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권-【00. 프롤로그】 (1/26)

  【00. 프롤로그】

금요일, 야간 자율 학습이 끝난 교문 앞은 하교를 하는 학생들과 각종 차량으로 혼잡했다. 수능이 채 한 달도 남지 않은 때였다. 마지막 스퍼트를 위해 마음 바쁜 학생들 사이에서 채훈의 발걸음은 가볍기만 했다.

채훈은 바로 옆에서 걷고 있는 승건을 슬쩍 보았다. 채훈과 승건의 집은 반대 방향이라서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야 같이 하교를 한 적이 없었다. 보통은 교실이나 정문에서 헤어졌다. 그러나 오늘은 특별한 일이 생겼다.

발단은 채훈의 하소연이었다.

점심시간이었다. 채훈은 친구들에게 내일 등산을 해야 한다고 불만을 터트렸다. 가을이 되면 채훈의 친가 쪽 친척들은 단풍 구경을 위해 산을 찾는 것이 연례행사였다. 그리고 채훈의 아버지 강대현은 몸이 약한 동생을 간호해야 하는 어머니 조미혜 대신에 장남인 강수찬과 차남인 채훈을 늘 데리고 다녔다.

작년까지는 채훈도 별말 없이 아버지를 따라나섰다. 등산도 단풍 구경도 좋아했다. 하지만 수능이 20일도 남지 않은 시점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수능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해도 아버지의 뜻은 강경했다. 시험이란 평소 실력대로 치는 것이라는 아버지의 주장을 어떻게 해볼 수가 없었다.

재작년에 형은 수능 직전이라고 빠졌고 그때도 채훈 혼자 아버지를 따라갔다. 하지만 올해는 사정이 달라졌다. 형은 군대에 가고 없고 동생은 감기에 걸려 상태가 좋지 않았다. 결국 아버지를 따라갈 수 있는 사람은 채훈뿐이었다.

친구들은 채훈을 응원해 줬다. 독서실로 튀어라. 아프다고 해라. 감기 걸리지 마라. 조심해라. 그 와중에 승건이 등산화는 있냐고 물어 왔다. 밤낮으로 온도 변화가 심한 가을이라서 산길이 미끄러울 거라고 했다. 의외로 산에서 사고가 많이 일어난다고도 덧붙였다.

지금까지 운동화를 신고 다녔던 채훈은 등산화를 빌려주겠다는 승건의 제안을 한 번 거절했다. 그러나 승건은 물러나지 않았다. 등산화가 살짝 크긴 하지만 등산 양말을 신으면 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바람에 결국 채훈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채훈은 잔뜩 들떠 있었다.

친구들 사이에서 옷이나 용품을 빌리고 빌려주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승건은 조금 달랐다.

2학년 여름 방학이 끝나고 전학을 온 승건은 기본적으로 아웃사이더 기질이 강했다. 잘생기고 공부도 잘하는 승건과 친해지고 싶어 하는 애들은 많았다. 그러나 승건은 특유의 냉랭함으로 반 친구들과 거리를 뒀다.

그나마 친한 사람을 꼽으라면 채훈이었다. 같은 반으로 전학 온 승건과 앞뒤로 앉아 시험지와 프린트를 주고받게 된 게 계기였다.

체육 시간에 혼자 서 있는 승건과 짝이 되기도 했다. 가끔씩 시시한 잡담도 주고받으면서 어느 순간부터 친구들과 어울려 같이 급식실을 오갔다.

처음에는 그렇게 승건과 가까워지는 것에 아무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지난여름에 승건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상황이 복잡해졌다. 승건의 가장 가까운 친구라는 타이틀은 뿌듯했다. 하지만 가장 가까웠기 때문에 자신의 마음을 들킬까 봐 무서웠다.

고백 따위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승건은 알파였다. 인기도 많았다. 주변에 있는 학교에서 승건을 좋아하게 된 아이들이 찾아오는 일도 종종 있었다.

오메가도 아닌 남자가 좋아한다고 고백해 봤자 차일 건 뻔했다. 아니, 경멸을 받을 확률이 높았다. 그럴 바에야 그냥 친구로 남는 게 나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건이 먼저 등산화를 빌려주겠다고 한 것은 자신을 특별하게 여기고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자신이 그를 좋아하는 마음과 다른 것이라고 해도 기분이 좋은 건 좋은 거였다. 그렇게 들뜬 마음을 감추기 위해 채훈은 이것저것 질문을 던졌다.

“걸어서 5분 거리라고 했지?”

“그래.”

“지금 집에 가면 부모님 계시지? 밖에서 기다릴까? 인사드리기에는 너무 늦었을까? 어때?”

“괜찮아. 집에 아무도 없어. 혼자 살아.”

뜻밖의 대답에 채훈은 저도 모르게 되묻고 말았다.

