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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통제할 수 없는 (2) (12/21)

11. 통제할 수 없는 (2)

문밖으로 나오자마자 서늘한 공기가 느껴졌다. 나름대로 매끈하게 흘러가고 있다고 생각한 대화 속에서 그에 대해 알게 되었던 사실들을 되새김질했다.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왜 그런 말을 했었는지. 그의 비밀이라면 비밀이라고 할 수 있던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기쁘긴커녕 불쾌함만 남았다.

그는 시계를 보며 걸었다. 숨기려면 얼마든지 숨길 수 있던 대화들과 그의 태도에, 짧다면 짧은 20분 동안 일어난 일에, 내가 어디에 와 있는지, 왜 이곳에 와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음식은 웬만하면 남기지 말고 먹고, 식사한 뒤엔 세 시간 정도는 조용히 있을 수 있을 거야.”

과연 내가 지금의 상태로 그들의 친척들까지 모두 모인 자리에서 태연하게 말을 주고받으며 앉아 있을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허물없던 사람들에 비해 본인들의 우월함을 알고 있는, 뱀파이어들 중에서도 상위에 군림하는 이들이 자신들의 정보를 내 앞에서 얼마나 드러낼지, 또 얼마나 나를 내놓아야 할지 복잡해지는 기분이었다.

휴식? 아마 죽는 날까지 내 인생에 휴식이라는 단어는 생기지 않을 것이다. 굳이 다시 묻지 않아도 될 사실이었지만 짐작이 아닌 그의 직접적인 대답이 듣고 싶어 말을 꺼냈다.

“하프?”

작은 혼잣말에도 대꾸하던 재혁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를 드러내고 과시하는 걸 좋아하는 다른 뱀파이어들과 다르게 왜 그가 힘쓰는 일을 자제하며 살았는지, 읽을 수 없던 눈빛에 무슨 의미가 담겨 있었는지 알 것 같았다.

이유가 어찌 되었고 그가 싫어했든 좋아했든, 남은 사실은 그가 아이들의 피를 먹고 자라 힘을 얻고 당당한 자세를 취하며 순혈 행세를 하고 내 앞에서 걷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고고한 척 혼자 다 하더니 애들 피 먹고 자란 놈은 여기 있었네. 그 잘난 척을 하면서 다닌 게 전부 그런 피를 먹고 얻은 힘이었고 그런 몸으로 나를 쓰레기 취급했어? 네가 그동안 해온 행동들이 있었으니 그렇게 나를 본 거였군.”

그는 내가 하는 말을 가뿐히 넘겼다.

“조은이와 같이 있는 게 불편할 것 같으면 따로…….”

“죄책감을 느끼라니. 그럼 다 해결되는 일이었군. 그냥 너희 어머니처럼 뻔뻔해지는 게 낫지 않아? 피해 본 애들은? 널 그렇게 좋아하는 애가 너도 똑같은 놈인 건 알아? 설마 이것도 팀장님이 알고 계신다고 하지 않길 바라.”

“내일은…….”

“뭐 하러 그 수많은 들러리를 부리면서 공장 같은 걸 찾고 다녀. 여기가 제일 썩었는데.”

재혁에게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는 나를 제지하려던 이들은, 그의 손짓 하나에 제자리를 찾아갔다. 태연한 척 굴고 있지만 조금은 빨라진 발걸음을 보니 그도 슬슬 감정의 동요가 오기 시작한 듯했다. 그의 느긋한 입에서 감정이 담긴 말이 쏟아지길 기다렸다.

“애초에 찾을 생각이 없는 건 아니야? 네놈이 만들어서?”

무슨 의미가 있나 싶은 일이었지만 그냥 그랬다. 약점을 잡혀 농락당하던 날들이 억울해, 나도 한 번쯤은 무기를 들어보고 싶었던 걸까.

“50가지라고 했나, 나한테서 나는 향이? 그럼 네 향을 가진 애들은 얼마나 되는데.”

다른 누구도 아닌 나는, 다섯 살짜리가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일 중에서 옳고 그름을 판단해가며 어른들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확률은 있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어쩌면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도 타고 자라난 환경에 의해 만들어진 괴물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지금 그런 것까지 이해할 필요는 없었다.

내가 그간 당해온 모욕들을 생각한다면.

“자발적이든 강제적이든 결과가 같으면 똑같아. 그래, 조금 다르게 행동하면서 나는 다르다는 걸 알리고 싶었겠지. 근데 그건 알아? 암만 다르다고 말해도……!”

녀석은 지나치려던 방문을 열고 나를 안으로 내던졌다. 갑작스럽게 암흑으로 휩싸인 공간에서 밀어붙이는 힘에 등이 벽에 강하게 부딪혔다. 작은 소리도 울리는 걸 보아 그리 좁은 공간이 아닌 듯했다. 그는 억눌린 목소리로 내 말을 되풀이했다.

“애꿎은 화살을 엉뚱한 곳으로 돌리지 마. 네가 그렇게 살았다고 모든 이들이 똑같은 경험을 갖고 살았다고 생각하는 거야? 결과가 같으면 똑같아?”

그저 상대도 똑같이 느껴보길 바랐다. 타인에 의해서 얽매인 과거로 얼마나 자신을 혐오하게 될 수 있는지. 그런 혐오로 파생된 덫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을 알면서도 벗어나지 못하고 자극을 당하는 일이 어떤 건지.

“어. 똑같아.”

