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진실과 거짓의 경계점 (2)
긴박했던 목소리들이 반복되며 허탈감에 지쳤고, 예민해진 감각 탓인지 사소한 것 하나에도 과도히 반응하게 됐다. 숲속을 헤집고 다녀도 평소에 보기 힘든 들짐승들이 우리를 보고 뜀박질할 뿐이었다.
겨우 마주하나 싶으면 금세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통에 일부러 저렇게 놀리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재민은 따분하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슬슬 같이 놀아줘야 할 때가 된 것 같은데.”
홀로 산책 나온 동네 주민처럼 걸어 다니는 그의 목소리에선 조급함도, 긴장감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끓고 있는 용암 앞에서 어서 터지기를 기대하고 있는 어린아이 같았다.
표성의 목소리는 여전히 일정한 톤을 유지하며 정보를 알렸다.
[한 시간 21분 남았습니다. 남은 포인트는 열세 개입니다.]
맞붙었다는 소식이 간간이 들리는 와중에도 들어오는 정보는 없었다. 이 정도면 제로들이 숨어 살 필요 없이 그냥 다 때려 부수고 지배하는 게 살기 훨씬 편하지 않을까. 물론 눈앞에서 행동하는 재민을 보고 싹 사라진 생각이었지만.
그의 손짓에 땅속에서 비집고 나온 습기가 수천 개의 물방울로 뭉쳐져 주위를 떠다니다가 쇳소리를 내며 얇은 유리 파편으로 변했다. 집중하고 보지 않는다면 있는 줄도 몰랐을 테고, 그 속을 지나간다면 온몸이 난도질당했겠지.
다행히도 얇은 결정들은 햇빛을 반사하며 반짝이는 덕에 존재를 드러냈고, 눈이 부셔 오래 보고 있을 수 없었다.
태주는 넋을 놓은 채 중얼거렸다.
“우어…… 봐도 봐도 신기하네요. 나도 순혈로 태어났으면 좋았을걸.”
청아한 소리를 내며 부딪치는 조각들은 제자리를 찾아 움직였다. 그가 미련 없이 돌아서는 자리엔 투명한 직육면체의 구조물이 자리 잡았다.
무식하게 뛰는 것보다는 무거운 짐을 들고 같은 자세를 유지하기가 더 힘든 만큼, 각지에 세워둔 구조물들 때문에 그도 작업 속도가 조금은 느려지고 있었다.
재민은 다음 장소에 다 와갈 때쯤 말했다.
“실질적인 대답을 듣고 싶은데.”
쏟아지는 햇빛에 후드로 얼굴을 더 깊숙하게 쑤셔 넣으며 말을 이었다.
“인간이 현장에서 뛰어서 과연 도움이 되는지 말이야. 같이 생활하고 있으니 솔직한 심정들 좀 이야기해보지그래.”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듯 서슴지 않고 꺼낸 질문에 선뜻 대답을 하는 이는 없었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재민은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지금 하는 일, 심각하게 비효율적이고 재미없어서 심심하니까 무슨 말이라도 좀 해봐, 다들. 일을 왜 이렇게 지루하게 해.”
“실례가 될 수도 있는 말이지만, 동등한 조건에서 실력으로 각자 자리에 오른 분들을 제 뜻대로 평가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그는 서연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은 듯 보였다.
“흐음.”
순간 고글에 닿은 날카로운 조각에 발걸음을 멈췄다. 손으로 잡은 조각은 순식간에 녹아 장갑을 타고 흘러내렸다. 재민은 그런 나의 반응을 보며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미끼 같은 건가. 침 흘리면서 달려들어도 이상하지 않은 향인데. 실제로 몇 있는 것 같고 기회가 된다면 한번…….”
“그럴 일 없을 겁니다.”
“그건 두고 봐야 할 일이지.”
나의 단호한 태도가 재민을 지겨움에서 벗어나게 해준 모양이었다. 재혁이 둘 사이에 끼어들며 말을 잘라냈다.
“네 재미를 위해 하는 일 아니야.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방해할 생각 말고 돌아가.”
재민은 그런 재혁에게 어깨만 으쓱할 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지체할 시간도 없이 곧바로 도착한 장소는 그동안 있던 산중과 달리 삭막한 콘크리트 건물 더미였다. 새카만 땟물로 얼룩진 회색 건물들은 굳건히 제 골격을 유지하며 서 있었고, 버려져 바닥에 구르는 자재들은 이곳이 오래전 발길이 끊긴 곳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움직임이라곤 빛이 바래고 너덜거리는 천과 다 찢어진 부대자루의 흔들림이 전부였다. 햇빛에 달궈진 콘크리트에서 풍기는 열기에 시원한 계곡물에 몸이라도 담그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일제히 멈춘 발걸음에 나도 발을 멈췄다. 서연은 주춤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뽑기놀이 같은 건가요. 마주치기만 해도 자취를 감추던 이들이 보란 듯이 이렇게 트인 공간에 대놓고 있는 게…….”
“그럼 상대해주면 될 일을.”
망설임 없이 공간으로 빨리듯 들어갔다가 나온 재민의 손엔, 악력으로 얼굴이 무너진 이가 잡혀 나왔다. 비명이 하늘을 찔렀다. 여과 없이 드러난 근육과 살, 그리고 폭력에도 감지 못하는 눈이 빠르게 굴렀다.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몸부림치는 녀석의 머리에 총알을 박아 넣자 사방으로 피가 튀었다. 재민은 얼굴에 튄 피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보기 드물게 인상을 찡그리며 피를 닦아냈다.
투명했던 결계는 재민의 손이 닿는 주변으로 거미줄 무늬를 그리며 빠른 속도로 퍼졌다. 이내 불투명하게 변한 결계는 굉음을 내며 깨졌다.
[……인……!]
[……의 영……!]
[……혹의 남은…….]
“아윽!”
전국에서 한 번에 터지는 신호들로 깨져버린 소리가 고막을 강타했다. 이명과 함께 찾아온 두통에 눈앞이 번쩍거렸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난 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말 그대로 지옥이었다.
“으……!”
[대전, 양구, 김해, 강릉, 평창 등 43개 지역에서 동일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게 무슨…….”
보란 듯이 전시해놓은 시체들은 기껏해야 열 살 남짓 되어 보였다. 새하얗게 질린 몸에선 새빨간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고, 건물에 매달려 있는 아이도 바닥에 널브러진 아이도 모두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어림잡아도 백이 넘어 보이는 숫자였다.
눈도 감지 못하고 고통을 토해내며 굳어버린 아이들의 시체에 돌조각들이 굴러 떨어지고 있었다. 그 흔적을 따라갔다. 무릎에 아이를 앉히고 우리를 여유롭게 바라보던 제로는 수많은 시선을 받으면서도 태연히 같은 짓을 반복했다.
섣불리 아무도 가까이 가지 못하고 있는 동안 기다림에 지쳤는지 상대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인이어를 통해 들어오는 소리도 아니고 직접 귀에 들리는 소리도 아닌, 머릿속에서 울리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
중첩되며 울리는 속삭임과 함께 다들 욕을 내뱉으며 발을 떼기 시작했다. 비어 있을 줄 알았던 건물 속에서 쏟아져 나온 이들은 아이들을 아무렇지 않게 짓밟으며 달려들었다.
[우욱……! 냄새 너무 심한데.]
찌걱거리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렸다. 불쾌했다. 죄 없이 잡혀 그들의 노리개가 되어 벗어날 날만을 기다리다가 죽어버렸을 생명이 눈앞에 비참히 쓰러져 있는 모습은, 제아무리 이런 광경에 익숙한 이라도 괜찮지 않을 거라 장담할 수 있었다.
잠잠했던 땅은 연이은 총성 소리와 폭격음으로 뒤덮였고, 모래 바람을 일으키며 시야를 방해했다. 땀에 젖은 몸은 달리는 바람을 맞으며 정신을 더 빠릿빠릿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고성, 안동, 경주, 공주, 김해, 강릉, 서산 지역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갸웃거릴 정도의 작은 기운들까지도 크게 다가왔다. 제로들은 그간 얼마나 더 손쉬운 조건 속에서 전투를 벌여온 것일지. 몸속을 흐르는 액체에 대한 궁금증만 늘어갔다.
[뒤.]
재혁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곧장 날린 총알의 끝에는 아쉬움을 흘리며 불순물 속으로 사라지는 가면이 보였다.
공격하는 속도를 이길 수 없어 반복적으로 부딪친 보호구들은 충격을 지워주지 못했고, 자극이 쌓일수록 힘이 빠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태주는 한껏 열 오른 목소리로 소리쳤다.
“아, 진짜. 어디서 자꾸 나오는 거야!”
“사라지지만 않으면 좋겠습니다.”
서연은 짧은 대답을 끝으로 그들에게만 집중했다. 귓가에 울리는 애원하는 목소리를 애써 외면하려고 해도 자꾸 주의가 흐트러졌다.
