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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5 Pause, and Replay (15/15)

외전 5

Pause, and Replay

“아잇. 튀잖아.”

고무장갑 낀 손등으로 이마에 묻은 양념을 덜어 냈다. 민혁은 그러든지 말든지 철벅철벅 큰 동작으로 배추를 뒤집어 댔다. 이번엔 고춧가루가 날아들었다.

“야!”

소리치니 초점 없는 동공이 마주해 온다.

“형은 알았어? 고학력자 되고 나서도 김치나 담그고 있을지……?”

“왜? 나 김장하는 거 좋아하는데. 그리고 일 없을 때만 오는데 뭘.”

대꾸하며 대각선 방향을 흘끔거리자 진지한 얼굴로 김치 속을 맛보는 차수민이 시야에 걸렸다. 표정만 보면 일류 주방장이 따로 없었다. 정말 안 어울리는데 정말 귀여워서 히죽 웃음이 나왔다. 야무지게 위생모에 앞치마까지 두르고 있었다.

“그치. 형이야 주말에나 가끔 오니까 아무렇지 않겠지.”

응. 게다가 여기 올 때면 저렇게 엄숙한 표정의 차수민을 볼 수 있는걸. 끄덕이며 치덕치덕 속을 바르는데 도끼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세상에나. 행님! 도련님이 행님 절대 일 시키지 말라고 하셨는데요!”

“방금 앉았는데…….”

“보시겠어요! 빨리 일어나세요. 저만 혼난다고요.”

“허어. 누구는 조오켔다. 혼자 특별 대우네, 아주. 예. 쉬세요. 제가 혼자 다 담그면 되니까요.”

민혁의 비아냥거림이 날아들었다. 다년간의 경험을 통해 나는 이민혁을 다루는 법을 알아차렸다. 대수롭지 않게 한 마디만 중얼거리면 입을 싹 다물고 조용해진다.

“너도 뭐. 한수진한텐 특별 대우 받잖아.”

“…….”

거봐. 나는 피식 웃으며 허리를 일으켰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래도 꽤 많은 양의 배추가 차곡히 쌓여 있었다. 간만에 힘 좀 썼다. 솔직히 아직까지도 머리 쓰는 일보단 몸 쓰는 일이 더 잘 맞는단 생각이 든다.

“아씨. 횟집에나 집중할 것이지 자꾸 사업을 늘려 대. 그러다 거하게 말아먹어야 정신을 차리지.”

산처럼 쌓인 배추 더미를 헤집으며 이민혁이 작게 쭝쭝거렸다. 다행히 제조실 밖에 있던 수민의 귀에는 들어가지 않은 모양이었다. 칼을 들고도 얌전히 무나 썰고 있는 걸 보면.

땅을 그냥 놀리냐는 게 차수민의 주장이었다. 왜. 이 광활한 대지에 느그들 공동묘지나 세워 주리? 그 시니컬한 한마디에 사내들은 찍소리 못하고 밭을 갈았다. 처음 그의 집으로 향할 때 언뜻 보았던 고랭지 밭이 정말로 그의 소유였던 것이다.

생산지 직배송이란 특혜를 달고 그렇게 새로운 사업이 시작되었다. 차수민은 예전에 했던 약속처럼, 그의 전속 따까리인 나를 굶길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글쎄. 말아먹을 일은 없을 것 같은데.”

사업 수완이 좋은 건지 전직 조폭들의 손맛이 기가 막힌 건지 김치는 날개 돋친 듯이 팔려 나갔다. 방송도 몇 번 타고 난 다음에는 안정적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말아먹기는커녕 날이 갈수록 판매량이 늘고 있었다. 더불어 귀찮은 일도 생겼다.

“아. 맞다. 그건 어떻게 됐어?”

민혁의 질문에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내일 법원 출두야.”

치솟는 인기에는 헤이터들이 따라붙는 법이라고, 천장에 붙은 평점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제품에 대한 비방이 올라왔다. 주관적 후기가 아닌 허위 사실을 포함한 글이었다. 유독 한 아이디가 끈질기고 뚝심 있게 입장을 고수하는 중이었는데 대개 내용은 이랬다.

‘그짝 김치 먹고 이빨이 다 나가부렸다. 고춧가루 대신 모래 쓰냐? 제조 시 위생 상태가 의심된다. 그따위로 장사할 거면 집어치워라. 어? 깡패 새끼들이 하던 일이나 잘할 것이지 무슨 식품 사업을 하겠다고 뛰어들어서. 여기 사장 내가 잘 아는데 아주 XX같은 XX인데 XXX…….’

그 아이디의 화려한 활동이 요즘 들어 보살급으로 유해졌다고 생각했던 차수민의 심기를 거스른 건 당연한 일이고 내게는 간만에 그의 따까리로 활약할 기회가 주어졌다.

소장을 접수하고 얼마 안 있어 악플러의 정체가 밝혀졌다. 몇 년 전 경찰의 대규모 마약 소탕 작전에 휩쓸려 나가리가 된 대검파의 부두목이 주인공이었다. 한때 차수민에게 뚝배기가 깨져 본 경험이 있는 그는 재기를 꿈꾸며 부하들을 끌어모아 새 사업을 시작했는데 공교롭게도 차수민이 뛰어든 김치 사업이었던 것이다.

“이 새끼가. 옛정을 생각해서 봐주려 했더니 미쳤네.”

수민이 우편 봉투를 책상에 패대기치듯 던졌다. 마음을 넓게 쓰려고 노력 중인 차수민이 내민 손길을 세차게 쳐 낸 그는 결국 합의에 응하지 않기로 했고, 본인의 결백을 주장했다. 덕분에 가뜩이나 바빠 죽겠는 수민은 친히 법원까지 발걸음을 옮겨 증인석에 서게 되었다.

“거긴 변호사도 안 쓰나. 합의 봐 달라 빌어도 모자랄 판에.”

“발악이지, 뭐. 승소 가능성 없단 걸 알면서도 그러는 거야. 나도 그런 고객 몇 명 만나 봤는데 상대가 싫어 죽겠을 때 종종 그렇게 귀찮게 굴더라.”

수민이 버린 과거는 이렇게 가끔씩, 여전히 그의 발목을 잡고 늘어질 때가 있었다.

나는 기계적으로 타이핑하며 힐끔 장식장 위에 전시된 액자들을 살폈다. 아이들을 껴안은 채 화난 듯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표정은 저래도 차수민은 꽤나 보육원 애들의 환심을 사고 있었다. 새 인생을 살아보겠다던 다짐이 헛것은 아니었는지 수민은 재단을 세워 물심양면 쏟아 가며 옛 과오를 씻어 내고 있었다.

나 몰래.

이걸 어떻게 알았냐면, 차수민의 바지 사이즈를 알기 위해 그의 옷장을 뒤지다 나온 후원 증서 덕분에 겨우 알았다. 어떻게 나한테 한마디 언급도 안 해 줘? 이게 창피해? 내 물음에 새빨개진 귓불로 대답하더랬다. 잘난 척해도 이해할 마당에 뭐가 부끄럽다고 꽁꽁 숨기다 걸린 게 귀엽기 짝이 없었다.

모든 부분이 사랑스럽고 모든 요소가 귀여운데. 이런 너를 싫어하는 인간들이 있다니. 나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이래서 힘만 쓰는 것들은 안 돼. 요즘 세상에 머리 굴릴 줄도 알아야지. 내가 그놈들 레이파 손잡을 때부터 박살 날 줄 알았다. 하.”

“민사까지 갈 거지.”

“어. 아주 벗겨 먹을 수 있는 거 다 벗겨 먹어야겠어.”

