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2. 제안】 (3/26)

  【02. 제안】

잊었다고 생각한 사람을 기억하는 순간은 여럿 있었다. 그것은 특정한 날짜일 수도 있고, 장소이거나 물건일 수도 있었다. 까맣게 잊고 지내다가도 문득 깊숙이 묻어놓았던 순간들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채훈이 승건을 기억에서 끄집어내는 것은 TV에서 수능 날짜가 언급될 때였다. 혹은 등산화를 볼 때면 그때의 사건을 떠올리곤 했다. 피투성이가 된 승건의 모습과 함께 미국에 있다는 놈을 향해 가볍게 불만을 투덜거리고는 끝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점심 시간이 끝나고 직원 휴게실에 앉아 선임들의 대화를 귀동냥하고 있던 채훈은 동창회라는 단어에 승건을 떠올렸다.

기억의 연쇄란 무서웠다. 동창회에서 승건을 만난 순간부터 그의 집을 빠져나오기까지의 일들이 한 번에 생각났다. 특히 그날 밤에 있었던 가장 야한 장면이 무작위로 재생되었다.

숨을 헐떡이며 야한 소리를 내뱉었던 것이나 승건의 상기된 얼굴과 함께 도리질을 할 수밖에 없었던 감각까지도 함께였다.

채훈은 민망함에 붉어지려는 뺨을 손으로 문질렀다. 아무리 강렬한 섹스였다고 하지만 대낮에, 그것도 직장에서 떠올릴 만한 건 아니었다.

그날 이후로 10일이라는 시간이 흐르면서 그사이에 연도가 바뀌었다. 몇 개의 송년회와 연말 종무식, 그리고 연초 시무식까지 치르는 동안에 종종 승건과의 기억이 난입했다.

2년 반 만에 한 섹스가 이렇게나 무서웠다. 아무래도 그동안 너무 금욕을 한 게 문제였던 것 같았다.

클럽에라도 가야 하나.

안전하고 신중한 만남을 선호하는 채훈은 클럽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도 현실 생활로 돌아오려면 다른 자극이 있어야 했다. 이러다가는 승건을 떠올리며 자위라도 할 판이었다. 정말 그것만큼은 하고 싶지 않았다.

머릿속을 떠돌아다니는 야한 기억을 의도적으로 털어버린 채훈은 선임들의 대화에 집중했다.

“걔는 도대체 무슨 빽이래?”

“부장님이 감싸고도는 게 장난 아니던데요.”

“아이고. 그래서 내가 죽겠다. 뺀질뺀질거리는데 뭐라 할 수가 있어야지.”

어느새 대화의 주제는 박광호가 되어 있었다. 채훈은 이번 사건으로 사내 권력에 대해 심도 있게 생각해야 했다.

채훈의 이름을 사칭하고 사고를 친 놈은 여전히 총무과에 남아 있었다. 이번 기회에 차장이 박광호를 딴 부서로 보내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행정부장이 끝까지 박광호 편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기획홍보과에서도 오랫동안 버틴 이유가 행정부장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들려왔다.

다행히 채훈은 박광호의 담당 사수에서 벗어났다. 새로운 사수 옆으로 이동한 박광호는 여전히 당당하게 뺀질거렸다. 이사장과 행정부장이라는 막강한 백을 가진 박광호에게 잔소리를 할 간 큰 인간은 없었다.

까라면 까야 되는 곳은 군대만이 아니었다. 시원한 사이다 사연은 인터넷 속에서만 있었다. 평탄한 사회생활을 하려면 아니꼽고 속이 쓰려도 눈치를 보고 버텨야 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보이지 않는 권력이 존재했다. 박광호는 그런 존재였다.

“강 주임은 2개월 동안 어떻게 데리고 있었던 거야?”

“그러게 말이야.”

갑자기 대화의 공이 채훈에게로 넘어왔다.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채훈은 사회생활에 어울리는 미소를 지었다.

“엑셀 입력만 시켰어요. 어린애도 그건 하잖아요.”

“그러다 틀리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잖아.”

“틀려도 상관없는 거요. 프로그램 돌리면 자동 작성되니까요.”

“아. 그 방법이 있었네. 나도 그거 해야겠다.”

채훈이 비법을 전달하자 박광호의 새로운 사수가 좋다고 웃었다. 다시 대화는 박광호의 정체를 추론하는 데 집중되었다.

이사장의 연줄로 기간제로 입사하고 행정부장의 비호를 받는 박광호가 도대체 어느 집안 자식인지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제멋대로 살아왔으면 사회성과 인성이 저렇게 엉망이 될 수 있느냐로 설왕설래했다.

지잉.

말없이 대화를 듣고 있던 채훈은 카디건 호주머니에서 진동하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별생각 없이 휴대폰 메시지를 확인한 채훈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승건인데. 지금 전화 받을 수 있으면 답장 줘.]

눈을 몇 번 깜빡여봐도 낯선 번호로 온 메시지에는 분명히 승건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갑자기 정신이 확 들었다.

왜?

머릿속에는 물음표만 잔뜩 떠올랐다. 동창회가 있었던 것은 10일 전이었다. 한 번 몸을 섞고는 얼굴도 보지 않고 헤어졌다. 시시때때로 승건을 떠올리기는 했지만 다시 만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승건에게서 먼저 연락이 왔다.

휴대폰 번호를 알아내는 방법이야 여럿 있을 것이다. 그래도 그런 수고를 하면서까지 승건이 자신에게 먼저 연락한 이유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아니, 짐작은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김칫국물을 거나하게 마시는 것 같아서 잠시 보류해 두었다.

어쨌든 뭐든 알려면 답장을 해야 했다. 그리고 그건 승건과 다시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맺겠다는 의미였다.

휴대폰 화면을 노려보던 채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휴게실을 나섰다. 사람의 발길이 뜸한 복도 끝에 서서 잠시 숨을 골랐다.

[전화 받을 수 있어.]

답장을 보내자마자 바로 휴대폰이 진동했다. 아까 그 번호였다.

“여보세요.”

―점심 시간이지?

“응.”

―밥은 먹었어?

“먹었어. 너는?”

―나도. 연락한 건 다름 아니라, 시간 되면 저녁 한 번 먹자고. 내일이나 모레는 어때?

승건이 예의상 오가야 할 말을 간략하게 하고는 바로 본론을 꺼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가벼운 식사 제안이었다. 그러나 채훈은 당장에 대답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이유 없이 만나려고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채훈은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궁금한 건 물어보면 그만이었다.

“시간이야 있는데, 무슨 일이야?”

―할 말이 있어. 전화상으로 이야기하는 것보다는 직접 얼굴을 보는 게 나을 것 같아.

휴대폰 너머로 승건의 목소리가 아주 멋지게 들려서 채훈은 주먹을 꽉 쥐었다.

이거, 내가 착각해도 되는 거지?

기대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전화상으로 하지 못할 이야기 중에는 종교나 다단계, 그리고 투자 권유 등도 있었다. 금수저라고 사기꾼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채훈은 마음대로 뻗어가려는 생각을 다잡았다.

“내일은 안 되고. 모레, 금요일은 괜찮아.”

―식당은 내가 예약할게. 장소와 시간은 메시지로 보낼 테니까 확인해.

“응.”

―금요일에 보자.

“그래.”

통화는 그렇게 짧게 끝났다. 채훈은 휴대폰을 쥐지 않은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첫사랑이자 짝사랑이었던 친구를 10년 만에 동창회에서 만나 뭔가 이루어진다는 건 드라마 속에서나 나올 법한 일이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예감에 심장이 들떴다.

“흠흠.”

비죽이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진정시키려고 채훈은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그사이에 손 안에 쥐고 있던 휴대폰이 진동했다. 승건이 약속 장소와 시간을 메시지로 보냈다.

