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통제할 수 없는 (3)
나와 마주한 남자는 희미한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절대 만만하게 대할 수 없는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그는 매체에서 접한 것보다 더욱더 날카로워 보였으며 쉰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건장했다. 그들이 가진 특유의 힘이 아니었더라도, 또는 권력을 갖고 있지 않더라도 마찬가지였을 듯했다.
남자는 재혁과 같은 색의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넘기고 있었지만, 매번 무언가 갈구하는 그의 눈동자와는 달리 냉철하기 짝이 없는 검은 눈동자로 나를 보고 있었다. 재혁이 석고상 같다면 이쪽은 동상 같은 느낌이랄까.
남자는 한층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앉아요. 아니면 어디라도 좀 걸을까?”
거절하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커다란 식탁에 얼마나 많은 손님이 들이닥칠지 알 법했다. 그의 어머니처럼 다정한 스킨십은 볼 수 없었지만, 둘 사이에서 느껴지는 친근함은 한층 우위에 있었다.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 생각은 없었다. 그냥 듣고 있는 게 마음이 더 편했기에 둘이 계속 대화를 이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비록 얼마 가지 못했지만.
“향은 괜찮아요? 우리야 적응이 돼서 괜찮아도 가끔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괜찮습니다. 붙어 있는 내내 맡다 보니 익숙해져서.”
그와 나의 사이에 재혁이 앉아 있다는 게 다행이었다. 안 그랬다면 긴장해서 필요 이상의 말을 내뱉거나 입에 음식물을 잔뜩 넣은 사람처럼 굴었을 테니까.
“제주도에 와본 적 있나?”
“훈련 때문에 내려온 적은 있는데, 프로그램만 따라가느라 타 지역이라는 느낌도 안 들었던 기억은 있습니다.”
홀로 웃음을 터트린 남자를 바라보자, 웃음소리를 삼키며 말했다.
“편하게 있어요. 무슨 면접 보러 온 사람 같네.”
나름대로 긴장한 티를 안 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사람이 보기엔 아니었나 보다. 남자는 눈으로 재혁을 가리키며 말했다.
“시간 남으면 가이드라도 시키면서 돌아다녀봐요. 바깥 돌아다니는 것보다 방에 박혀 있는 걸 좋아하는 애라 말 안 하면 그냥 집에서 쉬고 있게 될걸요. 나도 좀 끼워달라고 하면 그런가.”
“저보다 싫어하시면서 무슨.”
재혁의 대꾸에 다시 격식 없는 웃음소리가 울렸다.
“다 같이 오실 줄 알았는데 왜 혼자 오셨어요.”
“다들 휘오네 아기 보고 온다고 그래서 먼저 왔지. 집에 둘째 아들 손님이 왔다는데 당연히 그래야지. 네 엄마보다 늦게 본 게 약이 오르네.”
“누가 보면 별일이라도 난 줄 알겠습니다.”
“별일이지. 처음 있는 일인데.”
“악취미네요. 진짜.”
“너한테서 그런 소릴 듣는 날도 오네. 내일 한번 가서 보고 와. 뒤집기 연습하고 있던데, 요즘. 낑낑대는 게 귀엽더라고.”
“뭐…….”
“혹시 아기 좋아해요? 그냥 데리고 오라고 할까?”
나에게 말을 돌리는 걸 보니, 그냥 재혁의 말을 끊고 싶은 게 아닌가 싶었다. 대충 얼버무리며 그렇다고 대답하니 남자는 아예 연락을 취하려고 했다. 재혁이 그 행동을 제지했다. 남자는 그런 재혁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내일도 한번 오지.”
“내일은 큰댁에 다녀올 생각이라서요.”
“일조가 좋아하겠네. 같이 가는 건가.”
“그래야죠.”
내가 몰랐던 나의 일정을 지금이라도 알았으니 다행이었다. 그들의 가족에게 조은이라는 존재는 꽤 중요해 보였다. 만난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나는 그렇다고 답했다.
“한바탕했나?”
“네?”
바로 돌아온 질문에 멍청한 되물음을 전하니, 남자는 다시 한 번 웃음을 터트리며 물었다.
“조은이가 워낙 재혁이를 좋아하니까. 손님이 왔다고 하면 난리 한번 쳤을 것 같아서 물어봤지. 질문이 너무 이상했나.”
재혁은 코끝을 쓸며 대답했다.
“별일 없었습니다. 지금은 자고 있을 거예요. 제이가 보고 있고요.”
그 모습을 본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와 그를 번갈아 봤다. 지금은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게 맞겠지. 앞에 놓였던 차 한 잔이 좋은 매개체였는지, 아무것도 없이 마주한 이의 존재가 문제인 건가 생각했으나 그냥 내가 문제라는 게 답이었다.
“생각보다 더 잘 컸네. 어렸을 때 봤을 땐 깡마르고 키도 작았던 것 같은데.”
남자의 혼잣말에 의문스러운 눈으로 보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왜 그런 말을 했는지는 듣지 못했다. 같은 향을 풍기는 이들이 우르르 들어와 방 온도를 한층 낮춰주었기 때문이었다.
일곱이나 되는 이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오니 절로 침이 삼켜졌고, 이유 없이 적대감이 들기 시작했다. 그게 오롯이 나의 색안경 탓이 아니라 그들이 의도적으로 풍긴 힘이 한몫했다는 건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아, 손님이었구나.”
사람의 존재쯤이야 진작 알아챌 수 있는 그들이 놀란 진짜 이유는 내가 먹잇감이 아니라 그들이 앉을 자리에 동등하게 앉아 있기 때문인 듯했다.
그들은 먼저 악수를 권하던 재혁의 아버지와 다르게 웃는 얼굴로 고개를 까딱일 뿐이었고, 자기들만의 인사를 주고받으며 나에게는 철저히 눈길을 주지 않았다. 구시대적 남녀 차별이라도 존재해서 재혁의 어머니가 내려오지 않으시는 건가 싶었지만 잠시나마 느낀 분위기에서 그녀가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아직 10대인 그의 사촌들은 도도하기 짝이 없는 그들의 부모와 똑같이 행동하고 있었다.
“일조 오빠는요?”
재혁의 고모의 질문에 숙모가 대답했다.
“아주버님은 안 오시겠죠. 여기가 무슨 자리라고.”
“나는 또, 인간이 앉아 있길래 일조 오빠도 오나 했지.”
짧은 순간, 숨소리 섞인 웃음이 퍼졌다. 한마디 할까 싶다가도 무의미한 싸움을 만드는 귀찮은 일은 겪고 싶지 않아 그들과 눈을 맞추며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다. 그게 그들을 더 신경 쓰이게 할 테니까.
그들이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연약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와인 잔이 자리마다 놓이기 시작했고, 뒤이어 검붉은 액체가 담긴 유리병을 기울여 잔을 채워주었다.
아직 초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아이에게도 잔을 채워주는 것을 보면 술이 아닌 듯했지만, 나를 지나쳐가는 액체를 보고서 그게 사람과 관련된 액체라는 것을 알았다.
이제 입학할 때쯤 되었을까. 가장 어려 보이는 아이는 나와 그를 번갈아 보며 잔을 비우더니 손을 대지 않은 재혁의 잔을 가리키며 말했다.
“형, 안 마실 거면 내가 마셔도 돼요?”
“한입은 들지그러니. 옆에 앉은 사람이 쓸모없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게 아니라면.”
아이의 질문에 입을 연 건 한창 근황을 나누던 그의 고모였다. 아이를 거리낌 없이 터치하는 모습으로 보아 아마 아이의 엄마인 듯했다.
검사장에서 그 난리를 피우며 거부했을 때를 생각하면 순순히 아이에게 잔을 내주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는 보란 듯 잔을 비워냈다. 입술에 묻은 액체를 혀끝으로 쓸며 말했다.
“고모부, 자리를 비우셨네요. 또 바람이라도 피우셨답니까?”
그의 필터링이라곤 없는 익숙한 말의 대상이 내가 아니라는 게 우스웠다.
“말조심해라.”
재혁의 말에 경고를 날린 건 그의 아버지였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구긴 여자가 입을 열기 전에 멀리서부터 발소리가 들렸다. 가까워진 발소리에 갑자기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잔을 새로 채우는 액체의 맑은 소리가 위험하게 들렸다.
“흠…….”
문을 박차고 들어온 남자는 교만한 눈으로 나를 보던 이들과 다르게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나를 정면으로 마주했다. 그의 반응이 아니었다면 나의 뛰는 심장에 의구심을 품었겠지만, 그에게 다시 돌린 시선에 확실한 눈맞춤은 나에게 고민을 할 필요 따위 없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재혁이 나의 허벅지를 잡은 뒤에야 내가 다리를 떨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그때야 놀이공원에서 그가 했던 질문의 의미를 깨달았다.
넌 어떻게 할 거야?
난 어떻게 하고 싶은 거지.
일찍이 넘겼던 질문은 무의미했다. 지금 내가 해야 하는 건 무의식중에 떨던 다리를 멈추고 평정심을 찾은 뒤, 나를 얕보는 이들에게 태연함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놈이 차라리 뻔뻔한 놈이었다면 좋았을걸. 아니면 내가 더럽게 눈치가 없다거나. 단순무식하거나.
“바…… 람이라니 말이 좀 심하네, 재혁이.”
새로 등장한 남자는 장난스러운 말투로 재혁을 나무라며 자리에 앉았다.