“혼자?”

“응. 집안 사정으로.”

집안 사정이라는 승건은 다른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다. 채훈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좋아한다는 것을 자각하고 난 다음에서야 부모님이나 형제에 대해 승건이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되짚을 수 있었다. 어떤 사연인지는 모르지만 승건이 먼저 이야기하기 전까지 캐물으면 안 된다는 것쯤은 알았다.

“혼자면 무섭지 않아? 난 혼자 있는데, 막 이상한 소리 나면 무섭더라.”

“안 무서워.”

“그럴 줄 알았어. 너는 무서운 게 뭐야?”

“없는 것 같은데.”

“오. 강심장. 나도 강철 심장을 가지고 싶다. 며칠 전에 악몽을 꿨다니까. 수능 시험지를 받아보는데, 글자를 하나도 못 읽겠는 거야. 내가 이렇게 새가슴인지 처음 알았어. 시험 칠 때는 안 이랬는데.”

채훈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비밀을 가벼운 말투로 전했다. 경찰대학 입학시험은 난도가 높기로 유명했지만 채훈은 체력도 멘탈도 자신 있었다. 1차, 2차 시험도 별문제 없이 쳤다.

그런데 최근 며칠 간격으로 수능과 관련된 악몽을 꿨다. 경찰대학은 수능이 가장 비중이 높았는데, 아무래도 그것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는 것 같았다.

“너 경찰대 간다고 했지.”

“응.”

“경찰이 꿈이야?”

“그야……. 뭐, 좋잖아. 나쁜 놈들 잡는 거.”

핵심을 찌르는 승건의 질문에 채훈은 대충 얼버무렸다.

사실 경찰대에 가는 것은 아버지의 뜻이었다. 장남인 형에게는 아버지가 하는 조명 가게를 물려받으라고 했다. 그리고 형제들 중에 가장 공부를 잘하는 채훈에게는 경찰이 되라고 강권했다. 아들 중 하나는 고위 공직자가 되어야 하는데, 경찰대만 나오면 간부가 될 수 있으니 이보다 쉬운 것은 없다는 것이었다.

채훈은 수의사가 되고 싶었지만 경찰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경찰대면 학비 면제에, 졸업만 하면 취업 걱정이 없었다. 무엇보다 기숙사에서 생활을 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매력이었다.

채훈은 가족을 사랑하고 좋아했지만, 그래도 집을 떠나고 싶었다.

부모님의 관심은 오메가인 동생에게 쏠려 있었다. 베타인 부모님 사이에서 오메가인 동생이 태어난 것은 아주 희귀한 경우였다. 형질을 타고난 데다가 몸이 약해 잔병치레가 잦은 동생을 부모님은 애지중지 길렀다.

다음은 장남인 형이었다. 아버지는 집안을 건사해야 하는 장남이 기가 살아야 한다고 온갖 지원을 다 해주었다.

상대적으로 채훈은 뒷전일 수밖에 없었다. 차별을 받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대부분의 것들은 형과 동생 위주였다. 공부라도 잘하지 못했더라면 완전 찬밥 신세가 되었을지도 몰랐다. 어렸을 때는 몰랐지만 나이를 먹으며 하나씩 아쉬움을 삼키던 것이 이제는 섭섭해지고 있었다.

채훈은 작고 귀여운 동생을 아꼈다. 형도 좋아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감정을 갈무리하기 위해서 물리적으로 거리를 두면 낫지 않을까 생각했다. 경찰대를 지원하는 동기로는 유치하지만, 어쨌든 그랬다.

“고위직 경찰은 나쁜 놈만 잡는 걸로 안 돼. 능력도 능력이지만 사회생활도 잘해야 해.”

“그거야 상식이지. 내가 그런 건 좀 잘하잖아.”

승건의 조언 아닌 조언에 채훈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경찰대를 준비하면서 여러 이야기를 주워들었다. 어른들의 세계는 도시 괴담처럼 살벌하고 무서웠다. 그래도 잘할 자신은 있었다.

“수의사가 되고 싶다고 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제 수의사는 싫어?”

승건의 물음에 채훈은 깜짝 놀랐다. 채훈이 수의사를 희망했었던 건 맞았다. 고2 때까지는 어떻게 되지 않을까 바람을 가졌었다. 수의사 역시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업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아버지를 설득하지 못했고, 그래서 포기했다.

채훈은 자신이 언제 수의사가 되고 싶다고 승건에게 말했는지 떠올려보았지만 기억나지 않았다. 아마 지나가는 말로 한 듯했다.

“수의사도 괜찮지만, 경찰이 먼저야.”

“혹시나 모르니까, 수능 치고 지망하는 학교의 수의대에 원서 따로 넣어봐.”

“음, 그건 생각해 봐야겠네.”

