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
서막
병실은 고요했다. 쥐새끼가 돌아다닌다면 발걸음 소리마저 명확히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시간을 잊을 때쯤이면 공기청정기가 돌아가는 소리나 가습기의 기계음 정도가 굳어 버린 정적을 깨뜨리곤 했다.
새파란 침묵이 이어졌다. 차수민은 김정현의 옆에서 마치 가구처럼 소리 하나 내지 않고 앉아 있었다. 보는 사람이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한참 만에 입을 연 차수민이 말했다.
“겁도 많은 게, 거기가 어디라고 와서.”
자기반성과도 같은 어조였다. 목소리에 담긴 회한과 후회를 사내는 읽어 낼 수 있었다. 차수민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김정현을 살피며 한숨을 내쉬었다.
“……협상 결렬될 뻔한 거 아십니까.”
“더 반죽을 만들어 놨어야 했는데.”
사내의 탐탁지 않은 반응에도 차수민은 굴하지 않고 김정현의 파리한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덧붙였다.
“감히 누구 얼굴을 이렇게 건드려.”
순간 일렁거리는 분노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사내는 시선을 모로 돌리며 새로운 화젯거리를 찾아냈다.
“오늘 회장님께서 들어오신다고 합니다. 공항에 안 가 보셔도…….”
“잘됐네. 이제 귀찮은 일은 다 영감한테 넘기면 되겠어. 나는 여기 있을 거니까 너희들끼리 다녀오든가.”
싸늘한 어조와 다르게 부드러운 손길이 느껴졌다. 다정이 뚝뚝 넘치는 몸짓이었다. 곧 녹아내릴 것처럼 조심스럽고 떨리는 손길이었다.
“네 곁에 있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간지러운 말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김정현은 수런거리는 대화를 들으며 눈을 떴다. 수민의 수심 가득한 얼굴이 흐릿하게 떠올랐다 사라졌다. 웃고 있지만 안색이 좋지 않았다. 오로지 내게만 보여 주는 얼굴. 나만이 구분할 수 있는…… 그런 얼굴.
졸려. 이러면 안 되는데 자꾸만 축축 늘어졌다. 견딜 수가 없어 다시 눈을 감자, 의식 저 뒤편으로 굴러떨어지며 편안한 암흑이 몸을 감쌌다. 정현은 입술만 달싹였다. 그런 얼굴은, 싫은데…….
“일어났어?”
멍하니 두 눈을 깜빡이자 싱긋 웃는 차수민이 눈에 들어왔다. 침대 옆 간병인용 의자에 앉아 사과를 깎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사과를 비롯한 과일이 박스째 놓여 있었다.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어디지, 여긴.
시선을 돌리니 휑할 정도로 커다란 1인실의 벽 하나를 가득 메운 화분과 화환이 보였다. 흡사 꽃집에 와 있는 기분이었다. 집채만 한 화환엔 궁서체로 휘갈긴 글씨가 걸려 있었다. [김정현 님의 빠른 쾌유를 바랍니다. 주식회사 흑련상회]. 어쩐지 익숙했다, 이 광경. 알싸한 약품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비로소 이곳이 병실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몸은 좀 괜찮아?”
데자뷰처럼 익숙한 풍경. 다른 점이 있다면 어딘가 여윈 얼굴을 한 차수민일 것이다. 열일곱의 차수민이 적극적으로 이것저것 건드리며 환자 김정현을 귀찮게 했다면, 스물셋의 차수민은 한 발짝 물러서 관조하듯 다가오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의 차수민은 내가 간호사 벨을 누른다 해도 막기는커녕 자기가 불러 주겠노라며 나를 조심스레 다시 눕힐 것 같았다.
“자, 아 해.”
입을 벌리니 사과 조각이 들어왔다. 달콤한 과즙이 입안을 채웠다. 멀뚱히 앉아 몇 조각을 받아먹었다.
“나 칼 잘 쓰지. 짠.”
어느새 둥그런 사과 알은 토끼 모양으로 깎여 먹기 좋은 크기로 변해 있었다. 사각사각 칼 소리가 말초 신경을 자극했다. 더 이상 아무도 손대지 않는 사과 조각이 접시에 쌓이고 있었다. 나는 물끄러미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미안해.”
“미안.”
겹친 소리에 놀라 바라보니 차수민이 미간을 찌푸렸다.
“네가 뭐가 미안한데?”
“어? 그야 내 멋대로 오해하고 깽판 친 거……. 나 때문에 뭔가 거하게 말아먹은 거 아니야?”
정신을 잃기 전, 차수민의 놀란 토끼 눈과 당황한 얼굴에서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꼈고 누가 봐도 두목이다 싶은 놈들이 얌전히 찻잔이나 기울이는 꼴에서 내가 올 자리가 아님을 깨달았다. 그렇다 할 변명을 꺼내기도 전에 상황이 종료되었지만.
쪽팔려. 비로소 창피함이 몰려왔다. 미친놈아, 왜 나대서 일을 만들어, 어? 남의 영업장에 숨어들어 난리를 쳐 놨으니 수습할 것이 한두 개가 아니었을 것이다. 초췌한 차수민을 보아하니 뒤처리할 일이 쌓여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너 걱정시킨 거…….”
이 모양 이 꼴이 되어 사서 고생하는 멍청이를 밤낮으로 지켰을 너에게 미안해. 수치심으로 물든 얼굴에 톡, 손가락이 닿았다. 꿈결에 느꼈던 다정스러운 감촉이었다. 수민이 부드러운 손길로 앞머리를 넘겨 주었다. 그 얼굴을 보니,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오랜만에 제대로 보는 얼굴이었다.
맞아, 헛걸음이었지만 그래도 가길 잘했어. 이 얼굴을 다시 못 본다 생각하니 끔찍했다. 만에 하나의 가능성이었다 해도 그저 손 놓고 관망하는 것보단 괜찮았어. 너를 다시 보니 그런 생각이 든다.
“너 죽을 뻔했어. 알아?”
차수민이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화를 참고 있는 것 같았다. 잠을 통 못 잤는지 눈 아래가 퀭했다. 나 때문에. 가뜩이나 바쁜 놈에게 일거리를 안겨 준 꼴인 것 같아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네가 눈앞에서 쓰러지는데 내가 어떤 마음이었는지 알아?”
“미안해 수민아…….”
“이 모양 이 꼴이 되어서 눈 뜬 다음에 처음 하는 소리가 뭐, 미안해?”
근데 수민아, 나 후회는 없어. 네가 위험하다면 물불 안 가리고 뛰어들 거야. 백 번이든 천 번이든 더 할 수 있어. 너는 내 이기심이라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가 죽을 것 같은데 어떡해. 평생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할 말이 혀끝에 걸렸다.
차수민의 퀭한 눈동자가 흔들렸다. 나는 살짝 시선을 피했다. 너를 위한 일은 곧 나를 위한 일이기도 해, 수화기 너머로 들리던 차수민의 말이 맴돌았다. 나도 그래. 나도 그렇다고.
한참 동안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차수민이 중얼거렸다.
“네가 왜 미안해……. 미안해야 할 사람은 따로 있는데.”
내 이마를 쓸어 올리던 수민의 손이 천천히 떨어져 꿰맨 자국이 선명한 어깨에 닿았다. 상처는 아물었지만 결국엔 흉이 남았다. 들키기 싫어 서울까지 줄행랑쳤는데 그는 이미 다 알고 있었다. 내 이기심의 표상이자 끝까지 지킬 나의 아집. 그 부위를 한참 바라보던 수민이 고개를 숙였다.
“나는 너를 다치게만 하는 것 같아.”
“무슨 소리야.”
그렇게 생각하지 마. 제발. 내 멋대로 판단하고 내가 결정한 일인데. 너 상처받으라고 벌인 일이 아닌데.
나는 어깨와 옆구리의 통증을 참아 가며 팔을 들어 올렸다. 푹 숙인 작은 머리통에 손가락이 닿으려는 순간, 자조적이고 한숨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그런데도 너를 놓을 수 없다는 게 참 웃기지?”
나는 팔을 뻗어 수민의 뺨을 감싸 쥐었다. 살짝 들어 올린 고개에 반짝이는 무언가가 흘렀다. 그게 무엇인지 인지하기도 전에 젖어 들어간 붉은 눈매가 긴 앞머리 사이로 숨어 버렸다. 나는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처럼 멍하게 굳어 있었다.
“수민아, 너…….”
“김정현. 알아. 네가 무슨 생각으로 거기까지 왔는지. 나도 같은 마음이니까. 네가 그렇듯, 나는 너를 건드리는 것들의 씨를 말릴 준비가 되어 있어. 네게 위협이 되는 것들은 무엇이든 산산이 조각낼 거야.”
어느새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차수민이 메마른 얼굴로 웃었다. 그는 제 뺨에 닿은 내 손에 손바닥을 얹었다. 따듯한 온기가 느껴졌다. 내 손을 붙잡고 제 뺨을 비비며 차수민이 아직 촉촉한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애정이 가득 담긴 시선처럼 부드러운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난 너를 못 놔. 그래서 차라리 널 다치게 하는 것들을 부술래. 내가 널 떠날 수 없으니까 이게 최선인 것 같아. 너랑은 조금 다른 방식일지도 모르겠어. 어떡해? 이게 나인걸.”