“여보, 소민이는요?”
“소민이가 그냥 집에 있겠다고 해서 혼자 왔어. 휴가 자꾸 울어서…… 휘오는 잘 못 달래주니까. 안 늦을 줄 알았는데 다들 한잔한 걸 보니 좀 늦었나 보군요.”
남자는 당황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나를 힐긋거렸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단순히 내가 이 자리에 있어서일까, 아니면 그가 다섯 살을 상대로 몸을 섞은 적이 있기에?
당연하다는 듯 사람을 취하고 노는 이들에게도 지켜야 할 선이, 체면과 위신이라는 게 있다는 게 우스웠다.
“옆에 있는 사람은 누구냐.”
제일 늦게 들어온 그는 이곳에 있는 놈 중 유일하게 나의 정체에 대해 질문을 했다. 누군지가 아니라 왜 여기에 있는지가 궁금한 거겠지. 재혁은 매크로 답변을 했다.
“파트너입니다. 휴가 얻은 김에 같이 왔어요. 불편하신가요.”
“아니…… 내가 불편할 리가 있나.”
옆에 앉은 놈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나는 왜 다리를 떨어야만 했을까.
두려움을 지우기 위해선 그게 무엇인지 인지해야 하고, 인지한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하지만 나는 지금 한 단계도 나아가지 못하고 같은 질문에서 허덕였다.
오랜만에 만난 아버지가 하던 이야기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긴장이 아닌 겁을 먹는다면 해낼 수 있는 일도 엉망이 될 거라는 말.
나는 겁을 긴장으로 돌리기 위해 애썼다.
“지난 건은 어떻게 됐지.”
남자는 말을 다른 주제로 돌리기 위해 부쩍 노력했다.
“F에 관한 거라면 아직 확답은 안 왔는데, 그쪽에서 별수 있겠나. 소리소문 없이 사라지고 싶지 않으면 알았다고 하겠지.”
“아뇨, 그게 아니라 그에 관한 이야기인 것 같은데. 맞죠, 여보?”
“어…… 어, 둘 다 어느 쪽이든 알아야지. 아, 렉스네 들어갔던 일은 잘 해결됐으니까 이제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아.”
대화는 곧 그들끼리의 화제로 넘어갔다. 그들의 대화는 암호문을 푸는 것과 같았다. 주제와 상관없는 단어를 명사로 지칭하거나, ‘그거’라든가, ‘반대쪽’이라든가, 기존의 내용을 알지 못하면 전혀 흐름조차 잡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장식품 취급을 하다가도 중간중간 생각을 물어보는 게, 진짜로 나의 의견을 듣고 싶은 게 아니라 넌 이곳에 있을 놈이 아니라는 걸 인식시키고 싶은 모양새였다.
그러면서도 ‘어머, 죄송해요. 듣기 좀 거북한 말이었나요’ 같은 말을 끼워 넣으며 사과를 전했다. 괜찮다고 그냥 넘기려다가 조심해주었다면 좋겠다는 말에 그의 숙모는 얼굴을 붉혔다. 재혁이 나의 발을 툭 치는 덕에 공허하게 떠돌던 눈을 고정할 수 있었다.
“아…….”
문득 그들이 마시는 음료에 관심이 갔다. 이 자리에 앉아 있다고 갑자기 그들에 대한 동경이 생긴 건 아니었다.
나를 위해 기꺼이 쓸모없는 노력을 기울이는 놈들에게서 건질 것 따윈 없을 거란 걸 본능적으로 알았기 때문에 앉아 있는 일 자체가 지루해졌기 때문이었다. 액체는 굳지 않게 무슨 짓이라도 한 건지 한참이 지나도 색과 농도를 유지했다.
보란 듯이 비운 잔은 새롭게 채워져 찰랑거리는 액체가 한껏 담겨 있었다. 포도주라고 하기엔 너무 처절해 보이고 피라고 하기엔 너무 가벼워 보였다.
무심코 그의 잔에 손을 뻗었다. 그들에겐 이 냄새가 어떻게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나에겐 몸속에 흐르는 피를 식게 했다. 뜨거웠던 찻잔에 비해 차갑게만 느껴지던 액체는 식도로 넘어가는 순간 목이 타들어갔다.
비릿하고 알싸한 맛.
“으으.”
***
“심오한 대화라도 나눌 줄 알았더니~. 유치하고 지루해서 죽을 뻔했네. 아니, 넌 그 순수―하고 순결―하신 순혈들을 어떻게 다 제치고 그 자리에 있냐. 능력은 개뿔, 거기 있는 꼬마랑 붙어도 네가 질 것 같던데. 아, 아닌가? 저번에 보면 너도 뭐어…….”
“…….”
“아니, 그리고 스무고개라도 하는 거야, 뭐야? 어쨌든 부대에 들어온 건 스파이 짓 하러 왔다는 거잖아. 아빠한테 쪼르륵 가서 이르려고. 뭐 이런 멍청이가 다 있어? 난 왜 데리고 왔어, 여기. 나 생각보다 입 싸다고오~.”
생각하지 않아도 매번 목구멍까지 차올랐다가 억눌렀던 말들이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술술 나와버렸다. 부들거리던 몸도 얌전해진 걸 보니 잠시 긴장했던 것뿐이었나 보다.
사방에서 돌아가던 감시 카메라들이 전부 망가진 기분이었다. 왠지 지금은 뭐든 떠들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말하는 만큼 속은 뻥 뚫렸고 응어리졌던 것들이 전부 풀렸다.
“아무튼 있는 것들이 더해요. 팀장님은 이걸 다 알고 있다고? 대체 그분은 무슨 생각이신 거야? 사실은 머리가 텅텅 비신 거 아니야?”
차에서 내리자마자 찾아온 청량감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똑바로 잘 걷고 있었고 말도 안 꼬이고 잘하고 있었다. 세상이 조금 더 맑게 보인다는 것 빼곤, 나는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적응은 무슨…… 라벤더 향도 지겨워 죽겠다. 너 하나도 돌아버릴 것 같은데 우글우글 몰려 있으니까 화생방 저리 가라야. 어후, 구역질나는 거 간신히 참았네.”
앞질러가던 걸음을 멈추고, 그에게 돌아서며 물었다.
“근데 거기서 아카시아 향은 왜 났냐?”
그는 대답 대신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저었다.
“몰라? 씨발…… 어디서 거짓말을 해.”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소파에 앉으려는데 내 뒷덜미를 잡은 녀석이 나를 계단으로 질질 끌고 가며 말했다.
“올라가서 자. 자고 일어나서 얘기해.”
얜 왜 맨날 자라고 지랄이야…….
“졸린다고 한 적도 없는데.”
바닥은 나갈 때 그대로 엉망이었다. 그의 손에서 벗어나 조은이 난리를 쳐놓은 책을 밟았다. 바스락거리는 게 낙엽 밟는 것 같기도 하고…….
“오랜만에 가족들 본 걸 텐데 좀 더 있다가 오지 그랬어. 걔도 그렇게 가지 말라는데, 같이 좀 자주지 그랬냐. 무슨 옷을 그렇게 훌렁훌렁 벗어 젖히는지, 씨발, 아주 둘이 똑같아요. 잘한다는데 한번 해볼 걸 그랬나 봐. 아, 넌 알 거 아니야, 잘하는지 못하는지. 어떠냐. 진짜 잘하던?”
억지로 끌고 가서 침대에 내동댕이치고 자라고 닦달하거나 조용히 하라고 으르렁거릴 줄 알았더니 그는 체념한 눈빛으로 서 있었다. 왜 그런진 모르겠지만, 그 여자와 똑같은 취급을 받고 있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널브러진 책을 하나둘 들어 책꽂이에 꽂았다. 나도 내가 왜 이런 짓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재미없게 뭐 하냐. 너 깨끗한 거 좋아하잖아. 심심해 죽을 것 같으니까 청소라도 도와준다, 내가. 마음에 안 들면 네가 나중에 다시 하든가 하라고.”
“……그래. 책 다 꽂으면 카펫도 좀 다시 깔아줘. 먼지 한번 털어주면 더 고맙고.”
녀석은 내가 들고 있던 책 한 권을 빼앗아 가더니 소파에 벌렁 누워 태연하게 읽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어차피 다시 해야 한다며 뺏어서 할 녀석이 저렇게 나오니 괜히 또 오기가 생겨 더 엉망으로 책장을 채웠다.
얼마나 많이 꺼내 왔는지, 또 얼마나 구겨놨는지 반절을 치우는 데도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우주에 갔던 정신이 지구로 돌아오는 것 같은 시간이었다.
태평한 녀석이 뭘 하고 있나 봤더니 펼친 책으로 얼굴을 덮고 미동도 없이 누워 있었다. 잠이라도 들었는지 고르게 숨을 내뱉으며 누워 있는 꼴이 참 평화로워 보였다. 얌전히 배에 손까지 포개놓고 있다니.
그가 덮고 있는 책의 표지엔 그의 상태를 나타내주는 건지 정직하게 ‘수면’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었다. 왜 그가 하는 행동들만 보면 이렇게 약이 오르고 짜증이 나는 건지.
바닥에 털썩 앉아 소파에 턱을 얹었다. 몸에서 힘을 풀자 부드러운 천이 볼에 닿았다. 눈을 꼭 감은 채, 그의 목에 손을 뻗어 넥타이를 만졌다. 보이지 않아도 얼마나 지독하게 깔끔하고 단단히 매어놓았는지 느껴졌다. 풀벌레 소리가 지독하게 울렸다.
