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
L 모 씨의 뒷담
차수민이 또라이를 넘어 미친놈 수준이 된 건 여러 해를 거친 사건 사고와 점차 악랄하게 드러나는 본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견딜 만했다. 가장 옆에서 그의 패악질을 받아 온 이민혁이었기에. 차기 보스에 걸맞은 인재가 되어 가고 있구나, 좆같지만 넘길 수 있었다.
그러나 미친놈의 미친 짓이 정점을 찍은 시기가 있었다. 그때는 차수민의 괴상한 짓거리가 웬만한 일엔 닳고 닳은 이민혁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극에 달했는데, 이민혁은 차수민의 사춘기, 짧은 반항이라 치부했던 그의 생각이 짧았음을 나중에야 인정하게 되었다.
한국으로 거처를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보스는 그래도 고등학교는 졸업해야 하지 않겠냐며 이곳저곳 똥통 학교 리스트를 뽑아 왔다.
“제가 옆에서 모시지 못해서 어쩌죠.”
영혼 없는 말을 내뱉자 애쓴다, 하는 비웃음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재수 없는 새끼. 맞춰 줘도 지랄이야. ‘너랑 떨어져서 존나 만세다’라고 말하면 죽도록 괴롭힐 거면서.
어쨌든 차수민은 고등학생이 되었고 민혁은 근처 중학교에 들어갔다. 일거수일투족 수발을 들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민혁은 몸서리치게 기뻤다.
사실 조직원 모두 차수민의 한국에서의 학교생활에 대한 기대를 품지 않았다. 여기는 일본이랑 다르니까 뒤 봐줄 인간이 적으니 제발 사고만 치지 말아라. 모두의 바람은 한동안 잘 이루어지는 듯했다.
“우리 도련님, 그래도 꽤 잘 적응하시네.”
“밤마다 오토바이 끌고 도로 질주하는 건 안 보이시나 봐요.”
“그래도 교복 입고 타지는 않잖아…….”
하긴. 당신들 눈에 뭐가 문제로 보이겠어.
“근데 친구는 좀 사귀셨나 몰라. 학교 얘긴 도통 하지 않으니 알 수가 있어야지.”
“친구는 무슨. 누굴 패지만 않아도 다행이겠어요.”
하교 종이 치기가 무섭게 광란의 질주나 해 대는 사람이 무슨 친구가 있겠는가. 그가 3년을 잘 버틸지도 의문이었다. 민혁은 쌍칼과 차수민의 졸업장 수여 여부에 대해 내기를 걸었다. 백퍼 못 견디고 그만둘걸.
“자. 오늘 자 필기들. 영감한테 보고하시든가.”
예상과 다르게 차수민은 학교가 좀 적성에 맞는 듯했다. 한국 물은 일본과 다른지 꾸역꾸역 보스가 시키는 말도 안 되는 과제들을 수행해 오기도 했다. 조직원들은 정갈한 글씨로 정리된 보충 수업 필기 노트를 넘겨 보며 두 눈을 의심했다.
“이게 무슨 일이냐.”
“원래 도련님이 머리가 좋긴 했어. 안 해서 그렇지.”
“이거는 끈기와 노력의 문제잖아. 절대 이딴 걸 할 인간이 아니란 말이야.”
각종 문제집에 빼곡히 풀이 과정을 적어 오답 노트까지 만들어 왔을 때 그들은 비로소 합리적인 의심을 하기 시작했다. 누구 하나 봉 잡은 거 아니야?
“아, 영감탱. 뭘 자꾸 시켜 대. 귀찮아 죽겠어, 정말.”
그렇게 말하는 차수민의 표정은 몹시 즐거워 보였다. 그렇구나. 그들은 깨달았다. 불쌍한 범생이 하나가 불행하게도 멱살 잡힌 채 숙제셔틀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래도…… 즐거워 보이니 됐다.”
쌍칼이 말했다. 지난 9년간의 학창 시절 동안 차수민은 학교를 증오하고 혐오했다. 공부에 흥미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며 어딜 가든 아웃사이더 취급이나 받았으니까.
“그러게. 밝은 얼굴 보는 게 얼마 만인지.”
어쨌든 집안 분위기 평화로우니 그들은 잠자코 있기로 했다. 범생이 놈 하나의 희생으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질 수 있다면, 이거야말로 공리주의가 아니겠는가.
