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
어서 와 우리 집에
기말고사 시즌이 그리도 반가울 줄은 몰랐다. 살인적인 시험 스케줄을 핑계로 차수민을 만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술에 취해 섹스했던 때와는 달랐다. 그때는 당혹감에 피해 다녔다면 이번은 죄책감이었다. 쌍방도 아니었으며 술기운 하나 없이 맑은 정신으로 저지른 일이었으니까.
얼굴 보면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네 잠든 모습을 보니 동해서 서더라? 살짝만 벗겼을 뿐인데 그렇게 꼴릴 줄은 몰랐다?
아니, 사실 나는 너를…….
“별 쓰레기 같은 생각이나 하고…….”
머리를 쥐어뜯었다. 숨겨야 한다. 그래야만 한다. 나는 강제적으로 마음 정리를 시작했다. 막 형성되려고 하는 마음을 깨부쉈다. 인정하기도 전에 폐기되는 김정현의 조각은 본디 차수민의 것이 아니었으니 피해 보는 사람은 없으리라. 혼자 낑낑대며 사투할 때 어느새 학기는 마지막으로 치닫고 있었다.
평소라면 꼴에 공부라도 하는 건지 왜 연락 안 받냐며 득달같이 달려들었을 차수민이 조용했다. 덕분에 슬금슬금 피해 다닐 수 있었지만 [사랑과 인생] 수업은 피할 수 없었다.
“형, 수업 가요?”
“어. 사랑과 인생……. 이민혁, 너.”
죽을상을 하고 강의실로 향하는데 팔랑팔랑 손을 흔드는 이민혁이 보였다. 과팅 이후 처음 마주치는 얼굴이었다. 반가움 반, 억울함 반의 감정이 치솟았다. 너만 아니었어도 차수민이 대신 나올 리 없었고 민영 씨가 토할 일도 없었고 차수민의 옷을 벗기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무언가를 깨닫는 일도. 입술을 깨물었다.
“야.”
“아, 미팅 얘기 할 거면 사양할게요. 형들한테 너무 까여서 재가 될 것 같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긴 하지만 들으면 안 될 것 같네요.”
“너 차수민 어떻게 알아? 어디서 알게 된 거야?”
“차수민?”
“아, 이수민. 그날의 주범.”
“수민 형이 뭔 일을 치긴 했나 봐요. 다들 이를 가네. 형, 수진 누나 만났어요? 되도록 과방 오지 마세요. 형 보이면 죽여 버리겠다고 으르렁대고 다니니까.”
“야, 말 돌리지 말고. 어디서 만났냐고.”
“알바하다가 만났어요. 왜요?”
대수롭지 않게 얘기하는 이민혁을 수상하게 바라보았다. 알바라. 걔가 누구 밑에서 일할 성격이 아닌데. 수틀리면 손님 멱살도 잡아 올릴 수 있는 놈이었다. 차수민은 거짓 가면을 쓰고 젠틀한 척 연기할 수는 있어도 그걸 길게 유지하긴 어려울 놈이다. 나처럼 백방으로 그의 변덕에 어울려 주지 않는 이상.
흘끗 바라보니 이민혁이 의아한 표정으로 어깨를 들어 올렸다. 포커페이스인 거야, 정말 모르는 거야.
“어떤 알바? 걔가 알바할 타입은 아닌 것 같은데.”
“호스트바요. 학비 버느라 잠깐.”
“뭐? 진짜!”
박현식의 촉이 맞았단 말이야? 경악에 물든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민혁이 활짝 웃었다. 그 웃음에 살짝 소름이 돋았다. 방금 얘, 차수민처럼 웃었다.
“농담이에요. 선배, 근데 2시 다 됐는데. 수업 늦는 거 아니에요?”
“어어, 어.”
시계를 보니 2시 1분 전이었다. 늦어 버렸다. 나는 달리기 시작했다.
오늘은 그동안의 피와 땀이 갈려 들어간 활동 리포트를 내는 날이었다. 그리고 손꼽아 기다리던 마지막 수업이기도 했다. 차수민과의 지긋지긋한 악연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학기 초에는 이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러나 학관을 향해 달리는 지금, 수업이 끝난다고 해서 끊어질 인연이 아니라는 것쯤은 안다.
‘어느새 감겨 버려서…….’
넋 놓고 방심하다 보니 검은 용이 온몸을 칭칭 감고 있어서 곧 먹혀 버릴지도 모를 지경까지 와 버렸다. 벗어나야 한다. 안 그러면 뼈째 씹힐 거야. 미처 털어 내지 못한 김정현의 조각들이 아프게 가슴에 박혔다.
이게 마지막 수업이라는 사실이 참 사람을 안도하게 만들었다. 곧 긴 방학이 시작될 테고 두 달이란 시간과 물리적 거리는 이 치기 어린 감정을 바로 세워 줄 것이다.
요망한 차수민은 첫 수업 때 앉았던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일부러 비워 둔 것처럼 빈 옆자리가 보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수업 시작 시각이 지난 강의실은 꽉 차 있었고 교수님 코앞을 제외하면 빈자리는 하나였다. 거리 두던 며칠이 무색하리만큼 가까운 자리였다. 도움 안 되는 이민혁을 만나서.
“늦었네.”
단상에 시선을 고정한 차수민이 속삭였다.
어어. 나도 앞만 보고 답했다. 슬쩍 흰자로 살피니, 일주일간 연락 씹히고 거절당한 것치고는 어쩐지 컨디션이 좋아 보였다.
“오랜만이다. 그날 이후 처음 보지? 내 연락 다 씹고. 많이 컸어, 우리 정현이.”
“시험, 시험 기간이었잖아.”
“언제부터 그렇게 열심히 했다고. 야. 내 베르사체는 어디다 팔아먹었어? 당근나라 이딴 데 팔아서 등록금이라도 보태려고? 소싯적 삥 뜯던 양아치 기질 어디 안 가지, 김정현.”
아, 그놈의 셔츠. 용수철처럼 튀어나온 기억을 꾹꾹 눌러 담고 이를 악문 채 대답했다.
“돌려줄 거야. 세탁 맡겨 놨어.”
“세탁? 왜, 자다가 토라도 싸질렀냐.”
반박하려다 말문이 막혔다. 사실을 고하면 반박의 여지조차 없을 테니 그냥 입을 꾹 다물었다.
“가져도 돼. 갖고 싶으면. 난 많거든.”
차수민이 상냥하게 말했다.
“줘도 안 가져. 사이즈도 안 맞는 걸 뭐에 써.”
“팔아서 등록금에 보태라니까?”
“아, 진짜!”
“거기 두 학생.”
교수의 지목에 모두의 시선이 날아왔다. 아이씨……. 신경질적으로 앞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조용히 있다가 조용히 떠나려 했건만.
“남자끼리 조 됐다고 바꿔 달라 애원할 땐 언제고 한 학기 동안 특별한 감정이라도 싹튼 건가? 헤어지기 너무 아쉬워요?”
“뭐야, 너 조 바꿔 달라 그랬었어?”
눈치 없이 차수민이 앙칼지게 물어 왔다.
“아니이, 초반에 그랬지…….”
“자, 그럼 두 분. 할 말이 많은 듯하니 마지막 소감이나 발표해 보세요. 그동안 데이트도 열심히 하고 착실히 만나 왔던데. 웬만한 이성 조보다 열심이었어, 자네들.”
교수의 짓궂은 제안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졌다. 머뭇거리고 있으니 빤히 날 바라보고만 있던 차수민이 벌떡 일어났다.
무슨 말을 하려고……! 다급히 옷깃을 잡았지만 늦었다. 그는 이미 입을 열었다.
“경영학과 이수민입니다.”
‘야, 뭐 해!’
“저는 같은 조인 김정현과는 고등학교 동창입니다. 갑자기 전학을 가게 되어 연락이 끊겼었는데 우연처럼 이 수업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솔직히 기뻤어요. 그동안 꼭 다시 한번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거든요…….”
멍하게 그를 올려다보는 날 향해 웃음기 어린 시선이 와 닿았다. 그가 계속 말했다. 어쩐지 진심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반갑더라고요. 길다면 길 수도 있는 공백이 과제를 핑계로 메워졌습니다. 덕분에 많이 놀러 다녔습니다. 학창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아 즐거웠습니다. 그간 못했던 얘기도 하고, 내가 몰랐던 부분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고-.”
그가 살짝 말꼬리를 늘였다. 나는 덫에 걸린 동물처럼 지긋이 쏟아지는 눈길을 벗어날 수 없었다. 이윽고 고개를 돌린 차수민이 과장된 몸짓을 하며 말을 이었다.
“남-남 조이면 좀 어떻습니까. 성별을 떠나 관계의 아름다움을 알게 되었는걸요. 소중한 추억을 만들어 준 수업으로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좋은 경험 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교수님.”
차수민의 겸손한 고갯짓에 교수가 감격한 얼굴을 했다. 학생들로부터 박수가 쏟아졌다. 나 역시 찡했다. 차수민이 이런 생각을 갖고 있을지 몰랐다.
만나고 싶어 했구나. 나는 네가 날 헌신짝처럼 버리고 떠난 줄만 알았지. 차수민의 말대로 그와 함께한 한 학기가 썩 나쁘지는 않았다. 몇 번의 큰 사건이 있긴 했지만, 알고 싶지 않았던 마음까지 알게 되었지만…, 뭐 돌이켜 보면 즐거웠던 것 같기도…….
‘나 혼자 쓰레기였네.’
불순한 의도로 수강 신청을 했으며 술 먹고 분위기 취해서 몸 한번 섞은 것 가지고 혼자 깊게 생각하고, 날 친구라 굳게 믿고 있는 동창의 옷으로 수음까지 했다. 거기에 더불어 몹쓸 마음마저 품어 버렸으니 얼마나 쓰레기인가. 현타가 거하게 와서 그 후 수업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강의가 끝난 후. 나는 차수민과 발맞춰 걸으며 머쓱하게 말을 걸었다.
“차수민, 다시 봤다. 너 이 수업에 꽤 진지했구나.”
“뭔 소리야?”
“아까, 발표. 사실 좀…… 감동이었거든. 나는 피하려고만 했는데, 네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어. 나도 너랑 과제하면서 싫진 않았다. 그냥, 좀 그랬을 뿐이지…….”
머쓱하게 웃으며 뒤통수를 긁적이고 있는데 차수민이 픽,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진짜겠냐? 너 장학금 받아야 한다며. 이걸로 A+는 따 놓은 당상이니까 걱정 놓으셔. 김 교수 입에 발린 말 좋아하더라고. 늙은 여우야, 완전.”
“…….”
“왜?”
“아니야…….”
메고 있던 가방이 한결 무거워졌다. 터덜터덜 걷는데 차수민이 갑작스레 앞을 막아섰다. 안면에 한가득 미소를 띄운 채였다. 수년간의 경험상, 저 미소는 불길한 징조였다.
“김정현, 나 요새 엄청 기분 좋아.”
“그래 보여. 시험 잘 쳤나 보지?”
“그것도 그렇고. 곧 방학이기도 하고.”
그 말이 정곡을 찔렀다. 불붙은 마음 죽여 보려 방학 시작 날짜만 손꼽아 기다리던 내 모습과 방학이라고 신난 아이 같은 차수민의 모습을 비교하니 마음이 불편했다.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차수민이 물었다.
