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비밀
[여기는 백곰. 위치는 참나무 23번, 방울뱀 보고 바란다.]
저녁노을이 어스름하게 지는 오후, 적당히 부는 바람이 나뭇잎을 때리며 스산한 분위기를 마음껏 풍겼다. 확연히 떨어진 기온에 간헐적으로 몸이 떨리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낙엽 냄새가 코를 간질였다.
[방울뱀, 아무 움직임도 보이지 않음.]
지직거리는 전파 사이로 들리는 긴박한 그들의 목소리가, 한창 여유로움을 만끽하는 숲속에 긴장감을 조성하고 있었다. 숨을 죽이고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언제 어디서 위협적인 모습으로 나타날지 모르는 적들은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열심이었고, 내가 믿을 것이라고는 청각밖에 없었다.
계절 막바지에 접어들어 마지막 힘을 쏟는 벌레 소리와 풀끼리 부딪치는 소리, 마른 나무가 서로를 끌어당기며 내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렸다.
적들은 지금 어디쯤 와서 나를 노리고 있을까.
그런 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다람쥐가 창문을 두드리며 견과류를 내놓으라고 협박했다. 조그만 주먹이 얼마나 매운지 여간 신경이 거슬리는 게 아니었다.
실눈을 뜨고 창가를 바라보니 살짝 입을 벌린 채 집 안을 들여다보던 다람쥐가 나를 한심하다는 눈으로 쳐다보며 볼을 씰룩거렸다.
“…….”
얼어붙은 채 나를 보는 다람쥐를 향해 손을 휘휘 저으니, 진지하다 못해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목소리가 조용히 나를 나무랐다.
[생쥐. 한눈팔지 마라. 역할에 충실해야지.]
“예에.”
재혁의 큰아버지는 이제 나를 내키는 대로 불렀다.
자세를 고정한 채 움직이지 못해 허리가 뻐근했다. 내가 왜 이곳에서 이런 취급을 받고 있어야 하는지. 언제나 그렇듯 뒤늦은 후회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감정 소모일 뿐이었다.
[상황실.]
재혁의 닦달에 나를 나무라던 남자가 목소리를 가다듬고 한껏 멋을 부린 말투로 말했다.
[크흠. 여기는 상황실. 현재 목표는 움직임이 없음. 입구에서 확인된 트랩은 총 셋, 첫 번째는 레이저 트랩이다! 절대 몸에 닿으면 안 된다! 두 번째는 폭탄 트랩! 마지막은 아직 밝혀진 게 없다. 알아내는 대로 정보를 보낼 테니 조심하기 바란다!]
쾌활하다 못해 명랑한 보고에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낙엽 밟는 소리는 조용한 듯 어딘가 어수선했고, 그중에서도 발랄하게 들리는 짧은 보폭은 굳이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지금쯤 나무 계단을 밟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여기는 토끼이! 제가 먼저 갈 거다! 악마는 승…… 토끼가 해치울 거다!]
“악마……?”
[여기는 백곰. 뒤는 제가 볼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래, 악마.
뱀파이어들에게 사냥당하고 있는 나는…… 난 악마였구나.
실전보다 더 진지한 태도로 임하는 재혁의 목소리엔 한껏 힘이 들어가 있었고, 2층에서 현실감 있는 목소리를 전하는 그의 큰아버지는 응원단장 못지않은 큰 목소리로 승아의 용기를 북돋워주기 바빴다.
[여기는 방울뱀. 곧 합류하겠습니다.]
둘은 그렇다 치고 왜 제이까지 영혼을 끌어 모아 재능 낭비를 하는 건지. 성인 남자 셋은 그렇게 승아가 정해준 역할에 심취해 있었다.
어떤 역할인 줄도 모르고 하라는 대로 소파에 누워 잠자는 시늉만 하고 있으라니 아, 편하구나 하고만 생각하고 있었더니만. 악당인 줄은 알았지만 뱀파이어도 아니고 악마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
초반만 즐거웠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멍청히 누워서 그들의 말소리만 듣고 있는 건 여간 지루한 게 아니었다. 고개를 살짝 들어 야단법석인 밖을 봤다. 계단 난간을 이용해서 팽팽하게 이리저리 어지럽게 널린 실은, 평범한 나무집이었던 재혁의 집을 악마의 굴로 들어가는 입구로 탈바꿈시키고 있었다.
[닿으면 위험합니다! 제가 밟는 곳을 따라서 오십시오.]
“큽.”
재혁의 목소리에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참기 위해 노력했지만 귀가 밝은 그를 속이긴 힘들었나 보다.
[……웃어?]
“아니, 기침 나와서…… 방이 좀 춥네.”
담요라도 덮고 있으라는 말을 흘려듣는데 위층에선 뭘 준비하는 건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끙끙거리며 짧은 다리로 그의 보폭을 따라가느라 힘들어하는 아이의 목소리도 들렸다.
