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4 촉촉촉 스며드는 (4/15)

CHAPTER 4

촉촉촉 스며드는

연락 씹으면 죽여 버리겠다는 그의 말은 이제 무섭지 않았다. 나도 이제 성인이고 덩치도 더 자랐다. 운동도 계속해 왔으니 종잇장 같은 차수민쯤은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오는 연락을 다 씹었다. 방금도 벨 소리가 울리다 멎었다. 무시무시한 집착. 제멋대로 소름이 돋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선배.”

“억. 깜짝이야.”

의아한 얼굴을 한 이민혁이 서 있었다.

“왜 이렇게 놀라요? 쫓기는 사람처럼.”

자판기 커피 한 잔이 내밀어졌다. 휴게실에서 막 뽑아낸 따끈한 싸구려 커피였다. 나는 무안하게 웃으며 받아 들었다.

“요 며칠간 쫓기는 사람이긴 했지…….”

혹여나 마주칠세라 수업 마치면 곧장 집으로 향했고 아는 사람만 안다는 테니스 코트 뒤 쪽문이 전용 통로가 되었다. 경영대 쪽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다행히 법대와 등지고 있어 공유하는 동선이 적었다. 혼자 첩보물을 찍고 있는 기분이었다.

“발표를 유진이가 하기로 했으니까 선배랑 저랑 정리해서 일요일까지 넘겨주면 될 것 같은데 어떠세요?”

“어 그래.”

“그럼 피피티는 제가 만들 테니까 자료 조사만 부탁할게요. 괜찮으시죠? ……선배. 듣고 있어요?”

“야. 하나만 물어보자. 내가 아는 애 얘긴데 네 일이라 가정하고 들어 봐.”

“네?”

이민혁이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 보세요.”

“옛날에 알던 친구를 어쩌다 우연히 만났어. 근데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가타부타 얘기할 것도 없이 술 먹고 분위기를 타 버린 거야. 둘 다 제정신이 아니었던 거지. 깨어나 보니 둘 다 누드야. 너라면 이제 그 친구를 어떻게 대하겠어?”

“으음, 그러니까 술 먹고 친구랑 잤는데 어쩔 거냐, 이 얘기죠?”

자칭 연애 상담 전문인 민혁은 내가 며칠째 고민하던 상황을 짧게 끊어 냈다. 그러곤 물었다.

“그쪽 반응은 어떤데요?”

“없던 일로 하고 친구로 지내자고 한대.”

“그럼 그렇게 하면 되죠. 솔직히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건 두 가지잖아요. 맘 있어서 사귀거나, 없던 일로 하거나.”

사귀어? 사귄다고? 나는 창백해진 얼굴을 비볐다.

“앞으로 안 보는 건?”

“하하. 애도 아니고 실수로 잤다고 관계를 끊는다고요? 선배 지인도 참 웃겨요. 그리고 여자 쪽에서 쌩 까면 쌩 깠지 왜 남자 쪽에서 난리래요? 잃을 것도 없으면서.”

그게, 둘 다 남자야……. 만들어 낸 투명 지인을 비난하고 있는 민혁에게 쉽사리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이민혁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고. 쿨한 관점으로 본다면 내 꼴이 한심하긴 했다. 몸 한번 맞댔다고 이 난리라니.

……사실, 택시에서의 일이 자꾸만 리플레이되고 있었다.

‘그냥 친구로 지내자고.’

예전 같았으면 명령으로 느껴졌어야 하는 그 말이 어쩐지 부탁같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렇게 느끼는 내가 쓰레기 같았다. 감히 내가 그런 불경스러운 생각을 하다니. 하늘 같은 안하무인 차수민이 그런 부탁을 할 리가 없다. 있을 리가 없는 일이었다. 내가 그렇게 느낀 건 아마도…….

아마도?

“그리고 취했다고 마음도 없는 사람이랑 뒹굴진 않잖아요. 둘이 뭔가 있었으니 했겠죠. 상대만 좋다 하면 이 기회에 잘해 봐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이민혁은 개의치 않고 남은 커피를 휘휘 휘저었다.

“왜 선배가 난리람? 여튼 간단하게 생각하시라고 전해 줘요. 복잡할 필요 있나. 상대도 간단하게 해결하고 싶어 하는데.”

“……알겠어. 꼭 전해 줄게.”

간단하게 생각하란 말이지. 그러나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했다. 말이 쉽지. 복잡한 일이 어떻게 간단해진단 말인가. 침울한 내게 갑자기 질문이 던져졌다.

“그러는 선배는 어떻게 생각하는데요?”

“나? 왜, 왜 물어?”

“선배 친구라면서요.”

“아, 그렇지. 나는…….”

한숨이 푹 나왔다. 나는 구 차수민 현 이수민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친구? 동창? 아니면……. 아니면 뭐. 이민혁이 말했다. 취했다고 마음도 없는 사람이랑 뒹굴지 않는다고. 섹스가 발 걸려 넘어지는 것처럼 취기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던가.

그의 구멍에 쑤셔 넣은 건 온전히 내 선택이었다. 그 순간에는 다른 자잘한 것들은 하나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저 그의 붉은 입술을 핥아 보고 싶었다. 성욕의 문제였을까 아니면.

아니면 뭐!

“나 역시 내 지인이 쓰레기라고…… 생각해. 저쪽에서 친구로 지내고 싶다는데 자기가 왜 유난이냐고. 상대의 감정이 중요한 거 아니겠어? 자기 혼자 왜 우주로 갔다가 안드로메다로 갔다가 땅에 처박히고 시나리오를 쓰고 있냐고. 그렇잖아. 이 애매한 감정을 결론짓지도 못하면서.”

종이컵 모서리를 잘근잘근 씹어 가며 혼잣말을 웅얼거렸다. 대부분 나 자신을 향한 말이었다. 착한 민혁이는 그것조차 들어 주며 끄덕이고 있었다.

“야. 김정현. 누가 너 찾아.”

자기 비난과 하소연을 늘어놓고 있는데, 문이 벌컥 열렸다. 갑작스럽게 끼어든 동기가 창밖을 가리켰다.

“저기 입구에 서 있겠대. 빨리 나오라는데?”

누군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나는 데이터 값이 미리 입력된 기계처럼,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을 바닥에 냅다 던졌다. 퍽, 액정이 깨지는 소리가 났다. 민혁의 입이 벌어졌다.

“이게 무슨 일이죠……?”

무슨 짓이냐며 뜯어말리는 소리는 들리지도 않았다. 액정이 깨져 빛이 허옇게 새는 폰을 집어 들고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심정으로 일어서 문을 나섰다. 마왕을 독대하러 가는 용사가 된 기분이었다.

“차수민.”

벚나무 아래 그가 서 있었다. 연분홍색 벚꽃과 새까만 그의 머리칼은 기묘한 대조를 이루었다.

바람처럼,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가 고개를 돌렸다. 영화는 푸른 필터를 쓴 색감이 아름다운 청춘 성장 영화인 것 같기도 했고, 언제 무시무시한 것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공포 영화 같기도 했다. 부디 전자이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가 입술을 열기 전에 나는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

“……왜 연락 안 받았어. 쌩 까면 죽는다 했지.”

“폰 망가져서……. 봐 봐. 안 되잖아.”

너덜한 핸드폰을 보여 주며 슬쩍 눈치를 보았다. 분명 빡돌아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못 보던 사이에 분노를 다스리는 법을 배운 건지 생각보다 잠잠했다. 그래도 반들한 이마에 실핏줄 하나가 솟아 있었다. 눈이 마주치기 전에 얼른 시선을 내렸다.

“밥은 먹었어……?”

“아니.”

“그럼 같이 먹을까?”

“네가 사. 오늘부터 종강까지 모든 심부름도 다 네가 해. 내 과제도 네가 하고, 교수님 면담도 네가 가. 알겠어?”

“으응… 알겠어.”

내 저자세에 차수민은 뾰족했던 뿔이 가라앉는 듯했다. 그는 분노를 터뜨리는 대신 부루퉁한 얼굴로 툴툴거리고 있었다.

