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진실의 늪
눈앞에 다섯 구의 시체가 놓여 있었다. 손과 발이 오그라든 채 그대로 공포를 표현하고 있는 이들의 몸에는 검붉은 피가 터져 나온 흔적이 있었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였다.
그들은 제대로 감지도 못한 눈을 한껏 옆으로 굴려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치유되지 않은 상처의 흔적들과 온전치 못한 손톱이 그들의 마지막을 알려주고 있었다.
“……발견 시각 21시 58분입니다.”
[현장 보존하고…….]
“장난 아니네…….”
표성이 나를 힐긋거리며 중얼거렸다.
모든 부대가 조용함의 극치를 달리고 있는 와중, 일이 터진 건 재민의 말대로 정확히 5일 뒤였다. 간만의 사건 이야기를 듣고 빠릿빠릿 출동한 곳에서 긴장이 쭉 빠져버린 이유는,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한가운데에 버려진 대원들 탓이었다.
그들은 풀과 모래를 잔뜩 묻힌 채 굳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다들 무슨 생각을 할지 궁금했다. 적어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이는 없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장갑을 벗고 끔찍하기 짝이 없는 피부를 손가락으로 훑었다.
“……를 해야…… 듣고 있어? 왜 왔는지는 기억해?”
팀장님의 물음에 모두의 이목이 나에게 집중되었다. 팀원들만으로도 적지 않은 숫자였지만 부산에 있던 담당 팀까지 모여 더욱더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그 와중에도 재혁은 전혀 내게 시선을 주지 않았고, 처참한 시체들을 유심히 보고 있을 뿐이었다.
끈적거리는 손을 옷에 대충 닦으며 말했다.
“실종 사건…… 아니, 이제 살해 및 사체 유기 사건으로 바뀌겠네요. 그 정도는 압니다. 경보를 때릴지 말지 이야기하고 계셨고요. 이런 일로 무슨 경보입니까. 어디 원한이라도 품은 치가 청부 살인 업자라도 고용했었나 보죠.”
“넋 놓고 있지 말고 정신 차려.”
정신?
어깨를 으쓱하자 팀장님은 고개를 저었다. 지난 테스트 중, 화장실에서의 난리로 결국 시체가 된 놈들과 나의 관계는 꽤 퍼질 대로 퍼졌을 터였다.
항상 보던 표정에 비해 괴로움을 담은 표정을 보며 묘한 쾌감이 느껴졌다면, 고통에 몸부림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는 게 아쉬웠다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저렇게 쉬운 걸 난 왜 완성하지 못하고 머뭇거린 채 끝내기만 했나.
“아무렇지 않습니다. 어째서 이 사건에 저희가 협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겁니까. 별로 동조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범인으로 의심받는 것 따위가 아니라면 발 빼겠습니다.”
“진짜로 그런 게 아니라면 개인적인 감정은 집어넣어.”
“없습니다, 그런 거. 지금 굉장히 이성적인 상태입니다만.”
“가볍게 볼 만한 사건이 아니야, 대원 다섯이 죽었다는 건.”
“정확히 여기까지 온 이유가 뭡니까. 부산에서 담당 팀까지 우르르 몰려와서 있는 마당에.”
“한가로이 놀고 있을 때 협조 요청을 받으면 오는 게 규정이니까.”
“그렇죠. 규정이죠, 규정.”
현장에서 알아낸 건 그들을 죽인 게 한 명이 아니라 적어도 셋 이상이라는 것이었다. 인간도 아니라 하프인 다섯이 겁에 질린 채 죽어 있다는 것부터가 살해범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가리키고 있는 데다, 무엇보다도 확실한 증거는 공격 특성 자체가 모두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이 정도까지 경계 태세를 취하는 건, 언제든 대대적인 쌈박질을 터트릴 환경을 만들 수 있는, 명백한 테러 행위로 칠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정도쯤은 알고 있었다. 시체를 수습하고 범인에 대해서 작은 특성이라도 파악하기 위한 일을 하며, 왜 대원들이 이렇게 발견돼야만 했는지에 대해 여러 의견이 오갔다.
모두가 단순한 테러 행위,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일이라 치부하고 똑같이 갚아주어야 한다고 말할 때, 재혁은 아직은 때가 아니라며 좀 더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야기가 끝나기 전에 팀장님은 해산 소식을 알렸다. 모두 이미 새벽부터 타지로 불려 나와 해가 질 때까지 산속을 뒤지고 다닌 탓에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햄스터.”
“잔소리라면 됐습니다. 그리고 그 의미 없는 코드네임도 인제 그만두세요.”
“네 기분은 알겠다만 감정에 휩쓸려서 행동하지 마.”
승아가 그녀에게 가고 나서 특별해질 것도 없었다. 똑같은 생활 속에서 종알대던 아이마저 사라져, 공적인 일이 아니라면 말 한마디 나누지 않는 적막 속에서 각자의 시간을 살았다. 당사자들은 정작 아무렇지 않았지만 옆에서 느껴지는 타인들의 시선은 꽤 뜨거웠다. 내가 일궈놓은 과거들 덕에 다들 금방 적응을 하는 듯 보였지만.
그들은 관사가 꽉 찼다는 이유로 호텔을 잡아줬지만, 여기까지 와서 재혁과 부딪히고 싶지 않은 마음에 자비를 털어 독실을 잡았다. 완전한 개인적인 공간이 얼마 만인지. 후련한 마음에 찝찝한 몸을 씻고 가운을 걸치고서 바로 침대에 몸을 던졌다. 마음에 드는 푹신함은 아니었지만, 그저 이곳에 샤워 젤의 향만 퍼지고 있다는 게 행복했다.
좋은 시간은 그리 길지 못했다. 소심하게 울리는 노크 소리 때문에 맥이 빠졌다. 적당히 무시하면 가겠지 싶었지만 끈질기게 두드리는 소리에 문을 벌컥 열었다.
팀장님인가, 표성인가, 그것도 아니면 설마 선물을 주겠다고 선포했던 재민일까. 아니, 그 남자였다면 노크 따윈 하지 않았겠지…….
“아…….”
문 앞에 서 있는 건 잔뜩 긴장한 여자였다. 병원복 차림으로 슬리퍼를 신고 있는 이는 지난날, 자신의 책임이라며 혈액 팩을 나누어주던 한소라였다.
그렇게 좋게 평가하지도 않았던 파트너임에도 한껏 눈물을 쏟았는지 눈이 퉁퉁 부은 상태였고, 짧아진 머리카락에 두꺼운 화장을 지운 민낯 때문에 알아보지 못할 뻔했다.
얼마나 급한 일이 있었으면 저런 꼴로 달려왔는지 나도 모르게 우물쭈물 서 있는 여자를 멍청히 보며 서 있었다. 어정쩡한 눈치로 귀찮게 구는 건 여전했다.
“……제가, 쉬는 걸 방해했나요.”
“네.”
그녀는 깜짝 놀라며 손을 꼼지락거렸다. 가만히 두면 몇 십 분이고 똑같이 굴 것 같아 먼저 입을 열었다.
“됐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드…… 들어가도 되나요?”
내가 몸을 틀자 주위를 한참 두리번거리다가 잔뜩 웅크린 채로 들어온 여자는 어정쩡하게 선 채 눈으로 나를 좇고 있었다. 탁상에 놓여 있던 생수를 들이켰다. 미적지근한 물은 금세 반이 사라졌다.
“입 좀 열어달라고 부탁해야…….”
“예……? 예?!”
“입 좀 열어달라고 부탁드려야 말씀하실 겁니까. 할 말 있어서 오신 것 같은데.”
눈을 동그랗게 뜬 여자는 마음을 먹은 듯 입을 열었다.
“아! 아니요! 저…… 오시느라 많이 피곤하셨죠. 사실 부산 인력들이 지금 대거로 타 지역에 빠져나가 있는 상태라…… 그것도 그렇지만 제……! 제가 부탁드렸어요. 귀찮게 했다면 죄송해요…… 그래도, 그럴 수밖…… 아, 이건 아니고…… 제, 제가 말을 엄청 가볍게 하는 편이긴 했어요. 조금 귀찮게 굴기도 하고, 눈치도 좀 없고요. 그런데 진짜…….”
자신도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모르는 것 같았다. 그녀는 손을 쉴 새 없이 꼼지락거리다가 이미 잘려 없는 뒷머리를 쓸었다. 고개를 들어 금방이라도 울 것같이 글썽거리는 눈으로 나를 봤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습니다. 사과하실 일도 아니고 관계도 없는…….”
“토, 토씨 하나 틀리지 말고 말을 전하라고 했습니다!”
“무슨…….”