차수민은 정말로 친구라도 생긴 건지, 졸업장 못 따면 한 자리도 내줄 수 없다는 보스의 으름장 때문인지 꽤나 유순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민혁은 간만의 평화가 믿기지 않았다. 저리도 얌전해질 수 있는 놈이었나. 이유가 뭐든 좋으니 제발 이대로만 지내자. 생각했다. 차수민이 보여 주는 전에 없던 모습 때문에 민혁은 미친 짓의 징조를 제때 읽어 내지 못했다.
“민혁아. 너네는 학교 일찍 끝나지.”
닭살 돋게 왜 이렇게 다정하게 불러? 성 빼고 불린 이름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했다. 민혁은 쭈뼛쭈뼛 다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끝나고 친구랑 놀고, 숙제하고 그러면 몇 시야?”
“여섯, 일곱 시……?”
“친구랑 놀러 다니려면 돈이 많이 필요하겠네?”
“아뇨. 그다지…….”
고작 중딩이 써 봤자지. 우리가 가게 잡아 놓고 놀 것도 아닌데. 그러나 차수민이 듣고 싶은 대답은 그게 아니었나 보다.
“민혁이, 용돈 부족할 것 같은데. 맞지?”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이민혁에게 임무가 하나 부여되었다. 더불어 이민혁은 차수민이 잡은 봉이 누구인지 드디어 알게 되었다.
“엥. 저놈이야?”
의외였다. 모범생 하나 꽉 잡아 놓은 줄 알았는데 공부 따윈 해 본 적도 없게 생긴 날라리 새끼였다. 학교에서 내로라할 것 같은 양아치 말이다.
얼굴 하나는 반반하게 생겼지만 대가리와 속은 텅 빈 강정이 분명할 놈이었다. 저런 놈들 한두 번 보나. 다만 무엇이 차수민의 심금을 울렸나 곰곰이 생각해 봐도 모를 일이었다.
어쨌든 민혁은 피 같은 시간을 반납해 그 새끼 뒤꽁무니나 졸졸 따라다녀야 했다. 차수민의 목표물은 생긴 것과 다르게 집-학교-집의 반복이었다.
감시책 역할에 질려 구역질이 날 때쯤, 민혁은 형들을 졸라 소형 위치추적기를 하나 얻었다. 성능은 개구렸지만 밤낮으로 그 새끼 집 앞에 죽치고 있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충분히 만족스러운 물건이었다. 타이밍을 노려 그의 지갑 속에 넣어 놨다. 이민혁의 해이한 도덕관념은 모두 차수민 덕분에 형성되었다 볼 수 있겠다.
어느 날 차수민이 불쑥 말했다.
“이민혁. 뭐 장 봐 올 거 있어?”
갑자기 무슨 장? 항상 집안일은 민혁의 몫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장을 봐 오겠다니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지금 말해. 안 그럼 국물도 없어.”
“마트… 가시게요?”
“응. 카트 밀어 준다는 놈이 있어서.”
그렇게 말하는 차수민은 몹시 기뻐 보였다. 오싹했다. 무슨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예감이 맞아떨어졌는지 얼마 안 있어 마트로 향한 차수민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까의 기쁨은 어디 가고 빡돌아 있었다.
-야. 너 내가 김정현 감시하라고 했어, 안 했어?
“오늘은 주말…….”
-주말? 주마알? 아, 기분 잡쳤어. 걔 있을 법한 곳 모르지, 너.
위치추적기는 이럴 때 쓰라고 달아 놓은 거였구나. 이민혁은 자기 안목에 박수를 보내며 주소를 읊어 주었다. 상호명을 보아하니 술집인 것 같았다. 고딩 주제에 술이라니 역시 양아치가 분명했다. 그런 놈이 어쩌다 차수민한테 잘못 걸려서…… 혀를 쯧쯧 찼다.
차수민은 밤늦게 약간의 술 냄새를 머금고 돌아왔다. 빡돌아 있던 아까와는 다르게 굉장히 만족스러워 보였다. 상기된 뺨이 번뜩이는 흥미와 만족감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는 민혁에게 물었다.
“야. 나 안 무섭냐?”
뭘 할지 몰라서 무서워요. 민혁은 눈으로 얘기했다.
“이상하단 말이야. 왜 도망을 안 갈까. 무섭다면서 하는 짓은 정반대야. 자꾸 기어올라.”
