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 시작과 끝 (18/21)

17. 시작과 끝

[―상황입니다. 20XX년 7월 17일 01시 57분. 각 대원은 통제에 따라 움직입니다. 다시 한 번 방송합니…….]

거짓말같이 조용했던 날들에 작별을 고하듯, 뒤집힌 분위기는 온몸의 세포를 모조리 깨우는 느낌이었다.

이 바닥에서 10년 가까운 생활을 했지만 처음 듣는 안내 방송이었다. 아마 부대에 몸담고 있는 이들의 90%가 그럴 거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40년 만에 울린 소리.

복귀를 환영하듯 울리는 소리는 그렇게 세포 하나하나를 깨웠다.

그동안 부대에 울려 퍼졌던 예정된 삶과 죽음이 아닌, 그 누구도 어떤 결말을 보게 될지 모르는 소리였다. 마치 하늘이 울리는 듯 퍼지는 소리는 시끄럽다 못해 심장을 울렸다.

“적응할 시간도 안 주네.”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아직 잠이 덜 깬 아이를 안고 서로를 봤다.

재민이 했던 모두를 죽이겠다는 말이 그저 헛말이 아닌 진심이었음을 안 지금, 나는 뱀파이어들 사이에 껴서 뱀파이어들을 위해 전장으로 뛰어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반년도 채 되지 않은 시간 동안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지 생각하기엔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재혁은 나에게 담담하게 물었다.

“진짜 갈 생각이야?”

앞으로 어떻게 될지. 무사히 끝난 뒤에도 세상은 똑같을지, 아니면 전혀 다른 공존이 시작될지 알 수 없었지만.

“……나보단 네가 더 문제인 것 같은데.”

“전혀.”

그는 아무런 감정이 없어 보이는 얼굴로 입술을 들이밀었고, 나는 손으로 급하게 막으며 말했다.

“승아.”

“흠…….”

재혁의 얼굴에 아쉬움이 남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떨어지기 무섭게 이마에 닿았다 떨어지는 입술에 그를 노려보니 자기는 잘못한 것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나도오.”

그는 이마를 가리키며 웅얼거리는 아이의 이마에도 입술 도장을 찍어주었다.

새벽에 울리는 사이렌 소리와 귀를 때리는 안내 방송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관사에서 쏟아져 나온 이들은 모두 부대를 향해 달렸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이들도 모두 몸이 외워버린 순서대로 준비하고 있었고, 어리벙벙하게 움직이던 신입들도 분위기에 눌려 그 어느 때보다 빠릿빠릿한 상태로 서 있었다.

“백유운!”

표성에게 아이를 넘겨주자마자 닿는 서늘한 공기가 나를 현실로 데려다놓았다.

“아저씨도 오래오래 있다가 와?”

입을 다문 채 심각한 얼굴로 보는 아이의 볼을 꾹 눌렀다. 다신 만날 수 없을 사람을 기다리는 것만큼 무의미한 일이 있을까.

“아니, 금방 올 거야. 안 오면 이 아저씨 미워하면 돼.”

재혁은 자신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끌어 내렸다.

“그럴 일 없어.”

폭발음이 터지기 무섭게 전국의 상황을 알리는 화면에선 사망자 수와 부상자 수가 쉬지 않고 올라갔다. 모두 숨을 죽이고 서 있었다. 빨간색과 주황색으로 쓰인 숫자가 주는 압박감과 두려움이 모두의 근육을 깨우고 머리를 밝혔다.

아직도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아서였을까. 동료로서, 가족으로서 어쩌면 마지막일 수 있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유난을 떠는 인사를 나누는 이들은 없었다.

“실제 상황이다! 01시 57분 제주도에서 시작된 공격은 15초 뒤 부산, 대구, 21초 뒤 곡성과 천안, 40초 뒤 구미와 상주, 논산, 대전, 그리고 전국으로 퍼지고 있다. 피해 상황, 위치로 보아 그간의 사냥처럼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사냥이 아닌! 동족의 살상을 목적으로 벌이는 짓이라고 추정 중이다.”

하늘은 새벽인 줄도 모를 만큼 밝게 빛났다. 공중에서 모습을 드러낸 제로들의 몸에서 스파크가 튀듯 빛이 번쩍였다. 폭발음이 울릴 때마다 일그러지는 제로들의 모습은 괴이했다.

“오랜 시간을 미뤄온 싸움이다! 시작을 알렸으니 우리는 끝을 맺어야 한다! 알겠나!”

찢어지는 대답 소리와 동시에 폭발음과 함께 먼지가 일면서 시야를 잃었다. 울렁거리는 속을 부여잡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총성과 폭발음이 난무하는 공간은 현실과 가상의 세계가 번갈아 교대하듯 혼란스럽게 일렁였다.

사람들을 보호하고 서로를 공격하기 위해 반강제적으로 전국을 오가는 공간 속에서, 아이들의 피를 잔뜩 흡수한 놈들은 머릿수로 비교하기 민망할 정도로 적었지만 상대하기 버겁다는 말이 절로 떠오를 정도였다.

마른 입술을 적시고 굳은 몸을 되돌리며 해야 할 일들에 대한 목록을 되뇌었다.

“뒤는 내가 봐줄 테니까 맘껏 날뛰어봐.”

매번 떨어지지 말라며 으름장을 놓던 녀석은 귓가에 속삭이며 나의 등을 떠밀어 전장 속으로 밀어 넣었다. 억누르고 살아왔던 힘을 쏟아내는 녀석의 일부가 나의 몸을 맴돌고 있다는 걸 알았다.

“……네 가족이라고 특별대우 따윈 하지 않을 거야.”

“상관 안 해.”

“누가 됐건 당한 건 그대로 갚아줄 거야.”

“그래.”

몸은 가벼웠다. 걱정이 무색할 만큼 바람을 가르는 느낌도 자유로웠다. 서늘한 공기마저 뚫고 맺히는 땀방울이 불쾌함이 아닌 살아 있음을 알리는 질척거림이었음을.

“이, 이거 잘못 맞으면 죽는 거 맞죠?”

“넌 그냥 빠져 있으면 안 되냐? 꼭 나와서 뛰어야 해?”

하늘은 진정되어 보였던 것과 다르게 현장에서 점점 두려움에 휩싸여가고 있었고, 태주는 자신의 편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늘을 위해 빠지라 격려하고 있었다. 언제나 장난기가 다분했던 태주가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대화를 나눈다는 것 자체가 상황의 심각성을 쉽게 알려주고 있었다.

서로가 유리한 곳으로 이끌어가려는 힘 덕에 공간 자체가 쪼그라들며 압력을 가했다. 숨쉬기도 벅찬 곳에서 뛰어다니며 제로 놈들의 생사를 걱정할 필요 없이 총을 겨눴고, 혼란 속에서도 스쳐 지나가듯 풍기는 재혁의 향이 들뜨는 심장을 잠재워 나를 안정시켰다.

“재혁이 녀석은 꼴사납게 발을 동동 굴렀다만 나는 다시 못 일어난다는 걱정도 안 했다. 네가 누굴 닮아 태어났는데.”

빳빳한 옷에 하마터면 알아보지 못할 뻔했지만, 아버지에게 친근함을 표시하던 남자의 목소리를 잊을 순 없었다.

재혁의 큰아버지는 몸을 풀고 숨을 몰아쉬며 최대한 뚫린 평야 속에 놈들을 묶고, 싸우는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힘쓰고 있었다.

“어디까지 알고 계시는지 물어도 됩니까.”

“너에게 겸이가 만든 약물을 주입한 게 나라는 거…… 라든가.”

“당당하시네요.”

“내가 별나지 않게 조용히 살았다면 아무 일도 없었을지도 모르고, 너도 평범하게 살았을지도 모르겠군.”

손에서 느껴지는 반동과 어느 곳 하나 빠짐없이 신경이 곤두서 있는 감각에 정신이 없었다. 죽음으로 끌어당기며 끊어지는 신호 속, 찰나의 순간을 잡아 놈들을 노리는 것은 보고 공격한다는 개념이 아니었다. 모든 감각을 동원해 본능적으로 움직인다는 쪽이 더 정확했다.

“원망하는 짓은 안 합니다. 과거에 가정을 세워봤자 바뀔 게 없다는 걸 알았…… 읏!”

아슬아슬하게 눈앞에서 멈춘 유리 조각이 나를 막고 있는 재혁의 힘 덕분인지, 나타났다 숨기를 반복하며 손을 떨고 있는 남자의 힘 탓인지 알진 못하겠지만, 한눈을 파는 순간 머리가 뚫리고 유리 조각에 고슴도치가 되어버릴 수도 있다는 건 확실히 알았다.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간다면 언제든 때려치우고 설명 들으러 갈 테니 변명거리 준비해놓으세요.”