시끄러운 거 싫어하면서.
사실은 싫어하지 않는 게 아닐까. 옷 입고 자는 것도 싫어하면서 이렇게 평온하게 소파에 누워 자고 있고, 매번 냄새 난다고 난리 치면서 항상 입맛을 다시니까.
거짓말을 입에 달고 사는 놈이었다. 결국엔 팔은 안으로 굽기 마련일 텐데, 하마터면 진짜 아군이라고 생각할 뻔했다. 부쩍 작은 일에도 발악하고 냄새 하나에 다리를 떨며 약해 빠진 놈처럼 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게, 달콤한 말을 내던지는 그에게 기대고 있기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멍청하게 다시는 내 꾀에 말려들지 말아야지. 내 발목을 잡는 일을 만들면 안 됐다. 괜히 엮이는 일을, 어리석게 구는 일을 그만둬야 했다.
하루 동안 몇 번이고 만졌던 그의 넥타이가 차갑게 느껴졌다. 무슨 미련이 남은 걸까. 손을 떼려고 했지만 계속해서 머무르는 손은 나의 의지가 아닌 타인의 힘에 의한 일이었다.
“제대로 치운 거 맞아? 전부 다시 해야 할 것 같은데.”
“……네가 다시 해.”
“그러지 뭐.”
손이 자유를 찾음과 동시에 책 덮는 소리가 들렸다. 움직이기도 귀찮아서 소파에 볼을 기댄 채 앉아 있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풀벌레 소리가 어우러져 여름도 가을도 아닌 느낌이 났다.
조금은 졸린 걸지도 모르겠다…… 고 생각하던 찰나, 그가 머리를 마구 헝크는 바람에 눈앞이 머리카락으로 덮였다. 달빛에 의존하고 있던 시야가 어둑해졌다.
“아, 진짜, 뭐 하는……!”
망설임 없이 들어온 그의 입술은 짧은 시간을 끝으로 떨어졌다.
“나더러 다시 하라며.”
“……미친, 하지 마라.”
피로가 몰려와 고개를 돌렸다. 소파에 얼굴을 처박자 완벽한 암흑을 선물받았다. 세상에 있는 어떤 검은 물건을 가지고 와도 이보다 더 완벽할 순 없을 것이다.
“이제 좀 깼나 보네. 주정 진짜 최악이던데. 했던 말 하고 또 하고, 또 하고…… 하고 싶은 말은 다 했나.”
“100분의 1도 못 했는데.”
“그동안 어떻게 참고 지냈대. 지금 해봐. 귀 트였을 때 들어놓게.”
“기억 안 나. 너나 할 말 많아 보이는데 좀 해보지.”
옆에 눌러앉은 녀석이 자리를 뜨기 기다리다간 이대로 얼굴을 처박고 잠이 들 것 같았다. 고개를 살짝 돌려 옆을 봤다. 녀석은 나와 똑같이 소파에 앉아 눈을 가리고 있었다. 미동도 없이 앉아 있는 놈의 뒤로 보이는 집 안은 어질러졌던 게 언제라고 깔끔하게 원상태로 돌아와 있었다.
허리를 곧추세워 앉았다. 벌레들은 지치지도 않는지 끊임없이 울어댔고, 창문을 타고 들어오는 달빛 또한 여전했다. 다시 시작된 끊임없는 물음은 나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질문과 의문에 잠식당하기 전에, 고개를 돌린 그와 눈이 마주쳤다. 자리를 뜨려고 몸을 추스르는데 급할 것 없는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언제가 시작인지도 모르겠어. 태어났을 때부터겠지. 다들 그렇게 사는 줄 알았고, 난 당연히 그렇게 컸으니까. 지금 이렇게 말하는 게 변명이라는 건 알아. 하지만 그건 오롯이 피를 취한 행동이었고, 다른 일은 행하지 않았다는 건 알고 넘어가줘.”
미동도 없이 앉아 있는 녀석의 말투는 담담했다.
“뭔가 잘못되고 있다고 느꼈을 땐, 이미 늦은 뒤였어.”
“그래, 당연히 그랬겠…….”
“다른 이들이 갈증을 해소하는 모습을 봤어. 그들에겐 나이와 성별을 떠나서, 사람이 단순히 갈증만을 해소해주는 대상이 아니었다는 걸 알았을 때 그제야 말로 설명할 수 없던 불편한 느낌이 뭔지 알았어. 근데, 그때는 나도 고작 네댓 살쯤 됐을 때였어. 내가 할 수 있는 건 어른들을 향해 소심한 반기를 들어보는 것뿐이었지.”
허공을 맴돌던 그의 시선이 나에게 고정되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너 처음 본 거, 학교가 아니야.”
“……뭐?”
“정확히 말하면 향을 기억하고 있다는 게 맞겠지. 수많은 이들의 피를 취하고 나서야 내가 하는 게 남에게 옳지 않은 일이라는 걸 확신하게 돼서 한창 반항하고 있을 시기였어. 그런데 네가 나오더라. 그 새끼 집에서 말이야.”
그의 말에 작위적으로 잊고 살던 대상들의 모습이 뿌연 안개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10년 전, 스쳐 지나갔던 ‘손님들’보다 유별나게 나를 아껴주던 남자. 모두 잊고 감정만 남겨놓은 나의 감각 속에서 지우지 못한 냄새.
“얼굴도 기억나지 않고, 진한 향만 풍기는 아이는 그동안 만신창이가 된 아이들과 다르게 웃으면서 나왔어. 오히려 헤어지는 게 아쉽다는 듯 안기면서…… 넌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뒤를 따라갔어. 기분이 좋은지 폴짝거리며 뛰어가더라. 네가 손에 쥐고 있는 건 지폐 몇 장일 뿐이었는데.”
그의 눈에 박힌 나의 뒷모습은 어땠을까.
“내가 잘못 본 줄 알고, 이미 지독한 향이 가득한 그의 집에 자진해서 놀러 갔어. 나를 보면서 놀라던 어른들의 얼굴이 아직도 생생해. 그다음에, 다음다음에 봤을 때에도 변한 건 없었어.”
발가벗은 몸을 가리기 위해 끌어 모은 모래더미가 파도에 쓸려 사라지고 축축함과 찝찝함만이 남아 있었다.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걸까, 나만 뭔가 잘못하고 있는 건가…… 하는 의문을 가질 때쯤, 조은이를 알게 됐어. 지금 생각해보면 그 아이에 대한 호기심이었는지, 아니면 너에 대한 호기심이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들의 요구대로 피를 취한다는 조건으로 아이를 집에 들일 수 있게 했어. 가까이에서 본 아이의 상태는 더 말도 안 됐지. 그 후로 선과 악의 가면을 동시에 쓴 채 생활했어. 그렇게 10년 가까이 지나서 널 다시 만났고.”
시야 속에 그를 담지 않기 위해 고개를 돌렸지만, 턱을 잡은 그의 힘에 다시 눈을 맞췄다.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사는 건지 모르겠는데, 넌 나를 보자마자 거리낌 없이 적대감을 드러냈어. 그때 난 어린 네게 들던 궁금증도, 큰 너에게 들었던 의문도 지워버렸어. 적어도 내가 본 사람들이 다시 삶을 되찾지 못하며 사는데, 그런 삶을 사는 상대가 나를 쓰레기 취급을 하고 있어서 짜증이 났는지도.”
그의 손가락이 반복적으로 턱을 스쳤다.
“근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그냥 나 때문에 풀리지 않는 화였어. 내가 필요에 의하든, 의하지 않든 피를 섭취해야만 모든 게 엉망이 되는 걸 막을 수 있다고…… 그렇게 합리화하면서 사는…… 오해로 얼룩진 사이에, 정말 네게 미안한 감정을 가지게 되어서인지, 불쌍하다고 여겨서였는지 생각해야 했어. 너도 내게 던졌던 그 질문들을.”
“……그래서.”
“난 네게 거짓말한 적 없어. 그리고 앞으로도 안 할 거고. 그리고 더 생각할 필요가 없어. 고민하는 일은 끝냈으니까. 그러니까 너도 그만 계산하고 살아.”
흔들림 없이 확신을 품은 그의 눈동자 속에 갇힌 나는 사자 무리 속에 발이 묶인 사슴 한 마리 같았다. 도망치기 위해 눈치를 살피는 꼴이 가엽고 불쌍했다. 나를 이렇게 만든 나에게 미안했다.
그런데 나는, 무엇을 피해 도망가고 싶은 걸까.
“자신만만하네. 나보다 더 많이 머리 굴리는 놈이.”
턱을 쥐고 있던 그의 손이 떨어졌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띤 그는 몸을 일으키곤 다시 한 번 나의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놓았다. 마치, 내가 자리를 피하고 싶어한다는 걸 알고 있다는 듯이.
언제나처럼 충동적이었다. 그렇지만 이건 오기에 휩싸인 행동은 아니었다. 나는 지금 지극히 냉정한 판단을 할 수 있는 상태였고, 그에 상응하는 심장은 제 속도를 벗어나지 않고 있었다. 그에게서 답을 구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네가 확신을 품은 이유는 뭔지. 그럼 내가 느끼는 혼란은 뭔지.
믿어도 되냐고.
