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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4 복전생과 복학생 (14/15)

외전 4

복전생과 복학생

“야. 김정현. 너 왜 내 연락 다 씹었냐? 갑자기 휴학 때리더니 푸욱 쉬고 좋았나 보네. 얼굴 완전 폈다, 새끼야.”

박현식이 깐죽거리며 폰에 코를 처박고 있는 나를 건드렸다. 나는 과방의 푹신한 소파에 눕듯이 앉아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지만 그닥 반갑지도 않고. 지금은 메시지를 보내는 상대가 더 중요했다.

“뭐가 그렇게 좋았냐. 휴학할 거면 미리 얘기라도 하고 하든가. 어디 여행이라도 다녀왔냐?”

“아. 귀찮게 하지 마라.”

“생각해 보니까 너, 그때 이후로 연락 안 됐어. 그 뭐냐. 걔. 선수…… 제비! 맞아, 맞네! 걔 나이트 앞에서 얼쩡거리는 거 얘기해 준 다음부터 존나 연락 뚝 끊었어, 너. 와, 졸라 섭섭하다. 어떻게 한마디를 안 하냐. 몇 번을 전화해도 잘살고 있으니 걱정 마~ 고작 문자 하나 띡 날리고. 우리가 그 정도밖에 안 돼? 왜. 그때 설마 무슨 일 있었냐? 헐. 나 지금 엄청난 생각이 떠올랐는데……. 설마, 그쪽 사람들이랑 엮였다거나…… 그랬던 건 아니지?”

“아! 말 더럽게 많네!”

나는 귀에 피가 나도록 떠벌거리는 박현식을 무시한 채 간단한 길도 못 찾아 헤매는 누군가를 위해 열심히 자판을 눌러 댔다.

“여길 왜 못 찾지. 3층 올라오자마자 있다니까…….”

나는 겉옷을 챙겼다. 그냥 내가 나가서 데려오는 편이 빠를 것 같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박현식은 지치지도 않는지 여전히 입을 놀리고 있었다.

“야야, 김정현.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너 걔랑 아직 연락하는 건 아니지? 나 촉 좋다니까. 말했잖아. 걔한테선 냄새가 난다고.”

“네가 개야?”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들어. 위험한 냄새야. 뒷골목 어둠의 기운이랄까, 그런 게 아주 음산하게…….”

“안뇽?”

“으아아악!”

과방 문이 벌컥 열렸다. 갑작스러운 차수민의 등장에 한창 목소리 깔고 얘기하던 박현식이 발작을 일으키며 굴러떨어졌다.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지 몹시 볼썽사나운 꼴이었다.

“어, 어어??”

나는 바닥에 널브러진 박현식을 향해 악마처럼 웃고 있는 수민을 맞이했다. 언제 봐도 예쁜 눈동자가 오롯이 내게 향했다. 가슴이 찌르르 울리는 걸 애써 참아 냈다.

“왔네! 찾기 어려웠어?”

“응. 건물이 되게 구려 가지고. 뭔 미로인 줄 알았네. 경영대는 신식이라 삐까뻔쩍하거든.”

“아, 그러셔. 됐으니까 나가자. 강의실 알려 줄게.”

“잠깐, 잠깐!”

현식이 우리 둘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미드필드 위의 심판이라도 되는 것처럼 양팔로 차수민과 내 사이를 밀어 내더니 수민이에게 몸을 돌려 물었다.

“네가 왜 여기 들어와?”

“그럼 안 돼?”

수민의 물음에 단호한 대답이 돌아왔다.

“어. 여기 법학과 과방이거든.”

현식이 벽에 붙은 너덜너덜한 현수막을 가리켰다. ‘법학대학 00조 00항에 의거하여 타 전공생의 출입을 금합니다’라는 재미없는 문구가 적힌, 창피하기 짝이 없는 현수막이었다.

“뭐야, 저거. 뭔 지들끼리 지어낸 조항 가지고 이래라저래라야. 억울하면 너도 우리 과 들락날락하든가. 치사하게. 지가 학장이라도 되나, 어디서 유세람.”

“뭐, 뭐? 그래서 안 나갈 거…야?”

의기양양한 태도와 다르게 그의 목소리는 점점 기어 들어가고 있었다. 수민의 등장 전, 큰 소리로 촉을 자랑하던 모습과는 딴판이었다. 그의 말을 개무시한 수민이 보란 듯이 긴 소파에 몸을 뉘였다.

“어. 안 나가. 이제부터 나도 너네 과거든. 반 정도는.”

이해를 위해 도움을 필요로 하는 현식의 표정을 보며 나는 그가 더 불쌍해지기 전에 끼어들었다.

“야, 수민이 이번 학기부터 우리 과 복전해. 이왕 이렇게 된 거 서로 친하게 지…….”

“뭐?! 왜! 얘가 여길 왜 와?”

귀청 떨어져 나가게 소리를 지르는 통에 저절로 미간이 좁혀졌다. 언제부터 이렇게 싫어했냐.

그러나 그의 이러한 몸서리는 저 누워서도 사람을 내려다보는 인간에겐 전혀 타격이 되지 못했다. 지금도 봐, 재미있다는 듯이 히죽거리기나 하고. 막상 차수민은 박현식 이름 석 자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있을 텐데 전심을 다해 싫은 티를 내는 현식이가 불쌍하기까지 했다.

“그렇잖아! 취업도 안 되는 과를 왜?”

“왜냐니. 법 배워서 준법 좀 해 보려고 그런다.”

“준, 준법?”

