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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수민 외전 3 (7/15)

차수민 외전 3

“망쳤다…….”

목이라도 졸린 듯 반쯤 잠긴 목소리가 신음처럼 새어 나왔다.

“내, 내가 망쳐 버렸…….”

텅 빈 집무실, 차수민의 떨리는 손이 쉴 새 없이 중얼거리는 입을 틀어막았다.

망쳐 버렸다. 완전히. 내가 무슨 말을 내뱉었지? 그가 어떤 표정을 지었더라? 분명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나를 경멸하고 증오하고. 실망……했겠지.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던 거지?

목이 타. 타들어 갈 것 같아. 장식장의 술병을 꺼내 바로 입에 가져다 대었다. 목구멍을 적시다 못해 입가로 액체가 흘렀으나 갈증은 해소되지 않았다. 수민은 물컵으로 손을 뻗었다. 초점이 맞지 않는 손이 부들부들 떨려 대며 책상 위 물건들을 밀어 냈다. 잔뜩 늘어놓았던 서류들이 휘날리고 자개로 박은 명패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시발, 차수민이 걸리적거리는 만년필을 들어 세차게 내던졌다. 그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어 대신 시선을 두었던 창문에 날카로운 소리가 부딪혔다. 눈 한번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그렇게 자신만만했으면서.

수민이 식은땀을 닦아 내며 의자에 주저앉았다. 엉망이 된 책상 위 살아남은 청동 조각품이 수민의 하얗게 질린 얼굴을 비추었다.

대체 너는 뭐가 문제야, 차수민?

수민이 스스로 내던진 질문에 청동에 비친 차수민의 상이 히죽 웃으며 대신 대답했다.

시답지 않은 감정놀음에 빠진 거?

“이게……!”

차수민은 조각품도 낚아채 벽에 꽂았다. 음식물이 나뒹굴어 얼룩진 러그가 소음을 낼름 집어삼켰다. 다툼의 흔적이 처절했다. 방금 전까지 있었다. 김정현이. 여기에.

계획은 완벽했다. 그랬어야…… 했다. 왜 마음에도 없던 소리를 한 걸까.

수민이 헉헉 거친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돌리자, 벽에 걸린 거울이 반쯤 정신이 나가 보이는 남자의 모습을 비추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네 계획이었는데?]

거울 속 차수민이 물었다.

“나는 분명 김정현이 나를, 나를 좋아…… 아니, 적어도 신경 쓰고 있단 사실을 알아. 그래서, 이제는 괜찮을 거라 생각해서…….”

[그래서? 솔직하게 털어놓으려 했어?]

[네 착각이었던 거 아니야?]

거울 속 남자가 말하자 뒤집힌 청동 곰이 러그 위에서 버둥거리며 목소리를 보탰다.

“아니야! 분명, 그때……!”

[그때? 아아, 그때! 네 옆에서 딸 한번 쳤다고 그게 널 좋아한단 지표라도 된단 말이니?]

거꾸러진 청동 곰 모형에 담긴 차수민의 얼굴이 킥킥거리며 비웃음을 흘렸다. 수민은 땀으로 젖은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헉, 허억.”

[웃겨. 고작 네 추측으로 여기까지 데려와서 가진 패 다 보여 주더니 결국 참패했네. 걔가 네 등에 박힌 이무기까지 사랑스럽다던?]

[됐어. 그만해.]

거울 속 차수민이 무표정한 얼굴로 중재했다. 깨진 유리 조각처럼 날카롭고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와서 그 애 마음이 뭐가 중요하겠어. 이미 망친 일을. 안타깝구나. 지난 6년의 일이 물거품이 됐네.]

“허억.”

[차라리 잘된 걸지도 몰라. 감정에 휘말린 놈들은 대개 목에 칼이 들어와도 눈치채지 못하거든. 네가 딱 그 상태야. 항시 냉철하고 이성적이어야 하는 네가.]

“그만……!”

[왜 말 못 했어? 너를 갖고 싶다. 너 때문에 이 바보 같은 짓거리를 벌였다. 이게 진짜 내 모습이다. 한 마디면 될 것을, 너답지 않게 왜 머뭇거렸어?]

“그만 닥쳐!”

[아아, 알겠다! 무서워서 그랬구나! 하긴, 되도 않는 추측 한 조각 붙잡고 미주알고주알 털어놓자니 무섭기도 했겠지. 실망인걸. 무서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차수민이? 너도 무서워할 줄 알아?]

청동상이 끼어들어 깔깔거리며 소리쳤다.

“……으으. 꺼져.”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벌컥 들이켠 양주 탓인지 이 망할 놈의 환영들은 지칠 줄 모르고 떠들었다. 차수민이 이를 악물었다.

