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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덫 (14/21)

13. 덫

“……는 건 멍청한 짓이지. 아닌가?”

갑작스레 들이닥친 목소리에 손을 뻗어 상대를 침대에 내던졌다. 세상은 말 그대로 암흑과 다를 게 없었다. 상대를 제압하고 있는 나의 손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살아간다는 건 언제나 의심을 품는 게 당연한 일이건만 누구나 안정을 추구하고 고민하기를 그만두고서 결국 믿고 말지. 각양각색의 이유를 덧붙이면서.”

“……누구야.”

“아아, 목소리를 듣고도 구분을 못 하다니 조금 기분이 상하는데.”

잠시나마 스친 서늘한 눈빛에 눈을 질끈 감고 다시 뜨니, 손에서 벗어나 헝클어진 머리를 다시 묶는 이의 얼굴이 보였다. 재민은 평화롭기 짝이 없는 얼굴로 나를 보며 말했다.

“어떻게 여기에 있냐는 듯한 눈빛인데? 그런 것까지 일일이 알려줘야 해? 귀찮네…… 그냥 그러려니 넘어가. 하도 멍청하게 굴기 시작하길래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서 기껏 와줬더니 별로 반가워하지 않는 눈치라 그렇지 않아도 탐탁지 않은데.”

주위를 흘깃거리는 걸 눈치챘는지 재민은 되레 큰 소리를 내며 의자를 빼내 앉는 태연함을 보여줬다. 누군가가 올 리가 없다는 걸 알려주듯이.

“……어째서.”

“궁금하긴 하나 보네. 난 또 죽이겠다고 덤비거나 오럴이라도 해줄 줄 알았더니…… 싱거워, 싱거워. 아, 동생한테 허리 흔들면서 헉헉대는 모습은 안 봤으니까 걱정하지 마. 내가 이래 보여도 그 정도 매너는 가지고 있다고.”

그는 책상을 뒤적거리더니 손으로 부리를 나타내듯 손가락을 부딪치며 오리너구리가 조각되어 있던 펜을 찾았다.

“할 말이 있으시면 본론만 이야기하시죠.”

그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다리를 꼬았다. 분명 서 있는 건 나였으므로, 내려다보고 있음에도 압도당하는 느낌이었다.

“조은이 별로인가? 그 정도면 꽤 예쁘장하고, 말라서 그렇지 나쁘지 않은 몸매인데. 아니면 여자한텐 흥미가 없어? 뭐 그런 건가…… 너보다 약한 놈한텐 박힐 마음이 안 생겨? 성적 취향 문제가 아니면 자존심 같은 건가. 어쨌든 이런 건 중요한 게 아니고. 뭘 좀 많이 알아냈어? 몸 좀 놀렸으면 그만큼 가져가야지. 헛짓만 하지 말고.”

“……말, 조심하세요.”

“엄청나게 조심하고 있는데. 너한테 잘 보이려고 노력하잖아. 안 그랬으면 진작 네가 그렇게 날 쳐다보지 못하고 있겠지. 일정에 날 만날 계획은 없어 보이길래 친절하게 이렇게 정보도 주러 오기도 했고. 저 녀석 사람 다루는 법은 잘 알아서, 설마설마 했더니 너까지 잘 길들여놨나 보네. 하긴 그 어릴 때부터 얼마나 많은 사람을 만났는데 잘해야지. 침대에서든 밖에서든 말이야.”

어둠 때문인지 하얗게 반짝이던 그의 머리카락이 보랏빛으로 보였다. 그의 손에서 나타난 얇은 선들이 책상에 어지럽게 서 있었다. 바늘같이 얇고 빳빳한 실들이 얼마나 촘촘히 박혔는지 도형 같아 보이기 시작했다.

“결계를 몇 겹에 걸쳐서 쳐놓은 건지 얼굴 한번 보기가 힘들어. 내가 너한테 무슨 말을 할지 얼마나 겁났으면…… 쯧. 뭐, 이해는 돼.”

