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거래】
넓은 거실은 화사한 꽃이 핀 것처럼 꾸며져 있었다. 은은한 펄이 반짝이는 섬세한 꽃무늬가 그려진 크림색 벽지, 날개를 펼친 카나리아 그림, 하늘거리는 커튼, 그리고 거실 곳곳을 장식한 장미가 우아함을 더했다.
색연필로 세밀하게 그려진 카나리아 그림을 한참이나 들여다보고 있던 채훈은 재킷 호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8시 32분. 아직 9시가 되려면 한참이나 남았다.
“너무 서둘렀어.”
채훈은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승건과 만나기로 한 시간은 9시였다. 지난번처럼 허둥거리지 않기 위해 채훈은 40분 먼저 H호텔 방갈로에 도착했다.
늦지 않으려고 서두른 것까지는 좋았다. 다만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리려니 속이 바짝 탔다.
마치 드라마나 소설 속의 이야기처럼 위기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돈을 받고 자신을 팔아야 했다.
승건의 제안을 떠올려보면 그다지 나쁜 조건은 아니었다. 1년 동안 일주일에 한두 번 만나는 조건으로 20억이었다. 평생 월급을 쓰지 않고 모아도 손에 쥘 수 없는 거금을 받는 대가치고는 너무 손쉬웠다. 그저 자존심만 상할 뿐이었다.
아니, 자존심은 이미 그에게 연락할 때 몽땅 버렸다. 하지만 직접 얼굴을 맞대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아직도 제안이 유효하냐는 메시지에 승건은 오래 지나지 않아 답장을 주었다. 그는 무슨 일이냐고 묻지 않았다. 그저 언제 만나는 게 좋겠냐고 물었을 뿐이었다.
승건은 바쁘다며 주말이 어떻겠냐고 했지만 채훈은 그럴 수가 없었다. 한시가 급했다. 결국 주중에 늦게 약속이 잡혔다.
승건이 잠시 빌렸다는 주상복합 건물은 내부 인테리어 때문에 수리 중이랬다. 그래서 조용히 이야기할 수 있는 호텔 방갈로가 약속 장소가 되었다.
채훈은 H호텔의 뒷산자락에 이런 건물이 있는지 처음 알았다. 방갈로는 호텔 객실이라기보다는 개인 별장처럼 꾸며져 있었다. 거실 옆에는 커다란 침실이 자리했다.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뻔했다.
반사적으로 문이 열려 있는 침실 쪽을 바라보던 채훈은 머리를 휘휘 내저었다. 자존심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 일어날 일 때문에 긴장했던 모양이었다.
지잉.
침실 문을 닫아야겠다고 걸음을 옮기려는데 재킷 안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승건이었다. 채훈은 길게 숨을 들이쉰 다음에 통화 버튼을 밀었다.
“여보세요?”
―어디야? 도착했어?
“응. 방갈로에 있어. 왜?”
―미안한데, 오늘 약속은 취소해야겠어. 갑자기 일이 생겨서 붙잡혔어.
갑자기 일이 생길 수는 있었다. 하지만 채훈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오래 걸려? 아주 늦는 게 아니라면, 아니, 늦는다고 해도 기다릴 게. 너만 괜찮다면 만나자.”
―자정은 넘을 거야.
“괜찮아. 내가 좀 급해서 그래.”
채훈은 숨길 것 없이 솔직하게 말했다.
강수찬의 승용차 블랙박스에는 칼치기를 한 차량의 번호가 선명하게 찍혔다. 하지만 경찰의 말로는 도난 차량이라서 범인을 특정하려면 시간이 걸릴 거라고 했다.
윤 사장의 위협은 진짜였다. 강수찬은 분통을 터트렸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조미혜는 겁에 질렸고, 강영환은 친구 집에서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감당할 수 없는 위기에 가족들은 무력해졌다.
승건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은 쉬운 길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 되고 말았다. 윤 사장이 언제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가능하면 오늘 승건을 만나 담판을 지어야 했다.
―알았어. 그럼 거기서 보자.
“어, 응.”
통화는 간단하게 끝났다. 채훈은 한숨을 쉬며 거실 한가운데를 차지한 소파에 앉았다. 하얀 가죽으로 마감한 커다란 소파는 몸이 푹 꺼질 정도로 쿠션감이 좋았다.
“자정이 지나서란 말이지.”
이제 겨우 9시도 되지 않았다. 승건을 만나려면 세 시간이나 넘게 기다려야 했다. 시간이 한참 남았다고 생각하자 긴장이 훅 풀렸다.
“밥 먹고 올걸.”
한참이나 멍하게 있던 채훈은 배를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저녁이 훌쩍 지난 약속이었지만 뭘 먹을 기분이 아니었고 입맛도 없어서 저녁을 건너뛰었다. 그런데 긴장이 풀리니까 허한 속이 쓰리기 시작했다.
호텔 서비스로 뭘 시켜 먹는 것은 아무래도 부담스러웠다. 시간이 있으니까 밖으로 나가서 김밥이라도 사 먹는 게 괜찮을 것 같았지만 그건 또 귀찮았다.
푹신한 소파에 앉아 있자니 몸이 늘어졌다. 동생을 친구네 집에 데려다주고, 형이 갈아입을 옷과 필요한 물건을 챙겨 병원에 갔다가 집에 돌아오니까 새벽 2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몇 시간 자지 못하고 출근했더니 이제 와 졸음이 밀려들었다.
채훈은 소파 등받이에 기댄 채 무거운 눈꺼풀을 감았다.
조금만 자자.
승건이 오려면 아직 멀었으니까 조금 눈을 붙일 시간이 있었다. 알람을 켜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의식은 한 번에 가라앉았다.
채훈은 까무룩 잠이 들었다.
*
*
짧은 전자음에 이어 덜컹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강영환인가 싶었다. 오피스텔 비밀번호를 알고 있는 강영환은 연락도 없이 찾아오곤 했다. 조심성 없는 녀석은 중문을 벌컥 열어젖히면서 형을 불러댔다. 그런데 오늘은 웬일로 조용했다.
잠결에도 이상하다고 생각하던 채훈은 순간 이곳이 어디인지 기억해 내고는 눈을 떴다.
아니나 다를까 눈앞에는 강영환이 아니라 승건이 서 있었다. 검은 코트와 서류봉투를 들고 선 승건의 모습이 꿈이 아니라는 것과, 그가 삐딱하게 보이는 이유가 자신이 소파에 쓰러져 누워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동시에 알아챘다.
세상에.
순식간에 정신이 든 채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쪽팔림과 민망함이 뒤통수를 때렸다. 자신을 바라보는 승건의 얼굴이 무덤덤해서 더 그랬다.
“미안. 어젯밤에 잠을 못 자서. 아니, 그게. 정신 차리게 세수하고 올게. 잠시만 있어봐.”
승건이 무어라 하기 전에 얼른 욕실을 찾아 들어갔다. 거울에 비친 모습이 가관이었다. 머리는 부스스했고, 눈가는 붉고, 눈 밑은 퀭했다. 그나마 침을 흘리지 않은 게 다행일 정도였다.
소파가 푹신하긴 했다. 어젯밤에 잠을 좀 못 자기도 했다. 그래도 이 상황에서 세상모르고 푹 자는 건 아니었다.
채훈은 얼른 세수를 하고 머리를 매만졌다. 거울을 보고 사람다운 모습인 걸 확인하고 나서야 욕실을 나섰다. 그 때 마침 승건이 부엌에서 나오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손에 들고 있던 생수를 내밀었다.
“마셔.”
“어. 응. 고마워.”
채훈은 물을 마시지 않고 승건을 따라 소파에 앉았다. 넥타이를 느슨하게 만들면서 맞은편에 앉는 승건은 꽤나 피곤해 보였다.
벽걸이 시계의 바늘은 자정을 훌쩍 넘어 새벽 1시에 가까웠다. 승건의 몸에서는 선명한 술 냄새가 났다. 이제껏 회식을 했다면 피곤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급하다고 억지를 부린 게 아닐까 미안해지고 말았다.
