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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7 초대받지 않은 손님 (9/15)

CHAPTER 7

초대받지 않은 손님

요 근래 차수민은 정말로 노력했다.

“밤을 새웠더니 좀 피곤하네. 머리가 지끈거려.”

“여전히 일이 많은가 보네. 어깨 기댈래?”

“응.”

처음엔 기뻤다. 독선적이고 힘든 티를 절대 안 내는 차수민이 입을 열었다는 사실이 고마웠다. 무릎 꿇고 빌어도 무시하기 일쑤면서 섹스 중에 한 말은 들어주는 이상한 차수민.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놈이 귀여운 구석이 있구나 싶었다.

우리는 열흘을 달달하게 보냈다. 나는 쏘아 죽일 것처럼 노려보는 시꺼먼 놈들의 시선을 피해 틈만 나면 입을 맞추려 했고, 그럴 때마다 무뚝뚝하게 내 얼굴을 밀어 내던 차수민은 날이 저물기가 무섭게 슬금슬금 본인 방으로 날 끌어들였다.

“정현아.”

“응?”

“좋아.”

너. 네가 좋아. 그가 내 품속으로 파고들며 속삭였다. 그렇게 차수민은 내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는 새로운 취미를 들였다.

“네가 그렇게 나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즐기면 되잖아. 뭐가 어려워? 수민이 내 뺨에 촉, 입술을 가져다 댔다. 나는 입을 벌려 깔짝대는 그의 통통한 입술을 앙, 삼켜 버렸다. 막 시작한 커플치고는 달콤하고 스릴 넘치는 연애였다. 은근한 걱정이 스멀스멀 고개를 들기 전까지는 말이다.

“무슨 일 있었어? 점심에 안 보이던데.”

“아. 서류 처리할 게 남아 있어서. 아버지가 조져 놓은 새끼들이 숨이 붙어 있었나 봐. 귀찮게 됐어. 경찰에 들어가기 전에 손써 놔야 해서 좀 스트레스야.”

“콜록…… 콜록.”

“왜 그래. 사레들렸어?”

마시던 차가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분간도 안 되었다. 평온한 어조로 일상적이지 않은 벗어난 업무를 설명해 주던 수민은 걱정스레 내 등을 두드렸다. 나는 눈물을 닦으며 물었다.

“아 그래? 손을, 손을…… 어떻게 쓸 건데?”

“글쎄. 아무래도 (삐-) 해서 (삐-) 하고 (삐-) 해야겠지.”

“아…… 사람에게도 (삐-)를 할 수가 있는 거였구나…….”

나는 시선을 먼 산을 향해 돌렸다.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치였다.

나는 열흘 전,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그때, 차수민과 몸을 섞으며 애원했었다.

‘지금은 그런 사이니까 앞으론 다 얘기해 주면 안 돼? 아픈 것도 힘든 것도 나한텐 얘기해 주면 안 돼? 나한테 숨길 필요 없어. 네 집안 대소사까지는 바라지도 않아. 그냥 작은 것도 괜찮으니까 혼자 품으려 하지 말고 말해 줘.’

그리고 내 요구에 부응하기 위하여 그는 조금씩 변하고자 부단히 노력 중이었다. 나를 위해서. 하루의 일상을 미주알고주알 늘어놓았고 속마음도 조금씩 나누어 주었다. 그 모든 노력이 사랑스러웠고 고맙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 불쑥 들어오는 어퍼컷쯤이야 흐린 눈으로 넘기려고 했다.

그러나 친절한 차수민은 과할 정도로 일거수일투족을 낱낱이 내게 알려 왔다. 매일매일 상세하게. 순전히 나를 생각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말이다…….

“오늘은 육손파 보스 손가락 좀 잘라 주고 올게. 두 시간이면 돌아올 거야. 영감의 부재가 이렇게 클 줄은 몰랐어. 짜증 나게…… 빨리 갔다 올 테니까.”

“으응 그래…… 잘 다녀와…….”

내가 원했던 건 차수민이 기대는 법을 배우는 것이었다. 집착 광인처럼 어디를 갈 것이며 무엇을 할 것인지 꼬치꼬치 캐물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따라서 나는 굉장히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다.

숨기는 게 없었으면 좋겠다는 내 말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모르겠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실천 중인 차수민에게 이제 그만하라 할 수도 없고, 계속해서 쏟아지는 청불 범죄 영화 스토리를 태연하게 듣고 넘길 자신도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의 안위가 걱정이 됐다. 모르는 게 약이라고, 차수민의 보고를 듣기 시작한 날부터 그가 ‘조져지는’ 악몽을 꾸며 밤잠을 설쳐야 했다.

“미안해서 어쩌지. 내일 점심은 혼자 먹어야겠다.”

“야. 뭐 이리 바쁘냐. 나만 백수 대학생 같잖아.”

“일본에서 손님이 왔어. 영감 대신 내가 손 좀 봐 주고 와야 해. 원래 이렇게까지 바쁘진 않은데, 미안해. 최대한 빨리 다녀올게.”

“손님? 하하. 너네 되게 글로벌한가 보다. 그래, 뭐…… 야쿠자 같은 놈들만 아니면 됐지. 그래도 항상 조심하고.”

“아. 야쿠자 맞아. 어떻게 알았어?”

차수민이 밝은 얼굴로 손뼉을 쳤다. 내 입이 벌어지는 걸 느끼지 못한 것 같았다.

“레이파라고, 도쿄 근방 세력인데 원래 우리 지파 소속이었거든. 도쿄권 세력 다툼 때 무라사키 구미에 흡수되어서 떨어져 나간 놈들인데 요즘 아주 기세등등 난리야. 한국 넘어오려고 하나. 최근엔 칠왕지파 대가리 손가락 두 개가 댕강-”

“아니! 설명 안 해 줘도 돼!”

신나서 설명하는 차수민의 말을 가로막았다. 야쿠자라고……? 나는 하얗게 질린 얼굴을 애써 문댔다.

“차수민, 위험한 거 아니야? 너 다치면 어떡해.”

차수민이 픽 웃으며 귀엽다는 듯이 서너 배는 더 위에 달려 있는 내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걱정은. 이번 건만 끝나면 다음 주부터는 진짜 널널하니까 놀러 가자. 좁아터진 집구석 지긋지긋하지? 데려와 놓고 어디 구경도 못 시켜 줬네.”

“안 가면 안 돼?”

나도 모르게 다급하게 그의 옷깃을 붙잡았다. 차수민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니면 나 따라가게 해 줘. 너 혼자는 못 보내. 보내기 싫어……. 나도 갈래.”

“네가 가서 뭘 어쩔 건데.”

“몸빵이라도 할 수 있겠지. 너 대신 칼을 맞아 준다거나, 아. 나도 웬만큼은 버틸 수 있어. 저번에도 눈탱이 밤탱이 된 것 말고는 멀쩡했잖아. 이민혁이 소질 있다고 그랬거든? 짐 안 되게 할게.”

나는 급한 대로 아무 말이나 주워 삼켰다.

“미친 소리 하지 마.”

차수민의 표정이 삽시간에 딱딱하게 굳었다. 봐, 너도 걱정되면서. 나는, 나는 어떨 것 같냐고.

“김정현. 나 못 믿어? 내가 떡이 되게 맞을 사람 같아?”

“아니 못 믿고 자시고 간에…….”

나는 머리를 쓸어 올렸다. 어째 능력 넘치는 와이프에게 이래라저래라 간섭하는 공처가 남편이 된 것 같아서 입을 다물었다.

할 말은 많았지만 할 수가 없었다. 태어날 때부터 등짝에 용을 새겨야 했을 운명인 놈한테 고작 마음 확인한 지 한 달도 채 안 되는 내가 조직이고 뭐고 다 버리고 나랑 새 인생 살자고 하는 건. 그가 보기에 웃기고 선을 넘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래, 내가 뭐라 할 권리는…… 없지. 분해서 절로 입술을 깨물었다. 맘 같아서는 조직이고 나발이고 다 쓸어버리고 싶었다.

“……알았다. 잘 다녀와. 그리고…….”

“……?”

“앞으로 조직 관련된 일은 나에게 안 말해 줘도 돼. 저번에 말했던 건, 힘들고 슬픈 일 혼자 짊어지지 말고 털어놓으란 얘기였어.”

네가 걱정되니까. 나는 차마 뱉지 못한 한마디 대신 다른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러니까…… 누굴 조지러 가고 누구 손을 자르고, 누구 강냉이가 몇 개 빠졌고, 그런 세세한 것까진 말해 주지 않아도 돼.”

일순 차수민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상처 줬다……. 후회가 밀려왔지만 번복하지 않았다. 그의 입술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을 가만히 듣고만 있어야 한다는 건 고문이었으니까. 그러다 정말 연장이라도 챙겨 들고 그의 뒤를 밟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대신 애써 노력한 마음에 생채기라도 생길까 봐 작게 덧붙였다.

“믿으니까……. 그래서 하는 말이야.”

믿기는 뭘 믿어. 네가 다치지 않을 거란 걸? 사실 난 밤마다 네가 죽는 꿈을 꿔. 네가 걱정돼. 나는 뒷말을 삼키고 애써 웃어 보였다.

“하긴. 네가 누구한테 작살날 인간이냐. 그냥 다치지만 말고 돌아오라고.”

나를 빤히 바라보던 차수민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말 안 할게. 그리고 걱정 마. 안 다칠게.”

그날 밤,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길고 날카로운 일본도에 ‘조져지는’ 차수민 꿈을 꾸느니 잠에 들지 않는 편이 나았다.

✲ ✲ ✲

“형. 눈깔이 왜 그래요?”

“잠을 못 자서 그래.”

“잠을 못 잘 일이 뭐가 있어요? 이 집에서 형만큼 팔자 좋은 인간이 어디 있다고. 방학 내내 남의 집에서 뺀뺀히 놀고. 형은 취업 준비 안 해요? 집에 안 가냐고요.”

“왜 또 시비야. 가뜩이나 힘든데 눈치 주지 마…….”

힘들다는 말에 이민혁이 눈을 반짝이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이수민이랑 뭔 일 있죠?”

우리 둘의 사이를 가르고 이모님이 뜨거운 닭백숙 두 그릇을 가지고 왔다.

“형 뒤치다꺼리하기도 힘들어. 빨리 집으로 꺼져 줬으면. 무슨 VIP 게스트 모시는 기분인 거 알아요? 오늘도 형이랑 밥 같이 먹어 주라고 어찌나 문자를 보내던지. 밤마다 뜨겁더니 뭔 일이 있길래 죽상이람.”

“푸학.”

그 말에 놀라 나도 모르게 머금고 있던 따끈한 국물을 선사했다. 이민혁은 침착하게 본인의 얼굴을 닦아 냈다. 숟가락으로 내 머리를 후려치고 싶은 걸 가까스로 참는 눈빛이었다.

“밤, 밤마다라니. 그…… 무슨 소리야?”

“형. 눈 귀 제대로 달려 있으면 모를 수가 없죠. 집안사람들 다 알걸요. 둘이 물고 빨고 얼마나…….”

“집안사람들 다?”

나는 테이블 위에 엎드렸다. 시발……. 너무 안일했다. 집안에서 뒹굴다니. 아무리 좋아도 때와 장소를 가렸어야 했는데.

나야 그렇다 쳐도 차수민의 보스로서의 위상은 어쩌나. 사내놈을 좋아하는 대가리라. 나 때문에 차수민 인생 말아먹은 건 아닌지. 혹여나 이런 것 때문에 조직 내에서 반발이라도 일어나면 어떡하지. 성깔상, 가만있을 차수민이 아니지만 자존심은 상해할 텐데.

엉망으로 엉켜 가는 내 사고가 눈에 보이는지 이민혁이 혀를 차며 끼어들었다.

“형 봐 봐요. 집안사람 다 안다는 얘기는 당신들 섹스 얘기가 아니고. 미루어 보건대 둘의 관계를 알고 있을 거다, 이 말이에요.”

“뭘 보고?”

“형, 꿀 떨어지는 눈으로 이수민, 아니 차수민만 훔쳐보잖아요. 차수민도 얼굴이 아주 폈더만. 아, 참고로 나는 듣긴 했어요. 섹스. 차수민 옆방 쓰거든요.”

“그게 그거잖아!”

“괜찮아요. 우리 편견 없어요. 일본에 있을 때 가부키초 쪽에 있었거든요. 거기서 볼 거 못 볼 거 다 봤으니까 이거야 애교지. 다들 안 좋게 생각 안 해요. 드디어 도련님이 맘 붙일 사람이 생겼다고 오히려 아저씨들은 흐뭇해하던데. 차수민 성격이 워낙 괴팍해야 말이죠.”

표정 없는 얼굴 때문에 진심인지 농담인지 위로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지만 굳이 없는 소리 해 가며 내 마음을 신경 써 줄 인간이 아니었기 때문에 반쯤 진실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차수민…… 그래도 예쁨 받나 보네.”

“일은 잘하죠. 시커먼 근육 천지에서 살아남으려면 잘해야만 했고.”

“걔는 이 일이 좋아서 하는 거겠지? 안 어울리게……. 아, 답답해! 뭐라 못하겠어. 그래서 괴로워.”

기름이 둥둥 뜬 국물을 휘휘 저었다. 내 꼴이 한심했다. 연애 초기를 마음껏 즐기지도 못하고 노심초사 가슴만 졸이고 있는 꼬락서니가.

나는 차수민을 믿지 못하는가? 그를 내 새장에 가두고 온실 속 장미처럼 품고 싶은 건가? 아니, 온실 속 장미는 차수민이 아닌데. 당장이라도 피를 볼 것처럼 뾰족뾰족 가시를 세운 차수민이 진짜 차수민인데. 그걸 잘 아는데……!

“이딴 거 하고 싶어서 하는 사람이 어딨겠어요?”

이민혁이 닭다리 하나를 북 뜯어냈다.

“어딜 가나 사연 없는 사람은 없다지만, 특히 이 바닥은 더 하죠. 대부분은 죽지 못해 사는 거예요.”

“그렇지만 차수민은…….”

차수민은 억지로 떠맡아 하는 것 같지 않은데.

나는 고딩 양아치 시절의 차수민을 떠올렸다. 반짝거리는 소리를 하며 제법 어른스러워 보이던 옆모습.

‘저거, 저거 뭐가 되려고 저러지.’

‘난 아버지 자영업 물려받을 건데?’

‘아버지 자영업?’

‘어. 아버지 사업 물려받아서 확장시키고 한국 최고로 키워야지. 아무도 못 건드리게. 어중간하면 여기저기서 간 보고 건드리거든.’

내일이 없는 것처럼 사는 놈이 본인의 미래만큼은 확신에 찬 채 그리고 있었다.

‘너는? 넌 뭐 하고 싶은 거 없어?’

‘……어.’

‘뭐야. 진짜 없어? 노답이네.’

그래, 넌 평생 내 따까리나 해라. 한참 생각하던 차수민이 웃으며 내뱉은 말이었다.

정말 내일이 없이 살던 나는 제법 반짝반짝한 이야기를 가진 차수민이 부럽게 느껴졌었다. 아버지 사업이란 게 음지에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차수민은 이 조직을 아낀다. 내가 무슨 염치로 그의 미래를 어그러뜨리겠는가. 내 이기적인 생각으로 차수민의 날개를 꺾을 수가 있냐는 말이다.

나는 애꿎은 닭을 젓가락으로 쿡쿡 쑤셨다.

“너도 그래? 죽지 못해서 사냐? 손 씻을 기회가 있으면 씻을 거야?”

“나한테 묻지 말고 차수민한테 물어요. 왜, 차수민이 이 바닥 떴으면 좋겠어요?”

“당연하지. 걱정되잖아.”

“뭐가 걱정되는데?”

“위험하니까. 다칠까 봐. 그리고 상처받을까 봐. 상처 주는 사람은 상처받게 되어 있어.”

열심히 살을 바르던 이민혁이 고개를 들어 힐끗 나를 살폈다.

“진짜 걱정인가 보네. 제법 철학적인 소리를 다 하고. 근데 우린 일반인 안 건드리니까 형 걱정만큼 누군가를 상처 줄 일은 없을걸요. 이 업계 대부분 일반인한텐 손 안 대요. 까딱했다간 빵 가니까.”

“칼이라도 맞을까 봐 그래.”

“우리 한국에서는 조용히 지내고 있는 편이에요. 그리고 차수민이 어디서 맞고 다닐 인간인가? 걔가 쑤시면 쑤셨지.”

맞는 말이었다. 그래도 걱정되는데 어떡해. 그 조그맣고 연약한 몸뚱이로 근육 돼지들을 상대한다고 상상하니 돌아 버릴 것 같다고.

“……그만둘 리가 없겠지.”

중얼거리자 이민혁이 웃음기를 빼고 즉답했다.

“절대 그럴 리 없어요. 조직은 차수민의 전부이니까.”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는 내게 시선을 주지 않은 채 닭고기 살을 발라내고 있었다.

“내가 이 바닥 모두 사연이 있다고 말했죠? 조직원이라면 조직에 대한 의리나 소속감이 장착되어 있는 게 사실이지만, 차수민이 느끼는 감정은 좀 달라요. 걔는 집착이에요.”

“왜? 어째서 집착하는데?”

“내 것에 대한 경계가 분명한 인간이니까. 외로워 미칠 것 같을 때 그나마 조직이 손 내밀어 줬으니까. 우리가 차수민의 유일한 가족이거든요. 진짜든 아니든, 차수민은 그렇다고 믿고 있으니까요.”

민혁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내 표정을 흘긋 살피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후루룩 국물을 삼켰다.