그녀는 급하게 방 안쪽으로 들어와 내가 뚜껑을 닫지 않고 내려놓았던 물병을 한 번에 다 비웠다. 그러곤 더듬거리며 급하게 말을 내뱉었다.
“서…… 선물은 마음에 드나?”
침을 삼킨 여자의 입에서 나온 말은 자극적이었다. 누군지 굳이 밝히지 않더라도 알 수 있는 말이었다.
“고심 끝에 고른 일인데……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다고. 후기는 나중에 만나면 듣도록 할 테니까…… 역할놀이에 심취해 제로라는 허상을 뒤쫓는 끝없는 일을 할 바에야 그냥 하고 싶은 일을 얼른 끝내버리자고. 아…… 여…… 여자가 입이 가벼워 보인다면 죽여도 상관없어. 뒷일은 내가 알아서 할…….”
울음을 터트린 여자는 결국 더듬더듬 말을 전하는 행위를 그만둔 채 무릎을 꿇고 나에게 매달려 숨죽여 울었다. 헐렁하게 묶어놓은 샤워가운 자락을 잡아당기며 싹싹 빌기 시작했다.
“저…… 저, 그렇게 떠들고 돌아다니지 않을 자신 있어요. 어차피 이 일 그만둘 생각이었어요. 진짜 조용히 보내주시면 입 다물고 다닐 자신 있습니다. 그……그렇게 죽기 싫어요. 한 번만, 진짜…….”
얼굴이 퉁퉁 부은 건 자신의 파트너를 잃었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목숨을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인 듯했다. 울음에 목소리가 묻히지 않기 위해 억지로 삼키는 침에 기침을 토하면서도 똑바로 말을 전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쩔쩔매며 기억을 더듬는 게, 자신의 파트너가 죽어가는 모습을 모두 지켜봤던 모양이었다. 그녀가 입을 놀리고 다니건 말건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어떻게 죽었습니까. 괴로워하던가요.”
나의 목소리에 깜짝 놀란 여자는 손을 바들바들 떨며 그날 일을 떠올리기 위해 열심히 눈을 굴리다가 이내 생각하는 것조차 괴로운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결국 입을 열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이자 짧은 머리카락이 급하게 찰랑거렸다.
“지…… 진짜…… 그냥 보내주시……!”
말을 잊지 못하는 건 울음에 먹혀서가 아니었다.
“때가 때인지라 시간을 많이 주지 못할 것 같아 미안하다만, 대답은 이틀 내로 해주었으면 좋겠는데. 아, 추신. 이 여자, 참고로 말하면 돈을 위해서 갓난아이를 판 적이 있더라고? 그 아이는 2년 전 죽었고. 네가 들으면 결정에 도움이 될 것 같기도 하니 그냥 참고하라고, 참고.”
해맑게 말하는 재민의 손아귀에서 컥컥거리며 눈물을 뚝뚝 흘리는 여자의 눈은 빨갛게 충혈된 채 언제든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아 보였다. 고장 난 로봇이 움직이듯 간헐적으로 젓는 고개는 미세하게 떨리는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토씨 하나 틀리지 말라고 했는데. 쯧. 말 하나 똑바로 전하지 못해서 어째.”
나에게 시선을 고정하며 애타게 바라보는 여자의 눈빛이 간절하다 못해 광기 어려 보였다. 붉다 못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얼굴이었다. 선택권을 쥘 수 있다는 것. 그게 나에게 주는 건 무엇이었을까. 난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거울로 눈을 돌렸다. 다들 읽기 쉽다던 거울 속의 나의 표정을 지금은 읽을 수 없었다.
“……손 놓으시죠.”
그녀에게 악감정은 없었다. 악감정을 가질 이유도 없었고, 해칠 필요도 없었다.
“진심으로?”
나의 끄덕임에도 재민은 여자를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놓……!”
큰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렸다. 닫힌 공간에서 나타난 남자나, 뜬금없이 나타나 우는 여자보다도 예상하지 못했던 놈이었다.
도둑이 제 발 저리듯 재혁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내가 한 것은 뒤를 돌아보는 일이었다.
그곳에 재민의 흔적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눈물, 콧물, 침 할 것 없이 분비물을 내뿜으며 새빨간 얼굴로 주저앉은 여자만 있을 뿐이었다.
재혁의 목에 선 핏대와, 무시할 수 없는 눈을 마주했다. 주저앉아 있던 여자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지탱하지 못하고 연신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일어나기 위해 노력하다가 결국 그의 발밑에서 고꾸라졌다.
“……모두에게 복수라도 하고 싶었어? 그럼 마음이 좀 편해져?”
낮게 읊조리는 말, 나를 탓하는 듯한 말투.
무엇에 화가 난 걸까. 엎어져 있는 여자? 아니면, 짓무른 몸을 자랑하던 시체들?
“어. 진작에 왜 이러지 못했나 싶을 만큼.”
“그래서 그딴 식으로 행동을 해?”
“왜. 하면 안 돼?”
“그걸 말이라고 해? 모든 걸 망칠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해? 좋게 끝낼 수 있는…….”
이유가 어찌 됐건 적절한 시기에 정이 떨어질 수 있게 녀석이 노력해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무언가 결정을 하는 것에 있어 그가 가장 큰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한 일이었지만.
“이미 몇 번이고 이야기했던 걸로 아는데. 멍청하게 네 손에 놀아나고 있으니까 말로 허세만 떠는 줄 알았나 봐? 인제 와서 네가 발끈할 이유는 또 뭐야? 네가 필요에 의해 나에게 군 것처럼 나도 그렇게 굴고 있을 뿐인데?”
“네가 겪……!”
더 긴 이야기는 하지 못했다. 쓰러진 여자가 갑자기 일어나 소리를 지르며 난동을 피웠기 때문이었다. 타이밍 좋게 울리는 구급차 사이렌 소리에 그는 난리를 치는 여자를 진정시키며 끌고 나갔다.
호텔 앞은 말할 것도 없이 북적였고, 호텔 안도 다를 바 없었다. 번쩍이는 빛도, 시끄러운 소리도 다 사라지길 바랐다.
날마다 불평만 하며 지냈지만 어쩌면 운이 좋은 편일지도 모르겠다. 막다른 길에 다다를 때마다 억지로라도 움직일 수 있도록 나를 떠밀거나 닦달하고 자극하는 존재들이 있었기에.
그저 귀를 막고 눈을 가리던 날들이 얼마나 편했는지…… 거북하게 피어나는 감정들을 잠재우기 위해 눈을 가리고 귀를 막아도 요동치는 것들에 휘말리는 일을 그만두고 싶었다.
“답이 나온 모양인데.”
귓전에 속삭이는 달콤한 말에 오늘만큼은 손을 뻗었다.
“……마음에 들었습니다, 선물.”
***
안개가 잔뜩 낀, 10미터 밖조차 희미하게 보이는 길을 걸었다.
불순물이 섞인 공기에 눈 속을 걷는 듯했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차가운 공기가 폐를 훑으며 혈관을 타고 온몸을 돌았다.
달빛이 밝은 날, 얼음 상자 속에서 걷는다면 분명히 똑같은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북슬북슬한 샤워 가운 자락을 여몄다. 숨 쉴 때마다 흐르는 입김은 금세 공중으로 흩어졌고 맨발로 시린 기운이 올라왔다. 꿈속 같은 곳에서 그의 구둣발 소리를 따라 걸었다.
“너무 신뢰하고 있는 거 아닌가?”
재민은 걸음을 늦춰 나와 거리를 좁혔다.
“질문 같은 건 없어? 지금은 어디로 가고 있냐…… 자신은 뭘 해야 하나…… 뭐 이런 거 말이지. 폼 나게 대답하려고 준비까지 해 왔는데 왜 주인 잃은 개새끼처럼 굴고 있어?”
지겹도록 가벼운 말투로 내던지는 말들에 뼈가 박혀 있었다. 빛을 뿌리며 나타난 의상이 그간 적으로 맞섰던 놈들의 옷이란 걸 인지했을 때,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에 대해 질문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
다만 그가 이질적일 만큼 새하얀 가면을 쓰자 본능적으로 튀어나오는 거부감이 온몸을 지배했다.
앞을 가로막은 재민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키가 나보다 컸었던가?
“……!”
그는 나의 손을 들어 손가락 끝을 베었다. 손가락은 얼어붙어 감각조차 둔해져 있었다.
“무슨…….”
“주먹 쥐는 일은 안 했음 싶은데.”
그는 그대로 나의 손을 들어 새하얗기 그지없는 자신의 가면을 손가락으로 쓸게 했다. 지나가는 자리를 따라 남은 선명한 자국이 가면 위에 십자를 그렸을 때, 알 수 없는 위화감이 들었다.