“너 방학 때 뭐 해?”
“뭐 하긴. 본가 내려가지.”
“너 예전에 우리 집 와 보고 싶다고 했었잖아. 이번에 한번 와 볼래?”
“네 자취방? 저번에 갔었잖아.”
무슨 일 생길 줄 알고. 절대 안 돼. 내가 왜 방학을 손꼽아 기다리는데. 내 발로 악의 구덩이로 걸어 들어갈 수는 없었다. 하루라도 빨리 멀어져야 했다. 나는 이 거머리 같은 관계를 해지하기 위해서라면 휴학까지 감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아니, 내 본가.”
“본가라면, 부모님이랑 같이 사는?”
차수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차수민의 본가. 항상 궁금하긴 했었다. 대체 차수민을 낳고 기른 부모는 누구인지와 일맥상통하는 궁금증이었다. 제멋대로 밀고 나가는 성격이 부잣집 도련님 같으면서도 잡초 같고 거친 구석이 있었다.
평범한 집안은 아닐 거라 생각했었다. 보란 듯이 그가 소개해 주었던 부모님은 놀라우리만큼 평범했지만.
흔들리는 내 마음 한구석을 캐치한 듯 은근한 목소리가 따라온다.
“좀 오지에 있긴 한데 공기 좋고 물 좋은 데라 방학 때 머무르기 좋을 거야. 캠핑 가는 거라 생각해. 뭐, 나도 내려가면 심심하니까. 너 같은 거라도 있으면 낫긴 하지.”
검은 용이 칭칭 몸통을 감는다. 내 대가리가 까만 탓에 수민의 순수한 제안이 유혹처럼 느껴졌다. 나는 밀려드는 생각을 지워 내고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나도 본가 가 봐야 해. 전역 후 처음 내려가는 거야.”
내 호의를 무시하냐며 지랄을 떨 것 같던 차수민은 잠깐 생각에 잠긴 듯했다. 그는 의외로 순순히 나를 보내 주었다.
“흐응, 알겠어. 마음 바뀌면 연락해.”
“그래. 알았어.”
절대 그럴 일은 없을 테지만. 내 눈동자에 굳은 결심이 드러나 보이기라도 한 것처럼 뚫어져라 눈을 맞춰 오던 차수민이 피식 웃었다.
“방학 자알 보내고.”
방학은 항상 계획했던 대로 흘러가진 않는다. 계획표 가득 빽빽하게 일정을 적어 놔도 그날 날씨, 사정, 기분에 따라 변경되고 취소되기 십상이란 거다. 어릴 때부터 반복되던 의례였다. 그렇게 멋대로 살다가 개학이 다가오고, 멋쩍게 텅 빈 일기장을 제출하며 개학을 맞곤 했다.
그래도 이런 건 좀 당황스럽긴 했다. 나는 오랜만에 돌아온 내 본가 앞에 망연자실하게 서 있었다.
“어어, 거기 비켜요. 다쳐.”
긴 목재를 어깨에 얹은 아저씨가 소리쳤다. 옆에선 구멍을 뚫는지 불꽃이 튀었다. 혹시나 해서 내 방 문을 열었다. 매캐한 먼지가 일었다. 안전모를 쓴 기술자 둘이 타일 작업에 열중이었다.
나는 털레털레 걸어 나가 핸드폰을 들었다.
“엄마?”
-어어, 정현아!
“엄마, 나 집인데. 엄만 어디야?”
-아이고, 엄마 정신 좀 봐. 엄마 지금 공항이야. 아빠랑 누나랑 같이 있어. 정은아, 정현이! 인사할래? 역시. 싫다네?
“공항……? 왜?”
-미리 말했어야 하는데 미안해. 네가 도통 전화를 안 받잖니. 같이 가고 싶었는데 아빠가 너 시험 기간이라고 방해하지 말라 그래서 연락 안 했어. 얘, 엄마 이벤트 같은 거 도통 안 되잖아. 근데 이번에 딱! 응모권에 당첨된 거 있지? 그것도 1등! 파푸아뉴기니 가족 여행권 받았어. 너 빼고 가는 게 마음에 걸리기는 하는데 친구들도 만나고 그러다 보면…….
“어어, 축하해……. 안 서운하니까 걱정 마. 그것보다 지금 우리 집(드르르르르륵), 우리 집이(드르르르르륵), 잠깐만. 밖으로 나갈게. 지금 집 안 꼴이 난린데 이게 뭔지 설명해 줄 수 있어?”
-아 맞다! 아빠 바꿔 줄게, 잠시만. 여보, 정현이.
-어 정현아! 너 다시 올라가야겠다. 한동안 공사할 거야. 아빠 거래처에서 샘플하우스를 모집한다더라고. 어차피 해외 나가 있을 동안 집 비울 테니까 이때다 싶어 신청했는데 우리 집이 안성맞춤이라지 뭐냐. 인테리어 싹 갈아 준다더라. 하하. 올해 아주 운수대통이야. 이제 너만 잘되면 돼, 인마. 올 때 뭐 사다 줄까?
통화가 끝났지만 들뜬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뒤엉키는 듯했다. 나는 관자놀이를 눌렀다. 좆됨이 감지되고 있었다.
✲ ✲ ✲
다시 짐을 바리바리 싸서 상경했다. 다행히도 계약이 내년까지라 방은 안 뺀 상태였다. 버스를 서너 시간 타니 몹시 피곤했다. 의도치 않은 당일치기 코스가 되어 버렸다. 얼른 자취방에서 두 다리 뻗고 잠들고 싶었다.
털털털 캐리어를 끌고 몇 시간 만에 다시 보는 방문 앞에 섰다. 그런데 문이 열리지 않았다.
“아? 번호 이거 맞는데.”
몇 번이고 입력해도 비밀번호는 맞지 않았다. 일진이 사나웠다. 하루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비밀번호가 멋대로 바뀌었을 리 없고… 그렇다면 내가 갑자기 돌대가리가 되어 버렸을 가능성이 큰데. 오기가 생겨 계속 버튼을 누르다가 아예 록이 걸려 버렸다. 집주인 아줌마는 한참 만에 전화를 받았다.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갑자기 키패드가 안 먹혀서요. 초기화시켜야 할 것 같은데.”
-아냐. 잘 전화했어. 학생, 나가 줘야겠어.
“네에?”
문에 기대어 삐딱하게 전화를 받던 나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자세를 고쳐 잡았다.
-방 빼 줘. 두 달 치 월세는 빼 줄 테니까 그렇게 하자.
“갑자기 무슨 소리세요?”
-사실은 그동안 학생 때문에 말이 많았어. 주변 세입자들이 어찌나 시끄럽다 그러는지. 딱 205호 꼽아서 말했거든?
그럴 리가 없는데. 친구도 몇 없는 아웃사이더 찐따 놈이 주위의 공분을 살 만큼의 소음을 만들었을 리가. 내 의문을 읽었는지 아줌마가 헛기침을 했다.
-그, 섹…스하는 소리가 너무 크다고. 신음 소리가 동네방네 쩌렁쩌렁 다 울린대. 어쩌겠어, 학생이 나가 줘야지.
“섹…스요? 무슨 소리세요. 딱 한 번밖에 안 했는, 아니 그게 아니라 갑자기 이러시는 게 어디 있어요. 그, 소리…… 내는 건 옆방이겠죠! 저는 확실히 아니에요. 언질이라도 미리 주시든가.”
-학생 방 맞다니까 옆방엔 여자 둘이 살아. 구질구질하게 왜 딱 인정 못 해?
섹스, 그거 진짜 딱 한 번 한 거 가지고…! 억울했지만 그때 취하기도 했고 쾌락에 몰입해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 어떤 신음이 흘러나왔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본가에 내려가냐며 잘 다녀오라고 살갑게 인사하던 집주인이었다. 갑자기 손바닥 뒤집듯 바꾼 태도가 이상했지만 화낼 힘도 없어 김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방학 시즌이라 방 빼는 사람도 많을 텐데 대체 무슨 배짱이세요?”
-몰라, 하여튼 나가 줘!
처음부터 쫓아낼 작정이었는지 아줌마는 내 방의 잡동사니까지 1층 창고에 고이 옮겨다 놨다. 남의 사유물을 이렇게 허락도 안 받고 옮겨도 되는 건지. 어이가 없어서 화도 나지 않았다. 졸지에 쫓겨난 신세가 되었다.
옮겨야 할 짐은 한가득이었다. 어느덧 검게 물든 하늘에 한숨이 나왔다. 어디서 눈이라도 붙여야 하는데. 근처 사우나라도 가기 위해 주머니를 뒤지는데 없었다. 지갑이.
“버스에 두고 내렸나?”
좆됐다. 나쁜 일은 한꺼번에 일어난다지만 오늘이 그런 날일 줄이야. 나는 본가에 가지고 갔다가 그대로 가지고 돌아온 캐리어를 끌어안고 문 앞에 쭈그려 앉았다. 드넓은 한국 땅에 이 몸뚱이 하나 뉘일 곳이 없을까. 사람들이 힐끔힐끔 보면서 지나갔지만 꿋꿋하게 자리를 지켰다.
“어디 보자…. 박현식 번호가.”
먼저 현식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있는 집 놈이라 투룸 오피스텔에 살기 때문에 이 한 몸뚱이 정도 재워 줄 여력이 충분했다.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 있어…….
용철이, 민수, 건우……. 전화번호부의 자취생들을 모조리 컨택해 보았으나 사전에 입이라도 맞춘 건지, 모조리 받지 않았다.
나는 바로 옆 건물에 한수진이 산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급하니까 사람이 간사해졌다. 상처만 남은 미팅 이후로 피해 다니던 한수진이었지만 쌍욕 들을 거 감안하고 돈이라도 꾸자 싶어서 전화를 걸었다. 역시 받지 않았다.
이것들이 나 빼고 단체로 회식이라도 하나? 어쩐지 소외된 느낌이 들었다. 우울하게 몸을 구겼다. 그나마 여름이라 다행이었다. 따듯한 밤공기가 뺨을 훑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짐은 훔쳐 가든지 말든지 내팽개쳐 두고 한수진 다음으로 가까운 용철이를 무작정 찾아갔다. 집 앞에서 대기 타다가 들어올 때 마주치면 재워 달라고 매달릴 생각이었으나 아무리 기다려도 그는 오지 않았다. 여친도 없는 새끼가 어디서 밤을 지새우는 건지.
별 수확 없이 터덜터덜 돌아와야 했다. 문 앞에는 산처럼 쌓아 둔 짐 보따리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오늘 왜 이래? 마가 꼈나.”
범상치 않은 날이었다. 이런 날은 돌아다니면 안 돼. 여기서 더 나빠진다면 뭔 일이 일어날지, 솜털이 쭈뼛 섰다. 근처 공원에서 노숙할 생각도 싹 사라졌다.
털털털 캐리어를 끌고 집 근처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다행히도 차수민의 담배 심부름을 통해 안면을 튼 알바가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는 거북이처럼 짐을 이고 다니는 내가 불쌍했는지 폐기로 나온 김밥을 건넸다.
“드세요…….”