그가 눈을 감고 커다란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긴 속눈썹이 여전히 붉은 눈가 위에서 흔들렸다. 고요의 화살이 우리를 관통했다. 나는 여전히 그에게 내 손을 잡힌 채였기 때문에 살갗 아래로 느껴지는 상기된 뺨의 감촉을 느낄 수 있었다. 마주한 눈동자가 밤처럼 새까맸다. 나는 잠시 언어를 잊었다.
곧 침묵을 깨고 웃음소리가 터졌다. 내 멍한 얼굴을 바라보며 그가 유쾌한 목소리로 내게 박힌 화살을 빼내었다.
“정현아. 나 이제 백수야. 우리 조직 해체해. 이 말 하려고 했어.”
“뭐?”
“큭큭. 원래 서프라이즈로 좋은 데 가서 분위기 잡고 말해 주려 했는데 일이 이렇게 되어 버렸네.”
그가 웃자 손등에 닿은 입술의 미세한 잔떨림이 느껴졌다. 나는 함께 웃을 수가 없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간만에 마주한 차수민은 많은 것이 달라져 있어서 느린 내 머리로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나는 겨우겨우 머리를 굴려 한 마디를 뱉어 낼 수 있었다.
“너는 왜……. 네가 내게 상처만 준다고 생각해?”
차수민에게 조직이 갖는 의미가 얼마나 큰지, 나는 민혁의 말을 통해 짐작만 할 수 있었지만 적어도 그의 외로움을 달래 준 존재라는 걸 안다. 가족 같은, 어쩌면 가족 그 이상의 존재. 오직 나 때문에 그걸 저버려? 나 때문에 네가, 왜 그래야 하는데. 난 그저 네가 안전하고 행복하길 바랐을 뿐인데. 밀려드는 감정에 시트를 꽉 움켜쥐었다.
“너는 왜 너만 손을 놓으면 이 관계가 끝날 거라 생각해.”
“정현아.”
“나도 널 놓을 수 없으니까 여기까지 왔잖아. 네가 좋아, 수민아. 정신을 잃기 전까지도 네 생각만 났어. 눈뜨자마자 네가 보고 싶었어.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난 널 더 좋아해. 그런데 왜 너만 책임지려고 해.”
이것은 나를 믿지 못하는 너에 대한 배신감일까? 아니면 나를 선택해 준 것에 대한 고마움? 떨리는 목소리로 정금같이 밀도 높은 마음을 전하자니 남이 보기엔 우스꽝스러운 광경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차수민은 웃지도, 울지도 않았다. 대신 핏줄 선 내 주먹을 두 손으로 감싸 왔다.
“그거야, 정현아. 겁도 무서운 것도 많은 쫄보가 나 때문에 꾸역꾸역 깡패 소굴까지 간 거잖아.”
그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오직 나 하나 때문에. 내가 뭐라고 네 목숨 버려 가며 날 구하러 왔잖아. 그런 네가 눈을 뜨자마자 한 말은 미안하다는 말이었어. 알겠어? 너는 이미 나를 책임지고 있다고.”
이번에는 수민이 내 두 뺨을 붙잡았다. 그의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가 당황해 뻐끔거리는 내 모습을 담아내고 있었다. 그는 침착한 어조로 내 소용돌이치는 감정을 한순간에 가라앉혔다.
“자객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내 심장이 어디까지 떨어졌는지 모르지. 너는 말도 없이 떠났어. 배신감이 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 매일 밤 생각했어. 네게 나는 어떤 존재였나.”
역시, 알고 있었구나. 나는 그가 내민 와일드카드에 고개를 푹 숙였다.
“그건…….”
“그런 표정 보려고 꺼낸 얘기가 아니야. 화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긴 하지. 근데 어느 날, 어느 새벽에 순간적으로 깨닫게 되더라.”
수민이 떨어진 고개를 가볍게 들어 올려 눈을 맞췄다.
“네가 무슨 마음으로 도망가듯 떠난 건지. 내가 그렇듯, 너도 그랬던 거겠지. 나를 먼저 생각해 준 거잖아. 네 안위보다 내 걱정이 먼저였던 거잖아. 이걸 내가 탓할 수 있겠냐는 말이야.”
나는 수민의 검고 깊은 눈동자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곳에서 그가 말하고 있었다. 나와 같은 형태의 똑 닮은 진심을 내보이고 있었다.
“누구 하나가 손 놓으면 끝날 관계라고 생각해 본 적 없어. 우리는 이렇게나 우리의 감정에 책임을 지고 있는걸. 내가 네게 첫 번째가 된 이상, 너도 내게 우선순위일 수밖에 없어.”
“나는…….”
“너를 다치게 하기 싫어. 상처 주기 싫어. 놓치기 싫어. 내가 저번에 말했지. 너를 위한 선택은 곧 나를 위한 거라고. 너도 이해하잖아. 날 위한 결정이야. 네게 깔짝거리는 놈들을 보면 내가 야마 돌아 버릴 것 같아서 그렇다니까?”
“…….”
나는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내가 내린 이기적인 결정들의 이유를. 너를 위한 것이며 동시에 나를 위한 것.
너를 다치게 하기 싫다. 상처 주기 싫다. 네가 다치지 않기를 바라서 내 살을 깎는다. 너는 그 모습을 보고 상처를 입는다. 돌고 도는 사랑이란 감정이 낳은 미친 행동들. 아마 우리는 평생 이기적인 선택을 하게 될 것이다. 사랑하니까. 놓치기 싫으니까, 너를.
나는 쏟아지는 깨달음을 입술로 형상화하는 대신, 내 뺨을 감싸는 그의 손에 내 손을 포갰다. 그러자 차수민이 싱긋 웃으며 얼굴을 가까이 했다.
“김정현. 고마워.”
쪽. 사랑스러운 입맞춤을 선물하며 그가 말했다. 항시 새초롬하게 올라가 있던 눈매가 휘어졌다. 그 사랑스러운 모습에 심장이 멈추었다. 그를 처음 만난 순간이 떠올랐다. 그때도 꼭 이렇게 웃었어.
“정현아,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해 줘서 고마워. 한 번쯤 꼭 전해 주고 싶었어.”
나는 햇살처럼 말갛게 웃는 그의 뺨을 잡아끌었다. 보들보들한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사람 미치게 하는 동그란 뒤통수가 만져졌다. 네가 선물한 말은 내가 하고 싶었던 말. 거울처럼 닮은 너를 통해 들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나 사랑해 줘서 고마워. 하필 나였어서 고마워. 이 말도 언젠가 네 입술을 통해 듣게 될까?
잘게 뛰는 맥박과 풀내음을 머금은 머스크 향을 느끼며 나는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반칙이야. 갑자기 훅 들어오는 게 어디 있어.”
“그래서 싫어?”
“그런 말 하면 차수민스럽지가 않잖아.”
“나 참 친절하게 대해 줘도 지랄이야.”
차수민이 뚱하게 내뱉었다. 이런 점이 귀엽다니까. 나는 웃으며 고개를 틀었다. 엄지로 턱을 잡고 내려 부루퉁하게 다물린 입술을 떨어지게 만들었다. 웃음으로 벌어진 입이 반쯤 벌어진 입을 삼켰다. 혀와 혀가 얽혀 들었다.
너는 알고 있었구나. 그는 이 이기적 굴레의 형태를 나보다 빨리 깨달았으면서 한 번도 물러서는 일이 없었다. 서로 주게 될 상처에도 굴하지 않고 피하지 않는 너. 두 눈 똑바로 뜨고 맞서는 너. 뭐냐. 너야말로 너보다 나를 더 생각하잖아…….
우리는 천천히, 진득하게 서로의 입안을 탐색했다. 서로의 감정을 확인하고 나눴던 첫 키스가 생소하고 조급했다면 서로의 심장 끝까지 확인한 지금의 키스는 조심스럽고 애틋했다. 노크하듯 두드리며 모르는 부분을 하나라도 남겨 두지 않겠다는 것처럼 구석구석 열심히 훑었다.
그의 모든 걸 삼키고 싶었다. 차수민의 연한 알맹이를 씹어 흡수하고 싶었다. 사랑을 하는 차수민은 너무나 말랑하고 반짝거려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거센 물살에 휩쓸려 갈지도 모른다는 조바심이 들었다.
더운 숨과 못다 한 말로 호흡이 터질 듯이 가빠 올 때 아쉬운 두 입술이 떨어졌다. 나는 이마를 맞대고 말했다.
“보고 싶었어.”
“나도.”
엄지손가락으로 그의 입가에 묻은 타액을 닦아 주었다. 떨어져 있던 시간이 무색하게 이 모든 행위가 익숙하게 느껴졌다.
“우리 어쩌다 여기까지 왔을까. 시작은 네 따까리였을 뿐인데.”
“이왕 이렇게 된 거 종신 따까리 해. 애인도 하고 따까리 노릇도 하고.”
“진짜 그래야겠다. 평생 차수민이랑 붙어살아야겠다.”