“물론.”

“둘 다 떠들 시간 있으면 집중을 더 하는 게 나을 듯싶은데.”

압력이 가해지는 곳에서 숨통을 틔우려고 발악하는 재혁의 경고가 떨어지기 무섭게, 인이어를 통해 전국 각지의 상황을 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처참하고 끊어질 듯한 숨으로 내뱉는 말들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인원 확인 불가입니다.]

[전라도 지역 뚫렸습니다. 마구잡이 흡혈을 하며 민간인 신분인 하프들에게 접근, 복종 거부 시 협박과 함께 강제 굴복을 시키고 있습니다. 각 대원은 상부의 명령에 따라 정확하게 움직여주시기 바랍니다.]

[공간 이동…… 경계선에 있을 시 신체 절단이 일어날 수 있습…… 다.]

[하늘! 걸림돌이 될 것 같으면 현장에서 나와.]

[괘…… 괜찮습니다!]

시스템의 안내음과 표성의 단호한 목소리는 정신을 계속 차릴 수 있게 귀에 내리꽂히며 우리를 각성시켰다.

[윽, 뭐가 이렇게 무식하게 덤벼드는 새끼들이 많아요? 단체로 약 빨았나? 다 어디 있다가 기어 나온 겁……!]

“온다.”

태주의 칭얼거림이 무색하게 점점 더 늘어나는 놈들은 잔뜩 피 맛을 보고 넘어와 더 미쳐 날뛰고 있었다. 한 명의 대원이라도 더 지키며 제로를 제압하려는 우리와, 아이들의 피를 마시고 살해를 위해 학수고대하던 놈들이 동등한 상대가 될 리가 없었다.

“내가 죽기 전까지 네가 죽을 일은 없어.”

“……똥폼 잡지 말랬다.”

손에 잡힌 놈은 재혁이 사라지지 못하게 막은 덕에 관절을 꺾어가며 몸부림치고 있었다. 강제적이었을지, 자발적이었을지, 그것도 아니면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날뛰는 건지…… 어떤 연유에서 내 손에 잡혀 몸부림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다는 게 찝찝해도 그런 걸 따지며 안녕을 빌 때가 아니었다.

“사실이니까.”

내가 날린 총알은 제로의 미간을 쑤시고 들어가 머리를 관통했고, 재혁의 손은 자비 없이 상대의 심장을 쑤셨다.

[공간 이동 중 경계선에 있을 시 신체 절단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거리 유지…… 반복 안내합니…….]

[과 대미지로 위치 조정 중. 대기.]

[서울 8팀 지원 요청. 30초 뒤 방어 전환.]

[거부합니다. 현재 인원 파악 80% 완료. 우선 보호 지역은 제주, 서울, 부산으로 타 지역에 협조 요청 중입니다. 전투 가능 지역으로 확인된…… 예상 시…….]

―블랙아웃.

“하아…….”

상황실과 주고받던 신호가 끊기고, 가이드라인을 벗어나 감으로 맞히던 힘에 주변은 반복적인 마찰을 이기지 못하고 암흑으로 뒤덮였다. 특수 고글은 이변 속에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내 시야를 앗아갔다. 거친 숨소리와 잘그락대는 소리만 가득한 공간에서 쉽사리 입을 여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다들 귀를 기울이며 서로를 경계했다.

입술이 바짝 마르고 목에선 피 맛이 났다. 아직 요동치는 심장과 다르게 굳어 있는 몸은 그 격차를 이기지 못해 떨리고 있었다. 지직거리는 소음에 저절로 인상이 쓰이고 오만가지 향이 섞여 나는 악취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모두 상황실의 대원들이 무사하기를 빌며 다시 찾아올 소란을 위해 숨을 죽이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어쩌면 영원히 깨져버린 공간 속에서 허우적거려야 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이가 없다는 건 확실했다.

하지만 싸움이란 그리 녹록한 일은 아니었다. 기다림이 무색하게 귀를 뚫고 들어온 건 다름 아닌 노랫소리였다. 가늘고 높게 떨리는 목소리.

[사…… 산타 할…… 알고…… 대…….]

지직거리는 신호를 뚫고 나온 노랫소리는 정확한 음을 잡지 못하고 귓가에 울렸고, 머잖아 익숙한 아이의 목소리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와 관련된 거라면 마지막까지 모조리 앗아가려는 재민의 속내가 훤히 보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를 이용해 나에게 상실감과 무력함을 줘서 무엇을 얻고 싶은 건지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부들거리는 나의 손을 잡아챈 재혁의 목소리에서 단호함이 느껴졌다.

“……녀석이 바라는 대로 흔들리지 마.”

[누가 착한 앤지…… 나쁜…….]

울먹이는 소리에 섞여 들리는 웃음소리가 사람을 미치게 했다. 아이의 존재는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고, 처참해진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강제로 들어갈 수 있게 해줄 테니까, 실수하지 말고 구해.”

재혁의 큰아버지는, 끔찍한 결말을 맞을 수도 있는 말을 인심 쓰듯 아무렇게 내뱉었다. 나의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었을까.

“……죽을 수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변명거리 생각하기 싫어지신 겁니까.”

“그렇게 쉽게 죽을 거였으면 진작 죽었지, 어떻게 그 난리 통에 살아남았겠나. 죽기라도 하면 재혁이한테서 들을 수 있게 해놓았으니 걱정은 하지 말고.”

[오늘…… 바, 밤에…….]

고민해야 할 이유도 없었고, 할 시간도 없었다. 이미 온몸은 난도질당하는 듯한 고통을 삼키고 있었다.

헛구역질을 하며 무너진 몸을 일으켰다. 부대 건물 안, 안정적인 공간이 되레 더 불안하게 느껴졌다. 시끄럽진 않아도 언제나 웅성거리며 비어 있을 날이 없던 곳은 텅텅 빈 채 물방울 떨어지는 작은 소리까지 울리고 있었다. 등을 쓸어내리는 느낌에 고개를 돌리니 재혁이 눈썹을 으쓱거리며 눈을 마주쳐왔다.

재혁의 살을 갉아 먹으며 옮겨진 몸은, 언제고 찢어질 것처럼 불안하게 유지됐다. 이런 고통에 익숙해 보이는 재혁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지만, 덩달아 함께 넘어온 팀장님은 정신을 차리기 위해 바닥에 침을 뱉고 애쓰며 중얼거렸다.

“으…… 무슨 이런 미친 경험이 다 있냐. 계획대로 되고 있는지 확인해봐.”

“지금까지는 무리가 없어 보입니다. 적정 유지 시간은 20분. 공간을 깨트리고 나가려고 할 때, 상대 쪽에서 막을 겁니다. 그때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나가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다신 못 나갈 수도 있으니까요.”

팀장님은 이해가 됐다는 듯 재빠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목을 가다듬었다.

“아아…… 첫 번째는 꼬맹이 구출. 두 번째는 무사히 살아서 빠져나가기. 이해 못 한 자 거수.”

“……말은 쉽죠.”

“어려우면 안 할 생각이었나?”

“…….”

이렇게까지 누군가 살아 있길, 무사하길 바란 적은 없었다. 나 자신은 타인에 의해 많은 일을 겪었다지만, 나 때문에 아이가 겪지 않아도 되었을 일을 겪는다고 생각하면, 혹시라도 최악의 모습을 보게 된다면…… 지금까지 생긴 모든 일보다 더욱더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이 몰려올 것 같아 두려웠다.

앞장선 재혁의 뒤를 따랐다. 몇 년을 보낸 익숙한 공간이지만 낯설었다. 발소리를 죽인다고 재민의 귀를 속일 순 없었지만, 최대한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바닥에 날리는 서류 종이들과 어수선한 자리, 쓰러진 화분까지. 살아 있는 것들이 한 번에 증발해버린 곳은 금방이라도 모든 게 얼어붙은 것처럼 차가웠다.

찢어질 듯한 공기 속을 지나가는 일은 되레 죽어 있던 예민한 세포까지 깨우며 감각을 더욱 선명하게 만들었다. 사방으로 감각을 세우며 그의 뒤를 따랐고, 그 누구도 쓸모없는 농담을 던지지 않았다. 날카로운 숨소리와 마른침 넘어가는 소리가, 내색은 하지 않아도 다들 얼마나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지 보여주고 있었다.

“걱정돼?”

무심한 척 던지는 재혁의 질문에 대답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걷는 일만 반복했다.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고 있는데 태연하게 걷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조금씩 속도를 높이니 앞서가는 대원들의 발걸음도 빨라지기 시작했다.