차수민이 만들어 준 우정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불현듯 느껴지는 허기에 눈물 젖은 김밥을 삼켰다.
“남은 건 핸드폰뿐인데 배터리라도 나가면 어떡하냐.”
폰을 살피고 있는데 띠링, 경쾌한 알림음과 함께 메시지가 날아왔다. 이민혁이었다.
선배, 내려갔어요?
왜 이민혁 생각을 못 했을까! 어둠 가운데 한 줄기 빛이 스며드는 듯했다. 나는 주저함 없이 바로 콜을 때렸다.
“민혁아!”
-헉…… 헉. 선배.
“야, 너 왜 헉헉대냐.”
-아… 운동 중이었어요. 같이 운동이나…… 하자고 문자 한 건데.
우리가 언제 그렇게 친했다고. 툭 내뱉을 뻔한 말을 삼키고 상냥한 목소리로 사정을 얘기했다. 지금은 민혁의 과한 관심과 연락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래서 내가 잘 곳이 없어.”
이민혁은 한참 말이 없더니 다시 거센 숨을 몰아쉬었다. 언뜻 한숨 같기도 했다.
-그럼, 후. 데리러 갈게요. 어디예요?
“진짜 고맙다. 이 은혜는 꼭 갚을게.”
전화를 끊자마자 라면에 물을 부었다. 룰루. 일단 외상하고 이민혁 오면 돈 꿔서 메울 생각이었다. 과자 봉지도 뜯고 맥주도 한 캔 땄다. 오늘은 민혁이네서 비비고 차비 빌려 친척 집에 가 있을 예정이었다.
그러다 문득 이번 방학은 본인 집에서 머무르라던 차수민의 권유가 잠깐 떠올랐다. 순간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때 거절했다고 이런 일들이 생기는 거 아냐? 우후죽순으로 말이지. 그러나 나는 금방 웃어 버렸다.
“하하. 미쳤어. 말도 안 돼. 차수민의 저주야, 뭐야.”
후루룩 면 치기를 하는 중에 똑똑, 누군가 창문을 두드렸다. 이민혁인 줄 알고 고개를 드는데, 편의점 유리창 너머에 비친 건 그였다. 바로 전까지 생각했던 그 인간. 차수민.
면이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싱긋 미소 지은 그가 편의점 문을 열고 들어왔다.
“뭐 하냐?”
“네가 왜 여기 있어?”
“본가 내려간다며. 너는 왜 여기 있어? 궁상맞게 웬 라면.”
“너야말로 왜 여기 있냐니까?”
“나야 운동 중이었지.”
운동 그놈의 운동! 이 사람들 운동 못 해 죽은 귀신이 붙었나. 나는 이를 바득 갈았다. 집에 간다면서 자취방 바로 앞에서 라면이나 삼키는 모습에 대해 해명을 해야 했다.
“나, 나는 누구 기다리는 중.”
“누구?”
“있어. 바쁜 것 같은데 얼른 가 봐. 운동 잘하고.”
“이건 뭐야. 캐리어? 이 보따리는 뭐야. 엥. 살림살이 다 들어 있네. 너, 설마 집에서 쫓겨났니?”
“쫓겨나긴 누가. 아, 얘는 왜 안 와.”
괜히 미동 없는 폰을 살폈다. 차수민은 어느새 곁에 앉아 홀짝이던 맥주 캔을 만지작거렸다.
“그럼 본가 내려가지 왜 이러고 있어. 엄청나게 사 드셨네.”
그때 구세주처럼 벨 소리가 울렸다. 이민혁이었다. 나는 화색이 되어 전화를 받았다.
“어, 어디쯤이야?”
-아, 선배. 미안해요. 저 갑자기 부모님이 오셔서 오늘은 재워 드리기 곤란할 것 같네요. 일단 주변에 아는 분 계시면 부탁해 보시죠.
“야, 갑자기 이러는 게 어디 있…….”
“누군데? 누군데, 봐 봐.”
나는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절대 안 보여 줘. 오기가 생겨서 핸드폰을 뒷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몰라도 돼.”
“왜 화를 내. 뭐 찔리는 거라도 있어?”
“없어.”
“근데 왜 내 말에 대답 안 해. 왜 본가 안 가고 여기 있냐니까? 아까부터 묻잖아.”
“뭐, 뭐가?”
“전역하고 처음 내려간다며. 그래서 우리 집에 놀러 못 간다고 그랬잖아. 맞지?”
차수민의 눈매가 곡선으로 휘어졌다. 뭔가 빙글빙글 돌려 말하며 웃는 게 아주 재수가 없었지만 피할 수 없었다. 그렇게 웃는 건 뭔가 재밌는 놀잇감을 발견했거나 이미 그 놀잇감이 본인 손아귀에 있을 때의 일이었다.
나는 마지막 발악을 해야 했다. 얼른 차수민을 피해 잘 곳을 찾아야 한다. 저 얼굴을 보니, 공원이라도 가서 노숙할 의향이 불쑥 생겼다. 커다란 사내새끼에게 뭔 일이라도 생기겠어. 짜증 나게 구는 차수민을 두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아, 곧 내려갈 거라고!”
큰 소리로 외치며 박력 있게 편의점 문을 열어젖히는데 띠로롱, 청아한 문짝 종소리와 함께 다급한 알바생의 외침이 들려왔다.
“형, 계산 안 하셨어요!”
시발.
나는 다시 백스텝을 밟았다. 흰자로 차수민의 어깨가 잘게 떨리는 게 보였다. 차라리 마음껏 웃어라. 시발… 시발…….
어느새 다가온 차수민이 까치발을 들어 내 어깨에 팔을 걸쳤다.
“얼마 빌려줄까?”
나는 두 눈을 꾹 감았다.
집은 물론, 땡전 한 푼 없는 거지 체험은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다.
지금은 새까만 세단에 몸을 싣고 산길을 달리는 중이었다. 승차감이 어찌나 좋은지 비포장 길인데도 흔들림 하나 없이 나아간다. 앞에는 운전기사까지 있었다. 이 새끼 어디 도련님 아니야? 너무나 평범해 보였던 부모님이 사실은 모 기업 재벌 총수 아니냐고. 구찌에 베르사체. 줄줄이 명품만 걸치는 것만 봐도 꽤 사는 집 자제가 분명했다.
사업이 아주 잘되나 봐. 그에 비해 지금 나는 지갑조차 없다. 어디로 데려가는지 모르겠지만 돌아갈 차비조차 없는 신세이다.
‘아하, 버스비가 없어서 못 가고 있었구나? 뭐야, 말하지. 그러면 며칠만 우리 집 들렀다가 가. 집까지 태워다 줄 테니까. 어머니께는 잘 말씀드리면 되잖아.’
빈털터리에게는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어차피 집에 돌아가도 들어가지도 못하는데 몸 뉘일 곳은 필요하니까.
일이 이렇게 되다니. 남아일언 중천금이라 하였으나 방학 중에도 차수민을 보게 생겼다. 차수민을 피하고자 허둥지둥 내려갔던 건데 결국에는 차수민의 본가에 발을 디디게 된 상황이 어처구니없었다. 정말 차수민의 저주가 아니고서야.
덜컹거리는 차가 유배지로 향하는 감옥같이 느껴졌다. 같이 한 공간에 지내며 계속 마주쳐야 하는데 못다 한 감정 정리는 어쩌나. 너와 눈 마주칠 때마다 입술을 깨물게 되는데. 이걸 어떻게 숨겨. 하아. 깊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뭐가 그렇게 심란해?”
“아냐……. 근데 엄청 깊이 들어간다.”
사업을 하신다더니 고랭지 채소라도 기르시나. 세단은 산 몇 개를 지나치고 울창한 외딴길을 달리고 있었다. 창밖으로 푸르른 자연이 펼쳐졌다. 진짜 어디 휴양하러 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 즐기자. 방학을 좋은 데서 자연을 만끽하며 보낸다 생각하자. 자연을 벗 삼아 나의 더러운 뇌욕을 씻어 내는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고, 그땐 그렇게 생각했다.
“거의 다 왔어.”
“응.”
“아, 김정현, 들어가기 전에, 내가 말하지 못한 게 몇 가지 있는데.”
차가 멈추자, 안전벨트를 풀며 차수민은 평이한 목소리로 사소한 문제를 다루듯이 말했다. 그 뒷말은 확신에 차 있었다.
“이해해 주리라 믿어.”
말하지 못한 거?
그가 던진 말의 내용을 곱씹기도 전에 차 문이 열렸다. 거대한 덩치의 남자가 서 있었다. 경호원이라도 되는 것처럼 에스코트가 수준급이었다. 차수민은 몸을 일으키며 마저 말했다.
“부모님께 인사시켜 드리고 싶지만 지금은 안 계시니까 나중에 기회 되면 인사해. 나는 처리해야 할 업무가 좀 있어서 바쁠 거야. 며칠만 혼자 지낼 수 있지?”
어쩐지 개가 된 느낌이었다. 이거 완전 주인이 집 떠날 때 반려견한테 하는 말이잖아. 그러나 그의 은근한 미소가 아름다워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할 일 할 거면 난 대체 왜 데려온 거냐는 논리적인 생각은 들지도 않았다.
“그래, 착하네. 내 집처럼 편안하게 지내. 편안하게.”
차수민은 경호원의 호위를 받으며 내렸다. 정장 차림의 경호원은 풍채가 우람했다. 왜 가정집에 저런 체격의 경호원이 필요한지 도통 알 수가 없었지만 차수민의 뒷모습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알 것도 같았다.
눈앞에 펼쳐진 곳은 거대한 한옥이었다. 어찌나 큰지 본채와 별채 뒤로 빽빽한 건물들이 늘어서 있었다. 한국 민속촌에서도 보기 힘들 고급 한옥. 설마 차씨 가문-혹은 이씨 가문- 5대 장손 뭐 이런 건 아니겠지.
혼자서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사이, 차수민은 본채로 통하는 것처럼 보이는 대문으로 향했다.
육중한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보디가드의 넓은 등짝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지만 차수민의 뒷모습과 일렬로 서서 그를 향해 머리를 조아리는 수많은 사람들을 잠깐 본 것 같기도 했다.
“……잘못 본 거겠지?”
“그럼요.”
“아, 깜짝이야!”
운전기사였다. 긴 길 묵묵히 차를 몰던 그가 문을 잡고 서 있었다. 앉아 있을 땐 몰랐는데 일어서니 아까 그 경호원만큼 커다랬다.
“내리시죠.”
나와 얼추 키는 비슷했으나 근육인지 살인지 씨름 선수같이 단단하게 붙어 있었고 얼굴이 몹시 살벌했다. 그의 눈 밑에는 칼자국으로 추정되는 흉터가 길게 나 있었다. 칼자국이 트레이드마크인 유도 동아리 관장이 생각나 흠칫 몸을 떨었다. 주변에 칼자국이 난 인간이 하나만 있어도 까무러칠 일인데 어찌 된 일인지 자꾸 이런 사람들만 만나고 있었다.
그의 안내를 받으며 별채로 보이는 한옥으로 향했다. 잘 정리된 돌담길이었다. 칼자국이 불쑥 물어 왔다.
“도련님과 많이 친하십니까?”
“네? 네, 뭐……. 고등학생 때부터 알고 지내긴 했죠.”
