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권-CHAPTER 1 만나 버렸다 (1/15)

당신의 따까리 1권

CHAPTER 1

만나 버렸다

조금 길이가 붙은 머리카락을 만져 보았다.

“흐음. 세울까……?”

가르마라도 타? 너무 힘줬다고 수군거리는 거 아닌지 몰라. 미리 미용실에서 염색이라도 할 걸 그랬다. 이제 와서 후회해 봤자 늦었다. 왁스도 바르고 스프레이도 뿌리고 별 지랄을 다 하다가 아무래도 무난한 편이 나을 것 같아 화장실로 들어가 머리를 헹궈 냈다.

쓱싹 빗질을 하니 예전과 다를 바 없는 헤어스타일이 나타났다. 첫날이니 이 정도로만 해 두자. 시계를 보니 어느덧 9시 50분이다.

“미쳤네. 지각이다.”

이거 첫날부터 망했다. 나는 서둘러 가방을 들쳐 메고 현관을 나섰다. 거리는 나처럼 급히 발걸음을 재촉하는 몇 명을 빼고 텅 비어 있었다. 오늘따라 정문이 멀게 느껴졌다. 누군가 내 어깨를 퍽 소리 나게 때리기 전까지 나는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길을 빠르게 걸어갔다.

“이게 누구야? 김정현 아냐?”

“어, 현식아!”

“야, 왜 이렇게 오랜만에 보는 것 같냐. 휴가 때 이후로 처음 아냐? 인마, 전역하고 왜 연락 안 했어?”

“나 본가에 있었어. 개강도 얼마 안 남았고 해서 아예 개강하고 보려고 했지. 그리고 폰 새로 해서 연락처가 다 날아갔어. 번호 좀. 아니다. 나 늦었거든?”

전역 후 처음 만나는 동기 녀석 때문에 나도 모르게 신나 지각이란 걸 간과하고 있었다. 핸드폰을 내밀려다가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야, 그럼 이따가 과방에서 번호 좀 줘! 애들한테도 나 왔다고 말해 주고!”

손을 붕붕 흔들며 달렸다. 2년 만의 캠퍼스가 낯설기보단 아늑하게 다가왔다. 흉측한 다비드상, 봄이면 벚꽃이 눈처럼 내리던 정자, 허접한 길냥이 보호소, 쓰러져 가는 매점…… 모두 그 자리에 있었다.

다만 한 가지 달라진 사실은 옆구리가 몹시 시리다는 점일 것이다.

“뭐? 너 헤어졌어?”

“어…….”

“뭐야. 세기의 연인처럼 굴더니.”

5분 늦게 도착한 강의실엔 다행히도 아직 교수가 오지 않았다. 나는 중간 열 구석에서 두리번거리며 나를 찾는 수진에게 다가가 가방을 내려놓았다.

“어쩐지 유난 꼴값을 다 떤다 했다. 그래서 CC 같은 건 할 생각도 말라는 거야. 언제 헤어졌는데? 들어가기 전에? 아님 휴가 나와서?”

“복무 중에……. 편지로…….”

“이별 통보를 편지로 받았다고?”

수진이 깔깔 웃기 시작했다. 꼴좋다. 고무신 한번 제대로 꺾어 신었네.

“야, 근데 그럴 만도 하다. 군대 갈 거면 가기 전에 네가 먼저 헤어져 줬어야지. 편지는 너무했지만.”

“걔가 기다려 준다고 했단 말이야.”

“그걸 믿어? 은근 순진한 면이 있네. 아님 멍청한 건가? 너 왔으니 혜지는 어쩌니. 어쩐지! 걔 요즘 다른 과 전공 듣더라고. 그래도 안 마주치도록 조심해.”

나는 쓰린 마음을 부여잡고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남들한텐 유난 떠는 6개월짜리 CC 커플로 보였을지 모르겠지만 나한텐 참사랑이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간이고 쓸개고 다 빼 줄 것처럼 그녀를 아꼈다. 비록 비참하게 끝을 맺긴 했지만.

