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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쉬고 싶다 (7/21)

6. 쉬고 싶다

“…….”

오밤중에 잠이 들지 못하고 천장만 멀뚱히 바라봤다. 덩치 큰 룸메이트는 생각보다 얌전히 자고 있었지만, 침대를 점령한 이 작은 아이가 문제였다.

침대를 좌우로 굴러다니는 건 기본이요, 중앙에서 자리를 잡고 360도로 몸을 회전시키는 덕에 30분 간격으로 깨다가 이젠 잠이 다 달아났다. 백보 양보해서 나를 괴롭히는 건 이해해도, 언제든 침대에서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모습이라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으윽.”

그 와중에 날아드는 튼튼한 다리를 막았다. 어정쩡한 자세로 침대 위에 구겨져 있었더니 몸이 뻐근해지는 것 같아 결국 일어나버렸다. 바닥에서 자는 놈은 홀로 평화로이 눈을 감고 누워 있는 게 왜 약이 오르는 건지.

며칠간 같이 보내면서 안 사실은 그는 천장을 보며 바른 자세로 상의를 탈의한 채 잔다는 것이었는데, 오늘도 다를 바 없었다.

“시체 같네. 재수 없게…….”

떨어지려는 아이를 죽 밀어 중앙에 안착시켜준 다음 탁상 앞에 있던 소파를 침대 쪽으로 돌려 앉았다.

몸을 적당히 욱여넣으니 푹신푹신한 게 생각보단 나쁘지 않았다. 넓은 잠자리를 두고 이런 곳에 파묻혀 있어야 하다니. 좁은 집에 아이용 침대를 하나 사야 하는지 진지하게 고민을 했다.

“흐아암…….”

눈이 뻑뻑해지는 느낌에 시계를 봤더니 이미 4시 반을 넘어가고 있었다. 새벽에 괜히 눈을 뜨고 있으니 지난날만 머릿속에서 되풀이해 떠올라 감상에 젖어들었다.

역시 이럴 때에는 몸을 괴롭히는 게 최고였다.

테이블과 침대 사이의 협소한 공간에 적당히 자리를 잡았다. 열심히 팔굽혀펴기를 하다가 가방 안에 고이 모셔두었던 아령을 들고 팔 근육을 혹사하는데, 꾸물거리던 승아가 침대 끝을 향해 데굴데굴 굴렀다.

들고 있던 아령을 옷이 층층이 쌓인 가방에 던지고 침대로 뛰어들어 아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으음…….”

웅얼거리는 소리만 들릴 뿐,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허.”

바닥에 누워 있던 놈이 양손으로 아이를 잡은 채 속삭였다.

“보고만 있지 말고 잡지.”

그는 한쪽 눈을 완전히 뜨지 못한 채로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다시 잠들 줄 알았던 녀석은 바닥에 멍하게 앉아 마른세수를 했다. 부스스한 머리도 한 번 털고 나니 가라앉아 자연스러운 라인을 그리며 떨어졌다.

일어나자마자 이부자리를 정리하는 모습이,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하는 게 아니라 무의식중에 자동으로 하는 일 같았다.

“멀쩡한 침대 두고 애한테 다 줄 생각이면 내일부터 바닥에서 자. 등 배겨서 잠도 못 자고 있는데 내가 쓰게.”

“세상모르고 자고선.”

“그래서 자는 사람 얼굴 빤히 들여다보다가 면전에 욕을 날리고 가?”

잘 때 보초를 서는 눈이라도 있나.

“제대로 된 욕을 못 들어봤나 보네.”

“진짜였나 봐. 찔러봤더니 날름 대답해버리고.”

“마음대로 생각해라.”

캄캄한 방 안에 모습을 드러내려는 힘없는 햇빛에도 그의 흰 피부는 금방이라도 투명하게 변할 것 같았다. 재혁이 갑자기 고개를 돌리는 바람에 하마터면 팔을 휘저어 자는 아이를 칠 뻔했다.

“……뭐.”

신경질적인 나의 반응에, 그는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잠 안 잘 거라면 나도 좀 물어보자. 너는 나를 왜 그렇게 싫어했는지.”

이른 새벽, 그는 왜 이런 주제를 다시 끄집어내는 걸까.

“자길 죽어라 괴롭히는 놈을 싫어하는데, 왜 싫어했냐고 묻는 거야? 대답을 듣기 전에 네가 나한테 했던 행동들을 돌아보는 게 백배는 빠를 것 같다.”