누구 이야기인지 알 것 같았다. 김정현이란 그 인간. 어쩌다 차수민의 눈에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상당히 재밌어하고 있다는 점을 미루어 보아 그놈의 인생이 순탄치만은 않으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민혁은 떨떠름하게 히죽거리는 차기 보스를 바라보았다.
차수민은 그 후로도 김정현과 어울려 지내는 듯했다. 합이 맞는지, 아님 한쪽이 죽어라 맞춰 주고 있는 건지. 아마 후자이겠지. 차수민이 전에 볼 수 없었던 얼굴을 자주 보여 줘서 신기하긴 했다.
“도련님. 봉으로 잡으신 놈 있잖습니까. 요 앞 모텔에서 일하고 있던데 쓸 만한 놈 맞습니까? 공부도 여간 못하게 생겨서는 밤새 카운터 보던데요.”
눈치 없는 삼촌 하나가 입을 잘못 놀렸다. 책에 고정되어 있던 차수민의 시선이 옮겨졌다.
“뭐? 모텔?”
“넵. 갸 미성년자 아닙니까?”
“너는 거기 왜 갔는데?”
“네? 어…….”
삼촌은 쭈뼛대며 팔뚝지에 그려진 잉어를 벅벅 긁었다. 타이밍 좋게 다른 형이 끼어들어 그를 구해 주었다.
“임마도 대단하네요. 펄펄한 나이에 밤새 신음 소리와 못 볼 꼴 잔치일 텐데 용케 그런 데서 일을 잡았네.”
“긍까요. 머스마가 얼굴 하난 쓸 만하던데 음탕한 데 빠져가 도련님 과제 좆같이 해 놓을까 봐 걱정입니다. 보스께서 아시면 혼나는 건 도련님이잖습니까.”
잉어 삼촌의 말에 차수민의 안색이 묘하게 바뀌었다. 좋은 신호는 아니었다. 감시책 역할을 소홀히 했다고 불똥이 떨어질지도 모른단 생각에 이민혁은 급히 자리를 피했다. 숙제셔틀 따위가 뭐라고 차수민이 저렇게 유난을 떨까. 이제는 대부분이 김정현의 대략적 인상착의를 알고 있는 듯했다.
그날 이후로 차수민은 밤마다 집을 나섰다. 김정현이 알바한다는 모텔에 들어앉아 죽치고 있는 것 같았다.
“김정현인지 뭔지 고놈 참 불쌍하다.”
“그러게요. 하필이면 또라, 또련님한테 잘못 걸려서.”
밤마다 어떤 괴롭힘이 벌어지고 있을지 민혁은 짐작만 할 뿐이었다. 차수민이 조직원과 학생들을 싹싹 긁어모아 모텔에 쳐들어갔다는 얘기를 듣기 전까지만 해도 이민혁은 김정현의 존재를 그리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네에? 삼촌도 갔어요? 대체 거기 왜 간 거예요?”
“친구 있는 척이 하고 싶었던 게야. 쯧쯧. 불쌍한 우리 도련님.”
“왜요? 걔가 뭐라고……?”
숙제셔틀 따위가 뭐라고 애저녁에 깔끔하게 인정한 문제를 구질구질 끌고 나오게 만드느냔 말이다. 더 이상 울 필요가 없다며 친구란 개념 자체를 머릿속에서 지워 버린 인간이 뭐 하러 겁박으로 만들어 낸 숙제셔틀의 눈치를 살피냐고. 이상하잖아.
민혁이 떠오르는 의문을 정리하기도 전에 대규모 인사 작업이 벌어졌다.
“필수 인원 빼고 싹 다 올라가. 가서 영감이나 도와. 여기서 농땡이 부리지 말고.”
요지는 김정현이란 놈이 행차하신다는 거였다. 차수민은 간만에 예민해졌다. 진아 누나가 애지중지하는 일본도를 발끝으로 툭툭 건드리며 소리쳤다.
“칼! 이거 꼭 가지고 가! 고등학생 집에 이딴 게 왜 있어? 저저, 호랑이 그림도 떼고!”
급작스레 떨어진 축객령에 얼레벌레 올라가는 형들을 민혁은 참담한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또또. 셔틀 따위에게 마음이라도 생긴 걸까. 어릴 때 잠깐 마주쳤던 주근깨 소년이 떠올랐다. 그날 이후 차수민은 분명 변했을 텐데. 다시 기대하고 상처받고, 그딴 비효율적인 일이 하고 싶어진 걸까?
