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1. 재회】 (2/26)

  【01. 재회】

뚜루루루. 뚜루루루.

통화 연결음이 오래 울렸다. 채훈은 깊은 빡침을 억누르며 숨을 골랐다.

받아라. 받아라.

주문처럼 전화를 받으라고 되뇌었지만 연결음은 부재중 메시지로 넘어갔다. 벌써 세 번째였다.

“하아.”

채훈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욕을 하고 싶은 것을 꾹 참고는 재다이얼 버튼을 눌렀다. 그사이에 사무실 직원들의 복잡한 시선이 닿았다. 대부분은 안타까움이었다. 그러나 채훈은 거기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길어지는 연결음을 들으며 채훈은 비어 있는 옆자리를 노려보았다.

사고를 친 것은 채훈의 부사수인 박광호였다. 그것 때문에 오늘 아침부터 사무실이 발칵 뒤집어졌는데, 사건의 주범인 박광호는 10시가 다 되도록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무단결근이었다.

오늘의 사달은 채훈이 VIP 병동에 있는 주임간호사의 월급 명세서에서 이상을 발견한 것으로부터 시작했다. 주임간호사의 호봉이 잘못 입력되어 월급이 오버 지급된 것이었다.

태화 병원은 대한민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규모였고, 간호사 수도 3,000명이 넘었다. 아무리 시스템이 계산을 한다고 해도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라서 이런 실수가 가끔씩 있었다. 담당자가 지방 출장을 간 상황이라 문제를 발견한 채훈이 처리하기로 했다.

12월 말이긴 했지만, 다행히 연말 정산 전이었다. 전화로 사정을 설명하자 주임간호사도 이해해 주었다. 필요한 서류는 내일 오전에 채훈이 직접 전달해 주기로 했다. 간단하게 끝날 일이었다. 박광호가 끼어들지 않았다면 말이다.

통화를 끝내자마자 옆에서 듣고 있던 박광호가 말을 걸었다. 바쁜 채훈을 대신해 한가한 그가 서류를 가져다주겠다며 나섰다. 채훈은 정말 바빴지만 딱 잘라 거절했다. 박광호를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2년 계약직으로 태화 병원에 입사한 박광호는 원래 기획홍보과 소속이었다. 젊고, 잘생긴 데다, 돈까지 많은 그는 자신감이 넘쳤다. 하지만 그건 겉모습일 뿐이었다. 기획홍보과에서 몇 번이나 사고를 친 박광호는 또라이라는 별명을 얻고는 총무과로 쫓겨나다시피 했다.

박광호의 사수가 된 채훈은 그가 또라이가 맞다고 강력하게 주장할 수 있었다. 근태는 나빴고 일도 더럽게 못했다. 실수를 사과하는 법도 없었다. 그런데도 기가 죽기는커녕 당당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박광호가 이사장이라는 어마어마한 백을 등에 업은 낙하산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사장을 백으로 둔 놈이 말단 계약직인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그래도 입고 쓰는 걸 보면 금수저인 것은 거의 확실했다. 사무실 직원들의 말에 의하면 그의 손목에 있는 시계 값만 1,000만 원이 훌쩍 넘는 거랬다.

자신은 이런 곳에 있을 사람이 아니라며 틱틱거리는 박광호에게 채훈은 중요한 일은 맡기지 않았다. 하물며 실수를 바로잡으러 가야 하는 일은 더욱 그랬다.

그런데 박광호는 제멋대로 움직였다. 퇴근한 척하다가 다시 사무실로 돌아와서는 채훈이 서랍에 넣어둔 서류를 빼 들고 VIP 병동으로 향했다.

의욕적으로 나섰다면 일을 잘 처리했어야 했는데, 박광호는 대면한 주임간호사에게 모욕적인 언사를 내뱉었다. 옆에서 오고 가다가 그걸 듣게 된 수간호사가 주의를 주다 못해 총무과에 정식으로 항의하겠다고 경고까지 했다. 그래도 박광호의 오만한 태도는 그대로였다. 할 테면 해보라는 식으로 굴었다.

정말 빡 치는 건 그렇게 일을 저질러놓고는 박광호가 채훈의 이름을 댔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채훈은 출근을 하자마자 벼락을 맞았다. 자초지종을 듣기 전에 씩씩거리는 과장에 이어 싸늘하게 굳은 차장으로부터 욕을 얼마나 먹었는지 모른다. 다행히 옆자리에 앉은 이영진 대리가 증인이 되어준 덕분에 채훈은 누명을 벗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VIP 병동의 이하연 수간호사는 박광호가 직접 찾아와서 사과하지 않으면 징계위원회에 회부하는 것도 불사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을 일으킨 박광호는 무단결근에 전화도 받지 않고 있었다.

“강 주임.”

부재중 메시지로 넘어가는 것을 들으며 다시 재다이얼을 누르려고 하는데 과장이 채훈을 불렀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과장을 따라나서는 채훈의 뒤로 안타까운 시선이 따라붙었다. 능력도 좋고 사교적인 성격의 채훈은 여러모로 신임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채훈의 불행을 대신해 줄 수 없었다.

*

*

채훈을 부른 것은 천상재 행정부장이었다. 태화 병원의 행정직 전부를 통솔하는 행정부장의 권한은 막강했다. 그는 대놓고 박광호의 편을 들었다. 박광호가 채훈의 지시를 받고 VIP 병동으로 갔다는 주장을 전했다. 박광호가 채훈인 척한 것도 너무 놀라서 그랬던 거라고 말도 안 되는 실드를 쳤다.

다행히 채훈에게는 증인도 증거도 있었다. 증인은 채훈의 옆자리에 앉은 이영진 대리로, 그는 채훈이 그런 지시를 한 적 없다고 증언해 주었다. 증거는 총무과 내부에서 출입구를 찍고 있는 CCTV였다. 박광호가 먼저 퇴근을 했다가 다시 돌아와서 채훈의 책상에서 서류를 가져가는 것이 찍혀 있을 거라고 하자, 천 부장은 그 이상 책임 소재를 따지지 못했다. 그래도 일이 커지면 네가 곤란해질 거라는 협박이 이어졌다.

결국 수습은 채훈의 몫이었다. 박광호가 갑자기 크게 아파서 한동안 결근을 하게 되었다고 천 부장이 전해 왔기 때문이었다. 징계위원회에 회부하겠다고 잔뜩 벼르고 있다는 이하연 수간호사를 설득하러 간 것은 채훈과 채훈의 선임인 이영진 대리였다.

태화 병원에서 20년 근속한 이영진 대리는 발이 넓었고, 이하연 수간호사와도 안면이 있었다. 이 대리의 중재로 수간호사와 주임간호사에게 사과를 하고 사정을 설명했다.

이하연 수간호사는 박광호를 향해 미친 새끼라고 원색적인 욕을 하며 분통을 터트렸지만 징계위원회에 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이사장이 백이라면 척을 져서 좋을 게 없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걱정했던 것보다 쉽게 일이 끝났다. 감사하다는 인사를 잊지 않고 VIP 병동의 간호사실을 빠져나왔다. 직원용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가는 길에 이 대리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이 정도로 끝나서 다행이다. 그렇지?”

“네. 수간호사님이 화통하시네요.”

“뒤끝 없다고 했잖아. 금수저 낙하산이 얼마나 지랄 맞은 건지 다들 아니까. 그래도 더 이상 박광호 얼굴 볼 일 없다고 생각하니까 속이 시원하다.”

“그만둔대요?”

이 대리의 말에 채훈은 깜짝 놀라 물었다. 지금껏 박광호가 툭툭 내뱉는 말을 종합해 보면 여기서 2년은 버텨야 하는 사연이 있는 것 같았다. 박광호는 꾸역꾸역 다니려고 하고, 천 부장이 애써 감싸는 걸 보면 거의 확실했다.

“아니. 과장님이 딴 데로 보낼 거래. 이 사달을 냈는데, 어떻게 데리고 있겠어? 안 그래?”

“그렇다면 정말 다행이고요.”

“다행이지. 다행이고말고.”

박광호의 또라이 짓 때문에 박광호의 사수인 채훈도, 그리고 채훈의 선임인 이 대리도 같이 고생했었다. 이번 일로 눈앞에서 사라져준다면 전화위복이었다.

서로 고개를 끄덕이며 엘리베이터 앞에 섰는데, 이 대리의 품 안에 있는 휴대폰이 몇 번이고 진동했다. 휴대폰을 꺼내 확인한 이 대리가 한숨을 푹 내쉬며 중얼거렸다.

“아이고. 연말이라고 줄줄이 술 약속이네. 이제 간이 안 버텨주는데 말이야. 강 주임은 어때? 약속 있어?”

“내일 동창회가 있습니다. 고등학교 동창회요.”

내일은 토요일이었고, 망년회를 빙자한 모임은 보통 술판으로 끝나기 마련이었다. 채훈은 꿀꿀한 기분을 털어버리기 위해 잔뜩 마실 생각이었다.

“강 주임도 술 적당히 마셔. 나처럼 고장 난 다음에 후회하지 말고. 에구구. 나도 꼰대가 다 됐어. 잔소리나 하고. 그래도 간은 소중해. 알지?”

“그럼요. 알죠. 모든 게 다, 간 때문이잖습니까.”

“푸하하. 강 주임도 아재 개그를 하네.”