씩씩거리던 수민이 인상을 찌푸린 채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내게 다가왔다. 노트북 화면에 빨려 들어갈 듯이 코를 박고 있던 나는 익숙한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부드러운 손길이 안경을 벗겨 냈다. 꿈같은 감각이 뺨을 부드럽게 누르고 지나갔다. 입술을 매만지며 수민이 말했다.

“이번 주문량 맞추고 너랑 바다라도 갈까 했는데. 개새끼들 때문에 또 못 가게 생겼네.”

나는 차수민의 허리를 잡아끌어 잠옷 차림의 그를 무릎 위에 앉혔다. 몇 년을 맡아도 변함없는 그의 체향이 훅 끼쳐 왔다.

“다음에 가면 되지.”

속삭이듯 말하며 그의 상의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느긋한 여유가 가슴팍에서 찰랑거렸다.

“시간은 많잖아, 우리.”

✲ ✲ ✲

오랜만에 본 박현식은 여전히 적대적이었다. 차수민에게도, 나에게도. 차수민이야 원래 싫어했다지만 그래도 절친이었던 내게 으르렁거리게 된 데에는 누군가의 역할이 크게 작용했다.

변호사 배지를 달고 얼마 안 되어 박현식과 같은 케이스에 얽힌 적이 있다.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이냐며 서로 신기해했던 것도 잠시였다.

그 판은 내가 이겼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수민이 내 열 번째 승소 건을 축하해 주겠다며 방방곡곡에 ‘축 김정현 10번째 승소. 00지검 박현식 검사 상대로 이루어 내다!’라는 문구가 대문짝만하게 박힌 현수막을 걸어 버렸다. 그 이후로 대학 동기 놈은 그렇게 쌀쌀맞을 수가 없었다. 손발이 닳도록 싹싹 빌고 나서야 말 정도는 걸어 주는 사이가 될 수 있었다.

차수민은 실수라고 말했지만 내 생각에는 일부러 그런 게 분명했다. 많고 많은 광고판 중 굳이 현식이 출근길을 집요하게 따라 걸어 놓은 걸 보면. 수민은 성깔을 죽이고 얌전해진 이후에도 유독 박현식만은 가만두지 못하곤 했다. 그가 본래 성깔을 누른 채, 지금의 차수민으로 남아 있기 위해 남겨 둔 마지막 보루…라는 생각이 들었다.

“야. 다음부턴 그냥 합의 봐. 뭘 이런 걸로 여기까지 와서 많은 사람 귀찮게 해?”

시간이 약이라고 그래도 쌓인 화가 많이 풀렸는지 현식의 툴툴거리는 말투 속에서 옛정을 느꼈다. 분명 수민은 나만의 착각이라 일갈하겠지만.

“저쪽에서 결백하시다는데 어떡하냐.”

대검파 부두목은 결국 허위 사실 적시 명예훼손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증인으로 나선 차수민은 신성한 법정만 아니었으면 쌓아 두었던 욕을 한 바가지 퍼부었을 것이다. 온 힘을 다해 꾹꾹 참는 게 눈에 보였거든.

“커피 잘 마셨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 가 봐야 해.”

나는 반쯤 남은 잔을 내려놓았다.

“기다리는 사람은 무슨. 그 새끼인 거 다 알거든? 소장에 걔 이름 석 자 딱 적혀 있는데 새삼스럽게. 야, 너희 진짜 징하다. 이러다 백년해로하시겠어. 내가 그때 딱 말했었지! 가까이하지 말라고. 분명 너 코 꿰일 줄…….”

“담에 밥 한번 먹자. 알겠지?”

현식의 말을 뚝 자르고 일어섰다. 설교는 필요 없었다. 어서 집으로 돌아가 차수민의 허리를 끌어안고 어제 보다 만 영화나 마저 봐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나는 로비로 걸어 나가며 커피를 마시는 동안 잠시 풀러 두었던 넥타이를 다시 고쳐 맸다. 반들한 와이셔츠의 감촉이 몸을 조여 왔다. 앞날은 아무도 모른다고 했던가. 사시사철 트레이닝복만 걸치고 살았던 인간이 포멀하기 짝이 없는 복장으로 매일을 보내게 될 줄은.

‘근데 많고 많은 학과 중에 왜 하필 법학과였어?’

‘우리 조직 뒤 봐줄 인간 하나 심어 두려고 했다, 왜.’

변호사 배지를 달던 날, 넌지시 던진 질문에 차수민은 그렇게 대답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네가 나와 모든 걸 함께했으면 하고 바랐으니까. 근데 조직이고 뭐고 다 공중분해 된 마당에 첩자는 무슨. 다 허사가 되어 버렸네요.’

‘그럼 원대한 계획도 틀어진 마당에 공부랑 척진 놈을 왜 대학원까지 보냈니.’

‘그냥…… 너 슈트 입은 모습이 멋있을 것 같은 거야. 상상해 보니까 정말 멋있어서. 그래서 끝까지 밀어붙이자, 그렇게 된 거지. 겸사겸사 우리 사업도 좀 봐주고.’

뭐? 정말 그게 전부야? 옷 입히기 놀이? 어. 뭘 더 바라. 불만 있어? 그가 냉하게 되물었고 나는 입을 다물었다. 불만이 있을 리가 있나. 감사합니다, 절해도 모자랄 판에.

고작 ‘그런 이유’로 등 떠밀려 슈트를 입게 된 나는 퇴근의 즐거움을 안고 허구한 날 드나드는 로비를 나섰다.

이유야 어쨌든 차수민을 위해 일한다는 건 행복한 일이었다. 오늘같이 질 낮은 케이스는 약간 의욕이 떨어지긴 했지만…….

법원의 긴 계단을 채 다 밟기도 전에 수민을 끼고 뒹굴거릴 거라는 내 노곤한 저녁 계획을 날려 버리는 욕설이 들려왔다. 불길한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나는 서둘러 내려갔다. 이런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었다.

“이, XX. 뭘 잘했다고 또 지랄이야. 야, 벌금이나 두둑이 준비해 둬라? 내가 너 먼지까지 털어 갈 거거든?”

차수민이었다. 그 가냘픈 애를 둘러싸고 방금 전까지 질리도록 보았던 떡대들이 위협적인 태도로 서 있었다.

기가 죽을 법한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수민은 꺾이긴커녕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삿대질을 해 대고 있었다. 상대는 수하들을 곁에 둔 대검파 부두목이었다.

“어쭈? 말본새 봐라. 이 쪼그만 게 기고만장해서 눈에 뵈는 게 없지?”

“어. 상대할 가치도 없는 놈들은 눈에 보이지가 않더라고.”

“잠깐, 잠깐!”

나는 달려가서 팔짱을 낀 채 무섭게 윽박지르는 깍두기와 안면 가득 비웃음을 띄우고 있는 차수민을 갈랐다.

그를 등 뒤로 숨기기가 무섭게 내 정면과 등 뒤에서 동시에 무시무시한 육두문자가 쏟아져 내렸다. 내 개입이 아무짝에도 쓸모없겠다는 본능적인 예감이 들었다.

그들은 나를 벽이라도 된 양 세워 두고 정말 사이좋게도 한마디씩 공평하게 주고받고 있었다. 마치 내가 없는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머쓱하게 두 팔을 벌린 채 서 있던 나는 고개를 돌려 목에 핏줄을 세워 가며 욕설을 내뱉는 수민에게 속삭였다.

“좋아, 좋아. 다 좋은데 목격자가 없을진 몰라도 여기 널린 게 씨씨티비거든…….”

그러자 수민은 고분고분 내 말을 수용하여 입을 가리고 쌍욕을 내뱉기 시작했다. 내 의도와 한참 벗어난 방향이었지만 똘똘하기 짝이 없었다.