“많이 피곤해 보인다.”
“괜찮아.”
“술을 마신 것 같은데, 이야기할 수 있겠어?”
“두 잔밖에 안 마셨어. 술 냄새는…… 술이 엎질러져서 그러니까 신경 쓸 것 없어. 여기, 계약서. 읽어보고 수정할 거 확인해.”
승건이 하얀색 서류봉투를 탁자 위에 올려 채훈 앞으로 밀었다.
채훈은 계약서를 꺼내 드는 대신에 승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시선이 마주쳤다.
채훈은 자신이 절박해 보이지 않기를 바라며 입을 열었다.
“읽기 전에 물어볼 게 있는데.”
“뭔데?”
“알고 있었지? 우리 형이 사기당한 거. 그러니까 제안을 하기 전에 말이야.”
“그래.”
“내 뒷조사를 한 거야?”
“했어.”
승건이 너무 간단하게 긍정하는 바람에 채훈은 기운이 빠졌다. 뒷조사를 했다는 것을 당당히 밝히는 녀석에게 왜 그랬냐고 따져 물을 때였다.
“왜?”
“거래를 하려면 상대가 필요한 것을 내밀어야 하니까.”
“그래도 20억은 너무 많지 않아?”
“생명의 은인에게 20억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야.”
20억쯤이란다. 누구는 평생을 일해도 만질 수 없는 돈을 쯤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게 대단했다. 무엇보다 생명의 은인이라는 소리에는 조금 감동하고 말았다.
“네가 그때 설명을 제대로 했다면, 욕은 안 먹었을 거 아니야. 오히려 고마워했을 텐데.”
“감사를 받으려고 20억을 제시한 게 아니야.”
“……?”
“이 관계는 돈으로 거래하는 거야. 네가 응하지 않았다면 20억도 없었어. 전에도 말했지만 감정이 얽히는 건 바라지 않아.”
무감정한 설명에 채훈은 아연해졌다. 방금 전에 느꼈던 감동이 와장창 사라졌다. 상처도 조금 받았다.
말 참 이쁘게 한다.
채훈은 속으로만 투덜거렸다. 돈도 많고, 얼굴도 잘생기고, 그것까지 잘하는 녀석이 왜 20억이라는 거금을 들여서 자신이랑 만나고 싶어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한 번 잤더니 내 몸에 푹 빠져서 그러는 거냐고 물어보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덕분에 정신을 차렸다. 이게 비즈니스라면 그에 응하면 그만이었다.
채훈은 봉투를 집어 들었다.
“20억이랬지?”
“맞아. 20억.”
“다른 것도 가능해? 돈 말고, 폭력적인 건?”
폭력이라는 단어에 승건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인상을 쓰는 것인지 웃으려는 것인지 구분이 가질 않았다.
“무슨 일인데?”
“투자자들 중에 윤 사장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채훈은 그간에 일어났던 일들을 간략하게 사실만 전달했다. 채훈의 형 강수찬이 윤 사장을 밀쳐서 다치게 한 것부터, 윤 사장이 강영환과의 결혼을 합의 조건으로 내건 것과, 강수찬이 뺑소니 사고로 다리가 부러지고, 윤 사장이 노골적으로 협박했다는 것까지 모두 말했다.
“염치없는 부탁이라는 건 알지만, 돈보다 이게 더 급해.”
채훈은 자존심이고 뭐고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윤 사장의 뒤에 진짜 깡패가 있다면 경호원이나 해결사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좀 더 큰 권력이 필요했다. 태화 그룹의 회장을 외할아버지로 둔 승건이라면 어떤 방법이 있지 않을까 싶었다.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재벌은 폭력과 연관이 있을 것 같았다.
“그런 놈들을 처리하는 방법이야 많아.”
채훈은 처리라는 단어에 놀라면서도 안도했다.
“가능한 한 빨랐으면 좋겠어. 오늘은 무사히 넘어갔지만, 내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내일 당장 조치할 테니까, 이제 계약서를 읽어.”
승건이 손가락으로 서류봉투를 가리켰다. 그제야 채훈은 계약서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갑과 을로 시작하는 전문 용어로 쓰인 계약 내용은 이전에 승건이 말했던 것과 크게 차이가 없었다.
기한은 1년이었다. 주말 중에 하루는 반드시, 그리고 필요에 따라 주중에 하루는 승건의 것이었다. 토요일과 일요일 중에 언제가 될지는 승건의 스케줄에 따라 조정하기로 되어 있었다. 주중에도 마찬가지였다. 일방적으로 불려나가야 하는 것이지만 20억의 대가치고는 아주 간단했다.
승건이 말했던 것 말고, 추가 조건도 몇 개 더 있었다. 하나는 불법이나 비도덕적인 것이 아닌 이상에야 승건의 요청을 거절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둘의 관계를 제삼자에게 알리지 않아야 했다. 마지막으로 제삼자가 승건에 대한 정보를 요구하거나, 승건에게 불이익을 주는 일에 동참하길 회유하거나 협박할 경우에 숨김없이 그 사실을 알리라고 명시되어 있었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그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불법이나 비도덕적인 경우가 아닌 요청이라는 게 너무 광범위했지만, 최소한의 마지노선을 지킨다는 의미이니까 그러려니 했다.
이상한 것은 마지막 조건이었다. 이건 승건과의 관계 때문에 회유나 협박을 받을 수도 있다는 전제가 필요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이런 걸 미리 예방할 리 없었다.
하긴, 태화 그룹의 외손자라는데 평범한 사람이랑은 거리가 멀지.
채훈은 계약서를 마지막까지 읽고는 고개를 들었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승건과 눈이 딱 마주쳤다. 여전히 피곤해 보이는 녀석이 먼저 입을 열었다.
“다 읽었어?”
“딱히 고칠 건 없어 보이는데. 그것보다, 이거 읽어보면 널 싫어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아.”
“꽤 있지.”
혹시나 싶어 물어봤더니 승건이 긍정했다.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면서도 그다지 불쾌한 것 같지는 않았다.
채훈은 승건이 태화 그룹 회장의 외손자라는 사실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재벌 집안의 일원이라고 해도 영향력은 천차만별이었다. 20억쯤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돈은 많을 것이다. 거기에 수능 직전에 납치당할 뻔했던 특이한 이력까지 더해져야 했다.
어쩌면 위험한 이권과 얽혀 있을 수도 있었다. 이제 와 그와의 거래를 무를 수는 없지만 궁금한 건 궁금한 거였다.
“무슨 일을 하는지 말해 줄 수 있어? 궁금해서 그래.”
“아니. 알려고 하지 마.”
“……?”
“내 신상에 대해 묻지 않는 것도 조건이야. 어차피 네 귀에 여러 이야기가 흘러들어 가는 것까지는 막지 않지만, 내게서 뭘 알아내려고 하지 마. 계약서에 적을 테니까 그렇게 알아.”
승건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귀찮아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선을 정확하게 그었다.
채훈은 속으로 혀를 찼다.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고 했는데, 이 녀석은 입으로 매를 버는 타입이었다. 승건의 태도가 섭섭하긴 했지만 별수 없었다. 원래 그러기로 했으니까 말이다.
“네가 뭘 하는지 안 캐물을게. 그런데 내가 너한테 존댓말을 써야 한다거나, 네 비위를 맞춰줘야 한다거나 해야 해? 그것도 조건이야?”
“아니.”
“내가 꼰대처럼 대놓고 쓴소리할 건데, 너는 그 말투 때문에 욕 많이 먹을 거야.”
채훈은 지금 내가 속으로 널 욕하고 있다고 전했다. 아무리 20억에 자존심을 내던졌다지만, 고교 동창이자 친구였던 녀석에게 할 말은 해야 했다. 승건이 화를 내도 상관없었다.
그러나 승건은 인상을 찡그리는 대신에 희미하게 웃었다.
“외할머니도 비슷한 말을 하셨어.”
“외할머니가 좋으신 분이네.”
