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권-7. 진실과 거짓의 경계점 (1) (8/21)

7. 진실과 거짓의 경계점 (1)

“……죽었어?”

“멀쩡한 사람 죽이지 마세요.”

표성이 손가락으로 등을 꾹꾹 찌르는 바람에 머리가 울렸다. 살아 있음을 증명하고 다시 눈을 붙였지만, 다시금 툭툭 치는 느낌에 오던 잠도 달아났다.

“죽었어요?! 아침부터 왜 이러고 있어요, 유운 형?!”

“예? 누가 죽었습니까?!”

태주는 다짜고짜 시체라도 발견한 놈처럼 호들갑을 떨며 나를 흔들기 시작했고, 신입은 한술 더 떠 ‘어쩌지, 어쩌지’라며 주문을 외우듯 중얼거리며 왔다 갔다 했다.

무시하면 알아서 떨어져 나가겠지 싶었지만 그럴 생각이 전혀 없는 둘이었다. 비생산적인 게 참 잘 어울렸다.

“넌 시체를 그렇게 흔들어대면서 다뤄? 다들 왜 가만히 있는 사람을 이렇게 건드리고 다녀. 정신 사나워 죽겠네.”

책상은 짧고 강하게 흔들렸다. 지진이라도 난 줄 알았지만, 책상 위에는 50센티가 넘는 종이 탑이 쌓여 있었다. 그리고 신입은 그걸로도 모자라 종이를 추가해 높이를 늘려주고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가 엎어져 있는걸……. 웬 마스크야? 아니, 안색이 왜 그래? 감기 걸렸어?”

표성이 내 얼굴을 보더니 기겁을 하며 나의 이마를 짚었다. 차가운 손에 몸이 짧게 떨렸다.

“네. 개도 안 걸린다는 여름 감기에 또 걸렸네요.”

“이런, 괜찮으십니까?”

“예…… 뭐.”

“그나저나 재혁 님은 어디 가셨는지 아시나요? 매번 일찍 나오시더니 출근 시각 10분 전인데도 안 보이시네요.”

서연은 측은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바로 재혁의 안부부터 물었다.

“승아 어린이집에 데려다주러 갔습니다. 제가 갔어야 했는데, 보다시피 몸도 안 좋고…… 는 핑계고, 애가 꼭 그놈이랑 가야겠다고 아침부터 찡찡거리길래 어쩔 수가 없었네요.”

“약은 먹었어? 열나는데.”

표성의 질문에 고개를 젓다가 지옥을 맛봐야 했다.

“감기에 무슨 약입니까. 먹어도 일주일, 안 먹어도 일주일인데. 먹으면 잠만 오고 일손만 하나 줄잖아요. 그나저나 이 종이들은 다 뭡니까.”

“아직 말 똑바로 하는 것 보니까 버틸 정도는 되나 보다. 이건 오늘 봐야 할 서류들.”

이걸 다 봐야 한다고?

“아직 더 있습니다!”

본뜻을 아는지 모르는지 해맑은 신입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수레 가득 실린 종이 뭉치는 보기만 해도 입이 떡 벌어질 정도의 양이었다. 표성은 남의 컴퓨터 전원 버튼을 멋대로 누르더니 키보드를 내게 들이밀었다.

“지난 사건 보고서. 조금이라도 덜 잊었을 때 써서 내.”

“어젯밤에 보냈는데요.”

“뭐?”

“메일 확인해보세요.”

달칵거리는 소리가 몇 번 울리더니 그는 진짜 있다며 말을 줄였다.

“확인된 거 맞죠? 아직 출근 시각까지 8분 남았습니다. 한 번만 더 깨우면 일주일 휴가 내고 가버릴 거예요.”

“네가 일주일 휴가라니, 그런 협박 하나도 안 무섭다. 차라리 그냥 죽으러 간다고 해. 그게 더 무서워.”

표성은 내가 장기간 휴가를 가는 걸 상상도 하지 않고 사는 듯했다.

주위도 잠잠해지고 이제 정말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려는데, 목 뒤로 쑥 들어온 손에 몸이 펄쩍 뛰면서 달그락거리는 의자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하, 8분이 그렇게 힘들……!”

“소리를 지를 시간에 잠이나 더 자.”

내가 상체를 일으키자마자 친절하게 뒤통수를 잡고 다시 앉혀 책상에 얼굴을 박게 해준 이는, 오늘도 익숙한 향을 풍기는 탓에 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재혁 님!”

“오늘은 좀 늦으셨네요.”

다들 뭐가 그렇게 반가운지 반갑게 그에게 인사를 하며 알랑방귀를 뀌느라 바빴다. 잠은 무슨. 말짱해진 정신에 그냥 일어나는데 다시 한 번 잡힌 고개가 또 책상 위로 떨어졌다.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는지 빠르게 떨어진 몸에 내 영혼이 천천히 따라다니는 듯한 느낌이었다.

“……놔라.”

“아직 출근 시각이라면 5분 35초 정도 남았어. 자.”

“참 잘도 자겠다. 자장가라도 불러주지 그랬어.”

신입은 여전히 눈치가 없었다.

“아, 제가 합창단 출신이거든요. 솔로도 몇 번 했었는데 한 곡 불러드릴까요?”

그는 정말 우리 아기 잘 자라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아침부터 신성한 자장가라니. 잘못돼도 한참 잘못되고 있었다.

아직 내 몸을 놔줄 생각 없는 재혁의 행동에 기분이 묘하게 나빴지만, 차가운 손 덕에 열을 뿜어대는 머리는 어쨌든 식어갔다.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지만.

문을 박차고 들어온 팀장님이 다짜고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신입! 뭐 하는데 아침부터 혼자 노래를 불러? 쟤넨 또 아침부터 한판 한 거야? 왜 저러고 있어?”

손을 들어 괜찮음을 알리니, 팀장님은 곧바로 할 말을 하기 시작했다

“표성, 파일은 다 나눠줬어?”

“네. 최근 20년간 서울, 경기, 강원, 충남, 충북에서 일어났던 7,098건의 사건에 대한 기록, 정확히 7등분해서 1,014건씩 나눴습니다.”

7등분이라니, 팀장님도 같이 작업할 생각인 듯했다.

“그 중에서 가면 쓴 제로들이 등장했던 사건 위주로 보면 된다. 꼭 그들이 등장하지 않았어도 단서가 될 만한 것들은 다 표시해두고, 특히 아이들에 대한 건이나 공장과 관련된 일이라면 더더욱 주의해서 보길 바란다. 시간은…… 앞으로 39시간 58분 남았군.”

“네?!”

“예?”

동시다발적으로 터진 의문사에 나도 함께했다.

“다른 팀들은 다 뭘 하길래 이 파일이 다 저희에게 오는 겁니까.”

물음에 답할 생각이 없는 팀장님은 혀를 차며 나를 안타깝다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감기라니, 분기별로 꼭 한 번씩 걸리고 지나가네. 은근히 약골이란 말이야. 아직 멀쩡하게 구는 걸 보면 가서 쉬라고 해도 안 갈 테고.”

굴하지 않고 다시 한 번 말을 꺼냈다.

“저희가 밖으로 나가면 안 됩니까. 이걸 언제 다 봐요. A팀에 가면 서류에 미친 놈들 많잖아요.”

“그 팀원 중 하나는 지난 야근 때 쓰러졌고, 하나는 결혼하러 갔다던데. 신혼을 즐기고 있겠지. 억울하면 너도 결혼하러 가든가. 아니면 버티지 말고 자러 들어가.”

