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상처의 깊이
시끌벅적했던 나의 시간과 다르게 세상은 평화롭고 고요하고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그 무엇 하나 바뀌지 않은 조용한 세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 흔한 기사 하나 나지 않았다. 나에게 사람들의 죽음마저 함구하며 입 다물기를 종용하는 이들은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인생의 절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목숨을 내던지고 산 곳에서 내가 받을 수 있는 위로는 없었다. 지겨워졌다는 게, 이런 삶이 넌덜머리가 나고 말았다는 게 실감이 났다. 복수고 뭐고, 진실이고 뭐고 이젠 궁금하지도 않았다. 내가 뱀파이어들 속에 껴 있는 게 모두가 바라는 거라면, 더는 엮이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길을 잃은 나에게 갈 곳은 없었다. 내가 얼마나 쓸모없는 목표를 가지고 살았는지, 나 자신이 한심했다. 하하 호호 웃으며 대충 하루를 때우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무슨 허황된 영웅 심리를 품고서 지냈단 말인가.
그 누구도 나에게 강요한 적 없고, 전부 다 내 선택이었다는 게 억울했다. 억지로라도 돌리던 비난의 화살을 남에게 겨눌 처지가 아니라는 걸, 그저 이유를 만들기 위해 발악한 게 나였다는 걸 인정해버리고 나니까. 그럴 필요가 없다고 도장을 찍어버리고 나니까. 더는 감정의 스위치를 올릴 일이 없었다.
그리 짧은 사회생활도 아니었고, 나를 위해 쓴 돈도 없었지만, 수중에 모인 돈은 보잘것없었다. 있는 돈을 탈탈 털고 주어진 공간에서 빠져나와 갈 곳 잃은 내가 가장 먼저 얻은 곳은, 반지하에 습한 냄새가 가득하고 먼지가 폴폴 쌓인, 엄마라는 사람이 살던 곳이었다.
애원해도 보기 싫던 그녀의 뒤꽁무니를 밟는 멍청한 짓을 하고 있었다. 새삼 그립다거나 다시 만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몸이 가고 발이 닿는 대로, 꼴리는 대로 굴고 있는 것뿐이었다.
집주인이 이만한 방은 구하기 힘들 거라며 그렇게 자부심을 내비쳤는데, 방은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못한 채 방치되어 있었다. 허구한 날 내리는 비 탓에 곰팡내가 진동하고 있었고, 습도가 높아 몸도 더 처지는 느낌이었다.
가지고 있는 물건들도 미련 없이 쓰레기통에 모두 쑤셔 넣고 온 터라 집은 텅텅 비어 있었다. 기존부터 있던 낡디낡아 꿉꿉한 기운을 풍기는 검붉은 소파와 시대에 뒤처진 텔레비전이 그나마 가구다운 가구라고 할 수 있었다.
그마저도 잔상이 남고 화면이 깨져 온전하게 볼 수 없었지만, 나름대로 적적한 공간에서 나쁘지 않은 존재였다.
자연의 향에 익숙해진 코는 악취를 이기지 못하고 시큰거렸다. 휴대전화는 끊임없이 울리는 벨소리에 힘을 잃고 꺼진 지 오래였다. 방바닥을 구르는 술병을 발로 치우고, 환기도 하지 않은 퀴퀴한 공기 속에서 허우적대며 화장실을 찾았다.
잘못 친 거울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피할 새도 없이 떨어진 거울이 바닥에서 반짝였고, 산산이 부서져 나의 얼굴을 비췄다. 발에 박힌 유리를 뽑았다.
흐르는 액체에 마음이 편해졌다고 한다면 다들 나를 미친놈이라고 여기겠지.
표출해낼 곳도, 방법도 잊어 쌓인 감정들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이미 익숙해져버린 상처를 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편해질 수 있다니.
뽑아 든 유리 조각으로 발등을 찍었다. 죽어가던 의식이 되살아나 쾌감을 전해줬다. 바닥을 적시며 죽어가던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고, 그 속에서 구르던 나의 몸도 생생했다. 달 것만 같던 붉은 액체는 비리기만 했다.
답답한 속이 뚫리는 기분에, 집중할 감각이 있다는 사실에 멍청히 발을 내려다보다가 소파에 몸을 기댔다. 손을 더듬거려 팔걸이에 놓아둔 담배를 꺼내 들었다. 오늘도 뉴스는 시답잖은 이야기로만 가득할 뿐이었다.
“하…….”
햇빛을 본 지도 오래됐거니와 밤낮이 뒤바뀐 생활을 한 터라 날짜에 대한 감각 따윈 잊은 지 오래되었다. 텔레비전에 희미하게 나오는 숫자와 아나운서의 또박또박한 발음에 오늘로 이런 생활을 한 지 2주가 넘어간다는 걸 알았다.
이렇게 쉽고 아무 생각 없는 안락한 삶을 살 수 있었는데 뭐 하러 그렇게 힘들게 살았나 싶었다. 어느 곳에 있든 포기하는 놈들에게는 패배자의 프레임이 씌워지는 모습을 봤지만, 진정한 승리자는 일찌감치 포기하고 이미 안락한 삶을 사는 이들이 아닐까 싶었다.
“손목이나 그으면서 살걸.”
오기를 세워 뱉은 말이 나에게 이렇게 평화로운 삶을 던져줄 줄 알았다면 좀 더 빨리 알았으면 좋았을걸. 예전엔 불쌍하게 여기는 이들의 눈을 보면 화가 치밀어 올랐었다. 하지만 모든 걸 인정해버리고 나니, 자신들과 상관없는 타인의 삶에 감정을 쏟는 아까운 짓을 왜 하나 싶어 그들이 더 가여워 보였다.
그의 집에 살던 정신 나간 소녀가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마음 편한 삶을 사는 건 아니겠냐는 생각까지 들었다. 멍청하다는 건 안쓰럽게 여길 일이 아니라 축복이지 않을까.
처음 접할 땐 역겹던 알코올 향도 익숙해지고 나니 아무렇지 않았다. 조금만 정신이 되돌아와도 손은 절로 술병으로 향했다. 느긋하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빠르게 쏟아지는 지난 기억을 덮어내는 일은 참으로 손쉽고 간단했다.
그렇게 그녀를 욕했지만, 인간은 이렇게 간사하고 나약하고 별 볼 일 없는 존재였다. 자신은 다를 바 없을 거라 장담했었지만 그렇게 나도 별 볼 일 없는 사람이었다. 내가 정말 그들과 같은 존재였다면 아버지라는 이는 왜 나를 이런 존재로 만들고 싶었던 건지, 나에게 대체 무슨 삶을 바랐는지 궁금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서 꼬리를 무는 의문에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굳이 대답하지도, 문을 열어주지 않아도 철문은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길을 텄다. 익숙한 발소리도, 밖에서 들리는 말소리도 여느 때와 다르지 않았다.
“…….”
이젠 놀라는 기미도 보이지 않는 녀석은 자연스럽게 바닥을 치우며 들어왔다. 나는 담배 연기가 자욱한 곳에서 지혈이 되지 않은 발을 까딱거리며 하루에도 몇 십 번이나 본 CF를 봤다. 유리끼리 부딪치며 나는 날카로운 소리가 귀에 거슬려 괜히 볼륨을 높였다.
머리보다 몸이 기억하는 광고용 노래를 흥얼거리며 더럽기 짝이 없는 바닥에 앉아 나의 발에 난 상처를 소독하는 재혁을 봤다. 그는 용케 매번 남의 집에 쳐들어와 동태를 살폈다.
화난 듯한 얼굴을 보일 때도, 금방 울 것 같은 얼굴을 할 때도 있었지만 기본적인 그의 얼굴은 언제나 같았다. 평정심을 유지하고자 하는 얼굴.
올 때마다 어르고 달래거나 협박을 하던 녀석은 지쳐버린 건지, 포기한 건지 이렇게 말 한마디 꺼내지 않고 내 앞에서 허리를 굽힌 채 내 발에 난 상처나 치료하며 더러운 바닥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왜 이 녀석이 이렇게까지 굴고 있는지 생각해봤지만, 그저 자기만족일 거라는 답밖에 안 나왔다. 아니면, 내가 가여운 소녀와 같은 축에 속해버렸다든가.
그는 언제나 하고 싶은 말이 많은지 입술을 움찔대다가도 결국엔 다물어버렸다. 여전히 고집을 피우고 다니는 건지, 툭하면 쓰러질 것 같은 몸으로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차갑기도 하도 뜨겁기도 한 그의 손은 터지고 뭉개지고 변형되어버린 나의 발과 다르게 굳은살 하나 박여 있지 않고 보송했다. 이미 딱딱하게 말라비틀어진 나의 발바닥은 그의 깨끗한 손이 지나가는 감각을 전해주지 못했다.
“핥아.”
말할 일도 드물어 갈라져버린 목에 가래 끓는 소리까지 더해져 더욱더 형편없는 목소리가 나왔다. 멀뚱멀뚱 앉아 나를 보는 녀석의 얼굴에 들이민 내 발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고개를 들어 나와 눈을 마주친 녀석의 눈은 진작부터 흔들리고 있었다.
탐욕과 절제로 얽힌 상대의 눈을 피하지 않고 봤다. 흩어지는 담배 연기 사이로 보이는 그의 얼굴은 술집에서 오랜만에 마주했던 그때와 다를 바 없었다.
다만 전혀 다른 공간과 높이가 주는 미묘한 차이가 나를 거만하게 만들었다. 불안과 증오가 아닌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들은 더는 잃을 게 없는 나에게 편안함을 선사했다.
“뭐 해. 핥으라고.”
주춤거림도 잠시, 발끝에 맺힌 핏방울을 핥는 그의 혀가 붉게 물들었다. 조금씩 타들어가고 있는 담배를 손가락에 건 채 그를 봤다. 천천히 발가락 사이사이를 훑는 그의 혀를, 수치스러움도 잊은 채 발등을 훑는 입술을 봤다.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알코올은 나를 더 취하게 만들지 못했다. 또렷한 정신은 축축하고 뜨거운 그를 정확히 느끼고 있었다. 고통스러움을 느껴야 할 살갗은 그저 그의 움직임만 좇을 뿐이었다.
