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
기억나니
내가 그 녀석을 처음 만난 건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김정현! 너도 여기 됐냐?”
“어, 반갑다.”
“아는 얼굴 많네. 오. 거의 우리 중학교 애들인데? 다행이다, 그치?”
“으음. 뭐.”
남고 특성상 동네에서 알던 녀석들이 그대로 올라왔고 중학생 때와 비슷하게 서열이 정리되었다. 명문대 진학을 목표로 공부에 매진하는 무리, 적당히 즐기고 적당히 공부하며 평범함에 적응한 무리, 자신의 나약함을 내비쳐 동정을 받거나 혹은 단물이 빠질 때까지 이용당하는 무리, 호시탐탐 위로 올라가기 위해 눈치 보며 비굴함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무리.
그리고 그런 그들을 손아귀에서 굴리며 때로는 하늘을 나는 기분을 맛보여 주고 또 때론 땅 끝까지 처박아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기분을 느끼게 해 주는 무리.
학교는 다양한 인간 군상이 모여 있는 작은 사회였다. 자신이 속한 무리가 무엇인지에 따라 피라미드의 계층이 나누어진다. 그리고 그 계급 속에서도 또다시 서열이 매겨진다. 한번 찍힌 낙인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쉽게 바뀌기 어렵다.
“학교 한번 후지다. 그렇지 않냐? 이딴 데서 3년을 다녀야 한다니.”
“어. 그러네.”
나는 평범함을 추구하면서도 피라미드의 정점에 속해 있었다. 시작은 단순했다.
“김정현, 오늘도 고?”
“그래! 나 집 들렀다 갈 테니까 먼저 하고 있어!”
그저 축구를 좋아하던 나는 같은 접점을 가진 또래들과 쉽게 친해졌고 소위 그 지역에서 한 가닥 하는 애들과도 안면을 트게 되었다. 물론 그때는 지금처럼 반 전체를 하나하나 분석했던 것은 아니다. 나한테는 다 같은 친구였고 서열이니 뭐니 피부로 느낄 만큼 세상을 알지도,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어둠의 중2병이 창궐하는 시기가 오자 상황은 변하고 말았다. 그때도 나는 기껏해야 까리해 보이고 싶어 머리카락을 레드와인으로 물들이고 학주에게 자연이라고 이빨을 까고 다니는 허세 찬 중학생에 불과했다.
“김정현. 이 슥기 또, 또 카라 세우지. 명찰 어딨노? 대가리는 그게 뭐고?”
“아씨, 다른 학교는 대가리가 노랗든 파랗든 신경도 안 쓰는데 왜 우리만 자꾸 잡아요…….”
“왜애? 왜겠냐? 이리 와. 이름 적고 가.”
여느 날처럼 명찰을 깜빡해 선도부에 이름이 적히고 쿨한 척 백팩을 비스듬히 메고 교실로 들어가는 중이었다. 아직 조회 시간이 되지 않아 복도는 어수선했다. 그렇지만 뭔가 평소와는 달랐다. 아이들의 말소리 사이로 수런거림과 무거운 공기가 읽혔다. 새파랗게 질린 여자애 둘이 입을 가린 채 지나갔다.
“뭐야, 미쳤나 봐…….”
“담임한테 말해야 하는 거 아니야?”
“미쳤어? 무슨 꼴을 당하려구.”
나는 몰려 있는 아이들의 틈바구니를 헤치고 들어갔다. 내 뒷자리 애가 무지막지하게 맞고 있었다. 걔를 개 패듯이 패고 있는 세 명은 어제도 나와 축구를 했던 친구들이었다. 그때 내 눈에 씌워져 있던 사랑과 평화의 콩깍지가 떨어져 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뭘 봐, 개새끼들아! 눈 안 깔아?”
상대의 으름장에 얼굴이 새파래졌지만, 내 안에 남아 있던 콩 같은 정의감이 다리를 질질 끌어 그 앞에 가져다 놨다.
“어, 김정현 아니야. 어젠 잘 들어갔냐? 다리 접지른 건 괜찮아?”
애 하나를 반쯤 죽여 놓고 태평하게 대화를 걸어오는 그에게 쿵쾅거리는 심장을 숨기고 느물거리며 입을 놀렸다.
“완전 말짱해. 오늘도 한 판 더 뛸 수 있어. 근데…… 뭐 해, 너네. 아침부터 괜한 소란 피우지 말고 앉아.”
나는 쓰러진 애를 일으켜 밖으로 내보냈다. 알아서 가라. 보건실이든 교무실이든…….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들을 향해 말을 이었다.
“아, 너희 새벽에 토트넘 경기 봤어? 완전 대단했지?”
그들을 앉히고 얼마간 나불대자 선생님이 들어왔다. 그렇게 사건은 일단락되는 듯싶었다.
“김정현, 이따 끝나고 뭐 하냐?”
“집 가서 잘 건데, 왜?”
“그러지 말고 놀러 가자. 김형준이 용돈 받았다고 쏜대. 다 털어먹어야지. 너도 가는 걸로 안다?”
학교는 정글이었다. 내가 모르는 사이 저마다 자신의 성향에 맞게 무리를 형성했고 반에서는 서열이 정해져 있었다. 그 사건으로 나는 얼떨결에 ‘노는 애들’ 무리에 섞이게 되었고 더욱 치열한 경쟁을 해내야 했다. 조금이라도 얕보이면 죽는다. 사실은 무서워 죽겠어도 세상을 내 발아래 둔 것마냥 뻔뻔하고 오만하게 굴어야 했다.
아니, 내가 왜……?
어이가 없었지만 이제 와 발 빼기도 뭣한 일이었다. 아마 그랬다간 먼지 나게 다구리 맞겠지. 무서웠다. 그래서 가진 건 좆도 없으면서 있는 척을 했다.
수컷들의 서열은 무식하고 단순하게 정해진다. 게임 퀘스트를 깨는 것처럼 인내심을 가지고 하나하나 달성해 가면 된다. 정신없이 버티다 보니 어느새 나는 범생이들이 슬금슬금 피하는 레벨이 되어 있었다.
그럴수록 속은 항상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익숙해진 것 같으면서도 눈 마주치면 내리까는 반 애들이 묘하게 불편했고 항상 죄짓는 기분이었다. 가장 두려운 것은 내 알맹이가 탄로 나는 것이었다. 사실은 겁 많고 평범하기 그지없는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 언제 내 진짜 모습이 벗겨질지 몰라 두려워 노심초사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고등학교만큼은 그들과 떨어지고 싶었다. 그러나 이 망할 놈의 뺑뺑이. 나를 떡하니 공립 남고에 처넣었으니 눈물을 삼키며 그 운명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김정현이. 네가 김정현이 맞제? 상호한테 익히 들었다.”
“예에…… 안녕하세요…….”
“마, 반반하게도 생겼다. 여자애들한테 인기 쥑이겠네. 크큭. 언제 형이랑 밥 함 묵자.”
“하하. 밥이요. 밥……. 네에. 먹어야죠. 밥.”
고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중학생 때 알던 선배들과 처음 보는 선배들이 아는 체를 해 왔고 그들만의 카르텔에 날 끼워 넣으려 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소개해 주는 선배들에게 인사를 다녔다.
“빼도 박도 못 하고 이게 뭐 하는 짓이냐.”
“그치, 김돼지 비위 맞추기 좀 귀찮긴 해. 야 그래도 그 밑에 있으면 쉽게 생활한다고.”
“쉽다고?”
나는 쉽지 않았다. 중학교가 애들 장난이었다면 고등학교는 리얼이었다. 머리 좀 컸다 이거지. 그저 으름장 놓고 사나운 눈초리로 기죽이는 것은 초심자 레벨이었나 보다. 선배들은 됐다고 한사코 만류하는 나를 굳이 자기들의 아지트로 끌어들였다.
정말이지, 죽을 맛이었다. 평소에는 피우는 척만 했던 담배를 속담으로 뻑뻑 피워 대야 했고 기껏해야 ‘야, 너 운동화 샀냐? 멋있다? 하루만 빌린다?’ 정도였던 기죽이기가 이제는 금품 갈취로 변해 있었다.
처음 삥을 뜯은 날엔 죄책감에 시달려 하얗게 밤을 새우고 새벽같이 학교로 달려가 그 아이의 사물함에 그만큼의 현금을 넣어 놨다.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인지. 알면서도 발을 빼기엔 너무나 먼 길을 걸어온 듯했다.
그날은 봄치곤 제법 쌀쌀했다. 콘크리트 바닥에 허옇게 서리가 내려앉아 있었다. 아직 학기 초였으나 수업을 짼 횟수는 다섯 손가락에 다 담기지 않는다.
“으이구, 힘들게 네놈들 먹여 살리는 부모님을 좀 생각해 봐라!”
담임의 말이 요즘 따라 아프게 가슴을 파고들었다. 나는 이렇게 살다 인생 말아먹겠구나,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드는 요즘이었다.
나는 선배들에게 사냥당하여 운도 지지리 없는 누군가를 사냥하기 위해 기다리는 중이었다. 하필이면 날도 이런 때에. 간지를 위해 얇은 재킷 하나만을 걸친 채라 얼어 뒤질 것 같았지만 꾹 참고 덜덜 떨며 사냥감을 기다렸다.
“시발, 진짜 돈 필요한 것도 아니면서.”
“우리 기죽이기지 뭐.”
“추워 죽겠다. 있어 보이든 없어 보이든 무조건 처음 지나가는 애로 하자.”
“그래. 어떤 놈이 운이 나쁜지 한번 보자고.”
“탈탈 털면 몇만 원은 나오겠지.”
아직 한창 점심시간인지라 소각장 뒤쪽 외진 담벼락에는 쥐새끼 하나 보이지 않았다. 가끔 청소부 아주머니가 별 이상한 놈들을 다 봤다는 표정으로 분리수거 할 박스를 옮겨 놓을 뿐이었다.
“우리 자리를 잘못 잡은 거 아니야?”
“안 돼. 다른 데는 선도 지나다녀. 이번에 걸리면 난 삼진 아웃임.”
“어, 저기 온다!”
운 없는 한 학생이 터벅터벅 운동장 모서리를 걸어오고 있었다. 야리야리한 작은 몸체에 조막만 한 얼굴을 다 덮는 검정색 뿔테안경. 됐다, 됐어. 이 시간에 홀로 학교를 배회한다는 것부터가 찐따 새끼가 틀림없었다. 우리는 그를 맞이하기 위해 서둘러 자세를 잡았다.
“어이, 찐따. 어디 가냐?”
상호가 제법 무겁게 목소리를 깔고 들어왔다. 거대한 남자 셋이 분위기를 잡고 서 있었으나 상대는 우리가 화단의 쓰레기통이라도 되는 양 가볍게 무시한 채 앞만 보고 그대로 지나쳐 갔다.
면전에서 개무시당한 이상호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그 또한 개무시한 채, 가벼운 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찐따의 셔츠 목덜미를 잡아끌자 그제야 상대의 하얀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이 씨발 새끼가. 귓구멍이 막혔냐?”
커다랗고 붉은 얼굴을 가져다 대자 상대의 작은 얼굴이 더 도드라져 보였다. 놀랐는지 하얗게 질려 창백한 얼굴로 커다란 눈동자를 깜빡이고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뿔테안경 너머로 보이는 얼굴이 꽤나 곱상하여 선이 얇은 기생오라비 같았다.
예쁘다, 순간적으로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저요?”
예쁜이가 놀란 토끼 눈으로 물었다. 미처 우리의 존재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제스처였다.
“그래, 너. 이 찐따 새끼야. 계집애같이 생겨서는 말귀도 못 알아 처먹네.”
건장한 체구의 남자 셋이 저 조그만 애를 잡고 윽박지르는 꼴은 누가 봐도 노간지겠다 싶어서 나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나 있었다. 가만히 있어도 순조롭게 안주머니까지 탈탈 털어 벗겨 먹을 수 있겠다 싶었다.
“가진 돈 좀 있냐?”
협박하는 상호를 빤히 바라보던 기생오라비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제야 상황 파악이 되는 것 같았다.
“아하.”
“가진 돈 좀 있냐고, 찐따 놈아. 겉옷부터 벗어 봐. 5만 원. 딱 5만 원만 나오면 형이 용서해 준다.”
“저는 찐따가 아닌데요.”
“뭐? 이게 돌았나!”
집채만 한 사내의 윽박이 아무런 타격을 주지 못했는지, 뿔테의 눈매가 반달 모양으로 접히며 명백한 비웃음의 표현이 나타났다. 저게 진짜 돌았나? 지금 어떤 상황인지 모르는 건가? 그냥 이 자리에서 좋게 좋게 해결하고 나중에 몰래 만나 떼어 간 금액을 돌려주려고 했던 내 안에 언젠가부터 깊게 뿌리를 내린 양아치의 새싹이 스멀스멀 고개를 들었다.
나는 단단하게 멱살 잡혀 있는 그에게 다가갔다.
“자자, 열 올리지 말자. 이상호, 너도 이거 잠깐 놓고. 미안, 놀랐지? 우리가 막무가내로 달라는 게 아니고 잠시 빌린다는 거야. 금방 쓰고 돌려줄게.”
이 새낀 왜 삥을 신사적으로 뜯냐, 뒤에서 중얼거리는 친구의 말을 싹 무시하고 계속 말을 이어 갔다.
“혹시 얼마 가지고 있어? 잠깐 보여 줄래? 이름이…….”
그의 가슴팍에서 흰 명찰을 찾아내었다. 차수민.
“차수민. 그래, 수민이. 우리 거래하자, 수민아. 조금만 쓰고 금방 돌려줄게.”
가만히 고개 숙인 채 내 말을 꾸역꾸역 듣고 있던 차수민이 이름이 불리자 퍼뜩 고개를 들었다.
“거래?”
예고 없이 마주친 시선에 순간 당황하여 그의 눈동자에 붙잡히고 말았다. 슬며시 엿본 그의 눈동자에는 빠지면 걷잡을 수 없이 나락으로 인도할 블랙홀이 있었다. 어, 내가 멈칫하고 있자 조용히 팔짱만 끼고 있던 주용재가 끼어들었다.
“됐어. 뭘 그리 싸불대고 있냐. 이런 자식은 매가 약이야. 야, 어금니 꽉 깨물어라? 강냉이 나갈 수 있으니까.”
차수민이 바람처럼 몸을 빼내어 살쾡이 같은 몸짓으로 주용재의 목덜미를 누른 건, 주용재가 두꺼운 주먹을 그의 얼굴에 내다 꽂기 위해 막 팔을 들어 올렸을 때였다.
“아?”
차수민이 멈칫한 주용재의 엉덩이를 있는 힘껏 차올렸다. 용재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더러운 분리수거함으로 얼굴을 처박았다. 기절한 듯했다. 너무나도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방어 자세를 취하기도 전이었다.
“뭐냐, 쟤…….”
그는 넋 빠진 상호가 정신 추스를 시간도 주지 않고 달려들었다. 그럼에도 전혀 당황하지 않았는지 차수민은 재빠르게 움직였다. 고양이처럼 가벼운 몸놀림이었으나 노리는 곳은 급소였다. 전문 파이터의 냄새가 났다. 90kg에 육박하는 거대한 풍채가 낙엽처럼 쓰러졌다.
모래바람이 스치고 덩굴이 굴러다니는 황야의 카우보이처럼 눈 깜짝할 사이에 상황을 정리한 차수민이 저벅저벅 다가올 때까지 나는 차마 그 자리에서 달아날 생각도 못 하고 전봇대같이 서서 눈만 끔뻑거리고 있었다.
“어…….”
“놀랐냐?”
“…….”
“아이고, 이런 찐따 새끼를 봤나.”
차수민이 픽 웃으며 몸을 날릴 때 떨어뜨린 뿔테안경을 주워 먼지를 털어 냈다. 그의 맨 얼굴이 형형했다. 명백히 나를 향한 비웃음이 서려 있었으나 나는 긴 속눈썹과 수려하게 잘 빠진 그의 턱선을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나른한 움직임으로 안주머니에서 담뱃갑을 찾아든 손가락이 입술에 돛대 하나를 끼워 불을 붙였다. 마치 원래 이게 목적이었다는 듯이 유유히 소각장으로 향하던 그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 뒷걸음질을 했다.
“아, 맞다.”
그는 지갑을 꺼내 바보처럼 얼어붙은 나에게 지폐 뭉치를 건넸다.
“자, 쓰고 갚아.”
“이게, 뭐야……?”
나는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억지로 끌어모아 물었다. 그가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며 대답했다.
“돈 빌려 달라며.”
5만 원권 스물세 장. 자그마치 115만 원.
집에 와 몇 번을 세어 봐도 장 수는 변하지 않았다. 처음 만져 보는 큰 액수의 현금에 감히 더는 만져 볼 생각도 못하고 서랍 깊숙한 곳에 모셔 놓았다. 고등학생 주제에 이런 걸 들고 다니다니 대체 뭐 하는 인간이야? 갑부집 도련님이라기엔 꼴이 수더분했고 학원비라기엔 너무나도 많은 양의 현금이 지갑 속에 빼곡했다. 그 전문적인 몸놀림은 또 뭐고. 솔직히 격투기 선수라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병원 신세를 지게 된 둘은 쪽팔렸는지 그때 일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180도 안 되어 보이는 허여멀건 한 녀석에게 당해 묵사발이 되었으니 창피해 죽을 법도 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음에도 없는 일진 노릇에 괴로워했지만 긴 경력이 그냥 생긴 게 아닌 듯 이런 상황에 자존심이 상하다 못해 누군가의 귀에 들어가지는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얼이 빠져 받아 든 돈다발. 돌려줘야지 생각한 지 사흘이 지났으나 무서워서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간 아가리만 놀렸지 주먹이 오고 가는 현장은 처음 겪어 봤다. 그리고 그렇게 적수도 안 될 법한 상대는 난생처음이었다.
“차수민. 알아?”
“차수민? 7반 차수민?”
학교의 정보통이자 얇고 넓은 인맥으로 모르는 것이 없는 이수를 찾아갔다.
“어. 하얗고…… 예쁘게 생긴 애.”
마음에 들지 않은 표현이었지만 마땅히 설명할 단어가 없었기에 흔한 형용사로 얼버무렸다.
“아, 알지! 우리 반이거든. 인형같이 생겨서 반에서 되게 조용한 애. 맞지?”
“조용하다고?”
“응. 딱히 나대거나 시끄럽게 구는 걸 못 봤는데. 좀 특이하긴 해. 다 시꺼먼데 지 혼자 명도가 달라서. 근데 그런 것치곤 눈에 안 띄는 편이네, 생각해 보니까.”
그것참 의외였다. 한 성깔 할 것 같은데.
“지가 눈에 안 띄려고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자기가 남들을 왕따시킨다고 믿는 자발적 아싸인가 봐. 한 마디 하는 걸 못 봤어. 하긴. 떡대들 득실거리는 남고에서 그런 애가 눈에 띄어 봤자 좋은 일이 뭐 있겠어.”
그건 그렇지. 호구 잡혀 삥이나 뜯기겠지. 며칠 전 내가 그랬던 것처럼. 어쩐지 황망해져 쓴웃음을 삼켰다.
어쩌면 이런 것에 대비해서 운동을 배웠을지도 모른다. 나처럼 주머니나 터는 무뢰배들이 과거에서부터 쭉 괴롭혀 온 거지. 제 몸을 보호하기 위해 킥복싱 도장에 다니며 단련하는 차수민을 떠올려 보았다. 자기의 능력으로 대적할 수 없는 상대에게는 어쩔 수 없이 돈을 지불하기 위해 그 두꺼운 지갑을 들고 다니는 것이 아닐까?
별의별 생각에 밤잠 못 이루다가 돈 봉투가 서랍 안에 있는 한은 제대로 잘 수가 없을 것 같아 다음 날 등교하자마자 곧바로 7반으로 향했다. 뒷문에서 얼쩡거리던 안경쟁이 하나를 잡아 말했다.
“너희 반에 차수민 좀 불러 줘.”
나의 등장에 웅성거리던 반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다. 겁먹은 표정으로 안경이 ‘야, 너 나오래’ 하고 반 구석에 처박혀 죽은 사람처럼 잠자던 수민을 깨워 냈을 때 웅성거림이 다시 파도처럼 요동치기 시작했다.
“헉. 까이러 가나 보다.”
“아니야, 김정현이잖아.”
반 아이들의 수군거림과 함께 떨떠름한 얼굴로 불려 나온 차수민이 게슴츠레한 눈을 비비며 아래서 위로 훑어보았다.
“뭔데.”
“옥상으로 올라와.”
이게 어디서 이래라저래라야, 하며 내 목을 비틀어 재낄 차수민을 생각하고 순간 눈을 질끔 감았으나 의외로 군말 없이 순순히 따라왔다.
“헐. 찍혔나 봐, 쟤.”
7반 애들의 웅성거림을 뒤로하고 나는 죄수처럼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남들이 보기엔 영락없이 약한 애를 괴롭히러 온 일진 같았겠지만, 실상은 내가 무서워 죽을 지경이었다. 언제 주먹이 날아올지 몰랐다. 심장이 살갗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쿵쿵거렸다.
“자, 여기.”
옥상에 올라오자마자 가슴속에 고이 보관하던 돈 봉투를 꺼내 그의 손에 건네주었다. 봉투를 꼭 쥐고서 수많은 고민을 하였던 터라 쌈짓돈처럼 꼬깃꼬깃했다.
“돌려주려고. 생각을 좀 해 봤는데 네가 날 봐준 것 같아. 그날 미안했어. 나쁜 뜻은 없었고, 그냥 네가 맨 처음으로 오길래…… 딱 특정해서 너를 고른 게 아니야. 알아줬으면 해.”
봉투를 받아 들고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 침을 꿀꺽 삼키고 변명을 늘어놓았다. 말없이 듣던 그는 고개를 숙여 벌어진 봉투 속에서 지폐 뭉치를 꺼내 들었다.
“아, 안 썼어. 하나도! 내가 어떻게 쓰냐. 정말 뺏으려던 게 아니라, 설명하기 복잡한데. 여튼 나쁜 의도는 없었어.”
천천히 한 장씩 넘기며 돈을 세 내어 가던 손이 딱 멈추자 내 심장도 함께 멈췄다. 입을 벌리면 펄떡이는 심장이 그대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가 나른하게 웃으며 말했다.
“덜 갚았는데?”
“뭐? 그럴 리가.”
“이런 건 철저히 해야 하거든. 우리 집 가업이라.”
그가 당황한 내 손에 5만 원권 다발을 넘겨주자 땀 나는 손으로 장 수를 셌다. 신사임당 스물세 장. 115만 원.
“맞는데, 115만 원.”
항상 매력적이라 생각해 왔던 내 목소리가 멍청하게 들릴 줄이야. 수민은 날 안쓰럽게 한번 쳐다봐 주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지. 계산이 잘못됐잖아. 네가 빌려 간 돈 원금 115만 원에 오늘로 며칠이 지났지? 4일인가. 학생이니 일간 이자 150%.”
그가 잠시 눈을 감았다. 머릿속으로 이 말도 안 되는 이자율을 계산 중인 듯했다.
“이자만 690만 원이네. 지금 말하는 와중에도 이자는 계속 붙고 있는 거 알지.”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정말 말도 안 되는 계산법이었다. 일간 이자라니 그런 살인적인 이자율이 어딨어. 사채를 끌어다 써도 이보단 낫겠다.
“원금 회수는 이자 먼저 다 갚고 하도록 할게. 괜찮지?”
내 반발에 그가 악마처럼 웃으며 말했다. 그의 등 뒤로 커다란 악마의 날개가 퍼덕거렸다. 매캐한 지옥 불에 방금 발을 디딘 듯했다. 치익, 타는 소리가 환청으로 들렸다. 발끝이 뜨거웠다.
“무슨 또라이 같은 소리야.”
나는 이 말도 안 되는 억지에 무서움도 잊고 따지기 시작했다.
“억울해?”
“당연히 억울하지! 너는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가만 듣던 차수민이 갑작스레 다가와 지보다 한참은 큰 내 멱살을 잡아챘다. 몸이 크게 휘청였다.
“어어?”
저 작은 몸 어디서 이렇게 큰 힘이 나는지 장신의 나를 개처럼 질질 끌어 난간으로 향하고 있었다. 졸지에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가 된 나는 멱살을 움켜쥔 손을 풀어내려고 안간힘을 써 봤지만, 인상만 찌푸리게 할 뿐 크게 먹히지 않는 것 같았다.
“헉.”
내 머리는 이제 허공으로 빠져나와 등허리만 난간에 의지하는 바람 인형과 같은 꼴이 되었다. 하늘에 걸린 구름 몇 조각이 눈에 보이자 오싹한 두려움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잠깐! 잠깐, 잠깐!”
미친 듯이 버둥거리며 소리를 지르자 그가 손아귀의 힘을 풀었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안전한 사각 틀 안으로 들어와 쭈그려 앉았다. 짜릿한 발끝에 그림자가 졌다. 차수민이 우뚝 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시 물을게. 억울해? 억울하냐구.”
“아, 아니. 안…… 억울해.”
“그럼 됐네.”
억지로 목소리를 짜내자 날 따라서 쭈그려 앉은 그가 시선을 마주해 왔다. 울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왠지 억울해 보이는데.”
“아, 아냐. 눈에 먼지가 들어가서.”
“음. 아무래도 큰돈이긴 하지.”
당연하지! 690만 원이 뉘 집 개 이름인 줄 아나. 심지어 나는 돈 봉투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다고. 억울해 돌아가시겠다. 차마 말도 못 하고 타들어만 가는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상대는 가만히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알겠어. 봐줬다.”
“진짜?”
“노동력으로 갚아.”
“어?”
“일해서 갚으라고.”
“일? 아르바이트……?”
이런 답답한 놈을 봤나. 인형같이 큰 표정 변화가 없던 얼굴에 잠시 짜증이 스쳤다. 히익, 어깨를 움츠리자 얼굴을 가까이 해 한 글자씩 또박또박 설명해 주는 친절함 또한 갖추었다.
“이거 순 멍청이네. 못 알아들어? 다 갚을 때까지 내 따.까.리.나 하라고.”
정말이지 놀라운 배려였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따까리…….”
항상 내 입에서 나왔지 남의 입에서 이 단어가 나온 것은 굉장히 드문 일이라 멍하니 되씹어 보았다.
“야, 폰 내놔 봐.”
주머니를 뒤져 핸드폰을 낚아채 간 수민이 꾹꾹 자판을 두드려 무언가를 입력한 후 내 재킷 앞주머니에 팁 주듯 얇은 핸드폰을 꽂아 주었다.
“내 번호. 부르면 재깍 튀어나와. 뜸 들이지 말고. 늦을 때마다 대출 상환 역시 늦어진다고 생각하도록 해.”
그렇게 나와 차수민의 계약이 시작되었다. 불공정하고 일방적이며 한쪽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우위의 갑인 계약. 얼떨결에 그러겠다고 대답한 나를 옥상에 남겨 두고 욕설을 뱉으며 내려가는 그의 뒷모습은 이런 거지 같은 방식은 상상도 못 할 것처럼 순수한 소년 그 자체였다.
나는 바람에 팔랑이는 돈 봉투를 손에 꼭 쥔 채 그의 앞이라 뱉어 내지 못한 속마음을 내질렀다.
“시바아아아알!!!!!”
찌질하다, 찌질해. 누가 봐도 그렇게 비춰지겠지. 코앞에선 쫄아서 한마디도 못 하고 분위기에 압도되어 상대가 하잔 대로 하게 생겼다. 나한텐 손해만 보는 장사였다. 아니 애초에 빚진 것이 없는데?
“그래, 나 찌질하다.”
찌질한 나는 그 이후로 언제 휴대폰이 울릴지 노심초사 기다렸다. 폰에서 미세한 진동이라도 새어 나오면 벌떡 일어나 메시지를 확인했다. 반 이상은 쓸데없는 광고 문자였다. 무이자 대출, 카드론, 저담보 대출. 갖가지 사채 광고들. 아니 고등학생한테 이딴 문자나 보내고. 세상에 무이자 대출이 어디 있냐고.
“뭐야, 김정현 여친 있어?”
강박적으로 핸드폰을 확인하는 모습이 그렇게 보일지는 몰랐다. 너는 내 눈에 깔린 공포심이 안 보이니? 한수진은 그때도 역시 사람 속을 북북 긁어 놓는 걸 좋아했던 것 같다.
“있겠냐. 고등학교 입학하고 여자라곤 한 명도 못 봤거든?”
김돼지 같은 무지막지한 양아치들한테 불려 다니느라 바빠서. 중딩 땐 나름대로 이성의 선망을 받으며 생활해 왔다. 안 즐겼다 그러면 거짓말이겠지. 무리에서 제법 몇 명을 만나 보기도 했고 그런 관심이 싫지는 않았다. 생각해 보니 나도 순 양아치였네. 안 돼요, 싫어요, 억지로 일진 짓 하는 것 같다가도 서열이 높아 생기는 이점은 다 받아먹고 살았다. 기가 찰 노릇이다. 차수민을 만난 이후로 자기반성이 늘기 시작했다.
“김정현. 생각해 보니 우리 졸업하고 처음 만나는 것 같다? 간만에 애들도 보고 싶고. 야, 이 기회에 우리 동창 모임 할까? 내가 새로 사귄 애들 소개시켜 줄게.”
“됐어. 그냥 이렇게 가끔 만나면 되지.”
“야, 너 엄청 조용해졌다? 이런 자리엔 김정현이 빠지면 안 되잖아. 모이자! 내가 진짜 예쁜 애 소개해 줄게.”
“예뻐……? 아냐. 난 네 눈 못 믿어.”
“시발새끼가. 일단 만나 보라고. 나중에 나한테 절하지 말고.”
그럼 함 만나 볼까? 애들 본 지도 오래됐고. 빼던 것을 뒤로하고 신이 나 둘이 날짜까지 정해 가며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커피가 식어 갈 때쯤 핸드폰이 울렸다. 나는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차수민]
액정 위에 뜬 이름은 지옥의 사신, 그였다.
“헉, 여보세요…….”
-소각장으로 와. 3분이면 충분하지? 늦으면 알아서 해.
소각장? 학교까지 10분은 걸리는데. 새파랗게 질려 짐을 챙겨 나갈 채비를 하자 수진이 시끄럽게 호들갑을 떨며 가려는 나를 잡았다.
“누군데? 누군데 그래!”
“담임. 야자 짼 거 걸렸어. 얼른 튀어 오래.”
자존심이 있지 어떻게 삥 뜯던 애한테 삥 뜯기게 생겼다고 말해. 그래서 나를 이렇게 여기 두고 가겠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수진을 남겨 두고 뛰기 시작했다.
눈썹이 휘날리도록 달렸다. 허겁지겁 뛰어가니 저 멀리서 담배를 태우는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몸집이 작은 대신 간이 큰 건지. 걸리면 바로 퇴학일 텐데. 아무리 사람이 잘 지나다니지 않는 곳이라지만 대놓고 뻐끔뻐끔 연기를 피워 대고 있었다. 나는 그 앞을 뚫고 거친 숨을 내뱉으며 헉헉거렸다.
“6시 38분. 3분 늦었어.”
여유롭게 손목의 시계를 훑고 담뱃재를 툭툭 털어 내는 그는 죽을 것처럼 콜록거리는 내 모습은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그 우아한 스냅을 노려보다가 정신이 들어 눈을 깔았다.
“전, 전화 받을 때 학교에 없었거든. 그래서 늦은 거야. 엄청나게 뛰어왔다고.”
왜인진 모르겠으나 무뚝뚝하게 듣고 있는 그의 앞에서 나는 땀 흘려 가며 열심히 변명하고 있었다.
“왜. 불렀는데…….”
“왜 불렀을 것 같은데?”
“그야…….”
일 시키려고. 지지도 않은 빚을 노동력으로 갚으라 했으니까.
얼마나 무시무시한 요구가 들어올지 벌써부터 두려웠다. 막노동판에 중개할지 원양 어선에 팔아넘길지. 얼마 전 식당의 TV에서 본 남고딩들 사이에 아줌마와 원조 교제하는 용돈 벌이가 성행한다는 뉴스가 불현듯 떠올랐다.
설마 그런 거 시키진 않겠지? 난 튼튼한 거 빼고 시체니 어쩌면 연장 챙겨 들고 철거 현장 같은 데 동원될지도 몰랐다. 충분히 그럴 수 있어 보이는 놈이었다.
“부탁이니까 법적으로 문제 되지 않을 일만 시켜 줘.”
“뭐?”
“나도 고등학교는 졸업해야 할 거 아니야.”
“하.”
수민이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모르겠는데, 이거나 처받아.”
그가 내던진 것은 예쁘게 각 잡힌 스프링 노트 한 권이었다. 노란색 민무늬 표지엔 정자로 차수민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펄럭펄럭 넘겨 보니 첫 페이지에 펜을 대었다 뗀 잉크 자국만이 남아 있었다.
“뭐야, 이거?”
머리에 물음표를 그리는 나에게 그는 자기 명찰과 안경을 넘겨주었다.
“앞으로 야자 때마다 나 대신 네가 들어가서 출석 체크하고 여기에 또박또박 정갈한 글씨로 보충 수업 내용 필기해 와. 혹여나 선생한테 걸리면 너는 뒈지는 거야. 알겠어?”
“네? 제가요……?”