돌아온 익숙한 풍경에 마음이 가벼워졌다. 난 속도 없는 놈이다. 노예근성이 다시 스멀스멀 고개를 들었다. 복잡한 감정에 머리를 싸매 쥐고 고민하는 것보단 차라리 종노릇하는 편이 마음이 편했다. 머슴으로 돌아온 나는 심기 불편한 마님의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 갖은 알랑방귀를 뀌기로 했다.

“뭐 먹으러 갈래?”

“삼겹살 빼고.”

“저 앞에 곱창집 생겼는데 진짜 맛있대. 어때?”

“곱창?”

“싫어? 곱창에 소주 잘 어울리지 않아?”

힐끔힐끔 수민의 눈치를 보며 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고등학생 때처럼 나란히 걷고 있었다. 나보다 한참은 작은 머리통이 뚱하게 흔들렸다. 사브작 노을이 내려앉았다.

“어울리긴 하지. 넌 곱창만 먹어. 넌 앞으로 술 처마시면 인간이 아니다.”

“안 마실 거거든! 앞으로 금주할 거거든…….”

이러면 된 거 아닌가. 굳이 복잡하게 따질 필요 있나. 관계라는 것이 꼭 세밀하게 분류되어야 할 필요가 있냐는 말이다. 훼까닥 돌아서 같이 뒹굴긴 했지만, 편하게 곱창에 소주 한잔하는 사이가 될 수도 있지.

우리의 관계를 뭐라 정의해야 할지는 고등학생 때부터 쭉 어려운 문제로 남아 있었다. 이민혁의 말대로 어렵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굳이 이름을 붙여야 한다면 마음 편히 주종 관계 하련다. 피자 빵에 메론 빵을 갖다 바치던 그때처럼.

그렇게 나의 따까리 인생 제2막이 시작되었다.

✲ ✲ ✲

“안녕하세요, 김정현입니다.”

“체격 좋네. 운동해 본 경험 있어요?”

“운동은 킥복싱 4년 정도 했고요. 어릴 때부터 축구를 좋아해서 현재는 중앙 축구동아리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과는?”

“법학과요. 이번에 복학했어요.”

“법학과? 오. 우리 막내도 법학과라 했는데. 정일이 알아요? 한정일?”

“와, 잘생겼다. 윤주 누나가 좋아하겠네. 근데 우리 동아리 왜 가입하는 거예요? 우리야 신입 들어오면 감산데, 정현 씨는 딱히 유도에 별 관심 없어 보이고.”

부장이 가입 신청서를 훑었다. 그의 옆에는 간부급으로 보이는 남녀가 함께 앉아 있었다. 면접 아닌 면접이었다.

부장의 말이 옳았다. 내 신청서의 지원 동기란은 휑하니 비어 있었다. 사실대로 말해야 하나 고민스러웠다. 네, 유도 좆도 관심 없어요. 억지로 등 떠밀려서 지원했어요.

“뭐, 배우고 싶나 보지……요.”

옆에서 심드렁히 지켜보던 수민이 끼어들었다. 내 등을 있는 힘껏 떠미는 주인공이었다. 지금은 유도 동아리에 불과하지만 밀리고 밀리다 보면 끝에는 낭떠러지가 존재할까 무섭다.

그날 이후, 내가 굽히고 들어가기가 무섭게 수민은 되도 않는 요구들을 하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가 이거였다.

‘격투기? 왜?’

‘약해 빠져서 안 되겠어. 안쓰러워서 그래. 운동 배워.’

‘무슨. 너야말로 한 대 치면 부러질 것 같아서는. 내 몸 안 보여? 웬만한 사람들은 나같이 커다란 놈 잘 건드리지도 않아요. 그리고 나 킥복싱만 몇 년 했어. 너한테 당하고 살면서 이를 갈고 배웠다고!’

‘잠깐 일어나 봐.’

어리둥절해하며 일어서자 예고 없이 정강이가 걷어차였다. 억, 외마디 소리도 내지 못하고 나는 낙엽처럼 쓰러졌다.

‘봐. 백날 천날 잽만 날려 대면 뭐 해. 하체가 부실하잖아.’

누구나 무방비로 걷어차이면 이런 꼴일 거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 눈물을 삼키며 그의 계획에 몸을 맡겼다.

“유도가 그나마 쓸 만한 것 같아서요. 이 친구, 스토커에 시달리고 있거든요.”

내가? 처음 듣는 내 근황에 고개를 돌려 눈을 마주치자 진지한 끄덕임이 돌아왔다. 곤란하다는 듯 선배 하나가 졸지에 스토킹 피해자가 된 내 쪽을 흘끔 쳐다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면 경찰에 신고하시는 편이…… 여기는 도장도 아니고 동아리거든요.”

“이 친구를 좀 보세요. 겉은 꽤 그럴듯해요. 봐요, 키는 멀대같이 크죠, 어깨도 딱 벌어지고 근육도 단단해요. 허우대가 아주 말짱한 이런 사람이 스토킹 당한다고 신고하면 경찰에서 뭐라 할 것 같습니까? 바보 취급밖에 더 하겠어요?”

졸지에 거구의 스토킹 피해자에 바보가 된 나는 달변을 토하던 수민 덕분에 우여곡절 끝에 동아리 가입에 성공했다.

“근데 너는 왜 같이 가입한 거야? 나 창피할까 봐?”

내 물음에 무슨 개소리를 하냐는 표정으로 수민이 말했다.

“아니? 술 마실 사람이 필요해서. 너는 알코올 쓰레기라 쓸모가 없잖아.”

신입 환영회는 운동 동아리답게 셀 수 없는 소주병의 향연으로 치러졌다. 차수민은 간만에 신난 표정이었다. 나와의 술자리에서는 볼 수 없던 얼굴이었다. 알코올 분해 효소가 적은 게 내 탓이냐고……. 간땡이라도 강화시키면 좀 나아질까 싶어 간에 좋은 영양제를 찾아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 이 노예근성. 같이 안 마셔 주면 되는 거잖아.

애꿎은 환타를 꿀꺽꿀꺽 삼키며 붉게 상기된 차수민의 뺨을 훔쳐보았다. 우락부락한 유도부원들 사이에 낑겨 있으니 더 작아 보였다.

어쩜 이리 피부가 좋냐는 여자부원의 질문에 살짝 풀린 눈으로 선물 받았다는 로션을 설명하는 중이었다. 여자랑 사이좋게 말하는 그 꼴에 어쩐지 부아가 치밀어 자리를 비집고 들어앉았다.

“비켜 봐. 나 앉게.”

“아. 정현 씨. 법학과라고 했죠?”

“예? 예에…… 왜요?”

“그럼 법예인이 정현 씨였나? 지금 보니까 옆모습이 똑같네. 이거 봐 봐요.”

부원이 내민 핸드폰 화면에는 학교 커뮤니티 페이지가 열려 있었다. 몇 장의 뒷모습과 흐릿한 옆모습이 찍힌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언뜻 보면 몰랐을 것도 같은데 까만 후드티와 브랜드 로고가 박힌 캡 모자가 낯이 익었다. 차수민이랑 곱창 먹으러 갈 때 입은 옷이었다.

“법학과 연예인. 여자 친구 있나요? 성함 아시는 분. 우리 학교에 이런 훈남이 있다니. 대애박.”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수민이 게시글의 댓글을 읽었다. 술 냄새가 확 끼쳐 눈을 찌푸리자 뚱한 말투가 귀를 두드렸다.

“김정현 유명하네. 좋겠다.”

“그쵸? 이 사진 정현 씨 맞죠? 우와, 신기하네. 아싸, 이걸로 동아리 홍보해야겠다.”

“어쩐지. 후광이 비치더라. 잘생긴 신입 둘 들어왔다고 선배들이 정말 좋아해. 여자부원들 많이 들어오겠다고. 다들 기대 중이니까 절대 나가면 안 된다?”

나는 왁자지껄한 말소리 속에서 꿍얼대는 한 사람의 목소리를 캐치해 냈다. 수민은 혼자만 기분이 팍 상해 혼잣말을 곱씹으며 접시를 뒤적이고 있었다. 자기 혼자 여자부원이랑 속닥거리더니 전세 역전이다. 부럽냐, 임마. 놀리고 싶은 마음에 은근하게 속삭였다.