잠만 자는 적을 해치우는 것만큼 싱거운 게 어디 있겠느냐는 합리적인 판단 아래 몸을 일으켰더니, 귓가에 비상을 알리는 소리가 들렸다.
[비상!! 적이 움직임을 보인다! 모두 주의 바란다!]
찌뿌드드한 몸으로 기지개를 켠 뒤 어슬렁어슬렁 걸었다. 집은 처음 왔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승아와 내가 올 것에 대비해 좀 더 포근한 느낌의 천이나 작은 솜 인형들이 곳곳에 자리해 있기는 했지만, 여전히 조은을 의식한 듯 물건이 별로 없어 심심했다.
그런 집 안에서 여전히 그의 책장만은 고고하게 벽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 별다를 바 없는 책장은 책이 꽂힌 순서마저 다르지 않았다. 끼깅거리는 나무 바닥에 서서, 그가 한밤중에 읽던 「수면」이라는 제목의 책을 꺼내 들었다.
[여기는 토끼이! 1단계 무사히 통과!]
[아직 안심하긴 이릅니다. 끝까지 긴장을 놓지 말아야 합니다!]
글자가 빼곡히 적혀 있을 줄 알았던 책은 첫 장부터 잔잔한 파장이 이는 물의 사진이 박혀 있었다. 넘기고 넘겨봐도 역동적이냐 정적이냐의 차이일 뿐, 투명하고 반짝이는 수면이 다였다. 당연히 고고한 문서일 줄 알았는데, 뒤통수를 맞은 순간이었다.
시시하기 짝이 없는 책을 덮어 제자리에 꽂았다. 종잡을 수 없는 취향에 혼란스러워서 시선으로 책장을 훑었다. 천의 느낌이 그대로 밴 책들은 까슬까슬하기도 했고 보드랍기도 했다. 제각각 다른 두께의 책들이 울룩불룩 나와 손가락을 튕겨냈다.
[일조 님, 물풍선은 준비되셨습니까. 곧 지나갑니다.]
[오야.]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2층에서 추락한 물풍선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밖에서 터지기 바빴다. 우산 펼치는 소리와 걱정하지 말라는 제이의 목소리, 그리고 조심하라는 재혁의 경고까지 귀는 쉴 새 없이 소란스러움을 담고 있었다.
[꺄아!]
마지막으로 손에 걸린 책을 꺼냈다. 얇고 볼품없는 책이었다. 귀신에라도 홀린 듯 책장 끝에 서서 꺼내 온 책을 봤다. 군청색 책의 표지엔 아무 글씨도 없이 새카만 크레파스로 낙서가 잔뜩 되어 있었다. 조은의, 혹은 나의 발에 밟혀서 구겨진 듯한 곳이 많았다.
심상치 않은 표지에 고작 책 하나 펼치는 데에도 고민을 했다. 바닥을 향해 자신만만하게 날아가는 물풍선과 다르게 내 행동은 조심스러웠다.
[진짜 애한테 던지시면 어떡합니까.]
설마 이상한 게 튀어나오거나 하진 않겠지.
[아니, 둘이서 그러려고 있는 거 아니었나? 전재혁, 마지막 트랩이 뭐라고 했었어.]
[……발판이요, 발판. 트랩 세 개 외우는 게 그렇게 힘드셔서 연구는 어떻게 하고 계십니까.]
[허, 아직 그 정도는 아니다?]
황당하다는 듯 대답한 재혁의 큰아버지는 곧 목청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에헴, 마지막은…….]
펼쳐진 책 속에 자리 잡은 건 구불거리는 알파벳들이었다. 긴장이 무색하게 너무나 평범한 책이었다. 몇 장을 더 넘겨봐도, 바람을 일으키며 끝까지 파라락 넘겨보아도 그 흔한 일러스트나 표, 사진 한 장 없이 글씨만으로 빼곡한 책이었다.
“……왁!”
미련 없이 책을 꽂고 가려는데, 튀어나온 바닥의 나무판자에 발이 걸렸다. 나도 모르게 손으로 짚은 곳은, 금단의 영역처럼 생각해왔고 매번 눈에 불을 켜고 투시력이라도 생기길 기다리며 지켜보던 방문의 손잡이였다.
아마도 이 세상에 내가 존재하는 건 실험을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호기심, 인내심, 절제력. 그 뭐가 됐건 간에 나는 매 순간 머리를 굴리면서 살았지만, 지금처럼 이분법적인 사고로 고민을 한 적은 없었다.
그저께는 체력이 하늘을 뚫는 승아와 산속을 뛰어다녀서 곯아떨어졌고, 어제는 그의 본가에 다녀온 뒤…… 어찌 됐건 대부분의 시간을 붙어 있었다. 그 외의 시간엔 재혁이 들어가 있었기에 그 방으로 쳐들어갈 엄두를 못 냈었다.