“읏!”
이를 악물며 달라붙는 제로를 내리찍으려던 순간, 유리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붙잡고 있던 놈의 머리에 수십 개의 자상이 났다.
검은 액체를 묻히고 몸에서 다시 빠져나온 조각들은 속살을 헤집어놓으며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고, 비이상적인 바람은 회오리치며 조각들을 한데 모았다.
[양구, 대전 공장의 존재 확인했습니다. 일대 대원들 지원 부탁합니다.]
실시간으로 전해지는 전국의 상황에 빠르게 뛰던 심장이 이제 귓가에서 고동쳤다. 세차게 부는 바람에 먼지가 걷히면서 시야를 되찾았을 땐 아이들은 사라지고 피에 젖은 꽃잎만 살랑거리며 떠다닐 뿐이었다.
“또?!”
태주의 짜증과 함께 허망함으로 힘이 빠지는 순간, 당기는 힘에 대책 없이 넘어갔다. 향수라도 뿌린 듯 진하게 풍기는 향에 정신이 아득했다.
뇌가 꿈틀거렸다. 온 피부를 바늘로 찌르는 듯한 고통과 함께 욕지기가 몰려왔다. 입에 고이는 침들을 삼키며 고개를 들었다. 어지럽게 널려 있던 건물 잔해 더미들도, 대책 없이 달려들던 제로 놈들도 사라지고 기계음 소리만 이따금 들렸다. 지금은 그저 삭막한 시멘트벽 사이에 갇혀 있었다.
주위는 온통 잿빛이었고, 공간은 습기로 가득 차 있었다. 한쪽 구석에 때 탄 침대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눈에 익은 침대였다. 시체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탓에 속은 메스껍고 머리는 깨질 것 같았다. 고이는 침을 바닥에 뱉어냈다.
“쓰읍…….”
아무도 없는 공간에 울리는 입맛 다시는 소리는 막막한 공포감을 심어줬다. 먹먹한 귀를 파고드는 훌쩍거림은 사람을 미치게 했다. 반복적인 울먹임 소리가 허상인지, 실재하는 것인지 구분을 할 수 없었다.
“제법 잘 커줬어.”
다만, 나를 보며 미친놈처럼 웃어대는 놈들과 점점 거리를 좁혀간다는 것만큼은 사실이 아니길 바랐다.
“그땐 요만했는데, 그렇지?”
차가워진 손끝으로 몸 이곳저곳을 더듬었다. 열심히 싸맸던 옷은 사라지고 얇은 천 쪼가리가 겨우 몸을 가리고 있었다. 몸은 맥없이 자꾸 축축 처졌다.
웅성거림은 점점 커지고 뒤로 물러날 곳은 없었다. 훌쩍거리던 소리는 억 소리로 변해 건물 전체를 울렸다. 침대는 10년이 넘게 지나도 잊히지 않는 불쾌함을 품고 있었고, 눅눅하면서도 달콤한 향은 언제 맡아도 끔찍했다.
아무런 시도도 해보지 않고 멍청하게 있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애석하게도 몸은 움직여줄 생각을 하지 않았고, 깜박거리는 것조차 잊은 눈은 그들과 시선을 맞추며 나의 정신을 죽이고 있었다. 목소리로 존재를 알리던 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내가 익숙하다고 했었잖아. 그땐 어떻게 벗어났는지 모르겠지만, 여기서 네가 구해질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다면 헛된 희망이라고 알려주고 싶네.”
남자의 손에서 벗어난 손톱만 한 칼은 작고 볼품없어 보였지만, 이미 여러 차례 눈에 익었던 물건이었다. 목 언저리를 간질이고 있는 칼의 서슬에 쉽사리 움직일 수 없었다.
“쉽게 먹으면 재미가 없지. 안 그래?”
침을 삼킬 때마다 식은땀이 흘렀다. 뭉개진 손끝에 자리 잡은 딱지는 남자의 손톱에 하나둘 떨어져 나갔다. 쓰라린 감각이 늘어갈수록 주변에서 입술을 닦으며 입맛을 다시는 놈들의 눈은 투명해졌다.
“왜 대답이 없어. 네가 좋아하던 대로 꾸며봤는데, 마음에 안 들어?”
남자의 가죽장갑은 체온을 머금은 액체에 미끈거리며 닳아버린 손끝을 문댔다. 남자는 관절이 어긋날 정도로 나의 손가락을 쥐고 있었지만 하얗게 질려버린 손가락에서 나오는 피는 보잘것없는 양이었다.
“으…….”
“그땐 생글생글 잘 웃었잖아. 오늘은 왜 이렇게 울상이야. 찡그린 얼굴도 귀엽긴 하지만 웃는 게 더 예쁜데.”
열 명은 족히 넘어 보이는 놈들은 남자가 움켜쥐고 있는 내 손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네가 곱게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이유를 알고 있어?”
“……네놈한테서 듣고 싶지 않아.”
“쪼그만 놈이 얼마나 몸을 잘 놀리던지, 다들 울고불고 난리를 쳐서 묶여 있을 때에도 고분고분 말도 잘 듣고 오히려 어른들을 안달 나게 하는 게 제법이었다니까.”
“…….”
그는 목소리를 가다듬곤, 높은 톤으로 소리쳤다.
“아! 조금만 상냥하게 해주세요!”
연극이라도 하듯 읊는 대사들은 웃음기가 서린 그의 목소리완 어울리지 않았다.
“이거, 이거 다 주실 수 있는 거예요? 울지 않을 수 있어요. 저 잘하고 있는 것 맞죠?”
“……그만해.”
“더 잘할 수 있어요! 다음에도 또 불러주실 거죠?”
“그만….”
얄팍하게 애원하던 목소리는 금세 가라앉았다.
“도망가봐.”
선심 쓰듯 내던지는 말에 목을 찌르던 감각은 없어지고, 등에 닿았던 차가운 벽도 사라졌다. 그의 모습이 다시금 사라지면서 뒤를 지키던 놈들이 달려들었다.
“이렇게까지 말해주는데도 날 기억하지 못하다니, 조금은 실망했달까.”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안 될 걸 알면서도 무작정 달려드는 한 놈의 머리채를 잡아 그들에게 집어 던졌다. 떨리는 다리로 붙어오려는 놈을 넘어트려도 잠깐뿐이었다.
나를 가지고 놀듯 둔하게 움직이는 녀석들은 여전히 끅끅거리며 나를 뒤쫓고 있었다. 침대를 간신히 덮고 있던 천을 움켜잡아 그들에게 내던졌다. 출구라고 없는 공간에서 무의미한 뜀박질은 사기를 심어주기엔 너무 참혹했다.
앞만 보며 달려드는 놈들을 아무리 쓰러트려봤자 몸을 털고 일어나기를 반복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지쳐가는 건 나뿐이었다.
자지러지는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나를 괴롭혔다. 그 속에서 뚜렷하게 들리는 목 넘김 소리와 신음 소리가 괴이했다. 재혁이 강제로 먹인 약 때문인지 평소라면 들리지 않아도 될 작은 숨소리까지도 선명했다.
“으윽…….”
머리채가 잡혔다. 마구잡이로 잡아당기는 힘에 저항이란 의미 없는 짓이었지만, 맨살에 닿는 타인의 신체란 목숨을 내걸고라도 느끼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두 눈을 질끈 감고 머리를 감싸자 더 집요하게 파고드는 손길들 사이로 퍼지는 목소리는 여전히 악랄했다.
“아직도 희망이란 게 있어?”
그 목소리에 집중해 손을 뻗었다. 남자는 마치 벗겨보라는 듯 피하지 않고서 얼굴을 들이댔다. 매끈거리는 가면을 잡자마자 눈을 떴다. 남자는 자신의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놓았다.
“있어야지. 인간들은 희망이 없으면 금방 시체처럼 구니까.”
“…….”
너무 놀라면 소리를 지르는 것조차 잊어버린다는 이야기는, 숨 쉬는 법을 잊어버리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눈앞에 있는 얼굴은 사진 한 장 남지 않아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던 얼굴이었다.
“왜 그런 표정이야. 좀 더 기쁜 표정을 지어야지!”
손에서 절로 힘이 빠졌고 가면이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넋을 놓은 나를 보며 상대는 오히려 움직이라면서 나를 닦달했다. 사방에서 살을 파고드는 감각이 전해졌지만 반항하지 못하고 그의 얼굴만 봤다.
10년이 지나도 주름살 하나 없이 깨끗한 얼굴에 쌍꺼풀 없는 큰 눈, 그리고 웃을 때마다 푹 들어가는 보조개는 나와 똑같았다. 그저 크게만 느껴졌던 상대는 이제 나와 비슷한 몸집을 갖고 있었고, 나와 형제라고 해도 믿을 만큼 젊었다.
“아빠……?”
동경의 대상이자 유일하게 믿고 의지했었던 상대가 잡아당기는 힘에 맥없이 끌려갔다. 그는 미친 사람처럼 숨이 넘어갈 듯 웃으면서 나의 뺨을 어루만졌다.