긴장을 하는 게 아니라 겁을 먹는다면 될 일도 되지 않는다. 그럼 겁조차 먹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
이대로 잡아먹혀도 아무렇지 않을 것 같았다. 손가락뼈를 우둑거리며 씹어 삼키든, 내장을 꺼내 찌걱거리며 씹어대든, 머리통을 박살 내서 말캉거리는 뇌를 꺼내 먹든 아무런 고통도 없을 것 같았다. 미련 없을 것 같았다.
보란 듯이 노골적으로 움직이는 그의 혀에 닿는 곳곳마다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는 몸을 일으켜 한껏 늘어진 나의 몸 위로 가까이 왔다. 나의 손에 들린 담배는 그에게 넘어갔고, 다음 순간 그의 입에서 피어나는 연기를 봤다. 짧아진 꽁초는 바닥으로 추락했다.
“…….”
말없이 나를 보고 있는 그의 눈은 여전히 남을 끌어들이는 재주가 있었다. 술병마저 반항할 틈도 없이 그의 손에 넘어갔다.
그의 멱살을 잡고 끌어당겼다. 온전히 내가 주도권을 가진 키스에 그는 그저 내가 이끄는 대로 어울려주고 있었고, 젖은 입술은 더럽게 엉키며 질척이는 소리를 만들었다.
1차원적인 욕구만 따라 달라붙는 나의 가슴팍을 살짝 밀쳐내며 떨어진 녀석이 입을 열었다. 그의 입술은 타액에 젖어 있었다.
“……어디까지 망가져야 직성이 풀려.”
잠긴 목소리가 시끌벅적한 텔레비전을 뚫고 귀에 박혔다.
구렁텅이 같은 인생에 빠진 건 나였지만 어쩐지 그의 목소리가 더 상처받은 것 같았다. 무엇이 그를 이토록 하찮게 만들어버렸는지, 왜 나는 이렇게 말짱한지, 왜 잃은 것 하나 없는 놈이 이런 청승을 떨고 있는 건지.
물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 같은 팔을 들어 그의 손목을 잡았다. 서로 쓸데없는 힘 싸움도 하지 않았다. 당연하다는 듯, 일어나 그를 소파로 내던졌다. 더러워서 싫어할 게 뻔했다.
손등으로 거칠게 그의 입술을 닦아냈다. 입술 사이로 내비치는 그의 송곳니를 손가락으로 문댔다. 날카롭게 긁히는 동시에 손가락 끝에 닿는 그의 혀가 부드러웠다. 삼키는 침에 그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그의 셔츠 단추를 풀었다. 손은 느리고 느려서 멍청해 보였다. 헛손질만 거듭하며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게 짜증 났다. 힘에 벌어진 셔츠와 함께 떨어진 단추들이 바닥을 제 마음대로 굴렀다.
“읏…….”
입술을 비볐다. 그가 내게 달라붙던 그날처럼, 흔들리는 머리를 그에게 처박고 마음껏 탐냈다. 잘근잘근 씹어도 편편한 잇자국만 났고, 금방이고 다시 깨끗하게 돌아오는 살은 금방 달아올랐다가 얼어붙기를 반복했다.
열 오른 입안이 시원해지는 기분에 마음껏 씹으며, 익숙하고 상쾌한 향에 얼굴을 처박고 숨을 쉬었다. 길들어버린 몸은 술과 담배보다 독한 중독성을 내뿜는 녀석에게 미쳐 허우적댔다.
“하아.”
머리카락을 파고드는 그의 손가락에 얼굴을 기댔다. 반질거리는 그의 손바닥에 입을 맞추고 티셔츠를 벗었다. 멈칫거리는 그의 손을 들어 살에 맞댔다. 며칠이라도 굶은 것처럼 그와 익숙한 키스를 했다.
고동색으로 잠긴 반지하 방에서 희미한 빛줄기에 의지해 그를 좇았다. 섹스에 무슨 그렇게 큰 의미가 있겠는가. 그저 지루한 일상에서 순간의 쾌락을 좇는 행위일 뿐인 것을. 의미를 두는 멍청한 인간들이 가여웠다.
이 세계에서 섹스란 그저 이성이 날아간 놈들의 본능적인 행위일 뿐이었다. 일방적이건 쌍방이건 성별과 나이를 모두 깨고 그저 좀 더 예민한 곳을 자극하며 쾌락에 젖는 일이었다.
근육이 빠진 나의 몸은 이제 눈에 띄게 그의 몸과 상반된 길을 걷고 있었다. 귀찮게 근육 따위 키울 일이 이제 뭐 있겠나. 몇 배고 노력해서 몸을 키워봤자 어디에 쓰겠나. 그저 보기에만 좋을 뿐이지.
“흐…….”
등을 쓸어내리는 커다란 손에 숨이 터졌다. 앓는 소리에 떨어진 녀석을 붙잡아 입을 맞췄다. 닿았다 떨어지는 원초적인 마찰 소리마저 자극적이었다.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나를 진정시키듯 그는 다시 한 번 내 몸을 밀어냈다.
“……네게 쓴 약 정보는 큰아버지의 손에 남아 있어. 그들이 아무리 네 피를 가지고 갔다고 해도, 네 아버지의 피를 갖고 있어도 만들지 못할 거야. 지난번 난리 덕분에 놈의 뒤를 밟아서 공장의 규모와 위치를 파악하고 따르는 놈들을 알아냈어. 일주일 내로 쇼가 아닌, 진짜 네가 바라던 피로 물드는 날이 터질 거야. 네 아버지를 찾아올 수 있다면 장례식은 그 뒤에 어머니랑 같이…….”
요동치는 몸을 단번에 일으켜서 그를 내려다봤다. 울렁이는 속에 마른세수를 하고 다시 앞을 봐도 흔들리는 건 나일 뿐, 세상은 독하게도 굳건했다.
꿈과 현실 사이의 외줄타기를 끊어버리고 바닥으로 끌어 내리는 듯한 그의 말에, 발정이라도 난 개처럼 그에게 달라붙었던 몸도 얼음물을 끼얹은 듯 차게 식어버렸다.
재혁은 몸을 돌려 길을 순순히 터줬다.
어둠에 싸인 곳에서 번쩍이는 텔레비전 불빛이 그와 나에게 쏟아졌다. 분위가 파악 따위 못 하고 깔깔거리는 사람들의 악마 같은 웃음소리가 거슬렸다. 뇌 속을 파고들며 신경을 긁었다.
“……같이 하는 편이 좋을 거라 생각해. 승아는 팀장님이 계속 돌봐주고 계셔.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상태긴 해도 별다를 것 없이 잘 지내고 있어.”
꿋꿋하게 말을 잇던 녀석은 떨궜던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딱딱하기 그지없는 말투였다.
“미안, 신뢰할 수 없게 굴어서. 굳이 겪지 않아도 될 일들을 겪게 만들어서.”
내던진 소주병은 텔레비전과 함께 산산조각이 났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화면 속에선 계속 웃음소리가 울렸다. 반복적인 소음이 텔레비전에서 나는 건지, 내 머릿속에서만 울리고 있는 건지 구분이 되질 않았다.
“……나가, 그딴 소리 할 거면.”
“숨기고 속이려는 의도는 아니었어, 몇 번이고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늦어졌을 뿐이야. 나한테 틈도 보이지 않고 가시를 세우는 네가 그렇게 터무니없이 쉽게 그의 말을 들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어.”
귓가가 웅웅거리며 그의 말을 삼켰다. 먹먹하게 막힌 귀로 그의 말을 들으며 담배를 주웠다. 라이터를 든 손이 떨려 불이 요동쳤다. 급하게 빨아들인 숨에 꽁초는 급속도로 타들어갔다.
“웬만해선 모든 걸 다 겪어봐서 더는 곤란할 일도 없다 싶은데, 너만 보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능력도 망가지고 자꾸 감정적이 되고, 아무렇지 않게 넘어갈 수 있을 말이랑 행동에도 자꾸 유치하게 굴게 돼. 이젠 넌덜머리 날 만큼 나 자신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날 통제하는 것도 버거워서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자꾸 실수를 반복해.”
내가 매번 미련하게 오기를 부릴 수 있었던 이유가 뭐였나 생각했다.
“네가 망가져버리든, 무너져 내리든 신경 쓰지도 않았을 텐데, 오히려 그런 게 훨씬 편하다는 걸 알고 있는데, 마음대로 안 돼. 아무렇지 않은 척 소리를 지르고 나한테 화를 내다가도 상처받은 얼굴로 가라앉아버리고, 밀어붙여버리면 등을 보이니까, 기다려주면 괜찮아지려나 싶어서 기다렸더니 이젠 일어설 생각조차 없어 보여.”
웃기지만 희망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조금은 내가 원하는 대로 굴러주겠지. 이 고비만 넘긴다면, 이 더러운 일만 끝난다면 조금쯤은 내가 생각하는 대로 되겠지 하는 희망 말이다.
냉정하게도 세상에 그런 수학적인 결과물을 내놓을 수 있는 상황은 드물었다.
“분위기란 분위기는 다 깔아놓고 무게 잡고 한 말들을 하나도 지키지 못하면서 또 약속해버릴까 봐 이젠 너한테 입에 발린 소리 하는 게 겁이 나. 이젠 네가 이러고 있는 게 정말 다 내 탓같이 느껴져. 그냥 차라리 화를 내. 부수고 때리고 욕하면서 그냥 화를 내라고. 감정 따위 다 묻어둔 사람처럼 줄담배 피우고 마시지도 않던 술 마셔가면서 죽어가지 말고 그냥 나한테 화를 내. 피하고 도망가고 숨는 거 다 네가 싫어하는 거잖아. 아니야?”
급하게 피운 담배 탓인지, 무식하게 마셔댄 술 탓인지 급하게 뛰기 시작한 심장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빈속에 들어간 알코올을 몸에서 받아들이지 못해 속이 메스꺼웠다.
“사과할 일도, 네가 신경 쓸 일도 여기엔 없으니까 그냥 조용히 나가라고.”
목이 탔다. 갈증이 났다. 말라비틀어져 숨을 쉬기 힘들었다. 쓰러진 병을 주워 목을 적시려는데, 그마저도 그의 손에 빼앗겼다.
