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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크리스마스 (20/21)

19. 크리스마스

“싫어. 절대 안 돼.”

웬일로 외식을 나가자는 말에 의심 없이 다녀왔더니, 돌아오는 내내 말도 되지 않는 요구를 내뱉는 덕에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었다. 이렇게 굴 줄 알았다면 스테이크고 뭐고 집에서 삼겹살이나 굽고 마요네즈 범벅 샐러드나 만들어 먹으며 기름진 하루를 보냈을 텐데. 슬프게도 내 위는 이미 그가 작정하고 먹인 소고기로 기름칠이 된 뒤였다.

하지만 뇌물을 먹었건 말건, 안 되는 일은 안 되는 것이었다.

신발을 벗고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그는 아이가 벗어놓는 목도리와 겉옷을 받아 차곡차곡 정리하곤, 내가 주방 의자에 내팽개쳐놓은 목도리까지 자연스럽게 들고 가며 물었다.

“뭐가 싫은데.”

“싫다면 싫은가 보다 넘어가면 되지 뭘 자꾸 물어?”

단호한 거절에 투덜거리는 녀석을 무시하려고 했지만, 그는 오케이 사인이 떨어질 때까지 똑같은 말을 반복할 기세였다.

몰려오는 피로에 옷을 갈아입기를 포기하고서 소파에 벌러덩 누웠더니, 그가 코트를 벗으며 말을 걸어왔다.

“크리스마스이브니까.”

밀린 휴가가 폭탄으로 쏟아져 크리스마스를 끼고 새해까지 장기 휴가가 되었다. 추운 날씨에도 뛰어다니던 날을 뒤로하고 따뜻한 휴일 좀 보내겠구나 싶었더니, 이놈은 이미 한 달 전에 끝난 이야기를 뒤집어엎기 위해 나를 쿡쿡 찔러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게 대체 크리스마스이브랑 무슨 상관이냐고.”

“상관은 없지. 그럴듯한 이유를 뭐라도 걸어보는 거지.”

“단 1퍼센트도 그럴듯하지 않……!”

“또 싸워! 싸우는 건 나쁜 사람이야. 우는 것보다 싸우는 게 더 나쁘댔어. 산타 할아버지, 오늘 밤에 다른 집에 다~ 가고 우리 집에만 안 올 거야. 아빠도 선물 못 받을 테니까! 아저씨랑 맨날 싸워!”

내 발치에 앉아 있다가 벌떡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는 아이를 따라갔건만, 옷을 갈아입을 거라고 대차게 외치는 덕에 그대로 후진을 해야 했다. 지난 초가을, 부르고 싶은 대로 불러도 상관없다는 말에 그의 호칭은 원상 복귀되어 아빠가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아저씨라니. 뭔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됐다.

답답해진 마음에 그대로 주방으로 가서 애꿎은 생수만 들이켜고 있는데, 아직 포기 따위 모르는 재혁은 문 앞에 서서 당당하게 승아에게 말을 걸었다.

“승아, 밤에 아저씨 좀 빌려도 돼?”

“아니, 뭐 그런 걸 묻…….”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이제 다 컸다고 덤벼드는 꼬맹이는 꽤나 난리를 치면서 윗옷을 벗은 듯 단정했던 머리가 산발인 채 밖으로 나왔다. 승아는 조그만 손을 꼬물대더니 나와 재혁에게 손가락 여섯 개를 폈다.

“응. 승아 이제 내년이면 여섯 살이야. 이제 두 손으로 세야 해. 다 컸으니까 아저씨랑 같이 안 자도 돼. 승아 혼자 방 쓸 거니까. 아저씨, 아빠가 가져.”

“그래?”

눈까지 부릅뜨며 재혁에게 확신으로 가득 찬 시선을 던지는 게 황당했다.

“아니, 잠깐…… 그걸 왜 둘이 협상을 해? 그리고 내가 추워서 싫다니까? 나 자다가 얼어 죽는다고! 둘 다 방 하나씩 차지하고 살 거면 거실이라도 나한테 줘, 그럼.”