“…….”

“어렸을 때 얘기를 해주지 않던가? 애들 피를 먹기 싫어서 지랄 발광을 했다는 둥, 애지중지 조은이를 돌봤다는 둥, 뭐 그런 얘기. 하긴 내가 뭐 하러 이런 걸 묻고 있냐. 다 들었으니까 울고불고 매달리면서 같이 물고 빨고 한 거겠지.”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걸까, 저 남자는.

“하? 진짜 다 믿은 모양이네. 인상 좀 펴라. 원래 어정쩡한 사람보다 너같이 좀 경계가 심한 애들을 꾀는 게 더 쉬운 법이야. 뭐 하나 확실한 것만 건드려주면 알아서 넘어오거든. 그 뒤로 그만큼 충성을 하니까 관계 유지하기도 편하고. 조은이 봐. 원래 그렇게 멍청한 애가 아닌데, 그놈이 어떻게 길들여놓은 건지 도망갈 생각도 못 하고 더 주지 못해서 안달 난 애처럼 굴잖아.”

나른하게 감았던 눈을 감았다 뜬 재민이 말을 이었다.

“하프인 녀석이 나를 제치고, 또 순혈로 태어난 그 수많은 놈을 제치고 아버지의 다음 순번으로 서 있다는 게, 그것도 싫다는 놈을 억지로 세워놓는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이 정도 됐으면 그 새끼가 어떤 짓을 하면서 그 자리에 올라갔을까를 생각해야 하지 않나?”

“제가 무슨 이유로 당신 말을 듣고 있어야 하는 겁니까.”

“생명의 은인이니까? 적어도 나는 그놈들처럼 떠돌이 개한테 간식 던져주는 것처럼 굴긴 싫거든. 네가 쥔 열쇠, 그래서 널 이용하기 위해 잡아두는 놈들이 왜 그러는지 다 알려주려고. 내가 손해 보는 일 좀 없애려고. 난 그런 식으로 신뢰를 얻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 자기들은 실컷 분장하고서 어떻게든 남의 본모습을 보기 원하는 거 말이야. 뭐 어찌 됐든 선택은 네 마음이다만.”

“열쇠……?”

“너는 모르는 놈들이 널 알고 있고, 쫓고 지키려 하고, 잡고 있으려 하고, 갑자기 친절해지고, 또 특별한 사람이 되려고 하지. 언제부터 알게 됐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다들 원하는 게 있으니까 그렇게 구는 거지. 이유 없는 친절함은 없다는 거 너도 잘 알고 있잖아? 조만간 큰일이 터질 거야. 승기는 네가 있는 쪽이 갖게 되겠지.”

책상을 내리치는 힘에 날카롭게 서 있던 빛들이 그의 손을 뚫고 지나갔지만, 상처를 남기기는커녕 반짝이는 가루를 흩날리며 사라졌다.

“제가 가진 건 없습니다. 어느 쪽에 서 있든 상관도 없고요. 그쪽 중에 누가 이기고 지건 상관없습니다. 어느 쪽이 나쁘든 좋든 저한텐 다 똑같을 뿐입니다. 좀 더 제게 해가 되지 않을 쪽을 택하고 있을 뿐이니까요.”

“그건 네가 정하는 게 아니야. 네가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난 네가 열쇠라고 했지, 히든 박스라고 한 적은 없거든. 아무 일을 겪지 않고 평범하게 살았으면 지금처럼 이 바닥에 있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

“……아니라고 하실 겁니까.”

“네가 지금 이곳에 서 있는 걸 네 분노가 선택한 결과라고 생각하겠지만, 모든 건 네 아버지가 뿌린 씨앗이 착실히 자라고 있을 뿐이라고. 왜냐면 그가 히든 박스였거든. 다들 지금은 눈치 게임을 하고 있을 뿐이지.”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아버지의 존재에 재민의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신경이 쓰이는 것을 무시할 수 없었고, 재민은 귀신같이 그걸 알고 있었다.