채훈의 철 지난 농담에 이 대리가 웃었다. 채훈은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으쓱였다. 조직의 막내로 사회생활을 하려면 이런 어설픈 개인기 하나쯤은 있어야 했다. 그사이에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이 대리가 먼저 타고 뒤따라 탄 채훈이 닫힘 버튼을 누르고 고개를 들 때였다.

맞은편에 있는 VIP 병동 전용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훌쩍 큰 키와 짙은 회색 코트가 눈에 확 띄었다. 그리고 선명한 얼굴이 와 닿았다.

“어.”

그가 누군가와 닮았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채훈이 탄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그래도 채훈은 남자의 이름을 단숨에 떠올렸다.

최승건.

너무 빠르게 문이 닫혀서 확신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그인 것 같았다.

“강 주임? 왜 그래?”

“아, 그게. 아는 사람을 본 것 같아서요. 그런데 잘 모르겠어요.”

“그래? 그럼 전화해 봐.”

“네.”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지만 채훈은 그의 전화번호를 몰랐다.

10년 전의 인연이었다. 이제는 다 잊었다고 여겼는데, 그저 비슷한 사람을 본 것만으로 여러 가지 기억이 떠오르려고 했다.

피투성이가 된 그를 끌어안은 채 고꾸라진 것이 끝이었다. 그날 이후로 승건을 만나지 못했다. 수능을 치지 않은 승건은 계속 결석을 하다가 졸업식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어찌어찌 선생님을 통해 살아 있다는 것만 겨우 알아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승건이 미국에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것은 군대에 가기 직전이었다.

채훈은 쓴웃음을 삼켰다. 무사하다고 연락 한 번 해주지 않는 놈에 대한 원망은 그때도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끝나버린 첫사랑은 이제 추억이라고 부를 수 있었다.

승건을 다시 만난다면 웃으면서 옛날이야기를 할 수 있기를 바랐다.

* * *

불판 위에 올라간 두툼한 삼겹살이 멋진 소리를 내며 노릇노릇하게 구워졌다. 마늘과 양파, 버섯도 보기 좋게 익어갔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 두 번째로 열리는 동창회 장소는 을지로에 있는 고깃집이었다. 첫 번째처럼 호텔 연회장이 어떻냐는 소리도 있었지만, 연말이니까 고기와 술이 좋다는 의견이 압도적이었다. 300명이 넘는 졸업생들 중에 동창회에 참석하겠다는 인원이 50명도 되지 않은 이유도 있었다.

덕분에 짧은 축사 이후에는 먹고 마시는 시끌벅적한 분위기였다.

채훈은 집게와 가위로 삼겹살을 먹기 좋게 잘랐다. 가족끼리 고기를 구워 먹을 때도, 그리고 사무실에서 회식이 있을 때도 집게와 가위는 채훈의 몫이었다. 친구들과 만날 때도 마찬가지였다. 채훈이 헌신적인 성격이어서였지만, 그의 몸에 밴 버릇이기도 했다.

속이 익을 때까지 적당히 뒤집다가 한쪽으로 밀어두자 세 쌍의 젓가락이 달려들었다. 불판을 둘러싼 사내는 채훈을 포함해 네 명이었다. 모두 고등학교 때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이었다.

곧 서른을 목전에 둔 사내의 먹성이란 대단한 것이어서 불판은 눈 깜짝할 새에 텅텅 비어버렸다.

“채훈아. 너도 좀 먹어. 그거 나 주고.”

“에이. 유진이 너도 맨날 굽잖아. 오늘은 내가 한다. 그거 나 줘.”

채훈이 계속 고기를 구우려고 하자 맞은편에 앉은 신유진이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집게와 가위는 채훈의 옆에 앉은 남태호가 가져갔다. 불판 위는 다시 삼겹살로 가득 찼다. 그사이에 서주명이 빈 잔에 소주를 채워주었다.

친구들끼리 오가는 이야기는 늘 비슷했다. 다들 살기 바빴노라고 하면서 직장 상사의 욕을 하다가 정치나 경제 등의 이슈를 꺼냈다. 동창회니까 학창 시절의 추억도 끼어들었다. 그리고 마지막은 언제나 같은 주제로 귀결되었다.

“그러니까, 진짜 로또에 당첨된다고 해도 시내에 있는 아파트 하나 사기 어렵다니까. 아기가 태어나면 집도 넓혀야 하는데. 돈이 웬수다. 어휴.”

네 명 중에 유일하게 결혼한 신유진이 한숨을 쉬고는 소주를 입에 털어 넣었다. 다들 돈이 문제였다. 신유진은 박봉의 공무원이었다. 그리고 대기업에 취직하고도 1년 만에 뛰쳐나온 남태호는 아버지 친구분 밑에서 미장 기술을 배우느라 죽을 맛이라고 했다. 서주명은 IT 기업에서 가루가 되도록 갈리고 있었다.

서로 사는 모습은 다르지만 그래도 바라는 것은 비슷한 법이었다. 로또, 아파트, 주식, 투자로 이어지던 대화는 곧 정부 정책과 집값 문제로 옮겨갔다.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친구들을 바라보던 채훈은 조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열아홉 살에는 PC방과 축구, 걸그룹, 성적이 전부였던 세상이 이렇게나 커져 버렸다는 게 조금 이상했다.

감성적인 생각에 채훈은 소리 없이 웃음을 삼켰다. 결국 그만큼 나이를 먹었다는 소리였다. 어쩌면 술 탓이기도 했다. 주량이 소주 세 병인데, 벌써 두 병은 마셨다. 그래도 이런 날은 좀 취해줘야 하는 법이었다.

“그 또라이 새끼가 내 이름을 댔다니까. 그것 때문에 얼마나 까였는지.”

분위기가 무르익자 채훈도 직장 생활의 고달픔을 토로했다. 박광호의 또라이 짓에 친구들의 욕을 하며 호응을 해주었다. 어디를 가나 성격 나쁘고 일도 못하는 놈들이 문제라고 한마디씩 하면서 술잔이 돌았다. 그렇게 화풀이하듯이 소주잔을 비워내는데 입구 쪽이 시끄러워졌다.

새로운 얼굴이 등장할 때의 소란스러움이라 채훈은 별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소란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어……. 쟤는?”

남태호의 중얼거림에 채훈은 그제야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학생회장이었던 이석진과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비스듬한 옆모습만으로도 채훈은 그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보았다. 최승건. 어제 VIP 병동에서 스쳐 지나간 그 남자는 승건이 맞았다.

“최승건이잖아? 맞지?”

누군가 채훈의 머릿속에 가득 찬 이름을 대신 말했다.

고등학교 동기 중에, 정확하게는 같이 학교에 다닌 재학생은 물론이고 선생님들 사이에서도 그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2학년 여름 방학이 끝나고 전학을 온 승건은 연예인의 뺨을 때리고도 남을 잘생긴 얼굴로 유명해졌다. 남고였지만 키도 크고 몸도 좋아서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9월 모의고사에서 전국 등수에 이름을 올리면서 선생님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잘생기고 공부도 잘하는 승건은 인기가 많았지만 딱히 친하게 지내는 친구가 없었다. 무뚝뚝한 성격에 또래들이 열광하는 것에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서 겉돌았기 때문이었다. 사회의 작은 축소판과 같은 학교에서도 그는 조금 특이한 존재였다.

알파라는 소문이 진짜라고 밝혀지면서 더욱 그랬다. 누구는 동경으로, 질투와 시기로, 혹은 무관심으로 승건을 대했다.

그런 승건이 수능을 한 달 정도 앞둔 어느 날 갑자기 학교에 나오지 않으면서 다시 한번 논란의 중심이 되었다. 담임은 승건이 교통사고를 당해 입원했다고만 말했다. 그대로 계속 장기 결석을 하던 승건은 결국 졸업식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승건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아는 사람도 없었다. 들리는 얘기로는 수시로 합격한 대학에서도 그를 볼 수 없다고 했다. 나중에서야 미국에 있다는 소리만 잠깐 나돌았을 뿐이었다.

그런 승건이 갑자기 동창회에 나타났으니 다들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저 녀석이 웬일이야?”

“미국에 갔다고 했었지?”

“학생회장이 부른 것 같은데? 아는 사이인가?”

채훈은 친구들의 의문을 한 귀로 흘리며 승건이 학생회장과 악수를 하고 자리에 앉는 것을 계속 바라보았다.

채훈의 첫사랑이자, 잊지 못할 경험을 하게 한 장본인이 저기 있었다.

승건을 만나면 웃으면서 옛날이야기를 하면 좋겠다고 생각한 게 어제였다. 정말 그를 보자 반가웠다. 크게 다쳤었는데 이제는 괜찮은 거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과거 학생회 임원진이 모여 있는 테이블에 앉은 그에게 굳이 찾아가는 건 애매했다.

어떻게 할까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에 승건과 눈이 마주쳤다. 둘 사이에는 테이블이 몇 개나 자리했고 사람들의 머리도 여럿 있었지만 서로를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10년이란 시간이 흘렀지만 그의 모습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날카로운 눈도, 무표정함도, 그대로였다. 다만 어린 티가 났던 그때와 달리 원숙해졌다.

채훈은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을 티 내면서 활짝 웃었다. 만나서 반갑다는 걸 꼭 말로 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승건은 냉랭한 얼굴로 그대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졸지에 혼자 친한 척을 하게 된 채훈은 뻘쭘해지고 말았다.