“어. 착하게 살아보려고. 그러니 네가 좀 도와줘야 쓰겠다.”

수민이 얼어붙은 그를 향해 까딱까딱 손가락질해 보였다. 장난질하는 걸 보니 문밖에서 위험한 냄새가 난다는 둥 필터 없이 지껄이던 현식의 말을 주워들은 게 분명했다.

박현식이 촉이 좋긴 했다. 어느 정도 때려 맞춘 걸 보면. 내가 아무것도 모를 때에도 수민의 관상만 보고 뒷세계 얘기를 들먹이곤 했었으니까. 지금은 다 지난 일에 불과한 얘기가 되었다. 뒷세계 차기 새싹이 어엿한 횟집 사장이 되어 있단 걸 그는 알까.

현식은 어느새 창백해진 얼굴로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나는 일이 더 커지기 전에 사람 약 올리기에 열을 올리고 있는 수민의 손목을 붙잡고 과방을 나섰다.

“쟤 뭐야? 여기 애들 다 쟤 같은 건 아니지?”

“쟤가 현식이라고. 몇 번을 알려 줘야 하니.”

나는 그를 데리고 코딱지만 한 건물을 돌았다. 워낙 볼품없는 건물이라 오래 소개할 것도 없었다. 다만, 차수민이 곁에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허리를 아작 내는 일체식 책상과 영구적 검댕이 묻어 있는 화이트보드 칠판, 쥐가 떨어졌던 벌어진 천장 등이 신식 리모델링을 한 것처럼 아름답게 보였다. 앞으로 그와 같은 건물에 있을 걸 생각하니 자꾸 비죽거리며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좋아?”

헙. 티 났나. 손으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가리자 이번에는 그의 입매가 호선을 그린다. 나는 헤벌쭉해져 요구하듯이 물었다.

“너도 좋아?”

“아니. 아, 진짜 개후졌어. 이딴 데서 2년을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치가 떨려.”

그러나 말과는 다르게 하늘로 솟은 광대가 눈에 들어왔다. 아, 차수민. 진짜 솔직하지 못하다니까. 나는 입꼬리가 올라가다 못해 잇몸까지 드러날 지경이라 입술을 꾹 눌러야 했다.

요즘 차수민은 예전엔 잘만 갈무리하던 표정을 숨기지 않는다. 방법을 잊은 건지, 그럴 필요를 못 느껴서인지 모르겠지만 내게는 무척 기념비적인 변화로 느껴졌다. 그가 행복할 때 웃는 게 좋았다. 수민이의 상기된 얼굴과 반짝이는 눈에서 나는 우리 관계가 얼마나 발전하고 있는지 체감하곤 했다.

그를 휴게실에 앉혀 놓고 커피를 뽑아 오는데 띠롱, 문자 알림음이 울렸다.

야. 네 친군지 뭔지한테 전해라.

?

그딴 성질머리와 마음가짐으로는 우리 과에서 버틸 수 없을 거야. 법이라는 게 그딴 놈이 발 디딜 만큼 그렇게 호락호락하고 녹록한 세계가 아니거든.

박현식이었다. 얼굴 맞대고 있을 때는 제대로 말도 잘 못하더니 문파를 이끄는 무협지 단장이라도 되는 것처럼 위엄에 찬 메시지를 보내왔다. 공부도 더럽게 안 하는 놈이 전공에는 진심이라는 게 뭐라 말할 수 없을 만큼 한심했다. 가족 구성원 대부분이 법조계 일원이라는 점이 박현식의 유일한 자랑거리였다.

“아. 얘는 꼭 이상한 데 자부심이 있더라.”

“뭐야?”

“별거 아냐. 현식이가 친하게 지내재.”

시답지 않게 넘긴 박현식의 저주는 정말 시답지도 않게 현실이 되지 못하고 사라졌다. 차수민이 그에게만 본모습을 보인 탓이었다.

수민은 모범적인 복전생을 연기하며 교수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고 박현식, 이민혁을 제외한 전공생들과도 두루 잘 어울렸다. 겉보기에 흠잡을 곳 하나 없이 평범해 보였다. 잘 웃었고 말랑했다. 예전 같았으면 의자를 던지고도 남았을 일도 후환 없이 넘어갔다. 전에 없던 모습들이었다.

사실 수민이와 함께 수업을 듣는단 걸 알게 되었을 때 숨 막혀 죽을 것같이 거대한 행복과 더불어 나는 어느 정도 평범한 학교생활을 포기했었다. 내가 감수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이렇게 잘 지내리라곤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다.

스펙타클했던 작년 봄만 떠올려 봐도 차수민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가 멀쩡한 생활을 영위하리란 기대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울려 주는 척’ 정도가 그가 할 수 있는 최대치의 배려였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의 차수민이 어찌나 유한지 다른 사람이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들 정도였다.

어라……?

문득, 이 모든 게 수민의 연기가 아닐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곧잘 웃는 표정을 숨기지 않는 것도 그렇고 꽤 길게 정상적 범주의 사람을 흉내 내는 것도 그렇고. 애인한테 정상인을 흉내 낸다고 표현하니 좀 그렇긴 한데…… 내가 아는 차수민은 이렇게 긴 시간 동안 본성을 숨겨 가며 트러블 없이 지낸 적이 드물었다. 그만큼 놀라운 변화임이 분명했다.

“수민아.”

“응?”

“아니야…….”

“뭐야. 싱겁게.”