“첫날부터 면전에 대고 욕을 내뱉은 건 너였는데?”

웬 개소리야.

커질 뻔한 목소리를 간신히 참았다.

“무슨, 새로운 고문이야? 기억 조작 같은 거?”

“기억 조작? 첫날부터 재수 없는 새끼라고 다짜고짜 욕을 퍼붓고, 지나칠 때마다 인상을 찌푸린 건 너였는데.”

“무슨 소리야, 그건. 네가 먼저 기분 나쁘게 쳐다봤잖아. 징그러운 놈들한테 둘러싸였던 첫날은 내가 더 잘 기억해.”

“그 후로도 눈만 마주쳤다 하면 똥 씹은 표정으로 지나다니고, 진짜로 널 잡아먹지 못해서 안달 난 놈들을 겨우 진정시켜놓으면 발광을 떨면서 자극을 주곤, 당한 것도 내 탓이라면서 난리를 치고.”

평소에 잘하지도 않는 손짓까지 하며 말하는 게 진심인 듯했다.

“부추겼겠지, 진정은 뭔…….”

“네가 날 몇 번이나 죽이려고 했던 건 기억나? 기껏 다 해결해놓은 판 뒤집어서 네가 꼼짝없이 말라비틀어질 뻔한 거 살려둔 건? 지금 생각하니 유치하기 짝이 없다만, 선의를 베푸는 상대에게서 지금까지 이렇게 멸시를 받는데, 이 정도면 내가 너라는 존재만으로도 싫어하는 이유는 충분할 것 같은데.”

“하.”

“뭐가 그렇게 불만이 많아서 보는 족족 날 불쾌한 눈으로 쳐다보는 건지…… 덕분에 지루하기 짝이 없는 학교생활을 심심하지 않게 버텼다만, 너는 날 왜 그렇게 매번 못마땅하게 대했는지 좀 들어보자.”

지금 이렇게 된 게 다 내 탓이라고?

그는 내가 입을 떼기도 전에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온종일 네 옆에 있으면서 자제하느라 고생하는 건 난데, 무슨 전염병이라도 걸린 사람 취급하면서 난리 치니까 말해줄게. 너한테서 나는 향, 50가지가 넘는다는 건 알고 있어? 너한테는 별문제 될 일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 나한테는 그렇게 단순한 일이 아니라고. 네가 피 내주기를 혐오하는 걸 뻔히 알고 있으니까 별지랄을 다 떨면서 버티고 있는 건데 이런 취급까지 당하고 있으니 이젠 억울하기까지 하다.”

버티다니.

“뭔…….”

그는 대답할 시간을 주진 않은 채 잠깐 한숨만 쉬고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말했잖아, 억지로 하는 거 싫다고. 지금 와서 네가 무슨 과거를 갖고 있든, 그래서 나한테서 무슨 안 좋은 인상을 받았든 어떻게 해줄 순 없는데, 적어도 붙어 있어야 하는 동안만이라도 너도 나한테 노력이란 걸 좀 해.”

우수수 내뱉는 말 중에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은 몇 없었다. 화를 내는 것도 아니고 하소연하듯이 쏟아내는 말에 당황스러운 건 내 쪽이었다.

“내가 노력을 안 했다는 거야? 그리고 지금 그 말을 나보고 다 믿으라고? 네가 하는 말들을? 네 생각일 뿐이겠지. 다른 놈들 붙잡고 물어봐. 버텨온 세월이 몇 년인데 지금…….”

“목소리 좀 낮춰. 그리고 내가 널 진짜 죽이고 싶고 괴롭길 바랐으면 뭐 하러 귀찮게 질질 끌었겠어? 손쉽게 진흙탕에서 구르게 할 수 있는걸. 거지같지만 그나마 좀 잘 지내보자고 하는…….”

“잘났다, 남의 인생 휘저을 힘을 갖고 있어서. 뭐 하러 부탁을 하고 노력을 해. 나야말로 말했잖아, 그냥 꼴리는 대로 행동하라고. 착한 척 좀 하지 마.”

“대체 뭐가 그렇게 불만이야?”

“그냥 네놈들이 싫어. 너는 더 싫고. 왜 그렇게 불만이 많냐고? 오늘 보고 들었으니 귀가 있다면 다 알 거 아니야. 이미 더러워진 몸이야. 뭐 하러 생색내면서 참아. 그냥 너도 하고 싶은 대로 살아. 나도 내 마음대로 좀 굴게. 어울리지도 않게 아량이라는 말이나 지껄이지 말고.”

