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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1 민혁의 고백 (11/15)

외전 1

민혁의 고백

작은 도련님은 또라이가 분명합니다. 이 집에 발을 디디자마자 알 수 있었습니다. 또라이가 가득한 집안사람 중 가장 으뜸은 단연코 저 사람일 거라고, 내 작은 레이더가 삐용삐용 돌아가고 있었으니까요.

“도련님. 이 아이 형종이 형 아들이래요. 자, 인사해. 수민이 형이야.”

“아, 안녕하세요.”

젊은 청년 하나가 활짝 웃으며 내 손을 잡아끌었습니다.

“오. 수민이 또래네. 야, 수민아. 친구 생겼다. 오늘부터 함께 지낼 거래. 반가워, 꼬맹이.”

기껏해야 열 살. 많아 봤자 나랑은 겨우 한두 살 차이 나는 주제에 세상 다 산 아저씨의 눈을 하고 삐딱하게 현관에 기대어 서 있더군요. 나는 아직 상복을 입은 채였습니다.

도련님은 내 옷을 쓱 훑더니 미련 없이 뒤돌아 나갔습니다. 나는 그가 앳된 목소리로 투덜거린 문장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돌았나. 여기가 어디라고 와.”

조심스레 건넨 인사가 무참히 부서진 건 둘째 치고, 나가라는 말을 대놓고 면전에서 내뱉을 줄이야. 이런 홀대는 상상도 못 했던 터라 잘못 들었나 싶어 목을 쭉 뺀 채로 굳어 버렸습니다. 살면서 딱 두 번 본 깡패 아버지도 이런 식으로 말하진 않았거든요.

그런 내 머리를 거친 손이 쓱쓱 쓰다듬어 주었습니다. 올려다보니 도련님과 똑같은 눈매를 지닌 청년이 씨익 웃고 있었습니다.

“쟤가 숫기가 없어서 저래. 속으로는 기뻐하고 있을걸. 우리 집에 온 걸 환영한다. 오늘 파티할까? 민혁이 우리 가족 된 기념 환영 파티.”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사람은 도련님의 혈육이었습니다. 그는 나도 자신을 삼촌이라 부르도록 허락했습니다.

삼촌은 여러모로 이 집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혼자만 둥둥 떠 있는 느낌이랄까요. 싫은 소리 한번 하는 일 없고 항상 서글서글 웃고 다니는 사람이었습니다. 인상 더러운 인간들만 모아 놓은 곳에서 홀로 순두부처럼 맨질거렸습니다.

반면에 보스와 도련님은 날 때부터 칼을 물고 태어난 인간들인 것 같았습니다. 누가 봐도 악바리였고 누구보다 성깔 있었습니다. 부자가 꼭 닮았네, 싸가지 없는 면이. 나도 모르게 중얼거린 후에야 입을 틀어막았습니다. 이 집에서 나쁜 것만 배우고 있는 것 같아요.

“너 안 갔냐?”

식탁에 앉아 쌍칼 형이 만들어 준 핫케이크를 먹고 있는데 인기척도 없이 도련님이 나타났습니다. 저 여기서 지낸 지 벌써 한 달이 넘었어요. 더부살이에 하등 도움 안 될 대답 대신 의자를 끌어 자리를 내어 주었습니다.

“같이 먹어요, 도련님.”

“야. 여기서 이러지 말고, 네 아버지 명의로 걸어 놓은 보험금이 어마어마하거든? 거기에 플러스알파 더 얹어 줄 테니까 나가.”

내 성의는 똥구멍으로 잡수셨는지 대뜸 저런 말을 하지 않겠어요.

“네?”

“나가라고. 얼굴도 잘 모르는 애비였다며. 싹 잊고 나가서 행복하게 살든가 불행하게 디지든가 마음대로 하라고.”

저 여덟 살이에요……. 말문이 턱 막혀 당연한 소리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도련님은 왜 저를 싫어하시는 걸까요? 저는 여기 말고는 갈 곳이 없는걸요. 눈물을 가까스로 참아 가며 꾸역꾸역 핫케이크를 입안에 밀어 넣고 있자니 한숨 소리가 들렸습니다.

“네 아빠 칼 맞고 죽었어. 알아?”