생각지도 못한 요구였던 터라 얼떨결에 존댓말이 나왔다.
“모범생처럼 굴어. 나대다가 걸리지 말고. 그냥 뒷구석에서 가끔씩 내가 있다 정도만 어필해 주면 돼.”
“아니, 덩치부터 너무 차이가 나잖아. 걸리지 말라고? 상식적으로 그게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해?”
운동을 좋아해서 그런지 체격이 또래들보다 항상 좋은 편이었다. 내 장점인 떡 벌어진 어깨와 큰 키도 남들에게 위압감을 주는 데 한몫했다. 누가 봐도 커다랗기 짝이 없는 인간한테 한주먹 거리에 한 손에 쥐어지고도 남는 팔목을 가진 차수민인 척 연기하라고?
차라리 벼룩의 간을 빼먹어라. 유치원생 옷을 빼앗아 입은 짱구네 유치원 원장이 떠올랐다.
“우리 반 담임은 잘 안 들어오고 보충 땐 다른 반 담당 강사들이 들어오니 할 만해. 수학이 문제긴 한데. 뭣하면 청소 도구함에라도 들어가 있어. 필기만 하면 되니까.”
“이거 진짜 또라이 아냐? 싫어, 시발. 안 해. 걸리면 무슨 쪽을 당하라고. 차라리 원양 어선에…….”
순간 옆의 철제 쓰레기통이 쨍한 소리를 내며 찌그러졌다. 들어 있던 쓰레기가 우당탕 튕겨져 나왔다. 수민의 발이 화살처럼 꽂혀 있었다.
“생각해 보니 너 아직 나한테 안 맞아 봤지?”
“하, 할게. 해 볼게.”
비굴한 내 모습에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근데 너는 뭐 하게……?”
“나는 워낙 바쁘신 몸이라.”
그가 눈꼬리를 휘어 가며 웃었다. 그의 실체를 모르는 놈이면 사내새끼가 야살스럽게도 웃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한테는 오히려 슈퍼마리오의 뻐끔 플라워처럼 느껴졌다. 화려하게 피어서는 입을 쩍 벌리고 촘촘히 박힌 수많은 이빨로 불쌍한 배관공을 낼름 삼키는 악독한 꽃 말이다.
그때 운동장에 달린 스피커에서 엘리제를 위하여가 흘러나왔다.
“종 쳤다.”
팔짱을 낀 채 필터만 남은 꽁초를 비벼 끈 그가 멀뚱히 서 있는 나를 향해 눈을 치켜떴다.
“뭐 해, 안 들어가고?”
아. 오늘부터 시작이야? 머쓱하게 뒤통수를 긁적이다가 날아오는 그의 발에 채일 뻔했다.
7반에 도착했을 때는 아직 선생님이 오지 않았는지 쉬는 시간의 어수선함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서둘러 안경을 눌러쓰고 차수민의 자리를 찾았다. 왁스로 스타일링한 머리를 헝클어뜨려 앞머리가 그늘을 드리우게 만들었다. 영락없는 찐따 꼴이었다. 나는 옆자리 애에게 물었다.
“야. 나 차수민이랑 닮았냐?”
“너랑… 차수민……?”
“어. 닮았냐고.”
옆자리 애는 눈을 굴렸다. 무슨 말을 해 줘야 할지 생각 중인 것 같았다. 이수가 아는 체를 해 왔다.
“어, 김정현. 여긴 어쩐 일이야? 엥? 그 안경은 또 뭐야?”
“야. 너희 반에서 가장 커다란 애 누구냐.”
커다랗다 못해 살이 의자 밑으로 흘러넘치는 애가 지목되었고 나는 차수민 앞자리에 앉은 아이를 저 멀리 쫓아 버렸다.
“미안한데 오늘부터 보충 때만 네가 여기 앉아라.”
“아니, 그 안경 뭐냐고. 머리는 앞이 보이긴 해? 푸학. 진짜 안 어울려.”
“야. 나 차수민 닮았어? 솔직히 말해 봐.”
“…차수민……?”
깔짝거리며 시비를 트던 이수조차도 말을 잇지 못했다. 큰일이다. 최대한 웅크리고 있는 수밖에 답이 없는 것 같았다.
간만에 정색 빨며 반 곳곳을 천천히 노려봐 주어서 그런지 계속해서 주변을 얼쩡거리는 이수를 제외하곤 아무도 내 존재와 행동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것으로도 모자랄 것 같아 옆자리에서 빼앗아 온 도라에몽 담요로 커다란 몸을 둘둘 감았다. 차수민의 명찰을 착용하기가 무섭게 드르륵 열린 앞문으로 7반 담임이 들어왔다.
“오늘은 왜 이렇게 조용해? 무슨 일 있어요?”
뭐야, 잘 안 들어온다더니. 몸을 잔뜩 쭈그렸다. 벌써 3월이 다 가고 있다며 쓸데없는 이야기만 줄줄 늘어놓던 그는 뒷자리는 신경도 쓰지 않고 제 할 말만 하다가 나가 버렸다.
곧이어 국어가 들어왔다. 스스슥 닌자처럼 담요에 목을 집어넣고 커다란 앞자리 애의 등빨 뒤에 몸을 최대한 말아 그녀의 눈길을 피했다. 이 짓만으로도 힘들어 죽겠는데 필기도 해야 했다. 수민의 책상에 손을 넣어 대강 잡히는 펜을 아무거나 집었다. 새하얀 종이가 원망스러웠다.
“흔들리는 나뭇가지에 꽃 한번 피우려고 눈은 얼마나 많은 도전을 멈추지 않았으랴. 여기서 눈은 의인화겠고. 끝에서는 설의법이 쓰였죠?”
간만에 정신 차리고 수업을 들어 보는 것 같았다. 무슨 말인지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으나 일단 판서된 대로 똑같이 노트에 옮겨 적기 시작했다.
“봄이면 가지는 그 한번 덴 자리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상처를 터뜨린다. 아름다운 상처처럼 표면적으로 모순되게 표현해 내면은 진실을 나타내는 수사법을 역설법이라고 합니다. 소리 없는 아우성, 찬란한 봄의 슬픔. 이런 것들이 역설법이죠.”
얼굴값 하는 차수민. 굉장히 역설적인 표현 아닌가. 내가 생각해 내고도 자랑스러웠다. 공부를 안 해서 그렇지 못하지 않다니까. 이 적용력 좀 봐.
성벽처럼 펼쳐진 뚱땡이의 등을 방패 삼아 열심히 휘갈겼다. 도중에 중요한 부분은 색깔을 바꿔 포인트도 좀 넣어 봤다. 놀랍게도 이 과정이 꽤 즐겁게 느껴졌다. 국어가 돌연 질문을 던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렇담 마지막 문장이 의미하는 바는 뭘까요? 아는 사람? 아무도 없어?”
야. 네가 대답해. 볼펜 끝으로 앞의 녀석을 쿡쿡 찔렀지만 굳어 버렸는지 요지부동이었다.
“그럼. 오늘이 7일이니까. 27번. 27번이 한번 말해 보자.”
반 분위기가 싸해졌다. 아무도 제가 27번입니다, 하고 일어나는 사람이 없었다. 반 애들이 힐끔힐끔 내 자리를 훔쳐보기 시작했다.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27번 누구지? 차수민. 자리에 없어요?”
“아, 아뇨. 선생님. 잠깐 다른 생각을 하느라.”
얼굴만 빼꼼 내밀어 손을 들었다. 교탁이 아득히 멀어 보였다.
“자, 그러면 수민 학생. 마지막 문장 한번 해석해 봅시다.”
“음…….”
봄이면 가지는 한번 덴 자리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상처를 터뜨린다. 난생처음 보는 문장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무슨 뜻인지 도통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활자를 해석해 본 게 얼마 만이더라? 중학생 땐 꽤 열심히 공부했었는데. 아무도 믿지 않겠지만, 나름 장래가 촉망되는 아이였었다.
“어…… 화자는 봄에 뭔가 큰 잘못을 했던 것 같습니다. 나무로 된 뭔가로 맞는 것 같은데, 뭐 빠따나 회초리 같은 거겠죠…… 호된 매질에 상처가 터져 버려서 피투성이가 된 화자의 두렵고 서러운 마음을 나타내는 듯합니다…….”
풉.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여기저기서 웃음 참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눈을 꾹 힘주어 감았다. 이 자리에서 사라지고 싶었다. 시발 차수민……. 국어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자리에 앉아요. 창의적인 해석이었어요. 자, 모두 수민이에게 박수!”
마지못한 짝짝 소리가 교실을 울렸다.
“정석으로 해석하자면, 사실 마지막 문장은 이별을 겪은 후 더 성숙한 사랑을 하게 된…….”
국어가 수습하듯 내뱉는 뒷말이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어떻게 나머지 수업을 다 채웠는지 기억도 안 난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킥복싱 학원에 들러 수강증을 끊었다. 관장이 등록 이유를 물었다.
“오, 피지컬 좋은데. 선수 해 보려고?.”
“아뇨. 그냥…… 옆 반 애 하나를 쥐어 패고 싶어서요. 열심히 배워서 꼭 목표를 이루고 싶습니다.”
“……그렇게 안 보이는데. 혹시 괴롭힘을 당하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관장이 그럴 땐 폭력보다 대화나 상담이 더 좋은 방법이라 조언해 주었지만 귓등으로도 들리지 않았다. 차수민은 말로 해선 들어 먹지 않을 애였다. 강해질 거야. 강해져서 언젠가는 차수민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거야.
“아줌마! 아줌마, 여기요!”
그리 결심했던 것이 무색하게 나는 차수민의 문자 하나에 전쟁터에 와 있었다.
매점 샌드위치 두 개. 3교시 끝나기 전까지 사 와.
하, 시발. 누가 이까짓 말을 들을 줄 알고.
2교시까지 버티다가 태생 쫄보의 마음을 가지고 태어났기에 3교시에는 저절로 발이 매점으로 몸뚱어리를 이끌었다. 점심시간 한 시간 전의 매점은 전쟁통이 따로 없었다. 입구부터 계산대까지 사람으로 빽빽했다. 긴 팔로 앞을 휘저으며 전진했으나 인파에 이리 휩쓸리고 저리 휩쓸렸다.
“열 개 남았다!”
매점 아줌마의 외침에 복부와 등 뒤로 느껴지는 압박이 두 배가 되었다. 뭔 방송국 매점에서 판매하는 특별 제조 샌드위치였는데 아이돌들이 TV에 나와 그 맛을 입증해 주어 화제가 됐었다. 트렌드에 밝은 아줌마는 곧바로 레시피를 베껴 와서 매점에서 판매를 개시했고 불티나게 팔렸다. 항상 매진될 정도로.
“안, 안 돼.”
실망한 얼굴로 그거 하나 못 사 오냐며 쏘아붙이는 차수민이 자연스레 그려졌다. 나는 좀비 떼처럼 몰려드는 인간 군상을 헤치고 나아갔다. 맛대가리도 없는 빵, 왜들 이리 열광인지 모르겠다. 좋아하지도 않는 빵을 사려고 사람 틈바구니에 끼어서 고생하는 내가 짠했다.
왼팔을 뻗어 포장된 샌드위치 하나를 집었다. 그리고 오른팔로 그 옆에 놓인 하나를 더 집으려고 하자 손 하나가 불쑥 나타나 그 위를 덮었다.
“이씨. 야. 너 그거 놔라?”
“야아? 처음 보는 얼굴인데. 1학년 명찰이네? 이게 어디서 선배한테! 너 나 알아?”
“꼰대 납셨네. 예예. 선배, 좋은 말로 할 때 놓으시죠?”
나는 한껏 예민해져 쏘아붙였다. 매대에는 급속도로 사라져 두 손이 얹어진 하나를 제외하면 두어 개의 샌드위치만 남아 있었다. 그것 역시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에 사라져 텅 비었다. 조용하고 편안한 학교생활이 모토라 평소라면 마찰은 피했겠지만, 어쩐지 오늘만큼은 양보하고 싶지 않았다.
“야! 너는 이미 하나 들고 있잖아! 고3 수험생을 위해 하나를 양보 못 해?”
“제가 먹을 게 아니라서요. 수험생이면 잘 챙겨 먹어야지 왜 몸에 안 좋은 인스턴트를 드시려고 하시는지?”
“됐고, 네가 양보해!”
“그렇게는 못하지!”
삼선 쓰레빠를 신은 선배라는 사람의 흰 양말을 살짝 무게를 실어 밟자 비명이 터져 나왔다. 정말이지, 평소라면 하지 않을 짓이었다. 그의 손가락이 다섯 갈래로 펼쳐지며 반쯤 찌그러진 샌드위치의 머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무방비 상태의 샌드위치를 홀랑 집어 계산대로 튀었다.
“아줌마! 계산이요! 빨리요!”
됐다. 잔돈도 받지 않고 봉다리를 달랑거리며 성큼성큼 두 칸씩 계단을 올랐다. 어쩐지 자랑스러웠다. 이 치열한 경쟁에서 승리했다는 것이. 묘한 성취감이 느껴졌다. 어쩌면 내가 이 학교에 입학하고 처음 뭔가를 열심히 해 보려고 노력한 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 웬일이야? 기대 안 했는데, 하며 머쓱해하는 차수민을 머리에 그렸다. 슬쩍 미소가 지어졌다.
“오빠 기다렸냐?”
구석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는 동그란 뒤통수에다 대고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책상 위에 봉지를 던졌다.
“자, 여기 샌드위치 두 개. 사 왔다.”
봉지를 살펴보던 그의 미간이 찌그러졌다. 칭찬받을 줄 알았는데 예상 밖의 일이었다.
“졸라 주물럭거렸잖아. 눈깔 달렸으면 좀 봐. 이걸 지금 나더러 먹으라고 준 거야?”
나는 억울함에 변명을 늘어놓았다.
“아니, 네가 몰라서 그렇지 이거 사기가 얼마나 치열한데. 사람 개많아! 내가 진짜, 이거 사려고 모르는 선배 발도 밟았어. 알아? 겨우겨우 힘들게 사 온 거라고.”
내 말에 그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좋지 않은 신호였다.
“그랬구나. 힘들게 사 왔구나…….”
악마 같은 미소가 다시 그 입매에 걸렸다. 설마.
“그럼 당장 내려가서 피자 빵 사 와. 지금 딱 그게 먹고 싶어졌거든.”
썩어 가는 내 표정을 느긋하게 감상하며 차수민은 의자에 등을 기댔다. 나긋한 봄바람이 그의 검은 머리칼을 스치고 지나가자 봉긋한 이마가 잠시 드러났다 곧 사라졌다.
“싫어? 싫으면 고액 채무자로 생을 마감해 볼래?”
시발. 잇새로 읊조리고 홱 봉지를 챙겨 쿠다다당 계단을 내려갔다. 피자 빵이 먹고 싶으시다? 그래. 어디 한번 실컷 먹어 보시지. 매점에 도착해 종류 상관없이 손에 잡히는 대로 빵을 주워 담았다. 번복하지 못하게 처음부터 모든 빵을 사 갈 생각이었다.
“아니, 학생 이 많은 걸 다 사 가게?”
아줌마의 놀란 얼굴도 잠시, 계산 중에 수업 종이 쳐 버리는 바람에 빈손으로 돌아와야 했다. 운도 더럽게 없어요. 네가 빵 먹는 꼴을 꼭 봐야겠다는 오기가 생겼다. 점심시간이 시작되자마자 이 악물고 올라갔지만 차수민의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하교 시간에도 그를 볼 수 없었다. 아무리 덜렁덜렁 빵 봉다리를 들고 학교를 이 잡듯이 뒤져도 머리카락 하나 보여 주지 않았다. 마치 일부러 피해 다니는 것처럼.
“으아아아아아아!”
차수미이이이인! 차라리 원양 어선 타는 게 나았을 정도로 그는 나를 부려 먹었다. 그냥 부려 먹기만 하면 다행이지 놀려 먹는 것도 같았지만 어떤 대응도 할 수 없는 내 신세가 처량했다.
따까리. 단어의 사전적 의미가 맞았구나. 자질구레한 심부름 따위나 맡아 하는 인간. 나는 따까리였다. 차수민은 나를 그의 빵 셔틀이자 가방돌이이자 꼬붕처럼 대했다.
✲ ✲ ✲
누구에게 말도 못 하고 일주일이 지났다. 차수민의 노란색 학습 노트는 점차 빼곡히 채워졌다. 불안했던 7반 애들의 시선도 줄어들고 어느새 나는 그 반의 일원이 되어 있었다. 엄마는 웬일로 얘가 야자를 다 한다며 기뻐했다.
나는 생각보다 선생님들이 학생에게 큰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아니면 차수민이 존재감이 없거나. 한순간에 덩치가 쑥 자라 버린 뉴 차수민에게 신경 쓰는 선생은 아무도 없었다. 제법 기척도 숨길 줄 알고 보통 놈이 아닌 건 분명했다. 차수민. 그의 정체는 대체 무엇일까?
“운 좋은 줄 알아. 나니까 이 정도에서 해결하는 거지, 우리 집안사람들 같았으면 넌 손가락 잘렸어.”
빚 좀 깎아 달라며 찡찡대는 내게 차수민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했다. 처음 상상했던 페더급 운동선수는 아닌 게 분명했다.
“어떤 집이길래 사람 손가락을 잘라……?”
어마어마한 집안에서 길러졌으리라 감히 짐작해 볼 수 있었다. 혈육이 조직원이라거나 집안이 대대손손 조폭 가문 아니야? 겁에 질려 생각하던 내게 차수민이 얼버무리듯 내던졌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뭐.”
그렇지? 툭 치면 날아갈 것 같은 놈이 무슨. 나는 픽 웃으며 떠올랐던 흉악한 이미지들을 지워 냈다. 그럴 리가. 하늘하늘한 난초같이 생긴 그의 외양과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이었다.
수민은 얌전하고 조용조용하게 학교생활을 잘해 내 가고 있었다. 그의 본모습을 아는 자는 나와 그에게 죽이 되도록 맞았던 두 사람에 불과했다.
“수업 바뀌었대! 다음은 수학이래!”
7반 반장이 초시처럼 소식을 물고 날아들자 모두 툴툴거리며 교과서를 새로 꺼냈다.
“시발.”
나한테는 썩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수학은 보충 때 들어오는 교사 중 차수민을 기억하는 유일한 이로 본수업 때 7반을 맡아 반의 배치 또한 알고 있었다.
나는 방어막이 되어 주던 뚱땡이를 원래 자리로 보내고 덜그럭거리며 교과서와 필기구를 챙겨 들었다. 내가 일어선 자리는 휑해 보였다. 저번에도 출석만 하고 자리 비워 놔서 수학이 뭐라 했었는데…… 아씨. 나는 너무 착한 게 문제다.
“저기, 미안한데 보건실에서 베개 하나만 가져다주라.”
급하게 공수해 온 담요와 베개로 몸체를 만들고 까만색 바람막이를 씌웠다. 머리는 후드를 덮어 보이지 않게 했고 리얼함을 위해 등허리에 담요를 한 장 더 덮어 엎드린 형태의 더미를 하나 만들어 냈다. 이 짧은 시간 동안 꽤 그럴듯한 완성품이 나왔다. 개쩐다, 나. 조형에도 소질이 있는 것 같다.
서둘러 교탁 옆 커다란 구식 TV가 얹어진 선반 뒤로 들어가 몸을 숨겼다. 청소 도구함은 내가 들어가기에 비좁은 감이 있었다. 문 닫으면 어두워서 필기도 안 되고.
몇몇과 눈이 마주쳤으나 모두 흐린 눈으로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이젠 익숙해졌는지 현타조차 오지 않았다. 앞문이 열리고 꼬장꼬장한 마른 멸치같이 생긴 노 교사가 옆구리에 책을 낀 채 들어왔다.
“종이 돌릴 테니 출석 체크해라. 거기, 뒤에!”
모두의 시선이 더미 차수민에게 꽂혔다. 그냥 비워 둘 걸 그랬나. 식은땀이 흘렀다. ‘걸리면 디지는 줄 알아’ 수민의 차가운 목소리가 귓가에 어른거렸다. 나대지 말고, 기본만 해. 기본만.
기본…… 이제 와 후회해 봤자 엎질러진 물이었다.
“엎드려 있는 놈. 자나?”
교실이 조용했다. 담요와 베개로 이루어진 수민이 대답할 리 없었다. 원망스러운 눈빛의 반장이 내 쪽을 쳐다보았으나 그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쟤 차수민이지? 쌤이 왔는데 말이야. 일어나지도 않고. 너네도 그러면 안 된다. 친구들끼리 서로 도와 가며 공부해야지 벌써부터 경쟁자로 인식하는 거냐. 옆 사람. 쟤 깨워라.”
꿀꺽. 침을 삼켰다. 어쩌지, 나라도 지금 뛰쳐나가 시선을 끌어 볼까. 더미 수민의 옆자리 애가 흔들리는 눈동자로 힐끔 이쪽을 살폈다. 어떻게 해? 눈으로 물어 오는 그에게 쉽사리 대답을 내어놓을 수 없었다. 그의 손이 점점 가짜 수민의 어깨로 향했고 온 교실이 긴장감에 흔들거렸다.
“선생님!”
우렁찬 목소리가 팽팽한 긴장감을 깨뜨렸다. 손을 번쩍 든 목소리의 주인공은 이수였다.
“뭐고?”
“선생님. 사실은 차수민이 아까부터 몸이 안 좋다 했습니다. 얼굴도 창백하게 질려서 복통을 호소하는데 정말 아파 보였습니다.”
강이수는 눈치가 빨랐다. 그의 굳은 얼굴이 로봇처럼 삐걱거리며 입만 웃고 있었다. 나는 안도감 어린 한숨을 내뱉었다. 이수야. 이 은혜 꼭 갚을게. 어마어마하게 보상할게.
“뭐? 그럼 이러고 있으면 안 되지. 쟤 좀 일으켜라. 왜 이러고 있어. 빨리 보건실에 데려다줘라. 으이고. 사내새끼가 생긴 것부터 비리비리해 가지고 이럴 줄 알았다. 툭하면 아파서 어따 쓰냐.”
“헉.”
수학은 끈질겼다. 나는 침을 삼켰다. 기껏해야 쿠션으로 지탱해 놓은 몸, 일으키는 순간 와르르 무너져 내릴 텐데. 같은 생각을 했는지, 이수가 안쓰러울 정도로 덜덜 떨며 끼어들었다.
“제가… 이따…… 쉬는 시간에 데려가겠습니다. 열정이 뛰어난 친구라 저렇게라도 수업은 꼭 듣고 싶다고 말했거든요.”
“뭐? 나 참. 평소에 수업이나 그렇게 들어라. 뭐…… 수학이 중요하긴 하지. 그래도 아프면 쉬는 게 맞다.”
말도 안 되는 변명이었지만 교탁 반경 1m 이상을 벗어나는 법이 없는 수학은 더 신경 쓰기 귀찮았던지 에잉, 쯧쯧 혀를 차며 칠판을 향해 몸을 돌렸다. 분필이 규칙적으로 따닥따닥 부딪히는 소리가 교실을 울렸고 나는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첩보 스릴러 한 편 찍어 낸 기분이었다.
“그런 일이 있었어. 그러니까 다른 건 다 해도 수학 시간엔 못 들어가.”
화낼 줄 알았던 수민은 의외로 쉽게 수긍했다. 팔랑팔랑 필기 노트를 넘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개발새발일 줄 알았더니 글씨는 잘 쓰네. 그래. 수학 땐 빠져도 좋아.”
“정말?”
금방 화색이 되어 몸을 일으켰다가 이내 내 꼬라지가 주인 칭찬을 기다리는 개와 같다는 생각에 기분이 나빠졌다.
“대신에 이거.”
책상에는 수학 문제집이 한 권 놓여 있었다. 들춰 보자 전 페이지가 빳빳한 새 거였다. 불안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자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혹시.”
“응. 풀어 와.”
“뭐?”
“답지 딸려 있긴 한데 답 그대로 베끼거나 다른 놈한테 토스하면 가만 안 둬. 내가 병신도 아니고 그런 것도 구분 못할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문제 밑에 풀이 과정도 써 놔. 푼 흔적. 꼭 있어야 해. 정 모르겠으면 그때는 답지 참고하든가.”
“나 공부 안 한 지 꽤 됐는데……? 나더러 이걸 풀라고? 난 방정식도 잘 모르는 인간이야.”
애걸복걸을 해 봐도 그는 단호했다. 찡찡대지 말라며 발끝으로 내 정강이를 차 내려 극한의 고통에 몸부림을 쳐야 했다.
“아악.”
“졸라 너한테 해될 것 없는데 왜 이렇게 난리야? 이참에 공부한다, 치면 되잖아.”
“그게 하루아침에 되냐고…….”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아니, 알겠는데. 하나만 물어보자. 대체 이걸 왜 하는데? 나 괴롭히려…… 공부시키려고 문제집까지 사 온 건 아닐 거 아냐.”
“아버지가 풀어 오래.”
“아버지……?”
갑자기 튀어나온 의외의 단어에 눈을 깜빡거리자 냉랭하게 말을 이어 갔다.
“있어, 영감. 내 학업에 쓸데없이 관심이 많거든.”
차수민의 아빠. 머릿속에 그려 놨던 얼굴에 기다란 칼자국이 새겨진 빡빡이 조폭 형님의 모습이 몽글몽글 뒤섞여 바뀌었다. 자상하게 홍삼을 달여 가며 이른 아침, 늦었다며 뛰쳐나가는 아들을 한 잔 마시고 가라고 붙잡는 가정적인 사내의 모습이 그려졌다.
“아하. 아버지가 퍽 자상하신가 보다. 우리 엄만 성적표도 확인 안 하는데.”
“자상? 뭔 또라이 같은 소리야.”
수민이 처음으로 이빨을 보이며 소리 내어 웃었다. 비웃음이나 경멸의 미소가 아닌 순수하게 감정을 내비치는 웃음이었다. 금방 싹 사라지긴 했지만. 나는 눈을 비볐다. 항상 종이 인형처럼 표정 없이 다니더니 저렇게도 웃을 줄 아는구나.
“그럼 자상한 우리 영감을 위해 진도 맞춰서 풀어 와. 맘에 들게 풀어 오면 이자 반 정도 삭감해 줄게.”
썩 탐탁지 않았지만 얼마나 눈덩이처럼 쌓였는지 가늠할 수조차 없는 이자를 덜어 내기 위해 문제집을 받아 들었다.
수학은 손 놓은 지 오래되어 가장 자신 없는 과목 중 하나였다. 반에서 공부 좀 잘하는 만만한 애 하나 잡아다 가르쳐 달라고 해야겠다. 제법 모범생 같은 생각을 하며 복도를 나서는데 누군가 어깨를 붙잡아 왔다. 최우식이었다.
“김정현. 너 왜 요즘 안 보이냐.”
“앗. 바, 바빠서.”
“상호랑 용재랑 입원한 건 들었지?”
“어어. 들었어.”
나도 사실 그 자리에 있었지만. 허무하게 메다꽂히던 두 친구의 모습이 기억났다.
“미친놈들이야. 뭘 어떻게 했길래. 누구 돈 뺏다가 그렇게 됐다는데 아는 거 있어?”
“아니이…… 대체 누구 돈을 뺏었길래 입원까지 했대애? 나도 참 궁금하다.”
나는 땀을 훔치며 눈알을 굴렸다. 쥐방울만 한 놈한테 간이고 쓸개고 갖다 바치는 중이란 사실은 죽어도 들키기 싫었다.
“그건 그렇고. 너 요즘 공부 열심히 한다며? 이수가 그러던데.”
“아, 으응. 열심히 하고 있……지.”
“근데 왜 다른 반 가서 그래. 우리 반에서 해. 공부하는 모습 보여 주는 게 부끄러워?”
“어어. 좀 부끄럽더라고. 안, 안 하다가 하려니까. 그리고 이 반이 푸, 풍수지리가 좋은지 집중이 잘돼.”
“새끼. 갑자기 무슨 바람이 들어서. 대학 갈 생각 있었던 거야? 배신이다, 너.”
그런 생각은 추호도 안 해 봤는데. 내가 무슨 대학이야. 바라지도 않는다. 차수민 대타로 야자 뛰고 있다고 내 입으로 어떻게 말해.
새삼 소문이 생각보다 안 새어 나갔다는 사실에 7반 애들에게 고마웠다. 아니, 어쩌면 그들도 나와 차수민 간의 관계를 제대로 모르고 있는 듯했다. 야자가 너무 하고 싶은 내가 창피한 나머지 약해 보이는 뒷자리 애를 협박해서 대신 공부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 아니야?
“근데. 쟤랑은 무슨 관계야? 자주 들락날락하던데. 새 물주?”
우식의 시선이 이어폰을 꽂고 조용히 눈을 감은 채 팔을 괴고 앉아 있는 수민에게 향했다.
확실히 수민은 이질적인 존재였다. 거칠고 냄새나는 남고에서 자기 혼자 톤이 달랐다.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신경 쓰지 않으면 눈에 잘 띄지 않았지만 한번 신경 쓰기 시작하면 그 점이 자꾸 눈에 들어왔다.
“아니야. 그런 건 아니고.”
물주일 리가 없잖아. 오히려 내가 물주에 가까웠다. 차수민은 배려해 주는 척하며 내 기력까지 쪽쪽 빨아먹었다. 이 관계를 뭐라고 정의해야 남들이 보기에 타당할까. 찐따 새끼에게 호구 잡힌 모습은 곧 죽어도 보여 주기 싫었다.
“어, 음. 내 과외 선생님이야.”
별안간 왜 이런 말이 튀어나왔는지 모르겠다.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였는지 두 눈이 휘둥그레 커져 있었다.
“과외 선생이라고? 쟤가?”
“그, 그러니까 과외 선생이라기보단 공부 친구랄까. 그 왜… 학습 태도나 과제 같은 거 봐주는 파트너 있잖아. 우리 엄마랑 쟤네 엄마랑 친하거든. 같은 학교 입학한 김에 엄마가 잘 좀 봐달라고 부, 부탁했었나 봐.”
입은 생존을 위해서인지 시키지도 않은 거짓말을 술술 내어놓았다. 어쩌면 잘된 일일지도 몰랐다. 쉬는 시간마다 빵 사다 바치고 노트 필기를 검사하며 협박당하는 꼴을 이 구라 하나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여러모로 내가 많이 신세 지고 있어. 쟤가 저렇게 보여도 꽤 꼼꼼한 면이 있더라고.”
“그래애?”
어쩐지 조용한 우식이 눈치챘나 싶어 흘긋 눈치를 보니 턱에 까슬하게 올라온 턱수염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왜 그래?”
“아니, 조금 감동받아서. 난 네가 새 학기 뽕이 차서 공부한다고 나대 봤자 반짝하고 떨어질 줄 알았는데 본격적으로 마음을 다졌었구나. 몰랐다, 나는.”
“콜록…… 작, 작심삼일이 되지 않게 노력해야지. 얌마. 너도 이제 철없는 중학생이 아니잖아.”
이젠 되돌릴 수 없었다. 이러다 정말 공부하게 생겼어. 우리 엄마도 못 한 일을 차수민이 이루어 내고 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나도 정신 차려야지. 근데 너 형들은 어쩌고?”
허를 찌르는 질문에 몸이 얼어붙었다. 맞다. 선배들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 상호와 용재가 저 지랄 나서 잠잠했던 것뿐이지 수금해 오라 등을 떠밀었던 놈들이었다. 학기 초부터 이름 불러 가며 아는 척을 해 왔고 중학생 때 좀 놀았다는 애들을 싸그리 불러 모아 소집하기도 했다. 중학생 때와는 노는 레벨이 달랐다. 그중 몇은 조직과도 손이 닿아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나는 싫건 좋건 그들의 울타리 안에 들어가 있었고 쉽사리 빠져나올 수 없었다. 그럴 생각조차 안 해 봤다. 피라미드는 위로 갈수록 가팔라서 발이라도 헛디디면 끝이 안 보이는 저 아래로 떨어져 진흙탕에 얼굴을 처박히기 십상이었다.
“야. 학업도 좋지만 눈치 봐 가면서 해라. 병철이 형이 널 얼마나 예뻐하는데. 눈 밖에 나서 좋을 것 하나 없잖아.”
“그렇……지. 아무래도.”
그 선배는 왜 나를 예뻐할까. 사람 볼 줄 모르는 새끼. 이거 다 물 근육인데. 난 파리 한 마리 죽여 본 적 없는 쫄보인데. 차수민의 말이 틀릴 것 하나 없었다. 나는 찌질한 새끼였다.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면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와서 발 빼기도 뭐하고. 내게 다른 인생이 있긴 한가? 나는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도 모르고 의지도 없이 이리저리 휘둘릴 뿐인 한심한 놈이었다.
“뭐야, 너 왜 안 가.”
차수민이 불쑥 끼어들었다.
갑자기 어색한 공기가 밀려들었다. 놀란 나는 수민과 우식을 번갈아 바라보고 누구 하나 입 열어 대화의 핑퐁이 시작되는 순간 벌어질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허둥지둥 말을 꺼냈다.
“가, 갈 거야. 가야지. 여튼 다음엔 3단원까지 풀어 온다?”
“수학? 됐어. 그냥 진도까지만 풀어 오라니까.”
