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아이스크림
토요일 새벽 배달은 비교적 한가했다. 일이 끝나도 학교에 갈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벌이가 그다지 좋지 않지만, 성격에 큰 하자가 있는 저로서는 평생직장이었다.
길 위에 사람 한 명 보이지 않는 새벽은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저를 위한 시간 같았다. 이 시간만큼은 외톨이가 아니었고, 쭈구리 허두영도 아니었다.
우유를 소중히 품에 안은 두영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홍승표는 토요일마다 고정적으로 우유 두 개를 배달받았다. 아마 하나는 일요일에 마시는 것 같았다.
솔직히 흰 우유와 홍승표는 어울리지 않았다. 소주 한 궤짝은 단숨에 비울 것같이 생겼는데 우유라니. 잘 상상되지 않았다.
홀쭉한 우유 주머니를 채운 두영은 백팩에서 물빛 수건을 꺼냈다. 홍승표가 지난번에 빌려준 수건이었다.
두영은 잠시 망설이다가 수건에 얼굴을 파묻고 냄새를 맡았다. 흔한 빨랫비누 냄새가 났다. 자세히 보면 구멍도 송송 뚫려 있었다. 더 이상 수건이라 하기에는 다소 민망한 감이 있었지만, 부디 홍승표가 못 본 척해 주길 바랐다.
우유 주머니에 수건을 미련하게 쑤셔 넣었더니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두영은 내용물이 튀어나오지 못하게 입구를 잘 동여매고 건물을 나섰다. 할 일을 마치자 속이 조금 후련해졌다.
얼음 기둥 같은 자전거 손잡이를 잡았지만 별 타격이 없었다. 애초에 제 손은 그보다 더한 얼음장이었기에. 그래도 비루먹은 몸뚱이가 감기에 걸릴까 봐 그거 하나만큼은 걱정이었다. 아프면 병원에 가야 했고 그럼 지출이 생겼다. 세상에서 가장 아까운 지출이었다.
새빨갛게 굽은 손으로 코를 문질렀다. 억지로 손가락을 펴 보려고 했지만, 혈관 속 피가 얼어 버린 듯 잘 펴지지 않았다. 집에 도착하면 올봄에 정리한 장갑이랑 목도리를 꺼내야겠다. 생각해 보니 방 전구도 갈아야 했다.
두영은 페달을 힘차게 굴리며 낮게 중얼거렸다.
“전구, 장갑, 목도리… 전구, 장갑, 목도리…….”
건망증이 심하여 이렇게 주입하듯 외어야 했다. 뻐끔대는 입술에서 하얀 입김이 피어올랐다. 새벽부터 기억해야 할 것이 산더미였다.
창문으로 희미한 쪽빛이 들어왔다. 홍승표는 감은 눈꺼풀을 뜨고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예민함이 덕지덕지 묻은 얼굴은 한숨도 자지 못한 듯했다. 홍승표는 느린 몸짓으로 일어나 소파 등받이에 기대앉았다. 어딘가를 멍하니 응시하는 시선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숨 막히게 조용한 공간은 빛이 들지 않는 바다 같았다. 그는 오랜 잠수 끝에 수면 위로 올라온 듯이 날숨을 내뱉었다. 늘어진 몸을 일으켜 세운 그는 사각 드로즈와 후드티만 걸치고 부엌으로 향했다. 냉장고를 열어 안을 보지도 않고 손을 더듬거렸으나, 찾는 것이 손에 닿지 않았다.
그제야 홍승표는 창밖을 보고 있던 시선을 냉장고 안쪽으로 옮겼다. 우유가 있어야 할 곳이 텅 비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치 우유를 밖에서 가지고 들어오지 않았다.
홍승표는 현관문까지 어슬렁어슬렁 걸어갔다. 한 손으로 덜 마른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다른 손으로 문고리를 짓눌렀다.
냉장고를 뒤졌을 때처럼 시선을 허공에 내던지고 팔만 현관문 밖으로 내밀어 우유 주머니를 더듬었다. 그러다 평소와 다른 푸짐한 촉감에 결국 귀차니즘을 꺾어 내고 전실 밖으로 나왔다.
“하, 귀여운 새끼.”
우유 주머니는 발로 뻥 차고 싶을 만큼 두루뭉술했다. 파트라슈의 작품에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는 길쭉한 손가락으로 입구를 쑤셔서 벌리고 잡아당겼다. 앞서 보이는 건 물빛 수건이었다. 짧은 순간에 기억을 더듬은 그가 바람 빠진 소리를 냈다.
내일 준다더니. 정말 칼같이 약속을 지켰다.
홍승표는 수건을 꺼내 눈앞에 펼쳤다. 싸구려 빨랫비누 냄새가 코끝에 스쳤다. 대충 봐도 구멍이 무차별적으로 뚫려 있었다. 이건 뭐, 수건을 빌려줬더니 걸레로 만들어 왔다. 손재주가 대단했다.
그는 한참 동안 두영의 작품을 구경하다가 목에 수건을 두르고 집에 들어왔다. 우유 하나는 냉장고에 집어넣고, 하나는 단숨에 비웠다. 빈 갑은 분리수거 통에 던져 넣었다.
스트레칭을 하고 맨몸 운동을 했다. 만성 불면증을 해결하기 위해 안 해 본 운동이 없었다. 그런데도 정신은 불야성처럼 소란스러웠다. 약까지 안 먹었더니 신경은 날로 예민해져만 갔다.
두 시간 몸을 조지고 샤워를 했음에도 시간은 눈에 띄게 흐르지 않았다. 홍승표는 지루함에 몸을 뒤틀다가 쌓인 메시지를 무료한 표정으로 훑었다. 그러나 그것도 얼마 가지 못하고 눈두덩 위에 팔을 얹고 휴식을 취했다.
메시지 내용은 한 달째 이어지는 그의 귀국 파티에 관한 것들이었다. 이제 그것마저도 지겨웠다. 똑같은 얼굴, 똑같은 유흥. 먹지 않아도 무슨 맛인지 아는 것은 두 번 다시 입에 대고 싶지 않았다.
문득 등 쪽이 배겼다. 손으로 더듬대며 범인을 검거했다. 허두영이 버리고 간 물빛 수건이었다. 정체를 확인한 홍승표의 눈동자에 약간의 흥미가 일렁였다. 그는 얼굴 위에 수건을 덮었다.
“야무지게도 사용했네.”
구멍으로 앞이 내다보일 정도였다. 분명 대충 치우라고 했던 것 같은데, 아주 광이 나게 닦고 가셨다. 손에 상처가 수두룩하게 생길 정도로.
이름보다 똥개라고 자주 불리는 짝꿍은 딱히 강아지상도 아니었다. 굳이 생김새로 따진다면 새초롬한 고양잇과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똥개라고 불리는 건 행동이나 말투에서 매 맞고 다니는 똥개가 엿보였기 때문이다.
문득 머리카락 한 올 떼어 주었다고 바로 경계를 푸는 모습이 생각났다. 홍승표는 건조한 손끝을 소금 치듯 맞비비며 짝꿍의 살 감촉을 음미했다. 그리고 잔상처럼 남은 두영의 얼굴을 집요하게 떠올렸다.
버선코에서 윗입술까지 이어지는 선이 아주 섬세했다. 전체적으로 색소가 옅어 햇빛 아래 있으면 형체가 흐려졌다. 눈동자도 평범한 갈색을 넘어 투명한 호박색이다.
허두영은 따뜻한 색을 모조리 가지고 있으면서 흐린 잿빛처럼 눅눅하고 음울했다. 겨울에 내리는 진눈깨비처럼, 혹은 무더위에 쏟아지는 장맛비처럼.
홍승표는 눈을 감았다. 오랫동안 그 상태로 있었지만, 잠이 든 것은 아니었다. 창밖으로 여명이 서서히 밝아 왔다.
***
“아.”
교실로 들어서던 홍승표는 문틀에 부딪힌 이마를 감싸며 외마디로 소리를 냈다. 의자에 삐딱하게 앉아 있던 김진호가 비죽 웃으며 아는 체했다.
“뭐냐? 키 더 큰 거임? 고작 몇 주 만에? 시발 존나 징그럽네.”
김진호는 내뱉은 말과 달리 홍승표의 키를 부러운 듯이 바라봤다. 홍승표는 김진호를 익숙하게 무시하고 제자리를 찾아갔다.
그는 책상에 엎드린 두영의 왜소한 등을 바라보며 의자에 앉았다. 마지막 수업만 남은 지금까지 녀석은 단 한 번도 잠에서 깨지 않았다. 이 정도면 죽은 게 아닌가, 하고 의심을 한번 해 봐야 될 정도였다.
그 순간 홍승표의 휴대폰이 반짝였다. 김진호에게 온 메시지였다.
[오늘아지트가실?]
아지트라면 이주학 패거리가 드나드는 폐건물이었다. 더럽고 지저분한 곳이라 홍승표는 흥미가 동하지 않았다. 그는 휴대폰에 시선을 고정한 채 고개를 내저었다. 멀리 떨어진 자리에서 그를 보고 있던 김진호가 연달아 답장을 보냈다.
[이주학이 우리돈가에서 고기쏜다고했는데 진짜안감?]
김진호는 홍승표의 건조한 반응에도 아무렇지 않아 했다. 천성이 사람을 좋아했고 허영심이 넘쳐, 전학생 손목에 둘린 파텍필립만 봐도 저절로 용서가 됐다.
[아쉽넹ㅠ똥개나데려가야지]
평소처럼 그를 무시하려던 홍승표는 팝업창에 뜬 메시지 내용을 확인하고 화면을 터치했다. 그는 두영에게 힐끗 시선을 던지고 답장을 보냈다.
[왜?]
[심심하니까]
[왜?]
[뭐임ㅅㅂ무섭게]
홍승표는 휴대폰을 뒤집어 놓고 한쪽 다리를 떨었다. 어차피 학교가 끝나도 할 게 없었다. 이제 슬슬 새로운 놀잇감을 찾아야 할 시기였다.
손바닥으로 턱을 받친 그는 두영의 둥근 뒤통수를 물끄러미 보았다. 똥개는 본인을 두고 무슨 대화가 오가는지도 모른 채 태평하게 잠이나 자고 있었다. 왕따 생활이 한두 해가 아닌 것 같은데 눈치가 많이 없는 듯했다. 그것도 아니면 좀 모자란 건가.
허두영은 수업이 끝나자마자 귀신같이 일어났다. 가까이 다가온 김진호가 두영의 뒷덜미를 마사지하듯 주물렀다.
“오늘 아지트 갈 거니까 튀지 마라.”
홍승표는 김진호의 손을 빤히 보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나도 가.”
“엥, 안 간다며?”
“마음이 갈대 같아서.”
시큰둥하게 대답한 홍승표는 의자를 밀치고 일어났다. 190센티미터가 넘는 거구가 갑자기 우뚝 서자 김진호는 흠칫했다. 덩달아 깜짝 놀란 두영은 홍승표와 시선이 맞물리자 소심하게 눈을 깔았다. 잠깐 보았던 홍승표의 눈동자는 옅은 기대감으로 번져 있었다.
10분을 걸어서 폐건물에 도착했다. 흉측한 폐건물은 금방이라도 귀신이 튀어나올 것처럼 거무죽죽했다. 2층에 도착하자 미리 도착한 이주학 패거리의 웃음소리가 건물 밖까지 전해졌다.
이주학은 김진호 뒤에 서 있는 홍승표를 발견하고 입술을 삐죽였다.
“쭉정이가 고귀한 곳에 웬일이냐?”
“안 귀해 보여서 왔어.”
이주학의 표정이 짜게 식었다. 피식 웃은 홍승표는 이주학을 지나쳐 창틀에 걸터앉았다. 명백히 자기 말을 무시하는 행동에 이주학은 뜨거운 콧김을 내뱉었다. 그리고 불똥은 엄한 사람에게 튀었다.
“똥개, 뭐하냐? 안 꿇어?”
홍승표는 창밖에 고정한 시선을 돌렸다. 고개를 바짝 숙인 똥개가 이주학 앞으로 걸어가더니 무릎을 꿇고 앉았다. 누구 하나 시키지도 않았음에도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거행되는 아지트의 규율인 듯했다.
이주학의 친구들은 자기들끼리 떠들며 똥개를 신경 쓰지도 않았다. 오로지 이주학만 녀석을 뚫어지게 응시할 뿐이었다. 김진호는 안 보는 척하면서 몰래 상황을 살폈다.
똥개를 둘러싼 묘한 분위기는 이주학이 주범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방금 생각이 바뀌었다. 아무래도 이 점성 짙은 분위기를 만든 주범은 허두영인 듯했다.
유리 파편과 돌 조각을 깔고 앉은 똥개는 표정 한 번 바뀌지 않았다. 초연한 얼굴은 이런 취급받는 게 익숙해 보였다. 언뜻 무표정한 얼굴 위로 피곤한 기색이 드러났다.
차라리 티를 내지. 저런 모습 때문에 이주학이나 김진호가 연신 찔러 보는 것이다.
“그거 꺼내, 김진호.”
이주학의 명령에 김진호는 백팩에서 개 사료를 꺼내 두영의 앞에 쏟았다. 그 옆에 작은 우유 팩도 내려 두었다.
“이건 서비스. 목 맥힐까 봐.”
이빨을 드러내고 웃은 김진호가 뒤로 물러났다. 구경꾼들은 두영이 어서 사료를 집어 먹기를 기다렸다. 홍승표도 구경꾼들과 합세해 시험에 든 두영을 지켜봤다. 머뭇거리던 똥개가 천천히 손을 뻗어 사료 한 알을 입 안에 집어넣었다.
오독, 오도독.
텅 빈 폐건물에 사료 씹는 소리가 아득히 울려 퍼졌다. 몇 번 반복해서 사료를 주워 먹던 똥개가 갑자기 헛구역질을 했다.
“삼켜.”
이주학이 낮은 목소리로 명령했다.
“뱉으면 오늘 여기서 못 나갈 줄 알아.”
희게 질릴 만큼 입술을 깨문 두영은 입 안에 든 것을 억지로 삼켰다. 시키는 대로 했건만, 이주학은 불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사료를 반쯤 비워 갈 때, 이주학이 대뜸 사료를 발로 차며 성을 냈다.
두영은 깜짝 놀랐지만, 두 손을 말아쥐고 날 것의 반응을 숨겼다. 이주학은 두영의 앞에 쭈그려 앉아, 두영의 머리카락을 한 움큼 잡고 시선을 억지로 맞췄다.
“표정이 왜 이러지? 지금 이 상황이 마음에 안 드는 것 같네? 주인이 밥을 주면 꼬리를 흔들고 감사합니다 해야지. 자 해 봐, 감사합니다, 주인님.”
“…가, 감사합니다. 주인님.”
원하는 대답을 들은 이주학이 두영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었다.
“이러니까 얼마나 예뻐. 부당하다고 생각할 거 하나 없어. 넌 그렇게 태어난 거고, 난 이게 당연한 거고. 이게 입장 차이란 거야.”
비릿한 웃음을 매단 채 지껄이던 이주학이 갑자기 정색하더니, 따로 떨어져서 떠들던 친구들을 향해 다짜고짜 주먹을 휘둘렀다. 분위기는 순식간에 도떼기시장처럼 변했다. 이주학은 가장 앞장서 있던 친구의 멱살을 거칠게 틀어잡고 잔뜩 격양된 상태로 말했다.
“시발, 너 방금 뭐라고 했냐? 호모 새끼? 호모 새끼?!”
이주학 밑에 깔린 소년이 저항 한번 하지 못하고 찰흙처럼 얼굴이 빗어졌다. 누구 한 명 이주학을 제대로 말리지 못하고 처참하게 튕겨 나갔다. 김진호가 이주학의 한쪽 팔에 매미처럼 달라붙어 윽박질렀다.
“야 이주학! 진정해라! 진정하라고!”
홍승표는 어질러진 상황을 무료하게 구경했다. 호모 새끼가 호모 짓을 해 놓고 호모라는 단어에 저렇게 길길이 날뛰는 건 뭘까 싶었다. 그는 그들에게 향한 시선을 거두고 다시 두영을 바라봤다. 똥개는 바짝 굳어서 오도 가도 못 하고 있었다. 그 순간 시선이 겹쳤다.
그는 입술을 요사스럽게 끌어 올리며 두영에게 이리 가까이 오라며 손짓했다. 하지만 똥개는 못 본 척하며 몇 알 남지 않은 사료를 손끝으로 굴리기만 할 뿐이었다.
