니 아직 와인이 잔뜩 남은 글라스를 식탁 위에 올려두었다. 반대로 채훈은 빈 잔에 와인을 채워 한 잔 더 마셨다. 세 번째로 글라스를 채우려는데 승건이 병을 한쪽으로 치웠다.

채훈은 눈을 빛내며 승건을 노려보았다. 개도 먹을 때는 안 건드리는 법이었다.

“왜 그래?”

“씻을 거잖아. 욕실에서 낙상 사고가 많이 일어나.”

승건은 아주 진지했다. 마치 술주정뱅이를 대하는 듯한 태도에 채훈은 웃었다. 겨우 이걸로 취하지 않는다고는 말하지 못했다. 급하게 마셨더니 취기가 살짝 오르긴 했다.

“씻고 왔어. 안 씻어도 돼. 그러니까 한 잔만 더 마시자. 응?”

채훈은 활짝 웃으면서 글라스를 내밀었다. 혹시나 몰라 출발 전에 씻고 옷도 갈아입었다. 씻지 않으면 욕실에서 넘어질 일도 없으니, 더 마셔도 될 터였다.

잠시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보던 승건이 글라스의 3분의 1만 채워주었다.

“쩨쩨해.”

“많이 마셨어.”

“이게 뭘.”

채훈은 투덜거리면서 얼마 되지 않는 와인을 마셨다. 그는 글라스를 나란히 내려놓고는 승건을 쳐다보았다.

“키스해도 돼?”

“아니. 이 닦고 와. 샤워는 하지 말고.”

이상한 맛이 나는 키스는 싫다는 듯 승건이 반걸음 물러났다. 채훈은 웃으면서 따라붙었다.

“키스하면 맛이 달라져.”

얼굴을 가까이 대자 승건은 미심쩍은 표정을 짓기는 했지만 피하지는 않았다. 키 차이 때문에 살짝 까치발을 한 채훈은 부드럽게 입술을 살짝 맞물렸다가 떨어져 나왔다.

“어때?”

“이상하지는 않아.”

이상하지는 않단다. 승건답게 참으로 건조한 감상이었다. 그래도 채훈은 웃으며 다시 입술을 맞댔다.

*

*

“흐읏. 읏. 으응.”

승건의 성기가 거칠게 안을 쳐올릴 때마다 채훈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침대에 엎드린 채 승건을 받아내고 있던 채훈은 감당할 수 없는 쾌감에 진저리쳤다. 느끼는 곳만 집중적으로 찔러대는 탓에 눈앞이 번쩍거렸다.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으읏.”

채훈은 터질 듯 튀어나오는 신음을 삼키며 절정에 이르렀다. 꼿꼿하게 발기한 성기에서 정액이 울컥 쏟아져 나왔다. 채훈은 짜릿한 해방감과 여운을 느낄 여유가 없었다. 승건이 여전히 안을 쑤셔댔다.

계속되는 쾌감은 독이나 마찬가지였다. 채훈은 엎드린 채로 자신의 허리를 붙잡고 있는 승건의 손을 잡아챘다.

“이제, 흐, 으읏. 끝내.”

“네가, 네가 꽉 물고 안 놔주고 있잖아.”

채훈의 애원에 승건이 원색적인 말로 답했다. 채훈은 열이 오른 상태에서도 얼굴이 홧홧해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승건을 잡아먹을 듯 뒤를 조이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꽉 물었으니까, 그만 싸라고! 윽!”

울컥하는 마음에 벌컥 소리를 지르는데 승건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거센 삽입에 힘이 빠진 채훈의 몸이 제멋대로 흔들렸다. 그러다가 채훈의 안에 깊숙이 파고든 승건이 탄식을 내뱉으며 길게 몸을 떨었다.

숨을 멈추고 그 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린 채훈은 승건이 성기를 빼내고 떨어져 나가자마자 그대로 침대 위로 엎어졌다. 열이 나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힘들다는 소리가 절로 나오려고 했다. 지금껏 체력만큼은 자신이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열심히 운동한 덕분이었다. 그런데 승건과 섹스를 하면 매번 녹초가 되고 말았다.

승건은 정력이 넘치는 데다가 집요하기까지 했다. 가볍게 섹스를 즐기기보다는 쾌락의 극한까지 사람을 쥐어짰다. 다행히 속궁합은 좋았지만, 너무 느껴서 이러다 죽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그러니까 결론은, 승건과의 섹스는 좋은데 너무 힘들다는 거였다.

고민거리치고는 너무 유치해서 속으로만 웃고 있는데, 머리 위에서 승건의 목소리가 들렸다.

“채훈아?”

“어.”

채훈은 승건의 부름에 건성으로 대답했다. 눈을 슬쩍 뜨자 가운을 입고 이쪽을 보고 있는 승건과 시선이 마주쳤다. 널브러진 자신과 달리 생생한 녀석을 보자니 부럽고 심술도 났다.

힘이 넘쳐서 좋겠다. 이번에도 역시나 유치한 질투의 말을 삼켰다. 아무래도 체력 훈련을 본격적으로 해야겠다 싶었다.

“잘 거면 바로 누워. 자세 나빠.”

“아니. 안 자. 씻고 돌아갈 거야.

정신이 번쩍 든 채훈은 자리에서 흐느적거리며 일어났다.

처음에는 호텔에서 잠들었다가 다음 날 아침에 출근하기 위해 허둥댔었다. 그 일을 교훈 삼아 주중이든 주말이든, 섹스가 끝나면 무조건 자신의 원룸으로 돌아갔다.

침대에서 빠져나온 채훈은 준비해 놓은 가운을 걸치고는 거실에 있는 공용 욕실로 향했다.

*

*

씻는 건 금방이었다. 머리를 대충 말리고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는 욕실을 나왔다. 옷을 갈아입기 위해서 침실로 가다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는 승건과 마주쳤다.

승건은 잠옷으로 흰 티와 고무줄 바지가 아니라 파자마를 입었다. 그것도 광택이 있는 짙은 푸른색의 실크파자마였다.

귀하게 자란 도련님이 분명한 승건의 손에 밤늦은 시간과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 들려 있었다. 자정이 넘은 시간인데.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일과 관련된 통화를 해야 한다니 괜히 안쓰러워졌다.

“아니요. 그건 제가 임의대로 할 수 없습니다.”

승건의 목소리에 귀찮아하는 기색은 없었지만 건조하고 사무적이었다. 상대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승건이 그를 싫어하는 게 분명했다.

채훈은 눈치가 빨랐고 적당히 섬세했다. 승건은 자신에 대해 캐묻지 말라고 했지만 그와 여러 번 만나면서 취향이나 버릇, 성격 같은 것들을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승건은 감정의 기복이 크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무표정하고 말수도 적었다. 그래도 오늘은 그 정도가 심했다. 처음 들어설 때부터 기세가 흉흉했고 섹스도 거칠었다. 전화를 받고 있는 지금도 미간이 찌푸려졌다가 펴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태화 그룹의 대표이사가 된 승건이니 바쁠 수밖에 없긴 했다. 그는 야근을 밥 먹듯이 했고 퇴근 후에도 일거리를 아파트까지 들고 왔다. 그렇게 사는 사람도 있다지만 그래도 새벽 1시가 넘은 시간에 전화를 받는 것은 못 할 짓이었다. 이럴 때면 승건이 불쌍해 보일 지경이었다.

“시간이 늦었으니 이만 끊겠습니다. 네. 비서실에 연락하십시오.”

승건이 여지를 주지 않고 통화를 끝내버렸다. 화가 난 게 분명한데도 휴대폰을 내던지지 않고 테이블 위에 가만히 내려놓는 것이 승건답긴 했다.