강의실 문이 열리고 교수가 들어왔다. 푸근한 인상에 사람 좋아 보이는 할아버지였다. 강의평이 좋을 만했다. 심기만 거스르지 않는다면 출석도 눈감아 주고 점수도 퍼 줄 것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그러나 이 강의를 듣기 위해 어마어마한 경쟁률의 수강 신청을 뚫어야 했던 데에는 강의평 이외의 다른 이유가 있었다.

“[사랑과 인생] 수업은 중간고사를 리포트로 대체합니다. 다들 소문 듣고 오셨겠지만, 이 수업에서는 첫날 정해진 조대로 짝을 지어 한 학기 동안 사랑과 인생에 대해 고찰해 보는 활동을 할 겁니다.”

교수가 말을 이었다.

“좋게 말하면 데이트라 할 수 있고, 나쁘게 말하면 조별 활동이겠죠. 그간 이 수업으로 많은 커플이 탄생해 왔는데요. 아마 여기 있는 남학생들 대부분이 불순한 의도로 수강을 결심한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허허.”

수진이 설마 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맞아.”

차였단 소식을 듣고 선배가 추천해 준 교양이다. 사랑은 사랑으로 잊는 법이라고 했다. 이번에는 과 CC 말고 다른 과 학생을 만나 볼 생각이었다.

“강의 소개는 이만하면 된 것 같군요. 오늘은 첫날이니 오티에서 끝내겠습니다. 마치기 전에 조를 짜야겠지요?”

“너랑 같은 조 되면 망설임 없이 이 강의 드랍할 거야.”

“나야말로.”

눈을 잔뜩 찡그린 채로 건네는 수진의 말에 맞받아쳐 주었다. 내가 이거 들으려고 얼마나 힘들게 애썼는데. 난생처음 매크로란 것도 돌려봤다. 이번 학기의 정수와도 같은 강의다. 누구도 망치게 둘 수는 없었다. 그때, 한 학생이 손을 들었다.

“교수님, 성비가 안 맞는데요. 남자끼리 짝이 될 수도 있나요?”

강의실 전체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남학생들은 허를 찔린 표정이었다.

“강의가 점점 인기가 많아져서 남학생이 매해 늘어나는군요. 아쉽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오늘 조 추첨 결과 보고 수강 취소해도 이해하겠습니다.”

나만 아니면 돼. 나만 아니면 돼…….

염불 외듯 중얼거리는 나를 수진이 벌레 보듯 쳐다봤다. 80명 가까이 듣는 대형 강의에서 운 나쁘게 남자와 짝이 될 확률이 몇이나 될까? 나는 아닐 거야. 나만 아니면 된다.

교수가 앞 번호부터 하나씩 랜덤으로 돌려 정해진 조원을 부르기 시작했다.

“6번 김동석, 52번 한수진.”

수진이 목을 빼 6번을 찾았다. 저 멀리서 뿔테안경을 쓴, 눌어붙은 듯한 얼굴의 남자가 손을 흔들었다.

“씨이발…….”

수진이 욕설을 내뱉었지만 나는 거기에 집중할 수 없었다. 곧 내 이름이 불릴 차례였다.

“……8번 김정현, 30번 이수민.”

“예쓰!”

기쁜 나머지 주먹을 불끈 쥐고 수진을 향해 흔들었다. 해냈다! 봤지? 나는 아닐 거라 했지? 멀리서 교수가 크흠, 헛기침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고개를 돌려 30번, 이수민 씨를 찾는데 눈을 마주쳐 오는 사람이 없었다. 오늘 나오지 않은 건지, 수줍음이 많은 성격인지 보이지 않았다.

“시발, 앞에 봐.”

심기가 불편한 한수진 때문에 바로 앉아야 했다. 이수민, 이름도 예뻐. 나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교수의 기나긴 호명이 끝날 때까지 꿈에 젖어 있었다.