여태 들어가 볼 기회가 없었던 방의 문을 이렇게 우연히 잡았다는 건, 그리고 손잡이가 매끄럽게 돌아가 두 공간의 공기를 뒤섞었다는 건 더는 망설이지도, 고민하지도 말고 열어볼 때가 되었다는 계시였다.
적어도 지금 나는 그런 결론을 내렸다.
“흠…….”
같은 집이라지만 확연히 다른 향이 풍겼다. 시트러스 향을 뚫고 퍼지는 그의 향이 평소보다 더 풍성하게 느껴졌다. 침이 절로 삼켜져 하마터면 사레가 들릴 뻔했다.
손바닥만큼 벌어진 문틈으로 방 안이 보였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한층 철저하게 그의 취향이 들어간 방이었다. 무엇이 있냐고 물으면, 박자가 느리다면 한 박자 만에도 다 대답할 수 있을 만큼, 별게 없었다.
책상과 의자. 그리고 빼놓지 않고 자리한 책장은 가슴 높이까지 올라왔다. 의외의 물건이 있다면 무언가를 덮고 있는 듯한 천들과 액자들이었다.
액자는 거울에 반사된 빛에 눈부시게만 만들 뿐, 내용물을 내비치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발을 뗐다. 턱도 없는 문을 넘어섰고, 점점 더 넓은 시야의 세계로 빨려 들어갔다. 각도가 달라질수록 내리쬐던 노을빛이 걷히며 나를 환영했고, 의문이 가득한 물건들과 점점 거리를 좁……!
[백유운.]
“……!”
문은 순발력 덕분에 재혁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굉음을 내며 닫혔다.
“이 악마아!! 내가 무찌를 테다!”
[유운 님, 팔이든 다리든 휘저어주신다면 승아가 좋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여기까지 소요 시간만 한 시간이 걸린 탓에 아마 기합이 잔뜩 들어갔을 테니까요.]
“…….”
사방에서 닦달하는 눈빛은 금지된 공간에 침입해 두근거리던 나를 공황 상태로 몰아넣었고, 나의 몸은 제이의 요구대로 휘적거렸다.
“으, 으아아……! 덤벼라!”
이래서 안 한다고 했던 거냐! 다들!
“이야아!! 기다려, 곰돌아! 내가 구해줄게!”
나뭇가지로 만든 무기를 들고 달려오는 아이와 사방에서 느껴지는 기대에 부푼 눈길이 나의 등을 떠밀었다. 내가 들어도 감정 따윈 담기지 않은 말을 내뱉었다.
“쉬…… 쉽게 넘겨줄 수 없지.”
자비 없이 허우적대는 아이의 무기가 눈에 훤히 다 보였지만 적당히 맞아주고 막으며 할리우드 액션이 저리 가라 몸을 움직였다. 소파를 사뿐히 밟고 탁자를 뛰어넘으며 조그만 아이를 상대로 난리를 피웠다. 동료 역인 줄 알았던 이들의 시선이 여전히 나를 쪼고 있는 게 훤히 보였다.
“이 악마! 승아가 물리칠 테다!!”
“으…….”
이 정도면 됐겠다 싶어 막대기를 휘두르는 아이에게 고스란히 맞아주기 시작했는데, 쪼그만 게 힘은 얼마나 센지 회초리에 두들겨 맞는 느낌이었다. 잘못한 것도 없이 얻어맞는 게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쁜지. 차마 애를 때릴 수 없으니 휘두르는 나뭇가지를 맞고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아! 너무 강력한 힘이군. 더는 버티지 못하겠어!”
“…….”
“곰돌이, 곰돌이를 빼앗……!”
“그만할래. 재미없어요.”
어?
싱거운 아이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놀라운 소리겠지만, 그새 재혁의 품에 안겨 나를 내려다보는 승아의 눈빛이 수치스럽게 느껴졌다.
“……뭐.”
차라리 아이만 그랬다면 모를까, 승아를 안고 있는 녀석도, 나를 닦달하던 이들도 모두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꺼림칙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아무 일도 없던 척 옷을 털며 일어났다.
“……뭐요.”
어색한 정적의 시간이 흘렀지만 그 아무도 움직일 생각을 않은 채 서 있었다. 어정쩡하게 계단에 걸쳐 서 있는 재혁의 큰아버지나, 애써 눈을 돌리기 위해 시선을 굴리는 제이나, 나를 바라보는 재혁이나 다들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였다.
저녁밥을 요구하는 승아가 아니었다면 아마 몇 시간이고 나를 노려보고도 남았을 이들이었다.
“제가 사 오겠습니다.”
제이가 서둘러 나갈 준비를 하자 재혁이 급히 막았다.
“아닙니다. 시간도 늦었는데 이만 가보셔도 됩니다.”
재혁이 저녁밥을 사오겠다니 옳다구나 쫓아가겠다고 난리 치는 승아까지 덩달아 나가는 덕에, 난장판이 된 집을 치우는 것은 재혁의 큰아버지와 나의 몫이 되었다.
