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
어쩌겠어요
얼마 후 발신인이 적히지 않은 택배가 도착했다. 상자 안에는 핸드폰과 지갑과 신발 한 짝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흰 봉투에 고이 넣어진 신사임당 스물세 장. 학기 초 강제적으로 삥을 받았던 115만 원이었다.
봉투에 붙은 포스트잇에는 휘갈긴 글씨 몇 글자가 박혀 있었다.
< 그냥 너 써. >
누가 보냈는지는 고민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나는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린 한 인간을 어떻게 추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또 질 낮은 장난을 하는 건 아닌지, 교무실 출석부를 뒤지고 그의 자취방 앞에서 보초를 서 봤지만 차수민의 머리카락 하나 발견할 수 없었다.
등장만큼 갑작스러운 퇴장이었다. 그가 정말 떠났다는 걸 인정하기까진 시간이 필요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찾아온 불청객들은 내 마음 정리에 힘을 실어 주었다.
“마. 고두현이 아들놈 어디 있노.”
“진짜 몰라요. 몇 번을 말합니까. 모른다고요!”
“어린놈이 으데 으른 앞에서 구라나 살살 쳐 대고. 니랑 잘 아는 사이라며? 부산서 느그들 봤다는 사람만 몇인데.”
“제발 찾게 되면 좀 알려 주실래요? 나도 정말, 정말 알고 싶거든요.”
윽박질러 봤자 나에게선 캐낼 정보가 없었다. 진짜 몰랐으니까. 이유 한마디 남기지 않은 채, 왜 나를 부산에 버려두고 홀랑 사라져 버린 건지 정말로 알 도리가 없었다.
신변에 위협을 가하진 않았지만, 집 앞에 죽치고 앉아 있는 무리는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그들은 기분 나쁘게 손에 배트 하나씩 쥐고 집 근처를 어슬렁거렸다. 그러나 나는 조폭 따위에게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약속이라도 한 듯 주변에서 이상한 일이 한꺼번에 터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 이름을 수취인으로 한 택배가 하루에 한 번, 엄마의 퇴근 시간에 맞추어 도착했고, 가족의 눈앞에서 개봉한 박스에는 피우지도 않는 담배 한 상자, 흥미도 없는 성인잡지 등이 골고루 돌아 가며 들어 있었다. 덕분에 나는 저녁마다 등짝 세례를 받아야 했다.
“김정현! 이눔 새끼가! 믿는다, 믿는다 해 줬더니!”
“아, 아니야! 이거 내 거 아니라니까?”
끝이 아니었다. 마당에 걸어 놓았던 내 점퍼가 오색찬란한 스카잔으로 뒤바뀌어 있을 때도 있었고, 차수민이 즐겨 뿌리던 향수 냄새가 미처 마르지 않은 빨랫감에 진하게 묻어 있기도 했다. 아침마다 배달되는 우유는 종종 차수민과 홀짝였던 맥주 두 캔과 등가 교환이 되어 있었다. 야무지게 뚫어 놓은 자전거의 펑크는 덤이었다.
밤에는 차수민이 몰던 바이크의 모터 소리가 들리는 환청까지 겪었다. 등하교길마다 묘하게 뒤통수로 날아드는 시선도 느껴졌다. 처음엔 부산서 올라온 조폭들이 친절하게 미행이라도 하나 싶었는데 그들이 사라지고 나서도 미묘한 인기척은 남아 있었다. 나는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었다.
차수민이었다. 분명했다. 정성 들여 이딴 장난을 칠 사람은 그밖에 없었다. 어디선가 숨어 내 당황한 얼굴을 관찰하며 깔깔대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동네에 있단 건데. 밤낮으로 이 잡듯 뒤져도 그는 보이지 않았다.
차수민이 주기적으로 흘려 놓은 그의 흔적에 마음이 심란해질 무렵, 괴소문이 돌았다. 이 역시 그의 장난 중 하나였으리라.
개학 후 나는 묘하게 다른 공기와 마주치는 애들의 수군거림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었다. 매일같이 붙어 다니던 허여멀건 한 애가 자퇴했다니까 그러는 거겠지, 가볍게 생각했다.
최우식이 내 머리카락을 당겨 보기 전까진, 그렇게 생각했다.
“아!”
“이상하다. 리얼한데?”
우식이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의 손에 머리칼이 한 움큼이었다. 나는 이를 악물며 그를 노려보았다.
“뭐 하는 거야. 너까지 짜증 나게 하지 마라.”
“이거 진짜 네 머리야?”
“그럼 뭐로 보여. 죽고 싶냐?”
“가발이라던데…….”
“뭐?”
“너 탈모라던데 아니야?”
최우식은 자기 사물함에 들어 있었다며 머리가 벗겨진 내 사진을 보여 주었다. 내 얼굴이 반들반들 계란 같은 대갈통에 합성되어 있었다. 누군가 정성스레 포토샵을 돌린 모양이었다.
아니, 이게… 뭐람?
최우식뿐만이 아니었다. 교내 일보라도 되는 것처럼 모두의 사물함에는 내 민머리 사진이 한 장씩 들어 있었다. 대체 뭘 위해서 무슨 목적으로 벌인 짓인지 감도 오지 않았다. 노력 대비 얻는 게 뭐란 말인가.
“야. 웃긴다. 네가 뭐 연예인도 아닌데 찌라시가 다 도냐?”
그는 배꼽 잡고 웃었지만 나는 웃기지 않았다. 어쩐지 도연의 갑작스러웠던 이별 통보가 이 사진 한 장과 관련이 있을 것 같다는 합리적 의심이 들었다.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소문은 좁은 동네의 버프를 받아 바람을 타고 멀리멀리 여고와 근방 지역 학교들까지 퍼져 나갔다. 길거리를 걸을 때마다 쏟아지는 시선이 따가웠다. 얼굴이… 괜찮으면 뭐 해…… 머리털이 하나도 없는데…… 등의 속닥거림이 내가 가는 길 뒤꽁무니마다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나는 헛소문의 파도를 견뎌야 했다. 누가 낸 소문인지는 안 봐도 뻔했다.
“차수민…….”
차수민 새끼. 악마 같은 새끼. 그가 떠난 빈자리는 핼러윈 장난이라도 하듯 그가 남긴 악의와 저주들로 가득 채워져 그 빈틈을 느낄 새도 없었다. 한 문제가 해결되면 부비 트랩이라도 설치해 놓은 것처럼 다른 한 문제가 터졌다. 귀찮게 구는 조폭 아저씨들 때문에 이사를 가야 했고 자전거 바퀴의 펑크는 아침 밤 갱신되었다.
정신없이 그가 투척한 똥들을 치우다가 문득 인생에 회의감이 들었다. 깊은 빡침은 승화되어 신체의 한 부분이 텅 빈 것처럼 공허함마저 느껴졌다. 공허함 뒤에는 외로움이 있었다. 나는 애써 그 작은 부분을 무시했다.
“종놈 부리듯 막 대하던 놈이 사라져 봤자 뭐 어떻다고…….”
날 노예처럼 부려 먹던 놈이 사라졌으니 풍악이라도 울려야 할 판인데 이상하게 영 시원치가 않았다. 6개월. 짧다면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에게 생각보다 많은 마음을 주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고작 한 학기를 함께했지만 내 성장을 지켜봐 준 사람은 차수민이 유일했기 때문에.
그가 떠난 이후로 모든 관계들이 지겨워졌다. 피상적인 관계로만 느껴지기 시작했다.
각 잡고 공부하기로 마음먹은 건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차수민이 썼을 법한 뿔테안경을 눌러쓰고 등교했다.
“김정현, 너 미쳤냐……? 꼴이 그게 뭐야?”
“아니. 아주 제정신인데.”
나는 그가 떠나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수업도 열심히 듣고 숙제도 열심히 했다. 불편한 관심은 잠시뿐이었다. 구석의 차수민이 그랬던 것처럼, 나는 사람들 사이에서 투명해지는 법을 배웠다.
웬만한 연락도 다 끊었다. 한 번쯤은 뭔가를 열심히 해 봐도 될 것 같았다. 내가 생각보다 낫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었던 건지 그저 한 조각이 결여된 듯한 기분이 싫었던 건지 잘은 모르겠지만.
나는 조용히 모두의 기억에서 잊혀 갔고 나 역시 나를 이루고 있던 헌것들을 지워 냈다.
차수민이란 이름은 학창 시절 에피소드로 전락했고 시간이 갈수록 바라고 낡아져 기억 더미 어딘가에 묻혀 이내 완전히 소멸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땐, 그렇게 생각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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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님, 제발 안 되겠습니까?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제발요.”
간절한 애원에도 교수는 매정했다.
“학생 같은 사람을 한두 번 본 줄 알아? 남자끼리 짝 될 가능성이 분명 있다고 사전에 고지했고 수강 취소할 기회까지 줬잖아. 학생 한 명 때문에 조를 다시 짤 순 없어요. 정 싫으면 F 받고 재수강하세요.”
“그럼, 차라리 다른 남학생이랑 짝하면 안 될까요?”
“나가요!”
엉덩이를 걷어차이다시피 쫓겨났다. 내 불행은 한수진에게는 행복이었다. 마주칠 때마다 손가락질하며 소리 없이 대차게 웃어 재끼는 그녀는 하루하루가 행복해 죽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나는 그런 수진을 상대할 힘도 없었다.
“그냥 다음 학기에 재수강할까.”
“남자가 그렇게 싫어? 그냥 눈 꼭 감고 한 학기만 버텨. 꿀 강의인데 아깝잖아.”
내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현식이 등짝을 내리쳤다. 그들에게 이 중요한 고민은 깃털처럼 가벼운 문제라 여겨지는 듯했다.
“그런 게 아니고……. 아아. 복잡한데, 짝 된 애가 고등학교 동창이야.”
“잘됐네! 동창이면 더 편하잖아. 그냥 과제 있을 때마다 각자 할 일 하고 보고서만 입 맞춰서 써. 연애는 포기해야겠지만 학점을 얻어 가면 되지 않겠냐.”
“그래요. 까짓거 한 학기만 참아요. 선배 학점 좋지도 않더만. 괜찮잖아요. 남남 커플은 점수가 후하다는 강의평도 올라와 있던데.”
가만히 듣고 있던 이민혁이 옆에서 거들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 학점 네가 어떻게 알아?”
“수진 누나가 말해 줬어요. 선배 여기서 포기하면 수진 누나한테도 지는 거예요. 그리고 재수강한다 해도 또 남자랑 짝 될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래. 한수진 엄청 비웃던데. 그냥 들어. 재수강 귀찮잖아.”
남자고 자시고 이수민, 아니 차수민과 더 이상 엮이고 싶지 않았다. 짧지만 강렬했던 한때의 기억을 닦아 보자면 분명 나만 굴려질 게 뻔했다.
내 손으로 내 고생길을 내가 열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넓고 넓은 대한민국에서 하필이면 대학 강의로 이렇게 마주치냐고. 인연이 있다면 우린 악연이 분명할 것이다.
나야 그렇다 쳐도 차수민이 [사랑과 인생]을 신청한 건 의외였다. 이런 강의를 들을 만큼 여자에 미친놈은 아니었던 것 같던데. 너 역시 별건 아니었구나. 그렇게 생각하니까 차수민의 요사스러움이 조금이나마 누그러져 보였다.