“진작 일이 일어날 걸 알았다면 안 벌어지게 끊었어야 할 거 아니야. 그럼 이 지경까지 오지도 않았을 테고 애꿎은 사람들이 피해를 보는 일도, 우리가 지금 승아를 구하러 가는 일도 겪지 않았을 거고. 걱정되느냐는 말 같은 거 하지 마. 그런 질문에 대답하기 싫어.”

몸을 찢는 고통과 아이를 향해 곤두선 신경으로 곱게 대답이 튀어 나갈 수가 없었다. 그런 나의 말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한참 침묵이 흐른 뒤 정적이 깨진 건 팀장님 때문이었다. 한숨을 푹푹 내쉬며 내뱉는 말에는 뼈가 있었다.

“그런 식으로 의사소통을 하면 대화가 이어져? 대화하는 게 거의 싸우자고 시비 거는 수준인데.”

“……되네요. 제가 갑이 된 덕분에.”

“갑?”

“제 말에 토를 못 다는 옵션을 장착해서 말입니다.”

나의 말을 들은 팀장님은 어딘가 즐거워 보였다.

“요즘은 그런 것도 대화라고 쳐주나 보네. 최근에 조용하더니 잡혀 사는 줄은 몰랐어.”

“……자처한 일이니 불만은 없습니다.”

깔끔하게 내던지는 그의 말에 놀란 건 팀장님보다 오히려 나였다. 한껏 경직된 몸으로 앞만 보고 걷던 녀석이 갑자기 고개를 돌려 눈을 맞추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시선을 피해버렸다.

“앞이나 보…….”

나도 모르게 총을 든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불현듯 닥치는 익숙한 중압감이 얼마나 내 몸에 깊이 박혀 잊히지 않고 기억하고 있는 건지. 살의를 뿜는 것도 아니었고 물리적인 위압감도 없었지만, 내 목을 죄어오는 듯한 느낌에 긴 숨을 내뱉어야 했다.

“…….”

“기뻐할 일이야. 형제에게 집착할 사람이 생겼다는 건.”

재민의 목소리가 아니었더라도, 재혁과의 대화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재민이 쓰고 있는 가면에 나의 손끝을 쓸고 새겨진 선이 있었기에 알아볼 수 있었다. 붉은 핏자국은 이미 생기를 잃고 검게 죽어 있었지만, 재민은 전혀 개의치 않아 보였다.

굳이 돌아다니며 찾을 필요도 없이 자리를 잡고 우리를 기다리는 이와의 거리는 몇 걸음이 다였다.

“지금이라도 조용히 끝낼 수 있어. 아이는 넘기고, 그만둬.”

“뭐…… 그만둘까?”

재혁의 말에 장난스럽게 대답한 이는 의자에 앉아 여유로움을 만끽하며 망설임 없이 자신을 드러냈다. 흔쾌히 가면을 벗고 타인의 모습 뒤에 숨지 않았다.

그는 몸을 가리고 힘을 주는 데 집중한 나와 다르게,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흰 복장을 한 채 웃고 있었다. 너무 편안한 웃음에, 그의 앞 책상 위에서 잠이 든 아이의 얼굴에, 상황의 심각성을 모두 잊을 뻔했다.

그런 생각을 한 나를 비웃듯 그는 아이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느릿하게 쓸며 말을 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넌 재미가 없어.”

“이곳에 재미를 찾을 일은 존재하지 않아.”

“그럼 이런 시시한 곳에서 뭐 하러 살아.”

“원점으로 되돌리려고.”

“뭐, 우리가 스스로 목을 매며 살던 때로? 아니면 패싸움을 하던 때로. 그것도 아니면 하루 전?”

“거짓되지 않은 시점으로.”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그와 다르게 재혁은 단 한 번도 목소리 톤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그런 그의 모습이 익숙한지 재민은 더욱 그를 달달 볶으며 깐죽거리기 바빴다.

“하…… 당신들은 우리의 손에 놀아났습니다~. 평화로운 세상을 위해서 노력한 것뿐입니다~. 아이들은 고통스럽지 않게 살다가 죽었으니, 자, 지금이라도 다 같이 평등한 세상을 만들어볼까요? 이렇게 말하면 되는 건가? 바닥에 대가리라도 박으면서 사죄라도 하는 거야?”

“너한테 조롱받을 만한 짓은 한 적 없어.”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건 본인이 더 잘 알 텐데. 그렇지?”

재민은 뻔뻔하게도 나를 보며 동조를 구했다. 홀로 있으면서도 태연한 그 태도에선 긴장감이라곤 느껴지지 않았다. 그 사이에 끼어든 팀장님은 차분한 말로 그들을 갈라놓았다.

“그런 사죄와 용서로 쉽게 해결될 일이었으면 그쪽이 날뛰기 전에 끝날 일이었을 거다. 단순한 머리를 굴리는 네놈이랑 세상은 어울리지 않아.”

“흐음.”

“소란을 피웠으니 뭐라도 된 것 같은 착각을 하고 우월감에 젖어 있겠지만 모두 헛된 일이다. 전부 허황된 현실이라는 걸 깨닫는다면 좋겠지만 네놈의 머리론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일뿐이겠지. 더 멍청한 짓을 벌일 생각이라면 다시 한 번 고민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군. 끝내는 방법이 아직은 남아 있으니.”

재민의 모습이 익숙하던 엄마의 모습으로 변해갔다. 가짜라는 걸 알면서도 눈앞에 앉은 여자의 모습에 눈을 질끈 감았다 뜰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바뀌는 건 없었다. 죽어가던 여자의 모습이 겹쳐 보여 입이 말랐다. 술에 찌들어 퀭한 이의 눈이 나를 빨아들이는 것 같고, 원망하는 것 같았다.

“쓸모없이 방해되는 놈들은 죽어야 마땅해.”

“그런 가치를 따지는 건 네놈이 아니야.”

재민의 중얼거림은 팀장님의 단호한 말에 잘려나갔지만, 곧 줄줄이 터져 나왔다.

“가치? 필요 이상으로 자유로워지는 세상에서 더 이상의 포식자는 필요 없어. 생태계가 파괴된다는 말이야. 그 말인즉, 나에게 방해가 되는 녀석들은 모두 필요가 없다는 뜻이지. 그런 것에 가치라는 단어를 들먹이는 것조차 웃기는 일이라고.”

그는 발그레한 아이의 볼을 툭툭 건드렸다. 세상모르고 잠이 든 아이는 움직임이 없었다. 연신 웃음을 띤 얼굴이 순간적으로 혈색 좋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갔을 때 보인 살기는, 그가 이렇게 여유를 부릴 수 있는 이유를 뒷받침하고 있었다.

“쯧. 세상에 귀한 인간의 목숨이란 없다는 사실을 왜 아직도 알지 못해. 식량, 사냥감, 노리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걸 인정하기가 그렇게 힘드나? 넌 자아도취를 하며 모든 걸 복잡하게 하고 있어. 형편없이 급이 낮은 생명체에게 평등과 자유를 준다는 터무니없는 망상에 빠져선…… 그게 얼마나 몰상식하고 어리석은 생각인지 끝없이 알려줬건만.”

“전제부터 오류가 가득한 말을 뱉으며 시간 낭비하지 마. 넌 세상의 포식자도 아니고, 지금 가장 거치적거리는 건 너라는 걸 알아.”

“날 죽이기라도 하려고?”

재혁의 말에 그는 비웃듯 의문을 던졌다.

“그런 식이라면.”

그의 웃음소리는 언제 들어도 사람을 소름 끼치게 했다. 모두가 경계를 바짝 세운 속에서 어깨를 늘어트리고 허리를 고꾸라트리며 웃는 그의 모습은 신경을 긁어내기에 충분했다. 그런데도 섣불리 뛰어들 수 없었다.

“……큽. 가끔 보면 귀여운 구석도 있어. 아버진 너의 그런 점을 좋게 보신 거겠지. 되지도 않는 것에 목을 매며 고집을 부리는 것 말이야. 뒤에서 칼을 뽑고 때를 기다리는 건 모르고 있으면서.”

“네가 하는 짓 전부를 눈감아주고 있다는 생각은 해본 적은 없어?”

“아아. 그래, 참으로 자비로우시지.”

그저 둘의 단조로운 대화였지만 조금이라도 움직인다면 금방이라도 모든 게 깨져버릴 것 같은 압박감이 느껴졌다. 그런 둘 사이에서 평화로운 얼굴로 잠들어 있는 아이의 존재가 이질적이었다.

재민은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재혁을 그저 흥미롭다는 눈으로만 보며, 긴장도 되지 않는다는 듯 나에게 눈길을 돌리는 여유까지 부렸다.