금요일. 7시. 병원에서 멀지 않은 한정식 가게 이름과 함께 지도가 첨부되어 있었다.

“이런.”

애써 눌러놓았던 입꼬리가 다시 위로 향하고 말았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 * *

금요일, 채훈은 만반의 준비를 하고는 퇴근을 기다렸다. 머리도 옷도 평소보다 훨씬 더 힘줬다. 추위에 대비한 두꺼운 패딩 점퍼 때문에 별로 티가 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신경 썼다는 게 중요한 법이었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돌발 상황이 채훈의 발목을 잡았다. 자료 준비 때문에 퇴근 시간이 조금 늦어진 것은 괜찮았다. 문제는 금요일 퇴근 시간의 도로 정체였다.

병원에서 약속 장소인 식당까지는 가까운 편이었다. 버스나 지하철에서 내려 한참 동안 걸어야 했기 때문에 택시를 선택한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하지만 10분이면 넉넉할 거리였는데 30분이 넘게 걸렸다.

채훈은 택시가 멈춰 서자마자 날다시피 건물로 뛰어들었다.

“늦었어.”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채훈은 휴대폰으로 시계를 확인하고는 한숨을 삼켰다. 정확히는 늦지 않았다. 그저 약속 시간 3분 전일 뿐이었다.

평소에 지하철만 타고 다닌 탓에 이렇게까지 차가 밀릴 줄은 몰랐다. 그래도 아슬아슬하게 시간을 지킬 수 있을 것 같기는 했다.

승건이 예약한 한정식 가게는 빌딩 7층에 위치해 있었다. 채훈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지만 알아보니 꽤나 유명한 곳이었다. 훌륭한 맛에 비례해 가격 또한 비쌌다. 그만큼 서비스도 확실해서 직원에게 승건의 이름을 대자 안쪽에 있는 개별실로 안내해 주었다.

직원이 문을 열기 전에 채훈은 가볍게 심호흡을 했다. 늦을까 봐 걱정한 탓에 몰랐는데, 문 너머에 승건이 있다고 생각하자 갑자기 긴장이 몰려왔다. 고등학교 동창이자 첫사랑에게 허둥거리는 모습도, 딱딱하게 굳은 모습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채훈은 단단히 마음을 먹고는 열린 문 안으로 들어섰다. 의자에 앉아 있던 승건이 자리에서 일어나 맞이해 주었다.

“어서 와.”

“미안. 차가 밀려서 좀 늦었어.”

“딱 맞춰 왔어.”

직원이 곧 식사를 준비하겠다고 하면서 문을 닫고 나가는 동안에 채훈은 패딩 점퍼를 벗으면서 승건의 맞은편에 앉았다.

“갑자기 무슨 일이야?”

“우선은 식사부터 하자.”

채훈이 용건부터 묻자 승건이 말을 돌렸다.

“그러면 더 궁금하잖아. 심각한 거야?”

“어쩌면.”

직구도 견제구도 승건에게 먹히지 않았다. 진지한 얼굴로 심각한 거라고 하니까 불길해졌다.

설마, 진짜 투자 권유?

채훈은 승건이 사기꾼일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한 번 더 떠올렸다가 관뒀다. 이제 직장 생활 3년을 겨우 채운 월급쟁이에게 사기를 쳐도 튀어나올 돈이 없었다.

자신이 거지임을 인정한 채훈은 승건을 보았다. 제멋대로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것처럼 딱딱한 정장을 챙겨 입은 녀석은 사기꾼처럼 보이지 않았다.

분위기 있는 얼굴은 여전히 자신의 취향이었다. 저 얼굴이면 사기를 쳐도 그대로 넘어갈 것 같긴 했지만 말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채훈은 탐색하는 것을 포기했다. 어차피 제대로 말을 해주기 전에는 아무것도 알 수 없는 법이었다. 다단계나 종교나 투자 권유는 칼같이 거절할 자신이 있었다. 채훈은 우선은 저녁부터 먹기로 했다.

직원이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리고 식탁 위에 음식이 차려졌다. 한정식이지만 양식처럼 코스로 음식이 나왔다. 처음에는 가벼운 술과 곁들인 음식, 다음은 맑은 죽이었다. 음식은 모두 맛있었다. 그릇을 깨끗하게 비우는 동안에 가볍게 대화가 오갔다.

죽 그릇이 치워지고 난 다음에는 한정식이 개인 독상처럼 깔끔하게 차려졌다. 영양밥과 국, 찌개, 두부, 나물 반찬, 고기 산적 등등. 양이 많은 것은 아니었지만 모자람 없이 깔끔하게 담긴 음식은 모두 자극적이지 않고 맛있었다.

“이거 맛있어. 순두부부터 먹어봐.”

개인적으로 두부를 좋아하는 채훈은 갓 만들어낸 듯 따끈따끈한 순두부를 한 입 떠먹어보고는 감탄했다. 고소한 두부도 짜지 않은 간장도 모두 어울렸다.

채훈은 승건이 순두부를 입에 가져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곧이어 그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기운이 맺히는 것을 보며 채훈은 웃었다.

“맛있지?”

“응. 괜찮네.”

“직접 만든 건가? 두부 만드는 데 손이 많이 가는데.”

이러니까 비쌀 만하다는 말은 꿀꺽 삼킨 채훈은 밥 대신에 두부부터 모두 먹었다.

식사가 진행되는 동안에 자연스럽게 서로의 근황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럼 아예 한국으로 온 거야?”

“아직 안 정해졌어. 그래도 이번에는 오래 있을 거야. 처리해야 할 일이 많거든.”

“한국에서 살 생각은 없고?”

“여긴 복잡한 게 얽혀 있어. 그래서 싫어.”

싫다는 소리를 하는 승건의 목소리가 너무나 단호해서 채훈은 속으로 쓴웃음을 흘렸다.

자신이 기억하는 채훈은 어지간한 것에는 그다지 감정 표현을 하지 않았다. 크게 웃지 않았고 화를 내는 것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 다만 정말 싫은 건 싫다고 딱 잘라 말하곤 했다.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는데도 승건의 성격이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게 조금 웃겼다.

그래도 많은 것이 달라졌다. 인생과 앞으로의 거취에 대해 이야기할 나이가 되었다. 길지 않은 대화에서 채훈은 승건에 대해 꽤 많은 것을 알아냈다.

승건은 미국에서 대학을 다녔고, 경영학을 전공했고, 회사도 다녔다고 했다. 집안일 때문에 잠시 한국에 들어왔다며, 미국으로 돌아갈 거라고 확언하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을 종합해 보면 승건이 사기꾼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그래서 더더욱 이 자리를 만든 이유를 짐작하기 힘들었다.

자꾸 뿜어져 나오려는 기대감을 억누르며 채훈도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승건과 가깝게 지낸 고교 동창들이 어떻게 지내는지도 짧게 전했다.

그사이에 식사가 끝났다. 채훈은 자신의 그릇은 거의 다 비워졌는데, 승건의 것이 절반은 넘게 남아 있는 것이 의아했다.

“더 안 먹어?”

“다 먹었어.”

“그게? 반이나 넘게 남았는데?”

“이 정도면 충분해.”

“충분하다고?”

“나는 먹는 걸 그다지 즐기지 않아.”

먹는 걸 즐기지 않는다는 말에 채훈은 충격을 받았다. 채훈은 맛있는 걸 좋아했다. 이왕 먹는 거 맛있는 걸 먹자는 주의였다. 스스로 돈을 벌고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 그 성향이 더욱 뚜렷해져서 생활비에서 식비와 외식비 지출이 상대적으로 많은 편이었다. 과식은 지양했지만 그래도 이렇게나 맛있는 걸 반이나 넘게 남긴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무엇보다 평균보다 체격이 좋은 승건이 소식한다는 것은 문제가 생길 것 같았다. 고등학교 때 점심도 간식도 평범하게 먹었던 녀석이 왜 이러나 싶기도 했다.