“유쾌한 통화 상대는 아니었나 보네. 아, 네 일을 캐묻는 건 아니야. 그냥 아까부터 기분이 안 좋아 보여서. 지금도 미간이 구겨져 있고. 그러다 주름 생겨.”

캐묻지 말라는 계약 조건 때문에 채훈은 얼른 사족을 덧붙였다. 그러자 승건이 찡그린 미간을 천천히 폈다.

“귀찮은 일이 생겨서 그래.”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새벽에 전화하는 놈이 매너 없는 거지. 나 지금 되게 순하게 말하고 있는 거 알지?”

채훈은 귀찮은 일이 무엇인지 물어보고 싶은 것을 참았다. 가뜩이나 기분 나쁜 승건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대신에 승건의 전화 상대를 욕해 주었다.

승건이 당장에 움직이지 않는 걸 보면 생사가 걸린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새벽 1시에 전화를 한 것은 욕을 먹어도 쌌다.

채훈이 상대를 욕해 준 게 마음에 들었는지 승건의 얼굴이 조금 더 풀렸다.

“시차도 생각 안 하고 전화를 하는 인간이긴 해. 마음 같아서는 다 때려치우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어.”

그래서 더 짜증 난다는 승건의 말에 채훈은 웃었다. 승건답지 않게 투덜거리는 모습이 신선했다.

“사회생활이 다 그렇지. 뭐.”

“내가 내 발등을 찍었어.”

채훈은 미간이 아니라 콧등을 찡그린 승건이 다가오는 걸 보고 살짝 옆으로 비켜주었다. 그러나 자신을 지나칠 거라고 생각한 승건이 가까이에 섰다.

“왜 그래?”

“좋은 향기가 나서.”

“바디워시 냄새일걸?”

“그게 좋아.”

“그래?”

채훈은 대충 대꾸했다. 개인의 취향이니까 평범한 바디워시 냄새가 좋을 수는 있다. 하지만 향기를 맡는다며 머리와 귓가에 코를 들이밀다가 목덜미에 입을 대는 건 곤란했다. 허리를 감싸 안는 승건의 의도는 분명했다.

“어, 잠시만. 나 씻었어. 이제 돌아갈 거야.”

채훈은 승건의 입술을 피하는 것과 동시에 손으로 그의 어깨를 밀었다. 하지만 승건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한 번 더 씻어.”

단호하게 말한 승건이 채훈의 목덜미에 입술을 대고는 가볍게 빨아올렸다. 승건의 손짓은 더욱 노골적이었다. 샤워 가운 밑에 맨살 엉덩이를 움켜잡아 왔다.

채훈은 그러지 말라고 승건을 밀어내려다 포기했다. 그 빌어먹을 ‘불법이나 비도덕적인 경우가 아닌 경우’라는 조건이 문제였다. 피곤하긴 했지만 아예 못 할 정도냐고 물으면 그건 또 아니었다. 거기다가 승건의 애무에 몸이 달아오르고 있었다.

“너는 힘이 남아돌아서 좋겠다.”

조금은 억울한 마음에 채훈은 가볍게 항의했지만 곧 승건의 입술에 막혀버렸다.

키스는 시작부터 진했다. 혀를 깊숙이 넣어 핥으며 얽혀 왔다. 그사이에 길고 단단한 손가락 하나가 엉덩이 사이를 파고들었다.

방금 전까지 승건의 성기를 받아들였던 곳은 평소보다 풀어져 있긴 했다. 그러나 아무 준비 없는 갑작스러운 침입에 마른 살들이 아프게 밀리는 느낌이었다.

“빡빡해.”

입술을 살짝 뗀 승건이 가볍게 혀를 찼다.

“차라리……. 흑.”

차라리 침대로 가자고 하려던 채훈은 다급하게 신음을 삼켰다. 승건의 손가락이 힘으로 밀고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심하게 아프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약한 곳을 꾸욱 눌러 오는 바람에 허리가 흠칫 튀었다. 서 있는 채로 안이 헤집어지는 것은 처음이라서 기분이 굉장히 이상했다.

“침대로 가는 게…….”

이번에는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입술이 막혔다. 그대로 승건에게 단단히 끌어안긴 채 키스당하며 구멍을 희롱당하는 모양새였다. 채훈은 몰아붙이기를 좋아하는 승건의 섹스 취향이 고약하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대신에 승건의 목을 끌어안고는 쾌락에 빠져들었다.

안을 헤집는 승건의 손가락은 이미 두 개로 늘어나 있었다. 단단한 손가락이 안을 찔러 들 때마다 채훈의 더운 숨결이 승건의 입 속으로 삼켜졌다.

채훈은 샤워 가운 하나만 입고 있는 상태였다. 부풀어 오른 성기와 뾰족하게 솟은 유륜에 승건의 몸이 밀착되어 비벼질 때마다 뱃가죽이 흠칫흠칫 떨렸다. 이대로라면 승건의 몸에 대고 사정을 할 판이었다.

“뒤돌아봐.”

채훈이 더 이상 안 되겠다고 하려던 찰나에 승건이 입술을 떼고 말했다.

“……?”

뒤로 돌아서서 뭘 하라는 건지 채훈이 묻기도 전에 승건이 먼저 움직였다. 어리둥절하던 채훈은 승건의 손에 의해 뒤돌아 세워졌다.

“짚어. 안 넘어지려면.”

귓가에서 다정하게 목소리가 울렸다. 채훈은 눈앞에 있는 탁자를 보고도 이걸 짚어야 하나 싶었다. 망설이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승건이 등 뒤에서 허리를 껴안아 오면서 몸을 바짝 붙였다. 설마 하는 순간에 엉덩이 사이로 뜨거운 것이 들이밀어졌다.

“너. 으읏, 흣. 으…….”

채훈은 신음을 삼켰다. 갑작스러운 삽입은 단호하기 짝이 없었다. 뜨겁고 단단한 살덩이가 밀려들자 내벽이 벌어지면서 몸이 열렸다. 순간 채훈의 머릿속에는 콘돔과 젤이라는 단어와 함께 욕설이 섞였다.

평소 승건의 섹스는 평범한 편이었다. 자신을 집요하게 흥분시키고는 그걸 지켜보는 것 말고 딱히 괴악한 취향은 없었다. 체력이 넘치는 것은 별개로 말이다.

보통 섹스 스타일이 갑자기 바뀌는 것은 스트레스와 관련이 있었다. 자정 넘어서까지 업무와 관련된 전화를 받다가 어지간히도 빡쳤는가 싶었다.

젤도 콘돔도 없이 꾸역꾸역 밀려드는 생살의 느낌이 생소했다. 숨을 내쉴 때마다 신음이 새어 나왔다.

“흐. 으읏. 너, 진짜. 이렇게, 이렇게 할, 거야?”

채훈이 겨우겨우 문장을 만들어냈다. 승건은 대답 대신에 채훈의 목을 빨아 왔다. 동시에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면서 단번에 성기를 채훈의 안으로 밀어 넣었다.

“―!!”

채훈은 갑작스러운 침입에 숨을 삼키며 몸을 떨었다. 거슬한 음모가 엉덩이에 닿았다가 천천히 멀어졌다. 승건의 느릿한 움직임과 함께 살이 딸려 나갔다가 밀려드는 감각이 이상했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그곳이 승건의 것을 꽉 물고 있다는 게 머릿속으로 그려졌다.

몸을 뒤틀고 싶어도 승건에게 붙잡혀 있는 상태여서 그럴 수가 없었다. 안쪽 깊숙한 곳을 천천히 쳐올리는 것을 온전히 받아낼 수밖에 없었다. 평소와 다른 이질적인 감각은 곧 몸서리치는 쾌락으로 변해갔다. 느지막이 몰아붙여질 때보다 지금이 더 힘들었다.