엉킨 실 사이로 찢어진 물풍선들의 잔해가 걸려 있었고, 바짝 말랐던 바닥은 물 자국으로 난리가 나 있었다. 열심히 꾸민다고 종이로 만들어놓은 장식품까지 일일이 치워야 했다.
물에 젖어 반쯤 흘러내린 종이 모형의 얼굴을 봤다. 정말 악마라도 된 것 같은 형상이었다.
“로봇이 따로 없던데. 좀 심하긴 했었어, 암.”
재혁의 큰아버지는 목청을 가다듬더니 눈을 반쯤 감고 나를 보고선 배를 움켜쥐며 말했다.
“더는…… 버티지 못하겠어. 곰, 곰돌이를……!”
어떻게 저렇게 얄밉게 말할 수 있는지. 나보다 연장자만 아니었다면 가차 없이 이 악마 같은 상자를 들어 머리를 내려쳤을지도 모르겠다.
“……뭐 하십니까.”
“다 알면서 뭘.”
그는 세워져 있던 종이 상자를 들어 머리에 썼다. 캐주얼한 그의 복장에 어울리지 않으면서도 어딘가 어울리는 듯한 모습은 바닥에 놓여 있을 때보다 더욱더 공포감을 주었다.
이해 안 가는 행동을 하는 그를 내버려두고 나는 울타리에 엉킨 실을 풀었다.
“바로 물어볼 줄 알았더니 안 물어보네. 언제 또 어떻게 황당하게 골로 가는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미루지 말고 바로바로 캐묻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
“어디까지 아는지 궁금하다고 하지 않았나. 이제 별로 흥미 없어졌을까 싶기도 하고. 사는 게 좀 편해지면 아무래도 복잡한 건 돌아보기 싫긴 하지, 암.”
그는 손을 뻗어 나의 목 언저리를 더듬거렸다.
말도 꺼내기 전에 그는 나의 목에 걸려 있던 쇠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다가 싱겁게 놓아버렸다. 촉감을 느끼기라도 하는 듯 맨 손가락을 비비던 그는 내 손에 들린 실뭉치를 빼앗아 들고 아직 길을 막고 있는 실을 풀었다. 작게 읊조리는 그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겸이 그렇게 죽고, 바로 내가 널 찾아갔으면 아마 넌 내 손에 죽었을지도 몰라.”
“무슨…….”
신경 쓰지 않는다면 차고 있다는 것조차 잊어버릴 만큼 내가 이걸 왜 차고 다니는지, 언제부터 차고 다녔는지 기억나지 않는 목걸이였다.
“목걸이, 잘 갖고 있어달라고 했더니 언제부턴가 네 목에 걸어놨더라고. 일찍 죽어버릴 걸 알기라도 했는지. 유품이라고 해야 하나? 그렇게 남겨준 걸 고마워해야 하는지도. 뭐, 기뻐해야겠지. 그놈이 남긴 물건 중 유일하게 내가 준 거라고 하면.”
그의 손이 스쳤던 목걸이의 작은 펜던트를 쓸었다.
“이상한 생각 하지 마. 네 부모님 사이든, 가정 일이든 내가 파탄 낸 건 하나도 없다. 결과적으로 겸이랑 같이 산 적은 있어도. 난 지킬 건 지킬 줄 아는 미련한 놈이라서 그렇게 파렴치한 짓은 안 해.”
지금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이상하리만큼 넓었던 그의 집 주방이었다.
“네 아빠가 나만큼이라도 배려할 줄 아는 놈이었으면 해맑은 얼굴로 팔다리를 주체하지 못하고 버둥거리는 널 보여주지도 않았을 텐데. 내가 연기를 잘하긴 했다만. 가만 보면 유전되는 게 꽤 많아. 백겸, 너처럼 눈치는 더럽게 없어서 다 잃고 나선 나한테 오더라고. 그런 걸 보면 내가 나름대로 좋은 동료 역을 잘해줬던 모양이야.”
그의 손에 엉킨 실뭉치들이 가루가 되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검은 가루는 바닥에 내려앉기 전에 바람에 쓸려 흔적도 남지 않았다.
“약 만드는 법은 네 아빠가 살아서 돌아온다고 해도 못 알아낼 거다. 네 아빠도 너한테 쓴 약이 정확히 뭔지 모르니까. 마지막 작업은 오로지 내 머릿속에만 남아 있거든. 내겐 널 인간으로 만들어버릴 생각도 없었다고 하면 너무 잔혹한 말인가. 그래도 네가 지금 인간으로 세상에 남아 있는 건 겸이가 100% 신뢰했다는 결과겠지. 나를.”
꼬부라진 허리로 했던 노동이 무색하게 그의 손에 들어간 쓰레기들은 단번에 형체도 없이 사라졌고, 물에 젖어 얼룩졌던 바닥은 시간을 빨리감기로 되돌리기라도 한 듯 급속도로 말라들었다.