그가 픽 웃으며 책장을 넘겼다. 싱거운 건 그였다. 예전의 차수민이라면 내 턱주가리를 붙잡고 눈을 부라리며 끝까지 하려던 말을 내뱉게 했을 텐데. 너무 맥없이 넘어가 버려 서운하기까지 했다.

정말로, 정말로 변한 건가……? 멱살 잡고 원하는 걸 내줄 때까지 질질 끌고 다니던 앙큼한 모습은 이제 볼 수 없게 된 건가? 그를 훔쳐보며 생각에 잠겨 있는데 수민이 몸을 뒤척이며 기지개를 켰다.

나는 혹여나 그가 내 머릿속을 읽을까 침대 끝에 착 붙어 책을 읽는 그의 모습을 관찰했다. 변함없이 예쁜 눈매가 살짝 접혔다. 그에 따라 내 입도 살짝 벌어졌다. 요즘의 차수민은 잘 웃어서 무방비하게 있던 내 마음을 자주 난도질하곤 했다. 차수민의 변화 중 제일 마음에 드는 부분이었다.

“김정현. 갑자기 내외해?”

“어? 아, 아니.”

쓰읍. 그럼 이리 와. 그의 호령에 다시 데굴 굴러 조그만 품에 안겼다. 아니, 덩치상 내가 안았다는 표현이 더 나을 것 같다. 비누 향이 확 끼쳤다. 나는 좋은 냄새가 나는 차수민을 꼭 끌어안고 생각에 잠겼다. 정말 좀 유해진 것 같기도…….

유한 차수민. 내가 아는 유순한 차수민은 섹스할 때의 차수민이 전부였다. 거슬리는 인간은 무조건 할퀴어야 직성이 풀리는 놈이 벗겨 놓으면 무슨 말을 지껄여도 얼굴만 붉히고 순순히 넘어가 주곤 했다. 그래서 나는 순한 차수민이 보고 싶을 때면 그의 단추부터 풀었다. 반년 전까진 그랬던 것 같다.

나는 이제야 비로소 반년간의 행보를 돌아보았다.

나이트 쳐들어갔다 병원 신세를 지게 되었을 때 차수민은 평생 보여 줄 것 같지 않던 얼굴로 평생 하지 않을 것 같은 말을 속삭여 주었다. 나를 위해 손에 쥐었던 가장 소중한 것을 놓아 버렸고 나를 끼워 넣은 청사진을 들이밀며 달콤한 미래를 계획했다.

여행지마다 ‘너랑 와서 좀 괜찮네’라는 식의 말을 중얼거리며 빨간 귀를 보여 주었다. 그간 군말 없이 내게 맞춰 주었고 고분고분 내 말에 따라 주었다. 생각해 보니 발톱 세우는 차수민을 본 지 오래된 것 같다. 맵고 짤 것 같았던 그와의 연애는 달달하기만 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이번에는 내 얼굴이 빨개졌다. 이 자식 정말 변한 거 아니야?

생각해 보니 그랬다. 그간의 차수민은 독기가 쭉 빠져서, 쿡 찌르면 찌르는 대로 움푹 파이는 찹쌀떡 같은 면모를 보여 주었다. 사디스트 대마왕처럼 발톱 세우며 윽박지르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순한 고양이 한마리가 골골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걸 이제야 눈치채다니. 나는 집중하느라 한껏 인상 쓴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이 변화는 무엇의 징조일까. 깨닫고 나니 지금의 이 평화가 폭풍이 오기 전 맑은 날씨는 아닌지 걱정도 되었다. 내가… 몸을 사려야 하나? 갑자기 돌변하진 않겠지?

나야 곧잘 웃는 게 좋긴 한데. 혹시나, 억지로 맞춰 주고 있는 거라면…… 어쩌지? 그의 이 순진한 얼굴이 모래 위의 성처럼, 인고의 노력으로 지어진 거라면. 나를 위한 위태로운 모래성이라면.

나는 그의 머리카락에 턱을 비볐다. 간질간질한 감촉이 코끝에 닿았다.

“야. 갑자기 왜 이래?”

아무래도 좋아. 독기 찬 차수민이건 말랑한 차수민이건. 나는 차수민이면 다 좋아. 그러니까 애써 변하려고 하지 않아도 돼. 억지로 변하지 않아도 돼. 나는 속으로 속삭이며 그의 목에 코를 박고 마음껏 변함없는 살 내음을 호흡했다. 간지러워 죽으려 하는 차수민을 온몸으로 압박했다. 빠져나갈 수 없게.

그와 한 오피스텔에 살게 된 지도 벌써 두 달이 지나고 있었다. 집 안 어딜 가도 그의 체향을 맡을 수 있었다. 그럼 된 거 아닌가. 뭐든 간에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차수민, 그냥 너니까.

얼마 안 있어 나는 나 또한 변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선배. 요즘 잘 웃고 다니시네요.”

“내가?”

“네. 뭐 좋은 일 있으세요?”

좋은 일……. 그야 차수민과 같은 강의를 듣는 거? 눈떠서 눈 감을 때까지 차수민이 보이는 거? 내가 차려 준 요리를 먹고 맛있어하는 그의 모습을 보는 거, 우리 두 사람의 머리카락에 같은 샴푸 향이 나는 거, 그가 속삭이는 밀어를 들으며 잠에 드는 거……. 나열하자면 끝이 없었다.

지금까지 그렇게 티가 많이 났나? 어쩐지 부끄러워 열 오른 뺨을 두 손으로 감쌌다.

“선배 안 웃을 때 표정 엄청 무서운 거 아세요? 무슨 일인진 모르겠지만 쭉 웃고 다니세요. 우리 눈요기라도 하게.”