“거실이 제일 추워. 그리고 짐도 다 방에 있고 침대도 버젓이 있는데 뭘 자꾸 거실을 달라고 해. 날이 좀 추워졌다고 그렇게 모질게 내치는 거 참 너무하지 않냐. 날 더울 때에는 그렇게 달라붙지 못해서 안……!”

“……미친 새끼야, 애 앞에서 말 좀 가려서 해.”

급하게 입을 틀어막고 속삭였더니 눈을 휘며 웃는 게 사악해 보이기까지 했다. 우리를 째려보는 승아의 눈빛에 못 이겨 애써 웃는 얼굴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그는 복화술은 또 어디서 익혔는지 웃는 얼굴 그대로 조용히 말을 건넸다.

“욕이랑 폭력이 교육에는 더 나쁘지.”

“넌 욕도 좀 먹고 맞아야 해.”

“아무튼, 승아를 위해서라도 이제 방 완전히 옮겨. 자기 방 갖고 싶다고 노래하는 애 방에 가서 굳이 매트리스로 자리 차지하고 자는 이유가 뭐야.”

“…….”

거짓 웃음이었지만 승아는 만족스러웠는지 마저 옷을 갈아입겠다며 방으로 들어갔다.

“……!”

뜬금없이 양볼을 잡고 꾹 누르는 녀석 때문에 애꿎은 딸꾹질을 내뱉어야 했다. 밖에 있다 들어와서 얼어 있던 볼이 미적지근한 그의 손에 닿자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무슌…….”

눌린 볼에 어눌한 발음이 튀어나갔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으며 물었다.

“차가워?”

“아니, 뭐…….”

“제주도 갔다 온 다음에 마신 적도 없어서 냉기 잃은 지도 한참 됐다. 춥다는 변명거리는 좀 안 맞잖아.”

“근데 뭐 어쩌……!”

건조한 날씨에 조금은 굳어 있던 입술이 그의 입술에 적셔졌다. 끈적하게 붙어오는 키스에 볼이 다 화끈거렸다.

조심성은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점점 대담해지고 남의 눈도 신경 쓰지 않는 게, 너무 자주 빨리면 나중에는 진짜 눈 뒤집으며 달려들 것 같아 의도적으로 자제를 하고 있었지만, 늦바람이 무섭다고 그렇게 요란을 떨던 녀석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었다.

역시 세상은 마음대로 굴러가는 법이 없었고, 그는 여전히 나에게 미스터리한 녀석이었다.

“같이 잔 지 한 달도 넘었어.”

“그건 약속해서 그런 거고.”

“딴짓 안 해.”

바짝 다가와 눈을 마주치며 의도적으로 목소리까지 깔아대니 피할 수가 없었다.

“……신뢰가 없어.”

“그 신뢰는 언제 쌓이는데.”

“평생 안 쌓일 예정인데요.”

암만 아니라고 생각하려고 해도 이미 내 몸이 그에게 익숙해져 꼬시는 대로 넘어가는 날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다리 사이를 파고드는 그의 허벅지에 몸이 뒤로 밀리고 있었고, 그의 손이 더는 밀려가지 못하게 나의 목을 잡으며…….

[백유운!! 문 열어!]

그때, 문이 부서져라 두들겨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목소리를 알아들은 승아가 버선발로 뛰어나가 문을 열었다.

“군인 아저씨랑 군인 언니!”

“안녕? 잘 지냈어?”

“응!”

“승아야, 아저씨는 어디 갔…… 하?”

화들짝 놀라 그의 머리를 잡아 싱크대에 처박고 있으니 표성이 들어오자마자 우리를 벌레 보듯 쳐다봤다. 괜히 뒷머리만 벅벅 긁고 있으려니 표성은 나에게 눈을 부라렸다.

“뭘 그런 눈으로 봐요, 문 안 망가졌습니까.”

“……뭐 하고 있었냐, 너네. 승아 있는 곳에서.”

입술을 툭툭 치며 말하는 탓에 나도 모르게 입술을 벅벅 닦으며 말했다.

“뭐 하긴요. 설거지요, 설거지. 남의 집에 이 시각에 무슨 일로…….”