종일 뻥뻥 터지는 일들에 잠도 못 잤더니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왜 감성이 돋는다는 새벽에 이 난리를 떨고 있는 건지. 흥분한 채 계속 말을 쏟아냈다.

“내가 불쌍해? 아니면 여기 누워 있는 아이가 불쌍해서 아까부터 찝찝하게 굴어? 피, 얼마든지 줄 수 있어. 가진 거라곤 튼튼한 몸밖에 없으니까. 오죽하면 그 나이에 깔리면서 살아남았겠어? 아이를 빌미로 이미지 메이킹이라도 하고 싶은 거야, 아니면 나랑 잘 지내야 하는 이유라도 있어?”

“됐…….”

“또 그냥 끊어버리게? 왜 매일 시작도, 끊는 것도 죄다 네 마음대로야? 인제 와서 나랑 잘 지내보려고 했는데 마음대로 안 돼서 짜증 났어? 그런 귀찮은 짓 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이 나한테 했던 것처럼, 돈이나 주고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안 그래도 병원에 들어간 여자 입원비로 없는 돈까지 펑펑 나갈 지경인데 그냥 저번처럼…….”

악에 받쳐 괜히 울컥했다. 마주치고 싶지 않은 일들을 마주할 때나 억누르던 감정들이 날뛸 때마다 왜 눈앞에 이 녀석이 서 있는 건지. 나를 한껏 얕보고 있는 놈에게 더는 약점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지만, 상황이란 것은 나를 외면한 채 모든 것을 알리고 있었다.

나는 나를 방어할수록 더 구차해지는 말들을 내뱉으며 자신을 더 초라하게 만들었다.

“하…….”

그동안 잘 참아왔건만 왜 추잡스럽게 인제 와서 이러는 건지. 소리를 지를 뻔한 걸 간신히 참고 호흡을 가다듬는데, 참았던 감정이 터져버린 건지 진정하려 할수록 숨만 차고 눈앞은 흐릿해졌다. 추한 꼴을 보이기 싫어 이를 악물며 버텼다.

내가 잘못한 건 없었다고, 지금까지 괜찮았으니까 앞으로도 괜찮을 거라고 되풀이해 자신을 다독였다. 그렇지만 생각이라는 놈은 왜 불쑥 튀어나와 자꾸 나를 부정하는 건지. 혼란스러운 감정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꼴에 구겨진 얼굴은 보여주기 싫어서 머리를 푹 숙이고 침대에 앉았다. 이보다 더 한심해 보일 수 없었을 것이다.

살아오면서 더 수치스러운 일은 없을 거라며 하루하루를 살았는데, 지금은 정말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차라리 녀석이 또 나가버렸다면 좋았으련만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읏.”

“원하는 대로 하라고?”

붙잡힌 턱에 고개를 억지로 치켜들 수밖에 없었다. 힘을 잔뜩 준 손아귀에 입이 절로 벌어졌다. 혀끝에 닿은 액체로 보아하니, 이를 악다문다는 게 입술을 깨문 모양이었다.

눈을 깜박이는 순간 눈앞은 선명해졌고, 웃음기 하나 없는 그의 얼굴이 내 얼굴을 마주했다. 강하게 내리쬐기 시작한 새벽빛을 머금고서 오묘하게 빛나는 눈동자에 시선을 빼앗겼다.

그는 굳게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고, 입술 사이로 내비친 송곳니는 잠시나마 존재를 드러내었다가 모습을 감추었다. 한숨을 내쉬던 그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좀…… 네가 듣고 싶은 말만 듣고 하고 싶은 말만 내뱉기 전에 제발 남의 말에도 좀 귀를 기울여. 지레 겁먹고 상처받기 싫어서 네 멋대로 보고 판단하지 좀 말고.”

그의 목울대가 움직이는 동시에 침 삼키는 소리가 울렸다. 혀로 송곳니를 쓸어대니 새카만 피가 그의 혀를 적시고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믿건 안 믿건 자유긴 하다만, 네가 불쌍하다고 생각한 적 없어.”

볼에 서린 차가우면서도 부드러운 느낌에 힘이 절로 빠졌다. 입술에 그의 손가락이 스쳤다. 쓰라린 상처 위로 지나간 냉기가 한껏 달아올랐던 열을 진정시키는 듯했다.

“못 믿겠다면…….”

손을 쳐내자 미련 없이 떨어진 그는 핏방울이 맺힌 손가락을 천천히 핥았다. 그의 혀는 붉은 핏자국으로 젖었고, 입술은 빨갛게 물들였다.