제가 알 리가 있겠어요? 저는 대답 대신 건조한 눈가를 쓱쓱 문지르며 훌쩍였습니다. 그러자 무심한 충고가 날아들었습니다.

“여기 계속 있으면 너도 네 아버지 꼴 날 거야. 이거 하난 기억해.”

그러곤 쌩하니 몸을 돌려 사라졌습니다.

“와, 저 싸가지…….”

나는 다시 입을 틀어막았습니다. 나쁜 말. 도련님과 있자니 내 성격도 이상해지는 것 같습니다.

“다 네가 걱정돼서 그러는 거야.”

“걱정하는 사람이 말을 그렇게 해요……?”

“그건… 그렇지만. 나쁜 의도로 한 말은 절대 아냐. 도련님이 얼마나 네 아버지를 좋아했는데.”

나중에 진아 누나한테 도련님의 속뜻은 그게 아니었으며 누구보다 나를 걱정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깡패 소굴에서 지내다가 깡패가 될까 봐 그렇다구요.

깡패의 피가 진하게 흐르는 도련님은 제가 깡패가 되는 것이 싫은가 봅니다. 깡패는 나쁜 거니까요. 그러는 본인은 왜 이 집을 떠나지 않는 걸까요? 저는 도련님을 따라 학교에 가고 나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자, 네 반은 여기야.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텅 빈 대가리로 세상 살 순 없으니까 뭐라도 열심히 배워.”

“네. 아, 근데 도련님.”

저 필통을 안 가져온 거 같아요. 그러나 도련님은 이미 저만치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나는 작은 보폭으로 도련님의 뒤를 쫓았습니다. 3학년 교실은 2층에 있어 산처럼 거대한 계단을 올라야 했습니다.

3학년 2반. 그를 따라 겨우 도착했으나 도련님은 제가 부르기도 전에 벌컥 문을 열어젖혔습니다.

교실 문이 열리자 시끌시끌했던 소음이 싹 가라앉았습니다. 도련님이 걸어가는 길마다 모여 있던 사람들이 사라지고, 대신 불쾌한 정적이 남았습니다. 터덜터덜 자리로 간 도련님이 털썩 의자에 앉을 때까지 모든 시선이 그에게 향했습니다. 그러나 말을 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나는 다시 내 반으로 돌아갔습니다. 어쩐지 보면 안 될 것을 본 것 같아서요.

“있잖아. 아침에 너 데려다준 선배랑 무슨 사이야?”

“누구? 도련님?”

“도련님이라 불러? 헉. 완전 무섭다.”

맞다, 학교에서는 도련님이라 부르지 말라고 했었는데. 이미 내뱉어 버린 주둥이를 감싸고 있는데 그런 날 보며 짝꿍이 의아하다는 얼굴로 물었습니다.

“너는 안 무서워?”

무섭나…? 짜증 나는 성격은 맞는데 도련님이 무서워 벌벌 떤 적은 없는 것 같아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자니 짝꿍이 말했습니다.

“난 그 선배 무섭더라. 소문이 안 좋아.”

“소문이 어떤데?”

“유명한 깡패 아들이래. 너도 같은 집 사는 거야?”

고개를 끄덕이자 그 애가 신기하다는 듯 말했습니다.

“와, 그래도 너는 보통 사람 같다.”

보통 사람. 집에 돌아와 그 말뜻을 곰곰이 생각해 보고 있을 때, 삼촌이 간식을 들고 들어왔습니다. 뺨에 작은 생채기가 있는 걸로 보아 일을 갔다 온 모양이었습니다.

“민혁이 1등 하겠다. 공부 열심히 하네. 학교는 다닐 만해? 친구 많이 사귀었어?”

내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삼촌도 따라 웃다가 잠깐 올라간 입꼬리를 멈추었습니다.

“수민이는 어떤 것 같니?”

나는 오늘 본 광경을 이야기하려고 하다가 여덟 살의 설은 촉이 발동해 간신히 입을 다물 수 있었습니다.