“……그냥 앉아 있으라는 뜻으로 알아듣겠습니다.”

팀장님은 역시 독한 놈이라며 작업 시작을 알렸다. 잠을 안 잔다고 계산을 해도 한 건당 2분대로 끊어야 모든 일을 끝낼 수 있다는 말도 안 되는 결론이 나왔다. 중간에 승아라도 데리러 갔다 온다면 더더욱 말이 안 되는 시간이었다.

책상을 넘어 바닥까지 쌓인 수많은 종이를 훑었다. 빈 상자를 왼편에 가져다두고 우선 1차적으로 관련 없는 파일들을 버리기 시작했는데, 신입은 얼마나 급한지 감이 오지 않는 듯 참견까지 했다.

“허, 재혁 님. 무슨 속독 학원 같은 거 다니셨어요? 읽기는 하시는 거예요……?”

그는 내가 봐도 놀라울 정도로 기계적인 손놀림을 구사하며 서류를 보고 있었다. 말없이 종이를 넘기는 그는 분명 나와 거의 동시에 버리기 작업을 시작했던 것 같은데 벌써 양 차이가 나기 시작했다.

항상 친절하던 이들이 대답 없이 제 할 일을 하자 신입은 그제야 심각성을 깨달았는지 집중하기 시작했다. 글을 읽는 것도 읽는 거지만, 반복된 작업을 하는 손은 물론 하얀 종이를 쉬지 않고 보는 눈까지 아팠다.

몽롱한 머리를 고정하고 집중했다. 한여름에는 활동을 꺼리는 제로들 탓에 평소라면 쉬엄쉬엄 일하며 잘 지냈겠지만, 연이어 닥치는 정신없는 사건에 몸에 무리가 가고 있었다.

할 수 없이 에너지 드링크를 홀짝거리며 앉아 있어야 했다. 책상 한구석에 손을 뻗었지만, 음료수 캔이 있어야 할 곳이 텅텅 비어 있었다.

“……네 돈 주고 사 먹어.”

재혁은 나의 말에도 꿋꿋하게 음료수를 입에 탈탈 털어 넣었다. 그것도 오만상을 찌푸리면서.

“아니, 훔쳐 마시고 그 표정은 뭐야? 다시 사 와. 나 작업 못 한다고.”

“이런 거 마실 바에 차라리 한숨 자고 일어나.”

다시 사 와도 똑같은 짓을 반복했다. 제 맘대로 굴겠다는 게 이런 유치한 짓이었나. 다들 집중하고 있는 와중에 큰 소리를 낼 수도 없고 계속 왔다 갔다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종이에 괜한 화풀이를 했다.

세 시간에 걸쳐 관계없는 사건들은 배제하고 나니, 양이 절반으로 줄었다. 가볍게 훑어본 결과 그들이 얼마나 규칙 없이 제멋대로 활동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아동 실종 관련 사건은 우리 쪽으로 오기보다는 경찰 측으로 넘어가는 탓에, 그들이 골라 넘겨주는 사건이 정말 우리와 관련된 일인지, 아니면 단순 실종 사건인지 구분이 모호했지만, 장기 실종된 아이들의 사건 중에선 비교적 가능성이 커 보이는 게 많았다.

뱀파이어들에게 권장량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 자체가 웃기기는 해도, 한 달에 최소한 300밀리리터의 섭취는 유지해야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다는 통계가 엄연히 존재했다.

물론 이런 공장까지 이용하는 놈이라면 제 양껏 마음대로 먹겠지만 한 달 거래량이 500리터에 육박한다고 하는 걸 보면 대략 0.5리터씩 마신다고 해도 천 명은 넘는 놈들이 거래와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아무리 많은 실종 인구가 있다고 해도 전부 그들이 한 짓일 리는 없는데 아동들은 어디에 그렇게 많이 잡혀 들어가고 있는지, 대체 이 많은 피는 어디서 뽑히고 공급되며 어떻게 팔리고 있는지 이해되지 않는 것들만 가득했다.

조용히 있던 태주가 지치기 시작했는지 소리를 질렀다.

“제로 놈들은 대체 어디서 이렇게 많은 피를 구한대요?! 부러워 죽겠네, 나도 좀 배부르게 먹어보고 싶…….”

“모른 척해줄 테니까 가면 쓰고 제로 놈들 무리에 들어가서 배부르게 먹고 살아봐봐.”

“팀장님, 그 말 진심입니까?”

“허락받고 가려고? 그러다가 잡히면 고문당하면서 이야기하면 되는데 뭘 그렇게까지 하고 그러나.”

“에이, 잡힌 시점에서 끝인데 뭐 하러 버텨요! 그냥 다 술술 불어버리지. 아, 근데 애들 피 진짜 맛있대요? 무슨 사건이 이렇게 많아? 향기는 진짜 좋은데 마셔본 적이 있어야 알지!”

태주는 결국 입맛을 다시다가 팀장님께 한소리 들어야 했다. 가만히 있던 재혁이 태연하게 말했다.

“환상을 가질 필요까지야…… 향만 좋지 별다른 맛은 없으니까.”

“엇, 드셔보셨습니까?”

“먹어본 놈들을 많이 만나봤으니.”

재혁이 나를 쳐다보며 이야기하는 탓에, 나에게 꽂히는 시선이 점점 늘어갔다. 정적이 계속되는 가운데 아련하게 기침 소리만 울렸다. 신입은 제법 화제를 잘 돌렸다.

“그런데 어떻게 한 놈도 안 잡혔을까요. 그렇게 거래하면 걸리는 놈 한둘은 있을 법한데요!”

팀장님이 신입의 질문에 친절한 답을 줬다.

“잡힌 놈들이야 꽤 있었는걸. 살아서 온 놈들이 없어서 문제지. 드디어 잡았다 싶으면 순식간에 괴성을 지르면서 미라가 되어버리고, 심어놓은 애들은 성공했나 싶으면 다른 대원들 눈앞에서 절규하며 말라비틀어져 버리는데…….”

팀장님은 마른 얼굴을 쓸며 말을 이었다.

“초장에 제대로 잡았어야 했는데 이렇게까지 규모가 커질 줄이야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고, 또 언론에 노출도 워낙 안 하는 쪽으로 진행하다 보니 이 지경까지 왔다. 이번에 무슨 일이 있어도 끝내야지. 희생당한 수가 너무 많아. 그러니까 군소리하지 말고 빨리 끝내. 시간 더 달라고 징징거리지 말고.”

태주는 개의치 않고 투정을 부렸다.

“징징이 예약 걸어놓을게요. 뭔 짓을 해도 그 시간까지 못 끝낼 것 같으니까요.”

“말대꾸할 시간에 한 장이라도 더 봐.”

이렇게 일하는 기계가 될 걸 예상이라도 했는지, 점심 먹을 시간을 주기는커녕 행정실로 음식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쉴 생각 말고 일을 하라는 뜻이겠지. 다른 직장이었다면 반발을 일으키는 이가 있을 법했지만 끔찍한 사건 기록들을 뒤져보는 중인지라 다들 군말 없이 일을 할 뿐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바이러스를 물리치기 위해 힘쓰는 몸 탓에 열이 끓었다. 몸이 반항을 열심히 해줘서 다행이었지만 그만큼 멍해지는 정신을 붙잡는 데도 기운이 빠졌다.

세수라도 할까 싶어 일어나려다 발을 헛디뎌 비틀거려야 했다. 나사 빠진 사람처럼 행동하는 나를 걱정해주는 이들을 뒤로하고 화장실로 향했다.