“제로…… 제로…… 재미있는 이름이지. 한 놈도 남기지 말자는 의미라며. 근데 의미가 이상하잖아. 그럼 뭐 다들 자살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피가 맺힌 손가락으로 나의 볼을 훑고 간 그는 순순히 손을 놓아주며 발걸음을 뗐다. 내가 움직이지 않자 발을 멈춘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왜 나를 잘 믿나 곰곰이 생각해봤단 말이지. 이중적인 모습, 구역질나잖아. 적어도 나처럼 일관성 있게 굴어야지. 아무리 착한 척을 해봐도 이미 내비쳤던 본 모습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모든 건 무너지기 마련이니까. 안 그래?”
몸속을 가로지르던 안개마저 걷히고 시야가 선명해졌다. 입을 벌린 채 멍하게 앞을 볼 수밖에 없었다. 온전한 모양을 갖춘 익숙한 건물이 보이기 무섭게 사방이 거울로 둘러싸였다. 거울은 모든 걸 반사하며 복사하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올리자 거울 속 모든 인영이 똑같이 움직였다.
“걸어. 멍청히 서 있다가 얼어붙고 싶지 않다면.”
재민은 중압감이 밀려오는 공간에서 나와 눈을 맞추며 거울을 훑었다. 그의 손톱이 지나가는 길을 따라 스파크가 일었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걸어가야 하는지 알 수 없는 공간 속에서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실제로 싸운 적이 있지, 인간과 소수의 우리가. 말도 안 되는 것 같지만 다 죽일 수 있었어. 하지만 하지 않았어. 왜? 우린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이 없으면 살 수 없었으니까.”
“…….”
“빌어먹을 사랑이라는 감정이 얽히고 얽혀 우리를 갈라지게 했다는 게, 그게 학교라는 곳에서 배우는 내용이라던데…… 단순히 사람이 되고 싶다는 이유로 널 이렇게 어렵게 꼬신 게 필요 이상으로 쓸모없는 짓이라고 생각 안 해?”
“읏…….”
짓눌리는 고통에 주위를 둘러보는 순간, 거울 조각들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쏟아졌다. 순식간에 빼앗긴 시야 속에서 그의 목소리는 더욱 선명하게 귀로 들어왔다.
“인간에게 동화되어 지내고 싶던 놈들이 모여 개발을 하기 시작했어. 저주받은 피를 지닌 몸을 버리고 사람이 되기 위한. 성공했다면 세상이 달라졌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실패했어. 능력이 부족해서? 아니, 정상에 군림하고 싶은 이들이 모여 그들을 전부 죽여버렸으니까. 남은 이들은 손을 잡고 세상으로 나와 세력을 키웠지. 뭐가 중요한지도 모르는 멍청한 인간들에게 찬양을 받으면서.”
발을 에는 듯한 통증이 가시고 햇살이 들이닥쳤을 때, 심장이 녹아내리는 듯했다. 바스락거리는 땅을 디디자 발등을 간질이는 풀들의 느낌이 생생했다. 주위를 돌고 있던 이들이 모든 움직임을 멈추고 시선을 보냈다.
풀숲과는 이질적인 하얀 옷을 입은 이들, 역겨운 모양새를 하고 눈을 붉힌 이들 모두 그에게 느긋한 고갯짓을 했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순조롭게 흘러가는 듯했지. 인간도, 힘없는 뱀파이어 놈들도 평화를 깨기 싫어 고개를 조아렸고. 하지만 어느 사회든 안정화란 게 이루어지기 시작하면 돌연변이가 튀어나오게 되어 있는 법이잖아? 속이는 짓을 그만하고 평등하고 투명한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다시 개발을 시작했어. 당연하게도 탄압을 받았고.”
그는 나를 건물 안으로 인도했다. 피로 가득했던 지하실의 향이 벌써 느껴지는 것 같았다. 마른침을 삼키며 예전에 몰래 창문으로 들어갔던 곳을 이번에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낡고 습하던, 그리고 텅텅 비었던 곳은 모든 시설이 갖춰진 깨끗한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울부짖는 사람들이 엉킨 조각들은 여전히 눈으로 나를 좇으며 고통을 토하고 있었다.
내게 예민한 감각들이 느껴지지 않았다면 꿈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고장 난 텔레비전처럼 불규칙적으로 일렁이고 있는 건물은 사라질 것 같다는 느낌이 들 뿐, 무너질 거라는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네가 쓰던 총알이 무엇을 기초로 만들어진 건지 안다면 네가 함부로 쏘고 다니지 못했을 거야. 너희가 말하는 ‘제로’들이 세웠던 연구소는 그저 음료를 만들거나 유희 공간으로 사용되었을 뿐인데 인간 공장이라는 타이틀을 얻었고, 심지어는 인간과 뱀파이어 공공의 적이 되어 서로의 단합력을 높이는 데 이용됐지. 거기에서 죽은 아이들은 끝까지 좋은 소품으로 쓰면서 말이야. 사람들은 아이가 관련되었다고 하면 눈을 뒤집으며 달려드니까.”
그는 조각상의 딱딱한 입술을 훑으며 말했다.
“그런데 약을 만들어 고작 사람 따위가 되고 싶다? 재혁이가 네게 진짜 이유를 말해주지 않던? 녀석이 그곳에 들어간 진짜 이유. 지킬 게 있다, 뭐다 이유를 둘러대며 알려주지 않았겠지. 그들이 진짜 두려워하는 건 사람들이 그 약을 쥐고 자신들의 자리를 위협하는 일이라고. 죽는 것보다 굴욕적인 걸 더 못 견뎌 하니까.”
그간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았지만 풀지 못했던 의문들이 하나둘씩 정체를 내비칠수록, 내가 뭘 하고 살았던 건가 회의감이 몰려왔다.
분노의 표현이랍시고 열심히 뛴 만큼, 결국 그들에게 좋은 일만 해주었을 뿐이었다. 그들은 그런 나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는 그런 나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통제 속에 있는 수많은 문은 금방이고 무너져 내릴 것처럼 보이다가도 금방 페인트칠을 한 것처럼 깨끗하게 돌아왔다. 마치 시간이 뒤죽박죽 섞인 듯 흔들렸다.
어둡기만 했던 지하실은 입구부터 전구로 길을 밝히고 있었고, 쾌적한 공기를 뽐내고 있었다. 손으로 벽을 쓸며 계단을 내려갔다.
까슬까슬하던 시멘트벽은 말끔하게 칠이 되어 매끈거렸고 간간이 일렁이는 공기와 함께 비명이 들렸다. 급할 것 없이 느긋한 발자국 소리들이 또각거렸다.
착각인 줄 알았지만, 이곳에서 나를 의식하고 있는 이는 재민밖에 없는 듯했다. 미로같이 얽힌 곳은 단순한 철창만이 아니라 투명한 문으로 만들어진 방까지 있었다. 연구소로 썼다는 말이 맞는지 각종 실험실에서나 볼 법한 물건들이 있었고, 이따금 보이는 용도를 알 수 없는 기계들이 평범한 곳이 아니라는 걸 알려주었다.
철창 앞에 선 그는 책을 읽듯 딱딱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 무의미한 싸움의 시작은 아주 사소한 것이었습니다. 들판에 핀 작은 꽃은 말했습니다. 나는 언젠가 지고 말 거라고. 그 목소리를 듣고 있던 풀들은 말했습니다. 너는 다시금 예쁜 모습으로 태어나 세상을 볼 수 있을 거라고. 꽃은 어찌 되었을까요. 다시금 햇빛을 머금고, 이슬과 입맞춤을 할 수 있었을까요.”
“그건…….”
철창 안은 끊어진 비디오테이프처럼 움직였다. 간헐적으로 귀에 꽂히는 비명과 총성, 타격음, 그리고 울음소리. 코끝에 맺힌 비린내가 가시기도 전에 들이닥치는 숲의 향.
철창 사이로 보이는 두 눈은 사람의 것도, 그들의 것도 아니었다. 빛을 잃은 전구 같았다. 확장된 동공은 겁에 질린 채 두려움에 떨고 있었고, 도움을 구하듯 시선은 허공을 맴돌았다.
철창 밖으로 튀어나온 손은 프레임에 갇혀 더는 벗어나지 못하고 속절없이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그는 그런 곳으로 거리낌 없이 몸을 넣었다.
“우리가 재혁이에게 원했던 대답은 예스였어.”
그의 힘에 이끌려 방 안으로 고꾸라졌다. 그는 나의 앞에 쪼그리고 앉고는 가면을 벗어 나를 마주했다. 해맑게 웃는 얼굴이 그저 헤프고 가볍게 보이지만은 않았다. 거만하고 철없는 어린아이 같은 웃음이 그의 모든 것은 아니었음을 알았다.