“XXX, 진짜 XX같은 XXX가 XXXXX!!!”

“뭐, XXX? 야! 다시 말해 봐! 이…….”

“내가 마음 같아선 너 (삐-)하고 (삐-)해서 (삐-)하고 싶은데! 참는 거야! 정현아, 좀 비켜 봐.”

내 옆구리 틈새로 불쑥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든 손이 나타났다. 간만에 보는 차수민의 싸가지 밥 말아 먹은 모습이었다. 그동안 얌전하게 억눌렀던 본성이 터지기라도 했는지 입에 담기 어려운 단어와 함께 흰 손가락이 열심히 엿을 날려 댔다. 상대는 그 꼴을 보고 더 눈깔이 돌아간 것 같았다.

“해 봐, 어디 해 봐!”

“내가 못 하는 것 같냐? 안 하는 거지. 이봐요, 아저씨. 교양 있는 민주 시민답게 법으로 해결하자고오. 아까 탈탈 털린 거는 기억도 안 나나 봐?”

“내가 언제!”

“아까 법정에서 우리 정현이한테 개털렸잖…….”

활활 타오르던 분노가 뚝 끊겼다. BGM처럼 들리던 욕설이 멈추었다. 더 이상 이어지지 않는 정겨운 힐난에 나도 대검파 인간들도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고개를 돌리니 멍한 얼굴의 차수민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동공이 사방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왜 그래?”

“없어…….”

그의 시선은 여전히 가운뎃손가락을 치켜든 왼손에 고정되어 있었다.

“뭐가……?”

“반지, 반지가… 없어.”

그리고 그 매끈한 손에는 항상 반짝거리며 존재감을 드러내던 무언가가 사라져 있었다. 수민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더 이상 떡대들의 비아냥은 귀에 들어오지 않는 듯했다.

나는 불현듯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작은 다이아가 박힌 금고리가 단단하게 약지를 얽매고 있었다.

오랜만에 이것의 무게를 실감했다. 언제나 착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평상시에는 끼고 있는지조차 인식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어디서 없어졌는지 기억나?”

수민이 어두운 기색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럼 왔던 길을 돌아가 볼까?”

초조하게 입술을 물어뜯는 그를 데리고 다시 계단을 올랐다.

그 반지는 내가 수민에게 준 공식적인 첫 번째 선물이자 우리의 기념링이었다.

나는 주얼리를 몸에 걸치고 다니는 타입이 아니었다. 거치적거리기만 하지. 그런데 차수민의 흰 손에 뭔가가 반짝이는 건 보고 싶었다. 생각해 보니 그 시기에 한수진이 이민혁을 갈취해 뜯어내다시피 한 반지를 동네방네 자랑하고 다녔던 것 같기도 하다. 한수진은 행복해 보였다.

차수민도 행복해할까?

그렇게 굉장히 심플하고 직관적인 이유 하나로 졸업 날짜를 디데이로 정하고 죽어라 알바를 뛰었다. 사실 본질적인 선물 전달보다도 갑작스러운 서프라이즈에 비중을 크게 두었기 때문에 차수민이 눈치채지 못하는 것이 중요했다.

죽는 줄 알았다. 대학원 준비에 데이트에 졸업 논문까지 쓰면서 컨디션을 유지해야 했다. 조금이라도 지친 기색을 차수민은 기가 막히게 알아챘다. 안색이 왜 이러냐며 보약이라도 먹여야겠다고 난리 치는 걸 겨우 말릴 수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학사모를 쓰던 날, 준비한 것을 그의 손에 쥐여 줄 수 있었다.

‘뭐야, 이거?’

‘어…… 그, 열어 보면 알 수 있지 않냐?’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정말 멋대가리 없는 선물 전달식이었다. 손가락에 끼워 주는 게 그렇게 어려웠냐. 로맨틱하지 못한 새끼.

그러나 나는 그가 케이스를 여는 순간 휘몰아치는 수많은 걱정을 견뎌 내야 했기 때문에 그런 세부적인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제야 애초부터 고려했어야 하는 생각들이 드는 것이었다.

롤렉스를 차는 놈인데 이깟 게 성에 찰까? 평소에 반지를 잘 끼고 다니는 편이었나? 사이즈는 제대로 쟀던가?

…원치도 않은 선물을 한 거면 어떡하지.

‘야, 그게……’

이제 와 물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지만 변명이라도 시도해 보려는 찰나 케이스를 쥔 그의 손이 덜덜 흔들렸다. 나는 눈만 동그랗게 뜨고 얼어붙어 수민이 알아서 반지를 제 손가락에 끼우는 모습을 멀뚱히 구경했다. 벌써 몇 년 전 일이지만, 나는 아직까지 파르르 떨리던 그의 속눈썹을 기억한다. 붉어지던 눈매까지도.

기껏해야 쌀알만 한 보석이 박힌 보잘것없는 반지였지만 그가 지금 왜 이렇게까지 정신이 나가 있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없어.”

갔던 장소를 되짚어 봐도 반지는 나오지 않았다.

우리는 진행 중인 사건들이 끝날 때까지 법정 밖에서 기다려야 했다.

“분명 안에 있을 거야. 걱정하지 마.”

나는 호언장담을 하며 수민을 위로했다. 우리는 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들어가 곳곳을 뒤졌다. 증인석 의자 밑까지 샅샅이 살폈다.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고 청소부가 들어와 잔소리를 늘어놓을 때까지 법정 곳곳을 찾아보았으나 원하는 것은 찾을 수 없었다.

“집에서 나오기 전에는 있었어?”

“생각이 잘 안 나…….”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집 안 구석구석을 뒤졌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평소엔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던 반지의 무게가 더 무겁게 느껴졌다.

“정현아, 어떡하지……?”

잔뜩 울상이 된 얼굴을 보니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괜찮아. 이번 기회에 새로 하나 맞추자. 안 그래도 그러자고 하려던 참이었어.”

사실 우리 나이에 착용하기엔 어울리지 않는 반지였다. 학생 김정현이 아등바등 쟁취해 낸 탓에 골드는 순금이 되지 못했고 다이아는 반짝이다 말았으며 디자인은 풋내가 날 정도로 어렸다. 그냥 버릇처럼 끼다가 세월이 흘러 버렸을 뿐이다.

시간은 많으니까, 바쁜 것을 다 흘려보내고 나면 그의 손에 번쩍이는 새 반지를 끼워 줘야지. 시간은 많으니까, 내년 봄엔 그와 함께 바다에 가야겠어. 시간은 많으니까…….

입버릇처럼 중얼거리며 지내다 보니 벌써 몇 년의 시간이 흘러가 버렸다. 여전히 우리는 같은 반지를 갖고 있었고 바다는커녕 그렇다 할 여행지에 못 간 지 오래였다.

반지는 변함이 없는데 손가락의 주인은 변해 있었다. 그걸 탓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반지 하나가 사라져 버렸고. 아아, 어쩐지 모든 게 다 내 탓 같았다. 나는 여전히 침대 밑을 살피는 수민의 동그란 뒤통수를 바라보며 이마를 짚었다.

“그래. 차라리 잘됐어. 낡아 빠진 거 버리고, 더 좋은 거 해 주려 했으니까. 기회라 생각하고 이제 그만 일어…….”

“안 돼.”

그의 몸을 일으켜 세우자 그가 맥없이 주저앉았다. 의외의 흐트러진 모습에 너무 놀라 나까지 같이 주저앉고 말았다.

“너 울어?”

“울기는 누가, 내가 너 같은 줄…….”

수민은 말을 끝내지 않고 토퍼에 얼굴을 파묻었다.

“야… 왜, 왜 그래.”

“잘됐다니 그런 말 하지 마. 네 말대로 낡아 빠졌을지 몰라도 그게 나한테 얼마나…….”