“어허. 신경 안 써 줘도 돼. 내가 알아서 잘해 볼 테니까. 너도 어서 가서 수업 준비 해야지. 야, 우식아. 우리도 얼른 가자.”
“어어, 그래.”
저거 뭔 개소리야 하는 표정의 수민을 남겨 두고 최우식을 밀다시피 끌어내어 자리를 피했다.
✲ ✲ ✲
김정현. 우리의 약속 잊지 않았지?
까똑. 듣기 싫은 알림음에 발신자를 살폈다. 다행히 한수진이었다. 차수민 때문에 문자나 메시지가 오면 무조건 발신처부터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그럴 리가.
중3 때 여자 친구가 선물해 준 뺨을 붉히고 방방 뛰는 고양이 이모티콘을 함께 보내자 한수진은 한동안 답장이 없었다. 뻘쭘해져 다시 카톡을 보냈다.
근데 바로 내일인데 장소는 정했어?
내가 너인 줄 아니. 당연히 예약까지 끝냄
와, 역시
나 없었으면 이 모임 애초에 쫑 났을걸? 대전 갔다는 동우랑 중2 팸도 같이 불렀당ㅋ
와 진짜?
무표정으로 자판을 꾹꾹 눌렀다. 물론 보고 싶은 친구들도 있었지만 딱히 친구라 부를 수 없는 놈들도 섞여 있었다. 시간이 흘러도 교실 뒤편에서 살 떨리게 같은 반 학생을 패던 얼굴은 잊히지 않았다. 어쩌다 보니 나도 똑같은 놈이 됐지만.
그리고! 내 존예 친구들도 함께 올 거란 말씀!
나는 한수진 못 믿지.
야. 딱 보고 맘에 안 들면 내가 술값 다 낸다.
좋아서 이불을 둘둘 감고 침대를 굴렀다. 그렇단 말이지?
너 저번처럼 약속 파투 내거나 갑자기 사라지면 죽어. 어떻게 보면 니랑 나랑 주최자야. 무슨 일이 있어도 자리 지켜.
당연하, 까지 치던 나는 잠시 손가락을 멈췄다.
설마 주말엔 안 부르겠지. 뼛속까지 새까만 악귀 새끼가 아닌 이상 학교에서 그렇게 부려 먹는데 주말에도 연락을 해 오진 않을 것이다. 실제로 지금까지도 그래 왔고.
정신병 걸리게 쉬지 않고 울려 대던 녀석의 요구 메시지는 주말엔 잠잠했다. 그럼에도 막상 약속 잡으려니 불안함이 밀려오는 걸 보면, 이는 내가 쉼이 필요하다는 증거였다. 나는 미련 없이 작성한 메시지를 보내 버렸다.
당연하지. 혹시 그러면 내 손목 잘라 가라~
킬킬 웃으며 머리맡에 폰을 던졌다. 간만에 여유로운 토요일이었다. 상호와 용재의 입원이 이렇게 고마울 줄이야. 언제 호출이 들어올지 모르지만 아직까지는 오라 가라 하는 선배가 없어 살 만했다.
수진은 자기가 데려갈 친구들이 자기네 학교에서 알아주는 미인이라고 입을 털었다. 사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차수민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었을 뿐이다. 그래도 뭐, 오랜만에 간질간질한 설렘을 느껴 보면 좋긴 하겠지. 나는 떠오르는 미소를 애써 숨기려고 하진 않았다.
“뭐 입고 가야 하지?”
옷장을 열자 한동안 인기에 취했을 때 겉멋 들어 사들인 옷들이 빼곡했다. 살 때 무슨 정신이었는지 깡패 새끼 아니면 백두산급의 록 밴드나 입을 법한 가죽점퍼와 가죽 바지가 눈에 들어왔다.
“와. 내 손으로 구매했다니 믿기지가 않는다.”
이참에 옷장 정리나 할까 하고 구석에 처박혀 있는 옷들을 긁어모으니 어느덧 침대 위가 가득 찼다. 고심해서 입을 만한 옷들을 골라냈다. 꾸민 듯 안 꾸민 듯 은근하게 내 얼굴을 빛내 주어 좋은 첫인상을 남길 만한 옷이 필요했다.
그때 던져 놓은 휴대폰에서 징- 진동이 울렸다. 낯선 그 이름에 내가 제대로 읽은 게 맞나 눈을 비볐다. 몇 번을 다시 봐도 바뀌지 않는 이름 석 자.
“차수민?”
평화로운 토요일 오후가 와장창 깨지고 있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오늘따라 불안하더니 학교 밖에선 연락 한 번 없던 차수민이 문자 메시지도 아니고 카톡을 다 보냈다. 그럼 얘 카톡에 내가 친구 추가되어 있단 얘기잖아. 떨떠름한 기분이 되었다.
떨리는 손으로 창을 터치하자 마침표조차 찍지 않은 간결한 메시지가 보였다.
너 내일 뭐 해
“내일? 내이일?”
정말 초치는 데 뭐가 있다니까. 김정현 괴롭히기 자격증이 있다면 차수민은 보나 마나 합격이다. 어쩜 이렇게 미운 짓만 골라서 하지? 방금 수진과의 문자 내용을 훔쳐보기라도 한 듯 콕 찝어 약속 날짜를 골라낸 그에게 열이 뻗쳤지만 답장은 찌질함이 잔뜩 묻어 나왔다.
왜…?
나 장 봐야 돼
장……? 내가 잘못 읽었나. 다시 한번 눈을 비볐다. 그러니까, 지금 자기 마트 가는데 따라가 달란 거잖아.
너 장 보는 거랑 나랑 무슨 상관? 나 내일 약속 있어.
평소보다 강경하게 대응했다고 생각하는데 상대는 아니었나 보다.
너 약속 있는 거랑 나랑 무슨 상관? 카트는 누가 밀지?
이 미친 또라이 새끼! 누가 밀긴 네가 밀어야지! 뻔뻔함이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 분노로 눈이 헤까닥 돌아서 씩씩거리며 문자를 찍었다.
넌 손이 없냐, 발이 없냐?? 학교에서 충실한 발닦개 해 주면 됐지 주말까지 불러? 회사도 주말엔 쉬게 해 주거든~
회사는 돈이라도 주지 주는 것도 없으면서 가짜 사채를 빌미로 노동력을 착취하는 일은 악덕 고용주를 뛰어넘은 행패였다.
메신저의 1이 사라졌다. 어떤 답이 날아올까 궁금해 손톱을 깨물며 기다렸으나 5분이 넘도록 답장은 오지 않았다. 자기가 생각해도 너무하다 싶었나 보다. 반쪽짜리 승리감에 취해 화면을 끄려는 순간 성의 없는 문자 하나가 띡 도착했다.
내일 저녁 7시. 홈플러스 앞
이제는 화도 나지 않았다. 말을 들어 먹질 않으니 이길 자신이 없었다. 내가 가나 봐라. 따끈따끈하게 맨 위로 떠오른 대화창을 안 읽은 상태로 두고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삥 한번 뜯으려던 대가가 이리도 클 줄이야.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했다. 덕분에 포근했던 토요일의 즐거움이 싹 날아가 버렸다.
그놈을 개무시할 거라는 굳은 결심은 일요일 해가 슬슬 서산을 향하자 점차 무뎌지고 있었다. 안 갔다가 월요일에 대차게 까이면 어떡하지. 빠르게 마트 찍고 다녀올까. 요즘은 앱도 많고 온라인에서 장보기도 잘되어 있는데 왜 굳이 오프라인까지 친히 행사하는지, 졸라 아날로그 새끼.
방을 서성거리는데 어제 골라 놓은 착장이 눈에 띄었다. 아니다. 마음 약해지지 말자.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할 것. 김정현의 모토가 아니었나. 정강이를 차이든 주먹질에 코뼈가 부서지든 미래의 김정현이 감당할 일이지 오늘의 김정현은 모를 일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수진이 찍어 준 가게는 생각보다 외진 골목가에 위치해 있었다. 풀메이크업을 한 수진이 한 테이블에서 손을 흔들었다.
“여기야, 여기!”
“다들 일찍 왔네?”
엉성한 파티션으로 살짝 가려진 테이블에는 모이기로 한 사람들이 거의 다 와 있었다. 반갑지 않은 얼굴이 더 많았지만 반가운 척 서로 인사를 나눴다.
“왜 자리를 여기로 잡았어. 창문 있어서 추울 것 같은데.”
“이쪽이 구석이라 명당이야. 대놓고 시킬 수 없잖아.”
우식이 투명한 잔을 손에 쥔 시늉을 하며 입으로 꼴꼴꼴 소주 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아. 역시나. 겉멋만 들어서 고딩 새끼들 주제에 별걸 다 하려고 한다.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싫지만 먹게 되겠지.
“자, 그럼 김정현도 왔으니까 내 친구들을 소개합니다! 모두 박수! 얘는 김현아고 얘는 이도연. 이쁘지? 몰랐는데 현아는 대영중 출신이더라? 우리 옆 학교였잖아. 신기하지 않냐? 여튼 너네 정신 놓고 추근대면 죽는다.”
그렇게 말하며 수진은 나를 향해 한쪽 눈을 찡긋 감았다. 수진의 친구들은 정말 예뻤다. 어쩌다 한수진 같은 거와 친구가 되었는지 모를 만큼. 도연이라 불린 애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살짝 웃었다. 나는 빨개진 얼굴을 괜히 모로 돌렸다.
“김정현, 너 전화 오는데.”
테이블 위에 놓인 핸드폰이 거칠게 진동을 내뿜고 있었다. 보나 마나 뻔했다. 나는 망설임 없이 통화 종료 버튼을 꾹 눌렀다.
“엥. 안 받아도 돼?”
“응. 스팸이야, 스팸.”
그 후로도 진동은 지겹도록 이어졌고 결국엔 최후의 방책으로 전원을 꺼 버리고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끈질긴 새끼. 이 열정이면 이미 장 다 보고 집에 갔겠다. 술이 들어가자 남아 있던 일말의 두려움도 소멸해 버렸다. 분위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이도연. 한수진의 친구. 그리고 지금 내 앞에 앉아 활짝 웃고 있는 여자애. 나는 바닥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먼저 말을 걸었다.
“이름이 김정현이라 했지?”
“응. 김정현…….”
“원래 이렇게 말이 없어? 안 그렇게 생겨서 과묵하네.”
“내가 어떻게 생겼는데?”
“음. 생양아치처럼 생겼어.”
나도 모르게 일순 상처받은 표정을 지었는지 도연이 웃으며 덧붙였다.
“근데 봐 줄 만해. 난 이런 얼굴 좋아하거든.”
핸드폰 번호 알려 줄 수 있어? 말하는 도연의 목소리가 흐릿하게 들려왔다. 커다란 엔진의 굉음이 주변 소음을 집어삼켰기 때문이다.
시선을 길게 나 있는 창문으로 향했다. 한눈에 봐도 비싸 보이는 바이크 한 대가 멈추어 섰다. 몸체는 튜닝을 했는지 화려했다. 락카칠을 한 것처럼 파란 안개와 붉은 안개가 뒤섞여 있었다. 커다란 바이크 위에는 검은색 무광 헬멧을 쓴 남자가 앉아 있었다. 바이크에 정신이 팔려 있자, 도연이 입을 열었다.
“너 아는 사람이야?”
“아니, 그래서 본 게 아니라…….”
말하면서도 바이크에서, 아니 바이크를 몰고 온 남자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가 검은색 헬멧을 벗었을 때까지도. 드러난 새하얀 얼굴에 눈이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남자가 바이크에서 내려 문 쪽으로 걸어가느라 잠시 시야에서 사라진 순간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깜짝이야.”
“김정현, 어디 가게?”
“화, 화장실.”
얼빠진 채로 중얼거리며 종아리에 걸려 있던 의자를 드륵 뒤로 밀었다. 그 순간 바로 옆에서 저벅저벅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허억, 나는 저승사자라도 마주한 것처럼 다리를 꺾으며 주저앉았다.
“어디 가.”
거기에는 창백할 정도로 흰 얼굴 위 눈썹을 가리는 칠흑 같은 검은 머리카락과 조폭이나 입을 법한 가죽 재킷이 극도로 대비되어 흡사 저승사자처럼 보이는 차수민이 서 있었다. 그의 무표정은 사자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무결했다.
알코올 탓에 뇌가 노곤노곤한 상태였는데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술이 확 깼다. 그건 다른 애들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뭐, 뭐야. 누구야. 김정현, 네가 불렀어?”
“어. 쟤 7반에 걔 아니야? 그 얼굴 하얀 애.”
우식이 무언가 생각난 얼굴로 손가락질을 했다. 같이 고등학교를 다니는 애들이 잠시 얼굴을 들여다보고 맞장구를 쳤다.
“아아, 7반 애.”
“뭐야. 누군데. 왜 너네만 아는 얘기하는데.”
“그, 이름이 뭐였지. 차 뭐였던 것 같은데.”
“차수민.”
소란을 가르고 고드름같이 냉랭한 목소리가 뚝 떨어졌다. 고드름이 떨어진 자리부터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어어…… 그래. 차수민.”
“근데 여긴 왜 온 거야?”
나는 재빠르게 머리를 회전하려고 노력 중이었다. 쓰지 않아 녹슨 뇌가 알코올에 절여지기까지 해 끼긱대며 느리게 돌아갔다.
“쟤 김정현 친구래.”
우식의 아는 체에 모두의 고개가 내 쪽으로 돌아갔다. 손쓸 새도 없이 미간을 구긴 수민이 입을 열었다.
“친구? 친구라고?”
“아! 정확하게 말하면 학업 메이트라고 볼 수 있지!”
그 사이를 끼어들며 수민의 어깨에 와락 손을 얹었다. 그러자 수민이 불쾌하다는 듯한 제스처로 바로 쳐 내는 바람에 이번엔 1cm 정도의 간격을 띄워 소심하게 다시 손을 얹었다.
“나도 입학하고 알았는데 엄마끼리 절친이셨지 뭐야. 우리 아들 대학 보내야 한다고 엄마가 어찌나 하소연해 놨는지. 수민이네 어머님이 내 공부 도와주라고 하셔서 내가 이 친구한테 신세를 좀 지고 있어. 몰랐는데 꽤 괜찮은 애더라고. 그래서 너네한테 소개해 주려고 내가 불렀어.”
처세술로 먹고 살아온 김정현답게 거짓말이 술술 흘러나왔다. 태연한 얼굴과는 다르게 등에선 땀이 비질 흘렀다. 제발…… 나도 모르게 어깨 위에 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발작하며 다 때려 부술 줄 알았던 수민은 예상외로 잠잠했다. 그가 살짝 고개를 돌려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온 불쌍함을 눌러 담은 표정을 지으며 입 모양으로 간청했다.
‘제발 한 번만 도와주라.’
‘도와주면? 도와주면 뭐 해 줄 건데?’
내 넓은 어깨를 사각 삼아 그가 은근하게 물어 왔다. 지금도 종놈이나 다름없는 신세인데 뭘 더 해 줘야 하는지. 순간 억울한 표정이 되었다.
‘그렇잖아. 세상만사 기브 앤 테이크인데. 뭣도 없으면서 부탁하는 거야, 지금?’
“너네 지금 뭐 하냐?”
멀뚱히 이쪽에 주의 집중된 시선에 마음이 급해졌다. 수민에게 노예처럼 끌려다니는 걸 알면 이 자리에 모인 애들은 물론이거니와 학교를 넘어 이 지역에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질 것이었다. 그리고 다른 의미로 선배들의 호출을 받겠지. 생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었다.
‘할게. 뭐든지 네가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염치없기는…….’
다급하게 내뱉어 버린 소리 없는 외침에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차는 수민은 나의 착각인진 모르겠지만 조금 신나 보였다. 입꼬리가 평소와 다른 방향으로 올라가 있었다. 그의 미묘한 얼굴 근육의 차이도 알게 되다니 나는 그의 진정한 노예로 성장했나 보다.
“정현이가 두고 간 게 있어서 가져다주느라 들렀어. 노는데 말도 없이 불쑥 찾아와서 미안해. 자.”
그가 대충 주머니를 뒤져 쥐여 준 쓰레기를 받아 들었다. 나는 그의 입에서 나오리라 생각지도 못했던 미안하다는 말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는 누구나 깜빡 속아 넘어갈 만큼 잘 지어낸 가식적인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까의 냉랭한 분위기와는 상판 다른 부드러운 태도에 얼어붙은 테이블 또한 호의적으로 변했다.
“내가 방해했지? 그럼 재미있게 놀아. 나는 이만 가 볼게. 정현아, 학교에서 보자.”
“야. 온 김에 잠깐 앉았다 가. 김정현 친구라며.”
“그래. 김정현, 너는 너 때문에 여기까지 왔다는 애를 그냥 보내냐. 뭐라도 먹고 가.”
“그래도 될까? 동창 모임인 것 같은데 내가 껴도 되겠어?”
“여기 뉴페이스들도 많은데, 뭐 어때. 앉아.”
곤란하다는 듯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수줍게 자리에 앉는 그 작위적인 행동을 똑똑히 지켜보았다. 여기까진 도와 달라고 한 적 없는데. 뭐 하고 있어. 얼른 안 가? 작게 으르렁거리자 표정 하나 안 변하고 보란 듯이 물컵을 흔들었다.
“나는 물 마실게. 갈 때 운전을 해야 해서.”
남자들의 부러운 시선이 밖에 얌전히 주차된 바이크에 꽂혔다.
“바이크 네 거야? 쩐다. 야. 너 그렇게 안 봤는데 의외다. 학교에서는 조용하더니만.”
“그래. 그 찐따 같은 안경은 벗고 다녀. 훨씬 사람 같다.”
“나 한 번만 타 보면 안 되냐?”
쏟아지는 동경을, 혹은 놀라움을 담은 관심에도 수민은 크게 동요하지 않는 듯 보였다. 적절하게 원하는 리액션을 취해 주며 초면임에도 무리 없이 잘 섞여 들었다. 기 세기로 지지 않는 애들인데 한 마디도 허투루 물러서거나 내게 하듯 거세게 나가는 일이 없었다. 허세에 가득 찬 날라리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들려주며 비위를 맞추기까지 했다. 백 점 만점에 백 점짜리 처세술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빈 술병이 나뒹굴고 하나둘씩 혀가 꼬부라지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자리를 지키는 수민 때문에 긴장을 늦출 수가 없어 좌불안석이었다. 나도 정신줄 놓고 취해 버리고 싶었지만 마시지 않는 술을 입에 대긴 싫었다. 화장실로 뛰어가고 앉은 자리에서 잠이 들고 헛구역질을 이어 가는 혼돈의 카오스에서 말똥말똥한 사람은 우리 둘뿐이었다.
“너네 진짜 귀엽게 논다. 흡연에 음주에…… 어서 빨리 어른이 되고 싶은가 보지?”
차수민이 인생 다 산 애어른처럼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너는 이딴 가죽 재킷을 입고 장을 보냐? 요즘 조폭도 그런 옷은 안 입겠다.”
지기 싫어 대꾸했다. 수민이 말없이 테이블 위의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말릴 새도 없이 가느다란 쇠꼬챙이를 내 허벅지로 내리꽂는 척하다가 바로 위에서 멈췄다. 뚫리는 줄 알았다.
“허억.”
“장 못 봤다. 카트 밀 놈이 없어서. 왜 전화 씹었어. 오냐오냐 봐주니까 진짜 죽고 싶지.”
“잠깐 진정해. 선약이어서 취소할 수가 없었어. 근데…… 너 내가 여기 있다는 거 어떻게 알았어?”
생각해 보니 수민이 처음 들어왔을 때 했어야 할 질문이었다. 약속 있다는 사실은 물론 약속 장소를 오늘의 멤버 외에 다른 사람에게 알려 준 적이 없었다. 이 자리에 차수민과 따로 친분이 있는 사람도 없어 보였다. 대체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 의문이 들었다.
“지나가다…… 네 멍청한 얼굴이 보였어. 혼자 장 볼 생각 하니까 꼭지가 홱 돌아서 인근을 쥐 잡듯이 뒤졌거든.”
무서운 자식. 신빙성 없었지만 차수민이라면 가능하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문자 씹어서 미안한데 솔직히 주말에 부르는 건 너무하지 않아? 왜 국가가 7일 중 5일만 근무일로 정했겠어. 나도 사생활이란 게 있잖아. 네가 다시 생각해 봐야 할 문제가 아닐까 싶은데……요.”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용기 내어 주장하자 이번엔 차수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그러네. 학교도 토요일 일요일은 쉬는데, 그치? 충분히 불합리하게 느껴질 수 있겠어.”
“어어. 내 말이 그 말이야!”
“그럼 소원 찬스 쓸게. 아까 뭐든 들어준댔지? 주말에도 호출하기. 이걸로 할래.”
처음으로 의견이 일치하나 했더니 반달 모양 눈으로 예쁘게 나를 올려다보며 준비한 반전으로 두개골을 후려갈기는 수민이었다.
“싫으면 뭐. 네가 죽고 못 사는 친구들한테 우리 관계 확 불어 버리지. 나는 손해 볼 거 하나도 없거든.”
“……그래. 맘대로 해라. 주말이든 공휴일이든 마음껏 불러라.”
물이나 벌컥벌컥 마셨다. 내가 뭘 어쩌겠니. 하도 당하니 쉽게 포기가 되었다. 그리고 도와준 건 사실이니까. 눈치 없이 얘 내 꼬붕인데, 했을 장면을 생각하니 아찔해졌다.
“야. 너 나랑 아는 거 왜 이렇게 필사적으로 숨겨?”
한동안 노가리만 씹던 차수민이 물었다.
“그걸 말이라고 해? 당연히 쪽팔리니까!”
나는 고개를 돌려 턱받침을 한 채 나를 빤히 바라보는 차수민과 눈을 맞추었다. 이게 사람 놀리나.
“뭐가 쪽팔린데?”
“한주먹 거리로 보이는 너한테 처맞을 뻔한 내가 쪽팔리지. 얼마나 우습겠어. 새우한테 끌려다니는 고래처럼 보일 거 아냐.”
“그것 말곤 없어?”
“뭐가 더 있어야 해?”
황당해하는 내 목소리에 고개를 내저은 수민이 다시 마른안주를 씹어 댔다. 잠시 생각에 잠긴 듯했다.
“넌 나 안 무서워?”
“글쎄……? 쥐방울만 한 네가 무서우니까 네 빵 셔틀이나 하고 있는 게 아니겠어?”
“근데 왜 안 도망가?”
나는 얼빠진 신음 소리를 냈다. 뭐냐, 얜. 나더러 자퇴하란 소리를 돌려 말하는 건가?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서 입만 벙긋거리는데 차수민이 멋대로 결론을 내려 버렸다.
“문자도 씹고. 전화도 씹고. 말도 잘 안 듣고. 도망도 안 가. 내 생각엔 너는 날 무서워하지 않는 것 같아.”
“어어. 안 무서워해서 미안하다. 앞으론 더 노력해 볼게.”
“신기해서. 분명 겁쟁이 같았는데.”
저거 지금 나 찐따 같다고 돌려 까는 거지? 나는 울컥했으나 진짜 찐따가 맞았기에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내 속이 어떻든 자기는 만족스러운지 차수민이 기지개를 켰다.
“야, 집에 안 가? 피곤한데.”
널브러진 애들을 두고 겉옷을 챙겨 수민의 뒤를 조용히 따라 나왔다. 밤공기가 촉촉하게 스며들었다. 제법 따듯하게 느껴지는 걸 보니 봄이 정말 왔나 보다.
“잘 가.”
어색하게 인사하자 수민이 바이크를 타다 말고 멈추었다. 의아한 표정이었다.
“안 탈 거야?”
“어?”
“타. 데려다줄게.”
수민이 뒷자리의 안장을 가리켰다. 나는 숨이 막혔다. 살면서 두 발 달린 탈것은 자전거밖에 못 타 본 나였다. 바이크라니. 남자라면 누구나 가슴속에 바이크에 대한 로망을 품고 있을 것이다. 차수민의 바이크는 돈을 처바른 듯한 튜닝 덕분에 문외한이 봐도 멋이 철철 넘쳐흘렀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안장을 쓸었다.
“택시 타도 되는데…….”
“안 탈 거면 말고.”
“씁. 그럼 실례.”
혹시나 물릴까 나는 냉큼 다리를 들었다.
막상 앉으니 후회스러웠다. 두 손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모르겠어서 어색하게 팔을 들고 머뭇거렸다.
팔짱을 끼고 있자니 뒤로 굴러떨어져 생을 마감할 것 같고 안장을 잡자니 칸이 작았다. 그렇다고 차수민의 허리를 잡자니 그림이 이상할 것 같았다. 몸에 달라붙는 가죽 재킷 때문에 그의 체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어깨는 있는 편인데 허리는 가늘었다. 손을 대면 이상한 기분이 들 것 같았다. 그러나 고민은 짧았다.
“꽉 잡아라.”
한 마디만 남긴 채 급출발을 해 버린 차수민 덕분에 본능적으로 그의 허리를 꽉 잡아 버렸다. 헬멧도 안 썼는데 대가리가 터질 뻔했다. 173의 허리를 부여잡고 덜덜 떠는 186. 다른 의미로 웃긴 그림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으어어어어어.”
입을 벌릴 때마다 바람이 들어와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아무리 새벽의 도로라지만 이렇게 목숨 내놓고 달려도 되는 걸까 싶었다. 무식하게 속도를 올린 그는 신나게 도로를 누볐다. 낫을 든 죽음의 사신이 신호등 너머로 보였으나 으어어어어. 나는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가로수와 건물들이 휙휙 지나갔다. 죽기 살기로 그의 가느다란 허리에 의존하여 버텼다. 이 정도 속도라면 시간을 초월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광기 어린 레이스가 끝나고 내가 꺼낸 첫마디는 끝을 맺지 못했다.
“택시 탄다고 했잖, 우우우엑.”
집에 도착했을 때 엄마는 숙취 때문인 줄 알고 내 등짝을 마구 때렸으나 실상은 멀미 때문이었다. 차멀미. 올라오는 토기에 괴로워하다가 새벽을 지새우고 뜬눈으로 등교했다.
그래도 차수민에 대한 나의 인상은 전과는 달라져 있었다.
‘타.’
당연하게 뒷자리를 내주던 그의 태도가 떠올랐다. 생각보다 좋은 애가 아닐까 싶었다. 평소에 나를 갈구고 부려 먹긴 하지만 소심하게 반항할 때마다 주먹질도 안 하고 스무스하게 넘어가 주었다. 어제도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나를 건져 주었다. 비록 지가 만든 위기이고 또 약점 잡긴 했지만.
그리고 이 생각은 하루아침에 바뀌어 버렸다.
“잘 들어갔어? 연료비 2만 원에 네가 토한 가죽 재킷값 48만 원. 갚을 돈에 더해 놨어.”
“네가 타라며!”
“어허. 예민하게 왜 그래. 빚이 산더미라 50쯤 더한다고 큰일 안 나.”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어쩐지 쉽게 태워 준다 했더니 이렇게…… 뒤통수나 치고.”
주위 시선을 살피며 조곤조곤 말을 했으나 상대는 심드렁했다.
“이따 올 때 콜라랑 삼각김밥 사 와라. 난 참치마요가 좋더라.”
“참치마요는 빨리 나간단 말이야. 전주비빔밥은 어때.”
나는 그의 강압적인 태도에 나도 모르게 저자세로 요구 목록을 받아 적고 있었다.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전주비빔밥 사 오면 오늘이 네 제삿날일 줄 알아.”
차수민이 그래도 인간이 아닐까 기대했던 내가 바보였다. 존나게 부려 먹네 진짜. 툴툴대면서도 몸은 충실히 그의 명령을 따르고 있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매점의 삼각김밥은 전주비빔밥밖에 안 남아 있어서 힘들게 학교 앞 편의점까지 가야 했다. 걸리면 벌점이니 빙 돌아 도서관 뒷길을 이용해 가로지를 생각이었다.
그러나 도서관 뒤가 김돼지 전용 흡연터인지 도서관 근처에 얼씬거리는 일이 드문 나는 알 도리가 없었기 때문에 그놈들과 눈이 마주쳐 버렸다. 평소에 도서관 쪽을 가 본 적이 있어야지…….
“여. 김정현이.”
“아, 선배님.”
좆됐다. 의식적으로 피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 버렸다. 김돼지와 친구들.
“선배님은 무슨 닭살스럽게. 형이제, 병철이 형. 오랜만이다? 한동안 못 봤제?”
형은 무슨. 어떤 형이 동생 삥을 뜯는단 말이니. 나는 머릿속으로 그를 줘 패며 한껏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일도 있었고 좀 바빠서요.”
“파하. 정현이 요새 공부 열심히 한다더니 사실인가 보네. 갑자기 노선 갈아타기가? 서운해라.”
내가 공부를 하든 말든 니들이 무슨 상관인지 궁금했지만 묻진 않았다. 고작 차수민 대타로 보충 수업을 들은 게 이렇게 동네방네 소문날 일인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누가 보면 서울대라도 가려는 줄 알겠다. 창피하게, 진짜.
“상호랑 용재 소식은 들었는데 어쩌다 그런 꼴이 났는지 난 참 이해가 안 된다. 느그 길 가던 조폭한테 삥 뜯었냐. 안 그러고서야 애들이 떡이 될 리가 없잖냐. 쯧. 덕분에 우리 정현이만 힘들게 됐다.”
둘이 그렇게 된 터라 상납금은 아직 내지 못한 상태였다. 뚱땡이가 걱정하는 척 압박을 가했다. 짜증 나네. 돈 맡겨 놨냐? 나는 이를 뿌득 갈며 애써 태연하게 둘을 바라보았다. 괜히 귀찮은 일은 만들고 싶지 않았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내가 니 많이 애낀다는 거 알고 있제?”
병철이 태우던 담배를 던져 밟고 툭툭 어깨의 먼지를 털어 주는 모션을 취했다. 네. 알다마다요. 내 목소리에 담배 연기에 감겨들었다.
미쳤다 생각하고 지금 뚱땡이에게 달려들면 피떡이 되더라도 넘어뜨릴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항상 칼을 소지하고 있고 수틀리면 망설임 없이 사람을 그어 버릴 또라이라는 사실은 꽤 큰 장애물이었다. 굳이 그에게 도전하여 이 평안함을 깨뜨리고 싶지 않았다.
나는 차수민의 말처럼 겁쟁이일 것이다. 그치만 지금 이대로도 나쁘진 않잖아. 좋은 게 좋은 거지. 나만 참으면 모든 게 그럭저럭 굴러간다. 그게 내가 살아온 방식이었다.
“그럼, 곧 또 보자잉.”
김병철이 투실투실한 엉덩이를 흔들며 사라졌다. 그래도 저 기름 낀 얼굴을 오래 보고 싶진 않긴 하다. 윽, 비위 상해. 나는 토악질하는 척을 해 보였다.
“아끼기는 개뿔, 시발. 나를 왜 아껴. 니 몸이나 아껴 봐라. 곧 있으면 혈관 막혀 졸업하기도 전에 죽겠다.”
투덜거리며 차수민의 삼각김밥을 위해 가던 걸음을 이었다. 저딴 놈들에게 좋게 보여 어디에 쓰냔 말이다. 운동을 더 열심히 해서 한번 조져 놓든가 아예 안 해서 근육을 싹 빼 버리든가 해야 할 텐데 여전히 줄넘기만 주구장창 시키는 킥복싱 학원의 진도를 생각하니 한숨이 나왔다. 조지긴 개뿔. 역시 후자가 더 쉽겠다.
상납금도 문제였다. 수민에게 불법적으로 잡혀 있는 이자가 어마어마한데 상납금 또한 마련해야 한다. 누구 주머니를 털까 고심하다가 차수민에게 된통 당한 일을 떠올리니 고약한 생각이 쏙 들어갔다.
차수민이야말로 김병철을 능가하는 악독한 놈이었다. 뚱땡이는 그래도 사람이 커버할 수 있는 만큼의 빚을 지게 한다고. 둘의 차이가 있다면 차수민은 나만 표적으로 삼는다는 점일 것이다.
어쩐지 기분이 팍 상해서 그냥 교실로 돌아가기로 했다. 삼각김밥 까짓 거 알아서 사 드시라지.
삼각김밥
삼각김밥은?
김밥!!!!!!!!!
재촉하는 문자가 몇 번이고 울렸지만 사 바치고 싶은 기분이 영 아니었기에 무시했다. 쉬는 시간마다 교탁에 숨어 눈에 불을 켜고 나를 찾는 놈을 피했다. 나는 학교가 파하자마자 얼른 토꼈다.
“아르바이트를 구한다고?”
“네. 시켜만 주시면 뭐든 최선을 다해서 잘하겠습니다.”
“아직 학생 아니여? 알바가 잘 안 구해지기는 하는데 미성년자한테 시키기 좀 그런 일이라.”
“어휴. 알 거 다 아는 나인데요. 절 미성년자로 보는 사람, 거의 못 봤습니다. 입 싹 닫고 아무한테도 말 안 하겠습니다. 돈이 너무 필요해서 그래요. 전 체력 빼면 남는 게 없습니다. 몸 쓰는 일이랑 밤새우는 일 잘합니다. 뭔 일 있으면 제가 다 때려눕히겠습니다!”
“학생이……? 늦게까지 일하면 다음 날 학교 갈 때 힘들 텐데 괜찮겠어?”