내 손에 잡힌 그의 손목은 드물게 힘이 풀린 날것의 상태였다.
“아…….”
잡았던 손을 놓자마자 그는 되레 나를 잡아당겼고, 그 힘에 몸은 절로 벌떡 일으켜졌다.
“소파에 누울 생각 하지 말고 위에 올라가서 침대에서 자.”
그는 미련 없이 돌아서서 제 방을 향해 걸어갔다. 구부정한 자세로 소파에 기대고 있던 게 불편했는지 고개를 갸웃갸웃 움직여 근육을 풀면서.
“어떻게 하는 건데.”
나의 말을 들은 그는 발길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주머니에 손을 꽂은 그가 입을 열고 내뱉은 말은 간단했다.
“뭘?”
그의 넥타이를 끌어당겼다. 그대로 입을 맞췄다. 잠깐 붙었다 떨어진 입술은 알 수 없는 갈증을 느꼈다. 나도 본능에 굴복하는 괴물이라도 된 걸까.
더 깊게 이어지는 입맞춤에도 그는 나를 받아들일 뿐이었다. 주머니에 꽂은 손도 여전했다. 폭력적이지도, 상냥하지도 않은 감정 없는 입술을 좇는 건 나였다. 몇 시간 전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목석처럼 나를 받아들이고 있는 그의 목을 조이는 천 쪼가리는 작은 힘에 사이를 넓혔고, 매듭 부분은 속절없이 그의 가슴까지 내려왔다.
그때였다.
숨겨놓았던 그의 손이 나의 얼굴을 감쌌다.
그는 나보다 더 강렬하게 입술을 찾아 빨아대기 시작했다. 코와 이마를 맞댄 채 숨을 고르다가 입을 열었다.
“……머리 굴리는 일을 그만두는 거.”
대답은 무의미했다. 서로를 쫓느라 바빴으니까. 그는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였다는 걸까. 유리 조각이라도 다루듯 굴지도 않고 폭력적으로도 굴지 않는, 적당히 ‘신사적’인 그의 행동은 나를 답답하게 만들었다.
익숙함이란 중독이었다. 지독하고, 위험한.
***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물건이 뭐냐고 묻는다면 당당하게 암막 커튼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부족한 수면 시간은 사람을 예민하고 신경질적으로 만들며 기억력과 판단력 저하 등 좋지 않은 영향을 가져오고, 심한 경우 환각과 환청까지 동반할 수 있다는 건 이미 증명된 사실이었으니까.
“으으…….”
눈을 감아도 인상이 절로 써지는 밝기였다. 고된 노동에 지친 몸을 일으키려다가 포기하고 침대에 몸을 맡겼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다가 갑갑한 공기에 걷어냈다.
간밤 동안 건조해진 목에 입맛을 다시는데 계단을 올라온 재혁이 물을 건넸다. 언제 챙겨 입은 건지, 흰 티셔츠와 검은색 면바지 차림을 한 녀석이 입을 열었다.
“옷 입고 내려와.”
씻고 간다고 하려 했지만, 몸을 닦아놓은 건지 샤워 젤 향까지 풍겼다. 빈 잔을 건네주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별말 없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가방을 대충 뒤져 옷을 꺼내 입었다. 최대한 그의 옷과 비슷하지 않은 색을 골랐다. 내려가자마자 목인사를 건넨 제이가 언제 차려놓은 건지 모를 밥상을 권했다.
샌드위치나 도시락 정도쯤 던져줄 줄 알았더니 제대로 된 밥상이 차려져 있었다. 밥과 콩나물국, 그리고 열 가지가 되는 반찬들에서는 김까지 폴폴 나고 있었다.
“뭐야, 이건 다…….”
“남기지 말고 먹어. 가져온 제이의 성의를 봐서라도.”
두 남자는 양옆 소파에 앉아 나의 밥 먹는 모습을 구경했다. 종족 특성인지, 아니면 할 일이 없어서 저러는 건지 불편하기는 매한가지였다.
괜히 눈을 마주치기 싫어서 고개를 푹 숙이고 음식에만 시선을 고정했다. 얼마나 조용한지 음식물을 씹는 소리가 선명했다.
“……둘 다 할 일 없어요?”
“지금은 별로.”
심드렁한 재혁의 대답을 뒤로, 제이는 조금은 기대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맛은 어떠십니까.”
“맛있네요…….”
“다행입니다. 아내가 짜다고 해서 좀 걱정했거든요.”
“아내분이 만들어주신 거였습니까? 다음부터 그러지 않아도…….”
“아, 제가 만든 겁니다. 아침은 제 담당이니까요.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소소한 취미니까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않고 드셔주신다면 좋겠네요.”
……밥을 챙겨 먹나?
“같이 드실래요?”
요리하는 하프인 따위 들어본 적도 없다고.
“전 밥은 먹지 않습니다.”
“먹지도 않으시면서 요리는 어떻게 하세요.”
“그냥 눈으로 보고서 하는 겁니다. 인터넷이 워낙 잘 발달해서 영상에서 하라는 대로 하면 다 되는 세상이잖습니까. 가끔 맛을 보긴 하는데, 요즘은 대부분 아들이 봐줍니다.”
“자식이 있으세요?”
결혼했다는 것부터 놀라웠는데 아들까지 있다니. 제이가 들이미는 사진을 봤다. 제이의 유전자가 그리 센 편이 아닌지, 아들은 엄마의 피를 좀 더 받아 인간의 몸으로 자라고 있는 듯 보였다.
“다섯 달 뒤면 동생도 태어납니다. 둘째도 저보단 아내를 닮으면 좋았을 텐데, 검사 결과는 생각대로 따라주진 않네요. 뭐 태어나기 전까진 확신할 순 없으니까 조금은 기대를 하고 있지만요.”
“인간으로 자라는 편이 더 좋다고 생각하십니까?”
“하프는 본능적으로 받는 제약도 많고, 포기해야 할 일도 많으니까요. 거창하게 말하지만 결국은, 볶음밥이라는 걸 먹으면서 맛있다고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뿐이죠.”
식사를 방해해서 죄송하다고 덧붙이는 제이의 말에 나는 괜찮다는 대답을 전했다. 이내 내가 불편해하는 걸 눈치챘는지 제이가 재혁에게 질문을 던지며 이목을 끌어준 덕에 조금은 편하게 밥을 먹을 수 있었다.
식당에서 사 먹는 것보다 맛있다곤 할 순 없지만 단순한 맛이 나는 음식들은 꽤 맛있었다. 속이 부대껴서 그만 먹을까 싶다가도 요리한 당사자가 옆에 앉아 있다는 게 신경 쓰여서 결국 그릇을 다 비울 수밖에 없었지만.
그게 실수라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제이는 그 뒤로 더 많은 양의 음식을 들고 왔고, 남길 때마다 무슨 문제가 있는지 집요하게 물어왔다. 그저 무식한 양 때문에 다 먹지 못했다는 사실을 제이에게 납득시키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
“잘 지내셨어요?”
재혁이 이렇게까지 친근하게 인사를 건네는 모습을 본 적이라곤 없었다. 제 부모에게도 깍듯한 인사를 하던 그는 앞에 서 있는 남자와 격식 없는 포옹을 나누며 반가움을 표했고 편해진 복장만큼 분위기도 유했다.
“그럼, 네가 없으니까 훨씬 편하게 잘 지냈지.”
“농담이라도 좀 서운하네요.”
정원이라도 가꾸고 온 건지 목장갑을 벗어 드는 중년의 남자에게선, 머리부터 발끝까지 힘을 주고 있던 그의 가족들과 달리 편안함이 느껴졌다. 옷에는 흙과 잘려나간 풀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고, 신발 역시 온통 흙투성이였다.
그렇다고 해서 만만하게 볼 대상은 아니었다. 남자에게서 은연중에 퍼지는 기운이 이곳을 잔뜩 감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남자는 재혁의 아버지와 닮은 차원을 넘어 똑같이 생긴 수준이었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남자가 재혁의 백부라는 건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자식, 말하는 거 봐라, 서운하다니. 석 달…… 아니, 넉 달 만인가. 연락도 안 하고, 내가 더 서운하지.”
재혁을 나무라던 그는 제이와도 막역한 사이인지 친근하게 안부를 주고받았고, 곧이어 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반가워요. 많이 컸네.”
“예?”
멍청한 되물음과 함께 그가 내미는 손을 잡았다. 거친 악수는 반가움의 표시였지 적대적인 느낌은 아니었다. 나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던 남자는 빙그레 웃더니 곧 재혁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어제 가족 모임이 있었다며. 나도 갈 걸 그랬나.”
“마음에도 없는 소리는. 휴는 보셨어요?”
재혁의 말에 호탕한 웃음을 터트린 남자가 간신히 웃음을 멈추고 되물었다.
“휴?”
“휘오네 새로 태어난 아이요.”
“아, 소민이가 임신했다는 얘기 들은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낳았나 보네. 한번 가보긴 해야지. 날 반길지는 모르겠다만.”
“아마 정문을 통과하기도 전에 막히겠죠.”
“그렇게 말할 거면 봤냐고 뭐 하러 물어봤대.”
“예의상이죠. 예의.”
“네가 나한테 예의라니, 그냥 개나 주는 게 어떻겠냐.”
두 남자는 서로 치를 떨면서도 친근하게 대화를 나눴다. 차갑기 짝이 없던 본가 저택과 달리 소박한 집은 재혁이 사는 목조 주택과 다를 바 없는 크기였다.