그게 나한테 얼마나 큰 의미였는지 알아? 그는 쪼그라든 뒷모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크, 실수했구나. 나는 후다닥 그를 따라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훌쩍이는지 아니면 메마른 눈으로 공허하게 이불을 내려다보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수민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댔다.

“미안. 내가 성급했다. 그럼 일단 끝까지 찾아보자.”

“…네가 왜 미안해, 또.”

수민의 손이 이불을 꽉 움켜쥐었다. 억눌려 뭉개진 한숨이 뒤를 이었다.

“아냐. 내가 잘못했어, 정현아. 간만에 또 히스테리 부렸네. 내가 한심해서 그래……. 애지중지해도 모자랄 걸 칠칠찮게 잃어버리고.”

그의 어깨가 잘게 흔들렸다. 토퍼에 콱 파묻힌 그의 얼굴이 어떤 표정일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미안해…… 네가 준 거 잃어버렸어.”

목메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 네가 그거 어떻게 준비했을지 알거든. 안 봐도 뻔하잖아. 그래서 내가 너무 한심해, 지금. 나 그 반지 무덤까지 가지고 들어가려고 했었어.”

“정말? 그 정도로?”

“어. 그거 나한테 되게…….”

되게 소중한 거야. 그가 속삭였다. 나도 모르게 그의 어깨를 꼭 끌어안았다.

“미안해. 몰랐어. 네가 그렇게까지 내 선물을 아껴 주는지 몰랐어.”

너는 내가 준 거 안 아끼냐면서 툴툴대는 소리가 매트리스에 막혀 들리다 말았다. 어쩐지 웃음이 나오려 했다.

차수민은 항상 그랬다. 피도 눈물도 없는 척 벽을 쌓아 두지만 구멍 하나 뚫리면 댐 무너지듯 그동안 꽁꽁 숨겨 두었던 따듯한 것들이 쏟아져 나왔다. 무뚝뚝한 피부 아래 팔딱팔딱 숨 쉬는 그의 감정이 솔직한 눈동자를 통해 흘러나올 때면, 나는 홀린 듯 그의 손가락 마디마디 입을 맞추고 싶어졌다.

지금도 그랬다. 푹 엎어져 동그란 가마만 보이는 저 뒤통수를 잔뜩 흐트러뜨리고 긴 목덜미에 입술을 파묻고 싶었다. 나는 대신 사방으로 뻗친 그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근데 나 반지 말고도 너한테 준 거 많잖아. 지금 네가 입고 있는 셔츠, 저기 걸린 가방, 핸드폰, 노트북 다 내가 뼈 빠지게 일해서 선물한 건데?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은데? 아니, 지금이 더 힘들어. 그땐 반지 하나 사는 거야 뭐, 몸으로 때우면 됐잖아. 지금은 머리 굴려야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그걸 위로랍시고 하는 거야?”

“응. 그 반지가 우리 둘에게 큰 의미였던 거 나도 잘 알지. 근데 생각해 보면 반지뿐만이 아니라 우리에게는 모든 게 다 큰 의미야.”

나는 수민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소동물 다루듯 쓰다듬었다.

“네 셔츠, 저번 주에 겨우 시간 맞춰 백화점 갔다가 샀지. 간만의 데이트였어. 이 침대, 사다리차 안 쓰고 옮겼다가 엘리베이터에 껴서 우리 경비 아저씨한테 엄청 혼났었잖아. 가방은 스페인 갔을 때 비 피해 들어간 가게에서 사 온 거고, 이불은 라면 먹다가 홈쇼핑 보고 주문했었어. 네가 품절 임박이라고 재촉해 대서 색깔 잘못 주문했잖아. 또 뭐가 있더라.”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자 수민의 한숨 섞인 숨소리가 고르게 잦아들었다.

“그리고 선물 준 당사자가 괜찮다고 하잖아. 미안해할 필요 전혀 없다고.”

“…….”

“더 찾아보자. 분명 포기할 때쯤 나올 거야. 예전에 차 키 잃어버렸을 때 생각나? 그때 차를 새로 사느니 마느니 난리였잖아. 결국엔 어디더라, 냉장고 야채 칸이었나. 일주일간 택시 타고 출근해야 했지만 어쨌든 찾긴 찾았어. 그치?”

“이미 문짝 뜯어낸 이후긴 했지. 그리고 그땐 내가 아니라 네가…….”

“흠흠. 어찌 됐건. 이번에도 냉장고에서 튀어나올지 누가 알겠어. 적어도 반지는 키박스 뜯어낼 일은 없잖아.”

잔뜩 구겨진 이불을 동아줄처럼 꽉 부여잡고 있던 손에서 어느새 힘이 조금 풀렸다. 나는 느슨해진 차수민의 흰 손을 잡아끌어 열심히 주물럭거렸다. 따끈한 온기가 기분 좋게 손아귀에 들어왔다.

“기분 좀 풀렸어?”

“응.”

“그럼 얼굴 좀 들어 보면 안 돼?”

“안 돼. 이따가.”

단호한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았다. 고집은.

희고 말랑한 손가락은 군데군데 흉으로 얼룩져 있었다. 나는 까마득한 몇 년 전을 떠올렸다.

교양 강의실에서 수민과 6년 만에 재회했을 때, 그는 용이 승천할 기세로 들어앉아 있는 묵직한 반지를 끼고 있었다. 그 차수민을 다시 만났다는 생각에 까무러칠 지경이었어서 집중하지 못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가느다란 손가락에 너클과도 같은 용 반지는 정말 어울리지 않았다. 이 예쁜 손을 묶어 두었던 용을 몰아낸 것만으로도 괜찮지 않았나, 하는 뒤늦은 감상이 밀려들었다.

그래. 아무렴 어떻겠는가. 우리의 첫 번째 반지를 찾건 못 찾건 그는 내가 준 애정에 행복해했고 소중히 여겨 주었다. 금속 조각의 역할은 거기서 충분히 다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래도 자신을 한심하다 여기면 안 되니까.”

다만 속상해하는 연인의 자책을 보는 건 힘든 일이었다.

“우리 같이 딱 30일만 열심히 찾아보자. 냉장고랑 쓰레기통까지 뒤져 보는 거야. 그래도 없으면 그때는 깨끗하게 보내 주기. 누구의 탓도 하지 않기. 오케이?”

수민이 천천히 눌려 있던 고개를 들었다. 얼굴에 이불 자국이 도장처럼 찍혀 있었다. 눈물이라도 찔끔거렸는지 머리카락이 눈가에 붙어 있었다.

내 재촉에 잔뜩 헝클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아무렴 어떻겠냐는 속 편한 생각이 먼지가 되어 날아가는 걸 느꼈다.

역할 끝난 금속 조각 따위를 꼭 찾아내 그 뚱한 얼굴에 다시 희미한 미소가 서리는 꼴을 보고 말리라. 그런 바람이 대신 새겨졌다.

일주일. 딱 일주일 만에 한 줄기 희망조차 사라졌다. 나는 예감했다. 망할 놈의 반지는 결코 찾을 수 없으리란 걸.

연차까지 써 가며 온 집구석을 뒤졌다. 차수민의 생활 반경 안에 들어간 모든 장소를 살폈고 법원에 밥 먹듯 출근했다. 미화 여사님께 매일같이 반지의 유무를 물어보고 다녀서 그런지 나만 출현하면 칠색 팔색을 하며 꽁무니를 빼셨다. 심지어 내가 땅만 보고 다닌다는 소문이 박현식 귀에도 들어갔다.

“야. 질리지도 않냐? 너 여기 소문 쫙 났어.”

“그러든가 말든가.”

“뭘 잃어버렸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하나 사라. 어?”