승건이 싫다면 별수 없었다. 그래도 반가운 척이라도 해주지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채훈은 속으로 툴툴거리며 인상을 썼다. 그냥 달려가서 말이라도 걸려고 했는데 망설여졌다.

“와, 근데 지금 봐도 진짜 잘생겼다. 옛날에도 그랬는데, 저런 얼굴로 사는 기분은 어떨까?”

“등빨도 완전 장난 아닌데?”

“옛날에도 저랬어. 알파잖아. 학생회장도 그렇고.”

“알파였지?”

“아, 그래. 기억난다.”

신유진과 남태호, 그리고 서주명이 계속 승건에 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승건이 알파라는 건 꽤나 유명한 이야기였다. 그래서 채훈은 그에게 고백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런데 쟤는 알은척도 안 하네. 우리랑 친했는데 말이야.”

“뭐, 학생회장이랑 할 이야기가 많겠지.”

“어? 그냥 나가는데?”

“진짜?”

채훈은 승건이 가게 밖으로 나가는 것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인사라도 할 줄 알았는데, 저렇게 그냥 돌아가 버리다니 황당했다.

“저대로 가는 거야?”

“인사도 안 했는데?”

저마다 한마디씩 하는 와중에 채훈은 패딩 점퍼를 쥐고 분연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제는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그냥 지나쳤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허무하게 헤어질 수 없었다.

“나, 잠시만 나갔다고 올게.”

“오. 채훈이 빡쳤다.”

“살살 대해.”

“때리지는 마.”

친구들의 응원 아닌 응원을 받으며 채훈은 가게 내부를 가로질렀다. 조급함 때문에 발걸음은 재빨랐다.

*

*

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차가운 겨울바람이 채훈의 뺨을 때렸다. 채훈은 패딩 점퍼를 입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재빨리 골목 양쪽을 살폈다.

흔한 술집 골목이었다. 차가 두 대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좁은 골목 양쪽으로 각종 음식점과 주점이 늘어섰다. 오래된 가로등 불빛이 점점이 밝힌 골목에는 취객들이 많았다. 하지만 승건은 보이지 않았다.

“이런.”

황망한 기분으로 골목 양쪽을 둘러보던 채훈은 인상을 썼다. 그새 사라진 녀석을 찾을 방도는 없었다.

다시 한번 바람이 불었다. 그제야 추위를 느낀 채훈은 패딩 점퍼를 입었다. 그리고 가게로 돌아가는 대신에 적당히 후미진 곳을 찾아서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채훈은 어지러운 머리를 손으로 꾸욱 눌렀다.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술을 많이 마신 탓이었다. 앉아 있을 때는 몰랐는데 조금 움직이자 취기가 확 올랐다.

기분이 이상했다. 승건을 만나면 할 이야기가 많았는데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다시 헤어질 줄은 몰랐다. 그냥 운이 나빴다고 하고 넘어가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학생회장이 승건의 연락처를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에게 승건의 연락처를 알려달라고 하는 건……, 자존심이 상했다. 친구라는 놈이 그렇게 큰 사건 이후에 연락 한 번 하지 않더니, 10년 만에 만났는데도 인사도 없이 사라졌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뻔했다.

“나쁜…….”

채훈은 욕이 나오는 것을 참으며 담배를 하나 입에 물고는 불을 붙였다. 이대로 그냥 집에 돌아갈까, 얼굴에 철판 깔고 학생회장에게 승건의 연락처를 물을까 망설이는데 패딩 점퍼 안에 있던 휴대폰이 진동했다.

모르는 번호에서 메시지가 왔다. 하는 일이 일이니만큼, 주말에 모르는 번호로 온 메시지라도 확인해야 했다. 확인을 누르자 화려하게 연출된 온라인 청첩장이 나타났다.

주요 거래처의 결혼식인가 싶어 스크롤을 내려 신랑과 신부, 그리고 각각의 부모님 이름을 확인하던 채훈은 순간 얼굴을 와락 구겼다. 신랑에 전 애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미친.”

이름을 확인하자마자 욕이 절로 튀어나왔다. 헤어진 애인이 청첩장을 보냈다는 이야기를 자신이 겪을 줄은 몰랐다.

2년 반 전, 양다리 걸치다가 들키고도 네가 날 외롭게 만들어서 그랬다며 뻔뻔하게 굴던 놈이었다. 그러고는 몇 개월 지나지 않아 아직 혼자냐며 연락을 해 왔었다.

번호를 차단하고 끝냈었는데, 이렇게 청첩장이 날아올 줄은 몰랐다. 아마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고 대학 동기 명단에 적혀 있는 번호로 청첩장을 모두 돌렸을 확률이 높았다.

채훈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따라 과거의 인연이 훅 치고 들어왔다. 그냥 이런 날도 있는 거라고 스스로를 위안해 보지만 그래도 씁쓸하고 빡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진짜 이럴 때 서로 좋아서 사귀는 애인이 있었다면 웃으면서 넘어갈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2년 반 전에 빌어먹을 자식과 헤어지고는 지금까지 솔로였다.

변명 같지만, 굳이 따지자면 연애를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거긴 했다. 취직 후에 너무 바빴다. 취향이 까다로운 것도 이유였다. 말수가 적고 분위기 있는 미남은 흔하지 않았다.

전 애인과 자신의 취향에 대해 고찰하던 채훈은 순간 승건을 떠올렸다. 승건 역시 말수가 적고 분위기 있는 미남이었다. 문득 자신의 취향이 승건에게서 비롯된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아니, 의심이 아니라 분명 그럴 것이다.

그렇게 승건을 떠올리던 채훈은 다시금 어떻게 할까 고민했다. 사실은 승건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꽤 많이 있었다.

10여 년 전, 사고 후에 정신을 잃고 나서 다시 눈을 뜬 것은 하루가 지난 다음이었다. 머리가 찢어졌고 가벼운 뇌진탕 증세로 하루를 더 입원하고는 퇴원할 수 있었다. 승건의 소식이 궁금했지만, 칼에 찔린 곳이 나빠서 수술을 했다는 것만 간호사로부터 겨우 전해 들었다.

납치범은 잡혔는지, 승건은 깨어났는지 알아보려고 나름 노력했다. 하지만 인터넷 기사는 하나도 없었다. 사건 설명을 위해 경찰도 한 번 만났지만 승건의 소식을 알려줄 수 없다고 했다. 깨어난 그날부터 승건의 번호로 연락을 시도했지만 전원이 꺼져 있었다. 그리고 사고가 지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승건의 번호는 아예 없어져 버렸다.

아버지는 어른들끼리 이야기한다면서 자세한 건 알려주지 않았다. 그저 승건은 태화 그룹 회장의 외손자이며, 여러 가지 집안 문제가 있었다고만 말했다.

태화 그룹은 대한민국에서 한 손에 꼽히는 재벌로, 승건이 태화 그룹 회장의 외손자라는 사실이 놀라웠다. 금수저라고 할 수 있는 그가 왜 혼자 살면서 평범한 인문계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는지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대입 수능이 코앞이었기 때문에 채훈은 승건에게만 신경 쓸 수 없었다. 그리고 그건 수능을 치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수능 당일에 컨디션이 바닥을 치는 바람에 3교시와 4교시를 완전히 망치고 말았다. 경찰대 진학을 준비하고 있었던 채훈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었다. 특히 아버지의 실망이 대단했다.

채훈의 아버지는 딱히 화를 내거나 욕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 번 혀를 차는 것으로 더 이상의 기대가 없음을 드러냈다. 아버지는 재수 따위는 시키지 않겠다고, 아무 대학이나 들어가라고 했다. 결국 아버지의 친구분이 교수로 있던 보건행정 쪽으로 진로를 잡았다. 취직이 잘된다는 이유였다.

입시에 실패하고 좌절하고 있는 동안에 가끔씩 승건을 떠올렸다. 연락은 되지 않았지만 졸업식에서는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기대와 달리 승건은 졸업식에 나타나지 않았고 그렇게 첫사랑이자 짝사랑이 끝났다.

채훈은 나름 자신과 승건이 친한 사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큰 사고가 있었으니까 괜찮냐는 연락쯤은 오지 않을까 기대했었다. 채훈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몇 년 동안 휴대폰 번호를 바꾸지도 않았었다.

그러다 녀석이 미국에 있다는 이야기를 건너 건너 듣고는 잠시 원망도 했다. 무사하다는 말 한마디 해주기 어려운 건가 하고 혼자 실망하다가 미련을 접고는 잊어버렸다.

사는 게 바쁘다 보니 수능이라는 뉴스를 볼 때면 한 번씩 생각나긴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지금은 그저 기묘하게 끝난 첫사랑이라고 여겼다. 그래도 막상 한 번 보고 나니 심란해졌다.

“어휴.”

채훈은 다시 한번 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술에 취했다는 자각이 있었다. 주사는 크게 없었지만,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술의 힘에 용기를 얻곤 했다.

지금도 학생회장을 찾아가서는 승건의 연락처를 내놓으라고 하고 싶어졌다. 그리고 승건에게 연락해서 인간적으로 그러는 거 아니라고 한마디 하는 게 어떨까 진지하게 고민했다가 참기를 반복했다.

아무래도 사고를 치기 전에 그냥 집에 돌아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시간을 확인한 채훈은 마침 그곳에 놓여 있는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껐다. 슬쩍 빠지기 딱 좋은 시간이었다.