“안 그래?”

“읏…….”

자동으로 힘이 들어간 손을 날카로운 감각들이 들쑤셨다. 팔을 감싼 수천 개의 유리 조각이 바짝 붙어 나를 탐색하듯 주위를 돌았고, 재민의 머리카락은 바람 하나 없는 곳에서 흩날리며 재혁의 목을 조였다.

“거둬.”

“뭘 믿고.”

담백하게 내뱉는 재민의 말과 그에 걸맞게 냉담한 재혁의 대답이 들렸다. 교차하는 힘의 경계점 사이에 있는 것은 그리 달가운 일은 아니었다. 숨죽여 움직였다. 날카로운 바늘은 나를 감싼 공기를 뚫지 못하고 밀리며 미세하게 떨렸지만, 나의 피부는 수많은 공격점에서 힘없는 과녁이 된 것처럼 화살에 꿰뚫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붉게 타는 재혁의 손끝에 시선을 뺏긴 순간에 들려온 재민의 장난스러운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어디까지 귀엽게 굴 수 있을까. 얼마나 재주를 잘 넘으려나.”

재혁이 단번에 아이를 낚아채 오자마자 결계를 뚫은 제로 놈들이 걷잡을 수 없이 들이닥쳐 내려와 우리를 압박했다. 다양함이 공존하는 공간 속에서 나타난 이질적인 흰색의 향연이 사방에서 우리의 숨통을 조였다.

“윽!”

천천히, 그리고 조용하게 흐르던 공기가 단번에 가속을 가하며 모든 걸 흩트려놓았다. 소리도, 압력도 빠져나가지 못하고 닫힌 공간 속에서 울부짖었다.

재혁에게서 받아 든 아이는 깊은 잠에 빠져 소란에도 움직임이 없었다. 달려드는 제로들을 피해 몸을 숨기고, 두꺼운 장갑을 벗어 아이의 심장이 뛰는지 확인하고 나서야 작은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으…… 젠장, 무슨 틈을……!”

하지만 그런 시간도 오래 누릴 수 없이, 바로 움직여야 했다. 재미를 위해서라면 앞뒤 가리지 않는 재민은 지금의 상황도 그저 즐거움으로 느끼는 듯했다. 모두가 삶과 죽음을 운운하며 현재를 넘어가기 위해 뛰는 모습과 비교되는, 안연한 그의 모습에 분노가 차오르기보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끼어들면 오히려 방해될 정도로 재혁은 제로들을 상대로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그의 형을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벅찰 텐데 다른 놈들까지 신경 쓰려니 자신의 힘을 이기지 못해서, 살갗이 벗겨졌다 다시 차오르는 괴이한 모습을 보였다.

제로들을 피하며 뛰었지만, 아이를 보호하며 움직이는 것은 만만하지 않았다. 평소라면 불안해서 억지로라도 아이를 데리고 있었겠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나를 향해 손을 뻗는 팀장님에게 아이를 넘겼다.

“걱정하지 마라! 지키는 것쯤은 이골이 났으니까.”

“금시초문인데요.”

“오늘 들었으면 됐지 뭘.”

숨은 턱 끝까지 차오르고 잠깐 사이에도 심장이 몇 번이고 철렁거렸다. 서늘하다고 느껴졌던 공간은 이제 열기에 잠식당해 숨 쉬기조차 힘들었고, 떨어져가는 총알에 마음이 불안했다.

“크흣…… 대체 언제쯤 나갈 수 있는 건데……!”

찢어질 듯 찢어지지 않는 곳에서 버티는 것조차 버거웠다. 그리 넓지도 않은 공간, 사방으로 튀는 공격점에서 안전한 곳을 찾다 보니, 말도 안 되던 테스트를 해댄 게 이런 이유였나 싶기까지 했다.

재민이 만들어놓은 공간은 깨질 듯싶다가도 굳건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순식간에 몰아닥친 움직임과 긴장에 근육은 비명을 지르며 떨리고 있었고, 잠시도 가만히 있질 못해 머리에 피가 쏠리기 시작했다.

눈앞이 흐려져 눈을 질끈 감았다 뜨는 순간 들이닥친 조각들이 바로 앞에서 힘을 잃고 바닥으로 추락했다. 굳이 누군지 생각하지 않아도 눈을 맞춘 재혁의 바람 덕분이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는 경우 생길 수…… 니다…….]

귀를 타고 흐르는 신호 속에서 끊기는 목소리가 이토록 반갑게 느껴질 수 없었다.

[……나…… 완료된…… 시…….]

언제든 타이밍을 잡아 나가려고 노력하는 것과 별개로 그들은 사방에서 신출귀몰했고, 이젠 놀랄 틈도 없이 본능적인 방어를 했다. 그리고 방어의 우선순위는 조그만 아이였다.

“바깥과 연결된 뒤 3분 정도 버티는 게 한계일 겁니다.”

재혁의 말에 한 발짝 뒤에서 깔짝거리던 재민이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를 풍기며 뛰어들었다.

“나갈 생각을 하고 있다 이거지…… 마음대로 쳐들어올 때는 언제고 이젠 나가버린다니. 예의는 어디에 갔어. 바깥도 영 좋은 분위기는 아닌 것 같던데 더 놀다 가지그래. 30분, 그 정도면 바깥도 깔끔하게 정리될 것 같은데. 정상에 서는 기념으로 해가 뜨는 시각에 맞추고 싶단 말이지.”

……!

“그 정도로 유난 떨지 않아도 지킬 수 있으니까 네 몸이나 똑바로 간수해…… 이 멍청한 새끼야!”

갑작스러운 폭격에 튀는 조각들을 조금이라도 더 막기 위해 발악하는 재혁을 향해 소리치니, 재혁은 상황에 걸맞지 않게 입술을 삐죽거렸다.

[……리…… 다…… 습…….]

모두가 빠른 속도로 지쳐갔다.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돌아서서 들이닥치는 놈들을 상대했다.

“뭐야, 오늘이 날이긴 날이나 보네. 별거 없어 보이는데, 왜 넌 특별대우를 받고 있어?”

가면 뒤에서 심심찮은 감탄사를 내뱉으며 던지는 조롱 섞인 말들이 감정을 긁고 충동성을 키웠다.

[빨…… 나와……!]

“아읏!”

날 선 칼로 베는 듯한 고통이 닥친 피부에 잠깐이라도 힘이 가해질 때마다 관절이 으스러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보기에 멀쩡해 보여도 닥치는 고통에 바로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최대한 접점을 갖지 않은 채 거리를 벌렸다.

손을 떠난 총알들은 어지럽게 부딪치는 사이를 뚫고 흘러가 제로 놈들을 흩트려놓았다. 바닥을 나뒹구는 제로들이 늘어갔지만, 계속 들어차는 놈들로 쏟아지는 공격 또한 늘어만 갔다.

“대체, 왜……!”

구역질나는 하얀 옷이 아닌 일상복을 입고 덤벼드는 놈들의 머릿수가 늘어나고 있었다. 그들이 제로들에게 조종당해 강제로 우리를 공격하고 있다는 것쯤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무장조차 하지 않은 이들이라 총을 겨누는 것을 망설였다. 매번 겨누던 머리와 심장이 아닌 팔과 다리를 노렸다.

누구의 밑으로 들어가게 되었나 하는 어처구니없는 작은 차이로 갈린 우리는 서로를 공격했다. 죽지를 않길 바라면서도 방아쇠를 당겼다. 이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게 다였다.

[지금…… 얼마 못 버텨.]

아수라장이 된 공간 속에서 일렁이는 공기가 단번에 눈에 들어왔다. 얼마 되지 않는 거리였지만 틈을 보이지 않고 달라붙는 놈들 때문에 거리를 좁힐 수 없었다.

“윽! 좀……!”

보호구마저 뚫고 지나간 조각들이 몸을 긁는 와중, 압력에 못 이겨 총을 놓쳤을 땐 초조함에 절로 억 소리가 나왔다. 얼마나 배를 채우고 온 건지 아무리 날뛰고 상처를 내도 제로들의 몸은 급속도로 아물어갔다.

형제라고 하기도 이상할 정도로 적대적인 재민과 재혁은 막고 뚫기를 반복하며 서로를 쪼아대고 있었다. 둘이 있을 때에는 좀처럼 보기 힘든 딱딱한 재혁의 얼굴이 낯설게 느껴졌다. 그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던 팀장님이 입을 열었다.

“핏줄이란 거, 별거 없다. 등지고 사는 새끼들도 많고 꼭 소중히 해야 한다는 법도 없어.”