“…….”

나는 눈에 뵈는 게 없었다. 그깟 반지가 뭐가 중요하니. 우리가 이만큼 서로 사랑하는 걸, 따위의 멋들어진 변명은 잊은 지 오래였다. 오기가 생겼다. 차수민의 코앞에 동그란 그것을 들이밀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정말 최선을 다했다. 간만에 영혼까지 끌어다 썼다. 증거 찾을 때도 이렇게까지 용써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이만큼 했는데도 안 나오는 거면 정말 없는 거다. 이미 반지는 이 세상을 뜬 게 분명했다.

이 사실을 알 리 없는 차수민은 저녁마다 내가 낮에 샅샅이 뒤진 장소를 다시 들추어 냈다. 기대감과 실망이 어우러진 그 표정을 보니 차마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정말이지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없는 걸 어떻게 찾아낸단 말인가. 열심히 쓰레기통을 뒤지던 나는 신경질적으로 장갑을 벗어 던졌다. 앞에서 소파 아래를 훑는 수민이의 궁상맞은 뒷모습이 너무나 안쓰러웠다.

나는 약지에 습관처럼 붙어 있는 작은 링을 바라보았다. 차라리 내가 잃어버렸어야 하는데. 그랬다면 된통 혼나고 끝날 일이었는데. 네가 바닥에 철썩 붙어 보이는 틈마다 손가락을 넣어 보지 않아도 됐을 텐데.

마음 같아선 사라진 그것을 어디서 만들어서라도 갖다 바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한숨을 내쉬던 나는 차오르는 땀을 손등으로 훑어 냈다. 보석의 입체감이 이마를 긁었다.

아.

일주일. 일주일이나 지나고 나서야 깨달음을 얻었다.

차수민이 출근하기만을 목 빠져라 기다리던 나는 그가 집을 나서기가 무섭게 종로로 향했다. 가게 문을 열어 재치며 왼손을 내밀었다.

“이거랑 똑같이 만들어 주세요. 3주 안에 가능할까요?”

“뭐, 어렵지는 않은데. 요즘은 이런 디자인은 잘 안 하시거든요.”

“꼭 이렇게 해 주세요. 꼭.”

사장은 의아한 표정으로 한물간 디자인의 반지를 받아 들었다. 가게를 둘러보니 세련된 반지들이 큼직한 알을 품고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심 쌀알만 한 보석이 마음에 걸려 크게 바꿀 수 있냐고 물어보았다. 내가 못 버는 것도 아닌데 적어도 콩알만 한 크기는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손님, 그럼 이 느낌이 안 날 텐데요……?”

돈은 있는데 살 수가 없다. 이런 적은 난생처음이었다. 허, 나는 헛웃음을 삼켰다.

“역시 그렇겠죠……. 그럼 같은 크기에 더 좋은 다이아를 쓸 수 없나요? 아니면 링을 순금으로 바꾼다든가. 겉보기에만 이거랑 똑같으면 되거든요.”

“이 크기 다이아는 거기서 거기예요. 그리고 순금으로 가면 이거보다 좀 노래지고 물러질 수 있어요.”

“아… 그럼 어쩔 수 없죠……. 그냥 그대로 해 주세요. 아! 그리고 스크래치도 몇 개 내 주세요.”

반지값보다 세공비가 더 나오겠다며 혀를 차는 사장님에게 꼭 3주 안에는 받아야 한다며 반강제적으로 확언을 받아 냈다.

3주는 느릿느릿 천천히 지나갔다. 차수민 눈을 피해 서울로 토꼈던 그때를 고려한다면, 내 생에 두 번째로 느린 3주였다.

차수민은 핼쑥해 보였다. 그도 이제 포기하기 시작한 것 같았다. 나는 짠한 마음이 들었지만 대의를 위해 입을 다물어야 했다.

“밥은 먹었어?”

“아니. 이따가 가게에 좀 가 봐야 해. 간판이 말썽이라. 갔다 와서 먹으려고. 너는?”

“난 퇴근하면서 대충. 뭐 간단하게 차려 줄까?”

“됐어. 너도 피곤할 텐데. 근데 정현아. 너 내 눈 피하는 것 같다?”

“뭐? 무스은. 말도 안 되는…… 그, 요즘 판례 찾느라 눈이 침침해서 그런가.”

귀신같은 차수민. 시무룩 어깨가 내려갔어도 이런 건 단박에 눈치챈다. 차수민의 컨디션이 좋았더라면 내 마구 흔들리는 동공까지 포착했겠지만 그는 곧 서글픈 뒷모습으로 방에 들어갔다.

그 후로도 평상시와 다름없는 김정현을 연기하느라 진을 뺐다. 완성되었으니 찾으러 오란 문자를 받았을 때 내가 얼마나 기뻤는지 아무도 공감할 수 없을 것이다.

“얼마 안 남았네.”

약속한 30일로부터 정확히 3일 전이었다. 나는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고 수민에게 물었다.

“진짜 안 나온다. 그치. 끝까지 못 찾으면 어떡하냐.”

“보내 줘야지, 뭐.”

수민이 공기에 밥을 가득 퍼 담으며 중얼거렸다. 무심한 어조 기저에는 해탈이 녹아 있었다. 나는 당장이라도 그의 손목을 붙잡고 준비한 것을 끼워 주고 싶은 충동을 참아 냈다.

“생각해 봤는데 이쯤 했으면 충분히 할 만큼 한 것 같아. 반지 따위를 잊는 데 한 달이란 시간이 걸린 게 우습긴 하지만. 그깟 액세서리 따위가 뭐라고.”

수민이 건조하게 말을 이었다. 나는 얌전히 그가 퍼 주는 밥그릇을 받아 들었다. 식탁에는 그가 직접 끓인 백련 상회 표 김치찌개가 모락모락 김을 내고 있었다.

“네가 준 마음의…… 증표 같은 거였잖아. 그래서 과하게 집착하고 있었나 봐. 머저리 같긴. 너는 바로 여기 있는데.”

수민의 손이 가볍게 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애정 어린 손길이었다. 당장 식탁 밑으로 기어 들어가 ‘찾았다!’를 외치며 내 것과 꼭 닮은 반지를 쥐여 주고 싶었다. 저녁 식사고 뭐고 침실로 직행하고 싶었다. 내가 좀 더 충동적이었다면 진작 그렇게 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나는 그의 손맛이 묻어나는,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으나 대신 그의 부하 직원들이 빡세게 굴러 완성한 김치찌개를 소중하게 한 숟갈 떠 입에 넣었다. 비록 일주일 내내 같은 메뉴를 먹고 있지만, 그의 손길이 닿았는데 어찌 맛있지 않겠는가.

나는 깨작거리는 수민을 잠깐 지켜보다가 준비했던 대사를 읊기 시작했다.

“마, 맛있다. 너 요즘 공장 안 가?”

“아, 이젠 김치 지긋지긋해. 고춧가루만 봐도 재채기 나와. 이민혁이 알아서 잘하고 있으니까 한동안 가게만 보려고. 왜?”

“보내 주기 전에 등잔 밑을 안 뒤져 본 것 같아서. 우리 너 반지 잃어버리기 전날, 그러니까 법원 가기 전날에 열심히 김장했잖아. 기억나지?”

“기억나지. 오지 말래도 와서 시키지 않은 일이나 했잖아. 내가 너 김치 담그라고 대학원까지 보낸 줄 아니? 어?”

차수민이 발끈하며 숟가락을 들어 올렸다. 나는 눈치를 보며 계속 말을 이었다.

“우리 공장은 잘 안 찾아봤잖아. 냉장고에 신발장까지 뒤져 봤으면서 그게 뭐가 어렵냐. 혹시 모르잖아.”