“왜, 너도 그 아이들이랑 똑같은 피해자가 되고 싶어? 그게 아니면 나에게서 뭔가 약점을 찾았다고 생각해? 그럼 지금 자극하지 말고 조금 더 숨죽이고 샅샅이 뒤졌어야지.”

한껏 숨을 들이마셨다가 멈추었던 그는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지금은 너무 이르잖아. 더한 게 나올지도 모르는데. 이런 식으로 하면 내가 입을 다물게 될지 누가 알겠어.”

느려터진 시각이 빨리 어둠에 적응하길 바랐다. 앞에 있는 놈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가면을 벗고 있을 그의 얼굴이 궁금했다.

“모두 오픈할 마음이 있는 거 아니었어? 막상 하나씩 드러나니까 수치스러워?”

“하.”

“이렇게 귀찮게 다니면서 하나둘 듣는 것보단…… 지금 네 입으로 말해봐. 뭘 또 숨기고 있어서 갑자기 그렇게 죄책감을 가진 태도로 나를 대했는지 좀 들어보고 싶은데. 승아에게 잘해주는 건, 네게 또 다른 면죄부를 만들어주는 일이었어?”

내 입에서 승아까지 들먹거리며 그를 찌르게 될 줄은 몰랐다. 그는 최대한 목소리를 억누르며 말했다.

“조금이라도 우위에 서서 날 놀려보고 싶은 모양인데, 잘못 짚었어.”

커튼이 걷히고, 들이닥치는 햇빛 덕에 절로 눈이 감겼다.

“……!”

작게나마 터진 고통의 비명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난데없이 부딪친 입술에도, 어둠에 적응하고 있던 눈을 뜰 수 없었다. 과시하듯 거칠게 부딪치는 덕에 숨 쉴 타이밍을 찾지 못해 숨을 헐떡거렸다.

조심스러웠던 행동들은 온데간데없는, 일방적인 폭력이었다. 그는 그간 나를 향해 더럽다고 외치던 놈들처럼 몸을 붙여왔다.

꼼짝없이 붙잡힌 팔은 시린 바람에 할퀴어지며 들썩거릴 뿐이었다. 다리 사이를 파고든 그의 허벅지는 보란 듯이 자극을 주고 있었고, 천이 쓸리며 바스락거리는 소리 사이로 간신히 내쉬는 숨소리가 채워졌다.

그간 작은 움찔거림에도 숨겨오던 송곳니를 세워 나를 몰아붙였다. 얇은 셔츠 위로 느껴지는 그의 손이 허리의 굴곡을 따라 올라간 뒤 등을 쓸었다. 언제나 그랬듯 차차 반항을 멈춘 나의 몸은 밝아진 세상에 적응했다.

맥없이 끌려 올라간 셔츠에 그의 손이 그대로 느껴졌다. 농락하듯 움직이는 악랄한 행동에 불현듯 찾아오는 불길함이 달갑지 않았다.

“읍……!”

타액이 흥건한 입술이 자유를 찾기 무섭게 목을 울렸지만, 그의 손에 막혀 신음만 뱉을 뿐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배 위를 쓸고 지나간 손이 팽창되고 있는 중심을 짓누르고 있었고, 그는 어둠 속에서 마주했던 것처럼 정확히 나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몇 분 전까지 궁금했던 그의 얼굴은 지금, 한껏 일그러져 있었다. 거친 숨에 잠식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도발을 원했다면 최소한 네 아킬레스건은 감추고 시작을 했어야지. 입만 놀린다고 해결되기엔 이제 너무 먼 길을 왔다고 생각하지 않아?”

벽에 기댄 채, 옷매무새를 정리하는 이를 봤다. 보잘것없이 구겨진 나의 셔츠에 비해 그의 차림새는 여전히 반듯했다. 은은하게 퍼지던 국화차의 향은 사라진 지 오래였고 잠깐 사이에 긁힌 입안에서 익숙한 쇠 맛이 맴돌았다.

딱 자신이 원하는 만큼 나를 비웃고 놓아버리는 상대였다. 지금 끝을 내면 애써 만든 판을 넘겨준 것밖에 되지 않았다. 그렇게 내버려두긴 싫었다. 당한 게 얼마인데. 오늘 하루쯤 더 구른다고 나한테 무슨 타격이 있겠나.

“제 버릇 개 못 준다더니 네가 나랑 다를 게 뭐야.”

그는 나의 말에 움찔거리며 나를 봤고, 나는 그런 상대와 시선을 맞추며 재킷을 벗어 던졌다. 그리고 주름진 셔츠를 펴는 대신, 잠겨 있던 단추를 풀어갔다. 소매를 털던 녀석은 나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매번 다 안다는 듯 굴던 녀석의 얼굴에서 생각의 골이 느껴졌다. 내가 무슨 짓을 벌이는 건지, 어떻게 행동해야 자신이 흐름을 주도할 수 있을지 계산 중일 테지.

벌어진 셔츠 사이로 공기가 닿았다. 풀어헤친 벨트를 떨구곤 상대에게 다가갔다. 짤그락대는 쇳소리는 잠깐이었다. 쇄골을 간질이는 셔츠의 깃도, 버클을 풀어헤쳐 마음껏 팽창하는 아래도 제대로 햇빛을 받고 있었다.

그는 나의 셔츠 깃을 잡고서 내가 그 이상 다가가는 것을 막았고, 나는 그런 상대에게 비집고 나오는 웃음기를 숨길 필요 없이 물었다.

“왜. 벌써 싫어졌어?”