“6년 전에 큰일이 닥친 적 있는데, 그 자존심 센 인간이 무릎을 꿇더라니깐요. 인성이 나가리여도, 파릇파릇한 애송이여도 차기 보스로 인정받고 있는 건 그만큼 조직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는 걸 다들 알고 있기 때문이에요. 일 잘하는 건 당연하고.”

나는 몸을 섞으며 차수민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난 인간관계 같은 거 잘 못해. 관심도 없었고. 그대로 보여 주면 그게 약점이 되어 칼로 돌아오니까.’

“……많이 외로웠구나.”

멍하니 중얼거렸다. 몰랐다. 자기 얘기를 하지 않으니까. 항상 강한 모습만 보여 주려 하니까.

퍼뜩 그만두면 안 되냐고 애처럼 매달릴 뻔한 일이 떠올랐다. 말 안 하길 잘했어. 나는 생각했다. 내가 어떻게 가족을 포기하라고 강요해. 더 바라지 마라 김정현. 좋아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벅찬데.

나는 애써 웃으며 표정 관리를 했다.

“야. 너 법학과엔 왜 들어왔어? 합법적으로 불법 저지르려고 그러지! 왜, 너도 조직이 너무 좋냐? 차수민처럼 발 묶인 거 아니면 하루라도 빨리 손 털고 나가라.”

“다들 사연이 있다니까요. 하여튼 물렀어. 시키지도 않은 내 걱정까지 해 주고.”

이민혁이 냅킨을 뽑아 입을 닦았다.

“차수민은 형이 걱정인가 봐요. 나더러 닭백숙집까지 대동하게 만든 걸 보면. 근데 역시 차수민이 일 하나는 잘해.”

“뭐?”

“고개 돌리지 말고, 물컵 봐 봐요.”

스테인리스 컵에 정장 차림 사내가 옆으로 왜곡되어 비치고 있었다. 얼마 전에 마주했던 호성파의 사람인가 했지만 풍기는 분위기부터 달랐다. 조금 더 위험한 느낌이었다. 뭣도 모르는 내가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조무래기는 아닌 것 같죠? 야쿠자가 물 탔나. 요즘 자꾸 주변에서 껄떡이는 놈들이 있거든요.”

“야쿠자? 설마 차수민이 조지러 간 그 레이파인지 뭔지?”

민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차수민은 일본에서 손님이 왔다며 자알 대접해 주고 오겠다고 했었다. 차수민이 직접 만나러 갔을 텐데 뭐 하러 여기까지 와?

“문신 보이죠?”

민혁의 말마따나 남자의 걷어 올린 팔뚝에 난잡한 일본어가 가득했다.

“레이파 뒤에 있는 무라사키 구미 짓인 것 같아요. 레이파 두목은 간땡이가 작아서 우리 뒤통수치는 일은 잘 안 하거든요. 6년 전에 우리한테 개털린 전적도 있고. 아무래도 손님맞이는 미끼였던 것 같네요. 레이파 보내 놓고 빈집 털러 온 것 같은데.”

“어떻게 할까?”

나는 젓가락을 꽉 쥐었다. 여차하면 눈깔이라도 후벼 파고 도망갈 생각이었다. 이 역시 한 학기 동안 짭관장이 가르쳐 준 현장용 스킬이었다. 이민혁이 속삭였다.

“나쁜 생각은 아닌데, 그쪽 애들이라면 분명 칼을 숨기고 있을 테니까 건들지 않는 게 좋아요. 덩치로 보면 나보다야 형이 한 따까리 할 것 같으니까 형을 노릴 거예요. 천천히 일어나서 가게 밖으로 나가요.”

나는 입에도 못 대 본 닭백숙을 두고 일어섰다. 올 때마다 제대로 먹어 본 적이 없는 것 같아. 툴툴대며 신을 신는데 뒤통수에 날카로운 시선이 꽂혔다. 보고 있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침착하게 행동했다.

그러나 신발장을 넘어 가게 문을 여는 순간, 이민혁이 소리쳤다.

“형, 달려요!”

갑작스레 누군가 소리를 지르면 대개는 상황이 안 좋기 마련이다. 지금 역시 그랬다. 골목으로 몸을 숨기기가 무섭게 어깨 부근에 강렬한 통증이 일었다.

“윽!”

팔을 들어 만져 보니 축축했다. 뜨끈한 액체가 흘렀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아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 지금 칼 맞은 거야……?

눈만 끔뻑거린 채 골목 끝을 응시하니 정장 남자가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얌마, 왜! 너희 일반인은 안 건드린다며!”

순간 화가 나 빽 소리를 질렀다. 나는 아무 상관 없는 민간인인데. 진짠데.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게 생겼다. 내 억울함이 얼굴에 묻어났기를 바랐지만 제대로 전해지지 않은 것 같았다. 곧바로 두 번째 칼날이 날아들었기 때문이다.

“헉.”

나는 겨우 몸을 돌려 피했다. 상대는 얍실한 이방 수염을 기른 30대 남자였다. 일단 근육 돼지가 아니라는 점이 위안이 되었지만 어딘가 맛 가 있는 눈알과 시선을 마주하자 차라리 근육 돼지가 나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상이 아닌 것 같았다. 하긴, 정상인 인간이 이런 일을 하겠냐만은. 기대에 부흥이라도 하듯, 그가 정장 안주머니에서 잭나이프를 꺼냈다.

“도라에몽 주머니도 아니고…… 어디서 칼이 자꾸 나와…….”

나는 기겁하며 도망쳤다. 짭관장이 봤다면 ‘이 녀석, 농담할 기력도 남아 있고’ 껄껄 웃으며 더 열심히 굴렸을지도 모르겠다.

송곳처럼 내리꽂히는 날붙이를 다친 몸을 굴려 가며 피했다. 콩고물 묻힌 인절미가 된 기분이었다. 온몸이 흙투성이가 되고 있었다. 짭관장이 이런 내 모습을 봤다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근성은 있군’이란 마지못한 칭찬을 남겼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마지막 주마등이라도 되는 것처럼 자꾸 짭관장의 환상이 보이는 탓에 나는 머리를 휘휘 흔들었다.

“헉, 헉. 저기요……! 우리, 우리 말로 해요! 괜히 힘 뺄 필요 뭐 있어요? 나 그쪽 표적 아니라니까.”

어깨의 상처 때문에 제대로 반격할 수가 없었다. 헉헉거리며 피하는 게 고작이었다. 남자는 나를 힐끗 한번 노려보더니 뭐라 뭐라 중얼거렸다. 일본어였다. 아, 역시. 야쿠자가 분명했다.

진짜 날 죽일 수도 있겠다는 판단이 들자,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단단히 잘못 걸렸다.

“잠깐! 잠깐! 스톱! 나 조직원 아니야!”

한국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그는 다급한 ‘잠깐’에도 미친놈처럼 칼을 휘둘렀다. 고등학생 김정현아. 제2외국어를 좀 더 열심히 공부하지 그랬니. 지금 와서 후회해 봤자 언어의 장벽이 가로 막고 있는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아, 시발. 이 새끼가 진짜.”

내가 정육점 고기라도 된 것처럼 자꾸만 나를 썰으려 하는 사내를 겨우 막아 냈다. 어디서 칼이 솟아나는지 다트처럼 던져 대도 그의 손엔 새 나이프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치사한 새끼. 나는 맨손인데. 흘끗 주위를 살폈다. 있는 거라곤 돌멩이뿐.

“윽.”

어깨에서 피가 뚝뚝 흘렀다. 시간을 더 끌다간 어떻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저 나이프가 다시 내 어깨를 쑤신다면, 아니 가슴팍을 노린다면.

나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멈춰야 해. 다시는 차수민을 못 볼지도 모른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온몸에 피가 돌았다. 어떻게 얻어 낸 마음인데 이렇게 죽어 버릴 수는 없었다. 이 상황에 가릴 게 뭐가 있겠는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상대의 움직임을 살폈다.

남자가 다시 칼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나는 그를 막아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바닥을 구르며 소리쳤다.

초밥집에서 자주 들었던 일본어를. 우렁차게.

“이랏샤이마세에에(어서 오세용)!!!”

잠깐, 아주 잠깐이지만 남자의 두 눈에 띠용, 두 글자가 새겨졌다. 창피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내가 죽겠는데!

나는 그 틈을 타 몸을 벌떡 일으키며 다리를 걷어 올렸다. 내 긴 다리가 남자의 턱을 유려하게 스쳤다. 해운대 불꽃놀이처럼 코피가 아름답게 터졌다.

“아악!”

남자가 비명을 질렀다. 개새끼. 지 아픈 줄 알면 남 아픈 줄도 알아야지. 나는 그 틈을 타 땅을 뒹굴며 돌멩이 하나를 손에 쥐었다. 칼에 찔린 어깨가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희열도 잠깐, 꼭지가 돌아 버린 남자가 내 경동맥을 향해 날아들었다. 나는 손에 꼭 쥐었던 짱돌을 대가리를 향해 던졌다. 이 역시 짭관장이 유도 수업을 하며 가르쳐 줬던 스킬이었다.

‘저, 관장님. 이딴 것들이 대체 무슨 소용이 있죠? 아무리 봐도 유도랑은 거리가 먼 것 같은데요…….’

‘이런 멍청한. 누가 학생의 목을 노리고 달려든다 생각해 봐라. 기술 걸 시간이 있을 것 같나! 무조건 돌이라도 주워 들어서 대갈빡을 깰 생각을 해야지!’

‘글쎄, 살면서 제 모가지를 노릴 사람이 있을까요…….’

그 당시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피와 살이 되는 귀한 강의를 못 알아보고. 짭관장의 말대로 상황에 닥치니 남의 대갈통이 깨지든 말든 나부터 살고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돌멩이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았다.

딱.

경쾌한 소리와 함께 이빨이 후드득 떨어졌다. 머리를 노렸는데 돌출된 주둥이에 직격했나 보다. 결과적으로는 잘된 일이었다.

“흐어어어.”

“어어, 미안해요! 나는 이빨을 맞추려 한 게 아니고……! 그게, 당신의 대가리를 노렸었는데……!”

남자가 입을 움켜쥐고 눈물을 흘리며 주저앉았을 때, 타이밍 좋게 이민혁이 헐레벌떡 등장했다. 그의 손에는 닭백숙집에서 가져온 걸로 보이는 식칼이 쥐어져 있었다.

“형! 괜찮아요? 어.”

“너! 나 죽으라고 일부러 늦게 왔지.”

“아니, 가게 앞에 한 놈이 더 있었다니까! 그놈 상대하다 급하게 와 줬더니만.”

자세히 보니 식칼에 뭔가 묻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애써 시선을 먼 산을 향해 돌렸다. 잔인한 것들. 자꾸만 어떻게 해치웠냐고 묻는 이민혁의 물음 또한 회피했다. 이랏샤이마세라니. 죽어도 들키기 싫었다.

“그런데, 형. 다쳤어요?”

“아, 이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바닥에 핏방울이 흥건했다. 뒹굴며 싸우느라 여기저기 얼룩져 있었다. 이제야 아픔이 몰려왔다.

“아, 좆됐다.”

이민혁이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제 상사에게 보고할 생각에 머리가 아픈 모양이었다. 나는 이민혁이 건네는 수건을 받아 대충 상처 부위를 싸맸다. 그의 좆됨에 충분히 공감하는 바였다. 백숙 먹으려다 일이 귀찮게 되었다. 모르면 몰라도 이걸 알면 차수민은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야. 차수민한테는 말하지 마. 깊이 안 찔렸어.”

“이걸 어떻게 숨겨요. 치료받고 뭐 하고 하면 당연히 귀에 들어가지.”

“말하지 말라고.”

나는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헝클어뜨렸다.

저번에도 어깨에 가벼운 찰과상 입은 걸 은근히 신경 쓰던 그였다. 칼에 찔리고 왔단 말을 들으면 대군을 이끌고 레이파인지 나발인지 야쿠자 놈들을 몰살시키러 가고도 남을 인간이었다. 이민혁이 말하기를 호성파는 나를 차수민으로 착각해 담금질하려 했던 바로 그다음 날 해체됐다고 했다. 차수민의 짓이었다.

‘정현아. 내가 널 다치게 한 놈들을 가만둘 것 같니?’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듯했다. 차수민이 조직을 버릴 수 없다면, 적어도 내가 그의 짐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나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차수민이 누굴 조지러 가는 건 지금으로도 충분했다. 더 이상 건수를 늘리고 싶지 않았다. 걔가 다칠 확률을 내가 나서서 높이고 싶지 않다고.

“어떻게 하려고 그래요? 이거 아물려면 적어도 몇 주 걸려요. 차수민이 바보도 아니고.”

“나 올라가야겠다.”

나는 걱정한다는 것이 얼마나 불편한 일인지 잘 알고 있다. 밤새 뒤척이게 만드는 끔찍한 꿈과 달콤한 현실 사이의 갭이 얼마나 큰지 알고 있다. 때문에 별것도 아닌 일로 그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차수민 오기 전에 갈 테니까 말하지 마. 혹시 이놈들 또 올 수 있으니까 네가 잘 지키고. 알겠어?”

걱정되니까 힘든 일 아픈 일 다 털어놓으라고 종용하던 사람은 정작 본인의 아픈 일은 숨긴 채 도망가기로 한다. 짐이 되기 싫단 이유로. 걱정시키기 싫단 이유로.

“형. 차수민이 과연 좋아할까요? 나는 어쨌든 이놈들 침입을 보고해야 해요.”

“내 얘긴 빼면 되잖아. 대충 응급 처치나 해 줘. 별로 아프지도 않은데, 뭐.”

나는 그렇게 차수민의 영역을 떠났다. 마치 잠시 방문했던 것처럼 급작스럽게. 읍내 병원에서 대충 바느질을 하고 차에 몸을 실었다. 상대가 알면 참 이기적이라 느낄 수 있겠지만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사람을 이기적으로 만들기도 하는 것 같다’는 변명에 지나지 않은 생각을 하며…… 나는 짧은 방문을 끝냈다.

한 달이 지난 대학로는 그대로였다. 몇 가지를 제외하곤.

먼저, 강제적으로 쫓겨난 자취방. 나는 올라가자마자 들른 복덕방에서 다행히 방을 구할 수 있었다.

“조건에 맞는 방은 딱 이건데 어떠세요~?”

그리고 자꾸만 시야에 걸리는 낯익은 사람들.

복덕방에서 만난 공인 중개사는 낯이 익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 달간 같은 집에 살았던 차수민의 부하 여럿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할아버지가 쓸 법한 돋보기안경을 쓴다고 인상이 확 바뀌리란 착각을 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캐비닛이 들썩거리는 거로 보아 진짜 공인 중개사는 저기 가둬 놓은 게 분명했다.

“이 매물로 가시죠. 급하게 나온 매물이라 가격도 저렴하고 학생 학교랑도 가깝고. 지금 머물 곳도 없다면서요. 이건 바로! 입주 가능합니다.”

그가 미는 곳은 가 볼 것도 없이 이 자리에서 결정 가능한 매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차수민의 자취방 바로 옆방이었기 때문이다.

“오피스텔이 이 가격이면 거저 아닙니까? 보증금도 30%만 오늘 먼저 입금해 주시면, 집주인이 딱한 사정 고려해서 선입주 가능하게 해 주신다고 하니까는~”

“저기요. 왜 저 모르는 척해요.”

“네엥?”

“우리 아침 수련할 때마다 봤잖아요.”

사무실에 정적이 흘렀다. 열심히 쳐 내려가던 헛타이핑 소리가 뚝 멈췄다.

“아…… 그. 어떻게 아셨어요? 제일 끄트머리에 있었는데.”

“…….”

“……모르실거라 생각했는데 눈썰미가 좋으시네요.”

돋보기안경을 벗은 그가 머쓱하게 머리를 긁었다. 부정할 생각도 없어 보였다.

“그럼 방은 이걸로……?”

“이걸로 안 한다 해도 이걸로 해야 할 것 같은데. 그렇죠? 네. 그렇게 하죠, 뭐. 구조도 똑같을 테니 가 볼 필요도 없고.”

나는 한숨을 쉬었다. 쿨한 척했던 차수민은 전혀 쿨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걱정거리를 더 안겨 주고 간 건 아닌지 고민하게 만들었다.

야쿠자에게 칼침을 맞은 날, 부랴부랴 올라오는 길에 차수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뭐? 떠난다고? 지금?’

‘어어…… 너무 오래 머물렀던 것 같기도 하고. 갑자기 일이…… 생겨서 급하게 가 봐야 할 것 같아. 네 얼굴은 보고 가야 하는데 미안하다.’

차수민은 ‘무슨 일인데’라고 묻지 않았다. 그래서 마음이 더 불편했다.

‘내가 올라갈까.’

‘아니야! 오, 오지 마. 곧 만날 텐데. 개강하면 계속 붙어 있을 테니까……. 서로 바쁜 일 처리하고 개강 때 만나자. 그나저나 놀러 가기로 했는데 갑자기 이렇게 돼서 어떡하지?’

‘……그거 말곤. 할 말 없어?’

나는 퍼뜩 놀라 운전 중인 이민혁을 바라보았다. 새어 나오는 통화 내용을 다 듣고 있으면서 표정에 미동도 없었다. 이 새끼가 아무리 박쥐 같은 놈이라 해도 한창 정신없는 와중에 냉큼 일러바쳤을 것 같지는 않고. 나는 망설이다 대답했다.

‘응…… 없, 없어.’

그게 끝이었다. 알겠다며 개강 날 보자고 전화를 끊은 차수민은 무슨 일이냐며 나를 닦달하지도 않았고 꾸역꾸역 서울로 올라오지도 않았다.