“자, 여기까지. 불러 드린 번호 이상 없으시죠? 그럼 짝꿍 확인하시고. 드랍하실 분은 하시고. 다음 강의 때 뵙겠습니다. 교재는 제본실에서 구매하세요.”

시끄럽게 의자를 끄는 소리와 서로의 파트너를 부르는 소리가 한데 얽혀 소란스러웠다. 한수진은 자기 짝을 볼 생각도 않고 가방을 챙겨 쌩하니 나가 버렸다.

나는 배정받은 종이 표를 손에 들고 애처롭게 30번을 찾아 헤맸다.

“이수민 씨. 수민 씨, 안 계세요?”

사람이 빠지고 강의실이 한산해질 때까지도 30번 이수민은 나타나지 않았다.

“마, 걱정 마라. 첫 주는 오티니까 자체 휴강 때렸나 보지.”

“그렇겠지? 설마 새내기일까?”

“새내기가 돌았나. 그딴 수업을 왜 들어.”

“근데 너네 조용히 말해라. 분위기 파악 안 되냐?”

“한수진 말이야? 아직도 기분 안 좋아?”

“운도 더럽게 없어요. 많고 많은 남자 중에 그런 새끼가 걸리다니.”

과방의 낡은 컴퓨터 앞에 앉아 쌍욕을 하며 3학점짜리 대체 교양을 찾는 수진이 보였다. 화가 많이 난 듯했는데 엄밀히 말하면 내 책임은 아니었다. 학점 잘 나온다 해서 같이 듣자 한 거지…….

“근데 넌 왜 말짱하게 생겨서는 그런 루저들만 들을 것 같은 강의에 목숨 거냐? 너 좋아하는 애들 꽤 있었잖아. 아님, 뭐. 소개해 줘?”

“그래, 소개팅이라도 받아 봐.”

“소개팅…….”

소개팅에 안 나가 본 건 아니다. 군대 가기 전에는 사귀는 여자 친구가 있었으니 나갈 생각도 없었지만 그 전에는 반강제적으로 여기저기서 소개를 받았었다. 그러나 매번 처음엔 맘에 들어 하는가 싶다가도 끝에선 꼭 우린 맞지 않는 것 같다며 식상한 레퍼토리의 카톡을 받았다.

“소개보단 이런 데서 만나야 더 운명 같고 좋잖아.”

“지랄 똥 싸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학점도 잘 받고 연애도 하고 그럼 얼마나 좋아.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거니ㄲ…….”

“부디 너에게 저주가 내리길 빌게.”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수진이 소파에 눕다시피 앉아 있는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싸늘한 눈초리에 저절로 자세를 바로잡았다.

“야, 너 왜 그래……. 그게 내 책임이냐. 너 만약 내가 남자랑 짝 됐으면 죽어라 비웃었을 거잖아.”

“하여튼. 난 네 덕분에 법과 철학을 듣게 됐어. 부디 그 잘난 네 계획에 흠집이 생기길 바라. 갑자기 강의가 폐강되든, 이수민이 수강 취소를 때리든. 아니면 네 다리가 부러지든!”

쏟아 내듯 저주를 퍼부은 한수진은 가뜩이나 오래된 과방 문을 부서질 듯 세차게 닫고 사라졌다.

“와, 쟤 왜 저러냐?”

“그, 그러게. 김동석 씨가 그렇게까지 나쁘진 않았는데.”

“야야, 됐다. 여튼 오늘 개총 올 거지? 군대 갔다 온 놈들은 필참이니까 내뺄 생각 마라.”

“아, 어. 당연하지.”

주머니에서 꼬깃꼬깃 접힌 만 원을 꺼내 과대의 손에 쥐여 주었다.

“갈게. 술 먹은 지 너무 오래됐어.”

“오케이. 김정현은 참석이고. 너는? 얘들아, 너네도 올 거지?”