“허윽…….”

소름 돋는 자극에 채훈은 결국 오른손으로 탁자를 짚었다. 밀어붙이는 힘에 중심을 잃고 다리가 휘청거렸다.

질퍽하게 살이 부딪히는 소리가 점점 격렬하게 빨라졌다. 채훈은 넘쳐나는 쾌감을 참지 못하고 허리를 흔들면서 허덕였다.

“아, 으. 이제…….”

절정이 다가왔다. 채훈은 흐트러진 샤워 가운 사이로 꼿꼿이 솟아오른 자신의 성기를 붙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승건의 손에 의해 가로막혔다.

커다란 승건의 손이 성기를 꾹 감싸 쥐고는 사정을 강제로 막았다.

“조금만 더 참아.”

귓가에 속삭이는 거친 숨소리와 함께 마치 쐐기라도 박아 넣는 듯 강한 삽입이 시작되었다. 승건이 찔러 넣을 때마다 몸속에서 전기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흘렀다. 눈앞이 하얗게 점멸하기를 반복했다.

“어서. 으. 응. 아, 앗.”

달뜬 신음을 내뱉은 채훈은 자신의 성기를 붙잡은 승건의 손을 긁으면서 해방을 재촉했다. 얼마나 흐느꼈는지 알 수 없는 순간이 되어서야 한계까지 박아 넣은 승건이 탄성을 터트리며 몸을 떨었다. 채훈도 겨우 절정에 이를 수 있었다.

채훈은 탁자를 짚은 채 허리를 숙여 거칠게 숨을 골랐다. 머리가 멍한 와중에 귀에 이명이 울렸다. 열이 훅 오른 얼굴에 땀이 맺힌 것이 이상하게 거슬렸다. 그리고 승건이 목 뒤에 입술을 대고 핥고 있는 것도 느껴졌다. 채훈은 허리에 감겨 있는 승건의 팔을 밀어내고 몸을 빼내려고 했다. 그러나 승건이 더 단단하게 붙잡아 왔다.

“이제 놔줘.”

“잠시만.”

승건이 목덜미의 닿아 있던 입술로 귀를 깨물었다. 그리고 가슴을 움켜쥔 손끝으로 유륜을 누르는 바람에 채훈은 가늘게 몸을 떨었다. 저도 모르게 아직도 품고 있는 승건의 성기를 꽉 조이고 말았다. 후희치고는 노골적인 애무가 무엇을 뜻하는지, 눈치 없이 모르고 싶어지는 순간이었다.

무엇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승건이 제대로 작정한 것 같았다.

“계속할 거면, 침대로 가.”

“침대?”

“다리에 힘이 없어.”

채훈은 민망했지만, 사실대로 말했다. 승건이 붙잡아주지 않고 있다면 힘없이 주저앉을 판이었다. 어깨를 핥고 빨던 승건이 소리 없이 웃는 것이 정말 온몸으로 느껴졌다. 그러면서 몸 안에 들어 있는 승건의 성기도 꿈틀거리며 커지는 것 같았다.

“쓰러지면 잡아줄게.”

“지금도 잡아주고 있어.”

“그러니까.”

승건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담겨 있었다. 채훈은 더욱 밀착해 오는 승건에게서 벗어나기를 포기했다.

그래……. 네 뜻대로 해라.

*

*

섹스는 그 자리에 선 채로 이어졌다. 다리가 제대로 풀린 채훈이 휘청거리고 나서야 침대로 자리를 옮겼다. 한 번 더 질펀하게 몸을 섞은 끝에 지쳐 쓰러진 채훈이 더 이상 못 한다고 으르렁거리고 나서야 승건이 떨어져 나갔다.

채훈은 그대로 잠드는 대신에 겨우겨우 몸을 움직여 욕실로 향했다. 두 번째 샤워를 재빨리 끝낸 채훈은 다시 승건에게 붙잡히기 전에 옷부터 입었다. 다리에 바지를 꿰고 셔츠에 팔을 넣을 때마다 몸이 삐걱거리고 후들거렸지만 아직은 그럭저럭 버틸 만했다.

코트까지 모두 다 입은 채훈은 문가에 서서 승건이 욕실에서 나오기를 기다렸다.

채 마르지 않은 머리를 털며 욕실을 나온 승건은 아까와 다른 파자마를 입고 있었다. 짙은 와인색 또한 그와 잘 어울렸다. 여전히 고급스러운 취향이었다. 그리고 섹스 타입은 다분히 변태스러웠다. 그것도 정력 넘치는 변태였다.

“벌써 옷을 다 입었어?”

“어.”

채훈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혹사를 당한 곳이 욱신거려서 웃어줄 수가 없었다.

“빠르네.”

“나 간다.”

“잠시만. 줄 게 있어.”

인사를 하고 돌아서려던 채훈은 멈칫했다. 줄 게 있다니. 뭐지?

“뭔데?”

“이거.”

승건이 침대 옆에 있는 협탁에서 하얀 봉투를 꺼내 내밀었다. 봉투를 받아 든 채훈은 손끝에서 느껴지는 딱딱한 감각에 안에 든 게 무엇인지 대충 짐작했다. 봉투를 열고 내용물을 꺼내자 신용카드가 한 장 나왔다.

“이걸 왜?”

“마지막 투자금까지 모두 18억 4,000만 원이었고, 남은 1억 6,000만 원은 네 통장에 입금했어.”

“……?!”

“월급 통장 말고 K은행의 통장이야. 세 명의 이름으로 5,000만 원씩 입금되었으니까 국세청 걱정은 하지 마.”

채훈은 어안이 벙벙했다. 사기당한 투자금은 이미 다 갚았다. 2개월이나 넘게 걸린 이유는 마지막 투자자가 기다린 동안의 이자와 함께 위로금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 잘 마무리할 수 있었다.

승건의 말대로 투자금을 갚는 데 18억 4,000만 원을 썼으니 1억 6,000만 원이 남는 건 맞았다. 갑자기 월급 통장에 1억 6,000만 원이 꽂히면 국세청의 의심을 받을 수도 있었다. 다른 통장으로 분산 입금하는 것은 현명한 일이었다.

하지만 채훈은 남은 돈을 받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었다.

“그거 안 줘도 돼.”

“20억을 계약했어.”

“그럼 이건?”

채훈은 손에 쥐고 있는 신용카드를 흔들어 보였다. 1억 6,000만 원은 이해할 수 있는데 이건 뭔가 싶었다.

“내가 주는 거.”

“……?”

“보통은 카드를 준다고 하더군. 날 만나는 동안 그걸 써.”

그걸 쓰라는 승건의 목소리는 태연했다. 하지만 채훈은 수치스러움을 느끼며 얼굴을 굳혔다. 이미 20억을 대가로 승건을 만나고 있긴 했다. 그래도 그건 명분이라도 있었다. 신용카드는 정말로 자신이 몸을 팔고 있다는 증거 같아서 기분이 가라앉았다.

더 기분 나쁜 건, 승건이 아무 생각 없이 신용카드를 내밀었다는 것이었다.

“필요 없으니까 돌려줄게.”

채훈은 승건의 얼굴에 신용카드를 집어 던지는 대신에 침대 위에 살짝 올려두었다. 그런데 승건이 다시 신용카드를 집어 들고는 내밀었다.

“받아.”

“괜찮다니까. 이거 없어도 1억 6,000만 원 입금했다며. 그거 쓰면 돼.”

“그 돈이 남아날 것 같아?”

“뭐?”

“아직 빚이 남아 있잖아.”