“지금 너한테 쩔쩔매는 거 맞아. 알량한 자존심도 괜히 부려봤고, 가벼워 보이긴 싫어서 똥폼 잡는다고 별짓 다 했는데, 지금 그딴 게 눈에 안 밟힌다고. 넌 내가 어떻게 해주길 바라는데.”
정신 나간 그의 말에 피식 웃음이 샜다. 그의 손에 들린 병을 빼앗아 목을 축였다. 어깨 위로 든 병에서 남은 액체가 흘렀다. 아물지 않은 상처로 떨어진 알코올은 화한 감각을 선사하며 뇌에 산소를 공급해줬다.
“부수고…….”
그대로 벽으로 내리친 병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깨졌다. 튄 파편이 바닥을 어질렀다.
“때리고…….”
삐쭉 솟은 유리 조각들이 그의 가슴을 파고드는 모습을 봤다. 힘이 들어간 그의 근육이 꿈틀대고 있었고, 단번에 내리친 손에 그의 몸 위로 붉은 선이 선명하게 남았다.
“욕도 하고…… 그래. 씨발, 화도 내야지.”
“…….”
그를 살리기 위해 꿈틀대는 몸은 흔적을 지우며 아물어갔다. 부쩍 느려진 속도였지만 착실히 제 할 일을 해내고 있었다. 그는 앓는 소리 한번 내지 않고 서 있었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계속 피식댔다.
“이 또라이 새끼야. 평생을 그렇게 살았는데 내가 뭐 하러 또 그 짓을 해? 지겨워서 다 때려치우고 좀 내 마음대로 조용히 살겠다는데. 너한테 바라긴 뭘 바라. 가만히 내버려두는 게 그렇게 어려워?”
텔레비전도, 환청도 아니라 내가 계속 미친놈처럼 웃어대고 있던 거였나.
“왜 매일 와서 초를 치는데. 내가 이러고 있는 꼴을 보면 그동안 네가 좆같이 살았다는 게 눈에 보이냐? 내가 벌떡 일어나면 또 네가 한 건 해낸 것 같아서 기쁘고 그래?”
이미 모든 게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무슨 말을 듣든 기쁘지 않았다. 죄다 자기 편해지자고 하는 말같이 들릴 뿐이었다. 소리를 지르려고 해도 먹히고 화를 내려고 해도 흥분도 안 됐다. 그저 뚫린 입처럼 평소라면 마음속으로나 굴렸을 이야기들을 앞뒤 없이 뱉었다.
“당연히 모르겠지, 너한테 매달리지 않는 놈을 상대하는 법 따위……. 가만히 있어도 알랑방귀를 뀌어대는 놈들 사이에서 지겨운 걱정들을 받으면서 살았는데 알 리가 있나…….”
아직 메워지지 못한 그의 상처를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그의 목에서 막힌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대로 재생이 되어버리면 손가락이 박힌 채로 붙어버리려나. 그럼 내 손가락은 어떻게 되는 걸까.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면서 남의 인생 들쑤시는 것도 정도껏 해. 암만 네가 노력을 해도 네 생각대로 되지 않게 만들 테니까. 인생이 하수구 구렁텅이보다 더 더럽고 거지같아서, 너한테 박히고 입술이나 빠는 일로도 네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지고 싶은 걸 참아야 했는데, 이젠 아무 생각도 안 나. 내 피가 그렇게 좋았나? 이렇게 와서 지랄을 떨고 있을 만큼? 내 발을 빨면서 쩔쩔맬 만큼?”
손가락으로 쑤셔댄 곳에서 쿨럭거리며 피가 터졌다.
무슨 맛일까, 이 녀석의 피는. 틀림없이 아무 맛도 안 나겠지. 지독한 향을 펑펑 풍기면서 속은 텅텅 비어서 입안에선 아무 맛도 내지 않고 넘어가버리겠지.
숨을 삼키며 차분하게 이야기하던 녀석의 입에서 깊은 한숨 소리와 함께 말이 터졌다.
“그럼 안 돼?”
그의 말이 억지로 막혀 있던 물꼬가 트이듯 쏟아졌다.
“네 발을 빨면서 쩔쩔매고 있으면 안 돼? 왜 마음에 없는 소리라고 단정을 지어? 왜 굳이 나를 밀어내려고 노력까지 해, 너는? 내가 이러고 있는 게 아직도 그저 동정심 때문이라고 생각해? 아니면 뭐라도 너한테서 얻어낼 게 있어서 궁리라도 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딴 걸로 내가 이렇게 감정 소모를 할 리가 없잖아! 불쌍하면 네가 죽어라 챙기던 자존심 따위 신경 쓰지 않고 밀어붙였으면 그만이고, 얻어낼 게 있었다면 이렇게 오랜 시간 난리를 칠 필요도 없이 얻어내고서 손을 털었겠지. 네 감정 따위 무시하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밟아가면서 밑에 두고 아무것도 못 하게 가두고서 내 마음대로 했으면 쉬웠을……!”
“그래!! 그냥 그러지 그랬어? 그냥 생각도 못 할 정도로 정신 차릴 수도 없게! 네 맘대로 밀어붙이지 그랬냐고!”
그는 상처받은 얼굴을 했다. 짜증 났다. 내 얼굴을 비추고 있는 것 같아서 얄미웠다. 아니, 화가 났다. 얼굴을 마구 주물러 얼음장 같은 그의 원래 모습으로 돌려놓고 싶었다. 그에게는 나를 열받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얼굴이건, 행동이건, 말이건 다.
그는 이를 갈며 말했다.
“그러기가 싫어. 그렇게 네가 돼버리는 게 싫다고! 그런 게 싫어서 너한테 어떻게 맞춰줘야 할까 머리를 싸매고 대했는데…… 그런데 내가 대체 왜 네가 이러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어야 하는……!”
“어차피 언젠가 무너질 인생이었어. 조금 더 빨리 무너트려주지 그랬어. 난 원래 내 발로 지옥으로 걸어 들어가는 새끼잖아. 이렇게 되는 걸 원하지 않았어? 그럼 그 새끼한테 옳다구나 하고 쫓아가기 전에 잡아주지 그랬어. 돈 몇 푼에 후장 따일 때 좀 잡아주지 그랬냐? 나 좋다고 깔고 뭉개는 새끼들한테 당하고 있을 때 좀 구해주지 그랬냐고. 다 뒈지고 혼자 남았을 때! 나 따윈 신경도 쓰지 않고 이용하는 새끼들한테 구를 때, 재밌자고 지랄 떠는 놈들한테 쪼일 때 좀 잡아주지 그랬어. 개 똥폼 잡지 말고! 너도 나 따먹은 새끼들 목이나 좀 따주지 그랬냐고! 재수 없게 처웃고 쓸데없는 거 챙겨주고 할 시간에, 죽고 싶다고 술 퍼마시던 여자도, 죽여버리고…… 하, 씨발…….”
괜찮다, 괜찮다며 스스로를 향해 던지던 위로들은 모조리 화살이 되어 가슴에 박혀 있었다. 천천히 나를 죽이고 있던 걸 몰랐다.
“넌…… 뭐가 그렇게 잘났다고 나한테 소리를 지르고 이래라 저래라야. 속 시원해? 내가 술에 절어서 소리 지르고 있는 모습 보니까 속이 다 시원해? 마음에 들어? 어? 마음에 드냐고, 이제!!”
추하게 울음을 삼키는데도, 눈물은 자꾸 비집고 나오고 말을 삼키며 나를 굴복시켰다. 헐떡거리며 숨을 들이마시기 위해 노력할수록 멍청하게 앓는 소리가 났다. 나에게 손을 내밀고 억지로 끌어당기는 녀석을 밀어냈다. 물건을 내던지고 소리를 질러도 그는 당하고만 있었다.
그는 유리 조각에 살이 찢긴 그대로 나를 안았다. 흔들리고 정신없는 나를 잡아주는 확신에 찬 힘에, 주체할 수 없는 감정들이 폭발해 매일 밤 엄마를 찾으며 악을 쓰던 아이처럼 울었다. 그의 손은 식어버린 나의 등을 다독였고, 나는 그에게 매달려 분이 맺힌 울음을 토했다.
“……마음 놓고 그냥 그렇게 울어. 네가 잘못한 거 하나도 없어. 무너지지만 마.”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날들을 휘젓고 혼란스러운 감정의 골을 지나면서 망가져버린 나를 위로하듯 안아주는 이의 체온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따듯했다.
***
발작하듯 일어난 곳은 캄캄함 반지하가 아닌 눈이 부신 햇살이 들이닥치는 곳이었다. 병원 특유의 냄새와 누가 봐도 환자라는 것을 알려주는 침대, 그리고 손에 당당히 꽂혀 있는 링거 덕분에 내가 호화스러운 병실에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볶음밥을 맛있게 먹을 수 있다는 게 그렇게 중요합니까?”
문 앞에 서서 나를 보고 있던 제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나의 질문에 사뭇 진지한 대답을 던졌다.
“중요하진 않아도 좋은 점이라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제이는 내가 그녀의 집에 틀어박히기 시작했을 때부터 24시간 내내 있는 듯 없는 듯 집 앞을 지키고 서 있더니, 이젠 아예 미어캣처럼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집에 안 들어가세요? 2주 넘은 것 같은데.”
“정확히 말하면 18일째입니다. 못 들어가는 거죠. 백유운 씨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해고당하는 처지라서요.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그 링거도 빼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수당이 깎이거든요, 제가.”
“……악덕 고용주네요.”
“나름대로 후하게 잘 쳐주는 편이니까요. 열심히 이용해먹곤 돌아오는 것도 없는 곳보단 훨씬 나으니까 상관없습니다. 생각보다 휴가도 꽤 많이 주고 일이 없을 땐 조기 퇴근도 시켜주는 편이고요.”
몸이 뻐근한 것 같아 앉으려다가 어지럼증이 심해 다시 누울 수밖에 없었다. 따끔거리는 목에 마른침을 삼키고 있으니 제이는 냉장고에서 바나나우유를 하나 꺼내 들이밀었다.
“물은…….”
누가 사다놓은 건지 물어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좋아한다고 한 적도 없는데 왜 매번 수상하게 생긴 캐릭터가 박힌 바나나우유를 사 오는 건지. 보기만 해도 니글거려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이었다. 제이는 헛구역질을 해대는 나에게 급하게 빈 통을 들이밀며 미적지근한 생수를 건넸다.