복도로 나갔지만 다른 팀들도 같은 상황인지 그 흔한 잡담 소리도 들리지 않고 팔락거리는 소리와 전화 벨소리만 날 뿐이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화장실에 들어가 얼굴에 찬물을 끼얹으니, 잠깐이나마 정신이 맑아지는 것 같았다. 손을 뻗어 휴지를 찾는데 누군가 건네주는 손수건이 손에 잡혔다.

“괜찮습…….”

“아니, 쓰세요! 여분으로 들고 다니는 거니까요. 그나저나 오늘 쉬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신입은 얼굴을 닦는 나를 보며 양치질을 했다.

“괜찮으신 거 맞죠?”

“심하진 않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새빨간 얼굴이 누가 봐도 정상적이진 않았지만, 나름대로 나의 말을 믿어주는 건지 신입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이건 세탁하고 드리겠습니다. 감기 옮길까 봐요.”

“편하실 때 주셔도 됩니다. 급하지 않으니까요!”

그는 입안에 가득 물고 있던 거품을 뱉어내며 물었다.

“근데, 전부터 궁금했는데 못 물어보고 있던 건데요.”

턱으로 흐르는 물방울을 닦아내며 쳐다보자, 신입은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팀장님은 왜 파트너가 없으신 겁니까.”

이쪽에 몸담을 생각을 한 이들이라면 소문으로라도 들을 법했을 텐데,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이 물어오는 덕에 오히려 어안이 벙벙한 건 내 쪽이었다.

작게나마 뉴스까지 나가고 격식 있게 장례식까지 치렀건만.

뭐 어차피 이미 많이 퍼진 일이기도 하고 숨길 것도 없었다.

“하승균.”

“네?”

“팀장님의 마지막 파트너분이요. 첩자가 되어 공장에서 이뤄지는 만행을 알아낸…… 착취하는 현장과 거래 현장을 처음으로 목격하신 분이었습니다.”

“아…….”

“비록 팀원들이 보는 눈앞에서 보란 듯이 살해당하시는 바람에 자세한 내막은 듣지 못했지만, 인간 공장이라는 것의 존재를 처음으로 알리신 거나 다름없는 분이셨습니다. 팀장님은 그 후로 파트너를 정하지 않으셨지요. 나간다고 하시는 걸 혼자 일한다는 조건으로 붙잡아둔 거니까요. 나라에서 말입니다.”

나이도 적지 않은 팀장님이 더 높은 자리에 욕심을 가지지 않고 그 자리에 눌러앉은 걸 보면 완전히 그 일에서 빠져나오진 못한 듯했지만, 그렇다고 나는 왜 그렇게 막 굴리시는지…… 일단 확실한 것은 나는 동네북이라는 사실이었다.

갑자기 나의 고독한 삶과 일대기가 떠오르면서 억울함이 비집고 나오기 시작했는데, 앞에 있는 신입 녀석은 들은 이야기가 조금은 이해가 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헹구기 시작했다.

일어서 있자니 어지러워 자리로 돌아가려는데 신입이 나를 다급하게 불러 세웠다. 흔들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균형을 잡느라 애먹었다.

“으…….”

“헉, 죄송해요.”

“아닙니다. 말씀하세요.”

“물어봐도 되는 건가 싶긴 한데.”

뜸을 한참이나 들이던 그는 볼을 긁적거리면서 나와 눈을 마주쳤다 피하기를 반복했다.

“저…… 다른 두 분은 결혼한 분이시라 물어봐도 의미가 없을 것 같아서요. 전 동경만 했지 뱀파이어 분들과 함께 지내는 건 처음이라…….”

“그래서요?”

“원래 비즈니스 관계에서도 흡혈할 때 신체적 접촉에 관대한……!”

감기고 뭐고 다급하게 손을 들어 그의 입을 막아버렸다.

듣지 않아도 무슨 질문을 할 건지 알 수 있었고, 태주 녀석이 관련된 일이라면 더욱더 알기 쉬웠다. 신입이 들어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무슨 짓을 했을지, 자꾸 머릿속에 떠오르려는 영상을 지우느라 애썼다.

“세상에 당연한 건 없습니다. 싫으면 싫다고 하고 그래도 들러붙으면 그냥 되는대로 쥐어박으세요. 합법적인 폭력이잖습니까.”

“혹시 두 분은…….”

“아니라고요.”

“헙, 제가 실례되는 질문을 했죠?”

“알고 계시니 다행입니다. 어디 가서 또 실수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네요.”

신입은 재빨리 양치 도구를 챙기고 뒤를 쫓아왔다. 빨빨거리고 쫓아오는 걸 보니, 어벙한 면이 있어서 그렇지 오히려 그 덕에 더 잘 적응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행정실은 후덥지근한 복도와 다르게 얼마나 에어컨을 돌렸는지 여름이라곤 생각할 수 없는 온도였다. 담요를 둘둘 두르고 있자니 식은땀이 흐르고 벗자니 추워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난리를 치다가 결국 짧게 입은 상체만 덮고 있기로 했다.

돌아와서 하는 일은 아까와 별다를 게 없었다. 다들 한숨을 쉬며 종이를 보느라 바빴다. 시간이 흘러가는 줄도 모르고 보고 있다가 시계를 봤을 땐 어린이집이 끝날 시각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눈을 비비적거리면서 일어났지만, 재혁이 손을 붙잡는 통에 다시 자리에 주저앉아야 했다.

“안 가도 돼. 네가 없을 동안 오후에 더 있을 수 있게 신청해뒀어. 늦게 끝나는 날은 아이 봐주시는 분이 알아서 하원 도와주시고 다 해주실 거야.”

“……그렇게까지 해줄 형편이 안 돼.”

아이를 챙겨주는 게 편하긴 해도, 상의도 없이 일을 처리해가는 녀석 탓에 찝찝함은 어쩔 수 없었다. 더군다나 그런 말까지 들었으니 당연한 거 아니겠는가.

한두 번 큰 지출이야 억지로 버티면 된다지만 정기적으로 나가면 무한의 마이너스를 찍으며 다시 빚더미 속으로 들어가게 될 터였다.

그는 심각해진 나의 반응에도 가볍게 대답했다.

“돈은 신경 쓰지 마. 안 내도 되니까.”

“불순한 의도로 듣는 내가 이상한 거야? 아니면 네가 지나칠 정도로 오버하고 있는 게 맞아?”

“불순한 의도로 듣는 네가 이상한 것도 맞고, 내가 지나칠 정도로 오버하고 있는 것도 맞겠지.”

“대체 왜?”

“무슨 얘기를 그렇게 살벌하게 주고받아. 아이 도우미 쓰는 것 때문이라면 복지 차원에서 어느 정도 지원되니까 나중에 신청서만 제출해.”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팀장님이 하품을 하며 말하자, 쥐 죽은 듯이 앉아 있던 다른 팀원들의 말소리가 서서히 퍼지기 시작했다. 각종 앓는 소리와 함께 기지개를 켜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그나저나 지원이라니, 그런 좋은 복지를 왜 나는 모르고 이 녀석은 알고 있는 걸까.

재혁은 골라낸 파일들을 정리하며 말했다.

“무슨 생각을 또 그렇게 곰곰이 해. 남들은 그냥 넘어갈 일들까지 온종일 머리 싸매고 고민하니까 그렇게 골골거리는 거잖아.”

“이건 네가 어제 문을 활짝 열어놓고 자서 그런 거잖아. 아픈 거에 한몫해줘서 정말 고맙다.”