승건의 냉정한 말에 채훈은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뼈를 맞는다는 게 이런 기분인가 싶을 정도로 승건은 제대로 핵심을 짚어냈다.

당장에 급한 건 막아냈지만 은행에서 받은 대출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가게와 본가를 담보로 빌린 것이라서 아직 시간적 여유가 있긴 했지만, 당장에 쓸 현금이 없었다. 만약에 사고라도 나거나 해서 큰돈이 필요해지면 결국 채훈이 돈을 내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돈을 어떻게 쓸지는 채훈의 선택이었다. 승건이 간섭할 게 아니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할 거야. 이거 없어도 괜찮아.”

“손목시계부터 사도록 해. 매번 휴대폰으로 시간 확인하는 거 보기 안 좋아.”

“야. 최승건.”

사람 속을 확 긁어대는 충고 아닌 충고였다. 채훈은 경고의 의미를 담아 승건의 이름을 불렀다. 채훈도 멋진 손목시계를 좋아했다. 그러나 자신이 멋진 손목시계를 꼭 차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승건은 그걸 강요했다.

“금속 알레르기가 있다는 거 알아. 알레르기를 안 일으키는 시계도 있으니까 그걸 사.”

채훈은 인상을 썼다. 자신이 금속 알레르기 때문에 시계를 못 차고 다니는 건 사실이었다. 고등학교 때 생일 선물을 받았다가 발진이 나서 고생을 했던 일이 있었다. 승건이 그걸 기억하고 있다는 게 놀라웠다.

그러나 권하는 방식이 나빴다. 권유도 강요도 아니고 숫제 명령이었다. 그러고도 승건은 뭘 잘못하고 있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필요 없다니까.”

“내가 주는 건 다 받아.”

“그게 무슨 소리야?”

“사용하고 말고는 네 마음대로 해. 정 싫으면 버려.”

채훈은 신용카드를 들이미는 승건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승건은 물러설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불법적이고 비도덕적인 요청은 아니었다. 누군가 신용카드를 쥐여주고는 알아서 쓰라고 하면 다들 좋아할 것이다. 다만 채훈에게는 그 누군가가 승건이라는 게 문제였다.

자존심이 상했다. 그리고 그걸 모르고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기만 하는 승건 때문에 속상하고 짜증 났다. 말이라도 곱게 하면 또 모르겠는데, 녀석의 화법은 사람 심장에 보이지 않는 칼을 푹푹 찔러대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자존심 때문에 싫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것 또한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자가당착에 빠진 채훈은 눈싸움을 그만두고는 승건에게서 신용카드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승건이 보는 앞에서 바로 신용카드를 반으로 부러뜨렸다. IC칩이 망가지게 한 번 더 구겼다.

승건이 놀란 표정을 짓다가 곧 얼굴을 굳히는 걸 보며 채훈은 승자가 된 느낌을 맛보았다.

“됐지? 받아서 내 마음대로 했으니까. 그럼, 나 이제 간다. 나오지 않아도 돼.”

구겨진 신용카드를 코트 주머니에 넣은 채훈은 할 말만 하고는 뒤돌아섰다. 승건은 그를 부르지도 붙잡지도 않았다.

신발을 신고 현관문을 나설 때까지 화를 꾹 참던 채훈은 등 뒤로 문이 닫히고 철컥거리며 락이 걸리는 소리가 나자마자 주먹을 쥐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짜증이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야밤이라 소리를 지를 수가 없었다.

“미친놈.”

채훈은 잇소리를 냈다. 승건과 별 마찰 없이 1년을 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게 바로 오늘 낮이었다. 그런데 채 하루도 지나기 전에 날을 세워 싸우고 말았다.

20억을 줬으면 됐지, 신용카드는 왜 주냐고.

제일 화가 나고 속상한 것은 무엇을 잘못했는지 승건이 모른다는 점이었다. 마치 자신이 그에게서 당연히 카드를 받아 시계를 사야 하는 것처럼 명령했다.

앞뒤 가리지 않고 일을 저질렀다는 자각은 있었다. 그래도 녀석이 보는 앞에서 신용카드를 구겨버린 건 정말 속 시원했다. 비위를 맞춰주지 않아도 된다고 한 것도, 신용카드를 마음대로 하라고 한 것도 승건이었다. 유치한 짓이었지만 후회는 하지 않았다.

“하아.”

채훈은 길게 숨을 들이쉬면서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킨 다음에 걸음을 옮겼다. 통장에 1억 6,000만 원이 꽂혀 있으니 사치스럽게 모범택시를 부르겠다고 마음먹었다.

* * *

일요일 늦은 저녁이었다. 동네 맛집으로 소문난 뒷고기 가게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빈틈없이 가득 찬 테이블의 한 자리를 차지한 채훈은 부지런히 손을 움직였다.

먹을 것을 좋아하는 채훈은 기왕에 먹을 거, 가능하면 맛도 좋고 보기도 좋은 것을 먹어야 한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었다. 시간과 돈이 되면 맛집을 찾아다니는 것이 작은 취미 생활이었다. 물론 주중이나 주말에 제 입맛에 맞는 요리를 직접 하는 것도 즐겼다.

다만 혼자 자취하면서 아쉬운 게 여럿 있었는데, 그중에 하나가 바로 불판에 고기를 구워 먹는 것이었다. 혼밥과 혼술을 하는 게 아무렇지도 않은 시대였지만 그래도 고기는 여럿이서 먹는 게 맛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채훈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외식 메이트인 서주명이 있었다.

채훈의 원룸에서 10분 떨어진 곳에 살고 있는 서주명과는 1개월에 한 번 정도 만나 고기를 굽는 사이였다. 식성이 비슷한 친구가 가까이서 살고 있는 것은 축복이었다.

“다 익었다. 이제 먹어.”

집게와 가위를 들고 열심히 고기를 굽던 채훈은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단면을 확인하고는 서주명에게 말했다. 저녁 대신 먹는 것이라서 고기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두 번째 판을 구울 때였다.

“너 말이야. 요새 연애해?”

서주명의 뜬금없는 질문에 소주를 마시던 채훈은 사레가 들고 말았다. 다행히 소주를 뿜어내지는 않았지만 역류 때문에 코와 목이 따가워서 몇 번이나 쿨럭거려야 했다. 겨우 진정하고 나서야 채훈은 반문할 수 있었다.

“뭐?”

“연애하냐고.”

“연애? 내가?”

“요즘 그렇잖아. 주말에 보기 힘들고, 만나자고 하면 선약 있다고 그러고, 이번에도 약속 잡았다가 갑자기 안 된다고 하면 그것밖에 없지.”

“그건 갑자기 병원에 일이 생겨서 그랬고.”

“말 돌리지 말고. 연애해? 아니면 왜 이렇게 얼굴 보기 힘들어?”

채훈은 잠시 망설였다. 연애는 하지 않지만 계약 때문에 섹스 파트너가 생겼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반사적으로 승건을 떠올린 채훈은 인상을 쓰려던 것을 겨우 참았다. 섹스 파트너께서 성격이 별로인 게 불행이었다.

“요새 바빠서 그래. 바빠서. 그리고 연애는 혼자 하냐? 연애고 뭐고 할 겨를이 없다.”

채훈은 일부러 한숨을 쉬며 연기했다. 연애는 하고 싶지만 시간이 없어서 한탄하는 것처럼 들리길 바랐다. 서주명은 궁금한 건 집요하게 캐묻는 성격이었다. 그런데 서주명이 픽 웃음을 흘렸다.

“그렇다고 하지 뭐.”

“말이 이상하다? 그렇다고 하지 뭐는 또 뭐냐?”