도련님이라는 호칭을 실제로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정말 종갓집 장손임이 분명했다. 오냐오냐 자라서 인성이 그 모양이었구나. 드디어 차수민의 파탄 난 성격에 대한 명쾌한 원인을 찾은 것 같았다.
“그렇, 군요.”
그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 분명 살갑게 미소 짓는데 이마에 실핏줄이 불거져 있었다. 나는 시선을 저도 모르게 내리깔았다. 내가 뭘 잘못했나, 아님 원래 저따위로 생겨 먹은 건가? 혼란스러워하는데 이내 표정을 지워 낸 칼자국이 등을 돌렸다.
“이쪽이 게스트 룸입니다. 이 방에서 머무시면 됩니다. 머무시는 동안 별채 내에서는 마음대로 다니셔도 됩니다. 도련님께서 급한 일을 처리하는 대로 본가 출입이 가능하실 겁니다.”
“예. 감사합니다.”
“그럼.”
나갈 것처럼 몸을 틀던 칼자국이 다시 돌아와 나를 빤히 응시했다. 얼른 나가라 불편하게……. 속으로 염불을 외웠지만 그는 목석같았다. 침묵을 지키던 그가 오른손을 내밀었다.
……악수하자는 건가?
내민 손을 맞잡자 기다렸다는 듯이 엄청난 압력이 손을 짓눌렀다.
“윽.”
악력이 어찌나 센지 손뼈가 으스러질 것 같았다. 이건 악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억센 힘겨루기에 나도 모르게 있는 힘껏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순순히 손이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이게 뭐 하시는……?”
“실례했습니다. 푹 쉬지요.”
뭐야. 어이가 없었다. 나는 뚜벅뚜벅 작아지는 뒷모습을 보며 제자리에 못 박힌 것처럼 서 있었다.
“시비 턴 거지 지금?”
뒤늦게 분노가 밀려왔다. 여기 사람들은 왜 이래? 차수민 닮아서 하나같이 싸가지가 없다. 한발 늦게 씩씩대며 한 대 갈겨 줄 걸 후회했다. 이래 봬도 복싱도 배웠고 유도도 배우고 있는데 그깟 떡대 하나 제압 못 하려고.
……그러나 칼자국 새겨진 얼굴을 떠올리니 금방 진정이 되었다. 그냥 조용히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좋은 게 좋은 거니까…….
손님방은 넓었고 정리가 잘되어 있었다. 푹신한 침대에 엉덩이를 붙였다가 다시 일어났다. 불편하다. 5성급 호텔처럼 고급스럽게 꾸며진 방을 둘러보면서 어쩐지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누구보다 차수민을 잘 안다고 생각했었는데 실은 하나도 모르고 있는 건 아니었을까.
구겨진 기분의 정체가 상한 자부심인 걸 깨닫자 자존심까지 구겨졌다. 내가 모르는 차수민. 또 다른 차수민. 내게만 보여 주던 본래 모습을 아무렇지도 않게 드러내는 차수민. 나는 손톱을 물어뜯었다. 여기 오는 게 아니었어.
대충 짐을 풀고 기분 전환 겸 마당으로 향했다. 잘은 몰라도 돈이 엄청 많다는 건 알겠다. 기와집의 거대한 규모에 눈이 시렸다. 그의 몸을 휘감고 있던 명품 셔츠의 존재가 이제 이해가 되었다.
아, 그거. 돌려줘야 하는데.
그를 옆에 둔 채 정액을 토해 내던 치기 어린 밤, 더러워진 검은 셔츠…….
부드러운 실크 셔츠를 떠올린 순간, 귀두를 감싸던 그 감촉이 함께 떠올랐다. 희미하게 퍼지던 차수민의 체향과 밤공기를 데우던 밭은 숨소리도.
거짓말처럼 찌릿함이 몰려들었다. 앞이 훤히 뚫린 드넓은 마당에서 딱딱해진 앞섶을 발견하자 몹시도 당황스러웠다.
“돌았구나. 미쳤어, 김정현…….”
짐승도 아니고 이젠 상상 하나로 바깥에서 발딱 세우기까지. 요즘 자위를 못 해서 욕구 불만인 상태가 분명했다. 어쩔 줄 몰라 쭈뼛대는데 마당을 쓸던 험악한 아저씨가 불쑥 다가왔다.
“누구쇼잉?”
“허, 허억. 깜짝이야.”
나는 재빨리 아래를 가렸다. 수치스러움에 귀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아니, 이 집안사람들은 왜 다들 기척이 없어요? 저, 전 차, 아니, 이수민 친군데요.”
친구라고 하기엔 어떤 강을 넘어 버린 것 같지만. 속이 쓰렸다.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저씨는 뻑뻑 소리를 내며 나이에 걸맞은 거대한 박수를 쳐 댔다. 귀가 아려 왔다.
“아아! 수민 도련님 친구분이십니까잉!!!”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듯한 목소리에 반강제적으로 눈이 감겼다 떠졌다.
“아따 반가워라. 백만 년 만의 손님이셔잉. 울 도련님이 막 누구를 데려오고 그러지 않는데. 많이 친한가 봐요오?”
“그건 모르겠고…… 고등학교를 같이 나왔어요.”
내가 그를 얼마나 가깝게 느끼건 간에 상대가 그렇지 않다면 친한 사이라 볼 수 있는 건가. 나는 말을 흐릴 수밖에 없었다.
“고등학교? 고등학교오? 음.”
아저씨는 턱을 쓸며 어두워진 내 얼굴을 구석구석 관찰하더니 이내 등을 퍽 소리 나게 때렸다.
“알았으니까 일단 들어갑시다잉!”
당황스러워서일까 고개를 들었던 사타구니 사이의 것은 어느새 제자리를 찾아가 있었다.
아저씨는 막무가내였다. 방금 나왔다는 내 말을 사뿐히 무시한 채 별채로 다시 나를 끌어들였다. 그의 페이스에 말려 마당을 한 바퀴 도는데, 정갈하다 못해 강박적이기까지 한 동양식 정원이 보였다. 아름드리 소나무와 매화나무가 사이좋게 심어져 있었다. 뒷마당에는 난과 대나무가 있었다. 관리가 아주 잘된 정원이었다.
“사군자네요. 아버님 취향이 참 멋지신데요…….”
“보는 눈도 좋아라. 난은 제주에서, 대나무는 강릉에서 공수해 온 것이지라. 자고로 사내란 사군자를 본받아 마음을 정결케 해야 하는 법. 정신을 맑게, 몸도 마음도 수련하라는 깊은 뜻이 담겨 있지요오.”
범상치 않은 집안이라는 삘이 팍 왔지만 애써 무시하려고 했다. 그러나 종갓집다운 정원이라고 생각하려는 노력이 무색하게 마주치는 사람마다 한 덩치 하고, 아저씨의 ‘수민 도련님 친구분이시다’라는 소개에 90도로 허리 굽혀 인사하는 건 아무래도 요상했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험상궂게 생겨서는 깍듯하기가 이루 말할 데 없었다. 지키고 싶은 가업 비밀이라도 숨겨 놓은 건지, 지금까지 마주친 사람들은 모조리 보안을 관리하는 경호원인 것처럼 덩치와 면상이 어마어마했다. 아버지의 사업 규모가 생각보다 더 큰 게 분명했다. 이제 보니 첫 만남 때 지갑 가득 5만 원권을 꽂고 다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나는 아저씨에게 이리저리 끌려다니다가 겨우 건물 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나는 잠깐의 만남에 녹초가 되어 침대로 기어갔다. 차수민과 함께가 아닌 이상 감히 별채 밖을 돌아다니고 싶다는 생각은 앞으로 하지 않을 예정이었다.
“휴. 겨우 쉴 수 있겠…….”
한숨 돌리기가 무섭게 드르륵 문이 열렸다. 단아하게 생긴 여자가 일식 접시를 들고 있었다. 먹기 좋게 썰린 회였다. 나는 잠깐 이게 무슨 상황인지 고민해야 했다.
“저 주시는……?”
끄덕이는 고갯짓에 몸 둘 바를 모르며 접시를 건네받았다. 이를 시작으로 여자가 분주하게 왔다 갔다 하며 스끼다시를 차렸다. 내 의사는 전혀 묻지 않고 말이다.
“저기, 그런데 누구세요……?”
그녀는 나를 흘긋 쳐다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많아야 20대 중후반인 듯했다. 뉴스 채널의 아나운서처럼 단정하고 청초한 분위기를 풍겼다. 예전 같았으면 심장 뛰는 소리가 100미터 밖까지 들렸을 것이다.
예전이라 함은 차수민을 만나기 전……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또 자괴감이 밀려왔다. 그와 재회한 이후로 그간 애써 쌓아 올렸던 김정현의 규격들이 무너져 내리고 있는 것 같았다.
묻는 말에 한마디도 대답해 주지 않던 여자는 상을 다 차리고 난 후에야 자기 할 말을 했다.
“도련님께서 극진하게 대접하라 하셨습니다.”
“아…… 예에. 감사합니다.”
여자를 배웅하려고 문 앞에 서 있는데 그녀는 나갈 생각을 않았다. 머리에 물음표를 띄우고 바라보는데 그녀가 품속에서 칼을 꺼내 들었다. 과도였다. 그걸 왜 몸에 지니고 다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자는 사과 한 알을 집어 들었다.
“아, 안 그러셔도 되는데!”
남이 불편해하건 말건 내 일은 해야겠다는 건지 그녀는 문짝 옆에 모로 앉아 사과를 깎기 시작했다. 나 혼자 식탁에 앉아 있는 터라 불편함은 배증되었다. 제발 식탁에 같이 앉으면 안 되겠냐는 애원에도 막무가내였다. 포기하고 젓가락질을 하는데 그녀가 등장처럼 갑작스럽게 입을 열었다.
“때는 XX년 겨울이었습니다. 몇십 년 만의 한파가 닥쳤던 걸로 기억합니다. 따듯한 집이 있는 인간들에게는 좀 더 추운 계절에 지나지 않았겠지만, 길거리 동물들에게는 가혹한 겨울이었죠. 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길 동물이나 다름없는 신세였으니까요.”
갑자기 시작된 본인 과거 얘기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얼어 있는데 사각사각 사과 껍질을 벗겨 내는 소리가 들려왔다.
“빌어먹을 아버지의 폭력을 피해 길거리를 전전하던 가출 청소년이 저였습니다. 어쩌다 보니 폭력배에 몸담게 되었죠.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늦어 버렸습니다. 발 빼기도 어려운 상황이 되어 버렸으니까요.”
“……네?”
“그날은 눈이 많이 오는 날이었습니다. 신생 조직의 습격과 경찰의 조직 소탕 작전으로 몹시 혼란스러운 시기였습니다.”
그때의 일을 회상하는 듯 그녀의 눈이 아득해졌다. 이 와중에 딕션은 왜 이리 좋은지 아나운서에게 조직폭력 관련 뉴스를 전해 듣는 기분이었다.
그녀의 세 발 빠른 흐름을 따라가기 위해 애쓰던 나는 그냥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 멀쩡하게 생겨서는 싸이코인가 보다…….