“풉, 아빠? 아빠?!”
그는 조롱하듯 나의 말을 반복하며 웃음을 그치지 않았다.
“아빠?”
“으…….”
“아빠 좋지, 아빠, 하…… 아빠가 보고 싶었어? 아빠하고 놀아볼까? 재미있게? 크흡, 그동안 힘들었지? 얼마나 힘들었겠어!”
일그러졌다 붙기를 반복하며 망가지는 얼굴은 화상을 입은 듯 뼈가 다 드러나도록 망가졌다가도 멀쩡하게 돌아왔고, 피 칠갑을 한 채 이를 드러내며 웃다가도 깔끔한 상태로 돌아와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다.
“좋아? 응?”
그의 건장했던 몸은 점점 왜소해져 살이 푹 꺼진 상태가 되었다. 얄팍하고 높은 목소리가 울렸다.
“엄마도 좋아해줘야지!”
“……안 돼.”
“안 되긴 뭐가 안 돼. 오랜만에 만났는데 하고 싶은 말 없어? 아빠는 많은데~.”
불쾌하게 달라붙는 상대가 누구였든, 그저 똑같은 놈들이라고 생각하고 버티던 지난날과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큰 압박이 밀려왔다. 과거부터 쌓아 올린 기억들과 함께 어지럽게 부딪쳐오는 상대는 나를 보며 순간순간을 즐기고 있었다.
“하으.”
반복적으로 바뀌던 얼굴들이 섞이며 기괴한 모습으로 변했다. 시선을 피하려고 해도 고개를 돌리지 못하게 하는 힘 때문에 볼 수밖에 없었다. 억지로 뜬 눈 앞에 있는 놈은 나의 혼란스러운 감정만큼이나 해괴하게 녹아내리다가 다시 뚜렷하게 돌아왔다.
이젠 제 나이만큼 피부가 늘어지고 조금은 푸석한 피부에 다크 서클이 내려온 얼굴이었다. 그는 한껏 슬픈 표정을 지으며 나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진짜 없어?”
“……!”
“조금 서운하네~. 아빠는 유운이 보면 하고 싶은 말이 얼마나 많았는데!”
아무리 피해도 놈은 끈질기게 다가왔다. 매끈거리던 장갑을 벗고 쓸어내리는 손은 거칠었다. 놈의 푸른 눈동자가 희미한 빛을 내며 집요하게 얽혀왔다. 그 속에 비치는 나의 초라한 모습을 보고 있기 괴로웠다.
“아빠가 같이 있어줘야 했는데, 그렇지? 그랬으면 저녁때 유운이가 좋아했던 따뜻한 우유도 마시면서 하루 동안 있었던 이야기도 하고, 공부하느라 힘들 땐 같이 바람도 쐬러 나가서 바다도 보고 산에도 오르고.”
“…….”
“또 슬픈 일 있을 땐 이렇게 안아주고 위로해주면서 용기도 주었을 테고, 기쁜 일이 있을 땐 같이 웃어주면서 공감해주었을 텐데 말이야.”
귀를 막아도 들려오는 또렷한 목소리는 듣고 싶지 않지만 그리운 목소리였다.
“겁도 많고 외로움도 많이 타서 꼭 같이 자야 한다고 품속에 파고들어선 아빠 팔 꼭 끌어안고 잤었는데. 아빠가 미안해. 그것도 모른 척하고 이렇게 혼자 둬서 미안해.”
거짓인 걸 알면서도, 놀아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건네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그에게서 떨어질 수 없게 만들었다.
“하루하루 힘들게 버티면서도 꿋꿋하게 살아줘서 정말 자랑스러워. 아빠는 매일매일 이렇게 만나러 오려고 노력했어. 너무 늦어서 미안해.”
“이러지 마…….”
“악몽 같은 네 엄마한테서 살려주겠다고, 꼭 지켜주겠다고 약속해놓곤 지키지 못해서 매번 가슴에 한이 맺혀 있었는데, 잘 자라준 걸 보니까 정말 고마워.”
달래듯 등을 토닥이는 몸짓에 그를 밀어냈다. 상처받은 얼굴로 나를 쳐다보곤 가까이 오라며 손짓하는 그의 행동에 나도 모르게 그에게 다가갔다. 이게 꿈이라면, 왜 이렇게 모든 게 생생하게 느껴지는 건지.
손목에 이를 박은 채 할짝거리는 그 모습조차도,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은 마음이 있다고 하면 잘못된 욕심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얼굴조차 기억에서 사라져 꿈에서도 목소리뿐이었던 상대가 눈앞에서 나를 봐주고 있는데, 그게 과연 나쁜 거라고 할 수 있을까.
잠깐만.
아주 잠깐만.
내가 기억할 수 있도록, 머릿속에 새겨질 때까지만.
살을 쓸어내리는 촉감마저 이젠 거부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조금 있으면 깰 꿈인데 그 안에서 하는 무의미한 발악은 소용이 없을 거라고, 조금이라도 더 기억에 담기 위한 노력 중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그의 손이 자연스럽게 옷 속을 파고들었고, 피 묻은 입은 할퀴어진 상처를 지분거렸다. 더러운 침대에 몸이 닿았다. 불쾌한 감각에도 조금씩 나 자신을 스스로 설득해가며 그에게 반항하는 짓을 멈췄다.
나를 향해 웃어주는 그의 얼굴을 보며 저도 모르게 따라 미소를 지었다. 스스로가 미쳤다고 생각했지만 그만둘 수 없었다.
모든 일은 익숙했고, 자연스러웠다.
“커흑……!”
다만, 그 시간마저도 오래가지 못했다.
둔탁했던 시멘트 벽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무너졌다. 파편을 피해 감았던 눈을 뜨자 질척하게 흐르는 검은 액체가 몸을 적시고 있었다. 짓누르던 몸이 사라지고 훤히 드러난 맨살을 바람이 훑고 지나가자 닭살이 돋았다.
수많은 발소리에 지진이라도 난 듯 땅이 울렸다.
“정신 차려.”
재혁이 담요를 덮어주며 나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노력했지만, 다리가 힘없이 꺾여 몸이 바닥과 가까워졌다. 그는 그런 나를 억지로 일으켜 세운 뒤 지탱했다.
대원들도 마냥 편한 시간을 보냈던 건 아닌 듯 보였다. 모두 거친 숨을 들이켜고 있었고, 고글을 벗어 드러난 뺨에는 홍조가 서려 있었다. 재혁은 잔뜩 미간을 찌푸린 채 너덜거리고 떨리는 내 손을 잡아왔다. 덜덜 떨리는 나의 손보다 그의 손이 더 뜨거웠다.
“형! 괜찮아요?”
“어머!”
거친 숨을 고르며 달려온 태주와 서연을 뒤에 둔 채, 재민은 놀라운 발견이라도 한 놈처럼 신기하고도 흥미롭다는 듯 나를 보며 말했다.
“진짜 미끼 역할일 줄이야. 본인도 내심 알고 있었나. 아니면 같이 즐기고 있던 건가.”
모두가 한 건을 해냈다는 기쁨 속에 잠겨 있을 때, 멍하게 앉아서 웃는 놈을 봤다. 현실로 돌아왔다는 사실이 왜 기쁘지 않은 걸까.
머리를 총알에 뚫리고도 정신을 잃긴커녕 여전히 나를 보고 낄낄거리는 놈은 온몸을 결박당하면서도 자신의 본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며 나를 놀렸다.
시답잖은 걱정을 해대는 동료들을 뿌리치고 일어나, 놈에게 다가갔다. 내가 가까워질수록 놈의 얼굴은 다시금 익숙한 얼굴로 바뀌고 있었지만, 이마엔 메워지지 않은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가까이 가려고 했지만 나를 막는 대원들의 손에 더는 접근하지 못했다.
“……나한테 이러는 이유가 뭐야.”
“그야…….”
그는 미친 듯이 웃던 소리를 끊고 무표정하게 노려보며 말했다.
“재밌으니까.”
하늘을 뒤덮은 놈들로 주변이 어두워졌다. 일제히 움직이는 동작에 모습을 숨기고 있던 이들도, 기쁨을 만끽하며 긴장감을 놓았던 대원들도 재빨리 자세를 갖췄다.
거만하게 굴던 재민도 웃음기 사라진 얼굴로 그들을 보고 있었고, 여태껏 힘을 죽이던 재혁도 거침없이 실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결박당했던 놈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막고 있는 이들을 벗어나 나의 목을 죄어왔다.
“컥……!”
“아~ 진짜, 좀 더 놀고 싶었는데. 큰 판은 정신만 사납단 말이야.”
여태껏 들었던 폭발음과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새롭게 공격들이 쏟아졌다. 보호막을 펼쳐주는 이들이 아니었다면 그대로 형체도 없이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정신을 차리고 숨을 들이마셨을 땐 형형색색의 빛들이 날아다니며 바람 소리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몸을 부딪치는 것만으로도 공기층이 파장을 일으키며 충격을 전했다.