마치 다 알고 있는데 그냥 넘어가 주겠다는 태도에 채훈은 투덜거렸다. 그러나 싸울 의도는 없었다. 이렇게 넘어가 주면 좋았다.

“너무 대놓고 수상하거든.”

“아니거든.”

“그래. 믿어준다니까. 그거 말고 물어볼 건 따로 있는데. 어제 반찬 가지러 갔다가, 너네 집 이야기 들었어. 그런 일이 있으면 말을 해줘야지. 까맣게 모르고 있었잖아.”

서주명이 애인이 생겼냐는 질문보다 더 곤란한 주제를 꺼내는 바람에 채훈은 살짝 굳었다. 형이 사기를 당해서 큰 빚이 생겼다는 사실은 친구들에게 말하지 못했다. 승건 덕분에 빨리 일이 해결되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는 돈이 필요한 일이어서 친구들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기도 했었다.

“그냥 좋은 일도 아니라서. 그런데 어떻게 알았냐?”

“어떻게 알기는. 어머니들끼리 같이 계 하시잖아.”

“아.”

채훈은 어떻게 된 일인지 대충 짐작했다. 서주명과는 어려서부터 같은 동네에서 살았다. 그리고 어머니들끼리는 같은 동네 계를 하면서 2개월에 한 번씩 만나고 있었다. 거기서 이야기가 전해진 것 같았다.

“진짜 섭섭하다. 좋은 일이 아니니까 더 알려줘야 하는 거 아냐? 전에 말한 것 같은데, 나도 아는 경찰이랑 변호사 많아. 같이 머리 맞대고 고민해 줄 수 있다고. 그리고 다른 애들한테는 비밀로 해도 나한테는 말했어야지.”

섭섭하다는 티를 팍팍 내는 서주명에게 채훈이 할 말은 없었다. 서주명과는 오랜 친구였다. 같은 골목에 살면서 유치원부터,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모두 같은 학교에 다녔다. 성인이 된 지금은 10분 거리에서 살았다. 채훈이 게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친구이기도 했다. 확실히 섭섭할 만했다. 만약 반대로 서주명이 그랬으면 채훈도 섭섭했을 것이다.

“그때 너무 황망해서 그랬어. 액수도 너무 컸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래도 괜찮아. 이제 다 해결됐어.”

“아, 그래. 그거. 진짜 돈 많은 회장님이라고 해도 아주 조건 없이 그 많은 돈을 갚아준 거 맞아?”

“응.”

“그게 말이 돼? 또 다른 사기꾼 아니야?”

“말이 돼. 그런 드라마 같은 일이 진짜로 일어나기도 하더라.”

약간의 각색을 했지만 승건이 섹스에 대한 대가로 20억을 제시한 건 사실이었다. 그건 은혜 갚는 부자 할아버지만큼이나 비현실적인 일이지만 실제로 일어났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너 뭔가 숨기는 거 아니지? 너 그런 거 잘 숨기잖아.”

뭔가 숨기냐는 서주명의 물음에 채훈은 내심 뜨끔했지만 태연히 고기를 우물우물 씹어 삼키고는 소주도 한 모금 마셨다. 서주명의 말대로 자신은 이런 것을 잘 숨겼다.

“18억이 우리한테나 큰돈이지 진짜 부자들에게는 별거 아닐걸. 너도 생각해 봐. 너한테 1,000만 원이 있어. 그리고 생명의 은인이 18만 원이 없어서 빚쟁이한테 시달리고 있고. 그럼 18만 원 줄 수 있을까? 없을까?”

“그 정도야 줄 수 있지. 하지만 돈 단위가 다르잖아. 만이 아니라 억이야. 억.”

“그 할아버지가 찐부자라는 거지. 18억이 18만 원이랑 같을 정도로.”

채훈은 승건이 얼마나 부자인지 몰랐다. 그래도 20억을 20억쯤이라고 할 정도면 1,000억 정도는 있지 않을까 싶었다. 태화 그룹의 대표이사라면 더 많을지도 몰랐다.

어쨌든 세상에는 부자도 많고 괴짜도 많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서주명은 납득하는 대신에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안 되겠다. 그 할아버지 휴대폰 번호는 있지? 명함을 받았다며? 그거나 좀 알려줘.”

“그걸 왜? 뭐 하려고?”

“뒤 좀 캐보려고. 요새 번호 뒤지면 다 나와.”

“하지 마. 그런 거. 무슨 일 일어날 줄 알고 그래? 지난 주말에 돈 다 갚고, 더 이상 연락 안 하기로 했단 말이야. 번호도 다 지웠어. 잘못해서 문제 생기는 건 싫어. 그 할아버지가 정체 밝히기 싫어서 대리인이 나섰는데, 왜 뒤지려고 해. 그냥 둬.”

이것저것 둘러대다 보니 거짓말이 점점 불어났지만 어쩔 수 없었다. IT기업에 다니는 서주명은 컴퓨터에 능숙했다. 한끝만 잘못하면 세계적인 해커가 될 수 있다고 제 입으로 말하던 녀석이 작정하고 뒤를 캔다고 생각하면 아찔했다.

채훈이 완강하게 거절하자 서주명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식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아, 진짜 영문을 모르겠네. 세상에 괴짜가 많다고 해도. 모르겠다. 그래도 다 갚았다니 다행이네. 다른 거 요구하는 거 없지? 계약서나 보증서 같은 거 안 썼고? 너 모르게 아주머니께서 썼을 수도 있으니까 확인해 봐. 지금 당장. 얼른.”

“괜찮다니까.”

“내가 확인해야겠다니까. 아니면 아주머니 찾아가자.”

이미 다 확인했다고 해도 돈 문제에 깐깐한 서주명은 한 번 더 확인하라고 채근했다. 결국 채훈은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그 뒤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을 서주명에게 들려주었다.

그사이에 불판이 비워졌다. 고기를 더 추가하고 밥과 된장찌개를 시킬 것인지, 아니면 2차를 할 것인지 고민할 때였다. 채훈은 승건에게서 메시지를 받았다.

[오늘. 9시.]

메시지를 확인하자마자 채훈은 승건을 향해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수요일에 그렇게 부딪히고 난 후, 승건에게서는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았었다. 보통 수요일과 목요일에 주말 스케줄이 잡혔기 때문에 이번에는 넘어가는 건가 싶었다. 그런데 두 시간 후에 보자는 메시지가 오다니, 재수가 없었다.

계약서에는 주말 중에 하루라고 했으니 가야 하는 게 맞았다. 하지만 짜증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미안한데, 나 먼저 가야겠어.”

“혼자 할 수 없다고 하더니, 둘이서 하려고?”

채훈은 귀신같은 눈치를 자랑하는 서주명에게 사실대로 말하지 못하는 것이 억울했다. 휴대폰을 들여다보다가 가야 한다고 하니 이상할 만도 했다. 그러나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그런 거 아니야.”

“그래. 비밀이라 이거지. 알았어.”

채훈은 한쪽 눈을 찡긋하며 비밀로 해주겠다는 서주명이 오해하게 내버려 두었다. 여기서 부정해 봐야 어차피 통하지 않을 게 뻔했다.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동생인 강영환에게서 전화가 왔다. 원룸에 왔는데 형은 언제 오느냐고 물었다. 치킨 먹고 싶다는 강영환에게 채훈은 늦을 거라고 답해 주었다.

왕복하는 데 걸리는 시간도 상당하지만 승건과 만나면 간단하게 끝나는 법이 없었다. 자정은 넘을 거라고 하자 강영환이 치킨은 혼자 먹으면 맛없다며 투덜거리고는 통화를 끊었다.