여기 도착하고 나서부터 기상천외한 만남이 계속되어서인지 이젠 웬만한 일에는 놀라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 지금 무슨 얘기를 하는 거냐며 태클을 거는 것보단 얌전히 주어진 음식이나 먹는 게 도움이 될 거란 촉이 섰다. 그렇게 수긍하고 회에 젓가락을 갖다 대었다.
“피가 난무하는 시절이었죠. 배때기에 칼날이 꽂히고…….”
나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응시했다. 그녀는 누구보다 진지한 것 같았다.
“내장이 튀어나오고…….”
들었던 연어회 한 점을 다시 살포시 내려놓았다.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르겠으나 생생한 묘사를 들으며 날것을 먹을 만큼 내 비위는 강하지 않았다.
“흰 눈이 붉게 물들을 뻔했지만. 저는 참 운이 좋은 사람이랍니다. 도련님께 은혜를 입어 이렇게 새 인생을 살아갈 기회를 얻었으니. 그날의 도련님은 잊을 수가 없답니다. 그 어린 분이 마음은 또 얼마나 넓으신지.”
“그것참, 정말…… 다행이네요.”
어떤 반응을 취해야 할지 고민 끝에 힘겹게 맞장구를 쳐 주었다.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차수민 일가는 자선 사업도 진행하는 모양이었다.
득실득실하던 인상파 경호원들이 떠올랐다. 기업 내 자선 활동의 일환으로 깡패 갱생 프로그램을 시행 중인 것 같았다. 손을 씻고 새로운 삶을 살기를 원하는 깡패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해 주고 새사람 만드는 데 일조하는 애국 기업 말이다.
“피에 물든 제 손을 잡아 주시며 함께 가겠느냐고 묻던 그 앳된 목소리가 생각나네요.”
그녀는 이제 눈물을 찍어 내기 시작했다. 당황스러워 냅킨을 내밀었지만 그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도련님은 저희들의 아픈 손가락이세요. 강한 척하지만 누구보다 약한 분이시고, 퉁명스러운 척하시지만 누구보다 친절하시답니다.”
“네에. 그런 것 같네요……. 걔가 속은, 괜찮은 애니까…….”
나는 얼이 빠진 채로 중얼거렸다.
“도련님이 얼마 만에 초대한 손님인지 감개무량할 따름이에요.”
그녀는 아련하게 웃으며 한창 과일을 썰던 칼을 내려놓았다. 그 앞에는 사과와 오렌지로 빚어낸 학 한 마리가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처럼 날갯짓을 하고 있었다. 이, 이런 걸 어디서 봤더라. 나는 기억을 더듬으며 젓가락 내려놓았다.
“왜 더 안 드시고? 입맛에 안 맞으세요?”
“아니요… 배불러서요…….”
또 다른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으려는 그녀를 억지로 내보냈다.
자연과 함께하는 휴양 계획이 시작부터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차수민을 잊기 위한 방학이었는데 그와 같은 공간에 머물게 된 것과 더불어 여기저기서 그의 이름을 듣고 있었다. 나는 오지 않는 잠을 억지로 청했다.
그날 밤 악몽을 꾸었다. 검은 길을 걷고 있었다. 아무리 용을 쓰고 뛰어도 벗어날 수 없었다. 가도 가도 검은 길이 반복될 뿐이었다. 답답한 꿈 내용치고 썩 불쾌하지는 않았다. 그저 계속 걸었을 뿐이다.
“으음.”
수탉 소리에 깨었다가 다시 가물가물 잠들었는데 밖에서 낮은 목소리로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저분이 도련님의…….”
“허우대는 말짱해 보이던데.”
“말짱하기는. 얼굴이 곱상한 게 툭 치면 쓰러지게 생겼구만. 이래서 어떻게 도련님을.”
“그래도 힘은 좀 쓰던데. 어제 잠깐 악력 좀 확인해 봤거든? 꽤 쓸 만해.”
“그래도 걱정입니다……. 저런 놈팽이에게 도련님을 맡길 수는 없잖아요.”
이건 또 무슨 악몽인가 싶었다. 머리로는 당장 일어나 저 돼먹지 못한 놈들의 면상을 확인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몸은 물먹은 솜처럼 축 늘어져 있을 뿐이었다. 귓구멍에 자꾸만 대상이 나로 추정되는 험담이 날아들었다. 끄응, 분하지만 다시 쏟아져 내리는 잠에 정신을 맡기기로 했다. 너무나도 졸렸다.
다 귀찮아. 알고 싶지 않은 것투성이였다. 혹은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들. 마주하기 싫어. 차라리 계속 검은 길을 걷는 편이 나았다.
“정현 씨!”
간만의 센치한 무드를 깨 버리고 문을 박차고 들어온 불청객은 어제의 그 여자였다. 그녀는 인정사정없이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내 어깨를 흔들었다. 가녀린 팔뚝에서 이 괴력이 발산된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아침 해가 밝았습니다. 일어나세요!”
“으으. 무슨 일이신데요…….”
“별채 구경시켜 줄게요. 얼른 나와요!”
“괜찮아요. 나중에 혼자 돌아다녀 볼게요.”
“빨리요! 코스도 다 짜 놨단 말이에요. 빨리…… 아, 조금 시간 걸려도 되니까 샤워라도 하고 나오세요.”
그녀의 시선은 이불, 정확히 말하면 내 하반신에 닿아 있었다. 얼굴이 순간 뜨거워졌다. 애벌레처럼 이불을 둘둘 감쌌다.
“뭘 부끄러워하고 그래요. 호호. 애인이 좋아하겠네요. 밖에서 기다릴게요.”
차수민을 만나 새 인생을 살게 되었다는 그녀, 진아 씨는 강인하고 끈기 있는 여성이었다. 극구 사양해도 끝까지 달라붙어 결국에는 나가지 않기로 결심했던, 별채 문턱을 밟게 만들었다.
“자, 준비됐죠?”
그녀는 어째 신나 보였다. 본격적으로 준비했는지 가이드가 쓸 법할 마이크도 찼다. 남은 괴로운데 홀로 입꼬리가 올라간 모습이 차수민을 연상시켜 흠칫했다.
“자, 오른쪽을 보시면 잘 가꿔진 한국식 정원 사이로~ 예쁜 연못이 하나 보이시죠? 보라색 연꽃은 1년에 한 번 핀다는 귀한 정원용 수화이며…….”
조용한 목조 자택에서 시장통에서나 들릴 법한 마이크 소리가 울렸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이곳에 오고 처음으로 차수민이 보고 싶어졌다.
“다음은 실내로 가겠습니다. 깃발 잘 보시고 따라오세요.”
용 한 마리가 새겨진 깃발이 펄럭였다. 유럽 여행 중인 중국인이 된 기분이었다. 그녀를 따라 긴 복도를 걷는데 건너편서 눈이 마주친 떡대 하나가 성큼성큼 걸어와 어깨빵을 했다.
“아.”
“실수올시다.”
떡대는 까딱 고개를 숙이더니 저만치 제 갈 길을 가다가 갑자기 방향을 바꿔서 뛰어왔다. 다시 어깨가 부딪혔다.
“아?”
“실수라고오.”
저 새끼 뭐야? 나 노린 거 맞지? 고의성이 다분히 느껴지는 어깨빵이었다. 몇 발자국 앞에서 다시 각을 재는 떡대와 눈이 마주쳤다. 나도 욱해서 주먹을 쥐는데 쉴 새 없이 혼자 떠들던 진아 씨가 이쪽을 돌아봤다.
“앗. 철웅 씨. 여기서 뭐 해? 아, 두 분은 처음 보겠다. 인사해. 철웅 씨, 도련님의 친구분이세요.”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떡대는 뚱하게 나를 노려보더니 고개만 까딱하고 가 버렸다. 여기 사용인들은 하나같이 차수민을 닮아 싸가지를 밥 말아 먹은 것이 분명하다.
“여기 사람들, 저한테 악감정이 있답니까?”
“네? 그럴 리가요. 다들 정현 씨를 아끼고 좋, 좋아, 에엣취! 하아. 다음으로 가 볼까요?”
찝찝한 재채기와 함께 투어는 이어졌다. 이 미친 집은 뭐 그렇게 자랑할 거리가 많은지 박물관처럼 전시실도 따로 마련해 놓고 있었다. 전시실에 입장한 순간부터 진아 씨는 물 만난 고기처럼 신나게 떠들었다.
“이 족자에 그려진 황금 잉어는 정력을 상징한답니다. 여기, 반짝이는 비늘 보이시죠? 진짜 금이에요, 금.”
방금 부딪힌 새끼의 팔뚝에도 펄떡이는 잉어 한 마리가 새겨져 있었다. 나는 그제야 서늘한 예감과 마주했다.
잉어와 호랑이, 용. 그리고 알 수 없는 한자들로 빼곡한 족자 봉을 보며 뭔가 어긋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전시실의 구석에는 광이 나게 잘 닦인 기다란 칼 몇 자루가 보관되어 있었다. 그중 몇 개는 값비싸 보이는 게, 잘 관리한 일본도인 듯했다.
“혹시 사장님이 진행하시는 사업이란 게 일본과의…… 무역인가요?”
아니란 걸 알면서도 물어봤다. 그렇단 대답을 듣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아, 그런 건 아니고 사장님께서 재일 교포시거든요. 귀국하실 때 귀한 작품들을 많이 수집해 오셨죠. 일본에서 쌔벼 온, 아니, 가져온 귀중품은 옆방에 더 많습니다. 구경하시겠어요?”
“대체 어떤 사업을 하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방금 분명 쌔벼 왔다고……. 불안감이 엄습했다. 수많은 수집품과 떡대들이 의미하는 바는 추측하건대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진아 씨가 대답하려고 입술을 벌리면서 옆방으로 통하는 미닫이문을 열었다.
그때, 담벼락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 처리를 그따위로 하면 어쩌잔 거야! 누님이 아시면 나는!”
진아 씨는 어느새 옆방으로 가 신나게 재잘거리며 집안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었다. 열심히 떠드는 진아 씨를 남겨 둔 채 나는 창을 넘었다. 기억 속에 박혀 있던 그 목소리였다.
본가로 통하는 문이 보였다. 열어젖히는 문틈 사이로 역시나 아는 얼굴이 있었다.
고등학생 때 보았던 차수민의 평범하디평범한 아버지. 그는 무언가에 쩔쩔매고 있었다.
“뭐야, 부모님은 어디 가셨다더니. 인사도 안 시켜 주고.”
반가움에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서늘한 촉이 두 다리를 얼렸다.
“알았으니까 빨리 수습해. 시간이 얼마 없으니깐…….”
푸근한 인상의 아저씨는 안쓰러울 정도로 땀을 뻘뻘 흘리며 초조한 언어를 주워 삼키고 있었다. 땀에 젖은 아저씨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건 다음 일이었다.
육중한 나무 소리를 내며 대문이 열렸다. 아저씨와 얘기하던 떡대 놈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역시 익숙한 얼굴이었다. 6년 전, 고1 상담 주간에 뵈었던 차수민의 어머니가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또박또박 걸어오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누님!”
입이 벌어졌다. 그 선하고 인자한 어머니는 어디 가고 너무나도 매서운 분이 눈을 부라린 채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는 빤딱이는 가죽 재킷을 입고 있었는데 아주 먼 옛날, 마트에 같이 안 가 준다고 오토바이를 몰고 와 동창회를 파탄 내던 차수민의 패션을 떠올리게 했다. 그녀의 카리스마에 눌려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오, 오셨습니까.”