“아닌데. 내가 신청 안 했어. 해외에 있었어서 후배가 대신 아무 강의나 넣어 준 거야.”
차수민이 무표정하게 일갈했다.
“그, 그랬구나. 난 또…….”
하긴. 나는 신입생을 노리며 열심히 수강 신청 버튼을 눌러 댔을 차수민의 이미지를 휙휙 지워 냈다. 오토바이 뒷좌석에 여자 친구를 태우고 시속 150km의 광란의 질주를 하는 그의 무모한 연애는 누구에게도 공감 받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 놈이 무슨.
“너야말로 여자 만나고 싶어서 수강했지? 뻔하지. 어떡하냐. 나랑 같은 조가 되어 버려서.”
“아, 아니거든. 학점 잘 준대서 들었거든.”
“거짓말 마. 이수민 씨? 하고 해죽 웃던 네 얼굴 잊지를 못해. 여자일 줄 알고 기대했잖아.”
옳은 소리였기에 할 말이 없어 애꿎은 커피잔만 만지작거렸다. 심란한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차수민은 우리의 재회가 놀랍지도, 충격적이지도 않아 보였다.
“뭐 하고 지냈어?”
수민은 엊그제 만난 사람처럼 아무렇지 않게 물어 왔다. 어쩐지 약간 화가 치밀었다.
“뭐 하고 지냈냐고? 말 잘 꺼냈다. 네가 남기고 간 장난들 처리하느라 죽을 맛이었거든? 그때 왜 갑자기 사라졌어? 사라질 거면 곱게 사라지지 웃기지도 않는 장난질이나 하고. 왜 말도 없이 사라졌냐고.”
나는 우리가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찌질함이 묻어 나오는 마지막 문장은 삼켰다. 수민은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아메리카노를 쪽 빨았다.
“내가 갑자기 없어져서 어땠는데?”
“허. 그걸 질문이라고 해?”
어땠긴. 당황스럽고 화도 나고 배신감도 들고 막판에는 텅 빈 듯한 외로움이 발끝을 감쌌다. 짧다면 짧은 기간이었지만 내 진짜 모습을 알고 있던 유일한 상대였다.
유약한 김정현을 성장하게 해 준 짧은 봄에 그가 있었다. 그가 떠나고 나서 알았다. 내 찌질함을 여과 없이 받아 준 사람은 그뿐이었단 걸.
너는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너를 친구로 생각했어.
나는 이 복합적인 감정을 내뱉으려다 어쩐지 묘한 어투로 느껴져 인상을 쓰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네가 저질러 놓은 일들을 처리하느라 힘들긴 했는데 그거 빼곤 뭐. 아무렇지 않았어. 까맣게 잊고 살았는데 이렇게 다시 나타날 줄은 몰랐지.”
“그렇구나. 까맣게 잊고 살았단 말이지.”
그의 까만 눈동자가 순간 한층 더 시꺼메졌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예전의 노예근성이 살아났는지 나도 모르게 눈을 굴리며 중얼거렸다.
“그야 당연하잖아. 6년이나 안 봤는데.”
“6년?”
생소한 숫자인 듯 수민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네. 벌써 6년이 지났네. 하긴, 긴 시간이지. 나도 네가 대학생이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어.”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가 대학 문턱을 밟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네가 떠나고 밀려드는 공허함에 미친 듯이 공부했어. 그것 역시 사실이었으나 묘하게 느껴져 입 밖으로 꺼내기를 관두었다.
나는 그에게 6년간 무슨 일이 있었냐고 꼬치꼬치 캐묻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잘 살았겠지. 어디서 또 나 같은 봉 잡아서 잘만 살았겠지.
뚱하게 그를 노려보는데 부드럽게 곡선을 그리는 눈매와 마주쳐 버렸다. 그가 우위에 있을 때 자주 짓던 표정이었다. 나는 한동안 그 눈을 잊지 못했다. 그가 장난처럼 빨래감에 남기고 간 향수 냄새와 더불어 나를 미치게 하던 주범이었다.
나는 꼬리를 내렸다. 져 주는 쪽은 내가 되었다. 6년 전의 김정현이 그랬던 것처럼.
“……그나저나 왜 이렇게 말랐냐, 너. 그동안 밥 안 먹고 지냈던 것도 아닐 텐데.”
“그래 보여?”
“어. 키는 좀 컸나 보네. 그래, 좀 컸어야 했어. 솔직히 예전엔 중딩 같았다. 조그매서. 밥 좀 잘 먹고 다녀. 더 크게.”
“그럼 나 밥 사 줘.”
“엉?”
“밥 사 달라고.”
나는 후진 없이 들어오는 제안에 눈을 끔뻑였다.
“나랑…… 밥을 먹고 싶어? 우리가 정답게 앉아서 밥 먹을 사이야?”
“그럼 어떤 사인데? 오랜만에 봤으니까 같이 밥이나 먹자.”
외양은 좀 변했을지 몰라도 차수민은 차수민이었다. 이수민, 아니, 차수민은 예전보다는 조금 유해진 듯했으나 멋대로 사람을 끌고 다니는 점은 변함이 없었다. 그의 페이스에 당연하게 휘말리는 나 또한 그랬다.
30분 뒤, 나는 학교 앞 고깃집에서 삼겹살을 굽고 있었다. 과제는 그냥 입 맞춰서 보고서만 제출하자는 말은 꺼내지도 못했다.
“잘됐다. 야. 사진 찍어. 이걸로 첫 번째 과제 퉁치게.”
“어, 응.”
노릇노릇 구워지는 삼겹살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는 두 남자를 주위에서 이상한 눈으로 바라봤지만 수민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본격적이었다. 아무래도 이 수업에서 A+를 받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맛있어?”
“엉.”
“……많이 먹어.”
“그때는 아버지 사업 때문에 어쩔 수 없었어.”
고기를 질겅질겅 씹으며 이수민이 말했다.
“갑작스럽게 떠나게 됐거든. 말 못하고 떠나서…… 여튼 그렇게 됐다.”
“지갑이랑 핸드폰 훔쳐 간 건? 부산에 홀로 남겨 두고 홀랑 튀어 버린 건? 조폭들 쫓아오게 만든 건? 탈모니 뭐니 소문은 어떠하며…….”
“어허. 참 쩨쩨하게 그걸 다 기억하고 있었어? 아까는 까맣게 잊었다더니.”
“하하…….”
어이가 없으니 웃음이 났다. 그래, 원래 이런 놈이지. 한편으로는 안심도 됐다. 정말 차수민스러워서. 변하지 않았구나. 열일곱의 차수민. 나는 턱을 받치고 그의 변함없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직 앳된 티가 남아 있지만 조금은 성숙해진 느낌이 들었다. 젖살이 빠졌는지 날렵한 턱선이 그의 예민한 인상을 한층 돋보이게 만들었다.
나는 그의 잔에 잔을 맞댔다.
“그래도 나 네 덕분에 대학 왔다. 네가 과외도 시켜 주고 숙제도 열심히 내줘서.”
“그때 하기 싫어 죽을라고 하더니. 거봐. 다 피가 되고 살이 된다니까.”
“……지금 너 비꼰 거야.”
“알아. 어쨌든 다행이지? 대학생 김정현이라니.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수민이 눈을 살짝 휘었다. 예전의 그 웃음이었다. 고등학생 때는 그저 남자애치고 곱다고 생각했는데 성인이 된 수민은 어딘가 초연해 보였다. 그 원숙미가 그를 더 야살스럽게 보이게 했다.
나는 따라 웃다가 숨을 멈추었다. 그의 옆모습을 보자 순간적으로 내 두 뺨을 붙잡고 예고 없이 입술을 맞대어 오던 고등학생 차수민이 떠올랐다.
여름날의 더운 공기와 두 소년의 밭은 숨소리. 끈적한 타액이 오가는 소리와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던 신음 소리…….
나는 내 뺨을 찰싹 때렸다.
“미쳤구나, 김정현.”
“왜?”
“아냐……. 술이 들어가니까 아무 생각이나 떠올라서.”
“맞아. 너 술 더럽게 못 했었지! 잘됐다. 오늘 한번 좆돼 봐. 이모!”
신이 난 수민 앞에 소주 여섯 병이 세팅되었다. 앓는 소리를 해도 가차 없었다. 나는 억지로 못 하는 술을 삼켰다. 그래도 확실히 알코올이 들어가니 긴 공백이 눈처럼 녹아내렸다.
“다시 만나서 신기하다. 인연이란 게 정말 있긴 한가 봐.”
“너는 우리가 인연이라고 생각해?”
“어. 악연.”
단호한 내 말에 수민은 말없이 소주잔을 기울였다. 찰랑거리는 잔은 당연하게 내 앞으로 밀어졌다. 그가 중얼거렸다.
“인연 중에 악연이 제일 질긴 거 알아?”
“너 보니 그런 것 같다. 대학까지 와서 만나다니. 너는 아버지 사업 물려받는다 하지 않았어?”
“그래서 경영대 갔잖아. 이왕 하는 거 확실히 하려고.”
예전부터 궁금했는데 대체 아버지가 무슨 일을 하시길래 그렇게 사업에 집착해? 부산에서 깡패들에게 쫓기던 일을 생각하면 구멍가게 수준은 아닌 것 같았는데. 나는 궁금증을 애써 눌렀다. 내가 알아서 뭐 해. 한 학기 만나고 끝일 텐데.
“도움은 돼?”
“글쎄. 이론 나부랭이라. 그리고 나는 몸 쓰는 일이 더 맞는 것 같아. 그냥 학위나 따려고 눌어붙어 있는 중. 그보다도 놀랐잖아. 법학과라며.”
차수민이 여전히 하얀 얼굴로 술잔을 채웠다.
“양아치 김정현이 무슨 생각으로 법을 배운다고 했을까…….”
“별생각 없었어. 그냥 내가 갈 수 있는 과 중 제일 높아서. 뭔 이유가 있겠……냐.”
나는 ‘간지 나서’라는 말을 차마 하지 못했다. 수능 후 원서 철에 한창 법정 드라마에 빠져 있어서 즉흥적으로 내린 선택이었다.
나는 문득 아버지 사업을 물려받겠다는 당찬 꿈을 얘기하던 어린 차수민이 떠올랐다. 그 옆에서 쭈구리처럼 부러워하던 나에게 평생 자기 따까리나 하라며 빈정거리던 그 모습이.
귀여운 속마음은 숨기고 항상 틱틱거리던 열일곱의 차수민. 갑자기 토껴 버린 그에게 여전히 배신감은 남아 있었지만, 예전 그의 모습을 떠올리니 어쩐지 말랑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때도 봄이었는데. 딱 이렇게 꽃망울이 지기 시작하던 무렵, 우리 처음 만났었지. 나는 일렬로 늘어선 잔을 쭉 비웠다.
“으어어. 어어.”
분위기를 타면 이렇다니까……. 10분도 안 되어 고주망태가 되어 버린 나는 벌게진 얼굴로 아무 말이나 내뱉기 시작했다.
“아. 네가 두 개로 보여. 차수민이 두 개. 싸가지가 두 배로 없는…….”