과대는 나를 밀어 내고 은근슬쩍 과방 구석에서 수강 과목을 논의하는 새내기들에게 다가갔다. 양심도 없게 새내기한테 추파를 던지는 꼴이 보기 싫어 나왔다. [사랑과 인생]을 듣는 내 모습도 저따구였으려나. 본의 아니게 자기 성찰을 했다.

휴게실에 도착한 나는 담배를 뻑뻑 피워 대는 후배 무리를 지나 쭈뼛거리며 자판기 앞에 섰다. 점퍼 주머니를 뒤지는데 나오는 거라곤 5천 원짜리뿐이었다.

“선배, 여기요.”

옆에서 동전이 짤랑이며 불쑥 들어왔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아, 민, 민혁이었나.”

“네. 이민혁이요. 전역하셨다 들었는데 오랜만에 보네요.”

씨익 웃으며 스포츠 음료를 뽑아 건네는 민혁은 내가 유일하게 아는 후배였다.

별로 후배들과 잘 지내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과 생활을 열심히 하고 싶지도 않았다. 인싸 롤 같은 거 정말 싫었다. 굳이 아는 사람을 늘리고 싶지 않았다. 평범하게 열심히 그렇게 살아가리라 마음먹고 입학한 대학교였다.

그러나 이민혁은 처음 봤을 때부터 엄청나게 치대서 강제적으로 아는 후배가 되었다. 밥 사 달라는 말을 귀에 딱지 앉을 정도로 해 댔으니. 그리고 얼마 안 있어 나는 군대로 내뺐다. 따라서 정말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맞아. 이민혁. 오랜만이다. 너도 개총 가니?”

“당연하죠. 선배 가요? 꼭 오셔야 해요.”

또 일방적인 치댐이 시작되었다. 야, 우리 친하냐? 묻고 싶었지만 의젓한 선배의 역할을 수행해야 했다.

“…왜? 재미없는 복학생이 꼭 가야 하는 이유라도 있어?”

“그야…….”

잠시 머뭇거리던 민혁이 주머니를 뒤졌다. 그리고 잔뜩 구겨진 전단지를 꺼내 들었다. 조잡한 포토샵으로 만든 법학과 개총 홍보지였다.

“여기. 불쌍한 복학생을 위한 환영회를 식순에 넣어 놔서. 형 빠지면 세 명 중 두 명 오는 건데 학생회 모양 빠지잖아요. 꼭 와요. 그리고…….”

이민혁이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형이 와야지 여자애들 참여율이 높아지거든요. 진짜 이해가 안 돼.”

“뭐야, 언제부터 그런 거 신경을 썼다고. 네가 오지 말래도 갈 거니까 걱정 마.”

이민혁이 건넨 음료를 받아 들며 웃었다. 오, 아부까지. 얘는 어떤 인생을 살았길래 벌써부터 사회생활을 이렇게 잘할까.

“아, 그건 그렇고. 수강신청 잘 하셨어요? 이번에 저랑 전공 많이 겹치시는데 알고 계세요?”

“그런가? 휴학해서 네 기수랑 겹치나 보다. 잘 좀 부탁해. 내 동기들은 군대에 있거나 4학년 수업 들으니까 같은 전공 듣는 애들이 몇 명 없어.”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이민혁이 손을 내밀었다.

“잘됐다. 이번 학기에는 더 가까워져요, 선배. 고민 있으면 언제든 말씀하시고.”

붙임성도 좋았다. 어쩜 매사에 적극적인지 신기하기도 했다. 복학생이라고 챙겨 주는 건가? 나는 남자 선배랑은 말 붙이기도 싫었는데. 어쩐지 이번 학기는 저 얼굴을 자주 보겠다는 예감 아래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따 봐요, 선배!”

“어어. 그래.”