나는 그의 목에 코를 파묻고 웃었다. 그러자 수민의 온몸에 솜털이 쭈뼛 서는 게 느껴졌다. 오호라. 약 한 달을 못 봤을 뿐인데 예민하기가 극에 달했다. 작은 접촉에도 흠칫거리는 꼴을 보자니 촉촉하게 젖어 들었던 감성이 잦아들고 음흉한 욕구가 고개를 들었다. 장난기가 발동해 목을 잘근잘근 물며 목선을 타고 올라갔다. 움찔움찔 떠는 게 귀여웠다.
“근데 너 백수라며. 종신 따까리 먹여 살릴 수 있겠어?”
귓불을 앙 하고 한입에 삼키니 수민이 몸을 바르작거렸다. 미간은 잔뜩 찌푸려 놓고 싫단 말은 안 한다. 그렇지. 자극에 있어선 항시 솔직한 차수민이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허벅지를 쓸어 올렸다.
“야. 김정현. 너 안 아프냐? 어딜 만져 대.”
“방금 진통제 눌렀어. 오, 약발 도는지 뿅 간다. 우리 수민이, 오빠가 뿅 가게 해 줄까?”
“이 미친놈.”
그가 깔깔거리며 몸을 빼냈다. 나는 아픈 몸을 이끌고 그를 두 팔에 가두었다. 쪽쪽 입을 맞춰 가며 본격적으로 하체를 희롱해 보려는 찰나, 병실 문이 드르륵 열렸다.
커다란 생크림 케이크가 불쑥 들어왔고 우렁찬 외침이 둘만의 시간을 와장창 조각냈다.
“조직의 해체를 축하드립니다, 행님!”
“축하합니다~ 축하합니다~ 어엿한 합법 사회인이 되신 것을 축하합니다, 딴딴 따라라 딴.”
우리는 화들짝 놀라 몸을 떨어뜨렸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수민의 궁둥이를 움켜쥐었던 손이 제자리를 찾지 못해 허공에서 방황했다. 뭣 좀 해 보려는 찰나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수민의 로맨틱한 고백으로 데워 놓은 분위기가 차갑게 식어 가는 게 느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병실 안으로 시꺼먼 놈들이 밀려들어 왔다.
“시발, 분위기 파악 좆같이도 못하네.”
차수민이 조용히 내뱉었다. 험악한 표정이 된 상사의 얼굴을 아는지 모르는지 눈치를 저세상에 팔아먹은 구 깡패들이 케이크를 들고 들어왔다. 아무도 원치 않는 방문이었지만 당사자들은 즐거워 미칠 것 같아 보였다.
초가삼간 불태울 생각인지 한 뭉텅이로 꽂힌 초에서 주먹만 한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케이크는 이미 촛농이 뚝뚝 떨어져 엉망이었다. 속이 타들어 가는지 버릇처럼 담뱃대를 입에 문 차수민이 모닥불처럼 타오르는 촛불로 불을 붙이려다 앞머리를 태워 먹을 뻔했다. 그는 ‘아, 참 여기 금연이지’ 중얼거리며 필터를 씹어 댔다.
“화기 사용도 금지야…….”
언제 간호사가 뛰어올지 몰라 노심초사하는 내 얼굴은 분명 새하얗게 질렸을 것이다. 내 말은 들리지도 않는지 케이크를 들이밀며 도끼가 식순을 읊었다.
“아, 그럼 빠르게 진행할까여. 에, 금일 2시부로 주식회사 흑련상회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 시각부터 백련상회가 역사적인 새 출발을 열어 갈 것입니다. 과거는 청산하고 깨끗하고 밝은 내일을 꿈꾸며…….”
푸아아아아.
어디서 가져왔는지 소화기를 든 수민이 케이크를 향해 분사했다. 하늘 높이 치솟던 불길이 검은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뒤늦게 뻥, 하고 축포가 터졌다. 차수민의 머리 위로 팔랑팔랑 오색 종이가 내려앉았다.
“…….”
날아간 케이크에 잠시 침묵을 지키던 인간들은 서로 눈치를 보더니 짝짝짝 박수를 쳐 댔다. 힘없는 박수 소리가 정적을 채웠다. 차수민은 차마 들어오지 못한 채 문간에 서 있는 이민혁을 노려봤다. 그는 아연실색한 얼굴로 이 꼴을 지켜보고 있었다.
“말리려고 했는데…….”
그는 이마를 짚더니 나가 버렸다. 여전히 분위기 파악을 못 한 도끼가 활짝 웃으며 네모난 케이스를 내밀었다. 새로 판 명함이었다. 흰 종이에 차수민의 이름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사내 이사 차수민. 도끼가 두 손을 비비며 물었다.
“첫 업무 지시는 뭐라 내리실 생각이십니까?”
“꺼져.”
차수민이 말했다. 역사에 길이 남을 백련상회의 개업 후 첫 지시였다.
“예?”
“꺼져. 다 꺼지라고.”
살벌하기까지 한 명령이 떨어지고 잠시 후, 조용해진 병실은 비로소 평화를 찾았다. 나는 가만히 눈을 감고 가습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수증기를 들이마시는 차수민을 지켜보았다. 몇 번의 심호흡 이후 이윽고 화를 가라앉힌 수민이 내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 저. 활기차고 좋다.”
“에이씨, 김새게 뭔 지랄들이야. 우리 어디까지 했지?”
“어어……. 엉덩이 만지려다 말았어. 아, 맞다.”
나는 뭐냐는 표정을 지은 수민에게 손을 내밀었다.
“명함. 내가 첫 빠따로 받아야지.”
“뭐야. 이게 갖고 싶었어? 이깟 종이 쪼가리 박스째로 갖다줄 수 있어.”
“아, 팔 아파. 빨리.”
잠시 고민하던 수민이 한 장을 뽑아내어 내 손바닥 위에 얹어 주었다. 나는 그걸 소중하게 받아 들었다.
“멋있냐?”
“20대에 사내 이사라니, 가족끼리 다 해 먹는구나 너네.”
“어. 그러니까 나한테 줄 서, 김정현. 굶기진 않을 테니까.”
“백수 됐다고 울먹거릴 땐 언제고 큰소리네요. 이사직 달았다 이거지.”
“내가 언제 울먹거렸어? 없는 말 지어내지?”
“어휴. 됐다, 됐어. 말로는 너를 못 이기지. 아니, 뭘 해도 못 이기긴 해. 그치?”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쾅쾅 치자, 차수민이 내 목덜미를 잡아당겨 가볍게 키스했다.
“아냐. 나 이겨 먹은 건 네가 처음일걸.”
“내가 너를?”
“응. 너 때문에 졸라 짜증 나는 새끼들한테 굽실거리면서 방학을 보냈잖아. 시발, 망할 놈의 협정……. 쉿, 맞아요. 나 때문이기도 했어요.”
해체 과정이 순조롭지만은 않았던 게 분명했다. 내가 뭐라 말하려 하자 수민의 손가락이 입술을 가로막았다. 날름 혀를 내밀어 손가락을 핥자, 킥킥 웃으며 손을 빼던 차수민이 무언가를 떠올린 듯, 삽시간에 얼굴을 굳혔다. 그리고 처음부터 물었어야 할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너 거기엔 어쩌다 오게 된 거야? 나 있는 건 또 어떻게 알고.”
“아. 현식이가, 음. 너 박현식은 알아?”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기대 안 했어. 네가 쓸데없는 이름 따위 외울 리가 없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튼 누가 널 봤대서. 개강 때 오겠다던 애가 갑자기 나이트에 뿅 나타났으니 내가 걱정이 돼, 안 돼? 막 험상궂은 깍두기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다잖아.”
“그래서 프라이팬 하나 달랑 들고 쳐들어온 거야? 뭐가 그렇게 걱정돼서. 내가 분명히 저녁에 보자고 했잖아.”
“저녁에?”
“어. 식당 위치도 찍어 줬잖아.”
“어?”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본 채로 눈만 깜빡거렸다. 띠용? 물음표가 두 머리 위로 떠올랐다. 뭔가 이상하단 걸 감지한 차수민이 미간을 좁힌 채 중얼거렸다.
“내가 분명히 그날 아침에 이민혁한테 말해 놨는…….”
펑!
그때, 밖에서 굉음이 터졌다. 웅성거리는 소리도 함께 들려왔다. 고요하고 평화롭던 병원에 테러가 일어났을 리는 없고 도끼 외 세 명이 아직 병원에서 설쳐 대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같은 생각을 했는지 차수민이 머리를 감싸 쥔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만. 무슨 일인지 보고 올게.”
“으응.”
수민이 나가고 문이 닫히기가 무섭게 드르르륵 거친 소리와 함께 다시 열렸다. 깜짝 놀라 이불을 움켜쥐었다. 뭔 놈의 병원이 이렇게 스펙타클해. 쳐다보니 누군가 헉헉거리며 뛰어 들어왔다. 이민혁이었다.
내가 반가워서 이럴 리는 없고. 드물게 초조해 보이는 몸짓이라 당황해 멀뚱멀뚱 바라만 보고 있자니 성큼성큼 다가와 서랍장을 뒤진다. 곧 그의 손에 내 핸드폰이 쥐어졌다.
“어, 내 폰! 뭐, 뭐 하는 짓이야?”
“내놔 봐요. 나 분명히 보냈어. 문자 못 받았어?”
“무슨 문자?”
