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
첫인상
그동안 못했던 것들을 해치우기 위해 우리는 방방곡곡을 들쑤시고 다녔다.
김정현은 촌놈이었다. 비행기 탄 기억은 제주도가 전부라 했다. 너네 가족 파푸아뉴기니 보내줄 때 같이 보내 줄 걸 그랬나. 뭐, 됐다. 나랑 또 같이 가면 되는 일. 어디 갈까? 물으니 따듯한 곳이란 대답이 돌아왔다. 그럼 망고나 실컷 먹으러 가자. 태국으로 출발했다.
어때, 정현아. 좋아? 어. 너무 좋아. 최고! 따듯하다 못해 작열하는 태양 아래에서 김정현이 해처럼 화사하게 웃었다. 내가… 이러려고 돈을 벌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친김에 베트남 찍고 쌀국수까지 배 터지게 먹이고 돌아왔다. 미안해 죽으려는 걸 한마디로 일갈했다. 공짜 아니거든? 갚을 거잖아, 너.
김정현은 몸이 좋았다. 사실 많이 좋았다. 온종일 맞대고 있어도 질리지가 않았다. 아니, 내가 네게 질린 적이 있던가. 김정현의 따듯한 몸이 가슴을 덮을 때면 발끝에서부터 흥분이 몰려왔다. 그가 입술을 열어 사랑을 고백할 때면 금방이라도 녹아내릴 것처럼 눈가가 아릿해졌다.
우리는 밤낮으로 쪽쪽거렸다. 사랑은 아무리 나눠도 지나치지 않았다. 나는 항상 김정현으로 채워지고 싶었다. 이러다 네가 내게 질리면 어쩌지. 가끔씩 울컥하고 불안감이 치솟았지만 햇살처럼 파고드는 너를 느낄 때면 쓸데없는 기우란 걸 스스로 깨닫곤 했다.
다정하기 짝이 없는 김정현. 너는 언제나 그 자리에서 묵묵히 날 기다려 줄 것만 같아.
정말이지 차수민답지 않은 생각이었다. 나는 사람을 믿은 적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너는 믿고 싶어져. 믿게 돼. 약속했잖아. 피날레까지 함께하기로.
김정현은 약속을 어길 사람이 아니었다. 내가 그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한국에 돌아오고 난 뒤에는 차를 하나 렌트했다. 운전대는 김정현이 잡았다. 본인이 모실 테니 나한테는 숨이나 잘 쉬고 있으라고 했다. 핸들을 돌리는 모습마저 섹시하다면 내가 중증인 거겠지.
우리는 전국 팔도를 쏘다녔다. 아, 부산은 빼고. 우리의(나의) 흑역사가 묻혀 있는 그곳은 우리가 좀 더 단단해지면 방문하기로 했다. 시간은 많고 함께 갈 곳은 넘치니.
김정현은 의외로 아는 게 많았다. 수많은 명소에서 맛집만 골라내는 센스를 가지고 있었다.
“아는 게 아니라 찾아본 거야. 너 잘 때.”
그가 알이 흘러넘치는 게장을 쓱쓱 발라 내 밥그릇에 얹어 주었다.
“맛있는 것만 먹이고 싶어서. 너 회만 먹고 살았잖아.”
아니거든? 누굴 수족관에 갇힌 백설 공주 취급해. 쏘아붙였지만 기분은 좋았다. 반찬을 얹어 주는 손길이 퍽 다정했다. 그 이후로도 김정현은 제 밥그릇이나 챙길 것이지 어미 새라도 된 것처럼 자꾸만 내 입에 무언가를 넣어 주려고 했다.
겁박을 내보이지 않았음에도 조건 없이 날아드는 다정. 내겐 익숙지 않은 것이었으나 김정현이 곧 익숙하게 만들어 주리란 걸 알 수 있었다.
정현이는 그런 애였다. 구멍 난 치즈처럼 결핍으로 숭숭 뚫린 나를 넘쳐흐르는 다정으로 숨 쉬기 어렵게 만들었다. 눈치가 없는 게 유일한 큰 흠이긴 해. 일방적인 줄만 알았던 감정에 보상이 내려졌을 때의 그 기분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죽어도 알 수 없을 것이다.
나도, 흘러야지. 네게 부족한 것이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지만… 그래도. 나도 흘러서 너를 숨 쉬기 어려운 행복 속으로 잠기게 만들어야지.
내가 흘릴 수 있는 건, 일단 돈이었다. 펑펑 썼다. 펑펑. 이민혁의 잔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그 새끼 번호는 차단한 지 오래였다.
먹고 마시고 하고. 현실은 제쳐 두고 오로지 서로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시간을 보내니 어느덧 계절이 바뀌어 있었다.
봄. 우리가 만났던 그 계절. 그 말은 곧 개강일이 코앞으로 다가왔다는 걸 뜻하기도 했다.
“아악. 싫어!”
“열심히 해야 로스쿨 들어갈 거 아냐. 너 나랑 한 계약 잊었어?”
“아아악! 더 싫어!”
김정현이 큰 덩치로 침대 위를 데굴데굴 굴렀다. 그러다 벌떡 일어나 내 손목을 붙잡았다. 강한 힘이 날 끌어당겨 넓은 가슴팍에 이마를 박게 했다. 그가 날 꼭 품에 안고 속삭였다.
“너랑 계속 이렇게 있고 싶다.”
“…….”
“왜 조용해. 너는 아니야?”
“나, 나도 당연히.”
김정현의 재촉에 나도 모르게 얼빠진 목소리를 냈다. 그제야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풀어 준다. 가만 보면 저 자식 내가 지한테 홀려 잠깐씩 멍청해지는 순간을 즐기는 것 같았다. 원하는 대로 순순히 당해 주지 않으려다가도 김정현의 능글맞은 웃음을 보면 의지가 모래바람처럼 흩날리곤 했다.
“호캉스도 괜찮네…….”
뜨겁게 시작한 여행의 마지막 행선지가 호텔이라니 수미상관이 완벽하기 따로 없었다.
우리는 푹신한 시트에 누워 뒹굴다가 배가 고파지면 룸서비스를 시키고 기력을 보충하며 티비를 봤다. 지갑이 얇아지는 게 느껴졌지만, 시발 알 바야? 정현이가 노후는 책임져 주겠지.