어찌 됐건 민혁에게는 불행한 일이었다. 쏟아지는 지시와 짜증을 오롯이 받아 내야 했기 때문이다. ‘보통의’ 고등학생 자취방을 꾸미기 위해 게임기를 포함한 이것저것을 급히 공수하고 나서야 한숨 돌릴 수 있었다.
“도련님은 좀 어떠셔? 별일 없고?”
먼저 본가로 올라가 있던 쌍칼은 와르르 쫓겨 올라온 조직원들의 대거 이동에 당황했는지 전화를 했다. 민혁은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말을 고르다가 내뱉어 버렸다.
“어…… 친구가 생기신 것 같아요.”
“뭐? 친구?!”
아, 귀청 떨어지겠네. 수화기를 최대한 멀리 들고 대답했다.
“아닐 수도 있어요. 사실상 꼬붕에 가까운 것 같기도. 뭐, 차수… 도련님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달렸겠지만.”
얼마 안 있어 차수민이 김정현을 꽤나 각별하게 여긴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평소처럼 김정현 어디 있냐며 으르렁거리길래 추적기를 보고 주소를 불러 주었다. 버려진 공사장 폐컨테이너가 찍혔다. 그랬더니 거기까지 따라가 일을 벌인 듯했다.
어째 그동안 조용하다 했다. 대여섯 명이 중상을 입었고 차수민의 선배라는 뚱땡이 하나는 뼈도 못 추릴 정도로 처맞아서 제정신이 아닌 채 구조되었다. 이 근방 조직원 하나가 말려 들어 간, 규모가 작지 않은 사건이었다. 수습을 위해 쌍칼이 파견됐다. 알고 보니 김정현을 구해 준답시고 벌인 일이었다.
“여러모로 역사적인 사건인데. 너 도련님이 누구 지키려고 묵사발 만드는 거 본 적 있냐?”
“없죠. 조직 외에는.”
그러니까 신기하단 말이야. 차수민의 얼굴에 간만에 생기가 돌았다. 그는 병원에 열심히 출근 도장을 찍었다. 내가 아는 차수민이 맞나. 신기하다 못해 꺼림칙했다.
민혁은 어이가 없었다. 김정현 그놈도 참 알 만했다. 덩치도 큰 게 맞고 다녀. 차수민의 보호 본능을 자극했던 건지 뭔지 모르겠지만 차수민은 한동안 병원에 눌어붙어 김정현을 간호했다. 간호. 얼마나 차수민이랑 어울리지 않는 단어인지. 그 덕분에 조직원들은 말 한마디 나눠 본 적도 없는 김정현의 쾌유를 비는 화환들을 날라야 했다.
이민혁은 희미하게 김정현이 주근깨 따위와는 다른 위치에 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끝이 어떨진 모르겠으나 차수민은 현재 집착하고 있었다. 상대의 마음에 연연하던 옛날과 달리 그의 입장 따위 개무시한 채 원하는 대로 밀어붙이고 있었다.
“네가 이해해. 간만에, 아니 처음으로 마음 맞는 친구를 만나서 얼마나 기쁘시겠냐.”
차수민에게는 항상 무른 쌍칼이 말했지만 민혁은 동의하지 않았다. 친구에 대한 집착치고는 과한 거 아닌가? 하긴. 차수민이 워낙 괴이해야지. 처음 사귄 놈이니 감정 주체가 안 되는 모양이었다. 미친놈.
김정현이란 놈도 미친놈인 게 차수민의 괴롭힘을 넙죽넙죽 다 받아 주고 있었다. 이쯤 되니 즐기는 게 아닌가 합리적 의심이 들었다. 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뭐, 이 정도만 돼도 귀여운 정도였을 텐데.
“야. 민두식이랑 실장님 좀 내려오시라고 해.”
“왜요?”
“시키면 시키는 대로 그냥 좀 해.”
그렇게 말하는 차수민은 어딘가 초조해 보였다. 차수민이 두 사람에게 내린 지시는 간단했다. 가짜 부모 역할을 맡는 것. 박 실장과 민두식이 부모님 대역으로 학부모 상담을 가 김정현과 인사를 나누었다는 얘기를 듣자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속였다. 김정현을. 조폭 낙인에 괴로워하던 시절에도 단 한 번을 숨기려 들지 않았는데 작정하고 속였다. 이민혁은 문득 불안해졌다.
이 새끼 이거 진심인 거 아니야……?