방 안엔 그와 나뿐이었다.
“어때, 폼 좀 났어? 나도 멋있는 척 좀 해보고 싶었는데.”
“당신이 생각하는 끝은 뭡니까.”
죽이자, 며 나를 부추긴 그가 생각하는 끝은 어디였는지.
서로를 노려보듯 마주 보다가 내가 몸을 일으키는 순간, 그가 입을 열었다.
“모두가 원하지 않는 끝.”
그는 항상 거리낌 없이 나에게 등을 보였다.
“이제…… 슬슬 두 번째 선물을 줄까.”
유리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금방이라도 바닥으로 떨어질 것 같은 유리 조각들은 사이를 메워가며 주위를 감쌌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살을 베일 듯한 서늘함에 고개도 들지 못하고 서 있었다. 이내 암흑으로 가득 찬 공간은, 은은한 빛줄기라도 있던 길과는 다르게 한 치 앞도 볼 수 없었다.
얼굴을 스치는 유리 조각에 시선을 돌리지 못했고, 청각은 그럴수록 예민해졌다. 멀리서 들리는 기계음 소리에 온 정신이 쏠렸다.
[―xx년 8월 26일 목요일, 136번째 실험입니다.]
어둠 속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두 귀를 의심했다. 피곤함에 지쳐 있는 목소리는 갈라진 음색이었지만 알아듣기에 지장이 없었다.
몸을 뚫고 지나가는 서늘한 기운에 고개를 치켜들 때쯤, 공연의 막이 오르듯 세상이 밝아졌다. 눈앞에 나타난 책상엔 수많은 종이 뭉치가 쌓여 있었고, 청록색 액체들이 작은 플라스틱 통에 담겨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웅성대는 소리와 다급하게 덜거덕대는 쇳소리가 사방에서 울렸다. 그간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을 만큼 지워지지 않은 자국들이 책상 위에 남아 있었고, 벽에 붙어 있는 수많은 쪽지와 통계 수치는 다들 얼마나 이곳에 틀어박혀 머리를 싸매고 있었을지 보여주고 있었다.
귓가를 맴돌며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던 남자가 의자를 끌고 책상 앞에 나타났고, 하얀 가운을 입은 남자는 덥수룩한 머리를 긁적였다. 앞에 놓인 모니터에 그의 얼굴이 비쳤다. 핏기 없이 질린 피부와 오래된 갈증으로 솟은 송곳니.
“하…….”
검은 모니터 화면을 통해 시선이 마주친 듯했다. 꾀죄죄한 모습의 그는 모니터 위에 달린 작은 카메라를 보며 자신이 할 몫을 할 뿐이었다. 나도 모르게 앉아 있는 남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진정하지 못하고 떨리는 손이 닿으면 금세 연기가 되어 사라질 것 같았다. 화면을 통해 반복적으로 부딪치는 시선이 나를 옭아맸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손이 허공을 떠돌았다. 숨 쉴 때마다 내뱉는 미적지근한 입김이 공중으로 흩어졌다.
먹먹하게 막힌 억 소리를 내고서야 뒤를 돌아보았다.
“아버지를 만난 소감이 어때. 좀 더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귀한 자료인데. 나도 어렵게 구한 거라고.”
바짝 붙어 선 재민이 시야를 막아서고 있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이게…….”
재민의 뒤로, 온갖 조명이 집중된 차가운 침대에 누군가 결박당해 있었다. 입까지 막힌 그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최선을 다해 막힌 소리를 지르는 것뿐인 듯했다. 이곳에 서 있는 나마저 중압감이 들 만큼 열 명이 넘는 이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재민은 뿌듯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이곳에서 죽은 놈들의 기억을 모아서 만들었지. 네가 조금 더 생생하게 느낄 수 있게…… 알다시피 우린 상상으로 공간을 만들어내는 일은 못 하니까 의심 같은 건 집어넣어.”
[피실험자는 22세 남성 하프인. 실험 약물은 f―68입니다. 실험 목표는…….]
순식간에 치밀어 오르는 욕지기를 뒤로하고 다시금 고개를 들었을 때 아버지는 주사기를 들고 침대에 누운 남자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수많은 이들이 카메라와 파일을 든 채 오직 발버둥 치는 남자에게만 시선을 집중했다. 아버지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반복해서 중얼거렸고, 묶여 있는 남자의 앓는 소리와 합쳐서 기이한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주사를 맞았고 얼마나 오래 굶주린 건지, 바짝 여윈 남자의 팔엔 주삿바늘 자국이 남아 있었다. 아버지는 감정 없는 얼굴로 남자를 바라봤다. 냉정하기 짝이 없는 표정이 왜 나를 향해 짓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과연 내가 아버지에 대해 알고 있던 건 뭐였을까.
[백겸, 진심이야?]
아버지의 옆에 서 있던 남자가 떨궜던 고개를 들며 물었다.
“……하.”
기가 차서 웃음만 흘렀다.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는 남자는, 그의 사진을 갖고 있던 재혁의 큰아버지였다.
[어설프게 굴어서 실패할 거라면 애초에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나가서 입을 놀리는 순간 우린 다 죽을 겁니다. 아니, 죽기만 하면 다행이죠. 절 이 바닥에 끌어들이고선 약하게 굴지 마세요.]
[그렇다고 해도, 실험체로 쓰긴…… 그냥 얌전히 죽이는 게…….]
[……죽는다는 전제를 갖고 개발하셨습니까. 16시 49분. 약물 주입하겠습니다.]
얼마나 굶주렸는지 비쩍 마른 남자는 차라리 정신을 잃는 게 나아 보일 정도였다. 아버지는 그에게 주삿바늘을 꽂는 순간부터 하늘색 약물을 모조리 주입할 때까지 단 한 번도 눈을 떼지 않고 그와 시선을 맞췄다.
아버지가 어쩌다 이곳에서 이런 실험을 하고 있는지. 침대에 묶여 있는 남자와 아버지의 몸에 난 수많은 상처는 뭘 뜻하는 건지 묻고 싶었다. 이야기하고 싶었다.
나와 시선을 맞춰주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몸부림치던 남자의 몸에는 단박에 새빨간 반점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반점이 걷잡을 수 없이 퍼지고 퍼져 전신을 뒤덮는 동안 구경하는 이들은 익숙한 모습이라는 듯 지켜볼 뿐이었다.
아버지는 선명한 노란 빛을 띠는 남자의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독하도록 끈질기게 바라봤다. 살려달라고 외치는 듯한 남자의 눈빛은 점점 고통에 일그러지고 있었다.
재민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짝 다가가 누워 있는 이를 관찰했다. 그는 손댈 수 없을 만큼 망가진 피부를 허공에서 쓸며 입을 열었다.
“하승균.”
지금 상황에서 무엇이 이상하지 않겠냐만, 이곳에서 들을 이름이 아니었다.
“……136번째 실험체의 이름이더군.”
“팀장님…….”
“이야기를 들어보니 꽤 영웅적이던데. 그가 스파이 짓에 성공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네 아버지가 아직 살아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겠고.”
“……그는 현장에서 죽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뭐, 결과적으로 어느 쪽으로 넘어갔든 죽었을 놈이니까 너무 감정 소모하지 마~.”
승균을 얌전히 죽이자고 외치던 일조는 이젠 괴로움에 잠겨 소리도 지르지 못하는 승균의 입에 물린 결박을 풀어줬다.
살려달라고 중얼거리는 승균의 모습을 보고 있기 괴로웠다. 어쩌면 그런 모습을 냉정하게 보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재민은 그런 내 모습마저 즐거운지 시선을 돌리지 못하게 막았다.
“아직 연구실의 존재를 확인하지 못하고 있을 때, 직접 들어가 정보까지 흡수한 놈이거든, 여기 누워 있는 놈이. 정부 측에서는 하승균을 세상에는 죽었다고 알리고 정보를 캐낼 심산이었단 말이야. 그런데 이들이 그걸 가만히 둘 수 있겠어? 모든 걸 불고 나면 네 아버지 말대로 죄다 들통 나서 죽어버릴 텐데. 크, 어떻게 재주 좋게 빼 왔단 말이지.”
색을 잃어가는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꺼져가는 뱀파이어의 눈빛을 보며 심장이 뛰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신체의 끝자락부터 타들어가듯 점점 검붉은 색으로 변하던 몸은 이내 검게 말라비틀어지기 시작했다. 다른 이들이 모두 고개를 돌릴 때까지 아버지는 그 모습을 지켜봤다.
[xx년 8월 26일 목요일 17시 07분 f―68 사용 결과, 136번 사망. 투약 후 2분 30초 만에 체온이 치솟음. 3분 24초를 넘어서면서 호흡에 문제가 생김. 산소 공급을 했으나 실패. f―67보다 월등히 오랜 시간을 버티고 비교적 온전한 모습으로…….]