채훈은 얼굴도 모르는 승건의 외할머니를 편들면서 계약서를 서류봉투에 도로 넣었다.
“이것 자체는 고칠 게 없어. 다만 계약을 불이행할 때에 관련된 조항이 안 보이는데. 페널티가 있다면서?”
“페널티가 없으면 약속을 안 지킬 모양이지?”
“지킬 거야.”
“그럼 상관없어. 꼭 문서로 남길 필요는 없으니까.”
계약서에 언급 없이 실력 행사를 하겠다는 뜻이라는 것을 채훈은 어렵지 않게 알아들었다. 윤 사장과 같은 인간을 처리하는 방법은 많다고 했다. 그렇다는 것은 승건이 채훈에게도, 역시 같은 수를 쓸 수 있다는 의미였다.
“무섭네.”
“위약금이 20억의 두 배라는 것보다는 나을 거야.”
“확실히 그게 더 무섭다. 사인은 내용을 추가하고 난 다음에 하자. 윤 사장 일은 내일 조치해 준다고 했으니……. 너랑 하는 건 언제부터야?”
승건이 20억을 들여 거래를 하자고 한 것은 섹스 때문이었다. 계약서에 사인은 안 했지만 윤 사장을 해결해 준다면 효력은 지금부터였다. 채훈은 명확하게 하기 위해 승건에게 물었다.
“굳이 미룰 필요는 없지.”
“지금 하려고?”
“그래. 씻고 와. 나도 씻을 테니까.”
정말로 할 모양이었다. 채훈은 서류봉투를 들고 일어나는 승건을 멍하니 보았다. 이곳에 올 때 이미 각오는 했다. 그래도 막상 하자니까 심장이 단단하게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 전에…….”
“또 할 말이 있어?”
“술 좀 마시자.”
“……?”
승건이 의아한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덩치가 크고 인상이 사나운 녀석이 그러는 모습은 커다란 개의 그것과 닮아 보였다.
채훈은 자신이 현실 도피를 하려고 하는 것을 알았다. 어쨌든 술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맨정신으로는 못 하겠어. 아니, 할 수 있는데. 기분이 좀 그래. 그냥 그렇다고. 독한 것으로 시켜. 센 걸로. 나는 술 마시면 적극적으로 변하는 타입이라……. 아니, 이건 됐고. 씻고 올게. 침실에 있는 욕실 쓴다.”
아무 말을 아무렇게 하려던 채훈은 얼른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실에 있는 욕실을 찾아 들어가서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고. 인생 꼬인다.”
승건의 말대로 이 관계는 돈으로 거래하는 게 맞았다. 자존심을 내다 버렸다고 해도 지금의 상황이 비참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채훈은 머리를 흔들었다. 깊게 고민하면 할수록 심장이 너덜거리는 기분이었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었다. 그냥 섹스를 하는 것뿐이었다. 승건을 만난 것은 운이 좋은 것일 수도 있었다. 아니었다면 자신의 인생뿐만 아니라 온 가족의 인생이 꼬였을 것이다.
한 번 더 한숨을 내쉰 채훈은 고개를 들어 거울을 보았다. 거울에 비친 파리한 얼굴의 남자는 어딘가 겁을 먹은 것 같아 보였다.
채훈은 일부러 얼굴에 힘을 주며 뺨을 두드렸다. 승건에게 겁먹은 티를 내는 것도, 의욕 없이 비실거리는 것도 싫었다. 별거 아니었다. 채훈은 그렇게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었다.
*
*
샤워 가운을 걸치던 채훈은 잠시 고민했다. 아래에 속옷을 입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여졌다. 아래가 허전한 것은 좋아하지 않았지만 어차피 곧 벗어야 하는데.
“어휴.”
이런 고민을 해야 하는 것 자체가 별로였던 채훈은 과감하게 결정을 내렸다. 머리를 대충 말리고 욕실과 붙어 있는 파우더 룸에 옷을 걸어두고는 침실로 나갔다.
침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대신에 탁자 위에 위스키병과 잔 두 개, 그리고 말린 과일과 핑거 푸드가 담긴 접시가 놓여 있었다. 머리를 말리느라 시간을 잡아먹었더니 서비스가 벌써 도착한 모양이었다.
채훈은 승건을 찾는 대신에 그 자리에 서서 위스키를 잔에 반쯤 부어 마시기 시작했다. 채훈도 알고 있는 상표의 위스키는 맛이 좋았고 또한 독했다. 한 모금씩 들이켜자 취기가 순식간에 올라왔다.
원래 채훈은 즐기면서 느긋하게 술을 마시는 타입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짧은 시간에 취해야 했기 때문에 위스키를 커피처럼 들이부었다.
한 잔을 다 마신 다음, 두 번째 잔이 거의 바닥을 보일 때쯤에 승건이 나타났다. 그 역시 샤워 가운만 입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완벽하게 세팅되어 있던 머리가 물에 젖어 이마를 가렸다. 그래서 그런지 조금 어려 보였다. 마치 고등학교 시절의 승건을 보는 듯했다.
“벌써 그렇게 마셨어? 알코올 홀릭?”
병에 담긴 술의 양을 확인한 승건이 인상을 썼다. 적당히 취기가 오른 채훈은 코웃음을 쳤다.
술 좀 빨리 마셨다고 알코올 중독자 취급하면 안 되지.
채훈은 술에 강했다. 잘 취하지도 않았고 필름이 끊긴 적도 없었다. 그저 용기가 조금 더 샘솟을 뿐이었다.
“나 술에 강하다니까. 너도 한 잔 마셔.”
채훈은 빈 잔에 위스키를 적당히 채운 다음에 승건에게 내밀었다. 잔을 받은 승건이 한 모금 마시더니 미간을 구겼다.
“써.”
승건이 못 먹을 걸 먹었다는 듯 반응하는 바람에 채훈은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독한 술을 아무렇지 않게 먹을 것처럼 생긴 녀석이 그러니까 신기했다. 확실히 자신이 알고 있던 승건과는 많이 달랐다.
10년 전, 고등학생이었던 승건은 조금 비딱한 모범생이었다. 공부는 잘했지만 사회성과 친화력이 떨어졌다. 친한 애들이 얼마 없었고 흔한 일탈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승건은 못 하는 게 없었다. 공부도 운동도 잘했다. 막연히 술도 잘 마시지 않을까 싶었는데 편견인 모양이었다.
“술을 못 마셔?”
“즐기지 않아.”
승건이 잔을 내려놓으며 탁자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채훈은 의자에 앉는 대신에 제 자리에 선 채로 세 번째 잔을 채웠다.
“그렇게 마시다가는 급성 알코올 중독으로 쓰러진다.”
“넌 아무렇지도 않아?”
“뭐가?”
“어색하고, 좀 그렇지 않냐고.”
술을 마신 김에 채훈은 용감하게 물었다. 취기가 확 올랐는데도 불구하고 술렁거림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런데 승건은 아무렇지 않은 것 같았다. 하긴 서로 같은 입장이 아니긴 했다. 굳이 따지자면 채권자와 채무자의 관계였다. 자신이 좀 더 긴장해야 하는 것은 맞았다. 그래도 무덤덤한 승건을 보자니 궁금해졌다.
“별로. 섹스일 뿐이니까.”
채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대할 것도 없었다. 그냥 섹스를 하는 것뿐이었다. 채훈은 세 번째 잔을 단숨에 비워냈다. 어색하고 눈치를 보는 것도 싫으면 빨리 해치우면 그만이었다.
“맞아. 빨리 해치워 버리자.”
“해치워?”
“응. 네 말대로 섹스일 뿐이니까.”
해치워 버리자는 말이 충격인 듯 승건이 되물었다. 채훈은 거리낌 없었다. 승건의 말대로 이건 섹스일 뿐이었다.
도전적으로 말을 한 채훈은 빈 잔을 내려놓고는 승건에게 다가갔다. 승건이 앉아 있는 덕분에 그를 내려다보는 구도가 되었다. 그의 머리는 아직 젖어 있었고, 반듯한 정장 대신에 샤워 가운을 입고 있긴 했지만 잘난 얼굴이 모든 것을 압도했다.