민혁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이수민 며칠 일찍 올라간다고. 저녁 약속 잡을 테니까 시간 비워 놓으라고. 레스토랑 위치랑 예약 시간까지 친절하게 찍어서 문자로 보내 줬잖아.”
“안, 안 왔는데. 아, 설마.”
나는 좀비처럼 비틀거리며 민혁의 손에서 핸드폰을 빼앗아 들어 데이터를 켰다. 띠링. 경쾌한 알림음과 함께 긴 문자가 와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얼굴을 굳힌 민혁에게 애써 웃으며 중얼거리다시피 변명했다.
“지금 봤당. 아이폰은 데이터 켜야 MMS 문자 들어와. 주택가 와이파이 빵빵하니까 굳이 안 켜 놨지…….”
이민혁의 반듯한 이마에 핏줄이 투두둑 불거졌다. 나는 애꿎은 이불을 부여잡았다. 남의 영업장까지 쳐들어가 이놈 저놈 건드린 일이 진짜 내 헛짓거리였을 줄은 몰랐다고, 나도.
“미, 미안해. 그럼 문자 보내고 답장 없음 전화라도 주지 그랬어!!”
“당연히 본 줄 알았지. 그리고 당신이라면 당신 목소리 또 듣고 싶었겠어? 방학 내내 그렇게 전화를 해 댔는데?”
그랬다. 차수민의 안부를 묻느라 밤낮으로 졸라 전화했었다. 너무나도 맞는 말이라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시발, 진짜 다 내 잘못이었잖아. 사서 고생을 했구나. 상처가 뜨끔거리며 아파 오는 듯했다. 나는 최대한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됐어요. 반은 내 잘못이니까. 그나저나 그거 생각나요?”
“뭐?”
“형 나한테 빚진 거 있잖아.”
아. 진짜였냐. 빚 얘기……. 왜 이 집구석 사람들은 남에게 빚을 못 지워서 안달일까. 그래도 잘못한 것이 있으니 고깝게 들으려는 태도를 취해 주었다.
“응…… 있지.”
“그거 지금 쓸 테니까. 이수민 오면 말 맞춰 줘요. 알았지.”
그러고는 다시 폰을 낚아채어 냅다 바닥에 후려갈겼다. 당연히 마음 아픈 소리와 함께 액정이 나갔다. 나는 시체를 부여잡고 소리쳤다.
“악! 뭐 하는 거야!”
“나중에 최신 폰 사 줄게요. 이수민 돈이겠지만. 하여튼 내가 전화했는데 폰이 맛이 가서 형이 못 받은 거예요. 어쨌든 나는 문자 남겨 놨고. 알겠죠?”
차수민이 무섭긴 무서운 모양인지 이민혁은 속사포처럼 내뱉었다. 내가 동의를 표하기도 전에 재차 알겠냐고요, 다그치더니 호다닥 등장처럼 재빠르게 뛰어나갔다. 입구까지 달려간 이민혁이 깜빡했다는 듯, 몸을 돌린 채 외쳤다.
“아. 그리고 건강해 보여서 다행. 덕분에 목숨은 건졌네요.”
“그래, 고맙다……?”
바람이 쓸고 간 자리에 휑하게 남겨진 나는 수민이 남기고 간 토끼 사과를 입에 물었다. 달달한 과즙이 마른 혀를 쓸고 갔다. 하루에 몇 번이고 세차게 슬라이딩 되는 건 VIP 병실 문짝 인생 처음 있는 일이겠다 생각하며 들어오는 수민을 반겼다.
“무슨 일이었어?”
“아니, 밖에 웬 자판기가 쓰러져 있잖아. 별일은 아니었어. 우리 무슨 얘기 중이었지?”
“아, 그날 올라오는 거 나한테 말해 줬다고.”
“어. 맞아. 이민혁한테 대신 전해 달라 했는데. 연락, 못 받았어?”
차수민이 내 다친 이마를 쓰다듬었다. 평온해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눈빛이 살벌했다. 나는 자비로운 마음으로 이민혁을 구해 주기로 했다. 그에게 빚을 진 건 사실이니. 이민혁이 날 호성파의 제물로 바치지 않았더라면 차수민과 이러고 있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나는 죽어 버린 핸드폰의 잔해를 보여 주었다.
“아침에 계단에서 떨어뜨려서 먹통이 됐거든. 그래서 몰랐나 봐.”
“…….”
“연락도 안 받고 혼자 착각해서 난리를 떨어 놨네……. 나는, 네가 나 다친 것 때문에 돌아 버려서 미친 생각 한 줄 알았어. 미안. 칠칠치 못한 애인이라서.”
진심이었다. 창피해서 귀가 달아오르는 듯했다. 완전 불청객이 따로 없었다. 내게 피떡이 되게 맞았던 몇몇에게 미안할 따름이었다.
웃으며 받아칠 줄 알았던 수민은 내 앞에 앉아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그의 귀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돌아 버린 건 맞아. 다 쓸어버릴까도 생각했으니까.”
그치. 돌았으니까 멀쩡한 조직을 없애 버릴 생각까지 했겠지. 나는 품속에 고이 넣은 명함 한 장의 무게를 생각했다. 나로 인해 백련상회로 거듭난 흑련상회. 그리고 어린 이사 차수민. 그가 내 눈앞에 고개를 떨구고 있다.
“미안해. 내가 먼저 말했어야 했어. 시발, 서프라이즈를 하는 게 아니었는데.”
“서프라이즈?”
“앞으로 숨기는 거 없이 말하기로 했었던 거 아는데, 진행 상황 하나하나 보고하려고 하니까 네 말이 생각나서.”
내가 무슨 말을 했더라? 생각에 잠기려는 걸 차수민이 가볍게 건져 내었다.
“네가…… 그때 조직 일은 듣고 싶지 않다고 했잖아. 말하지 말라고. 그래서 다 해결되면 말해 주려고 했지.”
이제야 레스토랑 예약이니 뭐니 이민혁이 씨불였던 게 이해가 되었다. 그렇군. 그날이 차수민의 디데이였구나. 입꼬리가 쓰윽 올라가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나는 능글맞게 물었다.
“좋은 데서 분위기 잡고?”
수민이 대답 대신 고개를 모로 돌렸다. 이 귀여운 놈. 나는 아픈 몸을 이끌고 입술을 부딪쳤다. 숨을 고르지 못한 차수민이 나를 억지로 떼어 내었다.
“허억. 아프단 놈이 뭔 힘이 이렇게 세.”
“나는, 나는 네가 그 말을 그렇게 신경 쓰는지 몰랐어.”
그냥 내뱉듯이 던진 말이었다. 네가 다치는 게 무서워서.
“그거 그냥 네가 걱정돼서 그랬던 거야. 조직 일 들으면 네가 다쳐서 나뒹구는 꼴이 자동으로 상상돼서. 내가 너무 괴로워서. 그래서 이기적으로 한 말인데.”
가만 보면 내 말은 안 들어 먹는 것 같으면서도 다 듣고 다 지킨다. 미친 거 아니야, 차수민. 나만 아는 차수민을 넘어 내 말만 들어주는 차수민이라니. 황홀해 돌아가실 지경이었다. 다시 달려들어 키스하려는 걸 단호한 손바닥이 막아 냈다. 거기에 입술을 비비며 말했다.
“있잖아, 나도 궁금한 거 있다. 너 나 튄 거 다 알고 있었으면서 왜 모르는 척했어?”
“너 칼 맞은 거? 그래서 말 한마디 없이 입 싹 닫고 서울로 날은 거?”
“으응. 잘 알고 있네… 미…….”
미안. 말을 끝내기도 전에 차수민이 주둥이를 잡아챘다. 졸지에 입술을 집게손가락에 물린 채 옴짝달싹 못 하는 내게 수민이 얼굴을 들이밀고 짐짓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 보이는 거짓말 살살 해 대는 게 귀여워서 그랬다. 한 번만 더 구라 쳐. 가만 안 둬.”
“아에어 아으어에.”
“뭐라고?”
“알겠습니다. 안 그럴게. 다시는.”
“알았으면 뽀뽀해 봐. 여기.”
차수민이 다리를 꼰 채 턱을 치켜들곤 나를 내려다보았다. 당당한 표정으로 툭툭 제 뺨을 건드린다. 뭐지. 뭐 하자는 플레이지. 일단은 시키는 대로 쪽, 입술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고개를 살짝 돌려 가며 입을 벌린다.
“들어올 때 문 잘 잠갔어.”
“……?”
멀뚱히 보고만 있자 으르렁 신경질을 낸다.
“아, 답답한 새끼야. 아까 못했던 거 하자고.”
“아하. 오키오키.”
그럼 알아듣게 말하지. 주둥이 철벽 방어 하길래 끝난 건 줄 알았잖아. 히죽 웃으며 얇은 손목을 낚아챘다. 윽. 꿰맨 지 얼마 안 된 상처가 아파 왔으나 잠시뿐이었다.
침대에 살포시 안착한 차수민을 소중한 먹잇감 다루듯 조심조심 쓰다듬었다.
“차수민. 그동안 어디 안 나가고 집에만 있었어? 오랜만에 보니까 더 뽀얘졌네.”