역류할 음식도 없어 그렇게 헛구역질만 하다가 물로 입을 헹궈냈다. 멍한 머리를 부여잡고 천장을 봤다. 흰 천장이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른 얼굴을 쓸었다.
“……그게 다입니까. 아이가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하는 이유가.”
“흠…….”
직접적인 질문에 한참이나 아무 말 없이 나를 보던 제이가 입을 열었다.
“자유로운 삶 때문이겠죠.”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우월하다면 우월할 수 있는 그들의 입에서 자유를 갈구하는 말이 나올 줄은.
“존재 자체로 세상에서 제약을 받아야 할 대상이 될 테니까요. 대부분은 생명을 담보로 하는 곳에서 일하게 될 테고, 굳이 느껴서 좋을 것 없는 욕구에 반항하는 일을 평생 해야 합니다. 이해하기 힘드실 테지만, 갈증과 더불어 생기는 생식적인 욕구는 상상 이상일 겁니다.”
선글라스를 벗은 그의 눈동자는 연해지고 진해지기를 반복하며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한 채 일렁이고 있었다. 시선을 떨구니 그는 말을 이었다.
“이유 없이 다수의 사람에게 두려운 존재로도 인식될 수 있기에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비난의 말은 아니지만, 인간들은 아무리 찬양하던 대상이라도 자신에게 위협이 될 것 같다고 생각하는 순간 등을 돌리니까요. 사회적인 문제야 경험과 학습을 통해 습득하고 조심한다면 문제가 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열이면 열 시도 때도 없이 머릿속을 긁는 속삭임에 잠식당하는 순간이 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자기혐오와 자만심을 오가는 불쾌한 경험을 하죠. 인간들이 말하는 절제력이라는 말로만은 다 담아내기가 힘든 일입니다.”
제이는 손에 들고 있던 선글라스를 다시 꼈다.
“그렇게 언제든 폭발할 수 있는 폭탄을 껴안고, 터지지 않길 바라면서 자신을 다스리며 평생을 삽니다. 터지는 순간 살해당한다는 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일 테고요. 그러지 않기 위해서라도 일부러 이런 곳에 몸담고 살죠. 웬만하지 않고선 혼자 조절하긴 힘드니까요.”
“……사람이라고 다를 것 없습니다.”
얼룩덜룩한 팔을 쓸었다. 회복되지 않는 상처가 남은 피부에선 더는 아픔이 느껴지지 않았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제이는 문고리를 잡았다.
“본인이 갖지 못한 것에 환상을 품고 선망하는 건 누구나 똑같으니까요. 자리를 비켜드리겠습니다. 필요하면 불러주십시오.”
제이가 경계 없이 들인 사람은 팀장님이었다. 승아의 하원을 도와주는 중이었는지 어울리지 않는 노란 가방을 멘 채 아이의 손을 잡고 온 그는 제이와 짧은 대화를 나누고 승아의 손을 제이에게 넘겼다.
“가방이요! 오늘 그림 그린 거 보여줄래요!”
팀장님을 상대로 거리낌 없이 씩씩하게 요구해서 가방을 받은 승아는 나에게 경계 어린 눈빛으로 손으로만 인사를 하곤 곧장 제이와 함께 나갔다. 팀장님은 그런 모습을 지켜보다가 문을 닫으며 들어와서는 테이블 옆 의자를 질질 끌고 와 당당하게 내 옆에 앉았다.
아무 말 없이 나를 훑어보곤 한참을 생각하더니 꺼낸 말은 바나나우유 좀 마셔도 되냐는 말이었다.
“마지막까지 화끈해, 백유운. 사표 딱 내고 잠적하더니 알코올에 찌들어서 반쪽이 된 채로 병상에 누워 있고. 일탈했으면 몸이 두 배로 불어 있어야지.”
“위로 되게 못 하네.”
“인제 그만뒀다고 말도 잘라먹냐.”
팀장님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껄껄 웃으며 우유를 벌컥벌컥 마시더니 오만상을 찌푸리며 험악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건 왜 이렇게 달아? 매일 공용 냉장고에 들어가 있길래 신표성이 좋아해서 사놓은 줄 알았더니 네가 사다놓은 거였나.”
“제가 왜 바나나우유를 돈 주고 사 먹습니까.”
“흠…….”
그는 남은 우유를 내게 권하다가 거절당하자 자신의 입에 탈탈 털어 넣었다. 굳이 다시 먹곤 인상을 쓰던 그는 가벼운 말투로 입을 열며 우유 용기를 내던졌다.
“집은, 계속 거기서 살 생각인가?”
던져진 용기는 정확히 쓰레기통으로 들어갔다.
“어떻게든 되겠죠, 뭐. 승아는 셋째로 업어가세요.”
“글쎄. 승아는 너랑 살고 싶어 하는데.”
“그 녀석이랑 살고 싶은 거겠죠.”
“그럼 셋이 살면 되겠네.”
“말은 다 쉽죠.”
“싫다고는 안 하네.”
막힘없이 오가는 의미 없는 말들은 무게에 비해 가벼웠다.
“원래 이렇게 유치하셨어요?”
“직장 상사 역할도 끝났는데 무게 잡아서 뭐 해.”
“그럼 여긴 왜 오셨어요.”
“아저씨로 왔다. 동생 돌봐주는 동네 아저씨.”
“……그건 무슨 역할인데요.”
한참 동안 생각을 하다가 내뱉은 팀장님의 말은 황당했다.
“꼰대?”
“할 말 있으면 하세요. 쓸데없는 말 하면서 빙빙 돌리지 말고.”
팀장님은 팔짱을 낀 채 나를 유심히 보더니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왜 저 미친 호랑이 새끼는 나한테만 이렇게 독하게 구나 싶어서 한 대 쥐어박고 싶은 적 없었나? 너라면 더했을 것 같기도 하고.”
“잘 아시네요.”
“총 안 맞은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야겠네.”
하루에도 몇 번이고 욕을 퍼붓던 날들이 생각났다. 왜 저 남자는 나를 못 괴롭혀서 안달인가 싶다가도, 축 처질 때쯤이면 옆구리를 쿡쿡 찔러대며 닦달한 탓에 일어난 날들이 팀장님의 의도대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나날을 보낸 지 자그마치 5년이 넘은 걸 보면 팀장님의 손에 길이 든 건가.
팀장님은 장난스러운 모습을 감추고 말을 이었다.
“세상 모든 일이 이유가 있어서 일어날 수도 있겠지만 이유 없이 일어나는 일도 태반이야. 우연히 일어나는 일도 있고. 그 결과는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지.”
팀장님은 뒤로 잔뜩 기대고 있던 허리를 일으켜 세웠다.
“난 승균이가 죽을 걸 알고도, 정부 측에서 빼돌려서 네 아버지에게 넘겨줬어. 재혁이는 내가 그를 입에 담을 때마다 내가 그 일을 후회한다고 생각하더군. 쓰레기 같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난 그 결정을 후회하지 않는다. 심지어 좋은 결정이라고 생각해. 안 그랬다면 이제 곧 올 기회조차 잡지 못했을 테니까. 그때에는 이 많은 놈 중에서 왜 내가 이런 경험을 해야 하는 건지, 매일 1분 1초도 쉬지 않고 생각했어. 내가 옳은 결정을 한 건가, 아니면 멍청한 결정으로 모든 걸 망치는 배신자가 되어버린 건가, 살인자가 되어버린 건가 하고.”
“지금은, 결론을 내셨습니까.”
“아니.”
당당한 대답에 쳐다보니 팀장님은 눈썹을 으쓱거렸다.
“상처를 외면할 순 없어. 나에게 드는 의구심을 제거하는 것도 불가능해. 그냥 인정하고 가는 거야. 물고 늘어지는 질문들에 맞는 대답을 찾는 게 아니라, 내가 대답을 만들어야지. 일이 이유 없이 일어나더라도 이유는 만들면 돼, 결과가 나쁘게 흘러간다면 기회를 노리고 좋게 바꾸면 되는 거야. 나한테 왜 일어났는지를 생각하는 게 아니라 왜 나한테 일어났는지를 생각해야 해.”
“…….”
“네 아버지는 끝없는 고민을 하고 네게 최선의 선택지를 남겼을 거다. 잘 견디고 잘 자랄 수 있다고 믿었을 테지. 그게 본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을 거야. 거기에 맞게 넌 잘해왔고, 잘 걸어왔어. 내가 등을 떠밀지 않아도 매번 박차고 나갔잖아.”
팀장님이 탁자에 내려놓은 흰 봉투의 정체가 뭔지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살짝 열린 틈만 보더라도 그가 수시로 압수했던 내 콜트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뭐, 주저앉아 있다고 나쁠 거야 없지. 쉬어야 다시 달릴 힘이 생기니까.”
매번 품에 넣고 있기에 급급했던 물건이지만, 오랜만에 보는 물건은 그리 달갑지 않았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이제 없다. 앞을 보고 달릴지, 뒤를 보고 되돌아갈지를 결정하는 건 너뿐이고.”
“……다시는 엮이고 싶은 생각 없습니다. 아직 고민하고 싸우는 팀장님과 다르게 전 결론을 다 내린 일이니까요. 들고 가세요.”
“둘이 잘 맞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긴 했지만, 생각보다 훨씬 사이가 좋은 것 같아 뿌듯하군.”
팀장님은 진지하게 던지는 나의 말을 시원스레 무시하며 주제에서 벗어난 말을 내던졌다.
“어떤 선택을 하든 내가 뭐라고 할 자격은 없지. 다만 그렇다고 해서 널 진심으로 대하고 걱정하고 생각하는 사람들까지 깡그리 무시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는 게 내 최후의 변명이군. 넌 이상한 데서 핀트가 엇나갈 때가 많으니까.”
팀장님은 자신이 할 말을 다 하곤 시계를 보더니 곧장 나갈 채비를 했다.
“왜…….”
“음?”
“왜 잘 맞을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까.”
자신의 머리에 총을 겨누는 시늉을 한 팀장님이 효과음과 함께 웃으며 말했다.
“둘 다 한 똥고집 하잖나.”