“걱정 붙들어 매십쇼. 학교 수업 잘 안 들어요. 보충만 열심히 합니다.”
“그게 뭔 자랑이라고. 학생이 수업을 열심히 들어야지. 새벽 타임이 잘 안 구해져서 애먹는 중이긴 했는데. 맡겨도 되나 몰라.”
고민하는 척 뜸을 들이던 아주머니는 결국 내게 모텔 업무를 설명해 주었다. 각 방의 키와 CCTV의 위치를 익히고 결제 시스템을 대강 배웠다.
“내일 새벽부터 바로 출근하면 돼. 급여는 주급으로 나갈 거야. 일단 한 달만 쓰고 하는 거 봐서 연장하든가 하자.”
킥복싱 학원 끝나고 곧바로 아르바이트에 가면 될 시간대였다. 수업-보충-킥복싱 학원-아르바이트. 촘촘한 하루 스케줄이었다. 슬쩍 벅차올랐다. 24시간을 쪼개어 계획을 세워 두니 성실한 모범생이 된 느낌이었다. 내 인생에서 이렇게 열심히 살아본 적이 있었던가. 누구 덕분에 반강제적으로 성실히 살아가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니 차수민의 패턴도 어느 정도 파악하게 되었다.
자기 명령에 만족하는 결과를 가져다주지 않으면 패악질을 부리며 되도 않는 요구를 하지만 패턴을 파악하면 애 다루듯…… 아니, 그렇게까지 쉽진 않고, 패턴을 파악하면 어느 정도는 맞춰 주며 할 만한 꼬봉 생활을 영위해 갈 수 있다.
“체육복 빌려 와.”
여기서 처음 한두 번 정도는 수준에 못 미치는 결과를 보여 주는 것이 중요한데, 그래야 차수민의 사디스트적인 괴상한 성향을 충족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완벽하게 요구를 수행하면 허, 이놈 봐라? 하며 나를 괴롭히기 위해 강도 높은 레벨의 퀘스트를 계속 제시한다. 차라리 한 번쯤 헐렁한 모습을 보여 주면 그에 맞춰 할 만한 요구를 해 오기 때문에 그편이 훨씬 편하다.
“여기.”
나는 우리 반을 돌며 빼앗듯 빌려 온 체육복 하나를 내밀었다.
“이 냄새나는 옷을 지금 나더러 입으라는 거야?”
수민이 앙칼지게 소리 질렀다. 나는 짐짓 당황한 척 밖으로 나가 미리 빌린 다섯 벌의 체육복을 뒤져 깨끗해 보이는 하나를 대충 집어 가져다주었다.
“눈이 없냐, 너는? 이건 얼마나 뚱뚱해야 입을 수 있는 거야?”
네가 작은 거겠지. 입술을 깨물며 미리 준비한 S 사이즈의 체육복을 땀을 닦아 내는 시늉을 하며 내민다. 그러면 이미 두 번의 쿠사리를 먹었지만 더 이상 그날은 무리한 요구를 해 오지 않고 잠잠한 하루를 보낼 수 있다.
이렇게 살다 보니 내 자신이 고양이를 키우는 집사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제멋대로인 상전을 모시기 위해 갖은 정성을 쏟는 불쌍한 집사. 예상대로 반응하면 쾌감마저 느껴졌다. 이 수준이면 차수민의 행동 패턴에 대해 논문을 써도 될 정도였다.
✲ ✲ ✲
모텔 일은 생각보다 쉬웠다. 민망한 상황만 감수한다면 말이다.
“하앙, 아아앙!”
나는 귀를 틀어막았다. 이럴 줄 알았다. 2층 방 준다니까 굳이 카운터 바로 옆방에 들어가서는.
장소가 장소다 보니 남녀 커플을 많이 마주하게 되는데 아무리 경험 없다 해도 눈치껏 분위기 정도는 파악할 수 있었다. 귓가에 들려오는 신음이나 눈앞에서 벌어지는 키스 장면은 애교였다.
카운터에서부터 대놓고 남자의 앞섶을 만지는 여자도 보았고 아예 여자의 가슴 쪽 블라우스를 헤친 채 그 안에 손을 넣고 주물럭거리며 계산을 하는 남자도 있었다.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에 여자의 풍만한 가슴에서 눈 돌리느라 죽을 뻔했다. 한 번은 수건을 갈아 달라는 요청에 방 앞에서 노크를 하고 기다리자 전라의 여인이 거리낌 없이 문을 활짝 열며 입 벌리고 서 있는 내 손에서 수건을 낚아채 간 적도 있다.
특히 생각나는 일화가 있는데, 얼마 전 우락부락한 사내와 예쁜 누나가 나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던 적이 있다. 사내의 팔뚝에는 금방이라도 물가로 다이빙할 것 같은 잉어 한 마리가 큼지막하게 새겨져 있었다.
“니 이름이 뭐고?”
“예, 예?”
그는 덜덜 떨며 카드를 받아 든 내게 이름을 물어 왔다.
“이름이 뭐냐 캤다.”
“저는, 대학교에 다니는데요…….”
아무래도 고등학생인 걸 눈치챈 것 같아 이름을 물었는데 동문서답으로 ‘대학생입니다’라고 답해 버렸다. 내 알바 흑역사 중 한 페이지를 채울 일이었다.
처음엔 눈앞에서 벌어지는 세미 야동들로 단단해진 앞이 괴로워 집만 가면 밤새 자위를 했었는데 시간이 약이라고 이제는 손님 없는 카운터에서 수학 문제집을 풀 정도로 초연해졌다.
“하앙, 앙! 아, 더! 더 깊게!”
“3번…. y는 x 제곱…….”
곧 중간고사라 그런지 차수민이 맡긴 문제집이 늘어났다. 쉬는 시간마다 반장을 부여잡고 맨땅에 헤딩 중이었다. 그래도 강제적으로 듣는 야간 보충 수업 때문인지 2점짜리 문제들은 답지를 보면 이해는 되는 수준에 도달했다. 엄마가 알면 기뻐 눈물을 흘릴 일이었다.
뭐 해?
핸드폰이 울렸다. 함박웃음이 지어졌다. 동창 모임 때 만난 한수진의 친구 도연이었다. 양아치는 싫지만 양아치 상은 좋다던 그녀는 결국 내 번호를 받아 갔고 간간이 메시지로 대화를 이어 가고 있었다.
열공 중. 너는?
이 새벽에? 거짓말하지 마ㅋㅋ 지나가던 개가 웃겠다
왜 내가 새벽에 공부하는 게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니……. 내 이미지에 대해 성찰해 보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나는 시무룩하게 문자를 찍었다.
찍어서 보여 줄 수도 없고. 자랑하는 것 같아 보일 테니까
사실 그런 이유보다는 모텔 배경이 너무 적나라하고 문제집에서는 비가 내렸기 때문이었다. 나는 애꿎은 지우개로 틀린 문제들을 빡빡 문대었다.
너는 뭐 하고 있어?
누워서 음악 듣는 중~
어떤 음악 좋아하는데?
지금은 실시간 순위에 있는 아이돌 음악 듣고 있는데 평소엔 재즈 즐겨 들어
헉. 나도 재즈 엄청 좋아하는데. 다음에 가평 재즈 축제 같이 갈까?
나는 재즈의 재자도 모르는 사람이다. 그녀의 호의를 얻기 위해서라면 뭔 거짓말을 못 할까 싶었다. 그녀 역시 의심이 들었는지 쉽게 넘어가 주지 않았다.
ㅋㅋㅋㅋㅋ진짜? 좋아하는 재즈 아티스트 이름 세 명만 대 봐
한 명도 모르는데 세 명씩이나? 발등에 불이 떨어져 초록 창을 켜고 검색했다. 처음 보는 외국인들의 이름이 즐비했다. 대충 몇 개를 골라서 자판에 하나씩 쳐 내려가는 중이었다.
입구 쪽 자동문이 열리며 손님이 들어왔다. 나는 폰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카운터 근처로 다가온 그림자를 향해 물었다.
“대실이세요, 숙박이세요?”
“대실과 숙박의 차이가 뭔데요?”
“하 참. 여기까지 들어와서 모르는 척하시긴. 대실은 두세 시간 이따가 나오는 거고 숙박은 하루 자고 나오는 건데…….”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어 고개를 들자 그가 있었다.
차수민.
“안뇽.”
이제는 그가 나를 잡으러 온 저승사자라고 합리적으로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어떻게 내가 있는 장소를 콕 집어 감시하듯 어슬렁어슬렁 모습을 나타내는지. 나는 메시지를 보내던 핸드폰을 뒤집어 놓았다.
“하. 뭐냐 또.”
불청객은 질색하는 내 얼굴이 보이지도 않는지 아무렇지 않게 제집처럼 걸어 들어왔다.
“소문이 사실이었군. 여기 있었네.”
“헉. 소문이 났어? 학교에?”
“아니. 그건 아니고. 근데 너 여기서 뭐 해?”
“뭐 하긴. 보면 몰라? 아르바이트하고 있잖아. 너야말로 이 새벽에 여기 어쩐 일이야?”
나는 카운터에서 몸을 쭉 빼서 그의 옆에 여자라도 있나 확인했다. 여기저기 살펴보아도 트레이닝복을 대충 걸친 차수민 한 명뿐이었다. 그래, 아무리 막장이어도 고등학생이 섹스하러 모텔에 오진 않겠지. 제법 보수적인 생각을 하며 그를 계속 세워 둘 수 없어 문 앞의 대기용 의자에 앉게 했다.
“설마 나 찾으러 온 건 아니지? 스토커도 아니고?”
제가 부리는 종놈이 어디서 무얼 하는지 알아야 직성이 풀리는 대감마님 스타일일지도 모르겠다. 알아낸 사실을 머릿속 차수민 관찰지에 차곡히 적었다. 수민은 내 물음을 가뿐히 넘기며 말머리를 돌렸다.
“일? 왜 해?”
“무슨 부잣집 도련님 같은 발언이야? 돈 벌어야지. 네 악마 같은 빚을 갚으려면.”
생각해 보니 차수민은 부잣집 도련님이 맞는 것 같았다. 고등학생이 백만 원이 넘는 현금을 들고 다니며 개조를 거듭한 집 한 채값 오토바이를 끌고 다니는 일은 흔치 않았다. 있는 것들이 더하다고. 이런 놈에게 피같이 알바해 번 돈을 바쳐야 한다고 생각하니 울화통이 터졌다.
“천천히 갚아도 돼. 일당 이자는 오늘부터 멈춰 줄게. 이런……-그가 로비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쓰레기 같은 곳에서 일하는 모습을 보니까 내가 쓰레기가 된 것 같잖아.”
너 쓰레기 맞아. 뒷말을 삼키고 뚱하게 말했다.
“안 돼. 돈 필요해.”
“왜?”
“너도 넌데 돈 달라는 양아치들이 수두룩해서 벌어야 해.”
“여기저기서 돈 뜯기고 다니니? 너 정말 찐따구나.”
“이제 알았냐.”
대꾸해 주기도 지쳤다. 수민은 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긴 밤을 모텔에서 지새울 생각인지 자판기에서 싸구려 커피를 뽑아 왔다.
“진짜 안 갈 거야? 주인아줌마 알면 나 잘릴 수도 있어.”
“안 가.”
“하아. 고집은. 야, 안 갈 거면 이리 들어와. 로비 추워.”
나는 카운터를 막고 있는 무릎까지 오는 선반을 열어 주었다. 밖은 따듯했지만 빛 한 줌 들어올 창 하나 뚫려 있지 않은 로비는 서늘한 공기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전등 옆자리를 내주었다. 추울까 봐 담요도 덮어 주었다. 차수민이 시키고 나서 움직이는 것보단 미리미리 시킬 일을 예상하고 받들어 주는 편이 나았다.
수민이 커피 캔을 따자 청량한 소리가 울렸다.
“수학 문제 푸는 중이었네. 너 시킨 숙제 잘하고 있구나? 의외인데.”
“안 하면 팰 거잖아…….”
“와. 드디어 깨달았네. 이리 줘 봐 봐. 엑. 겁나 틀리네. 생각보다 더 똘빡이구나 너?”
그가 얄밉게 히죽 웃었다. 노란 불빛 아래여서 그런지 그 웃음이 순간 빛바랜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클로즈업된 차수민의 얼굴에 청량한 멜로 영화에서 나올 법한 BGM이 깔렸다. 요즘 잠을 통 못 잤더니 피곤한가. 나는 눈을 비볐다. 고약한 차수민이 혀를 차며 비 내리는 페이지를 훑는 중이었다. 그럼 그렇지. 밉상 그대로의 모습이 돌아왔다.
“내놔.”
씨익거리며 문제집을 뺏어 들자 금방 흥미를 잃고 뒤에서 방 키들을 짤랑이며 혼자 노는 꼴이 정말 고양이나 다름없었다. 한참 동안 키를 만지작거리던 수민이 물어 왔다.
“그래서 돈 달라는 양아치들이 누군데?”
“있어. 너 같은 애들 삥 뜯어 오라고 시키는 선배. 네가 상호랑 용재랑 사이좋게 쌍으로 병원에 보내 버리는 바람에 내가 혼자 다 내게 생겼어. 고오맙다.”
“그 선배들이 누군데?”
“알아서 뭐 하게?”
어쩐지 집요하게 물어 오는 수민이었다. 나는 홱 등을 돌려 그를 마주했다.
“학교 일진들 차근차근 도장 깨기라도 하게? 싫어. 안 알려 줄 거야. 네가 한주먹 하는진 몰라도 그 선배들은 날고 기는 사람들이라고.”
내 말에 수민이 픽 웃었다. 그의 눈이 예쁘게 접혔다. 나는 속지 않았다. 그는 여자애처럼 곱게 생겨서 속은 시꺼먼 아저씨였다.
“웃겨? 그냥 하는 말이 아니야. 위험하다니까. 내일이 없는 인간들이라서 수틀리면 진짜 칼질해. 우리 동네 알잖아. 몇 명은 조직 폭력배랑 연결되어 있다니깐.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 괜히 엮였다 피곤해져.”
“푸하하하하.”
이제는 배를 잡고 박장대소를 한다. 사람 말을 무시해도 유분수지. 정말이라니까? 그들이야말로 미래가 없는, 아니 역으로 생각하면 미래가 보장된 사람들이었다. 졸업 후 조직에 들어가 그렇고 그런 일들에 손을 댈 것이다. 이미 칼 들고 설치다가 퇴학당한 선배도 있었다.
병철 선배가 날 눈여겨본 것도 대충 피지컬이 맞으니 자기 줄 세워서 그쪽에 끌어들이려는 속셈임이 분명했다. 목숨 하나 구원해 보고자 내 자존심 깎아 가며 이를 구구절절 설명했지만 수민은 눈물 나게 웃어 재꼈다.
“야, 이제 그만, 좀…….”
“아하학, 진짜 웃겨!”
이렇게 격렬한 차수민의 감정 분출은 처음이라 좀 당황스러웠다. 한참 웃던 그가 눈물을 닦아 냈다.
“하아. 그래서 어떤 조직이래?”
“진짜라니까. 안 믿네? 답답하게. 몰라!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이 멍청아. 취업이 하늘의 별 따기인 이 시대에 조직 취업이라고 쉬울 것 같냐. 열몇 살짜리 조무래기들이 들어오겠다고 낼름 받아들여 줄 것 같아? 조직을 너무 물로 보네.”
“어휴. 네 맘대로 해라. 걱정해 줘도 지랄이야.”
“그래서 얼마나 걷는데?”
“30만 원.”
그가 눈을 똥그랗게 떴다.
“그러면 30에서 또 떼다가 제일 위에 바치는 거야? 고딩 주머니 푼돈을 모으고 모아서?”
“그런가 보지. 아님 지들이 쓰든가.”
“걔네 진짜 재밌다. 아하학. 어린 애들 삥이나 뜯고 수준 알 만하다. 진짜 조폭 새끼들 연계되어 있으면 더 꼴값이겠다. 어떤 놈들인지 정말 궁금해지는데.”
지는 무슨 다른 나라에서 왔나. 관찰자처럼 말하는 꼴이 영 아니꼬웠다. 생각해 줘도 비웃기나 하고. 나는 토라져 수건을 개는 데 집중했다. 바로 옆에 앉아 있으면서 도와주지도 않는다. 왜 온 거야, 진짜.
어느덧 시계는 3시를 향하고 있었다. 수민만 없었다면 이미 눈을 붙였을 시간이지만 어쩔 수 없이 쏟아지는 졸음을 막기 위해 아줌마의 코코아를 훔쳐 두 잔을 탔다.
“너 안 가? 벌써 3시야. 가라 좀.”
“싫은데? 거지같이 생겨서 은근히 아늑하네, 여기.”
나도 혼자 있는 것보단 이런 애라도 옆에 있는 편이 덜 외로웠지만 확실히 늦은 시각이었다. 우리 엄마는 워낙 아들 신경 안 쓰는 분이라 괜찮다 해도 일반적인 가정에서의 통금 시간을 넘겨도 훌쩍 넘긴 시각이었다.
“부모님이 걱정하시잖아. 가 빨리.”
“부모님 몰라. 나 자취해.”
“엉?”
“여기 뒷골목에 혼자 살아.”
수민이 가로막힌 콘크리트 벽을 손가락질해 보였다. 모텔은 우리 학교와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지만 골목 자체가 인근 대학생들이 많이 거주하는 원룸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자취하면서까지 다닐 만큼 좋은 학군도 아니고 고등학생이 혼자 살기에 좋은 지역도 아니었다.
“부모님은?”
“다른 지방에 계시는데.”
“첨 들어. 전혀 몰랐는데.”
“당연하지. 네가 안 물어봤잖아.”
“그, 그건 그렇지.”
물어보면 가르쳐 주긴 했을까? 우리가 사적인 내용을 서로 물어볼 관계인지 의문이 들었지만 이내 항상 궁금했던 궁금증이 스멀스멀 고개를 들었다.
아들의 공부에는 세심하게 신경 쓰면서 이딴 똥통 학군에 귀한 아들을 원정 보낸 그의 아버지는 대체 어떤 사람일까? 겉보기엔 얌전하고 참해 보이지만 실상은 성격 파탄자이면서 몸도 제법 쓸 줄 아는 두 얼굴의 차수민을 길러 낸 부모는 대체 어떤 사람들이냔 말이었다.
“그럼 말이 나왔으니까 물어보는 건데, 네 부모님은 뭐 하시는 분이야?”
용기를 가지고 꺼낸 질문이었다. 수민은 히터의 조절 버튼을 빙빙 돌렸다. 바람이 거세졌다가 약해졌다가 굽이굽이 파도치고 있었다.
“그냥……. 자영업자랑 주부.”
뭐야. 생각보다 평범하네. 그러나 머릿속에 새겨진 그의 아버지에 대한 이미지는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얼굴에 칼자국이 있는 험악한 사내와 아들의 문제집을 체크하는 인상 좋은 중년의 남자. 여기에 오늘 지방에서 꽤 규모가 큰 가게에 앉아 장부를 정리하는 자영업자 사장의 이미지까지 더해졌다. 점점 오리무중이었다.
“왜 궁금한데?”
그가 새침하게 물어 왔다.
“아아니. 네가 자취한다길래 궁금해서. 별 의미 없었어.”
당황해서 손을 젓자 나를 위아래로 훑던 긴 눈초리는 이내 2천 원에 판매하는 원가 500원의 싸구려 칫솔 치약 세트로 돌아갔다.
“심심하면 놀러 와도 돼. 아직 아무도 들인 적이 없지만 넌 내 따까리니까…… 특별히 허락해 줄 수도 있어.”
그가 다리를 꼰 채 도도하게 말했다.
“어? 어어, 그래…….”
시간도 없거니와 굳이 사자 굴에 제 발로 걸어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아마 갈 일은 없겠지만 당황한 나머지 어물쩍 대답해 버렸다.
그렇게 한참을 버티던 그는 희뿌옇게 동이 터 오를 때쯤 눈을 비비며 등교 준비를 위해 일어났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그동안 감히 생각지도 못했던 한 가지 가정을 떠올렸다.
……이 새끼, 친구 없는 거 아니야?
✲ ✲ ✲
벚꽃이 다 떨어져 나가고 파릇파릇한 잎사귀들이 고개를 들고 있었다. 따듯한 햇살이 한가득 쏟아졌다. 창밖의 풍경은 매우 평화로웠지만 건물 안에서는 살벌한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중간고사의 시작이었다. 나와는 크게 상관없는 연중행사였지만 팽팽한 긴장감에 눈치가 보이긴 했다.
“이게 뭐야?”
“행운의 연필.”
중학생 때부터 들고 다니던 유구한 역사가 새겨진 오각 연필이었다. 연필 꼭대기에 각 면마다 1에서 5까지 번호가 네임펜으로 적혀 있어 오지선다형 문제에 딱이었다. 시험 기간 내내 열심히 연필을 굴렸다.
앞 페이지는 차수민의 문제집을 대신 풀어 주던, 정확히 말하면 답지를 대신 그럴듯하게 베껴 주던 짬을 발휘해 좀 풀려고 노력도 해 봤다. 책상 위 문제집을 발견하고 드디어 우리 아들이 공부한다며 지인들에게 전화를 돌리던 엄마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이번 시험은 예감이 좋았다.
“세상에. 말이 되냐 이게.”
하지만 현실은 녹록하지 않았다. 받아 든 꼬리표를 비교했다. 전교 등수 306명 중 280등. 그리고 차수민의 꼬리표에 새겨진 80등. 내 등수와 정확히 200등 차이였다.
뒤에서부터 세는 편이 빨랐던 중학생 때의 등수와 비교하면 300등 안에 든 것만으로도 장족의 발전이었기에 자랑하고 싶어 꼬리표를 받자마자 팔랑거리며 뛰어왔더니 평소에 공부하는 것 같지도 않고 자습도 나한테 시키고 숙제며 문제집이며 다 나한테 넘기고 자기는 뺀뺀히 돌아다니는 주제에 80등짜리 꼬리표를 내밀고 있다.
“어째서? 어째서 이런 불공평한 일이? 너 다 나한테 시키잖아. 만날 보충 땡땡이치고 문제집도 다 내가 풀고 있잖아!”
“누가 보면 너 열심히 한 줄 알겠다. 그렇게 억울해? 왜인지 알려 줄까?”
수민이 나른하게 기지개를 켰다. 블라인드 사이로 햇살이 비집고 들어와 그의 검은 눈동자가 투명한 갈색으로 빛났다.
“나는 수업 때 열심히 들었거든. 너 한 번이라도 수업 시간에 집중해 본 적 있어? 기껏해야 내가 시킨 필기 하느라 야간 보충 때나 깨 있지 낮엔 대놓고 자잖아. 안 봐도 뻔하다.”
“이익.”
틀린 말이 하나 없어 할 말 역시 없었다. 모범생 놈들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을 쟤가 하다니 분했다. 교과서 위주로 공부했고요. 수업 시간에 집중해서 들었어요. 누가 못해? 안 하는 거지.
“그래도 너치곤 선방했네. 300등 안에도 못 들 줄 알았더니. 어떻게 보면 다 나 덕분이지? 내가 공부시켜 준 꼴이잖아.”
“틀린 말은…… 아니네.”
차수민이 안기다시피 넘긴 숙제들을 강제적으로 해낸 탓에 나도 모르게 공부가 좀 됐던 것 같다.
“그러니까 한턱 쏴.”
“한턱……? 280등이 80등한테……?”
어처구니없어 되묻자 역시나 무시하고 제 하고 싶은 말만 한다.
“이따 치킨 시켜 놔. 새벽에 갈 테니까.”
“또 온다고……?”
차수민은 모텔을 제집 드나들 듯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이러다 잘리면 책임질 거냐는 말에 그럼 손님으로 오는 건 되지 않냐며 모텔 로비를 꼬박꼬박 대실하고 있었다. 물론 그 돈은 내 주머니로 들어가고 있지만.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농담 반 진담 반의 물음을 던졌다.
“너 이쯤 되면 나밖에 친구 없지?”
“친구?”
“어. 계속 나 찾아오는 것도 그렇고, 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수민의 갈색 눈동자가 나를 담았다.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옅은 눈동자 속 홍채가 고양이처럼 줄어들었다 돌아왔다. 괜한 말을 했나 싶어 안절부절못하는 내가 그 안에 담겨 있었다. 가만히 바라보던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풉. 너는 내 따까리지. 잊었어?”
이게 진짜. 입술을 깨물었다. 좀 친해져 보겠다고 농담 한번 걸었더니 원하는 반응은 절대 안 내어 준다. 성질 더러운 고양이가 맞는지 한 발짝 다가가면 두 발짝 물러서고 내가 딴 일에 정신 팔려 있을 때만 주위를 어슬렁거린다.
그래도 그동안 꽤 친해졌다 생각했는데. 차수민이 나 말고 다른 사람한테 지랄 맞은 제 본모습을 보여 주는 장면을 본 적이 없다. 그건… 내가 편하단 얘기 아니야? 그 정도면 친구라 부를 수 있는 관계에 도달하지 않았나?
혼자 생각에 잠겨 있는데 그가 웃음기 머금은 얼굴로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야. 너 꼴에 내가 걱정되나 본데 나 친구 존나 많아. 보여 줄까?”
큰 구름이 지나가는지 뚝 끊겨 버린 햇빛 덕에 새까매진 눈동자가 번득였다. 아, 안 보여 줘도 되는데…… 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곧 그 대답을 후회하게 되었다.
12시, 야심한 시각. 홀로 이어폰을 꽂고 도연이 좋아한다던 재즈 음악을 몇 개 추천받아 듣고 있었다. 앨범 커버로 흑인 아티스트의 얼굴이 그려진 빠른 템포의 음악이었다. 장르 편식은 하지 않는 편이라 쏟아지는 영어의 향연도 큰 문제는 없었다.
리듬에 맞춰 모텔 마크가 대문짝만하게 박힌 수건을 개고 있는데 로비의 자동문이 열렸다.
“어서 오세, 아.”
손에 힘이 풀려 버렸다. 막 건조되어 나온 깨끗한 수건이 바닥에 뒹굴었다. 그곳에는 빨갛게 상기된 뺨의 차수민과 그의 백만 친구들이 있었다.
좁아터진 로비로 못해도 50명은 족히 넘을 것 같은 인원이 물밀 듯이 밀려 들어왔다. 그들의 공통점은 협박이라도 당한 것처럼 시무룩하고 겁을 잔뜩 먹은 데 있었다. 개중에는 딱 봐도 우리 또래가 아닌 험상궂은 아저씨도 몇 명 섞여 있었는데 모두 나를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아니. 이게 다 뭐야…….”
나는 흐린 눈으로 그들을 지나 우리 학교 학생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을 찾아냈다. 익숙한 얼굴도 몇 명 보였다.
“어, 반장?”
쉬는 시간마다 억지로 붙잡혀 수학을 가르쳐 주던 안경잡이가 눈에 띄었다.
“여긴 어쩐 일로……?”
“나 차수민 친구야.”
입력된 명령어를 산출해 내는 로봇처럼 기계적으로 내뱉은 반장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너랑 차수민이?”
내 말에 파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럴 리가 있나. 우리 반 반장과 7반 차수민은 접점이 하나도 없어 서로 이름도 모를 사이였다. 그의 표정만 봐도 여기까지 끌려온 과정을 알 것 같았다. 나는 그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사실대로 말해 봐. 너 쟤한테 협박당했지?”
그리고 우리 둘 사이를 무 자르듯 비집고 들어온 수민이 의기양양하게 로비를 꽉 채운 자신의 ‘친구’들을 가리켰다.
“봤지. 나 친구 존나 많다고.”
뭔진 몰라도 내가 허튼소리로 그의 자존심을 건드렸었던 것 같다. 맞아. 우리 쟤랑 친구야. 파랗게 겁을 먹은 몇 명이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섭외력 한번 대단하다. 이 늦은 시각에 생판 남을 이렇게도 많이 데려오다니. 내 얼굴 또한 새파랗게 질려 갔다. 요즘 들어 잊고 있었던 거지, 역시 또라이 새끼가 분명하다…….
“어떡하냐. 네가 걱정할 만큼 고립된 생활을 하고 있진 않거든. 얘들아, 인사해.”
차수민의 호령에 모두의 고개가 숙여졌다. 덕분에 수십 명으로부터 깍듯한 인사를 받는 진귀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어때, 김정현? 뭐 하고 싶은 말 없어?”
“와. 진짜 친구 많다. 미안해. 내가 너를 오, 오해했었구나.”
국어책 읽듯, 굳은 잇새로 새 나가는 내 기계적인 칭찬에 수민의 얼굴이 살짝 밝아졌다. 귓불이 잠깐 달아오른 것 같기도 했다.
순간 귀에서 이명이 울렸다. 성만 낼 줄 아는 도도한 고양이가 처음으로 담벼락을 걷다 스텝이 꼬여 냅다 굴러떨어진 모습을 몰래 엿본 캣맘의 마음을 잠시나마 느끼게 된 것 같았다.
‘귀엽…….’
나는 미처 완성되지 못한 단어를 삼켰다. 어쩐지 간질간질한 감정이 들었다. 비실비실 웃음이 새어 나가려는 충동을 억지로 눌렀다. 이 상황에서 웃어 버린다면 내일의 공기를 마시지 못할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조심히들 들어가세요. 반장, 월요일에 보자.”
나는 수민이 데려온 카운터까지 꽉 메운 사람들을 돌려보냈다. 마치 거한 회식 후 파하는 분위기였다. 이 모든 일이 후진 모텔의 좁아터진 로비에서 일어났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지만.
꾸역꾸역 낑겨 있던 몸이 이제야 살 만했다. 이 꼴을 주인아줌마가 봤다면 바로 나가리다. 나중에 CCTV에 손을 대 이 장면만 교묘하게 지워 버릴 계획을 세웠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수민 친구. 즐거운 밤 되시길.”
인상 더러운 아저씨들이 깍듯하게 이쪽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무서워 커피잔을 깨뜨릴 뻔했다. 대체 어디서 데려온 놈들인지 눈빛 한번 살벌했다. 수민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태연하게 그 인사를 받아 주고 있었다.
“저 아저씨들 누구야?”
“아저씨라니. 친구라고 했잖아.”
그가 팍 인상을 구겨 왔다. 하지만 누가 봐도 친구가 아니잖아…….
차수민은 제집처럼 선반에서 코코아를 꺼내 물을 부었다. 카운터는 자기가 지키고 있을 테니 치킨이나 사 오라는 명령에 문 닫기 일보 직전인 가게들을 누벼야 했다.
물끄러미 닭다리를 뜯는 수민을 바라보았다. 기름 묻은 입술이 번들거렸다.
“뭘 봐.”
“그냥. 많이 드시라고.”
눈치를 보며 날개, 다리는 몰아주고 퍽퍽한 닭가슴살이나 골라 먹었다. 이참에 근육이나 키우자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치킨 무를 입에 넣으며 말했다.
“맞다. 야. 나 너희 집 놀러 가도 돼?”
수민이 머금고 있던 콜라를 뿜었다. 덕분에 얼굴이 촉촉해졌다. 미스트야, 미스트.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잖아. 나는 눈을 감고 얼굴을 닦아 냈다.
“갑자기 왜?”
“아니, 주말인데 할 일도 없고 심심해서. 네가 저번에 놀러 오라고 했었잖아. 집에 있으면 엄마가 밖에 좀 나가라고 잔소리한단 말이야.”
별 의미 없이 툭 던진 말에 방어적으로 나오는 그에게 변명 아닌 변명을 하고 있었다. 내 발로 걸어 들어갈 일 없으리라 마음먹었던 그의 자취방에 먼저 찾아가겠다 의사를 밝힌 이유는 간단했다.
궁금하니까.
차수민이 궁금해졌다. 지나가는 말로 농담 삼아 친구 없냐고 묻자 페이크 군단을 몰고 온 그의 일상이 궁금했다. 냉하게 홀대하다가도 갑자기 상기되는 두 뺨이 신기했다. 어쩌면 그에게서 일말의 허점이나 인간성 같은 것을 엿보았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간단하게 말하자면…….
“친구잖아.”
얼어붙어 눈만 깜빡거리는 그에게 맹수를 대하듯 조심스럽게 ‘나’ 그리고 ‘너’를 손짓으로 가리켜 보였다.
“아냐?”
내 물음에 수민이 무언가를 말하려고 입을 달싹이다가 곧 다물고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얼어붙었던 공기가 따듯하게 녹아내리고 하늘에서 꽃잎이 내리는 환상이 보였다. 나도 히죽 따라 웃었다. 입가를 당기기가 무섭게 그는 닭 다리뼈를 가지고 매섭게 나를 후려쳤다.
“친구는 개뿔. 친구 안 키운다고!”
“아니 그럼 아까 걔들은 뭔데…….”
아픈 뺨을 부여잡고 무섭게 다가오는 수민에게서 뒷걸음질 쳤으나 이내 벽에 막혔다.
“걔네는 걔네고. 남들 앞에서나 네가 애걸복걸해서 친구인 척해 주는 거지, 너는 내 따까리야. 말해 봐. 뭐라고?”
“따, 따까리요.”
“그래. 네 본분을 잊지 마. 알겠어?”
“네. 네에.”