“……뭐 하는 짓이야.”

평소라면 어떻게든 얼굴을 감추고 싶었겠지만, 그림자 속으로 들어가는 대신 몸이 느끼는 그대로 그에게 드러냈다. 내가 어떤 꼴을 하고 있는지 보지 않아도 알았다. 변태 놈들 손에 내가 구겨지는 꼴은 마음껏 봤으니까. 그리고 어떻게 굴어야 그들이 더 좋아하고 내가 일그러지는지도 알고 있었으니까.

굴러먹은 탓에 타인의 눈치를 보는 짓은 의식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이루어지는 일이었다. 내가 꼬맹이였다면, 그가 지극히도 아끼던 여자처럼 비실거렸다거나 피부가 창백했더라면 그를 더 자극할 수 있었을까. 운동한 덕에 자리 잡은 근육과 보기 좋게 탄 살이 오늘만큼은 쓸모없게 느껴졌다.

불행 중 다행히도 그동안 물고 핥던 모습이 마냥 거짓된 건 아니었는지 그는 충분히 상황에 동요하고 있었다. 힘을 풀 생각이 없어 보이는 손을 잡고 고개를 숙였다. 입술에 닿는 그의 손은 거친 나의 손에 비해 맑고 깨끗했다.

혀끝을 스친 손가락은 움찔거릴 뿐이었다. 묻어나는 타액은 보란 듯 미끈거리며 반짝였다. 할짝대는 소심한 행동을 그만두고 꼼짝없이 굳어 있는 그의 손가락을 어르고 달래 입안에 머금었다.

“…….”

그의 얼굴을 봤다. 여전한 모습. 그에 비해 손은 축축하고 따뜻한 입안에 머무를수록 체온을 앗아갔고, 조금씩 깊숙이 파고들며 혀를 자극했다.

일부러 더 깊게 파고들며 그와 거리를 좁혔다. 일상적이지 않은 박힘에 일그러지는 얼굴을 펴지 않았다. 촉각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고 애쓰는 일을 때려치우고 애원하듯 달라붙었다.

멍청하게 늘어진 그의 손을 감싸 잡고 나의 것을 문질렀다. 깍지 낀 손에 뭉개지는 밑은 속옷과 얇은 정장 바지에도 확실하게 손길을 느끼며 부피를 늘려갔고 단단해질수록 밑은 갑갑해졌다.

움찔대는 손가락을 입안에서 굴렸다. 입천장을 쓸어가는 간지러움에 물러나는 것도 잠깐이었다. 자유를 찾은 입을 그대로 그의 입술을 비볐다. 굳게 다물렸던 입도 애원하는 혀끝에 금방 열려 나를 받아들였다. 일부러 그의 송곳니에 혀를 긁어 상처를 냈다.

“으…….”

소름 돋는 감각에 몸이 절로 긴장하기 시작했다. 이 순간 내가 참고 있는 것은 나를 혐오하는 일뿐이었다.

거친 숨을 감출 필요 없이 내뱉었다. 그의 허리에 단정히 채워져 있는 벨트를 풀며, 조금은 다급하게 달려들었다. 손은 금세 방해물을 제거하고 부푼 성기에 닿았다.

밀쳐내지 못하게 노골적으로 몸을 붙이며 어정쩡하게 놓인 그의 손을 허리에 둘렀다. 찬 손에 펄쩍 뛸 뻔했지만, 그대로 힘으로 밀어붙여 벽까지 향했다. 그는 어울리지 않게 소극적인 태도를 유지했고, 나는 불편하게 눌리고 있는 그의 것을 속옷 밖으로 꺼냈다.

“그렇게 목석같이 굴 거야? 네 말대로 너무 먼 길을 왔잖아. 내가…….”

매끈한 귀두를 손끝으로 문지르며, 타액으로 젖은 입술로 그의 귓가를 지분거렸다.

“그리고 너도.”

점점 열이 오르고 있는 목을 살짝 깨물자 그의 입에서 막히고 있던 숨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대로 무릎을 꿇고 앉아 그의 것을 입에 머금었다.

당당하게 제 존재를 뽐내는 좆이 오늘이라고 작아졌을 리 없었다. 무턱대고 들이댔지만 한입에 담기 버거운 크기에 절로 침이 넘어갔다.

부드러워진 입술로 앞을 물고 혀로 쓸었다. 천천히 굴곡을 느끼며 빨다가, 강도를 더해가는 기둥을 깊숙하게 박고 빼기를 반복했다. 볼에 닿는 그의 허벅지는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따뜻해져 있었고, 그의 체취는 독하게 풍기며 나의 코를 지배했다.

계속되는 마찰에 질척이는 소리가 공간을 채웠고 입안에서 밀려 나온 타액이 비집고 나와 입가를 적셨다. 낮게 내뱉는 그의 숨소리마저 자극적이었다. 열었던 목구멍을 조이며 벽으로 그를 밀어붙였다.

“읍……!”

언제까지고 멍청하게 서 있을 줄 알았던 놈이, 갑작스레 나의 뒷머리를 잡고 끌어올렸다. 허전한 기분도 잠시, 막혔던 숨을 한껏 몰아쉬며 신선한 공기를 누렸다.

입술에 길게 늘어진 침을 닦아내며,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놈에게 말했다.

“네 눈, 욕구불만이 가득하다고. 다른 사람들을 볼 때에도 똑같았겠지. 지금도 널 기다리고 있을 아이의 피를 마실 때에도 그랬을 테고.”