제 모습을 잃어가는 시체를 보며 녹음을 하는 아버지에게 손을 뻗었다.
“그런데 눈 뜨고 코 베인 정부가 가만히 있겠나. 여길 찾아서 끝장을 내버렸지.”
손은 아버지를 통과해버렸다. 전기가 통하듯 소름 끼치는 감각이 전해졌다.
아버지는 녹음이 끝나고 나서야 타들어가는 시체에 등을 돌렸다. 그는 안경을 벗어 던지고 숨을 몰아쉬었다. 파일을 뺏어 들고 사인까지 끝내고서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들고 있던 펜을 책상으로 던져버렸다.
[……젠장.]
분노하는 이유가 실험체가 죽어버려서인지, 단지 자신이 만든 약물이 실패작이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시체를 치워달라는 말을 끝으로 환영들이 눈앞에서 깨져 바닥으로 추락했다. 금이 가고 갈라져버린 아버지의 얼굴에는 절망이 가득했다. 그런 얼굴을 보기 싫어 고개를 돌렸다.
“이런 광경을 보여주는 의도는 뭡니까. 제 아버지가 살인자라고 말해주고 싶었던 겁니까.”
“설마, 선물 준다고 했잖아, 선물. 아직 많이 남았는데 벌써 그렇게 흥분하면 쓰나.”
재민은 홀로 남아 있는 책상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빛이 되어 사라지는 종이 뭉치들 사이에서 남은 한 장의 종이가 무얼 뜻하는지 알고 싶지 않았다.
“이제 됐습니다. 선물 따위…….”
“실험은 149번째가 마지막이었어. 당연하게도 실패했지.”
그는 종이를 집어 들었다. 빳빳했던 종이는 순식간에 세월이 흐르듯 순식간에 갈라졌다. 낙엽이 지듯 물들어버리는 종이가 그의 손 위에서 상하는 광경을 나는 지켜봤다.
“의도된 실패였다는 게 문제지만.”
종이에서 눈을 뗄 수밖에 없었다. 눈앞에 다시 나타난 아버지는, 금방이라도 일어날 것처럼 혈색이 도는 얼굴로 누워 있었다. 잠을 자는 듯한 평온한 얼굴에, 엉망이었던 모습과 달리 깨끗하고 상처 하나 없었다.
환상일 뿐인 걸 알면서도 눈을 뜨고 일어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자신이 어리숙하게 느껴졌다. 이런 모습이 선물이라면, 죽어가는 아버지의 마지막 순간을 보여주는 게 재민이 말한 선물이라면…….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은커녕 생전의 기억조차 제대로 없는 나에게 끝을 보여주는 일은 잔인하기 그지없는 짓이었다. 혹시나 어딘가에서 잘살고 있는 건 아닐까, 마음속에서 꿈꾸던 것조차 지워버리는 짓이었다.
아닌 걸 알면서도 손을 뻗었다. 손끝으로 그를 느껴봤으면, 따뜻했으면 좋겠다는 그런 허황된 꿈을 갖고.
“으…….”
부드러운 살갗.
맥박도 뛰지 않고 얼어붙어버린 듯 그대로 누워 있는 그의 모습을 보자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덮쳤다. 억눌렸던 감정이 주체하지 못하고 터지면서, 조작된 기억을 돌려놓았다. 꿈인지, 사실인지 모르고 감춰두었던 일들이 존재를 드러냈다.
그와 지낸 시간. 따듯한 기억에 묻혀버린 기억들이.
“f―73에서 멈춰버린 개발 약물의 기초는 네 아버지의 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만…… 실험은 진작 성공했다. 다른 놈들은 그저 네가 여자 쪽의 피를 더 많이 받아 태어났다고 생각하겠지?”
[이슬에 입 맞추는 삶을 살길.]
종이 속에 쓰여 있던 말에 굳이 설명을 덧붙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누구를 향한 말인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는 쓰여 있지 않은 그저 한 줄의 문장이, 내 인생에 벌어졌던 모든 의문을 정리하고 제자리를 찾아주는 느낌이었다.
“아, 설마 이놈이 마법처럼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오로지 피를 뽑아낼 작정으로 돌아가고 있는 몸이니까. 시체지, 시체.”
내가 아무리 발악해도 벗어날 수 없던 삶이, 선택이라고 저질렀던 일들이,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도 가까워질 수 없고 뱀파이어들에게는 본능적으로 일어났던 거부감이……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하고 겉돌며 홀로 삶을 버텨야 했던 이유가 이 때문이라면, 아버지는 대체 내게 어떤 삶을 원했던 건지 묻고 싶었다.
살기 위해 흩트려놓은 기억이 나의 목을 조여오는 듯했다. 왜 똑바로 보지 않았냐고 물어도 해명할 자신이 없었다. 어째서 아버지가 이런 인생을, 내가 이런 인생을 살아야 했는지 원망스러웠다.
“아아, 힘들어하니까. 기뻐할 만한 걸 줘야지.”
발밑으로 던져진 묵직한 소리.
숨이 넘어가기 직전 새어나가는 공기 속에서 피가 들끓는 소리.
미끄러운 바닥에 살이 끌리는 소리와 비명을 지를 수도 없이 막혀버린 목소리.
“으…….”
맨발에 질척이기 시작한 축축한 액체, 비린내, 그리고 그 속에서 느껴지는 알코올의 향.
“선물…… 선물, 선물…… 소원을 들어주는 산타클로스!”
속삭이듯 부르는 콧노래까지 어느 것 하나 나를 가만히 두는 게 없었다. 온몸을 기어 다니는 수많은 감각이 뭉쳐져 사람을 미치게 했다.
긴 머리카락이 발목을 간질였다. 환영과 실물이 반복적으로 교차하는 재민의 세상에서 발치에 닿은 촉감이 가짜이길 바랐다면 그건 무슨 감정일까. 그게 가짜가 아닐까.
발 옆에 늘어진 여자의 목에서 끊임없이 피가 솟구쳤다. 상처를 막아도 쓸모없는 짓이었다. 엉망이 된 머리카락을 걷어 얼굴을 봤다. 피에 얼룩져도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 언제나 술 냄새를 풍기며 스스로를 엄마라 칭하던 여자의 겁에 질린 얼굴을, 못 알아볼 리 만무했다.
무언가 말하기 위해 노력하는 게, 입을 벙끗거리는 것과 무관하게 공기가 새는 소리만 들렸다. 손쓸 방도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리를 굴렸지만, 당연히도 나오는 답은 없었다.
“선물, 선물…….”
“왜…….”
재민은 나를 보더니 미친 사람처럼 숨이 넘어가도록 웃어댔다. 손뼉을 치며 발을 구르는 소리가, 과장된 웃음소리가 사방에 가득 찼다. 알 수 없는 분노가 나를 지배했다.
“크큽…… 재밌다! 재밌다니까!”
“왜 이런 짓을…….”
“죽어야지! 이런 여자는 죽어야 마땅하지! 너도 그렇게 생각하는 거 아니었어? 죽길 바랐었다고 했다며. 그럼 의미가 있게 죽어야지! 슬퍼? 응? 슬퍼?”
조롱기가 다분한 어조였다. 반복적으로 되묻는 단어와 함께 흘러나오는 피가 멎었다. 멈춰버린 심장은 더 피를 쏟아내지 못했다. 눈앞에 있는 시체들은 그렇게 저마다의 온기를 유지하며 널브러져 있었다. 바닥이 무너지고 무너져 더 밟을 땅이 없어진 느낌이었다.
공허한 마음속에서 현실을 외면하려고 할 때마다 그의 웃음소리가 나를 현실로 끌고 왔다. 잠깐 사이에 오간 수많은 삶과 죽음의 모습 사이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무기력하게 감정에 동요하며 보고 있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가운은 그녀의 피를 머금고 서서히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빨아들이고 빨아들여 점점 무거워졌다. 피가 잔뜩 묻은 손으로 재민의 멱살을 잡았다. 매번 손끝도 대지 못하게 하던 그는 순순히 나의 손에 잡혔다.
“이런 거 바란 적 없어…….”
그는 그런 모습을 보며 더 즐거워했다.
“이런 거 바란 적 없다고.”
“벌써 무너져버리는 거야? 네가 원하는 걸 가지려면 나도 재미는 보게 해줘야지! 상부상조 몰라? 동맹은 상호 협조하에 이루어지는……!”
“이런 거 바란 적 없다고!”
“네 아버지란 놈은 그리 멍청하지가 않았는지, 네게 쓴 약물에 대한 자료를 남겨놓지 않았데? 너에 대한 정보도 숨겨놓고 말이야. 난 저 시체랑 네놈의 피만 있으면 돼. 약물의 부활을 끌어낼 때까지. 다른 놈이 죽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아직 난 하나도 어긴 게 없어.”