저도 모르게 정색한 홍승표는 곧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제 발로 직접 걸어가 두영의 앞에 불량한 자세로 쭈그려 앉았다. 똥개는 고집스럽게 바닥만 보고 있었다. 묘하게 승부욕을 자극하는 녀석이었다.
비스듬히 고개를 꺾은 홍승표는 두영의 얼굴을 노골적으로 들여다보며 물었다.
“사료 맛있어?”
뇌를 거치지 않고 나온 물음에 애써 무심함을 유지하던 두영의 얼굴에 실금이 갔다. 홍승표는 입 동굴을 활짝 개방하며 웃었다.
“맛있게 먹길래 물어본 거야.”
“…….”
눈을 끔뻑대던 두영은 어색하게 시선을 떨구었다. 홍승표의 스스럼없는 물음은 빈정거리는 게 아닌, 순수한 호기심이었다. 그것이 정확히 제게도 느껴져 도저히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랐다.
아직 옆 동네는 싸움이 한창이었다. 불쾌한 소음 공해에 미간을 살포시 구긴 홍승표가 별안간 사료 한 알을 주워 아그작 씹었다. 그러나 얼마 씹지 못하고 바닥에 뱉어 버렸다.
썩 유쾌하지 않은 맛에 그의 구겨진 미간이 펴질 줄 몰랐다. 두 번 다시 느끼고 싶지 않은 끔찍한 맛이었다. 혀로 입 안쪽 살을 쓸던 홍승표는 어느 순간부터 자신을 빤히 보고 있는 두영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콧잔등을 찡그리며 말했다.
“햇볕에 마른 개똥 본 적 있어?”
“…어? 아, 응.”
“그거 씹는 것 같아.”
“…….”
날것의 맛 평가에 두영은 입술을 깨물었다. 흔들리는 표정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숙이자 홍승표가 나직한 숨을 내뱉었다.
“재미없어.”
냉혹한 평가에 똥개는 어깨를 움찔 떨었다. 하자 있는 반응이 귀여워 보이는 것도 한두 번이지, 밑도 끝도 없이 저러면 짜증만 돋을 뿐이었다.
홍승표는 구부린 무릎을 펴고 일어섰다. 똥개를 지나쳐 건물을 빠져나와 일 층 출입문 구석에 서서 담배를 입에 물었다. 손으로 바람을 막고 라이터 부싯돌을 굴렸다. 작은 불씨가 눈앞에 자잘자잘하게 터졌다.
한 모금 깊숙이 빨고 내쉰 그는 찬바람에 흩어지는 뿌연 연기를 가늘게 뜬 눈으로 보았다. 문득 위층의 소란스러움이 아래쪽으로 내려오는 게 느껴졌다. 예상대로 이주학의 패거리가 건물을 우르르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그 안에 허두영은 없었다.
그는 아지트를 떠나는 그들을 진부하게 바라보며 꽁초를 바닥에 내버리고 새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러곤 출입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자꾸만 아지트에 무언가를 두고 온 것처럼 위로 올라가는 계단을 연신 보게 됐다. 그러다 자신의 모습에 의아함을 느낀 그는 바람에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 자리를 떴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계단을 내려오는 힘없는 발소리에 홍승표는 멈칫했다. 제자리에 서서 모퉁이 너머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똥개 한 마리가 보였다. 손에는 김진호가 준 우유가 들려 있었다.
홍승표는 발소리를 죽이고 똥개의 뒤를 밟았다. 모퉁이를 꺾고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자, 녀석이 하수구 앞에 쭈그려 앉아 손에 든 우유를 하수구에 흘려보내고 있었다. 그러다 대뜸 본인의 뺨을 찰지게 때렸다.
찰싹, 찰싹, 찰싹.
연달아 터지는 마찰 소리가 처절하고 처연했다. 속에 쌓아 둔 화를 스스로에게 푸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두영을 조용히 지켜보다가 느린 걸음으로 거리를 좁혔다. 그 순간 똥개 녀석이 갑자기 고개를 들어 옆을 돌아봤다. 시선 끝에는 길고양이 한 마리가 있었다.
“상해서 네가 먹으면 안 돼.”
숨소리가 가득 실린 음울한 목소리였다. 홍승표는 두영의 뒤통수를 빤히 내려다보며 방금 들은 목소리를 되새김질했다. 귀가 간지러운 느낌이 썩 기분 나쁘지 않았다.
“이리 와.”
고양이에게 손을 뻗어 손끝을 까딱까딱 움직였지만, 고양이는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이상하네, 전에는 바로 왔는데…….”
녀석이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홍승표는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리며 작게 웃었다. 여기서 고양이와 초면인 사이는 아무래도 저밖에 없는 것 같았다. 도대체 저 고양이가 허두영에게 어떤 애교를 부렸기에 이토록 실망하는지 궁금했다.
그는 뾰족한 시선으로 고양이를 바라보았다. 눈치 싸움에서 진 건 험난한 세상을 홀몸으로 살아가는 길고양이였다. 새초롬하게 돌아선 고양이가 뒷발을 차며 구역을 떠났다.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던 두영은 무릎을 짚고 일어서다가 현기증 때문에 도로 주저앉았다. 설상가상 다리에 힘이 풀려 아예 엉덩방아 찧었다. 홍승표는 반사적으로 한쪽 발을 들어 두영의 궁둥이를 받쳐 주었다.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에 두영은 고개를 퍼뜩 쳐들었다. 하늘을 등진 홍승표와 시선이 정통으로 부딪쳤다. 천부적으로 반응이 느린 두영은 뒤늦게 깜짝 놀라, 그가 기껏 받아 준 게 무색하게 맨바닥으로 털썩 주저앉았다.
홍승표는 짙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뭐 하는 거야?”
“…어?”
“일부러 나 짜증 나게 하려는 거냐고.”
그럴 리가 없다는 걸 홍승표 본인도 알고 있지만, 이따금 도를 넘는 허두영의 찌질한 모습에 그만 예민하게 반응하고 말았다. 한숨과 함께 짜증을 사그라뜨린 그는 두영에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두영은 스스로 일어날 줄 아는 아이였다. 혼자서 발딱 일어나 엉덩이를 탈탈 떨었다.
허탈한 표정을 지은 홍승표는 이내 싱거운 웃음을 터뜨리며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았다. 그러고는 빈 우유갑에 눈길을 보냈다. 그 시선을 따라 고개를 숙인 두영은 뒤늦게라도 우유갑을 등 뒤로 주섬주섬 숨겼다.
“우유는 왜?”
“사, 상해서…….”
“아아. 그래, 상한 건 먹지 마.”
걱정을 한 다발 담은 말투였고, 은연중 무시하는 말투이기도 했다. 상한 우유는 안 되지만, 안 상한 개 사료는 먹어도 된다는 논리였다.
“애앩웅.”
떠나 버린 줄 알았던 고양이가 어느새 이쪽으로 다가와 두영의 종아리에 얼굴을 문질렀다. 진회색 교복 바지에 고등어 털이 몇 올 박혔다. 두영은 서서히 흐무러지는 표정에 힘을 주고 근엄한 척 다리를 물렸다. 그런데도 고양이가 졸졸 따라오며 왕대가리를 문질러 댔다.
“가, 저리 가.”
고양이를 밀어 내는 절박한 목소리가 옅게 떨렸다. 두영은 제 비밀스러운 취미를 홍승표에게 들킨 것 같아 민망했다.
조용히 지켜보고만 있던 홍승표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쌍방이야? 땅콩 달고 하는 짓만 보면 일방 순정 같은데. 아니, 추근대는 건가?”
두영은 두 눈을 부산스럽게 깜빡였다. 대체 홍승표는 길고양이를 상대로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두영은 고민 끝에 고양이를 품에 안고 골목을 빠져나갔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는 모습에 홍승표는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똥개 녀석은 자신을 고양이 살인마로 보는 모양이었다.
두영이 길모퉁이를 꺾는 순간이었다. 바짝 따라붙은 홍승표가 두영을 뒤에서 껴안듯이 잡아챘다. 놀란 고양이가 두영을 품에 벗어나 사뿐히 착지했다.
두영은 제 심장이 끝없이 깊은 지옥 구렁텅이로 수직 낙하하는 줄 알았다. 그의 손목을 움켜잡고 버둥거렸다. 입이 틀어막히고, 두 팔이 결박당하자 눈앞이 새하얗게 점멸했다.
“쉬이.”
귓가에 밀접하게 닿은 그의 입술이 다정한 바람 소리를 내며 두영을 달랬다.
“저기 봐 봐.”
두영은 눈물을 송골송골 매단 채 그가 가리킨 곳을 보았다. 거기엔 이주학과 김진호가 인형 뽑기를 하고 있었다.
“지금 나가면 쟤들한테 들켜. 여기 좀만 있다 가.”
두영은 어째서 홍승표가 저 둘을 피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같이 어울리는 거 아니었나? 지금 상황은 마치 자신을 도와주는 것 같았다.
길목을 벗어난 고양이가 그들이 있는 근처 천막 아래에서 식빵을 구웠다. 때마침 모든 돈을 탕진한 이주학이 짜증 난 얼굴로 고개를 홱 돌렸다. 고양이를 지그시 바라보는 눈빛이 불손했다.
홍승표는 당장 튀어 나갈 것처럼 구는 두영을 품에 욱여넣었다.
“니 친구란 걸 알면 당장 해치고도 남을 녀석들이야.”
친구.
작은 단어 하나에 심장이 사포질 당한 듯이 따가웠다. 두영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홍승표의 말이 맞았다. 아무리 이주학과 김진호가 인성을 팔아먹은 쓰레기처럼 굴어도 동물을 해치진 않았다.
그러나 자신이 연관되면 말이 달라졌다.
그 아이처럼.
홍승표는 경계심 가득한 두영의 옆얼굴을 집요하게 보았다. 서늘한 바람에 녀석의 머리칼이 알알이 흐트러졌다. 코끝을 간지럽히는 녀석의 머리털에서 가을 햇볕에 바짝 마른 이불 냄새가 났다.
솜털이 바짝 선 뺨과 추워서 붉어진 콧잔등, 그리고 눈을 깜빡일 때마다 나는 속눈썹의 바스락거림. 방구석에 처박혀 녀석의 이목구비를 음미했던 그날의 새벽녘보다 지금이 훨씬 재밌었다.
똥개의 입을 틀어막은 손바닥이 습해졌다. 그 손을 붙잡고 있는 녀석의 손이 수전증에 걸린 환자처럼 덜덜 떨렸다. 뼈 위에 살가죽만 두른 듯한 가는 손은 얼음장처럼 찼다. 시선을 슬쩍 들어 올리자 울음을 참고 있는 허두영이 보였다.
때마침 이주학과 김진호가 자리를 떴다. 홍승표는 아쉬움을 무릅쓰고 두영을 놔주었다. 두영은 벽을 짚고 침까지 질질 흘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제야 홍승표는 자신이 두영의 숨구멍까지 틀어막았다는 걸 깨달았다.
사람 한 명 올려 보낼 뻔한 그는 두영의 침으로 젖은 손을 반대쪽 손에 문지르며 말했다.
“미안.”
하나도 미안하지 않은 말투와 얼굴에 도리어 두영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태평한 얼굴을 한 홍승표가 두영을 부축하기 위해 손을 뻗었다. 두영이 고개를 살짝 내저으며 거부했지만, 홍승표는 못 본 척하며 힘으로 두영을 붙들었다. 그러고는 침과 눈물로 젖은 두영의 얼굴을 본인의 옷소매로 닦아 주었다.
다시 얼굴이 보송보송해진 두영은 뭐가 마려운 듯이 있다가 작게 속삭였다.
“가, 갈게.”
“어딜?”
“알바…….”
“크게 말해. 잘 안 들려.”
홍승표는 두영의 입가 근처에 제 귓구멍을 가까이 갖다 댔다. 조금 머뭇거린 두영은 천천히 입술을 오물거렸다.
“알바… 가야 돼.”
이번에도 한낱 초겨울 바람에게 쉽사리 빼앗길 작은 목소리였다. 홍승표는 숨결이 다분히 섞인 두영의 목소리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원래 목소리가 작아?”
“…….”
“다그치는 게 아니라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야.”
눈동자를 데굴 굴린 두영은 느릿느릿 대답했다.
“…말을, 잘 안 해.”
“왜?”
“그, 그냥.”
“그냥 왜? 왕따라서?”
아래를 보고 있던 두영이 눈을 치떴다. 얇은 눈꺼풀 위로 진한 아이홀이 그려졌다. 호기롭게 군 것과 달리 홍승표의 눈동자가 새까맣게 가라앉자 두영은 저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러곤 뒤돌아 달아나려 했다.
“누구 맘대로.”
코웃음 친 홍승표가 두영의 가방끈을 잡아채고 뒤로 홱, 끌어당겼다. 두영이 중심을 잡기 위해 두 팔을 마구 허우적거렸다. 홍승표는 넘어질 뻔한 두영을 뒤에서 받아 주고 똑바로 서게 했다.
“내가 니 친구 구해 줬는데 넌 아무 보답도 없어?”
“…무슨 보답?”
“나랑 놀아 줘.”
“어?”
“놀아 달라구. 나 전학 와서 친구 없어.”
홍승표는 당당했다. 전학 온 것도 사실, 친구가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자고로 친구란 쌍방으로 친밀해야 친구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자신은 친구 한 명 없는 게 맞았다.
수탉처럼 빳빳하게 목을 세운 홍승표가 쉬지도 않고 부리를 털었다.
“아이스크림 사 줄게.”
그는 얼렁뚱땅 시선을 맞춘 두영에게 나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열 개 먹어도 돼.”
홍승표는 근처 편의점을 찾아서 들어갔다. 두영은 파라솔 아래 서서 그를 기다렸다. 알바를 가야 하는데 홍승표가 언제까지 자신을 붙잡고 있을지 걱정이었다. 그보다 입 안이 텁텁해서 얼른 양치를 하고 싶었다.
편의점에서 나온 홍승표가 생수 모가지를 비틀어 두영에게 내밀었다. 두영이 곧바로 받지 않고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자 홍승표가 가벼운 미소를 흩날렸다.
“물로 가글 해.”
넌지시 건네는 말이 다정했다. 두영은 조심스럽게 받은 물로 가글 했다. 하수구에 퉤, 하고 뱉은 뒤에 작은 목소리로 고맙다고 중얼거렸다. 이번엔 그가 잘 들었는지 다시 말하라고 하지 않았다.
목이 탔던 두영은 양 볼이 볼록해지도록 물을 가득 머금었다. 홍승표는 두영의 부푼 볼을 물끄러미 보다가 검지로 콕 찍었다. 분무기처럼 물을 내뿜은 두영은 사레가 들려 골이 울릴 정도로 기침했다.
홍승표는 두영의 등을 토닥이다가 아까처럼 입을 닦아 주려고 했다. 두영은 불쑥 치드는 생리적인 거부감에 고개를 살며시 내저었다. 그리고 안전거리를 확보한 다음에 제 와이셔츠 소매로 젖은 턱을 벅벅 문질렀다.
홍승표는 참 이상했다. 정말 친구 놀이에 진심인 것처럼 행동했다. 그때 얼굴 앞으로 포장지가 벗겨진 아이스크림이 내밀어졌다.
“먹어.”
그가 건넨 아이스크림을 두 손으로 공손히 받은 두영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극진한 어르신 대접에 홍승표는 한쪽 눈썹을 까딱 세웠다.
두영이 받은 아이스크림을 먹지 않고 들고만 있자, 홍승표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안 먹어?”
당장 처먹으라는 소리로 들은 두영은 고개를 냉큼 저으며 대답했다.
“머, 먹어.”
다 먹기 전까지 보내 주지 않을 것 같아 두영은 아이스크림을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순간 이가 시려 뼛속까지 전해지는 냉기에 두영은 열심히 핥아먹는 쪽으로 마음을 바꾸었다.
이제 정말 겨울이 가까워진 것 같았다. 입술이 시리고, 아이스크림은 몽둥이처럼 딱딱해 빨리 녹지 않았다. 홍승표는 뾰족한 송곳니로 아이스크림을 베어 먹었다. 그러다 시선이 맞닿았고, 그는 눈을 초승달처럼 구부리며 맑게 웃었다.