나는 미처 다 마시지 못한 캔을 쥐고 털레털레 자리를 떴다. 남은 수업은 다 오티이니 개총 전까지 집 가서 옷도 갈아입고 좀 자다가 나올 생각이었다. 몇 번이고 겪었던 봄이고, 벌써 몇 번째 보는 풍경이었지만 봄바람이 훅 불어오자 어쩔 수 없이 마음이 설레었다. 여전히 쌀쌀하긴 해도 비교도 안 되게 매서웠던 겨울바람과는 다른 냄새가 난다.

나는 잠시 서서 봄 내음을 맡았다. 지금까지의 삶이 싹 리셋되고 새로운 시작이 펼쳐진 것만 같았다.

리셋. 배관로를 넘나들며 온갖 악당을 만나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하지만 목숨만 남아 있으면 뾰롱, 새로 시작할 수 있는 슈퍼마리오처럼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전의 내가 아닌 새로운 인생을.

“평화롭다…….”

그냥…… 새로 깔린 잔디밭처럼 앞길이 싱그럽게 펼쳐져 있을 것 같은 낯선 기분이었다. 봄 냄새를 맡으니 그랬다.

이 기분, 예전에도 한 번 느껴 본 것 같은데.

나는 아무래도 봄을 타는 게 분명했다. 가물가물한 감상에 젖어 혼자 터덜터덜 언덕길을 올랐다.

“대학? 네가? 잘못 들은 거 아니지?”

근 5년 이전에 나를 알아 온 지인들은 모조리 이런 반응이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김정현이 대학은 무슨. 재수한다고나 하면 다행이지.”

중학생 때 친구였던 한수진 역시 같은 반응을 보였다. 어쩜 이리들 똑같은지. 토씨라도 달랐다면 서운할 뻔했다.

수진과는 수능 후 어찌저찌 만든 SNS를 통해 연락이 닿았다. 당연히 낡은 기억 속 예전의 김정현으로만 알고 있었을 수진은 내가 자기와 같은 대학, 심지어 같은 과에 합격했다는 얘기를 듣고 분통을 터뜨리며 PC방 키보드를 뽑아 던졌다.

“어, 뭐 하는, 야야. 죽는다. 야! 죽잖아!”

“뭐!? 미친! 내가? 내가 너 같은 거랑 같은 급이야?”

나 새로 태어났어. 마음먹고 공부 열심히 했어……. 울먹거리면서 변명 아닌 변명을 해도 듣지 않고 말도 안 된다며 내 머리채를 잡으려고 했다. 마침 컴퓨터 앞이겠다, 학교 홈페이지에 들어가 확인시켜 주니 언어를 잃고 PC방 문을 나서더랬다. 한동안 연락이 안 되더니 입학 며칠 전에 생각을 정리해 봤다며 메시지가 왔다.

야.

왜?

티비에서 봤는데

어.

전교 300등이 하루에 2시간씩 자면서 공부해서 서울대에 갔더라

응.

밥도 믹서기에 갈아 먹고 화장실도 안 가던데

…….

너도 그런 거였겠지…….

그렇게 믿을래. 안 그러면 내가 너무 불쌍하니까. 그렇게 말하는 그녀에게 ‘그렇게까진 열심히 안 했는데’라고 말할 수 없었다.

물론, 내 인생에서 가장 열심히 하기는 했다. 아니, 내 인생에서 뭔가를 해 보려고 했던 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그 전까진 미래도, 생각도 없이 살았으니까. 남들의 반응도 이해가 갔다.

“이렇게 평범한 대학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게 신기하다.”

담배를 뻑뻑 피우는 현식의 옆에 서서 고깃집 박하사탕을 빨며 말했다. 닭갈비 냄새가 진동했다.

가게 안에서는 왁자지껄 시끄럽게 술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눈치 보느라 제대로 취하지도 못한 신입생들이 테이블을 옮겨 다니며 통성명과 함께 술잔을 받아 내고 있었고 한 학년 올랐다고 군기 잡으며 선배 노릇을 하려는 양심 없는 놈들도 있었다. 아직도 있나 싶은 화석 선배도 보였고, 강의실에선 얼굴 보기 어렵지만 술자리엔 꼭 얼굴 비추는 멤버들도 보였다.