왠지 부루퉁한 강영환의 목소리에 채훈은 찜찜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채훈이 독립을 하고 혼자 살기 시작한 것이 4년째였다. 강영환이 자취방을 찾아와 사고를 친 적이 여러 번이었다. 그나마 요즘은 철이 조금 든 것 같으니 그냥 믿을 수밖에 없었다.

“동생이야?”

통화를 듣고 있던 서주명이 물었다. 채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치킨 먹자네.”

“오, 우리 채훈이. 인기가 많아.”

유쾌한 서주명의 말에 채훈은 그냥 웃어넘겼다. 이놈에게 1년 동안 승건의 존재를 숨기는 것은 힘든 일이 될 것 같았다.

*

*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칼을 쓸어 넘긴 채훈은 검은색으로 칠한 승건의 아파트 현관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발밑에 생기는 작은 물웅덩이를 보며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이런 날도 있는 법이었다. 타이밍이 한 번 어긋난 것으로 연쇄작용이 일어나더니 모든 게 엉망으로 뒤틀리는 날 말이다.

고깃집 주인이 결제를 잘못하는 바람에 카운터 앞에서 시간을 잡아먹은 것은 별일이 아니었다. 승건의 집으로 향하던 택시가 아주 가벼운 접촉사고가 난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겨우 새로운 택시를 잡아타고 8시에 맞춰 승건의 아파트에 도착한 것은 운이 좋았다. 그러나 아파트 현관문이 열리지 않았을 때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9층까지 왔으니 카드키는 멀쩡하다는 소리였다. 그렇다면 도어락 자체가 고장 났거나 비밀번호가 바뀌었다는 추측을 할 수 있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안으로 들어갈 수 없음을 판단한 채훈은 승건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현관문이 열리지 않아 1층 카페에서 기다린다는 것이었다.

채훈은 세 시간을 기다렸다. 하지만 승건에게서는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전화를 했지만 휴대폰은 꺼져 있었다. 심 실장의 휴대폰은 신호는 갔지만 받지를 않았다.

처음에는 짜증 났지만 나중에는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채훈은 승건이 지금 무슨 일을 하는지 몰랐다. 하지만 길거리에서 납치를 당한 전적이 있는 승건의 휴대폰이 꺼져 있는 것이 불길하게 느껴졌다. 유일하게 승건의 행적을 확인할 수 있는 심정민이 전화를 받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태화 그룹의 대표이사쯤 되면 사고가 났을 때 인터넷 기사 하나쯤은 나지 않을까 하고 휴대폰 배터리가 다 닳을 때까지 뒤졌다. 그러다가 결국 카페의 영업시간이 다 되고 말았다.

결국 기다리다 지친 채훈은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승건에게 돌아간다고 메시지를 보내고는 카페를 나왔다.

택시는 바로 잡히지 않았다. 콜도 마찬가지였다. 설상가상으로 오후부터 흐리던 하늘에서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다. 예상치 못한 폭우에 채훈은 폭삭 젖고 말았다.

채훈은 결국 택시를 포기했다. 편의점에서 우산을 사고는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데, 그제야 승건에게서 전화가 왔다.

다시 돌아오라는 소리에 채훈은 이를 갈았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까마득했기 때문에 승건의 옷을 빌려 입을 생각을 하며 발걸음을 되돌렸다.

검은 문 앞에 서서 지난 다섯 시간을 복기하던 채훈은 자신의 꼴이 우스웠다. 몇 시간이고 기다리다가 결국 녀석이 부르면 싫다는 소리 못 하고 냉큼 달려와야 했다.

채훈은 부정적인 생각을 털어냈다. 그냥 운이 나쁜 것뿐이었다. 승건이 아무런 사건 사고 없이 무사한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현관 벨을 눌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락이 풀리는 소리가 울렸다.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는데, 당연히 승건은 마중 나와 있지 않았다. 승건을 불러 수건을 달라고 할까 잠시 망설이던 채훈은 에라 모르겠다 싶은 마음으로 과감하게 젖은 양말로 바닥을 디뎠다.

“나 왔어.”

일부러 큰 소리를 내며 거실 쪽에 붙은 욕실로 향했다. 그 때 막 통화를 하며 침실에서 나오는 승건과 마주쳤다. 그는 아직 옷을 갈아입지 않은 상태였다.

“그것부터 정리하……죠.”

깔끔하게 빗어 넘긴 머리칼을 신경질적으로 쓸어 넘기던 승건이 채훈을 보자마자 멈칫했다. 지금 채훈의 모습은 물에 빠진 생쥐라는 관용구가 잘 어울리는 상태였다. 흠뻑 젖은 머리칼과 옷에서는 물이 뚝뚝 떨어졌다.

퍽 처량한 몰골이었다. 그리고 그건 채훈 본인 역시 잘 알고 있었다. 놀란 게 분명한 승건의 시선에 난감하고 민망하고 짜증 났다. 뭔가 울컥 솟아오르려는 것을 꾹 눌러 참고 욕실로 가려고 하는데 승건이 그 앞을 막았다.

“나머지는 내일 이야기하죠. 끊겠습니다. 강채훈. 왜 이렇게 젖었어?”

급하게 통화를 끝낸 승건이 다급하게 물었다. 채훈은 크게 숨을 들이쉬고는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돌아가는 길에 갑자기 비가 와서 그래. 택시가 안 잡히더라고. 너는? 왜 휴대폰이 꺼져 있었던 거야? 현관문 비밀번호, 바뀐 거 맞지?”

“비밀번호는 정기적으로 바뀌는데, 전달받았는 줄 알았어. 휴대폰이 꺼진 건 배터리가 방전되어서 그렇고. 아니, 그것보다 먼저 씻어. 감기 걸려.”

“심 실장님은? 전화를 안 받으시던데.”

채훈은 승건이 씻으라는 말을 무시했다. 열이 오른 몸이 한기로 떨리는 것이 감기를 예고하고 있었지만 샤워는 나중이었다. 그 전에 확인하고 싶은 게 먼저 있었다.

“휴대폰을 잃어버리셨어. 베이징 공항에서. 늦은 건 비행기가 기체 이상으로 회항을 해버렸기 때문이고.”

“…….”

승건의 설명에 채훈은 할 말을 잃었다. 정말 운이 나쁜 것이었다. 세 시간이나 기다리고, 녀석이 잘못되었을까 봐 걱정하고, 돌아가는 길에 비 벼락을 맞아 흠뻑 젖은 것이 모두 나쁜 우연이 겹치고 겹친 결과였다.

어렵지 않게 납득은 했지만 억울함과 짜증이 가시는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이 녀석이 오늘 당장 만나자고 불러내지만 않았더라면 이런 일은 아예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갈 곳 없던 원망이 승건을 향했다.

모든 원흉이 승건이라고 결론을 내리려던 채훈은 길게 숨을 내쉬며 진정했다. 승건의 잘못도 아닌데 이유를 따지는 건 꼴사나운 짓이었다.

“씻고 올게.”

궁금한 건 풀렸고, 원망스러운 마음은 가라앉혔다. 따질 기운도 없었던 채훈은 그대로 욕실로 향했다.

젖은 옷을 벗고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고 나서야 겨우 살 것 같았다.

한참이나 샤워기 아래에 서 있던 채훈은 자신이 이렇게나 운이 나쁜 인간이던가 하고 한탄했다.

과거를 되짚어봐도 별건 없었다. 수능을 망친 게 가장 큰 시련이었고, 그것 말고는 대체로 평범했다. 박광호의 사수를 맡은 게 최근 가장 큰 지뢰였다.