“거기서 잃어버렸으면 이빨 나간 고객이 전화가 와도 진작 왔겠지.”

“너는 제조실에 없었잖아. 제품에 들어갔을 리는 없어. 분명 어딘가 있을 거야. 내일 시간 비워 둬. 같이 가 줄게.”

내 말에 수민이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괜찮아지니까 이젠 왜 네가 이러냐. 나 정말 괜찮아, 김정현.”

내가 안 괜찮다고. 너 웃는 꼴을 봐야겠어.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감정 스펙트럼의 폭이 좁은 건지 차수민은 평소 기쁠 때도 슬플 때도 크게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그가 그나마 생경한 얼굴을 할 때는 기껏해야 몸을 섞을 때뿐이었다. 그거 보자고 매일 섹스를 할 수는 없는 터.

오랜만에 활짝 웃는 차수민이 보고 싶었다. 그깟 반지 하나에 풀 죽은 어깨를 바로 세워 주고 싶었다.

“내일 저녁. 오케이?”

그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 집착은 내가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뭐야. 왜, 왜 이렇게 어두워? 왜 아무도 없어?”

“다 퇴근했지. 이보세요, 나는 악덕 기업주가 아니거든요? 정해진 근무 시간은 칼같이 지키거든요?”

“수민아, 수민아. 먼저 가지 마. 어디, 어딨어? 안 보여.”

“어휴. 네가 이 시간에 오자고 했잖아.”

어둠이 서린 공장 내부는 새벽녘 슬금슬금 숨어 들어왔을 때와는 또 다른 풍경이었다.

딸깍 소리와 함께 벌컥 밝은 빛이 쏟아져 내렸다. 나는 나보다 작은 차수민의 옷자락을 동아줄처럼 꼭 붙든 채 갑자기 날아든 빛에 포착되어 버렸다. 풉. 작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는 항상 멋있게 보이고 싶은 상대의 입에서 나온 소리를 겸허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네가 관리실 안에 찾아봐. 나는 재료 준비실 쪽 맡을 테니까.”

“아니아니, 네가 관리실.”

나는 재료실로 향하는 그를 질질 끌어 관리실 문 앞에 데려다 놓았다. 떠밀리다시피 들어간 수민은 툴툴거리며 책상 위를 헤집기 시작했다.

“안 보여.”

“잘 찾아봐!”

나는 재료 준비실에 발만 걸쳐 놓고 길게 목을 빼 외쳤다. 5분 후부터는 아예 대놓고 흘끔거리며 서랍을 여닫는 차수민을 관찰했다.

바로 몇 발짝만 가면 되는데. 각종 장부와 레시피 북이 꽂혀 있는 간이 책꽂이의 세 번째 줄. 지금 그가 고개만 돌리면 눈에 보일 위치였다. 장소 선정에 고심했는데 눈에 확 뛰지 않으면서 너무 억지스럽지도 않은 장소는 관리실 책꽂이였다. 차수민은 종종 라텍스 장갑을 벗어 대충 올려놓고 레시피 북을 확인하곤 했으니까.

이런 내 기가 막힌 센스에도 불구하고 수민은 책꽂이를 제외한 온갖 곳을 뒤적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에잇. 이거 답답해서 원.”

결국 나는 나를 투입하기로 했다. 찾는 시늉조차 안 해 놓고 재료실엔 없는 것 같다는 거짓말을 하며 잰걸음을 옮겼다.

“여기 없으니까 내가 도와줄게!”

내 외침에 책상 밑을 살피던 수민이 몸을 일으켰다. 그의 입에서 안 들어와도 되니까 다른 곳이나 찾아보라는 말이 채 완성되기도 전에 나는 관리실의 문턱을 밟았다.

정확히 말하면 문턱에 걸렸다.

“앗.”

김정현 인생, 일이 술술 잘 풀릴 리가 없지. 나는 앞으로 기울어지며 생각했다.

짧은 순간, 미처 피하지 못한 수민을 끌어안고 몸을 틀었다. 그의 머리가 책장 모서리에 닿지 않게 뒤통수를 손으로 감쌌다. 그러곤 뭐, 화려하게 넘어졌다.

우당탕탕 요란한 소리와 함께 캐비닛을 들이박고 책장에 부딪혔다. 둔탁한 충격과 함께 후두둑 비처럼 서류철과 책 몇 권이 쏟아졌다. 나는 품속의 수민을 더 꽉 껴안고 몸을 둥글게 말았다.

“아야.”

“김정현! 괜찮아?”

정신을 차린 수민이 허겁지겁 내 얼굴을 살폈다. 나는 민망해 슬쩍 시선을 돌렸다. 넘어지면서 그와 눈이 마주쳤다. 내 얼빠진 표정과 자기를 향해 허우적거리는 몸짓을 적나라하게 다 봤을 거 아냐. 반지고 뭐고 쥐구멍에 들어가 숨고 싶었다.

“미안……. 삐끗했어. 너는 괜찮아?”

“안 다쳤어? 떨어진 책에 맞은 거 아니야?”

다행히 수민은 내 노간지 슬랩스틱 쇼는 안중에 없는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 머리를 여기저기 더듬었다. 혹이라도 났을까 상처를 찾아 헤매던 그의 손이 내 정수리 쪽에 닿았다. 그가 내 머리칼을 헤집었다.

“아.”

한 뼘 거리에서 마주한 수민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나도 덩달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왜. 어디 아파? 부딪혔어?”

“아니, 이거…….”

그가 내민 것은 반짝이는 작은 물체였다. 우리가 한 달간 눈에 불을 켜고 찾아다녔으며 수민이 식음을 전폐하게 만든 그것. 어린 김정현의 설익은 애정 표현이었고, 우리가 함께 보낸 시간의 결정체였으며 차수민의 만족이었던 그것.

그 모든 게 상징뿐인 허울이라 해도, 실체가 보잘것없는 탄소 압축물에 불과하다 하여도 저렇게 환히 웃는 네가 내 눈앞에 존재하잖아.

“찾았다…….”

수민이 작게 속삭였다. 나는 살짝 고개를 들어 엉망이 된 책꽂이의 세 번째 줄을 살폈다. 새벽에 몰래 숨어들어 레시피 북 앞에 올려놓았던 반지가 사라져 있었다. 방법이 어찌 됐든 간에 작전 성공이었다.

“찾았다!!! 찾았어, 정현아!”

두 팔이 쑥 뻗어 나와 여전히 모로 고개를 돌리고 있는 내 목을 끌어안았다. 살과 살이 맞닿자 뜨거운 온기와 펄떡이는 박동이 느껴졌다. 아드레날린이 솟구쳤다. 수민이 잔뜩 상기된 표정을 하고 반지를 높게 치켜 들었다.

“드디어 찾았다! 아, 바보 같아! 눈앞에 두고 몰랐잖아?”

그가 뿜어내는 기쁨에 내 입꼬리까지 사르르 올라갔다. 비록 이번에도 직접 손가락에 끼워 주진 못했지만, 차수민은 여전히 그때처럼 행복에 겨운 얼굴을 해 주었다. 어설프고 유치하고 체면은 어따 팔아먹었는지 찾아볼 수가 없고 로맨틱은 개나 줘 버린 상황일지라도, 그는 항상 내 본질을 바라봐 주었다. 내 진심을.

나는 지금 그가 짓는 표정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수민의 해사한 웃음이었다.

“그렇게 좋아……?”

조금 잠긴 목소리로 물으니 그가 반달 모양으로 접힌 눈꼬리를 가까이 들이밀어 온다.

“응. 너어무 좋아. 이깟 거라고 말하긴 했지만, 누가 준 건데. 당연히 찾고 싶었지.”