차수민의 기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거랑 똑같은 인형. 어디서 파는지 찾아내.”
그가 보여 준 사진에는 커다란 곰 인형이 떡하니 들어앉아 있었다. 흔해 빠진 곰인형. 유행 다 지나 요즘은 선물하는 이도 없을 법한 대형 곰 인형 말이다. 이 또라이 새끼. 욕이 목까지 치미는 걸 참고 쌍칼 형이랑 온 동네를 다 뒤지고 다녔다. 겨우겨우 낡아 빠진 상점에서 먼지 쌓인 곰 인형을 발견하고 나서야 차수민은 환하게 웃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거 이상해?”
화려한 스카잔을 걸친 차수민이 한 바퀴 빙 돌았다. 형들이 선물한 옷이었다. 저번에 김정현이 옷장 보고 한 소리 했다던데 그 후로 엄청 신경 쓰고 있는 것 같았다. 평소에는 눈에 보이는 대로 아무거나 주워 입던 인간이.
“아, 아니. 멋진데요?”
시선을 피하는 민혁의 동공을 목격한 차수민이 차가운 목소리로 명령했다. ‘보통’ 애들은 뭐 입는지 알아 와. 지하상가 다 뒤져서 쇼핑해 와!
그 외에도 김정현과 관련된 자잘한 일들로 얼마나 이민혁을 부려 먹었는지, 글로 적자면 책 한 권 분량은 족히 나오고도 남을 것이다. 김정현. 이름만 들어도 이가 갈렸다.
그러나 차수민의 즐거움은 얼마 가지 못했다. 일본에서 넘어올 때 미처 제대로 마무리 짓지 못한 일들이 조직의 발목을 잡아 왔기 때문이다.
빚 청산이 말끔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지 레이파는 인맥과 검은 루트를 동원해 조직의 목을 조여 왔다. 한국의 내로라하는 조직까지 숨통 조이기에 가세하자 후퇴를 생각해야 할 상황까지 치달았다. 임시로 보스는 용병을 고용해 차수민의 옆에 붙여 놨다.
“그… 전학생 신분은 좀 아니지 않아요?”
“시발. 내 말이. 차라리 선생으로 위장하든가. 어느 미친놈이 저 얼굴을 고딩이라 생각하겠냐고.”
전학생 용병이 붙은 이후로 한동안 밝았던 차수민의 기분이 저기압으로 떨어졌다. 김정현 부적도 힘을 쓰지 못했다.
눈치가 없는 건지 바보인 건지 김정현은 차수민의 오피스텔 앞까지 찾아와 서성거렸다. 설마. 걱정하는 거야? 차수민을? 일방적 괴롭힘에 불과하다고 생각해 왔던 이민혁이 허, 김빠진 소리를 냈다. 단단히 미친놈일세. 마조히스트 아닌가. 차수민을 걱정하는 놈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느냔 말이다.
선배라는 애 하나를 박살 내고, 비싼 돈 주고 고용한 용병을 줘 패고 나서야 차수민은 밝은 모습으로 돌아왔다. 미친 새끼. 말하기도 입 아플 정도였다. 미친놈과 미친 새끼. 어쩌면 둘은 정말로 ‘친구’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말하고도 어이없는 생각이 들었다.
“이민혁. 네가 몇 년 살았지?”
너랑 두 살 차이 난다, 이놈아. 대답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 질문이었지만 항시 을의 입장에 있는 이민혁은 방긋 웃으며 열다섯이요, 대답해야 했다.
“15년간 살면서 이 새끼만큼은 죽어도 기억나겠다, 싶은 놈 있어?”
민혁은 거울을 들어다가 면상 앞에 들이밀고 싶었다. 너. 너 말이야 미친놈아.
“당연히… 있죠.”
“어떤 사람인데?”
“좆같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사람. 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싶을 정도로 성깔이 더럽고 제멋대로에 나쁜 기억만 떠오르는 사람.”
“……그런 놈이 제일 기억난단 말이야?”
이민혁은 차수민의 눈을 똑바로 보면서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읊어 주었다.
“네. 개새끼일수록 기억에 오래 남는 법이더라고요. 어떻게 잊겠어요.”
흐음. 그래? 지 얘기를 하는지 눈치채지 못했는지 차수민은 사뭇 진지한 얼굴로 경청했다.
“그렇군. 나쁜 기억일수록 강렬하다 이 말이지…….”