“담배 피워?”

뜻밖의 목소리에 채훈은 천천히 옆을 돌아보았다. 건물과 건물 사이의 작은 골목은 맞은편 간판 불빛과 가로등으로 아주 어둡지 않았다. 그래서 말을 건 사람이 누군지 알아보는 건 쉬웠다.

승건이 서 있었다. 채훈은 잠시 숨을 들이켰다. 그의 등장에 놀라서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지만 그래도 침착하게 굴려고 노력했다.

“어. 너는?”

“안 피워.”

안녕이나 오랜만이라는 말은 대신에 엉뚱한 말이 나오고 말았다. 실없는 물음에 덤덤한 대답이 돌아왔다.

채훈은 살짝 긴장했다. 조금 전에는 분명히 승건이 고등학교 시절과 비슷하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막상 코앞에서 대면하려니 뭔가가 달랐다. 빗어 넘긴 머리카락과 빈틈없이 갖춰 입은 정장과 코트가 낯설어서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아니라 처음 보는 사람을 마주하고 있는 것 같았다.

“돌아간 줄 알았는데.”

“전화가 와서 잠시 나왔어.”

멍한 기분으로 물었는데 승건이 너무 쉽게 대답하는 바람에 민망해졌다. 전화를 받으려고 나가 있었단다.

어색함을 감추기 위해 채훈은 인사부터 건넸다.

“진짜 오랜만이다. 다친 건 괜찮아? 옛날 일이긴 한데, 수술했다고만 알고 있었거든. 아, 미국에 있다는 건 들었어. 지금 건강해 보이는데, 궁금해서. 아……. 말이 꼬인다. 아무튼 걱정했었어. 다행이야.”

정말 술이 문제였다. 취기가 오른 머리는 생각 없이 말을 내뱉게 만들었다. 채훈은 혀를 깨물고 싶은 것을 참으며 황급히 수습했다.

그래도 다행이라는 말은 진심이었다. 칼에 찔린 채 피범벅이 된 교복 셔츠가 아직도 눈에 훤했다.

채훈은 무난한 인사를 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승건의 반응이 뜻밖이었다. 입을 다물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원래도 딱딱한 얼굴이 어둠 속에서 더욱 굳어 보였다. 침묵이 부담스러웠던 채훈은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크음. 나 먼저 갈게.”

호응이 없다면 얼른 헤어지는 게 옳았다. 실수를 하기 전에 말이다.

“너, 나 좋아했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질문에 막 걸음을 떼려던 채훈은 그대로 굳어버린 채 승건을 보았다. 10년 전과 같은 질문이었다.

“그때도 그걸 물었었는데.”

“그래?”

“기억 안 나? 좋아한다고 했잖아. 안 좋아하면 친구 못 했지. 안 그래?”

채훈은 그때와 같은 대답을 했다. 나이를 먹었더니 더 태연하게 굴 수 있었다. 그렇지 않냐고 동의를 구하는 것은 역시나 연륜이 주는 여유였다.

“그거 말고.”

“……?”

“내가 양호실에서 자고 있을 때, 입 맞추려다가 말았잖아.”

너무 놀라면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 게 맞았다.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에 채훈은 숨을 들이켰다.

3학년 여름 방학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날이었다. 아침부터 컨디션이 별로라고 하던 승건은 결국 2교시가 끝나고는 양호실을 찾아갔다.

감기 같은 것은 걸리지도 않던 녀석이 빌빌거리는 것부터 걱정이었다. 점심 시간이 다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아, 혹시나 싶어 양호실을 찾아갔다.

그때 그 순간을 마치 어제처럼 떠올릴 수 있었다. 점심 시간이면 늘 북적거리던 양호실은 그날따라 한산했다. 보건 선생님은 잠시 교무실에 다녀오겠다며 자리를 비웠다. 예비종이 울리자 아이들도 하나둘씩 양호실을 나가면서 채훈은 승건과 단둘이 되었다.

채훈 역시 늦지 않게 교실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승건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눈을 감고 깊게 잠든 승건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기묘한 정적 속에 흐르는 빗소리, 그리고 양호실 특유의 약품 냄새와 섞인 비에 젖은 나무의 향까지 모두 완벽한 순간이었다.

얼굴선이 예쁘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자신이 그의 뺨에 입맞춤을 하려고 하고 있었다. 이대로 해버릴까 하고 찰나 동안 고민하는 사이에 복도에서 들리는 소란에 정신을 차리고 그만두었다.

그걸 어떻게 아냐고 되묻고 싶은 것을 참았다. 아마도 그때 승건이 깨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고백은 하지 않을 거라고, 혼자서 짝사랑을 끝낼 거라고 끙끙 앓았었다. 그런데 그게 헛짓거리였단다.

아, 쪽팔린다.

채훈은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나이를 이만큼이나 먹고도 과거의 마음을 들키는 것은 난감한 일이었다.

골목길이 어두운 게 다행이다 싶다가 그냥 뻔뻔해지기로 했다. 벌써 10년 전의 일이었다. 오히려 지금 이 순간에 그때의 일을 언급하는 승건이 더 이상했다.

이럴 때는 그냥 아무렇지 않게 구는 게 최선이었다.

“그래서?”

“나랑 잘래?”

채훈은 자신의 귀에 이상이 생긴 줄 알았다. 나랑 잘래, 란다. 어쩌면 잘래가 아니라 갈래라고 물은 것일 수도 있었다. 지금 상황에서는 따로 술을 마시자고 제의하는 게 어울렸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어딜 가자고?”

“못 알아들은 척하지 마.”

“뭘?”

“섹스하자고.”

이번에는 제대로 알아들었다. 10여 년 만에 만난 첫사랑이 다짜고짜 섹스를 하잔다. 장난을 치는 건 아닌 것 같았지만 그래서 더욱 당황스러웠다. 솔직히 그때 좋아했었던 걸 언급하며 자자고 하는 건 무례한 일이었다.

“내가 널 좋아했던 건 맞는데, 그게 10년 전이거든.”

“옛날이긴 하지.”

“그래.”

이젠 너를 안 좋아한다는 것을 돌려 말했다. 벌써 10년 전이다. 미련 같은 것은 없었다. 왜 그랬냐고 묻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채훈은 승건이 물러날 줄 알았다. 그런데 오히려 한 걸음 다가왔다. 적당했던 거리가 너무 가까워졌다.

“그럼 지금의 나는 어때?”

“……?!”

“싫어?”

채훈은 머리가 녹슨 것처럼 뻑뻑하게 굴러간다고 느꼈다. 나는 어떠냐는 승건의 의도를 오해할 건 없었다. 웃지도 않고 딱딱하게 말하는 것은 승건답기까지 했다.

그가 어떠냐고?

외양만큼은 확실하게 취향이었다. 승건은 조각처럼 생겼다는 말이 어울리는 미남이었다. 키도 크고 체격도 훌륭했다.

채훈은 연애 상대를 신중하게 정하는 편이었다. 그리고 원나잇은 하지 않았다. 세상에는 미친놈이 많았기에 미리 조심했다.

평소였다면 10년 만에 만난 고등학교 동창이자 짝사랑 상대가 들이댄다고 해서 흔들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술이 문제였다. 반짝거리고 아련한 추억도 한몫했다. 무엇보다 저 잘난 놈이 먼저 어프로치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었다.

“10년 만에 만나서 하는 말이 섹스하자는 거라니. 놀리는 거 아냐?”

채훈은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에 도발적으로 물었다.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던 승건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농담하는 거 아니야. 떠보는 것도 아니고. 네가 마음에 들어.”

“내가 어떤 사람인 줄 알고.”

“그래서 싫어?”

싫냐고 묻는 승건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채훈은 가만히 승건을 바라보다가 웃었다. 밤의 어두움과 주황색 가로등을 배경으로 선 승건의 모습은 10년 전의 연장선상 같았다.

문득 뭔가가 떠올랐다. 10년 전에, 승건이 자신을 좋아하냐고 물었을 때도 양호실에서 있었던 일을 알고 그랬던 걸까. 그때 승건은 왜 그랬는지가 궁금해졌지만 역시나 10년 전의 일이었다.

그때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도망쳤었고, 첫사랑은 어설프고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이번에는 10년 전에 하지 못했던 고백을 해버렸으니 아쉬운 것도 없었다.

갈팡질팡하는 마음의 추는 승낙하는 쪽으로 더욱 기울었다. 10년 전의 짝사랑과 섹스 한 번 한다고 해서 세상 망하는 건 아니었다. 이런 기회는 다시 오지 않으니까 놓치기 싫었다. 알딸딸하게 달아오른 취기가 용기를 부추겼다.

승건의 검은 눈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답을 기다리는 그의 모습에 목이 타는 듯한 갈증이 느껴졌다.

어쩌면 후회할지도 몰랐다. 아니, 후회할 것이다. 하지만 살다 보면 이런 날도 있는 법이었다.

“좋아.”

채훈은 웃으며 대답했다.

* * *

편안한 가죽시트에 앉은 채훈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차량 내부를 한 번 둘러보았다. 값비싼 세단을 기사가 운전하고 있었다.