두영은 저를 향해 소년처럼 웃는 홍승표 볼 때면 조금 난처했다. 타인의 선행은 함부로 믿으면 안 됐다. 나중에 철면피를 드러내고 자신을 잔인하게 도륙할 수 있었기에. 그게 아니면 지독한 트라우마를 안겨 주거나 말이다.
“자주 먹어?”
“…어?”
잠시 다른 생각에 빠졌던 두영은 뒤늦게 대답했다.
“사료. 난 이번에 처음 먹었어.”
두영은 자신이 맞게 들은 건지 의심했다. 조금의 우회 없이 들어온 질문 속에 자신이 이해하지 못한 의도가 숨겨진 게 아닌가 의심했다. 그의 말대로 사료는 오늘 처음 먹어 보는 게 아니다. 이주학의 아지트에 가면 꼭 하는 웰컴주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홍승표는 저런 말을 하려고 같이 놀자고 한 걸까? 방과 후에 놀자는 말을 정말 오랜만에 들었는데……. 진짜로 홍승표랑 같이 놀겠다고 쫄래쫄래 따라온 건 아니지만, 저도 모르는 사이에 아주 조금은 기대했나 보다. 그게 아니라면 이 실망을 어떻게 설명할 수 없었다.
“흐른다.”
어느새 코앞으로 다가온 홍승표가 두영의 손목을 잡고 말했다. 산호색 단물이 그의 손등 위로 빗금을 그려 가며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었다. 두영은 반사적으로 제 손을 핥았다. 아이스크림 밑동을 쭙쭙 빨고, 기둥을 입술로 더듬으며 올라갔다.
얼추 녹은 부분을 수습하자 손이 찐득찐득했다. 물로 씻어 내려고 생수 뚜껑을 여는데, 제 손목을 움켜잡고 있는 홍승표 때문에 손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두영이 몇 번 헛손질한 순간이었다. 홍승표는 두영의 손등을 겹쳐 잡고는 생수를 열어 주었다.
문득 이마에 따뜻한 숨결이 나부꼈다. 고개를 들자 제 앞머리가 그의 턱에 스쳤다.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는 홍승표의 얼굴에 두영은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시선이 겹쳤다.
눈빛에 무게가 있다면 홍승표는 우주에서 시멘트 바닥까지 맨몸으로 추락하는 속력일 것이다. 쉽게 헤어 나올 수 없는 그의 눈빛에 불현듯 거부감이 치솟았다. 그건 마치 김진호가 저를 보는 듯한 눈빛과 엇비슷했기 때문이다.
두영은 뒷걸음질 치다가 플라스틱 의자를 발뒤꿈치로 쳐 버렸다. 바닥을 긁는 플라스틱 의자 소리에 새까만 그의 눈이 섬광으로 번뜩였다. 그는 벌어진 거리를 단숨에 좁히고 두영의 팔뚝을 잡아챘다.
흠칫 놀란 두영은 무심코 그의 손을 뿌리쳤다. 한량 같던 홍승표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서늘해졌다.
“곧 있으면 내 얼굴도 치겠네?”
“미, 미안.”
두영의 사과에 홍승표는 다시 웃어 보였지만, 전처럼 산뜻하지 않았다. 그 미소에 음습한 겨울 내음이 났다. 두영은 문득 깨달았다. 앞으로 그가 제게 무슨 짓을 해도 자신은 반항 한 번 못 하리란 것을.
홍승표는 시무룩한 두영의 얼굴로 바라보다가 뒷덜미를 긁적였다. 그러다 두영의 손에서 생수를 채 갔다.
“물 부어 줄게. 손 씻어.”
“아, 응……. 고마워…….”
“안 들려.”
두영은 두 번 말하지 않았다. 홍승표는 입술을 가볍게 당길 뿐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그는 편의점 봉투를 두영에게 건네며 담백하게 말했다.
“양치 잘하고.”
아이스크림 10개를 사 주겠다는 말이 진짜였는지 편의점 봉투에 아이스크림이 종류별로 있었다. 심지어 비싼 컵 아이스크림도 있었다. 두영은 명치에 묵직한 덩어리가 걸린 것처럼 답답했다.
‘왜 너는 내게 잘해 줘? 너도 뺏어 갈 게 있는 거야?’
사람의 선의를 순수하게 받아 본 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났다. 애초에 선의를 받아 본 일이 드물었다. 선물도 받아 본 사람이 잘 받는다면 자신은 평생 누군가의 선의를 잘 받지도 못할 것이다.
“나 간다.”
그 말을 끝으로 홍승표는 홀연히 사라졌다. 눈 뜨면 사라지는 꿈의 종적처럼. 그러나 그가 나온 꿈은 흉몽일 뿐이었다. 앞으로도 그건 변함없었다.
밤이 가까워지자 비가 보슬보슬 내리기 시작했다. 잠시 외출했다가 돌아온 유재민의 머리가 살짝 젖어 있었다.
“우산 안 가지고 가셨어요?”
“응, 편의점 요 근처니까.”
“재고는 남아 있었어요?”
“아니, 오늘도 완전 허탕. 진짜 공장을 털어 버리든가 해야지.”
카페 ‘펜스테몬’의 사장인 유재민은 최근 인기 캐릭터 실이 들어 있는 과자를 구입하기 위해 동네 편의점을 순방 중이었다. 유행해 민감하지 않은 그가 유독 그 과자를 노리는 건 족제비를 닮은 사이드 캐릭터를 손에 넣기 위함이었다.
“어? 두영, 이 아이스크림은 뭐야?”
냉동고를 열어 보던 유재민이 물었다.
“…오는 길에 샀어요. 드셔도 돼요.”
“진짜? 그럼 괜히 아이스크림 사 왔네.”
유재민이 손에 든 편의점 봉투를 흔들어 보였다. 두영은 탈의실에서 마른 수건을 꺼내 유재민에게 건넸다.
“땡큐. 오늘 날씨 너무 춥다. 파전에 막걸리가 당기네. 그냥 문 일찍 닫고 들어갈까?”
“술 좋아하세요?”
“적당히? 너는?”
“저요?”
“아, 너 아직 미자구나. 올해 몇 살이지?”
두영은 조금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곧 스물이요.”
“벌써? 처음 봤을 때가 중학생이었던 것 같은데.”
“고등학생… 이었어요.”
유재민의 잘못된 기억을 교정해 준 두영은 괜히 헛헛한 마음에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사실 허삼혁이 출생신고를 1년 늦게 하였기에 햇수로만 따진다면 자신은 이미 성인이었다. 딱히 거짓말을 한 게 아님에도 두영은 왠지 모르게 유재민을 속인 것 같아 양심에 찔렸다.
“비는 오고, 사람은 안 오고. 너무 좋다.”
유재민이 밤 맛 아이스크림을 꺼내 입에 문 상태로 웅얼웅얼 말했다.
골목가에 위치한 작은 카페는 항상 한가했고, 메뉴도 극단적으로 단출했다. 두영이 이곳에서 갓 일을 시작했을 때, 연이은 실수로 눈치 보는 날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유재민은 기죽어서 도 닦을 거냐며, 도리어 두영을 위로했다.
두영은 분위기에 젖은 유재민의 옆모습을 힐끔 보았다.
“사장님은 일하는 게 좋으세요?”
“사장인데 일하는 게 좋냐니, 그게 무슨 말이야?”
“아니, 그냥… 딱히 매출 걱정하는 것 같지 않으셔서요.”
유재민의 단정한 이목구비가 부드러운 선을 그렸다.
“그래 보여?”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까지야. 근데 뭐, 틀린 말은 아니야. 매출 신경 안 쓰는 거 맞긴 하지. 그냥 여긴 내 아지트 같은 곳이고, 취미 활동 하는 곳이지. 다르게 말하면 돈지랄.”
유재민은 부동산 부자다. 손님이 없어도 카페가 망하지 않는 이유였다. 세상 아쉬울 게 없을 것 같은데, 종종 그는 자조적인 말과 함께 아득히 먼 곳을 그리워하듯이 바라볼 때가 있었다.
머리를 긁적인 두영은 냉장고에서 비싼 컵 아이스크림을 꺼내 유재민에게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뭐야, 나한테 비싼 거 양보하는 거야? 근데 난 밤 맛이 좋아. 예나 지금이나 순정이 최고지.”
유재민의 너스레에 두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작은 머리통을 주억거렸다. 순정. 유재민이 그리워하는 건 비 내음이 묻은 순정일지도 몰랐다.
두영은 평소 마감하는 시간보다 이르게 퇴근했다. 유재민이 유급 조퇴를 선물했기 때문이다. 집에 있는 시간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유재민의 기분이 꿀꿀해 보였기에 군말하지 않고 컵 아이스크림을 하나 챙겨 카페를 나섰다.
우산에 떨어진 비가 팝콘처럼 튕겼다. 후드득후드득 내리꽂히는 빗줄기 소리는 음악회와 견주어도 손색없었다. 새까만 아스팔트에 비친 주황색 가로등은 둥근 보름달이었다.
빗물이 흘러내리는 달동네 계단은 걸어 올라가기 쉽지 않아 보였다. 옆으로 조금만 더 가면 평평하게 다져 놓은 길이 있었지만, 두영은 평생 다닌 이쪽 길이 편했다. 변화는 싫었다. 싫어하는 음식을 억지로 먹는 것만큼. 아무리 몸이 고생해도 눈 감고 할 수 있는 익숙함이 편안했다.
두영은 현관문이라기엔 초라한 문을 열고 집에 들어갔다. 여닫을 때마다 녹슨 경첩이 비명을 질렀다. 마치 처녀 귀신이 찢어지게 웃는 소리 같았다.
매번 기름칠해야지 생각만 하고 내일로 미뤘다. 그렇게 5년은 지난 것 같다. 생각한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건 심하게 부담스러웠다. 짙은 무기력에 손끝 하나 움직이지 못할 정도였다.
형광등 스위치를 켰지만, 방에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전구가 나갔다는 걸 기억해 낸 두영은 방턱에 기운 없이 걸터앉았다. 분명 몇 번이나 되새김했음에도 몹쓸 기억력은 온전히 제 역할을 해내지 못했다.
자책, 짜증, 분노, 혐오. 자신을 향한 맹비난이 머릿속에서 난장을 피워 댔다. 울컥 넘어오려는 울분을 애써 참아 낸 두영은 가방에서 아이스크림을 꺼냈다. 다행히 날씨가 추워 많이 녹지 않았다.
뚜껑을 열다가 손에 묻은 아이스크림을 핥았다. 진한 단맛이 혀뿌리를 타고 전신에 퍼졌다. 눈을 감아도 떠올릴 수 있는 강렬한 맛이었다. 한 번 보면 잊히지 않는 홍승표의 얼굴처럼.
그때, 불길한 느낌이 두영의 등골에 스쳤다. 예상한 불안은 곧바로 불어닥쳤다. 샷시문이 거칠게 열리고 상태가 좋지 않은 허삼혁이 보였다. 지독한 술 냄새가 집 안으로 혀를 날름거렸다.
성큼성큼 안쪽으로 들어온 허삼혁이 다짜고짜 두영의 뺨을 후려쳤다. 두영은 날카로운 이명에 연달아 날아오는 발길질을 피하지 못했다.
허삼혁이 초조한 듯한 음성으로 두영에게 물었다.
“노친네는?”
입에 본드가 처발린 듯 벌어지지 않았다. 혀를 찬 허삼혁은 두영을 발끝으로 치우고 방 문턱을 지나쳤다. 뒤꿈치가 해진 신발이 방 안을 발바리처럼 돌아다녔다.
허삼혁은 무언가를 찾는 듯이 장롱을 뒤지고, 쌓아 둔 이불을 무너뜨렸다. 이내 목적을 이룬 그가 방에서 나왔다. 손에는 김춘녀의 통장이 들려 있었다.
두영은 허삼혁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그, 그건 안 돼요.”
“놔 이 새끼야, 안 놔?”
“월세 밀려서 쫓겨난단 말이에요!”
“씨발! 놓으라고!”
허삼혁은 두영의 멱살을 잡고 부엌 구석탱이로 내던졌다. 이마를 벽에 부딪친 두영은 천천히 무너져 내렸다.
“시발년이 어디 건방지게. 애비가, 놓으라면, 놓아야지, 어디서 말대꾸를, 늘어놔!”
허삼혁이 끊어 말하며 두영의 복부를 걷어찼다. 무차별적으로 쏟아지는 폭력에 두영은 몸을 둥글게 말았다. 악다문 입 안에 비릿한 쇠 맛이 서렸다.
먼저 나가떨어진 허삼혁이 거친 숨을 내뱉었다.
“씨발… 징그러운 새끼. 지 버리고 간 애미년 닮아서 소리 한 번 안 지르지.”
바닥에 누런 침을 뱉은 허삼혁이 김춘녀의 통장으로도 부족해서 두영의 옷 주머니와 책가방을 뒤졌다. 두영은 손바닥으로 귓구멍을 틀어막고 숫자를 셌다. 10까지 셌다가 정신이 끊겨 다시 1부터 시작했다. 그 짓거리를 여러 번 반복하고 눈을 떴을 땐, 곰팡내 나는 집에 저 혼자뿐이었다.
두영은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방에 들어가 구겨진 이불을 파고 들어갔다. 몸이 주체 못 할 정도로 떨렸다. 한기가 직접적으로 뼈에 스미는 것 같았다.
이런 날은 엄마 생각이 많이 났다. 마지막으로 본 엄마의 모습은 머리가 길었던 것 같기도 하고, 짧은 단발머리였던 것 같기도 했다. 제 얼굴을 어루만지는 손은 할머니 손보다 따뜻했는데. 지금 이 상태로 그 손길을 받으면 눈물을 쏟아 낼 것 같다.
어렸을 땐 엄마를 많이 원망했었다. 시간이 지나 미움의 감정은 희석되어 이젠 아무렇지도 않았다. 살고자 하는 사람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계속 살면 된다. 자신은 죽음을 여러 번 경험해 보았기에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 육체적 죽음인들 대단할 것도 없을 거다.
자조적인 웃음을 흘린 두영은 메말라 가는 모래성처럼 바사삭 부서졌다. 숨 막히는 정적이 죽음의 문턱 같아, 피부 안쪽까지 소름이 끼쳤다. 두영은 허둥지둥 이불 밖으로 나왔다. 어두운 건 싫었다. 그림자 속에 숨은 무언가가 저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부엌으로 나온 두영은 시멘트 바닥을 밟자마자 갓 태어난 새끼 짐승처럼 주저앉았다. 양말이 축축했다. 시선을 내리자 잔뜩 짓밟힌 아이스크림이 있었다.
사람마다 어울리는 옷이 있는 것처럼 음식도 그러한가 보다. 분수에 맞지도 않은 것을 탐내면 어떤 꼴이 나는지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두영은 짓이겨진 종이컵을 손에 쥐었다. 그리고 바람에 펄럭이는 샷시문을 향해 내동댕이쳤다.
초라한 제 모습에 화가 났지만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몰랐다. 손톱을 세워 살가죽이 파일 만큼 온몸을 긁었다. 머리털을 잡아 뜯고, 뺨을 때렸다. 알맹이가 없는 소리를 허공에 질렀으나, 고작 이것으로 평생 쌓인 응어리는 풀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답답할 뿐이었다.
강한 분노 뒤엔 진한 무기력이 찾아왔다.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두영은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태아처럼 웅크렸다.
해가 뜨려면 아직 멀었다. 그전까지 조금만 쉬기로 했다.
***
두영은 미련하게 학교에 나왔다가 후회했다. 산산이 조각난 몸을 억지로 얼기설기 이어 붙인 듯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이주학한테 억지투성이 추궁을 받을까 봐 결석도 하지 못했다.
입가에 터진 멍을 가리기 위해 마스크를 썼다. 안쪽에 습한 물이 차서 찜찜했지만, 주변을 돌아다니는 얘들 때문에 계속 책상에 얼굴을 파묻고 있어야 했다.
“엎드려 있는 얘 누구야? 빨리 일어나라.”
수업이 시작되고 교사가 두영을 깨웠다. 어느새 진짜 잠이 든 두영은 저를 깨우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홍승표는 검지로 두영의 뺨을 콕 찔렀다. 두영이 아무 반응이 없자 아예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그제야 두영이 작게 앓는 소리를 내며 굼벵이같이 일어났다. 교사가 고개를 내저으면 혀를 찼다.