천둥 치는 소리가 들린 지 얼마 되지 않아 지진을 일으키며 무너지는 건물 속에서,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나온 덕에 뭉개지는 꼴을 면했다.
햇살이 내리쬐며 달궈진 땅과 다르게, 하늘은 어둑하고 한 치 앞을 보기도 힘들었다.
“넋 놓고 있지 마.”
종잇장처럼 허리를 안긴 채 복잡한 사람들 사이를 유연하게 지나쳤다. 그의 손으로 빨려간 공기들은 먼지 속으로 사라졌다가 빨래를 쥐어짜듯 짜부라지고 일그러진 놈들을 끌어왔다.
폭죽이 터지듯 피부를 터트리고 나오는 뼈와 액체가 바닥을 적시며 추락했다. 지나치게 잔인한 죽음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놔. 내가 걸을 수 있어.”
나의 말을 들을 리 없는 그는 나를 놓아줄 생각 자체가 없어 보였다. 어디서 날아오는지도 모를 날카로운 조각들은 나의 피부를 뚫지 못하고 맴돌다가 흩날릴 뿐이었고, 덩치를 자랑하는 놈들이 코앞까지 와야 보였다.
회색으로 물들어버린 일대 탓에 떠밀려오는 공기로 그들의 접근을 알아차려야 했다. 이미 상태가 좋지 않았던 그도 과하게 힘을 쓴 탓에 버거워 보였다. 그런데도 그는 필요 이상으로 시체를 뒤틀며 지나갔다.
“예상했던 것보다 놈들의 숫자가 많았어. 위치 정보도 어디서 새어나간 건지 대기하고 있던 놈들한테 당하기까지 했고…….”
그는 나의 뒤를 노리는 녀석까지 상대하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그의 발에 밟힌 놈은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머리가 깨졌다. 그는 활동하기 불편했는지 고글과 마스크를 집어 던졌다.
달아오른 볼과 다르게 그의 입꼬리는 살짝 올라가 있었다. 그는 소음이 가득한 곳에 서서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가 다시 발을 떼며 말을 이었다.
“채혈과 감금을 했던 흔적이 남아 있긴 했지만 이미 백골이 된 송장이나, 구더기가 끓거나 산짐승한테 뜯긴 시체가 다였어.”
“……이번에도 허탕 쳤다는 소리야?”
총을 뽑아 달려드는 한 놈의 머리를 박살 낸 그는 풀어 헤쳐진 담요 사이로 드러난 나의 배를 쓸었다. 차가운 그의 손에 밀려, 땀으로 축축해진 등이 나무에 부딪쳤다. 망설임 따윈 없는 그의 새빨간 눈동자는 평소와 다르게 불안정적으로 폭발을 일으키며 보랏빛을 띠었다.
“지금부터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겠지.”
“그래서?”
“한창 전쟁 중이잖아.”
그는 나의 턱을 잡고 치켜들었다. 희미하게 지은 미소 뒤에서, 그의 눈동자에 새겨진 빛들이 터지며 산만하게 움직였다. 그는 마음껏 내 몸을 더듬으며 목에 얼굴을 처박았다. 그렇게 망설임 없이 이를 드러냈다.
차갑게 닿는 촉감에 몸이 식었다.
“개새끼야…….”
그의 허벅지에 꽂혀 있던 단도를 들어 거침없이 살을 뚫는 놈의 목에 겨눴다.
“그놈은 나한테 총을 던져줄지언정 목을 물어뜯진 않아.”
일대는 시간이 사라진 듯 모든 움직임이 멈추었다. 고요했다. 썩은 냄새와 풀 내음이 묘하게 섞여 구역질이 나던 대기는 이제 반사적으로 라벤더 향으로 뒤덮였다. 위협도 되지 않는 칼을 들고 있는 손에 온기가 닿았다.
목을 파고들던 놈의 입이 우악스럽게 벌어졌다 닫히기를 반복했고, 눈알은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았다. 바닥에 발을 딛지도 못한 채 공중에 뜬 놈을 봤다.
놈의 눈은 서서히 푸른색 빛으로 물들었고, 조각상 같던 얼굴은 울룩불룩 일어나 주름투성이로 변했으며, 머리카락은 색을 잃고 회색빛으로 바랬다.
퀭한 눈이 돌아간 곳을 보니 피를 토하는 재혁이 비틀거리며 겨우 서 있었다. 그의 어깨는 뼈와 근육이 그대로 보일 만큼 망가진 상태로, 지금은 살을 채워가고 있었지만 그래봐야 상처가 벌어져가는 것보다 턱없이 부족한 속도였다.
“잘 아네.”
재혁은 바닥에 피가 섞인 침을 내뱉고 그 자신의 총을 던져주었다. 익숙하게 일렁이는 그의 눈동자는 언제나처럼 나의 시선을 빼앗아갔다.
오차 없이 날아간 총알들이 놈의 머리와 가슴을 통과했다. 다른 놈이라면 움직임도 없이 고꾸라질 양이었지만 그는 기절도 하지 못했고 괴성을 멈추지 않았다.
울부짖는 소리와 함께 모든 이들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며 무릎을 꿇었고, 불순물들은 바람에 쓸려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은 채 10초도 되지 않는 사이였다. 잠시나마 참고 있던 숨을 쉬자마자 그들의 손에서 형형색색의 결정들이 흘러나와 하늘을 뒤덮었다.
“읏……!”
하늘을 덮었던 결정들은 표적 없이 그대로 내리꽂혔다. 사람들의 비명이 무색하게 일대에선 작은 꽃잎들이 흩날릴 뿐이었다.
제로 놈들의 피에 절어버린 이들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보잘것없이 터지고 말라비틀어진 제로의 몸이 바닥에서 꿈틀거리며 기어 다녔다.
모두가 흔적만 남기고 사라지는 동안에도 온몸이 새빨개진 놈은 자리를 뜨지 못하고 있었다. 놈의 치아가 부딪치던 소리는, 재혁이 쓰러지고 나서야 멈추었다.
공중에 떠 있던 놈은 바닥으로 떨어지며 삽시간에 말라버렸다. 물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몸에 눈이 뻥 뚫려 있었고, 입을 괴이하게 벌린 채 사지를 뒤틀며 그렇게 굳어버렸다.
사태를 파악하려고 애쓰던 이들은 여전히 주변을 경계하며 웅성거렸고, 작은 소리가 합쳐져 시끄럽게 울렸다.
[……혁, 무슨 짓을 한 거야?!]
그의 인이어에서 팀장님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꿈틀거리며 채워져야 할 그의 살은 작은 움직임도 없이 잠잠했다. 굳은 다리를 움직여 그에게 다가갔다. 얕게 쉬는 숨마저 곧 끊길 듯 불안하게 이어졌다.
“야, 장난하지 말고 일어나라.”
아무리 건드려도 그는 주먹을 날리지 않았고, 거들먹거리며 나를 쓰러트리지도 않았다. 축 늘어진 녀석을 돌려 눕혔다. 그리고 들고 있던 칼로 내 손을 베어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손을 그의 입가에 대어주어도 그는 삼키지 못했고, 액체는 달아오른 얼굴을 타고 흘러내릴 뿐이었다.
“먹으라고, 미친놈아. 줘도 못 먹냐? 이럴 거면 뭐 하러 그렇게 당당했는데…… 여기 다 네 냄새만 진동하잖아!”
나와 그를 찾는 목소리가 작은 이어폰을 통해서 들려왔다.
[……디 있어!]
“오늘 당한 건 누구한테 풀라고…… 승아한테는 뭐라고 해야 하는 건데……!”
잘난 척이라도 하질 말든가. 이렇게 허무하게 쓰러져버릴 거면 끝까지 못되게 굴었어야지. 왜 쓸데없이 잘해줘서 신경 쓰이게 만드는 건지.
“씨…… 직접, 진짜……!”
들고 있던 단도로 혀끝을 베어냈다. 소름 끼치는 감각을 끝으로 굵직하게 지나가는 핏줄을 터트리고 나니 감당도 되지 않을 만큼 피가 흘러 입안에 고이기 시작했다.
까다로운 녀석의 취향에 맞춰주었다. 눈을 감은 채 시체처럼 누워 있는 녀석의 상체를 일으켰다. 그의 목덜미를 잡은 손이 화끈거렸다.
재혁의 고개를 젖히자 그 반동으로 입이 벌어졌다. 쇠 비린내 나는 액체를 그의 입안으로 흘려보냈다. 베인 상처의 쓰라림도 무시한 채 그의 입속을 훑었다.
“으…….”
들어갈 생각이 없는 송곳니가 상처에 걸려 살을 헤집었지만, 꿀꺽거리는 소리에 떨어질 수가 없었다. 액체로 더럽혀진 입술 사이에서 그가 움찔거렸다.