“지켜? 욕심이 없어? 그만큼 입에 발린 소리도 없어. 솔직해져야지. 무언가 지키기 위해서, 조용한 하루를 보내기 위해선 힘이 있어야 하고, 권력이 있어야 한다는 걸 누가 몰라.”

“……대화를 다 듣고 있었습니까?”

“알다시피 우리 종족은 귀가 밝아서. 뭐,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네 아버지가 연구하던 게 뭔지 궁금하지 않아? 한 번을 묻질 않던데.”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아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 없었고 누구도 입을 열지 않던 일을 손쉽게 불어줄 것 같은 태도에 뛰는 심장을 붙잡을 방법은 없었다. 그게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단 하나의 소식으로 끝나버린, 아버지의 죽음의 원인이었다면.

정말 나는 이걸 듣고 싶은 건가. 혹시라도 내가 아버지를 원망하게 된다거나, 기억된 이미지를 버리게 되고 만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거짓된 모습조차 기억하고 싶어서 악랄하게 굴던 나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서,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상대는 여느 때처럼 마음대로 입을 놀리지 않고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을 따라 생겨난 사람 모형이 책상 위를 터벅터벅 걸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그 뒤를 조용히 좇았다.

“……뭐였습니까. 모든 걸 다 버리고 갈 만큼 중요했던 연구라는 게.”

“인간이 될 수 있는 약. 뱀파이어가 인간이 될 수 있는 약을 만들고 있었어.”

그의 손바닥에 덮쳐진 모형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만들었지.”

“…….”

“윗선이라면 모두 알고 있는 일이다. 네 팀장도, 내 동생도, 그리고 네가 지금껏 만났던 이들 모두가 알고 있다고 해도 무방하지. 너무 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라는 게 네게 이득이 될 수도, 약점이 될 수도 있겠군.”

눈높이를 맞추며 일어난 상대는 확신에 찬 눈빛으로 이야기했다.

“그리고 난 그걸 너에게 이득이 되게 해줄 수 있어. 뱀파이어들의 끝을 보고 싶다며. 위험을 뒤집어쓰기 싫어 덮기 위해 애쓰는 겁 많은 놈들을 대신해서 총대를 메고 도와줄 수 있어.”

어째서.

“난 이 지긋지긋한 싸움을 그만하고 싶거든. 역겨워서 볼 수가 있어야지.”

“……제가 당신을 믿어야 하는 이유는 뭡니까.”

“믿어?”

혼자 미친 사람처럼 웃던 이는 웃음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믿건 말건 상관없어. 어쨌든 넌 결국 네 발로 날 찾아오게 될 테니까. 왜냐면 의심이 하늘을 찌르는 네놈에 비해서 그 새낀 숨기는 게 너무 많거든. 신뢰라는 건 시간에 꼭 비례하진 않는 법이라고.”

“그런……!”

그의 손에 눈이 가려지고 몸이 뒤로 넘어갔다. 번쩍 뜬 눈앞에 있는 건 천장이었다. 들이치는 햇살에 눈살이 찌푸려져서 양옆으로 눈을 두 번이나 굴렸다. 이불은 폭신폭신하게 새로운 것으로 바뀌어 있었고, 바닥은 언제 난리가 났었냐는 듯 반들반들해져 잘못 디디면 미끄러지진 않을까 싶은 수준이었다.

여느 때와 같이 밥을 먹으라고 말하는 제이의 목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꿈이었나. 진짜로 나눈 이야기인가. 조각난 필름처럼 이어지는 데 비해 기억이 너무나 선명했다. 다시 한 번 눈을 감았다 떠봤자 변하는 건 없었다.

시트러스 향 속에 퍼지는 라벤더 향. 흩날리는 커튼 아래로 비친 책상이 조금 반짝였는지도 모르겠다.

3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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