“어머, 크리스마스 파티 하기로 합의되어 있던 거 아니었나요? 태주가 말해놨다고 먼저 가라고 하던데.”

뭐라고 소리를 치려고 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서연은 이미 만삭에 접어들어 펑퍼짐한 옷을 입어도 그녀가 임산부라는 사실을 모를 수가 없었다. 재혁도 그들이 쳐들어올 줄 몰랐는지, 제법 당황한 듯 목청을 가다듬으며 그들이 들고 온 짐을 받아 식탁에 올려놓았다.

“……서 있지 말고 소파에 앉으세요.”

“그래도 되나요?”

재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무심한 듯 대화를 이어갔다.

“예정일이 2주 정도 남았다고 했나요.”

“네, 벌써 그렇게 됐네요. 벌써 휴직한 지 한 달도 넘었고…… 너무 오래 쉬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육아 휴직까지 하면 팀에 피해 끼치는 것 같기도 하고요.”

“전혀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 아무도 없을 겁니다.”

평범하디평범한 대화를 주고받는 장면이었지만, 아직 옷을 갈아입지 않고 단정한 차림을 하고 있어서인지 냉정하고도 자상해 보이는 그와 서연을 보니, 표성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꽤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인과 있을 때 그는 꽤 신사적이었고, 거리를 두면서도 친근감을 표할 줄 아는 녀석이었다.

요즘 들어서 문득문득, 그가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리 없는 표성은 멍하게 서 있는 나에게 가까이 붙어오더니 중얼거렸다. 나는 모르고 있던 사실이지만, 복화술은 아마 우리 팀이라면 필수로 갖춰야 하는 재주인 모양이었다.

“……살판났다, 아주? 마성의 매력이 있긴 한가 봐, 널 그렇게 만들어버린 거 보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무슨 일인지 설명 좀 하시죠.”

“파티 하기로 했었잖아.”

“근데 왜 여기로 오냔 말입니다.”

“그럼 좁아터진 태주네서 해? 아니면 1분 1초가 고생인 아내가 있는 우리 집에서 해? 널찍하고 깔끔하니까 딱 좋잖아.”

“깨끗한 건 자동으로 깨끗해진답니까……? 뒷감당은 어떻게 하라고요. 집 난장판 되면 피해 보는 건 제……!”

[유운 형!! 문 열어요, 문!! 무거워! 빨리이!]

“저…… 이, 미친……!”

저 무리는 반드시 막아야 한다는 결심 아래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승아가 문을 열어준 뒤였다. 태주와 하늘은 막을 새도 없이 쳐들어와 뻔뻔하게 빨리 짐을 받으라며 난리였다.

얼마나 큰 상자를 들고 온 건지 나도 모르게 가서 받아 들고 있는데, 점점 소란스러워지는 집 안을 본 재혁이 집의 미래를 내다보고 왔는지, 조금은 핑크빛이 돌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지나가겠습니다~.”

“아니, 잠……!”

한숨을 토하며 거실로 기어 들어가는 태주에게 뭐라고 하려던 찰나, 생각지도 못한 까르륵 소리에 내뱉던 말이 그대로 삼켜졌다.

“승아야!”

남의 아이는 빨리 큰다고, 그새 부쩍 큰 것 같은 진주와 진솔이가 뛰어 들어와 승아와 인사를 나누기 바빴다. 그런 아이들을 뒤따라 들어온 쌍둥이들의 엄마는 여태껏 집에 쳐들어왔던 이들과 다르게 조금은 어리둥절해하고 미안해 보이는 눈치였다.

“분위기가 제가 껴도 괜찮을지 모르겠네요. 괜히 온 걸까요.”

그러나 그녀를 환영하지 않을 사람은 없었다.

서연과 아이들은 천장에 닿기 일보 직전인 트리에 장식품을 걸기 바빴다. 보송보송한 털 뭉치부터 반짝거리다 못해 번쩍번쩍 빛나는 장식품들, 그리고 겨울에 걸맞게 새빨간 선물 상자나 산타 옷을 입은 캐릭터까지, 없는 걸 찾는 게 빠를 정도였다.