승건에게 좋다고 한 다음에 채훈은 근처의 모텔을 찾았다. 하지만 승건은 자신의 집이 가깝다며, 잠시만 기다리라고 하고는 휴대폰으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가 가자는 대로 큰길로 나가서 얼마 지나지 않아 운전기사가 딸린 리무진이 나타났다. 운전기사가 있냐고 놀라며 물었더니 승건은 사정이 있다고만 했다.

채훈은 옆자리에 앉아 있는 잘생긴 얼굴을 바라보았다. 승건의 제안에 응한 것은 단순히 그가 취향이라서만은 아니었다. 술에 취했고, 과감해졌고, 첫사랑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욕망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또한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승건을 만나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승건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다. 왜 연락을 안 했는지, 납치범의 정체는 아는지, 얼마나 다쳤었는지. 그런데 지금 당장은 승건이 무엇을 하고 사는지가 궁금했다.

또래 중에 값비싼 차를 타고 다니는 것은 봤어도 운전기사가 있는 건 처음이었다.

사실 사회생활을 하면서 겉모양만 반지르르한 사기꾼을 여럿 만났다. 특히 젊을수록 그 정도가 심했다. 하지만 태화 그룹 회장의 외손자라는 승건이 사기꾼일 것 같지는 않았다.

채훈은 승건이 고등학생인데도 불구하고 집안 사정 때문에 고급 빌라에서 혼자 살고 있다고 한 것을 떠올렸다. 그 시절, 승건의 소지품들은 값비싼 게 많았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코트는 물론이고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도, 구두도 아주 좋아 보였다.

물론 외할아버지가 재벌 회장님이니까 돈이 많을 것 같긴 했다. 그래도 재벌 3세가 운전기사까지 데리고 다니나 싶었다.

너, 부자야?

노골적인 질문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것을 꿀꺽 삼켰다. 부자에게 부자냐고 묻는 것은 너무 속물 같았다. 취기가 아직 남아 있었지만 그런 질문을 하면 안 된다는 판단은 할 수 있었다.

채훈은 잠시 머리를 굴렸다. 무난한 질문이 필요했다.

“승건아. 나 물어볼 게 있는데.”

“뭔데?”

“누가 널 미국에서 봤다고 해서. 몇 년 전에. 지금까지 미국에 있었던 거야?”

물어볼 게 있다고 하자 시선을 돌린 승건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재활 치료 때문에 미국에 갔어. 미국에 어머니가 계셨거든. 거기서 대학을 다니고 직장 생활도 거기서 했어.”

승건의 가족 이야기는 처음 들었다. 사정이 있어서 혼자 살고 있다고 했던 것이 다시금 떠올랐다. 태화 그룹은 유명하지만 가족사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다. 채훈 역시 아는 게 몇 개 없었다.

승건에 대해 이것저것 알아보려고 검색을 했다가 부모님이 이혼한 것을 알아버렸다. 굳이 승건이 이야기하지 않은 것을 언급할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채훈의 신경을 끄는 단어는 따로 있었다.

“재활 치료를 할 정도로 심각했던 거야?”

“형질자 치료는 미국 쪽이 발달했으니까. 너는? 경찰은 아닌 것 같은데?”

갑자기 질문이 돌아오는 바람에 채훈은 살짝 당황했다. 입시 실패는 채훈의 아픈 부분이었다. 승건이 재활 치료 때문에 미국에 갔다는 것을 알아낸 것은 좋았지만, 이 나이에 수능을 망쳤다고 말하기는 쪽팔렸다. 그래도 달리 변명거리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게……. 수능을 망쳤어. 재수는 안 했고. 지금은 태화 병원에서 일해. 총무과에서. 아, 그래. 어제 병원에서 봤지? VIP 병동에서.”

“맞아.”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해서 긴가민가했어. 그런데 병원은 무슨 일로? 어디 아픈 거야? 설마, 후유증이 있어?”

“아니. 외할머니가 건강 검진 하시는데 따라갔어.”

이번에는 외할머니였다. 채훈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묻고 싶은 것은 많은데 어떻게 하다 보니 10년 만에 재회한 고등학교 친구들의 대화가 되어버렸다.

그렇게 서로의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니 차는 곧 목적지에 도착했다. 승건을 따라 내린 채훈을 반긴 것은 커다란 주상복합 아파트였다. 한참 TV에서 광고까지 했던 건물이라 채훈은 그 이름까지 알았다.

채훈은 승건을 돌아보았다.

“여기 살아?”

“응.”

“너 부자야?”

결국 마음속으로만 생각하고 있던 게 소리가 되어 나왔다. 아차 싶었지만 채훈은 이번에도 뻔뻔하게 굴기로 했다. 아직은 술의 효과가 남아 있었다.

속 보이는 질문에 잠시 어리둥절하던 승건이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에도 잘 웃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지금 것은 폭소나 다름없었다.

채훈은 괜히 민망해졌다. 그래. 웃어라. 내가 술에 취했다. 주정뱅이다. 그러니까 부끄러워하지는 않겠다.

“이런 거 물어봐서 미안한데, 궁금하긴 하거든. 네가 태화 그룹 회장님의 외손자라는 건 알아.”

“그래?”

“뭐 그렇다고. 그래도 할아버지가 부자인 거랑 네가 부자인 건 좀 다르잖아. 운전기사가 있는 것도 그렇고.”

재벌 3세라도 사는 모습은 제각각이지 않냐는 말이 이상하게 나왔다. 승건도 이상한지 아까만큼은 아니더라도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운전기사도 여기도 잠시 빌린 거야. 그래도 부자는 맞아.”

“오.”

“이제 가자.”

채훈은 제 입으로 부자라고 인정한 승건을 따라 움직였다. 다른 대화를 나눌 새는 없었다.

엘리베이터에 타기 직전에 남태호에게서 전화가 왔다. 승건을 잡으러 간다는 놈이 돌아오지 않아서 죽은 줄 알았다는 잔소리가 쏟아졌다. 채훈은 술에 취해서 집에 돌아가는 중이라고 변명을 해야 했다. 미안하다는 사과도 덧붙였다.

“괜찮아. 조금 알딸딸한 것뿐이야. 응, 나중에 보자.”

통화를 끝내자 엘리베이터에서 먼저 내린 승건이 현관문을 연 채 기다리고 있었다.

“들어와.”

“드디어 너희 집에 들어가 보는구나. 이번에는 방해하는 사람도 없고 말이야.”

빙긋 웃은 채훈은 기대감에 부푼 채 안으로 들어섰다. 신발을 벗고 슬리퍼를 신고 안으로 쭈욱 들어서자 실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채훈은 잠시 할 말을 잊었다.

블랙과 화이트로 모던하게 꾸며진 거실은 무척 컸지만 휑했다. 시커먼 벽걸이 TV와 스피커, 검은 가죽소파 세트, 그리고 하얀색 대리석 탁자가 눈에 보이는 실내 가구의 전부였다. 그나마 생활감을 느끼게 하는 것은 탁자 위에 올라간 작은 메모지 한 장뿐이었다.

집 안의 인테리어가 사람의 취향이나 성향을 대변한다면, 승건은 심플과 황량 그 사이였다.

“심플하게 사네. 구경 좀 해도 돼?”

집 구경 중에 최고는 부엌 구경이었다. 집주인에게 허락을 받기 위해 승건을 돌아보는데, 승건의 손이 뺨을 슬쩍 건드렸다가 떨어져 나갔다.

“집 구경은 나중에 해.”

“응?”

“뭐 하러 왔는지 잊지는 말아야지.”

잘생긴 얼굴이 가까워지더니 입술이 살짝 맞부딪혔다가 멀어졌다. 가벼운 접촉이 부드러워서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채훈은 잠시 멀어진 승건의 얼굴을 멍하니 보다가 정신을 차렸다. 친구 집에 놀러 온 게 아니었다.

채훈은 그제야 승건과 섹스를 하려고 이곳에 왔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긴장했다.

“기억나?”

“어, 음. 기억나.”

기억난다고 하자 다시 입술이 맞닿았다. 이번에는 제대로 된 키스였다. 아랫입술이 빨리고 혀가 얽혀 들었다.

채훈은 허리를 감싸 오는 승건의 팔을 잡으며 키스에 응했다. 숨결이 깊이 파고들었다. 체온과 입술이 겹쳐 두근거리는 울림이 전해졌다. 입술 사이로 파고든 뜨거운 살덩이가 입 안을 느긋하게 핥아 왔다.

2년 반 전에 연애가 끝이었던 채훈의 키스는 더 오래되었다. 잠시 주춤하는 사이에 주도권이 승건에게 넘어갔다. 키스는 아찔하게 휘몰아쳤다. 혀가 빨리고 입 안 곳곳이 애무당하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호흡이 엉키면서 입술이 맞물린 각도가 뒤바뀌고, 혀가 다시 깊숙이 파고들었다.

미치겠네. 정말 잘하잖아.

승건에게 속수무책으로 매달리게 된 채훈은 조금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2년이 훌쩍 넘게 키스를 못 했더니 바보가 된 것 같았다. 그러나 자존심이 상하는 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키스만으로 몸이 달았다.

질척한 젖은 소리가 넓은 거실에 울렸다. 승건이 밀어붙이는 힘에 의해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자 어느새 등이 벽에 닿았다. 그러면서 혀가 깊숙이 들어오는 것과 동시에 몸이 겹쳐졌다. 맞닿은 허벅지에서 승건의 성기가 선명하게 느껴지는 바람에 소름이 내달리면서 몸이 흠칫흠칫 떨렸다.