본격적으로 식사에 들어가기에 앞서 애피타이저로 이곳저곳 쪽쪽 입을 맞췄다. 흰 얼굴이 홍당무처럼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그래, 나는 이게 좋더라. 냉철하기 짝이 없는 인성 나가리와 수줍어 어쩔 줄 모르는 두 사이의 갭. 유혹은 먼저 시작해 놓고 두 팔을 들어 올려 얼굴을 가린다.
“야, 얼굴은 보여 줘야 예의지.”
차수민의 두 손목을 잡았다. 싫었다면 이미 난 침대 밑바닥에서 나뒹굴었을 테지만 얌전히 얼굴만 붉히고 있는 꼴이 요망하기 짝이 없었다.
“수민아. 다음엔 침대에 묶여 볼래? 아, 오늘은 안 돼. 보다시피 몸뚱이가 넝마 조각이라.”
“이 미친.”
은근하게 속삭이자 목덜미가 따끔하다. 이를 세워 잘근잘근 깨문다. 큰 타격도 안 되는 공격에 웃음만 나왔다. 너 지금 나 자극만 하고 있어, 알아?
“아, 아파. 나 환자잖아.”
우는소리를 하니 갑자기 아랫도리를 잡아 온다. 손끝으로 불거진 혈관을 건드리자 몸이 절로 튀었다. 읏.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자 그의 능글맞은 비아냥이 날아들었다.
“환자가 뭐 이렇게 건강해? 가만히 둬도 혼자 가겠어, 응?”
너를 이길 수가 없다, 정말. 끄응. 어쩔 수 없이 귓불을 말랑말랑 굴려 가며 핥아 주었다. 흥분이 안 된다면 거짓말이겠지.
눈뜬 순간부터, 그렇게 보고 싶었던 차수민의 옆선이 눈에 들어온 순간부터, 그 긴 눈매를 아래로 접으며 달콤한 말을 속삭이던 그 순간부터 이미 나는 주체할 수 없이 흥분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눈치 없는 방해꾼들이 있었지만 쓱쓱 몰아내니 다시 피가 몰려왔다.
서툰 손길로 차수민의 옷깃을 풀었다. 흥분해서인지 머리에 피가 돌아서인지 약 기운 때문인지 자꾸만 미끄러지는 손가락을 픽 웃은 차수민이 맞잡아 함께 단추를 풀어 가기 시작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너는 이거 벗겨야지.”
차수민의 손을 내 환자복 가슴팍에 올려놔 주었다. 그리고 먼저 윗옷을 벗은 차수민의 말랑한 가슴에 얼굴을 묻고 살내음을 호흡했다. 간지럽다며 머리통을 밀어 냈지만 힘으로 버텨 냈다. 곧추선 수민의 젖꼭지에 입을 맞추었다. 빳빳하게 존재감을 알리는 러브 벨이 귀여웠다.
“우리 폰섹할 때, 내가 빨아 준다고 했었잖아. 약속 지킬게?”
혀로 살살 돌기를 굴리며 입에 담자 파들파들 애처롭게 서 있던 유두가 음습하고 축축한 혀 아래 몸을 숨겼다. 안쪽부터 끈적하게 젖어 간다. 으흣, 작은 신음을 뱉은 차수민이 가슴에 붙은 괴물과 싸워 가며 드디어 내 병원복을 벗기는 데 성공했다.
“힘들었지. 칭칭 감아 놓은 게 많아서.”
“어. 환자 데리고 이래도 되는지 모르겠, 아.”
모르겠긴. 이미 유혹이란 유혹은 다 해 놓고 어디서 발을 빼. 수민의 맨 등을 안아 올렸다. 근육을 쓰자 살짝 어깨가 아파 왔지만 따듯한 온기가 살갗에 닿는 순간부터 다시 행복해졌다. 수민이다. 차수민이 여기 있다. 바로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거리에 네가 있다.
새끼 코알라처럼 찰싹 붙은 수민이 손을 뻗어 내 성난 등짝 위로 가져갔다. 그는 꿈틀거리는 근육을 하나하나 골라내려는 듯이 매만졌다. 맨살에 닿는 그 지분거리는 손길이 또 꼴려 가지고 심호흡을 했다. 참기 힘들어. 바로 싸 버리지 않기 위해 우람하게 덩치를 더해 가는 기둥을 수민의 마른 허벅지에 비벼 댈 수밖에 없었다.
“김정현. 몸도 좋아.”
내 아랫도리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밀착된 곳 아래로 손을 넣어 내 뱃가죽을 쓸어내리던 수민이 말했다. 드레싱 부위가 닿았는지 살짝 몸을 굳힌 차수민이 다시 내 목을 끌어안았다.
“그러니까 다치지 마. 예쁜 복근 흉 지는 거 싫어.”
“내 몸 좋아?”
나는 그의 긴 목덜미에 입을 맞추며 버클을 풀었다. 앞섶이 축축하게 젖은 드로즈가 드러났다. 나는 장난스럽게 튀어나온 부위를 튕겼다. 와락 안겨 들면서 죽으려고 한다.
“이렇게 젖었으면서 아닌 척 뭐야.”
선단에서 흘러나온 프리컴으로 이미 질척해진 속옷 안을 휘저으며 속삭였다. 그러자 한마디를 안 지는 수민은 내 페니스를 손바닥으로 뭉근하게 뭉개며 뻔뻔하게도 뭐가? 하고 반문했다. 그의 얼굴은 분홍색으로 물든 지 오래였다. 오지게 흥분했으면서 안 한 척 전문.
“수민아. 너 다 티나. 여기 이렇게 세우고 태연한 척해 봤자…….”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목덜미를 물렸다. 읏. 순간 쌀 뻔했다. 흥분에 녹아 버려 말랑해진 줄만 알았는데 제법 사나웠다.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나는 일부러 수민의 음낭을 건드리며 뒤를 향해 손가락을 가져갔다. 입구를 찔러 오는 손가락에 놀라 오므라든 구멍의 압박이 느껴졌다. 오랜만이라 꽉 물린 탓에 진입이 힘들었다.
“헉. 야, 미쳤어?”
“왜애.”
“여기가 어디라고 끝까지 가려고 해.”
목소리를 죽여 가며 화를 낸다. 나는 어이가 없어 손가락 끝마디까지 푹 집어넣었다. 반쯤 벗겨진 속옷 사이로 튀어나온 수민의 성기가 귀엽게 흔들렸다. 그 꼴이 재밌어 푹푹, 자꾸만 찔러 댔다. 안에서 손가락이 널뛰자 이제는 나를 밀어 낸다.
“아읏. 야!”
“아니, 너 정말 웃기다니깐? 위아래로 홀라당 벗어 놓고 어디까지 갈 생각이었는데 그럼.”
“으읏. 그만해. 나는 대딸에서 끝날 줄 알았지. 옆구리에 구멍 난 놈이 뭘 더 하리라곤. 앗.”
옆구리에 구멍 난 놈은 드로즈만 걸친 발칙한 놈을 안아다가 제 허벅지 위에 앉혔다. 차수민은 속옷이 골반 라인에 걸쳐져 까딱거리는 성기만 내놓은 채로 발딱 선 내 치골과 마주 보는 상태가 되었다.
“뭘 더 하리라곤 상상도 못했…….”
“거짓말.”
블라인드 사이로 따듯한 볕이 아주 잘 들어오고 있었다. 우리는 노골적으로 쏟아지는 햇빛을 받으며 한참을 눈 맞춘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의 체온이 햇빛에 타 버리기 전, 나는 조용히 한마디를 내뱉었다.
“알았잖아.”
그 말과 더불어 우리는 퓨즈라도 끊긴 것처럼 달려들어 서로의 성기를 비벼 댔다. 창피한 줄도 모르고 몸을 흔들어 대는 두 사람을 노곤한 늦여름 공기가 따듯하게 데워 주고 있었다.
“흐읏. 응. 정현아.”
차수민은 어디서 끝까지 가려고 하냐며 핀잔주던 건 생각도 안 나는지 눈이 반쯤 풀려서는 엉덩이를 앞뒤로 마찰하고 있었다. 그 꼴을 보면서 참을 수 있다면 나는 김정현이란 이름 석 자를 버려야 할 것이다. 사실은 아까부터 차오른 팽창감에 몇 번이고 입술을 깨물고 있는 터였다. 방해꾼이 없었더라면 지금쯤 침대 시트는 매트리스까지 젖고도 남았을 것이다.
수민이 허리를 튕겼다. 아, 시발. 못 참아. 아랫입술을 짓이기며 신음을 내뱉자, 차수민의 배 위로 투둑, 하얀 액체가 떨어졌다.
“하…….”
황홀경이었다. 여전히 골반을 흔드는 그 흰 배를 뭉클하게 우윳빛 액체가 더럽히고 있었다. 나는 아직 뜨거운 그것을 손가락으로 천천히 문댔다. 내 정액은 햇살과 함께 차수민의 뱃가죽 위에 얇게 발리며 흔적을 만들어 냈다. 예쁘다. 마음에 들어. 나는 뒤섞이는 정복감과 소유욕으로 그의 나신을 감싸 안았다.
“하아, 정, 정현아…… 나 아직 못 갔는데.”
허벅지에 엉덩이 골을 비벼 대는 그는 부족한 쾌감에 움찔움찔 떨다가 거의 뒤로 넘어갈 지경이었다. 안달이 나서 안겨 드는 차수민을 토닥였다.