대신에 그는 자기 수족 몇 명을 붙였다. 쿨하고 깔끔하게.

“정현 씨. 우리 자장면 시켜 먹을 건데 같이 먹을래? 생각 있으면 내려와.”

어느새 친숙하게 말을 놓게 된 진아 씨가 문을 두드렸다. 그들이 바로 아래층에 방을 빌린 지 벌써 3주가 넘어간다. 이제는 이런 급작스러운 노크도 원래부터 한 가족이었던 것처럼 익숙해지고 있었다.

“팍 씨. 후딱 안 내려오고 뭐 했냐. 면 다 불어 터졌잖아.”

호랑이가 큰 주먹을 코앞까지 내보였다. 현관 거울에 비친 그의 등에는 커다란 호랑이 문신이 아가리를 벌리고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왜 러닝만 입고 계세요…….”

밥맛 떨어지게. 나는 죽기 싫었기 때문에 뒷말을 가까스로 삼켰다.

차수민은 진아 씨와 호랑이, 그리고 첫날 공인 중개사 행세를 하다가 들켜 버린 도끼를 보냈다. 전봇대같이 커다란 성인 남자를 보디가드 하라고 보내진 않았을 테고 굿바이 인사도 안 하고 튄 나를 괴롭히려는 의사가 다분해 보이는 조합이었다.

그래, 괴롭히려는 의도가 맞을 것이다. 정말 매일같이 벨을 눌러 대는 통에 살 수가 없었다.

“자, 더 불기 전에 얼른 조집시다. 탕수육은 네 번 이상 젓가락질 금지!”

진아 씨가 상큼하게 웃으며 호랑이를 앉혔다. 도끼가 쭈뼛거리며 군만두의 랩을 벗겼다.

“야, 인마! 네 번 이상 젓가락질하지 말랬잖냐! 너만 입이냐? 죽고 싶어!”

호랑이가 애처롭게 뻗어진 도끼의 젓가락을 쳐 냈다. 도끼가 탕수육을 건드릴 수 있었던 기회는 단 두 번뿐이었다. 나는 호랑이의 억지를 목격했지만 도끼의 억울한 시선을 피하며 애써 모른 척했다. 커다란 주먹의 희생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하루하루 유치한 싸움에 진절머리가 났다. 뇌의 크기는 근육에 반비례하는 건가? 모든 조폭이 호랑이 같다면 걱정은커녕 차수민이 다치는 꿈은 꾸지도 않았을 것이다.

“근데 누님, 혹시 콜라는 안 시키셨습니까. 탕수육엔 콜라가 있어야 하는데요.”

눈치 보며 할 말은 다 하는 도끼가 말했다. 진아 씨가 기다렸다는 듯 벌떡 일어났다.

“어머, 내 정신 좀 봐. 금방 편의점 가서 사 올 테니까 먹고 있어요. 탕수육 내 거 남기고. 아, 소스는 붓지 마라.”

일부로 빼먹은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편의점 청년을 노리는 중이었다. 진아 씨는 여기 파견 온 이후 대부분의 시간을 편의점에서 알바 청년과 노닥거리며 보냈다. 카드가 진아 씨 손에 있는 탓에 호랑이가 무릎을 꿇고 사정하기 전까지 우리는 한동안 편의점 삼각김밥으로 끼니를 때워야 했다.

진아 씨가 지갑을 들고 문밖으로 사라지자 방 안엔 정적이 돌았다. 나는 넘어가지 않는 면발을 꾸역꾸역 삼켰다. 그런 날 물끄러미 쳐다보던 호랑이가 한심하다는 어투로 말했다.

“너는 면이 넘어가냐?”

“컥.”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가진 거라곤 근육밖에 없는 놈한테 이딴 소리를 듣다니. 기분이 팍 상해 그릇을 내려놓았다.

“아씨…… 그럴 거면 부르질 말든가요. 알아서 먹는다니까 안 내려오면 모가지를 비틀어 버린다고 협박하셨잖아요.”

“에효. 지 때문에 뭔 일이 벌어지는지도 모르지.”

“무슨 일이요……?”

그가 혀를 쯧쯧 차며 짧은 한탄 같은 말을 내뱉었다. 나는 놓치지 않고 창백해져 물었다.

“설마 본가에 뭔 일이라도 생겼어요?”

“그게…….”

“짬뽕 불겠습니다, 행님! 국물이 하나도 없습니다!”

갑자기 끼어든 도끼 때문에 대화의 맥이 뚝 끊겼다. 호랑이가 입을 다물었다. 나는 차갑게 식는 피를 느끼며 재차 물었다.

“차수민한테 무슨 일 있냐고요.”

“아니다. 일은 무슨. 아주 자알 지내고 계시니 걱정 꺼라, 꺼!”

“아닌 것 같은데. 당신 말투가 영 석연치가 않은데?”

“짜장면도 불겠습니다, 행님! 맛대가리 없어집니다!”

또다시 도끼가 끼어들자 내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호랑이가 역정을 내며 젓가락을 집어 던졌다.

“시발, 내! 면! 내가! 책임! 진다고!”

다시 찾아온 정적에 나는 할 말을 잊어버렸다. 잔뜩 풀이 죽은 도끼와 씩씩거리며 소스를 탕수육 위로 부어 대는 호랑이를 앞에 두고 차갑게 식은 자장면 그릇을 내려다보았다. 이놈들과 여전히 일주일을 더 봐야 한다니. 지긋지긋한 일이었다.

“……혹시 차수민한테 무슨 일 생기면 저한테 꼭 알려 주세요. 제가 알아야 해요.”

내 말에 호랑이는 대꾸하지 않았다. 오독오독 단무지 씹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 ✲ ✲

차수민의 수족들이 벨을 누르며 날 괴롭혔다면 대신에 나는 차수민의 오른팔, 이민혁에게 매일같이 전화를 걸었다.

“수민이는 괜찮아? 별일은 없었고?”

-아 짜증 나네, 진짜! 왜 자꾸 전화질이야!

“걱정되잖아…… 그 야쿠자, 너희 조직을 노린 거라면 수민이도 위험할 수 있잖아…….”

-그렇게 걱정되는데 왜 올라갔냐고요. 보스 아주 잘 계시니까요, 걱정 끄시고 앞으론 나 말고 그 인간한테 직접 전화하세요. 네?

직접 전화하라고? 너라면 할 수 있겠냐. 멋진 척을 있는 대로 해 가며 다 털어놓으라고 말했던 애인이 정작 털어놔야 할 사항을 꽁꽁 숨기고 토꼈단 걸 알면 어떤 마음이 들겠냐고.

양심에 찔려 차마 다이렉트로 콜을 넣을 수 없었다. 대신 쏟아질 것 같은 메시지를 남겼는데 짧디짧은 단답이 몇 번 돌아온 것 외에는 다 잘근잘근 씹어 드시는 중이었다. 왜 답장 안 해 주니. 우리 연애 초기야. 알아……? 비굴한 내용의 메시지에 돌아온 답은 ‘ㅗ’ 하나였다. 잘 아는 놈이 제대로 이유도 설명 안 하고 토꼈다 이거겠지. 결국엔 전화도 몇 번 걸어 봤다. 차수민은 받지 않았다.

“차수민…… 바빠?”

-왜요.

“아니. 연락이 없어서.”

그래도 못 본 지 3주나 됐는데 전화 한 통 받지 못했다. 변명 같지도 않은 변명을 하고 갑자기 떠나서 화난 게 분명했다.

“걔 화 많이 났지.”

-걱정되면 직접 해 보시라니까?

나는 어깨를 매만졌다. 방을 구하자마자 병원에 가서 정신을 놓았었다. 의사가 한 땀, 한 땀 장인 정신으로 꿰매 준 상처는 많이 아물었지만 과한 움직임에는 여전히 통증이 느껴졌다. 호랑이 몰래 꾸역꾸역 통원 치료를 받으며 3주란 시간이 흘렀다. 태어나서 가장 길게 느껴진 3주.

“…….”

가만히 기다리고 있자 이민혁이 한숨을 뱉었다.

-사실 저번 주까지는 화나서 연락 없었던 거 맞고요, 이번 주부터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요. 일이 갑자기 생겨서 여기 아주 난리거든요. 됐어요? 저도 할 일이 산더미라 끊습니다. 전화하지 마요!

비실거리는 내가 불쌍했던 모양인지 랩 하듯 따따따 쏘아붙인 이민혁이 으름장을 놓고는 통화를 마무리했다. 나는 뚝 끊긴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하. 옆에 있으면 목소리라도 들려주지.”

생각해 보면 차수민과 함께한 시간은 고등학생 시절과 저번 학기를 합쳐 1년도 채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 짧은 시간 동안 강렬하게 가슴에 박혀 버려서 차수민의 작은 뒤통수가 잠시라도 사라지면 심장엔 공허함이 들이쳤다. 열일곱의 방학이 그랬고, 지금도…….

나는 메말라 가는 중이었다.

그래도, 역시 그의 집에서 나오길 잘했단 생각이 들었다. 내 상처를 어루만지며 표정을 일그러뜨리는 차수민을 상상하면 심장 한구석이 칼에 맞은 것보다 더 쓰라려 왔다.

조직을 손에서 놓지 않는 한 그와 함께하는 내 목을 노리는 자들은 분명 존재할 것이다. 서로의 마음을 알게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자신보다 건장한 내 모가지를 걱정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걱정하는 쪽은 나 하나로 충분했다.

“차수민, 보고 싶어…….”

훌쩍이며 이불을 뒤집어썼다. 딱 일주일만 더 버티면 차수민을 볼 수 있어. 그때까진 팔을 들어 올릴 수 있을 만큼 나을 것이다. 흉은 좀 지겠지만.

나중에 섹스할 때 이게 뭐냐 물으면 자전거에 치여 굴러떨어졌다고 둘러댈 예정이었다. 아니면 나도 흉터에 용이나 박을까. 차수민이랑 세트로. 파스를 붙여도 괜찮겠다. 섹스할 때 차수민은 반쯤 정신이 나가 버리니까 대충 둘러대면 넘길 수 있을 거야. 섹스할…… 때.

섹스.

하고 싶다.

차수민이랑.

“으아아.”

나는 베개 밑에 얼굴을 파묻었다. 양심도 없는 김정현. 지 맘 편하자고 애인을 파렴치하게 속이곤 뭐, 섹스가 하고 싶어? 다시 만난 차수민이 뭐라 할 줄 알고 자신만만하냐, 너. 개빡친 차수민이 헤어지자고 면전에서 통보하면 어쩌려고.

머리를 벅벅 긁고 있는데,

-띠로롱

이런 내 맘을 아는지 전화벨이 울렸다. 발신자, 차수민.

“와!”

나는 호들갑을 떨며 방구석을 뱅글뱅글 돌아다니다가 벨 소리가 거의 끊기려 할 때쯤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뭐 하다 이제 받아?

“이상한 생각 안 했어!”

-……? 누가 뭐래?

도둑이 제 발 저린 꼴이 됐다. 나는 핸드폰을 고쳐 들었다. 오랜만에 듣는 그의 목소리에 집중하고 싶었다.

“왜 이제 전화해……. 보고 싶었어, 수민아…….”

-‘나도’라고 말하고 싶은데. 너 이민혁이랑 사귀어? 나 보고 싶다는 놈이 왜 이민혁만 들들 볶아 대.

차수민이 낮게 큭큭거렸다. 다행이다. 화는 풀린 것 같았다.

“네가 내 문자 다 씹었잖아. 화난 줄 알고……. 너 요즘 엄청 바쁘다며. 왜 또 갑자기 바빠. 너 병나는 거 아니야? 개강 날 올 수는 있는 거지?”

-올해 방학이 유난히 그러네. 영감이 자리를 비워서 그런가. 나 안 가면 네가 죽을 지경일 텐데 어떻게든 가야지 않겠어?

“지금도 죽을 것 같은데. 보고 싶어 죽을 것 같아. 네가 전화해 줘서 정말 좋아. 네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까…….”

좋아서 눈물이 날 것 같아. 나는 뒷말을 삼켰다. 김주책. 그만해. 그러나 찐따 김정현답게 쏟아지는 눈물방울을 숨길 수가 없었다. 나는 휑 하고 코를 풀었다. 가만히 내 훌쩍거리는 소리를 듣고 있던 차수민이 입을 열었다.

-있잖아, 정현아. 우리 떨어져 있던 시간이 고작 3주잖아. 근데 되게 길게 느껴지더라. 그리고 생각났어. 6년 전 네가. 내가 말없이 갑자기 떠났을 때의 네가 말이야.

“응…….”

-뭐, 그땐 네가 날 친구 이상으로 생각하고 있었는진 모르지만 어쨌든 괴로웠겠단 생각이 들었어. 지금 내가 그러니까. 화가 나고, 외롭고, 보고 싶고…… 고작 몇 주 떨어져 있는데도, 네가 어디 있는지 아는데도 불안하고 힘들더라. 남겨질 사람의 마음을 너무 몰랐던 것 같아.

그의 긴 고백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울먹거렸다. 이렇게 차분하게 속마음을 얘기하는 애가 아닌데. 화가 많이 난 게 분명했다.

“수민아, 너 내 욕하는 거지! 미안해. 얼굴도 안 보고 갑자기 올라와서!”

-아니니까 닥치고 들어. 요점은 이거야. 미안했다고.

헉. 나는 숨을 멈췄다. 사과하는 차수민은 아직도 익숙하지가 않았다.

-내가 이기적이었어. 그 당시 조직에 위기가 와서 급하게 피신해야 했거든. 너에게 말하지 않는 게 더 나으리라 생각했었어.

차수민이 숨을 골랐다.

-가짜 부모님을 보여 준 것도 그편이 나을 거라는 판단 때문이었어. 어쩌면 너에게 들키는 게 무서웠던 걸지도 모르겠네. 동네 양아치랑 진짜 깡패는 차원이 다르잖아. 네가 떠날까, 내가 상처받을까 무서웠던 걸지도 모르겠어.

나는 수화기 너머로 차분하게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에 눈을 감았다.

-미안해. 너를 위하는 척 남겨 두고 와서.

그의 진심 어린 목소리가 송곳처럼 가슴 한 켠을 찌르는 듯했다. 내가 이 상황에서 어떻게 네 사과를 받겠어. 너를 위하는 척 남겨 두고 온 사람은 나인데.

“차수민, 있잖아…….”

-오해하지 마. 내가 말한 건 순전히 과거의 일에 대한 거니까. 지금 널 탓하는 게 아니야. 깨달은 순간부터 꼭 한 번 미안하다고 말해 주고 싶었어.

나는 머뭇거리다 하려던 말을 하지 못했다. 대신, 나 역시 꼭 한 번 해 주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수민아. 네가 또다시 하루아침에 사라진다 해도 난 널 만난 걸 후회하지 않을 거야.”

-…….

“너와 함께했던 모든 순간이 내 일부를 이루는 걸 어떻게 부정할 수 있겠냐. 아무리 묻으려 해도 너를 만났던 봄날의 기억은 사라지질 않더라. 너와 마주한 순간들이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내 안에 남아 있더라고. 너는 나에게 배신감과 공허함보다 훨씬 큰 봄을 주고 갔잖아. 그거면 된 거 같은데…….”

-…….

“아. 그렇다고 갑자기 사라지라는 말은 아니고. 너무 마음 쓰지 말란 얘기야!”

내가 머쓱하게 중얼거려도 수화기 너머는 잠잠했다. 시발, 김정현. 또 오버했지.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통화가 제대로 이어지는 중인지 핸드폰을 확인했다.

잠깐의 침묵 후에 수민이 조용하게 속삭였다.

-김정현, 보고 싶어.

나는 낮게 웃었다. 귀엽기는.

“나도, 너무너무 보고 싶어.”

-지금 자취방이야?

“응. 네가 부하 직원 보내서 친히 지정해 준 그 방.”

-잘됐네.

섹시하게 갈라진 미성이 귓가를 핥았다.

-정현아, 나 지금 너랑 섹스하고 싶어.

“뭐?”

잘못 들었나, 눈을 깜빡이며 얼 타고 있는데 차수민이 뜨거운 숨결을 불어 넣었다.

-안 들려? 섹스하고 싶다고.

“아아, 어!”

나는 벌떡 일어나 방 안을 서성거리며 돌아다녔다. 당황스러워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런 내 꼴이 그려지는지 차수민이 한숨 같은 웃음을 내뱉었다.

-정현아. 닥치고 침대에 누워.

“침대……. 으응.”

그의 말대로 얌전히 침대에 몸을 뉘이자 차수민은 기다렸다는 듯이 달콤한 목소리로 나를 채근했다.

-착하네. 좋아 이제……. 오빠랑 재밌는 거 하자.

키스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던 어린 날의 그때처럼 차수민은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고 지시하기 시작했다.

-티셔츠 올려 봐. 가슴팍까지 다 보이게. 입에 물어. 내가 볼 수 있도록.

시키는 대로 했다. 어느새 바짝 선 두 돌기가 곧 찾아올 쾌감을 예감이라도 하는 듯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눈 감아. 그리고 상상해. 네가 와서 나를 눕히고 내 위에 올라타는 상상을 해 봐. 비벼지는 앞섶과…… 내 쇄골을 빨아들이는 네 입술.

끈적한 목소리가 귓구멍을 쑤셨다. 대놓고 밀어붙이는 유혹에 손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나는 차수민의 흰 나신을 생각했다. 손이 닿는 곳마다 붉게 꽃을 피워 내던 맑은 살결을.

-정현아, 할 말 없어? 하고 싶은 말 마음껏 해. 야한 말도 괜찮으니까…….