“그래도 너무 적게 먹는 것 같은데. 이걸로 괜찮아?”

“괜찮아. 모자란 건 영양제로 보충하고 있어.”

본인이 괜찮다는데 채훈이 더 먹어라 마라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지난밤을 떠올려보면 승건은 저체중이거나 하지는 않았다. 아니, 몸은 아주 좋았다. 영양제로 보충을 하고 있다면 다행이긴 했다.

그렇게 식사를 끝내자 곧이어 그릇이 치워지고 후식이 나왔다. 과일로 만든 간식과 차였다.

“밥 다 먹었거든.”

간식을 한입에 삼키고 달콤한 차를 마신 채훈은 운을 떼었다. 밥을 다 먹었으니 이제 본론을 이야기할 때였다.

도전적으로 쳐다보자 승건의 표정이 아주 미묘하게 변했다. 그러나 고등학교 시절부터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녀석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읽어낼 수가 없었다.

“제안할 게 있어.”

제안이란다. 불길한 단어에 채훈은 살짝 긴장했다. 사기꾼이 아니라면 사이비였다. 낌새가 나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자고 단단히 마음먹었다.

“뭔데?”

“너랑 계속 만났으면 해.”

“……?!”

“하지만 감정이 엮이는 것은 바라지 않아.”

채훈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우려했던 것과 달리 승건은 사기꾼이나 사이비는 아니었다. 하지만 기대한 것과도 달랐다.

감정이 엮이지 않은 만남을 하자는 승건의 표정은 덤덤하기만 했다. 채훈은 자신의 얼굴도 그러기를 바라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섹파라도 하자?”

채훈은 자신의 목소리가 꽤나 시니컬하게 들린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것보다는 명시된 관계를 원해. 거래라고 해야겠군.”

“혼자 납득하지 말고.”

“내가 제시할 건 20억이야. 원하는 건 주말 중에 온전한 하루, 필요하다면 주중에도 하루. 기한은 1년. 비밀 엄수를 위해 계약서를 써서 공증받고, 계약을 어길 시에는 페널티가 있어.”

고저 없는 승건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울렸다. 하지만 채훈은 멍하기만 했다. 머릿속에 들어온 정보가 제대로 정리되지 않고 떠돌아다녔다.

승건의 말을 종합해 보자면 만나서 섹스를 하는 대가로 돈을 주겠단다. 순간 스폰과 화대라는 단어가 동시에 떠올랐다. 기분이 나쁘다 못해 구역질이 나오려고 했다.

채훈은 얼굴을 일그러뜨리지 않으려고 힘을 주었다.

“너, 너 그게 무슨 뜻인지는 알고 하는 말이야?”

“거래하자고 제안했어.”

분노로 목소리가 떨리는 채훈과 달리 승건의 대답은 냉정했다.

“그게 무슨 거래야. 돈으로 스폰을 하겠다는 거잖아.”

“아, 그런 말이 있었지.”

마치 지금에서야 떠올렸다는 것처럼 승건이 말하는 바람에 채훈은 꼭지가 돌았다. 그러나 분노를 폭발하기에는 지금까지 채훈이 유하게 살아왔다.

욕을 퍼붓거나, 물을 끼얹거나, 얼굴을 한 대 치거나 하고 싶다는 충동이 치밀어 올랐지만 참았다. 그러기에는 자존심이 너무 상했다.

“씨발. 내 몸값이 1년에 20억이라니. 비싸기도 하네.”

“그래서?”

“그래서는 무슨 그래서야. 다시는 보지 말자.”

채훈은 그대로 패딩 점퍼를 집어 들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을 열어젖히려고 했다. 그런데 어느새 다가온 승건이 손목을 잡아챘다.

“강채훈.”

“놔.”

채훈은 반사적으로 승건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의도치 않게 승건에게 팔이 잡힌 채 서로를 노려보는 형국이 되었다.

팔을 잡고도 승건은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놓으라고. 최승건.”

“아직 모르는군.”

채훈이야말로 승건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래서 짜증이 확 치솟았다. 이놈이 왜 이러는지 이해할 필요는 없었다. 더 이상 말을 섞기 싫었다.

“그래. 네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됐지? 이제 놔.”

한 번 더 손을 뿌리치자 이번에는 승건이 순순히 물러났다. 채훈은 다른 말을 하지 않고 그대로 객실을 나섰다.

“나중에 보자.”

등 뒤에서 승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채훈은 문을 닫고 큰 걸음으로 입구를 찾았다. 대기하고 있던 직원에게 인사를 받으며 가게를 나왔다.

*

*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는 동안에도 분노가 가시지 않았다. 그건 건물 밖에 나와서 차가운 겨울바람에 뺨에 부딪혀도 마찬가지였다.

미친 새끼.

씩씩거리며 걸음을 옮긴 채훈은 승건을 향해 욕이란 욕은 모두 퍼부었다. 10년 만에 만난 짝사랑이자 첫사랑과 섹스를 한 것은 드라마였지만, 스폰 제의를 받은 것은 막장 중의 막장이었다.

그것도 20억이란다.

20억이라는 돈의 크기를 가늠한 채훈은 그 자리에서 우뚝 섰다.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자신이 정년까지 병원에 다니고 퇴직해도 벌 수 없는 돈을 제시한 미친놈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싶어졌다.

“한 대 때릴걸.”

갈 곳 없는 분노와 억울함을 풀지 못한 채훈은 꽉 쥔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고소를 당하거나 말거나 잘난 얼굴에 멍 자국 하나는 남겼어야 했다. 후회해 봐야 이미 늦었다.

채훈은 늦기 전에 휴대폰을 꺼내서 승건의 번호를 차단하고는 메시지를 삭제했다. 승건의 이름이 사라지는 것을 보며 채훈은 인상을 썼다.

기분이 나쁘기도 했지만 안타깝기도 했다. 반짝이던 추억이 엉망으로 끝나버렸다. 그래서 더 화가 났다.

“하아.”

채훈은 결국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추억은 추억으로 남겨둬야 한다는 격언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하더니 너무 많은 게 바뀌었다.

그게 씁쓸하고도 조금 슬펐다.

*

*

채훈이 오피스텔로 돌아온 것은 9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가게에서 오피스텔까지 걸었다. 지하철 정류장 다섯 개가 넘는 거리라서 한 시간이 넘게 걸리고 말았다.

얼른 씻고 자야겠다고 생각하며 현관문을 열자, 화려한 운동화가 채훈을 반겨주었다. 처음 보는 운동화는 동생의 것이었다.

중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아니나 다를까, 채훈의 동생인 강영환이 소파에 엎드려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그의 주위에는 먹다 남은 과자 봉지와 음료수 캔이, 그리고 식탁 위에는 몇 입 베어먹지 않은 샌드위치와 맥주캔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바닥에는 강영환이 벗어둔 옷이 허물처럼 여기저기 흩어진 상태였다.

“어, 형 왔어?”

일어나지도 않고 가볍게 시선만 주고 소파에서 뒹굴거리고 있는 강영환의 모습은 어딘가 고양이를 떠올리게 했다. 끝이 살짝 올라간 눈꼬리에 고집스러워 보이는 입술이 잘 조화된 귀여운 얼굴과 늘씬한 체형이 그랬다.

타고난 외모와 밝은 성격으로 인기도 많은 강영환은 외향적인 성격이었다. 거기다 오메가이기까지 해서 주말이면 약속이 넘쳐났다. 그런 그가 금요일 밤에 이곳에서 이러고 있는 이유를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애인이랑 싸웠는데 마땅히 갈 곳이 없으면 강영환은 이곳에서 이렇게 시간을 뭉개곤 했다.