노을이 한 겹씩 쌓이고 있었다. 나는 테라스로 걸어 나왔다. 객실에 딸린 야외 풀장이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내 뒷모습을 보고 강아지처럼 김정현이 졸졸 따라 나왔다. 정현아. 너 졸라 귀여워. 알아?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었지만 저 위에 달려 있는 터라 마음으로 대신했다. 대신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비벼 댔다.
“들어가 있어. 나 한 대만 피우고…….”
주머니를 뒤적거려 건져 낸 담뱃갑은 텅 비어 있었다. 하아. 실망감에 고개를 숙이자 정현이 쪼르르 달려왔다.
“왜, 없어? 으이구. 얘기를 하지! 잠깐만.”
김정현이 객실 안으로 후다닥 뛰어 들어갔다. 뭐 하나 눈길로 좇아가 보니 열심히 커다란 캐리어를 분해 중이었다. 잔뜩 들어 있던 옷가지와 잡동사니를 꺼내 바닥에 있던 파우치를 발굴해 냈다. 그 안에서 또 작은 틴 케이스를 꺼내 들더니 환하게 웃는다. 뭐길래 꽁꽁 숨겨 놨지.
“자.”
그가 건넨 틴케이스 안에는 담배 두 개비와 명함 한 장이 들어 있었다.
나는 그게 뭔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작년 어느 날, 그에게 담배 심부름을 시키다 하사한 두 개비의 심술. 그리고 애지중지 받아 간 내 새 명함. 갑작스럽게 찾아든 날것의 마음이었다.
별것도 아닌 것들을 왜 이렇게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어. 나는 눈가가 젖어 드는 걸 느끼고 시선을 모로 돌렸다.
“피워도 돼. 아, 참. 라이터 없지. 갖다줄까?”
“……딱 하나만 피울 거야. 하나는 킵. 네가 가지고 있어 줘.”
내 얼굴을 살피던 김정현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보관해 줘.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소중하게 대해 줘. 아무것도 아닌 나를 뭐라도 된 것처럼 소중하게.
정현아. 아무래도 난 네가 너무 좋은 것 같아. 어떡하냐. 너는 큰일 났어. 내가 절대 안 놔줄 거거든.
✲ ✲ ✲
“윽.”
젖은 손이 미끄러졌다. 뒤로 꺾이려는 허리를 정현이 잽싸게 받쳐 주었다.
“아파?”
“아니…….”
정현의 뱃가죽에 닿아 있는 내 것을 느끼며 나는 다시 천천히 움직였다. 결합부가 뻐근했다. 그의 커다란 손이 등허리를 감싸고 있었다. 그 온기를 느끼며 호흡했다.
노을이 잦아든 풀장은 푸른 어둠이 내려앉았다. 선선한 봄의 밤공기가 땀에 젖은 머리를 훑었다. 쇄골 아래로 찰랑이는 따듯한 물이 조명에 의해 에메랄드처럼 신비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물그림자가 아름다운 정현의 얼굴 위로 일렁거렸다. 젖은 턱선이 섹시했다.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내밀어 떨어지는 물방울을 받아먹었다. 읏, 정현이 얇게 떨었다.
“왜. 쌀 것 같아?”
“으……. 아직. 아직 멀었어.”
도발적인 내 물음에 자존심을 세우며 날 내려다본다. 그 꼴 같지도 않은 오만한 눈빛에 내가 쌀 뻔했다. 평소엔 빌빌거리면서 몸을 맞출 땐 꼭 우위에 서려고 하는데 그게 참 꼴렸다.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버릇처럼 손을 뻗었다. 재떨이 위에 걸쳐 있는 장초를 집어 들고 이빨로 씹어 대자 물끄러미 날 바라보는 김정현과 눈이 마주쳤다.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미안. 나도 모르게.”
“아냐. 피워도 돼.”
팔을 뒤로 뻗어 라이터를 찾아낸 그가 내 입가에 손을 가져와 불을 붙여 주었다. 나는 그의 소중한 한 개비를 음미하며 골반을 움직였다. 죽인다, 이거. 윗입과 아랫입 모두 물고 있자니 흥분이 갑절로 퍼져 절로 눈이 풀렸다. 흐느적거리며 바다를 유영하는 해파리가 된 것 같았다. 김정현은 그런 내 꼴을 조용히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갈색 눈동자에서 들끓는 욕망을 읽었다. 이럴 때 보면 내가 아는 김정현이 아닌 것 같다.
항시 찌질하고 다정한 김정현. 그러나 섹스할 때만큼은 짐승 같은 면모를 얼핏 드러내곤 했다. 아픈지 불편한지 꼬박꼬박 묻다가도 본인 삘이 꽂히면 죽어라 쑤셔 댔다. 다음 날 끙끙거리는 날 보며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꽤 귀여웠다. 미안해. 다시는 안 그럴게. 뭐라 한 적도 없는데 머리 박고 사과를 해 댔다.
지금도 봐. 호흡을 고르며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충동이 잦아들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를 더 자극해 볼까 하다가 어디까지 버티는지 궁금해졌다. 이 기회에 한번 네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해 볼까 봐.
움직임을 멈춘 채 한 모금 깊게 빨아들였다. 최대한 나른한 표정을 지었다. 김정현의 시선이 날아 꽂혔다.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같이 번득대던 눈동자가 퍼뜩 정신이라도 차리듯 모로 굴러갔다. 욕구와 인내 사이에서 어쩔 줄 몰라 하던 그가 목 졸린 목소리를 냈다.
“잠, 잠깐! 나 궁금한 거 있어.”
나는 대답 대신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가 억지로 웃는 얼굴을 하며 물었다.
“그, 그… 생각나? 우리 고딩 때. 네, 네가 키스 가르쳐 준답시고 나 벗겨 먹을 때.”
“내가 언제 벗겨 먹었어. 순진하게 속아 넘어간 놈이 잘못이지.”
“어쨌든. 그때 너 무슨 옆집 누나가 동정을 가져갔고 어쩌고 했었잖아. 그거, 진짜였어……?”
와장창 산통을 깨부수는 말에 절로 미간이 좁아졌다.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어?”
김정현은 대답 대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살살 풀려 가는 눈이 그가 정신을 붙잡기 위해 용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 주었다. 그렇군. 나는 설핏 미소 지었다.
“그냥, 갑자, 기 생각난… 건데. 사실 상관없어. 그렇게 궁금하진 않, 않으니까. 하아.”