그러곤 내 손바닥 위에 본인의 손을 올려놓았다. 하얗고 흉터투성이인 손.

“네가 준 거라서 좋은 거야. 정현아. 네가 없으면 그냥 패물에 불과하다고.”

나는 그가 내민 손에 뺨을 비비적대며 그 달콤한 말을 음미했다. 그의 마음에서 새어 나오는 진심을 들었다. 그의 입술이 제시하는 로맨틱한 권유를 들었다.

“그러니까 네가 끼워 줘.”

여러 의미가 담긴 작은 링이 내 다른 손에 쥐어졌다. 그 작은 것의 무게가 상당했다. 나는 대답 대신 그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반지 사건이 일단락되고 나는 남은 휴가를 모조리 써 버렸다. 그리고 무작정 내뱉었다.

“우리 바다 가자.”

선언 같은 내 말에 그가 읽던 신문을 빼꼼히 내렸다.

“이 시기에……? 요즘 바쁜데.”

“가야 해. 가기로 했었잖아.”

“가게도 봐야 하고 공장도…….”

“때려쳐. 휴가 내. 몸만 준비하면 되니까.”

나는 미리 다 싸 놓은 짐을 내밀었다. 생각지도 않았던 캐리어의 등장에 수민은 좀 당황한 모양이었다.

“너무 갑작스럽잖아. 다음에 가자, 다음에.”

“다음에 언제? 안 바쁜 날이 있나. 차일피일 미루다간 평생 못 갈 거야.”

다른 때와 달리 집요한 내 모습에 그가 먼저 시선을 피했다.

“어허. 김정현. 오늘따라 왜 이럴까. 시간은 많으니까 이번 시기만 좀 지나면…….”

“우리 정말 시간이, 많아?”

단호하게 묻자 수민이 입을 다물었다. 그가 들고 있던 신문을 차곡차곡 접었다. 대화할 의향이 생겼다는 뜻이었다.

“왜 그래, 갑자기. 너 나랑 인생의 피날레까지 함께한다고 약속했잖아.”

그가 스툴 받침대에 걸쳐 둔 다리를 초조하게 흔들었다. 나는 몸을 접어 그의 이마에 키스했다.

“응. 당연하지. 너한테 인생을 저당 잡혔는데.”

“그럼……?”

“그렇다고 우리가 무한한 시간을 가졌다고 할 수는 없잖아. 너도, 나도 피날레가 언제인지 알 수 없어.”

나는 무릎을 꿇어 눈높이를 맞추었다. 두려움이 설핏 떠오른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나는 지금 수민이 느끼고 있는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끝이 없는 연극은 없다. 방금 서막이 시작되었어도, 아무리 촘촘한 에피소드가 쌓여 있어도 언젠가는 막이 내린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심연의 공포와 싸워야 했다.

“반지를 찾으면서 생각한 건데, 우리 어쩌면 매일같이 중요한 걸 잃어버리고 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어. 벌써 지키지 못한 약속만 몇 개인지 몰라. 시간은 많으니까 안일하게 생각했던 거야. 지금 이 순간을.”

시간은 많으니까, 바쁜 것을 다 흘려보내고 나면 그의 손에 번쩍이는 새 반지를 끼워 줘야지. 시간은 많으니까, 내년 봄엔 그와 함께 바다에 가야겠어. 나는 시간은 많았어도 실재하지 못한 채 사라진 계획들을 떠올렸다.

우린 연극의 끝이 두렵다는 이유로 유한하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가치를 무의식적으로 무시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너랑 매일 저녁 함께 식사를 하고, 같은 침대에서 잠이 들고, 네 온기를 느끼며 기상하는 일상이 그렇게 소중한 건지 몰랐어. 너무나 당연했으니까. 몇 년째 빼 본 적이 없던 반지처럼, 거기 그 자리에 있는 게 당연한 거였으니까.”

반지가 반짝이고 있는 수민의 손을 붙잡았다. 나는 검지로 그의 약지를 톡톡 두드렸다.

“당연한 건 없더라. 이건 다시 찾았지만 지나간 시간은 되찾을 수가 없잖아.”

한순간에 빠져나갈 모래알. 그래서 아름다운 지금.

그와 함께하는 연극은 서막부터 흥미진진해서 체감하는 전개가 몹시 빨랐다. 일할 땐 느리게 움직이던 시침이 그의 곁에선 눈 깜빡할 사이에 숭텅숭텅 넘어가곤 했다.

너와 나는 종막을 향해 달리는 이 연극의 모든 신을 소중하게 대해야 한다. 네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대사에 집중하고, 네 모든 몸짓을 눈에 담아. 언젠가 다시 반지가 사라져도 후회는 없도록.

“이러다 또 잃어버리면 어떻게 해……. 우리의 소중한 시간 말이야.”

그가 조용히 손등을 응시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나는 이어지는 침묵을 견뎠다. 내가 사랑하는 차수민은 눈 가리고 회피하는 겁쟁이가 아니었다. 그가 긍정적인 대답을 내어 준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지금 당장 어디 가자는 의미에서 벌인 일은 아니었으니까.

우리에겐 변화가 필요했다. 더 나은 관계를 위한 작은 지진이. 나는 차수민을 더 열심히 사랑하고 싶었고 그 역시 그래 주기를 바랐다. 함께하는 모든 순간, 네가 내 우선이 되었으면 한다. 그러기 위해 잠깐 멈추어 재정비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게 바로 지금이었다.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던 나는 손등 아래 손가락이 꼬물꼬물 움직이는 감각에 정신을 차렸다. 배시시 웃고 있는 수민과 눈이 마주쳤다. 나는 순간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나 역시 설핏 웃음이 나왔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의 입술에 짧은 키스를 묻혔다.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두 팔이 목덜미를 감싸 왔다.

“내일이나 모레부터는 시간 낼 수 있지? 바다는 못 가더라도 요 앞에 벚꽃이라도 보고 오자. 벌써 많이 떨어졌던데 다 지기 전에 다녀오자. 아, 전에 가 보고 싶다고 했었던 소품샵도 들러 볼까?”

나는 드라마틱한 효과를 위해 대충 아무거나 쑤셔 넣어 챙겨 놨던 가방을 풀었다. 그간 서로 말로만 세워 두었던 버킷리스트를 이번 휴일은 물론이고 주말마다 차곡차곡 달성해 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는 명료하고 깔끔하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

“가자. 부산.”

“부산?”

“어. 너한테 꼭 맛보여 주고 싶은 국밥집이 있었거든. 어릴 때 엄마랑 자주 갔던 곳인데 깍두기가 미쳤어. 계속 미루다가 주인 할머니 돌아가시겠다.”

나는 눈을 끔뻑였다. 지금? 지금 가자고?

“어. 네가 가자며. 이왕 가는 바다, 예전 추억도 더듬어 볼 겸 부산 가자. 그때 이후로 한 번도 못 가 봤잖아. 이번엔 벨튀 안 할게. 약속.”

그는 그냥 한번 던져 본 나의 초반 계획에 한 발짝 더 나아가 살까지 붙였다.

“부산, 부산 좋지. 근데 나는 오늘 당장 가자는 얘기가 아니었어. 휴가도 길게 썼는데 천천히…….”

“천천히? 차일피일 미루다가 언제?”

수민이 째깍째깍 흘러가는 시곗바늘을 가리켰다. 지금 이 순간에도 시간은 흐르고 있거든? 그의 말에 어쩐지 할 말이 없어져 푸르고 있던 짐을 허겁지겁 다시 챙겼다.

“아, 어……. 공장은? 말 안 해 놔도 괜찮겠어?”

“이민혁이 알아서 하겠지. 야, 지금 출발해도 날 저물어야 도착하겠다. 당장 옷 입어.”