깔끔하다 못해 삭막해 보였던 집은 적당한 조명과 거실 한 칸을 차지한 나무와 남은 장식품, 쓰레기들로 난장판이 되었고, 재혁은 그 꼴을 보기 두려운지 자리를 피해 애써 외면하기 위해 노력 중이었다.

주방에서 이야기꽃을 피우기 바쁜 이들이 음식을 담기 위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집 안에 퍼졌다. 하늘과 태주는 높은 곳에 장식품을 걸기 위해서 열심히 아이들을 들었다 놨다 하기 바빴다.

체력으로는 이길 수 없었는지 아직 쌩쌩해 보이는 태주에 비해 하늘은 조금 지친 기색이었다. 헉헉거리며 뒤로 물러난 하늘을 잡아 끌어서 한마디 했다.

“그러니까 트리를 왜 여기 설치해야 하냐고요……. 그쪽 집에 해놓으면 될걸.”

“엄…… 애들이 좋아하는데요?”

“요점이 그게 아니잖습니까.”

“내일이 크리스마스잖아요. 크리스마스 하면 자고로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바로…….”

“트리잖습니까!”

그때 태주가 내 손에 주렁거리는 전구를 쥐여줬다. 사악한 웃음을 보니 이게 전부 다 나를 엿 먹이기 위해서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커야죠, 무조건. 이거 다 사는 데 30만 원도 넘게 들었다고요. 솔직히 고마워하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이 지독하게 텅텅 빈 거실을 따듯하게 만들어주고 있잖아요! 지금이야 좀 어수선해 보이지 분명 색다른 분위기를 내줄걸요? 예를 들면 뭐, 형이랑 재혁 님이……!”

“주둥이 안 다물면 네 몸에서 전구가 반짝반짝 빛날 거다.”

태주는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며 한참 딴청을 부리다가 한 발짝 물러났다. 그러고는 꼭대기에 별을 매달겠다며 두 팔을 번쩍 들고 있는 승아를 안아 올리며 중얼거렸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단 말이죠.”

“아저씨, 전구.”

세 아이는 약속이라도 한 듯 나를 단체로 쳐다보며 집단에 합류하기를 동조했다. 점점 나에게 집중하는 눈들이 많아지는 덕에 할 수 없이 나무 주위를 빙빙 돌며 전구를 달아야 했다.

“우웅, 예쁘다.”

집 안 상태가 어찌 됐건, 어둠 속에서 빛나는 불들은 예뻤다. 갖가지 색으로 물든 원색의 전구들은 반짝이며 주위를 빛냈고,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만큼 파티 분위기가 났다. 떠들썩했던 아이들의 소리도, 웅성거리던 어른들의 소리도 잠잠해진 채 모두가 조금은 멍하게 트리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자진해서 휴일 근무를 뛰거나 잠으로 하루를 보내던 과거의 크리스마스가 아니었다. 꽉 찬 배에 음식을 더 채워 넣고, 의미가 있나 싶은 이야기를 나누고, 꼭 보여줘야겠다는 아이들의 어설픈 춤을 보고 노래를 들었다.

시끌벅적한 분위기에 예민하게 섰던 날이 잠잠해진다는 건 불쾌한 감각인 동시에, 굳이 하루하루가 꼭 의미가 있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던져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감각이 편안한 느낌이라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은 게 아닐까 싶었다.

나른해진 몸으로 재혁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니, 그가 자연스럽게 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널따란 손에 감싸이는 포근함은 언젠가 또 이런 일상이 뒤집힐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을 잠재웠다.

그는 나에게만 들릴 수 있게끔 작게 속삭였다.

“졸려?”

“아니.”

“피곤하면 들어가서 자.”

“……나중에.”

분위기에 취해, 그리고 그의 손에 집중하느라 몰랐지만, 조금은 요란하던 주변에 정적이 깔린 게 문득 느껴졌다.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들어야 하나, 그대로 잠이 든 척을 해야 하나 망설이고 있는 나 자신에게 어이가 없었다.

고민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카메라 셔터 소리가 연신 울리며 나를 현실로 끌어내줬기 때문이었다.