그건 차수민의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는지 덜덜 떨며 억지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뭔 놈의 부부 관계가 이래. 지난 6년간 두 사람 사이에 무슨 고난과 역경이 있었길래 한쪽이 벌벌 떠는 사이가 되었느냔 말이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두 사람이 보통 관계가 아니란 걸 눈치챌 수 있었다. 차수민의 어머니가 성큼성큼 걸어와 아저씨의 멱살을 잡아챘기 때문이다.
“회계 장부가 아주 엉망이던데. 민두식이는 내가 출장 중에 다시 돌아와야 할 만큼 혼자서는 아무 일도 해내지 못하나?”
“아닙니다.”
“그 자리는 꽁으로 앉은 자리야?”
“아닙니다!”
“일을 그르쳤으면 보고를 해야지. 내가 자리 비운 사이에 해결할 생각이었나 본데 나를 물로 보지 않고서야 그런 미친 계획을 세웠을 리가 없잖아. 내가 그렇게 우스웠나?”
“절대 아닙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였다. 점차 감이 오기 시작했다. 차수민을 처음 만난 순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어딘가 요상했던 작은 기류들. 그동안의 모든 것들이 퍼즐처럼 맞춰지고 있었다.
“……세상에.”
나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대단한 빡대가리였구나…….
내 무딘 성격이 만들어 낸 환장의 콜라보가 여기까지 나를 이끌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제 발로 뱀 구덩이에 뛰어든 격이었다. 일단은 어디로든 피해야 할 것 같았다. 두 사람을 마주치면 넘지 못할 강을 넘을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러나 떡대들 중 하나와 눈이 마주쳐 버렸다. 하지 말라고 손사래를 치는데 기어이 깡패 새끼는 내 쪽을 가리켰다. 나의 운은 여기까지였다…….
“형님. 저기 어떤 간나 새끼가.”
그의 손가락질을 따라서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꾸벅 인사했다.
“하핫. 안녕하세요…….”
짧은 정적 속에서 차수민의 가짜 파파와 마마가 서로 시선을 교환하는 모습이 보였다. 나만큼이나 바쁘게 머리 회전 중이신 듯했다.
“어, 어머.”
“이게 누구? 설마, 그때 그 수, 수민이 친구?”
“세상에, 반가워라! 잘 지냈어요?”
“아, 그, 그동안 안녕하셨어요…….”
또다시 정적이 흘렀다. 차수민 어머니, 아니 아주머니의 미소 지은 얼굴에서 푸들푸들 경련이 일어나고 있었다. 정말이지 무서운 광경이었다. 나는 뒷걸음질을 치며 상황을 수습해 보겠다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내뱉었다.
“아, 아버님께서, 어머님께…… 꽈, 꽉 잡혀 사시는 것 같은데, 하핫. 부, 부인 말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고들 하잖아요. 그래서 저… 저는 이런 분위기가 부, 부부 관계에선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층 더 싸해진 분위기 속에서 아주머니가 입을 열었다.
“얘 눈치 깠지?”
“예, 그런 것 같습니다!”
그녀의 한숨 소리와 함께 깡패들이 각을 맞춰 다가왔다. 나는 뒷걸음질을 치다 못해 벽에 등을 부딪쳤다. 이도 저도 못하는 내게 아주머니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왜, 왜 이러세요.”
“아가야,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오늘 본 것들은 여기서 잊어버리는 게 좋아. 도련님 친구라고 해서 오냐오냐 다 봐주지 못하거든. 도련님 귀에 네가 알게 된 점들이 흘러 들어가게 되면 어떻게 될지 감이 오려나 모르겠네.”
그녀의 다정한 협박에 차수민의 (옛)파파가 캭 소리를 내며 목을 손으로 그었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곳은 그냥 화목하고 평화로운 가정집이야. 알겠지?”
나는 최선을 다해 고개를 끄덕였고 그런 노력이 가상했는지 아주머니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보여 주셨다. 한때는 차수민의 어머니였던 그녀가 물러서던 찰나, 누군가 말을 걸었다.
“실장님, 여기 계셨구나. 왜 전화를 안 받으세요.”
실장님으로 불린 아주머니가 몸을 돌리자 목소리의 주인공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입만 벌린 채 뻐끔거렸다. 평생 받을 충격을 오늘 다 받은 것 같았다.
“철웅 형이 티켓 내일 아침으로 미뤄 놨다고 전해 달래요. 일 마치시는 대로 출발하시라고.”
“어, 어어……?”
“아, 선배.”
목소리의 주인공은 놀란 기색도 없었다. 평소와 다를 것도 없이 밝고 어딘가 무료한 음성이었다. 앞에서는 사람 하나가 숨이 넘어갈 것 같은데 말이다.
평온한 그와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은 나. 그런 간극이 이상한 나라에 와 있는 듯한 기분이 들게 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나만 이상한 사람이 된 느낌이었다. 이상한 나라의 주민들과 우연히 굴러떨어진 이방인 하나.
“왔어요?”
이민혁은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내밀어 털썩 주저앉아 버린 나를 일으켜 세웠다.
이민혁. 같은 과 후배. 그리 친하지는 않으나 웬만한 얘기는 주고받는 사이. 새내기 때부터 과할 정도로 사근사근하게 굴었던 징그러운 놈. 어느샌가부터 묘하게 서늘해졌단 느낌을 받았는데.
그래, 차수민의 등장부터였던 것 같다. 차수민과는 아는 사이라고 했었지만 이렇게 아는 사이였을 줄은…….
“형. 정신 차려요.”
이렇게 아는 사이였을 줄은 결코 몰랐다.
자리를 옮기고 나서야 겨우 진정되었다. 나는 그와 마주친 순간부터 묻고 싶었던 것을 물었다.
“이민혁, 네가 왜 여기 있어?”
“그야 방학했으니까요.”
물어본 내가 이상한 놈인 것 같은 느낌이 들게 하는 평온한 어투였다.
“왔다곤 들었는데 저도 막 어제 도착해서 말이죠. 경황이 없어서 선배한테 인사도 못 했네요.”
“너 여기 살아?”
“그럼 놀러 왔겠어요?”
이민혁이 다리를 쭉 내밀며 추리닝 차림을 보여 주었다. 푹 눌러쓴 모자까지 아주 후리한 모습이었다.
“아니, 내 말은. 여기에서 그…….”
나는 하려던 말을 멈췄다. 뭐라고 말해. 여기 사는 놈들처럼 깡패 새끼냐고? 같은 일행이냐고? 말을 고르느라 머뭇대자 이민혁이 슬쩍 이쪽을 쳐다보았다.
“내 등에도 문신이 있냐, 그런 뜻?”
“내 등……에도?”
내 등‘에도’라니. 쟤 지금 차수민 얘기하는 거 맞지? 차수민처럼 본인 등에도 문신이 있는지 궁금하냐는 말이잖아.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민혁은 내가 차수민 등의 문신을 목격했단 사실을 알아챈 걸까? 우리 둘이 술 처먹고 몸을 섞었단 걸 안 거냐고. 가만, 둘이 무슨 사이기에 같은 집에 살고 그런 것까지 털어놔?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나도 모르게 이민혁을 노려보았다. 그는 잠깐 황당한 표정이 되었다.
“이 집 사람들 등짝에 뭐 하나씩 박혀 있으니까 해 본 말이에요. 보면 알잖아요.”
“어어 그렇지. 알고 있었어.”
나는 머쓱하게 웃어 보였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내가 너무 예민하게 반응했다. 이민혁은 차수민과의 섹스에 대해 아는 바 없을 것이다. 차수민이 곧이곧대로 털어놓을 놈도 아니고. 혹여 그랬더라면 동창이랑 실수로 자 버렸다는 고민 같은 걸 진지하게 들어 주지도 않았겠지. 나는 턱을 톡톡 두드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런 날 보며 이민혁은 한숨을 내쉬었다.
“형. 얼굴에 생각하는 대로 다 드러나는 거 알아요? 딱 놀려 먹기 좋은 스타일이라고요. 대체 이런 놈이 뭐가…….”
“너, 너 지금 이런 놈이라고 했냐?”
선배, 선배 꼬박꼬박 붙여 가며 붙임성을 보이던 후배 이민혁은 온데간데없고 무기력한 표정의 양아치가 담뱃불을 붙이고 있었다.
“제 등은 매끈하고요, 앞으로도 그럴 거고요.”
“그럼 왜 여기 있냐, 너. 혹시 알바생 같은 거야……? 그때 차수민 알바하다 만났다 했었지. 여기 억지로 끌려온 건 아니지?”
“선배 걱정부터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억지로 끌려온 거면 탈출시켜 주시게요?”
이민혁이 손을 휘휘 저어 연기를 몰아냈다. 나는 저녁노을에 스며드는 연기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뭐, 대충 알고 있는 것 같으니까. 저 따라와요. 딱 한 번, 형한테 기회를 줄게요.”
어느샌가부터 선배라는 호칭이 형으로 변해 버렸다. 신입생 환영회 때 게이인가 싶을 정도로 치대고 애교 떨고 시도 때도 없이 연락하던 이민혁은 어딜 가고 냉기가 어린 청년이 자리했다. 지금은 차수민 주니어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그가 무뚝뚝한 얼굴로 손짓했다.
“무슨 기회?”
“다 알고도 바보같이 어리바리하게 안 떠나는 형이 안쓰러워서요. 사람이 착한 거예요, 멍청한 거예요?”
“너, 너 이 자식. 형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가만 보면 잘 맞는 조합이라니깐. 순진한 얼굴이 가학심을 막 자극하나 봐. 정말 짜증 나 죽겠다니까.”
“뭐를 자극해……?”
나는 얼빠져 되물었다. 이민혁이 고개를 내저었다.
“에휴. 이리 오세요. 그동안 정도 들고 불쌍하기도 해서 베푸는 처음이자 마지막 선의예요. 죽을 각오 하고 알려 주는 거니깐 귓구멍 열고 잘 들으세요.”
이민혁이 데려간 곳은 별관 뒤 비품 창고였다. 창고 문은 굳게 닫혀 있는 것 같았다. 빙 뒤를 돌아 나무판자 몇 개를 헤치고 지나가니 담벼락에 개구멍이 하나 나 있었다. 사람 하나 겨우 들어갈 만한 크기였다.
“형 덩치가 워낙 커서 들어갈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그래도 힘껏 몸 구겨 넣으면 어떻게든 나갈 수 있을 거 같은데.”
“이게 뭔데?”
“도망칠 수 있는 기회요. 짐은 손님방에 풀어 놨죠? 내가 갖다줄 테니까 날 어두워지기 전에 먼저 나가 있어요.”
나는 눈을 깜빡이며 그가 뱉은 문장을 이해하려 했다.
“운전할 줄 아시죠? 읍내 가면 닭집이 하나 있거든요. 사장님한테 제 이름 대고 차 좀 빌려 달라고 하세요. 내비는 아마 안 달려 있을 텐데. 아, 여기까지 해 줬으면 알아서 길 잘 찾아서 가야지. 자, 그대로 산 내려가서.”
