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따까리 2권
차수민 외전 2
한동안 헤실헤실 웃고 다녔던 수민은 요즘 심기가 불편했다. 물론 헤실거리며 웃고 다녔다는 것은, 오랜 시간 동안 수민의 곁에서 그를 지켜봐 온 조직원들만 알 수 있는 변화였다. 아주 약간 올라간 입꼬리가 그랬으니까.
‘우리 예전으로 돌아가자. 섹스, 없었던 일로 할 테니까…….’
비굴할 정도로 빌었던 때가 엊그제 같았다. 충동적으로 그와 몸을 섞고 나서 어쩐지 후회만 가득해 보이던 그의 얼굴을 보자 혀라도 깨물고 싶었다. 처음엔 분노였다.
내게 어떤 의미였는데, 너는 그냥 지워야 할 실수였어?
그다음으로는 자책감과 후회가 물밀 듯이 밀려왔다. 시발, 내가 왜 그랬을까. 받지 않는 통화음에 속이 탔다. 와, 김정현. 진짜 후회되나 봐. 그래, 되돌리고 싶겠지. 걔한테 난 평탄한 인생에 갑자기 끼어들어 부스럼이나 긁어놓는 인간이겠지. 인생 최대의 실수였을 것이다, 김정현에겐.
……그런 건 아무래도 좋으니까 제발 안 보겠다는 말은 말아 줘.
다시는 내 얼굴을 보지 않겠다고 하면 어쩌지. 몇 번이고 문자를 썼다가 지웠다. 강제로 찾아갈까 하다가 조금은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 참았다.
나 버리지 마. 내가 6년간 어떻게 기다렸는데. 부스럼이라도 긁어 보려고 어떤 지랄을 떨었는데. 울먹여 봤자 그는 모를 일이었다. 쏟아지는 상실감으로 식음을 전폐하던 차수민을 결국 김정현이 구원해 냈다.
‘멋대로 연락 씹어서 미안해. 밥은 먹었어? 안 먹었으면 같이 먹을까?’
비록 예전과 같은 관계였지만 좋았다. 이렇게라도 너를 불러내고 얘기할 수 있어서. 김정현은 예전과 달리 빚진 거 하나 없는 입장이었지만 그래도 이 주종 관계에 꼬박꼬박 응해 주었다. 억지로 만들어 낸 우연에 바보같이 속아 주었다. 바보. 김정현이 너무 바보같이 착한 게 문제였다. 그래서 수민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기대하기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진도가 너무 안 나가.”
스킨십이라곤 김정현의 안위가 걱정되어 붙여 놓은, 장도팔의 유도 수업에서 서로 옷깃이 스치는 정도가 다였다. 김정현과 매일 붙어 다녔지만 정말 친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관계. 슬슬 짜증이 나고 있었다.
괜히 심통이 날 때면 담배 심부름을 시키곤 했다. 너는 내가 폐암으로 죽어도 눈 하나 깜빡 안 할 거지. 화가 나서 더 뻑뻑 피워 댔다.
첫 섹스의 기억이 이렇게 선명한데, 정말로 없었던 일이 되어 버렸다. 허. 차수민은 헛웃음을 삼켰다. 그를 아는 사람들이 이 꼬락서니를 보게 된다면 과연 이 이빨 빠진 호랑이가 차수민이 맞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이만큼 참은 게 대단할 정도로, 차수민은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자꾸 김정현에게는 마음대로 되지 않고 있었다. 속마음을 숨긴 채 틱틱거리고, 으르렁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노빠꾸로 직진해 볼까 생각한 적은 수도 없이 많았으나, 한 번도 시행해 본 적이 없었다. 뱃가죽을 쑤시는 칼날 따위는 무섭지 않아도 김정현의 입술에서 거절의 대답이 나오는 건 무서웠다. 그를 만난 이후로 수민은 겁쟁이가 되어 가고 있었다.
“답답해, 시발.”
차수민이 담배 연기를 깊숙이 들이마셨다. 주말엔 곧 죽어도 김정현을 협박해 약속을 만들어 내던 그였지만, 이번에는 어쩐지 심란해 본가에서 주말을 보낼 생각이었다. 나는 지금도 네 생각을 하는데, 문자 하나 없다. 개새끼.
“그래서 그때 그 여자랑은 잘되어 가냐? 너 그 누님 싫어했잖아. 만날 피해 다니더니.”
“그게, 몸 정이 무섭더라고요. 몇 번 같이 뒹굴었다고 글쎄, 마음이 생깁디다요. 자꾸 생각나고 그래요.”