“한국대에 써. 같이 대학 다니자.”

“어?”

“과가 달라서 교양 수업 정도만 같이 듣겠지만.”

채훈은 승건의 말을 조금 늦게 이해했다. 승건은 이미 수시로 한국대학 경영학과에 합격한 상태였다. 그의 말대로 채훈이 한국대학에 합격한다고 해도 과가 다르니까 교양 수업 정도만 같이 들을 수 있었다. 그래도 그가 같이 대학을 다니자고 한 게 특별했다.

한국대학교는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이었다. 합격만 한다면 아버지를 어떻게든 설득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고지식한 아버지가 결정을 번복하지 않을 확률이 더 높았지만, 그래도 꿈은 꿔볼 수 있었다.

“그래. 그러면 좋겠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 건널목에 도달했다. 2차선과 4차선이 교차하는 도로의 통행량은 얼마 없었지만 건널목 신호등이 빨간색인 것을 보고 멈춰 섰다.

“저기야.”

승건이 가리킨 곳은 4차로 너머에 있는 고급 빌라였다. 원룸을 생각하던 채훈은 조금 놀랐다.

“집 좋은데?”

채훈은 웃으면서 왼편에 선 승건을 돌아봤다. 승건 역시 이쪽을 바라보고 있어서 시선이 마주쳤다. 승건은 선이 굵은 분위기 있는 미남이었다. 검은 밤하늘과 주황빛 가로등 배경이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승건에게 반했음을 자각했던 순간도 이랬다. 여름 방학 직전에 학교 축제가 있었다. 붉은 등 아래에서 소리 없이 미소 짓는 모습에 넋을 놓았다.

잘생긴 얼굴이 문제였다. 침착하고 진중해서 어른스러운 것도, 낮고 명확한 목소리도 매력이었다. 그러나 세계적인 배우나 모델 못지않게 잘생긴 외모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바람에 머리카락이 살랑거리는 모습이 화보 같았다.

좋아하면 작은 행동 하나까지도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안타깝고 두근거리고 간질거렸다.

“채훈아.”

“응? 왜?”

홀린 듯이 승건을 바라보고 있던 채훈은 얼른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너무 대놓고 티를 냈나 싶었다. 짝사랑하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너, 나 좋아하지?”

살짝 긴장하고 있던 채훈은 순간 심장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 것을 경험했다. 멍해진 머리에 온갖 생각이 떠올랐다.

왜 갑자기 저런 질문을 하지? 좋아하기는 하는데, 들킨 건가? 어떻게 대답해야 하지? 밤이라서 다행이다. 당황하면 안 돼.

한 가지는 확실했다. 여기서 말을 잘못하면 끝장이었다.

“당연히 좋아하지. 안 좋아하면 너랑 친구 하겠냐?”

채훈은 늦지도 빠르지도 않은 타이밍에 대답을 할 수 있었다. 목소리가 조금 떨리기는 했지만, 어색하지는 않았다. 채훈은 자신의 센스에 만족했다. 친구니까 당연히 좋아하는 것이다. 그건 당연했다.

그런데 승건이 인상을 썼다.

“그게―”

무어라고 말을 하려던 승건의 재킷 호주머니에서 휴대폰이 크게 진동했다. 구겨진 인상을 펴지 않은 채 휴대폰을 확인한 승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채훈은 도망칠 기회라는 것을 눈치챘다.

“전화 받아. 나는 저기서 샤프심 사 올게.”

채훈은 자리를 비켜주는 척하면서 뒷걸음질 치다가 편의점으로 향했다. 등 뒤에서 시선이 느껴졌지만 무시했다.

편의점에 들어간 채훈은 태연한 척 샤프심을 찾아 손에 쥐었다. 하지만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다. 뒤늦게 얼굴에서 열이 올랐다.

친구니까 좋아한다고 해도 승건의 표정은 납득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다시 물어볼 것 같았다. 잡아떼야 할지, 정색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말 한 번 잘못했다가는 자신의 마음이 홀라당 다 까발려질 게 분명했다. 그건 상상만으로 소름 돋는 일이었다.

“하아.”

채훈은 앓는 소리를 내며 한숨을 쉬었다. 그냥 짝사랑으로 끝내고 싶었다. 잘될 거라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가끔은 녀석이 좋아서 어쩔 줄 모를 때가 있었다. 승건이 꿈에도 나온 적 있고, 야한 생각도 해봤다.

그러나 그게 전부였다.

이루어질 수 없는 짝사랑이란 상대방이 모르는 채로 끝나야 했다. 그래야 다음에 웃는 얼굴로 다시 만날 수 있는 법이었다.

채훈은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것은 참았다.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었다. 샤프심을 결제하고는 편의점 문을 열기 전에 심호흡을 했다.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승건을 보며 아닌 척하고 잡아떼는 게 최선이라고 마음을 굳혔다.