차수민이 우악스러운 악력으로 내 멱살을 그러쥐었다가 풀어 주었다. 콜록거리며 기침을 해 대는 가련한 내 꼴을 만족스러워하며 구경하다가 친절하게 물을 떠다 줬다. 병 주고 약 주고의 정석이었다. 그가 내 등을 두드리며 꿀 떨어질 것 같은 목소리로 물어 왔다.
“좀 괜찮아졌어?”
원망스럽게 눈을 홉떴다가 깔았다. 아니 내가 무슨 큰 잘못 했어? 또라이 싸이코 새끼. 왜 먼저 다가가 줘도 지랄이지? 집에 놀러 가겠다는 말 한마디 한 게 닭으로 후려 맞을 일이냐고. 지가 먼저 놀러 오라고 할 땐 언제고. 친구도 없는 게 자존심만 세서는. 말하려면 하루 종일 할 수도 있는 불평불만을 애써 마음속으로 삼켰다.
“내 집이 그렇게 궁금했구나. 좋아. 놀러 와도 돼. 그러나 친구로서가 아니야. 내 따까리로서 출입을 허가해 주는 거야.”
차수민이 비참하게 구겨져 있는 내게 몸을 숙이고 다가와 달콤하게 속삭였다. 섬유유연제 냄새가 코끝을 배회했다.
“지가 먼저 놀러 오랬다가 간다니까 사람을 후려쳐 놓고. 이제는 또다시 놀러 와도 된다고? 누굴 바보로 아나……”
이미 가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졌지만 구시렁거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매섭게 눈을 흘기는 수민과 대적할 용기가 없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 내일 갈게…… 그래도 돼?”
매도 먼저 맞는 편이 낫다고 했다. 내 생각 없는 주둥이를 후려치고 싶은 감정이었지만 초대해 달라고 찡찡거려 초대장을 받아 버린 입장이 되었다. 어차피 할 일 없는 토요일이니까 하루쯤 봉사해 준다고 생각하자.
내 말에 수민은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음…… 알겠어.”
그러면서 치킨 조각이 아직 많이 남았는데도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항상 밀어 내도 버티더니 오늘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먼저 일어났다. 역사에 남을 일이었다.
“야. 더 안 먹어?”
“너나 실컷 처먹어.”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예고 없이 자동문 저편으로 사라져 버린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대체 어떤 환경에서 자랐길래 감정 표현이 저따위인 거야?”
그러나 하루 이틀 보는 모습이 아니었기에 이내 다시 치킨으로 관심을 돌렸다. 점점 익숙해지는 내가 무섭다. 그날은 수민이 남기고 간 닭 날개를 뜯으며 처량하게 밤을 새웠다.
✲ ✲ ✲
그리고 오늘, 이 싫은 일정을 타파해 줄 인물이 나타났다. 문제는 구세주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늦은 아침, 내가 말 꺼내 놓고 가기 싫어 뭉그적대는 중이었다. 문자로 위치까지 받아 놓고 안 갈 수도 없고. 어쩐지 지옥 불에 끌려가는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아, 귀찮아. 괜히 말 꺼내서.”
나는 최대한 천천히 바닥에 널린 옷을 주워 입고 있었다. 그때 진동 소리가 한 번 울렸다.
“차수민. 성질 급하기는. 가. 간다고.”
그러나 액정에는 차수민만큼이나 인생에서 별 도움이 안 되는 사람의 이름이 찍혀 있었다. 뚱땡이. 병철 선배의 호출이었다.
여러모로 좆됐다.
나는 잠잠해진 폰을 들어 수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섯 번의 신호음이 가고 그가 전화를 받을 때까지 내 머릿속은 여러 가지 변수와 변명들로 혼란스러웠다.
분명히 활화산처럼 화가 철철 흘러넘칠 것이었다. 집적거리며 간 보고 그릇째 쏟아 버린, 자기를 엿 먹이는 행위로 간주할 것이 분명했다. 나른한 목소리가 스피커로 새어 나올 때까지 차가운 손이 덜덜 떨렸다.
“여보세요? 차수민?”
-김정현. 마침 잘됐다. 올 때 아침 될 만한 것 좀 사 와라. 패스트푸드는 싫어. 밥 종류로.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게, 정말 미안한데 나 오늘 못 갈 것 같아…….”
-뭐?
그의 목소리가 안개처럼 낮게 깔려 내 발목을 텁 잡았다. 죽을 맛이었다.
“내가 정말 죽을죄를 지었어. 다음에 얼굴 때려도 괜찮으니까, 아, 이빨이랑 코는 빼고. 이번 한 번만 봐주라.”
-……너 오늘 안 오면 다리 부서질 줄 알아. 내가 아침부터 청소를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엑!
차수민은 귀가 떨어져 나갈 것처럼 무시무시하게 소리를 질러 댔다. 나는 수화기에서 한 뼘 거리를 둔 채 빌고 또 빌었다.
“미안, 정말 미안! 나도 차라리 너희 집 가는 편이 낫다니까! 구라 아니니까 제발 믿어 줘.”
-왜 그러는데. 무슨 일인데. 납득이 되면 봐줄 것이고 그렇지 못하다면 너는 오늘 정말 모가지 따일지도 몰라. 거짓말 같지?
“그게…….”
벌어지려는 입을 꾹 다물었다. 얼마 전 차수민이 김병철에게 깊은 관심을 보였던 일이 생각났다. 사실대로 말했다가 그 유명한 병철이 얼굴 좀 보자며 졸래졸래 따라올 놈이었다. 그렇게 깔짝대다가 피투성이가 되어 나뒹굴 미래가 훤했다.
제가 좀 날렵할지 몰라도 무게부터가 다른 김병철한테 수민은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뚱땡이는 입 터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정말 사람을 개 패듯 팼다. 바람이 불면 날아갈 것 같은 차수민은 김병철의 적수가 되지 못할 게 분명하다. 아무리 차수민이 얄미워도 그런 꼴은 보고 싶지 않았다.
“비밀이야.”
그렇게 말하고 통화 종료 버튼을 눌러 버렸다. 폰 너머로 발광하는 수민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지만 이미 전화는 끊겨 있었다. 나는 죽었다. 이 모든 게 다 그의 안위를 위해서라는 점. 그는 모를 것이다.
선배가 불러낸 곳은 공사장 주변 폐컨테이너였다. 잘도 찾아냈다고 생각한다. 깡패들의 소굴에 딱 걸맞은 장소였는데 주로 집합시키거나 누군가를 떡이 되게 만들고 싶을 때 이용하는 공간이었다. 부디 후자가 아니길 바라며 걸음을 옮겼다.
“어이. 정현이 왔나.”
선배의 옆에는 항상 몰려다니는 그의 무리와 처음 보는 덩치의 사내가 서 있었다. 그가 풍기는 인상에서 딱 알 수 있었다. 조폭이었다.
“인사드려라. 내 아는 형님이시다.”
네 형님이지 내 형님이냐. 속으로 툴툴거리며 까딱 고개를 숙였다. 입으로는 뭔 말인들 못 할까. 그리고 그동안 밤새워 가며 피같이 모은 봉투를 선배에게 건넸다.
“이게 뭐고?”
“상납금이요. 조금 늦었어요.”
이제 됐지? 줬으니까 귀찮게 불러 대지 좀 마. 감정이 드러나는 목소리로 말했지만 귀에 살이 찐 그는 눈치채지 못했다.
한참 늦은 상납 기간을 김병철은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오히려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시발새끼가. 개가 된 기분이었다. 나는 그의 두툼한 손목을 잡아 부러뜨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왠지 모르게 요즘 자꾸 김병철에게 반항심이 들끓곤 했다. 분명 나를 손쉽게 피떡으로 만들 존재인데 말이다. 차수민한테 지랄 맞은 성깔이 옮아 버린 게 분명했다.
“행님. 얘가 김정현입니다.”
김병철이 삐딱하게 기대고 서 있는 사내에게 나를 소개했다. 나를 쓱 바라본 그가 발로 툭툭 내 종아리를 건드렸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풀었다.
“니가 김정현이냐? 괜찮네. 일단 다리가 힘이 있네. 운동도 좀 한 것 같고. 몸도 뭐.”
고개를 푹 숙였으나 내 눈은 그를 탐색하고 있었다. 인상이 들개 같았다. 얼굴에서 밑바닥 인생이 그대로 드러났다. 물리면 죽겠다. 나는 긴장감에 주먹을 쥐었다 폈다. 그가 한 발짝 다가와 내 얼굴을 관찰했다. 아드레날린이 빠르게 돌았다.
“근데 그 눈깔은 뭐냐. 싫은 티를 너무 내네. 병철아, 너 병신이냐? 얘 이렇게 티 내는데 그걸 몰라? 야. 한 대 칠 기세다.”
김병철이 나와 그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네? 행님, 그게 무슨….”
“쯧. 얘는 쓰려면 좀 패서 버릇 들여 놔야겠다.”
사내의 말은 요란한 바이크 소리에 먹혀 잘 들리지 않았다. 우리 셋은 약속이라도 한 듯 소리가 나는 컨테이너 밖으로 고개를 향했다.
이 익숙한 배기음…… 설마.
얼토당토않은 생각이 머리를 스쳤고 곧 현실이란 걸 깨달았다. 이런 겉멋 든 배기구 소음의 주인공은 한 명뿐이었다.
“뭐야. 또 누굴 불렀어?”
“아닙니다. 올 사람 없는데 한번 확인해 보겠습니다.”
괴물 같은 시동 소리가 잠잠하게 잦아들었다. 김병철이 눈치를 주자 몇몇 선배가 각목을 쥐고 문 앞에 섰다.
‘미친 거 아냐. 여기가 어디라고 와?’
이들 중 유일하게 문밖 인물의 정체를 알고 있는 나는 한 발짝 걸음을 뒤로해 조폭의 시야 밖으로 벗어났다. 그리고 빠르게 창고 안을 훑었다. 그나마 쓸 만해 보이는 도구들을 눈에 담았다. 부디 쓸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지만 분명 큰일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김병철 무리가 문손잡이에 손을 대는 순간, 철문이 벌컥 열리며 새하얀 얼굴이 드러났다. 까만 눈이 컨테이너 안을 훑더니 쭈뼛거리며 몸을 숨기고 있는 나에게 머물렀다.
갑자기 열린 문에 코를 박아 도미노처럼 일렬 기차로 쓰러진, 나의 선배들이기도 하나 그의 선배들이기도 한 그들을 사뿐히 무시한 수민이 카랑카랑하게 소리쳤다.
“내가 너 여기 있을 줄 알았다, 이 새끼야!”
멍청하게 정지된 사람들을 뚫고 큰 보폭으로 걸어와 방 한군데에 선 수민은 곧장 나를 찾아내 멱살을 잡아 내렸다. 한참은 더 큰 나와 굳이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옷깃을 끌어당겨 내 얼굴을 제 눈앞에 가져다 놨다.
“잠, 잠깐 이것 좀 놓고…….”
“나랑 한 약속은 약속도 아니냐? 고새를 못 참고 딴 길로 새? 초대해 달라고 애걸복걸할 때는 언제고 이런 데서 노닥거리고 있어?”
래퍼처럼 쏘아 대는 수민에게 목이 잡혔다. 나는 캑캑거리며 최대한 억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나마 자유로운 눈알을 굴려 말문이 막힌 선배와 굳은 얼굴의 조폭 아저씨를 가리키자 수민의 고개가 돌아갔다.
“왜. 뭔데. 아하. 네가 그 김병철?”
수민이 뚱땡이를 발견하고 살풋 웃음을 지었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뭐냐. 김정현. 이 새낀 뭐냐고.”
상황 파악이 안 되는 듯한 병철 선배가 해명을 요하며 다가왔다. 100kg이 거뜬히 넘는 거구가 다가오자 수민의 얼굴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나는 일단 차수민의 팔을 잡고 내 뒤로 이끌었다.
“형, 저랑 잠깐 나가서 이야기하면 안 될까요.”
“뭐야, 시발. 저 새끼 누구냐고.”
누구라고 말해야 현명한 대답이 될까? 사실 나조차도 차수민과 나의 관계에 대해 명확한 정의를 내리지 못하겠는데. 단순히 꼬붕이라기엔 쓸데없이 서로를 많이 알고 친구는 곧 죽어도 아니라지. 같은 학교 학생이라 밝히면 제 발로 학교를 나갈 때까지 죽도록 괴롭혀 댈 김병철이 눈에 선했다.
“어……. 동네 아는 애인데 학교도 안 다니고 약간 사리 분별을 못하기로 유명한 놈입죠.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애라 주변에서 잘 챙겨 줘야 하는데. 으휴, 어떻게 또 제가 여기 오는 걸 보고 따라왔나 본데 제가 잘 타이를게요. 자자, 어서 가자. 여기 형아들 화가 이만큼이나 났어요.”
뭐 이 새끼야?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내 어깨를 밀어 내는 수민을 있는 힘을 다해 구석에 가두며 귓가에 애절하게 속닥였다.
‘다 너를 위해서니까 가만히 좀 있어! 어디서 합기도 같은 거 잠깐 깨작거렸나 본데 뚱땡이한테 넌 상대도 안 돼.’
‘내가?’
‘그래, 체급 자체가 다른데 되겠냐. 넌 김병철이 숨만 쉬어도 날아갈 것 같잖아. 여긴 내가 어떻게 해 볼 테니까…….’
“푸흡. 내가 저 돼지 새끼한테?”
수민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김병철의 귀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음량의 비웃음을 내뱉었다. 공허한 창고를 채우는 쏟아지는 웃음에 상황은 급속도로 악화되고 있었다.
“너네 뭐 하냐…….”
돼지 새끼라 명명당한 선배 김병철은 부들거리는 안면 근육을 숨기지 못했다. 이마에 핏대가 불끈 올라와 있었다. 나는 숨넘어갈 듯 깔깔대는 수민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지만, 그는 보란 듯이 병철과 눈을 마주하며 손가락질을 해 대고 있었다.
“아니, 어이가 없잖아. 저 돼지나 걱정해 주지 그래.”
수민이 눈물을 닦았다. 싸늘한 시선이 느껴지지도 않는 것 같았다. 거기 끼어 피가 마르는 건 나 혼자였다.
“김정현이. 오냐오냐해 줬더니 선배가 선배 같지 않지? 요새 은근히 기어오르던데 다 봐줬더니 이 지랄이구나.”
그렇게 말하는 김병철은 흘끔 옆에서 팔짱을 끼고 상황을 관철하는 조폭의 눈치를 살폈다. 막상 그는 애들 싸움엔 영 관심 없는 모양인지 마른 하품을 내뱉고 있었다.
“그러게 쟤는 쓰려면 좀 죽여 놔야 할 거라 했지.”
아니, 아저씨. 저 아세요? 아까부터 폼은 있는 대로 잡으며 시비를 터는 그에게 한마디 해 주고 싶었지만 마음뿐이었다. 내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차수민이 대신 말을 전해 주었다.
“저건 또 뭐야. 있는지도 몰랐는데 왜 갑자기 껴들어서 아는 척이야. 김정현 너 쟤 알아?”
“아니…… 즈 스름 조직원인 긋 같으니 즈발…….”
제발 그만해…… 복화술로 속삭였으나 수민은 개의치 않았다.
“어떤 덜떨어진 조직이길래 고등학생들 상대로 길거리 캐스팅을 해. 아저씨, 어디 소속이야?”
딱딱하게 굳어 가는 조폭의 미간을 본 선배들이 반원을 그리며 몰려들었다. 김병철이 뒷목을 감싸 쥐었다. 좆됐다. 내 인생도 얘 인생도. 그냥 더럽고 치사해도 봉투만 건네주면 넘길 수 있는 일이었다. 그깟 시비쯤이야 웃어넘기면 될 일이었다. 나만 참으면 얼레벌레 굴러가는 세상이었는데 누구의 등장 이후로 모든 게 틀어지기 시작했다. 차수민은 내 인생을 조지러 온 악마가 분명했다.
“김정현이, 그 새끼부터 이리 줘 봐라. 허여멀건 한 쌍판대기부터 바닥에 갈아 줘야겄다.”
“선배, 진정하고 말로 하세요. 어디 좀 모자란 친구라니까?”
“아그야 이리 온나.”
병철의 매섭다 못해 반쯤 맛이 간 듯한 눈빛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나를 밀치고 앞으로 나서는 수민은 여전히 상대를 깔보다 못해 발밑에 둔 조소를 매단 채였다.
“어. 간다.”
가소롭다는 미소가 가득한 차수민의 얼굴을 향해 김병철은 두터운 주먹을 휘둘렀다. 돼지의 살과 근육이 무게로 탈바꿈해 주먹의 강도를 뒷받침해 주었다. 제대로 맞는다면 차수민은 뼈도 못 추릴 것이었다.
수민을 향해 내리꽂히는 주먹이 슬로 모션처럼 느리게 보였다.
나는 그때 무슨 생각이었을까. 얄팍한 정의감인지 비틀린 죄책감인지, 내 근육에 얇게 씌워진 감정들이 차수민의 손목을 홱 당기도록 만들었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뻔뻔하게도 눈 하나 깜짝 않고 날아오는 주먹을 정면에서 주시하던 수민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김병철의 무게가 실린 돌주먹은 빈 공간을 스치고 지나갔다.
“야, 무슨 짓…….”
휘청이던 수민의 몸이 바르게 서기 전에, 눈썹을 꿈틀거리던 선배의 목구멍에서 이게 미쳤나 소리가 나오기 전에 나는 난생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주먹을 날렸다.
“억!”
근처에 서 있던 노랑머리 선배 한 명이 우당탕 추하게 넘어졌다. 나는 그 빈틈으로 웬수 같은 차수민의 손목을 꼭 붙잡고 다리를 뻗었다.
“달려.”
앞을 막아 오는 선배들의 정강이를 세게 걷어차고 그들의 귀 밑 턱 쪽을 향해 주먹질을 했다. 눈 감고 발길질 몇 번 했을 뿐인데 앞이 깨끗했다. 그들은 반격도 못해 보고 낙엽처럼 쓰러졌다. 놀란 건 내 쪽이었다.
뭐, 뭐야. 생각보다 할 만하잖아? 나는 상기된 뺨을 손등으로 쓸어 보았다. 이 인간들 무게만 잡을 줄 알지 알맹이는 텅텅 빈 쭉정이와 다름없나 보다. 약간의 희망이 생기는 듯했다. 이 지옥 같은 컨테이너를 말짱히 살아서 나갈 수 있을 거란 희망.
훅 끼쳐 오는 열기에 아드레날린이 마구 분출되었다. 각목 든 여럿을 때려 부순 나와 차수민은 거의 문 가까이에 도달했다.
컨테이너의 녹슨 손잡이를 돌리려는 순간 어깨에 무게가 느껴졌다. 공기가 확 바뀌었다. 그리고 뒤돌기가 무섭게 코피가 터졌다.
“아윽.”
온몸이 굳고 골이 울렸다. 섬뜩한 김병철의 몸집이 역광을 받아 거대한 윤곽으로 보였다. 그 윤곽을 뚜렷이 인식하기도 전에 그의 주먹이 다시 내 턱을 메다꽂았고 그걸 신호로 컨테이너의 모든 이들이 달려들었다.
팔을 뻗어 반격을 시도했지만 어디선가 날아든 각목에 팔뼈가 어긋난 것 같았다. 이렇게 죽어라 일방적으로 맞는 건 태어나서 처음인 것 같다. 그러게 줄넘기만 시키지 말고 빨리빨리 실전으로 넘어가 주시지. 애꿎은 킥복싱 관장님을 원망하며 먼지 나도록 다구리를 당했다. 치사한 놈들. 열댓 명이 하나를 패냐.
문득 꼭 잡고 있던 왼손이 허전해 부르튼 눈으로 사방을 훑으니 이 난리 통에 한 걸음 뒤로 물러나 그림자 속에 가만히 서 있는 차수민이 보였다.
저 멍청이가 뭐 하고 있어. 빨리 튀어.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며 바로 앞의 출구를 가리켰지만 그는 못 박힌 것처럼 서서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눈두덩이가 부어오르는 중인지 점차 시야가 흐려졌다. 수많은 인영 사이로 수민의 올라간 입꼬리가 또렷이 들어왔다.
‘정현아. 아파?’
저저, 사이코패스 새끼. 안 도망갈 거면 도와주는 척이라도 하든가 방관자처럼 팔짱을 끼고 서서 히죽거리며 입 모양으로 아프냐 물어 온다. 안 아프겠냐? 이도 흔들리는 것 같다. 비릿한 피 맛이 입안 가득 느껴졌다. 어떻게 보면 저 새끼 때문인데 뭐가 예쁘다고 냅다 방패막이 되어 줬는지. 그냥 처맞게 놔둘걸.
집에 놀러 가겠단 약속을 깨 버린 것에 대한 대가였다. 초대장을 날리며 묘하게 들떠 있던 그 모습이 떠올라서. 그래서 끼어들었나 봐. 다굴 당할 걸 알면서도. 김정현은 너무 착해서 탈이야. 그렇게 속아 놓고 또 속는다.
쏟아지는 발길질에 점점 정신이 혼미해지고 있었다. 죽을 만큼 아파서 내가 괴롭혔던 모든 이들에게 고통으로 참회록이라도 쓰고 있는 기분이었다.
얄미운 차수민의 얼굴이 시야에서 사라졌을 때 정신 또한 끊겨 버리고 긴 암흑이 찾아왔다.
눈을 뜨자 낯선 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흰 천장을 배경으로 걱정스레 머리칼을 쓰다듬는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팔다리가 칭칭 감겨 고정되어 있었다. 흡사 미라 같은 모양새였다. 동생이 이 꼴이 났는데 태연하게 사과를 깎으며 누나가 말했다.
“야, 너 전치 4주래. 학교 안 가도 돼서 좋겠다?”
“얘는 어쩜 말을 그렇게 하니? 정현이, 내 강아지. 정신이 좀 들어?”
대답을 하고 싶었지만 핏덩이가 목구멍에 가득 찬지라 끼익거리는 쇳소리만 나올 뿐이었다. 그 대신 뻐근한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다 이런 일이.”
엄마가 티슈를 뽑아 코를 휑하니 풀었다.
“엄마가 다 미안해. 우리 아들 신경을 너무 못 써 줬지. 엄마는 아들이 알아서 다 잘하리라 생각했어. 그래서 터치 안 해 왔던 거고.”
알아서 잘해 온 선례인 누나가 한심하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내 몫으로 들어왔을 사과를 제 입에 넣었다. 신경 안 써도 사고 한 번 안 치고 스스로 잘 자라 명문대 합격증을 내밀던 누나였다. 나는 그 반대이긴 했다…….
“그래도 이런 일이 있을 줄은 몰랐어. 힘들면 엄마한테 말하지 그랬어. 너무 죄스럽다. 자식이 당하는 줄도 모르고.”
“허우대도 멀쩡하면서 삥이나 뜯기고 다녔냐, 너?”
“어허, 김이현!”
“그렇잖아. 키는 전봇대 같은 게 고만고만한 애들한테 돈이나 뺏기고 다녔다니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다. 아아, 쪽팔려. 너 어디 가서 내 동생이라 말하고 다니지 마라.”
나는 눈을 끔뻑였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누나를 노려보며 경고를 준 엄마는 이내 인자한 얼굴이 되어 말을 이어 갔다.
“그래도 정현아, 좋은 친구가 있어서 다행이다. 네 친구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
친구? 우식이가 와 있나 싶어 목을 길게 빼냈다. 엄마가 살짝 몸을 비키자 멀뚱히 앉아 있는 차수민이 드러났다. 어이가 없어 입이 벌어졌다. 눈이 마주치자 수민이 싱긋 웃어 보였다. 친구우우?
“수민 군이 연락해 준 덕분에 수술실 들어가기 전에 맞춰 올 수 있었어. 어린 친구가 웬만한 뒤처리도 깔끔하게 다 해결해 놨더라. 자, 얼른. 수민이한테 고맙단 인사해야지.”
“으어어.”
“고맙대, 수민아. 아줌마도 참 고마워. 우리 정현이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경악으로 일그러진 나를 가뿐히 무시하며 눈썹을 팔자로 만들어 안쓰러움과 믿음직스러움을 담아낸 수민이 엄마의 두 손을 꼭 붙잡았다.
“걱정 마세요, 어머님. 정현이가 워낙 여려서 그래요. 이런 일 없도록 앞으로도 잘 살필 테니 염려 놓으세요. 그나저나 연락받자마자 급히 오셨을 텐데 가셔서 일 마무리하셔야죠. 정현이는 제가 함께 있어 줄게요.”
그러고 보니 정신이 없어 반차도 제대로 못 쓰고 온 것 같다며 엄마가 핸드폰을 살폈다. 수민은 사과를 두 알째 깎고 있는 누나에게도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누나도 걱정 마시고 가세요. 여긴 제게 맡기시구요.”
“그, 그럴까? 걱정은 안 하는데.”
눈을 접어 가며 홀릴 것 같은 웃음을 건 수민은 종이 백에 사과 대여섯 알을 담아 누나에게 안겨 주었고 엄마와 누나를 몰아내다시피 하여 병실 밖으로 내보냈다. 쇳소리로 윽윽거려 봤자 가지 말라는 내 호소는 신음으로 들릴 뿐이었다.
한바탕 소음이 가라앉고 조용해진 병실의 문을 닫으며 차수민이 말했다.
“이제 너랑 나만 남았네?”
털이 쭈뼛 서고 소름이 돋는 오싹한 말이었다.
자연스레 간병인용 안락의자로 걸어가 파묻히듯이 등을 기대어 앉은 수민이 말했다.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한대서 급한 대로 여기 쑤셔 박아 놨는데 부담 갖지는 마. 병원장이 우리 아버지 지인이니까 섭섭하지 않게 잘 봐줄 거야.”
흐뭇하게 주변을 둘러보는 그였다. 개인실은 안락했으나 전혀 고맙지 않았다. 그와 함께 있느니 수다쟁이 할머니들이랑 같은 방을 쓰는 편이 나았다. 철심 빼면 바로 다인실로 옮겨 달라 할 것이다.
수민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언제 들어왔는지 누가 줬는지 모를 병문안 인사치레의 화초들을 쓰다듬었다. 화초에는 장례식에나 쓰일 법한 멋들어진 한문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병실 뒤쪽으로 사람 키만큼 커다란 화환도 보였다. ‘김정현 님의 쾌차를 바랍니다’라고 무게감 있는 궁서체가 박혀 있었다.
대기업 사장 피로연에서나 보일 법한 사이즈였다. 내게 이런 걸 보낼 사람이 있었나……? 확실히 내 친구들이 발신자는 아닐 것이다. 한자는커녕 한글도 잘 모르는 애들일뿐더러 벽 하나를 꽉 채운 화환을 보내 줄 만큼 정이 넘치는 놈들이 아니었으니까. 그럼 누가?
고급 난으로 보이는 화초를 닦아 내는 모습을 탐탁지 않은 눈초리로 흘끔거리다가 눈이 마주쳤다.
“야.”
차수민이 머리맡으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왜?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말은 입에서만 맴돌 뿐이었다. 수술의 후유증인지 목이 꽉 막혀 있었다. 수민은 대답 대신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정신을 잃기 전, 빤히 처맞는 날 바라만 보던 그때의 상황과 겹쳐져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또 뭔데.
“대체 왜 나섰어? 가만히 있었어도 되잖아.”
도와줘도 지랄이야. 가만있었으면 왜 가만히 있냐고 날 방패막이로 썼을 놈이. 밖으로 들릴 리 없으니 머릿속으로 온갖 욕설을 해 댔다. 묵은 감정이 새어 나갔는지 날카롭게 날 노려보는 그를 발견하고 뜨악했다. 두 눈이 곧 호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무서움이 한층 더해졌다.
“내가 돼지 하나 못 이길 줄 알았어?”
김병철의 면상에 대고 대놓고 돼지라 부른 놈은 차수민이 유일할 것이다. 폭신한 살이었다면 귀여운 맛이라도 있었을지 모르지만 그 거대한 몸집은 단단한 근육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김병철은 어떻게 됐지? 신나게 얻어맞던 기억이 마지막인데. 분명 이를 갈고 있을 것이다. 예뻐했던 것만큼 배신감도 크다고 마주치는 날에는 내가 가루가 되어 사라질지도 몰랐다. 잠시 치밀었던 용기도 자고 일어나니 싹 가라앉아 있었다. 좆됐다. 정말로 전학이라도 가야 하나.
“사서 고생을 해요, 아주. 찐따면 찐따답게 뒤에서 찌그러져 있을 것이지.”
혀를 차며 수민은 손을 뻗어 내 턱주가리의 멍을 꾸욱 눌렀다. 나는 소리 없는 아우성을 내뱉었다. 그가 이죽거리며 아파? 당연한 질문을 던졌다. 어투와는 다르게 기분이 좋아 보였다.
“아프냐고.”
눈물 어린 눈으로 그를 째려보자 그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머금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말을 못 하는 거야, 안 하는 거야.”
그러곤 내 모가지를 손날로 내려쳤다. 커헉. 콜록거리는 내 코앞에 기다렸다는 듯 휴지를 들이밀었다. 강제적으로 목구멍을 뚫다니. 그래도 피와 염증을 뱉어 내니 한결 시원하긴 했다. 나는 타의로 트인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좀 낫지? 자, 물.”
수민은 계속해서 내게 선심 쓰듯 물컵을 건넸다. 이대로 둘이 있다간 김병철을 만나기도 전에 여기서 죽겠다 싶어 받아 드는 척하다가 간호사 호출벨로 뻗은 손을 수민은 가볍게 제지했다.
“필요한 게 있으면 나한테 말해.”
“제발 나가 줘…….”
모기 소리로 속삭였는데 눈을 희번뜩 치켜뜨는 바람에 말을 돌렸다.
“뭐라고?”
“아, 아니…. 이게 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기억이 안 나서.”
“아. 다 잘 해결됐어.”
수민은 별일 아니라는 듯 손을 휘저었다. 남은 생사를 오갔는데 이리도 가벼운 손짓이라니.
“어떻게 잘 해결됐는데?”
“내가 힘 좀…….”
뭔가를 말하려던 차수민이 입을 다물더니 내 머리칼을 찬찬히 쓸었다. 손길이 퍽 다정했다.
“그냥…… 뭐. 병철이와 친구들은 학교 그만둔대. 너 쫄았었지? 그래, 네 성격에 분명 전학 갈까 이사 갈까 고민했겠지. 짜식. 쫄긴 왜 쫄아. 다 잘 해결됐으니까 걱정 마.”
“어……? 김병철이? 이상하다.”
올해만 버티면 졸업인데. 미래가 없다 해도 고등학교는 졸업하겠다고 부득불 붙어 있던 그였다.
“그럼 그 조폭 아저씨는?”
“그 아저씨는 오늘부로 직장을 잃었어. 너 다굴 당할 때 내가 경찰 불렀거든. 이제 그만 물어봐. 대답하기 귀찮으니까.”
“경찰? 네가……? 오토바이 밖에 세워 뒀었잖아. 걸리면 어떡하려고 그랬어. 그럼 진술서는 썼어? 뭐래?”
“야. 그만 물어보라고.”
신뢰가 가지 않는 대답들에 가슴속 밑바닥에서부터 물음표가 솟아났지만 더 입을 열었다간 한 대 맞을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어찌 됐건 잘 해결되었으니 말짱하게 병원에 와서 숨 쉬고 있는 거겠지.
“맞다, 이거.”
수민은 주머니를 뒤적여 노란 봉투를 꺼내 들었다. 그렇다. 나는 그저 저 봉투를 김병철에게 전해 주러 가는 길이었다. 누가 난입하지만 않았어도.
“그게 왜 너한테 있냐.”
“돌려주라던데.”
그럴 리 없는데. 김병철 그 인간이. 머뭇거리고 있자 수민이 재차 물었다.
“안 받아? 네가 힘들게 번 돈이잖아.”
소중한 거 아니야? 차수민의 시선이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구겨지다 못해 꼬깃꼬깃한 봉투를 받아 들었다. 모텔 카운터에서 꾸벅꾸벅 밤을 새우던 일이 떠올랐다. 나는 회한이 담긴 그 봉투를 다시 수민에게 내밀었다.
“그럼 빚 일부 갚을게.”
총액이 얼마인지 셈할 수도 없는 금액이겠지만 갚는 척이라도 해 보려고 그런다. 그러나 냉큼 받아 들 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봉투를 받지 않았다.
“됐어.”
네가 웬일로 하는 얼굴로 올려다보자 수민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빚은 반 삭감해 줄게.”
“헉, 왜?”
“네가 이렇게 개박살이 난 데에는 내 책임도 있으니까. 아니 없어도 너는 있다고 생각할 거 아냐.”
빚이라 함은 다 그가 만들어 낸 부채였지만 반이나 줄여 준다는 사실에 감격스러워 움직이지 않는 팔을 뻗어 그의 손을 꼭 붙잡았다.
“진짜? 정말 고마워! 너 생각보다 양심적인 놈이구나. 내가 너를 오해했었나 봐.”
병원에도 옮겨 주고 경찰 조사랑 뒤처리도 해 주고 생각해 보니 많은 일을 감당해 준 수민이었다. 고마움이 새록새록 솟아났다. 그가 아니었다면 병원 신세를 질 일도 없었겠지만. 점차 차수민에게 적응해 가며 이젠 모든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 같다.
“그럼그럼. 심하게 오해했지. 내가 책임감 빼면 시체인데.”
가소롭다는 듯 조소를 머금은 수민이 상체를 가까이 하며 은근하게 속삭였다.