“나 원래 잘 웃는데…….”

“그렇긴 한데 요즘은 나사 빠진 사람처럼 헤벌레 하잖아요. 웃음의 빈도 자체가 달라. 모르죠? 언제 한번 거울 봐 봐요.”

후배에 이어 한수진 역시 같은 말을 했다.

“김정현. 요즘 방실방실 잘 웃고 다니네. 연애하냐?”

“아니. 내가 그렇게 헤죽거리고 다녀?”

“웃지 마. 짜증 나니까.”

나는 핸드폰에 얼굴을 비춰보았다. 멀쩡하게 눈만 끔뻑거리는 남자가 나타났다. 내가 보기엔 똑같은데……. 만나는 사람마다 날 행복에 겨워 죽으려는 사람 취급하고 있었다.

“뭐 됐고. 우리 축제 너, 이민혁, 그리고 네 고딩 동창. 이렇게 셋이 서빙 보기로 했으니까 그렇게 알아.”

“뭐? 아니 이런 걸 왜 통보로 해? 그리고 걔는 복수전공생이야. 어떤 과가 복전생한테 주점을 맡겨.”

내 말에 노트북을 두드리던 한수진이 번뜩 고개를 치켜들었다. 기세에 눌려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그럼 어떡하라고. 술맛 떨어지게 박현식을 세우리? 전 학년을 싸그리 긁어모아도 인재가 없는데 어떡해. 남의 손이라도 빌려 와야지.”

아무리 그래도 박현식을 세…울 수는… 없지. 호객하는 현식과 텅 빈 주점이 절로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러다 이내 중요한 의문에 도달했다.

“야. 근데 너 수민이한테 얘기는 한 거야?”

“아니?”

한수진은 다시 노트북에 시선을 처박고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취업 준비 기간 중 맡게 된 직책이라 그런지 한껏 예민해 보였다.

“네가 해야지. 네가.”

그리고 나는 돌덩이같이 무거운 임무를 짊어지게 되었다.

✲ ✲ ✲

“그래. 그럴게.”

수민의 입에서 떨어진 허락에 들고 있던 컵을 떨어뜨릴 뻔했다. 일말의 기대도 안 했는데 너무 순순히 그러겠다는 대답이 나와 버려서 오히려 당황한 쪽은 나였다.

“진짜……? 왜?”

“물어봐 놓고 왜냐니. 뭐 어려운 일도 아니고.”

차수민. 진짜 변했다. 뭐 잘못 먹은 거 아니야?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달라질 수가 있나. 파리하게 질린 내 표정을 잘못 이해했는지 오히려 차수민이 되물었다.

“왜? 싫어? 하지 말까. 안 했으면 좋겠어?”

“아, 아니 그럴 리가. 나야 고맙지.”

안 했으면 좋겠냐니. 수민이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지 상상도 못 했다. 나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말랑하다 못해 어디 구멍이라도 뚫렸는지 요즘 감당하기 어려운 다정스러운 말들이 그에게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내 앙칼진 차수민은 어디 간 걸까. 좋으면서 싫은 양가감정이 들었다.

“원래 김현식이 하기로 했었다고? 잘됐다. 새끼. 빈자리를 내가 딱 꿰차 줘야지.”

“김현식이 아니라 박현식.”

“그게 그거지. 하여튼 김정현, 나 일 잘하니까 걱정 마. 예전에 기술 몇 개 배워 놨거든. 보여 줄까?”

수민이는 정말 일을 잘했다. 그가 일본에서 배웠다던 고급 기술은 뒷골목에 위치한 간판 없는 고급 주점에서나 쓸 법한 것들이었다.

덕분에 나는 난생처음 대학 주점에서 맥주잔 피라미드를 쌓아 올리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법학과 주점에서 법이라곤 눈곱만큼도 준수하지 않을 것 같은 냄새가 풀풀 나는 뒷세계식 서빙이 펼쳐졌다.

“아, 좀 말려 봐요. 저 인간 저러다가 과일도 깎겠네.”

이민혁이 몰려드는 사람들을 밀어 내며 툴툴거렸다. 쇼가 펼쳐지고 있다는 소문이 도는지 주변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한수진이 만족스러워했으니 성공이라 볼 수 있겠지만 죽어나는 쪽은 나와 이민혁이었다. 우리는 술병을 박스째로 날랐다. 말 그대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형. 누가 형 불러요.”

넋이 나간 상태로 서빙을 하다가 민혁의 턱짓에 고개를 돌리니 수줍은 손길이 옷자락을 잡았다.

“저기요. 여자 친구 있어요?”

“네, 애인 있…… 아이고. 괜찮으세요?”

소주병을 궤짝으로 쌓아 두고 마시던 여자가 비틀거렸다. 반사적으로 팔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잠깐 그녀의 머리가 가슴에 닿았다 떨어졌다. 나는 정신 못 차리는 그녀를 일행에게 넘겨주었다.

“저 애인 있어요.”

단호하게 말하고 돌아서는데, 술을 말던 차수민과 딱 눈이 마주쳐 버렸다. 나는 궁지에 몰린 쥐새끼같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런 날 응시하던 그가 슬쩍 시선을 피했다.

타이밍이 야속했다. 서로 얼굴 볼 시간도 없을 정도로 바빠 죽겠더니 하필 지금. 오해하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차수민은 은근히 질투란 걸 했다. 아직까지도 주구장창 과팅 이야기를 꺼내는 걸 보면 눈치 없는 나라도 알 수 있었다. 나는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인 채 밀려드는 주문을 무시하고 그에게로 다가갔다.