“김정현, 취했다. 일어나.”
차수민이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힘을 주어 눈을 감았다 떴다. 뿌연 시야로 스물셋의 이수민이 보였다. 이수민으로 나타난 차수민. 이렇게 나타날 거, 그렇게 갑자기 말도 없이 떠나 버리다니. 매정한 새끼. 정말이지, 재수 없어…….
그가 사라진 2년 반 동안 어떻게 지냈었지. 내 삶이 어떻게 굴러갔었더라. 나는 무슨 생각을 했었지. 그가 남기고 간 짓궂은 장난마저 그리워했던 그때의 나는 대체…….
나는 느물거리는 혀를 천천히 놀렸다.
“야. 나 네가 갑자기 날랐을 때 어땠는지 알아?”
“아무렇지도 않았다며.”
“거짓말이야. 그……거.”
“……어땠는데?”
반쯤 자리에서 일어서던 수민이 다시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궁금하냐? 빙글거리다가 뺨을 철썩 맞고 나서야 입이 다시 열렸다.
“처음엔 어이없었고 그다음엔 화, 화가 났…지. 콜록. 이 새낀 날 발끝의 때만큼도 생각 안 했구나 싶어서. 뭐, 뭔 지랄을 다 떨어 놨더라고. 탈모. 웃기지도 않아……. 내 머리털이 얼마나 빽빽한데. 만져 봐.”
대충 머리칼을 쓰다듬어 준 차수민이 재촉했다. 휘적거리는 손길이 간지러웠다.
“그리고?”
“그러다가…… 그러다가 마지막엔 외로웠어. 홀…로 남겨진 것 같아서.”
“……아까 전엔 새까맣게 잊었다고 했잖아.”
“어. 그다음엔 다시는 생각 안 나게 잊어버렸어. 나만 기억하고 있는 게 빡치잖아. 야, 나 어떡하지? 그렇게 너한테 당하고도 만나니까 또 좋네.”
다시는 얽히기 싫었는데 막상 얽히니까 추억도 생각나고 좋아. 학생 때로 돌아간 기분이야. 더듬더듬 한 단어씩 내뱉자 수민의 눈동자가 까맣게 일렁였다. 나는 희미한 시야 너머로 새까맣게 타오르는 그의 눈을 차마 마주치지 못했다.
내 착각일까. 차수민은 부드럽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사물이 두 개로 보이는 답답함에 자꾸만 눈을 비비는데 차수민이 내 손을 붙잡았다.
그가 내 귓가에 대고 조그맣게 속삭였다.
“너 자취하지.”
자취방까지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다. 휘청거리던 몸을 누군가 낑낑거리며 지탱해 준 느낌이 든다.
“개무겁네, 시팔.”
욕설을 들은 것 같기도 하다. 끊어졌던 필름이 연결되자 나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빙빙 도는 천장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겉옷을 벗은 수민이 머리맡 서랍장을 뒤지고 있었다.
“너 모해?”
“야, 콘돔 어디 있어.”
“저어기……. 두 번째 칸.”
“웃긴다, 너. 만날 차인다는 놈이 콘돔은 상시 구비야? 해 보긴 했어?”
“날 뭐로 보는…….”
반쯤 풀린 혀로 변명을 하려다 관뒀다. 혀 근육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술에 절은 느낌이었다. 그러게 나는 소주 못 마신다고 했잖아. 쏘아붙이려고 해도 수민은 들어 줄 마음이 없어 보였다.
차수민은 침대 모서리에 앉아 있었다. 니트를 벗자 선이 얇은 상체가 드러났다. 차수민의 벗은 몸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나는 정신없는 와중에도 그의 몸을 샅샅이 훑었다.
허리가 얇았다. 벗겨 놓으니 유려한 선이 드러났다. 그의 뼈를 감싼 근육은 호흡할 때마다 부드럽게 물결치며 얇은 곡선을 그렸다. 티 없는 피부 위로 군데군데 흉 자국이 보였다. 나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아, 차가워.”
“뭐…야? 이것들. 다쳤어?”
그러고 보니 손등에도 칼자국처럼 보이는 긴 흉이 나 있었다. 나는 옆구리에 한 뼘 정도로 크게 나 있는 볼록한 상처를 만졌다. 흐릿한 시야로 흠칫 떨리는 몸이 느껴졌다.
“오토바이 타다가 그런 거야? 엄청, 엄청 아팠을 것 같은데…….”
대답 없이 긴 손가락이 내 티셔츠를 벗겨 냈다. 나는 저항 없이 그의 손에 몸을 맡겼다. 몸이 물 먹은 것처럼 무거웠다.
그에게서 희미한 섬유 유연제 향기가 풍겼다. 빙글거리는 정신이 나를 어린 차수민의 자취방으로 데려갔다. 그의 작은 티셔츠를 빌려 입고 고등학생 주제에 맥주 캔을 따던 그때로.
“수민아…….”
허스키한 목소리에 그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너…… 왜 벗고 있어?”
멀뚱멀뚱 드로즈만 걸친 수민을 바라보자 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야. 확실히 말해. 너 나랑 자고 싶어?”
“자고 싶냐……고?”
멍하니 되묻자 차수민의 빨간 입술이 움직였다. 그 장면은 느리게 리플레이 되었다.
나랑, 자고, 싶어?
그 의미를 곱씹기도 전에 말랑한 감촉이 내 입술을 덮쳤다. 물기 어린 혀가 들어와 치열을 훑었다. 쌉싸름한 알코올 맛이 났다. 익숙하고 그리운 감각이었다. 내 입안 여기저기를 유린하는 그것을 잡아 보려 혀를 내밀었으나 입술이 떨어졌다. 다만 은색 실 하나가 아슬아슬하게 우리 둘 사이를 이어 주고 있었다.
“나랑 이런 거 하고 싶냐고.”
그러니까 지금 너를 덮치고 네 몸을 갈라 찾은 구멍에 내 걸 넣고 싶은지, 그 의사를 물어보는 거지? 사고가 느리게 돌아갔다.
그의 하얀 몸이 물고기처럼 퍼덕거리는 광경을 보고 싶긴 했다. 붉은 입술이 열리고 살짝 보이는 앞니를 혀로 건들고 싶었다. 그의 안쪽이 얼마나 따듯한지, 그 예쁘장한 얼굴이 어떻게 상기되고 찌푸려지는지 알고 싶었다.
“응……. 나 너랑 자고 싶어.”
이미 이성적 판단은 불가능했다. 알코올에 절은 혀는 의미도 모를 말을 던졌고 차수민은 픽, 하고 웃으며 콘돔의 포장을 깠다.
“그럼 벗어.”
아, 으응. 그의 마리오네트처럼 그의 명령에 고분고분 따랐다. 청바지의 버클을 내리고 얇은 속옷을 끌어 내리자 성난 페니스가 반쯤 고개를 들었다. 어. 이게 왜 서 있지. 눈을 깜빡거려 보아도 거대한 크기는 그대로였다. 살짝 눌러 보니 쾌감이 둔한 신경을 타고 반쯤 올라왔다가 사라졌다. 현실감각이 사라졌다. 모든 것이 연극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수민은 느릿하게 드로즈를 내렸고 미끌거리는 콘돔의 입구를 자신의 것으로 가져다 댔다. 나는 술기운에도 재빠르게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왜.”
“네…… 네가 넣으려고? 나, 나한테?”
그가 느물거리며 웃었다. 눈꼬리가 끝까지 접혀 능글맞고도 야한 웃음이었다.
“나 깔고 싶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잘 좀 세워 봐.”
반쯤 서다 만 내 것을 내려다보았다. 괜히 초조해져 꼬인 혀로 웅얼거렸다.
“그게, 술을 먹어서 잘 안 돼…….”
쯧, 혀를 찬 수민이 그의 손가락을 내 기둥에 감아 왔다. 부드럽고 따듯한 감촉이 아래를 감쌌다. 나는 거대하게 부풀어 오른 성기를 손에 쥐고 윗입술을 핥는 차수민의 옆선을 훔쳐보았다.
“아, 뭐 하는…….”
손이 상하 운동을 시작했다. 살 주름이 쓸려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반복했다. 손가락의 울퉁불퉁한 마디마디가 페니스의 살갗을 스치고 지나가자 척추가 찌릿했다. 소름 끼치게 손가락 하나하나의 감촉이 선명했다. 그의 손장난에 거짓말처럼 페니스가 뻣뻣이 고개를 들고 있었다.
“아…….”
피식 웃은 차수민이 이빨로 포장지를 뜯었다. 미끈거리는 고무 막이 껄떡이는 페니스에 덧씌워졌다. 콘돔의 링 부분이 귀두부터 천천히 타고 내려왔다. 차가운 점액질이 질퍽거렸다. 차가워.
나는 수민의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키스를 가르쳐 주겠답시고 고등학생의 앳된 입술로 내 정신을 한 움큼 베어 물던 그 감촉이 불현듯 기억났다. 내뱉던 얕은 숨과 희미하게 끼치던 섬유유연제의 향기. 그의 머리칼을 감아쥐고 싶은 충동을 참았다.
뿌리 끝까지 미끌거리는 콘돔을 씌워 낸 수민이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보았다.
“섰다.”
“……입술 빨아도 돼?”
수민이 고개를 끄덕이기가 무섭게 나는 그의 도톰한 입술을 갈라 먹었다. 알싸한 알코올 향이 났다. 절은 혀로 더듬거리며 치열을 훑자 철벽처럼 안 열릴 것 같던 이빨이 살짝 틈을 보여 주었고 나는 그 작은 틈으로 들어갔다. 입안이 촉촉했다.
기분 좋아. 멍하니 그의 입안 살을 핥아 올리며 생각했다. 촉 소리와 함께 입술이 떼어졌다.
“술맛 나.”
“……나도.”
차수민의 하얀 얼굴은 입술만 타액으로 번들번들한 채 선홍빛으로 상기되어 있었다. 희미한 술 냄새. 하긴. 네가 나보다 몇 병은 더 마셨는데 말짱할 리 없지. 나는 입술을 얇은 목으로 가져다 댔다. 한 손에 그러쥘 수 있을 정도로 가는 목이었다.
“하아. 키스는, 흡. 누구한테 배웠어?”
차수민이 귀에 대고 더운 입김을 불어 넣으며 물었다. 나는 멍해져 필터링 없이 대답했다.
“누구더라. 첫 키스 묻는 거야? 그야 중학생 때….”
내 말에 수민이 움직임을 멈추더니 손을 뻗어 귀두 끝을 손톱으로 눌러 버렸다.
“아! 아파……. 왜 그래?”
“그냥. 안 꼴리니까 잘 좀 해 보라고.”
자존심이 상해 더 열심히 애무했다. 싸가지 없는 차수민. 내 밑에서 질질 싸게 만들어 줄 거야. 목덜미에 코를 부비며 손가락을 유두 위에서 지분거렸다. 납작했던 젖꼭지가 조금씩 솟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바짝 솟은 유두를 두 손가락으로 비틀었다.
“아앗.”
작은 신음이 터졌다. 처음 듣는 동창의 신음에 조금 술이 깨는 듯했지만 허리를 감아 오는 두 다리가 다시 정신을 날려 버렸다. 나는 슬그머니 머리를 들려고 하는 이성을 짓눌러 버렸다. 그냥 본능에 몸을 맡겨 버려, 차수민의 분홍색 유두를 보며 생각했다.
