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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신뢰의 이해관계
신발을 신기 위해 쪼그려 앉은 와중에 녀석이 머리를 마구 흩트려놓았다. 따끔거리는 눈이 절로 감겼다.
“아침 안 먹고 가?”
“별걸 다 챙기네. 안 먹어. 사 오지 마.”
그는 요즘 눈에 띄게 상냥하게 굴고 있었고, 나는 그가 무심코 하는 스킨십을 거절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난밤의 심상찮은 대화 탓에 그의 행동이 가식적으로 보인다는 것과는 별개로 그를 밀어내지 못했지만, 스스로도 느끼는 변화를 그가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밤에 나갔다 와야 해.”
그는 그런 내 생각을 들쑤시듯 물어보지도 않은 일을 보고했다. 별것 아닌 말이었지만 어쩐지 그의 일상을 굉장히 신경 쓰는 사람이 된 것 같아 그리 기분이 좋진 않았다.
“그냥 나가, 일일이 보고하지 말고. 그리고 머리 좀 건드리지 마.”
“왜.”
모호한 이 삶이 깨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그를 믿으라고 외치고 있으면서도, 이렇게 지내도 되나 싶은 이중적인 생각이 그를 신뢰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런 혼자만의 전쟁은 피어나는 질문들을 억눌렀고, 조금 더 지켜보자는 결론을 냈다. 밤에 찾아와 이야기하던 남자의 말대로 나는 너무 생각이 많았다.
“짜증 나, 머리 건드는 거.”
제이의 초대에 지난밤 늦게 관사로 돌아온 탓인지,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몸이 뻐근했다. 그새 굳어버린 몸을 빨리 원래대로 돌려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주일 동안 뭐가 변할까 싶었더니, 역시 부대는 여전했다. 발을 들이고 나니 어제도 왔던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익숙하다는 건 이런 거지.
하던 일을 멈추고 서로 눈알만 굴리면서 우리를 보고 있길래 왜 이런 반응인가 싶어 경계하며 들어가는데, 뒤따라 들어오던 태주 덕에 왜 팀원들이 그렇게 굴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어? 왜 같이 와요?”
며칠간 붙어 다닌 일이 이렇게까지 영향을 끼칠 줄 누가 알았겠나.
“오다 만났……!”
“백곰! 햄스터!”
짤그락 소리와 함께 그와 나의 손에 날아든 물건이 뭔가 하니, 열쇠 뭉치였다. 건물에 들어가기 위한 키부터 집으로 들어가기 위한 전자 키, 이중으로 잠그는 흔하게 생긴 열쇠까지.
“4관! 201호! 저녁에 짐 싸고 내일 오전 중으로 옮겨. 원래 쓰던 방은 바로 들어갈 사람이 있어서 넘겨줘야 하니까.”
괜한 강조까지 하며 말을 하던 팀장님은 해맑고 친절한 설명까지 외치고 지나가셨다. 영상통화로 봤던 그 인위적이고 가식적인 웃는 얼굴. 누가 웃는 얼굴에 침을 뱉지 못한다고 했는가. 난 뱉을 자신이 있었다.
의도했는지, 정말 부를 일이 있었는지 재혁만 데리고 가는 바람에 모든 이목은 나에게 쏠렸다.
불러 갈 거면 부른 놈 손에 조용히 쥐여주면 됐잖아?
“4관? 4과안?”
갸웃거리며 서류를 정리하던 표성이 점점 가늘어지는 눈으로 쳐다봤다. 나도 몰랐으니 남들도 모를 거라는 그런 극단적인 사고방식은 고이 접어두어야 했다.
“유운 형, 어떻게 옮겼어요? 거기로 막 못 옮기는 걸로 알고 있는데? 일주일 동안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가 나타나시더니!”
소리 소문 없이?
“……그 정도로 몰고 가버린다고?”
“엥? 관사 옮기는 게 큰일이라도 일어난 겁니까?”
눈치 없는 하늘은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여기저기 묻고 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다. 할 일도 없는 컴퓨터 전원을 켜고 앉았다. 친절한 서연에게서 사실 관계를 들은 하늘은 태주에게 자신의 예상과 딱 들어맞지 않느냐며 붙들고 늘어졌고, 태주는 진짜냐며 나에게 들러붙었다.
“형, 뭐예요? 재혁 님이랑? 주하늘이 박박 우겨서 난 진짜 아닐 거라고 했는데? 둘이서 어디 사랑의 도피 행각이라도 하다 오신 거예요?”
“……대답할 가치가 없다.”
“와…… 반응 봐! 이상하게 오래간다 했어. 평소라면 쌍욕 날리면서 주먹질해야 정상인 거 아닙니까? 그분도 그분 나름이지만 어떻게 형이……!”
“아니, 뭔 생각을 하는 거야!”
괜히 제 발이 저려버렸다.
“허, 이거 맞았으면 사지 마비 각이었어요. 이건 진짜 뭐 있다, 진짜.”
“사지 마비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하지 마!”
“왁! 진짜! 무자비하시네!”
태주는 하늘의 피를 얼마나 빨아먹고 다녔는지, 하늘이 오기 전보다 몸놀림이 빠릿빠릿해져 금방이라도 날아다닐 것 같았다. 좁은 방 안에서 펄쩍거리며 뛰어다니는 놈에게 한껏 발길질했다. 하늘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발을 동동 굴렀고 이런 상황에 익숙한 서연과 표성은 고개를 저으며 구경 중이었다. 태주는 아프지도 않게 맞고는 온갖 엄살을 다 떨었다.
“우왁!! 쉬는 동안 특수 훈련이라도 갔다 왔어요?! 어쩐지 마른 것 같더니 왜 이렇게 빨라요!”
“백유운! 사물함 쓰러트리지 말…… 라고! 그거 정리하는 데 이틀 걸렸단 말이다!”
표성이 드물게 소리를 빽빽 질렀다. 치우는 일은 귀찮은 게 맞다. 인정해야지.
“네가 치워!”
“왜 자기가 쓰러트리고 나한테 그런담?! 표성 형이 이틀 걸린 거면 제가 하면 일주일은 걸린단……!”
엉망이 된 곳에서 태주와 나의 사이에 끼어든 이는 재혁이었다. 언제 들어왔는지 모를 그는 한 손으론 태주의 얼굴을, 남은 손으론 나의 다리를 잡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태주의 눈은 한껏 요동치고 있었다.
“승아 때문에 좀 옮겨달라고 했어. 따로 사는 건 힘들 거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된 거고. 이 정도면 설명이 되는 건가. 특혜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는데.”
발목을 짧게나마 쓸고 지나간 손가락 때문에 발에 절로 힘이 들어가 곧 바닥에 닿았다. 재혁의 손이 떨어지자 옷을 털고 있는데, 적막을 깬 건 깨달음을 얻은 서연의 밝은 목소리였다.
“아, 승아 때문이었군요. 아무래도 좀 견디기 힘드셨겠죠. 그런 구성이면.”
그런 구성……?
패스트푸드점의 세트 메뉴라도 된 기분에, 그럼 내가 메인 음식이고 승아가 사이드 메뉴라도 되는 건가…… 라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했다. 다들 조용히 작업하는 와중에도 태주의 중얼거림은 계속됐다.
“아닌 것 같은데에…… 뭐 있는데, 분명…….”
여전히 의심의 눈길을 보내는 태주의 목소리가 종일 울렸다. 훈련 내내 마주칠 때마다 옹알이를 하는 녀석 때문에 귀에 딱지가 앉는 줄 알았지만, 중얼거림의 대상이 나만은 아니었던지라 참을 수 있지 않았나 싶다.