“대학 안 갈 애들은 정시 준비하는 애들 방해하지 말고 쥐 죽은 듯이 다녀. 이런 식으로라도 도움이 되라는 말이다, 이 새끼들아. 요즘 크리에이터니, 뭐니 하면서 개성만 있으면 성공하는 줄 아는데, 그거 다 니들 착각이야. 힘들게 교사 된 사람들이 너희 가르치겠다고 앞에서 떠드는데, 그거 한 시간 제대로 못 참고 잠만 처자면서 뭘 어떻게 성공하겠어. 그냥 졸업하고 범죄나 저지르지 마라. 이제 자습해.”
두영은 뼈가 부서지는 말에 잠이 완전히 달아났다. 딱히 화가 난다거나 하지 않았다. 수업 시간에 잠만 잔 건 맞으니까.
언제부터 공부에 손을 놨더라. 기억도 바로 안 날 만큼 아주 오래전이었다. 두영은 태어날 때부터 모든 게 느렸다. 말하는 것도, 걷는 것도. 초등학교 2학년까지 할머니 없으면 혼자 등교하지도 못했다.
1학년 때는 수업 중간에 화장실 가고 싶다는 말을 하지 못해 수업 시간에 눈물을 질질 짰고, 2학년 때는 먼 자리 때문에 칠판 글씨가 보이지 않아 알림장을 못 적어 그렇게 매일같이 준비물을 못 챙겨 갔다.
3학년 때는 저 혼자 구구단을 외우지 못해 늦게까지 남아서 외워야 했고, 4학년 때는 억울하게 도둑으로 오해받아 복도에서 무릎을 꿇고 있어야 했다.
제가 안 그랬어요. 그 말이 그렇게 나오지 않았다. 이미 자신을 범인이라고 생각하는 듯한 반 아이들과 담임의 눈빛이 아직도 생생했다. 방과 후 혼자서 담임을 찾아가 더듬더듬 해명했지만, 담임은 자신이 입고 있는 낡은 옷을 더 신뢰했다.
그 일을 겪고 하교하는 길에 심하게 넘어져 무릎에서 피가 철철 흘렀다. 집에서 쉬고 있을 할머니에게 어리광 부릴 명분이 생긴 것 같아 그 순간만큼은 상처가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그러나 돌아온 반응은 피곤에 찌든 할머니의 화였다.
‘왜 맨날 다쳐서 와?! 할머니 피곤해 죽겠는데!’
처음 보는 할머니의 지친 모습과 저를 향한 짜증에 두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순간에도 상처에서 피가 계속 흘러 흰 양말이 검붉게 변했다.
두영은 휴지와 테이프를 챙겨서 집 밖으로 나왔다. 돌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상처 위에 네모로 접은 휴지를 얹고 테이프로 고정했다. 그때는 상처에 연고를 바르고, 밴드를 붙여야 하는 상식이 없었다.
제 유년 시절은 체념으로 가득했다. 아무도 제 말을 들어주지 않았고, 제 상처를 봐주지 않았다. 스스로도 그런 일이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면 어느 정도 괜찮아지는 것 같았다. 무릎의 상처도, 선생님의 무시도 전부 별거 아니었다.
종이 울리고 수업이 끝났다. 이제 좀 쉬는가 했더니, 김진호가 발랄하게 다가와 두영의 휴식을 방해했다.
“웬 마스크? 또 애비한테 처맞음?”
마스크가 강제로 벗겨졌다. 김진호는 두영의 턱을 우악스럽게 잡고 흔들었다. 그러고는 홍승표를 향해 두영의 얼굴을 돌렸다.
“야, 똥개 얼굴 봐봐. 존나 싸움꾼 같지 않냐? 무서워서 지릴 뻔.”
두영은 시선을 떨어뜨렸다. 큰 목소리로 떠드는 김진호 때문에 교실에 있는 모든 아이들이 이쪽을 보는 것 같아 가슴이 갑갑해졌다.
어쩌다 보게 된 홍승표의 표정이 조금 언짢았다. 찌질한 제 모습 때문인 것 같았다. 아이스크림을 사 주던 홍승표, 괴롭힘을 방관하는 홍승표. 두 사람은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어제 우유로 입가심은 했냐?”
김진호가 눈치 없이 계속 떠들었다.
두영은 눈에 띄지 않게 홍승표를 슬쩍 보았다. 자신이 우유를 버리는 걸 홍승표가 봤었다. 그가 사실대로 말할까 봐 심장이 거하게 날뛰었다. 그런 두영의 시선을 느낀 홍승표가 은은하게 웃으며 단조롭게 말했다.
“내가 봤어. 입가심하는 거.”
“니가?”
“어제 집 가는 길에 만났거든.”
김진호가 눈깔을 빠르게 굴리며 홍승표와 두영을 집요하게 살폈다.
“만나서 뭐 했는데?”
“입가심하는 거.”
“시발 장난하지 말고.”
“장난 아니니까 이제 넌 자리로 돌아가라. 선생 온다.”
낮지만 두껍지 않은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경고했다. 홍승표의 시선이 두영의 턱을 잡고 있는 김진호의 손에 박혔다. 갑자기 가라앉은 그의 분위기에 김진호는 얼결에 두영의 얼굴을 놔주었다.
“자, 장난도 못 치냐?”
“그러게. 내가 너무 진지했네.”
“싱겁기는……. 어차피 너도 대학 안 가면서 뭐 하러 모범생인 척하냐? 아까 체육이 한 말 들었냐? 시발 꼰대 새끼가 이빨 털기는. 지도 겨우 체육 선생이나 하면서 졸라 나대. 우리 무시하는 거 존나 꼴 받지 않음?”
“풉.”
홍승표가 입가를 가리고 작게 웃었다. 김진호가 한순간에 표정을 굳혔다.
“뭐임? 왜 웃냐?”
“아니 그냥… 우리라고 하는 게 웃겨서.”
눕다시피 앉아 있던 홍승표가 허리를 세우고 책상에 팔을 얹었다. 그러곤 손끝으로 눈썹을 덧그리며 덧붙였다.
“우리는 아니잖아? 너랑 내가.”
김진호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개졌다. 홍승표에게 무시당했다는 사실보다 왕따 허두영 앞에서 무시당한 게 더 수치스러웠다.
“시발 말 다 했냐?”
“뭐, 따로 더 듣고 싶은 말이라도 있으면 해 주고.”
나른하게 대꾸한 홍승표의 까만 눈동자가 김진호를 조용히 응시했다. 피가 마를 정도로 무심한 시선에 김진호의 객기가 빠르게 빠그라졌다.
원색적으로 깔보는 홍승표의 시선은 타고났다. 똑같은 교복을 입고, 똑같은 의자에 앉아 같은 수업을 들었지만, 절대 수평적인 관계가 아니었다.
“하! 시발 간다 가!”
김진호가 바람을 일으키며 자리를 떴다. 두영은 휘몰아친 상황에 넋을 놓았다. 이 모든 일이 저 때문에 일어난 것 같아 불안하게 입술을 뜯었다. 그 순간 입술에 따뜻한 것이 닿아 왔다.
흠칫 놀란 두영은 반사적으로 그 무언가를 손으로 쳐 냈고, 뒤늦게 허공에 쓸쓸히 떠 있는 홍승표의 손을 발견했다. 두영은 핏기가 가신 얼굴로 입을 뻐끔댔다. 화를 낼 줄 알았던 홍승표는 심드렁한 얼굴로 턱을 괼 뿐이었다.
거의 미생물을 관찰하는 수준으로 두영을 보던 그가 무덤덤이 물었다.
“병원은 가 봤어?”
눈을 끔뻑인 두영은 느지막이 대답했다.
“…아니.”
“아프겠네.”
두영은 홍승표가 진심으로 하는 걱정인지 의아했다. 그가 즐거운 듯이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곰팡이를 실제로 본 적도 없을 것 같은 홍승표의 시선에서 지독한 곰팡내가 났다. 그래서 자꾸 저에게 말을 거는 듯했다. 제 몸에서 곰팡내가 나서. 낡은 골방 냄새가 나서…….
침묵을 지키는 두영의 모습에 홍승표는 의자를 끌어당겨 더 가까이 다가왔다. 손끝으로 두영의 입술에 자리 잡은 피딱지를 살짝 건드렸다.
“아파?”
“…….”
“이래도?”
두영은 점점 힘이 실리는 그의 손을 붙잡았다. 홍승표는 눈동자만 굴려 두영에게 잡힌 제 손을 보았다. 주변을 살핀 두영은 홍승표에게만 들리게 속살거렸다.
“안 아파.”
교실에서 평범한 대화를 나눠 보는 게 오랜만이라 어색했다. 그래서 아픈데도 아프지 않다고 거짓말해 버렸다. 두영의 치기 어린 객기에 홍승표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또 아프게 하면 눈을 찔러.”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 못 한 두영이 고개를 살짝 갸우뚱했다. 혀로 입술을 축인 홍승표가 나른한 목소리로 설명을 덧붙였다.
“아빠라고 했나? 너 때린 사람. 니 주먹으로 때려 봤자 이빨도 안 나갈 테니까, 눈을 찌르거나 급소를 때려. 너도 남자니까 급소가 어딘지는 알겠지.”
마치 홍승표는 ‘배가 고프면 밥을 먹어.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시고.’ 따위의 말을 늘어놨다. 그런 그가 간과한 점은 저항은 희망이 보이거나, 살 의지가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나 한다는 점이었다.
그래도… 저를 위해 해 준 말이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홍승표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두영은 땅에 들러붙은 까만 껌과 규칙을 벗어난 벽돌 문양을 훑으며 펜스테몬으로 향했다. 맞은 부위가 욱씬거려 갈수록 걸음이 느려졌다. 결국 인도 한복판에 멈춘 두영은 편의점 유리창에 비친 제 몰골을 확인했다. 초라하고 볼품없었다.
이따금 몸과 영혼이 분리된 듯한 이질감을 느꼈다. 숨을 쉬어도 쉬는 게 아니었고, 먹어도 먹는 게 아니었다. 자아를 상실하고 우주를 막연히 헤매는 미아가 된 것 같았다.
옛날부터 종종 이랬는데 도통 원인을 모르겠다. 아무도 이해해 주지 못할 이 기분을 저만 앓고 있는 것 같아 종종 속이 허할 때가 있었다. 누군가가 제 상태를 자세히 설명해 주었으면 했다.
집 나간 영혼이 돌아올 때쯤 유리창 너머로 익숙한 얼굴이 지나갔다. 두영은 굵은 전봇대 뒤에 허둥지둥 숨었다.
모자를 깊게 눌러 썼지만, 거대한 덩치는 가릴 수 없었다. 이주학이었다. 그는 크로스 백에 소모품을 쓸어 담고 있었다. 곧바로 두영은 계산대를 확인했지만, 직원이 정산을 하느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두영은 엄지손톱을 물어뜯으며 이주학의 동태를 초조하게 눈여겨봤다. 그는 가방에 담기는 내용물이 뭐가 됐든 상관없는 듯 홀쭉한 가방을 채우는 데에만 급급해 보였다.
뚱뚱해진 가방을 자기 배처럼 두드린 이주학이 껌 하나를 집어 계산대 위에 얹었다. 계산을 치르고 유유히 편의점에서 나서는 순간, 경보음이 터졌다. 귀청이 터지는 소리에 다른 상가 직원들이 밖으로 나와 구경하기 시작했다.
이주학이 땅을 박차고 앞으로 튕겨 나가듯이 도망쳤다. 덩치와 어울리지 않는 민첩함이었다. 도둑을 놓친 직원은 곡소리를 냈고 구경 중이던 사람들은 모습을 감췄다,
두영은 여전히 전봇대 뒤에 서서 음험한 스토커처럼 일련의 상황을 지켜봤다. 워낙 헛것을 자주 보기에 방금도 자신이 잘못 본 게 아닌지 생각해야 했다.
그게 아니더라도 이 상황을 의심할 건덕지는 충분했다. 이주학의 집은 분명 잘 살았다. 그는 3년 내내 택시로 등하교 했고, 엄마 카드로 허락 없이 백만 원이 훌쩍 넘는 신발을 질렀다. 그런 그가 도둑질을 왜 했는지 이해가 안 됐다.
문득 이게 자신과 무슨 상관이라고 이렇게 심각하게 고민하는지 우스워졌다. 제 코가 석 자인데 말이다. 생각을 접은 두영은 전봇대 뒤에서 나와 펜스테몬을 향해 절뚝절뚝 걸었다.
카페에 도착해 문을 열고 들어가자 두영의 몰골을 발견한 유재민이 손에 든 잔을 떨어뜨렸다. 받침대는 별도인 리미티드 에디션 컵이 산산이 조각났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온 유재민이 두영의 얼굴을 두 손으로 덥석 붙잡고 말했다.
“오늘 일 쉬어.”
단호한 명령에 두영이 손사래 쳤다.
“괘, 괜찮아요.”
“쉬. 어.”
유재민이 눈을 희번덕 치켜뜨며 협박했다.
“내가 널 직원으로 왜 뽑았는데. 이 얼굴을 어쩔고…….”
“…….”
유재민은 두영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잽싸게 카페 문을 닫았다. 그리고 두영을 차에 태우고 명의가 있는 한의원을 찾아갔다. 허준의 환생이라는 원장은 두영의 상태를 인자한 눈으로 살피더니 뜸과 침을 놔 주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상태가 눈에 띄게 호전되기 시작했다.
신기했다. 이렇게 즉각적인 효과를 보는 건 처음이었다. 다리도 더 이상 절지 않았다. 두영은 신뢰의 눈빛을 가득 담아 허준을 보았다. 건장한 풍채 뒤에 짙은 후광이 비쳤다.
***
새벽부터 줄기차게 내리던 초겨울 비가 학교에 도착해서 멈추었다. 잿빛으로 물든 하늘은 그대로였다. 힘이 쭉쭉 빠지는 날씨에 두영은 무기력하게 책상에 엎어져 시간을 때웠다.
수능 전의 긴장감이 교실을 팽팽하게 감쌌다. 그들의 절박한 다짐이 손에 닿을 듯했다. 무언가 끓어오르는 기운을 받은 두영은 엎어진 몸을 벌떡 일으켜 책상 서랍에서 교과서를 꺼내 들고 샤프를 야무지게 쥐었다.
그러나 난무하는 꼬부랑이 기호에 멀미를 호소하고 도로 책을 덮었다. 역시 저는 안 될 것 같았다. 어차피 대학을 갈 돈도 없었고, 무언가를 끈기 있게 노력해 본 적도 별로 없었다.
애초에 대학은 자신과 어울리는 곳이 아니었다. 무언가를 해 봤자 제 노력을 조롱하듯 돌아올 불운한 결과가 두려웠기에, 두영은 시도할 엄두조차 내지 못한 채 버릇처럼 또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도 분위기에 휩쓸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이라도 공부하면 인서울은 할 수 있을까. 간다면 무슨 과를 선택할까. 설령 입학하더라도 등록금을 감당할 수는 있을까. 예치금도 장난 아니던데.
두영은 교과서 모서리를 갉작거리다가 정강이를 주물렀다. 어제만 해도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조차 힘들었는데, 지금은 훨씬 편안해졌다. 전부 유재민이 소개해 준 명의 덕분이었다.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우울했다. 우울은 어쩌다 즐기는 산책이 아니었다. 힘이 남아 있을 때 얼른 빠져나와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끝도 없는 절망을 영원히 표류해야 했다.
다시 책상에 엎어진 두영은 안쪽으로 구부린 팔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어떻게 하면 팔이 덜 저리면서 오래 잘 수 있을지 자세를 연구하며 꼬물댔다.
그때 옆자리 의자가 바닥을 긁는 소리를 냈다. 두영은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가 아슬아슬하게 지각을 면한 홍승표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입 모양만으로 ‘안녕.’ 하고 인사했다.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인 두영은 그의 눈동자가 제 얼굴을 꼼꼼히 훑자 머쓱하게 허리를 펴고 앉았다.
“상태가 괜찮아졌네.”
“…응.”
두영은 속삭이듯 대답했다. 그에 호응해 주듯이 고개를 끄덕인 홍승표가 별안간 두영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더운 숨결이 목 주변에 스치자 두영은 냉큼 손을 들어 목덜미를 감쌌다. 바짝 굳어서 눈을 끔뻑이자, 눈을 치뜬 홍승표가 두영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의 굴곡진 입술이 벌어졌다.
“약초 뿌리 같은 냄새가 나.”