진상을 만나 고생하는 것쯤이야 흔히 있는 일이었다. 형이 사기를 당한 것도 승건을 만난 덕분에 쉽게 해결되었다. 어쩌면 어렵게 풀려야 할 일이 쉽게 해결되는 바람에 이런 반작용이 생기는 것일 수도 있었다.

신의 존재는 믿지 않는 채훈이었지만, 인과응보나 기적은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냉정한 현대인으로서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20억에 대한 부족한 대가를 채우기 위해 이렇게 인내심을 시험받나 싶었다.

어쩌면 상대가 승건이라서 그럴 수도 있었다. 감정이 얽히지 않는 만남을 원하는, 속을 알 수 없는 동창이, 무려 갑을관계에서 갑 님이 되어버렸으니까 말이다.

채훈은 엉뚱하게 흘러가는 생각을 털어냈다. 이제 와서 못 하겠다고는 할 수 없으니 적당히 맞춰가는 게 최선이었다.

샤워를 끝내고 머리를 대충 말린 채훈은 젖은 옷을 가지런히 접어두었다. 겉옷은 물론이고 속옷도 당장 입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세탁을 한다 하더라도 돌아갈 때까지 마를지는 미지수였다. 아무래도 승건의 옷을 빌려 입어야 할 것 같았다.

샤워 가운을 단단히 여민 채훈은 거실로 나갔다. 승건이 거실 베란다 쪽을 바라보며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채훈은 현관 쪽을 확인했다. 현관에서부터 자신이 만들었던 젖은 발자국이 사라지고 없었다.

“닦았네.”

채훈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턱끝으로 사람을 부려먹게 생긴 승건은 의외로 제 손으로 뭔가를 많이 했다. 기본적으로 어질러져 있는 걸 가만히 두고 보는 성격이 아니었다.

승건의 통화 내용을 듣지 않기 위해 채훈은 침실로 향했다.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그간의 메시지를 확인하고 있는데 승건이 나타났다. 그는 여전히 정장을 입은 채였다. 채훈이 기억하기로는 승건이 관계하기 전에 씻지 않은 것은 동창회 날뿐이었다. 승건은 생김새만큼이나 청결에 신경 쓰는 느낌으로, 꽤나 깔끔 떠는 듯했다.

“옷이 다 젖어서, 집에 돌아갈 때 네 옷을 좀 빌려야 할 것 같아. 빌려줄 수 있지?”

옷을 빌려달라는 말에 승건은 즉답하지 않았다. 굳은 얼굴로 묘하게 인상을 썼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 모양새였다. 설마 빌려주기 싫은 건가?

“승건아?”

“줄 게 있어.”

“……?”

줄 게 있다는 말에 채훈은 반사적으로 신용카드를 떠올렸다. 설마 그렇게 싸우고도 다시 신용카드를 줄까 싶었다.

채훈은 승건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았다. 그가 테이블 위에 쌓여 있는 크지 않는 종이가방 몇 개 중에 하나를 들고 와 채훈에게 건넸다. 얼결에 종이가방을 받은 채훈은 이게 뭐냐고 물어보았다.

“이거 뭐야?”

“손목시계.”

“―?!”

“알레르기 안 일으키는 거야. 네가 좋아할 만한 스타일로 골랐는데, 마음에 드는 게 없으면 말해.”

조금은 멍하던 채훈은 손목시계라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온갖 생각 생각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이놈은 왜 이렇게 손목시계에 집착하는 거야? 지난번에 카드 부러뜨렸다고 현물을 가지고 온 건가? 종이가방이 도대체 몇 개야? 내가 좋아할 만한 스타일을 알아?

우루루 떠오르는 의문 중에 소리가 되어 나온 것은 단 하나뿐이었다.

“설마, 이것 때문에 오늘 보자고 한 건 아니겠지?”

설마 싶은 마음에 채훈의 목소리도 표정도 날카로웠다.

“이것 때문만은 아니지. 그런데 딴 걸 하자고 하면 물어뜯길 것 같군.”

“진짜 그럴 것 같다.”

“버리든 부수든 마음대로 해. 단, 이번에는 내 눈앞에서 하지 마.”

무엇이라고 정의를 내리기 힘든 희미한 감정이 담긴, 그러나 듣기 좋은 목소리로 한 승건의 말은 이번에도 명령조였다.

채훈이 침대에 앉아 있는 탓에 승건을 올려다볼 수밖에 없는 구도가 더욱 상황을 묘하게 만들었다.

채훈은 무표정한 승건의 얼굴을 향해 욕을 하지 않으려고 인내심을 쥐어짰다. 설마설마했는데 신용카드 부쉈다고 현물 시계를 가져와서 시위를 하는 게 분명했다.

네가 애냐?

채훈은 욱하고 치밀어 오르는 울화를 눌렀다. 자신이 알고 있던 승건은 또래들과 달리 어른스러운 녀석이었다. 분위기에 휩쓸리기보다는 한 발 물러서 지켜보았다. 애늙은이가 아니냐는 소리도 들었다.

물론 고집스러운 면도 없지 않아 있었다. 한라산을 등반하다가 발을 삐어놓고도 내색하지 않은 채 마지막까지 완주했다. 그때는 참을성이 강한 면이 너무 멋지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독한 거였다.

녀석이야 제 성격대로 손목시계를 줄 생각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채훈은 지난 다섯 시간 동안 한 고생이 손목시계 때문이란 사실에 빡쳤다. 그냥 운이 나빴던 거라고 넘어가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욕 나온다. 진짜.”

“욕해도 돼.”

한탄을 했더니 승건이 태연히 욕을 하라고 했다. 채훈은 한숨을 쉬며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화를 가라앉히려는 행동이지만 썩 효과는 없었다.

“내가 왜 화가 난 건지 모르지? 아니, 대답하지 마. 안다고 하면 더 화나니까. 네 말대로 더 있었다가는 진짜 물어버릴 테니까.”

“그깟 시계가 뭐라고 날을 세우는지 모르겠다. 내가 주는 걸 거부하지 마. 그게 계약이니까.”

분노로 얼굴이 구겨지려는 것을 채훈은 가까스로 참았다. 기어코 계약이라는 단어까지 나왔다. 그런 계약을 했다. 승건이 내민 것은 범죄도 비도덕적인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받아야 했다.

채훈은 진심으로 화가 나면 냉정해지는 스타일이었다. 큰 소리를 내기보다는 한 발 물러났다. 아무리 머리가 차가워졌다고 해도 이성적이지 못한 상태에서 험한 말을 해버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승건과 대화가 통하지 않는 것에 대한 체념도 있었다.

“다른 볼일은 없지? 옷이나 줘. 돌아가게.”

채훈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차분하게 말했다. 키 차이가 나서 승건을 여전히 살짝 올려다봐야 하는 것조차 짜증 났다.

승건이 왜 감정이 얽히지 않아야 한다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냥 웃으면서 고맙다고 하면 그만이었는데, 욱해서 치받았더니 이렇게 되고 말았다. 아직 9개월은 더 지속되어야 하는 관계였다. 채훈은 바닥에 납작 눌러놓은 자존심을 한 번 더 꾸욱 밟았다.

*

*

승건은 애매하게 인상을 썼지만 별말 없이 옷을 빌려주었다. 침묵 속에서 옷을 갈아입은 채훈은 일곱 개의 종이가방과 젖은 옷, 그리고 우산까지 야무지게 챙겨 들고는 승건의 아파트를 나섰다.

비는 여전히 내렸지만 다행히 출발하기 전에 콜택시가 잡혔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채훈은 운 없는 하루와 승건과의 관계, 그리고 푹신한 침대를 번갈아 가며 떠올렸다. 원룸에 도착하자마자 침대에 쓰러져 잠들 생각이었다.

그런데 채훈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엉망이 된 원룸이었다.