축 처져 있던 그의 목에 조금씩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혀에 갑작스럽게 닿은 뭉클한 감촉에 놀라 떨어지려던 순간, 물러나는 속도보다 빠르게 다가온 그의 속도에 이기지 못하고 더욱더 깊게 부딪쳤다.
“잠……!”
나의 뒤통수에 닿은 뜨거운 손이 머리카락을 파고들며 머리통을 감싸 쥐었다. 물러나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잡혔다. 그의 눈동자는 평소보다 격하게 나를 옭아맸고, 나른하게 뜬 눈에 내 얼굴이 화끈거렸다. 방전되었던 그의 몸은 브레이크 따위 사라진 뒤였다.
그는 멈출 줄 모르고 흐르는 피를 조금이라도 더 앗아가기 위해 열심히 입안을 파고들었다. 이제 입술을 적시는 축축한 액체가 침인지 피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놓칠 수 없다는 듯 부드럽게 핥아오는 그의 혀에 입술이 쓸렸다.
“뭐 하는…….”
생경한 감촉에 그를 밀쳐냈다.
“하아, 하…… 크읏……!”
고통과 쾌락의 사이에서 나에게 달라붙은 녀석은 회복되기 시작한 어깨가 괴로운지 연신 신음을 내뱉었다. 상처를 자꾸 손으로 뭉개는 탓에 차오르는 살들은 다시 일그러지기를 반복했다.
“으윽.”
이래서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하나 보다. 그 수많던 안 좋은 기억보다 조금 친절히 굴던 그놈이 떠올랐으니까.
“……빚진 거 갚는 거다.”
다시 상처를 헤집으려는 그의 손을 잡아챈 뒤 그가 원하는 대로 굴어주었다. 손아귀에 주던 힘을 풀자 이제 그는 나의 얼굴을 감싸왔다. 질척거리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비릿한 액체를 그에게 넘겨주기 위해 몸을 높였다.
어정쩡하게 무릎을 꿇고 있던 몸은 그의 손에 들려 허벅지에 안착했다. 복잡했던 마음을 다 내려놔버리니 그제야 무슨 짓을 했는지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하지만 밑에 깔린 녀석은 이제 시작을 알릴 뿐이었고, 다급했던 움직임은 나를 달래듯 부드러워졌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고 오랜만의 접촉에 몸은 열심히 반응하고 있었다. 화끈거리던 그의 손은 제법 서늘한 감촉을 되찾아가면서 열 오른 나의 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하…….”
미련 없이 떨어진 입술이 아쉬워 그의 옷깃을 잡고 입술을 빠는 순간, 뒤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몸이 경직되었다.
“뭐 하세요.”
생전 처음 듣는 태주의 낮은 음성에 뒤를 돌아볼 엄두가 안 났다.
“그…….”
내 입은 살짝 벌어진 채 뻐끔뻐끔할 뿐이었다. 뒤통수가 따가운 게 태주만 있는 게 아닌 것은 확실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재혁의 위에서 일어났다.
자극받은 몸을 담요로 둘둘 말아 감추고 태연하게 뒤를 돌아보았을 땐 더는 안면 근육을 태연하게 끌어올릴 수 없었다.
언제부터 와 있었는지 모를 팀장님과 표성까지 서 있었고, 입을 틀어막은 인파가 우르르 몰려들어 있었다. 이렇게까지 집중을 받을 일인가 싶다가 뒤에서 소매로 입을 벅벅 닦아주는 덕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
입안에 자꾸 고이는 피를 바닥에 뱉으려는데, 그는 아무렇지 않게 내 볼을 잡고 입을 벌려 훔쳐갔다. 현장에 있던 의료팀에 의해 혀를 꿰맬 때까지 화끈거리던 얼굴을 감출 수가 없었다.
***
그 난리를 치고도 언제 그랬냐는 듯 햇볕은 쨍쨍 내리쬐고 새소리가 울려 퍼졌다. 개미들은 열심히 줄을 맞춰 기어 다니며 밥을 옮기고 있었고, 풀숲에선 이름 모를 벌레들이 팔딱거리며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구급차 끄트머리에 함께 앉아 있던 표성이 먼 산을 바라보며 정적을 깼다.
“너도 사람은 사람이었구나.”
“그렇게 아련하게 말하지 마세요. 그런 거 아니었으니까.”
어지러운 머리를 진정시키느라 쉬고 있는데, 현장은 수습하느라 정신없이 붐볐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틈에서 꿰맨 혀를 날름거리고 앉아 있으니 실밥은 자꾸 이에 걸리고, 열심히 빨아댄 덕에 부은 입술과 혀가 평소와 달라 자꾸 신경 쓰였다.
아직도 코끝에 그의 향이 걸려 있는 듯했다.
“언제부터…… 그, 평가 날부터? 아닌데. 그날은 분명 아니었는데.”
“……그만하십시오. 그런 거 아니라고요.”
“귀가 빨간데.”
“더워서 그런 겁니다. 더워서.”
[한 시간 뒤 철수하겠습니다.]
손끝부터 팔뚝까지 죄 연고를 덕지덕지 바른 탓에 자세도 불편했다. 옷도 입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앉아 계속 오가는 결과 보고들을 듣고 있자니 허무했다.
“공장이 진짜로 있긴 한 겁니까? 거짓말 아니고요? 제로 놈들과 붙을수록 늘어나는 건 정보도 아니고, 구출도 아니고 상처뿐인 것 같은데요.”
살아남은 이가 없다고 해도 믿을 만큼 일대는 엉망이 되어 있었다. 수습이라고 해도 특별할 것 없이, 아직 꿈틀거리는 놈들은 확인 사살하고 쓸모 있어 보이는 놈들은 잡아가는 것뿐이었다.
“뜬소문은 아닐 거야. 양구에서 살아남은 애들이 발견됐거든. 차차 조사하다 보면 뭔가 걸리는 게 나오겠지. 저기 실려 가는 시체에서도 뭔가 나올 수도 있고. 그러니까 작작 다치고 다녀라. 어디 가서 조직 폭력배로 의심 안 받는 게 신기하다.”
“팀장님도 있는데요, 뭘.”
재혁이 살리려고 했던 놈은 황태 신세가 되어버린 채, 비닐과 천에 두 겹이나 싸여서 들것에 실려 가고 있었다. 피를 토하는 몸으로도 이 정도까지 파급력을 발휘할 놈이었다면 대체 팔팔할 때에는 어느 정도일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아, 넌 근데 다 죽어가다가 어떻게 몇 시간 만에 멀쩡히 돌아와? 마지막으로 볼 때 피를 토하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는데.”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궁금하네요.”
“네가 모르면 누가 알아.”
“글쎄요.”
평소라면 후련한 마음이라도 가지고 쉴 수 있었으련만, 십여 년 만에 마주한 아버지의 얼굴이 자꾸 떠올라 가슴 한구석이 먹먹했다. 갑자기 나타나서 한순간 사라져버린 그 얼굴을 다시 까먹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비록 진짜가 아니었더라도 잠시나마 들었던 말들이 좋아서,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그가 떠올라서.
아마 그곳을 벗어나지 않았다면 그렇게 합리화를 해가며 나를 놓았을지도 모르겠다.
끈질기고 독한 놈이라는 소리를 많이 들어서 자신도 그 말이 맞다고 생각하며 살았건만, 트라우마라는 벽을 마주하는 순간 무너져버리는 자신을 보면 하찮음 그 자체였다.
“지원 나왔던 대원들은 다 어디 간 겁니까? 도와주려면 수습도 좀 도와줄 것이지, 바로 없어지네.”
불쑥 나타난 태주가 손을 흔들며 대답했다.
“꽃잎이 촤랄라 하늘에 흩날리고 나서 바로 없어졌는데 못 봤어요? 그때에도 재혁 님이랑 붙어먹고 있으셨……!”
의식의 흐름대로 지껄여대는 녀석의 무릎을 차버렸다.
“아! 왜 때려요!”
“붙어먹고 다니는 건 너잖아. 첫날엔 현장에서 뛰겠다고 난리 치던 애가 왜 저러고 있어?”
나무 그늘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하늘을 본 표성이 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고, 태주는 억울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엄, 누군가 그랬죠. 편한 삶은 세상에 굴복하는 거라고요.”
“누가 그런 소리를 해.”
“기린 현태주 선생이요.”
재혁은 팀장님과 이야기를 하며 사람들 사이를 걷고 있었다. 너덜거리던 옷을 벗어 던지고 당당하게 몸을 드러내놓고 있는 놈의 몸은 햇빛을 바로 받으니 눈이 부실 정도였다. 무슨 심각한 이야기를 하는 건지 손짓까지 해가며 대화를 하다가도 금방 활짝 웃었다.