“그래서.”

그는 마치 더 이야기해보라는 듯 닦달했고, 집요한 시선에 지기 싫어 똑바로 그를 마주했다.

“부드럽게 입을 맞추고 애무라도 해주면서, 네가 품는 욕정에 정당성을 부여했겠지.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면서 특별해지고 싶었겠지. 자신을 먹이로 내놓은 사람들에게 나는 다른 놈들이랑 다르다는……!”

꿈틀대던 눈동자에 스파크가 튀었다. 무섭게 잡아먹을 듯 달려드는 녀석 때문에 몸이 절로 밀려났다. 그는 의식적으로 유지하고 있던 격식도 더는 필요 없다는 듯 굴었고, 그의 손에 간신히 걸려 있던 바지는 속옷과 함께 바닥으로 추락했다.

셔츠 하나를 겨우 걸치고 있는 나에 비해 그는 여전히 흐트러짐 없는 상태였다.

“읏……!”

나의 몸을 마음껏 주물럭거리는 놈은 자신의 옷깃 하나 건드리지 못하게 했다. 뒤로 결박당한 손이 나의 움직임에 풀릴 거란 기대조차 없었기에 마음껏 꿈틀거리며 반항했다. 그게 그에게 조금이라도 더 많은 즐거움을 줄 테니까.

등에 닿은 벽이 서늘하다 싶을 때쯤, 그의 손에 잡힌 몸이 천이 씌워진 책상 위로 던져졌다. 부딪친 배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몸을 일으키려는데, 차가운 손에 움켜잡히는 감각에 절로 눈이 번쩍 뜨였다.

“……!”

엉덩이에 닿는 그의 것은 아직 나의 타액에 젖어 축축했다.

“아윽!”

강하게 앞을 쥐는 손에 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손과의 마찰이 쓰라리다고 느낄 때쯤, 그는 미적지근한 타액으로 고통을 쾌락으로 바꿔주는 친절함까지 보여줬고, 나의 몸은 기계적인 손놀림에 착실히 반응했다.

“으으…….”

그 친절함이 나를 위한 일이 아닌, 그저 사전 작업에 불과했음을 알기까진 얼마 걸리지 않았지만.

앓는 소리를 삼켰다. 그의 손에 잡힌 성기는 손가락 하나하나의 스침을 그대로 느끼며 빳빳하게 섰고, 몸은 오래간만에 느끼는 접촉에 이성을 잃곤 그의 것에 엉덩이를 비벼댔다. 아랫배가 저릿해지기 시작하면서 몸엔 힘이 들어갔고, 애꿎은 천을 잡았다 놓아주기를 반복했다.

“하읏, 뭐 하는……!”

쉴 새 없이 몰아치는 감각 속에 사정감이 들기 시작했다. 손을 들어 그의 허벅지를 밀어봤지만, 단단하게 선 그의 몸은 물러날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으, 잠……!”

되레 안달 난 나를 눈치채곤 더 집요하게 괴롭히는 그의 손에 매달려야 했다.

“……!”

엉덩이를 한껏 치켜든 채 부들거리는 다리를 간신히 지탱하고 섰지만, 몸은 눈에 띄게 움찔대고 있었다. 그는 그런 나를 두고 자신의 손을 적신 체액을 나의 엉덩이 사이에 문질렀다.

미끈거리는 기분 나쁜 촉감과 뭉근하게 입구를 쓸어대는 손가락에 온몸이 저렸다.

처음이 아니어도 이런 상황에서 그의 것을 쉽게 받아들일 리 만무했다. 그는 그런 것 따윈 신경 쓸 필요 없다는 듯 가차 없이 뻑뻑한 곳에 밀어 넣기 시작했다.

“아윽…… 씨! 한…… 번에 들어갈 리가……!”

느릿하게 들어오는 그의 것에 살이 에이는 듯했지만, 아직 입구에 걸려 있을 뿐이라는 사실에 숨이 턱턱 막혔다. 그는 나의 턱을 움켜쥔 채 귓가에 속삭였다.

“숨 쉬어. 패기 있게 덤볐으면 노력을 해야 할 거 아니야.”

건조해진 목으로 억지로 침만 삼켰다. 몸은 그의 손에 손쉽게 뒤집혔고, 이제야 눈에 들어온 천장은 필요 이상으로 높고 깨끗했다. 내벽을 긁으며 들어오는 건, 냉정하기 짝이 없는 녀석과 어울리지 않게 뜨겁기만 했다. 잠깐이나마 가졌던 감정들도 사라질 만한, 그저 몸을 섞는 행위였다.

“으…… 윽, 좀……!”

깔짝거리는 움직임을 버리고 깊숙하게 박혔다 빠져나가는 성기를 그대로 느껴야 했다. 그만두지 않을까…… 라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한 순간이, 진짜 시작이었다.

배를 쓸어내리는 손에 잔뜩 힘을 주자, 그는 가차 없이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주저앉으려는 몸을 잡아두며 한껏 예민해진 피부를 만지작거렸다. 찔끔 서버린 유두를 잡고 비틀며 내가 움찔대는 모습을 구경했다. 그의 어깨에 얹힌 다리 밑은 그를 향해 환하게 벌어져 있었다.

“하으…….”

밑을 꽉 채워버린 것에 왠지 모를 안정감까지 들었다. 다만 억지로 벌어진 근육은 어떻게든 반항을 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었고, 녀석은 말릴 새도 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안을 가득 채운 고통에 불가항력적인 신음을 토했다.