“으……! 꼭 지금 그런 이야기를 해야 해요?”

“발 묶여 있지 말고 네가 만들라고. 살 부대끼면서…… 목숨 걸고 지킬 정도면 가족이라고 해도 되지 뭘! 이런 데서 일하지 말고 어디 결혼 정보 업체 같은 데서 일할 걸 그랬다. 짝 하나 기가 막히게 잘 지어주는 것 같지 않나?”

“결혼 정보 업체에서 일했다간 손님 하나도 못 받고 쫄쫄 굶으셨을 겁니다. 사채업자가……! 더 어울리십니다.”

“이렇게 착한 상사가 어디 있나.”

“말도 안 되는 대화는 나중에 해요, 제발!”

망가져 가는 통로의 빛을 보며 팀장님은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자기 할 말만 했다.

“네가 제일 걱정이긴 했다만 아무래도 성공인 것 같단 말이다. 시행착오가 좀 있었을 뿐이지 내가 연은 하나씩 다 엮어놓고 가네. 끊기지 않길 빌 뿐이고…… 그것 좀 외워봐.”

“예?”

뜬금없는 말에 반감을 토했다.

“눈 튀어나온 토끼가 별 모양 지팡이 들고 막 싸우는 거. 그 왜, 이상한 주문 있었잖나. 우리도 필살기를 써야지!”

눈앞에서 날아다니는 비현실적인 빛들에 놀이공원에서 본 생물체의 이름을 중얼거리니 팀장님은 덥석 물어 반가움을 표시했다.

“어어…… 그래. 뽀니였다, 뽀니. 저 백곰 새끼 좀 봐라. 이러다 다 죽어 나갈 것 같잖아. 같이 싸워야 할 것 같으니까 좀 불러내봐. 지금 못 나가면 평생 지겨운 부대에 지박령이 될지도 모른다는 거 아니야, 이거.”

“……미치셨어요?”

[……한……!]

“안 미쳤으니까 빨리 좀 외워봐라. 나이 먹어서 그런 건지, 네가 하도 속 썩여서 그런 건지…… 뇌세포가 다 죽어서 기억이 안 난다고 뭐라고 했는지.”

진지하게 요구하는 팀장님의 눈빛에 뭐라도 홀린 듯 입이 기억하는 노랫말을 웅얼거렸다. 팀장님은 뭐 대단한 거라도 외우는 사람을 보는 듯한 눈으로 나를 봤다.

달려드는 놈들의 배를 가르고 얼굴에 튄 핏자국을 지우며 기억을 더듬었다.

“……오늘도 뽀니와 함께 악당…… 하, 악당을 물리치고 우리의 친구 세라를 찾아 떠나볼 거예요. 호, 롤라 리루 삐리롱…….”

“너무 성의 없지 않냐? 오던 뽀니도 빈정 상해서 돌아가겠다.”

팀장님은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구겼다. 사람들이 죽어가는 와중에 자신을 갉아가며 버티고 싸우는 놈들 속에 갇혀 얼토당토않은 주문을 외우는 내가 멍청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으나, 나보다 더 정신 나간 것처럼 보이는 팀장님의 요구에 맞춰 입을 놀렸다.

“아, 오늘도…….”

“앞은 이제 좀 잘라먹고. 힘들고 시간도 없는데.”

가지가지 한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회복하기 바쁜 놈들 사이로 총알을 날리는 팀장님의 행동엔 주저함이 없었다. 방어구가 무색하게 조금만 삐끗해도 치명적일 공격의 연속이었다.

“호롤라 리루 삐리롱! 이제 됐습니……!”

“그래애…… 마무리는 확실히 해라!”

팀장님의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 팀장님의 수중에 있던 모든 것들은 나에게 넘어온 뒤였다.

“무슨……!”

손에 안긴 무기는 잠금이 풀린 채 빛이 나고 있었고, 아이는 여전히 새근거리며 얕은 숨을 뱉고 있었다. 팀장님이 자상을 내며 뛰쳐나가는 바람에 사방에 피가 튀었다. 팀장님은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나의 총을 주워 중앙으로 앞뒤 없이 달려갔다. 그쪽에 순간적으로 이목이 쏠렸다. 몸을 숨기지 않는 팀장님은 좋은 미끼가 되기 충분했다.

사방으로 튀는 피가 팀장님이 그곳에 있음을 알렸다. 벌어진 입을 다물 새도 없이, 발이 묶여 죽어가는 재혁의 숨통을 죄는 재민을 향해 총알을 쏟아부었다. 재혁이 눈을 뜬 걸 확인하는 순간, 헉 소리도 내뱉기 전에 뒤틀린 공간은 다시 복잡한 세상 속에 던져졌다.

“읏……! 잠, 깐……! 크억!”

“고통은 허상이야. 숨 들이켜.”

[―권한 위임 받았습니다.]

표성의 담담하고 깨끗한 목소리가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종지부를 찍어줬다.

무슨 짓을 벌이신 걸까.

이미 쉬어버린 이들의 목소리들이, 이곳에서 흘러간 시간이 그저 짧은 시간만은 아니었다는 걸 알려줬다.

[젠장…….]

“크읏!”

“정신 차리고 숨 쉬어.”

[괜찮습니까? 어떻게 된 겁니까?!]

[인원 파악 완료. 위치 조정 완료. 1급 이상의 제로는 전국적으로 200인 안팎으로 확인되었으며, 분당 약 20인의 제로가 새로이 생성되고 있습니다.]

“허억, 흐…….”

[방어 인력, 전투 인력으로 전환.]

[―중 경계선에 있을 시 신체 절단이…… 거리 유지. 반복 안내합니다.]

시끄럽게 울려대는 경고음은 그저 귀에서 나는 이명 같았고, 순식간에 들이닥친 대원들과 넓어진 시야각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쪼그라드는 폐에 숨을 들이켜지 못하고 컥컥거리는 와중에도 아이를 빼가려는 구조팀에게 반항하며 버텼다.

“좀……!”

놓치면 다시는 못 만날 것 같았다. 자는 아이도 죽어버린 것만 같아서 자꾸 뛰는 맥박을 확인하고, 오르내리는 가슴을 보고, 내뱉는 공기를 되짚었다. 또 다른 누군가가 눈앞에서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잊기 위해 노력했던 감정들이 파도치듯 밀려 나에게 쏟아졌다.

재혁이 나를 제지했다. 나를 잡는 손을, 아이를 데려가려는 손을 뿌리치자 녀석이 내 얼굴을 부여잡고 눈을 맞췄다.

“싫어……!”

“주변을 봐. 여기보단 안전할 거야.”

[카운트다운 들어갑니다. 5…….]

회복력을 잃은 대원들의 상처 사이로 압력을 이기지 못한 장기들이 쏟아져 나왔고, 그 와중에도 숨이 붙어 헐떡거렸다. 그런 이들을 어떻게든 살리기 위해 뛰어다니는 대원들은 자신의 목숨을 내던지며 폭발음이 난무하고 모든 것이 파괴된 바닥을 밟았다.

기이하고 토가 쏠리는 장면이 슬펐다. 뱀파이어에게 감정을 품는 날이 올까 싶었지만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은 수많은 것 중에서도 분명 슬픔이었다. 원치 않는 싸움 속에 내던져지고 이유도 모르는 공격 속에 파묻혀 발악하는 대원들을 봤다.

“얼마 남지 않았어.”

“…….”

“적어도 할 일이 남았다는 걸 알았으니까 그런 결정을 하신 거 아니겠어?”

예정된 싸움이었을까. 그럼 왜 그래야만 했을까. 사람들은 이런 무자비한 장면을 상상이라도 하고 있을까. 한 명 한 명의 손이 급급한 상황에서 인간들과 공간을 분리하기 위해 발버둥 치는 놈들의 모습엔 거짓이 없었다.

[4.]

[반복 안내합니다…….]

“……알고 있었잖아, 이렇게 흘러갈 거라는 거.”

“……씨발!”

엿 같은 인생이라서. 내가 조금이라도 미련을 가질 수 있는 이들은 모두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며 살다가 끝을 봐야 하는 건지. 원치 않는 이별들에 쌓여가는 죄책감은 나를 흔들리게 했다. 다시 또 나를 잡아주는 더러운 감정이었다.

눈앞에 펼쳐진 잔혹한 풍경 속에 아이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 비해 보잘것없는 몸뚱이가 된 것이 이렇게까지 화가 난 적은 처음이었다.

모두가 엉키고 엉켜 풀 수 없는 상황처럼 엉망이 되어버린 가운데 환희를 내뱉는 것은 재민뿐이었다. 그동안 쌓여버린 나의 개인적인 감정이 있든 없든, 한 놈이라도 더 살길 원한다면 재민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모든 정리는 이 더러운 싸움을 끝내고 할 일이었다.