잠시 뇌가 정지했던 두영은 그가 무슨 말을 한 건지 찰떡같이 알아듣고 입을 달싹거렸다.
“하, 한의원… 냄새일 거야.”
“한의원?”
홍승표가 눈썹을 둥글게 들어 올렸다. 한의원을 처음 듣는 듯한 표정이었다.
한의원을 모를 수가 있나?
문득 두영은 홍승표의 여러 소문 중 그가 미국인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몰랐지만, 맞다면 모르는 게 당연한 환경에서 자란 걸 수 있었다. 두영은 잠시 망설이다가 더듬더듬 설명했다.
“한의원은 한방 병원인데… 그, 혹시 허준 알아?”
아, 한의원을 모르면 허준도 모르겠구나.
두영은 김춘녀가 보던 옛날 드라마를 그 옆에서 보고 자랐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습득한 지식을 어떻게 설명해 줘야 할지 난감했다. 그러나 걱정은 기우였다.
“허준 알아. 책에서 봤어. 가끔 한의원이라고 써진 간판이 보여서 궁금했는데, 니 덕분에 알게 됐네. 고마워.”
고마워.
두영은 홍승표가 말한 ‘고마워.’를 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었다. 구석에 구겨 놓았던 외로움이 몸을 들썩거리는 게 느껴져, 두영은 무의식적으로 귓불을 잡아당겼다.
그 순간이었다. 홍승표가 가지런한 이를 활짝 보이며 웃었다. 평소에도 쉽게 볼 수 없는 잘생긴 얼굴이 제 앞에서 저리도 환히 웃자 두영은 눈을 부산스럽게 깜빡였다.
왜 웃는 건 예쁘고 난리람. 때마침 회색 먹구름 뒤에 숨었던 태양이 모습을 드러냈다. 창문을 관통해 들어오는 빛기둥이 그를 환하게 비췄다. 만물이 그의 존재를 찬양하는 것 같았다.
인사치레 같은 대화가 끝나고, 홍승표는 딱딱한 등받이에 느슨히 기대앉았다. 두영은 곁눈으로 그를 훔쳐보다가 저도 몸에 힘을 풀고 홍승표처럼 멋들어지게 앉아 보려고 꼼지락댔다. 결과는 당장 바다로 떠나도 이상할 것 없는 거북이만 됐다.
뭘 해도 엉성한 건 태어난 순간 정해지는 모양이었다. 빠르게 포기한 두영은 평소처럼 등을 구부리고 앉았다.
조회 시간이 한참 지나서 담임이 교실에 당도했다. 눈썹 사이에 진한 그림자를 만든 그는 어두운 분위기를 뿜어내며 교실을 한 바퀴 둘러봤다.
“어제 삼거리 근처 편의점에서 도둑질한 새끼 자진 고발해라.”
귀가 쫑긋 세워지는 조회 내용이었다. 두영은 오랜만에 담임 선생님 말씀을 경청했다.
“상가 사람들 증언으로 우리 학교인지 알아냈다니까 범인이 좁혀지는 금방이다. 후우… 생각만 해도 열이 뻗치네. 대체 어떤 미친놈이 교복을 입고 도둑질을 해? 머리가 나쁘면 행동으로 옮기지 말라고 했어, 안 했어, 어?!”
담임의 광범위 훈계에 몇 명은 주눅이 들었고, 몇 명은 허공의 먼지를 세며 한 귀로 흘려들었다.
두영은 담임이 말하는 미친놈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말하고 싶어서 입이 간질거렸다. 참지 못하고 손등으로 입술을 벅벅 문질렀다. 그러다 팔꿈치로 펜을 쳐 바닥에 떨구었다.
펜을 줍기 위해 허리를 숙이는데, 그보다 먼저 큼지막한 손이 펜을 주워 들었다. 두영은 코앞에 있는 홍승표의 얼굴에 멈칫했다. 선이 깔끔한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자.”
부스러기를 남기지 않는 단정한 목소리였다. 샤프를 얄팍하게 받아 쥔 두영은 감사의 의미로 고개를 까딱였다. 끈질기게 따라붙는 그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마치 자신의 머릿속을 꿰뚫어 보려 하는 것 같았다.
“지금 쪽지 돌릴 거니까 의심 가는 사람 있으면 이름 써라. 모르면 모름이라고 쓰고.”
두영은 두 마디나 될까 싶은 깜지를 조용히 노려봤다. 고작 종이 쪼가리가 자신의 새가슴을 짓눌렀다. 침을 꼴깍 삼킨 두영은 조몰락거리던 펜촉을 세웠다. 깜지 위에 글자를 냅다 휘갈기고 바지런히 접었다. 글자가 개발새발이었지만 누구 이름인지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문득 책상 위에 물든 그림자가 눈에 띄었다. 아까부터 움직이지 않고 있는 그림자는 저를 향해 기울어진 것 같았다. 무심결에 옆을 돌아본 두영은 홍승표가 자신을 빤히 보고 있는 걸 발견하고 그만 깜지를 떨어뜨렸다. 그것은 홍승표의 책상으로 넘어가 그의 손에 부딪히고 질주를 멈추었다.
언제부터 날 보고 있었지? 이주학의 이름을 적는 걸 봤으려나? 홍승표가 이주학한테 말하면 어떡하지?
회오리치는 생각이 머릿속을 난잡하게 뒤집는 순간,
“야, 너 안 내?”
한 손에 파우치를 든 반장이 두영에게 말했다. 파우치 안에는 반 아이들에게 걷은 쪽지가 들어있었다.
“빨리 내. 나 문제 풀어야 되니까.”
“자, 잠시, 아……!”
그 순간 홍승표가 제멋대로 두영의 쪽지를 반장에게 넘겼다. 안경을 추어올린 반장은 두영을 향해 묘한 눈빛을 남기고 자리를 떴다. 담임은 파우치를 건네받고 교실을 나섰다. 뭘 어떻게 할 새도 없이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이었다.
두영은 피멍이 맺힐 정도로 입술을 깨물었다. 겨우 아문 입술이 도로 터졌다. 홍승표가 두 눈을 깜빡거리며 순진하게 물었다.
“왜? 뭐 잘못 쓰기라도 했어?”
그러곤 두영의 입술을 엄지로 훑었다. 두영은 조금 전 상황 때문에 뇌 정지가 와 홍승표의 손길을 얌전히 받기만 했다. 홍승표는 나른한 얼굴로 두영의 피 묻은 입술을 마저 닦아 냈다. 그리고 다섯 손가락을 훤히 펴 보이며 입 동굴을 시원하게 드러냈다.
“립스틱 같다.”
햇살을 등진 그의 잿빛 눈동자에 색이 피어나는 건 한순간이었다.
학교가 끝나고 펜스테몬으로 출근하는 길에는 긴 골목 하나가 있었다. 학교와 좀 떨어진 곳에 있는 골목이라 사람이 별로 없었지만, 그게 오늘따라 유독 심한 것 같았다.
두영은 음산한 골목을 지나가며 수시로 뒤를 돌아보았다. 시선이 느껴지는데 막상 확인하면 아무도 없었다. 썰렁한 먼지바람만 나부끼는 골목의 음산함에 부르르 떨었다. 누군가의 새까만 눈동자가 저절로 떠올랐다.
홍승표가 무슨 생각 하는지 도통 모르겠다. 분명 자신이 이주학 이름을 적는 걸 본 것 같은데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마지막 수업까지 평소와 같은 모습이었고 미련 없이 교실을 떠났다.
이제 이주학 패거리와 안 어울리는 건가? 아지트에도 온 걸 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은데. 근데 또 김진호한테 하는 행동을 보면 그것도 아니었다.
“하…….”
한숨을 내뱉자 하얀 입김이 두영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종일 홍승표가 이주학한테 말하면 어떡할지 골머리가 썩을 정도로 고민했다.
경찰에 신고해도 될까? 너무 문제를 크게 키우는 게 아닐까? 경찰이 저를 도와줄까?
거기까지 생각한 두영은 서서히 걸음을 멈추었다. 경찰은 자신을 도와주지 않을 거다. 그 아이도 도와주지 않았으니까…….
사실 홍승표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게 아닐까? 문득 떠오른 가설에 두영의 심장이 나풀나풀 뛰기 시작했다. 그래, 헛것을 자주 보는 자신이 현실을 뛰어넘어 망상한 건지도 모른다.
갑자기 묵은 체증이 싹 내려갔다. 불행한 악몽에서 깨어난 것처럼 마음이 놓였다. 두영은 조금 가벼워진 걸음으로 골목 막바지에 다다랐다.
마지막으로 저를 쫓아오는 사람이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 뒤를 돌아보는 순간, 이제 막 골목을 들어선 사람과 부딪쳐 몸이 뒤로 넘어갔다. 다행히 상대가 붙잡아 주어 두영은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가, 감사합니다.”
“괜찮아?”
겨울의 냉랭한 공기에도 따뜻함이 느껴지는 목소리는 적어도 두영이 알고 있는 사람 중에 단 한 명밖에 없었다. 어색하게 고개를 들자 홍승표가 여유로운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바람에 헝클어진 두영의 머리칼을 향해 손을 뻗었다.
“윽!”
두영은 본능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한참이 지나도 예상한 일이 일어나지 않자 잔뜩 경계하며 눈을 떴다.
홍승표가 눈썹 끄트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혹시 내가 너 때린 적이 있었나?”
두영은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홍승표의 입에서 짧은 숨이 터져 나왔다.
“그럼 왜 이렇게 좆같이 굴지?”
입술을 꾹꾹 깨물던 두영은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홍승표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두영을 무 뽑듯이 일으켜 세웠다.
“너 진짜 가지가지 한다.”
두영은 민망하고 무서워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좀 전처럼 그에게 반쯤 안겨 있는 상태였다. 그의 침 넘기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홍승표는 두영의 헝클어진 머리칼을 큰 손으로 쓸어 넘기고, 뒷덜미를 작은 힘으로 주물렀다. 다정하고 따뜻한 손길에 두영의 경계심이 서서히 녹아내렸다.
기껏 정리해 준 옅은 빛 머리카락이 찬바람에 살랑거리며 다시금 헝클어졌다. 노을 지는 하늘이 두영의 호박색 눈동자에 비쳐 화려하게 산란했다. 그 빛에 시선이 빼앗긴 홍승표는 일부러 학교에서 일찍 나와, 길머리 끝에서 녀석을 기다리며 생각하던 말들이 전부 휘발되어 사라졌다.
그는 날숨을 흩뜨리며 천천히 말했다.
“종일 생각했어.”
“…?”
“어떤 방식으로 널 협박할지.”
그의 말을 빠르게 이해 못 한 두영이 뒤늦게 눈이 찢어질 듯 크게 떴다. 홍승표는 시원한 미소를 지으며 두영의 뒤통수를 다정히 쓸었다.
“머리가 작아서 내용물이 빨리 안 돌아가나 봐.”
그는 두영의 눈매를 엄지로 쓸었다. 두영은 그의 손을 쳐내고 품에서 빠져나왔다. 자신의 빈 품을 내려다본 홍승표는 언뜻 아쉬움을 느꼈다. 그건 스스로도 깨닫지 못한 기분이었다.
어깨를 으쓱인 홍승표는 두영을 기다려 주지 않고 본론을 꺼냈다.
“겨우 알아보게 적던데? 이주학 이름.”
그 말을 들은 두영의 얼굴이 실핏줄이 드러날 만큼 창백해졌다. 홍승표가 눈가를 접으며 웃었다.
“왜 놀라? 일부러 나 보라고 티 내면서 적은 거 아니야?”
“…아니야.”
“그래? 그럼 너무 허술한데. 네가 무슨 고양이야? 머리만 숨기면 아무도 못 보게?”
두영은 입을 앙다물었다. 이제는 똥개가 아닌 고양이 취급이었다.
“걱정 마, 비밀은 지켜 줄게. 대신 나랑 놀아 줘.”
당당하게 놀아 달라고 떼쓰는 홍승표의 태도에 두영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협박이야?”
“네가 생각한 것보다 가볍진 않을걸?”
“도, 돈이 필요한 거면…….”
홍승표의 눈빛이 한순간 가라앉았다. 짜증을 참아 내는 듯한 표정이었다.
“내가 궁해 보여?”
두영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홍승표의 집은 고급맨션이고, 그가 찬 시계는 김진호가 호시탐탐 노리는 것이었다. 어쩌다 들은 시계 가격이 아직도 잊히지 않았다.
두영은 배 앞으로 모은 손을 꼼지락거렸다.
“나는 머리가 나빠서… 자세히 말 안 해 주면 잘 몰라…….”
음울한 목소리는 온기를 빼앗는 계절과 어울렸다. 홍승표는 두영의 쓸쓸한 얼굴에 고정한 시선을 떼어 내고 허공을 주시했다.
“아이스크림 맛있게 먹었잖아.”
“그, 그건 네가 사 줘서…….”
“아아, 그래서 안 된다?”
“그…….”
두영은 자꾸 말리는 듯한 기분에 그냥 입을 닫기로 했다. 도망치고 싶은 적막함이었다. 손이 덜덜 떨려 기도하듯 움켜잡았다. 그 순간 아래로 향한 시선에 홍승표의 신발이 들어왔다. 연이어 다가온 그의 손이 두영의 뺨을 감쌌다.
“왜 이렇게 떨어? 추워? 몸이 차긴 한데…….”
“…….”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인데, 옷 좀 따뜻하게 입어.”
“…응.”
두영이 멋쩍게 대답했다. 그 순간 홍승표가 두영의 턱을 붙잡고 얼굴을 들었다.
“그 표정 일부러 짓는 거야?”
두영이 난처한 표정으로 입을 뻐끔대자 홍승표는 혀를 차며 두영의 얼굴을 놔주었다.
“…모르면 됐어. 아무 때나 흘리지 마.”
손등으로 아래턱을 쓸던 두영은 반 발짝 떨어진 홍승표를 흐린 눈으로 보았다. 호두알 같은 그의 목울대가 침을 삼키듯이 들썩였다.
홍승표는 아이스크림 빚을 받으러 온 일수꾼일 뿐, 절대 친구가 될 수 없었다. 그건 신도 꺾을 수 없는 불문율이었다. 그러니 눈에 보이는 다정함에 속으면 안 된다. 세상에 공짜가 없듯이, 다정한 협박도 없으니까.
“일단 나중에 천천히 하고, 넌 알바나 가라.”
홍승표가 불량식품 같은 미소를 띠며 말을 이었다.
“그때까지 몸 관리나 잘하고.”
어깨를 으쓱인 그는 골목을 미련 없이 떠났다. 홀로 남은 두영은 심각한 얼굴로 땅바닥에 붙은 껌을 노려보았다. 홍승표가 말한 몸 관리가 정확히 어떤 몸 관리인지 알 수 없어 막막했다.
맷집을 키우라는 소린가?
두영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아무래도 홍승표가 자신을 인간 샌드백처럼 이용할 목적인가 보다. 아까 넘어지면서 홍승표에게 붙잡힌 팔뚝이 아직도 아팠다. 손아귀 힘이 얼마나 센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런 손을 진심으로 휘두르는 날은 곧 자신이 무덤에 들어가야 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벽에 기댄 두영은 먼저 떠난 홍승표가 완전히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골목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그런데 골목 반대편에서 무리 지어 떠드는 기척이 느껴졌다.
두영은 제 또래가 불편했다. 특히 자신을 괴롭히는 이주학 패거리와 그들의 남성성이 무서웠다. 이건 아주 오래전부터 제게 각인된 생리적인 기분이라 저 자신도 쉽게 고칠 수 없었다.
고민 끝에 두영은 골목을 주섬주섬 빠져나왔다. 얼마 가지 않은 홍승표의 뒷모습이 보여 더욱 느릿느릿 걸었다. 그때였다. 잘만 걷던 홍승표가 갑자기 제자리에 멈춰 서서 뒤로 돌아섰다. 가방끈을 움켜쥔 두영은 애써 모르는 척하면 먼 곳을 보았다.
홍승표가 피식 소리 내며 웃었다.
“손도 잡아 줘?”
마치 홍승표는 자신이 무엇을 불안해하는지 알고 있는 듯이 말했다. 두영은 속이 울렁거렸다. 어디서 당당하게 말하지도 못하는 자신의 트라우마가 제 의지와 상관없이 까발려진 기분이었다.
수치스럽다. 분명 한심하게 생각하겠지…….