잠긴 목으로 꾸역꾸역 말을 내뱉었다.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관심 없어. 훈수 두려고 하지 마.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살아.”

그는 나의 말에 말없이 씩 웃고 말 뿐이었다.

이미 오래전 일이지만 기억나는 얼굴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 스치듯 지나친 짧은 얼굴.

알다가도 모를 놈이었다. 이해하려고 노력해봤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예상하는 족족 빗나가고 제멋대로 굴다가도 손을 떼버렸다. 남의 삶에 꾸역꾸역 밀고 들어오다가도 어깨를 으쓱이며 모른 척하기 일쑤였다.

뭘 원하는 건지, 왜 저러는지 알 수 없는 그의 행동은 언제나 그렇게 신경을 거슬렀다.

화장실로 들어간 녀석을 두고 침대에 멍하니 앉아 있으려니, 자꾸 그와 과거에 있던 일들을 곱씹게 됐다. 왜 그를 싫어하게 됐나 대답하고 싶어도, 그에게 뭐라고 했던 게 무색할 정도로 명확한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타일을 때리는 물소리를 들으며 답이 나오질 않는 문제를 고민하면 할수록 조금 전까지 주고받았던 말들도 꿈속에서 헛짓한 것처럼 느껴졌다.

방전된 몸이 다시 졸음을 몰고 온 탓에 비몽사몽 앉아 있는데, 언제 깼는지 모를 아이의 얼굴이 쑥 튀어나오기에 하마터면 주먹을 날릴 뻔했다.

“으우우, 아저씨 왜 앉아서 자요?”

“……안 자.”

“에이, 잤는데? 누워서 자요.”

너 때문이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언제까지고 처량하게 앉아 있을 것도 아니니 그만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덩치 큰 녀석이 눈앞에 떡하니 서 있어서 하마터면 뒤로 자빠질 뻔했다.

침대에 누웠더니 햇살이 강해 눈이 부셨다. 이불을 얼굴까지 끌어 올리고서 눈을 붙이려는데 쿡쿡 찌르는 느낌이 났다. 밀려오는 짜증을 억누르면서 이불을 걷어치우자 아이가 갸웃거리며 나를 보고 있었다.

“아저씨, 울었어요? 눈이 빨개.”

“안 울었어.”

“그거 알아요? 울면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 안 준대요.”

“너는 선물 못 받겠네.”

“힝, 선생님이 승아는 아직 어린이라서 괜찮다고 했는데. 아직 어려서 세 번은 용서해주신다고 했어요.”

스포츠도 아니고 무슨 경고 같은 소리를…….

“산타 할아버지 같은 건…….”

갑자기 어디선가 날아온 축축한 수건이 얼굴을 덮치는 바람에 말문이 막혔다. 주르륵 떨어지는 수건을 받았다. 범인은 언제 옷까지 챙겨 입은 건지 흰 티셔츠에 밝은 색 면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는 셔츠를 걸치며 나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뭔 상관이람.

“세상에 산타 할아버지 같은 건……!”

“일어나, 밥 먹으러 가게. 먹고 자.”

뜬금없이? 이 난리를 치고 같이 밥을 먹으러 가자고?

“밥 챙겨 먹지도 않는 놈이 무슨.”

“네가 데려온 애는 먹고 커야 할 거 아냐.”

“아저씨, 밥 먹으러 같이 가요. 배고파!”

침대에서 풀쩍거리면서 뛰던 아이는 재미가 들렸는지 주위를 빙글빙글 돌아다녔고, 그 와중에 간신히 붙여놓은 손가락을 밟혀 소리 없는 비명을 질러야 했다.

“하, 정신없어 죽겠네.”

나의 혼잣말에 눈이 동그랗게 변한 아이가 얌전히 침대를 내려갔다. 워낙 비몽사몽이라 까먹고 있었는데 어제 아침을 먹은 뒤 아무것도 먹은 게 없었다.

그냥 아무거나 주워 먹으라고 하고 싶었지만, 집 안에 먹을 거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나의 손을 당기는 아이의 힘을 못 이기는 척 따라갔다. 아직 분홍색 원피스만 달랑 입고 있는 아이에게 후드 집업을 입혀놓으니, 그야말로 질질 끌리고 펑퍼짐한 게 입은 아이도 버거워할 정도였다.

“아, 신발.”