[위치 정보 보냈다. 확실히 해. 두 번 기회는 없으니까.]

무심한 표성의 목소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나를 위로하는 것 같았다.

“……확인했습니다.”

손목을 그어 재혁의 입가를 적셨다. 거칠게 말라버린 그의 입술이 붉게 젖어 수분을 되찾아갔고, 그의 짧은 숨이 나의 등을 떠밀었다.

[하늘!]

[으…….]

[2.]

여기저기서 터지는 목소리를 들으며, 힘을 잃은 손에 천을 둘러 총을 고정했다. 그런 손등에 닿은 재혁의 손바닥이 뜨거웠다. 두꺼운 천을 뚫고도 생생하게 전해졌다. 나와 다를 바 없는 체온이, 맥박이 섞였다.

“……나 살린다고 오버하다가 죽으면 평생 저주할 거야. 나 지킨다고 다치면 나을 때까지 얼굴도 안 봐.”

“그래.”

손등에 짧게 붙었던 입술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기계음도 끝으로 내달렸다.

[1.]

방어 인력이 전투에 본격적으로 동원되며, 무겁게 가라앉았던 막이 걷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조금은 자유로워진 몸으로 공격에 힘을 쓰기 시작한 대원들과 함께하기 시작하자, 눈앞에서 벌어지는데도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미처 피하지 못한 인간들의 다급함이 고스란히 눈에 보였다. 마음이 점점 조급해져 하늘과 땅 할 것 없이 폭발이 난무하는 공간을 뛰어다녔다. 둔탁하던 몸은 아이러니하게도 시간이 지날수록 가벼워졌고, 암울하게 흐르던 공기는 살기를 품은 날카로움으로 바뀌었다.

누군가의 삶의 터전이었을 집들도,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담벼락들도 무너져 있었다. 목줄에 묶여 피하지 못한 강아지는 그대로 죽어 바닥을 뒹굴었고, 차로 가득 차 있던 골목들은 길이라고 하기도 민망할 만큼 쓰레기와 파편들로 어지러웠다.

새들이 지저귀고 푸르다 못해 맑았던 나무들은 어둠에 잠식당해 쓰러져 있었으며, 밟히고 짓뭉개진 풀들은 죄다 허리가 꺾인 채 죽어갔다.

“다리 노릴 생각 말고 놈의 시선을 따라가면서 정면으로 부딪쳐. 그편이 더 뜻대로 될 거야.”

금세 기운을 차린 모습으로 뒤를 따르는 재혁의 목소리는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뒤를 돌아볼 필요도 없어. 내가 있을 테니까.”

“왜 그런 말을 해.”

“네가 싸우는 방식은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으니까.”

“……그런 말 자신만만하게 하지 마. 기분 좋은 말 아니야.”

“어쩌겠어. 사실인걸.”

고개를 들기 위해 준비하는 햇빛에 하늘은 색을 찾아가고 있었지만, 흙먼지와 폭발에 제 색을 온전히 보여주진 못했다. 이미 땀으로 흠뻑 젖은 옷이 찝찝하고 목이 탔지만 잠시도 멈출 수 없었다.

또 도망치는 파렴치한 짓을 하면 어쩌나 싶어 조바심이 났지만, 이미 싸움의 장을 만들어버린 탓에 자리를 지킨 채 모든 이들의 목을 죄고 있었다.

굳건하게 서 있던 관사들은 몇 시간도 채 되지 않아 폐허를 방불케 하는 낡은 건물이 되어버렸고, 사방은 붉은 피가 터지고 튀어 끔찍하게 물들어 있었다.

채 도망가지 못하고 있던 사람을 빨아 먹고 종잇장처럼 늘어진 시체를 내던지며 입을 닦는 재민과 눈이 마주쳤다. 힘을 많이 써서도, 갈증이 나서도 아닌, 그저 눈앞에 벌어진 일들에 흥분하며 달아오른 그의 얼굴이 붉게 빛났다.

“흐음…… 맛이 없다, 맛이. 피는 네 맛이 최곤데. 애들 것보다도 향기로우니까.”

이미 대화가 통하지 않는 상대와 말을 섞어봤자 손해라는 건 경험에서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시간을 끌 필요 없이 그를 향해 뛰어들었다. 시야를 방해하는 고글을 벗으려다가 참았다.

“으.”

연속으로 날린 총알과 칼에 재민이 만들어낸 유리가 부딪쳐 쨍한 소리를 퍼트렸다. 이명을 느끼며 뒤로 한 발짝 물러난 순간, 태평한 그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울렸다.

“이런, 성격도 급해라. 아직 해가 고개를 내미는 중인데.”

제로들은 속속히 몰려들기 시작했고, 나는 손에 총을 쥔 채 호흡을 가다듬었다. 한때에는 신비롭게 봤던 유리 조각들이지만 그 용도를 알아버린 지금은 반짝이는 빛조차 혐오스러웠다.

피할 이유가 없었다. 머리를 쓸어 넘기며 여유를 보이는 놈에게 겁먹을 이유도 없었다. 재혁과 비슷하면서도 어딘가 어수선한 움직임은 자신의 힘을, 자신의 추종자들을 믿으며 나를 업신여기는 게 훤히 느껴졌다.

처음 만났던 그때와 다를 바 없었다. 두 번째, 세 번째, 그리고 마지막으로 만났던 때와도 다를 게 없었다.

“뒤에 숨어서 총이나 쏴댈 줄 알았더니.”

사람의 속을 슬쩍 건드리고 쿡쿡 찌르며 무너지기를 기다렸다. 언젠가 뚫릴 구멍을 비집고 들어가 재미를 보기를 기다렸다. 공격을 온전히 내지르기보다 자신을 뽐내기 바빴다.

“뭘 믿고 널 선두로 내보내는 건지. 한낱 인간이 돼버린 널.”

“…….”

아슬아슬하게 빗나가는 공격들은 나에게 상처를 주지 못했다. 나를 감싸는 향에 들뛰던 심장이 차분해졌다.

“맛보기 미끼 같은 건가? 제법 역할을 잘해냈으니까.”

막힌 공격은 그대로 나에게 충격을 전했고, 총알은 그를 향해 날아가다가도 속절없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그에게 먹히지도 않을 총도, 정교한 공격들도 다 쓸모없었다.

“넌…… 말이 많은 게 문제야.”

도망칠 필요 없이 그와 정면으로 마주보았다. 재혁이 말했던 것처럼 눈앞에서 재민의 시선을 좇았다.

재혁뿐만 아니라 사방에 흩어져있던 팀원들까지 달려와 한데 모이기 시작했다. 지겹게 듣던 불평불만도 들리지 않았고 가볍게 던지던 농담도 없었다. 갖가지 능력에 속절없이 당하며 허덕이던 대원들은 장기전에 지쳐가면서도,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들 정도의 집중력을 보이며 함께하고 있었다.

그간 함께한 훈련이 그저 시간 낭비가 아니었음을, 홀로 고군분투한다고 여겼던 날들에도 실은 우리가 함께였다는 걸 깨달았다. 함께하는 이들에 대한 확신이 짙어지고 부드럽게만 일던 바람이 강해진 때, 한때는 힘없이 악으로 내지르기만 했던 주먹과 발차기가 거짓말같이 재민에게 꽂혔고, 휘두르는 칼날은 그의 피부를 갈랐다.

고통에 무뎌져 감각조차 잃은 몸으로 상대와 부딪쳤다. 고스란히 받은 충격에도 곧바로 제정신을 차리고 일어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내 손바닥에 짓눌린 그의 목울대가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다.

“크흡, 실수하는 거야.”

“…….”

“어느 것이 옳은가를 따질 때 인간들은 다수를 따르지.”

피로 물들어 제 색을 찾아볼 수 없는 나의 손은 눈에 띄게 덜덜 떨리고 있었다.

“내가 아니더라도 나를 대신할 놈은 언젠가 나오게 되어 있어.”

“……너처럼 죽어갈 거고.”

더는 힘을 쓸 여유조차 없는 놈은 재혁을 바라보다가 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올라가는 입꼬리가 놈에겐 어떤 의미였을지. 이미 항거 불능 상태에 빠진 놈의 폐에 총알을 박았다. 숨을 쉬는 이들에게 고통을 준 대가였길 바랐다.

“……네가 목을 죄어 끌고 간 놈들의 몫이야.”

“모든 건 반드시……!”

또 한 발의 총성이 울리고 놈의 목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죄 없이 서로를 잃은 이들이 위로받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못다 한 말을 남긴 채 떠났을 이들의 미련과 그런 이들의 목소리를 갈망할 자들의 아쉬움이 메워지길 바랐다.