***
복귀 첫날부터 짧은 기간에 반복된 이사에 정신없는 하루 속에 승아가 없다는 건 천만다행이었다. 아이의 침대까지 조립하고 나자 짐 정리 따윈 거들떠보기도 싫어지는 바람에 거실로 나가 소파에 벌러덩 누웠다.
이사한 곳은 기본적으로 지난번 관사와 비슷한 느낌의 구조에 방 두 개만 달랑 추가된, 특별할 것 없는 곳이었다. 예전에 침대가 있었던 자리에 이번에는 가죽으로 된 긴 소파가 있었고, 안방으로 만들어진 방에는 여전히 실내의 반을 채우는 침대가 있었다.
지금 시점에서 그와 한 침대를 계속 썼다간 정말 걷잡을 수 없이 모든 걸 공유하는 사이가 될 것 같았기에 소파란 존재가 참 다행이었다.
누가 붙여놨는지도 모를 야광 스티커가 천장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팔걸이를 베개 삼아 누워 사은품이라며 준 보디필로를 끌어안고 있으니 우주에 둥둥 뜬 유랑자가 된 것 같았다. 그렇게 전깃불 스위치를 모두 내려버린 무방비 상태로 유영을 만끽했다.
“음…….”
예고대로 늦은 밤까지 외출했던 그는 도둑고양이처럼 조심스레 들어왔다. 원체 시끄럽게 다니는 녀석이 아닌지라 소란스럽진 않았지만 그는 보기 드물게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인기척에 깼지만 깨지 않은 척 누워 있느라 몇 시인지 알지도 못한 채 그대로 누워 있었다.
“……으로 ……까…… 하는 게 좋을 듯싶…….”
내가 왜 이렇게 있어야 하나 싶을 때쯤, 녀석의 목소리가 조금 선명하게 들렸다.
“아, 모르는 눈치 같던데, 전혀. 뭐,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조금만 더 있으면 완전히 가능할 것 같기도 하고, 이렇게까지 하고 있는데 망쳐버리면 큰일 나니까. 그쪽이야말로 신경 잘 쓰시죠. 실수했다간 언제 올지도 모르는…… 그리고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하지 마. 뻔뻔하게 잘 넘어갔다만. 내가? 아닌데. 그리고 의외로 촉이 좋을 때가 있으…….”
누가 들어도 수상쩍은 대화에 귀를 기울였지만, 그가 금세 방으로 들어가 목소리를 줄인 탓에 뒷이야기는 들을 수가 없었다.
“자는 척을 하려면 좀 제대로 해라. 눈썹부터 화난 얼굴로 자는 척하지 말고.”
갑자기 들리는 큰 목소리에 벌떡 일어날 뻔했다.
“자는 중이니까 말 걸지 마.”
“연락받은 거 있어?”
“무슨 연락.”
“팀장님. 자면서 대답은 잘해주네.”
왜 이놈 앞에만 있으면 내가 이렇게 유치해지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코를 드르렁거리니, 골지 않는 코 고는 척하면서 코 먹지 말라고 면박이었다.
“……연락했지. 승아 잠옷 파티인지 뭔지 한다고 하루 더 재우고 보낸다고.”
“그거 말고 다른 말은 없으셨어?”
“어.”
“확실해?”
“한 번만 더 물으면 죽여버린다.”
싫다고 누누이 말했건만 으르렁거리는 나를 무시하곤 머리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들고 있던 보디필로를 내던지니 가뿐하게 잡아버렸다. 그는 블록에 빠진 조각을 채우듯 나의 팔을 들어 보디필로를 끼워놓으며 물었다.
“그 새끼랑 만난 적 있어?”
“누구? 질문하려면 좀 똑바로 해. 그렇게 다 잘라먹고 질문하면 누가 알아들어.”
“전재민.”
“만날 일이 뭐가 있다고 만나.”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당연하게 튀어나온 거짓말에 내가 다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그렇게 얼굴에 다 드러난다고 하더니만, 고개를 끄덕이며 넘어가는 걸 보니 꼭 그렇지는 않았나 보다.
쑥 다가오는 상체에 밀쳐낼 생각도 못 하고 멍청하게 있었더니 목에 얼굴을 파묻고 킁킁거리는 숨결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키스라도 하는 줄 알았다. 낯간지러운 행동에 놈의 머리끄덩이를 잡았다. 그는 당황스러운 기색 따위 없는 당당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뭐 하냐?”
“머리 만지지 말라며. 냄새 충전.”
“가지가지 한다. 세상이 미쳐 돌아간다.”
“뭐 그럴지도. 멀쩡한 침대 두고 소파에서 뭐 해. 들어가서 자.”
권유하는 말과 다르게 짐짝이 된 듯 실려 간 몸뚱어리는 어버버 하는 사이에 거실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내려놔라.”
“아~ 무서워라.”
세상은 언제나 혼자 사는 거라고, 더 큰 폭풍이 올 테니 기대 따윈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라고 여겨왔던 만큼, 눈에 띄게 가까워지는 거리에 덜컥 겁이 난 것도 사실이었다.
어디까지나 계산적이고, 온전한 신뢰를 할 상대가 아니라는 걸 잊지 않아야 했다. 또 다른 상처를 키우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기에.
문턱은 내가 정한 마지막 마지노선이었다. 하마터면 천장을 발로 찰 뻔했지만, 정확히 빙글 돌아 떨어진 몸을 일으켜 그가 방으로 들어오기 전에 방문을 쾅 닫았다.
“들어오면 죽는다!”
“성격 진짜.”
생각보다 조용히 물러나는 놈을 두고 내가 한참을 뒤척였다는 건 모르길 바랄 뿐이었다. 그가 옷을 벗는 소리가 왜 그렇게 크게 들렸던 걸까.
***
“할 말 있어.”
뜬금없는 그의 말에 답할 틈도 없이 승아의 신발 신기를 도와줘야만 했다.
“내가 할래요! 내가 할 수 있어요!”
아이는 힘겹게 신발 구멍에 발을 욱여넣고 찍찍이를 삐뚤빼뚤 맞췄다. 굳이 다시 붙여줄 필요도 없이 꼼지락거리는 아이를 안아 들었다.
“지금? 지금 늦었어. 나중에 얘기해.”
“저녁에 일찍 들어올 테니까. 승아 재우고 기다려.”
승아를 핑계 삼아 현관까지 나와 옷을 갈아입으며 건네는 녀석의 이야기를 대충 넘겨듣곤 밖으로 나왔다.
어쩐지 도망쳐 나온 느낌이 들었지만 겨우 부탁해서 오게 된 어린이집 차를 놓치고 싶지 않아 온 힘을 다해 뛰었다. 아침부터 힘을 뺀 노력이 허무하지 않게 다행히도 버스는 아직 도착하기 전이었다.
“아저씨, 힘들어요?”
숨을 고르며 아이를 내려놓는데, 아이는 나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저 좋아하지 않는 문제가 아니라, 내 눈치를 보며 지냈다는 사실을 안 지 얼마 되지 않으니 억지로라도 정을 붙여야 하나 싶었지만, 보이지 않는 불편한 거리가 계속 유지되고 있었다.
나에게나 아이에게나 좋은 영향을 줄지는 확실치 않지만, 아직도 밤마다 제 엄마를 찾으며 울며 방에서 나오는 아이를 위해, 언젠가 한 번 엄마를 만나게 해주라는 팀장님의 조언을 이행해야 하는 건가 싶었다.