진짜 섹스를 하려고 여기에 있다는 것을 여실히 깨달았다. 이런 흥분은 진짜 오랜만이었다. 숨이 막히다 못해 다리에 힘이 빠지려고 했다.

참을 수 없는 감각에 채훈은 승건의 목을 끌어안으며 좀 더 키스에 탐닉했다. 그사이 승건의 손이 옷을 파고들었다. 어느 순간에 패딩 점퍼가 풀썩 하는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카디건이 벗겨지고 셔츠 아래로 승건의 손이 맨살을 쓸자 정신이 돌아왔다.

“자, 잠깐만.”

가까스로 입술을 뗀 채훈은 승건의 가슴을 밀어내며 숨을 골랐다.

“왜?”

“이대로 하려고?”

“그래.”

다시 승건이 키스하려는 것을 채훈은 피했다. 열이 오르기는 했지만 이대로 하기에는 문제가 있었다.

“잠, 잠깐만. 씻어야 해.”

“괜찮아.”

“내가 안 괜찮아. 아, 진짜. 고기 냄새 난다고.”

“별로 안 나.”

“난다는 거잖아. 우. 야, 으응.”

승건이 막무가내로 키스를 해 왔다. 고기 냄새도 좋다고 하니 채훈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대신에 혼자 당하는 것은 별로라서 경쟁적으로 승건의 옷을 벗겼다. 값비싸 보이는 코트를 벗겨내고 재킷도 바닥에 내팽개쳤다. 그사이에 단추가 너무 많다고 중얼거렸다.

옷을 벗기는 게 어느 순간 유희가 되었다. 입술과 혀를 빨고, 옷을 하나씩 벗기면서 침실로 향했다. 침대에 도착할 때쯤에 상체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게 된 채훈은 승건의 넥타이를 집어 던지고는 셔츠 단추를 푸는 데 집중했다.

“이거, 진짜 말썽이네.”

채훈은 초조함에 중얼거렸다. 승건의 입술과 손이 여기저기에 애무를 계속하는 바람에 손이 자꾸 미끄러졌다. 자세도 나빴다. 침대에 반쯤 누운 채, 승건에게 깔리게 되자 도무지 단추를 풀 수 없었다.

“잠시만.”

“……?”

잠시만이라고 한 승건이 무릎을 꿇고 상체를 세우더니 제 손으로 셔츠를 벗어버렸다. 엉거주춤 반쯤 일어나 앉은 채훈은 홀린 듯이 그걸 바라보았다.

워낙에 잘생긴 놈이라서 뭘 해도 화보 같은데, 몸매도 아주 훌륭했다. 어깨는 넓었고 가슴도 컸다. 복근에는 선명한 식스팩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어떤 흔적이 보였다. 승건의 피부색과 다른 흰색과 회색으로 우둘투둘 솟아오른 흉터였다.

채훈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문제 있어?”

빤히 바라보고 있자니 셔츠를 벗고 침대 위로 올라오던 승건이 뭐냐고 물었다. 찡그린 미간을 펴지 못한 채훈은 가까이 다가온 승건의 배를 손으로 쓸었다. 단단한 근육이 움찔거리는 것이, 그리고 매끄러운 피부에 솟은 흉터가 손끝에서 느껴졌다.

“그 상처……. 아프지는 않아?”

“다 나았어.”

다 나았다는 건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었다. 채훈이 걱정한 것은 다 낫기까지의 과정이었다. 찔린 곳이 나쁘다더니 장기를 다쳤을 위치였다. 재활 치료까지 했다면 크게 다쳤던 게 분명했다.

연민과 안타까움. 그건 섹스와 어울리는 감정이 아니었다.

“어떻게 하는 걸 좋아해?”

“……?”

“섹스 취향 말이야.”

어설픈 감정을 정리한 채훈은 승건의 허리띠를 붙잡으며 도발적으로 물었다.

사실 때늦은 질문이었다. 채훈은 평범하게 섹스를 좋아했다. 이왕 할 거면 즐겁게 해야 하는 법이었다. 어지간히 괴악한 취향이 아니라면 다 맞춰줄 생각이 있었다.

예상치 못한 질문인지 승건의 대답은 반 박자 늦게 돌아왔다.

“별로. 딱히 취향이라는 건 없어.”

“키스를 좋아하는 것 같은데?”

채훈이 승건에 대해 파악한 것은 몇 개 없었다. 냄새나는 것도 개의치 않아 하고, 손이 빨랐다. 그리고 키스를 잘하는 만큼 깨물고 핥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냐고 눈으로도 물었다. 그러나 승건은 가타부타 대답하지 않고 입을 맞춰 왔다. 확실히 키스를 좋아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며 채훈은 혀를 얽었다. 내일이면 입술이 퉁퉁 붓겠지만 지금은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침대 위에서 엎치락뒤치락하며 서로를 애무하면서 하의를 벗겨냈다. 알몸이 되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자신의 욕망에 솔직한 채훈은 적극적으로 덤벼들었다. 그런데 서로를 흥분시키기 위한 전희일 텐데 어느 순간부터 자극을 받기만 하고 있었다. 되돌려주고 싶지만 승건이 틈을 주지 않았다.

승건의 커다란 손이 매만진 곳은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입술이 스쳤다. 턱, 목덜미, 쇄골, 가슴으로 이어지는 애무에 채훈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오랜만에 타인에게 받은 자극에 몸이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의 축축한 혀가 배꼽 부근을 핥을 때는 결국 자지러지며 몸을 뒤틀고 말았다. 전희만으로 잔뜩 발기하고 말았다.

“흐흣.”

“여기가 약해.”

상체를 일으킨 승건이 배꼽 아래를 쓸며 말했다. 깊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마치 으르렁거리는 것처럼 들렸다. 채훈은 여러 가지 복잡한 마음으로 승건을 올려다보았다. 자신은 겨우 애무만으로 헐떡이고 있는데 녀석의 얼굴에는 겨우 가벼운 홍조뿐이었다. 그게 왠지 자존심 상했다.

“거긴 누구나 약해, 우, 읏.”

울컥한 마음에 채훈은 너도 당해보라는 심정으로 승건의 뱃가죽을 향해 손을 뻗으려고 했다가 멈칫했다. 승건이 손을 그대로 아래로 내려 채훈의 성기를 꽉 붙잡았기 때문이었다.

“윽, 너만…….”

입술을 깨문 채훈은 채 말을 잇지 못했다. 강한 쾌감에 눈앞이 번쩍거렸다. 2년이 넘도록 자신의 손으로만 욕망을 처리하다가 제대로 하려니 모든 것이 자극적이었다. 커다란 손이 성기 전체를 감싸 쥐고는 쓸어 올리다가 손끝으로 흥분한 귀두를 꾸욱 눌러 왔다. 머리끝까지 전기가 감전된 듯 저릿저릿함이 퍼져나갔다.

“흣.”

자신의 것이 아닌 듯한 목소리가 새어 나갔다. 채훈은 허우적거리며 승건의 팔을 꽉 붙잡았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승건의 눈빛이 어딘가 열기를 품고 있었다.

취향이 없다고 하더니 거짓말이었다. 상대를 흥분시키고 그걸 지켜보기를 좋아하는 게 분명했다.

채훈은 신음을 참으며 승건의 목을 끌어안다시피 하며 자신 가까이 잡아당겼다. 입술이 맞닿으며 뜨거운 숨결이 얽혔다.

그러면서 채훈은 손을 뻗어 승건의 복근을 더듬다가 성기를 잡아챘다. 한 손에 가득 잡힌 성기가 크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꿈틀거리는 감각이 선연하게 느껴졌다. 그러면서 맞물린 승건의 입에서 탄성이 튀어나왔다. 짜릿한 기분이었다.

“너 진짜…….”

으르렁거리며 잇소리를 낸 승건이 두 개의 성기와 채훈의 손까지 모두 잡아버렸다. 그것으로 주도권은 완전히 승건에게 넘어가 버렸다. 젖은 살이 질척이는 소리와 억눌린 신음이 모두 야하게 울렸다. 퍼부어지는 쾌락에 먼저 절정에 이르는 것은 채훈이었다.

“으읏.”

눈앞이 하얗게 부서지는 쾌감에 채훈은 승건의 어깨에 이마를 비비며 한껏 떨었다. 더운 숨을 헐떡이면서 손에 힘을 꾹 주었다. 그러자 승건이 사정했다.

격렬한 폭풍 같은 순간이 지나고 숨소리가 천천히 잦아들고 나서야 승건이 손을 풀었다. 채훈 역시 손을 풀고 고개를 드는데, 승건이 성급하게 입을 맞춰 왔다. 짧게 혀를 얽고 떨어져 나간 승건이 낮아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생각해 보니까.”

“……?”

“펠라는 취향이 아니었어.”

섹스 취향을 밝힌 승건이 다시 입을 맞춰 왔다. 채훈은 스스럼없이 입을 벌리면서 소리 없이 웃었다. 그는 펠라에 대해 딱히 호불호가 없었다. 그것보다는 이 순간까지 승건이 취향에 대해 생각했다는 것이 웃겼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승건은 꽤나 고지식하고 성실한 성격이었다. 그런 녀석이 어떻게 섹스할지가 궁금해졌다.

*

*

익숙하고도 낯선 감각이었다. 등줄기가 쭈삣 내달리는 느낌에 채훈은 시트를 꽉 쥐었다.