한 달간 차수민의 여린 살에 닿지 못한 페니스가 그의 야릇한 목소리에 껄떡대고 있었다. 갑자기 확 오른 열기에 페니스를 쓸어 올리며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네 알몸 보고 싶어. 셔츠 단추를 하나하나 떼어 내고 싶어. 분홍색 유두가 보일 때까지……. 네 젖꼭지 진짜 예쁘거든. 속옷은 이빨로 벗겨 줄게. 너 그거 좋아하잖아…….”

-홀딱 벗겨 놓고 뭐 할 건데?

“그리고 바짝 선 네 젖꼭지를 핥을래. 단맛이 날 것 같아…….”

넋이 나가 중얼거렸다. 그래, 분명 달콤할 것이다. 사탕처럼 입안에 품고 이리저리 굴려 보는 상상을 했다. 그가 자지러지는 꼴을 보고 싶었다.

수민의 웃음이 간지럽게 고막을 어루만졌다. 이 또한 자극으로 다가왔다. 더 해 보라는 듯, 그가 속삭였다.

-……내 가슴을 빠는 네 뒤통수가 보이면,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넣을 거야. 살살 쓰다듬어 줄게. 안달 내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 줄게. 그리고 묵직하게 달아오른 네 걸…… 만져 줄까? 있잖아, 너 지금 뭐 하고 있어?

다 알면서 묻는 너. 나는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었다.

“네 목소리 들으며 자위.”

-음란하기 짝이 없는 김정현.

차수민이 킥킥대며 웃었다. 고막이 간지러웠다. 짓궂은 새끼. 네가 시작한 거면서. 사실은 몸이 달아올라서 어쩔 줄 모르고 있으면서. 부풀어 오른 페니스를 이불에 비비적거리고 있을 수민을 생각하니 귀여워 죽을 것 같았다.

-불쌍하게 혼자 만지작거리지 말고 내가 직접 만져 준다고 생각해 봐. 시키는 대로 따라가. 먼저 천천히 기둥을 쓸어 봐. 뿌리 끝에서 귀두로.

“하…… 으응.”

-네 걸 빨아 줄게. 하아. 느껴져……? 손바닥으로 귀두 부분을 감싸 봐. 어때. 끈적해?

나는 흘끗 욕정 하는 선단을 내려다보았다. 어느새 새어 나온 욕망이 액체가 되어 흘러넘치고 있었다. 아는지 모르는지 차수민은 태평하게 적나라한 단어들을 사용해 가며 나를 괴롭혔다.

-내 혀가 닿는다 생각하고 미끄러뜨려. 손톱을 세워서 요도를 눌러 봐. 나라면 몇 번은 이빨을 세웠을 거야. 고통이 쾌감이 되는 법이잖아?

아. 차수민. 나는 그가 시키는 대로 손장난을 하는 중이었다. 수민의 작고 축축한 입안을 탐닉하며 손톱으로 귀두 끄트머리를 자극했다. 앙칼지게 이를 박고 도발적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그 얼굴이 그려졌다. 당장 달려가서 수민의 것을 빨고 싶었다. 버둥거리는 손목을 붙잡고 녹진하게 녹아내릴 때까지 빨고 빨고 또 빨고 싶었다.

“너도…… 내 생각 하고 있어?”

팬티에 손 넣고 네 귀여운 분신을 흔들어 재끼고 있어? 나만 안달 난 건 아니지? 내 생각 하면서 하고 있다고 말해 줘.

-하아…… 나? 네 따듯한 혀를 기다리고 있지. 네 잘생긴 페니스도 잘 떠올리고 있으니 걱정 말라고.

차수민 특유의 나른한 음성은 사람을 천국과 지옥으로 오가게 했다. 섹스를 할 때면 애처럼 발끈하는 귀여운 모습은 사라지고 쾌감에 매달리거나 느긋하게 재촉하며 날 조련해 왔다. 나는 뭉근하게 페니스의 대가리를 훑었다. 벌써 번들거리고 있다. 네 것도 그랬으면. 내 목소리만으로도 잔뜩 부풀어 올라 어쩔 줄 몰라 했으면. 나는 그런 몸이 되어 버렸다. 너 때문에.

“안, 놓아 줄 거야. 침으로 번들거릴 때까지 핥아 줄 거야…… 내 입에 싸게 할 거야. 네 영혼까지 삼키고 싶어.”

-흣. 잘 만지고 있어……? 빳빳이 섰어? 내가 그리워? 나 생각 하면서 흔들고 있어?

그리워……. 그리워서 미칠 것 같아. 언제 이렇게 되어 버렸을까. 어쩌다 쥐방울만 한 양아치에게 죽고 못 사는 놈이 된 걸까. 시작은 네 따까리일 뿐이었는데, 이젠 네가 안 보이니 미칠 것 같아.

차수민. 네 엉덩이에 키스하고 싶어. 네 허벅지를 어깨에 걸치고 제일 깊숙이 치고 들어가고 싶어. 네 내장 구석구석 내 걸로 후벼 파 주고 싶어. 네가 만족할 때까지 멈추지 않을 거야. 너를 울리고 싶어. 쾌락에 젖어서 제발 그만해 달라고 사정할 때까지…….

나는 난잡한 언어들을 모두 내뱉는 대신 정제된 한마디를 흘렸다. 내 진심이기도 했다.

“수민아, 네 안에 넣고 싶어…….”

-정현아…….

신음을 흘리며 차수민이 말했다.

-넣어 줘. 어서.

야한 말을 잘도. 음란한 건 네 쪽이 아닌가. 그렇지만 나에게만 보여 주는 네 모습이 좋아. 밖에선 책임감을 짊어진 차기 보스라지만, 섹스할 때만큼은 무해한 얼굴로 내게 모든 걸 보여 주는 네가 좋아.

“으윽. 하…… 수민아.”

-정현아. 네 것 너무 커. 흐응. 읏.

“아, 그만…….”

프리컴이 줄줄 흘렀다. 목소리만으로도 이렇게 자극적인데 직접 보면 어떡하지. 보자마자 싸 버릴지도 모르겠어. 몽롱한 정신으로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흐윽. 정현아, 이제 내 안에 싸 줘. 나도 갈래.

수민의 밭은 신음이 귓바퀴를 쓸자 척추에서 전율이 일었다. 페니스의 마찰이 빨라졌다. 조용한 방 안, 수화기 너머로 할딱대는 차수민의 숨소리와 끈끈한 액체로 점철된 마찰음 소리만이 들려왔다.

팟. 예민해진 구멍에서 울컥거리며 정액이 뿜어져 나왔다. 손바닥 가득 끈적한 액체가 넘실댔다. 이게 내 손이 아니라 차수민의 손이라면 좋았을 텐데. 몇 번이고 다시 딱딱해져서 정액이 말갛게 변할 때까지 쌀 수 있을 텐데. 나는 헐떡거리며 꿈처럼 떠오르는 생각들을 지워 냈다.

“하아, 수민아. 갔어?”

-흐윽, 으응…… 근데 손으로 하니까 별로다. 하아. 네가 있어야 했는데.

“난 손으로 해도 좋았는데…… 네 신음 들리니까 살 것 같던데.”

-목소리로 가는 변태 새끼.

차수민이 앙칼지게 말했다. 나는 억울한 목소리로 항변했다.

“누가 더 변탠데. 폰섹 시작한 게 누구더라? 어디서 못된 것만 배워 와 가지고.”

-아아, 한 발 빼니까 상쾌하다.

못 들은 척하며 차수민이 말했다. 불리할 땐 말 돌리는 못된 버릇마저도 귀여웠다. 침대에서 바르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쩐지 그의 온기가 지척에서 느껴지는 것 같았다.

-너 분명 내 생각 하면서 3주 내내 딸쳤지? 욕구 불만이고 뭐고 없었겠다. 막상 만날 땐 짜낼 것도 없는 거 아냐?

“아니거든. 너 생각하면서 하긴 했는데! 그래도 만나면 죽여줄 수 있거든?”

-푸하. 그래? 그것 참 기대된다. 달력에 동그라미 쳐 놔야지~ 김정현이 죽여주는 날.

그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짓궂은 새끼.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쓸어내렸다. 가끔 저렇게 후진 없이 달려들 때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모르겠다. 그마저 사랑스럽다면 중증이겠지. 병자 김정현은 다시 무게를 더해 가는 페니스를 진정시켜야 했다.

-김정현. 있잖아……. 아, 아니야.

“왜? 왜! 뭔데 말을 하다 말아.”

-나 보고 싶었냐고.

“몇 번을 말하냐. 보고 싶어 눈깔 뒤집히는 줄 알았다고. 얼마나 더 설명해 줄까. 네가 없어서 하루하루 말라 가는 기분이었어.”

잠시 수화기 너머로 정적이 흐르더니 귓가를 간질이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제법 만족스러운 대답이었나 보다.

-나도. 네가 없으니까 새삼 네 중요성을 알게 되네.

“생체 딜도로서의?”

내 조심스러운 질문에 차수민은 어이없다는 코웃음으로 답했다.

-그랬으면 좋겠냐?

“아니!”

잠깐 생각에 잠긴 듯 조용하던 수민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핸드폰에 귀를 딱 붙이고 있는 나만 들을 수 있는 말이었다.

-잠깐 너랑 떨어지니까 이젠 내가 너 없이는 살 수 없겠단 걸 여실히 느껴 버렸어. 응. 너 없인 못 살 거 같아.

끝말이 달콤했다. 섹스 후 보상 같은 건가. 사정의 도파민이 무심하기 짝이 없던 차수민의 입술마저 달콤하게 만들어 버린 건가. 아무렴 좋았다. 너무 좋았다. 허울 섞인 말이라 해도 날 사랑하고 있다는 게 여실히 느껴져서 고맙기 짝이 없었다. 그 사랑스러운 한 마디에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차수미인…….”

-너 우냐……?

잠깐 훌쩍거린 걸 귀신같이 잡아낸 차수민이 말했다.

“감동받아서…… 나도, 나도 그래. 그리고 그걸 알게 되어서 기뻐……. 그때처럼 내 감정도 모른 채 널 보내는 일은 생기지 않을 거니까.”

-야. 그런 걸로 왜 또 울고 그래…….

분명 질린 얼굴일 테지만 알 게 뭐야. 나는 찌질함과 비굴함을 타고나서 조금 훌쩍인 것 따위 부끄럽지도 않았다. 차수민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나는 희망 서린 목소리로 물었다.

“너도 울어?”

-그럴 리 있겠냐? 하여튼 그때처럼 말없이 널 떠나지 않을게. 약속할게. 그럴 일을 만들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울지 마.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간지 나는 새끼. 내가 해야 할 말을 지가 하고 있어. 폼 나는 건 다 차수민의 몫이었다. 그가 계속 말했다.

-김정현……. 내가 하려던 말은, 그러니까……. 나는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널 우선적으로 고려할 거야.

답지 않게 더듬거리며 차수민이 말을 이어 갔다. 나는 한 마디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전화기를 집어삼킬 듯이 귓구멍에 가져다 댔다.

-그건 결국 날 위한 일이기도 해. 너 없이 살 수 없는 인간이 되어 버렸으니까. 그러니 너는 내 사소한 결정에 자책하고 걱정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는 너보다 훨씬 이성적이고 이기적인 놈이거든. 누구처럼 남 생각만 하는 놈이 아니라.

따듯한 말이었다. 가슴이 촉촉하게 젖어 왔다. 동시에 어딘가 의미심장하게 들리기도 했다. 보통의 연인이 할 수 있는 말, 그건 차수민이 하기 어려운 말이기도 했다. 그걸 잘 아는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말 정말 감동적이고 황송해서 몸 둘 바를 모르겠는데… 너무너무 고마운데……, 왜 갑자기 이런 얘기를 하는 거야?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폰섹 잘 즐겨 놓고 일은 무슨 일.

차수민이 부루퉁하게 말했다.

“아니, 그냥.”

너 원래 이런 얘기 잘 안 하잖아…… 달달한 말이라곤 들어 본 기억이 없는데. 이 속마음을 얘기했다간 앞으로 영영 사랑스러운 고백 따위 하지 않겠지. 가슴속 저 깊은 곳에 박아 두는 걸로 결정했다.

-아 맞다. 이번 학기부터 같은 수업 들을 거야. 법학과 복전 신청했거든.

갑작스럽게도 차수민이 희소식을 전했다.

“뭐? 진짜? 그럼 계속 붙어 다닐 수 있는 거야? 하루 온종일?”

-좋아?

“응. 좋아서 또 눈물이 날 거 같아. 나 때문에 더럽게 외울 거 많고 재미없는 과에 온다잖아.”

이불을 뒤집어쓰고 뒹굴었다. 행복했다. 3주간의 고생이 결실을 맺으려 하고 있었다. 차수민이 큭큭 웃었다.

-그러니까 개강 기대하고 있어. 우리 곧 보겠네?

“후. 너무 긴 시간이었다. 너 일부러 연락 안 한 거지. 사람 애간장 녹아 죽으라고.”

-아니. 삐져서였다고. 할 말이 엄청 많은데 만나서 얘기해 줄게.

무슨 말?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이라면 가혹하고 영혼을 쏙 빼놓는 잔소리라 해도 곱게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차수민이 온다. 드디어 만난다. 신이 나 방방 뛰다가 찌릿한 통증을 느꼈다. 아. 어깨의 상처였다. 뚜렷이 보이는 흉터를 떠올리니 마냥 기뻐할 수도 없는 기분이 되었다. 나는 조금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언제 올 거야?”

-왜. 성대한 환영식이라도 준비하게? 가기 전날 연락할게. 이번 주가 피크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예정이거든. 연락 안 될 거야. 이번엔 삐져서 안 하는 게 아니니까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알겠지?

그의 말에 나는 다시 꼬리를 흔드는 개가 되었다. 물론이죠. 얌전히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 ✲

폰을 부여잡은 채 뜨거운 밤을 보내고 나서, 나는 며칠간 머리를 감싸고 고민했다.

‘남겨질 사람의 마음을 몰랐던 것 같아.’

차수민의 고백은 지금 내 상황과 일치했다. 나는 차수민의 사과를 받을 처지가 아니었다. 곧 그를 볼 수 있다는 기쁨에 젖어 어영부영 넘어갔지만, 어깨의 상처에 대해 말을 꺼냈어야 했다.

그의 말대로 남겨진 사람은 괴롭다. 영문도 모른 채 속이 타들어 가야 한다. 설사 떠나기로 한 결정이 남겨 둔 상대를 위한 것이었다 해도.

나는 내 선택이 과연 옳았는지에 대해 몇 번이고 고민했다. 차수민에게 상처 주는 걸 피하려다 더 큰 상처를 주게 되진 않을까? 나중에 내 부상을 알게 된 차수민은 어떤 생각을 할까. 홀로 버려졌던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 역시 배신감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자신을 신뢰하지 않은 연인에 대해.

그래, 지금에 와서야 후회가 되기 시작했다. 자의로 판단해 멋대로 결정해 버렸다.

“이기적이지…… 알면서도 그랬지.”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사람을 이기적으로 만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도망치듯 자취방으로 피신한 것이었다.

내 상처 보지 마. 네게 짐이 되기 싫어. 처음엔 걱정하고 보듬어 주겠지. 그러나 우리는 계속 위험에 처할 거고 이 상황은 반복될 거야. 누구 하나 지쳐 떨어질 때까지. 너는 조직을 못 버리잖아. 나는 너에게 버려지기 싫어…….

사실은, 무서워서 도망친 게 아닐까? 열일곱의 차수민이 그랬던 것처럼. 사랑이 진실과 마주하면, 대개는 사랑이 이길 거라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현실에 져 버리는 사랑, 깨지기 쉬운 사랑. 그래. 나는 그것이 무서웠던 것이다. 고작 시작한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는 연애에서 겁쟁이 김정현은 그런 것까지 재 가면서 벌벌 떨고 있었다.

말해야 해.

나 좋자고 내린 판단이었다. 밤마다 꾸는 꿈. 조폭들에게 둘러싸여 피투성이가 되는 차수민을 떠올려 보았다. 차수민이 다친 걸 숨기고 홀로 끙끙거렸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미어졌다. 나를 오죽 못 믿으면 말 한마디 없었을까, 자괴감이 들었을 것이다. 사랑하니까 걱정되고, 사랑하니까 옆에 있고 싶고, 상처까지 보듬어 주고 싶은 게 당연한 건데.

“오만했어. 김정현.”

내려가자. 얼굴 보고 직접 말하자. 힘든 건 함께 나누자고 입 털던 놈이 이기적으로 굴었다고. 네가 없는 한 달이 지옥같이 느껴졌다고.

나는 버스표를 예약했다. 마지막 휴가를 즐기려는 사람들로 인해 밤 시간대 표만 남아 있었다. 짐을 챙기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김정현! 오늘 할 거 없지? 우리 술 먹고 있는데 일로 와라. 개강 맞이 클럽 가자. 불금을 확실하게…….”

“나 바빠.”

“야, 네가 가야지 우리 체면이…….”

전화를 뚝 끊었다. 현식이었다. 이 새끼가 분위기 파악 못 하고. 울렁울렁 격렬했던 감정이 눈치 없는 전화 한 통으로 싹 가라앉았다. 하여간 짜증 나는 새끼. 구시렁대며 가방을 챙기는데 다시 벨이 울렸다.

“바쁘다고! 그런 데 안 간다고!”

“어머, 정현 씨. 미안해. 끊을게요…….”

“아, 아니에요! 누나인 줄 모르고! 안 바빠요. 말씀하세요.”

나는 황급하게 손을 내저었다. 아래층에 둥지를 튼 수민의 심복 진아 씨였다.