홍승표는 갑자기 시무룩해진 두영을 대수롭지 않게 보다가 다시 앞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저 멀리 가까워지는 육교가 보였다. 그는 그대로 육교를 지나쳐 직진했다.
자학에서 빠져나온 두영은 조금씩 속도를 내며 걷기 시작했다. 잽싸게 육교 위로 올라가 난간 너머로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는 홍승표가 순식간에 점이 되어 사라졌다.
두영은 와이셔츠 소매를 끌어당겨 한쪽 뺨에 문질렀다. 맨살에 닿았던 홍승표의 손길은 뜨겁게 데운 젤리 같았다. 점성 짙고 지독하게 단 그런 젤리.
찜찜함에 연신 뺨을 쓸던 두영은 문득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은 물먹은 도화지처럼 울퉁불퉁했다. 아침에 잠깐 해가 들었을 뿐 종일 흐린 잿빛을 유지했다.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질 것 같았다.
저녁 알바를 끝낸 두영은 왜인지 기분이 싱숭생숭하여 계획도 없이 김춘녀가 일하는 식당을 찾았다. 자정에 가까운 시간대임에도 손님이 많았다. 전부 술 한 잔 진득하게 걸친 아저씨들뿐이었다.
가게 앞에서 어슬렁대자 식탁을 치우는 김춘녀와 눈이 마주쳤다. 눈을 땡그랗게 뜬 김춘녀가 곧 소녀처럼 맑게 웃으며 밖으로 나왔다.
“똥강아지! 왜 집에 바로 안 가고 일루 왔어? 왔으면 들어오지 밖에는 왜 서 있고. 어서 들어가자.”
두영은 술에 취한 아저씨를 눈에 담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야, 괜찮아. 그냥 할무니 보고 싶어서 얼굴만 보고 가려고 했어.”
“배고프지? 밥 차려 줄 테니까 먹고 들어가.”
“사장님이 간식 주셔서 그거 먹었어. 근데 안 들어가고 여기 있어도 돼?”
“괜찮아, 괜찮아. 나도 쉬면서 일해야지. 근데 똥강아지 왜 이렇게 기운이 없어? 오늘 일이 많이 힘들었어?”
“음, 조금?”
두영이 커다란 눈망울을 굴리며 싱겁게 대답했다. 그때 식당 옆 건물에서 김춘녀와 같은 연배로 보이는 여자가 혀를 쯧쯧 차며 나왔다.
“으휴! 화장실에 누가 똥 한 바가지 질러 넣고 물도 안 내리고 갔어! 더러운 놈들, 한번 똥독에 지독하게 걸려 봐야 안 저러지!”
머리카락이 라면 사리 같은 아줌마가 김춘녀와 두영을 발견하고 구겨진 얼굴을 순식간에 폈다.
“어머, 춘녀 씨 앞에 예쁜 총각은 누구야?”
“누구긴 누구야! 하나밖에 없는 내 손주지.”
손주 자랑에 신이 난 김춘녀의 목소리가 한껏 높아졌다.
“세상에. 맨날 자랑하길래 얼마나 예쁘겠어 했는데, 나 젊었을 때보다 곱네!”
“너 젊었을 때랑 비비지도 못해!”
“말이 그렇다는 거지! 뭘 또 진심으로 정색하고 그래. 사람 무안하게.”
“안녕하세요.”
두영이 작은 목소리로 인사하며 허리를 꾸벅 숙였다. 볼을 발갛게 물들인 김춘녀가 두영의 엉덩이를 토닥이거나, 뺨을 쓸어 주는 둥 평소 잘하지 않는 스킨십을 늘어놨다.
“아유, 고등학생이라고 했나?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집에 안 가고 뭐 해? 아, 그렇지, 일한다고 그랬지? 벌써 할머니 용돈 챙겨 주고 기특하네! 춘녀 씨는 무슨 복을 받았길래 이런 손주를 얻었을까?”
“내 복이지, 복.”
김춘녀의 한 톤 높아진 손주 자랑에 두영은 명치 안쪽에 응어리진 느낌을 받았다. 그게 꼭 체한 것 같아서 속을 게워 내고 싶었다.
그런 두영의 속을 알 리 없는 라면 사리 아줌마는 홀로 더 떠들었다.
“우리 막내는 대학 졸업했는데 아직도 집에서 빈둥빈둥 놀기만 해. 대학 나오면 뭐 해? 맨날 집에 콕 박혀서 내가 차려 주는 밥만 먹는데.”
“그래그래. 요새는 대학 나와도 무조건 직장 구하는 게 아니라며? 등록금 그거 다 빚이야 빚. 요즘은 자격증만 따면 그걸로 먹고 사는 데 문제없어. 그렇지 두영아?”
“아…….”
두영은 뭉그적거리며 외마디 소리를 나지막하게 흘렸다. 그러자 라면 사리 아줌마가 두영에게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할머니 나 이제 가 볼게.”
“그래 어여 들어가. 피곤해서 눈이 쏙 들어갔네.”
“응.”
두영은 김춘녀의 작은 몸뚱이를 끌어안았다.
“오늘 정말 왜 이럴까? 무슨 일 있었어?”
김춘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은 두영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때 먼저 들어간 라면 사리 아줌마가 김춘녀를 향해 어서 들어와서 일하며 역정을 냈다.
“할미 이제 들어가야겠다. 저 아지매가 나 못 잡아먹어서 벌써 찾고 있네. 똥강아지 조심히 들어가, 알았지?”
“응 어여 들어가요.”
두영은 손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가지도 않고 식당 밖에 서서 계속 손을 흔들자 김춘녀가 하는 수 없이 손을 마주 흔들어 줬다.
긴 인사를 나눈 두영은 몸을 돌렸다. 유난히 집으로 가는 길이 멀게만 느껴졌다. 어쩐 일인지 속이 매슥거렸다. 찜찜한 물을 한 사발 들이켠 것 같기도 했다. 조금 전 김춘녀와 라면 사리 아줌마가 나눈 대화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속에 담아 두고 싶지 않은데도 이물질처럼 둥둥 떠다녔다.
그래, 대학에 간다고 모두가 성공하는 건 아니니까.
갑자기 걷는 게 버거울 정도로 기운이 빠졌다. 곧 있으면 땅에 드러누울 듯이 느릿느릿 걷던 두영은 불쑥 헛웃음을 씁쓸하게 지었다. 오늘 아침에 인서울이니, 등록금이니 고민했던 스스로가 우스웠다.
겨울의 찬바람이 소스라치게 차가웠다. 흐리기만 했던 하늘은 그 무엇도 쏟아 내지 않았다. 눈이 아니라면 비라도 주룩주룩 내렸으면 좋겠다.
답답한 가슴이 시원해지게.
불쾌한 기분이 씻겨지게.
***
이주학은 일주일 교내 봉사를 받았다. 그는 자기 이름을 적은 새끼를 찾겠다며 학교를 들쑤셨고, 결과는 봉사 시간만 연장되었다. 어차피 곧 수능이었고, 방학까지 하면 졸업은 금방이라 그렇게 대단한 벌도 아니었다.
그런데 평소라면 신경도 쓰지 않았을 이주학이 이번에는 눈을 뒤집어 깔 정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편의점을 턴 짓이 아버지 귀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돼지 새끼, 지 아빠 존나 무서워하잖아. 옛날에 가출했다가 개같이 처맞았다고 했어, 야구 빠따로.”
두영의 앞자리에 앉은 곱슬머리 아이가 옆자리 짝꿍에게 말했다. 두영은 불안한 눈초리로 그들을 힐끔 보았다. 자기 자리도 아니면서 굳이 여기서 떠드는 게 일부러 저 들으라고 그러는 거 같았다.
“완전 흑돼지 두루치기네. 근데 걔네 아빠 목사 아니냐? 목사가 사람 때려도 돼? 빠따로 때린 거면 거의 학대 수준인데.”
진한 쌍꺼풀이 있는 아이가 학대를 주장했다.
“맞을 짓을 했구만 뭔 학대여. 그리고 목사는 무슨. 옛날에 교회 증축한다고 사람 갈아 넣더니 돈 한 푼도 안 주고 입 싹 닫았어. 그 앞에 지나다닐 때 현수막 걸린 거 못 봤냐? 근데 이주학은 민증 따자마자 여름방학에 독일 차 끌고 다니더라. 그거 내 드림카인데…….”
“넌 뭘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냐? 이 새끼 이주학 좋아하네.”
“시발 말 가려서 해라. 전에 울 엄마가 그 교회 다녀서 알아. 지금은 부처님으로 환승.”
“개웃기네. 아줌마가 장발 남보다 곱슬 남이 취향이셨나 보다.”
“어찌 앎? 울 아빠 곱슬머리인 거.”
“…….”
계속되는 그들의 수다를 들으며 두영은 책상에 올린 제 손을 뜯었다. 이주학은 자기 아버지를 두려워했다. 어렸을 때부터 시험 점수 하나하나에 매질이 달라졌고, 문제를 일으켰을 땐 그 아비는 살인범이나 다름없이 아들을 폭행했다.
그런데도 이주학은 그런 부모에게 반항하듯이 날이 갈수록 분수에 넘치는 것을 구입했다. 그 돈의 출처는 교회 중축으로 고생한 사람들에게 돌아갈 돈이었고, 하나님의 은혜로 모금된 헌금이었다.
두영은 얼굴에 멍을 달고 오던 이주학을 기억 저편에서 끄집어냈다. 그저 다른 학교 학생이랑 싸운 줄로만 알았지 아버지의 만행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니 이따금 보이던 이주학의 황폐한 눈이 저항할 수 없는 폭력을 당한 이들의 눈이었음을 이젠 알았다.
신기했다. 학교를 왕처럼 다닌 이주학에게도 공포의 대상이 있다는 게.
나도 아버지가 무서운데. 야구방망이면 엄청 아팠을 텐데…….
두영은 이주학과 공통점이 생긴 것 같아 기분이 조금을 넘어 매우 찜찜해졌다. 그 아들의 아버지는 집에서 폭력을 행사하고, 그 아버지의 아들은 자기가 당한 일을 학교에서 풀었다.
이주학의 감정의 쓰레기통은 두영이었다. 그러나 자신은 이주학처럼 드림카도 없었고, 명품 신발도 없었다. 지금 신고 있는 신발은 중학교 3학년 때 처음으로 받은 급료로 산 신발이었다. 이렇게나 서로가 다른데, 동시에 절대 닮고 싶지 않은 면이 이주학과 제게 있었다.
담임이 들어오며 종례가 시작됐다. 앞자리에서 떠들던 두 아이가 자기 자리를 찾아 떠났다.
“이주학이랑 연락된 사람?”
“전화 안 받던데요. 톡도 씹고.”
김진호가 휴대폰에 시선을 고정한 채 담임의 말에 대답했다. 이주학은 크게 난동을 부린 이후 학교에 나오지 않고 있다. 봉사활동이 촉매제 역할을 했다지만, 애초에 모든 일의 시발점은 이주학이었다.
“안 그래도 출석 아슬아슬한 놈이 졸업 앞두고 뭐 하는 짓인지. 수시 합격한 애들, 너희도 긴장 풀지 말고 학교는 끝까지 나와라. 알아들었으면 반장 인사.”
두영은 종례가 끝난지도 모른 채 내내 의자에 앉아 멍을 때렸다. 그러다 설렁설렁 일어나 사물함에 책을 옮겨 넣었다. 머릿속에서 이주학의 존재를 내쫓기 위해 일부러 활기차게 움직였지만, 더 지칠 뿐이었다.
자물쇠를 걸어 잠근 두영은 사물함 위에 놓인 칭찬 양파와 비난 양파를 번갈아 가며 살폈다. 물을 갈아 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다가 귀찮아서 나중으로 미뤘다.
교실에서 나가려고 몸을 트는 순간이었다. 한 걸음 떨어진 곳에 홍승표가 서 있었다. 두영은 사물함 위로 올라갈 것처럼 펄쩍 뛰었다.
홍승표가 가는 눈웃음을 지었다.
“거기서 뭐 해?”
그가 두영의 옆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집에 안 가고 여기서 뭐 하냐구.”
“…….”
“말 안 해?”
딱히 책망하는 말투는 아니었으나, 두영은 지레 겁을 먹고 웅얼웅얼 대답했다.
“지, 집에 간 거… 아니었어?”
“나?”
홍승표가 검지로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두영은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중앙 현관에서 너 기다리는데 안 나오잖아.”
“나를?”
이번에는 홍승표가 고개를 흐느적흐느적 끄덕였다.
“오늘도 알바 가?”
“응…….”
“너 종일 잠만 자던데, 우유 배달하기 전에도 일하고 오는 거야?”
“아, 니.”
두영이 좀 전보다 뻣뻣하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오늘은 평소보다 별로 안 잔 것 같은데…….
처음으로 공부에 미련 없이 구는 자신이 창피했다. 상처받지 않으려고 지레 포기한 학업과 궁핍으로 실을 짜서 걸친 자격지심이란 옷. 자신은 한 번도 그 옷을 벗으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가난은 제게 배냇저고리와 사라지지 않은 몽고점이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늘 함께였다.
“되게 열심히 키우네.”
홍승표가 진심 반, 무덤덤 반을 섞어 말했다. 두영은 눈을 끔뻑거리다가 머뭇머뭇 대답했다.
“그냥… 아무도 관리 안 하길래.”
“착하네.”
두영의 눈이 살짝 크게 뜨였다. 양파 하나 잘 키웠다고 칭찬을 받았다. 평소 잘 듣지 못하는 말에 두영은 어색하게 반응했다. 귓불을 잡아당기거나 손등을 긁었다. 홍승표는 두영의 행동을 무심하게 보다가 말했다.
“왜 자꾸 몸에 상처를 내?”
동작을 멈춘 두영은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제 행동에 깜짝 놀라 흉터로 지저분한 손을 등 뒤로 숨겼다. 홍승표는 그 일련의 행동을 눈에 담다가 대수롭지 않게 화제를 전환했다.
“여자랑 자 봤어?”
프레임이 뚝뚝 끊기는 화면처럼 뇌가 원활하게 돌아가지 않았다. 머릿속에 부유하는 글자를 조합하고 뜻까지 도달하는 데 한참 걸렸다. 홍승표가 기다란 손가락으로 사물함을 톡톡 두드리며 두영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다가 나른한 어조로 다시 물었다.
“섹스, 해 봤냐고.”
사물함에 팔꿈치를 얹은 그는 상체를 앞으로 숙여 두영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그의 짓궂은 표정은 그가 한 질문과 다르게 천진난만했다. 평소 말 잘 듣는 아이가 사고를 치기 일보 직전 같았다.
두영은 본능적으로 거리를 두었지만, 홍승표는 눈썹을 까딱거리며 벌어진 거리만큼 붙어 왔다. 서로의 팔뚝 살이 납작 눌릴 정도였다.
손바닥으로 턱을 받친 홍승표가 두영과 눈높이를 맞췄다. 두영은 그의 반짝거리는 눈이 꼭 뱀의 눈동자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나랑 재밌는 곳 가자.”
“…….”
“처음이면 내가 가르쳐 줄게.”
재밌는 곳이 어디고, 뭘 가르쳐 주겠다는 건지 설명이 두루뭉술했다. 맥락상 섹스에 관한 내용 같았기에 두영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곧 나이 앞자리가 바뀐다고 한들 이런 장소에서 할 만한 대화는 아닌 것 같았다. 그런데 홍승표는 자꾸 스터디나 하자는 식으로 건전하게 말했다.
“우리 어리잖아. 지금부터라도 뒤처지지 않게 열심히 해 둬야지 않겠어?”
딱히 증명할 게 없긴 하지만, 자신은 홍승표보다 한 살 위였다. 정작 미성년자인 홍승표는 저런 말을 하는 게 익숙해 보였다. 두영은 입술을 깨물다가 느지막이 대답했다.
“…안 해.”
“왜? 처음이라 무서워? 아니면, 작아서 보여 주기 싫나?”
홍승표가 은근히 두영의 자존심을 건드렸지만, 두영은 욱하는 반응 없이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그,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면 뭐, 너 고자라고?”
두영의 앙다문 입술이 꿈틀거렸다. 살짝 스크래치 간 존심에 소심하게 눈을 부라리자 홍승표의 입술이 요염하게 휘었다. 똥강아지의 되도 않는 기선 제압 눈빛에 홍승표는 어깨를 들썩였다.