수민이 쿨하게 말하며 차 키를 챙겼다. 나는 어영부영 그의 지시에 따랐다. 과로로 고생하는 민혁에게는 미안한 일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고속도로를 타고 있었다. 네비에는 부산의 어느 국밥집이 찍혀 있었다. 차수민은 기분이 좋은지 콧노래를 불렀다. 조금 전까지 진지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곤 믿기지 않는 상쾌한 얼굴이었다.

나는 멍한 상태로 운전을 하다가 조수석을 쓱 바라보았다. 수민이 왼손을 쫙 편 채 우여곡절 끝에 되찾은, 아니 누군가의 계략으로 되찾게 된 반지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나는 혹여나 제2의 반지 사태가 벌어질까 걱정돼 빈 껌 통을 내밀었다.

“근데 그거 끼고 가도 돼? 또 잃어버리면 어떻게 해. 걱정되면 본네트에 넣어 놔. 타지에선 찾기도 어려워.”

“정현아, 나 사실 반지 네가 새로 맞춘 거 알고 있어.”

빵-

나도 모르게 경적을 울렸다. 차사고 날 뻔했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돌아보니 그는 여전히 유순한 얼굴로 싱긋 미소 지을 뿐이었다.

“언제……?”

“찾고 난 뒤 며칠 안 돼서 알았어. 착용감이 미묘하게 다르잖아. 그리고 미안한데, 너 거짓말할 때 엄청 티 나. 내 손만 뚫을 듯이 쳐다보는데 어떻게 몰라. 속아 주고 싶었는데 반강제적으로 알아 버렸어.”

하아. 그럼 그렇지. 연기력이라곤 쥐뿔만큼도 없는 나 자신이 너무도 한심했다. 공장에 숨어 들어가 첩보 영화 한 편 찍었던 건 다 허사였구나.

나는 뻣뻣하게 굳어 정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차마 수민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나는 그를 철저하게 기만했다. 얕은 속임수로 그의 상처를 갈가리 찢어 놓았다. 그래 놓고 다시는 잃어버리지 말자며 일장연설을 늘어놓곤 바다로 향하고 있다. 어쩔 줄 모르겠어서 우왕좌왕 전방과 네비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나 그날 밤 엄청 울었어.”

그의 말에 죽고 싶어졌다. 차 안이라는 사실이 원통했다. 무릎이라도 꿇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는 횡설수설 회한 섞인 사죄를 늘어놓았다.

“미안해, 미안해! 진짜 너 기만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는데 네가 기가 팍 죽은 게 너무 안 되어 보여 가지고……. 그래도 그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다 내 이기심 때문에, 나는 그냥 네가 웃는 게 보고 싶어서…….”

“정현아? 정현아.”

“진짜 미안. 아, 어떡하냐. 차 돌릴까? 내가 멍청했다, 정말. 네 입장은 생각도 못 하고.”

눈덩이같이 불어난, 구차한 사과가 더 날아들기 전에 수민이 딱 잘라 말했다.

“아니야. 너무 행복해서. 그래서 밤새 펑펑 울었어.”

나는 또 고속도로 위에서 경적을 울릴 뻔했다.

“행복……?”

생각지도 못한 단어였다. 당연히 까일 거라 생각했는데. 너는 속도 없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튀어나왔다.

“내가 그걸 찾고 싶었던 건 네가 날 위해 써 준 마음을 알고 있어서였어. 말했잖아. 너 없으면 그냥 패물일 뿐이라니까. 반지 하나 내 손에 끼워 주려고 어떤 노력을 했을지 눈에 선하니까. 그 조그만 거에 얼마나 많은 마음이 들어가 있는지 아니까 찾고 싶었던 거야.”

수민이 예의 그 무심한 목소리로 조곤조곤 속삭였다. 언뜻 돌린 시선에서 붉게 물든 그의 귓불을 본 것 같기도 했다. 그는 반지를 꼼지락대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공장에선 찾았다는 안도감에 제대로 살펴보지도 못했는데 자꾸 보니까 닳은 흔적이 없잖아. 인위적인 스크래치나 보이지. 너무 귀엽다, 정현아. 디테일도 살려 주고.”

“스크래치, 알았어?”

나는 멍청하게도 고작 이런 소리나 내뱉었다.

“모를 리가 있나. 스크래치를 무슨 각인 수준으로 새겨 놨잖니.”

시니컬하게 내뱉은 수민이 창문에 머리를 기댔다.

“여튼 네가 만들어 온 반지란 걸 알자마자 눈물이 나더라. 내 눈물 비싼 거 알지?”

알지.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안 우는 차수민. 혼자 울음을 삭이는 일은 있어도 내 앞에선 결코 보여 주지 않는 그 눈물.

“처음 반지 받았던 순간이 생각났어. 나 위로해 보겠다고 이거 준비하면서 너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내가 뭐라고 이런 정성까지 쏟아 가며 공을 들였을까. 네 사랑은 얼마나 크길래 이 반지에 다 담기지 않는 걸까……. 내 집착에 어울려 줘서 고마워.”

“아냐. 나 거창하게 생각 안 했어. 나는 그냥 네가 좋아할 것 같아서…….”

“바로 그거라니까. 바보야.”

그는 피식 웃으며 내가 건네준 빈 껌 통을 다시 컵홀더에 끼웠다. 반지는 여전히 그의 손가락에서 빛나고 있었다.

“잃어버리면 뭐 어때. 다시 새로 맞추면 되지. 우리가 성장하는 것처럼, 우리 주변도 새로 채워 가면 되는 거니까. 그리고 네 말처럼 중요한 건 다른 거잖아. 이런 상징 따위가 아니라.”

그가 쿡, 내 뺨을 찔렀다.

“너. 네가 중요해, 나한텐.”

나는 완전히 굳어 버렸다. 손가락이 살짝 누르고 간 자리가 화르르 불타올랐다. 직진 코스라 다행이었다. 휘몰아친 그의 독백에 얼이 반쯤 나가 버렸다. 그런 내 모습을 보며 그가 무안한 듯 조수석에 몸을 파묻었다.

“야, 너 왜 이렇게 뜨겁냐. 데이겠네.”

“……차수민. 나 너한테 키스하고 싶어. 어쩌지?”

“어쩌긴. 휴게소까지 5km 남았다.”

아는지 모르는지 속 편한 소리였다. 나는 흘끔흘끔 그의 입술을 훔쳐보며 핸들을 꽉 붙잡았다. 억센 마디 위로 수민의 것과 똑 닮은 반지가 존재감을 내비쳤다.

“수민아, 지금 우리가 고속도로에 있는 것에 감사해. 안 그랬음 아까 차 세웠어.”

차수민은 지지 않았다.

“너야말로 운전대 잡고 있는 거 감사해. 당장이라도 달려들고 싶은 거 참는 중이니까. 집에서부터 홀딱 벗겨 놓고 괴롭혀 줄까도 했는데 오늘 안에는 도착해야 할 거 아니야.”

나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수민은 뻔뻔한 웃음을 지으며 입술을 핥았다. 그가 시치미를 떼며 라디오의 볼륨을 높였다.

“아. 얼른 바다 보고 싶다. 그러니까 빨리 좀 가지?”

일찍 도착하면 뭐 겸사겸사 키스도 좀 해 줄지도. 모르쇠 섞인 재촉이 더불어 따라왔다.

라디오에서는 어느 시절 그의 자취방에서 들었던 익숙한 재즈 선율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보컬의 낮고 느릿한 목소리가 차 안을 가득 메웠다. 향수를 자극하는 감미로운 음색이었다.

나는 액셀을 밟았다. 이렇게 된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우리를 태운 시간이 함께 저 앞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당신의 따까리 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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