채훈은 동생이 자신의 집에 찾아온다면 충분히 반겨주었다. 다만 그건 미리 연락을 하고 허락을 받았을 때만이었다. 게다가 집이 어질러져 있는 것은 아예 다른 문제였다.

“강영환. 내가 미리 연락하고 오랬지.”

“뭘. 비번도 알고 있는데.”

“그거랑 다른 거라고 몇 번이나 말해야 알아듣겠어? 그리고 부스러기 흘리면서 과자 먹지 말랬잖아. 식탁 위에 쓰레기도 얼른 치워. 냄새나잖아.”

채훈은 강영환에게 잔소리부터 먼저 했다. 집은 독립을 한 채훈의 영역이었다. 가족들이 비밀번호를 알고 있는 것과 별개로 방문을 하려면 미리 연락을 하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강영환에게는 아무리 주의를 주어도 헛수고였다.

정리 정돈도 마찬가지였다. 결벽증까지는 아니었지만 채훈은 물건을 쓰면 제자리에 두고 쓰레기는 금방 치우는 편이었다. 반대로 강영환은 어지르는 데 일가견이 있었고, 그렇게 어지럽힌 것을 제 손으로 치우려고 하지 않았다.

본가에서는 강영환이 무엇을 하든 잔소리를 하는 사람이 없었다.

베타인 부모님 사이에서 오메가로 태어난 강영환은 어려서부터 몸이 많이 약했다. 부모님은 강영환을 애지중지 아꼈다. 특히 어머니가 그런 편이었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손에 물 한 방울 묻게 하지 않으려고 하셨다. 이제는 강영환도 건강해졌지만 어머니는 그대로였다.

그런 탓인지 강영환은 제멋대로인 경향이 있었다. 방문하기 전에 미리 연락을 하라고 해도, 네가 어지른 것은 직접 치우라고 해도 들어먹지를 않았다.

채훈이 독립하고 3년 동안 같은 실랑이가 반복되었지만 강영환은 그대로였다. 여전히 아무 예고도 없이 현관문을 열고 나타났다. 소파 위에서 과자 부스러기를 흘렸고, 먹고 남은 음식들을 아무렇게나 두었다. 벗은 옷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채훈은 동생의 성향이 그렇다고 이해하고 넘어가지 않았다. 나이가 어리면 또 모를까, 이미 다 큰 녀석의 뒤치다꺼리를 할 생각은 없었다.

“작은형은 맨날 잔소리라니까.”

“그래야 네가 치우잖아.”

“에이, 얼마 안 어질렀는데.”

“얼른 치워.”

채훈은 강영환에게 일부러 엄격하게 굴었다. 한 번 받아주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눈에 힘을 주고 노려보자 강영환이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나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청소에 서툰 강영환의 손은 야무지지 못했고 결국 채훈이 나서야 했다. 두 사람이 움직이자 정리는 금방이었다.

“집이 좁아서 그렇잖아. 조금만 어질러도 지저분하게 보이는 거라고. 이것 봐. 금방 치우잖아.”

테이블을 닦아내던 강영환이 입을 삐죽였다.

“금방 치울 거, 손 놓고 있었던 건 너야. 여기.”

“형은 다른 건 다 좋은데, 잔소리가 너무 심해. 잔소리 많이 하면 대머리 된다는 거 알아? ……어? 형한테서 알파 페로몬 향이 나는데?”

머그컵을 들고 채훈을 지나치려던 강영환이 멈춰 섰다. 알파 향기가 난다며 킁킁거리고 코를 들이미는 강영환 때문에 채훈은 당장에 대답하지 않았다.

오메가 동생을 둔 덕분에 채훈은 형질자에 대해 꽤나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알파와 오메가는 그들끼리의 페로몬 향을 맡을 수 있다고 했다. 발현을 하고 나이가 어느 정도 먹으면 페로몬 향을 거의 조절하기도 하지만 향수처럼 몸에 두르고 다니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그리고 알파의 경우 오메가에게 자신의 향을 덧입히기도 했다.

반면에 베타는 페로몬 향을 맡을 수도 없었고, 몸에 묻지도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채훈은 특이 체질이었다. 베타이면서 알파와 오메가의 페로몬 향이 묻었다. 그 정도가 심할 때는 알파나 오메가가 아니냐고 오해도 받았다. 특히 동생이랑 한방에서 자고 나면 더욱 그랬다.

샤워를 하고 나면 향이 지워졌기 때문에 채훈은 별달리 신경 쓴 적이 없었다. 그런데 알파 향기가 난단다.

채훈은 반사적으로 승건을 떠올렸다. 보통 페로몬을 뿜어낼 때 맨살로 접촉하면 가장 심하게 묻어났다. 승건에게는 겨우 손목이 잡혔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가 아니라면 딱히 만난 사람이 없었다.

애써 잊어버리려고 했던 승건을 떠올린 채훈은 속으로 혀를 찼다. 미련은 떨구고 왔는데, 보이지 않는 향기가 꼬리가 되어 달라붙어 온 모양이었다.

“지하철에서 묻었겠지.”

채훈은 별일 아닌 것처럼 굴었다. 반 박자 늦은 반응이었는데 강영환은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가? 그런 것치고는…… 독특한 향이야. 신기하네.”

“난 잘 모르겠어.”

어차피 베타는 페로몬 향을 맡을 수 없지만, 채훈은 자신의 어깨에 코를 대고는 킁킁거리는 시늉을 했다. 겨울바람 냄새가 맡아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게 승건의 향기는 아닐 터였다.

“당연히 모르지. 형은 베타잖아.”

“그러니까.”

“베타면서 페로몬을 묻히고 다니는 사람은 형밖에 없을걸? 그것보다 형, 일요일에 어디서 외식하는지 들었어?”

강영환이 대화의 주제를 바꿨다. 다음 주 화요일이 어머니의 생신이었다.

3년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 어머니의 생일과 아버지의 기일, 그리고 명절이 아니고서야 가족들이 모두 모일 일이 거의 없었다. 같은 서울에 살고 있어도 서로 사는 게 바빴다. 그래도 어머니의 생일이면 어떻게든 시간을 만들어냈다. 주중에 모두 모이기는 힘들었기 때문에 주말에 만나 생일을 축하하는 것은 암묵적인 약속이었다.

어머니는 고급 일식집에서 외식하는 것을 좋아했다.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잔칫상을 차리고 손님을 초대하길 바랐던 아버지에 비하면 어머니의 생일은 쉬운 편이었다. 특히 어머니는 가고 싶은 식당을 꼭 직접 고르시고 예약까지 본인의 손으로 다 했다.

“응. 작년에 갔던 거기 다시 가실 거라고 하더라. 맞아?”

“맞을 거야. 선물은 뭐 해?”

“현금 드리려고. 너는? 편지는 썼어?”

“안 썼어. 그런데 형. 이제 애도 아니고 이 나이 먹고도 엄마한테 편지 쓰는 거 이상하지 않아? 형도 안 썼잖아. 맨날 보는데 편지로 무슨 할 말이 있겠냔 말이야.”

머그컵을 싱크대에 내려놓은 강영환이 입을 삐죽거리며 불만을 토해 냈다. 편지라는 말에 채훈도 머릿속에서 승건을 몰아냈다.

어머니의 생일이 되면 강영환이 직접 쓴 편지를 드리는 것이 특별한 이벤트였다. 어머니는 돈이나 선물보다 강영환이 주는 편지가 더 기다려진다고 공공연히 말할 정도였다.

하지만 강영환은 글쓰기에 소질도 없었고 좋아하지도 않았다. 어렸을 때는 몰라도 나이가 들면 편지 쓰기가 귀찮아지는 법이었다.

강영환이 툴툴거리는 모습을 보며 채훈은 애매하게 웃었다. 이럴 때면 어머니의 사랑을 과도하게 받는 것도 좋은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써. 엄마가 좋아하시잖아.”