그의 눈빛이 푸른색으로 물들었다.
“필요한 게 나였다면, 나만 건드리면 되는 일이었잖아…….”
그는 나의 팔뚝에 묻은 피를 손으로 훑어 혀로 핥았다. 광기 어린 눈과 입에 웃음기가 넘실거렸다.
“아, 혹시 내가 그 새끼들 안 죽여줄까 봐 그래? 걱정하지 마. 나도 죽이는 거 좋아해. 난 뭐든지 재미! 재미가 있어야 해. 모든 일은 재미있어야 해…… 더 울어봐. 더 소리 지르고 슬퍼해봐…….”
“닥쳐.”
“……그 감정 좀 설명해줘. 알고 싶단 말이야. 어렵게 알아낸 사실들을 알려준 보람을 느끼고 싶단 말이야. 이건 나도 위험 부담이 있는 일이었는데 해준 거잖아. 말해봐. 어때, 앞서 해준 얘기가 네가 그렇게 화…… 화! 분노를 가지는 일에 도움이 됐어? 응?”
일그러진 얼굴이 변해갔다. 푸른 눈동자를 나에게 고정한 채, 보란 듯이 나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의 표정을 따라 하다가 또 웃기 시작했다.
“말 좀 해봐. 궁금하단 말이야! 왜 화난 거야? 응? 슬픈 거야? 네 엄마 때문에 그래? 저 여자가 싫어서 막 병원에 처넣고 그랬잖아. 죽어도 상관없다고 했었는데 왜 슬퍼하는 거야? 저 여자 때문에 후장 따이고 죽기 전까지 피를 빨려서 헉헉거려야 했으면서, 왜 그런 표정을 짓냐니까.”
“닥쳐……!”
순식간에 바뀌는 그의 얼굴에 내가 미쳐버린 건가 싶었다. 주먹질을 해도 곧바로 다시 얼굴을 돌려 나를 볼 뿐, 일그러지다가도 말짱해졌다.
“아들…… 한 번만 다시 기회를 주면 안 되겠니? 이제 정말 잘할게. 엄마한테 한 번만 기회를 주면 안 되겠…… 크큽, 큭…….”
고음의 웃음소리가 쨍하게 울렸다. 불규칙해진 호흡에 숨이 막히고 반복된 주먹질로 손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지치는 건 오로지 나일 뿐, 그는 재미를 갈구하며 나를 옭아맸다.
“만져봐. 그렇게 좋아하는 거잖아. 부드러운 피부를 느껴봐. 아직 열기를 가진 몸을 느껴보라니까?”
그는 내지르는 나의 주먹을 잡고 끌어가 평온하게 누워 있는 남자의 몸을 마구 흩트려버렸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서늘함에 섬뜩한 기운이 온몸을 지배하는 느낌이 들었다. 온몸을 타고 도는 듯한 가려운 느낌에 몸서리쳐졌다.
“그만해, 그만…….”
숨이 넘어갈 듯한 그의 웃음소리를 이제는 듣고 있기 힘들어 두 귀를 막았다. 나의 피인지, 그녀의 피인지 알 수 없었다. 얼얼해진 손에 감각은 사라졌고, 발치로 흘러오는 피에 덜컥 겁이 났다.
다 가짜라고, 훈련하는 것뿐이라고 되뇌어도 좀처럼 진정할 수 없었다. 손을 적신 그녀의 피도, 이미 죽어버린 사람들의 목소리도, 떠들어대는 재민의 목소리도 계속 나의 가슴을 찔렀다.
멍청하게 쪼그려 앉은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재민은 나의 옷깃을 잡고 일으켰다. 그의 힘에 밀려나며 밟힌 그녀가 물컹거렸다. 질끈 감았던 눈에 비친 그녀는 하늘을 보고 누운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울컥한 감정이 뭔지 설명이 되지 않았다. 악에 받쳐 달려들었지만 그는 혀를 차며 피할 뿐이었고, 힘이 빠진 몸은 맥없이 휘청거렸다.
처연한 세상이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뺨에 느껴지는 통증에 눈을 떴다.
“그새 기절을 해? 왜 나한테만 오면 그렇게 맥없이 굴어? 재혁이 앞에선 그렇게 잘 뻗대던데. 뭐, 박아주기라도 해야 해?”
어디를 때려야 고통을 느끼는지 잘 아는 놈이었다. 섬광이 이는 시야가 폭력에 의해 생기는 것임을 인지했을 때에는, 막힌 숨통을 뚫기 위해 애써야 했다. 무차별적인 폭행은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매끈한 감촉만 느껴질 뿐이었지만 사실 바닥은 흙과 잡초로 덮여 있었다. 유리로 둘러싸인 공간은 밖이 훤히 보였다. 벽으로 머리를 들이밀며 안을 보기 위해 애쓰는 놈들은 다닥다닥 붙어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이미 사람의 모습을 잃은 놈들은 큰 눈을 느릿하게 끔벅이며 이따금 벽을 두드렸다. 소리가 모여 빗줄기가 내리치는 것 같았다.
가운을 여미고 구역질이 나는 속을 부여잡고 일어난 순간, 그의 발치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계속 이어지는 헛구역질에도 입에서 나오는 건 침뿐이었다. 배를 누르는 그의 발이 샤워 가운을 간신히 지탱하고 있는 허리끈을 깔짝거렸다. 이미 채혈을 한 건지 팔뚝엔 바늘 자국과 멍 자국이 훤했다.
“냄새 나는 년이랑 같이 있던 보람이라도 있게 굴지? 벌써 시시해지면 어떡해. 씨발, 얼마나 공을 들였는데.”
그는 기분 나쁨을 그대로 표현했다. 잠깐 일어났다고 누군가 머리를 움켜잡고 바닥으로 짓누르는 듯한 어지러움이 몰려왔다. 이상하리만큼 힘이 빠진 몸에 절로 식은땀이 흘렀다. 꿈틀대며 가운 속으로 파고드는 그의 발을 잡았다.
이젠 환영과 상상, 그리고 현재와 과거가 뒤죽박죽 섞여 현실감이 없었다. 반복적인 소리와 시선, 그리고 나를 향한 압박의 몸짓. 어느 것 하나 나를 감출 수 있는 것도 없었다. 누군가가 이곳에 있는 나를 찾아주리라는 희망이 없다는 건 언제 겪어도 적응할 수 없는 낯선 감정이었다.
매번 멍청한 선택을 하곤 후회하기를 반복했다. 나는 지금 무슨 선택을 후회하고 있는 걸까.
“……다 의미 없는 짓이야.”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었다.
그는 여유로운 표정을 잃지 않으며 말했다.
“말이 짧아졌네. 깍듯이 존대하더니.”
“발 치워.”
“왜? 기껏 구경꾼도 모였는데. 마음 써서 챙겨줘도 이 모양이야.”
그는 말과 달리 순순히 뒤로 물러났다. 멀어질수록, 그가 한 발짝 떨어질수록 그때마다 좁아지는 공간에 압박감이 몰려왔다. 그는 그 속에서 느긋하게 의자에 앉아 나를 봤다. 벽을 헤집고 들어온 놈들은 마치 애완동물이라도 된 것처럼 그의 손길을 갈구했다. 나른한 움직임으로 그의 품을 갈구하는 그들을 그도 한껏 거만한 자세로 받아주고 있었다.
털 한 가닥부터 내장까지 모조리 훑는 듯한 그들의 시선에 식은땀이 흘렀다.
“굴복은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법이지. 이미 죽었다는 걸 알았다는 거니까. 그런데, 죽은 놈은 재미가 없어. 너도 똑같이 굴 거야? 어? 이놈들처럼 살 거야? 이렇게? 어?”
그는 살살 어루만지던 이들의 머리카락을 잡고서 질질 끌고 왔다. 반항도 없이 네발로 기어 그를 따라오는 놈들의 눈은 나를 향하고 있었다. 언제든 물기 위해 준비된 투견처럼 그들은 나를 봤다. 주인의 명령을 기다리며 복종하는 상태로, 그렇게 입맛을 다시며 다가왔다.
“인간들은 하나같이 기대에 미치지 못해. 심장을 겨누다가도 목숨이 위험해지면 더러운 발을 핥아. 가치는 스스로가 높여야지. 안 그래?”