“수민아. 있잖아…….”

계산 중이던 차수민이 고개를 들었다. 머뭇거리는 나를 보던 수민은 무슨 생각인지 살짝 미소를 띠었다. 변명을 내뱉기도 전에 그가 무언가를 말했다. 터져 나오는 음악 소리와 사람들의 고함에 시끄러웠지만 그의 목소리는 똑똑히 귓가로 흘러 들어왔다. 부드럽고 힘 있는 목소리였다.

‘정현아. 뭘 걱정하는 거야.’

그리고 그는 다시 몸을 돌려 손님들을 상대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이민혁이 내 옷깃을 잡아끌 때까지 나는 그 자리에 멈춘 듯이 멍하니 서 있었다. 그 이후는 잘 생각나지 않았다. 다만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일한 것 하나는 확실했다.

준비했던 술이 동났다. 다른 주점에 비해 현저히 빠른 속도였다. 차수민의 일당백 덕분이었다.

“됐어! 너희 다 가도 좋아. 즐겨. 축제.”

한껏 취한 한수진이 기분 좋게 등을 떠밀었다.

초대 가수들의 무대는 다 끝난 터라 광장엔 취한 채 펼쳐지는 버스킹만이 즐비했다. 셔츠 하나만 걸쳐도 될 만큼 따듯한 새벽이었다. 우리는 걸었다. 높게 뻗은 검은 하늘과 달리 내 머릿속은 복잡했다. 자꾸만 아까의 장면이 리플레이되었다.

‘정현아, 뭘 걱정하는 거야.’

단호하고 따듯한 한마디. 차수민의 숨 막히는 다정이 축제 당일까지 이어졌다. 나는 내심 그의 변화가 내 착각이길 바랐다.

내가 원하는 건 차수민이지, 보기 좋게 쌓아 올린 모래성 따위가 아니었다.

“야야, 나 어땠어? 꽤 괜찮았지? 나 혼자서 올린 매출만 얼마냐. 완전 떼거리로 몰려와서 난리 치는데 죽는 줄 알았네.”

조용한 나와 상반되게 차수민이 잔뜩 상기된 얼굴로 떠들었다.

“박현식 표정 봤어? 너, 네가 왜 거, 거기 있어…? 이러는데 세상 무너진 줄 알았다니까. 아, 진짜 더 비웃어 줬어야 하는데!”

신나서 깔깔대는 수민의 뒤로 한 커플이 지나갔다. 손을 꼭 붙잡고 어깨를 맞댄 다정한 모습이었다. 내 시선이 그들에게 꽂히자 차수민의 시선도 같은 곳을 향했다. 나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우리도 잡을까?”

대답 대신 손가락 사이로 꼬물대는 온기가 파고들었다. 한마디 했다고 일말의 주저 없이 손깍지를 끼어 온다. 맞댄 손바닥이 따듯했다. 어슴푸레한 새벽 공기를 뚫고 행인 몇 명이 지나갔지만 차수민은 개의치 않았다. 잡은 손에 꽉 힘을 줄 뿐이었다. 나는 그런 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김정현?”

귓가에 들려야 할 음성이 닿질 않자, 이번엔 그가 한마디도 꺼내지 못하고 있는 나를 올려다보았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그러지 마.”

앞뒤 잘라먹은 말에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억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네가… 먼저 잡자며…….”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아이씨. 나는 머리를 벅벅 긁다가 언젠가는 해야 했을 말을 내뱉었다.

“……나한테 맞춰 주려고 애쓰지 말라고.”

“으잉? 내가 언제?”

큰 눈을 깜빡이며 처음 듣는다는 식의 태도를 취하자 곤란해진 건 내 쪽이었다. 어쩌지. 하나하나 되짚어 줘야 하나.

“너 요즘 이상해졌어. 아니, 이상하진 않은데. 사실 좋아. 좋긴 좋은데.”

“알아듣게 천천히 얘기해 봐.”

수민이 고개를 살짝 모로 기울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도통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푹 고개를 숙였다가 쳐올렸다. 아니, 어쩌면 지금이 기회인 듯했다.

“으응. 요새 네가 좀 부드러워졌잖아.”

“내가?”

“응. 눈치 없는 내가 그렇게 느낄 정도면 확실한 거야. 방긋방긋 잘 웃고 다니고, 박현식이 빡치게 해도 웃어넘기고, 조별 과제 튄 새끼 연락처도 안 물어봤어. 아침은 네가 준비하겠다고 하지를 않나, 저녁 설거지는 내 당번인데 왜 네가 하는데? 그리고 저번에 내가 약속 까먹었을 때 화도 안 냈잖아. 비 쫄딱 맞으면서 기다렸으면서. 섹스할 때도 말이야, 장난처럼 말한 거 다 해 주고. 이러다 토끼 옷도 입어 주겠어, 어? 오늘만 해도 그래. 너 사람 많은 장소 싫어하잖아. 이깟 일 거절해도 되는데 냅다 수락하고, 고급 기술까지 보이고! 왜 이렇게 열심히 일했어?”

“정현아. 잠깐…….”

“아까도 말이야. 네 시점에서는 내가 여자분 안고 있는 것처럼 보였을 거야. 오해하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고. 그런데 그걸 그냥 웃어넘겨? 네가? 아, 말하다 보니 점점 무서워지려고 하네.”