“그래서 말인데, 도와줄게. 너 한동안 학교도 못 나가는 몸이 되었잖아. 중간고사 성적이 네 인생에서 제일 잘 본 점수라며. 이렇게 놔 버리기는 좀 아까우니까.”
“어떻게 도와줄 건데?”
나는 불안하게 물었다. 대학은 가도 그만 안 가도 그만이라 생각했었는데 본의 아니게 반 학기 동안 인생에서 제일 열심히 공부하긴 했었다.
“나만 믿어.”
차수민이 활짝 웃을 때마다 불행이 펼쳐진다는 법칙을 나는 그를 만난 지 세 달을 넘기고서야 알게 되었다.
✲ ✲ ✲
“인사해. 내 친구야.”
나는 읽던 만화책을 내려놓으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친구’라고 불린 안경은 7반 우등생 경식이었다. 모텔 로비에 등장했던 차수민의 백만 친구 중 한 명이었다. 그의 눈동자는 정신없이 방황하고 있었으며 덜덜 떨리는 몸이 그가 한쪽에서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친구’ 따위가 아니란 것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왜 내 친구들도 안 오는 병문안을 경식이가 왔어?”
“경석이도 도와주겠대. 그치 경석아?”
친구라면서 경식이의 이름도 제대로 모르는 걸 보아하니 오늘 처음 말 걸어 본 것이 분명했다. 누가 봐도 억지로 끌려온 경식은 누가 봐도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책가방에서 교과서와 문제집을 꺼냈다.
“오, 오늘 학교 진도는 연립 이차 방정식까지 나갔어. 방정식을 이해하고 있다면 풀기 쉬울 거야.”
“경석아, 정현이가 방정식을 이해하고 있을 리 없잖아.”
수민이 성을 빼고 내 이름을 부르자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 아는지 모르는지, 벽을 감아 오르는 담쟁이 넝쿨처럼 수민은 나긋나긋 경식을 채찍질했다.
“그, 그렇지 아무래도. 그럼 진도는 무시하고 기초부터 차근차근 시작하자. 수학은 하면 오르게 되어 있어.”
“저기, 미안한데 내 의사는 안 물어보니?”
의사가 분명 안정을 취하라고 했는데 침대 가득 펼쳐진 노트와 문제집은 안정과 거리가 멀어 보였다. 게다가 오른팔이 박살 나서 연필도 못 잡는 신세였다.
“너 때문에 나랑 안경이 병원까지 행차해 줬는데 지금 안 하겠다는 말이야?”
냉기가 묻어나는 목소리에 졸지에 경석에서 안경이 되어 버린 경식이가 연필을 떨어뜨렸다. 나는 동질감을 느끼며 온전한 팔로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너무 고맙다 너희들. 열심히 할게…….”
셋의 과외는 간호사가 드레싱 하러 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마실 것 좀 사 오겠다며 수민이 자리를 비운 사이 나는 경식에게 미안한 마음을 내비쳤다.
“미안하다 경식아. 네 공부도 바쁠 텐데.”
“아냐. 됐어. 복습도 할 겸 봉사한다고 생각하려고. 생기부에도 좋게 들어가겠지. 자소서 쓸 거리도 생기고.”
“으응……. 그렇구나.”
“그리고 돈 받고 하는 거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돈? 우리 엄마가?”
“아니. 쟤…, 차수민……. 너 성적 안 오르면 날 죽인댔으니까 제발 좀 부탁할게.”
차수민이? 무슨 생각이지 싶다가도 이것도 빚으로 달아 놓으려나 하고 뭉뚱그려 넘겨 버렸다. 얘에 대해 깊게 생각하면 머리만 아파졌다.
한두 번 단발성에 그치리라 생각했던 과외는 차수민의 방과 후마다 이어졌다. 학교 빠진다고 좋아했던 내 자신이 안쓰러웠다. 혹독한 숙제들을 견디느라 다인실은 꿈도 꾸지 못하고 있었다. 빨리 나아 버려야지. 차라리 학교 가는 편이 속 편하겠다. 내 마음을 알아준 건지 뼛조각은 빠르게 붙고 있었다.
“좋아요. 회복력이 장난 아니네. 역시 젊음이 좋아.”
담당 의사가 차트를 휘리릭 넘겼다. 옆에서 지켜보던 수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면 생각보다 일찍 퇴원하겠네요.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못해도 중년으로 보이는 의사는 수민에게 고개를 살짝 숙인 후 방을 빠져나갔다. 보호자에게 하는 인사라기엔 정중했다. 재벌집 막내 도련님에게 깍듯이 대하는 드라마의 한 장면 같았다.
“아무래도 수상해. 너희 아버지 자영업 하신다고 했지. 혹시 그 자영업이란 게 대기업을 운영한다거나…….”
“병원에 갇혀 있더니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봤네.”
“개인실도 하루에 얼만데 이걸 대 줘. 엄마도 부담스러워 죽으려고 하더라. 말 나온 김에 나 병실 옮길래. 너 이거 다 빚으로 달아 둘 거 아니야.”
“그냥 있어. 귀찮게 하지 말고. 넌 뭐 빚지고만 살았냐? 말끝마다 빚, 빚 거려. 애초에 빚질 일을 만들지 말든가.”
“아니, 빚은 네가…….”
말하려다 입을 꾹 다물었다. 무슨 말을 내뱉어도 저 자식을 이길 수 없다. 경식은 논리력을 키우려면 책을 많이 읽으라고 말했다. 그 말 따라 침대 밑에 만화책이 쌓여 가고 있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수민이 입을 열었다.
“그렇게 의심되면 너 우리 부모님 만나 볼래?”
“너희 부모님을?”
잠깐 솔깃했다가 이내 고개가 저어졌다. 경험상 차수민과 얽히면 귀찮은 일이 발생했다.
“아냐. 그렇게까지 궁금하진 않아.”
솔직히 궁금하긴 했다. 대체 어떤 분들이길래 악마의 현신을 낳고 길러 냈는지. 분명 대천사 아니면 지옥 불로 세수하는 악마,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뭐가 됐든 어마어마할 것이었다. 그렇지만 우리가 막역한 사이도 아닌데 아픈 몸 이끌고 뵐 정도로 만나 뵙고 싶진 않았다. 만나서 뭐라 해. 아드님의 꼬붕입니다. 이렇게 소개할 수도 없잖아.
“아니긴 뭐가 아니야. 야, 너 내일 치료 받을 거 없지. 내일 학교 와. 옷은, 시발, 내가 갖다줘야 하네. 옷은 너희 집에서 가져다줄 테니까 세수하고 준비하고 있어. 알았지?”
“내일? 나 외출 아직 안 되는데……. 말짱해 보여도 중환자였다고.”
“엄살은. 이번 주 학부모 상담 기간이야. 내일 우리 부모님 오시니까 잠깐 얼굴만 보고 가. 로비에서 딱 기다려.”
“아니, 그냥 사진 보여 주면 되잖아.”
“사진 보여 주면 또 구라 아니냐고 의심할 거잖아. 내일 봐.”
입이 방정이구나 싶었다. 진짜 안 뵙고 싶다고……. 애절하게 구시렁거려 보았지만 안타깝게도 무시는 차수민의 특기이자 취미였다.
다음 날 나는 부서질 것 같은 온몸을 이끌고 어기적거리며 학교로 향하는 택시에 몸을 실었다. 차수민이 상냥하게 보조를 맞춰 주었다.
“머리 조심해야지. 자.”
누가 보면 살가운 사이로 착각할 만큼 차수민은 과잉 친절을 베풀었다. 택시 문이 닫히는 순간 남아 있던 일말의 친절은 증발하고 원래의 차수민이 돌아왔지만. 목적은 이뤘다 이거지. 달리는 차 안에서 뛰어내릴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나는 혀를 차며 수민의 옆선을 흘끔거렸다.
정규 수업이 끝난 시간이라 복도가 한산했다. 방문 상담 주라 그런지 보충 수업은 없는 모양이었다. 학부모로 보이는 중년들이 자식의 손을 잡고 학교를 누비고 있었다. 보통의 학생들은 이때부터 어느 대학을 지망하는지 대략적인 루트가 정해지곤 했다.
“허억, 천천히 좀 가…….”
성치 않은 몸으로 태산 같은 계단을 오르며 땀을 뻘뻘 흘리는 나를 흘긋 바라본 수민이 시계를 살폈다.
“왜 이리 끙끙거려. 내가 업어 주랴?”
네가? 내 어이없다는 표정을 읽었는지 그가 고개를 돌렸다.
“야. 나 상담 들어가야 하니까 10분 정도 대충 시간 좀 때워.”
“아씨. 그럼 이 계단 오르기 전에 말하지.”
“금방 끝내고 올게. 혼자 잘 놀고 있을 수 있지?”
조롱 어린 목소리로 어깨를 툭툭 친 수민이 복도 저편으로 사라졌다. 저 자식이 누굴 애로 아나. 입원한 동안 보모 역할 좀 했다고 생색이다. 나는 목발을 쥔 손에 힘을 주어 계단을 마저 올랐다. 3층 교무실. 낡은 팻말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 왜 온 거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시간도 때우고 인사도 드릴 겸 찾아온 교무실에서 모든 시선이 내게 꽂히는 이색 경험을 하는 중이었다. 아직 깁스를 풀지 못한 손으로 목발을 바꾸어 잡았다. 새파랗게 질린 담임이 기우뚱 기울어지는 내 몸을 부축했다.
“몸 상태가 이런데 왜 무리하니. 7반 친구가 가정통신문이나 진도 알려 주고 있다던데. 필요한 게 있으면 그 친구한테 얘기하거나 선생님한테 연락을 하지 이런 몸으로 학교까지 오다니.”
젊은 교사는 안쓰럽게 나를 바라보았다. 그 면전에 제가 곧 쓰러질 것 같은 몸으로 여기까지 온 까닭은 차수민의 부모님을 만나기 위함이라고 고할 수는 없었다.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방문 상담 주라 해서요…….”
“어머니랑 얘기하면 되는데 뭘 힘들게 여기까지 와. 그나저나 정현이 요즘 공부한다며. 왔으니 일단 앉아 봐.”
그녀가 의자를 내밀었다. 나는 망설이다 자리에 앉았다.
“사실 선생님이 걱정 많았거든. 불량 학생들이랑 어울리는 것 같아서. 교사들은 보면 알아. 바뀔 의지가 있는 학생과 없는 학생. 그래서 늘 정현이가 안타까웠는데 변하는 모습이 정말 보기 좋아. 대학도 갈 거지?”
갑작스러운 칭찬에 얼굴이 후끈 달아오른 것 같았다.
“아직, 잘 모르겠어요…….”
“그래. 이번 사건도 약한 친구 보호해 주다가 다친 거라며. 그 애들, 학교에서도 주시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자퇴한다 해서 깜짝 놀랐지 뭐니. 아, 혹시나 보복하거나 협박 위협받으면 선생님한테 꼭 말해 줘.”
나는 어쩐지 정의의 사도가 되어 있었다. 차수민. 무슨 말을 지껄여 놓은 거야. 부끄러움이 겹겹이 쌓여 새빨개진 얼굴로 고개만 끄덕거렸다. 그때였다.
“쌤~ 체육관 키 여기에 반납하면 되죠?”
“최우식!”
“헉. 김정현?”
우식은 귀신이라도 만난 양 화들짝 놀란 눈치였다. 이만 됐다고 손짓하는 담임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고 최우식의 뒷덜미를 잡고 교무실 밖으로 끌고 나갔다.
“최우식 이 배신자 새끼야. 넌 친구가 입원해 있는데 병문안 한 번을 안 오냐? 네가 그러고도 사람 새끼냐? 나 거의 죽을 뻔한 건 아냐. 우리의 우정이 고작 그 정도였어?”
“미, 미안해. 김정현. 정말 죽을죄를 지었어. 가려고 했어! 아니 갔었어!”
“그게 무슨 소리야. 어디서 거짓말이야.”
나는 한 달간의 병원 생활 동안 우식의 그림자 한번 마주치지 못했다.
“정말이라니까! 병철 선배한테 죽을 정도로 처맞았다는 얘기 듣고 얼마나 걱정했는데. 강이수한테 물어봐. 걔랑 애들 몇 명 모아서 먹을 거 싸 들고 병실 앞까지 갔었다고. 그런데…… 근데 너 7반 허여멀건이랑 무슨 관계야?”
“갑자기 뭔 소리야. 걔랑은 엄, 엄마 친구 아들이라고 했잖아.”
“너희 어머니 과거가 궁금하다. 친구를 어떻게 사귀신 거야. 여튼 갔는데…… 휴. 아니다. 아냐.”
“말하다 마는 게 어디 있어? 빨리 불어. 병실 앞에서 뭐!”
“김정현.”
나긋한 목소리가 들리자 덩치 큰 최우식이 깜짝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어, 차수민. 생각보다 일찍 끝났네. 근데 잠깐만. 나 얘한테 들을 얘기가 있어서.”
“아, 아니야. 실은 기억이 잘 안 나.”
더듬거리는 우식에게 수민이 가까이 다가왔다. 수민은 그에게 겉만 다정하고 속은 얼어붙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그의 가식적인 목소리를 구별할 수 있는 건 차수민에 대해서라면 박사의 경지에 오른 나뿐일 것이다.
“정현이 친구네. 안녕. 근데 정현이랑 약속이 있어서. 잠시 괜찮을까?”
“어어. 난 이제 가 보려고 했어. 안녕, 김정현! 얼른 쾌차하고 건강한 모습으로 보자. 필요한 거 있음 문자해라. 가지는 못해도 택배로 보내 줄게. 그럼 가 볼게.”
“뭐냐 저 새끼.”
어쩐지 급하게 사라진 우식의 빈자리를 보며 어리바리하고 있자 수민이 세차게 등을 밀었다.
“저기 우리 아빠랑 엄마.”
복도 저편에는 7반 담임과 막 인사를 나누는 중년 부부가 보였다. 나는 창문에 얼굴을 비춰 보며 옷매무새를 바르게 했다.
“어머, 네가 정현이니?”
사람 좋아 보이는 아줌마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차수민의 어머니였다. 고등학생 아들을 둔 전형적인 어머니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옆엔 후덕하게 살찐 아저씨 한 명이 이마의 땀을 훔치며 연신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흡사 호빵맨의 잼 아저씨 같은 인상이었다.
“어. 학생이 정현이구나. 반갑다.”
“아, 안녕하십니까! 아드님께 신세 많이 지고 있습니다.”
신세는 그쪽 아드님이 지고 있다는 표현이 정확했겠지만 어찌 됐건 좋은 병실을 제공받은 건 사실이었다.
“하하. 우리 아들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 몸은 좀 괜찮아? 잘 먹고 잘 놀아야 해. 건강이 최우선이야.”
어머니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차수민을 길러 낸 사람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두 사람 모두 평범했다. 아니, 사랑과 인자함이 뚝뚝 흘러넘쳤다. 양육의 문제가 아니었다. 차수민은 싸가지 없게 길러진 것이 아니라 태생적으로 인성을 탑재하지 못한 채 태어난 것이었다.
“그래. 정현 군이 우리 수, 수민이랑 친해져서 얼마나 기쁜지 모르네. 타지에 보내 놓고 정말 걱정이 많았는데. 수민이가 외국에 있다가 들어와서 정상적인 학교생활은 처음이거든. 가족 모두 맘 졸였는데 이렇게 잘 지내서 정말 고맙…….”
손수건으로 땀을 닦아 내던 수민의 아버지는 무엇을 본 건지 눈동자를 굴리다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다시 땀을 뻘뻘 흘리며 내 손을 붙잡았다.
“어쨌든, 우리 수민이 잘 좀 부탁한다.”
“걱정 마세요. 수민이가 얼, 얼마나 좋은 앤데요. 선생님들도 친구들도 수민이 칭찬을 마, 많이 한답니다.”
나 또한 땀이 났다. 차수민의 아버지와 나는 서로 대결이라도 하듯이 말을 더듬으며 차수민에 대해 좋은 말을 주고받았다. 내 불꽃 연기를 남 일 보듯 구경하던 수민이 손목시계를 살폈다.
“어이쿠. 벌써 시간이. 어머니 아버지 돌아가실 시간이 되었네요.”
“저, 정말? 아쉽다. 우리 수, 수민이 이제 언제 또 보나. 집에도 자주 안 오고. 전화하면 받지도 않고.”
“……저도 아쉽지만 가게 지키셔야죠. 방학하면 허구한 날 볼 텐데 걱정 마시고 올라가세요.”
차수민이 냉랭하게 말하자 아버지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저저, 싸가지 없는 놈. 지 아빠 한테까지 저러는데 나는 얼마나 물로 보이겠냐고.
“그래, 수민아. 잘 지내고 있어. 엄마가 항상 사랑한다는 거 잊지 말고.”
어머니가 짧게 포옹했다. 그녀의 등에 가려져 수민의 표정을 볼 수 없었지만 어찌 됐든 단란한 가족의 풍경이었다.
“그럼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멀어지는 부부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큰 감흥 없어 보이는 수민은 어쩐지 마지못해 손을 흔들었다. 자식. 부끄러워하기는.
“뭐.”
느껴지는 시선에 그가 삐딱하게 반응했다.
“야. 네 부모님 엄청 좋으시다. 어떻게 너 같은 애를 키우셨지?”
“죽는다, 진짜.”
대악마 차수민을 길러 낸 부모는 지하를 다스리는 하데스 정도 될 줄 알았는데 지극히 평범한 부부였다. 정말 어디 지방에서 작은 가게를 하실 것 같은 이미지였다.
그래도 싸가지는 부족할지언정 자기 엄마 아빠한테까지 패악을 부리지는 않는 것 같았다. 차수민의 모든 패악은 올곧게 나를 향했다. 어쩌면 그의 부모도 모르는 본얼굴을 나만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투덜대며 택시를 잡는 차수민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병원으로 안 가?”
택시는 병원과 반대 방향으로 달리고 있었다. 차수민이 쌩쌩 지나쳐 가는 창밖 풍경을 바라보며 기지개를 켰다.
“넌 병원 지겹지도 않냐? 나온 김에 바람도 쐬고, 좀 돌아다니면 좋잖아. 저건 뭐 인생이 재미가 없어요.”
“이 꼴로 돌아다니란 말이구나…….”
나는 뒷좌석 한쪽에 고이 모셔 둔 목발을 들어 올렸다. 수민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너 결국 우리 집 못 와 봤지.”
“가려다가 이렇게 된 거잖아.”
내 말에 수민이 빙긋 웃으며 짝 박수를 쳤다. 앞좌석에서 택시 기사가 흠칫 몸을 떠는 장면을 목격했다.
“잘됐네, 그럼.”
그의 주문대로 택시는 골목가 신식 건물 앞에서 멈췄다. 그렇게 얼렁뚱땅 차수민의 자취방에 입성하게 되었다. 그렇게나 들어가기 힘들었던 그곳에 드디어 발을 디디게 되다니 감격으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왜 안 들어가?”
“마음의 준비를 좀 하고.”
“지랄하고 있네.”
수민의 발에 채이다시피 하여 들어간 자취방은 원룸이 아닌 오피스텔에 가까웠다. 아버지의 자영업이 잘되는지 고등학생이 혼자 살기엔 극도로 좋은 집이었다. 인테리어 또한 깔끔하게 잘되어 있었다. 사내놈이 혼자 사는 집치고 좋은 냄새도 나는 것 같았다. 바닥에 깔린 러그에 발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으니 부엌에서 먹을 만한 걸 찾는 소리가 들려왔다.
“벽에 칼이라도 걸려 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다, 너.”
“……나를 뭐라 생각하는 거야. 야, 이거 좀 들어 봐.”
수민이 건네준 것은 맥주 캔 한 박스였다. 나는 놀라 입을 벌렸다.
“이게 고등학생 자취방에 왜 있어?”
“아빠가 아까 주고 간 거거든? 분위기 초 칠 거면 나가.”
“아버지가…….”
나는 그 순진한 인상의 아버지를 떠올려 보았다. 미성년자 자식에게 맥주를 짝으로 갖다주다니 역시 그저 평범하지만은 않은 가족이 분명했다. 냉장고에서 대충 꺼낸 안주들로 상을 차렸다. 금세 꽤 그럴듯한 술판이 되었다.
“난 병자니까 원래 마시면 안 되는데 차린 사람 성의가 있으니 한 잔만 할게.”
“그거 마신다고 안 죽어. 알코올은 소독되잖아. 이렇게 고지식한 찐따는 또 처음 보네. 따라 봐.”
“네…….”
나는 수청을 드는 춘향이의 기분으로 그의 잔을 쫄쫄 채웠다. 기분 좋은 탄산음이 공기를 메웠다. 홀짝거리며 안줏거리를 주워 먹으니 기분이 올라왔다. 오늘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까지 들기 시작했다.
“병원 나오니까 좋긴 좋다. 사실 나 걱정했거든. 오늘 학교에서 김병철 마주칠까 봐.”
“걔 그만뒀다니까…….”
“그래. 자퇴했다더라. 그래도 김돼지 성격에 끝까지 복수하려고 얼쩡거릴 거야. 원래 그런 새끼거든. 너나 나나 뱃가죽 안 뚫리게 조심해야 돼.”
나도 나지만 차수민이 걱정되었다. 사실 나는 한 게 처맞은 것밖에 없는데 차수민은 그를 잔뜩 도발한 걸로 모자라 경찰에 꼰지르기까지 했으니 김병철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었다.
“글쎄. 조심 안 해도 될 것 같은데. 앞으로 그 돼지새끼 볼 일은 없을걸. 그 뭐냐…… 유학 간다고 들었어.”
“유학? 그놈 알파벳도 잘 모를 텐데.”
“큰 사고 쳤으니 외국으로 치워 버리는 거겠지. 그러니까 쓸데없는 걱정 안 해도 돼.”
기포가 올라오는 맥주잔을 내려다보며 차수민이 말했다. 걱정하지 마. 약간의 알코올이 그를 상냥하게 만든 건지, 안심이라도 시켜 주려는 것처럼 재차 말이다.
“진짜? 있는 집 아들이었단 말이야? 아오, 그럼 진즉에 보낼 것이지. 여튼 다행이다. 나 진짜 퇴원하면 착하게 살 거야. 공부도 열심히 할 거고.”
“누가 보면 빵이라도 갔다 온 줄 알겠어.”
홀짝홀짝 술이 들어가니 말이 많아졌다. 나는 TV 콘솔 아래 게임기를 발견했다. 우리는 조이스틱을 나누어 들었다. 슈퍼마리오 3였다. 콧수염 배관공 둘은 신나게 달렸다. 취한 탓인지 내 마리오는 자꾸만 뻐끔 플라워에게 몸을 내어 주고 있었다.
“야 근데. 왜 여기까지 와서 학교 다녀? 그냥 너 살던 동네에서 다니지. 여기 학군도 안 좋잖아. 양아치들 천지 삐까린데.”
“내 학력이 좀 복잡해서 대부분 안 받아 줬어. 개새끼들.”
술 때문인지 항시 틱틱대던 수민도 어느 정도 유해져 평소 같으면 가뿐히 무시했을 질문들에도 착실히 대답해 주고 있었다. 나 역시 기고만장해진 탓인지 평소엔 입 밖으로 낼 생각도 않던 말들을 내뱉었다.
“신기하다. 삥 뜯던 애 집에 놀러 와 있네.”
“자랑이다.”
“너네 집 좋은 냄새 나.”
“……야. 음악 좀 틀어 봐. 저기 블루투스 스피커 있어.”
나는 토 달지 않고 그의 명령에 따랐다. 핸드폰에는 도연과 연락하며 다운받았던 재즈 음악이 즐비했다. 스피커와 연결해 재생 버튼을 누르자 순식간에 분위기가 고급 레스토랑이 되었다.
알아듣지 못할 노래 가사는 로맨틱한 멜로디에 버무려져 듣기 좋은 밸런스를 자아냈다. 끈적한 음률에 무너지듯 소파에 몸을 기댔다. 새로 딴 맥주를 잔에 꼴꼴 따르는 수민의 옆얼굴을 보았다.
“있잖아. 예전부터 느낀 건데 너 사내자식이 좀 예쁘게 생긴 것 같아. 그런 말 많이 듣지?”
“나도 알아.”
“알아?”
“응. 그렇게 깝죽대다가 곤죽이 된 놈들이 한둘이 아니라서.”
차수민이 눈도 안 마주친 채 내뱉었다. 평소의 나였다면 그가 내미는 경고장에 허겁지겁 발을 빼냈을 테지만 지금의 김정현은 기분이 좋았다. 흘러나오는 음악도, 알딸딸하게 퍼지는 행복도.
“으음. 얼굴은 예쁘장한데 태도는 왜 그렇지 못할까.”
“……어디가 예쁜데?”
“말해도 돼?”
오늘은 특별히 허락한다는 듯이 소파 위에 팔을 올려놓은 채 그가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그 얼굴을 자세히 보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여기. 긴 속눈썹이랑 눈이 예뻐. 눈이 소처럼 커서. 뒤통수 치면 또르륵 굴러 나올 것 같아. 마치, 구슬처럼.”
“눈알이 예쁘단 말이군. 그리고 또?”
차수민이 길고 예쁜 눈을 반으로 접으며 웃었다. 팔랑거리는 속눈썹의 궤적을 쫒느라 잠시 할 말을 골라야 했다. 나는 눈에서 내려와 차수민의 잘 빠진 코를 살폈다.
“또 코도 오뚝하니 예쁘게 서 있는 것 같고, 머리카락도 부들부들하고. 그리고 여기…….”
언제부터 그의 얼굴께로 올라와 있던 내 손이 느물느물 넘어와 그의 도톰한 입술을 만졌다. 붉고 촉촉했다. 촉감이 탱탱한 포도알을 만지는 것 같았다.
“입술도…….”
아랫입술을 살포시 엄지로 누르자 새하얀 이빨이 살짝 보였다가 사라졌다. 힘주는 대로 일그러지는 입술 모양이 재밌어 하려던 말도 잊고 신나게 주물럭거렸다.
술의 힘은 위대했다. 죽탱이가 날아가도 모자란 시간이었는데 차수민은 가만히 내 손길을 받아 내고 있었다.
“김정현.”
입이 벌어지며 예의 그 하얀 이빨이 또 드러났다. 골격이 작아서인지 이빨 또한 오밀조밀했다. 입술은 만지작거린 탓에 부어올라 침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나는 멍하니 그 꼴을 지켜보고 있었다.
“……김정현.”
그의 부름에 홀린 듯이 두 손을 들어 올렸다. 내 커다란 손이 그의 작은 얼굴을 감쌌다. 뺨 또한 말랑말랑해 꼭 찐빵 같았다.
차수민이 두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작은 온기가 손바닥을 통해 느껴졌다.
“말……랑말랑…….”
그리고 내 상체는 그를 향해 쏟아져 내렸다. 익숙지 않은 알코올 탓이었다. 흡사 그를 바닥에 덮쳐 버린 꼴을 하고 나는 깊은 잠의 세계에 빠져 버렸다.
시팔 새끼. 누군가 잇새로 거친 욕을 내뱉는 것 같기도 했지만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수마가 나를 덮쳤다.
눈을 떴을 때, 나는 차수민을 곰 인형처럼 다리 사이에 끼고 껴안고 있었다.
“헉. 깜짝이야.”
“으응.”
화들짝 놀라 밀쳐 내자 침대에서 밀려 떨어진 수민이 눈을 비볐다.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아, 허리 아파. 침대도 좁은데 자리 겁나 차지해서 난 구석탱이에서 잤잖아.”
구시렁대며 허리를 부여잡는 수민을 보며 어젯밤 고삐 풀려 그의 얼굴을 만지작거리던 일이 생각났다. 이성이 순식간에 돌아왔다. 등골이 오싹해졌다.
“우리 어제 무슨 일 있었어?”
설마 하는 마음으로 양어깨를 붙잡고 묻자 뻗친 머리 사이로 잔뜩 찌푸린 그의 눈썹이 눈에 들어왔다.
“손 치워라.”
그래. 이게 차수민이지. 어제는 정말이지 둘 다 약간 미쳤었던 것 같다.
“미안.”
“다 나았지, 김정현?”
수민이 오른쪽 다리의 깁스를 깡 내리치며 이죽거렸다. 그리고 지갑을 내밀었다.
“말짱하면 가서 점심이나 사 와. 그리고 넌 앞으로 술 먹지 마라.”
“왜, 왜. 어제 무슨 일 있었어?”
“뭔 일? 뭔 일 있었냐고?”
응. 네 입술 조물거린거 말고 또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고 싶었지만 입이 열리지 않았다. 대신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술주정하다가 죽은 듯이 엎어져서 코 골면서 잘 자더라. 옮기느라 좆 빠지는 줄 알았어. 잠버릇도 개 험해서 진짜. 왜 자꾸 내 배에 발을 올리는데?”
나는 머쓱하게 뒷머리를 만졌다.
“집에서는 곰 인형이랑 같이 자서.”
“곰 인혀엉?”
“전 여자 친구가 준 거 있어. 테디라고. 왜. 소개시켜 줄까?”
수민의 얼굴이 경악으로 뒤덮이기 전에 냉큼 지갑을 받아 들고 현관문을 나섰다. 뭔가를 더 하진 않았구나. 얌전히 엎어져 잔 내가 대견스러웠다. 빨리 여자 친구를 사귀든지 해야지 안 되겠다. 얼굴 좀 예쁘다고 사내새끼에게 집적대다니.
“으으!”
나는 산발이 된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근처 햄버거 가게에서 대충 사 온 걸로 끼니를 때우고 병원으로 향했다. 일어나자마자 느끼한 걸 사 왔다고 대차게 까였다.
돌아가서는 병실 문을 열자마자 간호사에게 눈물 빠지게 혼났다. 환자분 큰일 날 뻔했다, 생각이 있냐 없냐, 치료가 장난이냐 화내는 간호사 앞에서 잔뜩 주눅 들어 있는 나를 남 일 보듯 힐끔 봐 주고 음료수를 뽑으러 가는 그였다.
외출 안 된다는데 꼬셔 낸 것도 차수민이고 병자에게 술 내민 것도 차수민인데. 억울했지만 힘없는 나는 엄마까지 가세해 쏟아지는 비난을 홀로 감내할 뿐이었다.
또다시 지루한 병원 라이프가 시작되었다. 정규 수업이 끝나면 수민은 칼같이 경식이를 데리고 병실 문을 열어젖혔고 가끔 퇴근 후 초밥을 사 들고 엄마가 방문했다. 물리 치료와 검진을 제외하고 오전은 텅 비어 있었다. 옆 병실 할머니들과 수다 떠는 것도 하루 이틀이었다.
여느 날처럼 등을 벅벅 긁으며 차수민이 오기 전까지 시간이나 보낼 겸 다른 병실을 순회하고 있는데 찰랑거리는 머릿결을 가진 뒷모습이 보였다. 단 한 번 보았지만 잊을 수 없는 뒷모습. 이 타이밍에 그녀라니. 신이 내린 우연이었으리라. 나는 생각했다.
“도연아!”
“김정현?”
동창 모임에서 만났던 한수진의 친구 이도연이었다. 번호도 교환하고 톡도 주고받았는데 만나자는 약속을 정하기 전에 이 꼴이 나 버려서 연락이 끊긴 상태였다.
“뭐야, 네가 여기 왜 있어. 그 팔은 또 뭐구. 다쳤어?”
“응. 스, 스케이트보드 타다가 넘어졌어.”
양아치는 싫다던 그녀의 말을 떠올리며 선배한테 맞아서 죽기 전까지 갔었다는 사실을 주워 삼켰다.
“헐. 많이 아팠겠다.”
“이제 괜찮아. 곧 퇴원이거든. 넌 이 시간에 병원에 무슨 일이야? 어디 아파?”
“아니. 할머니가 입원하셔서. 오늘 우리 개교기념일. 할머니 보러 왔는데 네가 있을 줄은 몰랐지. 근데 왜 너 내 연락 다 씹었어?”
정신이 없기도 했었고 어찌 보면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어 버린 터라 미안한 마음에 먼저 연락도 못 하고 있었다. 나는 성치 않은 손으로 주머니에서 새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미안해……. 다칠 때 핸드폰도 부서져서 답장을 못 했어. 한수진한테 물어볼까도 했는데 보다시피 이래서……. 괜찮으면 번호, 다시 줄래?”
수줍게 내민 핸드폰을 깔깔 웃으며 받아 든 도연이 배경화면을 보고 놀란 눈이 되었다.
“어. 존 메이어네. 뭐야, 김정현. 내가 추천한 곡 듣고 있었던 거야?”
얼마 전에 수민과 퍼마시며 재생했던 음악 목록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심심해서 음악이나 들을까 해 앱을 켜 두었는데 그걸 본 모양이었다.
“김정현 의외의 면이 있네. 어때. 좋지?”
“으응. 좋더라.”
음악이 귓가에 자동으로 재생되는 듯했다. 블루스와 재즈의 경계 사이에서 울려 퍼지던 부드러운 기타의 선율과 보컬의 감미로운 목소리.
……그리고 차수민의 타액으로 범벅된 아랫입술. 살짝 풀린 동공. 손바닥에 감겨 오던 뺨의 감촉.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세차게 고개를 털어냈다. 미쳤군, 김정현.