보통 사람. 그게 무슨 뜻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도련님은 보통 사람이 아닌 게 분명했습니다. 물 위에 둥둥 뜬 기름처럼 무언가가 도련님을 섞여 들어가지 못하게 막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 후로 삼촌이 몇 번 학교로 불려 가고 학생 몇몇의 이빨이 나가고 도련님이 씩씩대며 대문을 걷어차고 들어오는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어이구, 우리 도련님. 성질머리 한번 화끈하십니다.”

도련님이 또 애를 팼다는 소식을 들은 진아 누나가 학교를 째고 두부 한 모를 사 들고 왔습니다. 입시가 코앞이라면서 말이에요.

“자, 이거 먹고 나쁜 마음은 하얗게 지워 버리는 겁니다. 알았죠?”

저리 치우라며 매정하게 내칠 줄 알았는데 생각과 다르게 도련님은 얌전하게 두부를 받아먹었습니다. 형들이 낄낄거리며 그 모습을 사진기에 담았습니다. 아, 하지 말라고! 빽 소리 지르며 그들의 뒤를 쫓는 도련님의 뒷모습을 보며 깨달았습니다.

조직은 도련님에게 애증이구나.

싫어야 마땅하지만 싫어할 수가 없겠구나. 도련님을 붙잡는 ‘안 보통 사람’의 꼬리표는 이 깡패 집안이 붙여 준 것일 텐데 도련님을 위로해 주는 것도 깡패들이니 참 아이러니할 수밖에요.

나는 도련님의 웃는 모습을 눈에 담았습니다. 보기 드문 현상이었으니까요. 도련님을 웃게 만드는 건 가족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우리들이었습니다. 이러니 벗어날 수가 없겠구나. 작은 머리통으로도 알 수 있었습니다.

그의 발목을 잡아 오는 족쇄는 발을 따듯하게 덥혀 주는 양말이기도 했습니다.

삼촌이 죽고 도련님이 가진 애증이라는 그 감정은 더 커진 듯했습니다.

삼촌의 장례식은 비가 억수로 퍼붓는 날 치러졌습니다. 하늘도 울고 땅도 울고 모두 다 우는데 멀쩡해 보이는 사람이 하나 있었습니다. 나는 빈소에 앉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도련님이 얄미워 쏘아붙였습니다.

“도련님은 또라이에요.”

“…….”

“싸이코. 멍청이. 고집불통!”

내 말은 들리지도 않는지 미동도 없는 얼굴은 그가 정말 ‘안 보통 사람’인 것처럼 보이게 했습니다. 나는 악에 받쳐 소리쳤습니다.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아?”

생판 남인 나도 이렇게 줄줄 눈물이 나는데 정말 독한 놈이 틀림없었습니다.

삼촌은 ‘우리들’의 구심점이었습니다. 밝음과 어둠의 경계를 나눠 주는 등대 같은 존재였고요. 나에겐 1년 동안의 아버지 같은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할 말 못할 말 가리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인정해, 이 또라이야! 너는, 너는…….”

“…….”

“너는 사실 외로운 거야! 외로워서 어쩔 줄 모르면서 왜 울지도 않아!”

그 말에 멍하니 앉아 있던 도련님이 번뜩 고개를 돌렸습니다. 나는 무서워서 뒷걸음질 치면서도 자존심을 놓지 않았습니다.

“사실은 슬퍼 죽겠지? 더 외로워질까 봐 무섭지? 왜 인정을 안 해? 왜!”

형들이 나를 끌고 가기 전까지 나는 바락바락 소리를 질러 댔습니다. 사실 가장 슬펐던 건 도련님이었을 텐데요. 슬픔도 느끼지 못하는 그 모습에 내가 겹쳐 보였던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엄마가 죽고 나서 제대로 훌쩍거리지도 못한 채 나무토막처럼 누워 지내던 내 모습 말입니다.

“그런데 민혁이 말도 틀린 게 아니야……. 외로우면 외롭다, 슬프면 슬프다. 표현하면 좋을 텐데. 도련님은 좀 더 아이같이 굴 필요가 있어. 우리 민혁이처럼. 아, 민혁이도 애늙은이 같은 면이 있긴 하다, 그치?”

삼촌 대신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누나가 말했습니다.

“표현하는 게 좋아요?”

“응. 인정하면 사람은 바뀌거든. 가슴에 꾹꾹 눌러두는 것보단 훨씬 낫지.”