팀장님이 문을 열자 문 앞에 서 있던 승아가 고개를 빼꼼 내민 채 나를 바라보았다. 앙다문 입술은 무언가 굳게 다짐한 듯 보였다.
팀장님의 귓속말에 승아는 쭈뼛거리며 병실로 들어왔다. 내가 내 껍질 속에서 허우적거릴 동안 조그만 아이는 훨씬 더 의젓해진 모습이었다.
아이가 뒤를 돌아보자 팀장님과 제이는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고 온몸을 흔들며 응원을 하고 있었다.
“승아가 만든 컵케이크! 아저씨, 빨리 나아요!”
들고 있던 작은 상자를 내던지듯 침대에 놓고 후다닥 나가버린 승아는 문밖으로 사라졌다가, 다음 순간 소심하게 얼굴만 쭉 빼고 나를 보더니 손을 흔들고 사라졌다.
상자 안에는 생크림 범벅이 된 작은 케이크가 들어 있었고, 그 옆에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혼자 읽어봐야 한다는 경고 메시지가 적힌 종이가 붙어 있었다.
병실로 들어오자마자 탁상에 놓인 봉투를 본 재혁은 곧장 제이에게 집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말을 건넸다. 그는 팀장님이 앉았던 의자를 창가로 끌고 가 자리를 잡았다. 어정쩡한 의자 높이라 내가 그를 내려다보는 것 같아서 이상했다. 피곤해 보이더니 이제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게 영 상태가 좋지 않은 듯했다. 그런데도 그는 태연한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
“악덕 고용주라니 심하네. 복지랑 급여가 얼마나 훌륭한데.”
“암만 그래도 개인 시간을 앗아가면 악덕이 맞다.”
그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참고는 할게.”
이토록 정적이 불편하고 찝찝할 수가 있을까. 쓸데없는 말이라도 떠들어주면 좋으련만 그는 옆에 앉아 까딱거리고 있는 내 발가락이나 보고 있었다. 어딘가 나사 빠진 인간 같았다.
이불을 죽 끌어 얼굴을 덮곤 꼼지락거리며 발을 이불 속으로 넣었다. 이불은 그의 냄새를 차단하고 낯선 향을 풍겼다.
얼마나 긴 잠을 자고 일어난 건지, 잠도 오지 않고 자세도 영 불편했다. 더군다나 보이지 않는데도 옆에 앉아 있는 녀석의 시선이 제일 신경 쓰였다. 안 그래도 멀쩡함과 거리가 멀었던 녀석의 몸을 난도질해놨으니 녀석도 나와 함께 있는 공간이, 피 냄새가 여기저기서 퍼지는 병원이 불편할 게 뻔했다.
녀석이 걱정된다기보단 내가 불편함에 죽어버릴 것 같아서 입을 열었다.
“……안 가?”
“악덕 고용주 안 되려면 있어야지.”
그 난리를 치고 불편한 건 나뿐이었나. 하긴 그가 민망할 게 뭐가 있겠나. 숨을 죽이고 누워 있으니, 연신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제이는 왜 그런 얘기를 나에게 해줘서 재혁이 지금 품고 있을 욕구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건지.
오밤중에 술에 취해 그에게 온갖 소리를 지르다가 추하게 울어버린 것도, 그가 나에게 퍼붓던 말들도 생생하게 다 기억에 남아 뒤죽박죽 섞여 얼굴이 화끈거렸다.
“……안 갈 거면 이리 좀 와봐. 잠 좀 자게.”
뜸을 들이다가 나온 그의 말은 나긋하기 짝이 없었다.
“자. 여기 있을 테니까.”
“이용하라며. 등 좀 내놔봐.”
눈에 뵈는 게 없으면 당당해진다고 뻔뻔하게 한 번 더 말했지만, 그는 단호하기가 하늘을 찔렀다.
“안 돼.”
“왜.”
“오늘은 안 돼.”
그렇게 생소리를 지르면서 호소하던 놈은 어디 가고 안 된다면서 단정을 짓고 있는 꼴이 어딘가 짜증이 났다. 괜히 소리를 지르며 답답한 이불을 끌어 내렸다.
“그렇게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것처럼 말하더니 뭐 다 안 된……!”
창 밖으로 얼굴을 돌리는 녀석의 새빨간 귀에 목소리가 턱 막혔다. 암만 고개를 돌려도 셔츠 깃 밖으로 보이는 목도 불긋해져 있는 게 무슨 꼬락서니인지.
“뭐 하냐……?”
머리를 쓸어 넘기며 일어난 녀석은 피곤하다는 눈으로 한숨을 쉬었다.
“기다려. 쿠션이든 베개든 뭐라도 하나 가져올 테니까.”
관사에 기어 들어가며 잠이나 자면 될 텐데 사서 고생을 하는 그였다. 하지만 불쌍하다거나 안타깝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물론 저런 상태가 된 것에 대해서 절반 정도는 나의 책임인 듯했으나 그렇다고 굳이 미안함을 느껴야 하는 건 아니지 않나?
“필요 없어. 등이나 빌려줘.”
고갯짓으로 부르니 혼자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편 녀석은 눈동자를 열심히 굴리다가 나를 바라봤다. 삐쭉거리며 쳐다보는 내가 얄미운지, 입술을 잘근거리다가 포기한 듯 한숨을 푹푹 쉬며 침대로 걸어왔다.
신경질적으로 이불을 걷어낸 녀석은 등을 내보이며 침대에 눕곤 다시 조용히 이불을 덮었다. 막상 가까워지고 나니, 긴장됐다.
“뭐 해. 움직이기 귀찮아. 뒤로 좀 와봐.”
“……일부러 그러지, 너?”
어떻게 그렇게 당연한 걸 묻지?
“어.”
녀석의 등판이 눈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가만히 있어도 코를 쓸고 지나가는 그의 향은 이제 안정감을 주며 나를 차분하게 만들었다. 그의 등에 이마를 쓸었다. 매끄러운 셔츠 너머로 느껴지는 그의 체온이 얼마나 뜨거운지.
팔을 벤 채 침대에 구겨 누운 녀석을 끌어안았다. 손에 닿은 그의 몸에서 심박 수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셔츠 너머로 느껴지는 그의 몸엔 당연히도 상처 자국은 남아 있지 않았다. 손을 조금이라도 움직일 때마다 한숨을 쉬어대는 게 고소했다. 쓸데없이 꼼지락거렸더니 결국 입을 다물고 있던 그가 중얼거렸다.
“……그만해라, 진짜.”
“뭘.”
“참는 것도 한계가 있어. 술병 나서 병원에 누워 있는 사람을 상대로 사고 치고 싶은 생각 없으니까, 그만 좀 해.”
“협박을 하네?”
“하…….”
몸에 잔뜩 힘을 주고 있는지 팽팽하게 긴장된 그의 근육들은 녀석이 얼마나 신경을 바짝 세우고 있는지 느끼게 해줬다. 환자는 건들지 않는다…… 뭐 그런 건가.
손을 꼼지락거리길래 뭘 하나 싶어 잡았더니 흘러나오는 피가 손가락에 묻어났다. 앞에 누워 있는 녀석도, 나도 평생 피라는 놈한테서 벗어나긴 글렀구나 싶었다.
손을 들어 그의 입술을 뭉갰다. 꽉 다문 입은 벌어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온갖 소리를 지르고 난리를 치거나 몸으로 치고받고 싸우는 것보다 훨씬 손쉽고 간단하게 그를 빡치게 하는 방법을 알았달까.
“먹을래?”
말도 못 하고 누워 있는 녀석의 입술을 쓸었다. 바짝 붙은 몸 때문인지 나까지 열이 나는 느낌이었다. 맥박이 열심히 뛰는 손목을 그의 아랫입술에 문댔다.
연약한 살과 피부가 얇은 입술이 맞닿자 내 맥박이 나한테도 느껴질 정도였다. 고개를 들어 그의 새빨간 목을 핥자 그는 움찔대며 힘을 풀었다. 그 틈을 타 엄지손가락으로 그의 치열을 훑었다.
날카로운 그의 이에 닿았지만 떨림도, 두려움도 없었다. 지난날 그와 접촉하며 겪은 낯간지러운 감각들만 되살아날 뿐이었다. 충동을 이기지 못하는 건 앞에 있는 녀석이 아니라 내가 될 것 같았다.
손가락에 살짝 닿은 그의 혀에 놀라 떨어진 순간,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나의 팔을 잡은 채 몸을 돌렸다.
“…….”
그의 짧은 손톱에 긁히고 있는 팔에 신경이 쏠렸다. 거친 숨과 한숨을 반복하며 녀석의 눈동자는 빛을 냈다 잃기를 반복했다. 자유로운 손을 뻗어 그의 멱살을 잡고 끌어당겼다. 뜨거운 이마가 닿고 살랑거리는 머리카락이 얼굴을 간질였다.
코끝끼리 쓸리는 예민한 감각은 녀석이 더 잘 느끼고 있겠지.
손에 힘을 풀자 그와 나의 거리는 금방 멀어졌다.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팔은 차가운 공기를 만나 허전한 감각을 선사해주었고, 그는 침대에 걸터앉아 눈두덩을 눌러대며 혼자만의 전쟁을 치르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그냥 나가든 부탁하든 하면 될 일로 청승을 떨었다. 멍청하다고 해야 하는지, 미련하다고 해야 하는지, 아니면 참으로 대견하구나! 하고 칭찬이라도 해줘야 하는지…….
그냥 어이가 없었다.
“나 바나나우유 안 좋아해.”
내가 생각해도 좀 뜬금없는 말이긴 했지만, 그는 대답 대신 어쩌라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나 바나나우유 안 좋아한다고.”
“한 번만 말해도 알아들어.”
돌아온 대답에 별생각도 없는 말을 구체적으로 지껄여봤다. 저 정신에 어디까지 듣고 어디까지 꼴리는 대로 들어줄까에 대해 의문이긴 했지만, 딱히 듣지 않아도 될 말들을 던졌다.
“빵 쪼가리 먹기 싫어. 다음부터 아침 사 오려면 밥으로 사 와. 매운 거나 기름진 건 아침에 부대끼니까 머리 잘 굴려서 개운하고 든든하고 깔끔한 걸로.”
“…….”