얼큰하게 취기가 올라 화기애애한 난장판이었다. 이런 분위기가 적응이 되지 않아 얼굴도 식힐 겸 밖으로 나왔다.

“신기해하는 네가 더 신기해. 두메산골에서 나고 자랐냐? 요즘 대학 못 가는 애들이 몇이나 된다고 유난이야, 유난은.”

“에효. 네가 뭘 알겠냐.”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현식이 떨군 꽁초를 밟아 꺼 주었다. 현식이 짓궂게 어깨를 쳤다.

“야. 너희 테이블 신입생. 너만 계속 보던데. 얼굴 뚫리겠더라. 번호 달라고 안 하던?”

“이래서 복학생은 안 돼. 지가 외로우니까 괜히 착각은. 나랑 [사랑과 인생]이나 같이 듣자.”

“미친놈아. 난 지금 들어가면 남자랑 짝 될 거 아냐.”

아직 초봄이라 저녁은 쌀쌀했다. 전역 후 처음으로 과 사람들 다 보는 자리라 멋 내려고 얇은 셔츠만 걸치고 나왔더니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운동화로 불씨만 남은 꽁초를 마저 비비며 말했다.

“난 들어간다.”

“어, 나도 같이…….”

그때였다. 현식의 뒷말을 집어삼키는 용트림 같은 굉음이 골목 끝에서부터 끝까지 스쳤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놀라 귀를 막았을 정도였다. 엔진부터 몸체까지 개조한 바이크였다. 머플러를 어떻게 튜닝했는지 지각 변동 수준의 소음이었다.

“시발, 깜짝이야. 저 개 쌍놈의 새끼가! 저런 겉멋만 잔뜩 든 놈들이 소리는 오질라게 커요.”

현식이 손가락질을 하며 욕을 퍼부었으나 이미 바이크는 골목 저편을 향해 달려간 후였다.

잘 빠진 파란색 몸체에 위에는 새까만 가죽 재킷을 입은 사내가 타고 있었다. 커스텀된 헬멧의 진한 선팅이 가리고 있는 탓에 얼굴은 보지 못했다. 현식의 말대로 겉멋이 잔뜩 든 새끼임이 틀림없어 보였다.

“야야, 들어가자. 춥다.”

등 떠밀리듯 가게 안으로 향하며 두루뭉술하게 떠오르는 바이크의 잔상에 고개를 갸웃했다. 바디의 도색이 어쩐지 눈에 익었다. 새파란 바다 위에 선혈이 뿌려진 듯한 빨간색 포인트가 뇌리 깊은 곳에 박혀 있던 옛 기억을 자극했다. 빠르게 지나가는 와중에도 선명한 색의 대비가 또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김정현, 왜 그래?”

“어? 아, 아니야.”

파랑과 빨강. 흔해 빠진 색이잖아. 태극무늬만 해도 파랑 빨강이다. 나는 휘휘 떠오르는 생각들을 털어 내고 자리에 앉았다. 술잔을 기울이며 같은 테이블의 새내기가 용기 내 내민 핸드폰에 번호를 찍어 줄까 말까 고민했다.

그때까진 몰랐지. 한수진의 저주가 사실이 될 줄은.

✲ ✲ ✲

“한수진 얼마 전 개총 때 안 왔더라?”

“글, 글쎄요. 저도 모르는 일인데요.”

“너희 중학생 때부터 친구라며. 요즘 싸웠냐?”

“싸웠다기보단….”