“거어짓말.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잖아? 다 구라야. 옆집 누나는 개뿔. 우리 집 반경 500m 내에는 풀 한 포기 안 자랐어.”
그 말을 듣자 차오르는 욕정으로 녹아내리던 그가 상기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기쁨이 묻어 나오는 얼굴이었다. 귀여워 죽겠네. 근데, 너 이럴 정신 있어?
나는 모르는 척 ‘자, 그럼 하던 일을 계속해 볼까’ 말하며 그의 귀를 잘근잘근 깨물었다. 이를 악물었는지 그의 턱 근육이 불룩 솟은 게 느껴졌다. 그럴수록 더 은근하게 귓바퀴를 핥아 대자 김정현의 몸이 벌벌 떨렸다. 그의 긴 목에 이빨을 박아 넣기 바로 직전, 정현이 내 어깨를 잡아챘다.
“마, 맞다. 너 말 안 했잖아.”
“뭐야, 또?”
애쓴다, 애써. 그냥 박지 뭘 참고 그래. 원치 않는 배려심인 거 아니? 나는 딱한 눈초리로 사정감 참아 내며 머리를 굴리는 정현을 지켜보았다. 주먹을 꽉 쥔 채 넘실거리는 욕망을 억누르던 그가 입술을 떨며 외쳤다.
“ㄴ…나 언제부터 좋아했는지!”
엥.
갑자기 튀어나온 맥락 없는 질문에 담뱃재를 떨어뜨릴 뻔했다. 지금 완전히 그건데. 어떻게든 식혀 보려고 생각나는 말 아무렇게 내뱉는 거. 재떨이에 툭툭 털고 다시 한 모금 빨았다. 귀엽다. 정말.
“그게… 왜 궁금한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궁금한 게 많아?”
“그때도 말 안 하고 빙빙 돌렸잖아. 씨. 말한다고 닳는 것도 아니고. 그냥 얘기해 주면 어디가 덧나냐?”
“그때? 아아. 작년에 우리 집 온천탕에서 섹스했을 때.”
그때도 수중 섹스였지. 생각해 보니 아무 데서나 잘했네, 우리. 정현이는 순진한 척하는 변태다. 장소를 안 가리고 발정해 대는 게 변태라는 증거다.
나는 찰방거리는 물결을 건져 내어 김정현의 날렵한 턱선에 물줄기를 남겼다. 맞아. 그때도 물었다. 언제부터 본인에게 마음이 있었냐고 귓가에 속삭이면서 퍽퍽 잘도 박아 댔었다.
“딴생각하지 말고.”
그가 한 손으로 내 뺨을 잡아 시선을 맞추었다. 막상 내뱉고 나니 정말로 궁금해진 모양이었다.
“으음…….”
언제부터냐고?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지는 내가 물처럼 스며들어 있었다고 했으면서 나한텐 정확한 시기를 묻는 이유가 뭔데. 나 역시 너처럼…….
아. 생각났다.
나는 나른하게 퍼지는 니코틴과 내 품속에서 부피를 키워 가는 그의 것을 느끼며 회상에 잠겼다. 손을 뻗으면 잡힐 것 같은 우리의 열일곱 봄. 그때였다. 내가 너를 처음 본 것은.
“오. 새삥~ 너 발사이즈 몇이더라? 나랑 같았던 것 같은데, 맞지? 잘됐다. 야. 나 하루만 빌리자.”
들창코가 안경의 운동화를 빼앗아 들었다. 입학식 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서열질. 여기도 똑같구나. 벌써부터 재미없다. 차수민은 게슴츠레한 시선을 창문으로 돌렸다.
“글쎄. 너랑 안 맞을 것 같은데. 얘 딱 봐도 작년보다 5센티는 컸어. 발은 그대로겠냐?”
듣기 좋은 저음이었다. 저절로 고개가 돌아갔다. 커다란 키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는 들창코의 손에서 신발을 빼내어 안경에게 되돌려 주었다.
“우리 헛수고하지 맙시다. 네?”
그는 싱긋 웃으며 뻘쭘하게 서 있던 들창코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덕분에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차수민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저 멀리 내동댕이친 관심이 돌아왔다.
존나… 존나 잘생겼다, 저 새끼.
학군도 똥, 선생도 똥, 학생도 똥 같은 이 학교에 한 줄기 빛이 비치는 듯했다. 퀴퀴하고 곰팡내 나는 풍경 속에서 그의 얼굴은 홀로 고고하게 빛났다. 바닥을 치는 인간 군상이 모인 이 학교에서 저놈은 그나마 나은 편일 것이다. 여차하면 얼굴 뜯어먹고 살면 되겠네.
킬킬거리던 무리와 미남 하나는 등장처럼 재빠르게 교실을 빠져나갔다. 차수민은 그가 사라진 뒷문을 응시했다. 그리고 이내 다시 고개를 돌렸다.
“내가 문제다, 내가 문제.”
수민은 크게 하품했다. 요즘과 같은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조폭도 배워야 한다며 갑자기 엘리트주의에 물든 영감 때문에 원치 않는 학교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졸업장까지 수만 걸음. 3년을 잘 버틸 수 있을까……. 수민은 눈앞을 가리는 졸음을 그대로 수용하며 눈을 감았다.
…그렇게 스쳐 지나가는 인간일 줄 알았는데. 수민은 생각보다 빨리 ‘존나 잘생긴 새끼’와 다시 조우할 수 있었다.
얼굴을 뜯어먹고 살리라 생각했던 그는 의외의 것들을 뜯어먹고 있었다. 담벼락에 앉아 담배를 태우던 수민은 시끌벅적한 대화에 인상을 찌푸렸다. 흘긋 살피니 익숙한 풍경이 보였다.
“야. 너 돈 좀 있냐?”
우글우글 무리 지어 있는 놈들이 보였다. 어딜 가도 보이는 광경. 사춘기 펄펄한 남자애들 간에 약육강식은 당연한 현상이었다. 다만 좁아터진 학교에서 좀 더 적나라하고 빈번하게 드러날 뿐이다.
시발, 다른 데서 뜯지. 꼭 여기서 저 지랄이야. 여기만큼 눈에 안 띄는 곳이 없는데 장소를 옮겨야 하나 고민하던 도중 전봇대처럼 커다란 놈이 눈에 들어왔다. 걔였다. 이 학교 얼굴마담.