“네 면역력에 문제 있는 걸 내 탓으로 돌리지 마.”

밀려오는 짜증 덕에 몰려오던 졸음도 달아났다. 종이를 넘기고 있으려니 나풀거리는 담요가 거슬려 결국 벗어 던져버렸다. 얼마 안 가 조심히 주워 다시 두르긴 했지만.

해가 져도 건물 밖으로 나가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 그와 더불어 다들 집중력이 떨어졌는지 헛소리를 해대기 시작했다. 신입은 넋 나간 표정으로 중얼댔다.

“아, 이거 언제 다 해…… 그냥 쓰러지고 싶다.”

“들어온 지 얼마나 됐다고 쓰러져. 아직 갈 길이 먼데.”

표성은 신입을 다독이며 똑같은 페이지를 몇 번씩 읽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종이를 마구 넘기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 가면 놈들은 늙으면 쫓겨나나? 하나같이 젊은 애들만 나오네…… 진술 내용만 보면 20년 전에 나온 놈이랑 1년 전에 나타난 놈이랑 동일한 녀석 같은 뉘앙스를 풍기고 있는데. 이거 애들 피 모아서 마시는 게 아니라 단체로 목욕탕 차린 거 아닌가 찾아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서연이 그의 말을 듣고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 효능은 없습니다. 실제로 그렇다면 귀가 솔깃해지기도 하네요. 영원한 젊음이라니.”

어두워질수록 열이 더 오르면서 기침을 심하게 하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한테까지 피해를 주는 것 같아 자료를 끌고 온 카트에 싣고 나가려는데 팀장님이 붙잡았다.

“그냥 가서 쉬지 그걸 끌고 가?”

“어차피 들어가면 애한테 감기 옮기기만 할 것 같아서요. 그냥 빈방에서 처리하고 올 테니 신경 쓰지 마세요.”

슬슬 목도 맛이 가고 있는지 물기 없이 갈라지는 목소리는 내가 듣기에도 거북했다.

“의무실 가서 일중독 치료하는 프로그램은 없냐고 물어보고 가.”

“저 아프다고 다른 사람한테 미루긴 싫습니다. 이거 끝내고 물어볼…….”

말을 끝내지 못하고 목덜미를 잡힌 채 질질 끌려 나와야 했다. 반항할 힘도 없이 대롱대롱 매달리는 수준으로 끌려가서 도착한 곳은 의무실 앞이었다.

나는 잘 나오지도 않는 쉰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아니, 왜 이래. 감기 걸렸다고 해봤자 쉬는 방법밖에 없다고 대답한다니까!”

벌컥 열린 문 안쪽에 선 여자는 예상과는 달리 재혁이 등장하자 적잖이 놀란 듯 보였다. 그녀에게 설명할 시간도 없이 내 몸은 병실 침대에 내동댕이쳐졌다. 평소라면 텅텅 비어 있을 의무실은 수면실이라도 된 듯 자는 사람들과 링거를 주렁주렁 단 이들로 북적거렸다.

의무관이 커튼을 치고 들어오며 말했다.

“매년 겪으니 잘 아시네요. 잠이라도 한숨 주무세요. 구토감이라든가 설사라든가 그런 건 없죠? 밥은 잘 먹고?”

“네.”

“소리도 좀 그만 지르고요. 목 나갑니다~.”

오케이 사인을 날리던 의무관은 기침을 연이어서 하는 나를 보더니 한숨을 쉬며 사라졌다. 온 김에 조금만 있다 가야지 싶었는데 떠날 생각이 없는 듯한 그가 부담스럽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껏 째려보자 이마에 얹힌 손으로 눈까지 덮어버렸다. 부드러운 촉감과 맞지 않게 시원한 손에 두통이 줄어드는 느낌이었다.

식은땀을 흘려 젖은 이마가 찝찝할 법한데도 그는 손을 치울 생각이 없어 보였다. 결국, 그의 손목을 잡고 들어 올렸더니 눈을 쪼는 형광등 불빛 때문에 절로 인상이 써졌다.

머리는 다시 들이대는 손을 어서 치우라고 외치고 있었지만, 몸뚱이는 그의 손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뭐 하냐?”

“밥통 고쳐. 이 정도는 해줄 수 있지?”

뭐……?

“가서 할 일이나 해.”

“여유 있어, 시간. 절반은 끝냈으니까. 네 핑계 대고 좀 쉬다 가려고. 일찍 끝내면 다른 놈들 작업까지 넘겨받을 거 아니야.”

“그럼 조용히 앉아서 쉬어. 손도 치우고. 거치적거린다고. 이거 일주일이면 나아. 네 밥통 안 망가트릴 거니까 좀……!”

“시끄러워. 그냥 잠이나 자.”

한참 실랑이가 오가다 결국 조용히 하라는 옆 침대 대원의 말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눈앞은 캄캄하고 몸은 축축 늘어졌다. 떠들 수 없으니 금세 나른함이 몰려왔다.

“보고서에.”

바람 빠진 소리만 나는 목을 가다듬고 다시 말했다.

“보고서에 너와 그들이 주고받은 대화는 넣지 않았어. 본격적인 판이 벌어지기 전에 뭐 좀 묻자.”

“뭘.”

“가면 쓴 제로 놈들이 왜 하나같이 너에게 친근하게 구는 건지. 그들의 정체에 대해서 하나라도 아는 게 있으면 불어.”

“써도 상관없는 내용이긴 했다만, 왜 인제 와서 묻는 건지 궁금하군. 물어볼 기회도 많았을 텐데.”

“네놈이 하는 짓 좀 보려고.”

“그래서, 뭐라도 좀 건졌어?”

“…….”

다음 순간, 목소리가 가까워지면서 그의 숨소리까지 선명하게 들렸다.

“친근하다면 친근할 수도 있지, 그들에게 내가. 어딜 가도 다들 나와 안면을 트고 싶어서 난리인데 제로 놈이라고 별다를 건 없을 테고. 그들은 언제든지 제 편을 늘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니.”

잘난 척하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녀석이었다. 그는 아직 떨어지지 않은 눈가의 딱지를 손가락으로 살살 건드렸다. 시야가 차단되자 몸으로 전해지는 감각들이 더 예민하게 다가왔다.

“네가 날 수상쩍게 여기는 게 이해가 되긴 하는데 기분이 좀 나쁘긴 하네. 날 의심하기 전에, ZAT 놈들이 왜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아무런 조처를 하지 않고 있었는지 먼저 의문을 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뭐?”

“그동안 그렇게 많은 사건이 있었는데. 이제야 찾겠다고 그 난리를 떤다? 그리고 그 능력 좋은 놈들 중에서 한 놈도 현장에서 살아 돌아오질 못해?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한심해 보이는데.”

그가 이마에 얹어놓은 손을 치웠다. 막상 냉기가 사라지고 나니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광등 불빛에 눈이 부셔 고개를 돌리자, 한 뼘도 안 되는 거리에 있는 그와 마주했다.

“…….”

하마터면 손을 뻗어 그의 눈을 만질 뻔했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넘기는 손을 쳐내자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할 말인가 싶긴 하다만, 능력 좋다는 수많은 순혈들은 편하게 살면서 하프인들 대부분만 이곳에서 뒹굴고 있다는 건 알 테지. 그 고생을 하는 대가는 고작 정량의 피와 안정적인 직장뿐이라는 사실도 알 테고. 다들 왜 아이들 피가 단순히 맛있어서 찾는다고만 생각하는지 모르겠군.”