“야. 내가 잘생겼냐?”

네가 무슨. 개소리 말아. 여자들 눈이 다 삐었어. 따위의 폭언을 서슴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예상을 깨고 술 때문에 빨개진 얼굴로 수민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 어…… 조금……?”

“갑자기 왜 그러냐. 거참.”

평소와 다른 반응에 민망해서 시선을 돌렸다. 순간 6년 전의 기억이 안개처럼 스며들었다. 지금처럼 술기운에 상기된 얼굴로 가만히 뺨을 내주던 소년.

‘사내자식이 좀 예쁘게 생겼다.’

‘나도 알아. 내 어디가 예쁜데?’

‘눈썹도, 눈도……. 그리고,’

입술.

“그만 먹어라. 네가 아저씨야?”

셀프 추억 공격은 아무리 당해도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또라이 김정현. 열이 얼굴에 확 올라 애꿎은 수민에게 시비를 걸었다.

그의 입술에 닿았던 술잔이 떨어졌다. 빼앗은 소주잔에 오렌지 맛 환타를 콸콸 채웠다. 시끄러운 함성과 왁자지껄한 고함이 빈 공간을 메웠다. 모두의 얼굴이 흥으로 붉게 무르익었다.

모두 다 붉은 얼굴이라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 ✲

“어…… 여러분. 강사님이 오셨습니다. 어, 옆 지역 체육관 관장님이라고 하시네요. 재능 기부 형태로 무료 강습해 주신다고 하니까 감사한 마음으로 임합시다. 자, 박수로 맞아 주세요.”

“반갑다. 나는 장도팔. 옆 동네 체육관 관장이다. 서로 잘해 보자.”

동아리 부장의 소개에 깔짝이는 박수 소리가 조용하게 울렸다.

수업을 마치자마자 헐레벌떡 뛰어온 동아리 방에는 체육관으로 모이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흘러나오는 욕설을 주워 삼켰다.

언덕을 올라 구석탱이에 있는 한율관에 도착하자 애초에 공지를 받은 듯한 수민이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채로 멀뚱히 서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 험상궂은 아저씨와 어쩐지 기가 죽은 듯한 부원들이 보였다.

“너희 운 진짜 좋다. 들어오자마자 강사님이 생겼네. 열심히 배워, 이놈들아.”

부장의 말에 동의하는 이는 몇 없었다. 관장님이라기엔 그는 의심해 볼 여지가 있는 외모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얼굴에 길게 난 칼자국이 현재는 유도 관장일지 몰라도 과거에 다른 일에 몸담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가능케 했다.

어디서 마주친 듯한 얼굴인데. 아, 차수민과 백만 친구. 6년 전, 친구 없냐는 말 한마디 들었다고 어디서 동네 사람을 다 끌고 왔을 때 봤던 아저씨와 풍기는 분위기가 비슷했다. 한마디로…….

“조폭 같아.”

누군가 속삭였다. 관장도 분명 들었을 테지만 모른 척하기로 마음먹은 것 같았다. 태연하게 수업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관장님, 그럼 오늘은 낙법부터 하나요?”

부장의 말에 단호하게 ‘실전에서 쓸 수 있는 것부터’라는 대답이 들렸다. 체육관은 간간이 배드민턴을 치는 타 동아리생들의 발소리만 들릴 뿐 조용했다.

나는 유도를 잘 몰랐지만 지금 배우는 것이 정통 유도와는 거리가 좀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확실히 실전에서 쓸 수는 있겠네. 실전이라는 게 싸움판이라면 말이야.”

“왜. 다들 잘 따라 하는데. 입 다물고 하란 대로 해.”

수민은 단연 엘리트였다. 유도부원들은 정통 유도라면 모를까 격투기에 가까운 동작을 소화해 내기엔 어색한 감이 있었다. 낙법의 낙 자도 배우지 않고 잡기술부터 가르치고 있으니 따라가기가 어려울 따름이었다.

그중 차수민은 미리 예습이라도 해 온 것처럼 군계일학이었다. 군말 없이 무시무시하게 생긴 관장의 지시에 따르는 수민에게 관장은 무시무시하게 웃어 보였다.

“굿. 아주 잘했어요. 정말이지 탁월하십니다.”

어울리지 않는 극존대에 고개가 갸우뚱 넘어가기도 전에 수민이 내 등을 떠밀었다.

“관장님, 이 친구 좀 봐주세요. 개인 강습이 필요할 것 같아요.”

“어디, 보자.”

수민을 대할 때에는 무서울 정도로 입가에 미소를 띠던 사내의 표정이 나를 보자마자 한순간에 굳었다. 너무 무서워 쭈뼛거리며 뒷걸음질을 치자 억센 손이 팔뚝을 잡아 왔다.

“연습하자. 짐이 되면 안 되니까.”

“네? 짐이요?”

“네 몸 네가 잘 관수하라고. 애꿎은 사람 애먹이지 말고.”

갑작스럽게 짐덩이로 전락한 나는 관장의 표적이 되어 강습 내내 집중 지도를 받았다. 나보다 못 따라가는 사람이 수두룩했음에도 말이다. 관장 어딘가 이상하지 않냐는 의견을 묵살하고 시종일관 긍정적인 사람은 부장과 차수민이었다.

“왜. 도움 되지 않았어?”

“아니, 어떤 관장이 칼 피하는 법을 가르쳐 주냐고.”

“유도 기술을 기초로 한 응용 동작인가 보지. 거참 무료로 배우면서 불만이 많네. 혹시 알아? 나중에 칼 맞을 일 있을지. 뭐든 배워 두면 다 도움이 돼.”

별일 아니라는 듯이 대응하는 수민에게 평범한 대학생이 길 가다 칼빵 맞을 일이 어디 있냐고 묻고 싶었다. 이 괴상한 유도 수업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사랑과 인생] 리포트에는 수민과 매주 술 마시고 심지어 같은 동아리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내용까지 들어갔다. 교수가 완벽하게 좋아할 내용이었지만 나는 소름이 돋았다. 다른 남-남 조는 만나지도 않고 대강 쓰는 것 같던데 우리 보고서만 정성이 듬뿍 들어가 있는 것 같았다. 이성 커플보다도 자주 만나는 거 아니냐고. 이러다가 진짜 오해받는 거 아냐?

“유난이야. 유난. 이 세상에서 너만 그렇게 생각해.”

“지 일 아니라고.”

“너 중간 성적 잘 나왔잖아. 재수강 안 해도 되고 얼마나 좋냐.”

그건 그렇지. 현식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교수는 강의평처럼 동성 커플에게 후했다. 그렇지만 리포트를 핑계로 연애하는 기분이라 찝찝하단 말이야. 그래, 마치 연애하는 기분.

그런 기분이었다.

수업이 파하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근처 안주집으로 향해 노가리를 깠고, 주말에는 당연하다는 듯이 영화관에서 시간을 때웠다. 둘 다 영화광이라는 핑계가 있긴 하지만 남자 둘이서 영화관에 간다는 건 흔한 일이 아니었다. 주로 차수민의 취향대로 유치한 애니메이션을 보고 달달한 팝콘을 씹었다.

공강 시간엔 피시방에서 죽치고 앉아 있었다. 덕분에 그동안 차수민이 나를 배려하여 굉장히 바른 언어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살면서 들어 보지도 못한 살벌한 욕설이 모니터 밖 상대에게 꽂혔다. 하루는 그가 키보드를 거세게 주먹으로 내려치는 바람에 자판이 사방으로 튀어 오르고 모니터가 나갔다. 그 탓에 한동안 나까지 출입금지를 당해야 했다.

엎치락뒤치락 옷깃이 스치는 요상한 유도 수업은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차수민의 작은 체격을 느끼고 옷깃을 부여잡으면서 스치는 비누 냄새를 맡아야 했다. 물론 나뒹구는 쪽은 나였다.

점차 정형화된 패턴이 밀물처럼 흘러오기 시작했다. 조금씩 다가와 발바닥을 간질이던 파도는 이내 차올라 발목에서 찰랑거렸다. 그와 재회한 이후, 어떤 계기로 멈추어 버린 톱니가 드디어 다시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이래도…… 되나?”