“오. 재밌는 짓 하네.”
날티가 좔좔 흐르는 면상이라 그런지 조금만 인상을 찌푸렸을 뿐인데 그림 속 한 장면처럼 자연스레 잘 녹아들었다. 야. 너 졸라 잘 어울린다. 차수민은 킥킥대며 그를 관찰했다. 그의 눈에는 모든 게 소꿉장난처럼 귀여워 보였다. 고만고만한 것들이 고만고만한 놈들을 굴리며 우월감을 느낀다. 결국은 고작 머리 하나 차이이면서 말이다. 아, 저놈은 머리 두 개 차이긴 했다.
얼굴값 하네. 차수민은 생각했다.
처음 봤을 때 그 싱긋 웃던 모습은 오간 데도 없었다. 얼굴을 구긴 그는 어찌나 냉기가 철철 넘치는지 무서울 정도였다. 웃을 때와 인상을 쓸 때 느낌이 많이 다르구나. 알려고 안 건 아닌데, 자꾸만 수민의 흡연 장소에 얼씬거리는 탓에 자꾸 보게 되어 싫어도 눈에 들어왔다.
얼씨구. 봐. 지금도. 얼굴마담은 푼돈 따위 성에도 안 차는지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며칠을 지켜보아도 같았다. 그는 먼저 나서는 법이 없었다. 항상 뒤에서 미간을 좁힌 채 한 발을 툭툭 흔들어 댈 뿐이었다. 수민은 그의 서늘한 얼굴을 힐끔 훑었다. 저 불만스러운 표정은 뭐지. 제 손 더럽히긴 싫다, 이건가.
무표정의 ‘존나 잘생긴 새끼’는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이 생겼다. 백지 같은 얼굴에선 냉기가 흘렀고 후리후리한 키가 위압감을 더했다. 그가 눈썹이라도 꿈틀댈 때면 다른 놈들이 움찔하는 게 눈에 보였다. 제법 쓸 만하다는 게 차수민의 한 줄 평이었다.
피지컬도 괜찮으니 원한다면 모두의 위에 군림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별다른 욕심은 없어 보였다. 언제나 한 발짝 뒤에 서서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지 항상 미간 사이를 잔뜩 좁히고 있을 뿐이었다.
수민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를 관찰하고 있었다. 어느새 그를 하나하나 분석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자 불쑥, 그 조각상 같은 얼굴을 깨부수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차수민의 못된 버릇이었다.
“콜록, 콜록!”
그리고 원했던 대로 차수민은 그 아름답고 차가운 얼굴에 와장창 균열이 가는 장면을 목격했다.
뻐끔거리며 소각장 뒤에 숨어 담배를 태우고 있을 때였다. ‘존나 잘생긴 새끼’ 무리에게 담벼락을 빼앗긴 후로는 구차하게 쓰레기 소각장에 몸을 숨기고 해피타임을 가졌다. 그나마 선생 눈을 피할 수 있는 자리였다. 같은 생각을 하는 놈들이 많았는지 소각장 주위에 양아치들이 몰려들었다. 뭉실거리는 연기가 구름을 이루었다.
시발, 또 자리 뺏겼어. 미친 것들 아니냐. 이렇게 떼로 와서 피워 대면 대놓고 피우는 거랑 뭐가 달라. 차수민이 이를 갈며 자리를 피하려던 순간, 희끗한 연기 속에서 그를 발견했다.
“콜록. 큭, 하아. 하아.”
뿌연 공기 아래 눈물까지 흘려 가며 기침을 해 대고 있었다. 모가지에 푸른 핏줄이 섰다. 그의 흰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항시 냉하기만 했던 눈가에 눈물이 그렁거렸다. 손가락에는 한 모금 제대로 빨긴 했나 싶은 기다란 장초가 홀로 타들어 가고 있었다.
“야. 김정현. 괜찮냐?”
“흐으. 윽.”
김정현이라 불린 그는 손등으로 고였던 눈물을 닦았다. 그러고는 아무렇지 않은 척, 옆에 서 있던 놈에게 해죽 웃어 보였다.
“안 되겠다. 나 들어갈래…….”
저렇게 웃는 거 처음 봤다. 수민은 얼마나 집중했던지 떨어지는 잿가루도 인지 못 해 신발에 구멍을 낼 뻔했다.
충격이었다. 그렇게 냉랭하던 얼굴이 조금 웃었다고 다른 사람의 것처럼 저렇게 순하게 바뀔 수 있나. 날티는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한순간에 바뀌어 버린 유순하기 짝이 없는 인상에 반대로 수민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웃음기 머금은 그의 얼굴은 해사하다 못해 덜떨어져 보이기까지 했다.
수민은 그의 긴 손가락에서 빠져나가는 장초를 바라보았다. 입만 갖다 댄 돛대가 바닥에 떨어졌다. 커다란 운동화가 이를 덮었다.
어쩌면 얼굴마담은 수민의 생각과 조금 다른 구석이 있는지도 몰랐다.
“아.”
정말 그랬다. 세 번째 조우에서 차수민은 드디어 김정현의 알맹이를 깨달았다.
바이크 키를 두고 온 수민은 학교로 되돌아와 조용한 복도를 걷고 있었다. 텅 빈 교실 문을 열자, 누군가 화들짝 몸을 굳혔다. 생각 없이 옮긴 발걸음에서 수민은 노을빛에 타들어 가는 것처럼 점점 붉어지는 정현의 얼굴을 발견했다. 나쁜 짓을 하다 들킨 아이와 같이 그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차수민은 얼빠진 김정현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저 새끼는 왜 자꾸 새로운 모습을 보일까.
그는 갑작스러운 수민의 등장에 어쩔 줄 모른 채 허둥지둥 반응하고 있었다. 하늘이 오색으로 물들며 교실을 붉게 비추었다. 수민은 태양에 짓눌리는 느낌을 받았다. 해에 물든 하늘이 거센 물결처럼 밀려와 저놈을 덮치고 곧 자신까지 삼켜 버릴 것 같았다.
이윽고 먼저 정신을 차린 정현이 열려 있던 사물함의 문을 쾅 닫았다. 수민이 두 눈을 깜빡였다.
“그게… 그러니까, 뭘 뒤지려던 게 아니고…….”