“뭐. 쓰긴 쓸 거야. 그냥 귀찮다는 거지. 형. 우리 야식 먹자. 떡볶이 어때? 아주 매운 거.”

강영환의 관심은 야식 메뉴로 돌아섰다. 뭘 먹을 생각이 없었던 채훈은 순간 술이 마시고 싶어졌다. 재수 없는 일과 우울한 기억이 한 번에 몰아닥쳤다. 세상의 근심을 잊을 술이 필요했다.

“전에 그거 반도 못 먹고 버렸잖아. 순한 맛이나 보통 맛으로 시키든지, 아니면 아예 딴 걸 시켜.”

“에이, 그래도 떡볶이는 매워야지.”

“그냥 돈까스 시켜. 너 돈까스 좋아하면서.”

2개월쯤 전에 강영환이 시키고 남긴 매운 떡볶이를 처리하느라 고생했던 채훈은 돈가스를 제안했다. 돈가스는 안 당긴다는 강영환 때문에 야식 메뉴를 두고 한참이나 티격태격했다.

채훈은 그렇게 승건을 잊었다.

* * *

“경숙이 아줌마라고 알아? 예전에 우리가 살던 이층집 있잖아. 거기 골목 끝에서 미용실을 했었는데. 너무 옛날이라 너는 모르겠다. 어쨌든 네가 오메가인 걸 기억하고 있었나 봐. 좋은 혼처가 있다고 바로 어제 연락이 왔더라고. 서울 시청에서 일한대. 7급 공무원이고, 나이는 서른하나. 사진도 있어. 봐라. 잘생겼지? 어때?”

채훈은 어머니인 조미혜가 강영환의 코앞에 휴대폰을 들이미는 것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어머니의 생일을 기념하는 가족 외식은 순조롭게 끝나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마지막으로 나온 튀김까지 거의 다 먹어가고 있는 와중에 형은 중요한 전화를 받는다며 객실을 나섰다. 그리고 어머니는 강영환에게 맞선 이야기를 꺼냈다.

익숙한 장면이었다. 전 세계 인구 중에 형질자는 극소수였고 오메가는 알파보다 숫자가 더 적었다. 알파와 오메가는 베타를 상대로 아이를 가질 수는 있었지만 형질자가 거의 태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보통은 알파와 오메가가 만나 결혼을 했다. 상대적으로 숫자가 적은 오메가가 보통 결혼 시장에서 선택권이 있었다.

강영환은 우성 오메가였다. 우성 오메가는 임신 확률이 아주 높았고, 과학적으로 증명되지는 않았지만 남성 오메가의 경우 반드시 형질자를 낳는다는 속설이 있었다.

형질자 핏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집안은 수두룩했다. 알파로 대를 잇는 대기업은 그 정도가 심했다. 알 만한 집안끼리 정략결혼을 시켰다가 형질자 자식이 태어나지 않아 이혼을 했다는 소문 아닌 소문이 한 번씩 퍼지기도 했다.

우성 오메가에다가 남자이기까지 한 강영환에게는 스무 살이 되기 전부터 선 자리가 들어왔다. 결혼은 나중에 해도 좋으니까 우선은 약혼부터 하자는 곳도 많았다. 강영환은 결혼이고 뭐고 대학 졸업장은 따야 할 것 아니냐고 소리쳤고 부모님도 그러라고 하셨다.

그리고 올해로 강영환이 대학 졸업반이 되자 바빠진 사람은 어머니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강영환의 결혼을 온전히 어머니가 책임지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가능한 많은 상대를 찾아보고 가장 괜찮은 조건을 고르고 싶어 했다.

보험 설계사를 하고 있는 어머니는 발이 넓었다. 서울 시청에서 일한다는 남자는 어머니가 고르고 고른 상대였을 것이다. 그러나 채훈은 강영환이 남자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강영환의 눈은 꽤나 높았다.

아니나 다를까 강영환은 사진은 보지도 않고 조미혜의 폰을 밀어냈다.

“난 공무원 별로야. 게다가 7급이 뭐야.”

“7급이면 적당하고 괜찮지. 이미 자기 아파트도 가지고 있다는데. 남자 집에 돈이 많대. 아버지가 충청도에서 크게 사과 농사를 한다더라. 대전에 건물도 몇 채 있고. 형제 없는 외동아들이라 그거 다 물려받을 수 있잖아. 은퇴하고 나면 과수원 하면서 살 수 있고. 얼마나 좋아.”

“아, 몰라. 난 사과 싫어.”

조미혜가 부드럽게 설득했지만 강영환에게는 먹히지 않았다. 하지만 조미혜도 끈질겼다.

“우선은 한 번 만나는 봐. 사람이 좋으면 되잖아.”

“돈도 없는데 사람만 좋으면 뭐 해.”

“돈이 없기는. 너는 아직 어려서 모르는 모양인데, 재벌이니 하는 곳보다 이런 곳이 진국이야. 결혼은 집안끼리 격이 맞아야 하는 거라고. 아무리 조건이 좋아도 대단한 집안에 가면 네가 기를 펴고 못 살 거잖아. 과한 건 욕심이야. 욕심. 안 그러니? 채훈아? 엄마 말, 맞지?”

조용히 물을 마시고 있던 채훈은 조미혜의 부름에 반 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럴 때 어머니의 편을 들어야 한다는 눈치 정도는 있었다.

“엄마 말대로 결혼은 집안끼리 하는 게 맞아.”

친구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결혼은 두 사람만 좋다고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중매결혼은 더더욱 그랬다. 형질자는 특수한 경우가 많았지만 그래도 결국 집안끼리 잘 맞아야 오래갈 수 있다고 다들 말했다.

“됐어. 내가 알아서 할 거야. 두고 봐.”

강영환의 고집은 대단했다. 그렇게 두 사람의 실랑이는 계속되었고, 다시 부외자가 된 채훈은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괜히 아는 척 말을 섞었다가 불똥이 자신에게 튈 수도 있었다.

지금이야 조미혜가 강영환의 결혼 상대를 찾느라 정신을 쏟고 있었지만, 얼마 전까지는 채훈에게도 사귀는 사람이 없으면 선을 보지 않겠느냐고 물었던 적이 있었다.

채훈은 가족들에게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을 이미 밝혔다. 전 애인과 헤어지고 난 후였다. 채훈의 휴대폰으로 게임을 하던 강영환이 메시지를 보고는 알아낸 것이 조미혜의 귀에 들어가 버렸다.

고등학교 때 자신의 성벽을 자각한 이후로는 계속 남자만 좋아해 왔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가족들에게 딱히 밝힐 생각은 없었다.

30여 년 전, 유명 연예인의 요란한 열애의 결과로 알파와 오메가의 동성 결혼이 법제화되었다. 그 이후에 차례로 동반자법과 베타를 포함한 동성혼도 자리 잡았다.

그러나 나이가 드신 어른들의 생각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특히 사내라면 자신의 일가를 이루고 살아야 한다는 보수적인 가치관을 가진 아버지는 더욱 그랬다.

채훈은 괜한 분란을 일으키기 싫어서, 마음 맞는 사람이 없으니까 평생 독신으로 살겠다고 했었다. 형도 동생도 있으니까 대를 잇는 것에는 별문제도 없고 말이다.

그러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뜻하지 않게 아웃팅을 당해버렸다. 조미혜는 세상이 변했으니 그럴 수도 있다고 했다. 형인 강수찬은 네 인생이니까 네가 알아서 하는 거라고 넘겨버렸다.

다만 조미혜는 남자와 연애해도 여자와 결혼을 할 수도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채훈에게 정기적으로 맞선을 보지 않겠냐고 물어왔다. 그게 아니라고 설명하면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또다시 선 자리를 들이밀었다.