“으.”

입에서 탄식을 닮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엉덩이 사이를 더듬던 손가락이 슬쩍 안으로 밀려들어 왔다. 젤을 듬뿍 묻힌 입구가 어렵지 않게 열렸다. 조금씩 꽉 다문 살을 헤치는 굵은 손가락은 후퇴를 몰랐다.

“우…….”

낮은 신음성을 내뱉은 채훈은 인상을 썼다. 몸으로 느껴지는 것들이 눈앞에서 고스란히 펼쳐지는 것을 지켜보자니 기분이 이상했다.

펠라는 좋아하지 않는다는 승건은 목덜미와 가슴을 빨고 깨물었다. 맨살을 부대끼며 만져지자 흥분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거기까지는 확실히 좋았다. 하지만 승건이 다리 사이에 자리 잡으면서 자세가 바뀌자 곤혹스러워졌다.

승건의 어깨에 오른발이 걸쳐지는 바람에 엉덩이가 높이 치솟았다. 그리고 그 사이에 자리 잡은 승건의 손이 자신의 엉덩이를 헤집는 것이, 발기한 성기와 음모도 모두 시야에 들어왔다.

아무리 모든 것을 다 내보이는 게 섹스라고 해도 너무 노골적이었다. 키스만큼이나 섹스도 오랜만이어서 더 그랬다. 거기다 사납게 집중하는 표정으로 내려다보는 승건의 모습에 눈 둘 곳을 찾기가 힘들었다.

“차라리……. 읏.”

“……?”

“차라리 엎드릴게.”

차라리 엎드리겠다고 한 채훈은 몸을 뒤틀면서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허벅지를 단단히 붙잡은 승건의 손을 벗어나지 못했다.

“엎……드린다니까.”

“괜찮아.”

채훈은 다시 한번 더 몸을 빼려 시도했지만 이번에도 역시 막혔다. 뭐가 괜찮냐고 욕이 나오려는 것을 꾹 참았다. 이래서야 차라리 안 보는 게 나았다. 채훈은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얼굴은 왜 또 가려.”

“네가, 흐읏. 네가 보잖아.”

“얼굴은 봐야지.”

“안 좋은 취향, 이야.”

안 좋은 취향이라고 쏘아붙였는데도 불구하고 승건이 얼굴을 가린 손을 잡고 치웠다. 채훈은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손가락이 하나 더 늘어났다. 눈으로 보지 않아도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있었다. 주름이 벌어지고 손가락이 안을 헤집고 있을 것이다.

“좁아.”

승건이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채훈은 그런 승건을 걷어차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구불거리며 몸속을 드나드는 손가락이 깊은 곳을 파고들었다가 빠져나가기를 반복하면서 성감을 자극했다.

둔통과 함께 치솟는 우릿한 열기에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본능이 기억해 냈다. 그리고 예상보다 쾌감이 일찍 다가왔다.

“아, 아아. 으읏……. 아.”

이제는 세 개로 늘어난 손가락이 안을 들쑤실 때마다 채훈의 입술에서 참을 수 없는 신음이 터져 나왔다. 손가락으로 섹스하는 기분에 채훈은 팔을 뻗어 승건의 팔을 잡았다. 이대로라면 뒤를 자극하는 것만으로 사정을 할 판이었다.

발기한 성기가 움찔거리며 쿠퍼액을 줄줄 배 위로 떨어뜨리고 있었다. 그리고 승건이 상기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도 보였다.

채훈은 열이 오른 눈을 다시 감았다.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쾌감에 절정에 이르는 것은 금방이었다.

“……!!”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사정하는 순간에 안이 꽉 조여들었다. 먹먹해진 귀가 헐떡이는 호흡을 인지했다. 눈을 뜨자 시야가 뿌옇게 흐려져 있었다. 눈을 몇 번 깜박이자 눈물이 맺혔다.

채훈은 손등으로 다시 얼굴을 가렸다. 좋았는데 우는 건 좀 그랬다.

“가리지 말라니까.”

또다시 손이 치워졌다. 이번에 채훈은 눈을 뜨고 승건을 보았다. 상기된 얼굴을 한 그는 확실하게 흥분한 상태였다.

“뒤만으로 갔어.”

“……?!”

“민감하잖아.”

승건의 입에서 나오리라 생각지도 않던 야한 말에 채훈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사이에 승건이 어깨에 걸려 있던 채훈의 다리를 허리에 감게 했다. 그러고는 무릎으로 선 승건이 잔뜩 커진 성기를 흐물흐물하게 풀린 곳에 가져다 대었다.

채훈은 아까 손으로 붙잡았던 성기의 크기를 기억해 냈다. 묵직한 욕망만큼이나 승건의 표정도 사나웠다.

“이제 들어갈 거야.”

채훈의 다리를 허리에 감게 한 승건이 으르렁거리는 잇소리를 내뱉었다. 채훈이 무어라 반응하기 전에 끈질기게 손가락이 드나들며 헤집어 풀어놓은 곳에 뜨거운 것이 밀려들었다.

“……!!”

머리가 순간에 텅 비었다. 입이 벌려졌지만 제대로 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승건은 채훈의 허리를 단단히 잡고는 사정없이 박아 넣었다. 질퍽거리며 살이 부딪히는 소리가 커다랗게 울렸다. 두어 번 만에 승건의 성기가 채훈의 안을 빈틈없이 채워 들어왔다.

숨 막히는 감각에 채훈은 자신의 허리를 붙잡은 승건의 손을 구명줄이라도 되는 듯이 부여잡았다.

이런 감각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오랜만에 느껴지는 압박감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특히나 음모 너머로 자신의 몸 안으로 사라지는 승건의 것을 고스란히 지켜보는 것은 외설을 넘어섰다.

채훈은 반사적으로 얼굴을 가리려고 손을 들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가리기도 전에 막혔다.

“왜, 자꾸 가리려고 해.”

“너야말로, 읏. 왜 보려고. 아. 흐읏.”

채훈은 채 말을 완성하지 못했다. 승건이 채훈의 손목을 잡은 채 허리를 움직였다. 뿌옇게 번진 채훈의 시야에 다리 사이로 승건의 붉고 위협적인 성기가 빠져나오는 것이 보였다. 내벽이 딸려 나가는 감각에 채훈은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조여든 입구가, 빠져나가려는 승건의 성기를 붙들고 말았다.

승건이 낮은 탄성을 내뱉었다.

“힘을 빼.”

“그게. 마음대로……. 아, 윽……!”

거의 끝까지 빠져나간 성기가 단번에 치고 들어왔다. 깊은 곳을 파고든 성기가 이번에는 얕게 찔러대기 시작했다.

빠듯하다 못해 비좁아 터질 듯한 곳에 길을 내는 듯한 움직임에 채훈은 바르작거렸다. 아프고, 힘들었고, 숨이 막혔다. 그러나 내벽이 문질러질 때마다 불이 번지듯 열이 올랐다. 저릿한 감각이 서서히 채워졌다.

“하, 윽!!”

어느 순간, 안을 두들기는 감각이 어딘가를 스치자 입에서 울음 섞인 교성이 흘러나왔다. 몸도 커다랗게 튀어 올랐다. 그것을 시작으로 승건의 움직임이 거세졌다.

약한 곳을 집중적으로 찔러 들어오면서 유륜을 잡아 비트는 바람에 채훈은 몸서리치며 달뜬 신음을 내뱉었다. 더한 쾌락을 위해 본능적으로 허리를 흔들었다. 참을 수 없는 감각이 치고 올라왔다.

채훈은 낮은 탄성을 내지르면서, 잡아먹을 듯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승건을 향해 팔을 뻗었다. 승건이 흥분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을 좋아하듯, 자신은 품 안에 사람을 꽉 끌어안는 것을 선호했다.

허리가 끊어질 듯한 것을 참아내며 몸을 숙여 승건의 넓은 어깨를 와락 끌어안았다. 땀으로 손이 미끄러졌지만 그래서 더욱 필사적이었다. 승건은 잠시 멈칫거리기는 했지만 다행히도 마주 안아주었다.

뒤이어 아래를 치받는 감각이 더욱 강해졌다. 감전이라도 된 듯 저릿저릿하며 이제는 눈앞이 하얗게 부서졌다. 몸도 머리도 이성의 지배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채훈은 끌어안은 팔에 꽉 힘을 주고 매달렸다.

“아, 이제 안 되겠……. 으읏. 아, 더. 으응!”

살과 살이 맞부딪히는 소리와 헐떡임이 가득한 와중에 채훈은 아무 소리나 내뱉었다. 이 순간이 영원하기를 바라면서도, 어서 괴로움에서 해방되고 싶은 상반된 욕망이 뒤섞였다. 승건의 뱃가죽에 비벼지는 성기가 한계를 호소하고 있었다.

채훈은 승건의 목덜미에 뺨을 문지르며 재촉했다.

“아직. 아직이야.”

아직이라고 속삭이는 승건의 거친 숨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것조차 자극이었다. 귀며 뺨에 닿는 입술조차 마찬가지였다.

채훈은 승건이 찔러 넣는 대로 신음했다. 끝없이 부풀어 오른 욕망에 집어삼켜지는 것 같았다. 난폭한 삽입에 짓이겨지듯 한 내부가 부르르 떨리며 진동하는 것 같았다.