그는 나의 팔에 박힌 문신을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훑었다. 튀어나온 흉터 위로 그의 손가락이 천천히 스칠 때마다 낯선 감각에 소름이 돋았다.

“…다른 이유가 있어?”

“아이들 피는 단순히 맛만 좋은 게 아니라, 한계치 이상의 양을 마셨을 땐 순혈만큼의 힘을 쓸 수 있게 해주거든. 가면을 쓴 그 많은 놈들이 왜 말도 안 되는 능력을 사용하면서 다니는 건지, 왜 듣지도 보지도 못한 능력을 이용하면서 우리를 놀리는지…….”

의심 따윈 해본 적 없는 일이었다.

“하프 놈들을 여기 가둬두고 굴리는 이유를 이제 알겠어?”

“……하프들이 힘을 쌓지 못하게 하려고 이런 곳을 만들어두었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자신들의 위치에 위협이 되는 것들은 제거하려는 게 본능적인 면이니까. 덧붙여 말하자면 너랑 나를 엮어놓기 위해 힘쓴 건 팀장님이야.”

“팀장님이 우릴 왜.”

무슨 연유로 팀장님이 우리를 묶어두었고, 왜 우리가 같이 있어야 했던 건지. 매번 유연하게 빼내주던 팀장님이 유독 이번만큼은 강경하게 나온 이유도 다 그 때문이란 말인가.

“파트너를 죽게 만든 이들에 대한 복수로 가장 칼을 많이 갈고 계시고, 가장 위험한 위치에 앉아 고군분투하고 계신 분이기도 하니까. 온갖 트라우마를 겪으면서도 이곳을 떠나지 않고, 현장을 쏘다니는 널 그냥 두었던 게 그저 단순한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마. 그분은 나름대로 널 지켜주고 계신 걸 테니.”

그의 말을 종합한다면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일은 권력을 잡은 놈들이 벌여놓은 판에 맞게 쿵작거리며 일어났던 것뿐이라는 얘기였다. 모두가 그들의 인형이 되어 놀아나고 있는 거고.

어디까지 재혁의 말을 믿어야 할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가뜩이나 복잡한 머릿속에 폭탄이 투하되어 더 엉망이 되고, 생각할수록 과부하가 걸려 머리가 버벅거렸다.

“……넌 정확히 누가 보내서 여기 있는 건데.”

“그건 말해주기가 곤란한데.”

나에게 거짓 정보를 던져준다고 생각하면 굳이 힘없는 나한테 뭐 하러 혼란을 주는지 설명이 되지 않았다. 평생 원수지간처럼 지내온 녀석이 뜬금없이 넌 한 배에 탄 아군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도 설득력이 없었다.

“내가 지금 널 어떻게 믿어야 하는지 이해라도 가게 설명이라도 해봐.”

“네가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거. 그거 말고 더 필요한가.”

그동안 감정적으로 던진 대화들까지 덮쳐져 생각의 파도는 잠잠해질 줄 몰랐다.

“이걸 왜 지금 얘기해줘.”

“네가 별로 궁금해하지 않아서? 나라고 처음부터 알고 있던 건 아니야. 여기 오고 나서 정확히 알게 된 것들이 대부분이니까.”

“왜, 하필 나인 건데.”

“너만큼 뱀파이어라는 존재에 경계심과 분노가 가득한 놈은 없으니까…… 라고 하시더군.”

그는 고민할 시간도 없이 쭉쭉 내뱉었다. 확신에 찬 눈이 여느 때처럼 일렁였다.

“하, 너는 정확히 뭘 하고 싶어서 이 판에 뛰어든 건데. 그냥 순혈답게 가진 것들이나 누리고 살면 편하고 좋았을 거 아니야.”

“지켜야 하는 이들이 있어.”

대체 그가 지켜야 할 이는 누구고, 무엇으로부터 지켜야 한다는 말일까.

“내가 뭘 어떻게 하길 바라.”

“죽는다고 뻗대지 말고 쉬라고.”

그는 한참이나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내가 널 살리려고 노력 중이잖아.”

인생을 살면서 들은 말 중에서 가장 어이없고 신뢰가 가지 않는 말이었지만 왜 당황스러움을 느껴야 하는 건지. 아무래도 그의 말에 충격을 받은 게 분명했다.

“……지랄 떤다. 지금까지 네가 한 짓과 말들을 생각해봐.”

그는 피식 웃으면서 다시금 이마를 덮어올 뿐이었다.

허허벌판에서 언제 짐승들한테 뜯길지 몰라 안절부절못하며 평생을 경계하면서 살고, 힘없는 칼자루 하나 쥐고 그들이 득실거리는 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인생을 바쳤건만, 적의 우두머리가 기어 들어와 난 널 살리기 위해 노력 중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해야 그 말을 믿을 수 있을까.

제아무리 울타리 없는 삶을 살았다 해도 말 한마디에 상대가 세운 울타리 안으로 제 발로 들어가는 멍청한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의 손을 치우고 없는 힘을 짜내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렇게 널 쉽게 믿을 거라고 생각했다면 실수한 거야.”

“상관없어. 그렇게 나한테 경계를 세우는 편이 오히려 그들 눈에 보이기 좋으니까.”

그의 겁 없는 큰 목소리에 주위를 둘러보자 갑자기 녀석이 소리를 빽 질렀다.

“뭐 하는 짓이야?”

“아무리 소리 질러도 밖에서 들을 수 없게 해두었으니 안심해.”

“그럼 왜 가까이에서 속삭이는 짓을 했는데?”

“네가 조용히 말하는 게 더 좋아서.”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이제 놀랍지도 않았다.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서류의 늪에 빠져 기계처럼 앉아 있는 게 낫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붙잡는 손을 뿌리치고 나가려 했지만 그는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생각하기 싫으면 생각하지 말고 믿기 싫으면 믿지 마. 지금은 그냥 좀 쉬라고. 그게 그렇게 어려운 말이야?”

“놔. 일하러 갈 거야. 그래야 숨 쉬는 것 같으니까.”

그는 그제야 손을 놓아주었다.

왜 벌써 가버리냐는 의무관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은 채 행정실로 올라갔다. 당연히 따라 올라올 줄 알았던 그는 나의 뒤를 밟지 않았다.

자리에 앉아 글씨를 보고 있어도 눈에 들어오는 건지 마는 건지 알 수 없어서 똑같은 문단을 계속 읽어야 했다. 그마저도 몇 장 넘기고 나면 다 거짓투성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의심만 많아져서 제대로 읽을 수 없었다.

난 누구의 손에서 놀아나고 있는 건지, 지금 읽는 사건 파일도 그저 그들이 만든 판 중의 하나는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의문은 의문만 남기고 끝날 생각이 없었다.

이게 정말 만든 판이라면 누가 아군이고 적군일까. 누가 먹이사슬의 제일 꼭대기에 서서 이 모든 걸 지켜보며 제 밥그릇을 챙기고 있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결국, 아무도 없는 빈 창고에 처박혀 집중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텁텁한 공간 속에서 자꾸 튀어나오는 기침도 짜증 나고 열이 나는 것도 짜증 나고, 전부 싫은 것투성이였다. 손에 밴 그의 향이 싫어 일부러 마스크도 벗지 않았다.

***

분류 작업을 절반쯤 끝나고 정신을 차렸을 땐 귀가 먹먹해지기 시작했다. 몸은 최악의 상태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종이를 잔뜩 끌고 행정실로 돌아왔을 땐 깨어 있는 이를 찾는 게 더 빨랐다.