다른 것이 있다면 산속에 있지 않다는 것과 정성스레 손질된 정원이 있다는 것이었다. 굳이 무슨 향이라고 정의 내릴 수 없는 압도감에는 식물도 한몫 거들고 있는 게 분명했다.
주택은 그간 들렀던 집들과 달리 후덥지근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열기를 담고 있었다. 재혁의 백부는 들어오자마자 창문을 열며 의자에 앉을 것을 권유했고, 원목으로 만든 탁자와 검은색 가죽 소파가 신기하게도 동떨어지지 않고 어우러져 있었다.
“홍차? 내놓을 게 없군요. 보다시피 먹을 수 있는 거라곤 풀밖에 없고.”
“아, 아무거나 괜찮습니다.”
앉기를 거부하고 고양이 뒤를 쫓는 제이나 주방으로 향하는 집주인, 그리고 자기가 하겠다며 따라가는 재혁을 보며 홀로 앉아 있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하다가 의자에 앉았는데, 곧 말싸움에서 밀린 중년의 남자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다가와 앉았다.
인자한 미소를 띠며 앉은 이의 시선이 꽤 집요하고 부담스러웠다.
“화가 많은 건가.”
그는 자신의 미간을 툭툭 치며 말했다.
“아니면 자기도 모르게 끊임없이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든가. 진짜 똑같네.”
“무슨…….”
“재혁이가 잘해줘요? 내가 본 놈 중에서 제일 고집 센 놈인데. 가끔 저렇게 답이 없는 놈이 어디 있나 싶기도 하고. 말 안 들으면 나한테 연락해요. 한 방에 양으로 만드는 방법 알려줄 수 있거든. 그냥 온 김에 알려줄까?”
남자는 주방에서 날아오는 숟가락을 보지도 않고 낚아채더니, 이 정도는 우습다는 듯 콧등을 찡긋거리며 탁자 위에 조용히 내려놓았다.
북슬북슬한 흰 털에 덮여 구슬프게 울어대는 재혁을 상상하니 내가 다 괴로워지는 느낌이었다.
“괜찮습니다. 별로 양으로 만들고 싶은 생각은 없어서.”
차를 우려내기 위해 물 끓이는 소리도, 유리에 부딪쳐 달그락거리는 얼음 소리도 죄다 익숙하지 않은 생활 소음이었다.
뱀파이어의 집이라면 주방이 지하에 처박혀 있거나 아예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이곳은 마치 인간이 사는 집처럼 탁 트인 거실 바로 옆에 커다란 주방이 자리 잡고 있었다. 눈앞의 이 남자는 고작 차를 끓여 마시기 위해 저리 거대한 주방을 가진 걸까.
“궁금해요?”
“예?”
“진짜, 신경을 안 쓰면 얼굴에 다 드러나는 스타일인가 보네. 주방이 왜 저렇게 거대한가 생각하는 거 아니었나. 그냥 저놈을 보고 있던 거라면 할 말이 없고.”
묘하게 호감형이면서도 호감이 안 가는 상대였다.
“……같이 사시는 분이 있으십니까?”
은근히 사람과 같이 사는 순혈이 많다든가…….
“옛날에 같이 살았지. 지금은 혼자고.”
“아…….”
제이는 더운 공기가 답답한지 셔츠를 잡고 펄럭거렸고, 남자는 그런 제이를 보곤 열어놓은 창문을 닫았다. 나는 에어컨이 켜지는 소리가 끝나기 무섭게 그에게 물었다.
“절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음?”
“많이 컸다고 하시길래…… 언제 봤나 싶어서요.”
“아, 자네 아버지랑 좀 연이 있어서.”
망설임도 없이 나온 대답은 나를 멍하게 만들었다. 장식품은 아니었을까 싶었던 에어컨은 꽤 성능이 좋은지 금방 공기를 식혔다.
재혁이 얼음을 띄운 차와 물을 가져오자, 어색하게 흐르던 공기가 깨졌다.
“몰랐나 보군. 그래서 같이 온 건가 했더니.”
뱀파이어를 연구했던 아버지의 직업을 생각하면 마냥 허황된 소리는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지금 이곳에 있다는 사실보다, 지금 오가는 말들이 더 현실적인 듯했다.
“하긴, 알고 있다면 그게 더 소름 끼치긴 하겠네. 부모님 직장 동료까지 안다는 건 이상한 일이지. 저기 있는 놈도 아마 몰랐을 거고. 나중에 추궁해도 나오는 거 없으니까 물어볼 필요도 없다고 미리 알려주는 거지, 뭐.”
순간 번쩍인 그의 눈동자는 단숨에 들이켠 얼음물과 함께 사라졌다.
“오밤중에 급하게 불렀더니 웬 애를 안고 뛰어오더군. 한…… 요만했나. 아빠한테 딱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난리였지. 품에 안겨 있다가 잠들어버리길래 편하게 누워서 자라고 내려놓으면 깨고, 또 내려놓으려고 하면 일어나서 울어버리고. 덕분에 그날 백겸이 꽤 고생 좀 했지.”
“오밤중에 불러내신 게 더 고생시키는 일이 아니었나 싶네요.”
날이 선 나의 말도 그는 부드럽게 받아넘겼다.
“흠…… 그렇긴 하네. 맞는 말이라서 반박을 못 하겠군. 아, 전재혁. 오후에 거기 좀 갔다 와라. 내가 갔다 오긴 좀 그래서.”
“나이는 못 속이죠, 역시.”
“그래. 이제 늙어 빠져서 그래. 오늘따라 더 팔팔해 보이는 네가 좀 갔다 와. 아, 손님이 어디 가는지 궁금해 보이는 눈치네.”
“별로요.”
“집안일이라 좀 그런데.”
일부러 궁금해하라고 나를 찔러대는 그의 백부는 어딘가 장난꾸러기 같아 보이기까지 했다. 들고 있는 유리잔에 맺힌 물방울이 손을 타고 흘러내렸다.
잠시 들은 남자의 짧은 군 생활은 정말 별거 없는 반복적인 시간이었다. 지루하고 재미없고 무의미한…… 나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지겹도록 정신없고 피로한 나날들을 살고 있는데 말이다.
고양이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간 제이, 언제 들어올지 모르니 적당할 때 돌아가서 쉬라는 재혁, 그리고 파헤쳐놓은 땅은 마무리를 짓고 와야겠다는 남자 덕분에 나는 거실에 덩그러니 혼자 앉아 있는 신세가 되었다.
새끼손톱만큼 작아져버린 얼음을 입에 털어 넣고 와그작거렸다.
더러운 정도는 아니었지만 사방에 물건들이 내키는 대로 널브러져 있었다. 지금은 주방을 쓰지 않는 게 사실인지 밖에 나와 있는 건 주전자 하나가 다였다. 커피포트라는 게 있건만 꽤 아날로그적이구나 싶었다.
거실과 방으로 보이는 문을 잇는 짧은 복도의 끝엔 이름 모를 흰 꽃 그림이 걸려 있었다. 바로 밑에 있는 탁상엔 낱장의 종이들과 액자가 놓여 있었다.
자유분방한 종이 뭉치에 가려진 액자 안에는 우리의 나이였을 시절의 남자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활짝 웃는 남자의 어깨에 손 하나가 얹혀 있었다. 종이 뭉치를 밀어내기 위해 손을 뻗는 순간 들리는 목소리에 실행으로 옮기진 못했다.
“어디까지 구경을 하나 싶었는데 조금 많이 가는 것 같기도 하고.”
딱딱하게 행동하던 이들이 풀어진 모습을 보였다고 함께 경계를 풀었던 게 문제가 됐던 걸까.
“……친하셨습니까?”
“보다시피 내가 집안이랑은 등을 진 지 조금 돼서…… 재혁이도 사춘기 행세를 하다 보니 나를 좀 많이 따랐지. 거의 얹혀살다가 끌려간 적도 있고, 난리 피우면 가끔 몰래 빠져나와서 숨어 있기도 하고. 내가 여기까지 오는 데 한몫했네. 억울하기도 하…….”
“아뇨.”
단호한 나의 말에 남자는 바로 반응을 보였다.
“아. 일 같이 한 게 적어도 10년은 넘으니. 근데 자네 아빠가 무뚝뚝하기 그지없는 사람이었던 터라…….”
“그날도 같이 있으셨습니까.”
“그날?”
되묻는 것과 다르게 움찔거리는 입꼬리를 봤다. 굳이 알려주지 않아도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다는 거겠지.
남자는 목을 긁적였다. 막상 질문하고 나니 답을 듣고 싶지 않았다. 알고 싶지 않은 것까지 다 알게 될 것만 같아서.
“됐습니…….”
“같이 있었지. 끝을 보진 못했어도. 사고라는 게 예상치 못한 순간에 일어나는 거기도 하고…… 그래도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덕분에 수많은 사람이 살 수 있었다는 거야. 자네도 마찬가지고. 사실 한 번 찾아갈까 했었는데…….”
“누굴요.”
남자는 턱 끝으로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괜히 나랑 엮였다간 인생만 더 꼬일 거 아니까 그냥 뒀지만. 이렇게 다시 만날 줄 알았으면 한번 보러 갈 걸 그랬나 싶기도 하고.”
“표정에 다 드러나는 거, 저만 그런 건 아닌 것 같네요.”