“물론 죽일 기회는 많았지.”
기이한 종이 상자만이 그의 머리에 남아 나를 건너다보았다. 얼굴도, 감정도, 상대의 모습도 읽을 수 없었다.
“차마 그러지 못하겠더군. 클수록 너한테 그놈이 너무 많이 남아 있어서.”
제 입으로 연기엔 자신 있다 말하는 남자의 머리에서 상자를 벗겨냈다. 그 말이 틀린 건 아니었는지, 내뱉은 말들과는 다르게 너무나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지금 이 아저씨가 왜 친절하게 구는지 의심이 들거든, 그냥 빚 갚나보다 생각해라. 일찍이 미련 놓지 못하고 도와주지 못한.”
눈썹을 으쓱이는 그를 두고 말없이 집 안으로 발길을 돌렸다. 아무렇지 않게 과거를 털어놓는 이의 말이 충격적으로 와 닿지 않는 이유는 그동안 겪고 들은 일들이 너무 화려했기 때문이었을까.
서로 다른 공간에 존재하는 듯 말없이 어질러진 방만 치웠다. 생각이 많아지면 정리를 한다더니, 왜 그런지 알 것 같았다. 머리로 쏠리던 정신이 여기저기 흩어지는 느낌이었다.
한참을 치워야 할 것 같던 집은 그의 힘 덕분에 큰 노동을 투자하지 않아도 금세 끝났다. 튀어나와 있던 나뭇조각까지 깔끔하게 처리를 한 그는 미련 없이 겉옷을 챙겨 입고는 나갈 채비를 했다.
“……오면 인사하고 가시죠.”
“됐다. 갈란다.”
웃는 얼굴로 나에게 종이 뭉치를 내던진 그는 가벼운 손 인사까지 잊지 않고 건넸다.
“뭡니까, 이건.”
“양 되는 법? 넌 별로 궁금해하지 않는 것 같다만, 네가 하면 통할 것 같으니 알려주는 팁.”
꾸깃꾸깃한 종이는 별것 없는 쓰레기 뭉치였지만 짧은 문장 하나가 그저 쓰레기는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있었다.
건네준 그에게는 미안했지만, 나는 종이를 갈가리 찢어 쓰레기통에 넣어버렸다.
혹시라도 누가 보면 안 되니까.
***
“으응…….”
나름대로 피곤하게 놀긴 했는지 저녁을 먹자마자 곯아떨어진 아이를 침대에 눕히고 나니 나까지 피로가 쏟아지는 느낌이었다. 누가 일을 할 거냐, 애를 볼 거냐 묻는다면 난 피를 쏟는 일이건 목숨이 달린 일이건 일을 하러 간다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었다.
침대에서 자는 아이를 옆에서 내려다보며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는데 뒤에서 포개지는 몸에 나도 모르게 몸이 굳었다.
“……!”
입에서 나오던 말이 그의 손에 막혀 아무 소리도 내뱉지 못하고 들어갔다. 거침없이 옷 속으로 파고드는 나머지 손은 화장실에서 씻고 나온 건지 평소보다 더 차가웠다.
목 뒤에서 비비적거리는 얼굴 때문에 간지러웠다. 망설임 따윈 없는 손이 과감하게 내 맨살을 만지작거렸다. 입을 오물거리며 입맛을 다시는 아이를 앞에 두고 집요하게 근육을 훑는 손에 신경이 쏠렸다.
목을 훑고 지나가는 질척이는 느낌에 소름이 돋았다. 은연중에 나오는 소리는 여전히 그의 손에 막혀 아무것도 나오지 못한 채 끙끙거리는 신음뿐이었다. 큰 소리를 내려고 해도, 그를 잡아다 내팽개치려고 해도 아이가 깰까 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그의 손에 몸을 내주고 있었다.
“으읍.”
한창 제 온도를 뽐내는 따뜻한 몸에 사방으로 닿는 그의 시린 체온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등 뒤에 있는 그의 가슴팍에 닿지 않기 위해 꿈틀댈 때마다 그가 더 밀착해오며 나를 죄었다.
“읍……!”
“금방 안 깨.”
귓속으로 전해지는 그의 숨과 낮은 음성을 접하자 목에 열이 올랐다. 그런 내가 웃기는지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귓불을 오물오물하는 느낌에 열을 식힐 새도 없이 손이 근질거렸다.
가슴을 지분거리는 바람에 끌려 올라간 옷을 내리려다가 몸을 더듬는 손을 잡았지만, 얼마나 힘을 주는지 떨어질 생각이 없었다. 결국 길을 바꿔서 이번엔 입을 막은 손을 잡았지만, 내가 크게 소리를 내진 않을 걸 알았는지 손쉽게 떨어져 나갔다.
“뭐 하는…….”
아무래도 판단을 잘못 내린 듯했다. 덕분에 한 손이었던 그의 자유로움은 두 손으로 확장되어 나를 몰아붙였다.
“먹고 싶어.”