눈이 부신 햇살 속에서 서연과 팀장님만이 멍한 눈으로 종이를 보고 있었고, 재혁은 자리에 남아 있지 않았다.

“아직 안 들어가고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나오지 않는 목소리 탓에 종이에 글씨를 끼적거려 팀장님께 건넸다.

[여기 있는 반절은 끝났습니다. 몸이 너무 안 좋아서 쉬다 와서 다시 할게요.]

쪽지를 본 팀장님은 질색하면서 나를 내쫓았다.

“다시 안 와도 돼. 아니, 오지 마. 네가 감기에 취해서 난리 떠는 거 보고 싶지 않으니까 들어가. 병가 처리 해놓을 테니 멀쩡한 상태로 돌아오라고. 끌고 온 건 여기 둬. 네 파트너는 다 끝냈다니까 조금 있다가 그 녀석 시키면 돼.”

기껏 잊고 있었더니 그의 존재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다시 머리가 띵해졌다. 괜히 고개를 젓다가 넘어질 뻔했다.

[벌써요? 그놈은 어디 갔는데요?]

“승아 데려다준다고 나갔다.”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뒤이어진 팀장님의 ‘데려다줘야 하냐’는 말에 도망치듯 밖으로 나왔다. 그리 센 햇빛도 아니었지만 몸이 바싹바싹 말라가는 느낌이었다.

창가에 매달린 몇몇은 나를 동경의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고, 태주는 언제 깬 건지 창문 한 칸을 차지하고 있었다. 입을 벌리며 뭐라뭐라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보였지만 도무지 뭐라는지 알아들을 수 없어 대충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혼자 도망치는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진 않았지만 몸을 빨리 뉘어야지, 안 그런다면 진짜로 길 가다가 쓰러질 것 같았다. 눈을 뜨는 둥 마는 둥 바닥만 보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슬을 머금은 새벽 공기 덕분에 정신을 잃지 않고 걸을 수 있었다.

“읏……!”

건물에 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졌건만, 골목으로 끌어당기는 힘에 손쓸 새도 없이 끌려갔다. 고개도 들지 못하고 밀쳐내는데, 상대는 의외로 손쉽게 밀려났다.

“오랜만이네.”

새하얀 머리카락과 오묘하게 그와 닮은 얼굴.

고개를 들고 마주한 상대는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지만 단번에 알아볼 수 있는 이였다.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상대를 보고만 있자, 남자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거둬들였다. 이곳에 이 남자가 왜 있는지 의문을 품을 무렵쯤에 나타난 재혁은 꽤 신경질적인 모습으로 상대를 대했다.

“전재민, 쓸데없는 짓 할 생각 하지 말고 줄 거나 주고 가.”

“안면도 튼 사이인데 인사 정도는 해도 되는 거 아닌가. 어떻게 보면 내가 생명의 은인쯤 되는 건데.”

남자는 나를 보며 묻고 있었지만 나는 대답해줄 답을 찾지 못했다. 재혁은 어이없다는 듯 반박했다.

“네가 없었어도 잘 살아 있었어.”

“부탁하는 사람치곤 태도가 너무 불량하잖아. 여기까지 온 사람 기운 빠지게.”

“네가 기운이 빠진다니. 좀 더 현실성 있는 말을 해.”

남자는 자기 자신의 말보다 오히려 재혁의 말이 맞는다는 듯 수긍하는 눈치였다.

“큰집은 언제 찾아갈 생각이야? 내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니까 그만 버티고 인사드리러 가.”

“안 그래도 조만간 찾아뵐 생각이었어.”

“하여간 뭐든 열심히 하긴 하지. 그 열정으로 네가 알아서 하면 될 걸 굳이 고집 부리느라 나를 오라 가라 하질 않나.”

“할 말 다 끝났으면 주고 가. 한 시간 내로 들어가봐야 해.”

애꿎은 집안싸움에 끼고 싶지 않아 그들 사이를 비집고 지나가려는데, 두 놈이 동시에 나를 막아서는 탓에 골목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형제가 쌍으로 뭘 하는 건가 싶었는데, 재민이라는 남자가 나의 손에 무언가를 쥐여주었다. 엄지손가락만 한 작은 유리병은 새카만 액체로 출렁거렸다.

“다음부터 무슨 일 있으면 직접 불러. 괜히 얘한테 불리면 쓸데없는 욕만 먹고 가니까 썩 기분이 좋지 않아.”

내가 말없이 찰랑거리는 액체를 보고 있으니 재민은 뚜껑을 열고 마시는 시늉을 했다. 뭔지도 모르는 찝찝한 액체를 곱게 먹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싶었다. 다시 돌려주려는데 그 순간 재혁이 나의 마스크를 쑥 내리더니 병을 빼앗아 내 입에 들이부었다.

“커흑!”

턱을 잡아서 들어 올리고 있는 덕에 반항 한번 못하고 삼켜버렸다.

목을 타고 넘어간 액체는 뜨겁다 못해 속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고 코로는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나오는 헛구역질도 그의 손에 막혀버렸다. 복합적으로 몰려오는 고통에 입엔 침이 고이고 눈이 시큰거렸다. 거의 매달리듯 그의 손을 움켜쥐었지만 그는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으…….”

옆에 있던 재민의 만류로 겨우 그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둘이서 뭐라 말하는 것 같았지만 알아들을 수 없었다. 벽을 잡고 헛구역질을 했지만 빈속에서 나오는 게 있을 리 만무했다. 시멘트벽은 거칠게 나의 손끝을 파고들었다.

“씨……!”

입가에 흐르는 침을 닦았다. 손발은 저릿하고 눈앞이 아득한 게 온몸에서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 같았다. 팔과 목을 벅벅 긁어도 나아지는 건 없고 피가 묻어날 뿐이었다. 맥없이 긁히던 피부가 부어오르고 상처를 남기는데도, 고통보단 간질거리는 느낌에 미칠 것 같았다.

얼굴을 타고 오르는 감촉에 손을 대기 시작하자 두 팔을 꼼짝없이 잡혔다. 께름칙한 촉감에 몸부림치면서 온몸을 긁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생각대로 할 수 없다는 사실에 불안감이 증폭됐다. 재혁은 그저 발버둥 치는 나를 붙잡고만 있었다.

“뭘, 먹인…….”

숨소리가 말을 반쯤 먹고 있었지만 재민은 알아들었는지 쪼그려 앉아서 나의 얼굴을 보며 입을 열었다.

“어후, 이 정도까지 괴로워할 줄은 몰랐네. 그래서 정신을 놨을 때 먹이는구나. 30분은 있어야 괜찮아진다고 들었으니까 그냥 쓰러져서 자고 일어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네. 언제 깰 수 있는지 장담은 못 하겠지만 그편이 나을 것 같은걸.”

동물 실험이라도 하는 것처럼 신기한 눈으로 관찰하고 있는 이는 괴로워하는 나를 두고서 생글생글 웃는 입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감정 하나 담지 않고서 또렷하게 뜨고 있는 눈 때문에 어딘가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재혁이 그런 재민을 밀어내며 말했다.

“그렇게까지 안 걸려. 이제 가봐.”

“아무리 가라고 난리를 쳐도 난 며칠 여기 있어야 해. 네가 부르기 전에 부탁받은 게 있어서 원래 올 계획이었거든.”

“무슨 뜻이야.”

“본격적으로 붙을 계획이라면서. 상부상조해야지. 그래서 이거 달라고 한 거 아니었어?”

“네 도움 필요 없어. 너한테서 도움받느니, 내가 해.”