“원래 내 약점이 남한테서 보이면 더 눈에 띄고 그러는 법이잖나. 방금은 진심이었는데, 그렇게 안 느껴졌으면 유감이고.”
***
“언제부터 같이 지냈어요?”
“제가 성인이 됐을 때니까, 15년 전입니다.”
“어떻게…….”
“이곳에서 왜 일하게 됐는지가 궁금하십니까. 특별할 것 있겠습니까. 돈 때문이죠. 꽤 많이 주거든요, 여기.”
제이는 꽤 솔직하고 마음껏 정보를 퍼주는 스타일이었다. 제이는 고양이와 권투 놀이를 할 때와 다르게 온 신경을 곤두세운 채 소파에 앉아 있었고, 편하게 앉아 있으라는 말에 겨우 빳빳하게 세웠던 허리를 조금 구부릴 뿐이었다.
거실 한복판에 서서 그런 모습을 보고 있으니 제이는 손을 뻗어 계단을 가리켰고, 나는 나를 위해서가 아닌 그의 편안함을 위해 계단을 올라와 침대에 몸을 뉘었다.
몇 밤 지냈다고 침대에도 익숙해졌다. 남는 건 시간뿐이었다. 모두의 바람대로 휴식 좀 취해보자는 생각에서 넓디넓은 욕조에 물을 채우기 시작했다.
“어우, 더럽게 넓네, 진짜…….”
콸콸 쏟아지는 것과 별개로 물은 참 더디게 차올랐다. 욕조 앞에 멍하니 서서 조금씩 높아지는 수위를 지켜봤다.
사실은 관상용이라든가…… 집이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면 내 책임이려나.
기온과 상관없이 차가운 타일을 밟고 천천히 몸을 담갔다. 뜨거운 물과 미적지근한 공기는 나의 기를 빨아먹으며 묘한 나른함을 줬다.
아, 그냥 돌아가고 싶…….
“팀장님?”
[크윽. ……금 통화 가능해? 백곰은 왜 전화를 안 받아?]
“무슨 일 생겼습니까?”
한참 동안 억 소리만 내던 팀장님은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소리로 그만하라며 소리를 질렀고, 곧이어 날카로운 목소리의 ‘당신은 좀 조용히 해!’까지 들어버리고 말았다.
[진짜 내 인생에 셋째란 없다.]
“벌써 퇴근하신 겁니까.”
[어린이집에서 데리고 오느라 잠깐 숙소에 좀 들어왔는데 승아가 전화하고 싶다고 그래서. 승아가.]
……그럼 왜 그놈한테 먼저 전화를 걸었던 건데?
[영상 통화로 다시 걸 테니까 받아!]
그새 뛰어 올라온 제이에게 열심히 손사래를 치고 곧이어 울리는 전화를 받았다. 놓칠 뻔한 전화기를 간신히 붙잡고, 혹여나 송출 사고가 일어나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꼬맹이 셋에 눌려 있는 팀장님은 간신히 화면에 눈만 걸려 있었다.
“웬 영상 통…….”
[아저씨! 언제 와요?]
“……3일 뒤에?”
화면에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 승아의 손엔 색종이와 반짝이 풀이 잔뜩 묻은 엽서가 들려 있었다. 묘하게 쓰레기 같기도 하고 화려한 종이 같기도 한 엽서를 보며 칭찬을 해줘야 하나 고민하는데 아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거! 아저씨 울어서 선물 못 받잖아요! 제가 아저씨 착한 사람이니까 꼭 선물 챙겨달라고 편지 썼어요.]
“아니, 그런 건 필요 없…….”
[너, 그렇게 성의 무시하고 그러면 안 된……!]
잔뜩 성난 미간 주름으로 이야기하던 팀장님은 결국 아이들에게 눌려 화면에서 아예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저희가 승아 잘 보고 있어요! 걱정하지 말고 있다가 오세요!]
[윽, 그만 좀 눌러봐! 이놈들아!]
팀장님은 인상을 잔뜩 구기고 있었지만, 아이들은 겁을 먹긴커녕 깔깔거릴 뿐이었다. 팀장님의 모습은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지쳐 보였다. 다행히 아이들은 간식 먹자는 소리에 금세 우당탕 뛰어갔다. 화면 속일 뿐이었지만 내가 다 지치는 기분이었다.
“활기차고 보기 좋습니다. 셋째 낳으셔야 할 것 같은데요.”
[……그랬다간 죽을지도 모른단 말이지. 넌 가서 휴양 좀 즐기고 오라고 보내놨는데 왜 데쳐놓은 시금치가 됐어.]
“휴양이라니, 요양이겠죠. 반신욕 중입니다.”
[요양?]
“됐습니다. 요양이든 휴양이든 다 안 어울리는 말이네요.”
[괜히 간 것 같아? 실보다 득이 훨씬 컸을 것 같은데.]
그랬나.
이마를 타고 흐르는 땀을 닦아냈다. 화면에 조그맣게 뜬 내 얼굴은 열심히 열을 분출하고 있었다.
습기에 휴대전화를 잡고 있기 힘들어 욕조 옆에 내려놓았다. 조용한 듯 요란했던 날들을 돌아보면 자꾸 그놈 얼굴만 생각나는…….
“에?”
[뭐야, 그 멍청한 소린.]
못 들은 척 넘어가려고 했건만 덥석 물고 캐묻는 팀장님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가식적인 웃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휴대전화를 들어 똑같은 표정을 지어주곤 전화를 끊어버렸다.
할 말이 있으면 전화로 걸면 될 것을 굳이 다시 영상 통화로 걸어왔다.
[반응 봐라?]
“쓸데없는 소리 하면 차단할 겁니다.”
[그럼 긴급 번호로 하면 되고.]
“은근히 답 없으시네요.”
[답 없는 애들 끌고 가려면 나도 동기화될 필요가 있긴 하지.]
“마인드가 대단하시네요. 아주 멋있으십니다. 반하겠어요.”
[그럼, 내 인생을 다 바쳐서 살고 있는데 이 정도는 해줘야지. 네 얼굴 터져버릴 것 같으니까 잡담은 그만하고. 백곰은 어디 갔어.]
“늙으면 가기 힘든 곳에요.”
[뭐?]
“여기 있는 뱀파이어들은 말을 다 이런 식으로 하던데요. 말 똑바로 하면 병 걸리나 봐요.”
[뭐라는 거야.]
“그놈 큰아버지한테서 부탁받고 나갔습니다. 간 지 좀 됐으니 곧 돌아오겠죠.”
[……일조?]
“알고 계셨습니까.”
그놈이 하프인 걸 알았느냐는 질문, 그리고 여기에 나의 아버지와 관련된 이가 있다는 걸 알았느냐는 질문에 그는 부정의 대답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이쯤 되면 내 최고의 적은 패를 다 알고도 내주지 않는 팀장님이 아닐까 싶었다.
[별 뜻이 있다기보단 직접 보고 알아채라는 의미였지. 나름대로 비밀이라면 비밀인 건데, 내가 말해버리면 그 녀석도 껄끄러울 것 아니겠어. 너로서는 억울하게 느낄지도 모르겠지만 나름대로 공평하게 대하고 있다고. 그래서 네 일도 입 밖으로 내지 않잖나.]
내 일?
묘하게 굳어진 말투가 된 팀장님에게 물었다.
“……저와 관련된 놈도 여기 있다는 거, 아셨습니까?”
보기 드물게 뜸을 들이던 팀장님이 입을 열었다.
[그때, 현장에 있었다고 하면…….]
그러니까 왜.
홧김에 끊은 휴대전화가 울리는 진동에 본능적으로 눈을 돌렸건만 싱겁기 짝이 없는 팀장님의 문자였다.
‘반신욕 너무 오래 하는 거 안 좋다. 적당히 하고 나가. 그리고 승아 엽서는…….’
넓은 만큼 열기도 금방 빠져나가는지 공기와 물의 온도가 곧 비슷해져갔다. 사방이 막힌 곳에서 어디로 들어왔는지 모를 벌레가 전구 주변을 날았다.
빙글빙글 돌며 전투적으로 전구에 부딪치는 새까만 벌레는 열정적이었다. 빛을 향해 들어가지도 못하고 박아대는 꼴을 보다가 진동하는 휴대전화를 집어 던졌다.
“읏……!”
날카로운 소리도 잠깐이었고, 파편들과 휴대전화는 타일 바닥으로 속절없이 떨어졌다. 빛을 잃은 전구에 볼일 없어진 벌레는 새로운 목표를 향해 날아갔다. 머리끝까지 물속에 잠긴 채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내가 예상한 것보다 더 복잡한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냥 넘어가고 모른 척 따라줘야 하는 건지, 아니면 좀 더 비싸게 굴었어야 하는 건지. 뭐라도 된 것처럼 살았지만, 결국 무식하게 고생하는 파리 새끼 따위에게 동질감을 가지는……!
“푸하!”
몸을 끌어올리는 힘에 소리를 듣고 온 제이인가 했더니, 다름 아닌 재혁이었다. 그는 나를 물 밖으로 끌어내곤 수건을 덮어 머리를 탈탈 털어주며 말했다.
“이제 이해하는 일을 포기했다.”
뜨거운 물로 몸을 달군 탓인지 흔들리는 머리에 속이 울렁거렸다. 막무가내로 머리의 물기를 털어주는 놈을 밀쳤더니, 허무하다 싶을 정도로 맥없이 넘어갔다.