“워…… 오늘은 수위가 상중하 중에서 하잖아요. 이 정도는 괜찮지 않나요? 절대 안 뺏겨.”

태주의 목소리에 다시 끓는 속을 잠재우기 노력하며 손을 뻗었다.

“……내놔.”

“싫은데요. 저도 뭔가 담보를 잡아놔야 안 죽일 거 아닙니까. 제 손가락 하나라도 건들면 이거 부대 서버에 다 뿌려버릴 거예요.”

“……좋은 말로 할 때 지워라.”

이 상황에서 얼굴을 붉히는 이는 나밖에 없는 것 같았다. 어쩐지 태주 외엔 모두 광대를 움찔거리고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모두 튀는 불똥을 맞지 않으려고 애쓰는 와중에, 하늘 혼자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입을 열었다.

“근데 그거 지워봤자 별로 소용없지 않나?”

태주는 하늘의 뒤에서 격하게 고개를 저으며 모르쇠로 일관했다. 자기 파트너의 반응을 모르는 하늘은 기억을 짜내며 할 말을 이어갔다.

“그, 지난번 사건 때 입 맞추는 사진이라든가……. 아! 지지난 주인가 행정실에 있던 사진 다 백업해둔 걸로 알고 있는데! 맞죠?”

대답 없이 멋쩍은 웃음을 띠던 태주가 그대로 굳어 내 눈치를 살폈다.

“태주 형?”

“…….”

“태주 형?”

“……제발 눈치 챙겨.”

태주의 조용한 경고에 그제야 분위기를 파악한 하늘은 상에 놓여 있던 와인을 벌컥벌컥 들이켜곤 술에 취했다고 헛소리를 지껄였다며 되지도 않는 변명을 늘어놓았고, 태주는 그런 하늘을 화장실이라고 쓰인 진실의 방으로 질질 끌고 갔다.

“하…….”

다행히 표성의 주도 아래 분위기는 금세 원래대로 돌아왔고, 아이들끼리는 방으로 놀러 들어갔다. 그 뒤의 화제는 자연스럽게 앞으로 태어날 표성과 서연의 아이에게로 쏠렸다. 아이의 이름을 어떻게 지을지, 인간이라면, 그리고 뱀파이어라면 어떻게 키워야 할지 토론의 장이 열렸다.

나는 그런 이들을 내버려두고, 열기에 부쩍 달아오른 볼을 식히러 발코니로 나갔다. 너무 시끄러운 건 아닌가 하는 걱정은 쓸데없는 기우였다. 소란스럽기 짝이 없는 실내와 같이, 다른 집에서도 캐럴 소리나 웃음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입에서 나오는 뿌연 입김을 보니 문득 그와 마주쳤던 술집 앞이 떠올랐다. 독하게 물어뜯기 위해 난리 친 게 불과 몇 개월 전이었지만, 이제 모든 게 달라져 있었다.

만약 내가 지극히도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사람들 사이에 섞여 시시콜콜한 이야기나 나누며 살았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봤지만 어떤 모습도 그려지지 않았다.

내일 당장 죽어버린다고 한들 내게 미련이 남기는 할까.

“조금 시끄러운 것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 활기찬 것 같아서 기쁘네요.”

기지개를 죽 켜는 순간, 팀장님의 아내는 발코니 문을 닫고 나와 나의 옆에 섰다. 그러고는 나를 따라 기지개를 켜며 말을 이었다.

“왜 그렇게 허구한 날 목을 매면서 직장에 몸 바쳤는지 알 것 같기도 해요, 이런 거 보면……. 그때에는 뭐 하러 그렇게까지 하나 조금 밉기도 했는데 나도 이 속에 있었다면 그랬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같이 젊어지는 기분도 나고…… 살아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죄송합니다.”

그녀는 나의 사과에 깜짝 놀라며 손사래를 쳤다. 무슨 생각으로 튀어 나간 사과의 말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건, 그런 말을 내뱉어봤자 바뀌는 것도 없고 내 마음이 편해지지도 않는다는 거였다. 그런데도 해야 할 것만 같았다.