채훈은 복잡한 생각을 모두 한쪽 구석에 처박아 두었다.
“술 냄새가 날 건데, 키스해도 돼?”
“해도 돼.”
허락이 떨어지자 채훈은 양손으로 승건의 어깨를 살짝 짚고는 허리를 숙여 입술을 맞댔다. 처음에는 부드럽게 아랫입술을 물다가 혀를 집어넣었다. 질척하게 혀가 얽혔다. 승건은 여전히 키스를 잘했다. 그래서인지 아니면 술 때문인지는 몰라도 머리에 열이 훅 올랐다.
키스가 좀 더 깊어지면서 승건의 손이 채훈의 허벅지를 더듬어 올라왔다. 채훈은 속옷을 입지 않았다. 승건의 커다란 손이 맨살의 엉덩이를 아무렇게나 움켜쥐는 바람에 흠칫 떨어야 했다. 승건의 손은 엉덩이를 지나 허리께까지 올라갔다. 채훈은 신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떼고 말았다.
“술 냄새가 나.”
“난다고 했잖아.”
“그랬지.”
이번에는 승건이 먼저 키스를 해 왔다. 그리고 그대로 허리를 감싸 안고는 몸을 일으켰다. 채훈은 혀를 깊게 얽은 채 승건이 이끄는 대로 뒷걸음질 쳤다.
뒤꿈치에 뭔가 닿았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채훈은 침대에 누워 있는 자신을 깨달았다. 그리고 반쯤 자신을 올라탄 채 입술을 떼고는 몸을 일으키는 승건과 눈이 마주쳤다.
마치 관찰이라도 하는 듯한 시선은 첫날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확실히 취향이 나빴다. 하지만 그걸 소리 내어 말할 정도로 취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채훈은 입을 다물었다.
그사이에 승건이 침대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는 침대 옆에 있는 협탁 서랍을 하나씩 열어보더니 검은색의 작은 종이상자를 하나 꺼내 들었다. 채훈은 고개를 살짝 갸우뚱거렸다. 뚜껑에 호텔 로고가 박혀 있는 상자가 왜 이 순간에 필요한가 궁금했다.
“그게 뭐야?”
“필요한 거.”
채훈은 승건이 상자에서 콘돔 박스와 젤을 꺼내 협탁 위에 올려놓는 것을 보며 쓰게 웃었다. 이상한 곳에서 착실한 녀석이었다.
웃음이 나오는 와중에도 심장이 떨렸다. 머리 한쪽에서는 돈을 받고 하는 거라는 속삭임이 사라지지 않았다. 이제 와 못 하겠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왜?”
빤히 바라보고 있자 침대에 걸터앉던 승건이 왜냐고 물었다. 채훈은 고개를 저었다. 취기가 약간 있었지만 우울함을 전할 만큼 정신이 없지 않았다. 대신에 손을 뻗어 승건의 얼굴을 잡고 입술을 맞댔다. 다른 생각을 하지 않게 빨리 해치우는 게 나을 것 같았다.
*
*
지잉. 지잉. 지잉.
어디선가 계속 휴대폰이 진동했다. 한 번 끊겼다가 다시 울리는 진동에 채훈은 얕게 잠에서 깨어났다. 그러나 눈이 풀에 딱 붙은 듯 제대로 떠지지 않았다. 머리도 몸도 무거웠다. 급한 전화라면 다시 전화하겠지 싶어 무시하려는데 옆에서 누군가 일어나는 기척이 느껴졌다.
인기척을 낸 사람이 승건이고, 자신은 알몸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동시에 어젯밤의 일도 모두 기억났다. 몇 번이고 몸을 섞다가 씻고는 조금만 눈을 붙인다는 것이 그대로 잠들어 버린 것 같았다.
정신이 번쩍 들면서 잠에서 완전히 깼다. 여전히 제대로 떠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깜빡거리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눈은 부었고 허리는 욱신거렸다. 어제 정신없이 덤벼들었더니 상태가 엉망이었다
“네, 할머니.”
눈을 열심히 비비고 있던 채훈은 승건을 돌아보았다.
할머니라고?
침침한 시야에 막 침대에서 내려선 승건의 등이 보였다. 커튼은 쳐지지 않았지만 해가 뜨지 않은 밖은 아직 어두침침했다. 음영이 진 승건의 뒤태는 근사했다. 그런데 그 역시 완전히 알몸인 상태였다. 날씬하고 모양 좋은 엉덩이와 탄탄한 허벅지가 눈에 들어왔다.
“호텔이요. 네, 아니요. 자정이 훌쩍 넘어서 끝나는 바람에 들어가기가 애매했어요. 그럴 리가요. 실장님에게는 미리 말씀드렸어요.”
채훈은 승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휴대폰 너머의 미지의 인물은 아마도 승건의 외할머니인 것 같았다. 인테리어 공사 때문에 승건은 외할아버지 댁에서 잠시 지낸다고 했었다.
승건의 외할머니가 무어라고 하시는지는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대화의 맥락을 보자면 어젯밤에 외박을 했다고 승건이 혼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외할머니가 꽤나 몰아붙이고 있는 모양이었다. 무심한 목소리로 대꾸하고는 있지만 어딘가 난처한 것 같았다. 녀석이 착한 손자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이 신기하고도 웃겼다.
“네. 잤어요.”
혼자서 웃음을 삼키고 있던 채훈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몸을 뒤튼 승건과 눈이 마주쳤다. 이번에는 앞태를 고스란히 보고 말았다. 넓은 가슴팍과 식스팩이 선명한 복부, 희미한 흉터, 그리고 아침 발기를 한 성기까지 한 번에 훑어졌다. 처음 봤을 때부터 생각한 거지만 그의 것은 성기가 아니라 흉기였다.
그런데 바라보는 시선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승건이 눈을 가느다랗게 만들어 노려보았다.
미안.
채훈은 어설프게 웃으면서 소리 없이 입술을 움직여 사과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미안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예의를 차릴 때라는 것은 알았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괜찮다고 대답하는 승건의 목소리가 멀어지더니 곧 침실을 나가버렸다. 거실로 향한 문이 닫히는 것을 보며 채훈은 그제야 숨을 크게 내쉬었다.
서른 살 먹은 손자가 외박했다고 이른 아침부터 외할머니가 연락하는 건 또 처음 봤다. 어지간히도 과보호한다 싶다가, 승건이 과거에 납치당할 뻔한 전적이 있다는 것이 기억났다. 납치도 모자라 칼에 찔리기까지 했으니 걱정할 만도 했다.
그의 부모님이 이혼한 것은 인터넷에서 알아냈지만, 승건의 입에서 들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물론이고, 지난번에 만났을 때도 승건은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에 대해서만 이야기했었다.
6개월 전에 태화 그룹의 정 회장이 뇌경색으로 쓰러졌다는 것은 뉴스에도 나왔었다. 그리고 그 전에 정 회장의 하나뿐인 아들이 급성 심근경색으로 죽었다는 것은 입사 초에 일어난 일이라서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외에 승건의 가족들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었다.
고등학교 때 승건은 이미 혼자 살고 있었다. 그때도 그랬지만 말 못 할 가족사가 있을 수도 있으니 캐물을 생각은 없었다. 그저 조금 궁금할 뿐이었다.
뺨을 문지르며 이런저런 추측을 하던 채훈은 창밖이 푸르스름한 것을 보고 얼른 시간을 확인했다. 협탁 위에 있는 전자시계가 6시 32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늦었어.”
채훈은 호텔에서 오피스텔까지, 그리고 오피스텔에서 병원까지 동선을 떠올렸다. 출근은 7시 50분까지였다. 지금 당장 움직여도 아슬아슬했다.
옷을 갈아입는 걸 포기하고 호텔에서 바로 병원으로 출근한다면 그나마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찝찝했다.
“택시를 타야겠네.”