그는 내게 ‘따까리’라는 다소 인간적인 칭호를 내려 주었지만 나는 차수민의 로봇이었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로봇은 제 의사 없이 주인이 시키는 대로만 행동하고 반응해야 한다. 그래야 한다. 어느 순간부터 내 스스로가 정한 규율 같은 거였다.

그래야 하는데. 나는 조금 두려워졌다.

만약에, 로봇이 감정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따까리는 따까리로 남아야 하는데, 감히 주인님을 마음에 담으면 어떻게 되는 거냐고.

어느새 내 자취방을 점령한 녀석의 동그란 머리통을 노려보았다. 차수민이 휙 턱을 치켜들며 말할 것만 같았다.

뭘 어떻게 돼. 파멸이지. 영화 못 봤어? 감정이란 걸 맛보게 된 로봇 놈들이 주제넘게도 기어올라서 결국엔 전지전능한 인간들 손에 부서지잖아.

너도 부서질 거야. 로봇을 사랑하는 인간은 없을 테니까. 차수민에게 나는 따까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뭘 봐?”

“너.”

“…….”

“……의 머리에 붙은 먼지 한 톨. 쨘.”

“으, 저리 치워. 심심하면 가서 담배나 사 와.”

“넵. 아이스 블라스트 맞지요?”

“어. 저번처럼 원 붙은 거 사 오지 말고. 그랬다간 담배 대신 네 지갑을 태울 거야.”

“알겠어. 원 붙은 거 말고. 파란 지붕 큰 거. 금방 갔다 올게.”

차수민의 으름장은 삐걱거리는 로봇의 윤활유로 작용해 나는 한걸음에 편의점까지 달려갔다. 아무래도 나는 심부름하기 위해 태어났나 봐. 너무 적성에 잘 맞는다. 졸업하고 취업이 안 되면 차수민에게 오토바이를 배워서 심부름센터에나 취직할까.

“말보로 아이스 블라스트 하나 주세요. 아, 이거 말고요! 파란색 저거. 저번에 이거 주셔서 고대로 갖다줬다가 저 엄청 혼났거든요?”

카운터에서 알바생과 실랑이를 하는데 뒤에서 인기척으로 느껴지던 사람이 계산대에 턱 하고 우유와 라면, 그리고 맥주 한 캔을 올려놓았다. 어울리지 않는 조합에 옆을 보니 모자를 눌러쓴 한수진이 있었다.

“어?”

“김정현? 너 언제부터 담배 피웠냐?”

보아하니 자취방에 먹을 게 다 떨어져 대충 때우려고 어슬렁어슬렁 문밖을 나온 듯했다. 슬리퍼를 질질 끄는 꼬락서니가 그랬다. 한수진을 만나다니 오늘 일진도 참 더럽다.

“야, 순진무구한 김정현이 담배를 시작하고. 뭐가 그렇게 힘들었냐. 남-남 수업? 낄낄.”

어. 그 힘든 남남 수업에서 만난 남자 담배 셔틀 중이거든? 눈빛으로 말하며 빨리 계산을 해치우고 나가려고 했다. 한수진이 덧붙이기 전까진.

“삐졌냐? 하긴. 내가 좀 오래 놀려 먹긴 했지. 재밌는 걸 어떡해? 흠흠. 불쌍한 중생아. 사과의 의미로 누나가 미팅을 잡아 보려고 한다. 어때, 솔깃하냐?”

“미팅? 어디랑……?”

“T대 간호학과. 거기 알바에서 만난 내 친구 있거든. 우리 과에 잘생긴 놈 하나 있다고 들었대. 아, 우쭐해 하지는 말고. 기분 드러우니까. 그나마 반반한 애들 몇 명 모아 봐. 장소는 T대 앞으로 잡는다?”

“야. 기분 나쁘다? 너 왜 내가 당연히 참가한다고 생각하지? 내가 뭐 여자에 미쳐서 만남의 자리 있다 그러면 헤벌쭉 달려가는 놈이냐?”

학기 초면 모를까 지금은 딱히 여자 친구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차수민의 시중을 드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버겁다. 갓 전역했을 때나 소개시켜 주지 이제 와서. 한수진이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에 턱을 반쯤 늘어트렸다.

“와. 네가 미쳤구나. 그래서 안 하겠다고? 마당발 한수진이 직접 주최하는 희대의 미팅을 까시겠다고?”

그렇지만 이 미팅이 일종의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 차수민과 함께 있으면 사소한 거리에도 자꾸만 그 녀석과 함께했던 6년 전의 시간이 펼쳐져 죽을 맛이었다. 타임머신을 탄 것처럼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강제적으로 추억에 젖어야 했다.

그래,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은 일종의 노스텔지어야. 지나간 학창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지. 거기에 차수민이 섞여 들어갔을 뿐이라고.

“아니, 할게. 언제라고?”

지독한 향수병을 몸에서 떼어 내기 위해 미팅에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거기서 잘 맞는 여자를 만나고 그럭저럭 재밌는 연애를 해야지.

현실을 살자, 김정현. 안 그랬다간 점점 커져 버린 노스텔지어에 잠겨서 정말로 심장을 가진 로봇이 되어 버릴지도 몰라. 파멸이야, 파멸. 나는 내 최후를 그리며 몸을 떨었다.

“이 새끼가 사람 놀리나. 이젠 내가 싫어. 하겠습니다, 부디 미천한 저를 미팅에 끼워 주세요. ‘전능하신 수진 님이시여’라고 말해.”

“하겠습니다. 부디 미천한 저를…… 뭐라고? 아, 해 줘. 해 달라고.”

“네가 그럼 그렇지. 안 갈 새끼가 아닌데 어디서 가오를 잡고 지랄이야, 지랄이.”

어찌나 차수민에게 당하고 살았는지 한수진의 비아냥은 내게 아무런 타격을 주지 못했다. 따끔하지도 않았다 이 말씀.

“그럼 가는 거다? 현식이랑 민혁이…… 또 누구 부르지? 얼굴 좀 쓸 만한 애가 누가 있었더라.”

“날짜는 언젠데?”

“다음 주 금요일 생각 중이야. 시간 비워 놔.”

“알겠어.”

“휴. 바쁘다. 공부해야 하는데 이것들 연애나 도와주게 생겼네. 야, 그거 한 개비 줘 봐. 태우고 들어가자.”

“엥? 아, 맞다. 심부름.”

손에 든 담뱃갑의 존재를 깨닫고 어딜 또 도망가냐며 소리를 지르는 한수진을 내버려 둔 채 날듯이 뛰어 자취방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차수민에게 엄청 깨지고 심부름값이라며 담배 두 개비를 받았다.

“나 안 피운다니까.”

“뒀다 흡연자 되면 써.”

“부추기는 거야 뭐야. 나 빨리 죽으라고?”

“너 혼자 오래 사는 꼴은 못 보지. 나보다 먼저 죽어. 꼭.”

살벌하기까지 한 말과 함께 막무가내로 쥐여 준 담배 두 개비는 서랍장 깊은 곳에 들어갔다. 한 번 사용한 콘돔과 로션이 있는 그 서랍장에. 혹여나 누가 볼까 재빠르게 서랍을 닫았다.

수민은 다시 폰을 잡고 노래나 듣자며 음악 앱을 실행시켰다. 의미 모를 가사의 팝송이 흘러나왔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들으면 딱 좋을 음악이었다.

“이러고 있으니까 옛날 생각이 나네.”

그가 먼저 그때의 기억을 헤집는 말을 꺼낸 건 처음이라 조금 놀랐다. 같이 자 버린 그날 이후로 우리의 과거 회상은 암묵적으로 금기시되고 있었다. 수민은 침대에 축 늘어져 모기 자국 가득한 천장을 보고 있었다.

옛날. 짧은 시간이었지만 내게 그와 보냈던 한 학기는 비누 향과 봄 내음, 그리고 정강이의 멍으로 점철된 추억이었다. 내 시간은 그랬는데 네 시간은 어땠어?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에 혀를 깨물고 죽고 싶어졌다.