일방적 쌩깜이 아닌가. 수진은 복도에서, 학관에서 마주칠 때마다 나를 노려보았다. 소문으로는 법과 철학 정 교수가 중간 기말 모두 리포트와 시험을 병행한다고 말했단다. 매주 제출해야 할 보고서와 조별 과제도 산더미라고 했다. 아니, 그게 내 책임이냐고. 나는 정말 억울했다. 김동석이 못생긴 게 내 잘못이야?

한편으론 걱정이 되었다. 수진의 말마따나 이수민이 일찌감치 드랍했을까 봐.

“이러다 나 남자랑 짝 되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에이, 설마.”

왜 첫날 안 왔을까?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겠지? 그렇다면 그 사정이 뭘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가며 머리가 구체적으로 이수민의 정체를 그려 내고 있을 때쯤, 강의실에 도착했다.

[왼쪽부터 번호대로 앉으세요]

칠판에 교수님의 궁서체와 함께 친절하게도 A4용지에 배치도가 프린트되어 있었다. 몇 팀은 새로운 짝을 맞이하게 된 것 같았다. 저번 오티 때 나처럼 짝을 못 찾은 사람도 있을 테고 강의 취소로 사람이 비게 되었으니까 오늘까지 얼굴 익히라는 교수의 배려였다.

나는 위에서부터 손가락으로 훑으며 이름을 찾았다.

[8번 김정현. 30번 이수민]

다행인지 불행인지 짝은 바뀌지 않았다. 우리의 자리는 창가 자리 다섯 번째 열이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자리 칸을 세며 우리의 자리를 찾아보았으나 다섯 번째 칸은 텅텅 비어 있었다. 얼마나 바쁘시길래 오티도 빠지고 수업 5분 전에도 안 오고. 이 애타는 마음도 모른 채 시계는 기계적으로 분침을 움직였다.

교실은 하나둘씩 들어오는 학생들로 가득 차서 웅성거리는 대화 소리로 가득했다. 수줍게 배정된 파트너와 인사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나도 끼고 싶다.

1분 전. 어느새 교수도 들어와 프로젝터를 만지며 수업 준비에 한창이었다. 이제는 관심을 잃고 아예 창가로 고개를 돌려 학군 운동장의 ROTC들을 관찰 중이던 내 옆으로 한 사람이 다가왔다. 가벼운 인기척이 의자를 빼고 자리에 앉는 과정까지 함께했다.

그녀다.

내 가슴은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코끝에 시원한 우드 향이 스쳤다. 언뜻 느끼기엔 비누 냄새 같기도 했다. 뭐든 간에 땅이 꽁꽁 얼어 꽃망울이 채 피지 않은 초봄에 어울리는 건조하고 청초한 향이라 생각하며 흰자로 그녀를 훑었다. 만나자마자 할 말이 많았는데 어째서인지 쉽사리 고개가 돌려지지 않았다.

노려보다시피 눈알 모서리로 힐끔거리며 그녀의 손을 훑었다. 매끈한 손가락과 다듬어진 손톱과는 반대로 상처를 제대로 치료하지 않았던 건지 손등에 꽤 큰 흉이 보였다. 그 정도 크기면 꽤나 크게 다쳤을 텐데. 나는 내가 다치기라도 한 듯이 눈살을 찌푸렸다.

검지에는 어울리지 않게 번쩍이는 금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족히 세 돈 반은 나갈 것 같은 두께가 가냘픈 손과는 어울리지 않는 디자인이었다. 반지 한가운데에는 여의주를 물고 승천할 듯 몸을 늘리는 용 한 마리가 새겨져 있었다.

용……?

시선이 점차 위로 올라갔다. 그녀는 따듯한 색감의 노란색 니트를 입고 있었다. 머리칼은 묶었는지 니트 위로는 보이지 않았다.

“눈알 빠지겠어.”

그녀가 말했다. 슬쩍 훔쳐보는 것을 넘어 점점 가까이 다가가 뚫어져라 관찰하고 있던 내 모습을 깨닫고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상대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사고가 정지한 것처럼 머리가 둔해지고 주변의 소음이 음소거 처리가 되었다. 나는 갑작스레 맞닥뜨린 익숙한 얼굴에 바보처럼 입을 벌렸다.