이럴 바에야 새벽에 집에 갔어야 했다고 후회하며 바닥으로 내려서던 채훈은 순간 휘청거렸다. 허벅지부터 다리 전부가 욱신거리고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넘어질 뻔했다.
“이런.”
겨우 균형을 잡고 선 채훈은 격렬한 섹스의 결과에 혀를 찼다.
이번이 겨우 두 번째인데, 두 번 모두 이러니까 다음이 걱정스러웠다. 승건의 거시기 크기도, 그리고 정력도 모두 평균을 상회하는 것 같았다.
알파라서 그런가.
알파의 정력이 남다르다는 것은 거의 사실처럼 굳어진 속설이었다. 이러다가 복상사할지도 모른다는 실없는 생각을 하면서 채훈은 재빨리 움직였다.
물만 묻혀 세수를 하고는 파우더 룸에서 옷을 찾았다. 바지를 입고 셔츠 단추를 끼우고 있는데 승건이 문을 열고 나타났다. 그는 알몸이 아니라 샤워 가운을 입고 있었다.
“가려고?”
“응.”
셔츠를 바지에 집어넣은 채훈은 넥타이는 건너뛰고 바로 니트 조끼를 챙겨 입었다.
“할머니께 혼난 거야? 외박했다고?”
혹시나 해서 물어봤더니 침대에 걸터앉던 승건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거 아니야.”
“할머니께서 널 많이 아끼시는가 보다.”
“내가 아직도 애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
승건이 그답지 않게 툴툴거렸다. 채훈은 적당히 맞장구쳐 주었다.
“하긴, 다 큰 손자가 외박한다고 아침부터 전화하는 건 좀 그렇지.”
“…….”
“그래도 할머니한테는 언제까지나 애기일 거야.”
괴상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 승건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다. 확실히 승건처럼 커다란 덩치의 사내에게 애기란 말은 어울리지 않았지만, 그래도 할머니에게 손자는 영원히 손자일 수밖에 없었다.
설명을 생략한 채훈이 허리띠를 매고 재킷을 입자 승건이 물었다.
“왜 그렇게 서둘러?”
“늦어서 그래.”
“병원까지 30분이면 가.”
“집에 들렀다 가려고. 옷도 갈아입어야 하고.”
“정장은 대여 서비스 있을 거야. 아니, 새로 사. 속옷이랑 같이.”
“아니. 그러고 싶지 않아.”
채훈은 확실하게 거절했다. 옷을 빌려 입는 것도 사는 것도 모두 번거로웠다. 거기다가 결제는 모두 승건이 할 게 뻔했다. 뻘쭘하게 승건의 얼굴을 보고 있을 바에야 빨리 집에 돌아가서 자신의 옷을 입는 게 나았다. 채훈이 여러 서비스를 거듭 거절하자 승건이 다른 대안을 내놓았다.
“리무진 서비스라도 써. 집 앞까지 데려다줄 테니까.”
“그건 좋네.”
리무진 서비스가 좋다고 하자 승건이 바로 내선 전화로 서비스를 신청했다. 5분 안에 호텔 자동차가 방갈로 앞에 도착한다고 알려주었다.
코트까지 모두 챙겨 입고 지체 없이 거실로 나간 채훈은 걸음을 멈췄다. 문득 생각나는 게 있어서 뒤따라오는 승건을 돌아보았다.
“저기.”
“왜?”
“어젯밤에 이야기 못 한 게 있는데.”
“말해.”
승건이 멈춰 선 장소가 절묘했다. 침실 문틀에 기대선 승건이 팔짱을 낀 채 여유롭게 굴었다. 방금 일어나서 샤워 가운만 입고 있는 주제에 녀석은 아주 느긋해 보였다. 어떻게 하면 저렇게 될 수 있을까 부러워질 지경이었다.
“빚을 갚는 것도 좋은데, 그래도 20억이 갑자기 생기면 곤란해. 가족들은 출처를 궁금해할 테니까. 네 이름을 언급할 수는 없잖아. 안 그래?”
“맞아. 그건 안 돼.”
“그러니까 어떻게 할지 같이 고민해 줘.”
“알았어. 그런데 너……?”
알겠다고 한 승건이 갑자기 말을 하다가 말았다. 채훈은 멀뚱히 승건을 바라보았다. 뭐냐고 하려는데 승건이 가까이 다가와서는 허리를 숙였다. 끌어안지는 않았지만 냄새를 맡는 듯 머리 위에서 킁킁거리는 바람에 채훈은 굳어버렸다. 이 녀석이 왜 이러나 싶었다.
“승건아?”
“너한테서 내 냄새가 나.”
“……?!”
“페로몬 향기가 말이야. 너 베타 맞아?”
몸을 바로 세운 승건이 애매하게 미간을 찡그렸다. 상식적으로 베타인 채훈에게서 승건의 향기가 나는 것은 이상한 게 맞았다. 형질자의 페로몬 향기는 알파와 오메가 외에는 느끼지도 못하고 영향도 못 미쳤다. 하지만 채훈에게는 평범한 일이었다.
잠들기 전에 샤워를 했었다. 그런데도 알몸으로 한 침대에서 잤더니 향기가 묻은 모양이었다.
“나 원래 그렇잖아.”
“원래 그렇다고?”
“형질자 페로몬이 묻는 거. 너도 알면서. 예전에 내 동생 페로몬 향기 때문에 오메가냐고 물었잖아. 안 그래? 기억 안 나?”
승건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에 찌푸려진 미간이 좀 더 깊어질 뿐이었다.
“그런 사례가 있다는 거 들어본 적 없어.”
“그건 나도 그래.”
“연구하자는 사람이 있었을 것 같은데.”
“동생을 전담하는 의사 선생님이 한 번 피를 뽑아가기는 했었는데, 평범하대. 비슷한 체질인 사람도 없다고 하고.”
채훈이 검사를 안 받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특이할 점은 없다고 했다.
“이상하군.”
“뭐, 이런 경우도 있는 거지.”
사람을 앞에 두고 이상하다는 승건에게 채훈은 별것 아닌 듯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 때 마침 현관벨이 울렸다. 리무진 서비스였다.
“나 간다. 방법이 생각나면 연락해. 나도 연락할 테니까.”
채훈은 승건에게 인사를 하고는 서둘러 움직였다. 문 앞까지 마중 나온 기사에게 오피스텔 주소를 말하고는 자동차 뒷좌석에 몸을 실었다. 차가 부드럽게 출발했다. 채훈은 무거운 몸을 등받이 깊숙이 기대어 눈을 감았다.
긴장이 풀리자 피곤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아직 해결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남아 있었다. 20억이라는 돈의 출처를 추궁받지 않아야 할 방법을 찾아야 했고, 윤 사장이 정말로 떨어져 나갔는지도 확인해야 했다.
“하아.”
채훈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 섹스를 하고 난 다음 날 아침에는 승건이 자리를 비우고 없었다. 그때는 좀 섭섭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마주하니까 그게 아니었다.
아무렇지 않게 대하다가도 승건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창과 첫사랑과, 섹스 파트너, 그리고 계약자 사이의 어느 경계에서 균형을 잡아야 했다.
존댓말을 쓰거나 비위를 맞추지는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승건이 요구하는 것은 명확했다. 조금 억울하고 힘들어도 그가 원하는 것은 들어줘야 했다. 괜히 20억을 제시하면서 감정이 얽히지 않아야 한다고 한 게 아니었다.
섹스 자체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사람을 상대하다 보면 여러 갈등이 생겨나기 마련이었다. 가끔 승건이 재수 없는 소리를 하면, 목을 졸라버리고 싶어졌다. 그것도 분명히 감정일 것이다.
승건은 기억 속의 모습과는 확실히 달라져 있었다.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니 그대로일 수는 없었다. 그래도 사람 하나 망가지게 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녀석의 모습은 낯설다 못해 무섭기까지 했다. 권력과 돈을 가진 재벌가의 인간이란 그런 건가 하고 편견이 생길 것 같았다.
과거의 추억과 인연으로 승건을 편하게 상대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조심해야 한다는 걸 본능이 경고했다.