그간 들을 수 없던 직설적인 말에 내 심장까지 빨리 뛰었다.
“…….”
“싫어?”
보채듯 손목을 핥아대는 그의 혀에, 이미 젖은 입술에 나의 맥박이 나에게까지 전해졌고 그의 침 삼키는 소리가 청각을 자극했다. 노골적으로 붙어오는 그의 몸은 급하지 않고 느긋했으며, 강압적이지 않으면서도 나를 몰아붙였다.
“……손목은 싫어.”
“그럼.”
입술? 목? 가슴? 배? 다리?
주저 없이 신체 각부 명칭을 읊는 그의 목소리에선 이미 욕구가 잔뜩 끓고 있는 게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내 옆구리를 쓸고 지나가는 손끝은 소름 끼치게 부드러웠다.
그대로 뒷걸음질 치며 그를 밀어냈다. 문을 닫자마자 몸을 돌려 마주한 그의 얼굴을 잡아 입술을 부딪쳤다. 화장실로 통하는 복도에는 아직 그가 남긴 습기가 있었고, 열이 오르기 시작한 그의 얼굴은 따뜻했다.
엉덩이에 닿은 바닥은 차가웠다. 움찔거리는 건 또 어떻게 알아챘는지 그는 자신의 허벅지 위에 나를 앉혔다. 옷을 입고 있지 않았다면 영락없이 밑을 드러낸 뒤 맨다리로 그의 허리를 휘감는 낯 뜨거운 자세가 됐겠지. 지금이라고 안 그런 건 아니지만…….
볼을 스치고 귀를 따라 목까지, 그의 입술이 지나간 자리는 점점 더 예민해졌다. 끈적거리며 쇄골을 타고 가슴으로 내려가는 그의 얼굴을 잡아 내 목에 처박았다.
익숙하게 살을 핥고 날카로운 이로 긁으며 왜냐고 묻는 녀석에게 대답했다.
“얼굴 보면 쪽팔리니까…….”
그가 힘을 주체 못 하고 파고드는 덕에 등에 부딪쳐 덜컥거리는 문소리 사이사이로 그의 목 넘김 소리가 들렸다. 얌전히 배를 채울 때까지만 기다리면 되겠거니 해서 애써 촉각에 신경을 쓰지 않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저 조심하는 할짝거림에서 살을 빨아대는 것을 넘어 아랫니까지 긁어가며 끝을 모르고 달려드는 녀석 때문에 불편한 공포심이 꾸물거리며 나를 덮쳤다.
“이제…… 좀…….”
양손으로 그의 어깨를 밀어봤지만 꿈적도 하지 않았다. 손목을 잡는 그의 악력에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조금은 거칠고 뜨거워진 숨결이 목을 간질였다. 그의 혀가 닿을 때마다, 살에 그의 입술이 뭉개질 때마다 피부가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성욕과 식욕이 지배하는 공간에서 퍼지는 긴장감은 그에게나 나에게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강렬한 자극을 주고 있었다. 그는 완전히 이성을 잃지는 않았는지 이내 잡은 손을 놓았지만 힘이 잔뜩 들어간 손을 어찌할 줄 모르며 끙끙거리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피를 토해내는 피부를 머금기 바쁜 녀석의 얼굴을 잡아챘다.
“위험, 하다고……!”
“하아…….”
선명하게 번뜩이는 눈은 진정되나 싶으면 곧바로 나를 좇았다. 입가에 흥건히 묻은 핏방울이, 입술에서 흘러 턱에 고인 나의 핏방울이 이해하기 힘든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자신의 욕구를 억누르기 위해 인상을 잔뜩 구긴 채 힘을 쓰는 그의 눈은 핏방울과 다를 바 없는 색이었다. 피에 젖은 입가를 닦아내는 그의 손을 낚아채 더럽혀진 곳을 핥았다. 붉은 액체로 물든 흔적을 지웠다. 그런 나를 보며 거친 숨을 헐떡이는 녀석에게서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곧게 뻗은 그의 손가락 하나하나를, 티 없이 깨끗한 그의 손을 핥았다. 빳빳하게 힘이 들어갔던 손은 나의 혀에 닿을 때마다 부드러워졌다. 아직 복잡해 보이는 그의 얼굴에 묻은 핏자국을 핥았다. 비린 맛 속으로 파고드는 그의 중후한 향을 먹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타액에 젖은 혀로 그의 부드러운 뺨을, 보기 좋게 굴곡진 그의 턱을, 이젠 좋아져버린 그의 입술을 닦아냈다. 그의 절제라는 자물쇠를 풀어버린 이상, 우리 사이엔 낯간지러운 입맞춤이나 손장난은 사치였다.
“으……!”
침에 젖은 유두를 잘근거리며 엉덩이골을 쓸어내리는 덕에 허리가 절로 들렸다. 내가 듣기도 민망하게 튀어나오는 소리를 참기 위해 힘을 쓰는데, 그는 더 울어보라는 듯 손가락으로 밑을 꾹꾹 눌러댔다.