“야, 그러고 보니 너 왜 돈 돌려줬어. 그거 빌미로 날 아주 구워삶아 드셨잖아. 차용증 의미도 모를 때인데. 지금 보니 네가 했던 짓이 얼마나 극악무도하고 말도 안 되는지 기가 찬다.”

부산 여행 후 받은 택배를 떠올리며 묻자 대답이 가관이었다.

“벌어질 일에 대한 깽값이었어.”

“하, 참.”

“잘 썼지. 알차게.”

차수민이 고개를 돌려 나를 보며 웃었다. 그 모습에 심장이 쿵 떨어져 나도 모르게 들고 있던 베개를 냅다 던져 버렸다.

정확히 얼굴에 명중한 베개가 떨어지는 순간부터 그의 인형 같은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3초 이내에 주먹이 꽂힐 예정이었지만 나는 헤실헤실 웃었다. 그래, 차라리 이게 낫다.

야차의 얼굴을 하고 죽일 기세로 나를 패는 차수민이 가장 차수민답다고 생각했다.

✲ ✲ ✲

“T대? 간호학과? 미친.”

“한수진 뭐 잘못 먹은 거 아냐?”

“다 내 덕분이니까 놀라지들 말아라. 하해와 같은 은총을 너희와 나누고자 함이니까.”

“그래. 오늘은 네 쌉소리도 참을 수 있어. 다섯 명이라 했지? 어떻게든 모은다, 내가.”

찐따들만 모인 법학과에 희망의 바람이 불었다. 다 헤벌쭉해 있는데 이민혁만 어째 낯빛이 어두웠다.

“선배, 진짜 미팅 가요?”

“어어, 이민혁. 너도 가자. 비주얼 멤버가 더 필요해.”

옆에서 알짱거리며 끼어드는 과대를 무시하며 민혁이 재차 물어 왔다.

“그분은 어쩌고요.”

“그분? 누구?”

나는 멍하니 물었다. 곧이어 돌덩이가 대가리로 날아와 꽂혔다.

“선배가 술김에 섹스한 분이요.”

모두의 눈이 뎅그래졌다. 민혁의 입에서 섹스란 단어가 떨어지자마자 나는 총알처럼 그의 입을 틀어막고 과방을 뛰쳐나왔다.

“야! 미쳤냐? 무슨 소리야?”

“그때 말한 얘기……. 동창이랑 잔 거. 선배 얘긴 거 다 알아요. 왜, 잘 안 됐어요?”

티 났냐. 걱정스레 물어 오는 눈빛에 부끄러움으로 돌아가실 것 같았다. 새끼가 눈치는 빨라 가지고. 애초에 이놈한테 고민 상담을 하는 게 아니었다. 나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건…… 없던 일로 하기로 했어. 그냥 친구로 지내기로. 내가 왜 너한테 이런 얘기를 하는진 모르겠다만.”

“선배.”

“앞으로 애들 앞에서 이 얘기 꺼내면……! 죽는다.”

할 말이 더 남아 있는 듯한 그를 무시한 채 돌아 나왔다. 뒤돌아보니 그는 자판기 옆에 못 박힌 듯이 서 있었다. 왜 남의 연애사에, 아니 연애사도 아니다. 왜 남의 충동적인 엔조이 경험에 세심하게 신경 써 주고 지랄이람. 가뜩이나 심란한데.

“이민혁 안 간대?”

과대는 몇 안 되는 반반한 멤버가 빠졌다는 소식에 약간은 안심한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며칠 뒤, 거짓말처럼 과대는 미팅에서 빠지게 되었다. 그가 몰던 자전거가 전봇대를 들이받아 그렇게 소원하던 미팅은 꿈도 못 꿀 몸뚱이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자전거 바퀴의 펑크가 그 원인이었다. 과대는 목 깁스를 한 채 애처롭게 물었다.

“나 못 가……?”

“큰일 났다. 바로 내일인데 이 지랄 나서 어떡해.”

“아냐. 오히려 잘됐어. 이 새끼 데려가면 우리 얼굴에 먹칠이나 하지. 이민혁, 내일 시간 비워 놔라.”

“아, 저 교수님 미팅 있어서 안 되고요. 대신 아는 형 불러 드릴게요.”

줄곧 책에 시선이 가 있던 민혁이 페이지를 넘기며 대답했다. 여전히 시선은 책을 향한 채였다. 나는 이민혁의 뒤에 서서 조용히 입을 다물고 그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다행히 내 원나잇으로부터 비롯된 연애 고민을 까발릴 생각은 없어 보였다.

“뭔 아는 형이야. 과팅 몰라? 우리 과 인간이어야 한다고.”

“우리 학교고 담 학기부터 법학 복전 한다고 했어요. 아, 싫음 마세요.”

“박현식, 그만해. 급해 죽겠는데 뭘 과를 따져. 그래, 얼굴은 쓸 만해?”

그 물음에 시종일관 청산유수던 이민혁이 잠시 멈칫했다. 잠시 말을 골라내듯 눈동자를 굴리던 이민혁이 중얼거렸다.

“뭐…… 잘생겼죠. 예쁘장하고.”

그때 그의 말을 주의 깊게 들었어야 했다고, 미팅 당일의 나는 뼈저리게 후회했다.

모이기로 한 장소에는 낯익은 인물이 있었다. 검은색 아우라가 움실거리며 퍼졌다. 마치 원래 알았던 사이처럼 먼저 온 동기들과 몇 마디 주고받던 그가 고개를 들어 내 쪽을 바라보았다. 잠시 끔찍한 미소가 걸렸다가 사라졌다. 그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나는 전혀 반갑지가 않은데.

“김정현.”

“너, 네가 왜 여기 있어?”

이민혁의 지인이 이수민, 아니 차수민일 줄은 누가 알았겠냐고. 나는 뒤통수를 세게 한 대 맞은 얼굴이 되었다. 덕분에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 나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오는 차수민의 악귀 같은 얼굴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때, 박현식이 끼어들었다.

“아, 둘이 아는 사이라 했지. 하핫. 김정현, 잠깐만 나 좀 보자.”

졸지에 구석으로 밀쳐진 내가 미간을 찌푸리자 현식은 목소리를 낮춘 채 속닥거렸다.

“야. 너 호빠 다닌단 얘기가 진짜였냐?”

“넌 또 무슨 소리야.”

“그동안 말 안 했는데, 너 요즘 선수랑 어울려 다닌다고 애들 사이에 소문이 파다해. 난 안 믿었는데 개새끼. 돈이 필요하면 건전하게 공부를 해서 장학금 탈 생각을 해야지, 호빠? 호오빠?”

“아니, 그게 무슨.”

“저 새끼지? 누가 봐도 선수네. 시이발, 적재적소에 데려오긴 했다, 그치? 덕분에 오늘 미팅 아주 재밌겠어?”

“그, 그런 거 아니…….”

“재밌어야지.”

어느샌가 쓱 다가온 인기척에 까무러칠 뻔했다. 졸지에 호스트바 선수로 낙인찍힌 차수민은 정정하려는 노력조차 없이 빙글거리고 있었다. 나를 곤란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이 굉장히 만족스러운 듯했다.

“내가 친히 나와 줬는데 재밌어야 하지 않겠어. 더워. 앞장서.”

언제 봤다고 자연스러운 명령질에 비질거리는 땀을 닦으며 현식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선수니 뭐니 험담하던 건 잊어버렸나 보다. 모든 게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직감했다.

“저기, 수현…….”

“수현 씨는 압구정 산다고 했었나요? 저희 삼촌이 그쪽에서 작은 바를 하시는데, 칵테일 좋아하시나요?”

“민영 ㅆ…….”

“그럼 민영 씨는 이번 방학에 한국에 없겠군요. 아쉽네요.”

“저기…….”

“저기요! 여기 소주 다섯 병 추가요.”

차수민의 목적을 알 것 같았다. 나를 전담 마크하러 온 듯했다. 내가 잘되는 꼴은 두 눈 뜨고 절대 못 보는 인간, 그렇지. 그게 바로 차수민이었다. 내가 입을 떼기가 무섭게 끼어들어 요사스럽게 웃으며 맥을 자르기 일쑤였다.