불안했다. 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일을 벌일지. 차수민은 은근히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순진한 면이 있었다. 그리고 내 예감은 맞아떨어졌다.
봄의 끝물, 일본 구석에서 잠잠하게 있던 레이파가 급작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손을 쓴 건지 막 런칭한 사업의 자금줄도 막히고 있었다. 여러모로 좋지 않은 시기였다. 조직 상황이 바닥을 치닫는데 차수민은 방학을 맞아 부산에 가겠다고 주장했다. 물론 김정현이 함께였다.
“안 됩니다! 거기 어떤 놈들이 있는지 아시는 겁니까?”
형들이 목 터져라 간언해도 들은 체도 안 했다. 일본에 터 잡기 전에 부산이 영감의 나와바리였다고 들었다. 그만큼 적으로 드글드글한 곳이었다. 그러나 겁대가리를 오래전에 상실한 차수민이 말을 들어먹을 리 만무했다.
“우리 어쩌면 잠적해야 할지도 몰라요, 도련님. 지금 상황 아시잖아요.”
한국에서 채 자리 잡기도 전에 날아든 타격은 출혈이 컸다. 굵직한 사업체 몇 개가 제대로 시작도 해 보기 전에 무너졌다. 망나니 같은 보스와 차수민 때문에 쌓인 게 많았던 건지, 기회를 잡은 레이파는 집요했다. 자칫 조직 자체가 와해되고 사라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무겁게 울리는 쌍칼의 말에 창밖만 바라보던 차수민이 고개를 돌렸다.
“더 이상 일 벌이는 건…….”
“마지막이야.”
차수민이 말했다.
“마지막이라고. 방 뺄 준비 해. 뒷수습하고 레이파 조지려면 못해도 몇 년은 걸릴 거 아니야. 후딱 시작해야지. 차일피일 미루는 것보단 맞닥뜨리는 게 나으니까. 괜히 여기서 밍기적거리다 여기까지 알아채면 어떡해.”
굳어 버린 쌍칼의 표정을 흘끗 살핀 차수민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차피 졸업장 딸 거란 기대도 안 했어. 여행 정도는 다녀오게 해 줘.”
그 말에 반기를 들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차수민에게는 마지막 방학이 될 것이었다.
“금방 왔지? 자, 모두 짐 챙겨.”
그렇게 가고 싶었던 여행치고는 하루 만에 돌아와 버렸다. 김정현인지 뭔지랑 싸움이라도 벌인 건지 모두 흘깃거리며 그의 눈치를 살폈으나 수민은 의외로 멀쩡해 보였다. 겉으로는 항상 멀쩡한 인간이었으니 속이 어떨지는 그 아무리 이민혁이라 해도 알 수 없었다.
거사 준비를 위해 본가로 홀랑 떠나 버린 그는 대신 민혁과 쌍칼을 남겼다. 두고 간 미련처럼. 더불어 유진아가 내려왔다.
“누나는 왜 왔어……?”
“포토샵.”
남아서 뒤처리를 하라더니 차수민이 싼 똥은 이곳저곳에 한가득이었다. 벌집을 들쑤셔 놨는지 부산 양아치들이 껄렁거리며 동네를 배회했다. 밤마다 쌍칼과 진아는 김정현의 집주변에서 잠복하며 양아치들을 몰아냈다. 인력 낭비가 따로 없네. 누가 누굴 지켜?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일은 지가 벌려 놓고 뒤에선 털끝 하나 다치지 않게 망보라는 지시나 내고. 정말이지 모순적인 새끼였다.
민혁은 배달 우유를 맥주 캔으로 바꿔치기하거나 담배로 가득 찬 택배를 보내는 등 김정현을 소소하게 괴롭히는 임무를 맡았다. 이걸로도 모자라 매주 김정현의 일상에 대해 보고해야 했다. 잘 지내고 있는지, 아픈 곳은 없는지, 성적은 얼마나 올랐으며 교우 관계는 어떠한지.
이쯤 되니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스쳐 지나가듯 얘기했던 대화의 한 토막을.
‘15년간 살면서 이 새끼만큼은 죽어도 기억나겠다, 싶은 놈 있어?’
‘개새끼일수록 기억에 오래 남는 법이더라고요. 어떻게 잊겠어요.’
‘그렇군. 나쁜 기억일수록 강렬하다 이 말이지…….’