“이건 지금 네놈 덕에 피해를 본 사람들의 몫이고…….”

모든 것이 멈춘 곳에서 마지막 총성이 울렸다.

“그리고 이건 그냥 나의 즐거움을 위해서다.”

가슴을 움켜쥐며 웃음인지 괴로움인지 모를 악을 내쏟는 놈을 봤다. 여유로움도, 빈정거림도 없는 순수한 놈의 감정을 봤다. 오그라들던 근육들이 불규칙하게 멈추었다. 뛰는 심장에 발악하고 잠잠해지기를 반복하더니 시간이 흐를수록 강도를 더해 끔찍한 모습을 띠었다.

“크흐, 흐흐흐…… 끄으윽……! 흐흐!”

바람 빠지는 목에서 흘러나오는 웃음소리는 기괴했다. 그런 보잘것없는 모습을 보며 나도 놈처럼 소름 끼치게 웃을 수 있을까 생각한 게 하루 이틀이 아니었지만, 현실은 헛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되레 그동안의 나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괴로웠다.

재혁은 손을 뻗어 재민의 얼굴을 잡았고, 나는 재혁의 손가락 사이로 비치는 놈의 광기 어린 눈을 마주했다. 핏줄 터진 눈은 단 한 번을 깜박이지 않고 나를 지켜봤다. 아쉬움도, 미련도 없어 보였다. 놈은 마지막까지 즐거워 보였다. 크나큰 쇼의 주인공이 된 자신이 만족스러워 보였다.

“끄흐흐, 으윽…….”

죽어가고 있는 놈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자신과 피를 나눈 존재의 목을 물어뜯는다는 건 어떤 느낌일지, 심장을 움켜쥐고 두개골을 뚫고 뇌를 조이는 느낌이 어떨지. 지금 재혁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악에 받친 감정들을 죽이는 것뿐이었다.

재민도 다른 제로들과 다를 바 없었다. 꺼져가는 눈빛과 함께 넘어가는 숨을 껄떡거리며 마지막을 보는 것. 눈꺼풀을 내리지 못한 채로 재민의 푸른 눈동자는 얼어붙듯 새파랗게 질렸다가 빛을 잃고 검게 죽어버렸다.

윤기가 흐르고 탱탱하던 피부는 급속도로 볼품없게 늙어갔다. 온전한 끝을 보이지 않아도 주인공을 잃은 쇼는 금방 열기를 잃고 사그라졌다.

“하! 하하…….”

그제야 웃음이 났다. 기쁨이 아니라 그저 허무함의 웃음이었다. 모든 죽음은 허무했고, 재민이라 해서 다를 게 없었다. 조금이라도 더 고통을 받았으면 좋았을걸.

재혁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떨리는 손에 집중해 몸을 짓누르는 보호구를 벗었다. 고글을 벗자 고인 땀방울이 쏟아지면서 옅게 퍼지던 역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빼앗긴 수분과 피, 그리고 찌든 피로에 어지러운 머리까지.

벽을 짚고 빈속을 게워냈다.

재혁은 지금, 어떻게 냉정함을 유지하고 있을까.

입안이 찝찝해 침을 뱉어내며 빙빙 도는 세상이 제자리를 찾아가길 기다리는데, 다시 등장한 재혁의 목소리에 귀가 집중됐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야.”

발밑에 내던져진 사람을 보고 두 눈을 의심했다. 나는 맥없는 발로 그 몸을 굴렸지만, 가면에 가린 상대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고민할 필요도 없이 눈앞으로 날아든 놈의 백색 가면을 벗겼다.

“하…….”

남자의 얼굴은 익숙하다 못해 치가 떨리게 했다. 혼란스러운 냄새들 속에서도 그의 향은 코를 들쑤셨다. 몰랐다면 아름답게 느꼈을 아카시아 향은 나에게 좋은 기억을 주지 못했다. 자동으로 재혁에게 시선이 돌아갔지만, 그는 아무렇지 않게 시선을 맞추고 제 갈 길을 갔다.

발밑의 놈은 정신을 차리기 바쁘게 자신을 낮추며 나에게 매달렸다.

“유, 유운아!”

“…….”

“정이란 게 있잖니. 너도 좋아했던 건 사실이잖아! 어떻게 보면 여기서 너를 제일 오랫동안 알고 있다고 해도 무방한……!”

“더러운 새끼…….”

늘어진 침을 닦고 목에 끓던 가래를 놈의 얼굴에 내뱉었다. 망설임 없이 박아 넣은 세 발의 총알은 정확히 놈의 밑을 뚫었다.

“으아악!!”

괴로움에 비명을 지르는 게 시끄러워 급소를 겨냥해 정확히 박아 넣으니 놈은 더욱더 시끄러운 괴성을 내며 몸을 꼬았다. 수많은 소음을 뚫고 박혀 드는 목소리가 시끄러웠다.

나는 한참 동안 상대가 고통에 몸부림치는 모습을 지켜봤고, 재혁은 자리를 피할 생각이 없는지 나의 옆을 지키고 있었다. 옆에 서 있는 재혁에게 무미건조한 말투로 물었다.

“그새 불쌍한 감정이라도 생겼어?”

“그럴 리가.”

비명에 인상이 찌푸려질 때쯤, 눈앞의 놈이 목을 물어뜯긴 채 바닥을 뒹굴었다.

“……죽여주진 못한다더니.”

“시끄러웠으니까.”

***

목을 죄는 셔츠에 군청색 넥타이를 조였다. 옷장에 묵혀 있던 향이, 서늘한 천의 촉감이 손의 온기를 빼앗아가는 기분이었다.

묻어놓기에 급급했던 죽음을 알리는 일은 이례적으로 크게 치러졌다. 잠잠하던 언론도 너도나도 목소리를 높여 알리기 바빴다. 그게 자신들의 공로를 보이기 위함인지, 좀 더 확고하게 대중의 믿음을 얻어내기 위함인지는 굳이 따지지고 싶지 않았다.

“승아는? 오늘 어린이집 쉰다고 했었는데.”

“제이한테 부탁해놨어.”

언론도, 부대 내에서도, 당연히 모든 일에 대한 사죄는 없었다.

“왜. 옷 다 구겨진다.”

주름 하나 없는 제복을 입고 딱딱하게 서 있는 녀석의 팔을 걷어봐도 작은 생채기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억울하네. 누군 똑같이 굴러도 병원에 며칠씩 입원하는데, 누군 흔적도 안 남고 하루아침에 멀쩡해지고.”

“누가 입에 풀칠시켜주는 덕에.”

그는 걷힌 소매를 내리더니 나의 목에 매인 넥타이를 손보기 바빴다.

“애꿎은 인간 피 뽑아다가 난리 칠 게 아니라, 네놈 피를 뽑아서 치료법을 연구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이미 연구 중이잖아.”

다수가 알게 된다면 그만큼 어린 아이들을 노리는 놈들이나 위험한 놈들이 늘어날 거라는 이유로, 실험에 대해 아는 이들의 입을 막았다. 그저 내가 조용히 있는 이유는, 공장이, 아니, 전국으로 퍼진 실험실이 제 기능을 찾아 돌아가거나 폐쇄되어 두 종족 사이의 격차를 줄이는 일을 하며 부패한 놈들을 가려내 확실하게 처리할 배경을 만들어줬기 때문이었다.

이유는 정확하게 공표할 수 없으나, 비교적 투명하게 돌아가기 시작한 곳을 들쑤셔 불을 지필 생각은 없었다.

“준비 다 했으면 멀뚱멀뚱 구경하고 있지 말고 신발 좀 꺼내줘.”

“어디 있는데.”

“신발장 제일 위에.”

소란 속에 망가진 것들을 모두 복구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미 잃은 것을, 사라져버린 것을 다른 것으로 대체한다고 한들 같을 순 없었다.

병원에서 쓰러져 지내다가 다시 입은 제복이 불편했다. 마지막 인사를 할 수 있는 날이 주어진 게 다행인 듯싶다가도, 영원한 작별의 인사를 해야 한다는 사실에 울적해졌다. 괜히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이 너무나 괜찮아 보여서 마음 한편에 불편함이 커졌다.

인상을 찌푸린 채 짧은 머리카락을 긁적거려도 변할 건 없었다.

“무슨 생각 해.”

귀신같이 처지는 기분을 읽은 녀석이 물었다.

“……도망쳐버릴까 하고. 모른 척 살면 마음이 더 편할까 해서. 어디선가 다들 살아 있을 것만 같아.”

“인사해주길 바라실걸.”