“그 말 어머니가 들으면 좋아하시겠네. 괜찮아지면 같이 들어가도록 하지. 드디어 시작한다니 벌써부터 심장이 뛰는 느낌이란 말이야.”

“……하.”

손쓸 수 없는 상황의 끝은 도무지 보이지 않고 이젠 입에서 신음만 비집고 나왔다. 조금만 더 정신이 없었으면 몸 좀 긁어달라고 애원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지 않는 골목이라고 해도 밖에서 이게 뭐 하고 있는 건지. 차라리 창고에 틀어박혀 있을 걸 싶었다.

시간은 흐르는지 마는지, 어디 다른 데라도 집중할 무언가가 있으면 좋으련만, 할 수 있는 일은 다친 손끝만 헤집어놓으며 정신을 차리는 것뿐이었다. 대체 왜 이런 기분을 내가 느끼고 있어야 하는 걸까. 그것도 이들 앞에서 헉헉대면서.

“그래서, 이게 뭐냐고!”

나를 이 꼴로 만들어놓곤 제 할 말들만 주고받는 이들에게 소리쳤더니 앉아 있는 재민이 ‘오오……’ 하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런, 조금만 더 있으면 한 이틀은 자고 일어난 것처럼 좋아질 거야. 진짜 효과 빠르네. 우리가 마시면 몇 시간이 걸리는데 이렇게 금방 말할 수 있는 것 봐. 뭐 그렇게 쉽게 아플 일도 없고, 마셨다고 괴로워하지도 않지만 말이야.”

“으으.”

“영업 비밀이라 알려줄 순 없지만, 본인도 느끼고 있을 텐데. 기운이 팔팔 솟는 것 말이야.”

몸을 일으킨 재민은 저보다 덩치 큰 재혁의 머리를 헝클어트리면서 말했다.

“동생 너무 굶기진 않아줬으면 좋겠군. 이놈 눈이 이 정도로 번뜩인다는 건 그쪽이 지금 겪는 만큼이나 큰 괴로움을 참으면서 생활하고 있다는 거거든.”

“네가 참견할 바 아니야.”

재혁의 목소리와 함께 무겁게 가라앉는 공기에 주위를 둘러봤지만 아까와 별다를 바 없이 조용했다.

잠잠했던 길목에 스산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요란하게 울리는 풍경 소리가 귀를 찔렀다. 골목에서 나가려는지 놈이 나를 붙잡았으나, 힘을 주어 버텼다.

“가기 싫어.”

지금 이 상태로 그 좁은 관사에 둘이 있기는 싫었고, 북적거리는 부대로 들어가는 것도 불쾌했다. 강렬해지는 감각과 별개로 잦아드는 기침과 또렷해지는 목소리를 보면 그들이 한 이야기가 모두 거짓은 아닌 듯했다.

제멋대로 꺾이던 손가락이 서서히 잠잠해지자 그도 힘을 주고 있던 손을 풀었다. 쓰라린 피부를 차마 긁지는 못하고 문댔다. 가만히 있는데도 손이 벌벌 떨렸고 솜털 하나하나가 예민하게 공기의 흐름을 느끼고 있었다. 짧게 헐떡이던 숨결이 길어지고 깊어졌다.

“들어가서 편히 잠이나 자라고 하고 싶다만 그편이 더 위험해질 것 같으니까 같이 가. 그게 더 안전해. 손 떨리는 건 얼마 안 가서 멈출 테고 하루 정도 감각들이 예민할 거야.”

그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있으니 재혁이 등을 떠밀며 속삭였다.

“그리고, 지금부터 아무도 믿지 마. 나도 마찬가지고. 여태껏 네가 해왔던 것처럼 그냥 하고 싶은 대로 굴어.”

“무슨…….”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경보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천천히 발을 내디뎌 그의 뒤를 밟았다. 주변을 오가는 공기들이 그저 자연이 일으킨 바람이 아니었음을, 내리꽂히는 듯했던 시선들이 그저 착각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향들을 풍기며 하나둘 모습을 드러낸 이들은 발악하는 사이렌 소리에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권태로운 눈빛을 유지하며 앞을 향해 걸어갈 뿐이었다.

한 발자국도 바삐 움직이는 법이 없었고 일정하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이곳에서 들리는 사람의 소리라곤 나의 숨소리뿐이었다.

무거웠던 몸도 모래주머니를 벗어 던진 것처럼 가벼워졌고, 머리를 짓누르고 있던 통증도 사라졌다. 할퀴어지고 짓무른 상처들만이 스치는 바람에 고통을 알렸다.

섬세하게 부딪치는 잎사귀들의 소리도, 작고 보잘것없는 꽃들의 향도 나의 주위를 감싸왔다. 내가 이들 중에서 유일하게 하찮은 인간이라는 증거는 온기를 품고 있다는 것, 그것 하나였다.

[―니다. 20XX년 6월 21일 08시 47분. 각 대원은 통제에 따라…….]

죽어가던 내가 말짱히 걸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놀란 이는 표성과 하늘뿐이었다. 옷을 갈아입고 보호구를 착용하면서도 다들 심상찮은 이들의 등장과 계속해서 날아드는 경고 메시지로 말 한 마디 하지 않았다.

이미 쌓인 피로와 긴장감에도 흐트러짐 없이 준비를 끝낸 이들은 지시를 내리지 않아도 지정된 차에 몸을 실었다. 재민 역시 당연하다는 듯 뒷짐을 지고 같은 차에 올랐다.

재민의 등장에 놀란 대원들이 인사를 하려고 하자 그가 거만한 손동작으로 거절 의사를 표하고는 팀장님 쪽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팀장님은 설명을 시작했다.

“이번 작전의 목표는 공장과 그에 관련된 제로들을 찾는 일이다.”

어둑한 차에 타자마자 화면 가득히 떠 있는 가면들에 침이 절로 삼켜졌다. 그어진 빨간 선의 개수와 방향만 다를 뿐 모두 같은 모양의 가면이었다. 일정한 크기로 검게 뚫린 구멍들이 모두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 모습을 드러낸 적 있는 가면은 총 26개이며, 모두 순혈로 추정하고 있다. 3급 이상만 취급 시, 평균적으로 제로 한 명에 80명이 붙어 있는 걸 확인했고,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놈들까지 치면 총 2,000이 넘는 숫자가 조직적으로 활동을 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표성이 팀장님의 설명에 따라 사진과 함께 추가적인 정보들을 띄웠다. 눈에 익은 물건들이 얼마나 무식하고 자비 없는 것들인지 알고 있기에 절로 몸에 힘이 들어갔다.

“한 번이라도 그들의 손을 거친 피를 마셨을 경우 목숨은 그들의 통제하에 들어가기 때문에 혹시라도 현장에서 피를 발견했을 때 마시는 행위는 절대 금지하겠다. 또한, 꽃잎을 휘날리며 사라지는 경우가 대부분인 걸로 보아 실체가 아닌 경우가 많으니, 권총을 맞았을 시 아무 반응이 없는 놈이라면 공격보단 방어에 힘을 쓰며 살아남는 쪽을 권장하는 바다.”

팀장님의 손짓에 따라 모두 자리에 앉았다. 달그락거리는 소리도 잠시, 곧바로 차 안은 정적으로 가득 찼다. 표성이 팀장님의 뒤를 이어 브리핑을 시작했다.

“현재 감금되어 있을 거라고 추정되는 인원은 약 1,200명이며 그중 85%가 아동일 것이라 예상 중입니다. 피해자 발견 시 가까이 접근하는 일은 금지하며 매뉴얼대로 행동하길 바랍니다.”