“으응…….”
새는 신음에 승아가 깨진 않을까 목소리를 죽이기 위해 애썼지만, 그는 그런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더 거침없이 행동했다.
“흐…… 미친 거 아니야?”
“미쳤으면 진작 승아가 문을 벌컥 열었을걸. 일주일 전에도 네가 너무 닦달하는 바람에 들어왔잖아, 승아.”
“아니, 그건 네가 문을 안 잠갔……!”
그에게서 떨어지려고 해도 등을 막고 있는 문 때문에 벗어날 수 없었고, 허리를 숙이자 그의 손가락이 더욱더 깊은 곳을 긁어대며 나를 몰아붙였다.
“읏! 그리고 내가 못 버틴다고 했는데 네가 달라붙는 바람에 그런 거지, 난 아무 잘못 없…… 흐으…….”
몸은 자극에 점점 더 예민해졌다. 가슴에 닿은 그의 입술에 움찔움찔했고, 그만해야 한다는 이성이 무너지며 그를 닦달하기 시작했다.
“아아…….”
새어 나오는 신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깨무는 짓을 그만하고 그를 덮치기 시작했다. 빨리 끝내고 싶은 욕구도, 그를 굴복시키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다만 어서 더 큰 자극을 달라고 외치는 몸을 위해 넣어달라고 졸라댔다.
“넣어줄까?”
“물을 시간에 빨리…….”
번쩍 들린 몸이 단번에 땅에 닿았고, 벽을 마주한 몸은 이내 그에게 덮쳐졌다. 그의 발에 밀려 넓어진 두 다리의 거리만큼 그와의 거리는 밀착되었다.
“아읏……!”
밑을 찌르는 박자에 맞춰 앞이 흔들렸고, 미끄러지며 안을 쑤시는 그의 것에 얼굴은 점점 홧홧해졌다. 벽을 짚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쓸리는 손바닥이 쓰라려 꼼지락거리자 그는 나의 상체를 받치며 일으켜 세웠다. 꼿꼿하게 허리가 선 만큼 밑이 강하게 조여졌다.
“하윽……! 앗…… 아!”
“그렇게 소리 내면 승아 깰걸.”
더욱 강한 자극을 원하며 더 깊게 박히기 위해 허리를 흔들어댔다. 흘러나오는 신음을 참아야 한다는 생각 따위는 날아간 지 오래였다.
“네가 할 소리야? 그게……!”
“읏…….”
계단을 내려가기 위해 문을 열자마자, 짓궂은 녀석은 나의 목덜미를 깨물며 바로 붙어왔다. 그는 새어 나오는 앓는 소리를 막기 위해 나의 입을 자신의 입술로 막으며 축축한 엉덩이를 한 손에 잡고 벌어진 밑을 손가락으로 문댔다. 이미 한 차례 난리를 친 통에 부드러워진 밑은 언제든지 다시 벌어질 난리를 환영하듯 움찔댔다.
“우움…….”
아이의 뒤척임에 나는 뻣뻣하게 몸이 굳었건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대범하게 행동했다. 긴장감과 불안감은 흥분에 젖어 자극적으로 다가왔고, 아이에게 들켜서는 안 된다는 이성적인 말마저 나를 젖게 했다.
“아으…… 읏……!”
“곤란하지 않아? 여기서 그런 소리는.”
별걱정도 안 하면서 웃음기 섞인 농염한 말투로 속삭이는 그를 보자 어딘가 약이 올랐다. 반발심에 자유로운 두 손으로 그의 것을 만지려고 하자마자 그는 미련 없이 나를 들쳐 메고 계단을 내려갔다.
“잠깐 좀…… 내려놓……!”
한 발을 들여놓기 위해서 그 고민과 난리를 떨며 시간을 보냈는데, 그의 어깨에 몸이 얹히자 순식간에 그의 방에 들어갈 수 있었다. 살을 파고드는 것 같은 그의 향이 매섭게 죄어오는데, 그가 말한 냄새에 정신이 쏠린다는 게 뭔지 알 것 같았다.
“으으…….”
절정으로 다다를수록 일그러지는 그의 표정과 무거운 신음이 나를 더 자극했다. 나의 땀에 젖어버린 그의 앞머리를, 익어버린 몸과 살짝 풀린 그의 눈을 본다면 누구도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
얼굴을 베개에 처박았다. 지친 몸은 패잔병처럼 축 늘어져 있었고, 옆에 있는 녀석도 별다를 바 없었다. 뭐에 그렇게 흥분했었는지 아직도 급하게 뛰는 심장을 차분하게 만드는 데 신경을 써야 했다.