테이블 위에는 먹다 남은 치킨과 족발뼈가 굴러다녔다. 맥주캔도 십수 개가 바닥에 찌그러져 있었다. 절대 강영환이 혼자 먹을 양이 아니었다. 채훈은 혹시나 싶어 복층으로 올라갔다.

역시나 침대가 엉망이었다. 시트가 잔뜩 구겨지고 체액으로 젖은 것이, 여기서 섹스를 했다는 흔적이 가득했다.

“돌았어.”

강영환이 승건의 원룸을 어질러놓고 사라진 적은 몇 번 있었다. 어설프게 치우는 시늉만 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잔소리를 하기는 했지만 나아질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건 정도를 넘었다.

욕이 절로 나왔다. 채훈은 원룸이 어질러진 것보다 강영환이 사과도 하지 않고 도망친 것이 더 괘씸했다. 이제 어린애도 아닌데 자신이 저지른 일을 책임지지도 못하는 새끼 때문에 머리끝까지 열이 올랐다.

채훈은 당장에 강영환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휴대폰은 꺼져 있었다. 지금 당장 강영환을 붙잡을 재간은 없었다.

채훈은 뻗치는 분노를 억누르고 방을 치우기 시작했다. 편의점까지 가서 대용량 쓰레기봉투를 사 와서 시트와 이불을 몽땅 넣었다. 먹다 남은 음식들도 모두 쓰레기통행이었다. 침대 매트리스에 탈취제를 잔뜩 뿌리고 손님용 이불을 바닥에 깔고 나서야 채훈은 겨우 앉아 쉴 수 있었다.

“오늘따라 되는 일이 없네.”

한탄을 내뱉은 채훈은 이마에 손을 올렸다. 비를 맞았기 때문인지, 아니면 씩씩거리며 움직였기 때문인지 머리에 열이 올랐다.

해열제라도 먹어야 하나 싶어 비상약 가방을 뒤지다가 약이 다 떨어졌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쓰레기봉투를 사러 편의점에 갔을 때 살 걸 하고 후회했지만, 다시 갈 기운이 없어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러다가 현관 입구 쪽에 내려놓았던 종이가방이 눈에 들어왔다. 옷은 모두 세탁기에 집어넣었고 이제 남은 것은 승건에게서 받은 종이가방뿐이었다.

채훈은 청소를 하는 동안 잊고 있었던 승건을 떠올렸다. 머리가 차가워지고 흥분이 가라앉자 도대체 승건이 무슨 생각인지가 궁금해졌다.

누군가는 타인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다만 그동안 승건이 던진 작은 단서들로 몇 가지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상대가 싫어하는 티를 낸다면, 화를 낸다면, 상식적으로 배려하는 게 보통이었다. 그런데 승건이 그러지 않는 것은 자신에게 그런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아니면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제 의견을 관철시키는 게 당연한 삶을 살아왔기 때문인지도.

그리고 그건 강영환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가족이라고 해도, 상대가 싫어할 게 뻔한 일을 하는 것은 상대를 배려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는 소리였다.

어떤 것이든 다 최악이었다. 이럴 때가 멘탈이 박살 나는 순간이었다.

“이게 뭐라고.”

채훈은 한숨을 삼켰다. 운 나쁜 일이 겹치고 겹쳐서 일어나다 보니 생각이 안 좋은 쪽으로만 흘렀다. 평소라면 그냥 재수 없다고 넘어갔을 일인데, 오늘따라 더 아파서 우울해졌다.

특히 승건과의 일이 그랬다. 강영환이야 내일이라도 당장 한바탕 싸울 수가 있는데, 승건과는 그럴 수가 없었다.

생각해 보면 승건이 신용카드를 내밀었을 때, 비즈니스적인 미소를 지으면서 받았어야 했다. 그러고는 승건이 없는 곳에서 박살 냈으면 그만이었다.

채훈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종이가방을 챙겨 테이블 위에 내용물을 꺼내놓았다.

금색과 검은색, 혹은 빨간색으로 된 종이상자의 크기는 제각각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 있는 시계상자의 재질 역시 가죽과 벨벳으로 다양했다.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 고급스럽다는 것일까.

얼마나 대단한 손목시계일까 싶어서, 제일 크고 비쌀 것 같은 벨벳상자 뚜껑을 열었다.

반짝거리는 손목시계는 누가 봐도 고급스럽게 생겼다. 갈색 가죽밴드에 하얀 시계판, 그리고 금장이 과하지 않은 디자인이었다. 채훈은 몇 개 더 열어보았다. 모두 화려한 것보다는 단순한 걸 좋아하는 자신의 취향이었다.

“하아…….”

그래서 더 한숨이 나왔다. 그냥 선물이라고 내밀었다면 손목에 한 번 차봤을 것 같았다. 승건이 놈이 말만 제대로 했으면 일이 이렇게나 꼬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숨을 한 번 더 내쉰 채훈은 불빛 아래에서 반짝거리는 시계를 노려보았다.

“비싼 거겠지?”

승건이 고른 것이라면 비쌀 것 같았다. 갑자기 가격이 궁금해진 채훈은 휴대폰을 켜고 검색창에 브랜드 이름을 적었다. 손목시계에 관심이 없어서 대충 브랜드 이름 정도만 알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들어도 대부분 한 귀로 듣고는 흘려버렸다.

영문으로 된 브랜드명을 검색하자마자 사진과 함께 가격표가 주르륵 떴다. 채훈은 저도 모르게 눈을 몇 번 깜빡거려야 했다. 가격대가 최소 일곱 자리였다. 상자에 든 것과 같은 디자인은 찾을 수가 없었지만, 대부분 500만 원 전후였다.

“세상에…….”

남자 손목시계가 비싸다는 소리를 듣기는 했다. 박광호의 것도 비싼 거라고 들었지만, 그래도 막상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니까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채훈은 다른 브랜드도 하나 검색했다. 이쪽은 더 비쌌다. 기본이 2,000만 원대였다.

더 이상의 검색을 포기한 채훈은 복잡한 기분으로 존재감을 뽐내는 시계들이 보이지 않게 뚜껑을 덮어버렸다.

이 비싼 것들을 마음대로 하라는 승건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싶어졌다.

“미친…….”

승건을 지칭하는 단어가 미친놈으로 고정될 것 같아서 채훈은 말을 아꼈다.

마음 같아서야 시계를 버리거나 팔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비쌌다. 채훈은 상식인이었다. 아무리 짜증 나고 화가 났어도 수천만 원을 공중으로 날릴 배짱은 없었다.

“이게 뭐라고.”

한숨을 푹푹 내쉰 채훈은 열이 오른 얼굴을 마구 문질렀다. 이런 관계는 처음이었고, 이렇게 답 없는 유치한 싸움을 한 것은 오랜만이었다. 제멋대로 구는 승건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갈피도 잡히지 않았다.

고교 동창이기는 해도 둘은 친구가 아니었다. 정확히는 계약으로 종속된 관계였다. 감정이 얽히지 말아야 한다고 했으니 더더욱 그랬다.

“결국 비즈니스라 이거지.”

비즈니스라는 건 시작할 때부터 알았다. 그저 별문제 없이 만나다 보니 경계가 허물어진 모양이었다. 비즈니스라고 몇 번이고 되뇐 채훈은 박스를 정리해 붙박이장에 넣어두었다.

벌써 새벽 3시가 다 되었다. 내일을 위해 채훈은 알람을 몇 개 더 맞춰두고는 손님용 이불을 챙겨 자리에 누웠다. 승건도 강영환도 머릿속에서 밀어내고는 눈을 감아 잠을 청했다.

긴 하루의 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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