사람은 바뀐다라. 뭔가를 인정한 건지, 아니면 포기한 건지. 도련님의 변화를 눈치챈 사람은 내가 먼저였습니다.

삼촌의 죽음 이후 한동안 도련님은 본채에 틀어박혀 지냈습니다. 불행 중 다행히 얼굴에 주근깨가 가득한 소년이 주위를 얼쩡거리기 시작한 후부터 도련님은 서서히 예전의 모습을 되찾아 가는 것 같았습니다. 아니, 전보다 밝고 즐거워 보였습니다.

“어, 내 자전거 어디 갔어?”

쌍칼 형의 하루는 자전거의 소재를 묻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아까 도련님이 훔쳐 갔어요.”

“또?”

변해 가는 도련님이 보기 좋다기보단 무섭게 느껴졌습니다. 적응이 안 됐어요. 매일 밤 형들에게 생전 하질 않던 학교 이야기를 중얼거리지 않나, 어슬렁거리며 동네를 배회하지를 않나. 심지어 내게 먼저 살갑게 말을 걸기까지 했다니까요.

장례식장에서 너무 심한 말을 해 사람이 돌아 버렸나. 나 때문인 건가 고민을 하기도 했습니다. 형, 누나들은 너무 좋아했죠. 몇 번이고 축하 파티를 준비하려고 하는 걸 도련님이 뜯어말렸습니다. 사실… 좀 그렇잖아요. 친구 사귄 기념 파티라니. 나라도 뜯어말렸을 거예요.

그러나 이 행복은 길게 가지 못했습니다.

“저, 저기. 화장실이 어디예요?”

주방으로 향하던 길에 마주친 주근깨가 물었습니다. 우리 집에 밥 먹듯이 놀러 오는 도련님의 손님 말입니다. 내 등장에 깜짝 놀란 건지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습니다.

만날 오면서 그것도 모르나. 귀찮아 손짓으로 알려 주려고 하는데 그의 손에 들린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열한 살짜리가 읽을 리 없는 에세이 북 사이로 삐죽 튀어나온 분홍색 파일철.

저는 눈칫밥을 먹으며 사는 사람입니다. 주근깨가 정말로 화장실 따위를 몰라서 물어본 게 아니라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깨달았습니다. 내가 할 일은 선택이었습니다. 이걸 도련님께 알려, 말아?

“저쪽.”

나는 대충 손을 들어 아무 허공이나 찍었습니다. 어차피 주근깨가 갈 리 없는 화장실의 위치를요. 주제넘은 짓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주근깨가 도련님한테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거든요.

항시 누군가를 죽일 것 같은 얼굴로 돌아다니던 분이 요새는 방긋방긋 웃고 다니는데 내가 그 미소를 깨도 될지 판단이 서지 않았습니다. 결과가 어떻든 모든 건 도련님이 감내해야 할 몫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도련님은 애 하나를 팼습니다. 죽기 바로 전까지요. 삼촌의 죽음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아마 그 애의 얼굴엔 주근깨가 가득 박혀 있었을 거라고, 나는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집안이 술렁였습니다. 한동안 잠잠하더니……. 상담이라도 받게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걱정하는 사람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나는 예의 그 무표정한 얼굴을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눈물 자국 하나 없이 멀쩡한 얼굴. 분노도 상실도 느껴지지 않는 도자기 같은 얼굴.

전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어쩐지 실망스러워 방으로 들어가려 하는데 그가 나를 불러 세웠습니다.

“야.”

“네?”

“너 그때 나 질질 안 짠다고 지랄 떨었었지.”

“……??”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뻐끔거리는 내게 주저함 없는 한마디가 날아들었습니다.

“내가 안 우는 이유는 울 필요가 없어서야.”

그러곤 그는 몸을 돌려 슬렁슬렁 사라졌습니다.

나는 한동안 같은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그가 폭탄처럼 남기고 간 문장을 곱씹다 이내 깨달음이 스쳤습니다. 나는 눈만 끔뻑거리다가 겨우 큰 숨을 몰아쉴 수 있었습니다.

아……, 도련님이… 변했습니다!

진아 누나가 바라 마지않던 귀여운 제 또래 나이의 아이로 돌아오기는커녕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 같았습니다.