나는 대놓고 분탕 치는 누구 덕에 상대 여자애들과 단 한 마디도 제대로 나눌 수 없었다. 앞머리를 넘겨 고정하고 검은 셔츠를 입은 그의 모습은 마치…….

“거봐, 선수 맞네.”

현식이 오징어 다리를 씹으며 중얼거렸다. 그의 말에 아니라고 반박할 수가 없었다. 차수민은 일렬로 늘어놓은 맥주잔에 소주 세 병을 손가락에 끼워 폭탄주를 말고 있었다. 어디서 배워 온 것처럼 능수능란한 솜씨였다.

방긋방긋 웃으며 여자애들을 대하는 꼴이 꽤 그럴듯해 보였다. 어쩐지 속이 타서 사이다만 벌컥벌컥 들이켰다. 박현식이 내 옆, 빈자리에 앉았다.

“야, 근데 사내놈이 뭐 저리 곱상하냐. 둘이 어떻게 알게 된 거야?”

“사랑과 인생 같은 조.”

“엥? 그 수민 씨? 그 이수민이 쟤라고?”

어디선가 날아든 젖은 휴지가 착하고 뺨에 안착했다. 나는 축축한 휴지 조각을 떼어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악연이지.”

“너네도 좀 말아 줄까.”

멀쩡한 얼굴의 차수민이 소주를 꽉꽉 눌러 담은 술잔을 내밀었다. 그 뒤로는 아까까지만 해도 잔뜩 상기되어 있던 한수진의 친구들이 쓰러져 있었다.

“뭐 한 거야. 보내 버리면 어떻게 해.”

“네 뒤치다꺼리하기도 힘들다. 처마시기나 해.”

나는 그가 내게 내민 술잔을 현식에게 덜어 주었다. 오늘은 취하지 않기로 했다. 술이 떡이 되어 지난번과 같은 일을 만들기 싫었다.

현식이 조심스럽게 수민의 눈치를 보며 말을 걸었다. 방금까지 신랄하게 그를 까던 놈치고 퍽 비굴한 태도였다.

“있잖아, 요. 이수민……. 씨. 저희 온 지 한 시간도 안됐는데요…….”

“네에, 맞아요……. 소지품 선택도 안 했고, 술 게임도 하나도 안 했는데…….”

졸지에 관심 밖으로 밀려난 동기들은 쭈뼛거리며 이렇게 초 칠 거면 대체 왜 왔느냐는 항의를 수동적으로 표출했다. 틀린 말 하나 없었지만 수민의 차가운 얼굴이 정적처럼 내려앉자 그 아무도 뒷말을 이어 가진 못했다.

너무나 익숙한 패턴이라 남 일 구경하듯 강냉이나 씹으며 앉아 있던 내게 차수민이 홱 시선을 돌렸다.

“김정현. 너 즐거워?”

“어, 어?”

“재밌냐고. 지금 이 모든 것이.”

이렇게 물어볼 땐 뭐라 대답해야 현명할까. 여기저기 끼어들어 한마디도 못 뱉게 한 주제에 즐겁냐고 물으신다면. 그러나 여기서 재미없다고 대답한다면 내 노력은 뭐가 되냐며 정강이가 걷어차일 것이고, 재밌다고 대답한다면 이 재미없는 맥 끊기 놀이가 지속될 것이기에 눈동자를 굴리며 우문현답을 찾아 헤맸다.

“나야 뭐, 친구들이랑 오랜만에 나왔으니까. 너도 이런 자리에서 보는 건 처음이고…… 너는? 너는 재미없어?”

다행히 최악의 대답은 아니었는지 차수민은 부루퉁하게 되물었다.

“그래서 뭘 하고 싶은데, 너네.”

“소지품! 소지품 선택……이요.”

둘씩 짝이라도 지어야 차수민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지 현식이 애처롭게 의견을 냈다.

“소지품? 하이고. 별 같잖은 것만 알아 가지고. 겨우 재워 놨는데 또 깨워야 하는 거야? 하.”

인상을 팍 쓴 수민은 언제 그랬냐는 듯 상냥한 얼굴로 돌아와 한수진의 친구들을 깨우고 있었다.

차수민은 테이블 위에 펼쳐진 안경과 시계 따위를 한심한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이딴 게 그렇게나 하고 싶었냐는 비아냥에 현식은 거의 울먹이고 있었다.

나는 참담한 마음으로 반쯤 취해 있는 한수진의 친구들과 숙연하게 앉아 있는 나의 동기들을 바라보았다. 이쯤 되니 집에 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럼, 딸꾹. 저부터어 할게요.”

민영이 대충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바닥 아래 내 시계가 있었다. 취한 그녀를 그냥 집에 데려다주고 피시방이나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그녀의 옆에 앉아 있던 차수민이 조용하게 말을 걸었다.

“저 닳아빠진 후진 시계를 차는 사람은 과연 어떤 사람일지. 궁금하지 않은가요, 민영 씨?”

“아.”

그 얘기를 들은 민영은 고개를 끄덕거리고 손가락을 옮겼다. 알이 큰 R 브랜드의 시계였다. 모두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세상에. 누구 거야?”

고가 브랜드의 등장에 눈이 휘둥그레진 현수가 속닥였다.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내 거야.”

한숨을 쉬며 차수민이 겉옷을 챙겼다. 기다렸다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그래, 차라리 빨리 가 버려라. 모두의 의미심장한 눈초리 속에서 수민은 찰랑거리는 술병을 들어 보였다.

“우리 막잔 채우고 나가죠. 괜찮아요?”

민영 씨가 초점 없는 시선을 술잔에 고정한 채 손을 뻗었다.

“아, 당연하죠, 딸꾹. 저를 뭐로 보시고.”

“힘들면 됐어요. 내가 마시면 되니까.”

“주세요!”

고개를 끄덕이며 잔을 들이미는 그녀에게 수민은 콸콸콸 소주를 따라 주었다. 얼핏, 예의 그 악마 같은 미소를 본 것 같았다. 나는 서둘러 상황을 정리하려고 했다. 이미 늦었다는 불길한 예감이 등 뒤를 엄습했다.

“우리 그냥 여기서 파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그만 마시고 일어나자. 집에 데려다줄게요. 현식아, 택시 불러.”

내 실낱같은 설득에도 기어이 잔을 채운 민영은 꾸역꾸역 막잔을 삼켰다. 나중에 한수진에게 뭐라 설명해야 할까. 앞으로 내 인생에서 한수진 주최의 소개팅이란 다시없을 예정이었다. 눈이 뒤집힌 그녀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잔을 내려놓은 민영이 손을 들었다. 순간 모두 뭔가를 예감한 듯 분위기가 싸해졌다. 충분히 망한 미팅이니 더 망해도 이상할 것 하나 없었다.

“있잖아요. 저, 토할 것 같은데요…….”

“잠, 잠깐.”

“길, 길 터 주세요!”

“우욱.”

웅성거리며 흩어지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화장실이 어디죠? 묻는 제정신이 아닌 여자와 손가락을 들어 정확히 내 가슴팍을 가리키는 악마 같은 남자의 모습을.

여자는 새처럼 내 품속으로 날아들었고 따듯한 액체가 가슴을 촉촉이 적셔 주었다.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지고 토악질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 난리 통 속에서 차수민은 유유히 자기 몫의 술잔을 입에 댄 채, 시선을 내게 고정하고 있었다.

“이런. 막잔은 나 혼자 마셨네?”

그가 테이블 위에 빈 잔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오물을 뒤집어쓴 채로 택시를 부르니 쉽게 잡힐 리가 없었다. 남들은 2차를 가는 시간대에 우리만 귀가 택시를 부르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차수민의 은혜 덕이었다.

“택시!”

겨우 여자애들 몇을 택시에 태워 보냈다. 옆에서 흥이 오른 민영 씨가 몸을 흔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를 말리느라 애먹는 현식이 보였다.

“아, 빨리 집에나 가고 싶어…….”

“더럽게 안 잡히네. 야, 김정현. 너 먼저 가. 우리가 알아서 마무리할게.”