“……알아.”

그는 나의 목덜미를 주물럭거리면서도 감정 없는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긴장으로 뻐근했던 목이 시원했다.

어떻게 저렇게 차분할 수가 있을까.

그의 동족 중 다치지 않은 이를 찾는 게 불가능할 정도였다. 5분의 1이 목숨을 잃었거나 지금도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재민과 뜻을 함께했던 이들은 사건 종료 직후 사살되거나 체포되어 암암리에 고문을 당하며 죽어가고 있었다.

그의 가족 중 절반은 그렇게 각양각색의 이유로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차가운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녀석의 볼에 손가락을 얹고 죽 위로 올렸다. 입꼬리가 억지로 끌어올려지며 괴상한 표정이 지어졌다.

“네가 웃을 때는 비웃을 때랑 나 놀릴 때뿐이냐? 멀쩡히 웃는 걸 본 적이 없어.”

“지금이 웃어야 하는 때는 아닌 것 같은데.”

“몰라. 인사할 때 웃으면 좋은 거 아니야?”

“글쎄.”

“됐어. 늦기 전에 나가.”

한동안 못 보던 동료들을 봐도, 마치 어제 본 것처럼 새롭거나 새삼스럽지 않았다. 가벼운 인사를 날려 서로의 안부를 전하며 지나쳤다. 비석이 줄지어 선 공간 속 공터에는 부대에서 보던 동료들을 빼고도 각양각층의 사람들이 모여 엄숙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색이 없는 꽃들이, 공허하게 떠도는 눈빛들이 마치 나의 잘못인 것 같아 발걸음을 재촉했다.

“팀장님이라고 불러야 한다니.”

“뭐 내가 어때서. 나만큼 우리 팀을 생각하고 잘 아는 사람이 또 어디 있다고.”

자리를 지키고 서 있는 표성의 옆으로 일찍이 나온 팀원들이 모습을 보였다. 며칠 새 말끔해진 모습에 아직 시멘트 덩어리가 구르는 건물들이 아니었다면, 단상 앞에 줄지어 붙은 사진들이 아니었다면, 다 거짓말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유운 형 아직도 병원에 있어요? 1인실? vip룸에서 지내고 있다는 소문 돌던데.”

태주의 변함없는 목소리에 여러 시선이 꽂히는 게 느껴졌다.

“별 소문이 다 돌아. 오늘 퇴원이야.”

“……나갈 거 아니죠?”

“어딜.”

“부대요.”

별것 아니라는 듯한 말투와 달리 태주의 신경은 나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안 나가. 이제 우리 팀에서 너 갈굴 사람 나밖에 없는데 어떻게 나가.”

“으, 갑자기 살기가 느껴졌어.”

태주가 몸을 부르르 떨기 무섭게 마이크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고, 곧바로 굵은 목소리가 공터를 울렸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주시기 바랍니다.]

“아, 앞에 서세요.”

뒤로 자리를 옮기며 서연의 손을 따라 빈자리에 섰다. 멍하게 앞을 보는 표성에게 물었다.

“팀장님 가족분들은?”

“앞쪽에. 조금 있다가 인사드려야지.”

짧은 묵념을 끝으로 무겁게 깔리는 악기 소리가 무너지는 이들을 지탱했다. 괜찮음을 알리듯 사진 속의 이들은 강직한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잔잔하게 읽는 추도사는 누군가에겐 위로를 주었겠지만, 나에겐 그저 변명과 가식적인 말로 들릴 뿐이었다.

단상 앞에 서서 마이크를 든 유가족들은 자신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알지도 못했다. 그저 울음을 참기 위해 잠긴 목소리로, 써 온 편지를 담담하게 읽었다.

어두운 분위기 속에서 어울리지 않게 터지는 셔터 소리가 나를 현실로 끌어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사진 속 이들의 모습은 언제라도 다시 길을 가다가 마주칠 수 있을 것처럼 생생해 보였다. 그중에서도 끝까지 황당한 말만 던지고 간 팀장님의 사진 속 얼굴은 어딘가 후련해 보였다.

인사를 끝낸 표성은 팀장님의 사진을 바라본 채 물었다.

“네 잘못이라고 생각해?”

“어느 정도는…….”

“그러지 마라. 미친 호랑이가 들어서 전혀 기쁠 말이 아니잖아.”

자연의 향이 가득한 곳에서 퍼지는 쓴 내가 내 가슴을 적셨다. 흰색으로 물든 꽃들이 그들을 떠오르게 했다. 과연 순백색의 꽃이 그들에게 안녕을 기리는 꽃이 될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관악기의 소리에 심장이 아렸다. 조용히 울음을 삼키던 이들도 두꺼운 음에 자신을 놓으며 슬픔을 쏟아냈다. 그들은 좋은 향과 아름다운 꽃들에 어울리지 않는 감정들을 토해냈다.

나에게 가족이라는 의미를 다시 새겨주고 떠난 팀장님의 가족은 그의 빈자리를 실감하지 못하고 연신 고개를 저었다.

사진도 없이 묘지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익숙한 두 이름은 더 실감이 나질 않았다. 그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일상 속에서 글자로 새겨진 그들의 이름을 보는 것뿐이었다. 그런데도 몇 시간이나 담담함을 유지하다 이제 와 울컥하는 것을 보니, 그만큼 그들에게 알게 모르게 품었던 미련과 갈구했던 감정들이 아직 해소되지 못했다는 거겠지.

괜히 터지는 감정을 억누르느라 입을 열었다.

“……내 주변엔 왜 이렇게 다 멍청한 사람밖에 없었냐.”

“네가 멍청해서.”

단박에 돌아온 재혁의 실없는 대답에, 웃음과 함께 눈물이 신발에 굴러 떨어졌다. 울고 있다는 의식도 하지 못한 채 뚝뚝 떨어지는 눈물이 당황스러웠다.

당기는 힘에 끌려가자 그의 어깨에 얼굴이 파묻혔다. 벗어나려고 잠시 움찔거렸으나 뒤통수를 쓰다듬는 손이 부드러워 그냥 숨을 죽이고 힘을 뺐다.

까슬까슬한 머리카락을 연신 쓰다듬어주던 그는 무미건조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가만 보면 승아보다 더 많이 울어.”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하지 마.”

피식 새는 그의 숨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인사할 때 웃으면서 해야 한다며.”

“웃고 있는 거 안 보이냐?”

훌쩍대는 소리가 내 귀에도 들렸지만, 당당한 나의 말을 들은 그는 웃음을 삼키느라 먹힌 소리로 말했다.

“복귀 전까지 제주도에 내려가 있자, 승아랑. 가서 좀 쉬어.”

“……쉬러 갔다가 된통 당한 기억밖에 안 나는데.”

“좋은 기억들은 다 어디다 팔아먹었어.”

“좋은 기억은 개뿔……. 언제 내려갈 건데.”

“내일 오후쯤에.”

혼자라고 생각하며 살았지만, 나도 모르게 여기저기 의지하며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밀어내려야 밀어낼 수 없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도움을 받으며 살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안 좋은 일이었든 좋은 일이었든, 내가 지금 살아 있다는 게 모든 걸 뒷받침해줬다.

팀장님이 그리고 부모님이라는 존재가 나에게 진짜로 주고 싶었던 게 무엇이었는지는 지금까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꼴사납게 우는 나에게 어깨를 빌려주는 녀석이 있고 하루가 멀다고 매일 빨리 나으라며 닦달하는 꼬맹이가 있었다.

“알았어.”

품에서 떨어지기 무섭게 입술을 핥는 녀석을 막았다.

“……미친 새끼야. 사람들 많은데 뭐 하냐.”

“뭘 새삼스럽게.”

익살스럽게 웃는 그의 얼굴이 이제 짜증 나지 않는다면, 매력적으로 보이게 되었다면 미쳐도 단단히 미쳐버린 거겠지.

“또라이 새끼.”

의문 가득한 녀석의 표정을 보기 전에 그의 넥타이를 잡고 끌어당겼다. 입술이 눈물에 젖어 짭짤했지만, 그는 개의치 않으며 나의 입술을 빨아댔다. 조금이라도 더 얽히기 위해 맞닿은 혀가 서로를 찾았다. 다른 이들의 눈을 신경 쓸 필요 없이 그를 좇았다. 포근하게, 질척거리며 얽히는 점막에 떨어지기 싫었다.

“…….”

“지금은 무슨 생각 해.”

그의 물음에 망설임 없이 내뱉었다.

“너랑 떡 칠 생각.”

그들에게 내가 보내는 가장 밝은 인사가 되었길 바랐다.

물어볼 필요도 없이 아마도 가장 밝은 인사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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