나를 향해 던져진 놈들은 그처럼 느릿하게 팔다리를 움직이며 다가왔다. 반쯤 풀린 그들의 눈이 멋대로 굴러 빛을 냈다. 거리낌 없이 옷을 벗으며 볼품없이 기어오는 놈들은 하이에나 같아 보였다. 먹잇감으로 남겨진 영혼 없는 시체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갈구하는 사랑을 얻지 못했을 때 인간은 삐딱선을 타. 그리고 언제나 비극으로 끝나지. 그런 게 싫다면 노력을 해야지. 그래서 난 너의 그 점을 높이 평가했단 말이야.”
가운을 잡고 늘어지는 놈들을 막으며 그를 봤다.
“좋아…… 좋아. 아직 날 노려볼 여유도 있고.”
맨몸에 스치는 불쾌한 감촉. 질척거리는 입으로 입술과 귀, 어깨와 배꼽, 다리까지 그들은 나의 모든 걸 노리고 침을 흘렸다. 갈라지고 터진 피부에 맞닿는 감촉들이 소름 끼치는 악몽을 떠오르게 했다.
“아윽……!”
집요하게 파고드는 놈들을 밀쳐내며 일어났다. 빙글빙글 도는 세상 속에서 눈을 마주쳐오는 놈들의 집요함이 나의 가슴을 뛰게 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내가 잘못한 거겠지. 되돌릴 수 있을까. 그럼 다 괜찮아질까. 그렇게 벗어나면 나는 또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걸까. 의미 없는 분노를 참지 않고 마음대로 살아야지.
아니, 살아서 나갈 수는 있는 건가.
할퀴어진 피부에서 피가 흘렀다. 도망가기 힘들다는 걸 알아챈 순간 취할 수 있는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복종과 저항.
도망가도 그의 손에서 벗어난 놈들에게 잡히기를 반복했다. 살이 맞닿을 때마다 느껴지는 질척거림에 치가 떨렸다. 아무리 주먹을 휘둘러도 놈들의 목은 돌아갔다가 되돌아올 뿐이었고, 온 힘을 다해 밟아도 놈들은 헉헉대며 나의 다리를 붙잡고 매달렸다.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누군가에게 복종한다는 건, 이렇게 망가져 버린다는 뜻일까.
“하아, 하…….”
달리는 다리가 어떻게 박자를 맞추는지도 몰랐다. 놈들에게 가하는 폭력에 감정은 없었다. 겨드랑이를 핥고 지나가는 혀가, 여자의 피가 묻어 더러운 몸을 빨아대는 놈들의 입이 살을 조였다. 놈들은 은밀하고 치밀하게 나를 쫓았다.
점점 늘어나는 놈들을 상대할 수 없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벽 뒤로 느껴지는 타격 진동이 나의 심장을 닦달했고 숨소리는 귀와 머릿속을 헤집어놨다. 나의 앞에서 자신의 것을 잡고 흔드는 놈들의 눈에는 이미 초점이 없었다. 그들의 체액이 얼굴을 뒤덮고 몸을 더럽혔다.
“젠장…….”
“달라…… 분명 꼬리를 수그렸는데 눈빛은 죽질 않아. 하지 말라고 외치는데 몸은 박아달라고 외치고 있어. 잠깐 한눈을 팔면 날뛰겠지. 그런데 손을 대면 또 금방 다리를 벌려줄 테고…… 색기 어린 눈으로 바라보면서 말이야. 신기해. 재미있어. 즐거워.”
재민은 피에 얼룩진 체액을 손가락에 묻혀 나의 입술을 쓸었다.
“핥아봐. 자.”
폐가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숨을 내뱉으며 그의 손을 피했다.
“크읏.”
노력이 무색하게 그에게 턱을 잡혀서 고개가 젖혀졌다.
그냥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널브러진 시체 사이에서 그냥 이대로 숨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그렇게 된다면 쓸쓸하지 않을 것 같았다. 의미 없는 복수 따윈 이제 하고 싶은 마음도 사라졌다.
그런 나의 귓전에, 너는 어차피 그렇게 살았을 놈이라던, 확신에 찬 재혁의 말이 맴돌았다.
내가 이곳에 오지 않고, 그의 손에 물음표를 내던지면서도 모른 척 따라다녔다면 그때에도 그 말이 유효했을까. 아니면 지금과 별다를 바 없었을까. 진실을 알지 못한 채 그저 끌려다니며 고개를 끄덕였다면, 순진한 척 그에게 기댔다면 지금과 달랐을까.
살을 파고드는 송곳니에 고통을 느낀 적은 없었다. 그저 공포감에 몸부림쳤을 뿐. 그런 공포감에 삼켜지는 것이 싫어서 나를 놓았다. 웃음을 보이고 신음을 내뱉었다. 그들은 항상 내게 좋으냐고 물었다. 저마다 기쁨에 찬 목소리로 뿌듯하게 물었다.
싫었다. 괴로웠다. 항상. 1분 1초도 빼놓지 않고 싫었다.
“으…….”
입에서 나오는 신음은 이미 이름조차 제대로 쓰지 못하는 나이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나날이 예민해지는 몸을 두고 어떻게 하면 덜 괴롭게 하루를 끝낼 수 있을지도 알고 있었다.
어쩌면 나도 지금 침을 흘리고 있는 이놈들처럼 그저 패배자의 자리에서 관심을 갈구하며, 그게 검게 물든 호의일지라도 덥석 물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지 못했던 건 무슨 미련이 남아서였을까.
지금은 나에게, 그 미련이 남지 않은 걸까.
그들을 죽일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죽이고 나면 조금이나마 분노가 풀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비참하게도 감정은 그렇게 쉽고 만만한 놈이 아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남는 건 풀리지 않는 과거에 묶인 끈이었고, 점점 더 드세져 앞으로 가는 일을 막았다. 그저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망가진 나를, 서 있을 수 있게 해줄 뿐이었다. 낡은 톱니바퀴가 멈추지 못하도록 막아설 뿐이었다.
“……!”
이를 세워 나에게 달려드는 놈의 머리가 재민의 발에 날아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숨을 내뱉으며 절반이 날아간 머리로 사지를 팔딱이는 놈을 내려다봤다. 사방으로 구르는 눈알은 아직 쾌락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였다.
“쯧, 피는 건드리는 게 아니라고 누누이 일렀건만.”
그는 더럽혀진 채 죽어 있는 나의 것을 발로 뭉갰다. 묵직하고도 끈적끈적하게 비비는 느낌에 치욕스러움도 잊고 빳빳하게 서는 것을 봤다.
달궈진 몸에 닿는 차가운 감촉에 몸이 절로 부르르 떨렸다. 깔아보는 건방진 눈빛도, 언제고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듯 구는 태도도, 몸에 느껴지는 모든 감각이 싫었다.
투명했던 유리는 검게 물들었고 이내 신음이 울렸다. 얄팍한 목소리는 울먹거리며 날카롭게 짖었다.
[흑……!]
하얀 침대 속에 깔린 아이, 아직 햇빛을 타지 않아 뽀얀 피부를 자랑하는 어린아이. 입을 막아봤지만, 얼굴을 뒤덮을 만큼 큰 손에 저지당하고 금세 눈물을 뚝뚝 흘렸다. 웃으라는 말에 웃고, 울라는 말에 울며 겁에 질려 있었다.
[야, 그만 좀 울어. 기분 나빠지려고 하잖아.]
[으, 때리지……!]
사방에서 비춰대는 모습에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영상 속의 아이가 된 듯, 컥컥거리며 끓는 소리를 삼켰다.
“다시 예쁜 꽃이 되어 세상을 봐야지. 고개를 숙이면 되나.”
절박하게 굴러가는 눈동자로 시선을 마주치는 아이의 손을 잡아주고 싶었다. 그렇게 살지 않아도 된다고, 무의미한 사랑을 갈구하지 않아도 된다고 다독여주고 싶었다.
그런 건 필요 없다고. 전부 네 탓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나에 대한 죄책감과 실망으로 뒤덮이지 않는 삶을 살고 싶었다. 단 하루라도 내가 왜 그래야만 했는지 생각하지 않고, 차라리 멍청하게 살고 싶었다. 시도 때도 없이 닥치는 죽음의 유혹이 없는 세상을 살고 싶었다. 조용하길 바랐다.
“……건들지 마.”
재민은 나의 앞을 짓뭉개던 발을 들어 허벅지 안쪽을 쓸었다.
“건들지 마? 응? 건들지 마? 저렇게 야하게 울어놓고? 내가 다 꼴릴 지경이었는데.”
왜 이 순간 너답게 굴라며, 너답게 행동하라며 나를 부추기던 말이 떠오르는지.
재혁과 같은 향을 풍겨서라고 애써 생각했다. 발악을 했다. 자기합리화 속에서 매일같이 포기해버리던 반항을 해봤다.
화면 속엔 여전히 폭력에 정신을 잃어 헐떡이는 나의 숨소리와 포악한 상대의 숨소리만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왜 그렇게까지 구르면서도 살고 싶었을까.