이민혁의 입이 벌어졌다. 이 새끼 순진한 거야, 뭐야. 진짜로……?
친구 따위가 아니었다. 차수민이 바라는 김정현은 친구에서 끝을 맺는 단계를 이미 지나쳐 있었다. 차수민은 그 이상을 원하고 있었다. 누구에게도 미련을 두는 법이 없던 인간이 오래오래 그의 기억에 남아 있고 싶어 하는 중이었다.
민혁은 제 어린 보스의 일탈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했다. 치기 어린 사춘기 소년의 착각 혹은 비틀린 소유욕? 금방 식어 버릴, 한때의 뜨거운 감정?
확실한 건 이번에는 다르다는 점이다. 십몇 년간 반복되던 지겨운 패턴과는 확연히 달라서 미친 도련님이 반쯤 더 헤까닥 돌아 버렸다. 보통의 사람들과 달리 김정현은 어딘가 ‘특별’했던 것이다. 그저 찐따 양아치인 줄만 알았는데 김정현의 무엇이 차수민의 단단한 벽을 뚫은 건지 이민혁은 궁금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그 이유를 깨닫게 되었다.
“입학 축하한다, 민혁아. 야, 대학도 보내 주고 도련님이 널 증말 아끼시나 보다.”
개소리. 민혁은 웃지 않았다. 차수민의 집착은 생각보다 집요하고 강력했다. 사춘기의 짧은 치기 따위가 아니었다. 조직 문제로 골머리를 앓을 때에도 꼭 김정현에 대한 보고를 함께 올리게 했으며 시간이 날 때마다 김정현의 동네에 출몰하여 미친놈처럼 학교 주변을 흘깃거렸다.
몇 년이 흘러도 사라지기는커녕 더 강력해진 그의 기행은 온갖 공작으로 변형되어 결국 김정현을 이 과에 꽂아 넣었다.
차수민은 서브리미널 효과인지 뭔지를 믿는 듯했다. 검사가 나오는 온갖 콘텐츠를 긁어모아다가 정현의 주변에 심어 놓고 그걸로 모자라 입시 담당 교사까지 매수했다. 물론 모든 일은 이민혁이 해야 했다. 김정현은 어째서 저녁마다 들르는 분식집 텔레비전에서 법정 드라마가 흘러나왔는지 평생 알 수 없을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김정현이 여자라도 사귈라치면 어떤 계략이든 만들어서 끝을 보게 했다. 그가 떼어 놓은 사람만 몇 명이었던가. 조작된 김정현의 탈모 사진이 제일 잘 먹히는 방법이었다.
시발……. 욕 나오는 임무들이 그 후로도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래도 꼴통 양아치가 차수민의 계획에 발맞출 수 있었단 건 대단한 일이긴 했다. 그 계획안에 민혁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 문제였지만.
“정현 선배님, 안녕하세요! 저는 이민혁이라고 합니다.”
대학까지 와서도 이어지는 지긋지긋한 감시책. 김정현 너 졸라 싫어. 차수민은 더 싫어. 민혁은 억지로 웃음 짓느라 경련하는 얼굴 근육을 감추었다.
“아, 안녕. 신입생이구나.”
김정현이 몸을 돌려 당돌한 신입생을 발견했다. 항상 멀리서나 지켜봤지 처음으로 가까이서 보는 얼굴이었다. 새끼, 콧대에 베이겠어. 얼굴 하나는 봐 줄 만해서 민혁은 배알이 꼴렸다.
“네. 그러니까 밥 사 주세요, 선배님.”
“바, 밥?”
어. 너랑 친해져야 하니까. 좆같은 차수민, 아니 이수민의 지시를 수행하려면 안면 정도는 트고 있어야 할 거 아니야. 그래. 너도 사내새끼랑 밥 먹긴 싫겠지. 그래도 될 때까지 한다. 민혁은 이를 악물고 웃었다. 그러나 냉큼 거절할 줄 알았던 김정현은 곤란한 얼굴로 목덜미를 문질렀다.
“그래. 그러지 뭐……. 뭐가 먹고 싶은데?”
이민혁이 알게 된 김정현은 생각과는 다른 놈이었다.
날티가 철철 흘러넘치는 얼굴과는 달리 제 의견 하나 강하게 밀어붙이는 적이 없었고 자신보다 어린 놈의 말에도 고분고분 따라 주었다. 제 얼굴을 흘끗거리는 수많은 여자들의 시선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눈치가 없었고 이상한 동아리에 들어가 꼬박꼬박 길고양이 사료를 챙겨 주는 짓거리를 하기도 했다.