“여기, 여기 예민해? 꼭지가 바짝 섰어…….”
나는 고개를 내려 차수민의 분홍빛 유두를 입안에 품었다. 혀끝을 할짝거리며 반응을 살폈다. 항상 무표정하던 그의 얼굴에 야릇한 쾌감이 서려 있었다. 그걸 본 순간 찌릿한 감정이 올라왔다.
가느다란 목덜미를 살짝 깨물었다. 그리고 나의 페니스를 그의 페니스에 가져다 대었다. 내 성기에 덧씌워진 고무 막이 미끈한 점액을 흘리며 그의 보드라운 페니스에 닿았다. 왜 얘는 성기도 부드럽지. 뻘한 생각을 하며 목덜미를 빨아올렸다. 그렇게 다시 맡아 보고 싶었던 체향이 혀끝에서 맴돌았다.
“하읏. 아아앗…….”
수민이 가느다란 신음을 냈다. 살짝 쉬어 허스키하고 중성적인 목소리가 어쩐지 엄청 꼴렸다. 맞잡은 두 성기를 빠르게 비볐다. 콘돔에 묻은 윤활유가 매끄럽게 마찰을 최소화했다. 페니스에 닿는 생소한 고무 막의 감촉에 수민은 온몸을 떨었다.
“뭐야, 너 엄청 예민하잖아. 만지기만 해도….”
나는 끈적거리는 내 페니스의 끝을 세워 차수민의 것을 천천히 쓸었다. 그가 헉, 소리를 내며 몸을 바르작거렸다.
“만지기만 해도 가겠어…….”
나는 중얼거리며 눈물 어린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야해. 술에 담겨 반쯤 제 기능을 못 하는 뇌이지만 차수민의 얼굴은 야했다. 찌릿한 쾌감이 뇌간에 흘러 들어갔다. 나는 그의 한 손을 가져다가 우리 둘의 페니스가 닿아 있는 접촉면을 만지게 했다.
“느…… 껴져? 닿아 있어.”
“아앗, 으응, 잠, 잠깐…….”
“아, 근데 너 많이 넣어 봤어?”
내가 움직임을 멈추고 묻자 그는 인상을 찌푸린 채 대답했다.
“넣어 봤겠냐. 네가 처음이니까 잘 좀 해 봐.”
“아, 그래? 알겠어. 잘할 테니까……!”
어쩐지 감격스러워 죽는 한이 있어도 잘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겹쳐진 몸을 떼 내어 한 손으로는 그의 부어오른 페니스를 흔들고 다른 쪽 손가락은 그의 둔부를 갈라내어 작은 구멍을 찾아냈다. 입구를 건드리는 손가락에 몸이 경직되는 것이 느껴졌다.
“긴장 풀어.”
굵은 뼈마디가 구멍을 휘젓자 그가 밭은 숨을 내뱉으며 물었다.
“아아……. 젤 같은 거 없어?”
“없, 없는데.”
“콘돔은 있으면서 젤은 왜 없어. 시발. 하아.”
나는 급한 대로 서랍장 위의 로션을 쭉 짜냈다. 꾸덕꾸덕한 제형이 체온에 녹으면서 그의 내벽에 스며들었다. 갑자기 침입한 액체의 감촉에 근육이 요동을 쳤다. 러브젤 대용으로 짜낸 로션은 기름칠한 듯 구멍을 좀 더 미끈거리게 만들었다.
“좀 낫지.”
“으흣. 기분이 이상해.”
손가락이 두세 개 들어가도 살짝 인상만 찌푸릴 뿐 별 불만이 없었다. 나는 열심히 애널을 애무하며 구멍의 크기를 넓혀 갔다. 어느 정도 풀렸다 싶어지자 발기된 내 페니스를 잡아 귀두의 끝을 그의 구멍에 맞추었다.
발기되다 못해 무서울 정도로 치솟아 있는 것을 고등학교 동창에게 넣으려 하고 있었다. 다시 스멀거리며 고개를 드는 이성의 끈을 잘근잘근 밟은 채, 선액을 질질 흘리는 남근을 살집 있는 엉덩이 사이로 밀어 넣었다.
“아!”
“아파……?”
“안 아프겠냐. 아윽.”
“살살, 할게. 으응?”
그의 귓불을 자근자근 씹으며 얼렀다. 빨리 끝까지 넣고 싶었다. 입구에 살짝 걸쳐진 귀두가 찌릿했다. 수민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손톱으로 그의 요도를 살짝살짝 누르며 내 성기를 뿌리 끝까지 밀어 넣었다.
“아앗. 아흐으…….”
그의 눈가에 살짝 눈물이 맺힌 듯했다. 혀를 가져다 대고 핥아 보았지만 아무 느낌도 없었다. 그냥 울지.
“뺄까? 많이 아파?”
그가 고개를 저었다. 고집스러운 눈이었다.
“그냥, 해. 계속. 끝……까지.”
그의 내벽은 긴장과 아픔으로 내 페니스를 단단히 압박하고 있었다. 이대로 있다간 서로 더 괴롭겠다 싶어 나는 그의 어깨를 그러안고 거세게 몸을 움직였다.
“아앗, 하아아, 아윽…… 읏…….”
여린 세포들이 흥분으로 부푼 페니스에 붙었다가 떼어져 나가며 자극을 더했다. 수민의 몸이 위아래로 흔들렸다. 천장을 향한 젖꼭지가 신음과 함께 흔들렸다.
그의 손톱이 날카롭게 등가죽을 파고들었지만 술에 푹 절어서인지 그다지 아프지 않았다. 하체에서 느껴지는 자극이 더 강했다. 쪽쪽 빨아 당기는 구멍에 한참 추삽질을 했다. 작은 몸이 바르르 떠는 것이 느껴졌다.
“차수민. 나, 가도 돼?”
머리카락에 코를 묻은 채 조심스럽게 물었다. 차수민의 살냄새가 야릇했다. 붉게 물든 목덜미를 핥자, 앗, 하고 움찔거린다. 가도 되냐 재차 묻자 그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조여드는 그의 안에서 내 것을 끄집어내 콘돔을 벗겨 냈다. 그리고 그의 눈물 어린, 그러나 절대로 눈물 따위 흘리지 않는 고집스런 눈동자를 보며 가득 찬 정액을 그의 납작한 배 위에 쏟아 내었다. 수민이 작게 흐느꼈다.
“하아, 차수민…….”
“죽는다, 진짜. 너만…… 가고. 시발. 난 아프기만 한데.”
“미, 미안. 펠라라도 해 줄까.”
까마득한 정신을 챙기며 몸을 일으키려고 하는데 수민의 손이 다시 내 것을 잡았다. 노곤해진 페니스가 그의 손가락이 닿자 긴장했다. 마찰을 통해 반쯤 세우더니 내 눈을 똑바로 보며 말한다.
“다시 넣어.”
나는 그의 애완견이라도 된 것처럼 홀린 듯이 명령에 따랐다. 살짝살짝 목을 깨물며 아까 전까지 머물러 있던 그곳으로 다시 진입했다.
수민의 다리를 잡아 어깨에 걸쳤다. 더 깊숙한 삽입이 이루어졌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신음을 지시처럼 들으며 깊게, 끝까지 들어갔다.
몸을 움직이려는 순간, 수민의 허리가 큰 각도로 꺾였다.
“아.”
다시 한번 그쪽을 찌르니 잔뜩 긴장한 그의 두 팔이 내 등허리를 감싸 왔다.
“너, 여기…….”
“……잔말 말고, 계속해.”
귓가에 뜨거운 숨이 불어 넣어지자 페니스는 다시 단단해졌다. 나는 그의 자그마한 뒤통수를 붙잡고 커다란 몸을 욱여넣었다. 선단의 끝이 내벽의 돌기에 닿자 자지러지는 신음과 함께 내장이 수축했다. 뒤로 몸을 빼는 페니스를 여린 살결이 애타게 잡아 왔다.
“아윽! 응…… 아앗!”
“여기구나. 맞……지?”
“흐윽… 앗. 아윽! 김, 김정현! 조금만 살살…….”
살살 할 생각 따위 없었다. 살짝 무너진 표정을 보는 순간 뇌에서 퓨즈가 끊어지는 것 같았다. 나는 짐승처럼 제 성기를 친구의 뒷구멍에 꽂은 채 발정 난 수캐가 되어 골반을 흔들었다.
아래에서 할딱이는 야한 몸뚱이는 제정신이 아닌 듯 풀린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의 턱을 잡아 눈을 맞추었다.
“아앗, 꽉 찼어……. 죽을… 것 같, 아읏…….”
“아, 차수민. 나 봐 봐.”
“으응, 앗. 쌀 것 같아…….”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는 두꺼운 엄지로 선액을 질질 흘리고 있는 그의 요도를 틀어막았다. 배출이 막혀 버린 몸이 고무공처럼 튀어 올랐다. 다른 손으로는 천장을 향하고 있는 그의 몸을 뒤집었다.
수민의 몸이 돌아가며 함께 회전한 구멍의 마찰에 맞물려 있던 남근이 비명을 질렀다. 눈앞이 하얗게 물들었다. 그리고 그 흐릿해진 시야로 척추가 도드라진 얇은 등허리와 매끈한 피부에 새겨진 무언가를 보았다.
“저기, 읏. 차수민.”
“하아, 아, 아……ㅅ왜…애…….”
“용이, 한 마리 있는데…….”
“……안 잡아먹으니까, 냅둬. 아읏.”
그리고 차수민은 엉덩이를 움직여 머뭇거리는 내 성기에 애널의 주름을 비벼 가기 시작했다.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압박감에 내 정신 또한 그 구멍 속으로 빨려 가고 있었다. 대차게 허리를 흔들었다. 척추에 팽팽한 쾌감이 흘러넘쳤다.
“윽!”
나는 수민의 안에서 두 번째 사정을 하며 요도를 막고 있던 손가락을 떼어 냈다.
“아…….”
보드라운 성기 끝에서 왈칵 쏟아져 나오는 정액이 느껴졌다. 엄지손가락으로 흠뻑 젖은 그의 귀두 끝을 뭉근하게 만지자 남은 액체를 쏟아 내며 잘게 몸이 떨려 왔다. 나 역시 함께 몸을 떨며 그의 체취를 깊게 들이마셨다.
나는 그 따듯한 몸을 끌어안고 사정의 포만감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 ✲ ✲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어제 새벽의 일이 너무나도 또렷하게 재생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옆자리에서 느껴지는 체온에 입술을 깨물었다.
“김정현, 이…… 미친놈아.”
미쳤다. 정말이지 돌아 버렸다. 대체 무슨 생각이었던 거야? 6년 만에 만난 고등학교 동창에게 입을 맞춘 것도 모자라 그것까지 넣고 할딱거렸다. 동창과, 그것도 남자와 해 버렸다. 술기운이라지만 조금이라도 할 의사가 없었다고 할 수 있을까. 미쳐도 단단히 미쳤던 게 틀림없었다.