“아, 그럼 미안한데 지갑 좀 갖다줄래? 요 앞 편의점 왔는데 다시 올라가기 그래서…….”

그녀는 알바생과 노닥거리는 중이 분명했다. 편의점 총각에게 꿀물이라도 사 줄 심산이겠지.

버스 시간까지는 꽤 시간이 남았기 때문에 나는 내려가는 길에 아래층에 들렀다. 진아 씨의 방문을 향해 걸어가는데 옆방의 문이 벌컥 열리며 누군가 뛰쳐나와 세게 부딪히고 말았다. 강한 충격이 느껴졌다.

“어어, 죄송합니다, 행님! 괜찮으십니까?”

도끼가 화들짝 놀라며 튀어나왔다.

“아윽. 괘, 괜찮아요.”

“아이고오. 상처 터지진 않았나 몰라. 죄송합니다! 주의를 삼가 살폈어야 했는데!”

나는 내 어깨를 주물럭거리며 곡소리를 쏟아 내는 도끼를 밀어 내다가 문득 깨달았다. 내 어깨. 어깨의 상처를 알고 있다.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는데. 대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싸하게 발끝이 차가워졌다. 나도 모르게 서늘한 어투가 튀어나왔다.

“도끼 씨가…… 왜 제 어깨를 걱정해 주시죠?”

“네? 그야 다치셨으니까요.”

“다치다니요, 그게 무슨 말인지…….”

“칼빵 당하신 거 아니었습니까? 레이파 개호로 잡것들. 사람 뒤통수를 그리 치는 게 어디 있답니까? 상도덕도 없는 놈들입니다. 치료는 꼬박꼬박 받고 계시죠? 요즘 바빠서 신경을 못 써 드렸습니다.”

나는 새하얗게 질렸다. 도끼는 사람 속도 모르고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언제부터,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요?”

“아, 비밀이었습니까? 도련님이 잘 신경 써 달라고 부탁하셔서 제가 괜찮은 의사 데려다 스케줄 잡아 드렸는데요.”

“아아…….”

나는 비틀거리며 벽을 짚었다. 뭐야. 차수민, 너 알고 있었어?

그가 알게 될까 두려워 허겁지겁 응급 처치만 받은 채 도망치듯 올라왔었다. 병원 가는 걸 호랑이에게 걸릴까 노심초사하며 첩보물을 찍어 댔었다. 말단 중의 말단, 도끼 새끼까지 아는 정보면 나… 3주간 뭐 한 거지……?

“그런데 어디 가시던 길입니까? 짐이 한가득인데. 제가 들어 드릴까여.”

“아, 차수민 집…… 할 말이 있어서.”

도끼가 어깨에 멘 배낭을 흘깃거렸다. 나는 뒷걸음질 치며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아직 충격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였다.

“네? 도련님 본가 말씀이십니까? 도련님이 내려오라 하셨습니까?”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얼굴 본 지 오래돼서요.”

“지금 도련님은 거기 안 계실 텐데요. 오늘 올라오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호랑이 형님이 모시러 갔습니다.”

“올라와요? 어딜? 여기?”

“아, 모르셨습니까?”

도끼가 해맑게 끄덕였다. 나는 점점 더 혼란에 빠졌다. 한 달간 허튼짓한 걸로도 모자라 애인의 소재조차 모르고 있었다니. 관자놀이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올라온다고? 갑자기? 말도 없이? 나한테 말도 없이?

“왜, 왜 온다고…….”

얼이 빠져 도끼의 어깨를 붙잡고 캐묻는데, 이때다 싶게 핸드폰이 울렸다. 나는 발신자도 확인하지 않고 전화를 받았다.

“수민아?”

-김정현!

현식이었다. 징한 새끼. 클럽 못 가서 죽은 귀신이 붙었나. 나는 낮게 욕설을 읊조렸다.

“이, 시발. 너냐? 안 간다고, 안 간다고! 나 바쁘니까 끊어라.”

-야야, 끊지 마, 끊지 마! 그게 아니라 나 걔 봤어, 그…… 네 친구! 걔 봤다고!

“걔 누구.”

-그, 과팅 때 이민혁 대신 온…… 허여멀건 한…… 왜, 호빠 선수같이 생긴 애! 걔 네 친구 맞지?

“차수민……? 수민이가 왜?”

나는 핸드폰을 고쳐 들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더 충격 먹을 일이 남아 있단 말인가. 나 몰래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 거야, 차수민.

-밥 먹고 2차 가려는데 건너편에 커다란 나이트 있잖아, XX 나이트. 알지? 거기 VIP 통로로 들어가는 걸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 주변에 어깨들도 있던데. 거봐. 내 말이 맞지? 걔 선수 맞다니깐! 이젠 호빠로도 모자라 큰물에서 놀려고 하는 거야. 제비 짓 해서 누님들 주머니까지 털어 가려고.

“뭐……? 잘못 본 거겠지. 그리고 선수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하냐.”

-내가 미쳤다고 너한테 전화까지 해서 구라를 치겠냐! 과팅 박살 낸 새끼 얼굴을 어떻게 잊어. 하여튼 걔 번호 알면 조심하라고 전해 줘라. 거기 위험해.

“위험하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머릿속 스위치가 딸깍 켜졌다. 온몸에 피가 돌았다. 앞에서 알짱대며 통화 내용을 들으려 하는 도끼도, 갖다주기로 한 진아 씨의 지갑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3주간 삽질해야 했던 이유도, 뭔가 일을 꾸미고 있을 차수민의 계략도 더 이상 궁금하지 않았다. 차수민이 위험하다는 한마디에 꼭지가 확 도는 느낌이었다.

-어어. 너도 알다시피 우리 삼촌이 경찰서 소장이고, 우리 아빠가 부장검사고, 할아버지는 대법원…….

“닥치고 요점만 말해.”

-으응……. 하여튼 거기 겉보기엔 그냥 나이트 같지만 찐 중에 찐이래. 검찰에서 대대적으로 수색 한번 들어가려고 하고 있어. 국내 폭력배는 물론이고 일본 야쿠자까지 개입되어 있나 봐. 최근에 세력 넓혀 가는 놈들인데 아주 위험하대. 사람 가릴 것 없이 베는 놈들이라 국가에서도 예의 주시 중인가 봐.

“레이파.”

나는 중얼거렸다. 그놈들이다. 차수민이 일본서 오는 손님이라며 손봐 주고 오겠다고 했던 놈들. 백숙집을 습격해 내 어깨에 칼자국을 새겨 줬던 놈도 레이파의 일원이라고 했었다. 그 뒤엔 더 거대한 조직이 있다고도 했었던 것 같다. 순간 머릿속이 고요해졌다. 어떻게 된 일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차수민이 알아 버렸다. 내 부상과 그 원인까지.

-어. 맞아. 어떻게 알아? 레이파인지 뭔지 야쿠자 놈들! 그 나이트가 대검파라고 우리나라에서 제일 크고 오래된 조직 거거든. 근데 장사가 안 되는지 어디 일을 벌려 놨는지 요새 자금난인가 봐. 듣기로는 레이파 통해서 마약 유통하려는 시도 중이란 얘기가 있어.

현식이 떠벌떠벌 늘어놓는 정보들이 머릿속에서 둥둥 떠다녔다. 레이파, 대검파, 무라사키 구미…… 깡패 새끼들이 모여서 정답게 한일 화합을 도모하는 친목회라도 벌일 예정인지 아주 지랄이었다. 그리고 그 혼돈의 카오스로 차수민이 걸어 들어갔다.

-스케일부터가 다르지? 아주 위험하거든 거기. 야쿠자 놈들 한국 와서 머무는 곳이 거기야. 하여튼, 제비 짓 할 거면 가려서 하라 그래라! 괜히 너한테까지 불똥…….

나는 전화를 뚝 끊어 버렸다. 그리고 홱 고개를 돌렸다.

“도끼 씨. 차 있어요?”

“아, 아뇨. 아까 호랑이 행님이 몰고 나갔는데요.”

나는 우물쭈물 서 있는 도끼에게 메고 있던 가방을 벗어 던졌다. 그가 엉겁결에 내 배낭을 받아 들었다. 나는 멍하니 가방을 들고 서 있는 도끼를 뒤로하고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차수민이 알았다. 알아 버렸다. 이민혁의 짓이 분명했다. 그 새끼, 믿는 게 아니었는데.

“이 박쥐 같은…….”

언제 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어깨의 상처, 차수민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가 내게 말도 없이 XX 나이트에 행차한 것은 분명 나 때문일 것이다.

이민혁의 장난 어린 덫으로 호성파에게 의도치 않게 납치당했을 때, 나는 얻어맞아 눈탱이가 밤탱이가 된 게 다였다. 그럼에도 차수민은 바로 조직원을 이끌고 찾아가 호성파를 박살 내 버렸다. 지금은 어깨가 뚫렸으니 가만있을 차수민이 아니었다.

어떤 말도 하지 않고 도망치듯 내려온 데에는 눈이 뒤집혀 야쿠자를 들쑤시고 다니는 차수민까지 계산에 넣었기 때문이었다.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나는 내 방 싱크대 서랍을 열었다. 쓰지 않아 녹이 잔뜩 슨 식칼이 보였다. 핑핑 도는 엔도르핀에 나도 모르게 칼자루를 쥐었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역, 역시 좀 그렇지.”

생각을 고쳐먹고 인덕션 위의 프라이팬을 챙겼다. 바로 엊그제까지 계란 후라이를 부쳐 먹던 자취템이었다. 손잡이의 그립감이 안정적이었다.

차수민이 위험했다.

이건 그의 괴물 같은 전투 능력과 별개의 문제였다. 애인이 당했다는 사실에 눈이 돌아가서 시야가 좁아진 것이 분명했다. 레이파를 조지는 데 정신이 팔려 그 뒤에 버티는 훨씬 큰 대검파인지 뭔지까지는 고려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영악하기가 둘째가라면 서러운 차수민이 고작 어깨 몇 명 데리고 적의 본거지에 쳐들어갈 리가 없었다.

“택시! 택시……!”

잡히지 않는 택시를 기다리기엔 내 인내심이 한계에 달했다. 차수민이 걱정돼서 미칠 것 같았다.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왔나, 자그마한 몸뚱이로 가긴 어딜 가. 아랫입술을 초조하게 씹어 댔다.

그동안 수민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기 위해 봐 왔던 수많은 조폭물의 영상이 자꾸만 머릿속에서 재생되었다. 차수민이 피라도 보는 날에는 정말 내 꼭지가 돌아 버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 내 눈에 따릉이가 들어왔다. 자전거 보관소에 고이 주차되어 있는 얇고 조그마한 자전거 말이다.

‘띠롱!’

지금 이 상황에서 가릴 게 뭐가 있겠나 싶어서 냉큼 올라탔다. 큰 몸을 작은 자전거에 구겨 넣고 미친 듯이 페달을 밟았다.

두 손의 자유를 위해 티셔츠의 목 뒷부분에 프라이팬의 손잡이를 끼워 넣었다. 그래서 등 뒤엔 커다란 프라이팬을 꽂은 채였다. 흡사 큰 뜻을 실현하려는 중국 요리계의 대가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바람처럼 지나가며 아이스크림을 빨던 중학생들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기도 했다.

“뭐냐, 저 또라이는?”

“쉿. 눈 마주치지 마.”

차수민의 안위에 대한 집념 하나로 쏟아지는 사람들의 시선 따위는 모두 무시할 수 있었다.

가뜩이나 성격이 더러워서 여기저기 적도 많은 놈이다. 그 가느다란 목을 노리는 손이 얼마나 많은지, 문외한인 나조차 알 수 있었다. 차수민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나는 나를 절대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허벅지가 터지도록 페달질을 해서 도착한 나이트는 가히 거대하고 삐까뻔쩍했다. 나는 비장하게 따릉이에서 내리며 프라이팬을 뽑아 들었다. 어떤 일이 생기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입구에서~ 현반을 찾아 주세요~’

바닥에 가득 널린 명함을 밟고 들어갔다. 이른 시간임에도 줄이 길었다. 이렇게 활발하게 영업 중인 걸 보면 가게 안이 부서지고 비명이 난무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마음이 급하긴 매한가지였다. 분명 스테이지 뒷공간이 따로 있을 것이다. 거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큰 음악 소리에 묻혀 일반 손님들은 알 길이 없을 터였다.

나는 긴 줄을 헤치고 앞으로 갔다. 얌전히 입장 도장을 받을 시간이 없었다. 안 되면 프라이팬이라도 휘두르자는 마음으로 가드의 앞에 섰다. 그때 누군가 손목을 잡았다.

“어머. 모야모야. 이런 데 올 나이는 아닌 거 같은데. 조 앞 클럽 가려다가 온 거야? 아니면 누나들 만나러 왔어?”

나는 눈을 작게 뜨고 남자의 가슴팍에 달린 명찰을 확인했다. 요란하게 달린 오색찬란 LED 사이로 두 글자가 보였다. 현반.

“아. 입구에서…… 현반을 찾아 주세요…….”

들이붓듯 뿌려진 명함의 주인공이었다. 현반이라. 나는 나도 모르게 그를 아래위로 훑었다. 빨간색 스팽글이 촘촘하게 붙은 웨이터용 조끼를 입은 남자는 왜 본인 닉네임을 현반으로 지어서는 보는 이마다 탄식을 자아내게 하는지 도통 알 길이 없었다.

“잘생긴 오빠는 줄 안 서도 돼.”

머뭇거리는 내게 웨이터가 찡긋 눈짓을 했다. 잘됐지 뭐…… 지금 수민이가 어떤 상황에 있는지도 모르는데 하염없이 줄만 기다리고 있는 것보단 이편이 효율적일 것 같았다.

조금 찝찝했지만 번쩍이는 빨간 조끼를 따라 다른 줄로 입장했다. 입구부터 쿵작쿵작 음악 소리가 귀를 때렸다. 사람이 미어터지게 많았다. 여러 남녀가 서로를 붙잡고 영혼이라도 흡수해 갈 것처럼 쪽쪽 난리 블루스를 떨고 있었다.

“잘 생각했어. 사회생활은 일찍부터 하는 거야. 내가 VIP 누님들 다 꿰고 있거등. 테이블 잡아 줄 테니까 따라와. 덕분에 오늘 팁 짭짤하겠다야.”

“아. 그럴 생각 없어요. 좀 놔주세요. 찾을 사람이 있어서.”

그러나 웨이터는 막무가내였다. 초조해 죽겠는데 꽁술이라며 술잔을 들이밀지를 않나 인사를 건네는 여자들에게 날 들이밀지를 않나. 나는 정신없는 스테이지를 눈으로 훑었다. 분명 직원용 통로가 있을 터였다. 현반이 눈치 없이 계속 지껄였다.

“걱정 마. 형이 다 알아서 할게. 저어기 앉아 있으면 다 알아서 세팅해 줄 거니까 어여 얌전히 엉덩이 붙이고 있어.”

“놔 달라니까? 이럴 시간 없다고!”

징글징글하게 달라붙는 그 인간을 뿌리치려는데 명찰에 달린 LED가 번쩍하고 빛났다. 동시에 내 머릿속 전구도 반짝하고 불이 들어왔다.

이 새끼. 잡자.

생각해 보니 나이트에서 웨이터란 어디든 갈 수 있는 존재였다. 그걸 깨닫고 나니 저 블링블링한 레드 베스트가 이리도 탐날 수가 없었다. 안전한 잠입을 위해서 꼭 필요한 아이템이 될 것 같았다.

결심이 서자마자 지나가는 다른 웨이터에게 손을 뻗어 쟁반 위 술잔을 낚아챘다. 그리고 냉수마찰 하듯 가슴팍에 뿌렸다. 흰 티가 잔뜩 얼룩져 뚝뚝 물이 흘렀다. 팁에 눈이 멀어 보이는 게 없는지 여전히 내 손목을 붙잡고 누님인지 VIP인지를 찾으러 다니는 현반을 불러 세웠다.

“형!”

“어. 어, 뭐야! 다 젖었네! 부딪혔어?”

“아, 이렇겐 찝찝한데. 형, 혹시 남는 옷 없죠.”

현반은 잠시 고민하는 듯했다. 나는 서둘러 덧붙였다.

“아~ 그냥 집에 갔다 와야겠다. 이러곤 못 놀지.”

“아아, 잠시만! 강둥원 캐비닛에 티 쪼가리 하나 정도는 더 있을 거야. 따라와.”

웨이터는 어두컴컴한 커튼을 걷고 긴 통로를 가리켰다. 나는 씨익 웃으며 프라이팬을 꽉 쥐었다.

잠시 후, 나는 빨간색 반짝이 옷을 입고 있었다. 작은 사이즈라 가슴이 꽉 끼는 느낌이었지만 그런대로 팔은 끼울 수 있었다. 머리는 대충 물칠 해서 세웠다. 유난스럽게 깜빡거리는 현반의 명찰도 고대로 물려받았다. 손에는 용맹스러운 검투사처럼 창과 방패, 프라이팬과 웨이터 쟁반을 들고 있었다.

“수고하십니다.”

나는 스치고 지나간 큰 떡대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다행히 모르는 것 같았다. 누군가가 강둥원의 캐비닛에 잘 수납되어 있는 현반을 목격하지만 않는다면 어찌저찌 조용하게 잠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읍, 읍!’

‘쉿. 조용히. 퇴근 시간엔 나갈 수 있을 거예요.’

현반을 가두며 그의 유산을 사용했다. 현반의 조끼 주머니를 뒤져 보니 라이터와 콘돔 몇 개가 나왔다. 그래서 콘돔으로 팔다리를 묶고 문을 닫아 주었다. 끈적한 손이 기분 나쁠 뿐 일말의 죄책감조차 느껴지지 않는 걸 보니 점점 차수민화 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걸 기뻐해야 하나 비통해해야 하나.