남은 지쳐서 처량하게 벽에 머리나 기대고 앉아 있는데 그는 언제 다쳤냐는 듯 멀쩡히 돌아다니며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내 덕에 저렇게 팔팔하다고 생각하니 그를 뜯어먹어서라도 골골거리는 내 몸을 고치고 싶었다. 괜히 그를 보며 입술을 쓱쓱 닦다가 이상한 눈초리까지 받아야 했다.
저놈이야 생명이 걸린 문제였다고 쳐도 나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하고, 또 그것도 모자라 떨어지는 녀석의 옷깃까지 잡았는지. 괜히 죄 없는 머리카락만 쥐어뜯었다.
그저 오래간만에 해보는 스킨십 때문에 그런 것이라며 나를 다독일 수밖에 없었다.
***
열심히 굴려먹은 게 내심 미안했는지 대원들에겐 휴가가 주어졌고, 다들 약속이라도 한 듯 모두 관사로 들어갔다.
당연하게도 나는 재혁과 그 일에 대해 언급을 하지 않았다. 아니, 문 앞에 올 때까지 대화라는 것 자체를 하지 않았다는 말이 더 맞을 듯했다.
“먼저 씻어.”
그는 내가 집 안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욕실부터 가라고 권했다. 같은 곳에서 굴러놓고 혼자만 더러운 사람 취급을 받는 게 억울했지만, 찝찝해서 빨리 씻어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불만은 없었다. 신발을 벗기 위해 허리를 숙이자 얼마나 피를 빨린 건지 몸이 휘청거렸다.
나를 붙잡는 녀석의 손을 반사적으로 쳐냈다. 천천히 고개를 드는데 아이가 쏜살같이 튀어나왔다. 밑층이 비었으니 다행이지, 안 그랬다면 층간 소음으로 원수를 만들게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왔다!”
아이는 큰 소리로 외치며 당연하다는 듯 그의 품에 풀썩 안겼다. 이젠 놀랍지도 않았다. 너덜너덜한 티셔츠를 벗어 쓰레기봉투에 집어넣는데, 아이를 돌보던 아주머니가 나갈 채비를 끝내고 나오셨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아주머니는 얼마나 말랐는지 카디건을 걸치고 있는데도 튀어나온 관절이 다 느껴질 정도였다. 그녀는 거리낌 없이 나의 몸을 만지며 이곳저곳 살폈다. 별 큰 상처가 없는 게 민망했다.
“어유, 오늘 무슨 큰일이 있긴 있었나 봐요. 안색도 안 좋고 상처가 이렇게 많이 나서 어떡한담!”
조금은 어눌한 말투로 대답했다.
“큰 상처는 아닙니다. 오늘은 별일 없었습니까?”
근심 어린 표정으로 호들갑을 떠는 이에게 대답하려니 입안이 따끔거렸다. 꿰매놓은 상처의 마취가 풀리고 있는 데다 계속 마찰되는 탓에 움직일 때마다 같은 상처를 내는 느낌이 들었다.
“제 엄마가 보고 싶다고 좀 울긴 했는데, 그것 말곤 밥도 잘 먹고 잘 놀았어요.”
말끝을 줄이던 여자는 들고 있던 가방을 만지작거리며 승아를 보더니 다시 힘이 실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휴, 어찌 된 연유로 이렇게 동생을 데리고 사는지는 몰라도 아이랑 시간을 많이 보냈으면 좋으련만. 여기가 많이 바쁘긴 하죠? 참 만만찮은 곳이긴 해요.”
“예…… 뭐.”
“지금도 똑 부러지게 말도 잘하고 스스로 하려고 노력하는 거 보면 크게 될 아이 같은데. 사랑만 듬뿍 주면 얼마나 예쁘게 자랄지 기대가 된다니까요.”
뭐라도 변명을 해야 하나 싶었는데 구구절절 맞는 얘기라서 할 말이 없었다. 탐탁잖은 대답을 하며 얼굴을 구기는 나를 본 그녀는 허둥지둥 밖으로 나갔다.
“아이고, 내가 주제넘은 말을 했나. 알아서 잘 키울걸. 기분 나쁘게 듣지 마요. 사람이 늙으면 이렇게 자꾸 말이 많아진다니까.”
“……아닙니다.”
“모셔다드릴 테니 잠깐만 기다리세요.”
“아니에요. 신경 쓰지 말고 쉬어요.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살고 있으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그녀는 데려다준다는 재혁을 막으며 급하게 떠났다.
왠지 죄인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어정쩡하게 입을 벌리고 욕실로 들어가는데 아이가 잡는 탓에 다시 발을 멈추어야 했다. 기대에 찬 눈빛에 무슨 말을 하려나 싶어 집중하는데, 승아는 커다란 샌드위치가 담긴 접시를 불안하게 들고 왔다.
“오늘 저녁엔 아주머니랑 같이 샌드위치 만들어 먹었어요! 주려고 남겨놨는데! 먹어요!”
재혁이 음식을 먹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는 아이는 나에게 먹어야만 한다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음식을 보자 배가 고파져서 하마터면 바로 받아 들 뻔했다.
신체에 고문을 가하면서 아이의 기대에 부응해주느냐, 고통에서 조금 떨어져 있으면서 아이에게 거절을 주느냐의 선택지에서 나는 당연히 후자를 택했다.
아이가 흔들거리며 들고 있는 접시를 받아 들었다.
“미안. 못 먹어.”
“왜요?”
승아의 울상에 재혁은 세상 친절한 목소리로 부드럽게 이야기했다.
“이거 다시 만들 수 있어?”
“응.”
“그럼 다음에 같이 만들어서 먹자. 오늘은 몸이 안 좋아서 먹기 힘들대.”
승아는 실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의외로 손쉽게 나의 의사를 인정하고 권유하기를 포기했다. 대신 승아의 시선은 그에게로 옮겨갔고, 나는 그에게 접시를 넘겨주었다.
“……먹을래요?”
다시금 미소를 찾은 걸 보니 애초부터 그에게 주고 싶었던 게 틀림없어 보였다. 재혁은 난처하다는 눈으로 아이를 보다가 진한 향기를 풍기는 샌드위치를 집어 들었다.
과연 그가 재료가 잔뜩 섞인 샌드위치를 먹을까 싶어 욕실로 들어가지 않고 지켜봤다. 그는 편식이라도 하는 아이처럼 안에 있는 내용물을 유심히 보다가 입을 크게 벌려 한입 물었다. 참치가 섞인 마요네즈가 그의 입가에 묻었다.
“…….”
나름대로 평온한 얼굴로 우물거리고 있었지만, 목의 핏대가 심각하게 서 있었다. 강요한 것도 아니고 본인이 자처한 일이었다. 그가 무언가 씹고 있는 희귀한 장면을 집중해서 구경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가 시선을 돌렸고, 나는 도망치듯 욕실로 발길을 옮겼다.
거울에 비친 모습은 말 그대로 만신창이였다. 물을 뿌려도 되나 싶었지만 씻지도 않고 이불에 문댈 수는 없었다.
온종일 찝찝한 액체를 머금었던 입을 헹구고, 물이라도 끼얹자는 심산으로 샤워기를 틀었다. 온몸의 털들이 쭈뼛쭈뼛 섰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여유는 생각할 시간을 주었고, 하루를 곱씹는 쓸데없는 짓을 하게 만들었다. 하루가 지나갈 때마다 내가 어떻게 살아 있나, 이런 경험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싶었지만, 정신없이 흘러간 날들을 막상 이렇게 곱씹고 있으니 별거 아닌 것 같았다.
잊고 싶은 일은 꿈이었다고 생각하며 숨기면 되는 일이었고, 갖고 싶은 기억은 되뇌고 또 되뇌며 머릿속에 각인해두면 되는 일이었다.
목을 죄던 놈의 존재가 무엇이고 또 어떻게 나에 대해 그렇게 잘 알고 있는지 알 순 없었지만, 다정했던 생전의 그 모습과 목소리, 그가 해줄 법했던 말들을 들었던 짧은 순간을 지우고 싶지 않았다.
새로이 뚫린 상처들은 다행히 들쑤셔지지 않아 자리가 남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오늘은 더 빨리 일어설 수 있을 듯했다.
미지근한 물을 맞으며 서 있다가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 샴푸나 눌러 짜곤 머리를 벅벅 문질렀다. 떨어지는 거품에 눈이 따가웠다. 샤워기로 얼굴을 들이대자 물줄기들이 쪼아대면서 거품을 씻어 내렸다.
가늘지만 힘차게 때리는 물에 얼굴을 문대다가 문득 떠오르지 않아도 될 기억들까지 불쑥 튀어나왔다. 괜히 입술을 닦는 바람에 혀에 힘이 들어갔다. 황급히 입을 벌리곤 내적 비명을 지르는데 들리면 안 될 목소리가 들렸다.
“샤워 재밌게 하네.”
잘못 들었나 싶어 고개를 돌린 곳엔 그가 있었다. 헛것이라도 봤나 싶어 눈을 문지르고 다시 봤지만 똑같았다. 눈앞에 서 있는 놈은 태연하게 이를 닦았다.