“알고말고. 걱정 마. 나도 이렇게 끝낼 생각은 없거든.”
드로즈를 발목까지 벗겨 내고 두 다리 사이로 목을 끼워 넣었다. 졸지에 허리가 떠 버린 수민이 불안하게 눈을 마주쳐 오자 안심하라는 의미로 엉덩이를 두어 대 툭툭 쳐 주었다. 친절을 베풀어 베개까지 밀어 넣어 주었다. 좀 편해?
“야. 너 상처 터지는 거 아니야? 이봐요, 너 방금 눈떴어요.”
“나 완전 말짱한데? 원래 내가 튼튼한 몸뚱이 빼면 시체잖아. 잔말 말고 힘 빼세요.”
꾹 다문 애널을 조심조심 풀어 갔다. 가위 모양으로 만든 손가락 두 개를 넣고 천천히 벌려 가니 조금은 넓혀지는 것이 느껴졌다. 손을 세워 내벽을 긁어내리자 까무러칠 것 같은 신음이 들려왔다. 나도 그리웠어, 수민아. 중얼거린 채 두 손가락을 시계 방향으로 휘저었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조급했다. 천천히 시간 들여 앞도 빨아 주고 뒤도 빨아 주고 싶었지만 환자분, 드레싱 할 시간이에요! 칼 같은 목소리와 함께 갑자기 열릴 저 문이 무서웠다. 그 전에 우리 수민이, 얼른 한 발 빼 줘야지. 나는 사정하지 못한 채 괴롭게 부피감을 더해 가는 그의 것을 쓰다듬어 주었다.
뭉개진 정액이 그의 배 위에서 반짝반짝 빛났다. 다리는 내 목에 건 채 얌전히 누워 헐떡거리는 수민을 보니 내 건 따로 세울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눈앞의 존재가 주는 시각적 자극에 알아서 무게감을 더해 가고 있었다.
대충 구멍 입구에 귀두 끝을 가져다 댄 채 나는 수민의 허벅지에 입을 맞추었다.
“그럼, 들어갈게.”
“으응, 아앗. 아!”
좁고 빽빽했다. 뭐라도 발라 볼 걸 그랬다. 그러나 앞뒤로 몇 번 넣고 빼니 조금은 익숙한 감각이 돌아왔는지 죽을 것처럼 조여 대진 않았다. 나는 얼굴을 가린 수민의 팔을 잡아 치웠다.
“왜 자꾸 가려. 느끼는 거 보고 싶단 말야.”
그는 부끄러운 듯 자꾸만 바르작거렸다. 주인의 의사와 다르게 수민의 구멍은 내 기둥을 꿀꺽꿀꺽 삼켜 대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감고 고팠던 감촉을 느꼈다.
“여기를 건드리면 죽을 것같이 허리를 꺾곤 했는데.”
속삭이며 동시에 퍽 치켜올리자 차수민이 긴 목이 뒤로 넘어갔다.
“한 달 만인데 어때? 여전히 여기가 좋아?”
“아아흐. 좋, 좋아…….”
“여전히 정현이가 좋아?”
“읏, 흐윽. 응. 좋아…….”
그렇지. 그게 듣고 싶었어.
나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수민의 오금을 잡아 내렸다. 음낭이 엉덩이에 맞부딪히며 철벅철벅 음란한 소리를 만들어 냈다.
복도에서 몇몇이 지나다니는 발소리가 들려왔지만 오로지 신경은 침대 위 예쁘게 누워 있는 차수민에게 향했다. 정성스럽게 내부를 헤집었다. 녹녹한 압박감이 기분 좋게 나를 눌렀다. 너는 언제나 나를 받아 줘. 생각해 보면 쭉 그랬어. 투덜대고 사납게 굴면서도 결국은 나를 받아 줘.
수민의 엉긴 울음이 덩어리가 되어 튀어나오기 전에 부어오른 돌기를 쑤셨다. 우리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어쩌다 내 삶에 이렇게 깊숙이 들어와 버렸어?
“정, 정현. 아흣, 김정현…….”
아래에서 정신없이 흔들리며 차수민이 말했다. 신음과 뒤섞여 주문같이 들리는 말이었다.
“나…… 절대 너 안 놔 줄 거야. 나중에, 읏. 후회하면 안 돼.”
나는 웃으며 땀에 젖은 그의 머리를 쓸어 주었다.
“그러면? 놔 주려 했어? 평생 네 따까리 한다고 했잖아.”
여유롭게 허리를 돌리며 이제는 거의 울먹이고 있는 수민을 괴롭혔다. 그의 골반을 부여잡고 온몸을 쑤셔 넣었다. 넘어가는 숨소리가 사랑스러웠다. 한 번 더 세차게 파고들었을 때, 그의 발가락이 뻣뻣하게 서는 것이 느껴졌다. 수민은 고개를 모로 돌려 제 나신 위에 쿨럭이며 정액을 쏟아 냈다.
나는 부드럽게 턱을 잡아 그 시선을 내게 맞추게 했다. 풀린 눈이 아름다웠다. 구멍이 움찔거리며 수축하는 게 느껴졌다. 읏. 짧게 신음을 내뱉었다. 그의 안을 내 것으로 채우며 쾌락으로 떨리는 손으로 수민의 눈매를 훑었다. 종신 계약 완료야.
“……좋았어?”
차수민을 곰 인형처럼 껴안은 상태로 침대에 푹 고꾸라져 물었다. 힘들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진통제, 진통제. 나는 무통 버튼을 눌러 댔다.
“뭐…… 부상 투혼했으니 플러스 50점.”
쾌락에 젖어 끊임없이 신음을 내뱉던 차수민은 어디 가고 멀끔하고 새초롬한 표정의 도련님이 다시 등장했다. 그러나 그는 무겁게 눌러 오는 내 몸뚱이를 밀어 내지 않았다.
우리는 가슴팍을 맞댄 채 서로의 심장 소리를 들었다. 정사 과정 중 제일 좋아하는 부분이었다. 두 심장이 같은 시간에 서로를 향해 뛰고 있다는 사실은 묘한 꼴림 포인트이자 가슴 한구석이 먹먹해지는 뭔가가 있었다. 함께라는 사실이 사무치게 간지러웠다. 나는 아래 깔린 수민을 꼭 껴안으며 말했다.
“수민아.”
“정현아.”
동시에 수민의 입에서 내 이름이 흘러나왔다. 그는 멍한 얼굴로 천장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고사리 같은 손이 뱃가죽을 훑어 왔다. 이 작은 행위에서도 행복감을 느끼며 땀으로 젖은 그의 이마에 키스했다.
“너도 같은 생각 했어?”
한 판 더 뛸 생각으로 분위기 잡으며 묻자 그가 홱 고개를 돌려온다. 그러나 예상과 다르게 마주한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정현아. 너 피 나는 것 같아…….”
“엉?”
수민이 붉은 액체로 촉촉하게 물든 손을 들어 올렸다. 헙. 우리는 당황해 숨만 골랐다. 겨우 정신을 차린 수민이 내 돌덩이처럼 굳어 버린 몸뚱이를 겨우 굴려 내어 수술 부위를 확인했다.
“시발…… 맞아. 의, 의사 불러야…….”
“너, 너 일단 옷부터 입고!”
허둥지둥 옷을 꿰어 입은 차수민이 너스콜을 눌러 댔다. 띵동띵동. 다급한 발걸음이 가까워지기까지 나는 차수민의 차가워진 손을 꼭 잡은 채로 누워서 그의 턱선을 관찰했다. 예쁘게 잘 빠졌군. 하잘것없는 생각을 하며 헛웃음을 삼켰다. 급하게 주워 입어서 엇나간 단추 하나가 달랑거렸다. 그것마저 귀여워 보이니 중증이 틀림없었다. 정현아, 조금만 참아. 조금만……. 울먹이는 눈동자도 부어오른 입술도 너무너무 귀여워. 아무래도 퇴원일은 연장될 것 같다.
✲ ✲ ✲
“무시무시한 회복력입니다. 젊음이 좋긴 좋네요.”
의사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병원 문지방을 밟을 수 있었다. 이게 얼마 만의 쾌적한 공기인지. 바쁘게 여닫히는 자동문 앞에서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열일곱의 김정현이 그랬던 것처럼 그 문을 나오며 가장 먼저 차수민의 번호를 찾았다. 발신음이 세 번 울리기도 전에 익숙한 배기음이 들렸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커다란 오토바이 위에 걸터앉아 고갯짓으로 뒷자리를 가리키는 그가 있었다. 열일곱의 차수민이 그랬던 것처럼.
나는 활짝 웃으며 달려가 그가 내미는 헬멧을 받아 들었다.
“야. 옷이 그게 뭔데? 대학 와서 좀 나아진 줄 알았더니 다시 퇴행했냐?”
설마 했는데. 가까이서 보니 가관이다. 나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화려한 꽃무늬와 함께 황금색 용이 박힌 스키잔을 잡아 흔들었다. 차수민의 곱상한 얼굴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나 없이 쇼핑하니까 다시 이딴 옷이나 사들이는 게 분명했다.
“그러는 너는 환자복 그대로 입고 나왔냐? 패턴 뭔데.”