통로는 어두컴컴하고 미로같이 얽혀 있었다. 조금 들어가니 철문이 하나 나왔다. 일반 직원용 공간과는 확실히 다른 분위기가 느껴졌다. 손잡이에 손을 얹는데 등 뒤로 묵직한 그림자가 서렸다.

“사무실 출입은 안 된다고 몇 번을 말하냐.”

나는 기름칠 안 한 양철 인형처럼 끼긱거리며 억지로 고개를 돌렸다. 우람한 풍채의 깍두기 하나가 껌을 씹고 있었다.

“신입이냐? 손에 그건 뭐…….”

말하기가 무섭게 대가리를 깡 내리쳤다. 몇 번의 경험을 통해 선빵이 최고라는 사실을 습득했다.

“억.”

효과는 대단했다. 나를 옆으로 두 개 붙여 놓은 듯한 거구가 비틀거리더니 쿵 하고 쓰러졌다. 그의 발목을 붙잡고 질질 끌어 직원 휴게실에 데려다 놓았다. 도저히 캐비닛에 쑤셔 넣을 수 없는 덩치였다. 나는 이빨로 콘돔 포장지를 뜯어냈다. 현반 씨. 덕분에 요긴하게 쓰네요.

뺨을 철썩 치니 손발이 칭칭 묶인 덩치가 비몽사몽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차수민 어딨어.”

“무…뭐? 누우…… 누구?”

“차수민! 그, 왜…….”

나는 문득 내가 아직 차수민의 조직 이름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쓴웃음을 삼켰다.

“하얗고 예쁜 애……. 안 왔어?”

“여기 하얗고 예쁜 애가 얼마나 많은데…….”

“아. 내가 아는 하얗고 예쁜 애는 춤추러 온 게 아니고 너네 조질 목적으로 왔을 거야.”

덩치가 눈만 꿈뻑거렸다. 벌써 당했나. 시발, 가만 안 둬. 나는 프라이팬 손잡이를 잡고 일어서려 했다. 덩치가 입을 열었다.

“나, 난 말단이라 잘 몰라. 누가 오긴 한 것 같은데. 형님이 간만에 반가운 손님 온다고 하는 걸 들었거든……. 후하게 대접해야겠다고 안주도 내오던데.”

“후하게 대접……?”

나는 쏟아지는 후한 대접을 받아 초죽음이 되어 시멘트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 차수민을 떠올렸다. 머리가 핑 돌았다.

“근데 나 손목이 되게 미끈미끈한데 뭐 한 거야?”

차마 콘돔이라 말은 못 하겠어서 대답 대신 프라이팬으로 한 번 더 갈겨 주었다.

“자라.”

정신을 잃은 그의 재킷 주머니에서 열쇠 꾸러미를 꺼내 들었다. 터질 듯 꽉 끼던 빤짝이 조끼를 벗어 그의 양복 재킷과 바꾸어 입었다.

시간이 없었다. 맞는 열쇠가 들어가자 철문이 끼긱 소리를 내며 열렸다. 긴 복도가 펼쳐져 있었다. 나는 뛰기 시작했다.

싸구려 벨벳으로 마감한 바닥재는 발소리를 먹었다. 깡패 본거지이니 깍두기들이 돌아다니는 게 당연한 일이지만 게임 NPC처럼 한 명을 처리하면 다른 놈이 불쑥 등장하는 통에 프라이팬의 내구도가 깎여 가고 있었다. 이건 뭐, 퀘스트 깨는 것도 아니고. 공주를 구하기 위한 배관공 슈퍼마리오의 모험, 시작합니다.

“여긴 VIP 통로 아닌데요. 손님용 통로는 저짝에 있는데에.”

또 다른 NPC의 등장이었다. 험악한 인상의 깍두기와 눈이 딱 마주쳐 버렸다. 그의 눈동자가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웨이터 조끼를 덩치의 양복으로 갈아입고 온 게 천만다행이었다. 커다란 재킷이 반쯤 찌그러진 채 손에 들린 프라이팬을 가려 주었다.

“당신 누구야? 설마…….”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여차하면 또 대갈통을 갈기고 튈 생각이었다.

“접때 부른 록커는 아니고. 아. 그 요즘 뜨는 트로트 아이돌! 맞지?”

“예? 예예.”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전혀 모르겠으나 일단 맞장구를 쳐 줬다. 다행히 정체를 들키진 않은 것 같았다.

내 정체가…… 뭐라 정의하기도 참 어려웠다. 조폭 애인을 구하고자 빈손으로 야쿠자 소굴에 뛰어든 멍청이? 이제 와 경찰에 신고라도 해 볼 걸 그랬나, 하는 후회가 고개를 들었지만 그랬다간 내 손으로 차수민을 감빵에 처넣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대박. 실물이 훨씬 잘생겼는데? 야, 이 판에서 썩기 아깝다. 영화배우 해도 되겠어. 우리 형님 와이프가 당신 왕팬이잖아. 아무리 불러도 안 온다 빼더니 이번엔 제법 짭짤했나 봐?”

그는 손가락을 오므려 돈 모양을 만들어 보였다. 나는 대충 끄덕였다. 깡패 놈들을 몇 명이나 만날지 모르는데 그냥 넘어갈 수 있으면 넘어가는 게 좋지.

“예에. 감사합니다.”

“운 좋은 줄 알아. 공중파 몇 번 나오는 거보다 우리 밤무대 한 번 뛰는 게 훨씬 페이가 쎄요. 형님 만나면 꼭 감사하다 그래. 와이프 사인도 좀 해 주고. 쩌어기, 계단 올라가면 돼.”

그가 손가락으로 출입구를 가리켰다. 나는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이렇게 넘어가나 싶었다. 계단을 오르는데 그가 등 뒤에서 물어 왔다.

“근데, 출입증은 받은 거야?”

저벅저벅 발걸음이 가까워졌다. 나는 차마 뒤를 돌아보지 못한 채 멈추어 서서 그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요상하네. 매니저도 안 보이고…… 손에 그건, 뭐야? 무대 소품인가?”

나는 잠깐 고민했다. 그냥 위로 튈까, 해치우고 갈까.

“억!”

그러나 내 머리보다 팔이 더 빠르게 움직였다. 김정현의 고질병이었다. 머리가 느긋하게 일 좀 해 보려고 할 때, 성격 급한 몸뚱이가 먼저 일을 쳐 버린다.

좋게 말하자면 선빵. 굳이 나쁘게 말하자면 지금 같은 상황을 사서 만드는…… 구린 판단력. 머리의 허락을 받지 않고 근육이 멋대로 내려친 프라이팬에서 찌르르 진동이 느껴졌다.

쨍그랑.

찌그러진 고철이 손잡이와 분리되어 바닥에 나뒹굴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나는 비틀거리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가 정신을 차리고 내 목덜미를 낚아채기 전에 재빠르게 계단을 밟아 올라가려 했다. 그랬는데-

“이 새끼가 돌았나.”

사내의 행동이 더 빨랐다. 분명히 제대로 맞았는데. 큰 타격이 되지 못한 걸 보면 대가리가 돌이거나 맷집 경력이 팀장급인 듯했다. 적어도 행동대장 이상 급은 되리라. 나는 날아가며 생각했다.

“아으.”

벽에 부딪혀 골이 울렸다. 눈을 뜨기가 무섭게 단단한 주먹이 날아들었다. 눈앞에서 불꽃놀이가 펼쳐지는 것 같았다. 오른뺨에서 고통이 느껴지기도 전에 왼뺨이 쓰라렸다.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연타하는 걸 보니 이 바닥에서 구를 대로 구른 놈이 분명했다. 이 바닥, 짬빠가 중요하긴 하구나…… 얻어맞으면서 깨달음을 얻었다. 고작 한 학기 배운 조폭용 짭호신술로는 비벼 볼 정도도 못되었다.

몇 번 더 주먹질을 하던 사내는 내 멱살을 그러잡고 숨 막히게 조여 왔다.

“너 이 새끼. 이제 보니 행사 때문에 온 거 아니지. 누가 보냈어? 어?”

나는 캑캑거리며 그를 노려보았다.

“보내긴, 누가…….”

“형사는 아닌 것 같고. 멍청하게 혼자 기어 온 걸 보면 수뇌부가 영 빡대가리란 말이야? 아, 설마.”

설마, 뭐? 나의 존재가 차수민에게 해가 되어선 안 돼. 핏기가 싹 가셨다. 차수민이 빡대가리라고 명명당한 것보다 내 멍청한 잠입이 그를 곤경에 빠뜨릴까 봐 더 걱정되었다. 사내는 파랗게 질린 내 얼굴에 누렇게 뜬 본인 얼굴을 들이밀며 말했다.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

“호성파에서 보냈구나! 맞지?”

호성파라면 그… 이민혁의 악의 없는 장난으로 인해 차수민에게 묵사발이 된 조직 아닌가. 피식, 김이 빠졌다. 신나게 착각하는 눈앞의 사내를 한심한 눈으로 훑었다.

행동대장은 개뿔. 누가 봐도 수상한 사람을 듣도 보도 못한 밤무대 가수라 착각하지를 않나, 이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조직을 들먹이지를 않나. 통찰력이라곤 좆도 없어서 어디 쓸래도 못 쓰겠다. 그가 너무나 확신에 차 있어서 대충 예예, 하고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는 신났는지 이죽거리기 시작했다.

“이수민한테 박살 났다고 들었는데, 왜. 복수라도 하려고? 걔 여기 왔단 소문 들은 거구나. 하긴, 남의 영역에 와 있을 때 처리하기가 쉽긴 하지. 아무래도 그렇지 애를 혼자 보내냐.”

수민의 이름이 언급되자 눈이 번뜩 떠졌다. 역시. 여기에 와 있어.

“차수민…… 지금 어디 있어?”

“차수민? 아, 이수민~. 어디 있긴. 보스가 자알 대접 중이지. 얌마, 너 헛걸음한 거야. 푸핫.”

그가 검지로 내 가슴팍을 툭툭 쳐 댔다. 대접. 뒷 세계 놈들의 대접은 선량한 일반 시민의 대접과 다른 개념인 듯했다. 온몸에 칼자국을 새긴 놈들이 차나 따르고 홍홍 웃으면서 담소 나눌 건 아니잖아. 절로 주먹이 쥐어졌다.

“어이구. 심장 뛰는 것 봐라. 불쌍하니까 몇 대만 더 때리고 살려서 보내 줄게. 생각해서 말해 주는 건데 복수일랑 다 잊어. 목숨은 건져야지. 오늘이면 사라질 조직이니까 너무 마음 쓰지 말란 말이야.”

“그게 무슨 소리야. 사라진다니!”

나는 이를 악물고 물었다. 사내가 내 떨리는 얼굴을 비웃듯이 내려다보았다.

“알고 온 거 아니야? 보스가 지금 얼마나 신났는데. 몇 시간 후면 좆같은 이씨네 조직도 느그 조직 꼴 날 거라고오. 억.”

반사적으로 주먹이 나갔다. 역시 머리의 허락을 받지 않은 주먹의 단독 행동이었는데 이번에는 간만에 머리의 의사와 일치했다.

“지금 뭐라 그랬어. 사라져?”

주먹이 찌잉 울렸다. 저놈을 빨리 조져야 한다. 오늘 차수민의 조직이 사라진다. 모르긴 몰라도 상대는 거사를 치를 생각인 듯했다. 차수민은 칼빵 맞은 애인을 위한 복수심에 눈이 멀어 단순히 레이파를 치러 왔다가 거하게 뒤통수를 맞을 예정인 것이다.

조직끼리의 가벼운 다툼 따위가 아니었다. 한쪽이 사라진다. 차수민이…… 위험하다.

“아 히발. 혀 씹었어.”

갑자기 턱주가리를 가격당한 사내가 주둥아리를 움켜쥐고 있었다.

“아프냐……?”

“너라면 안아흐겠냐? 퉤.”

귀찮은 일은 미래의 김정현에게 맡기며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흘러가는 대로 살아왔는데, 이렇게 초조한 적은 처음이었다. 걱정으로 머리가 마비될 것 같았다. 나는 코에서 흐르는 뜨거운 액체를 닦았다.

“차수민은, 그 조그만 애는 시멘에 담가 버릴 생각을 하면서 이까짓 게 아파?”

“엥. 내가 언제-”

다시 주먹을 날렸다. 사내의 고개가 뒤로 꺾였다. 피가 거꾸로 솟았다. 덩치도 집채만 한 놈들이 한주먹거리도 안 되는 여린 애를 갈아 버릴 모의 중이라 생각하니 온몸이 떨렸다.

“어떻게 할 생각이었어? 어? 드럼, 드럼통 같은 거라도 준비했냐? 너희가 감히 차수민을!”

머릿속에서 그동안 봐 왔던 느와르 영화의 줄거리가 지나갔다. 시멘트가 가득 찬 드럼통과 차가운 바닷물 말이다. 눈이 뒤집혔다.

“나는 절대로 그 꼴 못 봐!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나는 그가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총알같이 달려 나가 몸을 부딪쳤다. 갑작스러운 몸통 박치기에 큰 풍채가 계단 밑으로 굴러떨어졌다. 사내가 자꾸 뭔가를 말하려고 뻐끔거렸지만 틈을 주지 않고 달려들어 주먹질을 했다.

“차수민 건들지 마! 죽여 버릴 거니까.”

“시발, 왜 이, 왜 이래! 살려…….”

상대의 배 위에 앉아 광대에 주먹을 내리꽂았다. 사내가 내뱉는 욕설조차 들리지 않았다. 귀에서 이명이 울렸다. 몸이 자제가 안 됐다.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답지 않게 왜 이래, 김정현! 머릿속에서 털끝만큼 남은 이성이 꽥꽥 소리를 질러 댔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죽여 버릴 거야. 수민이 손끝 하나 건드렸다간, 내가 죽여 버릴 거라고.

“헉. 헉…….”

움직이지 않는 상대를 확인하고 몸을 일으켰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수민이가, 수민이가 다치기라도 한다면 나는…….

치직-

‘イ·スミン(이수민)と交渉完了。 はんこだけ押せばいいんだけど、 お前は今どこにいるんだ?’

손톱을 물어뜯으며 계단을 오르던 나는 뒤쪽에서 들려온 난잡한 일본어 속에서 수민의 이름을 건져 내었다. 놀라 뒤를 돌아보니 기절한 줄 알았던 사내가 엎드려 무전기를 조작하고 있었다.

그가 부들부들 혼신의 힘으로 말했다.

“B-6, 침입자…… 발견.”

이런, 더 조져 놨어야 했는데. 가까이 다가가자 사내가 흠칫 놀라며 굼벵이처럼 몸을 말았다. 이제는 차수민보다 차수민스러운 생각을 하게 된 김정현은 뚜벅뚜벅 걸어가 지직거리며 일본어를 토해 내는 기계 덩어리를 밟아 부수었다.

“히익!”

“방금 쟤네가 뭐라 한 거야? 차수민……. 어쨌대?”

“모, 몰라 나는!”

“내가 방금 말했지. 차수민 머리털 하나라도 건드렸다간….”

나는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위층의 층계 도어가 세차게 열리며 여러 개의 구둣발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아, 이럴 시간이 없는데. 나는 쏟아져 내려오는 떡대들의 물결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수민이가 위험한데…….

“퉤.”

침에 핏물이 섞여 나왔다. 더럽게 아팠다. 언제나 평화로운 인생을 고수해 왔던 김정현 인생 최고의 고통이었다. 아니다. 차수민을 만난 이후로 그닥 인생이 순탄하게 굴러가진 않았다. 삥도 제대로 못 뜯던 찌질한 반 양아치가 지금은 주먹을 마구 휘두르고 있으니까.

이럴 줄 알았겠냐고. 나는 힘없이 무거워진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차수민이 얽힌 문제에는 나도 모르게 이성을 잃어버리곤 했다. 시작이 언제더라.

고분고분 따르던 병철 선배의 턱주가리에 주먹질을 했던 게 떠올랐다. 그때도 이런 기분이었던 것 같다. 초조하고, 답답한 기분. 앞뒤 안 가리고 덤벼들며 차수민의 놀란 눈동자와 마주했었다.

“빨리 가야…….”

나는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웨이터 쟁반이 없었더라면 지금쯤 내 배는 구멍 나 있었을 것이다. 현반 씨 고마워요……. 나는 아직도 갇힌 채 캐비닛의 문을 두드리고 있을 웨이터 생각에 눈물을 훔치며 비적비적 층계를 올랐다. 묵직한 뭔가를 밟았지만 사과할 힘도, 피해 갈 힘도 없었다. 아까 넘어뜨린 놈 중 하나였을 테니까.

“으…….”

눈앞이 흐릿했다. 아물어 가던 어깨의 상처가 다시 터졌는지 흰 셔츠가 축축하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더 이상의 깍두기는 사양이다. 누구 하나 더 마주쳤다간 나는 수민이를 만나기도 전에 황천길로 직행하게 될 것이었다. 제발 아무도 없기를, 주문처럼 읊조리며 2층 문을 열었다.

여기구나.

삘이 왔다. 1층과 비교도 할 수 없는 화려함. 조폭 특유의 싸구려 미적 감각이 묻어난 인테리어였다. 예상으론 제일 끝 방이 VIP룸일 것이다. 일본인으로 보이는 두 인간이 지키고 있었다. 그때였다. 차수민이 있을 거라 추정되는 복도 끝에 위치한 방문이 열렸다.