울 필요가 없어서 울지 않는 아이. 뭐, ‘보통 사람’과는 확연히 다른 부류였으나 어쨌든 그는 꾸준히 자신을 괴롭혀 오던 외로움을 받아들이기로 했나 봅니다. 외로움을 수용하고 마음을 여는 대신 외로움을 짓밟고 강해지기로 마음먹은 게 약간은 다른 방식이기는 했지만요.

그는 울지 못하는 게 아니라 울지 않는 거라고 굳이 제게로 와 똑똑히 말해 주었습니다. 그건 일종의 다짐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도련님은 자신이 내뱉은 다짐대로 행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좋게 말하자면 차기 보스에 걸맞은 인재가, 나쁘게 말하자면…… 갖다 붙일 말이 너무 많군요.

외로움을 인정하니 그 실체가 보였나 봅니다. 눈에 보이는 건 무섭지 않다, 보스와 도련님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입니다. 싸가지 없는 두 부자의 신념대로 실재하는 외로움은 더 이상 도련님의 적수가 되지 못했습니다. 기대하는 것이 없으니 실망할 리도 없었죠.

대신 우리. 가족이라는 이름의 우리. 도련님의 발목을 파고드는 우리를 동아줄처럼 꼭 붙들더군요. 그 이후로 달라진 도련님은 오로지 조직에게 기대하고 조직을 위해 움직였습니다. 그게 도련님의 성장법이었습니다.

“미친놈이야. 눈깔 돈 거 봤어? 애 같지가 않아.”

혹자들의 수군거림도 도련님에게는 칭찬이었을 겁니다. 조직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는 차세대 보스. 도련님이 눈물을 잃음과 동시에 어떤 결핍을 얻었는지 저희로서는 알 수 없지만, 이것 하나만은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도련님은 훌륭한 보스가 될 거에요.”

내 말에 도련님이 코웃음을 치며 담배를 빨았습니다.

“악담을 사람 눈앞에서 하냐, 너는?”

또라이니까, 당신은. 결핍과 상실을 뒤집어쓴, 비틀린 사이코. 이 집에 눌어붙어 있는 모두가 부족하고 비틀린 인간들입니다. 그중 최강자, 우리 도련님.

도련님을 구심점으로 우리는 얽히고설켜 단단한 뿌리를 내릴 겁니다. 최강자가 이끄는 최강 조직을 상상하니 비실비실 웃음이 나왔습니다. 애초에 보통이 아닌 사람들끼리 모여 있는데 어떻게 보통 사람이 만들어질 수 있겠어요.

어쨌든 우리는 항상 따듯하고 도련님은 항상 또라이니, 우리 조직은 건재할 겁니다. 아직 채 자라지 못한 머리통을 가지고도 선명하게 그릴 수 있어요.

울 필요가 없는 보스. 그리고 성장기 애처럼 무럭무럭 자라 그늘을 내어 주는 조직. 나름 괜찮은 조합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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쭉 읽어 내려가던 이민혁은 얼굴을 굳혔다.

“도련님? 도련님 좋아하시네.”

짐 정리한다고 간만에 창고를 뒤졌더니 먼지 쌓인 일기장이 딸려 나왔다. 이딴 쓰레기가 아직도 남아 있어. 이민혁이 이를 악물었다. 한국 올 때 버리고 온 줄 알았는데 끈질기게 살아남아 새 보금자리까지 따라가려고 한다.

“그렇겐 안 되지. 차수민의 악령아.”

먼지 쌓인 노트를 집어 던지기 일보 직전, 그는 갑자기 생각을 고쳐먹었는지 다시 페이지를 펼쳤다. 그러곤 펜을 집어 들더니 뚜껑을 열어 쭉쭉 검은 줄을 쳐 내려갔다.

사정없이 엑스 표를 그려 가던 이민혁이 거친 숨을 고르고 볼펜을 주워 들었다. 그리고 검은 줄이 찍찍 그려진 일기장 위로 새로운 글씨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작은 도련님은, 아니 차수민은 또라이 따위로 설명할 수 있는 인간이 아니었다. 그는 모든 부정적인 수식어가 어울리는 차세대 미친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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