한참을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가 산소를 달라고 경고를 날리는 몸을 위해 고개를 드니, 내가 녀석의 방에 들어와 있다는 게 실감이 났다. 이렇게 쉽게 들어올 수 있는 곳이었다면 그냥 당당하게 들어왔어도 별로 상관없던 거 아닌가 싶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낮에는 너무 밝아서 보지 못했던 물건들이 지금은 어두워서 보이질 않았다. 쌓이기만 한 채 풀리지 않은 궁금증과 귀찮음의 경계에서 움찔거리고 있는데, 뒤에서 끌어안는 힘에 몸이 힘없이 죽 딸려갔다.
“……찝찝해. 달라붙지 마.”
“그렇게 궁금해?”
질문에 대답 없이 발버둥만 치고 있으니 그는 더 바짝 몸을 붙였다. 나는 결국 그의 품에서 몸을 늘어트렸다.
땀에 젖은 몸에 달라붙는 그에게 떨어지라는 말을 했다가 되레 나의 향이 진하게 풍겨서 좋다는 미친 소리를 여러 번 들었기에 반항이 얼마나 쓸데없는 짓인지 알고 있었다.
떨어질 생각이 없어 보이는 녀석 때문에 간간이 몸을 돌려 밀어냈지만 풀린 몸에서 나오는 힘은 참 보잘것없었다. 킥킥 웃어대는 그의 얼굴을 밀어내니 그는 그제야 허리를 끌어안은 손을 풀어냈다.
몸을 일으키자마자 발치에서 구르던 얇은 이불을 끌어 대충 몸을 감싸고 보란 듯이 그의 책상으로 다가갔지만, 그는 예상외로 나를 막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망설일 필요도 없이 반대편으로 돌아가 있던 액자를 들어봤다.
“뭐야…….”
액자 속에 있던 건 이름도, 얼굴도 모를 아이들의 사진들이었다. 다른 액자들을 봐도 다를 바 없었다. 모두 다른 아이들로 나이도, 성별도 다 제각각인 아이들이었다.
“왜, 상상했던 거랑 달라?”
가벼운 그의 말투에 위화감이 들었다.
“이 사진들은…….”
“내가 봤던 아이들.”
“죽었어?”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너무나 당연하게 튀어나간 질문이었다. 거리낌 없이 내던진 나의 말에 그는 여전히 가벼운 말투로 대답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잠시나마 정적이 흘렀다. 그를 보고 있지 않았기에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보기 두려웠다. 마음만 먹었다면 굳이 보여주지 않아도 됐을 것들을 거리낌 없이 보라며 올려놓은 게, 사실은 봐달라는 의미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대답을 해.”
“잘살고 있길 바랄 뿐이니까.”
침대에 늘어졌던 그는 어느새 나의 어깨에 턱을 얹고 있었다. 아직 열이 식지 않은 몸이 뜨겁게 느껴졌다. 그렇게 뒹굴고서도 이런 접촉에 볼이 달아오르는 느낌을 받는다면 막장 인생의 길로 접어든 게 아닌가 싶었다.
“…….”
순간 차단된 시야에 그의 손을 잡았지만 낮게 파고드는 목소리가 모든 신경을 쓸어갔다.
“사실, 보라고 열심히 전시해놨는데 막상 보여주려고 하니 조금은 망설여지긴 해.”
손등에 포개진 그의 손이 깍지를 낀 채 공기를 갈랐고, 얼마 가지 않아 손끝엔 보드라운 천이 닿았다. 이게 뭐냐고 묻지 않아도, 그의 책상에 있던 수상쩍은 물건임을 알 수 있었다. 어림짐작해서 아무리 크게 잡아도 팔뚝만 한 통 안에 있는 게 뭔지 알 수 없었지만, 막연히 겁이 덜컥 나는 것도 사실이었다.
“…….”
“궁금해?”
철저하게 가려둔 통 안에 아이의 머리카락이건, 잘린 손가락이건, 찰랑거리는 피가 고여 있건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포르말린에 담긴 동물들의 사체가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어째서 이런 잔인한 상상만 계속 떠오르는지 알 수 없었지만 자라온 환경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대답 대신 손에 닿은 천을 집어치우곤, 연신 잔인한 이미지들을 머릿속에서 굴리고 온갖 물건들을 나열해가며 커지는 생각에 잠식되기 전에, 시야를 막은 그의 손을 잡아챘다.
“……아?”
허무하게도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유리병이었음에도, 통 안은 텅텅 비어 아무것도 내비치지 않고 있었다. 황당한 상황에 유리병을 빤히 보고 있자 그가 알아서 입을 열었다.
“뭐 같아?”
“……장난해?”
“아니. 그럴 리가.”
“뭔데, 이게.”
“네 냄새.”
황당한 발언에 입이 떡 벌어졌다. 언제, 어떻게, 어디서 이런 걸 만들어서, 대체 왜 갖고 있냐고 물어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미친 변태 새끼.”
그는 나의 말에 눈썹을 한 번 으쓱했다.
“뭐 그럴지도.”
“넌 요절할 거야.”
“왜.”
“조만간 내 손에 뒈질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