“하.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넌 눈치가 없어. 난 한국 들어올 때부터 언젠간 이리되리라 예상했다. 문제는 없지. 조직원 대부분 동의했고 계속 말 나왔던 부분이었잖냐.”

“그건 그렇지만…….”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이놈의 깡패 새끼들은 왜 이렇게 빨빨대며 돌아다니는 거야. 나는 축축 늘어지는 몸을 억지로 쓸어 담았다.

기둥 뒤에 몸을 숨겼다. 한시가 급한데 몸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 이런 몸으로 저 둘과 문 앞의 둘, 총 넷을 상대하긴 무리였다. 입술을 깨물고 있으니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도련님도 겁이 너무 없으세요. 몸 사려도 부족할 마당에 대검파 아지트에 직접 나타나실 줄은. 대검파만 있습니까? 야쿠자도 함께잖아요.”

“잘됐지, 뭐.”

익숙한 목소리. 짭사부와 호랑이였다. 긴장이 풀렸다. 그 말인즉슨 차수민이 확실히 이 장소에 있다는 것을 뜻했다. 저 문 너머에 수민이가 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둘이 여유롭게 걸어가는 걸 보아하니 수민의 신변엔 아직 이상이 없는 모양이었다. 괜히 왔나……? 나는 피 칠갑을 한 가슴팍을 내려다보았다. 호랑이와 짭사부가 멀쩡해 보이는데 반해 지금의 내 모습은 시체라 해도 믿을 지경이었다. 헛짓거리한 거라면 어쩌지.

“형님은 잘됐다 생각하실지 몰라도 저는 아직 좀 그래요. 너무 빨리 진행된 것 같고.”

“얌마. 이왕 해치울 거, 빨리빨리 해치우는 게 낫지 않겠냐. 질질 끌다간 우리가 뒤통수 맞을 수도 있어.”

어째 좀 대화가 이상하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나는 귀를 쫑긋 세웠다.

“그쵸? 이게 맞는 거겠죠?”

호랑이가 답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몇 년을 몸담은 조직인데 이대로 사라진다 생각하니 아쉽습니다. 머리론 다 받아들였는데 가슴으론 아직……. 곧 있으면 도련님도 더 이상 도련님이라 부를 수 없게 될 거 아닙니까.”

“뭐 어떠냐. 눈 딱 감고 기다리면 새 시대가 온다니까?”

나는 기둥 뒤에 멀찍이 서서 눈을 깜빡거렸다. 지금…… 내가 이해한 게 맞는 거야? 너무 당황스러워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사라진다. 더 이상 도련님이라 부르지 않는다. 기다리면 새 시대가 온다.

뇌보다 빨리 답을 내린 입술이 신음 같은 혼잣말을 흘려보냈다.

“배신…….”

차수민!

휘청거리는 몸을 일으켰다. 가뜩이나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을 차수민은 믿었던 부하들에게 배신까지 당한 상황이었다. 내가, 나라도 그의 뒤에 있어야 했다.

수민이가 네놈들을 얼마나 믿었는데. 마음 같아선 배신자 두 명을 떡이 되도록 두들겨 패 주고 싶었지만 이 몸으로는 불가능했다. 저 문을 뚫고 곤란한 상황에 놓여 있을 수민이에게 다가가는 것이 너덜거리는 몸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다음은 뭐. 수민이를 끌어안은 채 대신 구둣발에 차이든가 칼이라도 대신 맞든가, 미래의 김정현이 알아서 할 일이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몸을 날렸다. 갑작스러운 돌진에 야쿠자 둘이 화들짝 놀라며 뒷걸음질을 쳤다. 주머니에서 현반의 유산인 동전 몇 개를 쥐어뿌렸다. 초등학생 수준의 같잖은 공격에 적잖이 당황한 것 같았다. 뒤에서 벌어진 소란에 호랑이와 짭사부가 달려왔다.

“이게 무슨, 아니 김정현? 네가 왜 여기 있어? 여기서 지금 뭐 하는 거….”

나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그들을 밀쳐 내고 문손잡이를 잡았다. 뒤에서 벌어지는 소란은 신경 쓰지 않고 앞만 바라보았다.

천천히 열리는 문틈 사이로 그렇게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 했던 얼굴이 보였다. 사랑스러운 차수민……과 그의 친구들.

친구들?

“어라.”

내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앞에 펼쳐진 상황은 다도라도 나누는 것처럼 평화로운 분위기였다. 마치 불청객은 내가 된 것처럼 말이다. 실제로 찻잔을 손에 든 채 편한 자세로 뭔가를 말하고 있던 차수민과 눈이 마주쳤다. 예쁜 얼굴은 멍 하나 없이 깨끗했다.

“김정현……?!”

놀란 얼굴의 차수민 앞에는 일본 놈으로 보이는 야쿠자 두목이 얼빠진 얼굴로 이쪽을 돌아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는 대검파 두목이 분명한 사내가 칼자국이 난 눈썹을 치켜올리며 읽고 있던 서류철을 내려놓고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내게 쏠려 있었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앗, 그게 있잖아.”

머쓱하게 변명을 늘어놓으려는데, 둔탁한 마찰음과 함께 별이 보였다. 아픈 뒤통수의 감각이 세세하게 느껴지기도 전에 시야가 서서히 흐려졌다. 누군가 외치는 소리마저도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죄송합니다! 침입자가 발생했습니다. 커트해야 했는데…….”

그래…… 차라리 정신줄을 놓고 이 민망한 상황으로부터 벗어나는 편이 빠르겠단 판단이 들었다. 미래의 정현아, 뒷일을 부탁한다.

✲ ✲ ✲

민혁은 냉랭하기 짝이 없는 뒷모습을 마주해야 했다. 그의 어린 보스는 창밖만 말없이 바라보고 있기를 30분째였다. 아무런 대화가 오가지 않았지만 십여 년을 그 옆에 딱 붙어 지내 온 그는 알 수 있었다. 차수민은 화가 났다. 어마어마하게.

“저, 그래도 응급 처치는 해서 보냈으니까요.”

“그래서. 다행이라는 거야?”

얼음과도 같은 냉기가 뚝뚝 묻어 나오는 목소리였다. 재수 없는 놈. 그렇지만 별수 있나. 민혁이 입술을 깨물었다. 상사에게 깨지는 일은 썩 기분 좋은 경험이 아니었다. 그것도 김정현 같은 머저리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면 더더욱.

김정현이 칼에 찔렸다. 등짝이 동물원인 놈들에게야 큰일이 아니겠지만 그는 일반인이었다. 숨긴다 해도 눈치가 칼날처럼 날카로운 차수민은 분명 알아차릴 것이 뻔했다. 나중 가서 들킨다면 노발대발 천지가 갈라질 일이었다. 그래서 냉큼 몰래 전화를 넣었다. 지 생각 해서 알려 줬더니 빛의 속도로 복귀해서는 진짜 떠나 버린 김정현의 빈자리를 보고 저렇게 화만 내는 중이다.

“민혁아.”

부드러운 목소리에 소름이 끼쳤다. 저 인간이 저렇게 나오는 건 좋은 신호가 아니었다. 민혁은 자기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차수민은 이민혁을 움찔하게 만드는 유일한 인간이었다.

“내가 누구에게 화를 내면 좋을까. 사람 하나 제대로 못 돌봐 준 너? 바보처럼 당하고 도망간 김정현? 아니면 누울 자리 못 보고 미친 짓을 벌인, 엿 같은 중소 조직?”

그래도 도쿄 근방을 잡고 있는 야쿠자인데 중소 조직이라는 명칭은 약소했다. 엿 같은 중소 조직에서 뿌득, 이를 가는 소리가 난 걸로 보아 다행히도 차수민의 분노는 앞뒤 분간 못하는 왜놈들을 향해 있었다.

레이파, 일본에서부터 마찰이 잦았던 조직이다. 영감, 아니 보스가 낯선 타국에서 살아 보고자 재일 교포들을 모아 만든 조직은 수년에 거쳐 탄탄하게 세력을 키워 갔다. 거기에 제일 딴지를 걸고넘어지던 놈들이 레이파였다. 어찌나 시비를 걸어오던지 견디다 못한 영감은 귀찮아 죽겠다며 그들의 살림살이를 싹싹 긁어 한국행을 결심했다. 한국에 들어온 후 그들은 한동안 잠잠한 듯하더니 타국 땅까지 손을 뻗쳐 방해해 왔다. 6년 전에는 차수민의 평화롭던 학교생활도 박살 내고 우리를 칩거하게 만들기도 했다.

가만있을 차수민이 아니었다. 몇 년에 거쳐 배로 되갚아 주었다. 타격은 상당했을 것이다. 독을 품은 차수민에게 두들겨 맞은 이후 레이파는 기회만 살피고 있었다. 예전에 비해 기세가 움츠러들긴 했지만 가장 큰 야쿠자 지부로 손꼽히는 무라사키 구미의 권력을 등에 업게 된 후부터는 흑련파와의 빚을 청산하려고 다시금 껄떡거리는 중이었다. 이번 사건도 배후에 무라사키 구미가 있을 테지만 빌미는 레이파에서 먼저 제공했을 게 분명했다.

영감이 싹싹 긁어 들고 온 살림살이라 함은, 조직의 사이코 유진아가 아끼다 못해 경외하는 전시실에 보관된 반짝이는 보물들을 뜻했다. 일종의 전리품이었다. 실제로 유진아는 김정현을 끌고 일본에서 쌔벼 온 밀수품들을 정성스레 설명을 곁들여 가며 보여 주기도 했다.

도련님, 이미 화내는 중이잖아요. 툭 내뱉으려다 거의 죽기 직전까지 갔던 무라사키의 자객을 떠올린 민혁이 입을 다물었다. 간만에 꼭지가 돈 차수민을 볼 수 있었다. 타국에서 온 자객은 잘못된 표적에게 칼질을 한 대가를 혹독하게 치렀다.

“많이 다친 거야?”

어느새 목소리에서 힘을 뺀 차수민이 말했다. 방 안을 가득 채우던 독기가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숨기려 해도 걱정이 드러나는 음성이었다. 이민혁은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따끔했을 거예요. 그래도 튼튼한 놈, 아니 튼튼한 형이니까 금방 아물 겁니다.”

“하아.”

긴 한숨이 들렸다. 이민혁은 당장이라도 야쿠자 놈들을 조지러 갈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명령은 떨어지지 않았다. 차수민은 차가운 얼굴로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솔직히 놀랐다. 당장 비행기표를 끊고 레이파에 쳐들어가 개박살을 내겠다며 지랄발광을 떨 것 같던 차수민이 분노를 삼키고 있었다. 차분히 창가에 이마를 대고 있는 꼴이 낯설었다. 주먹에 힘이 들어간 걸로 보아 최선을 다해 화를 참고 있는 것 같았다.

“맞아. 마음 같아서는 개새끼들, 다 죽여 버리고 싶어.”

잇새로 얼음장 같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졸지에 마음을 읽힌 민혁이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망나니 도련님을 이렇게까지 길들여 놓은 걸 보면 김정현이 영 멍청이는 아닌 모양이었다. 손부터 먼저 나가던 인간이 이제 제법 성질머리도 다스릴 줄도 알고. 이민혁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건지, 생각에 잠겨 있던 차수민이 몸을 돌렸다. 그리고 폭탄 같은 말을 내뱉었다.

“민혁아. 우리 플랜 Z 있지. 한국 들어올 때 다들 지장 찍은 거. 그거, 할 거야.”

이민혁의 턱이 벌어졌다. 설마. 지금 보스도 안 계시는데.

“뭘 그렇게 놀라. 언젠간 일어날 일인데. 조금 시기를 당겨서 진행할 뿐이야.”

“보, 보스는 아직 러시아에 계신데 이렇게 우리끼리 정할 일은 아닌 것 같…….”

“전화 줘 봐. 내가 통화할 테니까. 아, 그리고 임원 회의 열어. 말 나온 김에 빨리 처리해 버리게.”

방금까지 철들었다고 칭찬한 게 무색하게도 흑련파 도련님은 멋대로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플랜 Z. 그 카드를 꺼낼 줄은 몰랐다.

꾸준히 나왔으나 시행된 적 없는 계획이었다. 한국행이 정해지면서 임원들은 조직의 앞날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플랜 A, 플랜 B. 고향 땅에서 갖은 불법으로 떵떵거리며 잘 빌어먹고 살 만한 제안들이 나왔다. 누군가가 한숨처럼 넋두리를 내놓기까지는 말이다.

‘어휴. 언제까지 이 짓거리로 먹고살아야 하나.’

모두의 시선이 꽂히자 발언의 주인공은 땀을 뻘뻘 흘리며 변명했다.

‘그, 그게! 진심이 아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보스! 지금 당장 제 배때기를 가르겠습니다!’

순식간에 회장이 조용해졌다. 미묘한 공기가 흘렀다. 보스가 손을 들어 어쩔 줄 몰라 하는 조직원을 진정시켰다.

‘……솔직히 틀린 말은 아니지.’

영감조차 동의했으니 그를 탓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실 모두 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언제까지 목숨 걸고 벌어먹어야 할 것인가. 배타적 타국에서 먹고살기 위해 만든 조직이었다. 고향 땅에서까지 그 명맥을 이어 가야 할 명분은 없었다.

그렇게 탄생하게 된 조직의 새로운 방향성이 플랜 Z였다. 조직의 해체.

적어도 보스가 은퇴하고 나서, 아니, 작은 보스가 조직에 정이 뚝 떨어질 만큼 언제 한번 거하게 털리고 나서야 일어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게 조직의 해체를 제일 완강히 반대했던 쪽은 차수민이었기 때문이다. 소년의 아집과 변화를 두려워하는 아저씨들의 망설임으로 인해 차일피일 묻어 두었다가 6년 전, 조직에 위기가 닥친 후에야 다시 수면에서 거론되기 시작한 계획이었다.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민혁의 물음에 수민이 픽 웃음을 터뜨렸다.

“뭐가. 너네 다 예전에 동의했던 내용인데 새로울 게 있나. 그냥…… 지금 시기가 적절할 것 같아서 그래. 야쿠자 놈들, 러시아 루트 뚫겠다고 저 지랄 중인데 지금이야 우리랑 비등해도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고. 영감도 늙었고.”

거짓말. 그래도 플랜 Z는 조직에 대한 애착이 큰 차수민이 쉽게 판단 내릴 만한 결정이 아니었다. 김정현 때문이겠지……. 그러나 민혁은 곧 생각을 고쳐먹었다. 차수민이 아무리 사랑에 눈이 멀었다고 해도 조직을 진창에 처박을 만한 멍청이는 아니었다. 공과 사는 칼같이 구분하며 어린 나이에 누구도 반박 못 할 능력을 인정받은 놈이니까.

무슨 그림을 그리고 있는 거지. 의문스러운 눈으로 못처럼 딱딱하게 굳어 버린 민혁에게 차수민은 으르렁댔다.

“뭘 하고 있어? 나가 봐.”

변함없이 한결같은 인성에 이민혁은 혀를 차며 명령에 따랐다.

수민은 불만스러운 얼굴로 방을 나서는 민혁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문이 닫히자 수민의 도자기 같던 얼굴이 무너져 내렸다. 잇새로 욕이 새어 나왔다.

“시발.”

김정현이 칼에 맞았다. 잡아 족친 자객은 정현이 조직의 임원인 줄 알고 벌인 실수였다고 불었다. 분이 풀릴 때까지 후려갈겼지만 김정현은 이미 다친 후였다.

오늘은 실수일지 몰라도 내일은 그렇지 않겠지. 차수민은 김정현을 사랑한다. 그리고 김정현은 차수민의 약점이 될 것이다.

지금 레이파를 박살 내 봤자 더 날카롭게 벼린 칼날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이쪽 생태계가 그랬다. 예전엔 그 부메랑이 무섭지 않았는데 지금은 무서워 죽을 것 같았다. 차마 그를 건들지 못하는 버러지 같은 놈들이 엉겨 붙어 어떻게든 김정현의 몸뚱이에 상처를 내고자 할 것이다.

수민이 머리를 감싸 쥐었다. 칼에 베이는 김정현, 피를 흘리는 김정현, 눈을 뜨지 못하는 김정현……. 관자놀이가 쨍 하게 아파 왔다. 그를 사랑하기로 마음먹은 순간부터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 이건 당연한 절차일 것이다.

“바보같이…… 남 걱정은 왜 해.”

제대로 치료도 못 한 채 쫓기듯 올라갔다고 했다. 가슴 한구석이 찌릿하게 아파 왔다. 이런 감정은 차수민에게 영 익숙하지 않은 것이었다.

조직은 그가 가진 유일한 것이었다. 그것을 지키기 위해 수민은 뭐든 해 왔다.

이 역시 조직을 위한 거니까…… 문제없어. 차수민은 생각했다. 더 이상 아끼는 사람들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차수민은 조직원들이 햇빛 아래에서 떳떳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더는 개죽음 당하거나 감방에서 허송세월 낭비하는 일이 없도록.

……아니, 사실 모두 개소리다. 차수민이 이를 악물었다. 김정현을 잃고 싶지 않다. 그게 유일한 이유였다.

어떻게 손아귀에 넣은 사람인데. 그를 갖기까지 몇 년을 기다려 왔는데! 정성을 들여 겨우 옭아맨 그를 잃는다는 건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생각만으로도 피가 거꾸로 솟아 돌아 버릴 지경이었다.

김정현을 처음 봤을 때부터, 이미 정해진 수순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차수민은 입술을 깨물었다. 홀로 버려질까 하는 두려움에서 벗어나야 했다. 차일피일 미루어 왔던 변화가 필요한 때가 찾아온 것이다.

조직의 해체.

차수민은 조직의 해체를 결심했다.