이름을 부르자 승아는 나의 손을 꼭 잡고서 똘똘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온종일 뛰어다녀 탄 나와는 다르게, 햇빛을 받으니 투명할 정도로 깨끗하고 맑은 피부를 갖고 있었다.
“엄마 보고 싶어?”
타이밍 좋게 도착한 어린이집 버스가 눈앞에 멈추어 섰다. 평소라면 곧장 달려갈 아이였지만 지금은 여전히 손을 잡은 채 나를 보고 있었다. 조금은 놀라 보이는 아이의 볼은 벌써 발그레해지고 있었다.
“응.”
아이는 망설임 없이 확신에 찬 대답을 했다.
“그럼 다음에 보러 가자.”
얼마 만에 보는 해맑은 미소인지 모르겠다. 아이다운 미소에 나도 모르게 함께 웃어버렸다. 선생님 손에 이끌려 자리에 앉는 아이는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창문 너머로도 발그레한 볼이 눈에 띄었다.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한 게 아니길 바랄 뿐이었다.
***
별다를 것 없는 조용한 하루를 끝내고 잠이 든 아이를 보고 있자니, 아침에 무슨 약속을 해버린 건지 실감이 났다. 벌써 긴장이 됐다.
하루라도 빨리 만나러 가고 싶어 언제 가느냐고 묻는 아이에게 정확한 답변을 주지 못했지만, 이미 약속을 한 이상 마주 볼 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멍청히 앉아 있으니, 할 말이 있다며 자지 말고 기다리라던 이의 말이 머리에서 맴돌았다. 뜬눈으로 기다려야 하나, 잠들어야 하나, 잠이 안 오면 자는 척이라도 해야 하나 고민했다.
무슨 말을 하려나 궁금하면서도 불편한 자리를 가지고 싶지 않았다. 이런저런 핑계 삼아 아이의 방 한구석에 사놓게 된 침대에 몸을 내던지는데, 현관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겨우 잠든 아이가 깰까 싶어 헐레벌떡 뛰어나갔다.
“너도 늙긴 하나 보다. 반응 너무 느린데.”
“……뭡니까, 이 시간에.”
팀장님은 당당하게 밖을 향해 고갯짓했다.
“안 잤지? 승아는 자겠고, 그놈은 나갔겠지 뭐.”
“신종 협박이에요?”
“나와. 바람 좀 쐬게.”
“제가 왜요……?”
“말대꾸 그만하고 나와. 10시밖에 안 됐으니까.”
“신고해도 돼요?”
조용히 나를 빼내 가기 위해 설득하던 팀장님은 결국 나의 목덜미를 잡고서 질질 끌고 나갔다. 허둥지둥 신은 슬리퍼가 짝짝이라는 걸 알아차렸을 땐 이미 건물을 나온 뒤였다.
뻥 뚫린 슬리퍼 앞코로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걸어갔다. 평일의 늦은 밤거리는 조용했다. 거리의 발소리를 들은 개가 짖는 소리가 드물게 들려오고 집 안에서 튀어나오는 텔레비전 소리가 적막을 조금이나마 깨고 있었다.
“세상에 직장 상사가 밤 10시에 집에 쳐들어오는…….”
“가끔 이 생활 말고 다른 것도 좀 해보고 싶다는 생각 들지 않아?”
한껏 깔린 팀장님의 목소리가 얼마나 적적하게 들리는지, 그간 그에게서 엿보였던 무거운 공기가 나까지 짓누르는 기분이었다.
“무슨 생활이요.”
“평범한 직장인이라든가, 위험 수당이 안 나오는.”
“여기 말고도 위험 수당 나오는 곳 많습니다.”
“대충 알아들어. 사람들 사이에서 지내고 싶을 때도 있지 않냐고 묻고 있는 거야.”
부대는 평소보단 불이 많이 꺼진 상태였지만 여전히 드문드문 불이 켜져 있었다. 창문 너머로 누군가와 시선이 마주쳤다는 느낌과 동시에 꺼진 불 때문에, 나의 고개는 다시 팀장님 쪽으로 돌아갔다.
“무슨 일 있으셨어요? 별걸 다 묻…….”
“남들은 평생 느끼지 않을 긴장감을 자처해서 겪고 있으니까. 그만두고 싶은 적은 없냐고.”
“그런 건 팀장님이 더 잘 아시잖습니까. 제가 답할 문제인가요, 그게…….”
“나야 지금이라도 그만두고 싶지.”
“네?”
생각지도 않은 고백에 멍청하게 되묻는 나의 목소리가 골목을 울렸다. 그는 흔하지 않은 미소를 보이며 말을 이었다.
“잘 다녀오라면서 품에 폭 안기는 쌍둥이들의 인사를 들을 때에는 정말 당장이라도 그만두고 싶지. 평생 사랑하겠다 맹세한 아내가 한밤중에 지친 얼굴로 나를 맞이할 때에도 때려치워버리고 싶고. 개뿔도 모르는 것들이 한심한 말을 지껄일 때에는 그냥 목을 분지르고 나가고 싶은데.”
“그만두기라도 하시게요?”
“그럴 리가. 너 같은 놈들을 잔뜩 두고 어떻게 그만둬.”
“……그런 말 들을 정도는 아닌데요?”
팀장님은 혀를 차며 피곤한 발걸음으로 앞장섰다. 자연스럽게 들어간 카페는 새벽까지 하는 술집과 다르게 마감 시각이 얼마 남지 않아 한산했다.
“이보다 더 건전한 시간은 없을 거다.”
“……불만이면 그냥 가고요.”
“어딜 도망가. 뭐 마실 거야.”
“카페인 없는 거면 아무거나 상관없습니다.”
워낙 높은 곳에 있는 부대는 멀리서도 보였다. 남을 불러놓고 한참을 멍하게 건물만 바라보던 팀장님은 음료가 나왔다는 소리에 나를 보냈다. 왠지 모를 짜증이 솟구쳤고, 들고 오는 내내 흔들거리는 컵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그는 유리잔 안을 휘저으며 얼음 소리를 한참 냈고, 한 모금 마신 음료는 단번에 반이나 사라졌다.
“걱정했는데, 예상보다 잘 지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하늘이요?”
“여기서 갑자기 그놈 얘기가 왜 나와. 그 똥강아지 같은 놈……. 네 얘기 하는 거야. 너랑 전재혁이.”
“잘 지내는 것처럼 보이세요?”
“첫날을 생각해봐. 서로 찌르고 쏘고 하지 않고 있는 것만 해도 대단한 발전이지.”
“간단하네요.”
“그간 네 행보를 생각해봐. 경이로울 정도로 잘 지내고 있는 편이잖나.”
길어진 머리카락이 내려와 눈앞이 거슬렸다. 한 손으로 양껏 쓸어 넘기고 스무디를 죽 빨아들였다.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차가움에 절로 눈이 감겼다.
“일주일간 좋은 시간 보냈어?”
아직 쨍한 머리에 인상을 찡그리며 앞을 보니, 그는 심각한 얼굴로 부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는데요.”
열 오르는 얼굴을 가라앉히기 위해 스무디를 죽 빨아들이다가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
“둘이 지지고 볶는 거 말고. 간 보람이 좀 있었냐고.”
“뭐, 모르는 것보다는 나았겠죠.”
나를 빤히 쳐다보는 팀장님 때문에 시선이 절로 옆으로 흘렀다. 어디에다가 이야기하면 좋을지 아직도 감을 잡지 못해 답답한 건 내 속뿐이었다.