담배를 태우던 수민은 기둥에 몸을 붙인 채 두 조직원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현재 상황에서 차수민의 구미를 끄는 주제였다. 몸 정이라…….
“나 참. 그렇게 안 맞더니만 신기하네. 진짜 몸 정이란 게 있나 봐? 내가 꼰대인지 한 번 잔다고 고새 정이 붙는다는 게 참 이해가 안 돼.”
“형님, 이건 겪어 봐야 압니다. 몸 가면 마음이 간다고, 진짜 그래요. 한 번 깔짝 뒹구는 건 뭐 엔조이죠. 그래도 몇 번은 살 부딪히고 서로의 온기를 느껴 줘야, 딱! 그리워지기 시작하거든요. 그러니까……. 헉, 도련님!”
“어, 언제부터 여기 계셨습니까?”
두 사람은 외설을 나누다 조카에게 걸린 삼촌마냥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수민이 손을 휘저었다.
“아냐. 나 신경 쓰지 말고 얘기들 나눠.”
그러니까 선 섹스 후 연애라는 거지. 후회가 어린 김정현의 눈동자를 떠올림과 동시에 담뱃재가 뚝 떨어졌다. 그래, 한 번은 애들 장난도 아니고, 몇 번은 시도해 봐야지 뭐라도 되지 않겠어. 차수민의 눈이 형형해졌다.
“뭐? 어디를 나가?”
“미팅이요. T 대 간호학과랑.”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김정현이 미팅을 한단 얘기까지 들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자에 미쳐서는, 사람 빡돌게. 손을 쓰는 것도 지겨웠다. 정말 눈 딱 감고 한 번 더 자 버릴까. 몸 정이든, 연민이든 들어 버리게.
자존심 빼면 시체였던 차수민이 이렇게 초라해지다니, 김정현은 정말 고단수였다. 싱글벙글 무해한 얼굴로 자꾸만 차수민을 말려 죽였다. 수민이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래, 미팅이든 소개팅이든 어디 한번 가 봐. 지옥을 보여 줄 테니까.
“아, 정말 잘생기셨다.”
“그러게. 소문대로 멋있으시네요.”
그렇게 따라 나온 자리에서 수민은 김정현에게 정신이 팔려 있는 여자애들을 내치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저기, 정현 씨…….”
“자! 한잔 드릴게요. 우리, 짠 할까요?”
가부키쵸에서 어깨너머로 배웠던 화려한 기술도 써 가며 이름 모를 여자들의 비위를 맞추고 있자니 화가 치밀었다. 뭣도 모르고 시시덕거리는 김정현의 잘난 얼굴을 보자 불안감이 스쳤다. 벌컥벌컥 속 타는 마음에 술을 들이부었다.
초조했다. 오늘이 날이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오늘, 몸 정인지 뭔지 그거 한번 해 보자.
“저, 토할 거 같아요……. 우우웩.”
수민은 한껏 멋 부리고 나왔을 정현의 가슴팍에 이물질이 흐르는 꼴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좋아. 이제 벗을 수밖에 없겠군. 호텔로 직행하면 속 보이고. 근처에 괜찮은 모텔이 있었나?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조급한 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김정현은 친절하게 여자애들을 한 명 한 명 손수 배웅해 보냈다. 얼씨구.
“김정현, 내가 할 테니까 저기 모텔이라도 가 있어.”
이러다 거사는 꿈도 꾸지 못할 것 같아 그를 먼저 모텔로 올려 보냈다. 답지 않게 이성적 사고가 잘 안 되고 있었다. 홧김에 퍼마셨던 술기운이 오르는 듯했다. 차수민은 거의 집착 수준으로 김정현을 모텔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곯아떨어졌다. 원대한 계획엔 없던 일이었다.
“으음.”
살짝 올라오는 숙취와 함께 정신이 들었을 때는 김정현이 답답하게 몸뚱이를 조이던 셔츠를 벗겨 내고 있었다. 얼굴 위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싸구려 샤워코롱 향을 뚫고 김정현의 기분 좋은 체취가 훅 끼쳤다.
확 덮쳐 버릴까 생각했지만 몸이 물먹은 솜처럼 축축 늘어졌다. 너무 많이 마셨다. 네가 빡치게 해서 그래. 원랜 이 정도로 취하지 않는데.
“옷 벗고 자라니까…….”
셔츠 자락을 꼼지락대던 그의 손가락이 유두를 스치고 지나갔다. 명백히 고의적인 움직임이었다. 놀란 수민은 몸을 굳혔다.