나는 고른 숨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아주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무서워서 등 뒤는 볼 수도 없었다. 아무렇게나 내팽개친 옷들은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주 잘 말해 주고 있었다.
주섬주섬 주워 입으며 서랍장 위에 놓인 지갑을 챙겼다. 침대에서 엉덩이를 막 떼었을 때, 약간 쉬어 허스키한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어딜 가려고?”
“허, 허억.”
자는 줄 알았던 수민은 침대 헤드에 상체를 붙인 채 피곤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구겨진 이불이 가까스로 그의 하부를 가리고 있었다.
“담배나 한 대 줘 봐.”
“나 담배 안 피우는데.”
“……내 옷.”
바닥에서 굴러다니던 그의 점퍼를 가져다주었다. 그러자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담뱃갑을 꺼내 든다.
미간을 구긴 채 담배에 불을 붙이는 차수민은 섹시했다. 그래, 원래 예쁘장하게 생긴 놈이었으니까. 그래도 섹시한 것과 섹스한 것은 엄연히 다르다. 그의 맨살이 자꾸만 시야 안에 걸렸다. 나는 당장이라도 문을 박차고 뛰쳐나가고 싶었다.
“너 나 두고 튀려고 했지.”
“아, 아냐!”
“뭐가 아냐. 네 얼굴에 그대로 쓰여 있는데. 무슨 형편없는 매너야. 파트널 두고 뜨려고 해?”
“…….”
“하아. 첫 데이트부터 섹스라니 A+ 맞겠는걸. 어, 얼굴 빨개졌다.”
나는 터질 것 같은 얼굴을 푹 숙인 채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어제는, 서로 많이 취했었고. 피차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어휴, 저 새끼. 꼭 아다 티를 내요. 뒷구멍 뚫린 건 나거든? 왜 네가 순결을 뺏긴 양 얼굴 붉히고 지랄이야. 그런다고 벌어진 일이 없는 일 되냐.”
할 말이 없어 애꿎은 침대 시트만 부여잡았다. 한 모금을 피워 올린 수민이 고개를 기울였다.
“말해 봐, 김정현. 좋긴 좋았지?”
“좋긴 누가……!”
순간 생생하게 떠오르는 어제의 기억에 입이 절로 다물어졌다. 아래를 적셔 오는 젖은 신음 소리에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던 나의 것이 기억났다. 따듯하고 촉촉한 구멍 안에서 음란하게 흩뿌려지던 액체까지도.
“거봐. 좋았잖아.”
“하아. 그래. 어제는…… 아.”
질척한 기억의 파편들 사이로 희미한 용 한 마리가 떠올랐다. 섹시한 등짝에 똬리를 틀고 그 위에서 헉헉거리는 상대를 한입에 삼킬 듯이 노려보던 검은 용. 곧 승천할 것처럼 정교한 그것은 타투라 부를 수 있는 레벨이 아니었다.
“저, 저기. 내가 어제 뭔가를 본 것 같은데.”
“뭘 봤는데?”
뻔뻔하게 눈을 맞춰 오는 터라 오히려 내가 그 시선을 피해 버렸다. 모르는 거야, 모르는 척하는 거야?
“그, 검은색 용, 한 마리…….”
“잘못 본 거 아냐? 취해서 맘에도 없던 섹스 할 정도였는데, 용 따위 헛것 본 거 아니냐고.”
“아니, 진짜로 봤는데…….”
생각에 잠긴 듯 연기를 쪽 빨아들인 수민이 시선을 내게 돌렸다.
“뭐일 것 같아?”
“글쎄, 정확히는 모르지만 아버지 사업이랑 관계있는 거 아냐? 부산에서도 그쪽 사람들이랑 알고 지내던 것 같았는데.”
“사업이라.”
“아무래도 사업이 커지면 불법적인 것들이 끼어드는 일도 생기겠지.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대학 잘 다니고 있으니까 잘 풀린 거로 생각할게.”
조심스럽게 단어를 골라 가며 내뱉은 내 말을 담배 연기와 함께 음미한 수민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지금 내 등에 용 한 마리가 살고 있다고 날 아버지 사업을 위해 조직에 발 담갔다 뺀 깡패 새끼로 생각하고 있다?”
“아,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라.”
“무섭냐?”
쑥 가까이 다가온 얼굴이 히죽 웃으며 매캐한 담배 연기를 뿜어냈다. 나는 캘룩거리며 그것을 삼켰다. 수민의 손이 내 턱을 붙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고정시켰다. 가느다란 손가락의 악력이 제법 셌다. 어쩐지 신나 보여서 뿌리치지 않고 그냥 가만히 있어 주었다.
“우리 그리운 놀이를 해 보자. 너 오늘부터 수업 빠지거나 과제에 제대로 임하지 않아서 나한테 불이익 끼치는 일 있으면 죽는 거야.”
“아, 알겠어. 이거나 좀 놔 줘…….”
이래서야 6년 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래서 얽히기 싫었던 것이다. 어떻게든 내 멱살을 잡고 수렁으로 끌고 내려갈 놈이었다. 밑에 달린 걸 함부로 놀린 내 잘못도 있으니 할 말은 없지만.
“만져 볼래?”
어느새 등을 돌린 채 어깨 너머로 발랄하게 물어 왔다.
“아니, 싫어…….”
울상을 지어 보아도 결국에는 자기 손으로 내 손을 여의주를 문 용의 머리에 가져다 댈 심산이었다. 결점 없는 살결 위의 거칠한 감각에 소름이 돋았다. 이걸 새기기 위해 살점을 얼마나 파냈을까. 흰 등에 핏물이 뚝뚝 떨어졌을 것을 생각하니 끔찍했다. 뭘 꼬나봐. 용은 두 눈을 새파랗게 뜨고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어때?”
“와. 비싼 데서 했나 보다.”
영혼 없는 호응에 곧 흥미 없는 표정이 돌아왔다. 뭐야, 재미없어. 그가 중얼거렸다.
벗을 때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옷을 꿰어 입은 수민은 오토바이 키를 꺼냈다가 집어넣었다.
“오늘은 택시 타야겠다. 허리 아프니까.”
“집 가게? 데려다줄까?”
화색이 도는 내 얼굴을 가소롭다는 듯이 훑은 수민은 내게는 몹시 안 된 말을 내뱉었다.
“집은 무슨. 너도 같이 가야지. 영화.”
“미쳤어? 이 상황에서 넌 영화가 보고 싶냐?”
“그럼 어떡해. 보고서에 고기 구워 먹다가 삘 꽂혀서 섹스했다고 쓸 수는 없잖아. 영화 티켓이라도 첨부해야 교수 놈도 믿어 줄 거 아냐.”
“그건 이제 제발……!”
진짜로 섹스 보고서를 제출할지도 모르는 놈이다. 6년 전의 기억을 되짚어 보면 남들이 몰라서 그렇지 항상 지 좆대로 살아온 새끼였다. 그래도 그때는 최소한의 바운더리 안에 있는 느낌이었는데 지금의 차수민은…….
거울을 보며 앞머리를 정리하는 수민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준비 안 해?”
“하……. 그래. 가자 가. 아주! 보고 싶은 거 다 보고! 네 맘대로 다 해 봐!”
수민은 픽사의 애니메이션을 좋아했다.
“이걸 보자고?”
“응.”
의외의 영화 취향에 놀란 터였다. 우리는 알록달록한 포스터 앞에 서 있었다. 누가 봐도 전체 연령가의 애니메이션이었다. 낯익은 카우보이 인형과 우주인 장난감이 큰 눈을 또랑거리며 매표소를 돌아보고 있었다. 와우. 성인 남자 둘이서 온 건 너희가 처음이야! 마치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정말 의외다. 너는 범죄, 스릴러, 액션 뭐 이런 피 튀기는 장르 좋아할 줄 알았는데.”
“그런 게 뭐가 재밌어. 말도 안 되잖아. 권선징악 이딴 거. 세상엔 없는 얘긴데.”
애니메이션 쪽이 더 말 안 되는 것 같은데. 굳이 토를 달진 않았다. 매점에서 팝콘을 샀다. 줄이 길다며 수민은 저쪽에 가 버려 팝콘 취향을 물을 수가 없었다. 내 마음대로 오리지널과 스위트 팝콘을 반반 섞어 가져갔다. 흠. 한참을 바라보더니 스위트 팝콘을 집어 먹고 있다.
“난 단 게 좋아. 짠 건 네가 다 먹어.”
다행이었다. 고등학생 때 샌드위치를 사 오라 했다가 힘겹게 사 간 결과물을 내던지며 악의 가득하게 피자 빵을 사 오라고 재주문했던 차수민을 생각하니 심장이 쪼그라들었다. 군말 없이 내밀어진 팝콘을 씹고 있는 차수민을 보니까 기분이 묘했다. 좀 유해진 것 같기도 하고.
어린 차수민은 예민한 도련님 같았다. 남들을 장난감 취급했고 제멋대로에 어딘지 모르게 오만한 면이 있었다. 그러나 그 모습을 모두에게 보여 주지 않았다. 어쩌다 보니 그의 경계선을 넘어가 버린 사람이 나였기 때문에 그 패악을 나 홀로 받아야 했었다. 특히 마지막으로 볼 때쯤에는 그 예민함이 극에 달아 있었는데 지금의 차수민, 아니 이수민은.
“왜. 불만 있어?”
“아냐…….”
영화는 무난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굉장히 감동적이었다. 몇 년 만에 재개봉한 영화의 상영관은 일부 아이들과 대다수의 어른으로 꽉 차 있었고 깔깔대는 아이들과 달리 대부분의 어른들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짜낼 것 같은 분위기였다. 반쯤 비웃고 있던 나도 그 대열에 합류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우냐?”
“흐읍, 아니. 안 울어.”
“쯧.”
촉촉한 목소리에 휴지가 쓱 내밀어졌다. 쪽팔리게. 훌쩍임 속에서 스크린 속 카우보이 인형은 그의 성장한 주인에게 작별 인사를 고했다. Good Bye Andy. 영화는 그렇게 끝이 났다.
“남겨진 장난감들은 행복할까?”
상영관을 빠져나오며 그에게 물었다. 자기가 보자고 해 놓고 얄미울 정도로 건조한 눈가가 휘어졌다. 살짝 웃음이 머물렀다가 사라졌다.
“장난감들 입장에선 새로운 놈한테 가는 편이 나을지도 몰라. 왜, 인형에게 넘칠 것 같은 사랑을 주는 건 어린애들만 가능하잖아.”
“어른이 된다는 건 서운한 일이구나. 아꼈던 것들을 놓아주어야 할 때도 오고.”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앤디는 착한 어른이었나 보지.”
나른하게 파고드는 음성에 솜털이 곤두섰다. 핸드폰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무심한 얼굴이 말을 이었다.
“나라면 내가 아끼던 물건은 절대 놓아주지 않아. 인형이 평생을 창고에 처박혀 있게 되어도. 상대가 어린애라 할지라도.”
지금 이렇게 감동적인 영화를 보고 할 소리야? 나는 뜨악해진 마음으로 물었다.
“인형이 떠나고 싶다고 한다면?”
“감히 인형 주제에 어디서 의사 표현을 해? 걔 소유권은 나한테 있으니까 내 맘대로 할 거야. 그게 맞아.”