“잠, 잠깐.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데? 여기로 나가라고? 왜……?”
이민혁은 그동안 봐 왔던 것 중에 가장 험악하고 어이없는 표정을 했다. 그 후에는 나를 한껏 무시하는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눈썹이 아주 사람을 경시하는 눈썹이었다. 그동안 차수민을 통해 많이 봐 왔던 표정이라 딱 보면 알 수 있었다.
“형 바보야? 깡패 소굴에서 계속 머물고 싶어? 보내 줄 때 가라고.”
“당연히 나가고 싶지! 근데 이렇게 가는 건 아니잖아.”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새 정이라도 들었어? 한 명, 한 명 인사 나누고 갈 거야?”
“그게…… 차수민한테 아직 아무 얘기도 못 들었잖아.”
쩔쩔매며 혀끝에 걸리던 말을 내뱉었다. 쳐다보는 이민혁의 시선이 느껴졌다. 어쩐지 발가벗겨진 기분이라 얼굴을 들지 못하겠다. 나는 목덜미를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아무 얘기도 못 들었다고…….”
“그게 중요해요?”
이민혁이 물었다. 발끝만 내려다봤다. 그리고 대답했다.
“나한텐…… 중요해.”
결국 차수민은 나에게 아무 얘기도 해 주지 않았다. 어떤 집에서 자랐고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고 본인이 어떤 사람인지. 내가 알고 있던 것들이 모두 거짓이라 생각하니 발밑이 공허했다. 그동안 그와 쌓아 왔던 유대는 나만의 것이었을까?
나는 계속해서 애써 피해 왔던 진실과 마주하기로 마음먹었다. 직접 그 입을 통해 들어야 했다. 진짜 네가 어떤 사람인지를.
나만 알고 있던 차수민의 뒤에 서 있는 내가 알지 못하는 차수민. 내게만은 가면을 벗고 진짜 네 얼굴을 보여 줬었잖아. 그러니까 이번에도 네가 알려 줘야지……. 그럴 거잖아. 그치?
“챙겨 줘서 고마운데 차수민에게 무슨 설명이라도 들어야 할 것 같아. 그래야 떠나든가 하지. 이렇게 찝찝하게 도망치듯 갈 수는 없어.”
한껏 경멸하는 표정을 짓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잠깐 마주친 이민혁의 얼굴에서 의아함이 떠올랐다가 뭔가 답을 찾은 것처럼 빠르게 지워졌다. 잠시 얼이 나가 벌어진 입술 사이로 위태롭게 돛대가 타들어 가고 있었다.
“어, 담배. 떨어지겠다.”
이젠 질린 표정이 된 이민혁이 중얼거렸다.
“지긋지긋하다. 당신들.”
“뭐라고?”
“아뇨.”
“뭐라고 중얼댄 것 같은데. 내 욕 했지.”
“잘못 들으신 것 같네요. 네, 형 마음 알겠어요. 본인이 안 가겠다는데 강요할 수 없죠. 자, 그럼 돌아갈까요?”
이민혁은 떠오른 생각을 갈무리했는지 몸을 돌려 아직 긴 돛대를 비벼 껐다.
돌아가는 길에서는 본관 건물 보였다. 점차 희미해져 가는 저녁노을 아래 옛 청취가 느껴지는 전등에 하나둘씩 불이 켜지고 있었다. 별관 앞은 이미 환했다.
“그럼, 난 들어가 볼게. 이유야 어쨌든 만나서 반가웠다.”
아니, 그리 반갑지는 않았지만. 나는 속마음을 삼키고 입에 발린 말을 대신했다. 본래 알던 귀여운 후배 놈이었다면 반가웠을 텐데 앞에 있는 놈은 목석같은 비꼬기의 달인이었다. 차수민이라도 딱 나타나 주면 반가울지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게 신기했다.
너에게만 전부를 보여 준다고 생각했던 차수민이 실은 네게 비밀이 있었던 거야. 화나냐? 슬퍼, 김정현?
답은 아직, 이었다. 온종일 놀랄 만한 일들뿐이어서 아직 감정이 선명하게 올라오지 않고 있는 듯했다.
하루 만에 벌어진 일들을 깔끔하게 받아들이기엔 혼란스러움의 무게가 상당했다. 사실 상황 파악도 이성적으로 되고 있는 것 같진 않다. 내일쯤 되면 민혁의 도움을 거절한 걸 땅을 치고 후회할지도 모른다.
이민혁은 생각에 잠긴 건지 말이 없었다. 그래도 나름 신경 써 준 것 같은데……. 거절한 게 미안해 나는 짐짓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야. 내일 할 일 없으면 나랑 놀아 줘. 차수민이 데려와 놓고 방치하는데 사방에 깡패 천지라 어디 돌아다니지도 못하겠다.”
“그러니까 가랄 때 가든가.”
“아, 차수민 입에서 직접 얘기 듣기 전까진 못 간다니까.”
“형 선택이었어요. 끝까지 기억하시라고요.”
민혁이 뚱하게 말했다. 자꾸 겁주지 마. 무서워지잖아…… 나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래. 잘 쉬어라.”
“……형. 들어가지 말고 저 따라오세요.”
“어딜 또 가?”
또 다른 개구멍을 소개해 주려 그러나. 나는 의심쩍은 눈빛으로 이민혁을 노려보며 문고리를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민혁이 한숨을 쉬며 손짓했다.
“차수민한테 직접 들어야 발걸음이 떨어지시겠다면서요. 저녁 먹재요. 형이랑.”
그 말을 끝으로 앞서가는 이민혁을 따라 본채로 통하는 문을 지났다.
별채가 아담하고 화려하게 꾸며져 있다면 본채는 크고 웅장했다. 집 자체가 과시하기 위해 지어진 집 같았다. 잔챙이들이 깔짝거려 보려고 해도 그냥 크기에서 압도당할 것 같았다. 아니, 일단 이 산골까지 쳐들어오는 것부터가 일이겠다.
“야. 집 진짜 크다. 거의 뭐 요새 수준이네. 이게 다 몇 평이야. 너 길은 안 잃어버리니?”
땅 부자 차수민, 이제 보니 양심도 없는 새끼였다. 그에 비하면 거렁뱅이나 다름없던 날 빵 셔틀이나 시키고. 앞장서 걸어가는 이민혁은 대꾸도 없었다.
이 겉모습만 화려한 깡패들의 소굴에 도착했을 때, 차수민이 차에서 내리며 했던 말이 생각났다.
‘내가 말하지 못한 게 몇 가지 있는데……’
‘이해해 주리라 믿어.’
차수민은 왜 그동안 나한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까? 진짜 나 혼자만이 매달리던 관계였나. 내가 손을 놓으면 바스러질 사이었나? 그러기엔 차수민이 가끔씩 보여 주던 진짜 웃음이 마음에 걸렸다. 차수민은 덮어 왔던 그 몇 가지 진실을 왜 이제 드러내려고 하는 걸까. 어쩌면.
어쩌면 나를 조금은 신뢰하게 된 건 아닐까?
내 불경스러운 생각을 눈치라도 챈 듯 조용하던 이민혁이 입을 열었다.
“듣고 싶은 말이라도 있어요? 차수민한테.”
“듣긴, 뭘. 그냥 자초지종이라든지 뭐가 됐든 얘기해 주겠지.”
이렇게 숨겨 와서 미안하다. 하지만 이젠 네게 털어놓고 싶다, 따위의 말을 떠올리며 눈을 깜빡였다. 어느새 차수민의 바운더리 안에 속하게 된 거라면 그런 말을 해 주지 않을까. 만일 그렇다면 나는 그를 용서할 생각이었다.
“어떻게 보면 깡패인 거 숨기고 속인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화 안 나요?”
“너도 속였잖아, 인마. 나라도 숨겼겠다.”
그런 건 화 안 나. 원래 지랄 맞았잖아. 그 성질머리 더러운 놈이 깡패가 아니면 서운했을지도. 농담 따먹기를 할 정도로 기분이 올라왔다. 실은 나는 기대하고 있다. 차수민이 내게 마음을 터놓기 시작했다고 믿고 싶어졌다.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지금까지 속여 온 게 대수인가 싶을 정도로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설렘이 차올랐다.
마당을 가로지르는 긴 마루를 지나자 서양식 내부 인테리어를 한 방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몇 개의 코너를 지나 오피스텔처럼 꾸며 놓은 방 앞에 도달했다. 조금 열린 문밖으로 두 사람의 목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냥 처리하는 편이 후사에도 탈 없지 않을까 싶은데요.”
차수민의 목소리였다. 한결같은 새초롬한 목소리인데 어쩐지 생소했다. 처음 듣는 것처럼. 낯선 이질감에 머뭇거리자, 이민혁이 대신 문을 똑똑 두드렸다.
“네, 그럼 그렇게 진행하겠습니다.”
“그래요. 아, 들어와.”
직무 중이었는지 책상 위에 서류가 가득했다. 심각한 얼굴로 걸쳐 쓴 안경을 만지작거리는 차수민이 보였다. 고작 하루 만에 다시 본 이 얼굴이 이렇게 반가울 줄은 몰랐다. 강아지처럼 뛰어 들어가 총알처럼 하고 싶었던 말을 쏟아 내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차수민의 앞에는 낮에 보았던 차수민의 가짜 엄마가 있었다. 얼굴을 들이밀며 으름장을 놓던 도깨비 같은 실장님 말이다. 나를 발견한 실장이 자리를 정리했다.
“그럼, 아들? 엄마 가 볼게. 친구랑 식사 맛있게 하고.”
아직 역할극이 이어지는 중인지 그녀는 엄마 가면을 뒤집어썼다. 인자하게 미소 짓는 얼굴을 보니 오금이 저렸다. 그러나 그녀는 차수민을 지나 내 쪽으로 오면서 표정을 확 굳혔다. 그리고 본인 턱 아래에 손날을 갖다 대고 흔들었다. 그 의미는 명백했다. ‘말하면, 죽는다?’
“그럼 저희는 가 볼게요.”
이민혁이 무심하게 내던지곤 문을 닫아 버렸다.
세상과 단절된 듯 조용하기만 한 이 공간에 차수민과 나 둘만 남겨졌다. 불편한 정적이 흘렀다. 등에서 땀이 흘렀다. 나는 잘못한 거 하나 없는데. 오히려 어쩔 줄 몰라 해야 할 쪽은 저쪽 아닌가.
그러나 나는 차수민의 가짜 파파와 가짜 마마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식은땀을 흘리며 뚝딱거렸고 차수민은 그런 내 꼴을 지긋이 지켜볼 뿐이었다. 나는 아무 말이나 내뱉어야 했다.
“바, 바쁜데 내가 온 거 아냐?”
자기가 먼저 저녁 먹자더니 내가 방해꾼 된 느낌이 들었다. 초대한 사람이 뭐라도 주절대야 하는 거 아니냐고.
차수민은 금방이라도 서류 속에 파묻힐 것처럼 안경도 벗지 않은 상태였다. 안경 쓴 차수민은 고1 때 본 게 마지막인 것 같은데 오랜만에 보니까 귀여웠다. ‘귀엽다’라는 단어가 내 뇌에 떠올랐다는 것을 알아채자마자 나는 다시 식은땀을 흘렸다. 그 모습이 퍽 안쓰러워 보였는지 차수민이 입을 열었다.