“그래, 토 묻은 몸으로 우리 옆에 오지 말아 줬으면 해. 가서 쉬어.”

“됐어. 너네를 어떻게 믿고 맡겨. 비켜.”

누나는 술 들어간 남자들은 개병신이며 늑대 새끼이니 아랫도리를 조신하게 잘 간수하라 누누이 일렀다. 이미 그 아래를 술에 취해 고등학교 동창 깔아뭉개는 데 써 버렸으니 틀린 말이 아니었다.

사이다로 채운 맑은 정신이 가끔씩 옷에 묻은 토사물의 존재를 일깨워 줬지만 적어도 집에는 잘 돌려보내 줘야 할 것 같았다.

“김정현, 내가 할 테니까 저기 모텔이라도 가 있어.”

차수민이 불쑥 끼어들었다. 취한 여자애들과의 사투를 소 닭 보듯이 멀뚱멀뚱 바라만 보더니 무슨 심경의 변화였을까. 네가 왜? 목구멍까지 나온 말을 애써 삼켜야 했다.

“드러워서 그래. 못 봐 주겠으니까 빨리 올라가.”

됐다는 걸 한사코 카드까지 쥐여 주어서 내쫓기다시피 근처 모텔에 들어왔다. 대충 옷을 벗고 셔츠를 씻어 내니 지잉 하고 진동이 울렸다.

몇 호야?

503호.

문자를 찍고 얼마 안 있어 방문이 벌컥 열렸다.

“어, 어떻게 들어왔어?”

깜짝 놀라 가슴팍을 가리자 차수민이 빙글거리며 스페어 키를 흔들었다. 뭔 놈의 모텔 보안 규정이 이따위야. 그는 사뿐사뿐 걸어 들어와 푹신한 매트리스에 쓰러지듯 몸을 묻었다.

“잘 바래다줬어?”

“아, 힘들어. 뭔 여자애들이 힘이 그렇게 세냐. 네 망할 놈의 친구들도 잘 내쫓았으니 걱정 마.”

“그러기에 왜 술이 떡이 되도록 먹여 가지고 이 고생을 하게 해. 남들도 너만큼 잘 마시는 줄 아냐. 덕분에 한수진한테 한 소리 듣게 생겼네. 고오맙다.”

“내가 먹였냐? 너희가 목석처럼 앉아 있으니까 분위기라도 쇄신해 보자 한 건데 내 노력을 개똥 취급하네. 하여간 별 숙맥 같은 것들이 여자 만나겠다고 나대서는. 민영이가 너네 졸라 재미없었대. 한 번만 더 눈에 띄면 죽여 버리겠다고 전해 달래. 토사물은 작은 성의 표시라니까 너무 기분 나빠하지는 말고.”

어디까지가 진짜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알 수 없었지만 평상시보다 말이 많은 걸로 보아 좀 취기가 도는 것 같았다.

힐끔, 수민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술 한 방울 들어가지 않은 사람처럼 창백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차수민은 술기운이 돌 때 재잘재잘 입을 놀리곤 한다. 한참 떠들던 수민이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눈을 꾹 감았다.

“……넌 하루가 멀다 하고 여자들 뒤꽁무니만 쫓아다니냐. 한심해 죽겠다.”

“한심? 너야말로 이때다 싶었지. 좋아 가지고 헤벌레해서는 여자애들한테 치근대던 게 누군데. 어찌나 능숙하던지 현식이가 너 호빠 선수 아니냐더라.”

네가 왜 그런 말까지 들어야 하냐고. 박현식에게 입조심하라고 몰아붙이려 하는 순간, 차수민의 빈 6년에 대해 전혀 아는 바 없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아는 건 열일곱의 반절 동안 만났던 차수민과 스물셋의 반절 동안 만나고 있는 이수민이 전부였다.

울컥, 화가 치밀었다. 나는 뭐 할 말 없는 줄 아냐? 너 생글생글 잘만 웃더라. 차수민은 나 외의 사람들에겐 대체로 상냥한 편이었다. 그러나 잘 웃진 않았다. 거짓된 가면을 썼다 해도 오늘처럼 그렇게 부드럽게 웃어 주는 일이 별로 없었다. 생각해 보니 난 차수민의 여자관계에 대해서도 전혀 아는 바 없다.

“술잔 한두 번 돌려 본 솜씨가 아니던데, 설마 아버지 사업이란 게 그쪽이야?”

“웬 미친 소리야.”

아니란 걸 알면서도 쏘아붙이고 싶었다. 취기 도는 차수민이 표독스럽게 받아치지 않을 거란 걸 알아서일까. 나에게 낼 화를 그에게 풀어놓고 있었다.

“화낼 기운도 없다. 입 좀 다물어. 속 안 좋으니까.”

뒤돌아 누운 차수민에게 손을 뻗으려다 그만두었다. 내 미숙한 발언이 후회스러웠다. 뒷머리를 헝클어뜨리며 한숨을 내뱉었다. 애써 주제를 다른 길로 돌렸다.

“야…… 그러고 보니 너, 이민혁이랑은 어떻게 아는 사이야?”

“왜.”

“민혁이 가만 안 두려고. 너를 데려와서 이 사달이 났으니.”

“호빠에서 만났다. 왜.”

“진짜?!”

“진짜겠냐. 너 안 씻냐? 토 냄새나.”

차수민이 귀찮다는 듯 휘휘 나를 몰아냈다. 화장실 취급한 게 누군데. 구시렁거리며 욕실로 향했다. 바보같이 혼자 열 올린 것 같아 찬물에 남은 감정을 씻어 냈다.

벅벅 씻고 나오니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열심히 주둥이를 놀리던 차수민은 쌕쌕거리며 미동도 없이 자고 있었다. 허. 지쳤냐? 신나게 잘 논다 했다. 헛웃음이 나왔다.

“앵알앵알 시끄럽더니 누가 업어 가도 모르겠네…….”

컨디션이 별로인지 얼굴이 창백했다. 셔츠 단추를 풀어 주려고 몸을 숙이니 술 냄새가 확 끼쳤다.

“야. 자?”

말술이라 취하는 경우는 드물었는데. 하긴, 오늘 많이 먹긴 했다. 안주 빨 안 세우는 타입이라 빈속에 퍼부었을 것이다. 그러게 왜 굳이 나와 가지고 사서 고생이람? 설마 아직도 친구가 없는 걸까. 괜히 핑계 대고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어 나온 자리가 아니냔 말이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괜히 짠해져 나는 침대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야. 옷은 갈아입고 자야지.”

“으응.”

젖은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차수민의 반듯한 이마에 닿았다. 살짝 눈썹이 찌푸려졌다. 나는 방해되는 젖은 머리를 대충 수건으로 감쌌다. 별소리 듣지 않고 그를 가까이서 관찰할 수 있는 이런 기회가 또 없을 것 같았다.

“……속눈썹 완전 길다.”

‘뭐…… 잘생겼죠. 예쁘장하고.’

나는 이민혁의 말을 곱씹었다. ‘예쁘다’라. 한 가닥 내려온 차수민의 앞머리를 쓸어 보았다. 왁스로 고정하여 살짝 뻣뻣한 촉감이었다. 항상 보드랍게 손에 감기던 얇은 머리카락과 대비된 감촉이었다. 그의 긴 눈매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예쁘장하다기보다는…….

‘야하게 생겼잖아. 어딘가 위험해 보이고.’

왜 차수민을 선수라 생각했냐는 물음에 현식이 어깨를 으쓱하며 내놓은 답이었다.

‘네 지인이라니까 말 아껴서 호빠 선수인 거지, 저 새끼 사실 게이바 바텐더 상이야.’

‘미친놈. 게이바 가 봤냐?’

‘아니이, 말이 그렇단 거지. 사내놈이 야살스럽게 생겨서는. 여자애였으면 남자 여럿 울렸을 면상이잖아. 그리고 어딘가 좀, 위험한 냄새가 나. 아무래도 쟤 뒷골목 인생인 거 같아. 왜, 그쪽 사람들 있잖아. 내가 그런 놈들 인상은 기가 막히게 구분하거든.’