수민은 천천히 주위를 살폈다. 7반, 차수민의 교실. 수민이 알기로 그의 학급은 아래층에 위치했다. 모두가 빠져나간 빈 교실, 그것도 남의 반에서 해야 할 중요한 일이라도 있던 걸까. 뿔테 안경 속 눈동자가 생각에 잠기는 걸 알아챘는지 정현이 서둘러 입을 뗐다.
“어. 돌…돌려줄 게 있어서.”
그가 살피던 사물함은 우리 반 안경의 것이었다.
“저기. 나는, 저… 이만 가 볼게!”
정현이 서둘러 자리를 떴다. 바람처럼 사라진 그의 뒷모습이 허무했다.
수민은 물끄러미 그쪽을 바라보다 걸음을 옮겼다. 녹슨 사물함이 삐걱거리며 열렸다. 곱게 놓인 흰 봉투를 집어 들었다. 아직 따듯한 온기가 남아 있었다.
배춧잎 일곱 장. 점심시간, 담벼락 아래에서 그의 친구가 빼앗은 금액이었다. 차수민은 입을 틀어막았다.
“하.”
손가락 사이로 입꼬리가 비집고 올라갔다. 뭐야. 웃기는 놈이네? 수민이 중얼거렸다. 알 수 없는 감정이 발끝을 간지럽혔다.
“웃겨. 정말.”
흰 봉투가 팔랑팔랑 수민의 손길대로 이리저리 흔들렸다. 차수민은 물끄러미 그의 흔적에 시선을 박은 채 온몸을 관통하는 생소한 감각을 버텼다. 피식피식 헛웃음이 차올랐다.
장렬하게 타오르던 태양이 전사하고 서서히 어둠이 내려앉을 때까지도 수민은 사물함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 그러니 지금 이 상황이 얼마나 우습고 말이 안 되는지. 수민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아야 했다. 분위기가 짐짓 무거웠기 때문이다.
“가진 돈 좀 있냐?”
수민은 발화자 뒤에 서 있는 김정현을 살폈다. 그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하나도 안 무서웠다. 와, 이렇게 안 위협적일 수가 있나. 그러지 말고 좀 웃지. 웃는 게 더 이쁘던데.
김정현의 알맹이를 알고 나니 예전엔 어찌나 잘 어울리던지 한 폭의 그림이 따로 없다고 생각했던 삥 뜯는 장면이 그렇게 안 어울릴 수가 없었다.
이런 시답지 않은 생각을 하며 그를 훔쳐보다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사물함 앞에선 그렇게 당황했으면서 안경 하나 얹었다고 내 얼굴 기억도 못 하네. 차수민은 애꿎은 뿔테를 건드려 보았다. 평상시 같았으면 지루하기 짝이 없는 상황에 낭비할 시간 따위 없었겠지만 오늘만큼은 어울려 주기로 했다.
“돈 있냐고, 찐따 놈아.”
“저는 찐따가 아닌데요.”
찐따는 여기 계신 예쁜이가 찐따고. 수민은 힐끔거리며 김정현의 얼굴을 훑었다. 추위에 재킷 하나만 걸치고 오들오들 떨고 있었던 건지 어딘가 지쳐 보였다. 저 얼굴을 가지고 이렇게 멋대가리 없을 수가 있냐. 비웃음 대신 자꾸만 웃음이 흘러나왔다.
분위기 잡고 있는데 맘 상할까 애써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눈썹을 찡그리던 그가 이내 인상을 펴고 싱긋 웃으며 다가왔다.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투명하기 짝이 없는 제스처였다.
“미안, 놀랐지? 우리가 막무가내로 달라는 게 아니고 잠시 빌린다는 거야. 금방 쓰고 돌려줄게.”
오, 제법 양아치 같은데. 그래 봤자 또 사물함에 흰 봉투나 몰래 가져다 놓겠지. 속으로 휘파람을 부는 수민을 아는지 모르는지 김정현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가까운 다가온 그 얼굴에 수민은 저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혹시 얼마 가지고 있어? 잠깐 보여 줄래? 이름이…….”
그가 명찰을 훑었다.
“차수민. 그래, 수민이.”
부드러운 저음이 고막에 달라붙었다. 순간 쾌감이 전신을 타고 흘렀다. 멍청한 입술에서 내 이름 석 자가 흘러나온 그 순간.
차수민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충동이 가슴 한구석을 방망이질했다. 저 새끼의 잘난 얼굴이 당혹으로 일그러지는 꼴이 보고 싶어졌다. 저 새끼 눈동자에 나를 박아 넣고 싶었다.
조용히 지내라던 영감의 말은 저편으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정신을 차려보니 껄렁거리던 두 인간이 길바닥에 굴러다니고 엉덩방아를 찧은 채 입만 뻥끗 거리며 김정현이 두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민은 뒷주머니를 뒤적여 지갑을 꺼냈다.
“자, 쓰고 갚아.”
“이게, 뭐야……?”
목소리 좋고. 당황한 꼴도 영 보기 좋았다.
“돈 빌려 달라며.”
공허한 한마디에 그의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았다. 겁쟁이 새끼. 차수민이 히죽 웃었다.
학교생활이 재밌어지려고 했다. 얼마 만의 흥밋거리던가. 꽉 잡아야지. 질릴 때까지 놓아 주지 말아야지. 차수민은 입술을 혀로 핥았다. 어쩐지 초조했다. 가슴 한쪽이 조여드는 기분 나쁜 느낌이었다. 그는 자꾸만 발가락 끝부터 치고 올라오는 간지러운 감정을 무시했다.
✲ ✲ ✲
“허어.”
나는 헛웃음을 삼켰다. 그래, 봄이었다. 만물이 미숙하고 그저 싹을 틔울 뿐인 시작의 계절. 떠올리니 우습기 짝이 없었다. 막 피어나기 시작했던 감정의 씨앗을 다룰 줄 몰라 쩔쩔매던 어린 날의 차수민과 그에게 잡혀 버린 봄날의 사냥감.
“왜? 왜 그래? 뭐가 생각났는데?”
김정현이 물어 왔다. 나는 대답을 회피했다. 네 얼굴이 취향이었어. 이 말을 어떻게 하냐. 죽어도 말 못 해. 네 잘난 얼굴과 내 비틀린 인성의 화려한 콜라보레이션을.