✲ ✲ ✲

민혁은 당황스러웠다. 의결 건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능구렁이 같은 차수민의 언변 때문인지, 모두들 태양 아래 떳떳한 삶을 살아가고 싶어 했던 건지, 아니면 저들이 그냥 빡대가리라서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은 차수민의 PT를 보며 역시 도련님, 대학 보내기를 잘했다는 속없는 얘기나 하고 있었다.

“새 사업을 잘 정해야 한다고요. 앞으로 우리의 몇십 년을 먹여 살릴지도 모르는 문제인데! 유통 루트 뚫려 있는 식품 쪽으로 가시죠.”

수십 년을 존재해 온 조직의 해체는 달랑 한 시간도 안 되어 결정한 인간들이 의외의 문제로 고심하고 있었다.

“회 센터가 대박이라니까. 우리 그동안 셰프 데려다 연습도 많이 했잖아. 그게 다 횟집 차리려고 준비했던 거 아니었어? 장도팔 이 새끼가 시발, 만날 회만 썰어 나와서 물려 뒈지는 줄 알았는데. 다 이날을 위해서 아니었냐고.”

“그건 그렇지만 밭을 놀립니까? 고랭지 배추는 값도 잘 쳐줍니다.”

“그러지 말고 차라리 배추로 김치 사업하는 건 어떻겠습니꺼. 홈쇼핑 같은 데 나가면예, 하루에 몇천 포기씩 팔아 재낄 수 있다고 합니더.”

“장도팔이가 그동안 얼마나 열심히 생선 비늘 벗기고 손질해 댔는데 갑자기 다른 사업을 하시겠다? 도팔이는 엿 돼 봐라 이거지?”

소란스러운 회장 안에서 그나마 조용한 테이블을 찾아낸 이민혁이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형. 형은 괜찮아? 하루아침에 직업이 바뀌는 건데.”

민혁의 속삭임에 강냉이를 주워 먹으며 쌍칼이 대답했다.

“글쎄. 낯설기야 하겠지. 그래도 굵직한 사업은 그대로 굴리고 루트만 합법적으로 바꾼다니까.”

“아니, 그런 거 말고.”

“안 그래도 딸래미가 학교 들어갔잖아. 자꾸 선생님이 알아 오랬다고 아빠 직업 뭐냐고 물어봐. 잘됐지 뭐. 그동안 외줄 타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너는 안 괜찮아?”

민혁은 대답 대신 단상에 서서 임원들과 창백한 얼굴로 의견을 주고받는 차수민을 바라보았다. 사실 가장 괜찮지 않은 사람은 차수민일 것이다.

이민혁은 누구보다 조직이 차수민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처음에 왜 그렇게 필사적으로 플랜 Z를 반대했는지, 조직을 지키기 위해 어떤 일들을 감행해 왔는지. 그런데…… 이제 와서 그 소중한 걸 버려?

“사랑을 하면 사람이 막 미치나 봐.”

“야. 도련님도 할 만큼 했어. 버틸 만큼 버텼지. 솔직히 원치도 않은 자리 억지로 앉혀 놓았던 거잖아. 감사하게도 그런 것치고 완벽했지. 이젠 놓아드릴 때도 됐어. 서로 좀 편해지자고.”

“아, 잠깐만.”

진동음에 핸드폰을 확인하니 김정현이었다. 이 모든 일의 원흉인 김정현은 서울로 올라간 이후 지겹도록 전화를 해 대고 있었다. 그렇게 걱정되면 시발, 내려오든가. 이미 다 알아 버린 마당에. 그렇지만 수민이 내린 함구령이 무거웠기 때문에 이민혁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욕설을 삼키는 것뿐이었다.

“안 받아도 돼?”

“어. 받을 가치도 없는 전화야. 그래서 앞으로의 일정이 어떻게 되지?”

“일단은 평화 협정 맺는 게 제일 중요하니까 국내 조직들 하나하나 순회 다녀야겠지. 계약이야 맞추면 되지만 도련님이 제일 싫어하는 게 누구한테 머리 숙이는 건데, 참 걱정이다.”

쌍칼의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차수민은 무탈한 앞날을 위해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억지로 그동안 하대했던 조직 보스들을 만나러 다녀야 했다. 그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는 것이 김정현의 전화로 밤낮없이 시달리는 민혁의 자그마한 낙이었다.

“하. 좆같네, 진짜. 현무파는 팩스로 보내 준댔으니까 패스하고. 이제 몇 개 남았지?”

“대검파. 이놈들이 제일 문제입니다. 레이파가 러시아 루트 뚫겠다고 한국 껄떡거리는 거 아시죠? 대검은 마약 공급책이 필요한 상황이고. 덕분에 대검파랑 레이파가 결탁되어 있어서요. 레이파와 관계가 껄끄러운 우리로서는 힘든 상대라 생각됩니다. 다행히 그 사건 후로 무라사키 구미가 조용하지만 갑자기 수틀려 이 계약에 끼어들지도 모르는 일이고요. 그리고…….”

이민혁의 브리핑에 떨떠름한 표정이 된 차수민이 물었다.

“그리고, 뭐?”

“그리고 저번에 도련님이 대검파 부두목 뚝배기 깨셨잖아요. 이를 갈고 있을걸요. 우리 조직 해체되면 제일 쌍수 들고 달려올 놈들이 이놈들이에요.”

“그건……. 하. 제일 중요한 협약이 되겠군. 한국 올 때 걔네한테 쌔벼 온 물건 중 제일 값나가는 게 뭐야?”

유진아가 입을 열었다.

“황금 잉어 족자랑 에도 시대 때 주조된 사무라이용 검은 지금 경매에 내놔도 천 이상은 땡길 수 있는 물건입니다. 뒤져 보면 더 많을 겁니다. 손에 잡히는 대로 털어 왔으니까.”

“놈들이 환장할 것 같은데. 어때요?”

“네. 안 그래도 꾸준히 반환 요구가 있었습니다.”

“좋아. 그럼 진아 누나가 우리 창고에 있는 물건들 리스트 짜 오는 걸로 하고 그걸 미끼 삼아 잘 구슬려 보자고. 관리도 귀찮았는데 잘됐어.”

플랜 Z는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사실 누구에게 쫓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빠른 속도로 계약을 체결해 나갔다. 이민혁은 그런 차수민을 빤히 관찰했다. 분명 만감이 교차할 텐데 내색 한번 내비치지 않는다. 지독한 놈이었다. 다만, 때때로 흘끔거리며 달력을 확인하는 것이 완전히 숨기지 못한 마음의 끄트머리를 보여 주었다.

“천천히 하시죠. 중요한 작업인데 하나라도 빠뜨린 게 있으면 우리 나중에 칼 맞을지도 모르잖아요.”

“개강 날까지는 끝내야지. 영감 들어오면 더 복잡해져. 정신 사나우니까 꺼져.”

오호. 민혁이 속으로 휘파람을 불었다. 걸려 오는 전화며 문자를 매정하게도 씹어 대더니 사실은 보고 싶어 미칠 지경인가 보다. 평소에 냉혈 인간 같다가 간만에 감정적인 상사를 보니 골려 주고 싶은 마음이 치솟았다.

“정현 선배요. 치료는 잘 받고 있을까요?”

“……글쎄. 알아서 하겠지.”

당신이 도끼를 시켜 꼬박꼬박 김정현 병원 스케줄을 체크하는 걸 잘 아는데. 민혁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삼키느라 힘들었다. 변했어. 너어무. 누가 당신을 차수민이라 생각하겠어.

“그런데 어쩌죠. 대검파 미팅이 당겨졌어요. 25일. 개강일 5일 전이네요. 이때로 잡자고 하는데 아직 확답은 안 했거든요. 처리할 일이 많아 보이시는데 좀 미룰까요?”

“뭐어? 그놈들은 왜 자꾸 날짜를 바꿔 대. 아, 아냐. 미루지 마.”

퉁명스러운 어투와 다르게 차수민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이틀 당겨진 게 뭐라고 아주 헤벌쭉 좋아 죽는구만. 2mm 정도 미세하게 올라간 입꼬리를 보고 이민혁이 혀를 찼다.

“일찍 처리하면 좋잖아. 나머진 영감 오면 해치우라 하면 되니까. 겸사겸사 먼저 올라가지, 뭐.”

수민의 손에 들린 만년필이 경쾌하게 호를 그렸다.

드디어 김정현을 만난다.

사실 처음엔 괘씸해 화가 머리끝까지 났었다. 다친 것에 대한 걱정이 잦아들자 배신감이 가슴을 채운 것이다. 이 새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힘든 일 있으면 말하라던 새끼가 지는 입 꾹 다물고 홀랑 날라 버리고.

……내가 못 미더웠나.

사실 차수민이 할 말은 없었다. 그동안 못 미덥게 해 온 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속마음을 숨기고 빙빙 돌리다가 그의 수음 장면을 보고서야 쥐꼬리만 한 용기를 짜낼 수 있었다. 막상 조폭이 우글거리는 집에 데려와 놓고서는 그 쥐꼬리만 한 용기도 달아나 버려 또다시 삽질을 해 댔다.

겨우겨우 달달한 뭔가를 시작해 보려 하니까 영감의 부재를 틈타 온갖 것들이 꼬이는 바람에 토벌이나 다녀야 했다. 그러던 도중 날아든 칼에 맞았으니 김정현 입장에서도 얼마나 억울하고 짜증 나는 일이었을까.

생각하니 다시 열이 받았다. 조직 해체니 뭐니 레이파 이 개 같은 것들을 조져 놓고 시작할 걸 그랬나. 좆같은 평화 협정 맺기 전에 정현이의 복수부터 해 줬어야 하는데 말이다.

‘그러다 너 다치면 어떡해. 안 가면 안 돼?’

그러고 보니 김정현, 은근 걱정하는 것 같았는데. 그는 눈에 콩깍지라도 씌어 있는지 수민을 야리야리한 종이 인형으로 보는 것 같았다. 누굴 줘 패러 간단 얘기만 들으면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이젠 백수란 소식을 들으면 기뻐하려나? 빨리 이 소식을 알려 주려다가도 김정현의 뒷말이 귀에서 맴돌아 머뭇거리게 되었다.

‘앞으로 조직 관련된 일은 나에게 안 말해 줘도 돼. 그냥 힘들고 슬픈 일 혼자 짊어지지 말고 털어놓으란 얘기였어. 그러니까…… 그런 세세한 것까진 말해 주지 않아도 돼.’

김정현……. 무서워하는 것 같았지. 그래, 차라리 다 마무리 짓고 말해 주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대검파에 야쿠자에 이놈 저놈 만나러 다니는 걸 알면 새파랗게 질려 겁을 집어먹을 게 뻔했다. 대검 놈들과 협약이 무사히 끝나면 어디 좋은 데라도 데려가 분위기 잡으면서 말해 줘야지. 얼마 안 있어 오픈하게 될 서프라이즈 선물을 생각하며 수민이 옅게 미소 지었다.

“김정현, 보고 싶네…….”

일에만 매진할 땐 괜찮았는데, 한 번 떠올리니 자꾸만 아른아른 맴돌았다.

그래서 충동적으로 건 전화였다. 버릇 좀 고쳐야 한다며 몇 주간 매몰차게 연락을 끊어 놓고선 말이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 애끓는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수민아, 네가 너무너무 보고 싶었어.

귀엽게, 예쁜 말을 속삭일 줄도 알고. 화내지도 못하겠잖아.

“정현아, 나 지금 너랑 섹스하고 싶어.”

……역시 충동적으로 벌인 일이었다. 김정현의 섹시한 저음이 귀에 꽂히니 몸이 달아올랐다.

그들은 핸드폰 하나를 부여잡고 별 짓거리를 다 했다. 목소리 하나에 발정 난 짐승처럼 헉헉거리며 몸을 비틀었다. 병신 같지만 쾌감에 눈물이 날 정도로 좋았다.

“김정현, 있잖아…….”

사정의 만족감에 사로잡혀 며칠 후면 곧 가노라고, 조직을 댕강댕강 조각내는 작업 중이라고 넌지시 일러 주고 싶었다. 네가 다칠까 봐. 너를 잃을까 봐, 내 손으로 쌓아 왔던 것들을 부서뜨리고 있어. 그만큼 너를 생각해. 그러니까 나를 좀 더 믿고 의지해도 된다고, 바보야…….

“아, 아니야.”

수민은 생각을 고쳐먹었다. 곧 볼 텐데 뭐. 설레발치지 않는 것, 차수민이 조직 생활을 하며 뼈에 새겨 놓은 교훈 중 하나였다. 올라갈 날짜라도 알려 줄까 하다가 지들이 갑이라고 밥 먹듯 협약 일을 바꿔 대는 대검파의 갑질을 생각하곤 입을 다물었다. 엿 같은 대검 놈들. 저번에 다시는 못 일어나게 두목 새끼 뚝배기를 깨부쉈어야 했는데. 수민의 암울한 생각을 김정현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솔직히 3주는 심했어. 그치?”

-응. 연애 초반에 누가 이렇게 길게 떨어져 있겠어. 고문이야, 고문.

연애. 낯간지러운 단어에 귓불이 뜨거웠다. 김정현과 하고 있는 게……. 그런 거구나. 6년 전 차수민은 몰랐을 것이다. 거짓 사채 계약 따위 없어도 그를 곁에 둘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걸.

말도 안 되는 사채 계약을 시작으로 그를 갖고 싶어 행했던 여러 병신 같은 일들이 떠올랐다. 이민혁을 붙여 그의 주변을 맴도는 이들을 쳐 냈고 교사를 매수해 김정현의 대학 진로까지 계획했다.

인위적 우연이 겹쳐 만들어 낸 재회 이후, 수민은 더 이상 느긋하게 지켜볼 수 없었다. 그를 지켜 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공작을 벌였던가. 장도팔을 학교로 불러들인 것은 물론이거니와 김정현의 본가 방문을 추진하고자 그의 원룸 집주인에게 돈 봉투를 내밀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부질없었고 애처롭기까지 했다. 수민은 조용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럼, 가기 전날 연락할 테니까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조급해하지 않아도 돼. 김정현은 그 자리에 있을 거니까. 이렇게 쉬운 사실을 깨닫기까지 6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6년도 넘게 기다렸는데 그깟 며칠이야 금방 지나가리라 믿었다.

그리고 손꼽아 기다리던 디데이가 왔다. 저쪽으로부터 통보받듯 픽스된 날짜였다. 개강 5일 전은 개뿔, 이틀이나 밀린 금요일이었다.

“아, 하필 금요일에. 사람도 많은데 다른 데서 보든가. 촌스럽게 영업장으로 부르고 지랄.”

“혹시 모르니까 연장 좀 챙길까요?”

“협약 파탄 낼 일 있어? 현무파랑 이미 계약 체결했으니까 쉽게 등 뒤에서 칼 꽂진 못할 거야. 인심 팍팍 썼는데 지들이 안 들어주고 배길까. 국보급 문화재들 거저 주는데 감사합니다, 하고 받아 가야지. 아.”

뭔가를 떠올린 듯, 슈트 단추를 잠그던 차수민이 고개를 들었다.

“그, 디, 디너 예약했어?”

“네. 비이싼 데로요. 앞으로는 예산 좀 아껴 쓰세요. 돈 나올 구멍도 줄어들었는데.”

이민혁이 버릇처럼 이죽거렸다.

“이 새끼가. 협약서나 내놔 봐.”

시선을 서류철에 고정한 차수민이 이민혁에게 손짓했다.

“오늘 서울 올라간다고 김정현한테 연락해. 대검파 놈들이 질질 끌면 늦어질지도 모르니까 가게 주소랑 예약 시간 같이 알려 주고. 일찍 끝나면 데리러 간다고 전해.”

“네.”

한 톨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으려는 듯 각종 조항으로 빽빽한 종이 뭉치를 팔랑팔랑 넘기며 차수민은 생각했다. 오늘만 잘 마치면 숨 좀 돌리겠군.

✲ ✲ ✲

“김정현……?!”

그렇기 때문에 김정현의 등장은 당혹스럽고 경악스러운 것이었다. 네가 왜 여기서 나와?

이 나이트는 어떻게 알았으며 여기까진 또 어떻게 숨어 들어왔는지. 그러나 머릿속을 가득 채우던 의문들은 피투성이의 몸뚱이를 발견하고 가루처럼 소멸해 버렸다.

“아.”

누군가의 타격에 피에 젖은 몸이 맥없이 허물어져 내렸다.

뚝, 가슴 깊은 곳에서 뭔가 끊기는 것 같았다.

차수민의 시야가 분노로 새하얗게 물들었다. 말릴 새도 없이 자리에서 튕겨져 나간 차수민이 김정현에게 달려들었다. 정확히는, 정신을 잃은 그를 질질 끌어 옮기려는 야쿠자 두 명을 향해.

“아악!”

무언가 엎어지고 귀가 찢어질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그만, 그만하세요! 누군가 외쳤다. 그러나 차수민에게는 진공에 갇힌 듯 무음만이 지속될 뿐이었다. 주먹이 닿았다 떨어졌다. 수민의 창백한 얼굴에 피가 튀었다. 누굴 건드려. 감히. 감히.

슬로 모션이라도 걸린 것처럼 모든 상황이 느릿느릿 지나가고 있었다. 억센 손 여러 개가 광분하는 그의 옷깃을 붙들어 잡았다. 강제로 뒤로 밀려날 때까지 차수민은 사냥감에 몰두한 광견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헉, 헉.”

돌아가지 않는 고개를 돌려 두려운 광경을 눈에 담은 차수민은 턱 끝까지 차오르는 호흡으로 겨우 내뱉을 수 있었다.

“정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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