“그럼 다음에 한번 거기 가 볼까? 네가 전에 말했던 재즈 축제. 너 다 나으면.”
“뭐, 진짜? 나는 너무 좋지! 아, 아니 축제 가는 게 좋다고.”
킥킥 웃던 도연은 또 연락하겠다며 긴 머리를 찰랑이며 손을 흔들었다. 마음이 따듯해졌다.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몸뚱어리는 박살났지만 도연과의 진도가 크게 쑤욱 움직였다.
그녀는 그 후로도 종종 할머니 병문안을 올 때마다 나를 불러냈다. 평범한 고등학생처럼 야자에도 꼬박꼬박 참여하고 학원도 두어 개 다니고 있는지 차수민이 드나들지 않는 주말에 주로 방문했다. 병원 데이트라니 이색적이었다.
“뭘 그렇게 헤벌쭉 웃어?”
“애들은 몰라도 돼.”
내게 결핍되었던 조각은 연애라는 가설이 들어맞는 순간이었다. 도연과 다시 연락이 닿기 시작한 이후로 수민의 시비에도 기분 좋게 웃어넘길 수 있었다.
“뭐야. 누군데.”
“있어. 나도 친구 존나 많거든.”
내 대답에 수민은 기가 차다는 듯 하, 숨을 내뱉고 침대 위에 잔뜩 내놓아진 문제집을 집어 던졌다.
“저저 성깔 하고는.”
그러나 그가 아무리 성깔을 부려도, 이 긴 병원 생활 동안 알게 모르게 의지가 되었던 사람은 차수민이라는 점에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목적은 나를 괴롭히기 위함이었어도 매일 시간 맞춰 방문하는 그의 정성은 나무랄 수 없었다. 좋건 싫건, 5시가 되면 파블로프의 개처럼 의지와 상관없이 그를 기다리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그가 던져 너덜너덜해진 문제집들을 차곡차곡 정리했다. 병원에 틀어박혀 있는 동안 공부란 것을 해 봤다. 그간 활자라곤 쳐다도 안 봤던 나에게는 장족의 발전이었다.
“너는 공부 안 하고 왜 나만 시키냐.”
“난 안 해도 똑똑하거든. 넌 솔직히 타는 쓰레기보다도 심각한 수준이잖아.”
“말본새 봐. 저거 저거 뭐가 되려고 저러지.”
혀를 쯧쯧 차자 질세라 대답이 돌아왔다.
“난 믿는 구석이 있거든. 아버지 자영업 물려받을 거라서 말이지. 너야말로 뭐가 되려고 그러냐.”
“아버지 자영업?”
너무나도 당당한 대답에 할 말을 잃었다. 아니, 사실 좀 당황스러웠다. 나처럼 내일도 없이 사는 놈인 줄 알았는데 그래도 계획이란 게 있는 놈이었다.
“어. 아버지 사업 물려받아서 쭉쭉 확장시키고 한국 최고로 키울 거야. 아무도 못 건드리게. 어중간하면 여기저기서 간 보고 건드리거든.”
“아. 그, 그래? 아버지 사업을 꽤나 소중하게 여기나 보네.”
“뭐. 소중……. 어쨌든 내가 키워야 해. 그럴 거고. 너는? 넌 뭐 하고 싶은 거 없어?”
갑자기 치고 들어온 질문에 멍해졌다. 나? 나는…….
나는 한 번도 내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뭘 적극적으로 해 보고 싶었던 적도 없는 것 같다. 제 꿈을 이야기하는 수민의 얼굴이 왠지 낯설어 보였다.
대답 없는 나를 보며 수민은 알만하다는 듯이 콧등을 찡그렸다.
“진짜 없어? 노답이네.”
“…….”
“그래, 넌 평생 내 따까리나 해라.”
“에이 씨.”
어쩐지 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져 홱 드러누워 담요를 얼굴 위로 덮었다. 삐졌냐? 깐족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짜 나 뭐 하지? 이러다 평생 쟤 따까리로 인생 마감하는 거 아니야? 별안간 불안감이 몰려들었다. 나는 애써 고개를 저었다. 깁스 풀고 퇴원하면 난 새 인생을 살 거니까 그때 천천히 고민하면 되지. 새로운 시작이라고. 김정현이 김정현에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옆에서 빽빽대는 차수민을 무시한 채 주문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부서진 뼈는 어느새 무럭무럭 자라 퇴원 일을 앞두고 있었다.
“젊음이 좋다니까. 튼튼하게 잘 붙었어요. 이 정도면 굴러다녀도 되겠어.”
의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퇴원해도 좋아요.”
드디어. 지겹던 일상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해방의 자유를 전하러 도연에게 전화를 걸던 나는 다이얼을 취소하고 이젠 외워 버린 번호를 눌렀다. 그야 도움을 받았으니까…….
한참 후 순백색의 병원 건물과는 어울리지 않는 괴물 같은 소음이 들려왔다. 바이크를 몰고 나타난 수민은 야쿠자나 입을 법한 화려한 야구잠바를 입고 있었다. 가죽 재킷에 이어 호랑이 한 마리가 잔뜩 웅크리고 있는 스카잔이었다.
“……패션 센스 뭔데.”
“지는. 윗도리는 병원복이야? 넝마 조각인 줄 알았어.”
“좋은 데 가려 했는데 너 때문에 창피해서 못 가겠다. 에효. 동네 치킨집이나 가자.”
“이거 비싼 거거든?!”
한 마디도 지지 않으며 뒷자리를 내어 주는 차수민의 허리를 잡은 나는 어렴풋이 깨달았다. 악연인지 인연인지 모르겠지만, 아니 아마 악연이겠지만 그저 스쳐 지나갈 줄 알았던 그는 어느새 새로운 내 인생에 꽤 큰 비중을 차지할 인물이 되어 있었다.
가느다란 허리를 붙잡고 빠르게 뺨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을 느꼈다. 어쩐지 설레었다. 함정 루트를 밟던 마리오는 배관로 너머로 사라지고 새로운 마리오가 등장했다. 새로운 시작의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봄은 예전에 다 끝나 버렸지만 나는 이제야 봄을 타나 보다.
✲ ✲ ✲
학교는 놀랄 만큼 그대로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반들반들한 내 책상에 살짝 내려앉은 먼지 정도였다.
“김정현. 퇴원 축하한다!”
“됐어. 이번 기회에 3년 우정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해 줘서 고맙다. 어떻게 한 번을 안 와?”
“갔었다니까? 말했잖아. 네 병실에…… 아니다. 휴. 그래도 연락 꼬박꼬박하고 택배도 보내 줬잖아.”
최우식이 걸쳐 오는 어깨동무를 쳐 내고 자리에 앉았다.
“참 고맙네. 이제 나 공부할 거니까 저리 꺼져. 새 인생을 살 거야.”
나는 경식이가 추천해 준 문제집들을 책상에 쌓아 올렸다. 여기저기서 폭소가 터졌다. 공부한댄다, 공부.
“야, 김정현. 근데 너 김병철 피떡 만든 게 사실이야?”
“뭐……?”
어리둥절한 내게 내가 아는 것과는 조금 맥이 다른 정보들이 날아들었다.
“운동한다더니 진짜였구나. 그 근육 돼지 아무도 못 건드렸잖아. 진짜 존경한다. 쫄보인 줄 알았는데 사나이였어, 올.”
“근데 너 뒷감당은 어떻게 하려고 그래.”
누군가의 질문에 안절부절못하던 우식은 뒷감당 얘기가 나오자 말을 꺼낸 당사자를 거세게 밀어 냈다.
“방금 돌아온 애한테 그딴 말을 하고 그러냐. 야, 신경 쓰지 마. 몇 명만 그 지랄인 거지 김병철도 사라졌는데 걱정할 필요 없어.”
나 걱정 안 하는데……? 어리둥절한 나를 두고 갑론을박을 벌이는 이들이 이해가 가지 않았으나 곧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평화로운 스쿨 라이프가 시작될 거라 믿었지만 복귀전은 험난했다. 최우식의 말대로 그 ‘몇 명’에 해당되는, 김병철 무리의 일부였다고 생각되는 그들은 집요하게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차수민에게 물들었는지, 아님 다굴 당하고 죽다 살아나 무서운 게 없어졌는지 깡만 세져 크게 신경 쓰이지는 않았지만 짜증 나는 건 사실이었다.
특히 지금 같은 상황은.
“야. 김정현. 너 무서운 게 없지? 선배가 물로 보이지, 이젠?”
기분 나쁜 손가락이 어깨를 툭툭 건드려 왔다.
“이 새끼가 웃어?”
“안 웃었는데요.”
정말인데. 억울했다. 혹시 웃는 얼굴로 비쳐졌다면 그것은 곧 있을 데이트 때문이었을 것이다. 주머니 속 핸드폰이 진동했다. 나는 어느새 여자 친구라 부를 수 있는 관계가 되어 버린 도연의 얼굴을 떠올리며 히죽 웃었다.
“또 쪼개네? 얘 안 되겠네. 김병철 없어지니까 신나냐?”
기가 찬다는 듯이 실실 웃던 실눈 선배가 눈 깜짝할 사이에 뺨을 쳤다. 제법 매서워 별이 반짝했다. 퉤, 침을 뱉자 붉은 피가 섞여 나왔다. 나는 불만스럽게 그를 노려봤다.
“다 하셨으면 전 갈게요.”
“이 미친 새끼가!”
제 분에 못 이겼는지 다시 한번 주먹이 날아왔다. 나는 그냥 눈을 감고 받아 주었다. 나보다 키도 한 뼘이나 작고 멸치같이 마른 놈 하나 정도야 패려면 팰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똑같은 사람이 되기 싫었다. 좆같은 피라미드에서 벗어나니 이렇게나 마음이 편했다.
“됐죠? 저 데이트 가야 해서용.”
나는 말을 마치기도 전에 튀었다.
“야! 거기 안 서!”
애달픈 목소리가 붙잡았지만 무시했다.
설렁설렁 넘기니 안 되겠던지 옆 학교 일진들까지 불러다가 족칠 때도 있어 피해 다니는 것이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었다. 세기의 우정으로 병철이의 복수라도 하겠다는 일념인지 끈질기게도 달라붙었다.
그때 현장에 함께 있었으니 분명 차수민에게도 집적거릴 터였다. 그러나 수민의 상황이 어떤지 나는 들을 수 없었다.
“학교를 이틀이나 안 와? 왜?”
“몰라. 집에 뭔 일이 생겼대. 담임이 그러던데.”
7반 걸상은 한 자리가 텅 비어 있었다. 그걸 보니 순간, 가슴이 꽉 막혔다. 몰랐다, 전혀.
난 우리가 친구라 생각했는데.
한마디 말도 없이 결석한 수민에게 느낀 얕은 배신감은 전화건 문자건 연락이 통 되지 않자 걱정으로 바뀌었다. 걱정돼 찾아간 그의 자취방은 비어 있는지 아무리 두드려도 인기척조차 나지 않았다. 담임한테 부탁해서 본가 주소라도 알아봐야 하나 생각할 때쯤 그가 돌아왔다.
“야.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얼굴에 상처는 또 뭐고.”
“집안 사정.”
짧게 대답하는 그의 눈 밑에는 작은 생채기가 나 있었다.
나는 아버지의 작은 슈퍼를 서로 물려받기 위해 티격태격하는 집안사람들과 그 와중에 누군가의 손톱에 의해 피가 방울방울 올라오는 차수민의 도자기 같은 얼굴을 상상했다. 큰일이 있긴 했는지 백옥 같던 눈 아래가 살짝 어두워져 있었다.
“그럼 말이라도 해 주고 가지. 걱정했잖아.”
“걱정했어……?”
“당연하지.”
“걱정했단 말이지…….”
멍하니 중얼거리던 수민은 이내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내둘러 꺼지라는 의사 표현을 해 보였다. 어쩐지 지치고 예민해 보여 토를 달지 않고 얌전히 물러났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그의 반에 전학생이 왔다. 평범하지만은 않은 전학생에 대한 소문은 학교 전체에 퍼졌다.
“미친, 김정현. 쟤 너보다도 커. 저 정도면 냉장고 아니야? 졸라… 졸라 무섭다.”
“아니, 일단 고등학생이 맞긴 해?”
떡 벌어진 체격도 체격이었지만 액면가 또한 남달랐다. 사납게 생긴 그의 얼굴엔 세월의 흔적을 나타내는 것만 같은 깊은 주름과 흉터가 가득했다. 실한 근육은 교복 셔츠를 뚫고 올라올 정도로 성나 있었다. 프로 레슬러가 아닐까 하는 조심스러운 추측이 나왔다.
모두들 무시무시한 전학생에 대해 수군거리고 있을 때 우식이 조용히 말을 걸어왔다.
“있잖아. 나 저 떡대. 너 입원해 있을 때 본 것 같아. 네 병실 앞에서.”
“무슨 소리야. 난 처음 보는데. 내가 한번이라도 본 인간이라면 저 얼굴이 기억 속에서 잊히겠냐.”
“아냐. 분명 낯이 익어. 왜 내가 애들이랑 병문안 갔다가 돌아왔다고 했었잖아. 사실 그때 네 병실에 저런 떡대들이 화환을 옮겨 놓는 중이었거든.”
병실을 떡하니 채우고 있던 장례식에나 세울 법한 커다란 화환과 난초 화분이 떠올랐다.
“어찌나 큰지 개업 축하 화환인 줄 알았다. 들어가려고 했는데 그중 하나가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들어오면 죽여 버린단 식으로 얘기해서…… 그래서 못 들어가고 돌아갔던 거야.”
“그걸 지금 나더러 믿으라고?”
“어. 가오 상해서 굳이 말 안하려 했는데, 아씨. 아, 7반, 걔. 차수민 걔도 있었다. 떡대들 사이에서 쫄지도 않고 가만히 앉아 있더라. 걔 좀 무서워, 나는. 하여튼 진짜 전학생 쟤 본 것 같다니까?”
그 장면이 생생히 기억나는지 최우식이 몸서리를 쳤다. 나는 쯧쯧 혀를 차며 그의 말을 가볍게 넘겼다.
“네가 쫄았던 건 아니고? 우식아, 괜히 병문안 안 온 핑계 지어내지 마. 누굴 바보로 알아. 떡대는 무슨. 병원 인력이었겠지.”
전학생의 등장 이후로 수민은 한껏 예민하고 괴팍해졌다. 신경질이 늘었으며 사소한 것에 벌컥 화를 냈다. 심지어 학교에서는 꽁꽁 숨기고 내 앞에서만 보여 주던 본 성격을 아무렇게나 드러내고 있었다. 반에서 또라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 같았다.
나는 몸을 사려야 했다. 고삐 풀린 차수민은 보이는 족족 할퀴려 드는 고양이나 진배없었다. 마치 처음 만났을 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렇게 위태로운 외줄 타기를 하는 도중 일이 터져 버렸다. 차수민의 심기를 거스른 사람이 나타나 버린 것이다.
석식 후 수업 시작 전까지 조금 시간이 남았을 때였다. 빨리 먹고 공을 차는 애들도 있었고 교실서 늘어져라 자거나 복습하는 모범생도 있었다. 작심삼일이 틀린 말은 아닌지 나는 전자에 속했다. 몇 시간 집중해 수업을 들으니 좀이 쑤셔 축구를 하는 중이었다.
화단 뒤로 익숙한 뒤통수가 보였다. 차수민이었다. 언제 친해졌는지 그의 옆에는 화제의 전학생이 붙어 있었다. 둘은 몇 마디를 주고받는 듯하더니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의견 충돌이 있는 것 같았다. 수민의 조그만 뒤통수만 봐도 그가 얼마나 성질이 나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김정현! 공 간다!”
“어어…….”
날아온 공을 토스하고 나니 잔뜩 심통이 난 수민은 어느새 홀로 운동장 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사건은 그때 발생했다.
“이게 누구야? 1학년 찌질이 아니야?”
하필이면 기분이 저기압인 차수민이 실눈 선배의 무리와 딱 마주쳐 버린 것이었다. 그들은 벼르고 있었는지 보는 눈이 많은 공간에서 내게 했던 것처럼 툭툭, 기분 나쁘게 차수민의 어깨를 치며 시비를 트고 있었다.
“재밌냐. 선배 하나 골로 보내 놓고 학교 다닐 만해?”
언뜻 보면 어깨 위 먼지를 털어 주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죽거리는 목소리는 진짜였다. 수민은 그저 고개를 푹 숙인 채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왜. 또 신고해 봐. 듣자 하니 경찰도 불렀었다며. 맞아?”
거친 손찌검에 수민의 뿔테 안경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 광경에 내 입도 벌어졌다.
“김정현 뭐 해! 공 놓쳤잖아! 자꾸 딴 데 정신 팔래?”
“큰일 났…….”
“야! 어디 가! 김정현!”
나는 축구고 뭐고 차수민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차수민이 걱정되었던 건지, 실눈 선배의 한 치 앞이 걱정되었던 건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 예민한 차수민 레이더가 곧 어마어마한 일이 벌어질 것이라 예견하고 있었다.
나는 손을 뻗어 수민의 머리를 툭툭 치던 선배의 손목을 잡았다. 그러나 차수민이 한 발 더 빨랐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나는 들을 수 있었다. 마치 지옥에서 울려 퍼지는 고문 기구의 마찰 소리 같았다.
“……시발. 이제는 별 버러지 같은 것들이.”
수민은 가냘픈 팔로 선배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그게 시작이었다.
“으악!”
그의 얼굴에서 코피가 터졌다. 폭죽처럼 피가 사방에 튀었다. 온몸으로 막아 봤지만 소용없었다. 수민은 빈 공간으로 귀신같이 파고들어 묵직한 어퍼컷을 날려 댔다.
그는 오랜만에 전문 싸움꾼의 면모를 보여 주었다. 그간 날 많이 봐주고 있던 거였구나, 잊고 있던 고마움을 일깨워 주는 주먹질이었다. 말리다 덩달아 나도 몇 대 맞은 것 같았다. 옆구리 여기저기가 욱신거렸다. 악력이 어찌나 센지 잠시 잡힌 선배의 목 부분에는 시뻘건 손자국이 박혀 있었다. 김병철은 근육이라도 튼실했지 얇다란 실눈을 줘 패는 일은 내가 봐도 쉬워 보였다.
한 놈만 패는 차수민 덕분에 실눈 선배의 친구들만으로는 수습이 어려워 식사 후 운동장을 거닐던 학생들까지 합세해 그를 뜯어말려야 했다.
“야야, 그만해! 사람 죽겠다!”
꼭지가 돌아 버린 차수민은 내가 알던 차수민보다 갑절은 더 무서웠다. 현장은 흡사 난투극을 방불케 했다. 사실상 한쪽의 일방적 폭행이나 다름없었다.
몇 사람이 달라붙어 겨우 둘을 떼어 낼 수 있었다.
질질 끌려가면서도 차수민은 사냥감을 놓치지 않았다. 괴력으로 어깨를 잡은 손들을 떨쳐 내더니, 운동장을 돌돌 굴러다니던 축구공을 들어 올려 있는 힘껏 난장판이 된 선배의 머리통에 내다 꽂았다. 뻥 소리가 세차게 교정에 울려 퍼졌다. 선배의 작은 눈을 비집고 눈알이 튀어나오는 환상을 본 것도 같다.
“나는 그 선배 대가리가 깨지는 줄 알았잖아. 선생님이 못 봐서 다행이지.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팬 거야?”
그날의 참투를 회상하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이후 수민에 대한 소문이 무성했다.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던 조용한 애가 갑자기 돌변해 김병철 다음으로 기세등등했던 선배를 때려눕히니 별의별 소문이 도는 것 같았다.
수민은 쏟아지는 관심에 별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 같았다. 아니, 오히려 기분이 좋아 보였다.
“실눈? 오늘 보니까 말짱히 등교하던데 뭐. 야. 이따 끝나고 떡볶이나 먹으러 갈래?”
한창 말도 못 붙일 정도로 예민하더니 오늘은 어쩐 일인지 웃는 얼굴도 보여 주고 있었다. 실눈을 샌드백처럼 사용하고 기분이 풀린 듯했다. 방법이 어찌 됐든 나는 그의 좋은 컨디션이 길게 유지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오늘은 안 돼. 나 데이트 있어.”
“데이트?”
“어. 예전에 마트 안 따라가 줬다고 네가 바이크 끌고 내 동창 모임에 난입했었던 거 기억나? 그때 만났던 애인데 도연이라고.”
하도 그의 신경이 날카로워 말할 타이밍을 놓쳤었다. 굳이 말하자면 여자 친구 생겼다고 말해 봤자 ‘근데? 어쩌라고. 웬 자랑질이야. 여자 처음 사귀어 봐?’ 하고 대꾸해 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사귀어?”
“사귀지.”
“언제부터?”
“몇 주 됐어.”
“흐응.”
그는 의외로 싹퉁머리 없이 대화를 싹뚝 잘라 내지 않았다. 대신 긴 눈을 가늘게 뜨며 잠시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다가 어깨를 툭툭 치고 지나갔다.
“그래. 잘해 봐.”
뭐야. 저 품평하는 듯한 눈길은. 믿기지 않겠지만 나도 예전엔 한 인기 했었다고. 스쳐 지나가는 그를 붙잡고 구구절절 말하면 너무 없어 보일 것 같아 그냥 보내 버렸다.
떡볶이 먹으러 가자던 수민의 제안이 인상 깊었던 탓일까 데이트 장소를 분식집으로 잡아 버렸다. 매콤달콤한 소스 사이로 윤기가 흐르는 떡을 집어 도연의 접시에 올려 주었다. 차수민의 소울푸드라던 김말이 튀김도 시켰다. 계속 붙어 다니다 보니 입맛도 옮아 버린 것 같았다. 집도 근처인데 가는 길에 사다 줄까 봐. 데이트 중 차수민의 포장까지 생각하다니, 시도 때도 없이 튀어 오르는 노예근성이었다.
도연과 시답지 않은 농담 따먹기를 하며 행복해하는 중에 그녀의 뒤로 나와 같은 교복을 입은 무리가 들어와 앉았다.
“아줌마, 여기 모둠세트 3인이요.”
초면인 걸로 보아 같은 학년은 아닌 듯했다. 귀는 눈처럼 감는다고 안 보이는 기관이 아닌지라 듣고 싶지 않아도 그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그나저나 봤지. 박의찬 얼굴이 떡이 됐던데. 팅팅 부어서 원래 가늘던 눈이 거의 소멸됐더라.”
“사람을 개 패듯이 팼다며. 걔는 대체 정체가 뭐냐. 1학년이라는 것 같던데.”
핫하다 차수민. 어딜 가든 이 얘기네. 내가 데이트 중에도 그 얘기를 들어야 하나 싶어 더 오버하며 도연의 입에 김밥을 넣어 주었다. 이 새끼가 갑자기 왜 이러나 당황스러워하는 도연의 표정을 애써 무시했다. 그럼에도 뚫린 귓구멍은 나머지 대화도 필터링 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근데 걔는 이 난리를 쳐 놓고 학교 잘 다닌다더라? 신기해. 깡다구는 좀 셀지 몰라도 뒷일 걱정 안 되나? 박의찬 성격이 인맥 끌어다 뒷골목에서 다구리라도 뜰 놈인데.”
“야야, 걔 그거라잖아.”
그중 하나가 새끼손가락을 흔들어 보였다.
“그 1학년에 전학 온 존나 큰 새끼 알지. 걔가 뒤 봐준대. 나 얼굴 봤거든. 꼴리게 생기긴 했어.”
“헐. 그럼 몸 대주고 방패 되어 주는 거야?”
“안 봐도 뻔하지. 기브 앤 테이크 아니겠냐.”
“사내놈들끼리? 으, 왜 그러고 산대.”
“저기요. 모르면서 함부로 얘기하지 마시죠.”
나도 모르게 그들의 대화에 불쑥 끼어들었다.
“넌 뭐야?”
기세 넘치게 뒤 돌은 한 명이 그보다 한참 위에 있는 나와 시선을 맞추기 위해 쭈욱 고개를 치켜들었다.
“어어…….”
“걔 친군데요, 차수민 그런 애 아니거든요.”
그의 흔들리는 동공을 보며 한숨을 쉬고 도연을 데리고 나왔다. 오늘 데이트는 망했다. 기분이 상해 더는 있을 수가 없었다. 당사자 없다고 되도 않는 말을 아무렇게나 내뱉는다.
나는 도연을 버스 정류장까지 데려다주고 그 앞 포장마차에서 떡볶이와 튀김을 포장했다.
‘헐. 그럼 몸 대 주고 방패 되어 주는 거야?’
잔뜩 부푼 목소리가 자꾸만 맴돌았다. 어처구니없는 소문이었다. 그럴 위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나였다. 분명 차수민에게 맞아 본 적 없는 놈이 퍼뜨린 소문이었다. 그 살기 넘치는 눈동자를 마주한다면 누구도 감히 그런 상상조차 못 할걸.
수민의 성격에 그런 거래를 하느니 차라리 학교에 불을 지르거나 살인청부업자를 불러 원흉을 제거하는 시나리오가 훨씬 어울렸다. 무엇보다도, 누구의 힘을 빌릴 것도 없이 실눈 선배는 차수민의 한주먹감이었다.
……그래도 요새 부쩍 그 의문의 전학생과 자주 어울리는 모습을 보이긴 했다. 보려고 본 건 아니고, 자꾸 두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떡대는 차수민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 따라오곤 했고 제지당하면 먼발치에서라도 지켜보려고 했다. 은밀한 곳에 단둘이 있던 장면을 목격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수민은 들키면 큰일이라도 나는 듯 신경을 예민하게 곤두세우곤 했다. 떡대가 오고 나서부터 차수민은 예민하기가 극에 달했다. 그건 사실이었다.
그래서 나는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어쩐지 마음 한쪽이 쓰린 결론이었다.
“웬 떡볶이야. 데이트 간 거 아니었어?”
날 세워 말하는 수민은 어투와는 다르게 갑작스러운 떡볶이 배달에 매우 만족스러워 보였다. 내가 너를 잘 알지.
“그냥. 생각나서 사 왔어.”
그의 얼굴이 밝아졌다. 내게 손을 뻗는 그에게서 몸을 뺀 채 비닐 봉다리를 등 뒤로 숨겼다.
“뭐야, 빨리 내놔.”
“그 전에 물어볼 게 있어서.”
“뭔데.”
그의 눈이 새초롬해졌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너 전학생 좋아하지.”
“……뭐?”
나는 굳어 버린 수민의 얼굴을 빗겨 바라보며 걸어오면서 정리했던 말을 띄엄띄엄 내뱉었다. 몇 번이고 연습했는데 땀이 삐질 흐르며 차수민의 눈을 피하고 있었다.
“사실 분식집에서 말도 안 되는 소문을 들었어. 알고 있는진 모르겠지만 학교에 이상한 소문이 도나 보더라고. 너랑 전학생이랑 그… 그런 관계라 그 대가로 전학생이 널 보호해 준다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수민은 말이 없었다. 어둠 속에 오롯이 빛나는 가로등의 노르스름한 불빛만이 비틀리는 수민의 입매를 보여 주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말을 이었다.
“나는 물론 그게 사실이 아니란 걸 알아. 내가 널 모르냐. 넌 보호가 필요 없는 놈이잖아. 그냥 둘이 예쁘게 만나는 걸 텐데 별 이상한 소문이. 내가 최대한 막아 보긴 할 건데.”
“…….”
“그, 그래도 노파심에 하는 말인데 사귀는 사이라 해도 학교에서는 안 만나는 편이 좋을 것 같아. 잠깐! 오해하지 말고 들어. 친구로서 걱정되니까 하는 말이야. 사실이 아니라 해도 소문이 흉흉하게 나 있으니까…….”
그는 한동안 망부석처럼 서 있었다. 괜히 말 꺼냈나. 걱정돼서 말한 건데. 나는 조바심에 아무 말이나 주워 삼키기 시작했다.
“나는 편견 없으니까 혹시 고민거리가 있다면 나한테 말해도 돼. 그러니까, 의지해도 된다고…….”
“하.”
침묵을 깨고 돌덩이 같은 한숨이 날아들었다. 그는 나에게 와 보라고 까닥까닥 손짓했다. 나는 맞을까 무서워 눈을 꽉 감고 다가갔다.
“잠깐만 기다려 봐.”
수민은 폰을 꺼내 들었다. 통화음이 가고 저음의 상대가 무어라 말하는 게 들렸다.
“지금 당장 튀어 와.”
그리고 정확히 5분 후, 누군가가 헉헉대며 뛰어왔다. 바로 전학생이었다. 우리는 어색하게 삼자대면을 해야 했다. 남자 친구 소개해 주려는 건가? 아, 안녕. 머쓱하게 인사를 하려는데 수민이 끼어들었다.
“김정현. 잘 봐.”
“어, 뭘?”
“어금니 악물어.”
그리고 말릴 틈도 없이 떡대를 쥐어 패기 시작했다. 엄청난 신장 차이는 어릴 때 성경학교에서 배웠던 다윗과 골리앗을 떠오르게 했다. 다윗이 골리앗을 맨손으로 줘 패고 있었다. 무기 하나 없이.
한적한 주택가에 북어 패는 소리가 울렸다. 그 잔인한 장면에 손에서 힘이 풀렸다. 떡볶이 봉다리가 바닥을 뒹굴었다. 초여름의 시작점에서 청초한 밤공기가 무참히 아스러지고 있었다.
수민은 이마에 땀을 닦으며 물었다. 바닥에는 넉 다운 된 떡대가 널브러져 있었다.
“어때. 좀 대답이 됐어?”
나는 말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흠씬 두들겨 맞은 떡대가 더 이상 학교에 나오지 못하게 된 이후로 수민은 제 페이스를 되찾았다. 한결 가벼워진 모습이었다.
“그러니까 따까리 같은 거였다고. 너처럼. 알겠어? 누가 누굴 좋아해? 돌았나. 한 번만 더 그딴 오해 했다간 인생 종 칠 줄 알아라.”
“정말 미안…….”
이해는 잘 가지 않았지만 나를 거스르면 너도 그 꼴 날 줄 알라는 협박으로 들렸기 때문에 강제로 납득했다. 하긴. 감정이 싹트는 사이라면 사이코패스라 해도 사람을 그 지경까지 만들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대체 어떤 계약을 맺었길래 죽이 되도록 맞으면서도 억 소리 한번 내지 않았던 걸까.
돌아온 차수민에 적응하고 말고 할 것 없이 기말고사가 어수선한 분위기를 삼키며 파도처럼 덮쳐 왔다.
썰물이 빠져나간 자리에는 쨍한 햇빛이 비치었다. 복도마다 뒤엉켜 자라던 소문들도 어느새 강렬한 태양에 말라 비틀어져 가루가 되었다. 바람을 타고 날아가는 잿가루 사이로 매미의 울음이 잔잔히 메아리쳤다. 여름이 오고 있었다.
고등학생이 되고 맞는 첫 방학의 첫날을 수민의 집에서 보내게 된 건 단순히 그의 고집이었는지, 아니면 새로 발매된 게임 시디를 사 놨다는 말에 영혼의 이끌림을 받은 나의 생떼였는지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다만 블라인드 틈으로 비집고 떨어지던 햇살과 땀에 젖은 교복 셔츠의 감촉이 생생할 뿐이다. 해가 쨍쨍할 때의 하교는 처음이라 약간 들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확실한 기억의 단편에서 차수민은 하늘색 아이스 바를 물고 있었다.
“더워.”
에어컨을 작동시키며 수민이 말했다. 셔츠 깃을 펄럭거리며 부채질을 하자 쇄골이 드러났다 사라졌다. 나는 이미 상의를 벗어 들었다.
“티셔츠 없어? 좀 큰 거.”
“아주 제집처럼 요구하네. 옷장 열어 봐.”
그중 가장 헐렁해 보이는 반팔 티를 집어 들었다. 희미하게 차수민에게서 자주 맡았던 섬유유연제 향기가 났다.
“세상에. 옷 취향 한번 살벌하다. 있잖아, 대체 셔츠에 금박이 왜 들어가 있어? 밤마다 몰래 행사 나가? 셔츠 패턴은 왜 죄다 화려한 건데? 이건 뭐야, 호랑이……? 옷장만 보면 잘나가는 트로트 가수인 줄 알겠어.”
“……내가 산 적 없어. 선물 받은 거야.”
“나랑 쇼핑 한번 가자. 창피해서 같이 못 다니겠다.”
수민은 말없이 아이스크림만 쪽쪽 빨았다. 딱히 대꾸할 거리가 없을 땐 못 들은 척 딴청을 피우는 것이 차수민의 못된 버릇이었다.
차수민 사이즈의 꽉 끼는 티셔츠를 입고 주방을 누비며 사 놓고 손도 대지 않아 썩어 가는 식재료들을 수집했다. 내 집처럼 드나들었더니 어디에 뭐가 있는지는 척하면 척이었다. 집주인은 소파 위에서 녹아내려 움직일 생각을 않고 있었다.
“대파 어딨어?”
“베란다에. 뭐 하게.”
“먹지도 않으면서 재료는 다 사다 놓네. 파전 부치려고.”
“비도 안 오는데 파전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 수민은 막걸리가 있나, 하며 찬장을 뒤지고 있었다.
“기대해도 좋아. 울 엄마 레시피야. 도연이도 맛있다고 칭찬했어.”