“하아…….”
나를 죄는 녀석들에게서 발버둥 쳤다. 갇힌 공간 속에서는 그들의 손에서 벗어나더라도 더는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에게 그것 말고 중요한 건 없었다.
볼품없이 힘 빠진 주먹질이라도, 발길질이라도 의미 있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그런 나를 그는 더욱 빛나는 눈으로 봤다. 볼 뿐이었다. 자기 일이 아니라는 듯, 밝은 미소를 띠며 눈을 부릅뜨고 구경했다.
달라붙는 놈들을 뿌리치며 그에게 다가갔다. 고작 한 걸음 가까워지는 것도 벅찼다. 살을 쥐어짜는 듯한 악력을 뿌리치고, 짓밟으며 거리를 좁혔다. 이윽고 얼굴을 마주했을 때, 그는 기뻐 보였다.
“호오,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아! 네가 물려받은 피 덕분일까. 아니면 환경이 널 그렇게 만든 걸까. 모든 놈이 너처럼 길들지 않는 야생 동물 같았다면 좋았을걸! 어떻게, 그다음엔 어떻게 행동할 거야, 응?”
“…….”
“아무것도 남지 않은 지금, 널 그렇게 다시 발버둥 치게 만든 건 대체 뭐야? 수치스러움?”
웃음소리와 신음이 얽히는 공간 속에서 흐르는 눈물은 그저 터트리지 못했던 분함일 뿐이었다.
[……!]
적어도 나는 속옷 한 장 걸치지 못하고 발악하는 내가, 체액과 분비물에 뒤덮여 끈적거리고 미끈거리는 몸으로 몸부림치는 내가 더럽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내 삶은 하루하루가 그랬기에 그렇게 여기는 건 의미가 없었다.
“크읏…….”
재민은 얼굴을 나에게 마구 들이밀며 감정의 동요를 종용했다. 나의 얼굴을 한 채, 나를 부추겼다. 그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푸른 눈동자는 나를 꿰뚫고 싶어 빛나고 있었다.
“크하하하!! 아하하!!”
손가락 마디마디가 다 부러진 것 같았다. 겹겹이 쌓인 고통은 감각을 잃게 했다. 바닥을 기는 놈들을 짓밟고 재민에게 돌진했다. 목이 찢어져라 박장대소를 터트리는 놈에게 달려들었다. 새하얀 옷에 튄 핏자국들이 나를 자극했다.
“……씨발! 그만하라고!”
만신창이가 된 몸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도 몰랐다. 내지른 주먹과 발길질은 그의 옷을 스치는 게 전부였다. 그는 그렇게 거리를 유지하고 나를 놀렸다. 아직 한 대도 제대로 갚아준 게 없었는데, 그는 한눈까지 팔았다.
“이런.”
여유로운 감탄사를 내뱉는 그에게 득달같이 달려들어 발길질을 퍼부었다. 진정하고 싶은 생각 따위 들지 않는 게 진정한 현실이었다. 타격음이 들려야 하는 순간마다 영상 속에서 들리는 둔탁한 소리가 나를 자극했다.
……!
발악과 분노 사이에서 허덕이며 그에게 잡힐 뻔한 순간, 섬광이 일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 떴을 땐, 하늘에서 빛가루가 휘날렸다. 색색의 빛가루는 저마다의 색을 뽐내며 사라졌다. 공중에서 퍼지는 타격음에 심장이 덜컹 주저앉았다. 바닥으로 추락한 재민은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으며, 나를 보고 미친놈처럼 웃었다. 깔깔거리는 놈에게 주먹을 휘두르는 순간, 눈이 마주친 건 재혁이었다.
재혁은 바닥에 누워서 웃고 있는 재민을 붙잡았다. 그는 이미 한껏 구르고 왔는지 잔뜩 흥분한 상태였고, 자신이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내 쪽으로 내던졌다. 겉옷은 피가 고인 바닥으로 추락했다. 그런 재혁과 나를 보는 재민은 한껏 들떠 보였다. 정말로 즐거운 걸 보고 있다는 듯이 눈이 빛나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일들은 정말 좋은 거야. 그렇지? 내 동생이 널 구하겠다고 이렇게 온 거 보면 진짜 감정이란 건 알다가도 모르겠단 말이야.”
[아!]
누구 하나 쉽사리 움직이지 않은 채 시간이 흘렀다. 생각나는 모든 것들이, 끊임없이 튀어나오는 앓는 소리와 화면에 먹혔다.
“크큽……!”
재혁의 손을 빠져나간 놈의 뒤를 쫓았다. 또 사라질 것만 같은 놈을 놓치기 싫었다. 허우적거리며 재민을 향해 달렸다. 피를 탐하며 바닥을 기어 다니는 놈들을 헤집으며 그를 향해 내달렸다.
그에게 조금이라도 갚아주어야 들끓는 속이 가라앉힐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세상은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았다. 이변은 그렇게 쉽게 일어나는 게 아니었다. 그런 작은 기대도 이뤄주지 않은 놈은 유유자적 다시 한 번 자취를 감추었다.
이미 죽어 바닥을 뒹구는 놈들의 시체를 짓밟았다. 드러난 근육과 터져 나온 내장을 밟으며 걸었다. 비명과 고통 속에서도 여전히 허리를 흔드는 아이의 울먹임이 귀에 울렸다. 흰 시트에 창백한 몸이 뒹구는 모습은 지워지지 않고 계속 흘러갔다.
“하…….”
온몸에 질퍽거리는 감촉도, 머리가 어지러울 만큼 풍기는 역한 냄새도 나를 미치게 했다. 처참하게 망가진 채 재민에게 버려진 놈의 머리를 잡아들었다. 잡고 있는 놈의 머리를 아무리 화면에 부딪쳐봐도 무용지물이었다. 화면은 충격에도 같은 장면을 선명하게 비춰냈고, 나는 튀는 피들이 지긋지긋할 뿐이었다.
재혁의 주먹질에, 굳건히 버티던 화면들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그는 거친 숨을 삼키며 나에게 손짓했다.
“……이리 와.”
몸을 뒤덮은 피가 진득거렸다. 머리카락이 손가락에 엉켜, 힘을 주지 않아도 터지고 뭉개진 머리는 나의 손에서 떨어질 생각이 없어보였다. 그 와중에도 쩝쩝거리는 소리는 끊기지 않았고, 내 몸은 한계에 다다라 부들거리기 시작했다.
재민과 같은 향을 풍기고 있었지만, 전혀 달랐다. 마약 같은 라벤더 향에 이끌려 그의 앞으로 걸어가, 손에 얽혀 질질 끌려오는 놈을 재혁의 발 앞에 던져주었다. 엷은 공기의 흐름에 손이 쓰라렸다.
“그 새끼가 한 말들, 보여준 것들…… 전부 진짜야?”
그는 말없이 손을 뻗었다. 그 손을 쳐내자 온 근육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알고 있었어?”
“……이야기해주려고 했어.”
목이 베인 채 바닥을 뒹구는 여자를 가리켰다. 턱 끝까지 찬 숨에 단어를 하나하나 끊어 말했다.
“저 여자, 진짜야? 진짜냐고…… 왜 다 사라져버렸는데 저 여자는 왜 아직도 있냐고 묻잖아!!”
아직 풀리지 않은 악과 분에 눈물이 터졌다.
“어?! 진짜 죽어버린 거야? 왜?! 대체 왜 그래야 했는데!!”
나는 정말 추했다. 말없이 서 있기만 하는 놈이 제일 나빴다.
“왜…… 왜 그렇게 꼭꼭 숨기고 있어서 내가 찾아보게 만드는 건데. 왜 그렇게 애매하게 굴어서 내 발로 뛰게 만드는 건데. 믿고 싶은데, 그만하려고 했는데…… 기대하게 만들고선 왜 자꾸 의심하게 만드는 건데! 왜!!”
괜한 억지를 부렸다. 그래도 된다고 했던 놈이 잘못이다. 제대로 된 도움 하나 주지 못한 놈의 잘못이었다.
“그냥…… 그냥 모른다고 해. 차라리 그냥 모른다고 하면 되잖아. 몰랐다고 하면 되는 거잖아.”
하나둘 도착하기 시작한 대원들은 주위를 둘러싼 채 몰려드는 제로들을 처치하기에 바빴다. 멎을 생각 없이 눈물이 흘렀다. 그간 참고 참았던 기억이 쏟아지듯 흘렀다.
“너도…… 다를 바 없어. 다 똑같아, 다 똑같다고…….”
눈물을 닦아주는 재혁의 손을 다시 한 번 쳐냈다. 대체 나에게 뭘 잘못했는지 모를 놈이 하는 사과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