“복잡하네.”
채훈은 감은 눈을 손으로 꾹꾹 눌렀다. 모든 것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조금만 균형을 잃어도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미리 고민할 건 없었다. 지금 당장 눈앞에 있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집중하는 것이 먼저였다.
우선은 지각하지 않고 출근부터 하는 게 중요했다.
*
*
호텔 서비스로 승차감 좋은 세단을 탄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출근 시간 도로 정체로 샤워를 할 시간이 애매했다. 결국 채훈은 샤워를 포기하고 옷만 갈아입은 채 출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승건의 페로몬 향기가 나는 게 걱정이었다. 하지만 총무과에는 형질자가 없었고, 샤워를 하지 않아도 반나절 정도 시간이 흐르면 페로몬 향기가 사라지기 때문에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부지런히 움직인 덕분에 평소보다 조금 일찍 병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허리가 무거워서 하루가 힘들겠다고 한숨을 삼키며 사무실 안으로 들어서던 채훈은, 막 밖으로 나오는 박광호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연말에 박광호가 자리를 이동한 이후로 두 사람은 서로 인사만 하며 데면데면하게 지내고 있었다. 채훈은 재빠르게 인사하며 박광호를 지나치려고 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강 주임님. 잠시만요.”
걸음을 멈춘 채훈은 박광호를 돌아보았다. 갑자기 그가 왜 자신을 부르나 싶어 경계했다.
“무슨 일입니까?”
채훈은 박광호보다 다섯 살 연상이었고, 연차도 그만큼 오래되었지만 하대를 하지 않았다. 첫 만남에 박광호가 친하게 지내려면 말을 트는 게 좋지 않겠냐며 능글거리는 바람에 칼같이 거절했다. 가만히 두면 기어오를 게 뻔했기 때문에 서로 깍듯하게 존댓말을 하자고 선을 그었다.
채훈은 박광호에게 까다로운 사수가 되려고 했다. 박광호가 속으로 꽤나 이를 갈든 말든 상관없었다. 그리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강 주임님. 알파였어요? 아니면 오메가?”
“네?”
“뭘 놀라요. 냄새가 진하게 나는데. 지금까지 감쪽같이 속았네.”
뭐가 좋은지 박광호가 실실 웃었다. 채훈은 얼굴을 굳혔다. 하필이면 박광호에게 들킨 건가 싶다가, 문득 그가 어떻게 페로몬 향기를 맡았는지 의심이 갔다. 채훈이 알기로는 박광호는 형질자가 아니었다.
“박광호 씨. 형질자였습니까?”
채훈은 혹시나 하고 물었다. 그러자 박광호가 잠시 얼굴을 굳히더니 곧 특유의 능글맞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하하. 일부러 숨기고 있었죠. 형질자라고 하면 베타들이 신기한 눈으로 보는 게 지겨워서요. 안 그래요? 주임님도 아시잖아요.”
채훈은 그렇다고 맞장구치지 않았다. 대신에 박광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형질자인 건 맞을 것이다. 그러나 박광호의 성격이라면 베타들의 시선을 귀찮아하는 게 아니라, 형질자임을 자랑하며 우월감을 뿜어냈을 게 뻔했다.
키가 크고 체격이 좋은 걸 보면 박광호는 오메가이기보다는 알파일 것이다. 젊고, 잘생기고, 돈도 많다고 자랑하고 다니는 박광호는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그런 그가 알파라는 사실을 숨긴다는 게 이상했다.
채훈은 굳이 이유를 추측하지 않았다. 그것보다는 오해를 바로잡는 게 더 시급했다.
“형질자가 아니라서 잘 모르겠습니다.”
“설마요? 이렇게까지 냄새가 나는데.”
“형질자의 페로몬이 묻는 체질입니다. 출근할 때 묻었나 보네요.”
“에이, 그런 게 어딨어요. 당황하면 거짓말하는 타입이신가 본데. 숨기질 못하는 걸 보면 만나는 알파가 있나 봐요? 그것도 독점욕 강한?”
“박광호 씨. 방금 그 말은 성희롱에 해당합니다.”
알파와 오메가 사이가 아니더라도 방금 대화는 성희롱이었다. 거기다 박광호의 표정과 말투가 너무 노골적이어서 채훈은 짜증이 나다 못해 화가 났다. 목소리를 확 깔고 차갑게 사실을 지적했다. 하지만 박광호는 뻔뻔하게 굴었다.
“에이, 뭘 그런 걸 가지고.”
“그 마인드가 문제라는 걸 모르는 게 더 문제입니다. 사내 성범죄 예방 교육 받은 걸로 아는데, 경각심을 가지고 조심하세요. 그리고 제가 형질자가 아니라는 건 부서 사람들은 다 압니다. 입사 직후에 신체검사를 받았으니까요. 그러니까 오해는 그만하고 좀 비키죠?”
채훈은 너랑 이야기할 게 없다는 뜻을 사무적으로 전했다. 박광호가 무어라고 말을 하려는데 이 대리가 나타났다.
“좋은 아침입니다. 지나가게 막지 말고 좀 비키시지요?”
이 대리가 채훈과 박광호 사이를 가로질러 지나가는 바람에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채훈은 박광호에게 잠시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하고는 자신의 자리를 찾았다.
패딩 점퍼를 벗고 있는데 먼저 와서 앉아 있던 이 대리가 말을 걸었다.
“박광호 씨는 또 뭐래?”
“그냥 인사했어요.”
“쯧. 쟤는 아침부터 힘도 좋다.”
박광호의 인사란 시비 건다와 동의어였다. 이 대리가 혀를 쯧쯧 차는 것을 들으며 채훈은 업무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컴퓨터를 켜고 관리 시스템이 뜨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휴대폰이 진동했다. 승건이었다.
아직 업무 시작 시간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채훈은 복도로 나가서 전화를 받았다.
“응. 나야.”
―아까 생각해 보라고 했던 거. 심 실장님에게 말해 뒀어. 심정민 실장님이라고 내 일을 도와주시는 분인데, 그분이 방법을 찾아줄 거야. 실장님과 만나서 이야기를 해. 점심 시간과 저녁 시간 중에 언제가 괜찮겠어?
“저녁. 이야기가 길어질 수 있으니까.”
―심 실장님 번호는 메시지로 보낼게. 윤 사장 일도 심 실장님이 처리하니까, 궁금한 건 실장님에게 물어봐.
“알았어.”
승건의 빠른 일처리에 채훈은 얼떨떨했다. 승건이 직접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시키는 것이지만, 그건 그것대로 능력이었다. 믿고 맡길 유능한 사람이 있다는 소리니까 말이다.
―계약서는 직접 만나서 마무리하자. 괜찮지?
“괜찮아. 그리고……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심 실장님이 우리 계약에 대해 알고 있어?”
―알고 계셔. 다른 거 궁금한 건 없어?
“없어. 음, 고마워.”
―그럼 끊는다.
“들어가.”
길지 않는 통화가 끝나자마자 바로 메시지로 심정민이라는 이름과 함께 휴대폰 번호가 도착했다. 채훈은 심정민 실장님이라는 이름으로 번호를 저장한 다음에 사무실로 향했다.
이번에도 무슨 우연인지 복도 반대편에서 오는 박광호와 맞닥뜨렸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얼굴을 확 구긴 박광호는 인사도 없이 사무실 안으로 쏙 들어갔다. 채훈은 별달리 신경 쓰지 않았다. 저런 놈에게 일일이 신경 쓰는 건 에너지 낭비였다.
휴대폰을 챙겨 넣은 채훈은 자신의 자리에 돌아와 관리 프로그램이 구동되는 것을 확인했다. 캐비닛에 넣어둔 서류를 꺼내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채훈은 꼬리뼈부터 타고 오르는 고통에 허리를 잡고 인상을 썼다.
지끈거림과 욱신거림이 머리 꼭대기까지 치솟았다. 어젯밤에 무리를 해서 섹스를 했다고 몸이 알려주고 있었다. 우릿한 고통과 함께 어젯밤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것도 민망한 신음을 내뱉은 장면이었다.