“혹시 뭐 숨기는 거 있으세요?”
“음?”
“숨기는 게 있으시냐고요. 요즘 너무 방치하잖아요. 하물며 매일 한가해 보이던 윗분들도 바쁘게 돌아다니는데…… 하도 시간이 남길래 자료 좀 뒤져보려고 열람 신청하면 다 까이고.”
“일 그렇게 열심히 하고 있었어?”
“요점이 너무 빗나갔는데요.”
“흠…….”
“가끔 팀장님이 제일 나쁜 사람 같아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래?”
“지금도 포함해서요.”
어깨를 으쓱거리던 팀장님은 금세 화제를 돌렸다.
“승아는 요즘도 밤마다 울어?”
“뭐, 가끔이요. 엄마 있는 데 한번 데려가긴 해야죠. 제 마음대로 다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이야기는 꽤 시시콜콜한 쪽으로 흘러갔다. 다 이야기하고 나서도 기억에 남는 게 별로 없을 만큼 가벼운 내용이었다.
팀장님의 음료가 다 바닥나 얼음물이 되고 뻑뻑했던 스무디가 묽어질 때쯤, 마감을 알리러 온 직원의 말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팀장님은 오밤중에 꽃을 사 가야 한다며 발길을 돌렸다. 이대로 들어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하다가 머리카락을 핑계로 동행 의사를 알리니 팀장님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 시간에 머리 할 곳이 있긴 해?”
“어딘가 있긴 하겠죠. 일단 좀 같이 가요.”
핑계라는 것은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는 좋은 회피법이었다.
***
“으…… 지루해. 누가 시비라도 걸어줬으면 좋겠다.”
“이거라도 읽으실래요?”
서연은 자리에 앉아 의자를 빙글빙글 돌리고 있는 태주에게 적어도 두께가 10센티는 되어 보이는 책을 건네주었다. 몸서리치며 거절할 줄 알았는데 시큰둥하게 받아서 펄럭거리는 게 어지간히 심심했나 보다.
복귀하고 2주가 넘는 동안 터진 사건이라곤 멍청한 뱀파이어 하나가 사람 무리와 얽혀 난리를 친 걸 중재하는 일뿐이었다.
평소라면 쉬는 걸 보면 손이 근질거리는지 쓸데없는 서류라도 던져주며 정리를 시키거나, 그것도 아니면 일정에도 없던 훈련을 시키며 체력 단련이라고 포장했을 터였다. 그런데 지금은 할 일이 없으면 자유롭게 일을 하라는 말을 팀장님이 대놓고 남긴 덕에, 다들 퇴근 한 시간을 앞두고 의자에 앉아 휴대전화를 보거나 잡담을 나누며 앉아 있었다.
“어디 가?”
재혁은 뒤통수에 눈이라도 달렸는지 나를 보며 말하면서도 서류를 넘기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놈은 하루도 빠짐없이 밤마다 자리를 비우고 있었고, 들어오더라도 자정을 넘기곤 했다.
집도 넓어지고 따로 방을 쓸 수 있게 되면서 접점은 출퇴근 때가 다였지만, 그것도 승아 등원을 핑계 삼아 각자 오가고 있었기 때문에 거의 따로 사는 수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와중에도 아침을 사 와서 내 입에 욱여넣는다거나 내가 피곤해 보일 때마다 질질 끌고 가 쉬게 만드는 만행을 벌이고 있었지만, 그렇게 정말 있는 듯 없는 듯 ‘적절한’ 룸메이트가 되어가고 있었다.
“잠깐 뛰고 오게.”
“응? 형, 좀 있으면 퇴근하는데 웬 달리기예요? 씻은 지 30분밖에 안 됐잖아요.”
“너도 할 거 없으면 나오든가. 의자 소리 시끄러워.”
“으, 달리기 싫은데.”
태주는 그러면서도 책을 있는 힘껏 덮어버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한판 붙죠!”
“예?! 안 돼요! 제발 싫다고 해주세요!”
그에 절규하는 건 다름 아닌 하늘이었다. 태주의 외침을 듣고 문 앞을 기웃거리는 이들이 생겨버렸다. 다들 왜 이렇게 관심을 가지느냐고 한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게, 평소라면 엄격한 폭행의 기준도 대련 때에는 조금은 관대하고, 평등이라면 평등해진다고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와.”
거절할까 싶다가 역시 운동만 하는 것보단 한 번쯤은 몸을 푸는 게 좋겠다 싶어 오케이 사인을 날렸다. 어쩌면 나도 싸우는 걸 꽤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다들 필요 이상으로 웅성거리는 걸 보니 괜한 결정이 아니었길 바랄 뿐이었다.
“에이, 형, 그냥 상의 벗고 해요. 뭘 옷까지 갈아입어요.”
“기본 예의지, 기본 예의. 넌 훌렁훌렁 좀 벗지 마.”
“왜요. 내 몸 보면 다들 뒤집어지는데.”
“눈이 썩어서 뒤집어지나 보지.”
“와~. 진짜 막말 너무하시네.”
옷을 갈아입기 위해 탈의실로 들어갔더니 내 뒤를 따라오던 표성이 말을 걸었다.
“태주 봐라. 이를 간다, 이를 갈아. 이겨야 해. 이건 무조건 이겨야 해. 인간의 명예가 달린 일이라고.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야 해.”
“말릴 줄 알았던 사람이 왜 갑자기 그렇게 열성입니까. 요즘 좀 다혈질인 거 알아요?”
“몰라…….”
머리를 쥐어뜯으며 절규하는 표성을 두고 옷을 벗었다.
“몰라! 모른다고!”
“왜 이래요! 진짜.”
옷을 입으려고 하는데 잡고 늘어지는 덕에 쌀쌀한 바람을 온몸으로 느껴야 했다. 한참이나 뜸을 들이던 표성은 잡고 있던 손을 놓으며 물었다.
“승아 키우는 거 어때? 힘들어? 아니, 좀 커서 괜찮나? 아! 그래도 동생이랑 자식은 다르겠지…… 다른 거겠지! 그렇지? 단어부터 다른데 당연히 다르겠지. 아빠라는 게 더 힘들겠지?”
“……아.”
“알겠다는 눈빛 하지 마. 그리고 내가 가진 거 아니야. 그렇게 내 배 봤자 아무것도 없다고.”
“그런 건 나중에 고민하세요. 태어나고 고민해도 안 늦겠죠.”
“……너한테서 그런 말을 듣게 될 줄이야.”
“그럼 좀 비켜주시겠습니까. 거기가 문이라서요.”
“묘하게 어른스러워진 것 같기도 하고.”
“당연하죠. 하루하루 늙고 있는데.”
“그렇게 말해버리면 나는 뭐가 돼.”
문을 열고 인파가 몰린 곳을 향해 발을 떼는데, 표성이 무언가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내가 보낸 문자는 봤어? 한창 너 쉴 때 전화 안 받길래 문자 보내놨었는데.”
“아, 그땐 휴대전화 망가져서…… 중요한 얘기였습니까?”
“잘못 본 걸 수도 있는데, 너희 어머님, 길 가다 마주친 것 같아서.”
이게 뭐라고 머릿속에 시끄럽게 사이렌이 울리는 것 같았다. 그가 본 게, 그가 말하는 게 사실이라면, 왜 밖을 돌아다니고 있으면 안 될 사람이 돌아다니고 있는 건지.