네 얼굴에 코가 꿰이고 답지 않게 찌질대던 널 발견한 순간부터 눈이 돌았나 봐. 끊임없이 다정한 네게 감겨 버렸나 봐. 이걸 어떻게 한 문장으로 설명해? 창피하고 심란해져 목구멍을 꾹 닫았다. 대신 짧아진 꽁초를 입에 물었다.
“왜 대답 안 해……. 언제부터 좋아했냐니까.”
알려 줄 기미가 보이지 않자 재촉해 대던 김정현이 가볍게 쿵 쳐올렸다. 그 심술궂은 허릿짓에 나도 모르게 신음과 함께 머금고 있던 연기를 뱉어 냈다.
“아!”
“코, 콜록!”
그대로 뒤집어쓴 김정현이 기침을 해 대기 시작했다. 안쓰러울 순간도 없었다. 콜록거리며 기침을 해 대는 탓에 부풀 대로 부푼 그의 것이 내 내벽의 여기저기를 강하게 찔러 올렸기 때문이다.
“흐읏! 아! 정현아, 아! 흣.”
눈에서 별이 튀었다. 단단한 막대가 온몸을 휘젓고 있었다. 뜨겁고 커다란 것이 배 속을 꿰뚫을 것처럼 쑤시고 들어왔다. 몸뚱이가 공중에 떴다가 처박히면서 김정현의 것은 더욱 깊숙이 삽입되었다.
기침하는 김정현만큼이나 나 역시 호흡이 어려웠다. 딱딱한 성기가 공격적으로 내부를 할퀴어 대니 숨을 고를 수가 없었다. 가득 차 버겁게 벌어져 있던 구멍이 부들거리며 경련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가 몸을 떨며 응축된 공기를 내뱉을 때마다 점막에 강한 타격이 전해졌다. 일부러 이러나 싶을 정도로 느끼는 곳만 골라 찔러 대어 척추가 금방이라도 녹아내릴 것 같았다. 달콤하고 미칠 것 같은 갈증이 기저에 끓어올랐다. 더, 더 머물러 줬으면 좋겠어. 금방 치고 빠지지 말고 내 안에서 좀 더……. 헐떡이며 뒤로 넘어가려는 나를 따듯한 팔이 끌어안았다.
“수민아……. 너 너무 조인다. 흐윽.”
“기, 김정현. 너… 일, 일부러 그랬……지.”
더 이상 몸을 가눌 수가 없어 축축 늘어지는 내 겨드랑이에 손을 넣은 그가 천천히 나를 들어 올렸다. 엉덩이 골 사이로 파묻혀 있던 그의 것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묵직하게 내부를 채우고 있던 성기가 조금씩 빠져나가고 있었다. 애가 타 미칠 지경이었다.
나는 벌벌 떨리는 허벅지에 힘을 주었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콧방귀를 뀌어 주고 싶은데 자꾸만 눈이 풀리고 입술이 벌어졌다. 틈을 놓치지 않고 그가 혀를 넣었다. 두서없이 목구멍을 긁어 대는 혀의 움직임에서 나 역시 그의 타는 듯한 갈증을 읽어 낼 수 있었다.
어둡다 못해 탁하게 가라앉은 그의 눈동자와 시선이 얽혔다. 냉랭한 한기와 절절 끓는 온기가 내 심장을 꿰뚫었다. 분출의 욕구가 치밀었다. 나는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정말 웃지 않으면 인상이 달라진다니까…….
“하아, 하아. 김정현, 제발…….”
그러나 나는 그가 순순히 삽입해 주지 않으리란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저런 돌아 버린 눈깔을 할 때면 나조차 그를 말릴 수 없어진다. 오늘 잠은 다 잤다.
“그래서. 묻잖아. 언제부터였냐니까?”
그가 낮게 그르렁거렸다.
나는 그의 목소리를 참 좋아한다. 부드러운 저음. 삥 뜯으며 회유할 때도, 어쩔 줄 몰라 당황할 때도, 사랑을 속삭일 때도 부드럽기 짝이 없는 음성이었다. 귓가에 속삭이니 목소리만으로도 녹아내릴 것 같았다. 지금은 욕망이 덕지덕지 묻어 긁히는 쇳소리가 섞여 있었다. 나는 두 눈을 꾹 감으며 사정욕을 참았다. 시발. 이마저도 섹시해. 김정현.
“대답 안 하지.”
고집스러운 태도에 김정현은 빡돌아 버린 듯했다. 제가 돌아 봤자 얼마나 하겠어. 그렇게 가볍게 생각한 때도 있었다. 그러나 정신 나간 김정현은 무서울 정도로 집요한 구석이 있어서 어떻게든 나를 쾌락에 적셔 엉엉 울게 만들어야 만족하곤 했다. 점막을 헤집어 포인트만을 찌르며 사정하기 전에 꼭 몸을 뒤로 빼 내 입에서 먼저 박아 달라는 말이 나오게 한다.
정말 변태 새끼가 따로 없다니까. 그의 위에 올라타 바짝바짝 약을 올리던 적도 있었지만 모두 김정현이 참아 줘서 가능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는 굳이 위험한 장난을 사서 하지 않았다.
나는 내 뱃가죽을 바라보았다. 그 아래로 김정현의 성기가 뱀처럼 유유히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 야릇한 감각에 몸을 뒤틀었지만 나를 붙잡은 힘이 너무 강했다. 그는 나를 들어 올려 제 성기를 빼내었고 귀두의 꺾이는 부분이 구멍에 걸리자 다시 천천히 부푼 성기를 내 몸 안으로 집어넣었다.
“흐으으. 아! 이상해.”
몸서리치던 나는 닿지 않는 감각에 눈을 깜빡였다. 내려다보니 커다란 성기의 극히 일부만이 들어와 있었다. 김정현은 깔짝거리기만 할 뿐, 더 넣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가 그 일부를 빼내었다가 재차 삽입했다. 나는 애가 탔다. 지금 뭐 하는 짓이야. 거세게 짓이겨도 모자랄 판에. 어서 넣어 줘. 내 눈빛을 읽었는지 그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 되게 안달 난 표정인데. 알아? 넣어 줄까, 수민아?”
나는 도도한 표정을 지어 보려 했다. 그러나 그 커다란 것이 조금 더 깊숙이 들어왔다가 사라지자 여유가 싹 사라졌다. 자존심을 내팽개치고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대답해 줘야지. 기브 앤 테이크. 우리 수민이가 제일 좋아하는 말이잖아.”