“으응…….”

급하게 입을 틀어막았지만, 이내 그에게 손을 잡혀 애꿎은 입술만 깨물어야 했다. 그는 그것조차 마음에 들지 않는지, 입안으로 손가락을 쑤셔댔다. 정신없이 밀어붙이기라도 하면 나았겠지만, 고통만 느끼지 못하게 속도를 조절해가며 움직이는 놈 때문에 입을 비집고 나오는 앓는 소리가 나를 제일 미치게 했다.

작은 반응 하나도 놓치지 않고 끈질기게 약한 곳만 노려댔다. 그 덕에 방 안에는 신음과 질척거리는 소리, 그리고 움직임에 맞춰 책상이 내는 덜컥거리는 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텁텁했던 공기는 젖어갔고, 일정하던 상대의 숨소리도 조금씩 페이스를 잃고 있었다.

등에 느껴지는 충격에는 익숙해져버렸다. 이미 한 번 토해내고서도 죽지 않는 앞을 보니, 감각들은 어지간히 잘 길들어 있구나 싶었다.

고통마저 뒤로한 채, 조금이라도 더 자극적인 감각을 얻기 위해 허리를 세웠다. 절정에 다다른 몸을 위해 바짝 힘을 주며 그에게 매달렸다.

“읏……!”

그의 허벅지까지 잡으며 발악하고 있었지만, 기대와 다르게 그는 쑥 빠져나갔다. 움찔대는 밑을 두고 새어 나오던 숨을 몰아쉬었다. 손을 떼자 저릿한 느낌이 온몸에 퍼졌다.

그는 상체를 숙여 목 언저리를 송곳니로 긁어댔다. 손으로 급하게 얼굴을 덮었지만, 상대의 손에 금방 시야를 되찾았다.

“네가 원하는 대로 굴어준 게 맞아?”

힘을 얼마나 주고 있었는지 턱은 뻐근했고 쉽게 입을 벌릴 수 없었다. 그는 나의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는지 곧바로 말을 쏟아냈다.

“……내가 죄책감을 느끼길 원한다면 좋은 시도였어. 네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만큼 내가 수백도 넘는 사람들을 먹고 밟으며 자란 괴물이라는 걸 절실히 깨닫고 있으니까.”

그는 다시 상체를 세워 나를 정면으로 마주했다. 붉게 물들고 있는 얼굴, 열이 오르고 있는 손과 다르게 그는 여전히 흐트러짐 없는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목을 죄는 넥타이까지, 더러운 셔츠 쪼가리 하나만 걸친 나 자신과 비교됐다.

“그런데 넌, 뭘 어쩌고 싶은 건데. 매번 동정도 싫다, 간섭받기도 싫다 찡찡대면서 하는 행동들은 결국 위로받고 싶은 꼬맹이 신세로 벌벌 떨고 있잖아. 하찮은 가시만 세우면서. 그렇게 엮이는 걸 싫어하는 새끼가, 왜 항상 네 인생에서 일어난 일들을 다 나한테 화풀이하고 있는 건데. 어디까지 이해를 해줘야 하고 어디까지 놀아나줘야 직성이 풀릴 거냐고.”

그의 밑에서 헐떡거리느라 말라버린 목은 보기 좋게 갈라진 목소리를 선사했다.

“씨발……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미련한 인생이었다. 도발이고 나발이고 나는 그가 가진 울타리가 내심 탐이 났던 모양이었다. 애써 인정하기 싫어 부정하던 감정을 받아들이는 일은 너무 쉽고, 들끓던 나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눈가를 훔치며 손을 뻗어 그의 넥타이를 잡았다. 더럽게 딱딱한 책상 위 행위를 때려치우고, 널따란 매트리스 위로 그를 내동댕이쳤다. 그리고 뭐에 홀린 사람처럼 그의 배 위로 자리를 옮겼다.

체액과 침으로 얼룩진 엉덩이를 움직이며 그의 옷을 더럽혔다. 그러곤 그의 목을 죄고 있는 넥타이를 잡아당겼다. 매듭은 보잘것없는 힘에도 손쉽게 풀렸다.

“내가 알면, 이렇게 살았겠어?”

양손으로 그의 셔츠를 쥐어뜯자, 벌어진 셔츠 사이로 그의 맨살이 드러났다. 그의 단단한 가슴에서 느껴지는 심박 수가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난 미친 게 분명했다. 아니면 오기가 머리를 지배해서 돌아버렸거나. 어느 쪽이건 지금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직 빳빳하게 서 있는 그의 것을 잡곤 주저앉았다. 열이 식지 않은 채 움찔대는 곳은 거부감 없이 그를 받아들였다. 절로 수그러드는 허리를 억지로 세웠다. 이를 악다물었지만, 양볼을 한껏 누르는 힘에 입이 벌어졌다.

“읍……!”

감았던 눈을 부릅뜬 순간 입을 맞추는 녀석 탓에 숨을 쉴 타이밍을 잘못 잡아 하마터면 기침을 토할 뻔했다.

거칠 대로 거칠어진 입술을 부드럽게 핥았다. 끈적이며 달라붙던 녀석은 소동 속에 풀이 죽은 나의 성기를 잡고 달래듯 문지르며 자극을 줬다. 지체할 필요 없이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질척이는 살이 부딪치는 소리는 언제나 잔혹했다.

“으…….”

허리를 감싼 그의 손은 단단하기만 했다. 갑작스럽게 몰려오는 수치심에, 나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을 끌어다 입을 맞췄다. 상처고 뭐고 중요하지 않았다. 열심히 그의 입안을 탐할 뿐이었다.