“야. 잠깐만-”

그러나 나는 그가 끼어들 틈을 주지 않고 요 며칠 속에 담아 두었던 속마음을 와다다 꺼내 들었다.

다정한 차수민, 잘 웃는 차수민, 조곤조곤한 차수민. 솔직히 말하면, 좋았다. 가시 눕힌 고슴도치를 귀여워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그건 차수민이 아니었다. 내가 아는 차수민은 이게 가능한 놈이 아니었다. 순한 양 같은 그의 모습에 헤벌쭉하다가도 그가 이 모양새를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부던히 노력하고 애쓰고 있을지 생각하면 숨이 턱 막혔다.

분명 나 때문이었다. 몸을 섞을 때마다 내 다정함을 좋아한다고 귓가에 달콤하게 속삭이던 그였다. 차수민의 말대로라면 나는 다정하기 짝이 없는 배려의 화신이자 누구나 기분 좋게 만드는, 고깃집 박하사탕 같은 존재였다.

‘뭐, 박… 박하사탕?’

‘응. 별거 아닌 거 같아 보이는데 받으면 기분 좋잖아. 네가 그래. 엄청난 건 없어도 옆에 있으면 기분 좋아져.’

그리고 본인은 휘황찬란한 박스에 과대 포장된 시큼한 레몬 사탕 한 알에 비유했다. 심지어 ‘분명 내 사탕 먹는 놈들은 혀에서 피 날걸’ 하고 시니컬하게 덧붙이기도 했다. 그땐 농담인 줄 알고 웃어넘겼는데 자꾸만 변해 가는 그를 보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분명 그 잘못된 인식으로부터 자괴감을 얻었을 것이다.

나는 그의 어깨를 꾹 붙잡고 시선을 맞췄다.

“네가 자꾸 나 배려한답시고 성… 성질머리 죽이고 있는 것 같아서 신경 쓰여. 나 때문에 이러는 거 같아서. 원랜 안 그랬잖아. 걱정돼. 너는 너대로 매력 있는 사람이야. 뭐, 조금은 둥글어질 필요가 있긴 했지만, 그건 차차 생각할 문제고. 나는 네가 어떤 모습이든 괜찮아. 차수민이면 다 괜찮다고. 이제는 싸가지 없던 네 모습이 그리울 정도야.”

그동안 말하기도 뭐해서 꽁꽁 숨기고 있던 마음을 얘기하니 조금은 가벼워진 것 같았다. 나는 혹여나 그가 상처받았을까 걱정되어 차수민의 얼굴을 살폈다. 맞춰 보겠다고 애써 노력하는 중이었는데 내가 초를 친 건 아닌가, 약간의 후회도 있었다. 그러나 차수민은 웃고 있었다.

“얘기 다 했어?”

“응.”

“와. 내가 그동안 얼마나 망나니처럼 굴었으면 그깟 친절 좀 했다고 김정현이 이런 착각을 하게 만드네. 아, 차수민. 진짜 개쓰레기였구나. 내 살아온 방식에 반성하게 된다.”

실실 웃던 차수민은 북받쳐 오르는 감정이 감당되지 않는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꺼이꺼이 웃기 시작했다.

“…웃겨?”

“어. 웃겨. 끄흐… 웃어서 미안. 그리고 걱정하게 만들어서 미안.”

“이것 봐! 지금도! 사과를 왜 해?”

“아니, 정현아. 내가 막 죽을 둥 살 둥 온 힘을 다하면서 성깔 누르고 있지는 않거든? 나도 사회적 동물이거든……? 날 정말 뭐로 본 거야. 아냐, 내 잘못이다. 내가 워낙에 지랄 맞았어야지.”

수민은 절레절레 고개를 젓더니 내 손을 붙잡고 벤치로 끌고 갔다. 금방이라도 꺼질 것처럼 깜빡이는 상태 안 좋은 가로등 밑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미리 마련해 둔 것처럼 그곳만 자리가 비어 있었다. 주변에 쪽쪽 거리는 커플이 넘쳐났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나 좀 변한 거 같아?”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안 들어?”

당연히 마음에 들긴 하지. 근데 그럴 필요 없다고. 뭐 하러 고생해. 난 다 좋은데.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말을 고르고 있자 그가 불쑥 내뱉었다.

“맞아. 너 때문이야.”

“역시 내가…….”

“너랑 있으니까 자연스럽게 그렇게 돼. 바보처럼 실실 웃음이 나고 누가 뭐라 해도 화도 안나. 네 주변의 모든 것들이 예뻐 보이는데 너는 오죽하겠냐? 약속 까짓거 백번 천번 늦어도, 밤새 찡찡거려도 괜찮은데. 그래도 네가 예쁜데 어떡해.”

“예, 예쁘다ㄱ…….”

“어. 너 때문이잖아. 네가 이렇게 만들었어. 너랑 닮아 가는 게 분명해. 예전의 깡패왕 차씨가 보고 싶으시다면 지금껏 내게 했던 것의 반대로 해 봐. 철철 넘치던 애정 표현 같은 거 뚝 끊고 다정한 말 대신 다른 얘길 해 봐.”

생각지도 못했던 말에 괜히 툭툭 땅을 파던 다리가 멈추어 버렸다. 올곧은 시선이 오갔다.

차수민은 가끔씩 이렇게 갑작스러운 솔직함으로 나를 당황시키곤 했다. 장난스레 던지는 내 솔직함에는 어쩔 줄 몰라 귓불을 붉히면서 본인은 불도저처럼 전진한다. 나는 목멘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게… 되겠냐…….”