“와. 못돼 처먹은 것 좀 봐.”
“지금 알았어? 난 나쁜 어른 할래. 너는 다 놓아주며 사세요.”
킬킬거리며 유유자적한 걸음으로 앞서가는 그의 뒷모습을 쫓았다. 보고서에 너 질질 짜던 것밖에 쓸 거리 없겠다, 따위의 농담을 던지며 그가 웃었다. 어쩐지 물고 빨고 질척했던 밤이 먼 옛날의 일인 것만 같았다.
“야. 너 내일부터 나 쌩 까면 죽어.”
택시 정류소로 걸어가며 차수민이 말했다. 어떻게 알았지, 순간 뜨끔해 앞만 보고 걸었다.
“자기는 6년을 쌩 까 놓고…….”
자존심에 조그맣게 중얼거렸지만, 그 좋은 청력은 고등학생 때와 다름없는지 고개를 든다.
“그동안 잘만 잊고 살아왔다며.”
“뭐가.”
“나 말이야. 나 새까맣게 잊고 잘 살았다고 했잖아.”
그의 퉁명스럽고도 비웃음이 스며 있는 말에 뇌가 꿈틀거렸다. 섬광처럼 어제의 대화가 생각났다. 삼겹살 노란 기름 냄새가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것 같았다.
‘……새까맣게 잊었다고 했잖아.’
‘어. 그다음엔 다시는 생각 안 나게 잊어버렸어. 나만 기억하고 있는 게 빡치잖아. 야, 나 어떡하지? 그렇게 너한테 당하고도 만나니까 또 좋네.’
‘…….’
‘좋다. 이렇게 보게 돼서. 옛날 생각도 나고……. 너는 나 안 보고 싶었…어?’
시이발. 김정현, 너 마조히스트 아니냐. 제발 저를 괴롭혀 주세요, 대놓고 말한 수준 아닌가.
좋긴 뭐가 좋아. 지옥 시작인데! 이제야 제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영화관까지 고분고분 따라온 것도 지금 생각하니 너무 어이가 없다. 김정현, 병신 새끼야. 너 네 동창이랑 잤어. 그것도 사내자식이랑.
“……어후. 갑자기 숙취가 올라오네. 나 편의점 좀 다녀올게.”
“뭔 수작이야. 멀쩡한 얼굴로 느끼한 팝콘도 잘만 처먹더만. 지랄 말고 택시나 잡아.”
뚱한 그의 옆모습을 내려다보았다. 이 인간은 어떻게 이리도 쿨한 걸까. 나랑 잔 게 아무렇지도 않을까? 난 술기운이라도 빌렸지, 자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제정신이었으면서.
삼겹살 회담이 떠오르자 그와 함께 걷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몸 섞은 건 그렇다 쳐도 그 전의 야릇한 대화가 친구 사이에서 오갈 주제는 아니었다. 끊긴 필름이 이어지자 기억들이 마구 쏟아져 들어왔다. 술주정 한번 오지게 했다. 외로웠다는 둥 좋다는 둥.
이제 보니 같이 자자 꼬신 건 내 쪽 아니야?
경악스러운 생각에 다다르자 로봇처럼 오른팔과 오른 다리가 함께 나가고 있었다. 택시를 발견하자마자 얘를 얼른 집에 보내야겠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태, 택시!”
먼저 줄 서 있던 학생들을 밀어 내고 수민을 뒷좌석에 구겨 넣었다. 럭비공처럼 튕겨져 나간 고등학생이 바닥을 굴렀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빨리 이 인간을 내 주위에서 멀리 떨어뜨려 놓고 싶었다.
떨어뜨려야 한다. 이제야 무난히 굴러갈 것 같던 슈퍼마리오의 새 게임에 갑자기 난입한 침입자를. 갑작스레 몸이 던져진 이수민이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잘 가라. 그럼 안녕.”
“자, 잠깐!”
택시 문짝을 닫으려는데 흰 손이 불쑥 나와 가로막았다.
“……김정현.”
“……?”
문을 잡은 수민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택시 기사가 짜증 섞인 불평을 늘어놓기 전까지.
“이봐, 학생! 안 탈 거면 내려!”
“야. 빨리 가. 화내시잖아.”
나는 억지로 택시 뒷문을 닫으려 했으나 이수민은 있는 힘껏 버텼다. 몸이 가벼워서 힘차게 밀면 밀릴 것도 같았지만 녀석의 더러운 성격이라면 자존심 상해할 것 같아 그냥 손을 놓았다.
“김정현. 어제 일은 없었던 일로 해 줄게. 그러니까…….”
차수민이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러니까 예전으로 돌아가자.”
“갑자기 무슨 소리야?”
“섹스 말이야. 없었던 일로 해 주겠다고.”
아무렇지 않게 흘러나온 단어와 상황의 부적절성을 파악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윽박을 지르던 택시 기사는 생소한 단어에 흠칫 놀라 입을 다물었고 내 힘 풀린 손은 차 문에서 미끄러졌다. 당사자만 타격 없이 말을 이어 가고 있었다.
“그냥 오랜만에 만난 사이 해. 연락 끊겼다가 우연히 만난 동창 하자고.”
“지금…… 그게 무슨 말이신지. 하하, 아저씨. 이 친구가 낮술을 해서 좀 취했어요. 얼른 가서 자.”
“술은 개뿔. 너 내일부터 내 연락 씹으면 죽는다.”
“그럼 난 이만. 아저씨, 잘 부탁드립니다.”
“없었던 일로 해 주겠다잖아, 아다 새끼야악!”
나는 깜짝 놀라 문을 쾅 닫아 버렸다. 개빡친 이수민이 다시 문짝을 열어젖힐까 봐 택시가 출발하든 말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정류장을 벗어났다.
“미, 미친놈 아니야?”
동네방네 떠들고 다녀라. 필터가 없어도 너무 없어. 이러다가 대학 커뮤니티에도 소문나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내가 무슨 생각으로 쟤랑 잤지. 무슨 생각으로 영화까지 봤지. 정말 미친놈은 나일지도 모르겠다. 지 인생 지가 꼬는 거라던 할머니의 명언이 생각났다.
“아아악!”
게임처럼 인생에 리셋 버튼이 없다는 것은 참으로 통탄스러운 일이었다. 단 한 번 ‘다시 하기’ 버튼을 누를 수 있다면, 나는 고등학교 입학식으로 돌아가 이수민, 아니 차수민과 만날 가능성을 원천 봉쇄해 버릴 것이다.
차수민 외전 1
지겹다. 차수민이 항상 읊조리던 문장이었다. 정말이지 지긋지긋해.
“지우개 좀 빌려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지우개 대신 묵직한 필통이 통째로 내밀어졌다. 나는 멈칫했다.
“너, 너 다 써.”
안쓰러울 정도로 덜덜 떠는 손이었다. 어쩐지 기분이 팍 상했다. 어디까지 하나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야. 나 교과서도 안 가져 왔는데, 같이 봐도 돼?”
예상했던 대로, 교과서는 붙여진 책상의 경계선을 한참 넘어 내 쪽에 들이밀어졌다.
“편하게 봐!”
그리고 의자 끄는 소리와 함께 옆에 앉아 있던 놈이 벌떡 일어나 허둥지둥 뒤로 향했다. 힐끔, 돌아보니 좁아터진 책상을 비집고 들어가 세 명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죽어도 눈은 마주쳐 오지 않는다.
나랑은 책도 같이 보기 싫은 거지. 나는 애꿎은 지우개를 박박 문댔다. 종이가 찢어졌다.
“수민 군. 잠깐 나와 볼래?”
눈을 찌푸렸다. 하야토…라고 했었나. 싱긋 웃는 그의 뒤에는 그와 비슷한 인상의 아이들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소우타, 시의원 아들놈. 타케시, 요미모토 상가의 장자. 투명하기 짝이 없는 것들.
그러나 나는 그들의 말을 들어주기로 결심한다. 이번에도 속아 넘어가 주기로. 계약으로 이루어진 피상적인 관계라 해도 어쨌든 급식을 같이 먹고 하교를 같이하는 ‘친구들’이었으니까. 이 넓은 학교에 나 혼자라는 것은 생각보다 외로운 일이었다.
하야토가 물었다.
“다름이 아니라 이번 축제 말인데, 너희 아버지께서 주최 측에 계시더라고. 맞지?”
“응.”
아마 그럴 것이다. 매년 돌아오는 지역 축제는 세력을 과시할 수 있는 꽤나 짭짤한 대목이었기 때문에 여러 지파들은 피 튀기는 경쟁을 해 주도권을 따내려고 했다. 몇 년 전부터 영감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있었다.
“역시. 대단해. 쿠로이렌(검은연꽃) 사가 없었으면 우리 마을은 제대로 돌아가지도 못했을 거야. 우리 아빠가 자금은 넉넉하니 걱정 말고 즐거운 축제 부탁한다고 전해 달라고 하셨어.”
“맞아. 수민 군 쪽 인력의 비호 덕분에 안전한 축제가 되겠다. 정말 즐거울 거야, 그치. 기대되는걸.”
입에 발린 소리들을 내뱉는 걸 보면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했다. 예상은 되지만 본인들 입에서 나올 때까지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런데 입점 업체 말이야. 즐거운 축제를 위해서는 조금 조정이 필요하지 않을까?”
“맞아. 하나바라 상회에서 판을 꽤 크게 펼칠 모양인데 신생 업체이고 우리 마을 토종 업체도 아니잖아. 좀 그렇지 않아?”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말속에 섞인 탐욕을 가늠해 냈다. 요약하자면 요즘 뜨고 있는 신생 업체의 기를 눌러 달라 이거군. 그리고 또?
“그리고 입점 수수료 말인데, 요미모토 상가는 조금 내려 주는 게 맞지 않을까 싶어. 이번 축제 비용 대부분을 부담하는데 그 정도 메리트는 있어야 할 거 같아서. 너희 아버지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들을 수 있을까? 우리끼리 할 얘기는 아니지만, 궁금하잖아.”
팔짱을 끼고 가만히 듣고 있으니 기가 막힌 소리들을 늘어놓는다. 고작해야 초등학생들이 벌써부터 본격적인 사업 이야기를 주고받는 게 퍽 우스우면서도 어이가 없었다.
어린애에 불과한 내게 아부와 교묘한 언사를 늘어놓으면서 거래를 제안한다. 그를 통해 내가 받는 것은 허황된 친밀감 하나뿐이다. 그럼에도 이 멍청한 놈들에게 매달리는 내 꼴이 비참할 따름이었다.
미우나 고우나 내 편이 되어 주는 조직 놈들을 제외하면, 내 주변을 구성하는 인간들은 딱 두 부류였다. 나를 무서워하거나, 내게 원하는 것이 있거나. 깨끗한 호의를 가진 놈들은 없었다. 아무도 다가오지 않는다. 먼저 다가가면 기겁을 하고 피한다.
나는 무존재였다.
차라리 욕하고 때려! 윽박에도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는 놈들. 투명 인간처럼 지내는 게 지겹다 못해 괴로워졌을 때쯤, 개미처럼 꼬여 드는 놈들이 생겼다. 속내가 까만 놈들이었다. 알아차리기까지는 그다지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래서 말인데, 너희 아버지 좀 설득해 볼 수는 없을까?’