“괜한 참견 같아서 말 안 하려다가, 아무래도 그때 부대 앞에서 소란이 있던 것도 있고 해서 왠지 말해줘야 할 것 같아서 했는데…….”
“착각이었겠죠.”
“그렇겠지?”
“언제예요?”
“어?”
“마주친 거 말입니다.”
“음…… 그때가 수…… 요일? 어, 맞아. 오랜만에 평일에 외식 나갔던 때라 정확하게 기억한다.”
봤다고 주장하는 표성조차 본인의 말을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착실하게 나가고 있는 병원비를 생각하면, 당연히 표성이 다른 사람을 본 게 맞다고 여겨야 했다. 그리고 만약 그녀가 진짜 병원에서 나왔다면 날 찾기 위해 부대로 쳐들어왔을 테니까.
“그렇지? 내가 잘못 본 걸 거야! 신경 쓰지 마! 지금은 인간의 파워를 보여줄 때라고!”
“말릴 줄 알았더니 더 열성이십니다.”
“이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고…… 사람인데 매일 똑같을 순 없잖아.”
시간 때우려고 시작한 일은 패싸움 수준으로 흘러갔고, 패기 넘치는 이들의 구도는 어쩐지 종족별로 갈리고 있었다. 이렇게 될 걸 뻔히 알았기에 태주가 처음 팀에 들어온 날 이후엔 단 한 번도 이런 자리를 가진 적이 없었다.
물론 바빴다는 이유도 한몫했지만, 쌈박질엔 일가견 있는 놈들이 모이다 보니 여느 올림픽 뺨치는 열기를 띠기 마련이기 때문이었다.
실전에서 사용하는 방식대로 훈련을 하다 보니, 기존의 스포츠처럼 평평한 매트에 칸을 치고 싸우는 그런 간단한 대련이 아니었다.
곳곳에 부상 방지를 위해 완충 장치들을 설치해놓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중앙은 음식점이나 숲, 가정집, 바위산 등 여러 주제로 꾸미곤 했다. 오늘은 풀이나 모래가 아니라 잘 마감된 바닥인 걸 보니 실내로 정한 듯했다.
“다들 어지간히 할 일 없나 보다. 퇴근 10분 전에 저렇게까지 모일 일인가? 너, 실내가 더 나아? 야외로 가는 게 낫지 않나.”
“어느 쪽이든 상관없습니다. 그리고 본인도 안 가고 있으면서 뭐라 할 처지는 아닌 것 같은데요.”
“내가 빠지면 서운하지. 우리 팀 기둥이잖아. 내가 심판 봐야지, 심판.”
“기둥은 팀장님 아닙니까.”
“팀장님은 지붕.”
“아.”
인파를 뚫고, 정확히 말하면 갈라지는 인파 속을 걸어간 곳에서 몸을 풀고 있는 건 태주가 아닌 재혁이었다. 흔한 전쟁 영화 속에서 승리를 거두고 돌아오면 어떤 환영을 받게 될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등장한 건 나였지만 환호성은 그를 향해 쏟아지는 듯했다.
왜 생각보다 더 난리가 났나 싶었더니…….
“뭐 해? 어디서 약을 팔아.”
“유운 형, 전 정말 형이랑 붙고 싶었는데 말인데요, 관중분들께서는 이 그림을 좀 더 원하는 것 같아 어쩔 수 없었네요!”
큰 소리로 외친 태주가 헐레벌떡 도망가 하늘의 등에 숨어 섰다. 남산만 한 놈이 하늘의 등에 가릴 리 만무했다. 흔치 않은 대련 광경에 소문을 듣고 몰려오는 이들이 점점 늘고 있는 게 느껴졌다.
이쪽은 옷까지 갈아입고 왔건만 녀석은 퇴근 준비를 모두 끝내고, 착실히 빳빳한 셔츠로 차려입은 차림새였다. 복장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네가 왜 여기 있어. 태주 손보려고 한 건데.”
“피해 다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 무시한다고 해야 하나. 싸워주면 상대라도 제대로 해줄까 싶어서.”
습관적으로 뒤통수를 쓸었지만 짧게 자른 머리카락은 까슬까슬할 뿐이었다.
“……딱히.”
소매를 걷어 채우는 녀석을 봤다. 굳이 저 불편한 차림을 하고 어디를 가기에 매번 밤늦게 돌아다녔을지 신경 쓰이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는 다른 이들의 눈 따윈 신경 쓰지 않은 채 입을 놀렸다.
“잠자리가 별로였어? 반응을 보면 그건 아닌 것 같고. 뭐 숨기는 일이라도 있어?”
“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다만.”
“시작하기 전이라도 말하면 그만둘 수도 있고.”
“준비나 똑바로 해.”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한 안전장치들에 둘러싸인 곳에 있자 말 그대로 구경거리가 된 것 같았다. 그가 꼼지락거리기를 멈추자 표성이 당당하게 중앙에 서서 입을 열었다.
“기존 훈련 때와 동일한 규칙을 적용하되 능력 사용은 철저히 금지합니다. 생명에 위협이 간다고 판단될 경우, 심판의 권한으로 임의 중지 시킬 수 있습니다. 제한 시간은 없습니다. 시작은 제가 경기장을 벗어난 시점입니다.”
대련장은 식당처럼 꾸며져 있었다. 그것도 주방이 달린 채로. 쇠로 만든 의자와 불판이 깔끔하게 놓여 있었고 유리병이나 접시가 없다는 게 의아할 정도로 잘 꾸며놓은 곳이었다.
상식적으로 무기라고 생각되는 것들은 들여놓지 않았지만 10년을 넘게 쌈박질에 대해서 배운 우리에겐 사방에 도구를 둔다는 것 자체가 그냥 한 놈 죽을 때 끝난다는 의미일 뿐이었다. 물론 그렇게까지 내버려두진 않겠지만.
잠금장치 작동 소리가 들렸지만, 상대도 나도 섣불리 뛰어들지 않았다. 소리를 지르던 이들조차 숨을 죽이며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나를 보며 말했다.
“겁먹었어?”
오랜만에 보는 재수 없는 미소와 작게 터진 함성들. 내 손을 떠난 의자가 그의 앞을 막으며 본격적인 시작을 알렸다.
“그럴 리가.”
가벼운 터치가 칼부림으로 이어지듯, 폭력이 더 큰 폭력으로 이어진다는 건 로봇이 아니고서야 당연한 일이었다.
사회와 스포츠라는 이름을 건 자리에선 그런 감정을 억누르고 최대한 실수를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게 당연한 일이었고, 이 자리도 마찬가지였다. 기교와 멋보단 상대에게 틈을 보이지 않아야 했고 상대가 누구든 감정을 배제한 채 상대의 머리와 심장을 뚫어야 했다.
한 번도 이곳에 들어와서 뒷일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어차피 붙는 상대는 대부분 그와 같은 놈들이었고 직업적으로 하는 일과 별반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상대는 뭔가 착각을 하는 것 같았다.
“……장난해?”
“전혀.”
술래잡기쯤으로.
맨몸으로 싸우는 지금 상태에서 저런 놈한테 잡힌다는 건 단순하게 잡혔다는 문제가 아니다. 부상과 직결되는 문제이기에 잡히지 않게 조심해야 할 건 이쪽이었지만, 그는 나를 잡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상처 입힐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달까.
내가 피할 것을 예상하며 저리 구는 건지, 아니면 매일 밤 잘 생각도 없이 싸돌아다닌, 승아의 부탁이라면 뭐든 들어줄 것 같던 놈이 주말에도 예외 없이 나가버린 일이 그를 진짜 둔하게 만든 건지 모르겠지만. 뭐가 어찌 됐건 봐준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긴가민가한 마음을 접어두고 피해야 타이밍에 그가 빗겨 칠 곳으로 방향을 틀었다.