***

“……가 다시 생기는 애들도 완전히 똑같은 게 아니래. 연골로 만들어진다나!”

이곳에서 가장 수상하게 행동하는 이는 나도, 그도 아니라, 마른 빵을 뜯어 먹으며 생태계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여자였다. 적당한 크기로 썬 고기에 시큼한 소스를 찍은 뒤 질겅질겅 씹었다. 침만 삼켜도 따끔거리는 목에 인상이 절로 써졌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꾸역꾸역 배를 채웠다.

“햄스터.”

익숙한 단어는 분명 여자의 목소리였다. 커다란 고깃덩어리를 그대로 삼켜버린 탓에 목에 걸릴 뻔했다.

“그 조그만 쥐가 독립적인 생활을 한다는 거 알았어? 닥치는 대로 새끼를 배고 여의치 않으면 잡아먹어버리고! 좁은 공간에서 같이 키우면 막 싸운대. 그래봤자 잠깐 찍찍거리는 것뿐이겠지만.”

재혁은 의자에 앉아서 고상하게 책이나 읽고 있었고, 제이는 그런 재혁의 옆에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그녀의 말에 대꾸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조은은 밖으로 나가는 녀석을 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나에게 달려왔고, 얇은 노란 원피스는 허리선부터 무릎까지 바람에 날리며 그녀의 다리를 그대로 드러냈다.

“재혁이 진짜 화났다.”

“자리로 돌아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제이는 나에게 딱 달라붙은 채 중얼거리는 조은을 질질 끌고 가 원래 상태로 돌려놓고는, 음식을 다 먹기 전까지는 움직이지 말라며 경고했다. 그녀는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닌지 깨작깨작 먹던 음식을 한입에 욱여넣더니 우유까지 단번에 비워냈다.

빈 유리잔을 내려놓은 조은은 제이를 보며 당당하게 내 옆으로 돌아와 입가에 묻은 액체를 닦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우웅, 징짜 화났다.”

아직 음식물을 다 삼키지 못했는지 웅얼거리는 말투로 같은 말을 반복하는 여자는 음식에만 집중하는 나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노력했다.

“내 말 들었어? 재혁이 진짜 화났다니까.”

세상 냉정한 모습으로 책을 읽다가 나간 녀석의 무슨 면을 보고 화가 났다고 단정을 짓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이곳에서 가장 분노 조절을 잘하고 있는 것은 나였을 것이다. 제이가 그녀를 그대로 들어 자리에 앉혀놓았지만, 그녀는 그리 호락호락한 성격은 아니었다.

“화났다니까.”

“네. 그런 것 같네요.”

“나 때문인 거 같아?”

그녀는 나의 접시에 남아 있던 마지막 고기 조각을 집어 먹었다.

“……아니요.”

이미 식어버린 고기 조각이었지만 마지막 조각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음식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열심히 턱을 움직이고 있는 사람을 봤다.

“유운이 내 말 안 믿지? 진짜야.”

그녀는 말릴 틈도 없이 테이블보를 잡아당겼다.

“무슨…….”

“……짜야. 진짜야. 진짜야. 내가 확인시켜줄까.”

바닥에 떨어진 그릇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이 났고, 말릴 틈도 없이 사기 조각은 그녀의 손에 들렸다. 내가 자신에게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그녀는 제이가 뻗은 손 위에 조용히 사기 조각을 얹어놓았다.

“진짠데…….”

당당하게 앞장서서 걷는 여자는 복도에 목석같이 서 있는 이들에게 전부 인사를 하며 지나갔다. 되돌아오는 꾸벅임을 신경 쓰지 않고 지나가는 걸 보니 자신이 하는 행동에만 의의를 두고 있는 것이지, 주고받는다는 게 중요해 보이지는 않았다.

“저기 봐.”

그녀는 가던 발길을 멈추고 창문을 활짝 열었다.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뻗은 손가락 끝에선 계절에 맞게 핀 꽃들이 선명하게 제 색을 뽐내고 있었다.

그녀가 꺾은 몇 송이가 아니라 수십 송이를 꺾어도 티가 나지 않을 만큼 넓은 정원은 누가 꾸몄는지는 몰라도 꽤 애정을 가지고 가꾼 듯 보였다.

“나 말고 아무도 안 가. 다들 별로 안 좋아해. 누가 만들었는지 몰라. 근데 내가 올 걸 알고 있었나 봐. 다 준비해둔 거지. 관리하는 사람도 없다?”

관리하는 사람이 없을 리 없었다. 저기 널린 게 모두 살아 있는 식물이라면.

“어때, 유운이는.”

“……예쁘네요.”

“그렇지? 멀리서 볼수록 예뻐. 썩은 꽃잎도, 잎을 갉아 먹고 있는 벌레도 안 보이잖아.”

“벌레 싫어합니까.”

“아니, 좋아. 근데 같이 있는 건 싫어.”

지하에 박혀 있는 식당에 비해 5층 끝까지 올라가야 보이는 그녀의 방은 멀리서부터 요란스러웠다. 그간 건물 안에서 보지 못했던 다양한 색들로 칠해진 문은 단조롭기 짝이 없는 건물에서 그녀를 한 번에 설명해주고 있었다.

“문. 10년 전에 같이 칠한 거야.”

파스텔 톤의 페인트를 마구 발라놓은 문. 추상화를 그리는 작가들이 봤다면 고개를 끄덕였을까.