“그럼 뭔데?”
“아직… 어리니까.”
“아, 진부해.”
늘어지는 말투로 대꾸한 홍승표가 사물함에 드러눕다시피 몸을 기댔다. 그러자 그가 입은 마이가 팽팽하게 당겨지며 넓은 등판 실루엣이 드러났다.
“내가 비밀 하나 알려 줄까?”
홍승표가 속삭이듯 말하며 두영을 올려다봤다.
두영은 조금 망설여졌다. 타인의 비밀은 딱히 알고 싶지 않았고, 제 비밀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그러나 홍승표의 비밀은 조금 궁금했다. 가볍게 행동하면서도 쉬워 보이지 않는 그가 어떤 비밀을 품고 있는지 내심 알고 싶었다.
입술을 오물거린 두영은 결국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에 홍승표가 은은한 미소를 입에 걸었다.
“나 19살 아니야. 전 학교에서 유급 받았거든. 아주아주 대단한 짓을 저질러서.”
두영은 눈을 끔뻑였다. 자신이 알고 있는 홍승표의 소문 중 하나가 진실로 판명 났다. 문득 그에 관한 또 다른 소문이 연달아 떠올랐다. 그가 사람을 죽였다는 소문이었다. 갑자기 홍승표의 모습이 달라졌다. 원래도 가까이하기 힘든 분위기였는데, 두려움이 더 가중되었다.
그 순간 그의 까만 눈동자가 얇은 눈꺼풀 뒤로 숨었다가 천천히 드러났다. 진실만 볼 것 같은 눈이 저를 관통하듯 바라보자 입 안이 뻐근하게 말랐다.
“나, 나는 이만 가 볼게.”
두영은 급하게 몸을 돌렸지만, 한 걸음 채 떼기도 전에 홍승표에게 손목이 붙잡혀 몸이 돌아갔다. 홍승표는 두 팔 사이에 두영을 가두고 사물함을 짚었다.
“왜 자꾸 도망치지?”
홍승표가 두영을 삐딱하게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쫓아가고 싶게.”
두영의 속눈썹이 거미줄에 걸린 잠자리 날개처럼 바들바들 떨렸다. 그 모습을 지그시 보던 홍승표가 혀로 입술을 축였다.
“네가 걱정하던 일은 사라졌으니 이제 나랑 놀아 줄 수 있겠네. 뭣하면 형이라고 불러도 되고.”
“나, 나도……!”
“응?”
형이라는 말에 순간적으로 발끈한 두영은 아차 했다. 그만 말하라는 머리와 달리, 입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나, 나도 원래 20살인데… 출생신고를 늦게 해서……. 그, 그러니까 형 아니야.”
“아하.”
홍승표가 싱거운 반응을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영은 쪽팔려서 죽을 것 같았다. 제 우스운 객기에 홍승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면서도 알고 싶지 않았다.
눈을 마주치지도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이마에 따뜻한 바람이 닿아 왔다. 무심코 시선을 들어 올린 두영은 멈칫했다. 홍승표가 정말 재밌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시도 때도 없이 변하는 홍승표의 분위기는 천국과 지옥을 무한으로 오갔다. 그런 그에게 제대로 휘둘리기 시작한다면 소생 불가능할 정도로 망가질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홍승표와 그런 식으로 어울리고 싶지 않았다. 민망하기도 했고, 생리적인 거부감이 들었다. 게다가 자신은 그런 쪽으로 딱히 흥미도 없었다. 정말 홍승표의 말대로 자신은 고자일지도 몰랐다. 자위도 잘 하지 않으니까.
불현듯 기억 저편에서 매캐한 연기가 불어왔다. 더럽고 추잡한 그 기억에서 도망치고 싶다고 생각하는 순간, 머리맡에서 똑! 하는 소리가 목탁처럼 울렸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들자 홍승표가 같은 소리를 또 한 번 내었다. 입 안쪽에서 혀를 차는 소리였다.
“무슨 생각해?”
두영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짧게 내저었다.
홍승표는 혀로 입천장을 쓸며 두영의 얼굴을 집요하게 훑었다. 똥개는 동그란 이마부터 작은 턱까지 달짝지근하게 생겼다. 도톰한 입술이 벌어지면 그 안에서 향긋한 내가 흘렀다. 마지막까지 남겨 뒀다가 천천히 음미하면서 먹고 싶을 만큼.
그때 똥개 녀석이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오물거렸다.
“말… 안 했어?”
“뭐?”
“이주학한테…….”
홍승표가 한쪽 입술을 끌어 올렸다.
“나 안 믿었어?”
조금 시무룩하게 말하자 똥개가 눈을 크게 떴다.
“아, 아니! 믿었어, 정말 믿었어!”
“몸 둘 바를 모르겠네.”
홍승표가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평소 말이 느리고, 긴장하면 더듬기까지 하는 허두영이 저렇게 과장하면서 또박또박 말하는 걸 보니 신선했다. 녀석의 살짝 벌어진 입술에 자꾸 시선이 빼앗겼다. 이성이 움직이기도 전에 본능이 먼저 반응했다. 그 입술을 향해 몸이 저절로 기울어졌다.
그때였다. 교실 앞문이 천둥 같은 소리를 내지르며 열렸고, 그 뒤로 이주학이 휴대폰을 하면서 들어왔다. 화면에 달라붙었던 이주학의 시선이 홍승표에게 가닿았다. 이주학은 잠시 멈칫하더니, 두영을 발견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둘이 뭐냐?”
아무도 그에게 대답을 돌려주지 않았다. 휴대폰을 바지 주머니에 넣은 이주학이 삐딱한 시선을 홍승표에게 던졌다.
“돈으로 전학 온 놈이 이 시간까지 학교에 왜 있냐? 고 삼 다 끝나서 야자라도 하려고?”
홍승표는 가라앉은 표정으로 이주학을 보다가 문득 두영의 기척이 바뀐 것을 느꼈다. 똥개는 바지춤을 움켜쥐고, 얼굴이 바닥을 뚫고 들어갈 것처럼 고개를 수그린 상태였다. 겨우 녀석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렸는데 이주학 때문에 원상태로 돌아갔다.
“둘이 뭐냐고.”
터덜터덜 걸어온 이주학이 굳이 두 사람 사이를 비집고 섰다.
“야, 똥개, 말해 보라고.”
“뭐긴, 대화 중이었어.”
대답은 홍승표가 대신했다. 이주학이 언뜻 불쾌한 표정으로 홍승표를 쏘아봤다.
“얘랑? 이 병신하고 말이 통하디?”
“제법.”
“미친놈.”
비죽거린 이주학이 두꺼운 손바닥으로 두영의 머리를 쳤다. 탁, 탁, 탁. 일정한 음절이 적막한 교실을 채웠다. 두영의 가는 목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말도 제대로 못 하는 똥개 새끼랑 뭔 대화가 통하겠어. 안 그러, 헉―!”
이주학이 갑자기 석고대죄하듯이 무릎을 꿇었다. 홍승표가 이주학의 오금을 걷어찬 것이었다. 두영은 반사적으로 교실 구석탱이에 몸을 구기고 숨었다.
“시발… 씹새끼야, 너 뭐 하는, 으윽!”
겨우 두 발로 선 이주학이 홍승표의 발길질에 도로 엎어졌다. 홍승표는 이주학을 담배꽁초처럼 짓이겼다. 그러고는 거대한 몸뚱이를 축구공 다루듯 대굴대굴 굴렸다. 쓰레기통에 부딪힌 이주학의 머리 위로 쓰레기통 뚜껑이 떨어졌다.
“씨발!!”
악다구니를 쓰며 일어난 이주학이 홍승표를 향해 각성한 듯이 달려들었다. 그러나 가볍게 피한 홍승표를 그대로 지나쳐 책상을 볼링 핀처럼 무너뜨렸다.
“아아악! 시바알!!”
두영은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이주학의 울부짖음이 확성기를 찢고 나온 것 같았다. 무너진 책상 진열에서 이주학이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홍승표 개시발 좆같은 새끼야.”
“시끄러워.”
“씨발 너나 닥쳐! 좋게 좋게 대해 주니까 내가 니 시다 같냐? 존나 기어오르고 있어. 난 너 처음부터 좆도 마음에 안 들었어. 넌 모든 사람 다 니 아래로 보이지? 알아서들 살살 기어 주니까 마음대로 굴어도 될 것 같지? 근데 어쩌냐? 나는 아닌데. 그리고 시발 뒤에서 너 안 까는 애들 없어. 음침하고 무슨 생각하는지 모르겠다고.”
“그래서 뭐.”
홍승표가 한숨을 늘어뜨리며 말을 이었다.
“내가 너희들 자판기야? 동전 넣어 주면 반응해 주게? 그러면 최소한 반응이 아깝지 않게 노력해 보든지. 시시껄렁한 얘기로 이빨이나 털 거면 그냥 입 다물고 있어. 지금 돼지 멱따는 소리 때문에 머리 터질 것 같으니까.”
홍승표는 만성 수면 부족으로 기억이 끊기는 날이 종종 있었다. 지금이 그 순간이라고 제 본능이 말해 주었다. 그렇게 정신이 끊겼다가 돌아오면 피가 떡칠한 사람이 제 앞에 널브러져 있었다.
한때는 일상이라 별로 대수롭지 않았지만, 지금 이 공간에 허두영도 있었다. 녀석이 피 칠갑한 모습은 그다지 보고 싶지 않았다.
그 순간 이주학이 야생 멧돼지처럼 달려들었다. 홍승표는 등 뒤로 손을 뻗어 칭찬 양파를 손에 쥐었다. 양파는 땅에 버리고 그새 가까워진 이주학의 얼굴에 물을 뿌렸다.
급작스러운 물세례에 이주학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홍승표는 방향감을 상실한 이주학의 등을 발로 찍어 눌렀다. 그리고 한쪽 다리를 높게 들어 이주학의 정강이로 낙하했다.
빠각.
“으아아악!!”
비명을 토해 낸 이주학이 거품을 물고 기절했다. 홍승표는 성에 차지 않아 이주학의 뒤통수를 잘근잘근 밟았다. 신발에 묻은 양파 물도 이주학의 옷자락에 문질러 닦았다.
거친 호흡을 내쉬던 그가 불시에 고개를 돌려 구석에서 찌그러진 채 숨죽여 우는 두영을 보았다. 홍승표는 흥분을 가라앉히지 않은 상태로 두영에게 다가가 그 앞에 저잣거리 깡패처럼 쭈그려 앉았다.
“왜 울어?”
그는 두영의 눈물을 닦아 주기 위해 손을 뻗었다. 두영은 본능적으로 그의 손을 쳐내고 이내 당황한 듯 입술을 뻐끔댔다.
홍승표는 허공에 망연히 떠 있는 제 손에 눈길을 주다가 다시 두영의 척척한 얼굴에 시선을 고정했다. 녀석의 얼굴은 석고로 조각한 조형물 같았다.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 느껴지지 않을 만큼, 피 칠갑을 하지 않아도 이미 죽은 것처럼 느껴졌다.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은 눈물이 차오른 호박색 눈동자가 유일했다. 거울처럼 투명한 눈망울에 괴물 같은 자신이 비쳤다. 그 눈의 주인은 당장이라도 졸도할 것처럼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어쩐지 가슴 근육이 뻐근했다.
홍승표는 다시금 손을 뻗어 두영의 턱관절을 잡았다. 시선을 지그시 겹치자 녀석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며 아래로 추락했다.
얼굴값 못하는 허두영의 외모는 화려한 수채화 같지만, 존재가 찬란하지 않았다. 그저 별 무리에 섞인 돌덩어리일 뿐이었다.
“무서워?”
그의 말 한마디에 두영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장대비처럼 쏟아졌다. 마중물을 단단히 부은 듯 쉽사리 멈추지 않았다. 홍승표는 대답이 없는 두영의 턱을 살짝 흔들었다.
“나 봐.”
“…….”
“나 보라고.”
두영은 강압적인 말투에 머뭇거리다가 젖은 눈을 치떴다. 진한 아이홀이 생기고, 긴 속눈썹이 가련하게 떨렸다. 눈 주변과 코끝이 붉었고, 콧물로 젖은 인중마저 지극히 색스러웠다.
홍승표는 두영을 강제로 일으켜 세웠다. 복도 쪽 창문 아래 두영을 꿇어앉히고 그 앞을 막고 섰다. 겁을 먹은 녀석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한겨울에 맨몸으로 쫓겨난 아이처럼 바들바들 떨기도 했다.
그가 바지 지퍼를 내렸다. 두영은 깜짝 놀라 눈을 내리떴다. 홍승표는 눈물로 젖은 두영의 입술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아이스크림 먹는 것처럼만 하면 돼.”
두영이 머리를 내젓자 홍승표는 두영의 머리카락을 한 주먹 쥐고 얼굴을 들게 했다. 그러곤 두영의 입술을 엄지로 벌리고 들어가 미끄러운 혓바닥을 지그시 눌렀다.
“안심해. 복도에 사람 없어.”
“…….”
“근데 돼지 새끼가 고래고래 소리 질러서 곧 사람이 올 거야. 난 누가 봐도 상관없어.”
두영은 책상다리 너머 찬 바닥에 널브러진 이주학을 보았다. 제 목에 목줄을 채우고 부리던 이주학이었다. 그런 그를 홍승표가 단숨에 무너뜨렸다. 덩달아 제 끔찍한 세상도 무너지고, 새로운 세상이 떠올랐다. 그건 작은 저항조차 무의미해지는 홍승표의 세상이었다.
홍승표가 밤에 피는 장미처럼 싱그럽게 웃었다. 그러고 즉시 미소를 거둔 채 뜨거운 호흡을 섞어서 명령했다.
“빨아.”
진한 노을빛이 교실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 빛을 등진 홍승표의 표정이 어떤지 알 수 없었다.
두영은 눈앞의 흉측한 살덩어리를 눈싸움하듯 노려봤다. 그러다 짧게 심호흡하고 귀두 표면을 살짝 핥았다. 눈을 치뜨자 그의 흉곽이 크게 부푸는 게 보였다. 다시 혀를 삐쭉 내밀고 핥자 검붉은 것이 꺼떡거리며 움직였다. 징그러운 움직임에 소름이 쫘악 돋았다.
그때 홍승표가 두영의 뒤통수를 한 손으로 감싸고 치골 쪽으로 잡아 눌렀다. 두영은 제 얼굴에 그의 성기가 마구 비벼지자 당황하여 그의 허벅지를 밀쳤다. 그러나 그의 딴딴한 허벅지는 뿌리 깊게 내린 나무처럼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입 벌려.”
홍승표는 두영이 입을 벌리고 억지로 살덩어리를 쑤셔 넣었다. 두영은 목젖을 치는 성기에 생리적인 눈물이 고였다. 주먹으로 홍승표의 허벅지를 밀치고 때렸지만, 그는 두영의 한계를 가늠하려는 듯 깊이, 더 깊이 들어왔다.
“웁… 후욱…….”
그는 곧 터질 것 같은 두영의 얼굴을 바라보며 성기를 천천히 뒤로 물렸다. 녀석의 입 안은 좁았다. 목구멍은 그것보다 더 좁아 가히 자극적이었지만, 녀석의 펠라가 생각 이상으로 형편없어 흥이 식을 것 같았다.
그 잠깐 드나드는데도 녀석의 이가 성기를 긁었다. 입을 벌리라고 했더니 정말 입술만 벌렸다. 일부러 그러는 건가 생각했지만, 녀석의 처연한 얼굴을 보면 그런 생각은 쏙 들어갔다.
홍승표는 다시금 두영의 입을 벌리고 성기를 집어넣었다. 오래 즐기려고 했지만, 녀석의 형편없는 실력 때문에 빠르게 한 발만 빼고 끝내는 게 좋을 듯했다.
두영은 갑자기 빠르게 치고 들어오는 홍승표의 허리 짓에 고개를 강하게 내저었다. 그러자 홍승표가 두 손으로 두영의 머리통을 잡고 거칠게 입 안을 헤집었다.
두영은 어린아이 주먹만 한 귀두가 목젖을 연신 치자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묵직한 홍승표의 불알이 두영의 작은 턱을 무자비하게 때렸다. 한계에 다다른 두영이 홍승표의 허벅다리에 손톱을 박은 채 밀어 내고 때렸지만, 그는 조금도 봐주지 않고 추삽질을 이어 갔다.
“컥, 우욱……!”