손쉽게 넘어간 놈은 잠깐 얼굴을 찡그릴 뿐이었고, 나는 그런 녀석을 쿠션 삼아 몸 위에 올라타 있었다.
“……이해? 넌 평생 모를 거야.”
말을 끝내기 전에 머리카락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그의 얼굴을 타고 굴렀다.
“이익을 위해 옆에 두는 게 느껴지는데도 그저 갈 곳이 없어서 신뢰했어. 이제는 좀 괜찮겠구나 싶으면 다들 떠나가버렸고. 누구라도 좀 잡아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모두가 등졌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세상은 원래 이런 거라고 나를 납득시키는 일이었어. 사는 데 이유를 만들고,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 적을 만들어야 했어.”
힘들여 소리를 지르는 일은 하지 않았다. 턱턱 막히는 말들을 꺼내는 것조차 버거웠기 때문이었다. 모든 건 그를 위해서가 아닌, 순전히 나를 위한 일이었다.
“주어진 일에 반항하는 게 그렇게 힘들었어? 신념 하나 지키기 위해서 발악하는 게 그렇게 괴로웠다고 말하고 싶어? 매번 똑같은 좌절을 겪으면서 나는, 나 스스로에게 쏟아붓는 혐오를 지우기 위해 발버둥 쳐야 했어. 그래서 그렇게 외면하며 살아왔는데…… 고작 그딴 이유로 인제 와서 무슨 바람이 불어서 내 편이 되어주겠다고 지껄이는 건지. 넌 그 뜻조차 몰라.”
후련해질 줄 알았지만, 마음은 점점 답답해져만 갔다.
“그게 얼마나 무거운 말인지 몰라.”
“그래.”
“……그게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모른다고. 날 약해 빠지게 만들지 마. 그렇게 스스로를 생각하는 사람으로 만들지 마.”
그와 전혀 다른 삶이, 어쩌면 닮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대로 되는 건 하나도 없으니까.
오랫동안 차단되었던 산소를 갈구하듯 그의 입술을 덮쳤다. 녀석은 상체를 일으키며 나의 행동에 응하면서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손을 집어넣으며 도망가지 못하게 막았다. 그와 나누는 짙은 키스에 달아오른 몸은 식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넓은 욕실에 낯간지러운 소리가 울렸다. 발꿈치에서 느껴지는 화끈거림에 움찔거리니 그도 눈치를 채곤 내 다리를 잡아챘다.
깨진 전구 파편에 스쳐 생긴 작은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는 바닥에 고인 물들까지 붉은색으로 물들였다. 그는 말릴 새도 없이 발에 입을 대며 상처를 핥았다. 갈증에 익숙할 그가 저 작은 상처에 눈이 돌아갔다고 할 순 없겠지.
“으으…… 그만해.”
간질거리는 촉감에 발을 빼려고 하자 옆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야, 관사를 바꿔달라고 이렇게 인증을 한다고?]
“눈치 없으시네.”
재혁은 전화기 너머의 사람에게 대답했다.
[허, 방귀 뀐 놈이 성낸다더니 이건…….]
휴대전화를 집어 욕조로 내던졌다. 물속에 잠수당한 휴대전화는 꼬르륵거리며 말을 다 전하지 못하고 사라졌다.
……지금 무슨 일이.
“적어도 하나는 손쉽게 해결했네.”
“뭐?”
숙소? 라며 나를 일으켜 세운 그의 명치를 강타했다. 주먹이 꽤 잘 들어갔는지 주저앉아 기침을 토하는 놈을 보니 속이 다 시원했다. 기쁨도 잠시, 팀장님이 대체 어디부터 어디까지 들은 건지. 아니, 영상 통화여서 본 건 아니었을지…….
“느아!! 진짜! 저런 미친 새끼를 봤……!”
머리를 쥐어뜯으며 문을 벌컥 열었는데 이번엔 진짜 제이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여전히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지만, 그의 시선이 밑으로 내려가고 있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아직 다 죽지 못하고 반쯤 고개를 세우고 움찔대는 내…….
생각은 그만두고 문을 닫아버렸다. 안 그래도 전구를 깨먹어 침침한 화장실이 더 그늘졌다. 원인은 굳이 찾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문에 기대어 있는 그의 팔과 내 목에 닿은 그의 얼굴 때문에.
“진짜 아팠다, 이번엔.”
“그전엔 다 안 아팠다는 걸로 들린다.”
“설마.”
움직이는 그의 입술이 계속 목을 간질이고 손으로는 밑을 주물럭거리는 바람에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앞으로 가면 손으로 막히고 뒤로 가면 이미 묵직해진 그의 것이 닿았다.
“팀, 장님한테…….”
“카메라 망가졌었어. 봤을까 걱정 안 해도 돼.”
“아니, 전화해보라고. 할 말 있어 보이시던데.”
“진심이야?”
“……제이가 들어.”
말 끝나기 무섭게, 문밖에서 퇴근하겠다는 우렁찬 목소리가 울렸다. 애매하게 젖은 옷이 몸에 스치는 기분은 썩 좋지 않았다. 끈덕지게 붙어오는 놈을 마주하곤 셔츠를 벗겼다. 아직은 찬 기운을 머금은 그의 맨살에 닭살이 돋았다. 발소리가 모두 사라지자 그는 문을 열었다.
습한 공기에서 벗어나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숲속에 들어가 몸과 마음을 맑게 한다더니 마냥 허무맹랑한 말은 아닌가 보다. 은은히 퍼지는 달달한 향에 허브 향이 섞이면 얼마나 위험한 향이 되는지 맡아보지 않는다면 아무도 모르겠지.
뒤로 밀리며 박은 뒤꿈치 상처에 내가 움찔대자, 혀에 닿은 자신의 송곳니 때문인 줄 알고 떨어지려는 녀석의 얼굴을 잡았다. 따뜻함과 차가움이 공존하는 입술이 좋았다.
“……오버하지 마. 이미 물어뜯을 거 다 뜯어놓고.”
과한 조심스러움은 필요 없었다. 소름 끼치는 감각과 오르는 심박 수는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어이가 없지만 며칠간 맛본 달콤쌉쌀한 시간에, 그와의 불장난에 중독되어버렸다고 인정할 수밖에.
그는 버릇인지 취향인지, 매번 첫 잠자리를 가지는 것처럼 정성스럽게 온몸에 키스를 퍼부었다.
굳이? 거기까지? 싶을 만큼.
겨드랑이, 배꼽, 발까지 낯 뜨거우면서도 간질거리는 게 왜 이리 유별나게 구는 건가 싶어 그만두게 하고 싶어도, 더럽게 잘생긴 얼굴로 색기에 잠겨 집요하게 쫓는 걸 보는 게 얼마나 꼴리는 일인지. 고의인지 우연이지 허벅지에 간간이 그의 것이 스칠 때마다 빨리 박아줬으면 좋겠다…… 는 충동이 일었다.
“읏, 짜증 나…….”
“갑자기?”
분위기를 깽판 치는 말에 의문을 표하며 고개를 살짝 든 모습에 뜬금없이 부끄러워졌다면, 그의 태도에 내가 애송이가 됐다고 생각할 수밖에. 확인해볼 필요도 없이 내 얼굴은 익어 있을 게 뻔했다.
“……쳐다보지 좀 마.”
“시작도 안 했는데 새빨갛게 익어서 움찔대고 있…….”
굳이 그런 거 직접 얘기해주지 않아도 안다고.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고!
그의 허리에 다리를 둘렀다. 그의 얼굴이 가까워졌고, 침대는 잠깐이나마 요동치던 일을 멈추었다. 그의 말을 끊으려고 한 행동이었지만 왜 더 미치겠는지. 오히려 나의 행동은 시작을 알리는 일이었다.
얼굴에 흐르는 물방울을 닦아내기 위해 손을 들다가 그에게 막혔다. 이마에 닿은 입술이 물방울이 흘러내린 자국을 따라 도장을 찍으며 내려왔다. 눈가에 닿은 간지러운 느낌에 몸서리치니 그의 콧김이 얼굴에 닿았다.
“……웃어?”
그는 대답 대신 조용히 하라는 듯 입을 맞췄다. 급하지도 않고 장난스럽지도 않은, 부드러운 움직임이었다. 그의 곧은 치열은 물론이고 깨끗하게 떨어지는 입술 선, 끈적이게 달라붙는 혀까지 하나도 놓치지 않고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귓가를 살살 쓸어대던 그의 손이 목선과 가슴, 옆구리를 타고 내려갔다. 하나같이 예민한 곳을 소름 끼치게 훑었다.
“……읏.”
새는 소리를 참기 위해 다물린 입에 그는 나의 고개를 젖혀 입술을 벌리게 했다. 그와 동시에 내려온 손이 나의 것을 부드럽게 매만지는 덕에, 막힌 숨과 함께 터진 앓는 소리에 내가 다 부끄러울 정도였다. 적응하기 힘든 닭살 돋는 섹스는 볼을 달구고 몸을 달궜다.
발가벗은 채 있는 나에 비해 착실히 그의 허리에 걸려 있던 그의 옷을 벗겼다. 빳빳하게 서 있던 놈의 성기가 브리프 밑으로 느껴졌다. 천 한 장 사이로 맞닿은 느낌은 심장을 뛰게 만들기 충분했다. 천천히 움직이는 그의 몸에 호흡마저 뜨거워졌다.