“색이 특이하네요.”

“이상해. 흰색은 모든 색에 섞으면 맑아질 것만 같은데 어딘가 흐리멍덩해 보이기만 하잖아. 안 그래?”

“그래도 좋아하니까 칠해놓은 거겠죠.”

“응. 마음에 들어. 애매한 색이잖아.”

예상치 못한 행동만 하는 이와 함께 있는데도 긴장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온몸을 싸고 있던 예민함이 누그러지며 나른함이 몰려올 뿐이었다.

흰색이나 분홍빛으로 채워졌을 줄 알았던 그녀의 방은 하늘색과 연보랏빛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그녀의 취향대로 따듯한 느낌도, 차가운 느낌도 아닌 모호한 느낌이었다.

오리너구리가 잔뜩 있다는 말에 많아봤자 얼마나 많겠냐는 생각은 고이 접어야 했다. 존재 자체에 의문을 품었던 생물은 수많은 종류의 상품들로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이불과 탁상시계 같은 평범한 물건부터 머리를 뎅강 자른 것같이 생긴 가방까지 잔인함과 귀여움이 저울질하고 있었다.

그의 집에서 보았던 것과 똑같이 생긴 커튼은 활짝 열린 창문 앞에서 흩날리고 있었고, 온통 포근해 보이는 장식품들이 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녀는 방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단정하게 묶여 있던 머리카락을 풀어헤쳤다. 몇 시간 전만 해도 엉키고 꼬여 있던 머리카락은 손질이라도 했는지 윤기가 흐르고 있었다.

“옛날에는 재혁이가 매일 빗겨줬는데.”

“…….”

“제이는 너무 거치니까.”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시를 세운 고슴도치 같은 거대한 빗을 들어 내밀었다. 받을 생각이 없는 나의 눈치를 보던 여자는 다시 책상 위에 얌전히 내려놓았다.

“항상 같이 다녔는데…… 자꾸 멀어지는 기분이야. 네가 보기엔 어때 보여, 우리 사이가.”

기대에 찬 눈으로 그와의 관계성을 묻는 여자는 이미 듣고 싶은 말이 따로 있어 보였다. 당사자는 어디에 가서 이런 질문을 받고 있어야 했을까.

“잠깐 본 사이에 뭘 알겠습니까. 당사자들이 제일 잘 알겠지요.”

“후응…… 그냥 물어본 것뿐이야.”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한 여자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민망한지 자신의 어깨를 쓸다가 머리맡에 놓여 있던 인형을 가져왔다.

“아, 맞다, 오리너구리. 이제 모른다고 하면 안 돼.”

그녀의 손에 들린 갈색 인형은 팔뚝만 한 게 베개로 쓰면 딱 좋을 크기와 모양이었다. 조은은 인형을 나의 품에 밀어 넣은 뒤 침대에 벌러덩 누워버렸다.

허벅지가 훤히 드러나는데도 신경도 쓰지 않고서 침대를 뒹굴었다. 그녀의 콧노래가 정적만 흐르던 공간을 채웠다. 여린 듯 선명한 멜로디는 아이러니하게도 순수하다는 말이 가장 어울렸다.

“이게 왜 그렇게 좋습니까. 특별히 귀엽지도 않은 것 같은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는 사람의 콧노래가 잠시 끊겼다가 다시 시작됐다. 나풀거리는 노란 원피스가 불편한지 훌러덩 벗어버린 그녀는 새하얀 원피스를 꺼내 들었다. 부끄러움이라곤 찾아볼 수 없이 자신의 몸을 드러낸 채 대답했다.

“애매―하잖아.”

옷을 입을 생각이 없어 보이는 이에게서 눈을 돌렸다. 벽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포스터는 천장까지 이어져 있었다. 동물 캐릭터들은 모두 날개를 가지고 하늘을 날고 있었다. 자신을 봐달라는 듯 시야 속으로 비집고 들어온 여자는 이목구비를 모두 이용해서 웃어 보였다.

“나처럼!”

치렁치렁 긴 머리카락은 움직일 때마다 착실히 흩날리고 있었다.

“어때, 내가 몇 살 같아 보여?”

“…….”

얼굴을 붉히던 여자는 내 손을 잡아 자신의 뺨에 댔다.

“나랑 잘래? 나 진짜 잘해.”

장난스러움이 사라진 진지한 물음에 심각하게 고민을 할 뻔했다. 조심스럽게 잡혔던 손을 미련 없이 빼왔다.

“……옷 입으시죠.”

“진짠데에…….”

그녀는 노골적으로 자신의 몸을 드러내며 나를 만지려 했다. 더 이상의 문제를 일으키긴 싫었다. 등 뒤로 잡힌 문을 열고 나왔다. 방 안의 사람은 적극적이던 모습과 다르게 잠잠했다.

그녀의 모습에 욕정이 일기보단 그에게 들이대던 나의 모습이 생각나서 견딜 수 없었다. 엉망진창이 된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리고 고개를 드는 순간 그림자가 드리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가까이 있다고 느낄 수 있는 게 후각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 수 없는 불안감을 가져왔다. 어깨를 스치고 지나간 재혁은 짧은 노크를 두어 번 한 뒤, 방문을 벌컥 열었다.

설마, 옷은 입었겠지. 지은 죄도 없건만 왜 내가 불편해야 할까 억울함이 몰려왔다. 슬프게도, 문 뒤의 여자는 나의 바람과 다르게 여전히 머리카락으로 몸을 가린 채 울먹거리고 있었다.