한 마디를 지기 싫어하는 차수민이 대꾸했다.
“이거 내 옷 아니거든? 네 부하 직원이 띡 갖다 놓고 간 거거든?”
“발끈하기는. 아휴. 그래요. 뭘 입어도 참 잘 어울려요, 우리 정현이. 자, 이제 잔말 말고 좀 타지?”
“아, 사이즈도 틀렸어. 헐렁거리잖아. 너 내 사이즈 모르지.”
“왜 몰라? 얼마나 많이 안아 봤…….”
“자, 출발.”
바이크의 궁둥이를 탁 치자 평생 병원 주차장에 붙박여 있을 것 같던 오토바이가 스무스하게 전진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병원 신세였다. 그동안 몇 번이나 붙어먹었는지 손가락으로 셀 수 없었다.
상처가 또 터질세라 살금살금 눈치 보며 조심스럽게 매달려 오는 차수민이 너무 귀여워서 하루에도 몇 번씩 벌떡 일어나는 것을 달래느라 진을 빼곤 했다. 김정현의 세포들이 젖 먹던 힘까지 끌어 올려 기적 같은 회복력을 보여 준 것은 빨리 이 좁아터진 병실 문을 박차고 나가 신음과 교성이 터지는 자유를 만끽하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른다.
그나마 병실이 1인실이라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르겠다. 돈 많은 수민아, 고맙다.
“우리 어디 가?”
내 물음에 차수민이 기다렸다는 듯이 열일곱의 김정현이 했던 대사를 들려주었다.
“좋은 데 가려고 했는데 네 꼬라지가 창피해서 그렇겐 못 하겠다.”
“뭐, 내가 창피해? 야. 너 만날 나 잘생겼다고 하잖아.”
“내가 언제?”
“햐 말 바뀌는 것 봐라. 옷만 벗겨 놓으면 정현아 네가 제일 잘생겼어, 너무 좋아, 빨리 들어와 재촉해 대는 놈이, 엇.”
멀쩡히 신호를 기다리던 바이크가 가스 불이라도 잊어 먹고 온 것처럼 급출발하는 바람에 차수민의 낭창한 허리춤을 꽉 부여잡지 않을 수가 없었다. 멀대같이 커다란 놈이 세상 여리여리한 등판에 매달려 가는 꼴이란 참 굴욕적이기 짝이 없었다.
좀 더 회복하면 내가 오토바이부터 배운다. 이를 악물고 생각했다.
“진짜 어디 가는데?”
“오늘은 좀 구린 곳. 네 덕분에 한 학기가 떴잖아. 시간은 충분히 많으니 구린 곳 먼저.”
본의 아니게 입원을 하는 바람에 차수민과 함께하는 러브 캠퍼스 라이프는 무산되고 강제 휴학을 해야 했다. 그의 말대로 남아도는 게 시간이긴 했다. 그리고 정력과 사랑…….
아, 너무 좋아……. 차수민의 등 뒤에서 큰 몸을 구기고 비비적거렸다. 번쩍이는 스키잔 너머의 몸뚱이가 뻣뻣하게 굳는 것이 느껴졌다. 어쩐지 속도가 더 빨라지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짓궂게 웃으며 차수민의 허리를 꽉 잡아챘다.
“그러네. 시간 많으니까 우리 방학 때 못 갔던 여행도 가고 재밌게 보내자. 어?”
“으응……. 그러든가.”
귀엽다니까. 잡아 삼킬 것처럼 직진해 오다가도 조금만 밀어붙이면 쑥스러워한다. 나는 붉게 물들기 시작한 그의 뒷목에 시선을 고정했다.
저기에 코 박고 싶어. 거추장스러운 헬멧을 벗어 던지고 왕, 한 움큼 이빨을 박아 넣고 싶었다. 길고 흰 목에 내 흔적을 거하게 박제하고 싶었다. 누가 봐도 임자 있는 것처럼 보이게 붉은 목에 더 붉은 잇자국을 남겨 놓고 싶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피가 아래로 쏠렸다. 헉. 나는 도로 위를 질주하는 좁아터진 바이크 위에서 최대한 엉덩이를 뒤로 빼려고 들썩거릴 수밖에 없었다.
“김정현…….”
“미, 미안. 네가 자꾸 귀엽게 구니까…….”
“……지금은 안 돼. 거의 다 왔으니까 애국가라도 불러.”
생각나는 노래 소절을 몽땅 꺼내 와 중얼거린 덕에 겨우 말짱하게 땅을 밟았다.
도착한 곳은 휘황찬란한 음식점이었다. 간판 대신 걸려 있는 거대한 생선 모형이 아니었다면 흡사 나이트라고 해도 속을 것 같은 외관이었다. 네온사인을 얼마나 걸어 놨는지 형광 불빛에 눈이 멀 지경이었다. 나는 번쩍이는 미러볼을 가리키며 물었다.
“여기……, 뭐야?”
“음. 뭐일 것 같은데?”
“와. 나 방금 생선 대가리랑 눈 마주쳤어. 저거 눈 깜빡이네……?”
차수민은 말없이 놀이공원에 온 것처럼 들쑤시고 다니는 내 손목을 잡아끌었다.
딸랑, 어울리지 않게 청아한 종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 정말이지 어울리지 않는, 아니 어쩌면 너무 어울리는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푹 숙이며 입을 모아 외쳤다.
“어서 오십쇼, 손님!”
“…….”
차수민은 뒷걸음질 치는 나에게 환한 미소를 보여 주었다.
“어때? 교육 잘 시켰지.”
“산골에 틀어박혀 몇 달간 빡세게 CS 연수만 받았지 말입니다.”
도끼가 해맑게 웃으며 메뉴판을 가지고 왔다. 뒤에서 각 재고 서 있는 사람들 중 한 사람과 눈이 마주치자 기다렸다는 듯이 모두 일제히 허리를 꺾었다.
“퇴원 축하드립니다, 행님.”
“축하드립니다, 행님!”
언제부터 ‘행님’이란 칭호를 얻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가게가 떠나가라 전하는 진심 어린 축하에 정말 눈물이 다 날 지경이었다. 덕분에 어디 구경 났나 궁금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미는 룸에 틀어박혀 있던 다른 손님들과 얼굴을 마주해야 했다.
십여 분간 ‘네가 도련님 구하러 그 한 몸 애끼지 않고 왔다며? 비록 헛짓거리였지만’, ‘이젠 뭐 든든하네. 도련님 뒤를 맡겨도 되겠어. 비록 헛짓거리였지만’ 따위의 인정과 격려 어린 말들을 듣고 나서야 방에 들어갈 수 있었다.
“제일 비싼 거.”
수민의 주문에 윙크를 날린 도끼가 문 너머로 사라지자 겨우 한숨을 돌릴 시간이 생겼다. 나는 입구부터 묻고 싶었던 것을 쏟아 냈다.
“뭐야? 개업했어?”
“응.”
“김정현이랑 착하게 살아 보려고?”
히죽 웃으며 물으니 뻔뻔한 태도로 응대해 온다.
“뭐, 노력은 해 보려고. 합법적 사회인으로서 김 누구 씨랑 알콩달콩 살아 보려고요.”
“감동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보여? 나 눈물 나려고 그래.”
“어디서 건조하기 짝이 없는 눈알을 들이민담.”
차수민이 웃었다. 웃는 차수민 죽인다, 정말. 나도 히죽 따라 웃었다. 알콩달콩. 정말이지 예쁜 말이었다.
“어쨌든 축하해. 짠 할까? 차수민의 창창한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물컵을 들어 짠, 건배를 했다. 고개를 돌려 이곳저곳을 살피니 살벌한 종업원들과는 어울리지 않게 꽤나 고급스러운 인테리어가 눈에 들어왔다.
“횟집이구나. 나는 워낙 번쩍거리길래 나이트 낸 줄 알았어. 어쩐지 놀러 갔을 때 회만 처맥이드니 다 계획이 있었구나.”
“우리가 칼은 좀 만지잖아. 소질 좀 살려 봤지.”
뼈 있는 농담에 뭐라 대꾸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괜히 물만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그의 말에 힘을 실어 주듯이 밖에서 딸랑 소리와 함께 우렁찬 ‘어서 오십쇼, 손님!’이 재차 들려왔다.
“근데 저거 손님들이 안 무서워하냐……?”
“어. 괜찮더라. 컨셉인 줄 알아. 잘됐지, 뭐.”
응…… 정말 잘됐다. 조폭 물 빠지려면 몇 년은 걸리겠다는 생각을 하며 호랑이가 정성스럽게 서빙해 온 ‘초호화 스페샬’을 한 점 떠 차수민의 입에 갖다 댔다. 윤기가 좔좔 흐르는 참치 대뱃살부터 입에 넣어 주었다. 아이고, 잘 먹네. 올라가는 입꼬리를 힘줘서 내렸다. 아는지 모르는지 그가 우물거리며 말했다.
“퇴원 후 첫 방문지가 구린 곳이라 미안한데, 너한테 꼭 보여 주고 싶었어. 너와 함께하는 새 인생의 서막 같은 거니까 나한테는 의미가 커. 비록 생선 대가리 하나 달린 작은 가게이지만.”
“와. 뭐야. 요즘 자꾸 훅 들어와.”