그는 거치적거리는 속옷을 벗고서 나의 성기를 손으로 감싸곤 귀두를 자극했다. 그의 엄지손가락에 쓸릴 때마다 나오는 쿠퍼액에 젖어 질척거렸다.
“흠…….”
그렇게 안 쓰던 그의 능력에 딸려온 건 다름 아닌 젤이었다. 통에 붙은 쪽지엔 ‘J’라는 글씨와 함께 웃는 이모티콘이 그려져 있었다.
“……허.”
짧은 탄식을 내뱉는 것도 잠시, 엉덩이에 닿는 차가운 촉감에 절로 눈이 찌푸려졌다. 그는 자신의 것마저 치덕치덕 바른 뒤 쓸었다. 지난번만큼은 아니더라도 여전히 뻑뻑한 밑은 조금씩 그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차이가 심하네. 덤빌 때랑 안 덤빌 때랑.”
“으…… 뭐라는 거야.”
조금 눌린 그의 목소리에 숨을 내뱉는 순간, 끝에 걸쳐 있던 그의 것이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꽉 찬 내부에 묘한 안정감이 느껴졌다.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한 그는 간간이 숨을 쉬거나 입술을 깨물지 말라는 의미로 입술을 비벼댔고, 거친 숨은 그의 입술을 쓸며 나갔다.
“으응…….”
내 입에서 흘러나온 소리에 내가 놀라 눈을 부릅떴지만 이상한 부분에서 학습 능력이 좋은 놈은 순간을 포착해 반복적인 피스톤질을 해댔다. 다리가 저릿해지면서 아랫배부터 머리까지 타고 올라오는 뻐근한 감각에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흐읏…… 잠……!”
나의 말에 움직임을 멈춘 녀석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하아…….”
아직 질척거리고 있는 그의 것을 손으로 쓸며 그대로 그의 허벅지에 주저앉아버렸다. 그의 얼굴을 보기가 낯간지러워 기껏 등을 보이고 앉았건만, 꼭 끌어안는 놈에게 밀착하는 자세가 만들어졌고, 등엔 그의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배꼽을 만지작거리다가 앞을 잡는 그의 손에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양쪽에서 오는 자극에 몸이 움츠러들며 부들거렸다.
“집에 아무도 없어.”
“읏…… 그, 그래서 뭐.”
강하게 쥐고 있던 앞을 달래듯 가볍게 쥐고 흔드는 놈을 제지하기 위해 그의 손목을 덥석 잡았지만, 씨알도 안 먹혔다.
“소리, 안 참아도 된다고. 매번 입술 깨물잖아. 피 냄새 때문에 자제하기 힘들어. 안 그래도 발 상처 때문에 힘든데.”
“……읏, 너무 뻔뻔해졌다고 생각하지 않아?”
“뭐, 이미 뒤로 가긴 글렀으니까.”
“흐으, 으…….”
그가 참지 말라고 해서 말을 잘 들은 게 아니라, 비집고 나오는 신음을 참을 수가 없는 지경이 된 거였다. 얼마나 젤을 들이부어놨는지 엉덩이를 타고 흐른 젤은 허벅지를 적시고 움직일 때마다 찰박찰박 소름 돋는 마찰음을 냈다.
혼자 온몸을 조이고 부들거리며 안달이 나는 게, 괜히 약이 올랐다. 엉덩이를 그에게 딱 붙인 채 허리를 움직였다. 박자에 맞춰 타격음으로 들리던 소리가 끈적거리게 들릴 만큼, 느릿하고 부드럽게 움직였다.
“아으…… 응…….”
……역효과였지만.
지금까지는 쾌감이 정신없이 몰아쳤다면, 이제는 움직임 하나하나를 느낄 수 있게 되었다. 나도 함께 쾌락에 젖는다는 소리였다.
다행히 마냥 나만 좋은 일은 아닌 듯했다. 나의 것을 잡고 있던 그의 손이 나의 허리로 향했고, 그의 다리도 점점 벌어지고 있었다. 의지보다는 본능적으로 움직이며 더, 더 그를 쫓았다. 몸 깊숙이 남은 버릇이 튀어나와 빨리 상황을 끝내야 한다며 다그친 걸지도 모르겠다.
“하…….”
낮게 터지는 그의 숨소리에 움직임을 멈추자, 그는 몸을 일으켜 나를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그의 힘을 버티지 못하고 밀려나 어느새 벽에 붙어버렸고, 그의 손에 겨우 몸을 세우고 있는 신세가 됐다.
브레이크가 고장이 난 건지, 이젠 이까지 세워 어깨를 긁는 그의 행동에 심장은 점점 빨라졌다.
“아……! 하윽!”
몰려오는 사정감에 그의 허벅지를 밀어봤지만, 상대는 그리 만만하게 덤빌 상태가 아니었다.
“참지 말고 그냥 싸. 한 번 싸고 나면 더 잘 느끼잖아.”
아무렇지 않게 낯간지러운 말을 내뱉는 놈과 괜한 씨름을 그만뒀다. 그리고 그냥 그에게 몸을 맡겼다.
“으으……!”
닦달하듯 빠르게 움직이는 그의 손에 그대로 저질러버렸다. 며칠 새 얼마나 뺐는지 정액은 이제 투명해져 있었다. 그는 질척이는 손 그대로 다시 나의 것을 주물렀고, 절정에 올랐던 몸이 가라앉기 전에 다시 달아올랐다.
그는 움켜쥔 나의 주먹에 손가락을 끼워 넣으며 깍지를 꼈고, 그런 그의 행동에 낯부끄러워 고개를 푹 숙였지만, 이내 몸은 그를 향해 돌아가서 아무 쓸모도 없는 짓이 되었다.
“하아…….”
짧은 시간 동안 알게 모르게 그에게 익숙해지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나는 그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고 그는 그런 반응을 보며 언제나 나를 통제하려 했다. 오늘이라고 다를까.
“으…….”
지쳐버렸다. 매번 나 혼자 뻗어버린 것과 다르게 녀석도 피로해졌는지 옆에 누운 채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같은 공간에서 숨 쉬는 것도 싫어서 욕하며 싸운 게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얼굴을 붉히고 몸을 섞고 그것도 모자라 같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고 누워 있는 상황이라니, 정말 인생은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는 일이었다.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려고 해도 왜 이렇게 만사가 귀찮은 건지. 조금씩 나태해지던 몸은 게으름의 극치를 달리고 있었다. 근육이 빠진 것 같아서 운동이라도 하러 일어나야 하나 생각하다가, 이런 일조차 바로 하지 않고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에 소름이 돋았다.
이미 더럽혀진 이불을 끌어 배를 벅벅 닦자, 미간을 찡그리던 녀석도 어차피 빨아야 할 걸 알았는지 똑같은 행동을 하며 정적을 깼다.
“너는 어디 가서 휴전하자고 하지 않는 게 좋겠다.”
“……뭐?”
괜히 뜨끔해서 모른 척 되묻자, 그는 이불을 바닥에 내던지며 말했다.
“싸울 때에는 조금만 건드려도 총 쏘려고 했던 놈이 이제 조금만 열받으…….”
“나한테 다 뒤집어씌우지 마라.”
“열받으니까 손가락을 빨다가 펠라를 하질 않나, 시도 때도 없이 입술로 달려들……!”
내가 베개를 들고 풀스윙을 날리자 그의 입은 그 폭력을 이기지 못하고 어버버 하며 더는 말을 내뱉지 못했다.
“넌 캐릭터를 정했으면 일관성 있게 가라고! 그냥 싸가지 없는 과묵한 놈으로 있으라고! 그리고 먼저 들이댄 건 너잖아!”
“좀……!”
재혁은 날 잡을 생각도 없이 그저 휘두르는 베개를 막고만 있었다. 힘쓰기도 귀찮았는지, 그 모습이 더 얄미워 보였다.
“그러니까 왜 진로를 바꿔서 그렇게 징그럽게 굴어, 이 미친 새끼야! 그냥 차라리 냄새 맡기도 싫다고 쌍욕이나 하던 때로 돌아가라고! 너 때문에 나까지 이상해지고 있잖아!”
결국은 방 안 가득히 새하얀 깃털이 흩날리는 것으로 끝을 보았다.
머리카락에 붙은 깃털을 털어내며 상체를 일으킨 녀석이 아직 거칠게 내뱉고 있는 나의 숨결을 함부로 채갔다. 그런 일에 진정이 됐다면 좋아해야 할까, 싫어해야 할까.
발로 밀어내자 녀석은 침대 밖으로 튕겨 나가더니, 바닥에 날린 깃털을 몇 개 집어 들며 일어났다.
“이걸 누가 다 치워. 너 치우는 건 엉망이잖아.”
솔솔 부는 바람이 곧 작은 소용돌이를 일으키더니 깃털이 한데 모였다. 잘 쓰지도 않던 힘을 쓰는 걸 보니 어지간히 마음에 들지 않은 듯싶었다.
“……잘해. 안 해서 그렇지.”
미련 없이 자리를 뜨는 걸 보고 어디 가냐고 물으니 같이 씻겠냐는 질문이 돌아왔다. 등부터 침대에 벌러덩 누워 곧게 뻗은 중지를 돌려줬다. 그는 엉망이 된 화장실을 치우는 건지 한참 동안 나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