“아휴, 사과받으려고 이런 말 하는 거 아니에요. 그이였다면 그게 누가 됐건, 언제가 됐건 똑같이 바보같이 굴었을 테니까요.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어요. 살아서 같이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을 봤다면 좋겠지만……. 어쨌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이룰 것도 이루고, 헛되게 간 것도 아니고, 적어도 애들한테 아빠는 영웅이었다! 하고 말할 수 있잖아요.”

눈을 한껏 휘는 미소가 티끌 없던 쌍둥이의 웃음과 닮아 보인 건 착각이었을까.

난간에 기댄 채 먼 곳을 바라보던 여자는, 칼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다시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하면 남들 생각하느라 나를 뒤로 밀어두고 산 그이가 미웠는데, 이젠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아마 본인이 목표한 걸 마무리 짓지 못했으면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고 후회했을 테니까……. 그리고 자기가 제일 지키고 싶었던 사람들이 이렇게 다 같이 웃으면서 한 해를 마무리 지을 수 있는 걸 알면 분명 기뻐할 거예요. 어쩌면 제가 팀원분들께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네요.”

평생을 함께하기로 약속한 상대가 자신을 버리고 타인을 택한 뒤 이별을 고했는데도 그녀가 웃을 수 있는 이유란 뭘까 생각해봤지만, 알 수 없었다. 더군다나 그 타인들을 앞에 두고.

어딘가 후련해 보이는 여자의 모습에 언제나 뜬금없이 나에게 조언을 주던 팀장님이 겹쳐 보였다. 산만 한 덩치였던, 얼굴마저 험악했던 팀장님이 환하게 웃던 마지막 모습이 떠올라 그녀를 보고 있을 수 없었다.

고개를 돌려 하늘을 봤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는커녕, 맑다 못해 끝없이 새까만 하늘이었다.

“승아는 알아요?”

“예?”

갑작스러운 질문에 되묻자, 그녀는 별거 아니라는 듯한 말투로 다시 물었다.

“엄마가 죽은 거요.”

“아니요. 아직…… 어떻게 말을 해줘야 할지 막막해서…… 학교에 들어갈 때쯤이 좋지 않을까, 생각만 막연하게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 누구도 나에게 던지지 않던 질문이었다. 어쩌면 우리들 사이에서 금기시된 질문이었기에, 그녀가 가볍게 묻는 말은 되레 나에게 아무렇지 않게 다가왔을지도 모르겠다.

나조차도 현실감 없는 일인데 어떻게 승아를 이해시켜야 할까. 어떤 반응을 보일지, 반응을 보인다면 내가 어떻게 해주어야 할지, 아무 생각이 없었다는 게 맞을 터였다.

더 깊은 고민에 빠져들기 전, 그녀가 다시 한 번 질문을 던졌다.

“본인은 괜찮고?”

앞서 던진 질문들은 이것을 묻기 위함이었나 싶을 만큼 차분하게 건네는 말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런 속과 별개로 입에서 튀어나간 대답은 가볍기 짝이 없었다.

“뭐…… 그냥 살아가는 거죠.”

어딘가 허탈해서 웃음이 났다. 허심탄회하던 여자의 웃음도 지금과 비슷한 심정에서 나온 것 아니었을까.

하늘에 떠 있어야 할 별들은 환한 서울의 하늘에서 빛나지 못하고 도심으로 떨어져 내려 땅을 빛내고, 곳곳의 집에 숨어 들어가 형형색색의 빛으로 집 안을 물들이고 있었다.

매일 보는 똑같은 풍경이었지만,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장면이었지만.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여느 날들과는 다르게 묘하게도 아름다워 보였다.

“받아요, 이거.”

그녀의 손에 들린 건 어느 날, 영상 통화 중 화면 너머로 잠깐 마주했던 카드였다.

“애들 때문에 온 것도 있지만 염치없이 끼어든 거, 사실 이거 주려고 온 거예요.”

받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고 있으려니 그녀는 나의 손바닥 위에 카드를 얹곤 손을 포갰다.

“궁금해서 열어볼까 하다가 그대로 가져왔어요. 비밀이라도 적혀 있을까봐.”