“윽.”
예상은 틀린 적이 없었고, 그의 발꿈치는 나의 어깨를 강타했다. 아픔은 빡침에 묻혔다. 명백한 무시였다. 내가 느끼기에 어떻건, 장내는 더욱 열기를 띠었다.
아마 모인 이들이 모두 사람이었다면 암만 에어컨을 틀어도 열사병으로 한 명쯤 쓰러졌을 것이다. 상을 하나 두고 그와 때 아닌 힘겨루기를 시작했다. 평화로운 상체를 두고 하체는 서로 밀리기 싫어 발악했다.
“기억나? 첫 대련.”
나의 말에 찰나의 틈도 없이 대답이 돌아왔다.
“네가 숨겨 가져온 총에 맞아 머리가 뚫릴 뻔한 날? 오늘도 챙겨 왔어? 은근히 준비성이 철저하니까.”
“내가, 그놈들한테 봉사하는 일이 시작된 날이지.”
블라인드에서 빼낸 철봉을 무기 삼아 휘둘렀다.
“정말 싸우길 기다렸다는 듯이 구네.”
몸을 풀고 있는 재혁을 보고도 제 발로 이곳에 들어오다니, 정말 그와 싸우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홧김에라도 묻지 못했던 것들을 묻고, 확실히 하고 싶었나 보다.
“이게 원래 나잖아.”
그는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원점으로 돌아가자는 의미인가.”
재민이 했던 말이 사실이라면 그는 모든 걸 얻은 뒤 무슨 짓을 꾸미려는 걸까. 내가 정말 열쇠라고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면, 그가 열쇠를 쥐고 할 수 있는 게 뭘까.
밑져야 본전인 말을 내뱉었다.
“그 자리에 올라가기 위해 무슨 짓을 했지.”
맞아도 금방 회복되는 녀석들은 상처가 나더라도 피하기보단 잡는다는 걸 알고 있기에 언제나처럼 다리를 노렸다.
“……얼마나 많은 놈을 밟고 속였어.”
“읏.”
철봉에 제대로 맞은 그의 다리가 터져 피가 샜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뛰어다녔다. 사방에 피가 튀면서 수많은 냄새를 압도하는 향이 퍼졌다.
쉽게 피할 수 있던 공격을 피하지 못하고 맞은 상황에서 나는 그의 반응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보기 드물게 당황하는 표정과 분노의 표현. 다쳤다는 사실보다 아마 옷이 더러워졌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은 게 아닐까.
봉에 밀려 넘어간 녀석에게 지지대를 잃고 하늘거리는 블라인드 천을 내던졌다. 마치 커다란 물고기를 잡듯. 그러곤 발론 그의 가슴을 밟고 봉으론 그의 목을 눌렀다. 비명과 환호가 난무하는 사이에서 발밑의 그에게 속삭여주었다.
“거짓말 하나 하지 않았다 장담할 수 있어?”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가 말을 해도 듣지 못했겠지만, 그의 입은 움직이지 않았다.
천에 가려 희미하게 비치는 실루엣. 그의 움직임에 물결치는 천에 좀 더 힘을 주자 일대가 조용해졌다.
죽은 듯 가만히 있는 녀석에게 물었다.
“……약 때문이야?”
“뭐?”
되묻는 놈에게 다시 한 번 물었다. 멀리서 표성이 카운트다운을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3…….]
“인간이 되고 싶냐고. 그게 아니라면 그걸 손에 쥐어야 하는 이유라도 있어?”
“싸울 때 원래 말이 그렇게 많은 타입이었던가. 적어도 나를 상대로 했던 때를 생각하면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추상적인 말에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걸 보니 무얼 뜻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눈치였다. 천에 가려 희미하게만 보였지만, 어떤 얼굴로 말하고 있을지 보이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는 사실이 나를 몹시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의 표정을 보는 순간, 간단히 넘길 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걸 알아챘다.
[2…….]
“……말 돌리지 마.”
[……!]
방심한 사이 규칙 따윈 개나 준 녀석의 바람이 장내를 휩쓸었다. 그를 싸고 있던 천은 그대로 나를 감쌌고, 등에 벽이 닿았다. 시멘트벽 같아 보이던 벽에서 느껴지는 촉감은 철창과 다를 바 없었다.
단번에 바뀐 상황에 다들 또다시 숨을 죽였고, 종료를 알리는 표성의 외침에도 우리 사이에 변하는 건 없었다.
그가 조금은 화나 보였다는 게, 어떤 의미일지.
“누구 말을 듣고 그런 소릴 하고 있는지는 알 것 같으니까 넘어가고…… 그놈이 하는 말을 다 믿는 건가? 네놈이랑 그 긴 시간 살을 부대끼며 지낸 나보다 고작 서너 번 만나봤을 놈을?”
조인 목엔 천의 까끌까끌함만 느껴졌다. 천에 가려 앞이 잘 안 보일 것 같았지만, 지독하리만큼 시야는 선명했다.
들끓고 있는 그의 눈.
“신뢰는, 시간에 비례하지 않으니까.”
“하.”
강제 제압 경고를 날리는 소리가 나오기 무섭게 미련 없이 떠나는 놈의 뒷모습을 봤다. 다들 숨을 참고 있었는지 작은 한숨과 웅성거림이 모여 소란스러운 소리가 났다.
자리를 박차는 뒷모습마저 익숙해졌다. 그렇게 떠나선 또 무슨 달콤한 말을 가지고 돌아와 속삭일 생각일까.
어쩌면 그가 변명을 늘어놓았다거나, 아니라는 소리를 한 마디만 했더라도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진 않았을 것이다. 그는 정말 숨기는 게 많았고, 나는 지독하게 생각이 많았다.
표성의 손에 들린 총을 빼앗아 총구를 그에게 향했다.
“그럼 뭐라고 변명이라도 지껄여봐. 도망가지 말고.”
차가운 촉감에 눈을 흘기니 팀장님의 총구가 나를 향하고 있었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총 내려놔.”
“…….”
“내려놔.”
장난기 하나 없는 살기를 띤 음성이었다. 긴가민가했던 생각이 팀장님의 차가운 목소리를 끝으로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팀장님이 말씀해보시죠. 전 당신의 복수를 위한 패였을 뿐이었습니까. 아니면 그 복수라는 것조차도 가림막에 불과했던 겁니까.”
“보는 눈이 많아. 그만 거둬. 상황 악화시키지 말고.”
돌아온 말은 질문에 대한 답을 들려주진 못했다. 더 이상의 대답은 없었다.
총을 타고 흐르는 바람에 그에게 겨눈 제압용 총이 제 기능을 다 못할 것은 알고 있었지만 거두지 않았다. 내가 함부로 행동을 못 하는 것처럼 상대도 그럴 테니까.
“그게 다입니까.”
입을 다문 채 목석처럼 서 있던 녀석이 말했다. 귀에 익으면서도 최근에는 듣기 힘들었던 얼어붙을 듯한 말투로.
“변명을 늘어놓으면? 들어? 혼자 골머리를 앓다가 말 한마디에 넘어가서 또 총을 겨눌 텐데. 그렇게 신뢰를 하지 못할 거라면 그냥 그만둬. 굳이 네가 아니더라도 수많은 패는 존재해. 양쪽에서 널 들먹인다고 뭐 중요한 놈이 된 줄 아는 모양인데, 버려지는 건 한순간이야. 경험도 많으니 잘 알 거 아니야.”