“밤에 작업하는 거 아닌 이상 카페인 음료는 싫어. 웬만하면 마실 거는 그냥 생수나 이온 음료로 가져와. 그리고 내 앞에서 똥폼 잡는 거 꼴 보기 싫어. 뭐가 됐건 내가 하는 말에 태클 걸 생각 하지도 말고, 나랑 관련된 얘기가 있으면, 아니, 해야겠단 생각을 한 번이라도 한 말이면 다 해.”
쓸데없이 솔직한 대화를 나누어버린 상대에게 다시 한 번 속내를 비치는 일은 처음처럼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이제 아껴둔다고 좋을 것도 없고 바뀌는 것이 없어도 손해 볼 것도 없었으니까.
“내가 또라이 같은 짓 해도 다른 사람 편들지 마.”
말이야 번지르르했지, 결국 ‘내가 하라는 대로 해라’를 줄줄이 읊었다.
그는 잠깐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저 잔뜩 찡그린 얼굴이, 어쩌면 그냥 고민하는 얼굴일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알았……!”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녀석을 잡아채 입을 맞췄다. 부딪친 충격이 조금 얼얼하긴 했지만, 그와 하는 키스는 잡생각을 날려버리기 좋았다. 굳이 할 말을 꾸깃꾸깃 던져대는 짓을, 기 싸움을 하지 않아도 오가는 감정에 중독되었달까.
모든 게 멈추어버린 것 같은 세상 속에서 빠르게 흘러가는 듯한 기분은, 쓸데없이 쓰고 맛없는 알코올보다 좋았다. 주춤대는 듯하던 녀석도 나의 욕구에 맞춰 넘어오고 있었다.
보기 좋게 빨개진 아랫입술을 훔치고 입속 깊이 그를 삼켰다. 습기 가득한 입안으로 닿는 점막의 감촉에 몸속에서 탄산이 터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는 잡은 손을 놓아도 물러나지 않았다. 밀리고 밀며 조금 더 서로를 탐하기 위해 발버둥 칠 뿐이었다.
간간이 내뱉는 뜨거운 숨이, 흔들리는 콧바람이 간지러웠다. 부드럽게 쓸며 지나가는 혀에 지지 않고 달라붙었다. 본성부터 글러먹은 둘이기에 거칠었지만 그만큼 격렬하게 서로를 탐하는 움직임은 상대를 끌어당기기에 충분했다.
“……!”
나의 얼굴을 향해 뻗은 그의 손을 끌어당겨서 뒷덜미를 감싸게 했다. 흩날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자리 잡은 손에 힘을 주곤 나의 목에 그의 얼굴을 처박았다. 어딘가 익숙하고 묘한 기분이었다. 그는 움찔대며 벗어나기 위해 바빴다.
“……똑바로 해. 맨 정신으로 있기 싫으니까.”
그는 나의 말에 얼마 가지 않아 참고 있던 숨을 터트렸다. 간질거리는 느낌이 들자 손발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긴장한 피부를 달래듯 몇 번이고 쓸고 지나가는 그의 혀는 부드러웠고, 축축한 입에 삼켜진 피부는 화끈거렸다.
눈가에 오르는 열감에 얼굴을 가렸다. 귀신같이 알아챈 녀석이 손을 잡고 끌어내렸다. 깍지 낀 손가락 사이사이로 그의 체온을 느꼈다. 뚫린 살갗 사이를 비집고 나온 액체는 피부를 적시기 무섭게 그의 것이 되고 있었다.
반복적으로 스치는 그의 혀와 입술은 나를 잡아먹으려는 것 같기도, 애무하는 것 같기도 했다. 신경을 곤두서게 하면서도 몽글거리는 느낌을 주는 두근거림은, 언제든 내가 끊어낼 수 있는 긴장감이자 끊어내고 싶지 않은 감각이었다.
그의 울대가 움직이는 소리가 귀를 자극했다. 그는 깍지 푼 손으로 나의 얼굴을 감싸곤, 조금은 짜증 섞인 표정으로 입을 맞췄다. 비릿하면서도 달고 묘한 맛에 입맛을 다시는데, 부드럽게 움직이던 그의 손이 나의 몸을 대충 덮고 있는 환자복 사이로 파고들어 주물럭거리기 시작했다.
배에 닿은 그의 손이 옅은 숨의 오르내림을 느끼고, 옆구리를 쓸고 지나가 가슴에 닿으며 심장의 움직임을 느꼈다.
손가락이 대체 뭐라고 사람의 촉각을 이렇게 예민하게 만드는지.
갈비뼈를 훑으며 내려오는 손에 몸이 움츠러들었다. 간지러우면서도 그만두지 않았으면, 조금 더 만져줬으면, 상대가 나를 가만두지 못하게 되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으…….”
얇디얇은 옷은 입은 느낌조차 들지 않았다. 그의 허벅지에 눌린 앞이 적나라하게 촉감을 전했다. 아랫배는 간질거렸고, 익숙한 욕구가 일어났다. 나의 시선을 좇는 이의 입술을 덮쳤다.
나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분위기에 휩쓸려 덤벼들었다. 이제 그가 어떤 기분일지, 어떻게 느끼고 있을지, 그런 배려심 깊은 고민을 할 때가 아니었다.
그는 힘 조절을 하지 못하고 밀어붙이다가도, 낮은 숨을 토하며 의도적으로 제동을 걸고 있었다.
“……떡 치는 데 신사적인 척하지 마라. 하나도 안 멋있어.”
이미 끌려 올라간 상의를 벗자, 그는 눈썹을 으쓱이며 자신의 셔츠를 한 번에 벗었다. 방 안에서 흐르는 잔잔한 기류 때문인지, 아니면 필요 이상으로 밝은 전구 불빛 때문인지, 그의 몸이 평소보다 더 자극적으로 보였다.
그의 커다란 손이 치골을 쓸고, 골반을 지나 부드럽기 짝이 없는 엉덩이를 주물렀다. 노골적인 손의 움직임이, 그에게 깔린 몸이 답답하기보단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는 건…… 위험한 게 맞겠지.
그는 입술로 나의 몸에 있는 상처를, 문신을 훑으며 내려갔다.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잊을 수 없던 일들이 고스란히 담긴 몸을 닦아내는 듯한 행동에 얼굴이 홧홧해졌다.
“낯간지럽게 뭐 하……!”
그가 붕대 감긴 내 발을 들어 입에 머금었다. 차가운 발가락 하나하나가 입에 데워지고, 거친 발바닥이 그의 부드러운 얼굴에 닿았다.
붉은 혀가 발가락 사이사이를 오가며 엉키는 모습을 봤다. 마치 일부러 보라는 듯 눈을 맞춰갔다. 부드럽게 핥는 게 그의 혀인지, 그의 눈동자인지 구분되지 않을 만큼 나를 옭아맸다.
“지금도 내가 무슨 잔머리를 굴리는 걸까 생각해?”
그는 나른한 눈으로 물었다. 낮은 목소리로 읊조리는 그의 숨이 젖은 발가락을 간질였다. 발가락을 한껏 오므렸다.
“…….”
그저 벼랑 끝에 내몰렸다가 뒷걸음쳐서가 아니었다. 관능적인 그의 눈빛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으왁……!”
기다렸다는 듯 꿈틀거리던 발을 잡고 끌어내리는 덕에 몸은 주룩 미끄러져 그와 가까워졌다. 엉덩이골 사이를 훑고 지나간 손이 나의 성기를 쥐었다.
“……!”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접촉에 벌어진 입을 다물려던 순간, 그가 다시 입술을 부딪쳤다. 쪽쪽 하는 낯부끄러운 소리가 퍼지고, 그의 손에 앞이 쓸리면서 질척이는 소리가 울렸다.
느릿한 키스도, 부드럽게 달래는 손도 전부 적극적이었다. 그는 어떻게 하면 내가 얼굴을 붉히는지, 소리를 참지 못하고 터트리는지 뻔히 알고 있었다.
혼자만 끙끙거리고 있는 게 어딘가 분해 그의 것을 덥석 쥔 순간, 그가 입에 머금은 타액을 손에 뱉어내 엉덩이 사이를 적셨다. 타액은 골을 타고 흘러 피부를 간질였고, 어딘가 따뜻하고 질척이는 묘한 감각에 밑은 움찔거리며 익숙한 반응을 보였다.
“으…….”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가며 입구를 누르는 손에, 손장난을 멈추곤 무의식적으로 그의 몸을 발로 밀어냈지만, 그가 그런 힘에 밀려날 리 만무했다. 결국 다급한 마음에 적나라한 말을 토했다.
“……손가락 넣으면 죽여버린다.”
“왜, 그사이에 민망해졌어?”
“주둥아리 좀 닥쳐봐.”
“이번엔 좀 억울한데.”
대답은 저래도 생각보다 말은 잘 듣는 녀석인지도.
밀고 있던 발을 덥석 잡아 어깨 위로 걸친 상대는 그대로 자신의 것을 잡고서 밑을 비집고 들어왔다. 안은 단번에 박차고 들어온 그의 것으로 꽉 찼고, 미끈거리며 내벽을 훑는 촉감이 그대로 느껴졌다.
“흐…….”
질끈 감은 눈이 무색하게도 잠잠한 기운에 살짝 눈을 뜨자, 그는 그제야 움직이기 시작했다. 적나라하게 느껴지는 그의 움직임보다, 어딘가 따뜻하게 퍼지는 이 분위기가 더 참기 힘들었다.
평소라면 귀에 거슬리기만 했을 침대의 스프링 소리도 왜 이렇게 낯부끄럽게 들리는지 모르겠다. 몸을 비틀자 그는 더 가까이 붙어왔고 그럴수록 내 다리는 점점 벌어져 그의 시야에 훤하게 드러날 뿐이었다.
“흐읏, 아……!”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싫다고 밀어내고 머리카락을 쥐어뜯었겠지만, 나는 되레 더 확실한 자극을 위해 허리를 세웠다. 젖은 성기가 밑을 들락거리는 그런 질척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왜 흥분을 하는 것인지!
사람은 쉽게 변하는 게 아니었다. 그 흥분감을 공포로 느꼈던 기억이 쉽게 사라지는 게 아니라는 말이었다. 어떻게든 빨리 이 분홍빛 분위기를 없애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기 시작했다.