칼날보다 날카로운 언어였다. 지금이야 아무렇지 않지만 저학년 때는 엉엉 울면서 조폭 따위 안 할 거라고 집안을 휘젓고 다니곤 했었다. 그렇게 자란 지 몇 년. 외로움에 면역이 될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다만 남을 조종하는 법과 벽을 치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서투르구나.’
친해지고 싶었던 애의 셔츠 목덜미에 방아깨비를 쑤셔 넣었을 때 일이다. 학교에 불려 간 삼촌이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서툴러. 그렇게 다가가서는 안 돼. 관계는 그런 방식으로 맺는 게 아니란다.’
‘그럼요?’
‘쉽게 생각해 보자. 누군가를 괴롭히면 그 애 기분이 어떻겠니? 수민이랑 친구 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가도 사라지지 않을까?’
곰곰이 생각하는 내게 삼촌은 이건 말로 배워서는 알 수 없는 것이니 지금은 서투를 수밖에 없을 거라고 말했다. 삼촌은 나를 위하는 듯 좋게 말했지만 넌 진짜 친구가 하나도 없으니까 평생이 가도 알지 못할 거라는 말로 들렸다.
나는 노력했다. 그러나 잘되지는 않았다. 마음에 드는 애의 짝꿍을 개 패듯이 패서 내가 그 옆자리를 차지했을 때, 허옇게 질린 그 아이의 얼굴보다도 화가 난 삼촌의 얼굴이 더 뚜렷하게 기억에 남는다.
‘형은 애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뭐 한 거야? 살살 굴려 얻어 내는 법은 알아도 진심을 얻는 법을 모르잖아. 힘으로 얻어 내려고만 하잖아!’
그렇게 화를 내는 삼촌은 처음이었다. 누구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영감에게 악을 쓰고 있었다. 나는 멀뚱히 그 광경을 구경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삼촌은 죽었다. 별거 아닌 영역 다툼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운 나쁘게 휘말린 것이다. 그때쯤 나도 철이 들어 짝에게 우유갑을 던지거나 최신 장난감을 미끼 삼아 휘둘리는 꼴을 즐기거나 하지는 않게 되었다. 하야토 무리와 어울리게 된 것도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삼촌의 죽음이 슬펐냐고 묻는다면 글쎄. 이런 불상사는 빈번하게 일어나는 편이라. 나는 애도하는 대신 그저 조직을 이어받기로 결심했을 뿐이다. 개죽음 당하는 인간이 없도록 강하게 키워 내야지. 아무도 건드릴 수 없게 만들어야지.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었다.
“하야토, 수민 군에게 너무 과한 요구를 하고 있는 거 아니야?”
퍼뜩 정신을 차리니 낯선 아이 하나가 끼어들어 얘기하고 있었다. 누구더라. 얼마 전에 전학 왔다는 2반 애인 것 같았다. 온 지 얼마 안 되는 놈이 용케도 하야토 무리에 섞여 들어와 있었다.
“그, 그랬나. 어려운 요구였다면 미안해.”
“응. 수민 군이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니까 곤란했을 거야. 그렇지?”
지역 유지의 아들놈을 꼽주다니, 보통 깡이 아니었다. 어느새 굴러온 돌이 박힌 돌처럼 자리 잡은 걸까. 빨갛게 된 얼굴의 하야토를 내쫓다시피 한 전학생을 물끄러미 관찰했다. 온 얼굴에 큰 주근깨가 박혀 개구진 인상이었다.
그들의 뒷모습을 확인한 그가 활짝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반가워! 나는 료스케라고 해.”
“료스케…….”
“수민 군. 들어주기 곤란한 부탁은 거절해도 되는 거야. 친구 사이에 저런 부탁을 해 오는 건 좀 이상한 것 같아.”
료스케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 기분을 살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료스케의 그 걱정 어린 얼굴이 순간 삼촌의 것과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기분 나빠. 너.”
그래서 몸을 돌려 그냥 교실로 들어가 버렸다. 새로운 놈 비위까지 맞춰 주기엔 내가 너무 지겨웠다. 또 어느 상회 아들놈이려나. 초등학생 주제에 이런 것까지 신경 써야 한다는 사실이 끔찍했다.
“수민 군, 뭐 해?”
그러나 료스케는 매 쉬는 시간마다 나를 찾아왔다. 꺼지라고 윽박지르고 무반응으로 응대해도 지치지 않고 귀찮게 했다. 이 새낀 대체 뭘 원하길래 이렇게 끈질긴 거지? 기다려도 쉬이 거래 제안은 들어오지 않았다.
료스케는 주근깨 가득한 얼굴을 꾸준히 들이밀며 눈도장을 찍었다. 워낙 끈질겨 나는 장도팔을 시켜 그의 아비 직업을 알아냈다. 어디서 말아먹었는지 빚쟁이라 했다. 내게 원하는 게 사채 끌어다 쓰는 건 아닐 테고.
내 의심스러운 눈초리에도 료스케는 끊임없이 질척댔고, 결국 계속되는 관심에 지친 나는 그와 함께 하교하기 시작했다.
“와, 저것 좀 봐. 너무 예쁘지 않아?”
그저 흔하디흔한 강가의 풍경이었다. 료스케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자전거를 타고 산책하면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전혀 흥미롭지 않은 제안이었지만 거절하면 또 귀찮게 달라붙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쌍칼의 자전거를 쌔벼 왔다. 우리는 료스케의 낡은 자전거 바퀴가 펑크 날 때까지 산책로를 달렸다.
그렇게 지낸 지 두 달이 흘렀다. 나는 어느새 그와 등교도 같이하기 시작했다.
“있잖아, 왜 반 아이들은 수민 군한테 쌀쌀맞은 거야?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수민 군을 피하는 것 같아.”
그를 알게 된 지 세 달째 되는 날, 그가 물었다. 진짜 몰라서 묻는 건가 싶다가도 근 세 달의 행태를 보아하니 정말 모를 수도 있겠다 싶었다. 료스케는 내게 어떠한 요구도 한 적이 없었다. 나를 피하지도 않았고, 나를 무서워하지도 않았다.
“아빠가 흑련파 오야붕이라서.”
짓궂게 내뱉었다. 이 말에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놀라서 꽁지 빠지게 도망가거나 슬금슬금 눈치를 보거나 둘 중 하나겠지.
그러나 료스케는 조용히 내 등을 두드려 주었다. 놀란 쪽은 내 쪽이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등에 닿는 손바닥의 감촉을 느껴야 했다. 낯설어서, 너무나 낯설어서 몸을 공처럼 말았다.
“많이 힘들었겠다…. 그런 생각을 하는 애들이 잘못된 거야. 너는 너잖아. 아버지랑 너는 다른 사람인데 말이야…….”
딱딱하게 굳어 있는 내게 료스케가 활짝 웃어 보였다. 모래를 뿌려 놓은 것 같은 주근깨가 햇빛에 빛났다.
“걱정 마. 수민 군이 사실은 착하고 친절한 사람이라는 걸 모두들 알게 될 거야!”
“아닌데……. 나 안 착해.”
료스케는 뒷걸음질을 치는 나를 재밌다는 듯 바라보며 한 발짝 앞으로 다가왔다.
“아니야. 나는 알 수 있어. 수민 군은 사실 좋은 사람이란 걸.”
좋은 사람? 좋은 사람의 정의가 언제 바뀐 걸까. 아무리 인상을 찌푸리고 겁박해도 료스케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나는 인정해야 했다. 이번 겨울 방학을 그와 함께 보내게 되리란 것을.
어색하긴 했어도 영 싫지만은 않았다. 나는 료스케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반응하게 되었다. 따라 웃는 내 모습이 적응이 안 되어 어색하게 올라간 뺨을 쓸어내리는 버릇도 생겼다. 겨울 방학이 시작될 무렵, 나는 뚱하게 초대장을 내밀었다.
“야. 우리 집 놀러 올래? 추워 디지겠는데 자전거 타잔 얘긴 말고.”
집에 누군가를 초대하게 된 건, 료스케가 처음이었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 집 대문을 두드렸다.
“와, 너네 집 정말 크다. 그럼, 처음 뵙겠습니다!”
“집에 아무도 없어. 그냥 들어와.”
혹시나 겁이라도 먹을까 봐 조직원들은 다 내보내 버린 터라 텅 빈 저택은 한산했다. 아무도 없다는 말에도 료스케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 신발을 벗었다.
집 구경을 시켜 달라기에 대충 데리고 다니며 보여 줬다. 도우미 아줌마가 해 주고 간 간식을 먹었다. 한 시간 정도 TV를 시청했다. 뭘 더 해야 할까? 친구가 집에 온 건 처음이었기 때문에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머뭇거리는 내게 료스케가 말했다.
“우리 책 읽을까?”
나는 그를 서재로 데려갔다. 집에 책을 읽는 인구가 없었기 때문에 그나마 뭔가 많이 꽂혀 있는 방은 영감 서재밖에 없었다. 료스케는 동화 비슷한 걸 찾아내 꺼내 들었다.
“방에 게임기 있는데.”
쌍칼 거지만. 그러나 료스케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여기가 좋아. 재밌는 책 많다! 집에선 애들용 동화책만 읽게 하거든.”
“범생인가 보네, 너. 뭔 여기까지 와서 책이야.”
열세 살 꼬마들이 서재에 눌러앉아 활자를 읽는 건 누가 봐도 이상한 장면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아무래도 괜찮았다. 그는 책을 읽었고, 나는 책을 덮고 졸았다. 가을 내내 자전거를 탔던 것처럼 겨울 동안 자리 잡은 우리의 루틴이었다.
긴 방학 동안 료스케는 자주 우리 집에 놀러 왔다. 점점 익숙해져 조직원들이 집에 있을 때에도 스스럼없이 그를 불러들였다. 드디어 도련님이 친구를 초대했다고 난리 법석을 떠는 걸 막느라 힘들었던 걸 빼면 그럭저럭 괜찮은 방학이었다.
그렇게 겨울이 지났다. 즐거웠냐고 묻는다면, 글쎄. 그런 것 같기…….
……아니. 나는 익숙해진다는 걸 배웠을 뿐이다. 삼촌에게 증명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더 이상의 애 취급은 사절이라고.
“료스케는?”
겨울이 지나고 나는 처음으로 그의 반까지 행차했다. 개학날이었음에도 그 지겨운 주근깨투성이 얼굴이 보이지 않는 까닭이었다. 덕분에 간만에 재수 없는 하야토의 얼굴을 마주해야 했다.
“료스케? 아, 걔 이제 학교 안 나와. 전학 갈걸. 빚 싹 갚고 이사 간다더라.”
“그게 무슨 소리야.”
살짝 떨리는 목소리에 하야토가 건수를 잡았다는 듯, 씨익 웃었다.
“너희 요 근래 친하더니 몰랐어? 성화 그룹인가 새로 상장하는 한국 회사 있잖아. 거기 투자했대. 걔네 아버지가 워낙 도박꾼이잖아. 있는 돈 없는 돈 그러모아 탈탈 털어 넣었는데, 글쎄 그게 대박이 났나 봐.”
“성화 그룹…….”