상상이라도 네게 모진 말 하긴 싫어. 내 말에 생글거리던 차수민이 잡은 손을 본인 쪽으로 끌어당겼다. 슬쩍 주위를 살피더니 재빠르게 손등에 쪽, 입을 맞추곤 아무 일 없었다는 표정을 했다. 빨개진 내 뺨을 보며 그가 말했다.

“사실 너랑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의식하는 부분도 있긴 해. 너만 퍼 주고 너만 다감하면 불공평하잖아. 연애는 뭐 혼자 하냐? 나만 나쁜 놈 만들고 싶어?”

“그치만…….”

“너, 내가 죽도록 집착했으면 좋겠어? 여기서 애들 대가리 깨부수고 김정현 건들지 마악!! 고래고래 소리 질러 가며 깽판 놓길 원해? 원하면 기깔나게 잘할 수 있어. 말만 해.”

“아니?? 그럴 리가 있겠냐? 왜 이렇게 예시가 극단적이야.”

“내가 미친놈도 아니고 남들은 너랑 나랑 뭔 관계인지도 모르는데 너 좀 터치했다고 깽판 칠 수는 없잖아. 나야 막사는 놈이지만 너 사회적으로 매장당하면 어떡해. 김졍현, 나 먹여 살려야지.”

차수민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다니.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너무나 낯설어 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그만하라고 매달리고 싶었다. 뭐, 내가 너무 좋아서 닮아 간다는데 말릴 수도 없고. 마음과 다르게 히죽 솟는 웃음을 참았다.

“……물론 예전이라면 그랬을지도 몰라. 누군가의 대가리를 깼을지도. 근데 지금은 다르잖아. 확신이 있으니까.”

“확신?”

“응. 네가 줬잖아, 확신. 날 사랑한다고 온몸으로 말하고 있잖아. 티 엄청 나거든.”

순간 깜빡깜빡 줄곧 불안하게 치직거리던 가로등이 터졌다. 때마침 나가 버린 전등이 불러온 한 칸의 어둠은 우리가 충분히 입술을 맞댈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 주었다.

나는 그에게 달려들다시피 와락 입을 맞추었다. 온몸의 세포가 어서 빨리 차수민의 점막을 핥아 줘야 한다고 재촉하고 있었다. 조급이 목구멍까지 치밀었다. 긴 혀로 그의 곳곳을 쓰다듬었다. 달달한 맛이 났다.

차수민과의 연애가 그랬다. 초조하고 달다. 곁에 있으면서 멋대로 훌쩍 성장해 버리고 달콤한 고백을 대뜸 속삭인다. 남겨진 내가 얼마나 안달이 날지 전혀 모르면서 순진한 얼굴로 덜컥 심장을 붙잡고 쥐 흔든다.

근처에서 인기척이 느껴질 때까지 우리는 서로를 갖지 못해 안달 난 사람처럼 서로의 숨을 빼앗기에 여념이 없었다. 아쉽게 입술을 떼어 내자 그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난 아마도 죽을 때까지 너한테 집착할 거야. 그러니까 계속 줘. 확신. 누구 대가리 깨지는 꼴 보기 싫으면.”

확인이라도 받는 듯한 어조에 나는 다시 키스하고자 하는 욕망을 참아야 했다. 어둠 속에서 고요하게 빛나는 두 눈을 바라보며 겨우 속삭일 수 있었다.

“응. 그럴게. 걱정시키는 일 없도록 할게. 절대.”

뺨에 촉촉한 무언가가 닿았다 떨어지는가 싶더니, 그게 뭔지 알아차리기도 전에 수민이 기지개를 켰다.

고여 있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그가 칭얼거렸다.

“아, 그러고 보니 팔기만 했지 우리는 정작 한 방울도 못 마셨네. 이 짓거리를 내일도 해야 한다니.”

“내일 쨀래?”

“김정현, 미쳤구나. 네 동창이 가만 안 있을걸.”

수민이 피식 웃으며 벤치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나는 점퍼를 벗어 그의 무릎 위에 얹어 주었다.

“잠시만 기다려 봐.”

그리고 나는 곧 두 손에 병맥주 두 개를 쥐고 나타났다. 차수민의 얼굴이 환해졌다.

“이것도 가져왔어.”

내가 내민 것은 막대 폭죽 세트였다. 동아리 부스에 남은 것이 굴러다니기에 냉큼 들고 왔다.

“근데 이거 여기서 해도 돼?”

차수민이 좋아 죽으려는 얼굴로 라이터를 꺼내며 물었다. 안 될걸. 나는 말하며 불을 붙였다. 그치만 네가 좋아하는데 알 바야? 당연하다는 듯 튀어나오는 사고에 내가 놀랐다. 아무래도 나는 너를 닮아 가나 봐.

우리는 타닥타닥 별사탕처럼 튀겨지는 막대를 들고 푸르슴한 그을음을 누비고 다녔다. 타오르는 폭죽 주변으로 빛이 퍼졌다.

어둠을 방패 삼아 진한 스킨십을 하고 있던 커플들이 질색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 꼴이 재밌어서 일부러 가로등 없는 곳만 골라 다녔다. 두 남녀를 몰아내며 차수민은 뼛속까지 행복한 얼굴을 했다. 아직 내가 아는 싹퉁바가지 차수민이 남아 있구나, 하는 안도감에 나는 그를 말릴 생각은 못 하고 함께 난장판을 피워 댔다.

“이러니까 부산 갔던 거 생각난다.”

“부산 기억나? 벌써 몇 년 전이지.”