우리 사이에 무슨 기브 앤 테이크야. 그냥 좀 넣어 주면 안 돼? 너도 미칠 것 같잖아. 생각과는 다르게 무방비 상태가 된 입술은 제멋대로 열려 원치도 않는 말을 쏟아 내고 있었다.
“흐으, 하. 처음 봤을 때부터…… 읏.”
“응?”
“아읏. 들, 들었잖아. 처음… 봤을 때부터라고!”
뚝 움직임이 멈췄다. 분명 빨개졌을 내 얼굴을 빤히 보며 그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내가 삥 뜯을 때……?”
“아니. 그런 게 있어.”
“또, 또. 말 안 하지.”
부루퉁해진 김정현이 다시 감질나는 허릿짓을 시작하려 하자 나는 손을 뒤로 뻗으며 다급하게 외쳤다.
“그 전에! 전에! 내가… 너를 지켜봤어. 어쩌다 보니…….”
“차수민 씨. 어쩌다 보니가 어디 있어요.”
나는 홱 고개를 들어 김정현을 노려보았다. 대놓고 빙글거리며 웃는 게 많이 컸다, 김정현. 그는 내가 섹스 중에 속박당해 어쩔 줄 몰라 하거나 쾌락에 헐떡거리는 걸 좋아했다. 평상시에는 찍소리도 못하는 주제에.
어느새 묵진한 욕망이 가라앉은 눈에서 장난기가 어렸다. 내가 대답을 회피하는 걸 알고 놀려 먹는 게 뻔했다. 절대, 안 알려 줘.
“흐아.”
살덩이가 뭉근하게 밀려들어 왔다. 등골을 타고 흐르는 저릿한 감각에 혀를 깨물 뻔했다. 김정현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얄밉게도 스팟의 주변을 골라 가며 찔러 댔다. 끓어오르다가 가라앉는 쾌감에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앗, 아! 으흥! 아! 말할게! 말할 테니까!”
“됐어. 읏. 안… 속아.”
“응! 아읏, 마, 마음에 들어서! 네 얼굴이! 네 얼굴이 눈에 들어와서……!”
“뭐?”
“네가 잘생겨서 자꾸 보게 되잖아…! 나더러 어쩌라고!”
파도처럼 몰아치다가 매정하게 빠져나가는 추삽질에 나는 거의 울먹이고 있었다. 무슨 말을 내뱉었는지 알지도 못한 채 훌쩍거리며 엉망일 얼굴을 가렸다.
“……?”
뒤를 간질이던 감각이 뚝 멈추었다. 생각보다 조용한 주변에 손을 내리니 고개를 푹 숙인 김정현이 보였다. 나는 가만히 다가가 그의 얼굴을 붙잡았다. 뜨거운 감촉 아래로 빨갛게 익은 두 뺨이 드러났다.
“김정현…….”
“어어?”
“너 얼굴 빨개.”
그가 어쩔 줄 몰라 하며 고개를 꺾었다. 나는 끈질기게 따라붙어 붉게 물든 그의 얼굴을 관찰했다.
“야. 나 봐 봐.”
“왜, 왜 이래.”
“시발. 미쳤나 봐. 귀여워. 지금 잘생겼단 말 듣고 이러는 거야?”
“…….”
“야. 못 들은 척하지 마. 아까까지 펄펄 날던 놈이. 부끄러워? 뭐가 부끄럽지.”
나는 꽉 찬 아래의 묵직함에 허덕이며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허리를 꽉 붙들고 있던 김정현의 두 손이 맥없이 풀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성난 황소처럼 주체를 못 하던 놈이 고장 난 로봇처럼 멈추어 버렸다. 아, 얘를 어쩌지. 정말.
그의 귓구멍에 또박또박한 어조로 그의 뺨을 더 활활 타오르게 할 문장을 박아 넣었다.
“김정현. 잘생겼어.”
너 지금 불타는 고구마 같아. 나는 웃음을 삼키며 그의 얇은 눈두덩이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서서히 골반을 내려 그의 것을 삼켰다. 굵은 기둥이 점막을 스치며 들어왔다. 힘겹게 중간까지 삽입하고 그의 목에 매달려 속삭였다.
“잘생긴 정현아. 어서 넣어 주세요. 뿌리 끝까지 쑤셔 줘.”
그러자 구멍에 걸쳐진 그의 것이 울컥 크기를 키웠다. 내 어깨에 줄곧 얼굴을 파묻고 있던 김정현이 커다란 손을 휘감아 엉덩이를 붙잡았다. 우레와 같은 몸짓에 순간 휘청이던 나는 손을 뻗어 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의 밭은 호흡과 몸짓을 느끼며 천천히 몸을 맡겼다. 오래 발기되어 있던 페니스가 허겁지겁 제 길을 찾아가는 것이 느껴졌다. 장 끝까지 찌르고 들어와 배 속이 아릿할 정도였다.
나는 터져 나오는 교성을 삼켰다. 과도한 자극에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대신 씨익 웃으며 귀여운 정현이를 긁었다. 버거움과 쾌감으로 얼굴 근육이 푸들푸들 떨렸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했다.
“우리 정현이……. 정말 끝까지 들어왔네? 넣어 달라고 넣어 주고. 착하게. 여전히, 읏. 얼굴은 빨갛고.”
“…흥분해서 그런 거거든?”
발끈하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내벽을 조였는지 김정현이 낮은 신음을 내뱉었다. 나는 그 섹시한 얼굴에 홀린 듯이 키스했다.
나는 열일곱의 여름을 떠올렸다. 바다 냄새가 묻어 있던 마지막 여행.
이 얼굴을 한동안 보지 못한다 생각하니 끔찍했지만 언젠가 내 손아귀에 들어올 날만을 그리며 버티기로 결심했었다. 나 기억해 줘. 그거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부산까지 데려가 잔뜩 깽판을 놓고 왔다. 절대로 잊지 마. 내 이름. 악연이든 인연이든 내가 새겨 주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사람 욕심은 끝이 없다고 여유만 생기면 김정현의 동네를 어슬렁거리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저주처럼 남기를 바랐으면서 참을 수 없었다. 그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이 냉한 눈매와 다정한 입술이…….
눈을 감고 키스를 받아 내던 그가 경고처럼 중얼거렸다.