한수진이 개처럼 쪼아 대도 허허실실 받아넘겼고 남들이 피하는 잡일을 도맡아 했다. 찌질하게 별것 아닌 일로 고민하며 밤을 새우기도 했고 하루 만에 털고 일어나 무슨 일 있었냐며 방긋거리기도 했다. 그의 주변엔 항상 사람이 많았다.
민혁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차수민이 왜 그렇게 김정현을 가지지 못해 안달인지. 이 생각 없는 놈은 누구든 ‘보통 사람’처럼 만드는 기술이 있었다.
멍청하고 허술하기 짝이 없어서 방심하고 넋 놓고 있으면 어느새 스며들어 예의 그 멍청한 웃음을 따라 짓게 만들었다. 물론 이민혁은 거기 넘어가지 않았다. 멍청이는 차수민 하나로 족했다.
“아이고 힘들어.”
MT에 와서까지 남의 뒤치다꺼리나 하고 있는 김정현을 보며 민혁이 작게 혀를 찼다. 학생회도 아니면서 사서 고생해요, 아주. 그는 취한 인간들을 하나하나 방으로 옮기고 있었다.
일을 마친 김정현이 밖으로 나오자 이민혁은 피우던 담배를 아래로 내렸다. 민혁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선배. 좀 쉬세요.”
“어. 다 했어. 와, 다들 뭔 놈의 술을 그렇게 퍼마시냐.”
“고생하셨어요. 한 대 피우실래요?”
한 손으로 담뱃갑을 내밀며 다른 손은 반쯤 타들어 간 개비를 쭉 빨아들였다. 퍼지는 연기 속에서 김정현이 콜록콜록 기침을 해 댔다. 이민혁은 어이가 없었다. 뭐야. 생긴 건 골초면서?
“아. 담배 안 피우시는구나. 죄송해요.”
민혁이 담배를 끄려고 하자 정현은 손을 내저었다.
“괜찮아. 계속 피워도 돼. 나 곧 들어갈 거니까.”
그렇게 말하며 몸을 일으키던 김정현이 순간 멈칫했다. 그리고 멀뚱히 연기를 내뱉는 이민혁에게 다가섰다.
“아. 근데 냄새가 되게…… 그거 뭐야?”
“네?”
“아니. 뭔가……. 잠깐 줘 봐 봐.”
한동안 킁킁거리던 김정현이 손을 내밀어 한 개비를 받아 갔다.
비흡연자가 그거 뒀다 뭐 하려고. 뻑뻑 피워 대며 주머니에 들어가는 연초를 지켜보는데 문득, 민혁은 자신이 차수민으로부터 담배를 배웠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역겹지만 같은 취향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차수민과 이민혁이 공유하는 유일한 교집합이었다.
멘솔이 거기서 거기지. 에이 설마. 주문처럼 중얼거리면서도 멍하니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며 밤 풍경에 녹아드는 저 꼴을 보니 그동안 결코 생각해 본 적도 없던 가설이 하나 세워졌다.
‘개새끼일수록 기억에 오래 남는 법이더라고요. 어떻게 잊겠어요.’
이민혁의 툭 던진 한마디가 기정사실화 되는 순간이었다.
“…선배. 군대 안 가요?”
“어? 갑자기?”
가라. 도망가. 곧 공을 세우고 전장에서 돌아올 차수민과 한구석에 그를 잊지 못하는 머저리 하나가 만난다면. 벌어지는 모든 일은 이민혁이 감당해 내야 할 몫이었다. 얼마나 굴려 댈지 지금보다 더 좆같을 게 분명했다.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머릿속에 그리며 민혁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애초에 차수민을 만나는 게 아니었다. 나가라고 할 때 나갈걸. 그 집에 눌어붙어 있는 게 아니었는데.
차수민은 또라이 따위로 설명할 수 있는 인간이 아니다. 그는 모든 부정적인 수식어가 어울리는 차세대 미친놈이니까. 그리고 그런 놈에게 꽉 붙잡혀 버린 불쌍한 멍청이가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얼굴로 밤바다의 별이나 세고 앉아 있었다.
시이발. 잡일이란 잡일은 다 떠맡게 생겼네. 민혁은 조용히 욕설을 삼키며 남은 연초를 길게 빨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