“잊을 리가 있나. 그때 이런 거라도 해 봤으면 좋았을 텐데. 발바닥에 땀 나게 뛰기만 했잖아.”

내 말에 별 조각을 뿜어내는 빛 무덤에 시선을 박고 있던 수민이 고개를 돌렸다. 그가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치. 좀… 하드코어 하긴 했지. 그땐… 그, 미안했다.”

“미안하라고 한 얘기 아닌데? 지금 와서 떠올리니 재밌었던 것 같기도 하다. 조폭 투어, 그 누가 경험해 보겠니.”

그러자 차수민이 고개를 모로 돌렸다. 워낙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해 집중해 들어야 했다.

“나는 네가 그렇게라도 날 기억해 줬으면 했어. 긴긴 시간 동안 나를 잊을까 봐 무서웠거든.”

차수민이 내게서 잊힐까 무서웠다고…….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잊으려고 애썼지만 다시 네 얼굴을 마주한 순간, 억눌렀던 기억의 파편이 나를 덮치는 것 같았다. 네 소악마 같은 웃음과 손때 묻은 게임기, 깨끗한 셔츠에서 나던 비누 향과 변화가 두려웠던 겁쟁이 소년. 찌질하기 짝이 없던 김정현을 바꾸어 놓고 홀연히 사라진 뒷모습.

결국 나는 결코 너를 잊을 수 없었나 봐. 나는 밀려드는 긴 감정을 나열하는 대신 그의 보들보들한 머리칼을 잔뜩 헝클어뜨리는 것으로 대신했다.

“생각해 보니 우리 그때 국밥도 못 먹고 왔네. 다음에 또 가자. 또 가서, 맛있는 것도 먹고 바다도 보고.”

긴긴 시간 동안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자.

“응. 그러자.”

차수민이 말갛게 웃었다.

나는 마지막 남은 폭죽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그에게 넘겨주며 물었다.

“나 다시 보기 전까지, 6년간 뭐 하고 지냈어?”

“네 생각.”

겸사겸사 주변 조직도 좀 조지고. 그가 시니컬하게 덧붙였다.

“앞으론 절대 말없이 안 떠나. 6년간 만나지도 못하고 생각만 하는 게 얼마나 끔찍했는지 알아? 괜히 깔짝댔다가 네 모가지 날아갈까 봐 얼굴도 제대로 못 봤어.”

“보긴 봤었어?”

우리 집에 찾아왔었어? 내 질문에 차수민은 살짝 시선을 피했다.

“어. 스토커처럼 흘깃거리고 다녔지. …보고 싶어서.”

나는 빛에 반사되어 노랗게 빛나는 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작은 입술에서 자꾸만 예쁜 말이 흘러나온다. 바닥에 뚝뚝 떨어지는 그의 애정이 아까워 더 흘러나오기 전에 나는 벌어진 입술을 막기로 했다.

“아…….”

코끝이 부딪히고 따듯한 숨결이 얽혔다. 눈을 감고 수민의 온기를 느꼈다. 그가 수줍게 간직하고 있던 비틀린 소망이 느껴졌다. 나는 위로하듯 그것을 먹어 치웠다.

숨이 가빠질 무렵 가벼운 손길이 어깨를 두드렸다.

“하아. 야. 누가 보면 어쩌려고 그래.”

답지 않은 걱정에 웃음이 났다.

“정말 너 나 닮아 가는구나. 그런 것도 신경 쓰고. 괜찮아. 여기 누가 있다고 그…….”

말을 맺기도 전에 부스럭 소리가 들렸다. 수민이 반사적으로 반쯤 타들어 간 폭죽을 치켜들었다. 그 희미한 불빛 사이로 두 사람의 형태가 보였다.

“어……?”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아까 미처 몰아내지 못한 커플이 있을 거라 생각했던 그곳엔 우리가 잘 아는 두 사람이 있었다.

“시발.”

차수민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잔뜩 취한 한수진은 이민혁을 벽으로 몰아붙인 채 잡아 삼킬 듯이 키스하고 있었다. 상상해 본 적도 없는 일이 펼쳐지고 있었다. 나는 잠깐 내 손에 들려 있는 맥주병의 무게를 가늠했다. 반도 채 마시지 않았는데, 헛것이 보일 리가…….

갑자기 비친 불빛에 멍하니 두 눈을 깜빡이던 이민혁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한수진에게 얼마나 쥐어뜯긴 건지 꼴이 이미 만신창이었다. 읍, 이민혁이 외마디 신음을 내뱉었지만 한수진은 까치집이 된 머리채를 놓아 줄 생각 따위 없어 보였다.

지금처럼 일방적으로 행해지는 키스는 키스라기보다 고문에 가까워 보였다. 술에 꼴은 한수진에게 결박당한 이민혁이 살려 달라는 듯 열심히 눈알을 굴렸다. 그 광기 어린 광경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두 눈을 의심하며 숨만 몰아쉬는 것밖에 없었다.

홀린 듯이 시선을 떼지 못하던 나는 이내 퍼뜩 정신을 차렸다. 봐서는 안 될 것을 봐 버린 기분이었다.

“저기, 그, 나 가스 불을 안 끄고 온 것 같아…….”

내 말에 피차 당황한 건 마찬가지였는지, 흠칫 몸을 떨며 차수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어. 그럼 가야지. 얼른…… 가야지.”

우리는 종종걸음으로 격렬한 현장을 빠르게 빠져나갔다. 차수민의 손에는 어느새 끝까지 타 버린 폭죽이 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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