그때마다 채훈은 나이가 들면 사람의 생각이나 가치관이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어쨌든 당분간 조미혜의 관심은 모두 강영환에게 몰릴 수밖에 없었다. 그사이에는 조용히 지내는 것이 상책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강수찬이 돌아왔다. 식사는 모두 끝난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대로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강영환은 친구들과 약속이 있다면서 중간에서 내렸고, 조미혜 역시 따로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고 해서 목적지까지 배웅했다. 강수찬과 채훈만이 차 안에 남았다.

“나는 적당한 지하철역에 내려주면 돼.”

“그 전에 잠시 나랑 이야기 좀 하자.”

“급한 거야?”

“그래.”

해는 이미 한참 서쪽으로 기울어진 상태였다. 채훈은 집에 돌아가는 길에 장을 봐서 반찬을 잔뜩 만들어둘 계획이었다. 그런데 이야기를 하자는 강수찬의 얼굴이 너무 진지해서 다음에 하자고 할 수가 없었다. 채훈은 반찬은 천천히 만들자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

*

목 좋은 자리에 위치한 대형 프랜차이즈 커피숍은 온갖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였다. 헤어지는 연인부터, 보험 영업사원과 고객이, 공부하는 학생이 저마다 자리를 차지하고는 자신의 일에 몰두했다.

그리고 강수찬과 마주 앉은 채훈은 황망함을 감추지 못하고 되물어야 했다.

“35억이라고?”

“응.”

강수찬이 침통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상상하기 어렵지 않은 단위에 채훈은 인상을 썼다. 35억. 강남에 위치한 커다란 아파트 한 채를 살 수 있는 돈이었다.

그리고 강수찬이 그 돈을 사기당했단다.

채훈은 도대체 뭐냐고 화를 내는 대신에 강수찬의 이야기를 차분히 들었다.

강수찬이 박 사장이라고 부르며 친하게 지냈던 사기꾼은 갭투자를 이용한 사기로 돈을 빼돌렸다. 다만 전형적인 형태와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강수찬을 공동 사업자로 내세워 화살받이로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35억이 넘는 돈을 들고 해외로 도피한 박 사장은 채훈도 두어 번 만난 남자였다. 형과 2년 전부터 알고 지낸 그는 약간 소심하고 성실한 인상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진짜 사기꾼이란 외모로 구분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강수찬은 자신이 왜 그에게 넘어갔는지 알 수 없다고 했지만 채훈은 대충 짐작했다.

장남으로 자란 강수찬은 성공해야 한다는 부담감과 허세를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기 전부터 사업을 하겠다고 돌아다녔다. 하지만 사업도 취업도 모두 실패한 후, 아버지 밑에서 일을 배웠다.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조명 가게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아버지가 기반을 잘 닦아놓은 가게는 주인이 바뀌고도 문제없이 굴러갔다. 그리고 기세가 오른 강수찬은 부자가 될 거라고 입에 달고 다녔다. 돈을 벌 욕심에 눈이 멀어 사기에 걸려든 게 분명했다.

사실 강수찬의 계획은 꽤나 그럴듯했다. 박 사장과 공동명의로 투자 회사를 세우고 투자자에게서 돈을 받아 서울에 있는 괜찮은 빌딩을 사들여서 월세를 받는 것으로 이자를 대신하고 건물값이 오르면 되팔아 차익을 챙긴다는 것이었다. 최근에 유행하는 갭투자를 살짝 변형한 방법이었다.

빌딩을 사들이고 6개월 동안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월세는 꼬박꼬박 통장에 꽂혔고 빌딩 시세는 순조롭게 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모두가 안심하는 순간에 박 사장이 빌딩을 내다 팔고는 필리핀으로 잠적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모든 책임은 한국에 남은 강수찬의 몫이 되었다.

35억짜리 빌딩에 투자자들의 투자금액은 18억이었다. 박 사장이 빌딩을 팔고 필리핀으로 잠적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마자 그들은 저마다 움직였다. 투자금액이 적고 강수찬과 친한 사람들은 조금 더 두고 보겠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투자자들은 어떻게든 빨리 돈을 받아내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강수찬도 사기를 당한 것이었지만, 투자 회사의 공동 대표로 그의 이름이 올라가 있기 때문에 책임을 피할 수가 없었다. 상담한 경찰도 변호사도 모두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특히 변호사는 민사뿐만 아니라 형사 소송도 준비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사기 금액이 커서 재수가 없으면 실형까지도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정황상으로는 강수찬도 피해자였지만 한패가 아니라는 것을 적극적으로 증명하지 않으면 일이 꼬일 수도 있었다. 형사에서는 고의성이 매우 중요했다.

“12월 중순에 박 사장이 필리핀으로 갈 때 나도 따라갔거든. 골프 여행이라고. 박 사장은 볼일이 있다고 거기 남고, 나는 돌아왔는데. 박 사장이 그 길로 도망쳐 버렸어. 그런데 그게 걸린다는 거야. 아. 씨발.”

그것 말고도 강수찬이 박 사장에게 별 의심 없이 각종 서류와 증명서를 맡긴 것도 문제가 된다고 했다. 하지만 제일 문제인 것은 따로 있었다. 바로 투자자들에게 반환해 줄 돈이 없다는 것이었다.

강수찬은 조명 사업으로 번 돈을 모두 빌딩에 투자했다. 4억은 수중의 현금으로, 그리고 13억은 가게와 현재 살고 있는 주택을 담보 삼아 대출을 받았다.

실제로 따지고 보면 가장 심각한 피해를 당한 것은 강수찬이었다. 빈털터리가 된 강수찬은 돈을 내놓으라고 아우성치는 투자자들에게 아무것도 갚을 수가 없었다.

변호사는 개인 회생을 추천했다. 당장에 융통할 수 있는 돈으로 투자금 일부를 갚고 합의를 하는 게 형사 사건에서 유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돈은 시간을 두고 천천히 갚아가는 것이 최선이랬다.

그런 긴 이야기 끝에 강수찬이 본론을 꺼냈다.

“윤 사장이라는 새끼가 있는데, 그 새끼가…… 거의 조폭이나 마찬가지야. 돈을 안 갚으면 감옥 보내겠다고 날뛰고 있거든. 그놈이랑은 합의가 안 돼. 그래서 아무래도 형사까지 갈 것 같은데…….”

“형?”

“만약에, 만약에 말이야. 진짜 가야 한다면 네가 가면 안 될까?”

“……?!”

뜻밖의 말에 채훈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강수찬이 가라고 한 곳이 감옥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한 박자 늦었다.

분위기가 얼어붙자 강수찬이 비장한 얼굴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니, 그러니까 그냥 누명 뒤집어쓰라는 게 아니고. 그게 네 이름으로 빌딩을 관리하는 회사를 하나 만들었거든. 그냥 유령회사야. 유령회사. 서류로만 있는 거. 그런데 그것 때문에 너도 같이 공범이 될 수 있단 말이야. 형제니까. 그러니까 너랑 나랑 둘 중에 감옥에 가야 한다면 나보다 네가 낫잖아. 돈을 갚으려면 내가 남아서 가게를 운영해야 하고. 안 그래? 너는 조명 가게에 대해 아는 게 없잖아. 오래 가는 것도 아니야. 한 몇 개월? 운 좋으면 집유로 나올 거야. 그래. 집유. 직장에서 잘리면 우리 가게에서 일하면 되잖아. 응?”

마치 준비라도 해 온 듯 강수찬이 막힘없이 말했다. 그리고 채훈은 할 말을 잃었다.

강수찬의 말은 논리적이었다. 돈을 갚으려면 강수찬이 조명 가게를 닫지 않고 계속 운영해야 했다. 조명 가게는 경기를 타긴 하지만 아버지가 탄탄하게 기반을 다져놓았기 때문에 수익이 나쁘지 않았다. 만약 둘 중 한 명이 감옥에 가고, 한 명이 돈을 벌어야 한다면 벌이가 많은 강수찬이 남아서 돈을 버는 게 맞았다.