폭발은 한순간이었다. 뿜어져 나온 정액이 배를 더럽혔다.

아득함에 채훈이 몸을 굳히고 있는 와중에도 승건이 허리를 고쳐 잡고는 커다랗게 쑤셔 박았다. 절정에 이르러도 계속 주어지는 쾌감에 채훈은 진저리쳤다.

“어서. 우읏.”

얼른 끝내라고 승건의 등을 쥐어뜯다시피 했지만, 그의 움직임은 단호했다. 아래로 내려찍다시피 하는 허리 짓 끝에 승건 역시 욕망을 터트렸다.

채훈은 숨을 헐떡이며 눈을 깜빡거렸다. 젖은 눈썹이 엉긴 흐린 시야보다는, 머리에서 울리는 듯한 심장 소리가 먼저였다. 맞닿은 몸에서 내뿜는 열기를 느끼면서 채훈은 땀에 젖은 승건의 등을 안은 팔을 풀었다. 그러나 승건이 놓아주지 않아서 여전히 그에게 끌어안긴 채였다.

“이런…….”

승건이 탄식을 작게 내뱉었다.

“왜?”

“콘돔을 잊었어.”

“아.”

채훈은 콘돔 없이 섹스를 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분위기에 취한 채훈도 별생각이 없던 것이었다. 어차피 콘돔이 없어도 섹스는 할 수 있었다.

“괜찮겠어?”

“어……. 어. 괜찮아. 씻으면 돼.”

채훈은 길게 설명하려던 것을 관뒀다. 뒤처리가 귀찮지만 괜찮지 않을 건 없었다. 오히려 신경이 쓰이는 것은 따로 있었다.

입술을 귓가에 댄 승건이 슬쩍 귓바퀴를 깨물더니 뺨과 턱을 핥았다. 후희를 즐기는 애무였다. 그러나 민감해진 몸이 그것을 자극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채훈은 고개를 슬쩍 물리며 승건의 얼굴을 손으로 막았다.

“그만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싫어?”

승건이 코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땀에 젖어도 잘생긴 얼굴을 보며 채훈은 애매하게 웃었다.

“그건 아닌데, 자꾸 자극받거든.”

“이게?”

“그래. 이대로 또 할 거 아니면, 하지 마.”

“그럼 하면 되겠네.”

“……?”

간단한 문제라는 듯이 승건이 단순하게 결론을 냈다. 그러고는 망연히 쳐다보는 채훈의 손을 치워내고는 입을 맞췄다. 채훈은 입 안으로 밀려드는 살덩이를 반사적으로 빨았다.

좀 더 직접적인 자극에 소름이 돋는 와중에 승건이 아래를 쳐올려 왔다. 빠져나가지 않고 안을 꽉 채우고 있던 승건의 성기가 다시 존재감을 뽐냈다.

억눌린 신음이 승건의 입속으로 삼켜졌다. 채훈은 살 떨리는 감각에 승건을 끌어안았다. 키스는 금방 진득해졌다. 서로를 탐닉하는 움직임 역시 마찬가지였다.

채훈은 쾌락을 향해 뛰어들었다.

*

*

천천히 잠에서 깨어나던 채훈은 나른한 기분을 느끼며 눈을 깜빡거렸다. 눈이 부어 시야가 애매했지만 주변은 컴컴했다. 한숨 더 잘까 하고 몸을 뒤척이는데 허리가 아팠다. 거기도 욱신거렸다.

낯선 통증에 채훈은 어젯밤에 있었던 일을 한꺼번에 떠올렸다. 몸을 웅크린 채로 얼어붙은 채훈은 눈을 번쩍 떴다. 침대 바깥쪽을 향해 모로 누워 있던 채훈의 눈에는 승건이 보이지 않았다.

설마 승건이 등 뒤에 누워 있는 것은 아니겠지?

채훈은 벌떡 일어나는 대신에 숨을 죽여 주변의 기척을 살폈다. 다른 사람의 숨소리 같은 것은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허리가 땅겨서 앓는 소리가 흘러나오려는 것을 꾹 참았다.

눈을 몇 번이고 깜빡인 채훈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옆자리는 비어 있었고 승건은 보이지 않았다. 실내가 어두운 것은 암막 커튼 덕분인 듯했다. 암막 커튼이 살짝 벌어진 사이로 햇살이 강했다.

“없나?”

조용히 중얼거리자 자신의 목소리만 오롯하게 들렸다. 문을 열고 나가 확인하고 싶었지만 완전히 벌거벗은 상태였다. 시트를 칭칭 감고 나가는 것은 무리였다.

옷이 어디 있나 싶어 두리번거리는데, 승건이 누웠던 침대 발치 쪽에 옷걸이에 걸려 있는 외투와 양복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거기에는 속옷과 양말, 휴대폰, 지갑, 그리고 작은 메모지가 함께 있었다.

그곳까지 대충 굴러간 채훈은 메모지부터 집어 들었다.

[스케줄이 있어서 먼저 간다.]

펜으로 쓴 글씨는 멋지게 흘려 쓴 정자체라서 채훈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 고등학교 시절에도 승건의 글씨는 아주 반듯했다. 어렸을 때 펜글씨 연습을 무지하게 한 게 분명하다고 놀렸던 기억이 났다. 그때 승건은 그렇다고 했었다.

메모지를 들어 몇 번이고 팔랑거린 채훈은 잠시 고민했다. 승건이 이곳에 없는 이유 말고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승건의 휴대폰 번호라든가, 혹은 다음에 보자는 예의상 인사 같은 것 말이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명명백백했다. 다음은 없었다.

채훈은 아쉬움을 느꼈다. 분명히 두 번 만날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서 원나잇을 하자는 승건의 제안에 응하기는 했다. 충동적인 결정이었고, 후회할 거라는 각오도 했다. 그래도 여지를 주지 않는 메모의 내용은 이제 더 이상 친구조차 아님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라 기분이 좀 그랬다.

“뭐…….”

채훈은 미련을 버렸다. 여기서부터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10년 전에 끝났던 인연이었다. 어제의 일은 작은 해프닝일 뿐이었다. 인생이라는 드라마에서 비정기적으로 일어나는 뜻밖의 이벤트 말이다. 게다가 한 번 자버렸으니까 친구라고 하기에는 어정쩡한 관계가 되어버렸다. 그럴 바에야 그냥 안 보는 게 나았다.

채훈은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11시 5분 전. 집에 돌아가서 점심을 먹으면 딱 좋은 타이밍이었다. 승건이 언제 돌아올지는 모르지만 그 전에 사라져야 했다. 채훈은 재빠르게 옷을 챙겨 입기 시작했다.

승건이 당장에 나타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쫓기듯, 혹은 도망치듯 나가는 것도 별로였다. 그래도 얼른 사라지는 게 좋다는 것을 본능이 느꼈다.

“어구구.”

바지를 꿰입으며 채훈은 결국 앓는 소리를 냈다. 혹사당한 허리가 욱신거렸고 다리는 반쯤 풀려 있었다. 이리저리 움직일 때마다 몸이 삐꺽거렸다. 양말을 신고, 셔츠에 카디건을 챙겨 입고 패딩 점퍼를 손에 쥔 채훈은 결국 침대에 걸터앉았다.

오랜만에 너무 무리해서 그런지 허리도 엉덩이도 너무 아팠다. 너무 흥분해서 앞뒤 가리지 않고 덤벼든 게 문제였다.

그 자식 게 너무 컸어. 체력도 짐승이고.

내가 미쳤다고 자책하려다가 승건에게도 책임을 전가했다. 흉기를 가진 녀석이 지칠 줄 모르는 체력으로 사람을 쥐어짰다. 멀쩡하지 않으면 그게 이상한 일이었다.

그래도 섹스 자체는 좋았다.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몸 안쪽이 저릿해지는 것 같았다.

난감한 여운에 길게 한숨을 내쉰 채훈은 천천히 침실 내부를 둘러보았다. 어젯밤에는 정신이 없어서 커다란 침대 말고는 기억에 남는 게 없었다.

사실 볼 만한 것도 별로 없었다. 벽에 걸려 있는 추상화 액자와 암막 커튼, 커다랗고 푹신한 러그가 전부였다. 이곳도 거실만큼이나 휑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모두 비싼 것 같기는 한데, 사람 사는 곳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부자라면서. 좀 꾸미고 살아.”

이곳에 없는 승건을 향해 중얼거린 채훈은 피곤한 눈을 손으로 잠시 눌렀다. 기분이 묘했다. 조금 허허롭고 이상하게 한숨이 나왔다.

사실은 승건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아직 많이 있었다.

왜 그때 연락하지 않았어?

왜 갑자기 섹스하자고 한 거야?

다 지나간 일이라고, 혹은 어른이 되었다고 이유를 따져 묻지 않고 넘어가기에는 미련이 남았다. 궁금했다. 납득하고 싶었다. 그러나 대답해 줄 승건은 없었다.

“자존심이 뭐라고.”

채훈은 스스로를 타박했다. 부자냐고 하기 전에 먼저 물어봤으면 되는 거였다. 먼저 말해 주지 않을까 기대하느라 기회를 놓쳐버렸다.

어쩌면, 시간이 흘러, 다시 한번 더, 우연하게 만나게 된다면 물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되기를 바랐다.

한숨을 삼킨 채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련 따위는 조금도 남겨두지 않고 모조리 털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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