“우응…… 어디 갔었어…….”

당황스러운 상황에 변명하는 것조차 잊고 둘을 봤다. 그는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바닥에 떨어진 원피스를 주워 입히곤, 손으로 머리카락을 끌어 모아 넘긴 뒤 등에 달린 지퍼를 닫아줬다. 막힘없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동작이었다. 더는 볼 수 없었다. 그가 문을 닫아버렸기 때문에.

“담배 있어요?”

“아니요.”

제이는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다음에 밖에 나가면 좀 사다주시겠습니까.”

“새 일자리를 구할 계획은 없습니다.”

“그게 그 정도 일이에요?”

그는 눈썹을 치킬 뿐이었다.

창가에 앉아 멍하게 앉아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5층에서 보는 정원은 3층에서 보던 것보다 더 깔끔하고 아름다웠다.

별로 큰 차이는 아니었지만 멀어질수록 선명해지는 색과 창문이라는 액자 속에 가둬지는 풍경은 넓어져 있었다. 애매함을 추구하는 여자가 왜 나에게 보여줬던 3층이 아닌 5층에 사는 걸까.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전 결백합니다.”

애꿎은 남자에게 손을 들어 보였고 상대는 질문으로 답했다.

“재혁 님이요? 아니면 조은 님을 말하는 겁니까.”

“……둘 다요.”

“저한테 말해봤자 쓸모없을 겁니다. 직접 말씀하시는 게 좋겠네요.”

“냉정하시네요.”

“한 시간 뒤에 아버님과 친척분들이 온다는 소식을 전해드렸으니 그리 오래지 않아 나오실 겁니다. 내려가 계시겠습니까?”

“……아니요.”

집으로 돌아갈 거냐 묻는 말에 다시 한 번 고개를 저었다. 괜히 뒷머리를 긁적거리다가 창문을 열었다. 아니, 열기 위해 노력했다는 게 맞는 것 같다. 그는 내가 한참을 헤매고 나서야 그 창문은 열 수 없는 거라며 사실을 알려줬다.

“몇 살이에요? 요즘은 왜 이렇게 어림짐작하기 어렵게 생긴 건지…….”

“서른다섯이요.”

“저 얼굴로요?”

“아뇨. 제가요.”

그는 방문을 한 번 쳐다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조은 님은 재혁 님보다 한 살 어리십니다.”

“음…….”

“고민이 많아 보여서 말씀드리는데, 조은 님을 상대로 결백을 주장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 정도는 그분도 알고 계실 테니 말입니다.”

그의 말대로 얼마 가지 않아 방문이 열렸고, 문턱을 넘은 발은 하나였다. 굳이 고개를 들어보지 않아도 커다란 발에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돌아다니면서 사고 치지 못하게 봐주세요. 잔다고 하면 그냥 두고 나중에 일어났을 때 푸딩만 챙겨주시고요.”

“네. 알겠습니다.”

목덜미를 스치는 촉감에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봐야만 했다. 따라오라는 듯 던지는 고갯짓에 군말 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이 궁전 같은 곳에서 또 누굴 만나 무슨 일을 겪을지.

딱지가 앉은 아랫입술을 물어뜯으며 걸었다. 한 층 한 층 내려갈수록 가까워지는 정원은 조은의 말과 달리 티끌 없이 빛났다.

한여름의 태양은 길었다. 건물 밖으로 나오자마자, 사방에 깔린 꽃들 덕에 지겹게 맡던 라벤더 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4시가 넘어가는데도 뜨거운 햇살에 그는 정원 한가운데에 있는 작은 공간으로 발길을 옮겼다. 나는 말없이 그를 따라 걸었다.

온실로 썼을 법한 공간은 텅텅 비어 아무것도 없었다. 조용한 분위기를 이기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아무 일도 없었…….”

“알아. 그새 친구가 되었을 줄은 몰랐다만.”

말을 덧붙일 줄 알았던 그는 한숨을 쉬며 밖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사방이 유리로 된 벽을 두고 그가 바라보는 곳엔 장미꽃이 잔뜩 피어 있었다.

이건 무슨 고요의 늪인 건가…… 그의 등만 빤히 쳐다보고 있는데, 몸을 돌린 녀석이 입을 열었다.

“남의 등 보면서 무슨 생각 해.”

“고민 중이야. 뒤통수 한 대 칠까 말까.”

망설임 없이 던지는 말에 그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세상 더럽게 좁아.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너랑 이렇게 마주 보면서 서 있고.”

“…….”

“별안간 몸까지 섞어가면서 가까워졌으니, 어떻게 일이 돌아갈지 아무도 모른다는 게 틀린 말은 아닌 듯싶네.”

같잖은 말을 분위기 있게 늘어놓는 녀석 때문에 온몸에 닭살이 돋았다.

“괜히 좋게 포장하려는 거라면 그냥 조용히 있…….”

“면죄부, 구한 걸지도 모르지. 아무 의미 없었겠지만.”

함구하며 모른 척 지나갈 줄 알았건만,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를 꺼내는 덕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잘 아네.”

“의미 있게 하고 싶으니까. 협조해주든가.”

“뭔 소리야.”

“등쳐먹겠다며. 적으로 생각 좀 하지 말고 이용할 생각을 하라고.”

세상 어울리지 않는 말에 나도 모르게 얼굴이 일그러졌다.

“정말 믿음이 간다. 진심으로.”

“비꼬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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