“어?”

막 문을 열고 나서려고 할 때였다. 승건의 뒤로 승합차가 급하게 섰다. 거칠게 열린 문으로 내린 세 명의 남자가 승건을 둘러싸더니 그대로 끌고 가려고 했다. 승건이 잡힌 팔을 뿌리쳤지만 건장한 남자 셋을 상대로는 중과부적이었다.

“뭐야?!”

인신매매라는 단어를 떠올린 채훈은 그대로 뛰쳐나갔다. 달려가던 힘으로 승건의 목을 감은 남자의 등을 어깨로 치받았다.

그 때부터는 개싸움이었다. 경찰대 시험 준비로 태권도와 합기도를 배우고 체력 단련도 꾸준히 했던 채훈이었지만 고작 한 명을 붙잡고 드잡이질을 하는 것이 전부였다.

“경찰! 경찰 불러요! 납치에요!! 이거 납치라고요!! 경찰에 신고해요!!”

상가와 주택가가 뒤엉킨 지역이었다. 밤이라 지나다니는 사람이 적었다. 그래도 편의점 알바생이라면 무슨 일인가 하고 고개라도 내밀 거라는 믿음에 채훈은 커다랗게 소리쳤다.

“저 새끼, 막아!”

남자들의 고함 소리와 승건이 채훈에게 부딪힌 것이 순차적으로 일어났다. 채훈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다만 승건의 앞에 있는 남자의 손에 들린 잭나이프에 붉은 게 묻어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불길한 예감에 옆을 보자 아니나 다를까 승건이 배를 감싸고 있었다.

“승건아?”

휘청거리는 승건을 붙잡은 채훈의 뒷머리에 둔탁한 충격이 가해졌다. 눈앞이 순간 번쩍하면서 몸이 고꾸라지려고 했다. 필사적으로 균형을 잡으려고 하는데 몸이 끌려갔다.

채훈과 승건이 승합차에 실리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빨리. 빨리. 납치범의 재촉에 문이 닫히기도 전에 승합차가 튀어나가듯 출발했다.

엉망으로 구겨져 있던 채훈은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꼈다. 경찰대를 준비하면서 여러 가지 사건 기록을 읽었다. 이건 일반적인 인신매매가 아니었다. 목격자를 잔뜩 만들다 못해 칼까지 휘두르고, 목표의 곁에 있던 자신까지 함께 납치해 버렸다.

이대로라면 죽겠다고 생각하자마자 채훈은 짓누르고 있던 납치범의 손을 뿌리치고 그대로 벌떡 일어났다. 무슨 힘이 났는지 알 수 없었다. 차를 세워야 한다는 일념하에 운전석 쪽으로 팔을 뻗어 핸들을 있는 대로 꺾어버렸다.

쾅―!

어떻게 할 새도 없이 승합차가 전봇대를 들이받았다. 충돌의 여파로 납치범 둘이 닫히지 못한 문밖으로 튕겨 나갔다.

운전석 등받이에 머리를 부딪친 채훈은 세상이 뒤집히는 것처럼 어지러웠다. 그래도 그걸 이겨내고 쓰러져 있는 승건을 밖으로 끌어냈다. 승건을 부축해서 가능한 한 멀리 떨어지려고 했지만 몇 걸음 걷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지다시피 주저앉아 버렸다.

채훈은 승건을 반쯤 끌어안은 채 주위를 경계했다. 전봇대를 들이박은 승합차의 앞은 흉하게 찌그러졌다. 조용한 거리에 일어난 사고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뒤따르던 차량도 몇 대 섰다. 납치범들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상황을 파악하더니 욕을 하면서 사라졌다.

그래도 채훈은 긴장을 풀지 않고 안고 있는 승건을 보았다. 배를 감싼 채 주저앉아 있는 승건의 손은 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셔츠도 완전히 빨갰다.

“승건아? 괜찮아?”

“너, 머리에서 피 나.”

승건이 얼굴을 찡그리고는 말했다. 채훈은 아까 부딪혔던 머리를 만져보았다. 욱신거림과 함께 손가락 끝에 살짝 피가 묻어 나왔다.

“괜찮아. 이거 별로 안 아파. 너는……. 아니, 아니지. 119부터.”

채훈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재킷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폰을 찾았다. 긴급 전화를 찾아 눌러야 하는데 자꾸 헛손질만 했다. 머리는 아프다 못해 멍했고, 귀에는 이명이 울렸다. 설상가상으로 어지러움이 심해졌다.

정신을 차리려고 머리를 흔들어봤지만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채훈아! 강채훈!”

다급한 승건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채훈은 대답하지 못했다. 몸이 앞으로 고꾸라지는 것을 느끼며 채훈은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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