“이수민, 씨……?”

그녀는, 아니 그는 내 멍청한 얼굴을 위아래로 쓱 훑어 주고 부슬거리는 옆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입꼬리를 올렸다.

아. 누군가에게 가슴팍을 세차게 밀린 탓에 과거의 저 뒤편으로 데구르르 굴러떨어진 것 같았다. 그는 내 기억 무덤 깊숙한 곳에 묻혀 있던, 기억해 봐야 딱히 좋을 것 없는 이름들이 쫘르르 열거된 리스트를 찾아내 눈앞에 대고 흔들었다. 가장 위쪽에 그 낯익은 얼굴이 있었다. 요주 인물. 주의할 것. 별표 다섯 개까지 쳐진 빨간 글씨가 반짝였다.

“아니……, 차…수민……?”

나는 어버버거리며 의자와 벽 한 뼘도 안 되는 공간에서 최대한 뒤로 물러서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마귀에게서 떨어지려고 했다.

너무나 당황스러워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 차수민이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당최 모를 동그란 뒤통수, 아슬아슬하게 눈가를 덮어 오는 앞머리, 얼음물에 푹 담갔다 뺀 듯 창백할 정도로 하얀 피부, 옆으로 긴 눈과 까만 속눈썹, 우수에 차 보이는, 그러나 알고 보면 악독한 꿍꿍이를 생각 중인 눈동자, 벌어지는 입술을 꾹 누르는 앞니 두 개, 할 말이 넘쳐 보이지만 꾹 다문 저 입술.

멀쩡하다 못해 선의까지 품게 되는 외양이었지만 겉모습만 보고 다가갔다가는 경을 칠 일이다. 맞다. 차수민이었다.

“오랜만이야.”

그가 찢어진 눈을 살풋 휘며 입을 벌렸다. 새까만 머리카락과 흰 피부의 차가운 대비가 포근한 노란 니트와 어울리지 않으면서 어울리는 것도 같은 기묘한 조화를 만들어 냈다.

“몇 년 만이지? 좀 바뀐 것 같기도 하고. 살 빠졌어?”

엊그제 만난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넋이 나간 나는 멍하니 열리는 지옥문을 바라보았다. 달구어진 유황불에서 불길한 열기가 훅 끼쳤다. 깊고 깊은 웜홀에 발을 헛디뎌 떨어지는 슈퍼마리오가 그려졌다. 괴물 꽃, 뻐끔 플라워가 떨어지는 콧수염 배관공을 발목부터 꿀꺽 삼켰다.

“네가… 왜, 거기 있어……?”

“왜긴. 이 수업 들으니까. 멍청한 건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구나.”

이 수업을 듣는다고? 아니, 그 전에 이 학교 학생이라고? 목소리가 떨려 왔다.

“너는, 너는 차씨잖아. 차수민이잖아. 네가 왜 이수민 씨 자리에 있어.”

엄마 옷자락을 부여잡고 떼쓰는 아이처럼 끝까지 눈 가리고 우겨 보는 마지막 발악을 수민은 안쓰럽게 바라봐 주었다. 안타깝지만 듣고 싶은 대답을 들려줄 수 없는 모양이었다.

“새어머니 성이 이씨야. 우리 영감이 좀 여자가 많아야지. 요전엔 나카무라 수민이었다고.”

“마, 말도 안 돼.”

길 잃은 붕어처럼 입만 뻐끔거리자 수업 시작을 알리는 교수의 인사가 귀에 들어왔다.

“쯧. 이따 얘기하든가.”

수민은 귀찮은 날파리 대하듯 얼어붙은 날 남겨 두고 몸을 돌려 정면을 향했다. 수업이 들어올 리 없었다.

그렇게 고대하던 이수민 씨와의 첫 만남이었다. 한수진의 저주가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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