나는 새빨개진 얼굴을 한 손으로 가렸다. 어디서 멘트 학원이라도 다니는지 심장 한가운데를 찔러 대는 말만 한다. 차수민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대체 뭐가 좋았던 거야?”
“나와 하는 새 인생의 서막. 그 부분.”
리플레이해 줄래? 눈을 느끼하게 뜨고 속삭이니 뺨을 밀어 낸다. 차수민의 입꼬리도 슬그머니 올라간 것을 나는 봤다. 우리는 깔깔대며 회 조각을 서로의 입에 밀어 넣었다. 차수민의 빨간 입술에 평생 맛난 걸 넣어 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새 인생의 서막이라. 본 막도, 종막도 이미 너와 하기로 결심한 지 오래인데. 나는 웃음을 멈추고 속삭였다.
“네 인생의 피날레까지 함께할게. 내 연극의 주인공은 너니까 어쩔 수 없어. 비록 가진 건 몸뚱이뿐이지만, 그래도 예쁘게 봐 주세용.”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차수민의 기다란 눈이 세로로 똥그래졌다. 토끼 아니냐. 나는 장밋빛으로 물들어 가는 토끼의 얼굴을 관찰했다.
눈을 몇 번 깜빡이다가 이내 표정 관리에 성공한 차수민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젓가락을 들었다. 멍청이. 다 티 나. 목 아래가 새빨갛다. 그래도 귀여우니까 골리지는 말아야지.
“음. 나는 가진 건 몸뚱이뿐, 일단 그 부분이 마음에 드네.”
수민이 웃음기를 머금고 내 접시에 회 한 점을 올려 주었다.
“몸뚱어리 하나는 기깔 나지, 네가.”
“마음에 들어? 맞아. 너 내 몸 멋있다고 그랬지. 요거요거 보는 눈은 있어요. 후후. 조금만 기다려. 퇴원도 했겠다, 아주 그냥…….”
넉살 좋게 음담패설을 시작하는데 차수민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차수민의 까맣고 깊은 눈. 잘못 발을 디뎠다간 블랙홀처럼 깊은 저 틈에 빠져들어 닿지 않는 바닥으로 떨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그 바닥에 무엇이 있는지 안다. 따듯하고 보드라운 차수민이 두 팔 벌려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내가 와장창 제 인생에 굴러떨어지기를, 폭신한 쿠션을 깔아 놓고 기대하고 있다.
이미 가진 거라곤 몸뚱이밖에 없는 이 몸, 그를 향해 떨어지고 있다. 내 벌어진 입술 사이로 정제되지 않은 욕망이 흘러나왔다. 조종이라도 당한 것처럼.
“입 맞춰도 돼?”
“되겠니. 나 여기 사장이야.”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가볍게 내 의견을 묵살한 차수민이 대신 내 뺨을 가볍게 쓸었다. 그러곤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치켜들었다.
“아. 그리고 인생의 피날레. 그 부분도 마음에 들어.”
에잇, 더는 못 견뎌. 허락하건 말건 키스를 퍼부으려고 뺨을 붙잡자 차수민은 젓가락으로 내 손을 잡아 내렸다. 그러곤 진지한 목소리로 말한다.
“정현아. 우리 종신 계약 맺었잖아.”
얘가 갑자기 왜 그 얘기를 할까. 입도 못 맞추게 하면서 섹스 중에 한 얘기를 왜 꺼내냔 말이다. 머리를 굴리며 대답했다.
“어. 평생 네 따까리 하기로 했지. 제가 가진 게 일단은 몸뚱아리뿐이니까요.”
“그거 진짜야?”
이게 지금까지 한 얘길 귓등으로 들었나. 확신을 요구하는 듯한 물음에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피날레 너랑 맞는다고 했잖아. 다시 말해 줘? 네 밑에서 평생 구르겠다고.”
구른다는 건 여러 의미가 있는데 특히 침대에서…… 능글맞은 목소리로 채 설명하기도 전에 차수민이 짝, 손뼉을 쳤다.
“잘됐다.”
나는 맹하게 그의 움직임을 두 눈으로 좇았다. 수민이 방 한구석에 처박아 놓은 가방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접시들을 쫙 밀고 팔랑팔랑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뭐야?”
불안감이 엄습했다. 수민이 활짝 웃었다.
“우리 법무법인 한 자리 비거든. 차 이사님 소유가 이 구린 횟집만 있는 게 아니라서 말이야.”
무슨 얘기를 하는지 잘 모르겠어. 눈만 끔뻑거리며 친절한 설명이 나오기를 기다리자 얕게 한숨을 쉬더니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너 말이야. 법학과 간 게 온전히 네 선택이었다고 생각해?”
“내 손으로 원서 썼는데……?”
“에휴. 귀여운 정현아.”
차수민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뭐, 여튼. 네가 영 꼴통은 아니더라. 내가 콩깍지가 씌어서 하는 말은 아니고, 정말로 김정현 몸뚱이 쓸 만해. 그리고, 이 머리도. 솔직히 뺀질거리던 양아치가 공부 조금 한다고 대학 가겠니. 그러니까 너에게서 가능성을 보았다, 이 말이야.”
“공부 조금이라니! 나 피똥 싸며 열심히 했거든?”
“그래그래. 기특해요. 더 열심히 해서 가면 되겠다.”
“어디를?”
“로스쿨.”
내가 잘못 들었나 싶어 나? 하고 자신을 지목하자 고개를 끄덕여 온다. 허, 허. 나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차수민은 진지했다. 어느새 내 손에 만년필이 쥐어져 있었다.
“딱히 하고 싶은 것도 없어, 계획한 것도 없어. 그럼 차수민 따까리 하는 수밖에 없지. 뭐야, 그 표정은. 나랑 같이 일하는 거 싫어? 나를 위해서 일하는 게 그따위로 머뭇거릴 만큼 존나게 싫은 거야? 김정현, 나 약간 빈정 상할 뻔했어.”
“아, 아니!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럼 사인해.”
“근데 이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닌 것 같…….”
“사인.”
펜이 허공에서 방황하자 쓰읍, 하고 재촉해 온다. 슬쩍 눈치를 보자 매섭게 눈을 홉뜨고 있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어쩐지 웃음이 났다. 예전 같았으면 등줄기에 서늘함이 스쳤겠지만 지금은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그 모습이 귀엽게만 느껴졌다.
그래, 내 연극의 주인공이 너이긴 하지. 그를 처음 만나고, 그의 삥을 뜯었던 순간부터 내 미래는 예정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겁 많은 소년 김정현을 오롯이 드러내 보일 수 있었던 유일한 사람. 자꾸만 뒷걸음질 치는 내 머리채를 붙잡고 코앞까지 끌고 가, 감은 눈을 바로 뜰 수 있게 만든 사람. 누군가를 위해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알게 해 준 사람.
김정현은 결론에 도달했다. 그런 사람이 까라면 까야지, 별수 있나.
“대충 읽어는 보고….”
빼곡히 적힌 글씨를 훑으려 종이를 집어 드는데 시야가 어두워지더니 뺨에 말랑한 것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멍하니 손을 들어 올려 그의 입술이 지나간 자리를 훑었다. 찌릿찌릿했다. 상 너머에서 그가 만족스럽게 웃고 있었다. 나는 홀린 듯이 펜을 휘갈겼다.
그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잉크가 채 마르지 않은 서류를 냉큼 빼앗아 갔다. 사기꾼이 따로 없었지만 이미 코가 꿰어 버린 것을 어쩌겠는가.
“좋아. 열심히 해서 차수민 전속 따까리가 돼 보라고. 학비는 몸으로 일해서 갚아.”
“몸으로 일한다는 건 여러 의미가 있을 텐데…….”
아직도 아른거리는 입술의 감촉을 떠올리며 뺨을 매만지며 중얼거리자, 차수민이 은근한 미소를 지은 채 다가왔다.
“네가 생각하는 그 의미가 맞을 거야.”
그리고 조그마한 카드 한 장을 내밀었다. 그게 호텔 키라는 걸 깨닫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차수민은 점점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내 얼굴을 즐거운 듯이 감상하며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정현아, 조급해하지 마. 우리 시간 많다고 했잖아. 천천히 그동안 못했던 것들을 하자.”
그의 말마따나 시간은 넘치고 흘렀다. 6년의 세월을 아깝게 허비해 버렸지만 어쩌면 지금을 위한 초석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무한했다. 지금 막 서막이 올랐을 뿐이니까.
지금 막 한 발을 뗀 우리에게 커튼콜까지의 거리는 너무나 멀어 보였다. 아니. 무슨 자신감인지 끝이 있을 거란 생각도 나지 않았다. 나는 앞으로 펼쳐질 수없이 많은 에피소드와 애드리브를 상상하며 차수민의 반짝반짝 빛나는 까만 눈동자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오늘 밤, 뜨겁게?”
장난스럽게 물어 오는 그의 얼굴을 감싸 쥐고 예쁜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키득키득 웃으며 속삭였다.
“너무 좋아.”
부디 끝나지 않을 연극이기를 간절히 바라며. 우리는 이마를 맞대고 활짝 웃었다. 김정현의 따까리 인생, 드디어 서막이 올랐다.
Fin.
당신의 따까리 2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