“걔네 집 갔었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멈추었다. 주방 벽면의 작은 창으로 쏟아지는 햇빛 때문에 수민의 눈동자가 투명한 갈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아니. 만들어서 갖다줬는데. 현관까진 갔었다.”
그럼 그렇지, 맥 빠진 얼굴로 한심하게 날 쳐다봐 준 후 시리얼을 챙겨 홀랑 거실로 가 버렸다. 어쩐지 그 모습이 얄미워 뒷모습에 대고 소리쳤다.
“그래도 이번에 1박 2일 놀러 가기로 했거든!”
그 소리에 차수민은 벌떡 일어나 다시 주방으로 다가왔다. 억울했다. 내가 여자 친구랑 여행 간다는 사실이 그렇게 안 믿겨?
“어디로? 둘이서?”
“그럼 둘이 가지 누구랑 가. 방학이고 하니까 바닷가나 다녀올까 해. 일단은 강릉이 후보진데 추천해 줄 곳 있어? 너 어릴 때 부산 살았다 했지. 부산은 어때.”
“신났네. 김정현.”
뭐가 또 불만인지 나만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미묘하게 뚱한 표정이었다. 또 뭔데. 친구가 아니라 요구가 많은 동생이 생긴 것 같았다. 우리 누나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그래도 난 단순해서 다루기 쉬웠을 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누나의 극악무도한 심부름을 한 기억밖에 나지 않았다.
부침 반죽을 열기가 올라오는 프라이팬 위에 떨구었다. 앞뒤로 익혀 내니 그럴듯한 요리가 완성되었다.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고 컴퓨터 게임이나 하고 있는 그 앞에 가져다주었다. 몇 조각 우물거리더니 스리슬쩍 거실 테이블 앞에 엉덩이를 붙였다. 맛있기는 한가 보지.
“넌 방학 때 뭐 계획 없어?”
“정현아. 계획은 네가 짜야 하지 않겠니. 평소보다 성적 좀 잘 나왔다고 머리에 놀 생각만 가득한 것 같은데 그러다가 후회한다. 그래 봤자 바닥이긴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래서 아니꼬웠다. 눈을 흘기며 간장 종지를 내 쪽으로 옮기자 수민의 젓가락이 다시 종지를 가운데로 옮겼다.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본가에 좀 다녀오려고. 금방은 말고 8월쯤에.”
집안 사정이 뭔지 아무리 캐물어도 잘 해결됐다고 일갈하던 그였다. 과연 진실인지 알 수 없었으나 분위기를 일그러뜨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가볍게 물었다.
“놀러 가도 돼?”
“나중에.”
“그래. 아. 우리 엄마가 너 왜 요즘은 안 오냐고 서운해하더라. 다음 주 중엔 우리 집 갈래?”
“뭐, 한번 친히 행차해 줄게. 너 말고 어머님이랑 뽀삐 보러 갈 거야.”
뽀삐는 우리 집 말티즈 이름이었다. 고양잇과에 속할 것 같은 수민은 의외로 강아지를 좋아했다. 이유를 물어보니 대수롭지 않은 어투로 개들은 충성하니까. 한마디를 던지더랬다. 흰 강아지를 끌어안고 쓰다듬는 모습이 제법 어울려 뽀삐를 산책시킬 땐 일부러 그의 오피스텔 앞을 지나쳐 걷기도 했다.
반쯤 해치운 파전을 팽개쳐 두고 누군가 콘솔 옆 게임기를 꺼냈다.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말없이 게임에 몰두했다. 전투기가 새파란 상공을 누볐다. 살구 알 같은 포탄이 씨처럼 뿌려졌다. 수민의 엄호에도 나는 자꾸만 죽었다.
“아씨. 게임 더럽게 못 하네.”
풀이 죽어 다시 마리오로 돌아갔다가 스트리트 파이터 화면이 떴다가 피파의 초록 잔디밭까지 펼쳐졌지만 모두 다 잠시뿐이었다. 여름의 힘인지 몸이 녹진해졌다. 쏟아지는 디지털 세계는 무료했다. 우리는 조이스틱을 던져 버렸다.
“심심해. 남자 둘이서 뭐 해.”
“피차 같은 마음이거든. 어디 재밌는 거 안 하나.”
TV 채널을 돌렸다. 평일 저녁이라 그런지 이렇다 할 프로가 없었다. 시시한 농담 따먹기 같은 채널들이 짧게 머무르다 사라졌다. 알록달록 색을 바꿔 가는 TV 화면이 일순간 살색으로 가득 찼다.
“어이쿠.”
당황한 나머지 리모컨을 떨어뜨렸다. 화면에서는 나체의 남녀가 서로 껴안고 뒹굴고 있었다.
“돌, 돌리자.”
“왜. 재밌는데.”
그의 발에 멀리 밀려 간 리모컨이 야속했다. 나는 억지로 앉아 배우들의 섹스 장면을 감상해야 했다. 차수민이 어쩔 줄 몰라 하는 내 모습을 보며 빙글거렸다.
“네가 초등학생이냐. 야동 첨 봐?”
“그런 건 아닌데. 너는 빠삭한 애늙은이처럼 말한다? 야동 박사님 좋으시겠어요.”
수민이 그 말에 낄낄 웃었다. 화면 속 둘의 행위는 점차 정도를 더해 가고 있었다. 그 장면을 무심히 보고 있던 수민이 TV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너 아다냐?”
풉. 나는 홧홧한 목구멍을 축이기 위해 마시던 맥주를 뱉을 뻔했다.
“아다냐고.”
“그런 걸 왜 물어?”
“아다네. 그럼 그렇지. 너답다 김정현. 여자 친구도 있으면서 이 나이 먹도록 뭐 했어.”
나는 순간 내 가치관에 문제가 있는지 깊은 의심을 해야 했다.
“미성년자가 경험 있는 게 더 이상하지 않아?”
차수민이 깔깔 웃어 댔다.
“크크큭. 귀엽다. 똥통 학군 다니면서 제법 귀여운 생각을 하네. 네 친구들 다 한 번씩은 자 봤을걸. 너만 빼고. 여친이 라면 먹고 가라 그런 적 없어?”
생각해 보니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중학생 때 일인데. 그렇게 까졌었다고? 세상이 말세다.
“그러는 너는 경험 있어?”
설마 하고 던진 말에 차수민이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받아쳐 왔다.
“당연하지. 날 뭘로 보고. 말해 줄까. 아다 김정현. 궁금하지?”
나는 어느새 그의 페이스에 말려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여기 오기 전에 일본 살았거든. 옆집 누나랑 친하게 지냈었는데, 졸업했다고 축하 파티하자고 오라는 거야. 누나 집으로. 방문을 여는데 딱 어슴푸레 실루엣만 보이는 거야. 나를 기다리고 있었나 봐. 희미한 무드등 하나 켜져 있고 향초가 타들어 가는데…… 방문 앞에서 고민했지. 들어갈까, 말까.”
“그리고……?”
“뭘 그리고야. 너 키스는 제대로 해 봤냐?”
그는 말을 하다 말고 내 하체를 곁눈질했다.
“으휴. 김정현. 아다 티를 내요. 너 여친이랑 여행 간다며. 단둘이 여행이면 뻔하잖아. 혹시 걔가 신호라도 보내오면 어떡하려 그래.”
“뭘 어떡해…….”
“요즘 여자애들은 너무 서툰 것도 싫어해. 한쪽이 서툴면 상대는 누워서 연기나 하는 거잖아. 너는 말이지, 충분히 그럴 것 같아.”
그의 말에 갑작스레 불안감이 엄습했다. 살면서 한 번도 이런 문제에 대해 고민하지 않았는데 분위기 잡고 말하니 괜히 뒤처진 것 같고 초조해졌다.
“그럼 어떡하지. 야동 많이 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나?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는 법이잖아.”
“지랄하고 있네. 주둥이 가져와 봐.”
“뭐……?”
“입술 가져와 보라고.”
그는 아무렇지 않게 내 얼굴을 끌어당겼다. 차수민의 살짝 차가운 손가락이 뺨에 닿자 부드러운 촉감에 몸이 움찔했다. 나는 붉어진 얼굴로 소리쳤다.
“뭐, 뭐 하는 거야……?”
“뭘 봐야 가르쳐 줄 거 아니야. 아 짜증 나. 비싸게 구네. 키스도 제대로 못해 봤다며.”
그래서 뭘 어쩌자고? 말똥말똥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수민이 킥 웃음을 터뜨렸다.
“이 형아가 기초부터 가르쳐 준다고.”
수민은 내가 가타부타 말하기도 전에 내 입에 본인의 입술을 포갰다. 나는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차수민에게 삼켜졌다. 얼굴을 부여잡은 손이 강하게 뺨을 눌러 입을 열게 만들었다. 매끈하고 촉촉한 혀가 얼어붙어 있는 내 혀를 잡아끌었다. 블랙홀 같았다. 내 영혼까지 빨아먹는 블랙홀. 잠깐 동안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차수민은 뻣뻣하게 굳어 있는 내 어깨를 밀어 넘어뜨렸다. 소파 위 나뒹구는 내 위에 올라탄 모양새로 촙촙 맛있게도 혀를 굴리고 있었다. 나는 멀뚱히 누워 그런 그를 받아 냈다. 작업에 집중하는 장인처럼 그는 입을 맞춰 왔다.
세상이 정지했다. 오로지 나와 걔, 두 사람만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머리가 새하얘졌다. 숨이 가빠 왔다. 호흡을 멈춘 채 질척하고 야하게 울리는 살이 부딪히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뎅- 뎅- 머릿속에 징이 울렸다. 어디다 두어야 할지 몰라 허공을 방황하는 내 두 손이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눈을 꾹 감았다. 현실 인지가 잘되지 않고 있었다.
그가 잠시 입술을 떼 냈다.
“너 숨은 안 쉬냐?”
“허, 허억. 헉.”
그제야 가쁜 숨을 토해 낼 수 있었다. 내가 숨을 참고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얼이 빠져 천장만 바라보는 나를 한심하게 내려다본 차수민이 끌끌 혀를 찼다.
“이 새끼 진짜 처음인가 보네. 뽀뽀도 안 해 본 건 아니지? 네 말로는 인기 좀 있었다면서요.”
“어어어…… 어…….”
“야. 지금 확실히 말해. 더 나가, 아니면 여기서 그만둘래.”
나는 두 눈만 깜빡거렸다.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긴 앞머리가 그의 두 눈을 덮어 나는 차수민의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대신 살짝 부어올라 더 말랑해 보이는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번들번들 젖어 있는 내 입술을 훔쳐 주었다. 질질 흐르던 타액을 닦았다.
“더 가르쳐 주냐고. 진도를 빼려고 해도 수강생이 이렇게 얼이 나가 있으니. 내가 나쁜 놈이 된 것 같고. 근데 김정현, 이건 알아 둬.”
차수민이 고개를 숙여 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목덜미에 소름이 오소소 돋을 만큼 작고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이따위 키스로는 이도연이든 다른 여자애든 절대 만족시킬 수 없을걸. 네 겉모습에 홀려 다가온 여자애들이 허술하고 리드 하나 못하는 네 멍청한 실체에 얼마나 실망할까…….”
동공이 흔들렸다. 내 시선은 악마처럼 올라가는 차수민의 입꼬리만 따라갈 따름이었다.
“그건 싫지?”
그의 말에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웃음소리가 귓바퀴에 닿아 부서졌다. 간지러워. 온몸이 간지러웠다. 그러나 몸을 일으킬 수 없었다. 거미줄에 걸려 버린 나비처럼 꼼짝 않고 누워 되바라진 소리를 잘도 하는 차수민에게서 눈을 뗄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그래. 잘 생각했어. 웬만한 전희는 키스부터 시작되니까 잘 배워 두면 후회는 안 할 거야…….”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다시 입술에 폭신한 것이 닿았다 떨어졌다. 혀로 살살 주름 사이를 긁어내더니 앞니를 핥아 온다. 이 미친놈. 나는 달아오르는 열기를 식히려고 애를 썼다. 이 새끼는 어디서 이런 걸 배워 온 거야?
“네가 리드해.”
“어엉……?”
“그럼 내가 계속하리? 네 여친이랑 내가 키스해?”
아아. 알겠어.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두 귀를 감싸 당겨 왔다. 어쩐지 빨갛게 익은 귓불이 뜨거웠다. 원래 빨갰나? 긴장했다기엔 차수민의 얼굴은 평온하기 짝이 없었다. 인형 같은 얼굴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사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이끄는 대로 눈앞의 입술에 입을 맞출 뿐이다.
친구끼리 대딸 한다는 건 들어 봤고 뭣 모르는 중학생 때 실제로 잠깐 해 본 경험도 있다. 그런데 키스는. 이런 것도 같이하나? 끈적하게 녹아내린 뇌로 이 상황을 판단해 보려 했으나 눈앞에 펼쳐진 음습하고 깊은 눈동자에 이내 그 시도는 바스라졌다.
나는 차수민의 빨갛고 말랑말랑한 입술에 키스했다. 포도알 같은 그 입술.
입술을 가르고 혀를 넣었다. 방금 전 차수민이 했던 대로였다. 수민은 정말로 내 스킨십 스킬을 개발해 주기라도 할 것처럼 이리저리 혀를 굴리며 리드를 도와주었다.
그래, 이건 일종의 강의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수강생 김정현은 차수민의 작고 고른 이빨 하나하나 훑어가며 탐색했다. 혀 기둥이 뭉근하게 얽히고 타액이 섞였다. 살짝 눈을 뜨니 차수민의 긴 속눈썹이 보였다. 선생님은 눈을 감은 채 누구보다 진지하게 강의에 임하고 있었다.
한참을 촙촙거리다가 다시 입술을 떼어 냈을 때, 은색실이 반짝이며 두 입술을 이었다. 나는 그가 했던 것처럼, 엄지를 들어 타액으로 점철된 그의 입술을 닦아 주었다.
“하아.”
“……공부는 못하면서 이런 건 잘 배우네.”
“나…… 잘해?”
내 말에 차수민은 대답 대신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화장실로 들어갔다. 정말 비즈니스적인 태도였다.
홀로 남겨진 나는 머쓱하게 부어오른 입술만 만지작거렸다. 그래, 차라리 이렇게 나와 주니까 민망함은 없었다. 차수민 말대로 조금 감을 잡은 것 같기도 하고. 덕분에 여행 가서 창피당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생각보다 아는 게 많은 놈이었다. 나중에 다른 것도 물어봐야지. 친구 좋단 게 이런 거 아니겠는가. 잠깐 굳었던 뇌를 다시 살살 녹이며 몸을 일으키던 나는 어느새 묵직해져 있는 나의 것을 발견했다.
“어.”
이게 왜……. 나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이게 왜, 누굴 상대로. 미쳤나. 남의 집에서 무슨 추태야. 빨개진 얼굴로 주위를 살폈다. 화장실에 들어간 차수민은 금방 나올 것 같지 않았지만 불안했다. 이 모습을 들키면 강냉이 두어 개쯤은 털릴지도 모르겠다.
“첫 키스라 그래. 처음…이라서.”
나는 중얼거리며 싱크대로 가 찬물을 얼굴에 끼얹었다. 키스 하나로 몸이 달아오르다니. 누가 보면 차수민한테 발정이라도 한 줄 알겠다.
민망함에 고개를 빼 화장실을 살폈다. 물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김정현, 한심한 새끼.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물기를 털어 냈다.
그 이후로 나와 차수민은 부쩍 가까워졌다. 나만의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전이 피상적인 친구 관계였다면 이제는 영혼을 나눈 의형제랄까. 야동 시디 돌려 보고 대딸 치는 놈들의 뇌 구조가 조금은 이해가 되는 상황이었다.
그가 몸소 가르쳐 준 키스의 미학은 결국 사용하지 못했다. 여행 가기로 한 며칠 전, 도연으로부터 문자 한 통을 받았기 때문이다.
우리 헤어지자.
뭐??? 갑자기 왜?
아무리 전화를 걸어도 통화음만 울릴 뿐 받지 않았다. 착신 불가 안내 메시지가 흘러나오고 얼마 안 있어 짧은 진동이 왔다.
잘 지내.
그때부터였을까. 이유도 모르고 잠수 이별 당하는 나날이 시작되었던 때가. 분명히 며칠 전 놀이공원에서도 불편한 내색 하나 없었고 ‘담에 또 오자’고 웃으며 말했던 도연이었다. 그때 산 너구리 키링이 아직도 내 핸드폰에 달랑거리고 있었다. 아무리 눈치가 없는 나라도 그 정도는 안다. 우리 사이에 문제는 없었다. 대체 왜?
“네가 뭘 잘못했었나 보지.”
“잘못한 적 없어. 아무 문제 없었다니까? 멀쩡히 웃으면서 인사했었다고!”
“잘못을 알면 너네가 헤어졌겠냐? 모르니까 헤어지게 된 거지.”
어쩐지 철학적인 말이었다.
“그러니까 네 말은 내가 개새끼라는 거지…….”
그 말에 부정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문 수민이 아래로 시선을 돌렸다. 난간 아래 빽빽한 건물들이 몸을 비틀며 옹기종기 세워져 있었다. 동네의 작은 풍경 위로 해가 뉘엿뉘엿 서산을 향해 굴러가고 있었다. 어쩐지 세상이 미니어처같이 느껴졌다.
“그래도 오래오래 기억되겠네.”
차수민이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위로랍시고 던진 말 맞아? 나는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맘에 안 들어서 이별 통보 날린 놈을 왜 기억해.”
“아냐. 누가 그러더라고. 좋은 사람은 문득문득 그리워지는 반면에 개새끼는 평생 선명하게 기억한다고.”
“누가 그랬는데?”
“일본 누나.”
아, 네 동정을 빼앗아 갔다던.
“전혀 개새끼 될 만한 일을 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도연이는 대체 뭐 때문에 이별을 고했을까? 센치해져 눈앞을 가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니 가만히 나를 응시하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가 물었다. 어쩐지 은근한 목소리였다.
“너도 그래? 똥차는 선명하게 기억나? 왜, 헤어질 때 학을 떼게 만든 애들 있잖아.”
“글쎄. 여자도 똥차라 부를 수 있나……. 애초에 그럴 만한 애는 안 만난 거 같은데. 그래도 안 좋게 끝난 애들은 꿈에도 나오고 그랬던 것 같긴 해.”
나는 중학생 때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사랑이라 부르기에는 많이 부족한 호감의 연애만 해 봐서인지 부정적인 감정이 주는 날카로움이 더 선명했다.
“얼굴도 선명히 기억나?”
“어어, 뭐 그렇지? 대화도 드문드문 기억나네. 안 좋은 기억이 이래서 무서워.”
기억을 더듬으면 바로 지천에 있긴 했다. 안 좋은 기억일수록 선명하게. 뭐, 중학생 때라 해 봤자 얼마 안 됐으니까. 갑자기 옆에서 짝, 깨달음의 박수가 울렸다.
“그럼 그 사람 기억에 오래오래 뚜렷하게 남고 싶다면 개새끼가 되면 되는 거잖아?”
‘뭐야, 쉽네’ 하며 세기의 발견이라도 한 양 입꼬리를 끌어 올리는 수민은 언뜻 보기에도 무서웠다. 연애는 그런 게 아니라고, 관계를 계속 이어 가려면 그따위 정신이면 안 된다 아무리 말해도 듣지 않았다. 나는 그를 설득하기를 포기하고 혀를 찼다.
“섹스에 있어서는 닳고 닳은 척하더니 아무것도 모르네, 이거.”
“아니 사랑은 차치하고, 그냥 그 사람 기억에 길게 남고 싶을 때가 있잖아. 예를 들어,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라든지.”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바람에 살랑이는 머리칼이 노을을 배경으로 청량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어느새 흰 얼굴이 햇빛에 노랗게 물들었다. 표정은 태연했다.
그의 섹스하는 모습은 떠올릴 수 있어도 누군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모습은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에 더 놀라웠다. 너한테 그런 사람이 있어? 감정이라곤 개나 줘 버린 차수민이. 나는 머뭇거리며 말했다.
“근데 당하는 사람 입장에선 이기적으로 느껴지지 않을까?”
그가 씩 웃었다.
“거기까진 내 알 바 아니지.”
그래…… 차수민스럽다. 그래도 처음의 악귀 같은 이미지가 많이 중화되어 지옥을 지키는 대 악마에서 이제는 그가 귀여운 소악마 정도로 느껴졌다. 그냥 얘는 감정 표현에 서툰 평범한 나의 또래가 아닐까? 우정이란 이상한 것이었다. 알고 싶지도 않던 상대를 이해하려 들게 만들었다.
뉘엿한 햇빛 탓일까. 어딘가 사근사근해진 차수민이 말했다.
“야. 그럼 우리 바다나 갈까. 너 전 여친이랑 여행 깨졌으니까 내가 특별히 위로해 줄게.”
“됐어. 사내놈들끼리. 아, 숙소 예약해 놓은 거 아직 취소 안 하기는 했다.”
“그럼 딱 됐네. 가자, 바다.”
그러나 차수민에 대한 나의 이해도는 현저히 떨어지는 수준이었음을 나는 그 여행을 통해서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다.
✲ ✲ ✲
그날은 더럽게 날씨가 화창했다. 여자 친구와 여행을 가기에 딱 좋은 날씨였다. 상대가 사내자식이라는 사실은 영 탐탁지 않았지만 예약해 둔 숙소와 교통편이 아까워 승낙해 버렸다. 방학인데 집에서 바닥 파고 있느니 차라리 기분 전환이라도 하자는 마음이었다.
막상 도착하니 나쁘지 않은 선택이란 생각이 들었다. 해운대는 핫했다.
“야. 이왕 이렇게 된 거 이따가 수변공원에서 헌팅이나 할래. 2 대 2로.”
“여자밖에 모르지. 헤어진 지 얼마나 지났다고. 그 전에 잠깐 갈 곳이 있어.”
목적지도 모른 채 한참 택시를 타고 도착한 그곳은 부둣가가 보이는 작은 동네였다. 곳곳에 수산물 시장도 있고 건물들은 물때 묻어 짭조름한 소금 내가 났다. 낡은 상가마다 잡상인들이 손님 모으기에 한창이었다.
“회 먹으러 온 거야?”
외진 곳이니 분명 맛집이리라. 그러나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여기 내가 어릴 때 잠깐 머물렀던 곳이야.”
그랬구나. 그래서 따라오겠다고 했던 거구나. 짜식, 의외의 면이 있네. 어릴 적 추억의 조각들을 줍기 위해 수줍게 부산에 발을 내밀었을 그를 생각하니 어쩐지 찡해졌다. 합심해서 함께 지도를 찾았다.
“여기다. 많이 달라졌네.”
수민이 멈춰 선 곳은 비린내 나는 5층짜리 상가였다. 1층에는 매운탕 집과 횟집들이 즐비해 있었고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는 일수업자들의 스티커가 여기저기 붙어 있었다.
“영화에서 많이 본 분위기다 그치?”
그는 물어 오는 내 말을 가볍게 무시했다. 차수민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한 층 더 올라가더니 내게 물어 왔다.
“너 운동화 신었지?”
“어. 근데 왜?”
내 신발을 확인한 그는 사무실의 입구로 보이는 불투명한 유리문을 세차게 밀었다. 문 앞에 서 있던 남자가 억 소리를 내며 밀려 나갔다. 나는 펼쳐진 광경에 그만 말을 잃었다.
사무실 안은 뿌연 담배 연기로 가득 찬 상태였고 양복을 입은 장정들은 하나같이 험악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넘어질 뻔한 남자가 내 멱살을 잡아 올렸다. 그의 얼굴엔 선명한 칼자국이 나 있었다.
“니 뭔데. 죽고 싶나.”
제가 아니고 얘가 밀었는데요……. 억울하게 모가지가 잡힌 나를 뒤로하고 수민이 태연한 얼굴로 저벅저벅 제 발로 조폭 소굴에 걸어 들어갔다. 편안하게 구석에 놓인 소파에 걸터앉는 그를 나와 사내들은 넋을 잃고 쳐다보고 있었다. 저게 지금 미쳤나.
같은 생각이었는지 그중 정신을 차린 하나가 말했다.
“꼬맹아. 길을 잘못 든 모양인데 여기 느그들이 올 만한 데가 아니거든? 좋은 말로 할 때 나가는 게 좋을 거야.”
“이철호 만나러 왔는데. 여기 맞을걸?”
가볍게 내뱉은 성명에 주위의 공기가 달라졌다. 실실 웃던 놈들도 얼굴 근육을 굳힌 채 우리를 노려보았다.
“니 누구고.”
“어디서 꼬맹이가 형님 이름을 함부로 부르노!”
화가 많아 보이는 아저씨가 차수민의 멱살을 잡아 눌렀다. 몸집이 작은 소년과 험상궂은 떡대는 체급 차이가 어마어마했다. 나는 그를 구하기 위해 몸을 비틀었으나 벽처럼 서 있는 사내의 몸에 막혀 벽에 온몸을 붙인 채 숨만 쉬어야 했다. 차수민은 수그러들지 않고 목이 졸린 목소리로 말했다.
“나 고두현이 아들. 혹시 할아범 죽었어? 할아범 만나러 온 건데.”
그의 말에 사내가 당황한 얼굴로 손을 뗐다. 주위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고두현? 고두현이라면 그 고두현?”
“오랜만에 왔더니 되게 많이 바뀌었네. 서운하다. 할아범도 없고. 요 앞에 대박수산도 사라졌더라. 아쉽지만 이 바닥 순리니까. 위에서 잘못하면 바로 나가리 될 수밖에.”
그 틈을 타 몸을 일으킨 수민이 주름진 카라 깃을 탁탁 털며 말했다.
“대박수산 꼴 나지 않으려면 정신머리 박힌 사장이 운영해야 하지 않을까? 고두현 씨가 그러는데, 부산 말이야. 버리기는 아까울 것 같대. 우리도 갑자기 일이 생겨서 어쩔 수가 없네. 아직 살아 있으면 할아범한테 꼭 좀 전해 줘.”
눈만 끔뻑거리며 그 문장의 의미를 해석하고 있던 사내들이 이내 숨은 뜻을 캐치하고 각목과 목검을 움켜쥐었다. 그 틈에서 언뜻 번쩍거리는 사시미 칼도 본 것 같았다.
그러나 이미 수민은 날다람쥐처럼 뛰어올라 내 손목을 잡고 달리고 있었다. 계단을 두세 칸씩 밟아 내려갔다. 등 뒤로 욕설과 함께 사내들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잡힐 듯 말 듯 한 그 거리를 느끼며 차수민은 큭큭 웃고 있었다. 마치 이 스릴을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미쳤다. 나도 미치고 얘도 미쳤다. 아니 애초에 미친 애를 정상이라 믿어 온 내가 제일 미쳤다.
학교에서 으스대는 양아치들과는 질이 달랐다. 저들은 조폭이었다. 폭력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놈들이란 말이다. 잡히면 말 그대로 죽을지도 몰랐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소금 내 나는 골목길과 뒤통수로 날아드는 고함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비록 우리는 배우가 아니기에 잡히면 바로 시멘트 통에 담가지겠지만.
해맑은 얼굴로 이리저리 골목길을 누비는 수민을 따라 달리다 보니 어느새 추격은 멈춰 있었다.
“하아. 못 따라오네. 젊음이 좋아, 그치.”
“허억, 헉. 너 돌았어?!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야?”
“벨튀. 예전엔 할아범이 지팡이 들고 쫓아 나왔었는데. 그땐 다 기울어 가는 인력 사무소였거든. 많이 컸다. 세월 참.”
추억에 젖어 얘기하는 그의 모습은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어린 시절 놀이터에서의 인연이라도 얘기하는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추억 필터를 씌워도 그가 내뱉는 단어들은 전혀 아련하거나 아름답지 않았다.
“우리 죽을 뻔했어, 알아?”
“사람이 그렇게 쉽게 죽나…….”
“야!”
“너무 걱정 마. 잘 피해 다니면 되잖아. 얼굴 펴고, 응?”
말도 안 되는 위로를 하며 태평스럽게 횟집에 들어가 주문까지 마쳤다. 반면에 나는 회가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꾸역꾸역 생선살을 씹고 있는데 뒤쪽에서 심상치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두현이 아들놈이 왔다고?”
“미쳤는지 애만 보냈다더라고. 잡히면 작살날 텐데 말이지.”
“잡아야제. 이 기회에 잘난 면상이나 함 보자고.”
화제의 주인공인 차수민은 귓구멍이 막혔는지 매운탕까지 주문하고 있었다. 부산 조폭 전부가 수민의 아버지를 아는 것 같았다. 그렇게 안 봤는데 돈 떼먹고 나르셨나. 그러나 아무리 상상해도 호인 상의 그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상인들을 등쳐 먹는 장면은 떠오르지 않았다.
횟집에서 나온 뒤로는 해 질 때까지 숨어 다녔다. 강제적인 숨바꼭질에 여행이 아니라 스릴러를 찍는 기분이었다.
“나가자. 수변공원 가고 싶다며.”
“지금 이런 상황에서 어딜 가! 사람 약 올려?”
“어두워서 괜찮아. 기껏 왔는데 숙소에만 있을 거야?”
하긴, 언제 또 이렇게 놀러 오겠어. 단순한 김정현의 얇은 귀가 팔랑였다. 목숨 건 추격전은 새까맣게 잊고 어느새 제일 괜찮은 옷으로 갈아입고 한껏 멋을 부린 채 나타난 나를 수민은 한심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우리는 해변을 돌아다니며 장소를 물색했다.
“어려 보이는데 몇 살이야?”
“대, 대학생.”
“얘는 스물둘이고 저는 스무 살이요. 친척이에요.”
거짓말도 제대로 못하는 어리바리한 나와는 달리 차수민은 의외로 이런 데 강했다. 하늘하늘하게 생겨서는 제법 리드도 할 줄 알았다. 나는 어쩐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서 팔을 쓰다듬는 누나의 시선을 애써 외면한 채 맥주만 꿀꺽꿀꺽 마셨다.
하루 종일 긴장한 탓에 허기가 졌다. 왁자지껄한 해변의 분위기와 이마를 쓰다듬어 주는 여름밤의 공기 때문이었을까. 슬슬 취기가 올랐다.
어쩐지 차수민의 시선이 내게 고정되어 있었다. 모두가 취해 가는 술판에서 수민은 홀로 멀쩡한 채 나를 찬찬히 뜯어보고 있었다. 저 새끼는 항상 나를 저딴 눈깔로 보더라. 저보다 몸집 큰 동물을 사냥하는 맹수마냥.
그만 봐. 또라이야. 너 때문에 오늘 고생한 일 생각하면……. 꼬부라진 혀로 더듬더듬 말을 이어도 그의 시선은 뚜렷했다.
“김정현. 오늘 일 재밌었어?”
“재밌, 재밌었겠냐? 하루 종일 오지게 뛰기만 했는데.”
“그래? 난 재밌었는데……. 그래도 즐거워해 줘. 우리가 언제 또 같이 이런 델 오겠냐.”
차수민이 술잔을 부딪치며 씨익 웃었다. 벌써 몇 잔째인지, 자꾸만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내게 술잔이 내밀어졌다. 머리를 쓰다듬는 짭짤한 바닷바람에 서서히 의식이 가물거리고 있었다. 생각에 잠긴 듯 먼 바다를 바라보던 수민이 조용히 물었다.
“김정현. 너, 내 삥 뜯었던 거 후회해?”
갑자기 무슨 소리람. 왜 그런 말을 해? 나는 감겨 오는 눈을 껌뻑거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아니 바라보려고 했다. 시각이 사라진 감각 기억엔 그의 킥킥거리는 웃음소리만 간지럽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이왕 후회할 거면 강렬하게 해 주라.”
무슨 또 이해 못할 소리를. 나는 인상을 팍 찌푸렸다. 됐다. 됐어. 내가 너랑 무슨 얘길 하겠어. 힘이 빠져 벌러덩 누워 버렸다. 하루 만에 진이 다 빠진 것 같았다. 따듯한 밤공기가 이불처럼 내려앉았다. 나는 말없이 술잔을 기울이는 차수민의 옆모습을 흘긋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철썩이는 파도 소리에 시야가 점차 흐릿해지며 알코올의 바다로 빠져들었다.
‘너는 나를 어떻게 생각해.’
누군가 물어 왔던 것 같다. 대답은 하지 못했다. 말을 이을 수 없을 정도로 꽐라였으니까. 나는 어렴풋이 귓가에 남은 마지막 한마디를 기억하지 못했다.
‘……기억해 줄 거야?’
그리고 아침. 나는 해변의 모래사장에서 눈을 떴다.
“……어?”
없었다. 핸드폰도 지갑도 신발 한 짝도. 그리고 차수민도.
숙소는 체크아웃이 되어 있었다. 전화를 빌려 통화했으나 엄마는 근무 중이었고 누나는 받지 않았으며 친구들의 번호는 당연히 외우지 않고 있었다.
“허. 허허허허……하하…… 하.”
사람이 어이가 없으면 웃음이 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날 깨달았다. 졸지에 부산에서 미아가 된 나는 땡전 한 푼 없이 홀로 남겨졌다.
일일이 떠올리기도 싫은 기억이다. 정말 개고생을 했다. 히치하이킹을 시도해 겨우 거지꼴로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차수민의 자취방은 깨끗이 비워져 있었다.
그는 떠났다.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나의 열일곱 살 여름 방학은 그렇게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