“또 다른 생각 하지. 안 되겠네. 이럴 여유도 있고.”
그리고 말 끝나기가 무섭게 거친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평온하게 고여 있던 풀에 첨벙첨벙 파도가 쳤다.
배 속을 꽉 채우던 것이 쑥 빠져나가며 여린 점막을 자극했다. 신경 마디마디에 발가락이 곱아드는 쾌감이 퍼져 나갔다. 그는 공허함이 느껴지기 전에 다시 채워 들어오며 깊은 곳을 꾹꾹 눌러 댔다.
“흐으, 아! 앗, 응! 아아!”
나는 뱃가죽 아래에서 들짐승처럼 난리를 치는 김정현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바닥만큼 남아 있던 여유가 휘발되며 그의 말처럼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그저 벌어진 입에서 신음을 흘려 대며 구멍을 치고 들어오는 거센 물결에 온 신경을 맡길 뿐이었다.
안이 절절 끓었다. 종이 인형처럼 흔들리는 나를 김정현이 강하게 껴안아 밀어붙였다. 누군가의 힘에 제압당하는 건 오랜만이라 넋이 나갈 것 같은 상황에서도 비죽 웃음이 났다.
거칠지만 따듯하게 김정현이 들어왔다. 나는 놓칠세라 그를 꼭 붙들었다. 그의 다정이 더 철철 나를 채워 줬으면 좋겠다. 배 속 깊은 곳까지 그의 애정으로 가득했으면 좋겠다.
“흐윽. 아, 차수민…….”
“응, 정현아. 아! 아흑.”
내가 어미젖을 갈구하는 강아지 새끼처럼 엉겨 붙자 김정현은 움찔거리더니 억눌린 소리를 냈다. 동시에 내부에서 흉흉하게 움직이던 것이 멈추며 따듯한 액체로 가득 차는 느낌이 들었다. 장벽에 흘러내리는 야릇한 감각에 나 역시 뒤를 수축하며 앞으로는 탁한 액체를 내뿜었다.
전율하며 조여드는 구멍 때문인지 그가 살짝 미간을 좁혔다. 그러나 몸을 뺄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는 나를 꼭 끌어안고 내가 사정의 여운을 느낄 수 있도록 본인 가슴에 기댈 수 있게 해 주었다.
차갑기도 하고 따듯하기도 한 봄바람이 이마 위로 살랑거렸다. 김정현의 오르내리는 가슴팍에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물결을 보고 있자니 졸음이 몰려왔다. 그런 나를 내려다보며 김정현이 말했다.
“차수민. 너도 얼굴 빨개.”
그야 당연히 너랑 붙어먹었으니까 그렇지. 나는 소리칠 기운도 없어서 장난스레 웃음 짓는 김정현을 독기 빠진 눈으로 쏘아보았다. 그가 물었다.
“…내가 잘생겼어?”
“응.”
뭘 알면서 물어. 그렇게 부끄러워하더니 이제는 다시 듣고 싶은가 보다. 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해 줬다. 어둠 속에서도 살짝 달아오른 그의 뺨이 느껴졌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나는 너 처음 봤을 때 예쁘다고 생각했어.”
내가 얼빠진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는 머쓱하게 내 어깨에 턱을 올렸다.
“사내애가 기생오라비같이 생겨서. 근데 성깔은 어찌나 더럽던지. 고양이 새끼마냥.”
“나도 알거든?”
나는 홱 쏘아붙였다. 얼굴 보고 덤볐다가 가루가 된 놈들이 한둘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맥주 한 캔에 취해 해롱거리며 내 입술을 만져 대던 고등학생 김정현도 기억한다. 그가 내뱉었던 대사까지도.
‘있잖아. 예전부터 느낀 건데 너 사내자식이 좀 예쁘게 생긴 것 같아. 그런 말 많이 듣지?’
그러곤 키스할 줄 알았는데 찐따 숙맥 김정현은 엎어져 쿨쿨 잤다. 그때를 생각하면 치가 떨렸다.
“그래? 알고 있을 줄 알았어.”
김정현이 대수롭지 않게 툭 말했다. 어쩐지 내 입으로 내가 미인이라도 되는 양 지껄인 모양새가 되어 버린 것 같아 뭐라 반박하려는데 갑자기 뺨에 입술이 닿았다. 촉, 물기와 함께 경쾌한 마찰음을 남기며 떨어져 나간 김정현이 웃었다.
“모를 리가 있나. 예뻐. 차수민.”
확, 목 위로 피가 몰리는 게 느껴졌다. 당황하여 입만 뻐끔거리고 있는데 김정현이 예의 그 장난스러운 눈길로 박제가 되어 버린 내 모습을 하나하나 뜯어보았다.
“어. 얼굴 빨개졌다. 부끄럽냐?”
“뭐어……?”
“뭐가 부끄러워. 예쁘다는 말? 더 해 줄까? 예뻐. 예뻐요.”
이 능글맞은 새끼. 항시 찐따처럼 굴다가 갑자기 이런 모습이 튀어나올 때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사과처럼 익은 얼굴로 분해서 부들부들 떨고 있자 첨벙 물소리와 함께 단단한 팔이 나를 결박했다. 김정현의 가슴팍에 다시 폭 얼굴이 묻혔다. 지랄을 떨까 하다가 그냥 분위기를 맞춰 주기로 했다. 내 안에서 점점 부피를 키워 가는 무언가가 느껴졌지만 애써 모른 척 그의 탄탄한 살갗에 뺨을 대었다.
“수민아. 밤이 길다. 그치?”
한 번 더 하자고 은근히 분위기 잡아 온다. 하아. 나는 팔딱대는 그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시선을 돌렸다.
필터만 남은 담배 한 개비가 재떨이 위에 위태롭게 걸려 있었다. 김정현이 소중히 보관하던 나의 장난. 나의 심술. 나라는 존재.
너는 내가 물처럼 스며들었다 했지. 가랑비에 옷자락 젖어 가듯이. 나도 마찬가지거든. 네 얼굴에 뿅 간 건 맞지만 마음 준 건 물에 녹듯 나도 모르는 사이에 벌어진 일이야. 그냥 어느 순간부터 당연하게 네가 가지고 싶어졌어.
다만, 내 건 가랑비가 아니라 폭우였어. 이것만큼은 절대로 말하지 않을 거야.
나는 목덜미에 키스를 해 대며 재촉하는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