“…….”

“괜히 생각이 복잡해진다거나…… 말할 사람이 없어서 끙끙거릴 때가 되면 부담 없이 연락해요. 나한테도 가족 같은 존재잖아요,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그래도…….”

“나를 위해서 그래달라는 거예요. 매일 그랬던 사람이 없어져서 허전해졌으니까.”

그녀는 도망치듯 인사를 건네고 거실로 들어가더니 아이들을 불러 급하게 떠났다.

이유 모를 먹먹함에 종이를 움켜쥔 채 그렇게 서 있었다. 모든 걸 잃었다고 생각해도 옆을 보면, 또 뒤를 돌아보면 자리를 채우고 있는 이들이 있었다. 매번 혼자라고, 혼자서 모든 걸 해왔다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나야말로 모든 걸 밀어내고 있던 건 아닐까 싶었다.

그가 당당하게 내게 말했던 것처럼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건 명백한 거짓말이었다. 조금은 더 날을 세우지 않고 살았더라면 바뀌는 일들은 얼마든지 있었을 테니까.

다만 그 후회가 죄책감보다는, 앞으로 접할 선택지에서 더 나은 길을 택할 수 있게 만들어준 것도 분명했다.

도시의 별들은 저물 줄 몰랐고, 집 안에서 빛나던 트리가 꺼질 때쯤에야 종이를 뜯어 안을 들여다보았다.

[산타 할아버지. 아저씨 울보 안이에요. 화도 마니 내고 승아보다 마니 우는데, 그래도 차카니까 선물 꼭 줘야 대요. 아저씨 웃는 얼굴 예쁘니까.]

삐뚤삐뚤한 글씨가 적힌 카드의 주변을 도는 종이 쪼가리에선 매번 나를 나무라던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할 게 없어서 다섯 살짜리한테 걱정을 만들어주고 다녀? 그만 울상으로 돌아다니고 웃어라, 좀!’

늦은 시각이라 아이는 이미 잠든 지 오래였다. 청소하기 바쁜 녀석을 두고 나는 소파에 누워 휴식을 즐겼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내게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바쁘게 움직이는 녀석을 보면 잠이 몰려왔다.

그릇을 씻기 위해 주방에서 틀어놓은 물소리도, 쓰레기를 치우는 바스락바스락 소리며 먼지를 쓸어내리는 소리, 걸레질 소리조차도 따뜻하게 들렸다.

고작 청소 따위 하는 데에도 불끈거리는 그의 근육을 봤다. 그는 겨울이라 그런지 아예 벗고 다니기보단 얇은 티셔츠를 걸치고 다니곤 했는데, 오히려 그 얇은 한 장의 천이 상상력을 자극했다.

몽롱해지는 정신을 이기지 못해 결국 눈을 감았다. 검은 세상 속은 시끌벅적했던 하루와 지나간 날들이 겹쳐지며 어지러웠다.

“…….”

이대로 잠이 들겠구나 싶어 힘을 풀었더니 몸이 붕 떴다.

“……뭐 하냐.”

“선물 셀프 배달.”

꿈속에서 유영이라도 시작하나 했더니, 내 몸은 가볍게 그의 팔에 들려 옮겨가고 있었다. 분명 언젠가 이런 날이 또 있었던 것 같은데…….

고분고분 그의 팔에 들려 몸을 늘어트렸다. 난리치기 귀찮았기도 하고, 왠지 혼자 잠들면 외로울 것 같은 밤이었으니까…… 같은 변명을 해봤다.

내 몸을 침대에 내려놓는 녀석을 붙잡아 끌어안았다. 진짜 배를 곯은 지 오래되었는지 미적지근한 몸이 따듯하게 느껴졌다.

그가 매일 했던 것처럼 그의 목에 얼굴을 파묻었다. 나에게 안달 나 있는 그처럼 나도 그의 냄새에 중독되어 있었다. 내가 하는 대로 고분고분 받아주고 있던 녀석이 나를 더 깊게 안으며 중얼거렸다.

“넌 진짜, 알 수가 없어.”

“……내가 할 소리 네가 하지 마.”