이번에도 자극이 심하네.
채훈은 한숨을 삼켰다. 하루가 시작부터 힘겨웠다.
* * *
승건이 말한 심정민 실장을 만난 것은 퇴근 후, 채훈의 오피스텔과 가까운 카페에서였다. 심정민 실장은 50대 전후의 학자풍으로 생긴 사람이었다. 부드럽게 웃는 모습은 사람의 신뢰와 호의를 사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그는 승건을 도련님이라고 불렀다.
“도련님께 대강의 사정은 들었습니다. 그래도 본인에게 직접 이야기를 들어야지요.”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호칭에 채훈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태화 그룹 외손자이니까 도련님이라고 불릴 수도 있었다.
새삼 승건의 위치를 다시 확인한 채훈은 그에 대해 이것저것 묻고 싶은 것을 참았다. 그의 신변에 대해 캐묻지 말라는 게 조건이었다. 지키지 않았다가는 무슨 소리를 들을지 몰랐다. 대신에 채훈은 현실적인 문제에 집중했다.
제일 처음은 윤 사장의 일이었다. 심정민은 무난하게 처리가 될 거라고 했다. 윤 사장의 윗선과 줄이 닿았다는 것이었다. 가족들에게 한 번 더 시비를 걸면 회유가 아니라 실력 행사에 나설 거라고 심정민이 온화하게 웃으며 말했다.
채훈은 그냥 고개를 끄덕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정말 위험한 세계에 발을 디딘 게 아닌가 걱정만 할 뿐이었다.
다음은 20억의 출처에 관한 거였다. 심정민의 아이디어는 단순했다.
“어렵게 생각하지 맙시다. 돈 많은 할아버지의 목숨을 구해드린 적이 있고, 이번에 보답을 받게 되었다는 건 어떻습니까?”
“그건 너무 만들어낸 것 같은데요?”
채훈은 심 실장의 제안을 듣자마자 반대했다. 세상에 그런 우연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하필이면 목숨을 구해준 할아버지가 부자고, 20억을 선뜻 내준다는 건 드라마에서도 일어나지 않을 이야기였다.
“도련님과 채훈 씨의 사연과 비슷합니다. 도련님의 나이 대가 다르긴 하지만요. 아주 만들어낸 건 아니지요.”
“어……. 알고 계셨어요?”
심정민의 말에 깜짝 놀란 채훈은 저도 모르게 알고 있었냐고 되묻고 말았다. 그러자 심정민이 사람 좋게 웃었다.
“예. 사건 처리할 때 일을 도왔습니다. 채훈 씨는 기억이 안 나겠지만, 병원에서 잠들어 있는 채훈 씨를 본 적도 있습니다.”
“전 몰랐어요.”
“다들 정신이 없었으니까요.”
심정민이 여전히 웃었지만 채훈은 기묘한 기분이었다.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 많은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신기하고도 이상했다.
20억의 출처에 대한 알리바이는 드라마틱하게 만들어졌다. 군대에서 말년 휴가를 나왔던 채훈은 차에 치일 뻔한 할아버지를 구하고는 도와줘서 고맙다고 명함을 받았다. 제법 힘깨나 쓴다고 자랑한 할아버지는 뭐든 도와줄 수 있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채훈은 농담인 줄 알고 까맣게 잊고 지내다가, 이번 일로 혹시나 해서 전화를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할아버지가 흔쾌히 도와주겠다고 나섰다.
가상의 할아버지는 빌딩 부자였고, 힘 좀 쓰는 사람과도 연이 닿아 있다는 설정이었다. 채훈의 고민을 듣자 어렵지 않게 해결할 수 있다며 자신만만했다. 다만 정체가 드러나는 것이 내키지 않아 심정민이 대리인으로 나섰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어설픈 계획이었다. 곤란한 사정에 맞게 좋은 인연이 생길 우연이란 제로에 가까운 확률이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별별 일이 다 일어나는 법이었다.
더 그럴듯한 방법을 생각해 내지 못한 채훈은 결국 심정민의 말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와 형을 설득하는 것은 채훈의 몫이었다.
만약을 위해 좀 더 세세한 부분까지 조절을 하고 있는데 승건이 나타났다. 그는 20억에 대한 알리바이를 듣고는 심정민과 비슷한 반응을 했다.
“내가 할아버지가 되어버렸군.”
승건까지 괜찮다고 하는 바람에 채훈은 특별한 우연에 대해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그것으로 준비는 모두 끝냈다.
*
*
엘리베이터가 기계 소리를 내며 올라갔다.
4, 5, 6, 7.
채훈은 엘리베이터의 층수가 올라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옆에 선 승건이 신경 쓰였다.
어머니와 형을 설득할 계획을 마무리하는 것까지는 순조로웠다. 그런데 심정민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헤어지려는 순간, 승건이 뜻밖의 부탁을 해 왔다. 채훈의 집을 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채훈은 당황했지만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집은 가까웠고 깨끗한 상태였다. 거짓말을 하는 것도 내키지 않아서 고개를 끄덕였다.
일반적인 친구를 초대하는 것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입사할 때 면접관을 만날 때와 비슷한 기분이었다.
녀석에게 무엇을 대접할까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밤이 늦었으니까 커피는 별로일 것이고, 녹차도 마찬가지였다. 손님용 차를 준비할 걸 하고 후회하고 있는 동안에 엘리베이터는 11층에 도착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왼쪽으로 한참 들어가서야 채훈의 원룸이었다. 이쪽이라고 종종걸음으로 앞장선 채훈은 1103호의 문을 열면서 승건을 초대했다.
“여기야. 들어와.”
채훈은 들어가자마자 불부터 켰다.
“거기 앉아. 뭐 마실래? 늦어서 커피는 안 되겠고, 유자차 있는데 어때?”
소파에 앉으라고 권한 채훈은 냉장고에 들어 있는 유자차를 기억해 냈다. 하지만 승건은 소파에 앉을 생각이 없는 듯 원룸 가운데 서서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차는 됐어. 곧 돌아갈 거야.”
채훈은 곧 돌아갈 거라는 승건을 보았다. 정말 구경만 하고 가려는 듯했다.
“구경만 하고 그냥 가려고?”
“다른 걸 해줘?”
승건이 아주 진지한 얼굴로 담백하게 물었다. 채훈은 한 박자 늦게 그것이 성적인 의미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엄격한 표정을 지으며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다. 어젯밤에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기억해라. 내가 얼마나 시달렸는지 좀 알라고.
울컥해서 억울함이 담긴 말이 머리까지 차올랐지만 소리가 되어 나오지는 않았다. 충동을 자제할 정도의 정신은 충분했다.
“조용히 돌아가 주시면 됩니다.”
채훈은 깍듯하게 높임말을 하면서 웃었다. 그러자 승건 역시 웃었다.
“알았어. 이제 갈게.”
“진짜 뭐 하려고 온 거야?”
“활자로 된 보고서와 실제는 차이가 있으니까. 직접 확인해 보고 싶어서.”
꽤나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뒷조사를 한 게 얼마나 정확한지 두 눈으로 확인하겠다는 말이었다.
채훈은 기분이 묘했다. 심사받는 것 같았다. 만약에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하는 불길한 생각을 하다가 말았다.
“확인해 보고 마음에 안 들면 어떻게 하려고? 환불은 안 되는데.”
“마음에 들어. 나중에 연락할게.”
진짜 어떻게 사는지 확인만 하는 게 목적이었던 듯 승건은 자리에 앉지도 않고 신발을 신었다.
채훈은 승건을 엘리베이터 타는 곳까지 배웅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며 승건의 모습이 사라지는 것이, 마치 그를 병원에서 다시금 보았던 순간과 겹쳐졌다.
채훈은 한숨을 쉬며 얼굴을 문질렀다. 특별할 것 없었던 일상에 비일상적인 일들이 자꾸 침범하는 바람에 머리에 과부하가 걸릴 지경이었다.