당당한 모습에 당황하고 있는 내가 이상해 보일 정도였다.
“허.”
하얀 거품을 증식시키며 칫솔질을 하던 그는 나의 감탄사를 들으면서 시선을 떨궜고, 나도 모르게 그의 시선을 따라 내려갔다. 그제야 내가 아무것도 입지 않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동시에 고개를 들어 올리며 한 번 더 그와 눈을 마주치자 얼굴이 홧홧해졌다.
황급히 가리는 것도 유난을 떠는 것 같아 아무렇지 않은 척 샤워기를 껐다. 타일을 때리던 물소리가 없어지고 나니 신경은 더 그에게 쏠릴 뿐이었다. 수건으로 밑을 가리고 머리를 털 때까지 그는 열심히 제 할 일을 하며 태평하게 입까지 헹구고 있었다.
빨리 나가야 한다는 직감에 손잡이를 잡았지만 대차게 밀어버리는 하얀 손에 빼꼼 열렸던 문은 닫혀버렸다.
“뭐 하냐……?”
돌아보지도 않은 채 물었지만, 발음이 새는 덕에 정말 같잖게 들렸다. 손을 뗄 생각이 없어 보이는 그는 딱지가 앉아 우툴두툴한 나의 손끝을 매만지며 말했다.
“음식 못 먹겠으면 냉장고에 주스랑 우유 사놨으니까 그거라도 마시라고.”
고작 그런 말을 하려고 이 난리를 피웠다는 말인가. 바로 뒤에서 서늘하게 느껴지는 기운 탓에 젖은 몸이 식어갔다.
“……욕실 에티켓이나 좀 지켜라.”
최대한 또박또박 말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아마도 듣는 놈에게는 부족했겠지만.
이틀은 자고 난 것처럼 개운할 거라더니 정신적인 피로와 상관없이 잠이 오지 않았다. 마치 카페인을 과다 복용했을 때의 느낌이랄까. 이럴 거면 뱀파이어들 몸처럼 상처도 좀 아물게 해주는 걸 먹이든가!
밤이 되어도 떨어지지 않는 온도에 에어컨을 틀어놓았다. 옆에서 자는 아이는 이불을 몸에 둘둘 감고서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이불을 빼앗아 갈 수도 없고 깊이 자는 아이를 두고 뒤척거리는데 배까지 고프기 시작했다.
식탁에는 반쯤 먹다 남은 샌드위치가 있었다. 나는 왜 자꾸 그놈 입술에 묻은 마요네즈만 기억이 나는 건지…… 고통을 참고 먹을까 싶다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설마 하고 열어본 냉장고엔 그의 말대로 팩에 든 갖가지 맛 우유와 과일주스가 줄 맞춰 놓여 있었다. 왠지 새콤한 맛은 입안에 자극만 줄 것 같아 바나나우유를 집어 들었다.
우유 옆에 있던 빨대를 꺼내 꽂았다. 쪽쪽 빨고 있으니 꼬맹이가 된 것 같아 기분이 묘했지만, 차가운 액체 덕에 불붙은 혀가 잠잠해지고 있었다.
손바닥만 한 용기의 우유는 금세 바닥을 드러냈고, 몸 상태를 보아하니 자기는 그른 듯 보였다. 바나나우유를 하나 더 꺼내 들고 가방을 뒤졌다.
혹여나 이불에 묻을까 봐 바르지 못하고 있던 연고를 꺼낸 뒤 식탁에 앉았다. 휴대전화 빛에 의존해서 상처를 찾아 꼼지락거리는데 자는 줄 알았던 놈이 일어나 주방으로 와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재혁은 물을 마시고도 나의 뒤에 계속 서 있었다. 몽유병이라도 생겨버린 건가 싶어서 하던 일을 멈추고 뒤에 있는 녀석한테 귀를 기울였다.
“……뭐야?”
잠잠하나 싶더니 갑자기 쑥 들어온 손이 바르고 있던 연고를 훔쳐 갔다. 그는 한숨을 쉬며 낮게 읊조렸다.
“밤마다 안 자고 뭐 해? 잠 좀 자자.”
이게 누구 때문인데?
“잠 안 와.”
“왜. 끌어안고 잘 팔이 없어서?”
“……뭐라는 거야.”
“그놈이 하는 얘길 들을 땐 긴가민가했는데 반응 보니까 맞나 보네. 어쩐지 잘 때마다 뭘 자꾸 끌어안고 자더니.”
“그걸 다 듣고 있었어?”
“봤지.”
그 모습을 그 수많은 이들이 다 보고 있었다는 뜻인가. 새로운 의미로 충격적이었다.
어처구니가 없어 입을 벌리며 돌아서는 순간, 가까이 붙어 서 있던 녀석의 몸에 얼굴이 부딪쳤다. 혀에 퍼지는 찡한 고통에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끙끙 앓다가 입안 가득 냉기가 남은 우유를 물었지만, 내 턱을 잡고 들어 올리는 그의 손아귀 힘에 고개가 젖혀져 꿀꺽 넘어갔다.
“으, 보고 있을 시간이 있었으면……!”
그는 나의 턱을 그대로 잡은 채 내 아랫입술을 훑었다. 태연히 입안을 헤집고 들어오는 그를 밀쳐냈다. 그는 맥없는 힘에도 순순히 뒤로 물러났다. 그의 입술이 지나간 시간은 짧았지만, 기억을 상기시키기엔 무리가 없었다.
“다음부터 싫으면 이렇게 거절을 해. 매번 가만히 앉아서 손 놓지 말고.”
“뭐?”
“좋아서 그러는 거 아니잖아. 싸울 때에는 잘 뻗대다가 왜 그러는 건데.”
그의 말은 마치 나를 나무라는 것 같았다. 내가 인지하고 생각하던 내용이었다고 한들, 같은 내용을 남의 입으로 듣는다는 건 막연하게 품던 추측에 확인 도장을 찍는 일이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앉아 있었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우유 용기를 집어 싱크대에 넣었다. 흐른 우유가 그의 손에서 뚝뚝 떨어졌다.
“나한테 매번 소리 지르는 것처럼, 발악이라도 하면서 끝까지 표현하라고. 그래야 도와주든 말든 할 거 아니야.”
그가 바닥을 닦고 손을 두 번이나 씻을 때까지 멍청하게 앉아 있었다. 금방 자리를 뜰 줄 알았던 그는 싱크대에 말없이 기대 있었다.
탈출을 꿈꾸는 달팽이가 느린 발걸음으로 통 속을 돌아다녔다. 고작 한 뼘을 움직이는 데 10분이 넘게 걸렸다. 지나간 길목마다 남은 자국이 그간 작은 생명체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보여주고 있었다.
손끝에서 미끌거리는 연고를 문질렀다. 휴대전화 조명이 꺼지자, 빛을 받아 반짝이던 투명한 액체는 이제 촉감으로만 느껴졌다. 찝찝한 나머지 옷에 문대는데 그가 나의 손목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안 졸…….”
“안 졸려도 누워 있어. 나 좀 자게.”
“네가 자는 거랑 나랑 무슨 상관이 있……!”
그는 나를 질질 끌고 가 침대에 내동댕이치고는 무심하게 이불을 전부 내어주었다. 푹신한 침대에 누워 있자니, 바닥에서 열심히 헤엄치고 다니는 승아를 배신한 기분이었다.
승아에게 매트리스건 침대건 뭐라도 사줘야겠다고 생각하며 에어컨이 돌아가는 소리에 집중했다. 허리가 뻐근한 느낌에 왜 그런가 했더니 그가 던져놓은 그대로 어정쩡하게 자세로 누워 있던 탓이었다. 그가 나의 쪽으로 구깃구깃하게 말아놓은 이불을 끌어안고 얼굴을 묻자 익숙한 향이 확 퍼졌다.
뭐든지 반복하다 보면 익숙해진다고, 맡기 싫었던 그의 냄새도 24시간 맡고 있으니 오히려 안정감을 줬다. 그렇게 탐지견이라도 된 듯 킁킁거리며 이불에 얼굴을 처박고 있었다.
에어컨이 꺼지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고개를 들어 방 안의 공기를 크게 들이켜는데, 옆에 누워 있는 놈이 눈에 들어왔다.
“아.”
그는 어김없이 바른 자세로 천장을 보며 누워 있었다. 오늘은 뭔가 심각한 꿈이라도 꾸는 건지 미간을 좁히고 있었다.
보고 있는 내내 자세를 바꾸지 않는 녀석이 신기했다. 매번 정자세로 잠이 들 때면 가위눌리든 악몽을 꾸든 둘 중 하나는 꼭 걸리는 덕에 잘 때에는 절대 취하지 않는 자세였다. 그를 자세히 보고 있자니 점점 심해지는 미간의 주름에, 덩달아 내 얼굴까지 찌푸려졌다.
사람은 표정에 따라 감정과 성격이 변한다고 했다. 나라고 다를 게 없었다.