[그 애 앞에선 원치 않은 말이 튀어나오고 사고가 멈추지. 제일 멍청한 부류가 되어 가고 있어, 차수민. 그러니까 이제 그만둬. 그래야 네…….]

“꺼지라고!”

쨍한 소음이 고막을 찢었다. 날아든 골프공에 거울이 산산이 조각났다. 거울 속 남자가 백 개의 조각들로 부서졌다. 분이 풀리지 않는지 차수민은 백 개의 조각을 천 개로, 천 개의 조각을 만 개로 나누었다.

가루가 된 거울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잠시 숨을 고른 차수민이 옷매무새를 바르게 했다.

“……지랄하고 있네. 미친놈들 아니야, 이거.”

어느새 평온한 얼굴로 돌아온 차수민이 커프스단추를 채웠다. 그리고 휘적휘적 걸어가 그나마 깨끗한 소파에 털썩 몸을 기댔다. 엉망이 된 방 상태가 한눈에 들어오는 자리였다.

“이 시발새끼들. 감히 내 대가리 위에서 놀아.”

수민이 유쾌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가벼운 어조와 다르게 손끝은 여전히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상태였다. 수민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펄떡펄떡 날뛰는 심장이 느껴졌다.

‘아아, 알겠다! 무서워서 그랬구나! 하긴, 되도 않는 추측 한 조각 붙잡고 미주알고주알 털어놓자니 무섭기도 했겠지.’

틀린 말이 아니었다. 방에 들어온 순간부터 어쩔 줄을 몰라 하는 김정현을 보자 아차 싶었다.

그를 보는 순간, 멈추었던 두려움이 다시 시작되었다. 내 멋대로 판단했던 거야. 네가 모든 걸 받아 주리라고. 그런데, 아니면? 내가 네 한계치를 벗어난 사람이라면?

‘정현아, 그래도 나랑 친구 할 거야?’

그래서 차수민은 노선을 바꿨다. 차수민의 입술이 멋대로 내뱉어 버린 말이었다. 친구라도, 해 주면 안 돼……?

‘왜 날 속였냐? 왜 말 안 했어? 내 주변에 하나같이 네 사람들 심어 놓고 한마디를 안 해?’

네가 걱정돼서 그랬어. 내 옆에 있다가 칼이라도 맞을까 걱정돼서. 너를 잃을까 봐 무서워서.이걸 어떻게 말해? 내가 널 사랑한다고, 내 입으로 어떻게 말해? 우리가 그럴 사이는 아니잖아. …아직은. 아직은 아닌 거잖아. 내 진심을 꺼내 보이기엔 네가 준비가 안 되어 있잖아.

‘내가 그렇게 우스웠냐? 재밌었어? 나 가지고 노니까 즐거웠어?’

재밌었겠냐. 남의 속도 모르는 새끼. 차수민이 한숨을 내쉬었다.

바보 같은 확신을 품는 게 아니었는데. 예스를 얻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그의 대답만 들으면 된다고. 분명히 긍정적이어야 할 그 대답. 그러나 변수는 너무도 많았다.

무서워. 문제는 그거다. 차수민은 김정현이 무섭다. 그의 입에서 나올 모든 말들이 무서워 뱅뱅 주위만 맴돌며 주지 않아도 될 상처를 입힌다. 김정현은 그대로인데 내가, 내가 변해 버려서. 내가 선을 넘어 버려서.

이렇게 애매할 바에야 차라리 따까리 취급할 때가 나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둘 다 변함없던 그 시절. 들끓는 욕망을 가릴 수 있던 그때의 관계. 마음은 괴로워도 웃는 낯으로 너를 볼 수 있었을 텐데.

수민은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그러나 라이터를 달깍거리기만 할 뿐, 불을 붙이진 않았다. 잇새로 필터가 어그러졌다. 멍청하게 벌벌 떨던 나와 상처받은 눈을 한 그가 아른거렸다. 친구라 믿었던 인간이 뒤통수를 후려치니 당연히 화가 났겠지.

친구. 수민은 생소한 두 음절을 혀로 굴려 보았다. 아마도 네가 우리를 정의하는 최대치의 단어.

친구라 생각했던 놈이 품은 생각을 알게 되면 너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수민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게 뭐가 중요해. 예전과 달라지는 건 없어. 나는 그를 놓아줄 생각이 없으니. 김정현은 앞을 바라보며 걷고 나는 그의 뒤를 따라 걷는다. 늘 그래 왔듯이 앞으로도 그러면 돼.

“그래, 그러면 돼. 쭉 그랬던 것처럼.”

공허하게 울리는 그의 말에 반쯤 찌그러진 청동상이 조그맣게 비웃는 듯했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차수민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곧 방 안은 차가운 정적만이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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