10년 만에 만난 동창이자 첫사랑과 계약을 한 게, 운이 좋은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가 없었다면 자존심을 굽히는 것 따위는 사치스러운 고민이 될 건 확실했다. 생존의 위협 속에 동생은 강제로 결혼을 하고, 빚에 허덕이다가,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지 않기 위해 허둥거릴 테니 말이다. 승건과의 계약으로 그걸 막았다.
자존심을 거래한 것치고는 괜찮은 결과였다.
사실 채훈은 승건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다. 생명의 은인에게 20억쯤은 아무것도 아니랬다. 하지만 그것과 제안은 별개의 것이었다.
어쩌면 그저 흥미일지도 몰랐다. 그날 밤에 자신이 첫사랑이었던 승건의 어프로치에 마음이 흔들려 원나잇을 한 것처럼 말이다.
그래도 알고 싶었다. 어째서 10년 만에 만나 섹스를 하자고 했는지. 왜 무사하다고 연락 한 번 안 했는지. 왜 자신과 만나고 싶어 하는지.
채훈은 이곳에 없는 승건에게 물었다.
“너는 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 * *
“심정민 실장님이세요.”
채훈은 본가 거실에 모인 가족에게 심정민 실장을 소개시켰다. 채훈이 승건을 만나고 3일 후, 토요일 오후였다.
부잣집 할아버지가 윤 사장도 쫓아내고, 18억이라는 투자금을 갚아준다고 가족들에게 설명하자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조미혜는 좋아했고, 강영환은 정말로 그렇냐고 반문했고, 강수찬은 당연히 의심했다.
채훈은 강수찬을 설득하거나 이해시키려고 하지 않았다. 이번에 사기 사건 이후로 강수찬은 의심부터 하고 봤다. 그래서 채훈은 강수찬의 편을 들었다.
자신도 이상하긴 한데, 그래도 밑져야 본전이라고 한 번 자세히 알아보는 것도 좋지 않겠냐고 운을 떼었다. 어떻게 도와준다고 하는지 가족이 모두 다 같이 들어보고, 판단을 내리자고 했다.
조미혜는 어렵게 온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했다. 강영환도 마찬가지였다. 강수찬도 갈등할 수밖에 없었다. 윤 사장의 위협 때문에 조미혜도 강수찬도 바깥에 나가질 못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강수찬도 승낙하면서 만남이 이루어졌다.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가지기 위해 은혜 갚는 할아버지의 대행이라는 심정민 실장을 집으로 불러들였다.
심정민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깍듯하게 인사했다.
“심정민이라고 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채훈의 가족들과 마주한 심정민은 유창한 말솜씨를 자랑했다. 가상의 부잣집 할아버지를 은퇴한 회장님이라고 지칭하며, 회장님이 채훈에게 아주 감사하고 있다는 말을 거듭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살아 있어야 호강을 누릴 수 있는 거라며 18억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도 했다.
그래도 강수찬은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혹시나 다른 빚을 떠넘기는 게 아니냐고 직접적으로 물었다. 심정민은 달리 바라는 게 없다고 했다. 믿지 못하겠다면 강수찬이 고용한 변호사를 대동해 같이 돈을 갚고 다니자고 강하게 나갔다. 그러자 결국 강수찬도 한 발 물러났다.
심정민은 당장에 다음 주부터 약속을 잡자고 하며 명함을 두고 돌아갔다. 그를 대문까지 배웅한 조미혜가 제일 좋아했다.
“어머머. 진짜 이게 무슨 일이야. 세상에. 정말 이런 인연도 있나 보다. 그 회장님이 정말 부자인가 봐. 18억을 아무 조건 없이 갚아준다니.”
“어떻게 될지는 두고 봐야지. 그놈도 사기꾼인지 누가 알아.”
조미혜가 손뼉을 치며 자리에서 방방 뛰기까지 하자 깁스한 다리로 소파에 앉아 있던 강수찬이 투덜거렸다. 하지만 조미혜는 꿋꿋했다.
“다음 주 되면 알겠지. 사고 이후에 윤 사장이 코빼기도 안 보였잖아. 회장님이 손을 쓰긴 썼나 봐.”
“아직 몰라. 이름이랑 번호도 인터넷에 안 뜨는데 뭘 믿으라는 거야. 채훈아, 이놈들이 사기꾼이면 어쩔 거야?”
강수찬의 공격 화살은 결국 채훈에게 돌아왔다. 채훈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제도 말했지만 장 변호사 아저씨랑 이야기해 봐. 진짜라면 좋은 기회잖아. 아무 조건 없이 갚아준다니까, 조건 걸면 파투 내면 되고.”
의심이 많아진 강수찬이 스스로 납득해야 했기 때문에 채훈은 회장님과 심 실장을 믿으라 말라 하지 않았다. 강수찬은 더 이상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다시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이것저것 검색하기 시작했다.
한 고비 넘긴 채훈은 조미혜와 강영환에게 붙잡혔다. 특히 강영환이 적극적이었다.
“회장님이라고 하는 할아버지가 뭐 하는지 진짜 몰라? 얼마나 부자래?”
“나도 잘 몰라.”
“그런 건 제대로 알아봐야지. 형도 참 무르다니까. 어떻게 생겼어? 알파야? 아니면 베타?”
“그냥 할아버지처럼 생겼던 것 같은데. 사실 기억은 안 나. 회장님을 본 건 그때가 끝이라서. 이번에는 통화만 했고. 심 실장님도 별말 안 해서, 자세한 건 몰라.”
채훈은 적당히 대꾸했다. 회장님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싶지 않아 한다고 미리 전제해 둔 게 다행이었다. 그런데 강영환은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형은 뭘 몰라. 말이 18억이지, 아무리 생명의 은인이라도 18억을 턱 내놓기 쉬운 줄 알아? 돈 좀 있다는 치들치고 구두쇠 아닌 놈들 없다고. 진짜 찐 부자들만 그럴 수 있단 말이야. 그런 사람들하고 인연을 만들어놔야지, 인연을. 연락해서 고맙다고, 인사드리고 싶다고, 만나자고 해. 무조건. 안면 트고, 친하게 지내고 이래야 뭐든 생길 거 아니야. 용돈도 받고, 소개도 받고. 그러다 보면 유산이라도 조금 받게 될지 누가 알아? 안 그래?”
강영환이 노골적으로 욕심을 드러냈다.
18억을 선뜻 내놓는 부잣집 할아버지와 인연이 생긴다면 친하게 지내는 게 좋긴 할 것이다. 하지만 채훈은 강영환의 부추김을 단번에 잘라냈다. 알고 지낼 회장님도 없을뿐더러, 만약에 진짜 있다고 해도 억지로 인연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됐어. 자기가 누구인지 알리기 싫다고 대리인까지 내세웠는데, 질척거리면 역정 사.”
“누가 질척거리래? 자연스럽게 하면 되잖아. 자연스럽게. 안 그래? 엄마? 엄마는 어떻게 생각해?”
강영환이 조미혜의 동의를 구했다. 강수찬의 옆에서 장 변호사의 휴대폰 번호를 알려주고 있던 조미혜가 당연히 인사를 드려야 한다고 가세했다.
사람의 욕심이란 끝이 없었다. 윤 사장의 위협에서 벗어나고, 투자자들에게 돈을 돌려줄 수 있게 되자마자 바로 그다음을 욕심 낸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강영환의 말대로 잘되어 유산이라도 받을 수 있다면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채훈은 가상의 상대에게라도 그러고 싶지 않았다.
가족들과 성향이 다르다는 것을 이럴 때마다 깨달았다. 마음 같아서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화목함을 위해서는 적당히 끊을 수도 있어야 했다.
“나중에 다 끝나고 심 실장님에게 넌지시 인사드리고 싶다고 말은 해볼게. 그래도 싫다고 하시면 어쩔 수 없고.”
채훈은 빙긋 웃으며 여지를 만들어두었다. 비즈니스란 사회에서만 하는 게 아니라 가족들 사이에서도 필요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