“너도 입 다물어. 백유운, 마지막으로 말하는 거니까 들어. 내려놓…….”
……!
생각을 끝내는 깔끔한 마무리를 알리는 소리.
총성은 언제나 맑고 고운 법이었다.
예상한 것과 다르지 않았다. 옅은 연기만 그의 등에서 피어날 뿐, 상처 하나 나지 않았다. 그 많은 고민을 하고 감정을 정리하는 데 쓴 시간은, 그에게 기대하며 매달렸던 시간은 모조리 쓸모없었다.
첫 단추가 엉망이면 모든 단추가 엉키듯, 그렇게 망가졌다. 그동안 낭비한 시간 속에서 남은 건 네 꼴리는 대로 살라는 말뿐이었다.
이 난리를 칠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어준 태주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쉽게 끝낼 수 있었는걸. 뭐 하러 남을 신경 쓰고, 얽히고, 복잡한 삶을 살았을까. 모두 이기적으로 자신만 생각하며 사는데…….
나 홀로 태풍이 몰아치는 한가운데로 기어 들어가 살아보겠다고 발버둥 치는 일을 그만두고 싶었다. 조용히만 살 수 있다면 이제 어느 바닥이건 상관없었다.
이런 마당에 누가 조금 더 선하냐를 따지고, 누가 적이고 아군인지 구분하는 일을 하고 있던 것 자체가 어리석었다.
“우웅? 혼자 왔어요?”
“이리 와.”
여전히 그부터 찾는 아이였다. 무작정 아이를 안아 들곤 밖으로 나왔다. 나의 발을 죄던 사슬을 하나씩 떼어내듯, 그렇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을 했다.
“어디 가요?”
“엄마 만나러.”
손을 대지 말았어야 했던 것들을 제자리에 돌려놓는 것.
***
아이는 방방 뛰며 기대에 찬 눈을 반짝였다. 병원에 도착하는 그 순간까지 잘못되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제 발로 종종 돌아다니며 간호사에게 말까지 먼저 붙이는 걸 보니, 역시 나만 빼고 모든 사람을 좋아하는 게 맞는 듯했다.
표성이 봤다는 건 역시 그 여자가 아니었다.
“채지연 환자 보호자님.”
간호사의 부름을 받고 따라 들어간 병동은 온통 하얗던 부대와 똑같은 페인트를 쓰는 듯했지만 군데군데 색깔이 다양하게 칠해진 그림들 덕에 좀 더 화사해 보였다. 늦은 시각이라 면회실은 텅 비어 있었다. 주변은 너무나 조용하고 또 조용했다.
나름대로 푹신한 가죽 의자와 커다란 소파들 사이에서 적당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의자에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모습을 드러낸 이는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좀 더 건강해 보였다.
그때에는 피골이 상접했다고 해도 틀리지 않은 묘사였을 텐데 이제 푹 파인 볼은 조금 살이 올랐고, 공허했던 눈도 조금 생기를 되찾은 상태였다. 긴장했던 것과 달리 그저 매일 보는 사람처럼 익숙했다.
“엄마아!”
“아휴, 우리 예쁜 딸, 엄마 보러 온 거야?”
이산가족 상봉이라도 하는 듯한 장면을 보고 있었다. 매일 밤, 새벽만 되면 그녀를 찾던 아이의 울음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울리는 것 같았다.
역시 작은 침대를 사길 잘했다고, 끈질기게 죽지 않고 플라스틱 통에서 꾸물대는 달팽이를 보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더는 타인에게 들어갈 돈을 계산하지 않아도 됐고 내가 쓰지 않은 돈을 갚기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됐다. 모든 건 처음부터 이랬어야 했다.
그녀는 멀뚱히 앉은 나는 안중에도 없이 승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런 아이도 오랜만에 만난 엄마가 좋은지 팔짝팔짝 뛰며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뭘 먹었는지, 지난주에 친구와 무슨 놀이를 했는지, 새로 보고 있는 애니메이션의 캐릭터가 무슨 색을 좋아하는지까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끝도 없이 나누었다. 그들에게서 시간의 공백은 느껴지지 않았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이 공간에도, 그들의 대화 안에도 나는 없었다. 아이에 대해서 내가 아는 것도 하나도 없었다. 어리석고 무책임한 행동과 태도를 보인 나에게는 그녀를 비난하고 아이를 빼앗을 권리도 없었다.
괜한 오지랖이 맞았다.
둘이 원하는 대로 삶을 살고 나도 내 앞길이나 걱정하며 편히 살 수 있었던 걸 꼬아놓은 건 역시 나였다.
벽에 그려진 원숭이에 점이 몇 개 찍혀 있는지, 이상하게 생긴 나무의 잎사귀가 몇 개나 있는지 세며 시간을 죽였다. 멍청하게 앉아 있는 일은 실로 비생산적일 뿐더러 나를 생각의 늪으로 빠지게 하는 지름길이었다.
다시 반복될 일상 속에서 빠져나올 방법은 있는가, 어떤 길을 걷고 싶은 건가 두서없는 질문을 던지고 대답하기를 반복했지만, 결론이 나는 질문은 하나도 없었다. 그저 의문만 낳을 뿐이었다.
의식해서 눈을 깜박이다가 부자연스럽게 질끈 감고 또 뜨기를 반복했다. 이렇게 멍청한 짓으로 한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그…….”
“잘 지내셨습니까?”
고개를 급하게 끄덕인 여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전화, 왜 안 받았니? 아니다, 괜찮아. 이렇게 찾아와줬으면 됐지. 이제 내보내주지 않을래? 다신 안 그럴 테니까, 승아랑…….”
아무렇지 않을 줄 알았지만, 그녀에게 어린 나는 어떤 존재였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다신 안 그럴게. 돈 안 보내줘도 돼. 네 눈에 띄지도 않고 시골에 내려가서 조용히 살 테니까. 그냥 여기서 나가서 이 어린 꼬마랑 같이 살 수 있게만 해주면 돼.”
“……도와드릴 생각 없습니다. 무슨 이유가 됐건 눈에 띄지 않게 사세요.”
“그래. 그래. 밥은 잘 먹고 다녔니? 조금 살이 빠진 것 같기도 하고…….”
호의적인 말에도 관심조차 주지 않는 내게, 그녀는 걱정하는 말을 건네며 나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쌈박질을 해대는 놈들보다도 거친 손. 달갑지 않은 그녀의 손을 쳐냈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움찔대는 그녀를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안하다. 이제 듣기도 싫겠지만.”
다급하게 소리치는 목소리에 흔들리는 일은 이제 없었다.
“웅? 아저씨 혼자 어디 가?”
“네 아버지랑 따로 살게 되고 주, 죽으려고 했었어. 내가 없는 존재가 되는 게 더 나을 것 같았으니까.”
반복된 사과는 신뢰를 잃고, 가슴을 움직일 힘을 잃는다.
“죽지 그러셨습니까.”
“겁쟁이라서. 이렇게 겁쟁이라서 막상 그러려니 무서워져버려서…… 그러지 못했어. 또, 그렇게 괴롭다가도 미련이 남아서, 뭐가 뭔지 알 수 없어서…… 한 번만 다시 기회를 주면 안 되겠니? 이제 정말 잘할게. 엄마한테 한 번만 기회를 주면 안 되겠니?”