빨라진 피스톤질에, 그리고 나보다 높이 올라 있는 그의 체온에 안은 점점 뜨거워졌고, 작은 자극 하나하나가 손끝까지 전해지고 있었다. 저릿한 손을 꼬물거리다가 움직임에 열심히 흔들리고 있는 앞을 잡아버렸다.
“으으…….”
움직일 필요 없이 반동에 쓸리는 감각은 앞뒤 할 것 없이 박차고 들어왔고, 닿는 곳마다 머물던 감각들이 비집고 올라와 뇌를 간질이는 것 같았다.
“……!”
“급한 건 알겠는데 반칙은 하지 말자. 흥분한 얼굴 보는 건 좋은데…… 네가 너무 빨리 지치잖아. 오늘은 안 돼.”
양손은 그의 손에 잡혀 위를 향해 뻗는 꼴이 됐고, 그 여파로 숙여진 그의 상체는 나와 밀착되었다. 들린 엉덩이에 그의 하체가 닿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더 깊숙이 박히는 것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뭐라 반박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입술을 덮치는 녀석 때문에 막혔다.
“읍……!”
올라간 팔 탓에 겨드랑이에 훤히 바람이 통하는 것도 이상하건만, 그의 손은 자꾸 여린 살을 훑어댔다.
민감해진 몸에 간질거림을 넘어선 감각들은 몸을 가만히 있지 못하게 했고, 나는 안달 난 사람처럼 꾸물거려야 했다. 자유를 찾은 성기는 그의 배를 툭툭 치며 껄떡거리고 있었고, 언제라도 사정을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붉고 단단하게 서 있었다.
감각들에 무뎌지기 위해 힘을 바짝 줬지만, 그게 오히려 그를 닦달한 꼴이 되었는지도. 밀어붙이던 몸을 뒤로 빼는 녀석 때문에 막혔던 숨을 토해내는데, 몸이 한 번에 뒤집혀버렸다.
“윽, 잠……!”
찬 바닥에 열이 오른 발로 섰다. 침대에 바짝 밀착한 상체를 위해 부드러운 천을 끌어당기는데, 목을 쓸고 간 그의 손이 날개뼈에서 멈췄다. 누르는 힘에 반항하며 몸을 일으키려던 순간, 무섭게 달려드는 녀석 때문에 절로 신음이 터졌다.
“하으…….”
비집고 나오는 앓는 소리를 막기 위해 고개를 푹 숙여봤지만, 입안을 비집고 들어오는 그의 손에 부질없는 짓이라는 걸 깨달았다.
빠져나가는 허전함을 잊기도 전에 무턱대고 들이닥치는 감각에, 나도 모르게 엉덩이를 치켜세우고 그에게 달려들었다.
적극적인 나의 반응에 그는 입안을 헤집던 손을 빼내곤 살이 파이도록 세게 쥐고 있던 나의 주먹을 감싸왔다. 틈 없는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며 더는 물러날 곳도 없는 나를 계속 밀어붙였다.
“읏…… 아윽……!”
의도와 상관없이 풀리는 다리에 내가 이렇게까지 허약해져버렸나 싶었지만, 저 녀석이 얼마나 집요하게 나를 몰아붙이는지 생각하면 억울하지 않았다.
“씨…… 너무 무식하게……! 아프다고……!”
손을 비틀어 빼내 그의 배를 밀어내며 고개를 들자, 그는 붉은 눈동자를 앞세워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하…….”
그 눈에 압도당해 굳어버렸다. 언제고 목을 조르고 살점을 뜯어내도 이상하지 않은 시선과, 그에 비해 무방비한 상태인 나의 괴리감이 뜨겁고 말랑거리던 모든 것들을 차갑고 딱딱하게 만들어버렸다. 그는 손가락으로 나의 턱 끝을 쓸며 물었다.
“무서워?”
정신없어 느끼지 못했던 심장 박동 소리가 귓가에 고스란히 느껴졌다. 한계를 모르고 뛰다가 언제든 펑! 하고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그런 심장 소리였다.
헉헉거리느라 마른 입술을 적시며 대답했다. 갈라진 목소리는 조금 주눅이 들어 있었다.
“……전혀.”
맞추고 있던 시선을 잠깐 돌렸지만, 그가 다시 입을 연 덕에 제자리로 돌아갔다.
“무서워하는 것 같은데.”
대답 대신 내가 할 수 있는 한 얼굴을 구겼다. 그는 상체를 숙여 입을 맞춰왔다. 괜찮다고 달래듯 내 귓불을 쓰다듬으며, 남은 손으론 나의 앞을 조물거렸다.
조심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한 몸은 상냥하던 목소리와 달리 다시금 폭주를 시작했다. 말릴 생각은 접었다. 그냥 될 대로 되라는 느낌으로 남아 있던 이성을 날려버린 채, 흘러가는 대로 정신을 놓아버리기로 했다.
허벅지에 바짝 힘을 주며 그가 주는 감각에 몸을 맡겼다. 이미 몇 번이고 열을 내고 가라앉기를 반복했던 몸은, 단박에 비집고 올라오는 사정감을 좇았다.
“으으……! 아…… 아!”
그가 그만두지 못하도록 몸을 움직이고, 손목을 잡았다.
“하읏……!”
막힌 숨이 트이고 사방에서 간질거리던 감각들이 폭발해 온몸을 적시는 느낌이 퍼졌다. 숨을 고르기 위해 산소를 잔뜩 품은 공기를 들이마셨지만, 그는 예민함이 하늘을 찌르는 기둥을 계속 만지작대며 엉덩이에 몸을 붙인 채 비비적대고 있었다.
막을 수 없는 신음은 계속 터지고 있었고, 온몸을 간질이는 듯한 감각에 몸을 비비 꼬아도 미치겠는 건 나뿐이었다.
“씨…… 발, 뭐 하는…….”
그는 나의 등에 얼굴을 붙이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공기의 흐름이 절로 느껴져 닭살이 돋았다. 그의 혀가 땀에 젖은 피부를 쓸었고, 곧이어 입술이 닿았다. 허리를 꺾어 바짝 매트리스에 붙이며 그를 피하려고 했지만, 더 끈질기게 달려드는 녀석은 송곳니로 달궈진 피부를 살살 긁으며 간을 보고 있었다.
“좀…… 그만……!”
“나, 아직 못 갔는데.”
“읏……! 그건 네 사정…….”
돌아간 몸은 그의 힘에 손쉽게 들렸고, 나는 본능적으로 떠 있는 몸의 불안함을 없애기 위해 그의 허리에 다리를 둘렀다.
말을 잘 듣는다는 개소리는 다시 집어넣자. 벌어진 엉덩이 사이로 손가락을 꾹 집어넣고 아직 팔팔하게 살아 있는 녀석의 것을 중력에 끌려 내려가는 몸에 맞추더니, 녀석은 다시 내 몸을 비집고 들어왔다.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에 소름이 끼쳤다.
“뭐, 신사적인 거 싫다고 했으니까.”
배와 가슴을 적신 그의 체액이 질척거렸다.
“으…….”
방전된 몸을 침대에서 일으키기 귀찮기도 하고, 갑자기 이게 무슨 짓을 한 건가 정신이 들어 눈을 가린 채 누워 있는데, 미끈거리는 체액을 쓸어대는 느낌에 자동으로 몸이 움찔거렸다. 혀끝이 배에 닿는 느낌에 소름이 끼쳐 얼굴을 덮고 있던 손으로 그의 머리를 잡아당겼다.
“……미친 새끼.”
그는 나의 근본 없는 욕에 어쩌라는 듯한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탁상에 놓인 새 수건으로 배를 벅벅 닦아내고 던져주니 그는 알아서 잘도 닦아냈다.
닦은 수건을 고민도 없이 휴지통에 던져버리는 걸 보니 정말 아까운 줄 모르는구나 싶었다. ……물론 다시 빨아 쓸 생각은 없었지만.
남들은 아파서 앓는 소리를 내는 병원에서 무슨 짓을 벌인 거지……. 그가 가져온 물로 마른 목을 축이며 그를 봤다. 아무렇지도 않게, 심지어 본능적인 욕구를 풀고 난 다음인지 더 뻔뻔하고 침착하게 나를 보고 있는 게 참 웃겼다. 물을 들이켜며 다가오는 녀석을 발로 막았다.
“……안거나 그런 징그러운 짓 하면 진짜 머리카락 다 뜯어버린다.”
한껏 침대에서 뒹굴고 이보다 더 유치한 말을 하는 사람은 없겠지.
“바로 내쳐버리다니 냉정하네.”
잔뜩 찡그린 얼굴로 쳐다보자 그는 두 손바닥을 내보였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소심한 밀어내기 따위 오래가지 못한 채 그에게 질질 끌려갔다는 건 비밀에 부쳐두기로 했다.
흡사 지옥에서 생크림을 던져준다면 나올 모양새를 한 컵케이크를 한입 베어 물었다. 틈만 나면 목에 얼굴을 처박고 킁킁거리는 녀석 때문에 어깨와 목에 닿는 그의 머리카락이 간지러웠다.
생긴 건 이상해도 나름대로 맛은 정상적인 빵을 우물거리는 중에 귀찮게 달라붙는 녀석이 짜증 나 밀쳐내니, 별 반응 없이 내 먹는 모습만 지켜보고 있었다.
“무슨 맛으로 먹어. 젖비린내만 나는걸.”
“……단맛.”
“단거 좋아해?”
“아니.”
“근데 왜 먹어.”
“……받았으니까.”
이게 아닌가.
“……있으니까?”
그의 쓸데없는 질문에 내가 이걸 왜 먹나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고개를 갸우뚱거려야 했다. 시선이 부담스러워 체할 것만 같았지만 가라고 닦달했다간 어떻게 나올지 뻔해서 내가 시선을 피해버리기로 했다.
상자에 붙은 편지 안에는 종이 크기가 무색하게 커다란 글씨로 빨리 나으라는 엉망진창인 글씨가 쓰여 있을 뿐이었다. 문득 내가 이런 걸 받아본 적이 있었나 싶어 곰곰이 생각해봐도 기억나는 게 없었다. 난장판인 글씨 몇 자 적힌 종이 쪼가리가 뭐라고 사람을 먹먹하게 만드는 건지, 한참을 멍하게 보고 있다가 내려놓았다.