하야토는 내 얼굴을 살피더니 짐짓 놀란 척을 해 보였다.
“정말 몰랐던 거야? 한국 회사길래 네가 가르쳐 준 줄 알았는데. 나름 내로라하는 사람들만 아는 고급 정보였더라고. 우리 아버지가 얼마나 아쉬워하던지. 함께 알면 좋잖아.”
모를 리가. 성화 그룹. 익숙한 이름이었다.
‘그럼 서울과는 그렇게 거래하는 걸로 하고. 진행하지.’
‘아, 그리고 그놈들 이번에 회사 하나를 상장한다고 하던데요. 이름이…… 성화였나. 출처 불분명한 자금까지도 다 흡수할 예정이니 세탁 필요하면 투자 부탁한다고 했습니다.’
‘그래? 그럼 내부 서류 있으면 보내 달라 해. 얼마나 대단하게 일을 벌이실지 검토해 보자고.’
영감이 언급한 적이 있다. 그리고…… 망할 놈의 료스케가 함께 들었다. 그가 쥐새끼처럼 책 속에 파묻혀 훔쳐 듣고 있었다.
피가 차갑게 식었다. 언제부터?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야토가 일그러진 내 표정을 살피는 듯했다. 나는 보란 듯이 살갑게 웃어 주었다.
교실로 돌아가지 않았다. 나는 그 길로 곧장 집을 향해 걸었다.
“도련님, 학교는 어쩌고……?”
갑작스러운 귀가에 쌍칼은 어리둥절한 모양이었다.
“형. 투자 관련 서류는 어디에 있어?”
나는 서재를 뒤졌다. 이 새끼가 어디까지 손을 뻗쳤는지 확인해야 했다.
“뭘 찾길래 그러세요? 우리 도련님, 벌써부터 조직 운영에 관심을 보이는 건가? 감격스럽네요. 그렇게 하기 싫다고 도망 다니시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성화 그룹 관련 파일. 그게 필요해.”
아니, 내가 얼마만큼 뒤통수를 세차게 얻어맞았는지 확인해야 했다. 쌍칼이 멈칫했다.
“도련님이 성화 그룹을 어떻게 알아요? 또 몰래 엿들으신 거예요?”
너희가 다 들리게 말했잖아. 초대한 쥐새끼도 들을 수 있도록 친절하게. 내 구겨진 표정을 읽은 쌍칼이 책꽂이를 훑기 시작했다.
“어. 원래 투자처들은 다 여기 모아 놨는데. 파일철 하나가 비네요?”
“됐어, 그럼.”
나는 무슨 일이냐며 붙잡는 쌍칼을 뿌리치고 무뚝뚝하게 몸을 돌렸다.
차가운 바람이 몸을 비집고 들어왔다. 두 뺨이 얼어 가는 듯 감각이 사라지고 있었지만 나는 가만히 자리를 지켰다. 어쩌면 일말의 바보 같은 희망을 품고 왔을지도 모르겠다고 아주 잠깐 생각했다.
제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썩은 나무문을 노려보았다. 이 모든 건 삼촌 때문이었다. 내가 지랄 맞게 태어난 걸 어쩌라고. 다들 이 모양 이 꼴로 나를 대하는데 내가 여기서 뭘 더 어떻게 하라고. 분노로 열이 올랐다.
다행히 더 열이 뻗치기 전에 타이밍 좋게 문이 열렸다. 나는 넋이 나간 얼굴과 마주할 수 있었다. 내 갑작스러운 방문이 달갑지 않은 건지, 딱딱하게 굳은 표정이었다.
“수, 수민 군. 여긴 어쩐 일이야? 우리 집 주소는 어떻게 알았어?”
“어쩐 일은. 우리 집 문은 제집처럼 넘나들던 놈이 갑자기 발길을 뚝 끊으니까 궁금해서 와 봤지.”
“내가, 내가 가도 되는데 뭐 하러 여기까지.”
“너 학교도 안 나왔잖아. 전학 간다며. 야, 근데 졸라 후졌다.”
나는 건물 외관을 대충 휘휘 둘러보며 파랗게 질린 료스케의 곁으로 다가갔다. 내 마지막 말이 거슬렸던 건지 그는 이를 악물고 있었다. 그러렴. 그러라고 한 말이니까 말이야.
“다행이다. 내가 작은 도움이 되어 준 것 같아서. 곧 쓰러질 것 같은 구질구질한 집에서 벗어날 수 있겠구나, 료스케.”
내가 달콤하게 속삭이자 그가 주먹을 날렸다. 순간 피할까도 생각했다. 그러나 긴 학교생활 동안 선빵을 맞아 주는 게 후사에 편하다는 걸 몸소 배워 왔기 때문에 살짝 눈을 감았다.
뺨에 작은 충격이 와 닿았다. 나는 눈 위에 누워 씩씩거리며 배 위에 올라탄 료스케를 올려다보았다. 무슨 말이라도 해 봐. 어쩐지 흥분이 되어 자꾸만 치미는 웃음을 삼켜야 했다.
“이게, 놀아 주니까 나를 지 아래로 알아!”
솜방망이 같은 주먹이 꽂혔다. 그렇구나. 망하기 전에는 꽤나 부잣집 도련님이었던 게 분명했다. 이 비실한 손목 하며 철없는 대사. 하긴, 웬만큼 독기를 품거나 멍청하지 않고서야 벌일 수 없는 짓을 했다. 내 또래 녀석이 야쿠자가 우글거리는 집에서 무언갈 훔쳐 간다는 건 꽤나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어쩐지 지겨워져 한숨이 나왔다.
“너는 나를 한 번이라도 친구로 생각한 적이 있어?”
내 한숨 같은 속삭임에 그가 악을 썼다.
“누가 너 같은 것과! 더러운 뒷골목이나 전전하는 너랑, 잠깐 굴러 들어왔을 뿐인 내가 같다고 생각해?!”
나는 히죽 웃었다. 그럼 그렇지! 실망할 뻔했네.
나는 무릎을 들어 올려 료스케의 복부를 가격했다. 그가 소리를 지르며 나뒹굴었다. 지겨워, 정말 지긋지긋해. 지겹게 반복되는 이 패턴들. 나는 료스케를 후드려 패며 생각했다.
바보같이 속아 넘어가다니. 저 모가지를 비틀어 버릴까 생각도 했지만 올라가던 손을 내렸다. 사실 이건 오롯이 내 탓이었다. 약해진 내 탓. 외로움을 견디지 못한 내 탓.
나는 필요했던 것이다. 그 누군가가.
아무 이유 없이 내 편이 되어 줄 누군가.
짜증 나는 사실이었다.
“이거 안 먹냐? 안 먹으면 내가 먹는다?”
김정현은 여러모로 신기한 놈이었다. 나를 무서워한다고 말하면서도 꾸역꾸역 제 할 말을 하고 부당한 계약에 발 묶여 있으면서도 툴툴거리기만 할 뿐 별달리 대단한 리액션을 취해 오지도 않는다.
쥐어 터지면서도 나를 구하겠다고 두려워 마지않는 선배 새끼와 맞붙기까지 했다. 겁도 많은 게. 일부러 어디까지 하나 지켜보았다. 의식을 잃어 가면서도 그의 입 모양은 도망치라고 말했다. 정말이지, 바보가 따로 없었다.
“왜……. 또 왜 그러는데.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건데?”
오, 이제는 내가 막 편한가 봐. 나는 김정현의 맹한 얼굴을 위아래로 훑었다. 제 딴에 찔렸는지 떡볶이 그릇을 내민다.
“아, 알았어. 소시지는 안 먹을게. 그럼 됐지? 만두는 딱 두 개씩 들어가 있어! 공정하게 나눈 거야.”
“너 다 먹든가 말든가.”
나는 어쩔 줄 몰라 하는 김정현에게 쏘아붙였다. 그의 뒤로 재수 없는 곰 인형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침대에 곱게 놓인, 전 여친이 줬다는 인형. 김정현은 때가 꼬질꼬질한 저 인형을 매일 밤 끌어안고 잔다고 했다. 이름이 테디라고 했나.
“아, 저거. 세탁할 때가 되긴 했지.”
“언제 빨 건데?”
“어……?”
“더러워 죽겠어. 빨리 빨아 버려. 저런 털에 진드기가 얼마나 많은 줄 알아?”
나는 반도 줄지 않은 떡볶이를 내버려 두고 일어났다. 김정현이 슬금슬금 눈치를 살피는 게 느껴졌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기분을 신경 써 줄 시간이 없었다. 안 그래도 저 재수 없는 곰인형을 눈앞에서 치워 버리려 했는데 오늘이 날인 거 같았다.
“저기 맞아?”
“넵. 이 동네에선 제일 큰 완구샵이랍니다. 오래된 가게니까 찾으시는 물건이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나는 동네 장난감 가게를 이 잡듯이 뒤져서 겨우 그 멍청한 곰 인형을 찾아냈다. 오래되어 먼지가 잔뜩 쌓인 곰 인형은 아무도 찾아 주는 사람이 없었는지 선반 저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불쌍한 것. 나는 인형의 궁둥이를 탈탈 털어 내며 읊조렸다.
“네 이름은 곰돌이야. 거지 같은 테디 따위가 아니라.”
그리고 며칠간 커다란 곰 인형을 들고 김정현의 집 근처를 서성거리는 게 일과가 되었다. 차마 김정현네 집에서 빨래를 언제 너는지까지 알아 오라고 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잡심부름은 완구샵으로도 족했다. 내 헛짓거리를 놈들이 뭐라 생각하고 있을지는 알고 싶지도 않았다.
며칠의 헛고생 끝에 드디어 김정현네 앞마당에 흰 곰 인형이 걸렸다. 포실한 솜뭉치를 마주했을 때, 나는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인형 든 수상한 놈이 어슬렁거린다는 신고라도 들어왔을까 봐 내심 걱정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본 녀석은 땟국물을 씻어 내 제법 말끔한 모습이었지만 세월의 흔적은 지워 내지 못했는지 여기저기 실밥이 뜯어져 있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테디의 귀를 잡고 끌어냈다.
“꺼져.”
그리고 빨랫줄에 새삥이라 반짝거리는 곰돌이를 걸었다. 제 운명을 아는지 모르는지 곰돌이가 멍청하게 웃었다. 나도 같이 픽 웃어 주었다.
김정현은 갑자기 새것이 된 곰 인형을 보고 어떤 반응을 보일까? 생각보다 더 단순한 놈이니 의심 없이 곰돌이를 제 침대에 데려다 놓을 것이다. 나는 그 장면을 상상했다.
곰돌이는 매일 밤 김정현의 묵직한 무게를 견디어야 할 것이다. 바뀐지도 모르고 새 곰을 꼭 끌어안고 자겠지. 나는 흡족해져 휘파람을 불었다.
시선이 느껴져 돌아보니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가 멍하니 내가 하는 일을 구경하고 있었다. 나는 손에 든 테디를 아이에게 안겨 주었다.
“너 가져. 이제 얘는 네 거야.”
지긋지긋한 일상에 찐따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너를 어떻게 구워삶아 줄까. 문득,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서툴다고 속삭이던 삼촌이 떠올랐다. 서툴러. 서툴러, 차수민.
아무래도 좋아. 나는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좋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