시동이 걸리는 소리와 함께 화면이 지도로 가득 찼다.

“이것은 20년 동안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사건들을 모두 표시했을 때의 지도입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부적합해진 장소와 실종자들이 이미 사망했을 것으로 판단되는 지역을 제외한 뒤…….”

새빨간 점으로 뒤덮였던 지도는 서서히 땅을 드러내며 초록빛으로 변했다.

“위치와 주변 환경상 앞으로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곳과 아동이 실종되었던 곳이 지도상 표시된 곳들입니다. 이곳들을 포인트로 해서 동시다발적으로 습격한 뒤 범위를 좁혀갈 예정이며, 다시 자리 잡을 수 없게끔 한 뒤 관련된 자들을 잡아낼 것입니다.”

강원도 일대 지도가 확장되는 동시에 점들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포인트 지역을 묶는 일은 지원 나오신 전재민 님께서 해주실 예정이며, 저희 팀이 맡은 지역은 지도에서 볼 수 있다시피 화천을 거쳐 홍천과 횡성까지입니다.”

먹이사슬의 가장 하단부에 있을 피해자들이 어디에서 어떤 삶을 살고 있을지는 상상도 되지 않았다. 다만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조차 정체 모를 윗놈들의 각본대로라면 지금의 나는 어떤 위치에 서서 행동해야 할지…… 꼬이기 시작한 인생에 원망할 곳도 없었다.

모두가 몸을 지키기 위해 가릴 수 있는 곳을 다 가릴 때에도 고작 천 쪼가리 하나 뒤집어쓸 뿐인 재민은 당당하게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부담스러운 시선을 피해 고글을 썼지만, 여전히 시선을 맞춰오는 걸 보면 의미 없는 일인 듯했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시선 치워.]

재혁은 짧은 음성을 남기고 바로 연결을 끊었다.

언제부터 그의 말을 이렇게 착실히 다 듣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복잡하게 휘몰아치던 생각들을 지우고 나자 어차피 세상에 내 아군이란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제 밥그릇을 지키려 싸우는 놈들은 모두 피를 먹고 살아가는 이들이라는 게 떠올랐다.

무슨 싸움이 일어나고 있건, 그들이 무슨 진실을 숨기고 있건 일단 지금은 공장을 찾아내 사람들을 구하고 더 이상의 피해자가 없도록 만들어야만 했다.

세상은 어차피 악을 동력으로 굴러가는 법이고 좀 덜 나쁜 놈이 손해를 볼 뿐이었다. 나 또한 더러운 세상에서 더 더러운 놈들을 처리하기 위해 이 조직에 몸을 담고 있었을 뿐이라는 현실이, 모든 고민을 잠재우고 안도감을 가져다주었다.

팔짱을 낀 채 우리를 지켜보던 재민이 입을 열자 모두 그에게 집중했다.

“일정 구역 안에서 그들이 몸을 숨기지 못하게 하는 데에 최대 여섯 시간. 범위 또한 제한이 있기에 최소한의 포인트 지점을 만들어둔 것이고. 시간 내에 재빨리 움직여야 하고 살아서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르니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힘을 모아두는 게 좋을 거라 생각되는군.”

그는 저보다 나이 많은 이들이 있는 자리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반말을 내뱉으며 모두를 아랫사람 취급하는 태도를 보였지만, 다들 그 사실에 기분 나빠하기는커녕 오히려 경청하고 있었다.

“30분 뒤 첫 포인트 지점입니다.”

모두가 막바지 준비라도 하는 이들처럼 제 파트너와 마주했다. 차 안에는 꿀꺽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얌전히 표성의 손목을 붙들고 있는 서연과 달리 태주는 보란 듯이 옆자리에 앉아 하늘의 목덜미를 물고 있었다. 하늘은 그 모습을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는 재민과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돌렸다.

재혁은 옆자리에 앉아 있으면서도 나에게 별다른 요구를 하지 않았다. 그저 그들을 묻어나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다시금 불안하게 움직이는 그의 손가락이 신경 쓰여 힐끔거렸지만, 다행히도 장갑을 끼고 있어 상처를 내지는 않고 있었다.

그렇게 조용히 끝나는 줄 알았다.

“뭐 해.”

짧게 던진 재민의 단어 한마디가 그 정도로 크게 다가올 줄은 몰랐다.

“신경 꺼.”

재혁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재민의 말을 되받아쳤다. 하지만 그 모습이 흥미를 돋웠는지 능글맞은 미소를 띠던 재민이 나를 잡아끌었다. 강제로 그의 앞에 무릎을 꿇은 자세가 되었다. 재민이 재혁에게 웃으며 물었다.

“신경 꺼?”

“……뭐 하는 짓입니까.”

나의 물음에도 그는 재혁만을 보며 말했다. 천 한 장을 두고 턱 끝을 조물거리는 그의 손가락이 소름 끼쳤다.

“아까워라. 기껏 팔팔해졌는데.”

난, 덜컹거리는 차 안에서 이게 무슨 신세일까.

움직이려고 해도 몸은 움찔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끈덕지게 만지작거리는 재민의 손을 잡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단단함이 느껴졌다. 그의 발밑에 앉아 생글거리는 입을 보고 있는 건 생각보다 굴욕적이고, 좋지 않은 기억을 되살리는 짓이었다.

“하.”

익숙한 공기와 함께 몸은 조금씩 자유를 찾아가고 있었고, 얼마 가지 않아 뜻대로 거리가 벌어졌다. 날아가듯 자리로 튕겨 돌아왔지만, 등에 충격이 가해지진 않았다. 인공적인 바람에, 통증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다행이었지만.

이 순간 가장 확실한 건 형제 사이에 껴서 등이 터지는 건 나의 몫이라는 것이었다.

차 안에서 오가는 형제간의 팽팽한 신경전에 전부 굳은 채 분위기를 파악하기에 바빴다. 팀장님의 제재가 없었다면 아마 도착할 때까지 숨 막히는 공간에서 신경을 곤두세웠어야 했을지도.

“제아무리 안심할 수 있게 된 자라도 쉽게 믿지 않는 걸 추천하지. 뒤통수치는 일이 제법 있거든.”

재민이 재혁을 보며 천연덕스럽게 말을 던졌지만, 어디에서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각지에서 도착과 결과를 알리는 음성들이 오가고 있었지만 별다른 결과는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신입은 나가고 싶다고 조르는 대신 표성의 설명을 들으며 새로운 일을 배우는 데에만 전념했다.

“5분 뒤 첫 번째 하차 지역입니다. 남은 포인트는 43.”

차분한 어조의 표성과 달리 신입은 웃음기 섞인 미성으로 안내했다. 본인이 하고도 뿌듯했는지 올라가는 입꼬리를 내리려고 노력 중인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폐쇄된 공간 속에서 평소라면 느끼지 못했을 만큼 미세한 바람이 살을 스쳤다. 내가 정체 모를 액체를 먹었을 때와 같은 수준의 고통을 느껴왔을 거라는 말을 듣고 나니, 옆에서 꼼지락거리며 앉아 있는 놈이 눈에 밟혔다.

“괜찮겠어?”

내가 한 말인지 의심되는 수준의 질문이었다. 경험과 반복된 학습이라는 게 얼마나 훌륭한 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지를 체감했다.

[너답잖게 굴지 말고 평소처럼 해.]

쌀쌀맞다 못해 재수 없게 답하는 녀석이었다. 잠깐이나마 걱정이라는 것을 한 과거의 나에게 제발 입 좀 닥쳐달라고 전해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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