갑자기 밀려오는 허한 기분에 우물거리던 빵을 우걱우걱 씹으니 나를 빤히 보고 있던 녀석이 책상에 놓인 종이를 보다가 피식거리며 물었다.
“맛있어?”
생크림을 입안 가득 문 채 그를 봤다. 콩고물 떨어지기를 바라는 강아지처럼 쳐다보고 있는 게, 원래 이렇게 느끼하게 구는 녀석인가 싶었다. 내가 그를 보는 관점이 달라진 건지 그가 이중인격자처럼 굴고 있는 건지 알 순 없었지만 아무튼 부담스럽긴 매한가지였다.
답을 기다리는 녀석의 목덜미를 끌어와 입으로 생크림을 넘겨줬다. 미끈거리고 설탕이 잔뜩 섞여 진득한 생크림은 혀에 달라붙어 끊임없는 단맛을 풍겼다.
점막끼리 얽히는 사이 미끄러지는 크림의 촉감에 나조차도 당황스러웠지만, 기겁하고 떼어낼 줄 알았던 그가 쪽쪽거리며 입술을 빨아왔다. 결국엔 내가 참지 못하고 먼저 물러났다.
기겁하고 도망갈 거라던 예상과 다른 현실에,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맛있냐?”
“생각보단.”
그 난리를 치고 또 다가오는 녀석에게 너무 익숙하게 팀장님이 두고 간 총을 들고서 그에게 총구를 들이밀어버렸다. 이렇게까지 빠릿빠릿하게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일 줄 몰랐지만 얼마나 많이 한 짓인지 실감이 나는 순간이었다.
나조차 이렇게 생각하는데 총구가 살에 닿은 그는 얼마나 익숙해졌을지. 그는 겁 따위 이미 상실한 채 콧방귀를 뀌며 나를 보고 있었다.
오히려 당당한 그의 면전에 물음표를 던진 건 나였다.
“……뭘. 왜.”
그는 당당하게 방아쇠에 닿은 나의 손가락 위로 자신의 손가락을 겹쳐 힘을 줬고, 바람 한 점 없는 공간 속에서 침을 삼키는 소리만 울렸다.
“쏘고 싶으면 쏴. 한 번 정도야 뭐 죽는 것도 아닌데 맞아줄게.”
아직 입에 남은 단맛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진짜 이대로라면 방어 따윈 할 생각 없는 녀석의 머리에 총알을 박아 넣을 것 같았다. 결국엔 오기에 몸을 부르르 떨고 철 덩이를 침대에 내던졌다.
“으……! 미친놈.”
그 모습이 웃긴지 웃음을 터트린 녀석에게 케이크를 내던지다시피 처박아주었다. 케이크가 좀 컸다면 좋았을 걸, 애초에 조그만 케이크를 그것도 반쯤 먹은 상태인 게 한이었다. 그는 볼에 묻은 크림을 쓸더니 입맛을 다셨다.
“그래도 선물받은 건데 너무 매정하게 내던지네. 이거 만든다고 이틀은 연습했다고 들었는데. 결과물이 조그매서 그렇지, 망친 거랑 연습용으로 만든 걸 팀장님이 부대에 잔뜩 들고 오는 바람에 다들 울며 겨자 먹기로 당 섭취를 해야 했다고.”
“……내가 해달라고 했던 것도 아닌데 뭘. 그리고 넌 먹지도 않았을 거면서.”
그는 태연하게 휴지를 뽑아 떨어진 케이크 조각을 쓸어서 버리더니,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나의 발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모난 데 없이 길고 곧게 뻗은 손가락과 단정하게 정돈된 손톱까지 치사할 만큼 손까지 완벽하게 생겼다. 간지러움에 발가락을 꿈틀거리니 그는 손을 떼버렸다. 나는 녀석에게 말을 걸었다.
“……승아 보냈을 때.”
그는 나의 말에 고개를 들어 눈을 맞췄다.
“왜 아무 말도 안 했어.”
언제부터였을까. 그가 나를 지금과 같은 눈빛으로 보기 시작한 때가. 내가 그의 시선을 의식하기 시작한 게.
그는 피곤한지 하품을 하며 발밑에 벌러덩 누웠다. 한참이나 그의 숨 쉬는 타이밍에 맞춰 오르내리는 가슴을 보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그의 호흡을 따라 하고 있다는 걸 인식했을 때쯤, 그가 입을 열었다.
“나 혼자서도 잘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결과적으론 자만일 뿐이었지만.”
“……그땐 왜 그렇게 다짜고짜 화냈는데.”
“언제.”
“호텔에서.”
“네가 한 짓인 줄 알았어.”
“내가 왜 그런…….”
“뭔가 잔뜩 엇나가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나도 좀 유치하게 화나 있기도 했고.”
“네가 화날 게 뭐가 있어.”
“일부러 묻는 거야, 지금도?”
황당하다는 듯 묻는 얼굴이 나름대로 진지해 보였다. 무슨 대답이 돌아올지 몰라 되묻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우습지만 지난 일들에 대한 실감이 나질 않아서 그저 잠깐이나마 악몽을 꾸고 일어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는 손을 뻗어 침대에 널브러진 총을 잡았다. 아무리 오랜 시간 함께한 총이라지만 그의 손에 있는 모습은 익숙하지 않았다.
“아직 긴가민가해. 내가 같은 종족에게 진실을 운운하고 사람들에게 평등을 언급하는 일이 맞는 건지. 내가 그 사이에서 가장 득을 크게 봤을 걸 뻔히 알고 있으니까.”
“후회라도 해?”
“안 해. 내가 아니었으면 수면으로 올라오지도 않고 모른 채 지나갔을 일들이니까. 다만 나한테 그럴 자격이 있는 놈인가 의문이 들 뿐이야.”
“별 쓸데없는 걸 고민하고 있네…….”
“너한테서 들을 만한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뚫린 게 입밖에 없으니까. 듣고 잊어.”
이불 속으로 들어가니, 그는 알아서 나에게 등을 내주며 누웠다. 다른 날이었다면 미친놈 취급이라도 했을 테지만 너무 자연스러워서, 그게 아니라면 그의 등이 정말 필요한 날이어서, 모른 척 그의 등에 이마를 기댔다.
끈적거리는 손장난도, 오기로 부리는 스킨십도 없이 그렇게 담백하게 내주는 등에 기댔다.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곳에서 조금이라도 더 든든한 안정감을 위해 파고들 뿐이었다.
방황하던 나의 손이 그의 배 언저리에서 맴돌았고, 그는 갈 곳 잃은 손을 잡았다. 주저함 따윈 없어졌는지 대담하게 나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지금 와서 쭈뼛거리는 게 더 웃기겠지만…….
“금전적인 도움이야 어렵지 않게 줄 수 있어. 다만, 난 누굴 다 죽여버리겠다든가 시체를 선물로 주겠다는, 그런 거창한 것들 약속 못 해.”
말투만큼 단호한 말에 순간 어쩌라고 하는 말이 튀어 나갈 뻔했지만 노곤한 몸에 그저 듣고 있기만 했다. 다행히 그도 대답을 들을 생각은 없었는지 할 말을 이었다.
“이번 일이 무사히 마무리된다고 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장담도, 확답도 못 내려. 더 말도 안 되는 일이 생길 수도 있는 거고, 더 미친 놈이 나와서 날뛸 수도 있으니까.”
“……어떻게 하는 말마다 멋이라곤 하나도 찾을 수가 없냐.”
“무게 잡지 말라고 할 땐 언제고.”
그는 좀 전과 다르지 않은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저 해야 하는 말이기에 전한다는 듯한 어조였다.
“그래도 네가 했던 말 전부 까먹지 않고 기억해.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킬게. 믿지 않아도 돼. 내가 그렇게 할 거니까. 의심할 일 없게. 내가 그렇게 만들게.”
그런 말을 하려면 좀 더 힘 있게 해주면 좋을 걸, 맥빠진 말투로 등을 보이면서 할 얘기인가.
“너무 많이 갔어. 뜬금없이 그런 징그러운 말 하지 마.”
“해야 할 것 같은 말은 하라며.”
“안 어울려. 사기꾼 약쟁이 같아. 사이비 교주 같아.”
뒷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나의 말을 따라 하며 의아함을 지우지 못하는 녀석에게 물었다.
“나 너 안 좋아해. 알아?”
“어.”
“너랑 그냥 떡 치는 게 좋은 거뿐이야. 그것도 알아?”
“좋았다니 다행이네.”
“근데 왜 이렇게 뭐라도 된 것처럼 유난을 떨어. 난 너한테 약속 같은 거 못 해.”
그와 겪은 수많은 일들을 모조리 뒤엎고 등을 보일 수 있다는 것. 언성을 높이지 않아도 이야기를 할 수 있고, 꾸밈없는 날것의 말을 내던져도 이해를 할 수 있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는 게, 짧은 시간 동안 꽤 많이도 부딪치며 살았구나 싶었다.
허구한 날 삽질만 하며 지낸 날들이 의미 없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랬다면 진작 아무것도 한 게 없었을 테니까. 내가 다시 걸어간다면 얼마나 더 걸어갈 수 있을지, 또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진 않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얼마나 더 많은 삽질을 또 할지 예측할 수도 없었다.
“약속 같은 건 필요 없어. 그건 내가 하면 되는 거니까. 그냥, 내가 가진 의문에 네가 답이 되어주기만 하면 돼.”
다른 이가 가진 생각의 의미를 파악하는 일은 이제 나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다른 머리에 든 생각을 이해하려는 것만큼 허무맹랑한 목표가 어디 있겠나.
그를 전적으로 믿어서도 아니고, 어울리지 않는 농담을 던지며 그와 엮기 바쁜 팀장님 때문도 아니었다. 지난날들을 허무함으로 마무리 짓기 싫은 나의 마지막 발악이었다.
여기서 더 엉망이 될 일이 뭐가 있겠냐만, 그 결정이 또 다른 나의 불행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적어도 작은 아이의 신뢰를 얻을 마지막 기회를 버리지 않고, 또 다른 나를 만드는 일을 멈출 수 있는 멍청이가 되었으면 할 뿐이었다.
또다시 차가운 철 덩이를 잡는다는 건, 그 이상의 의미도, 이하의 의미도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