하지만 그건 그냥 말장난일 뿐이었다. 그 전에 자신과 상의도 없이 유령회사의 대표로 만들어버린 것부터가 문제였다. 미안하다고 하지도 않고 어쩔 수 없으니 네가 희생하라고 하는 것부터가 틀려먹었다.

아무리 가족이라고 하더라도 형을 대신해서 감옥에 가는 것은 말도 안 되었다. 그렇다고 형이 알아서 하라고 매정하게 굴기에는 사정이 너무 나빴다. 조금만 삐끗하면 가족 모두가 거리에 나앉을 판이었다.

채훈은 모진 성격이 아니었다. 어렸을 때는 자신만 참으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고 나이가 들어서는 어지간한 일에는 무던하게 넘어갔다. 특히 가족이 얽히면 그 성향이 더 두드러졌다. 서주명은 착한 아이 콤플렉스라고 했을 정도였다.

취직을 하고 독립을 하고 나서야 채훈은 지금까지처럼 해서는 안 되겠다고 자각은 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닥치면 냉정하게 생각하면서도 자신을 위한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채훈은 감옥을 대신 가지는 못하겠다고 거절하는 대신에 반사적으로 승건이 제시한 20억을 떠올리고 말았다. 20억이면 투자자들에게 모든 돈을 갚고도 남을 금액이었다.

승건은 강수찬이 어떤 상황이었는지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에게 20억이라는 돈을 제시하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아직 모르냐고 했던 것도, 다시 보자고 했던 것도 이유가 있었다.

한숨이 아니라 욕이 나오려고 했다. 다 알고 있었으면서 자초지종을 설명하기보다는 절실해지기를 기다리겠다는 녀석의 성격은 더럽게 꼬인 게 분명했다. 물론 그때 설명을 들었더라도 자신이 믿지 않았을 확률이 높았다. 그래도 일의 순서가 틀렸다.

“채훈아? 응? 영환이가 제대로 결혼하면 다 해결될 거야.”

채훈은 빌다시피 애원하는 강수찬을 보다가 한숨을 삼켰다. 과한 욕심을 부리다가 모든 것을 날리고는 책임을 동생들에게 전가하고 있는 형의 모습에 속이 울렁거렸다.

옛날부터 강수찬이 사고를 치면 자신이 수습을 하긴 했다. 강수찬이 아버지가 아끼던 도자기를 깨트리고는 채훈이 그랬다고 거짓말을 한 적도 있었다. 그래도 그때는 채훈이 아버지에게 혼나는 것으로 끝났는데 이번에는 너무 암담했다.

“엄마는 모르지?”

“응. 아직 몰라.”

“하아. ……조금 생각해 볼게. 지금 당장 고소당하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되는지 보고, 보고 난 다음에 결정해도 늦지 않을 거야.”

채훈은 여지를 뒀다. 강수찬의 말만 듣고 당장에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자신이 어떻게 사기에 얽혀 있는지도 자세히 알아봐야 했다.

“고맙다. 진짜. 고마워. 내가 진짜 말라 죽는 줄 알았는데, 너 때문에 숨통이 트인다.”

강수찬은 마치 채훈이 대신 감옥에 가겠다고 맹세라도 한 듯이 굴었다. 채훈은 강수찬의 성향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듣고 싶은 것만 들은 다음에 그게 진실이라고 주장하곤 했다. 만약에 채훈이 감옥에 못 가겠다고 한다면, 자신에게 거짓말을 한 거냐고, 왜 기대를 하게 만드냐고 화내고 따질 게 뻔했다.

채훈은 깊은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편한 방법도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채훈은 승건이라는 선택지를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미루어두었다. 아직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딘가 희망이 있다고 채훈은 그렇게 믿고 싶었다.

* * *

냄비 안에 죽이 맛있는 냄새를 내며 끓고 있었다. 죽이 냄비에 눌어붙지 않게 나무수저로 젓던 채훈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요리를 하면 딴생각이 안 나는 편인데, 오늘은 유달리 머릿속이 복잡했다.

상황은 채훈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나빴다.

강수찬이 조폭이나 다름없다고 했던 윤 사장과는 사이가 엉망으로 꼬이고 말았다.

윤 사장이 조명 가게를 찾아와 강수찬을 위협하면서 영업을 방해했다. 그때 마침 강수찬을 만나러 갔던 강영환이 그 장면을 보고 끼어들었다가 언쟁이 벌어졌는데, 감정이 격해진 상황에서 강수찬이 윤 사장을 밀어 넘어뜨렸다.

운 나쁘게도 조명기구 위로 넘어진 윤 사장은 깨진 유리에 오른쪽 팔을 크게 베이고 말았다. 신경 손상으로 새끼손가락이 제대로 굽혀지지 않는 장애가 생긴 윤 사장은 어떤 합의도 해주지 않을 거라고 씩씩거리고 있었다.

사기 횡령 사건과 별개로 강수찬은 폭행 상해로 따로 고소가 진행되었다. 우발적인 범행이라지만 강수찬은 초범이 아니었다. 과거에 친구와 시비가 붙어 쌍방 폭행으로 합의 없이 재판을 한 적이 있었고,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때문에 합의를 하지 않으면 실형은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에 오늘 낮에 갑자기 윤 사장에게서 폭행 상해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면서 연락이 왔었다. 조용히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면서 가게에서 만나자고 했다. 강수찬은 당장에 합의가 급하니 윤 사장의 조건을 들어보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윤 사장은 혼자 오지 않았다. 깡패 같은 남자 다섯을 데리고 나타났다. 그들은 고성을 지르거나 폭행을 휘두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커다란 덩치의 남자 다섯은 그 존재만으로 위협적이었다.

깡패들을 병풍처럼 등 뒤에 둔 채 윤 사장은 가게 한가운데 앉아 강영환과의 결혼을 합의 조건으로 내세웠다.

윤 사장은 알파였고 결혼 상대를 찾고 있었다. 강수찬과 윤 사장이 사돈지간이 되면 그래도 사돈을 감옥에 보낼 수는 없지 않겠냐는 주장이었다. 우성 오메가의 값이라며 5억이라는 투자금도 돌려받지 않겠다고 했다.

강수찬은 당연히 말도 안 된다며 거절했다. 윤 사장은 화내지 않았다. 그저 비열하게 웃으면서 협박을 했을 뿐이었다.

자신의 팔을 이렇게 만들어놨는데, 사돈도 뭣도 아니면 밤길은 조심해야 되지 않겠냐고 말이다.

그러나 윤 사장의 합의 조건은 절대 들어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강영환보다 스물두 살이나 더 많았다. 게다가 그의 폭력 성향은 조명 가게 거리에서도 꽤나 유명했다. 특히 그의 전 부인이 폭행을 견디다 못해 자살했다고 소문까지 나 있었다.

그런 곳에 강영환을 보낼 수 없었다. 강영환은 당장에 친구네 집으로 피신했고, 조미혜는 자리에 드러누웠다. 강수찬은 아는 경찰을 만나러 간다며 나갔다.

퇴근을 한 후에 집에 들렀다가 조미혜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채훈은 먼저 죽부터 끓였다. 조미혜는 입맛이 없다고 했지만, 뭐라도 먹어야 힘이 나는 법이었다.

잘 풀어진 죽을 그릇에 담고 쟁반에 올려 안방으로 향했다. 조미혜가 침대에 누워 끙끙 앓고 있었다.

“엄마. 죽을 끓였어. 이거라도 먹어.”

“내가 그걸 먹을 정신이 없다. 정신이. 도대체…… 도대체 말이 되니? 그딴 놈이랑, 우리 막내랑 결혼이라니. 절대 안 돼. 안 되고말고. 차라리 수찬이 보고 감옥을 가라 그래. 가게는 내가 보면 되니까.”