‘나 쟤랑 같은 고등학교 나왔거든? 말조심해라. 그런 애 아니니까.’

‘몇 년간 못 봤다며. 그동안 무슨 일 있었을지 어떻게 알아? 나 이래 봬도 법조인 가문 장자다. 내 촉을 무시하지 마.’

개자식. 말짱한 애를 화류계 인사 취급하고 있어. 예비 법조인의 똥촉 중 그나마 야하게 생겼다는 점에는 동의하는 바였다.

바텐더라, 어울릴 것 같기도……. 차수민의 말랑한 뺨을 잡아당기던 나는 한 가지 의문점에 봉착했다. 차수민은 게이일까? 지 말로는 일본서 누나랑 첫 관계를 했다고 했는데. 믿을 수가 있어야지. 게이가 아니라면 왜 나랑 잤을까. 보통 엔조이를 남자랑도 하나.

너도 차수민이랑 잤잖아.

머릿속에서 울리는 내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나는 술에 취했던 거고. 차수민은 분위기에 취했었나 보지. 나도 참, 덮어 두기로 한 지난 과오를 왜 다시 떠올려서는.

“야, 차수민 일어나. 옷 벗고 자.”

괜히 머쓱해져 그를 흔들었다. 주먹질할 땐 짱돌처럼 단단하던 몸이 바람 인형처럼 맥없이 흔들린다. 누구보다 멀쩡한 척, 배웅까지 하더니 정신을 놓자마자 죽은 듯이 움직이지 않는다. 은근히 센 척하는 면이 있다니까.

나는 한숨을 쉬고 목을 조이는 갑갑한 셔츠 단추를 풀어 주었다. 있는 집 자식이 맞는지 셔츠 안쪽엔 명품 로고가 커다랗게 박혀 있었다.

“야, 일어나라니까.”

칼라 깃이 흘러내리고 얄따란 쇄골이 드러났다. 흰 모가지가 규칙적으로 오르락내리락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침을 삼켰다. 손가락에 닿은 옷감의 감촉이 노골적이었다. 얇은 천 아래 팔딱대며 울리는 그의 심장이 있었다. 그 파동이 그대로 피부를 타고 올라왔다. 같은 심장으로 호흡하는 기분이었다.

“옷, 벗고 자라고…….”

천천히 하나하나 단추를 풀어 내렸다. 위에서부터 조금씩 숨겨 두었던 흰 살갗이 드러났다. 반쯤 고의로 그의 젖꼭지가 있을 위치를 손끝으로 건드렸다. 그가 살짝 몸을 떨었다. 짓궂은 장난이었다. 미팅 자리를 파탄 낸 것에 대한.

‘하으, 하아앗……. 아, 아파…….’

그런데 숨넘어갈 듯 할딱이던 그의 작은 목젖이 왜 지금 떠오르는 걸까. 손가락에 감기던 엉덩이의 감촉과 나무를 닮은 그의 체향. 더불어 풍기던 앳된 비누향.

나는 나도 모르게 손가락을 그의 입술로 가져갔다. 그리고 도톰한 아랫입술을 쓸었다.

“으……응.”

이 입으로 끊임없이 신음을 흘렸었다. 퍽퍽 쳐 낼 때마다 터져 나오는 신음이 잇새로 부서졌었다. 흔들리는 차수민의 몸뚱이와 땀에 젖은 머리카락.

그때, 나는 그의 작은 구멍에 내 모든 걸 욱여넣고 싶었다. 그의 몸속에 들어가 다 짓이겨 버리고 싶었다. 느물텅거리는 내벽과 앞을 쓸어 올리는 미끄덩한 감촉까지도 선명하게 떠올랐다.

항상 나를 내려다보던 새초롬한 눈매가 눈물로 얼룩지는 걸 보고 싶었다. 내 아래에서 울어 줬으면…….

모든 걸 술기운이라 치부했던 그때, 사실 나는 선명하게 차수민을 원했었다.

“으응.”

넋이 나가 손가락을 그의 입속으로 밀어 넣던 나는 화들짝 놀라 손을 뺐다. 촉촉한 혀의 촉감이 남아 있었다.

“나, 나는 네가 불편할까 봐 옷, 벗고 자라고…….”

나도 모르게 흘려보낸 욕망을 갈무리했다. 되지도 않는 변명을 하며 표정을 살피는데 여전히 잠에 취한 차수민은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그가 어눌한 발음으로 띄엄띄엄 명령했다.

“불편하니까… 마, 저……. 벗겨 봐…….”

그리고 미동도 없이 축 늘어졌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손끝에는 여전히 촉촉하고 말랑하던 감촉이 어른거리는 채였다. 셔츠는 이미 단추를 다 풀어 놔서 두 어깨에 위태롭게 걸려 있을 뿐이었다.

몸을 숙여 차수민의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칭얼거리는 애를 어르듯이.

“미안해. 코 자.”

평소 같으면 눈에 쌍심지를 켜고 지랄했을 놈이 조용하다. 뒤통수가 동그랗다. 나는 천천히 손을 내려 팔에 걸쳐진 검은 셔츠를 벗겨 냈다.

따듯한 살갗이 닿았다 떨어졌다. 등허리에 새겨진 검은 용이 언뜻 보였다. 정말 차수민과는 어울리지 않는 문신이었다. 청바지의 버클도 풀어 줄까 하다가 입안을 멋대로 쑤시던 정신 나간 손가락을 기억해 냈다. 또 정신이 나갈까 무서워 벨트에만 손을 댔다.

“……됐다. 편히 자.”

어깨까지 이불을 덮어 주고 불을 껐다. 룸을 따듯하게 채워 주던 노란색 빛이 빠져나가고 어둠만이 남았다. 나는 그의 옆에 누웠다. 피곤했다.

알고 싶지 않다.

두려운 것을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어른이 되어 감을 의미한다. 나는 아직 고등학생 수준에 멈춰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내 감정, 내 생각, 내 기억…… 나를 이루는 모든 것들이 나를 괴롭게 만들고 있었다. 종잇장 한 장만 들추어내면 꼭꼭 숨겨 두었던 두려운 것을 마주할지도 모를 지경에 이르렀다.

도망친다. 아무것도 모르던 열일곱 살의 바보 김정현으로 돌아간다.

옆에서 쌕쌕이는 수민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리고 그의 온기가 남아 있는 셔츠를 움켜쥐었다. 일렁이는 욕망이 깃털처럼 남은 죄책감을 씻어 주었다.

“흐윽.”

모텔 가운 속 퉁퉁 부어오른 것이 프리컴을 흘리며 껄떡거리고 있었다. 나는 차수민에게서 벗겨 낸 셔츠로 나의 분신을 감쌌다. 천천히 상하 운동을 시작했다. 실크의 감촉이 민감하게 다가왔다. 알코올의 힘을 빌려 탐했던 차수민의 내벽 감촉을 기억해 내려 애썼다.

다시 넣고 싶어. 너를 안고 싶어.

“하아, 하아아…….”

셔츠가 기둥의 핏줄에 쓸려 주름졌다. 부드러운 옷감이 흔들리며 뭉뚝한 살을 긁어냈다. 자극을 받은 순간 찌릿함이 올라왔다.

“읏.”

나는 그의 검은색 와이셔츠에 한가득 흰 얼룩을 만들어 버렸다.

등줄기가 서늘했다. 사정의 여운에 잠겨 들 새도 없이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불을 덮어 준 그대로 미동도 없이 누워 있는 차수민이 보였다. 천사 같은 모습이었다. 누군 개처럼 옆에서 헉헉대는데 아무것도 모른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죄책감과 쾌감이 한데 뒤섞여 울렁였다. 도망가자. 난 비틀거리며 겉옷을 걸쳤다.

김정현, 대체 뭘 하고 싶은 거야……?

끔찍한 사실은 오늘 한 방울의 술도 마시지 않았으며 놀라우리만큼 깨끗한 정신이었다는 것이다.

시발, 변명거리조차 없어. 나는 차수민을 남겨 둔 채 도망치듯 그 방을 나왔다.

<2권에서 계속>

당신의 따까리 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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