“어제 뭐 먹었어? 누나가 맛있는 거 먹였다던데.”
“어, 어제? 회 먹었어. 엄청 잘 먹었어.”
“아 그래? 이런. 오늘 저녁 메뉴도 회일 텐데 겹치네. 밥 먹어야지. 너 점심도 안 했잖아.”
“아냐, 회 좋아. 또 먹어도 돼. 나 점심 안 먹은 거는 어떻게 알고.”
“……어제보다 핼쑥해 보여서.”
“아아. 그렇구나…….”
또 정적이 흘렀다. 나는 책장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와. 책 많다. 오, 서재도 따로 있냐? 네가 언제부터 활자를 읽었다고. 필기하기 싫다고 나 보충 들어가게 시켰던 거 기억나?”
입을 털며 애꿎은 책 한 권을 빼내어 펼쳐 들었다. 그러자 잭나이프 하나가 발등 옆으로 툭 떨어졌다.
“아.”
등줄기가 오싹했다. 조금만 발을 옆으로 두었다면 나이프가 발등에 꽂히는 불상사가 발생할 뻔했다. 책 사이에 고이 꽂아 둔 잭나이프는 자객이 드나들 경우를 대비한 호신용 무기가 분명했다.
“하하……. 책갈피가 참 날카롭구나.”
“응…….”
나만 애쓰지 차수민은 수습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이 새끼 귀찮은 거야 뭐야. 조금 마음이 상하려고 했다. 먼저 나서서 허둥지둥 수습해도 모자랄 판에 차수민은 나와 제대로 눈도 마주치지 않고 창밖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가 창밖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물어 왔다.
“집은 구경했어? 마음에 들어?”
“어. 엄청 크더라. 너 부자면서 왜 만날 나한테 빌붙어서 얻어먹고 다녔냐.”
“지낼 만한 것 같아?”
“어어. 뭐. 근데 나도 언제까지 신세 질 순 없고. 며칠 있다가 가야지. 너도 바쁜데.”
“그렇지. 바빴지. 손님 모셔 놓고. 미안하다.”
미안하다고? 지금 내가 사과를 들은 건가? 차수민으로부터? 차수민을 알고 지낸 몇 년간 전무후무한 일이라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 일었다.
쟤 때문에 줘 터지고 뼈 부러져서 병원 입원했을 때도 못 들어 본 사과를 오늘 들은 것 같다. 충격 다음에는 두려움이었다.
무서웠다. 하루 종일 조폭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어도 무섭지 않았는데 차수민의 사과를 들은 순간부터 무서워졌다. 너무나도 낯선 모습이 당황스러웠다. 우리 둘 사이에 거대한 벽이 새로 지어진 느낌이었다. 혀가 꼬이기 시작했다.
“방학인데 뭐, 뭐 하느라 그렇게 바빴어? 아버지 사업 물려받는다더니 진짜인가 봐.”
“응. 호성파가 영역 확장 중이라 한번 크게 조져 줄 필요가 있어서. 신생 조직이라 겁도 없고 이 바닥 순리를 잘 모르는 것 같아.”
“어?”
“들었잖아.”
차수민이 고개를 돌려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화살에 관통당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번엔 내가 시선을 피했다. 나는 겨우겨우 고개를 숙였다. 그런 내게 차수민이 물어 왔다.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차분한 목소리로.
“정현아, 그래도 나랑 친구 할 거야?”
그야 당연…… 그 말에 고개를 확 들고 입을 떼려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나는 벌린 입을 다물었다. 짧은 침묵 후에 문이 열렸다. 나는 그쪽을 돌아보았다. 요리를 들고 서 있는 사용인은 나도 잘 아는 인간이었다. 지난 학기 일주일에 한 번씩 꼬박꼬박 만났으니까.
갑자기 나타나 강압적인 재능 기부를 하던 험악한 체육관 관장, 장도팔. 칼 피하는 법이나 총상 피해를 줄이는 방법 따위를 알려 주던 의심스러운 유도 선생님. 그리고 나는 그 수업을 차수민과 사이좋게 둘이서 들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로.
그 순간 귓가에 이명이 울렸다. 넘실대던 기대와 설렘이 거짓말처럼 휘발되었다. 나는 본래 하려던 말을 지워 버렸다.
“너! 나한테 할 말이 그것뿐이야? 친구 할 거냐고?”
“이, 이놈이 어디서 도련님한테 큰소리를……!”
성큼성큼 나서는 유도 선생에게 차수민이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소란 피우지 말고 나가.”
곰처럼 다가오던 유도 선생은 차수민의 저지에 눈치를 보더니 문밖으로 퇴장했다. 그가 남기고 간 스끼다시 접시가 나뒹굴었다. 이 방에는 다시 우리 둘만 남겨졌다. 또다시 찾아온 정적을 깨뜨리며 차수민이 물어 왔다.
“화났어?”
그 천진난만한 물음에 나는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화났냐고? 너라면 안 나겠냐?”
그는 알 수 없는 눈동자로 나를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왜 날 속였냐? 왜 말 안 했어? 내 주변에 하나같이 네 사람들 심어 놓고 한마디를 안 해? 내가 그렇게 우스웠냐?”
시선을 피한 차수민이 조금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모든 걸 털어놓을 사이는 아니잖아…….”
거기서 더 피가 솟구쳤던 것 같다. 시발, 일말의 희망조차 안 주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야. 넌 항상 그래. 나 혼자 저 멀리 나아가 있으면 너는 나만 바보 만들어. 너 내 생각 요만큼도 안 해 봤지? 그때도 그랬어. 친구라 생각했던 놈은 나뿐이었고 너는 한마디 언질도 없이 사라져 버렸지. 머리카락 하나 안 남기고. 내가 이해 못 해 줄 거라고 생각한 거야? 내 생각을 해서 말을 안 한 거야, 아니면 나를 그냥 배제한 거야? 재밌었어? 나 가지고 노니까 즐거웠어?”
따발총처럼 쏘아붙이면서도 왜 이렇게 화났는지 알 수 없었다. 이런 내 모습이 낯설었다. 하도 당해서? 조폭이란 정체를 숨겨서? 같은 상황이었다면 나도 그랬을 텐데. 뭐가 이렇게 화나. 항상 안달 나는 내 모습이 바보같이 느껴져서? 우리가 이런 것까지 털어놓을 사이는 아니라는 그 비수 같은 말에 뜨끔해서?
사실은 이런 말을 하려고 남아 있던 게 아니었는데. 물론 그런 말을 들으려고 했던 것도 아니었고.
“친구 하겠냐고? 항상 기다렸던 쪽은 나야. 원할 때 다가와 놓고 제멋대로 떠나 버리고. 기다렸던 쪽은 나였다고.”
그냥 네 입에서 잘 다듬어진 변명거리라도 들어 보려고 했던 건데. 그거면 난 또 바보같이 헤벌쭉 웃으면서 뭐야, 그런 거였어? 말해 줄 수 있는 놈인데.
“너는……!”
나는 하려던 말을 삼켰다. 차수민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살짝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모르겠는 머리통만 보였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아래로 보이는 가지런한 눈썹이 다시 나를 미치게 했다.
나는 그의 작은 얼굴을 큰 손아귀로 감싸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애초에 오는 게 아니었다.
“야. 집에 보내 줘. 갈래.”
그 말에 차수민은 푹 숙였던 고개를 쳐들고 재빨리 내뱉었다.
“싫어.”
“싫다고? 네가 그런 말 할 입장이야?”
“이렇게 가면 다신 나 안 볼 거잖아.”
기분 탓인가 그의 목소리가 어딘가 기어드는 것처럼 들렸다. 평소 같으면 또 마음 약해져서 헤실거렸을 텐데 단단히 화가 나서인지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쪽을 택했다. 차수민이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보내 줄 수는 없어……. 기분 전환 겸 바람이라도 쏘이고 오든가.”
“하. 미쳤냐, 너?”
“안 미쳤거든. 헤까닥 해도 못 보내 주니까 싫으면 계속 집구석에 있든가.”
차수민이 팩 쏘아붙였다. 어쩐지 웬일로 조용히 듣고만 있나 싶었다. 언제나 지 성깔대로 행동하지.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없고. 나는 그냥 차수민을 남겨 두고 걸어 나갔다. 그의 목소리가 뒤통수에 따라붙었다.
“……야. 김정현. 말해 놓을 테니까 가서 저녁 먹어. 점심도 안 먹었잖아.”
나는 대답 대신 쾅 소리가 나게 문을 닫고 나왔다.
차수민의 바운더리 안은 개뿔, 나는 여전히 선 밖의 장난감이었을 뿐이다. 혼자 착각하고 머릿속으로 시나리오까지 그리던 내 모습이 병신 같아서, 그래서 화가 나는 것이다. 걔는 잘못이 없단 걸 안다. 그에게 나는 따까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음에도 기대하던 쪽은 나였다. 나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그래, 다 내가. 전부 나 혼자서만.
‘정현아, 나랑 그래도 친구 할 거야?’
관장이 방해하지 않았더라면, 그 말을 듣는 순간 바보같이 벌떡 일어나 주워 담지 못할 말을 내뱉었을 것이다.
‘당연하지. 그런데 난 친구보다도 너랑…….’
너랑, 너를……. 나는 이를 악물었다. 이젠 휴지 조각만도 못하게 되어 버린 바람이었다.
네가 깡패이든 또라이든 상관 안 해. 나를 따까리 취급하며 마구 굴려도 좋아. 다만 우리 사이를 규정하는 말만 하지 말아 줘. 허황뿐인 이상이라도 좋으니 내 희망을 빼앗지 말아 줘. 이런 것까지 털어놓을 사이는 아니라고? 친구 할 거냐고? 그건 너무 내게 잔인한 제안이었다. 희망 고문조차 하지 못하는.
분노의 원인을 깨달은 순간 맥이 빠졌다. 그렇군. 문제는 나였다. 차수민은 그대로인데 나만 변해 버린 것. 그것이 우리의 본질적 문제이다.
자괴감에 머리를 쥐어뜯으며 빠른 걸음으로 바로 옆 모퉁이를 도는데, 바로 그 유도 관장과 부딪혔다. 멀뚱히 서서 방 안의 일을 염탐했던 게 분명했다. 시발. 불난 데 부채질하나. 뭘 엿듣고 있어. 나는 허리를 숙이고 바닥에 나뒹구는 유도 선생을 일으켜 세웠다.
“저기요. 앞으로 차수민 따라다닌답시고 내 주변에서 얼쩡거리지 마요. 차수민이랑 가까운 사이도 아니고 앞으로도 볼 일 없을 테니까.”
“이놈의 새끼가 어디다 대고 명령질…….”
나는 주먹을 세차게 벽에 꽂았다. 귓가에 들린 굉음에 짭관장은 좀 놀란 것 같았다.
“꺼지라고. 요.”
가짜 부모, 가짜 개인사, 가짜 후배, 가짜 유도 선생까지는 괜찮았다. 그치만 나도 가짜라는 사실은.
알고 싶지 않았던 감정이 꿈틀댔다. 얼른 이곳에서 나가야 해. 나는 잰걸음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