“엄마.”

채훈의 부름에 조미혜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놈이 문제야. 35억이라니. 세상에. 그 돈을 어떻게 갚아. 아이고. 내가 답답해서 못 살겠어.”

조미혜가 가슴을 퍽퍽 쳤다. 채훈은 아무 말도 못 했다. 방법이 없는 것은 채훈도 마찬가지였다.

다시 한번 죽을 드시라고 권하려고 하는데 조미혜의 화살이 채훈에게 날아왔다.

“수찬이가 헛짓거리를 하면 너라도 말렸어야지. 아니면 나한테라도 말을 하든가. 왜 되지도 않은 일을 한다고 해서 이 사달이냐고.”

“나도 몰랐어.”

“수찬이 말로는 같이 했다며. 그 박 사장인가 하는 사기꾼을 소개시켜 준 것도 너라던데.”

“같이 하기는 뭘 같이 해. 형이 마음대로 내 명의 가져다 쓴 건데. 도대체 형은 왜 이런 걸 거짓말을 해.”

억울한 누명에 채훈은 사실을 말했다. 강수찬이 아버지가 아끼던 도자기를 깨트렸을 때는 멋모르고 당했지만 나이가 들고 나서야 따질 건 따졌다.

“아니. 됐다. 이 상황에서 잘잘못을 따지면 뭐 해.”

조미혜의 짜증에 채훈은 입을 다물었다. 잘잘못을 따질 상황이 아니기는 하지만, 그래도 결국 시간이 흐르면 조미혜의 머릿속에서는 채훈의 잘못이라고 기억될 게 뻔했다.

나중에 강수찬과 삼자대면이라도 하자고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채훈은 다시 죽을 권했다. 조미혜의 전화가 울린 것은 그 때였다.

강수찬이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연락이었다.

*

*

차는 반파되었지만 다행히 강수찬은 왼쪽 다리가 부러진 것 말고는 무사했다. 다만 수술방이 잡히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려서 응급실에 대기하고 있어야 했다.

그사이 강수찬이 설명한 사고의 경위는 간단했다. 어떤 놈이 칼치기를 하고는 뺑소니를 쳤다는 것이었다. 균형을 잃은 강수찬의 차는 그대로 가로수를 들이박았다. 흔하다면 흔한 사고였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사고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정신을 잃은 강수찬을 대신해 119를 부른 것이 윤 사장이었기 때문이었다. 병원까지 따라온 윤 사장은 강수찬의 보호자를 자처했다고 했다.

“분명 윤 사장 짓이야. 경찰을 불러야 해.”

“우선은 블랙박스부터 확인하는 게 좋을 거야. 거기 다 찍혀 있을 테니까.”

조미혜는 물론이고 강수찬도 당장에 경찰을 불러야 한다고 분통을 터트렸다. 채훈 역시 그가 의심스러웠지만 과연 증거가 있을지 의문이었다.

증거를 확보해야 한다고 옥신각신거리는데 갑자기 윤 사장이 어슬렁거리며 나타났다. 합의 때문에 채훈도 윤 사장을 몇 번 만났었다. 40대 중반의 남자는 어느 모로 보나 험상궂게 생겼다.

팔에 붕대를 감고 보호대로 고정시킨 윤 사장 뒤로는 조미혜가 말했던 깡패 넷이 따르고 있었다. 동네의 크지 않은 병원 응급실은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모이는 작은 광장으로 온갖 소란이 일어나는 곳이었다. 그래도 검은 양복을 입은 덩치 큰 사내들의 등장은 위화감을 주기 충분했다.

윤 사장이 이쪽으로 침대로 다가오자 조미혜가 겁을 먹었다. 강수찬이 욕설을 내뱉었다. 윤 사장을 가로막은 것은 채훈이었다.

“저랑 얘기하시죠. 윤 사장님.”

“아, 강 사장의 동생이네. 그냥 인사하려는 거야. 겸사겸사. 영환이는 없네. 이럴 때 얼굴 한 번 보면 좋은데 말이야.”

“지금 우리 형은 윤 사장님을 만날 상황이 아닙니다.”

“내가 강 사장 은인인데? 119를 부른 게 나라는 소리를 못 들었나 봐? 내가 우연히 지나가다가 강 사장 차를 발견했다고.”

“우연인지 아닌지는 확인해 봐야죠.”

채훈이 단호하게 말하자 윤 사장이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강 사장. 강 사장 동생이 깡이 있어. 그런데 사람 인생이란 어떻게 되는지 모르는 거 알지? 강 사장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아차 하다가 훅 간다고. 사람 목숨도 마찬가지라서 조심해야지. 안 그래? 응?”

다들 들으라는 식으로 윤 사장이 큰 목소리로 주저리주저리 읊어댔다. 조심하라고는 하지만, 그의 태도는 누가 봐도 질 나쁜 협박이었다.

하지만 채훈은 굴하지 않았다.

“더 할 말 없습니다.”

“쪼그만 게 겁이 없어. 그래. 여기는 보는 눈이 많지. 그건 나도 알아. 하지만 밖에 나가면 어떻게 될까? 응? 감당할 수 있어?”

주위를 한 번 둘러보다가 느물한 웃음을 짓는 윤 사장을 보며 채훈은 얼굴을 굳혔다. 번뜩이는 윤 사장의 눈빛은 마치 교활한 뱀처럼 빛났다. 이런 놈들의 성향은 한결같았다. 자신이 우위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며 사람의 약점을 끊임없이 공격했다.

채훈은 평범한 방법으로는 이 상황을 타개해 낼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할 말 다 했으면, 이제 돌아가세요.”

“그래. 그래. 시간은 충분하니까. 강 사장. 뺑소니 차량이 차량 블랙박스에 찍혀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사돈지간이 될 건데 도와드려야지. 범인은 금방 잡을 거야.”

끝까지 사람 속을 뒤집어놓은 윤 사장이 뒤돌아섰다. 그가 응급실을 나서자 여기저기 얼어붙었던 공기가 풀렸다.

“정말로 돌아가는 건지 확인하고 올게.”

채훈은 윤 사장 무리의 뒤를 쫓았다. 다행히 그들은 다른 곳으로 새지 않고 주차장에 세워둔 차를 올라타고는 사라졌다.

겨울밤, 채훈은 빨간색 후미등이 멀어지는 것을 지켜보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윤 사장의 위협은 현실이었다. 이제 자존심을 내다 버려야 했다.

한숨을 삼킨 채훈은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차단한 번호를 되돌리는 방법을 찾느라 조금 버벅거리기는 했지만 금방 해결할 수 있었다.

[채훈인데, 아직 제안 유효해?]

짧은 문장은 금방 완성되었다. 채훈은 망설이지 않았다. 차단을 풀고 전송 버튼을 눌렀다.

말풍선 옆에 1이 생긴 것을 확인한 채훈은 답장이 오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휴대폰을 패딩 점퍼 주머니 안에 집어넣었다.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질렀다는 사실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괜찮아.”

마법의 주문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으니 이게 최선이었다. 그러니까 괜찮을 것이다. 10년 만에 만난 첫사랑이랑 충동적으로 섹스해도 세상이 망하지 않는 것처럼, 그에게 돈을 받고 자신을 팔아도 변할 건 없었다.

아니, 뭔가 변하기는 할 것이다. 그래도 가족이 불행해지는 것보다는 나았다.

“하아.”

무거운 마음에 길게 한숨을 내쉬자 하얀 입김이 퍼져 나갔다. 차가운 겨울바람에 얼어버린 손을 호주머니에 집어넣는데, 때마침 휴대폰이 진동했다.

채훈은 잽싸게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설정 탓에 팝업 창은 보이지 않았다. 떨리는 손으로 잠금을 풀고 메시지를 확인했다.

승건의 답장 역시 짧았다.

[유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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