“……그런 무식한 놈들한테 깔리는 게 좋았을 리가 없잖아, 이 재수 없는 새끼야.”
자던 놈이 말 끝나기 무섭게 눈을 뜨는 덕분에, 하마터면 침대에서 떨어질 뻔했다.
“……!”
손목을 잡고 끌어당기는 힘에 고꾸라지려는 몸을 간신히 팔로 지탱했다. 옆으로 보이던 그의 얼굴이 이젠 정면으로 보였다. 그는 손을 뻗어 나의 목을 감싸 쥐곤 천천히 끌어당겼다. 차가운 그의 손에 나의 맥박이 고스란히 전달되고 있었다.
움찔거리기만 해도 코가 닿을 거리에서 그는 멈췄다. 꽤 많은 피를 마셨을 놈은 은은하게 빛나는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규칙적으로 내뱉던 숨이 조금 빨라졌고 괜한 긴장을 하는 바람에 큰 소리로 침을 삼켰다.
“…….”
천천히 나를 끌어당기던 그는 고개를 살짝 젖히며 나의 입술을 빨았다. 힘이 들어가던 그의 손이 옮겨와 나의 턱을 간질였고 또다시 입술이 맞닿았다 떨어졌다. 그의 타액에 젖은 입술을 깨물며 시선을 피했다.
평생 거칠게만 부딪쳤던 입술에 전해지는 간질거림과 낯 뜨거운 상황에 혼란스러웠다. 매번 을의 위치에서 상대의 눈치를 봐가며 움직이던 때와 달랐다. 앞에 있는 녀석은 착실히 나를 보고 있었고, 닦달하지 않았다.
평소라면 빨리 끝나길 바라며 늘어지는 상대를 부추겼겠지만, 오늘은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나를 공황 상태로 만들었다.
“싫어?”
그는 나에게만 들릴 법한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여전히 나른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부드러운 손으로 나의 턱선을 쓰다듬었다. 그가 강요한 일도 아니었고 무언가 거래가 있는 상황도 아니었지만, 이상하게도 거부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는 뒤로 조금씩 물러나는 나를 끌어당기지도 않았고 표정을 바꾸지도 않았다. 다만 멀어지는 나를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아니.”
벽을 짚고 있던 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싸고 입술을 부딪치자 오히려 누워 있던 놈이 나를 밀쳐내며 진정시켰다. 어디에 시선을 두어야 할지 난감해 흔들리는 눈동자를 그는 빤히 보고 있을 뿐이었다. 손에 힘을 풀자 그는 다시금 턱을 잡아당겨 키스했다.
나와 체온이 같아진 그의 손은 점점 더 따뜻해졌다. 상대가, 그리고 내가 왜 이렇게 행동하는지 이해하기를 포기했다. 그냥 매일 하는 실수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적어도 이건 쌍방과실이니까.
“윽.”
베인 혀가 접촉할 때마다 찌릿한 고통이 전해졌다. 그는 움찔거리며 뒤로 밀리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뒤통수를 감싸 잡으며 몸을 일으켰다. 얇은 옷 위로 스치는 그의 손가락이 그대로 전해졌다.
집요하게 입술을 부딪치던 상대는 귓바퀴를 만지작거리다가 입술로 목 언저리를 간질였다. 얼마 안 가 질척한 혀가 살에 닿는 느낌에 내가 무슨 불을 붙여버린 건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간간이 살에 닿아오는 송곳니에 초조함이 찾아올 때면 그는 귀신같이 눈치채고 입술을 맞대어왔다.
“하…….”
귓가에서 들리는 그의 한숨 소리에 심장이 더 빠르게 뛰었다. 아마도 다 느껴질 테지. 숨길 것도 없이 손을 뻗어 그의 몸을 훑었다. 그의 근육들은 꾸밈없이 작게 쪼개져 하나하나 존재를 드러내고 있었고, 눈으로 볼 때보다 더욱더 자극적이었다.
온몸에 살살 자극을 주는 그의 행동 덕에 착실하게 반응하는 몸은 연신 끙끙 앓는 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자신의 욕구를 풀기 위해 거칠게 몸을 비비던 놈들과 다른 간질거리는 느낌은 나에게 새로운 두통을 선사해줬다. 얼굴이 터질 것 같았다. 불현듯 찾아온 낯간지러운 느낌에 빨리 끝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다려봐.”
그는 자신의 것을 만지려는 나를 제지하곤 나의 티셔츠를 벗겨냈다. 그리고 멋대로 손을 뻗지 못하게 나의 손을 잡았다. 힘을 주어도 재혁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빨갛게 달아오른 녀석의 귀를 잘근잘근 깨물다가 속삭였다.
“……키스해줘.”
뜨거운 숨만 내뱉던 녀석이 움찔거리는 덕에 잡힌 손을 빼냈다. 만만찮은 녀석은 나를 들어 올렸고, 나는 영락없이 그때처럼 그의 다리에 걸터앉게 되었다.
그가 몸을 밀착해왔다. 조금은 급하게 입술을 부딪치다가 뒤로 밀쳐내자 의외로 손쉽게 떨어져 나가는 녀석이었다. 별 의심 없이 그의 밑으로 다시 손을 뻗었지만, 그는 나의 가슴을 막고 거리를 유지했다.
“아, 잠깐만.”
“……또 왜.”
갑자기 흐름을 끊는 놈 때문에 거친 숨만 몰아쉬고 있는데 그의 시선이 옆으로 돌아갔다. 그를 따라 눈을 돌렸을 땐, 등에서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우웅…… 뭐 해요? 승아 목말라.”
……불행 중 다행은 둘 다 바지를 입고 있었다는 거겠지.
아직 졸린 눈을 비비는 아이는 눈을 깜박이며 우리를 보고 있었다. 엉거주춤 맞닿았던 몸을 떨어트리자 에어컨은 다시 일하기 시작했다. 티셔츠를 주섬주섬 입고도 일어나질 못했다. 하루에 두 번이나 중도 하차한 몸은 이제 뻐근해 미칠 지경이었다.
“승아 목말라요.”
“그래…… 잠, 깐만.”
닦달하는 아이에게 대답해주며 그를 봤지만, 그는 조금 열이 올라 있을 뿐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평온하게 앉아 있는 재혁이나, 오늘따라 나에게 필요한 걸 찾는 승아나…… 얄미운 게 똑같아서 잘 맞는 건 아닌가 싶었다.
옷에 몸이 쓸릴 때마다 가시지 않은 감각들이 뚜렷하게 느껴졌다. 열 오른 얼굴은 가라앉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애꿎은 에어컨 온도를 18도로 내려버렸다. 티셔츠라도 펑퍼짐했으니 다행이었다.
비적비적 걸어가 냉장고를 열어 아무 음료수 병이나 꺼낸 뒤 빨대를 꽂아서 줬다. 달콤한 음료를 쪽쪽 빨아 마시던 승아는 바닥에 앉아 나와 그를 번갈아 보다가 나를 향해 말했다.
“아저씨 나쁜 사람.”
……마실 것까지 갖다줬는데 어째서.
그저 선호하지 않는 줄만 알았지 나쁜 사람까지 간 줄은 몰랐다.
“왜 괴롭혀요.”
“내가?”
아이는 빨대에서 입을 떼곤 고개를 끄덕였다.
“쟤를?”
아이는 더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황당한 발언에 고개를 돌리자 그는 턱을 괸 채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오밤중에 공동범에서 단독범이 된 덕에, 압박되었던 밑은 평화를 찾을 수 있었다.
바닥에 멍하게 앉아 음료수를 마시고 있는 아이를 보고 있는데 잘 먹고 있던 아이가 갑자기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엄마는 어디 있어요?”
“…….”
이제 당황할 틈도 주지 않는 아이는 금세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입꼬리를 쭉 내렸다. 한숨을 쉬며 상체를 일으킨 재혁이 나보고 아이를 안고 달래주라며 등을 떠밀었다.
아이는 생각보다 순순히 나의 품에 안겨 고개를 처박고서 똑같은 말만 되풀이하다가, 얼마 안 가 방전된 건전지처럼 다시 잠이 들었다.
돈은 돈대로 나가고 애는 애대로 힘들어하고, 여기저기 민폐를 끼치고 다니는 것 같았다. 수없이 고민했지만, 과연 이게 최선이었나에 대해 자꾸 의문을 품게 됐다.
침대고 이불이고 마음이 답답했다. 한 대 태우러 갈까 싶어 지난번에 담배를 꺼냈던 서랍을 뒤지는데, 이미 들킨 장소에 있을 리 만무했다. 수납 공간도 별로 없는 곳에서 뒤적거리는데 지켜보고 있던 놈이 입을 열었다.
“버렸는데.”
작은놈이나 큰놈이나 다 제멋대로였다. 같은 실수를 안 하는 것만으로도 사람은 발전한다고 했건만, 나는 제자리걸음도 아니고 후퇴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