대답은 남겨두지 않았다. 온전한 정신일 때만 보내는 도움과 용서의 손길에 넘어가고 싶지 않았다. 또다시 망가질 걸 뻔히 알았으니까. 퇴원 확인을 받을 때까지도 나는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내가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건 길바닥에 주저앉아 자지 않도록 해주는 것뿐이었다.
나오자마자 무작정 택시를 탔다. 목적지를 말하지 않았지만, 택시는 도로를 달렸다.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슬프지 않다. 그게 내가 말할 수 있는 감정이었다.
언제든 상처받을 준비를 하고 하루하루 버림받을 준비를 하는 것. 좋아한다는 감정을 품는 일은 그런 거였다. 어설픈 사과에도 자존심을 굽히고, 용서하게 되어버리고, 약해져버리는 것.
택시 기사는 흘러나오는 라디오 방송을 들으며 홀로 이야기하기 바빴다.
“이 새끼는 또 왜 나온다고 지랄인지 모르겠네. 아무튼, 요즘 사람들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이슈만 되면 우르르 몰려나와서 시위나 하고, 그러니까 저놈이 자꾸 나와서 저 지랄을 떨지, 어휴.”
끝없이 흘러나오던 택시 기사의 목소리와 백미러에 비친 그의 얼굴이 익숙하게 바뀌는 기이한 일.
“학생도 그래? 우르르 나가는 편?”
언제나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나타나는, 그리고 그 타이밍마저 귀신같이 정확한 남자.
재민은 자신이 물고 있던 담배에 불을 붙여 넘겨주었다.
“진실을 알면 그렇게 휘둘리지 못하지. 머리가 박힌 놈이라면. 그렇지?”
오랜만에 피우는 담배는 그간 답답하게 막혔던 무언가를 흘려보냈다. 턱턱 막히고 씁쓸한 공기가 차 안을 채웠고, 열린 창문으로 나가는 연기만큼 찝찝함이 쓸려가는 느낌이었다.
“학교라도 뛰쳐나온 반항기 학생 같은 표정 짓고 있지 말라고.”
“그런 적 없습니다. 어딜 가고 있는 겁니까.”
“흐음…… 내가 알 리가 있나. 그냥 흘러가는 거지~.”
뭐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정적이 흐르는 와중에도 차는 열심히 달렸다. 앞도 보지 않고 딴짓을 하는 놈과 별개로 차는 정말 잘 굴러가고 있었다.
줄담배를 피웠다.
끊었다가 다시 시작하는 일은 이렇게 사람을 미치게 했다.
“사람을 납치했으면 뭐든 말 좀 해보시죠.”
“죽여버리지 그랬어~.”
장난스러운 말투였다.
“죽고 싶다고 하는데 죽여주지 그랬어. 내가 처리해줄 수 있었는데. 아니면 내가 죽여줄까?”
그렇지만 전혀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그는 실없는 소리를 하며 호탕하게 웃곤, 나의 입에 물려 있던 담배를 가져가 피웠다.
“너 말이야, 진짜 우리가 다 죽어버리길 바라는 것 맞아? 그렇게 어설프게 굴다간 당하기만 하고 끝나게 될 거다. 사람은 자리가 만드는 법이잖아? 그곳에 몸을 담은 게 잘못이었어. 뭐든지 조용히 덮는 곳에 들어가서 뭘 하겠다는 거야. 무기부터 하는 짓까지 전부 다 소심 덩어리인 곳에서.”
어둑한 저녁, 그가 다시금 운전대를 잡은 순간 세상은 밝게 빛났다.
“네가 그날 시름시름 앓느라 재혁이가 하는 말을 똑바로 못 알아먹은 것 같은데, 아직도 무조건 제로들이 더 악이라고 생각한단 소리는 지껄이지 마. 사이가 좋지 않은 놈들에게 던져주는 게 뭔지 알아?”
입이 찢어지도록 하품을 하던 재민이 다시 입을 열었다.
“공통의 적이지. 그저 역할놀이를 하는 거야. 나쁜 역, 착한 역. 역할놀이에서 착한 역을 한다고 더 착하다? 그런 무식한 논리라면 집어치워. 그런 뒤통수 쪽이 더 더러운 법인 거지. 아…… 난 다 지쳐버렸다고, 이런 유치한 놀이!”
“…….”
“5일 뒤, 선물 하나 보내줄게. 그게 마음에 든다면, 이런 유치한 역할놀이에서 빠지고 네가 꿈꿨던 세상을 만들고 싶다면 함께할까 싶은데. 애초에 네가 여기 왜 몸담게 됐는지 잊지 않았다면 좋겠고~. 물러터진 인간이 되고 싶진 않잖아?”
“당신은 뭐가 아쉬워서 그런 행동을 합니까.”
“내가 가지지 못할 바에는 누구의 손에도 넣지 못하게 한다…… 랄까. 보다시피 놀이에서 열외자가 되어버린 탓에 외롭던 참이기도 하고. 여기저기 치이고 다니는 게 지쳤다고 할까. 너랑 좀 비슷한 것 같은데.”
돌아온 관사에는 아무도 없었다. 텅텅 빈 거실이 여름임에도 춥다고 느껴졌다. 실내에는 아이가 만들어서 둔 샌드위치 냄새가 진동했다.
마요네즈가 잔뜩 들어간 샌드위치를 음식물쓰레기 봉지에 미련 없이 넣곤 봉투를 묶었다. 갑자기 줄담배를 피워대서인지 두통이 찾아왔다. 따끔거리는 목을 붙잡고 침대에 누웠다.
30분쯤 지났을까, 잠과 현실의 경계가 문 닫는 소리에 무너졌다. 자연스럽게 귀가 그의 발을 따라갔다. 욕실을 거쳐 방으로 들어가는 똑같은 패턴. 굳이 내가 피하려고 하지 않아도 알아서 피해준 것 같은 분위기가 이어졌다.
대련장에 있을 때보다, 그에게 총을 겨누고 있었을 때보다 벽 하나를 두고 숨죽이고 있는 지금, 더욱 신경이 곤두섰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밖으로 나가는 소리에 겨우 참던 소리를 토해냈다.
“하아…….”
마지막 남았던 담배를 태우곤 이불 속에 파고들어 베고 있던 베개를 빼내 끌어안았다. 머리를 짓누르던 두통은 점점 강해졌다. 그가 들어오기 전까지 잠들 수 있기를 빌었다.
소소한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문 앞에 선 녀석이 입을 다문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문 안 닫았었구나.
“뭐.”
“승아, 어디 갔어.”
샌드위치 냄새 때문에 화라도 내러 왔나 싶었는데, 오자마자 승아를 찾았다.
“거기 서서 지껄일 생각이면 문 좀 닫고 꺼져. 고양이 새끼처럼 나갔다가 새벽에 들어오든가.”
“어디 있…….”
끌어안고 있던 베개를 던졌다. 정확하게 맞은 솜 덩어리에 문이 굉음을 내며 닫혔다.
그가 문을 벌컥 열고서 침착한 척 나를 추궁할지, 아니면 소리를 질러댈지…… 나는 어느새 그에게 변명할 말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다행히 그는 더는 말을 걸지 않고 조용히 제 방으로 갔지만.
난 버림받은 적은 없다. 내가 떠나고, 또 잃어버렸을 뿐.
순간순간의 감정에 흔들려 내가 이곳에 몸을 담은 목적조차 잊어버릴 뻔했다. 손쓸 수 없는 감정이 생겨버리기 전에, 지난 세월의 고생이 헛되지 않게 이렇게 끊어내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