가만히 눈을 감고 있으니 가슴팍을 웃돌던 손이 스멀스멀 위로 올라왔다. 반쯤 벌어진 입안으로 굵은 마디가 들어왔다. 손가락은 타액을 묻혀 가며 수민의 가지런한 치열을 휘젓고 있었다. 순간 술이 확 깼다. 이놈 봐라……?
지금 뭐 하는 거지. 너무나도 노골적이고 야릇한 손놀림이었다. 소주로 인해 잠깐 활동을 멈추었던 뇌가 다시 가동되었다.
기대감. 그동안 차수민을 죽였다가 살렸다가 끈질기게 괴롭혀 댔던 그 망할 놈의 기대감이 다시 차올랐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으응.”
“나, 나는 네가 불편할까 봐 옷, 벗고 자라고…….”
몸을 뒤척이자, 김정현이 당황하며 파들짝 몸을 일으켰다. 수민은 빨갛게 물든 귓불을 들키지 않기 위해 베개에 푹 얼굴을 묻었다. 판도 깔아 줬겠다, 어디 한번 실현시켜 봐. 내 기대감을.
“불편하니까…… 마, 저……. 벗겨 봐…….”
연기까지 해 가며 욕정에 물든 거친 손이 바지를 벗겨 내길 기다렸지만, 대신 따듯한 손바닥이 머리카락을 어루만질 뿐이었다. 강아지를 쓰다듬듯 큰 손이 머리를 감싸 왔다. 수민은 가만히 눈을 감고 그 온기를 느끼고 있었다. 그가 속삭였다.
“됐다. 편히 자.”
불이 꺼졌다. 고요한 어둠 속, 아무런 터치도 이어지지 않았다. 이게, 끝?
차수민은 벌떡 몸을 일으키고 싶은 충동을 참았다. 시발, 이게 다야? 이게 다냐고. 또 나 혼자 기대하고 나 혼자 실망하지. 항상 그럴듯하게 대해서 사람 착각이나 하게 만들고. 착한 놈들은 이런 게 문제야.
약이 올라 씩씩거리는데, 작은 숨소리와 함께 바스락 소리가 들렸다.
“흐읏.”
조용한 적막, 무엇인가 마찰하는 듯한 소리가 반복해서 들려왔다. 모텔의 싸구려 침대가 가볍게 흔들렸다. 수민은 숨을 멈추었다.
“하아, 차수…….”
속삭이듯 가쁜 숨이 방 안을 메웠다. 정형적이고 반복적이던 흔들림은 점차 거세졌다. 폭풍에 흔들리는 배처럼 매트릭스가 삐걱삐걱 움직였다.
차수민은 눈을 떠 어둠으로 가득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시야가 어두우니 청각이 예민하게 날이 섰다. 마찰하는 옷감의 재질과 조급한 손놀림이 그려질 정도로 방 안은 조용했다. 그가 내뱉는 숨결이 자장가같이 느껴졌다. 거짓말처럼, 요동치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김정현이 수음을 한다. 나를 바로 곁에 두고.
“흐으. 하아…….”
사내의 불규칙한 숨소리는 흐느낌과 닮아 있었다. 수민은 고개를 돌렸다. 이 어둠 속에 김정현의 넓은 등이 있을 것이다.
손을 뻗어 자잘하게 박힌 근육을 어루만지고 싶은 충동을 참아 냈다. 흔들리는 팔뚝과 꿀렁이는 등 근육. 그리고 나를 생각하는 머리통. 모두 하나하나 손을 대 만져 보고 싶었다.
이게 현실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꿈일지도 몰라. 김정현은 이미 집으로 가 버리고 나 혼자 침대 위에 덩그러니 누워서 슬픈 꿈을 꾸고 있는 걸지도 몰라.
“읏.”
그가 몸을 떨었다. 움직임으로 인한 진동이 수민이 누운 자리까지 전달되었다. 삐걱거림과 젖은 숨, 밀려드는 온기. 모든 것이 생생했다. 차수민이 눈을 깜빡거렸다. 생생해.
사정을 끝낸 김정현이 긴 한숨을 토해 내더니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어딘가 화가 난 것처럼 거친 동작이었다. 차수민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였다간 심장이 터져서 죽어 버릴지도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떠난 자리가 찬 공기에 식어 버렸을 때, 비로소 수민은 몸을 일으켜 더듬더듬 불을 켰다.
수민의 검은색 셔츠가 없었다.
“그렇구나…….”
차수민이 중얼거렸다. 김정현이 오늘 마신 거라곤 사이다가 전부란 걸 떠올렸을 땐, 이미 아침이 밝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