그의 거뭇한 음모에 얼굴이 파묻힌 두영은 크게 꿈틀거렸다. 고개를 뒤로 꺾은 홍승표가 성기를 깊숙이 처박은 상태로 정지 화면처럼 멈추었다.
“큿……! 하아……!”
홍승표가 흐릿한 초점으로 천장으로 올려다봤다. 기대하지도 않았던 쾌감에 교실의 모든 사물이 형체를 잃고 제게 쏟아지는 환각이 보였다. 저 먼 곳에 있는 먼지까지 헤아릴 수 있을 정도였다.
그는 두영을 얼굴 내려다봤다. 녀석의 뺨이 다람쥐처럼 부풀었다가 푸르르 소리를 내며 좁아졌고, 정액이 그 틈을 비집고 입 밖으로 나왔다. 천천히 성기를 빼내자 두영이 곧바로 상체를 수그리고 토악질했다.
“켁, 콜록… 흐으…….”
두영은 기다랗게 늘어진 침을 멍하니 보았다. 눈알이 터질 것 같았고 목이 찢어지게 아팠다. 다시 콜록콜록 목을 긁어내자 목구멍에서 덜 내려간 희끄무레한 것이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졌다. 거기에 약간의 피가 섞여 있었다.
갑자기 감당 못 할 정도로 추워졌다. 덜덜 떨리는 몸을 끌어안고 책상 아래 몸을 말았다. 그때 홍승표가 흐트러진 외형을 정리하는 게 보였다. 방금까지 욕망에 눈이 멀어 허리를 무식하게 흔들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게다가 사정 직후임에도 그의 분위가 냉랭했다.
평소 보이던 나른한 표정이 아닌 것만으로 어쩐지 두영은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왜인지는 저도 알 수 없었다. 한 가지 중요한 건 방금 느낀 기분이 상처받은 기분과 비슷했다는 점이다. 두영은 이딴 상황에서 그런 감정을 느꼈다는 자신을 인정하기 싫어 고개를 깊게 숙였다.
조금 전 행위로 홍승표와 자신이 동등한 사이가 아니란 것을 완벽하게 깨달았다. 아니, 애초에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기습받은 짐승처럼 쉽게 일어날 수 없었다. 쓰라린 기분이 제 귀에 대고 크게 비웃는 듯했다.
두영은 떨림이 멈추지 않아 무릎을 감싸 안고 얼굴을 파묻었다. 흐르는 눈물은 뜨거웠다. 빨리 입을 헹구고 싶었다. 그리고 이대로 사라지고 싶었다.
저벅저벅 멀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여닫히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교실에는 긴 적막이 찾아왔다.
두영은 작은 돌멩이를 걷어찼다. 조준을 잘못해 쓰레기를 뒤지던 고양이에게 날아갔다. 별안간 날벼락을 맞은 고양이는 민첩하게 돌멩이를 피해 자동차 밑으로 기어들어 갔다.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눈동자가 두영을 경계했다.
“미안…….”
옷에 손바닥을 문지른 두영이 멋쩍은 목소리로 사과했다. 마침 바지 주머니에 유재민이 준 간식이 있었다. 흰색 어육 소시지였다. 포장지를 벗겨 잘게 쪼갠 다음 차가 다니지 않는 한편에 내려놨다. 그리고 조금 떨어져서 손가락으로 소시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먹어.”
쉽게 경계를 풀지 않는 고양이가 차 밑에서 두영을 빤히 올려다봤다. 길고양이는 어느 정도 사람을 경계해야 하는 게 맞았다. 그런데 오늘따라 고양이의 매서운 눈빛을 보자 섭섭함이 밀려왔다.
“꼭 네가 먹어야 해.”
어깨를 축 늘어뜨린 두영은 거듭 말하고 방향을 틀었다. 그러다 불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고양이가 소시지를 입에 물고 다시 차 밑으로 기어가는 중이었다. 두영은 섭섭함이 사그라지는 걸 느꼈다. 무시받았던 하루를 이렇게나마 위로받고 싶었던 것 같다.
언뜻 보니 차 밑에 몇 쌍의 눈동자가 더 있었다. 새끼 고양이들이었다. 두영은 주머니에 있는 마지막 어육 소시지를 꺼내 고양이 가족에게 전부 넘겼다. 그때 불쑥 토기가 올라왔다. 두영은 입을 틀어막고 무작정 걸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갈림길을 앞에 두고 서 있었다.
잠시 고민한 두영은 큰길 쪽으로 몸을 틀었다. 이쪽으로 가면 김춘녀가 일하는 식당이 나왔다. 일하는 할머니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지만, 오늘 집에 바로 가면 끝도 없는 암울에 허우적댈 것 같았다.
식당 근처에 다다르자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할머니!”
두영은 밖에 나와 있는 김춘녀를 반갑게 부르며 다가갔다. 그의 손에는 대용량 쓰레기봉투가 쥐어져 있다. 두영이 냉큼 빼앗아 들려고 하자 김춘녀가 “에끼!” 하면서 두영의 손을 쳐냈다.
“내가 들게. 이리 줘요.”
“손 더러워져. 요 앞에 버리면 되니께, 할미 무시하지 말어.”
김춘녀가 너스레를 떨며 대꾸했다. 쓰레기를 버린 그는 찬 바람을 맞고 선 두영의 엉덩이를 팡팡 두드렸다.
“왜 또 왔어? 안 피곤해? 맨날 집에 바로 가지 않고…….”
“그냥 반겨줘요. 할무니 보는 게 내 낙이니까.”
“얼씨구, 말은 아주……. 근데 목소리가 왜 이리 쉬었어?”
그 순간, 방과 후에 있었던 일이 셔터가 터지듯 떠올랐다. 두영은 순간적으로 어색해진 분위기를 무마하기 위해 억지 미소를 지었지만, 도리어 기운 없는 미소를 들켜 버렸다.
김춘녀는 두영의 얼굴을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오늘도 일이 많이 힘들었어?”
“…응. 요새 사람이 많이 오네. 근데 할무니 얼굴 보니깐 기운 난다.”
“할미도 우리 똥강아지 얼굴 보니까 기운 나.”
“할머니, 나 안아 줘.”
김춘녀는 평소 보기 힘든 두영의 어리광에 의아해하면서도 깡마른 몸을 안아 주었다. 두영은 김춘녀의 왜소한 어깨에 턱을 괴고 눈을 감았다. 등을 토닥여 주는 손길에 조금 목이 멨다.
“몸이 차다. 어여 집에 가서 쉬어.”
“응.”
“아, 맞아. 저번에 본 아지매 기억하지? 오늘도 어찌나 자기 자식 험담을 늘어놓는지, 내가 아주 들어 주느라 귀때기 빠지는 줄 알았다. 등록금도 안 갚고 놀기만 한다고, 배운 전공 안 살리고 다른 길로 간다고 하루 종일 우는소리만 해 대는데, 그럴 거면 차라리 대학에 안 가는 게 낫지. 안 그러냐, 두영아? 대학 안 가도 잘만 먹고 살더라.”
두영은 김춘녀의 품에서 찾은 안정이 빠르게 휘발되는 걸 느꼈다. 그리고 강한 충동이 뒤따랐다.
“할머니.”
“우야.”
두영은 김춘녀의 품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바닥에 시선을 꽂은 채 자격지심을 포장한 알맹이를 꺼냈다.
“그런 말은… 자식을 당연하게 대학에 보낸 부모랑 그 자식이 졸업까지 한 마당에 취업도 하지 않고 집에서 빈둥거려도, 등록금을 다 갚지 않아도 당장 내일이 무너지지 않는 사람만 할 수 있는 넋두리예요.”
근데 할머니는 그럴 자격 없잖아.
두영은 혀뿌리까지 올라온 뒷말을 참아 내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김춘녀의 표정에 혀를 깨물고 싶었다. 흔들리는 김춘녀의 눈동자가 가느스름 접힌 미소 뒤에 가려졌다.
“그러게. 할미가 뭣도 모르고 말했네. 날이 많이 춥다. 어여 들어가서 쉬어.”
“…응.”
식당 안으로 들어가는 노쇠한 몸이 유난히 씁쓸해 보였다. 두영은 집 방향으로 몸을 틀어 묵묵히 걸었다. 그러다 도저히 참지 못한 역함을 바닥에 토출했다.
바닥에 쏟아지는 오물은 저 자신이었다. 원망할 상대를 원망하지 못하고, 제 딴에 가장 만만한 할머니를 무시하는 옹졸한 인간이 허두영의 실체였다.
두영은 손바닥으로 뺨을 후려쳤다. 연이은 마찰음이 어두운 하늘 아래 반복적으로 울렸다.
그런 말 할 자격이 없다고? 자격은 저한테도 없었다. 아무리 새벽바람부터 우유 배달을 해도 수업 시간에 졸지 않고, 한적한 저녁 알바 중에도 책을 놓지 않고, 가난해도 학업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만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깨어 있는 척했던 방금 전의 자신을 죽이고 싶었다. 가난에 체념한 자신이 할 말이 아니었다.
겨우 몸을 추스른 두영은 집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밟았다. 달동네 가장 꼭대기에 있는 집, 손만 뻗으면 하늘에 닿을 수 있는 집, 그리고 가장 낙후된 집이 자신이 돌아갈 곳이었다.
수백 개의 계단을 밟으며 좁은 비탈길을 올랐다. 중간중간 이가 빠진 가로등을 지나 느지막이 집에 도착했다. 우편함에서 열쇠를 찾는데 아무리 뒤져도 차가운 금속이 만져지지 않았다. 그때 문 안쪽에서 기척이 느껴지더니, 샷시문이 벌컥 열리고 허삼혁이 집에서 나왔다.
담배를 뻑뻑 피우던 허삼혁은 두영을 보고 멈칫했다. 두영은 녹슨 경첩처럼 몸을 돌리고 벌 받는 아이처럼 섰다. 한심한 눈초리로 두영을 보던 허삼혁은 바닥에 가래를 뱉고 두영을 불렀다.
“야.”
두영은 아래로 처박은 시선을 슬쩍 들었다. 그러자 얼굴 위로 진득한 담배 연기가 쏟아졌다. 콜록콜록 기침하자 허삼혁이 담배 연기만큼 짙은 한숨을 내뱉었다.
“한심한 새끼. 고추 달고 태어나게 해 줬으면 쪽팔린 줄 알아야지.”
“…….”
“새끼가 대답 안 하지.”
“…네.”
두 번째 한숨을 내쉰 허삼혁은 두영의 이마를 검지로 밀쳤다. 점점 힘이 실린 손은 기어코 자기 자식을 넘어뜨렸다. 허삼혁은 온정이 스미지 않은 눈으로 두영을 보다가 필터만 남은 담배를 땅에 뱉었다.
“미련한 새끼. 소리 참는 건 네 애미한테 배운 거냐? 너 버리고 간 쌍년 뭐가 좋다고 찾아서 닮고 있어. 암캐 같은 년. 개시팔년. 시궁창 같은 곳에서 빼내 줬더니 남편을 버리고 튀어? 내가 때리면 얼마나 세게 때렸다고 집을 처나가고 지랄이야 지랄은……. 나약해 빠져 가지고 시발. 또 어디 가서 몸이나 팔고 있겠지.”
생활 능력이 없는 허삼혁은 기껏 직장을 구해도 하루 이틀이면 그만두었다. 그렇게 스쳐 지나간 직장 중, 환영식으로 들린 술집에서 두영의 모친을 만났다. 허삼혁은 심한 의처증이 있었다. 그의 술친구와 두영의 모친이 가벼운 눈인사만 해도 손찌검을 날렸다.
“꼴에 낳아 준 엄마라고 그립냐?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 기억나긴 해? 처맞아도 울지 않는 거 빼다 닮았으면 나중엔 니 애미처럼 도망도 치겠다? 아주 공장으로 나르는 것도 닮지 그러냐?”
술주정을 부릴 때면 허삼혁은 주먹을 휘두르거나 말이 많아졌다. 가끔 술기운을 빌려 속에 쌓아 둔 이야기를 하소연하듯이 털어놓을 때가 있었지만, 다음 날이 되면 본인이 뭐라고 지껄였는지 깨끗이 잊어버렸다.
그런 제 아비처럼 두영도 다음 날이 되면 그의 이야기를 머릿속에서 지워 냈다. 타인의 비밀은 별로 듣고 싶지 않았다. 특히 저와 조금이라도 관련된 비밀은.
라이터 부싯돌 구르는 소리가 났다. 피어오르는 연기가 밤바람에 휘날렸다. 건조한 계절은 저 작은 불씨에도 큰 위험이 됐다. 특히 다닥다닥 붙은 판자촌이라면 말 다했다.
아무리 허삼혁이 막 사는 인간이라도 담배꽁초를 아무 데나 버리지 않았다. 술에 잔뜩 절여진 상태여도 마찬가지였다. 그건 아주 깊은 곳에 각인된 경고등 같은 것이었다.
새로운 담배를 꼬나문 허삼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달동네를 내려갔다. 신발 뒤꿈치를 질질 끄시는 소리가 완전히 사라질 때쯤, 두영은 잔기침하며 호흡을 터뜨렸다. 담배 연기 때문에 눈이 매워 구부린 손가락으로 눈두덩을 뭉갰다.
두영은 집을 지나쳐 달동네 정상까지 올라갔다. 우두커니 서 있는 가로등 불빛 아래 벤치 하나가 고즈넉이 있었다. 벤치에 앉은 두영은 아득히 먼 곳에 있는 도심의 불빛을 바라보았다. 자정이 넘어도 언제나 반짝거리는 게 마치 하늘에 있던 별들이 지상으로 쏟아진 것 같았다. 꼭 우주 속의 별 무리처럼.
자신은 도시가 싫었다. 사람이 많으면 숨이 안 쉬어졌고 공황 상태에 빠졌다. 제게 도시는 화성 같은 곳이었다. 그러나 정작 외계인은 자신이었다. 지구를 벗어나지 못하는 외계인 허두영. 겨우 빛을 발하는 달동네가 제 행성이었다.
문득 두영은 생각했다. 도시에서 보는 달동네도 저들처럼 반짝거리면 좋겠다고.
바람이 찼다. 엉덩이에 감각이 사라졌다. 가을의 흔적을 조금도 찾을 수 없는 완연한 겨울이었다. 합법적인 체온 갈취에 한 줌의 체온도 뜯기지 않으려면 더 미루지 말고 겨울옷을 사야 했다.
매해 하는 고민이었지만, 한 번도 실행에 옮긴 적이 없었다. 항상 내년 이맘때쯤으로 고민을 미룰 뿐이었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매년 맞이하는 봄. 그리고 스무 살의 봄.
옛날에는 출생신고를 늦게 한 허삼혁이 원망스러웠다. 때에 맞게 했으면 자신은 진작 학교를 졸업하고도 남았고, 학교라는 지옥에서 좀 더 빨리 벗어날 수 있었을 테니까. 혹은 겪지 않아도 될 일을 안 겪거나…….
하지만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한 게 진짜 법적인 성인이 된다고 하니 막연하게 불안했다. 언제까지고 책임감을 회피할 수 있는 미성년일 줄 알았는데, 곧 있으면 책임을 스스로 져야 하는 성인이 되어 버린다. 막막했다. 누군가가 복잡한 회오리 속으로 등을 떠미는 기분이었다.
마천루의 별빛이 물에 잠긴 샹들리에처럼 일렁였다. 두영은 손등으로 눈을 거칠게 문질렀다.
“미련한 새끼, 한심한 새끼, 호로 새끼. 청승맞게 울지 마.”
연신 흐르는 눈물을 닦아 내기도 지쳐 그냥 제멋대로 흐르게 두었다. 유난히 고단하고 죄책감으로 짓무른 하루였다. 깨금발을 들고 간신히 숨을 쉬는 것 같았다. 턱 아래까지 들어찬 물은 할머니이고, 허삼혁이고, 이주학이었다. 오늘로 홍승표도 추가되었다.
그 꼴을 당해 놓고 적어도 홍승표는 저를 때리지 않았다고 안심하는 스스로가 우스웠다. 학습된 공포는 마음먹는다고 벗어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허삼혁을 보면 말이 안 나오는 것처럼, 이주학의 앞에 서면 몸이 굳는 것처럼. 그리고 홍승표는…….
“초콜릿 먹을래?”
그 순간 바람을 타고 날아온 목소리가 두영에게 초콜릿을 권했다. 두영은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