어처구니없는 발언에 고개를 들어서 보니 인정할 수 없다는 그의 표정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약 오르게 만드는 그의 얼굴이 보기 싫어 등을 돌려버렸더니, 그는 알아서 나를 품으로 끌어당겼다. 그의 손에 조금 끌려 올라간 티셔츠로 바람이 통했다.

“탁상에 카드 놓여 있던데, 읽은 거야?”

집을 휩쓸고 간 이들 덕에 그의 목소리도 조금은 피곤한 듯 들렸다.

“응.”

“승아가 뭐라고 적었어?”

“네가 나쁜 게 맞대. 억울해도 착한 내가 참으라네.”

“거짓말은 현실성 있게 하는 게 좋지 않겠어? 울보 주제에.”

“아?”

“나는 네가 건 싸움에 선물 못 받는 신세가 되었는데, 넌 울보라서 못 받는다잖아.”

잘 나가다가 꼭 길을 잘못 드는 녀석이었다. 품 안에 뒀던 베개를 들어 그에게 휘둘렀더니 막기보다 처맞아주며 베개의 안위나 걱정했다.

“윽, 베개 또 터진다. 그거 터지면 진짜 치우기 힘들……!”

“그거 알아?!”

“뭐……!”

“넌 바닥에 쪼그려 앉아서 청소할 때가 제일 멋있다, 멍청한 새끼야!”

“네 입에서 내가 멋있다는 말도 다 나올 때가 있……!”

“으……! 의미가 다르다고!”

오밤중에 침대 위에서 벌이는 레슬링 한판은 격렬하기도, 부드럽기도 한 조용한 전쟁이었다. 꿈과 현실에 반쯤 걸려 있던 세상이 그에게 휘두르는 폭력으로 온전히 말짱해졌을 때에는 이미 침대에서 엎치락뒤치락하는 두 남자가 있을 뿐이었다.

“……!”

막기 위해 잡은 팔은 미끄러져 옷 속을 더듬었고, 다리를 잡고 있던 손은 자연스럽게 허벅지 근육을 훑는 가운데 서로를 잡아먹을 듯 입을 맞출 뿐이었다. 끝은 항상 이따위였지만 불만은 없었다.

춥긴 개뿔. 그런 것 따위 느낄 틈이 없었다. 설령 그가 차가운 얼음 덩어리였던 날이 있다고 해도, 달굴 방법이야 다양했으니까.

한참이나 난리를 치르고 나서 숨을 고르며 누워 있으려니 이게 다 무슨 짓인가 싶었다.

“종이에 뭐라고 쓰여 있었어?”

“뭐? 다 본 거 아니야?”

“승아가 쓴 거 말고. 나 양으로 만드는 법 알려줬다던데.”

증거 인멸까지 하고 왔지만, 그에게 직접 말했을 줄이야.

그건 그렇다 치고, 나를 보는 눈빛이 양으로 만드는 방법이 뭐든 간에 자신에게 해주길 기대하는 눈치였다. 갑자기 홧홧해진 얼굴에 고개를 돌렸더니 내 턱을 잡고 돌리게 해 입을 맞추는 탓에, 말이고 뭐고 자꾸 종이에 적혀 있던 내용만 생각났다.

“씨…… ㅈ…….”

“좆같다고?”

이럴 때만 귀 안 좋은 척하지.

“하…….”

험악하게 변하는 인상에 똑같이 인상을 빡 쓰고 말했다.

“……좋아하게 된 것 같다고.”

“좋아하면 좋아하는 거지, 좋아하게 된 것 같은 건 뭐야.”

말해줘도 이 모양인지. 세상에 있는 양이 다 뒈졌다.

“됐다. 잠이나 처자라.”

“이왕 하는 거 제대로 말해줘. 확실한 게 좋으니까.”

“아, 잠이나 자라고……! 들러붙지 말고!”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그의 큰아버지가 말했던 요구사항을 좀 더 확실히 체크하고 나서 말할걸. 어설픈 말이 양의 탈을 쓴 늑대를 만들어버린 듯했다.

[고백해봐. 그 녀석 확실한 걸 좋아한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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