고민하는 척이라도 해주면 좋았을 걸, 아이는 나를 거들떠보지 않고 재혁의 품으로 갔다. 재혁은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길을 걸어갈 뿐이었고 아이는 어정쩡하게 안아 드는 나보다 안정적이고 널찍한 그의 품이 더 편했는지 그의 팔을 의자 삼아 편하게 안겨 조잘거렸다.

“후훙, 승아도 아빠…… 엄마가 좋아하겠다.”

가슴팍에 볼을 푹 대고 있으면서 살짝 미소를 짓고 있는 게 어딘가 수줍어하고 있는 것 같았다.

부대 앞까지 나왔건만 이른 아침부터 문을 연 식당은 그리 많지 않았다. 어디로 가야 하나 고민을 하다가 결국 돈가스가 먹고 싶다는 아이의 결정대로 온갖 것을 다 판다는 24시간 김밥집으로 들어갔다.

일요일 아침이라서인지 가게는 텅텅 비어 있었다. 적당히 후미진 자리를 골라 앉았다.

“먹지도 않을 걸 뭐 이렇게…….”

그는 이것저것 잔뜩 주문한 주제에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아이를 챙겼다. 김밥 다섯 줄에 우동, 왕돈가스 두 접시에 만두가 3인분이라니. 한껏 쪼그라든 위에 음식이 잔뜩 들어갈 리 만무했다.

아까워서라도 꾸역꾸역 먹었지만 아직도 빌 기미가 보이지 않는 그릇들을 보고 있자 녀석이 말을 걸었다.

“뭐 해, 안 먹고. 예전엔 며칠 굶은 사람처럼 쌓아두고 먹더니.”

“아무리 그래도 이걸 어떻게 다 먹어. 잔뜩 주문하길래 네가 다 먹을 줄 알았더니……. 안 먹을 거였으면 물어보고 주문을 하든가.”

“괜찮아요! 승아가 다 먹을 수 있어.”

아이는 나와 재혁에게 증명이라도 하듯이 우리를 번갈아 바라보면서 정확한 젓가락질로 돈가스를 집어 입에 넣었다. 조그만 입에 한껏 욱여넣은 것과 별개로 먹는 속도는 정말 느렸다.

배도 부르고 몸은 축축 처졌다. 할 말도 없고, 앞을 보자니 불편한 녀석이 떡하니 앉아 있었다.

불과 몇 시간 전의 일만 생각해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다른 생각 하자. 다른 생…….

“각, 다른 생각…….”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길래.”

아.

“……김밥 한 줄에 밥알이 몇 개나 들어갔는지.”

“억지로 먹지 않아도 되니까 남겨.”

그는 헛웃음을 터트리며 김밥을 들고 먹을 생각이 없어 보이는 아이에게 말했다. 미련 없이 음식을 버리고 떠나는 놈을 두곤 아주머니에게 포장을 부탁드렸다.

뭐 하러 싸 가냐는 그의 면박에도 꿋꿋하게 지켜낸 비닐봉지는 묵직했고, 종일 뭘 먹어야 하나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마음도 푸짐해졌다.

“승아는 나한테 주고, 이것 좀 들고 들어가.”

“어디 가게요?”

되물은 건 재혁이 아니라 아이였다.

“집에 가요? 엄마 혼자 있으면 밥 잘 안 먹는데, 이거 남은 거 가져다주면 되겠다! 매일…….”

“아니, 집에 안 가. 네 옷이랑 신발 사러 갈 거야.”

아이의 말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승아 옷 안 사도 되는데! 집에 많아요! 저번에 엄마가 예쁜 원피스 많이 샀어!”

“됐어. 새로 사줄게.”

한사코 거절하며 집으로 가자던 아이는 심각한 표정으로 재혁의 목을 꼭 끌어안고 나를 봤다. 그리고 재혁은 이 상황에 기름을 붓는 말을 했다.

“같이 가.”

“뭐 하러 따라와. 그냥 들어가. 넌 이리 오고.”

아이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고, 재혁은 이마를 덮고 있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면서 말했다.

“너 말고 애한테 말한 거야. 애꿎은 애한테 화 좀 그만 내.”

소리도 안 지르고 친절하게 말했는데.

“진짜 별…….”

“승아가 잘못했어요. 싸우지 마요!”

“싸운 거 아니야.”

하마터면 진짜로 언성을 높일 뻔했다. 결국, 있는 줄도 몰랐던 그의 차를 얻어 타고 부대 주변을 벗어났다.

자동차는 시도 때도 없이 덜컹거리는 작전 차량과 승차감부터 달랐다. 뽑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건지, 아니면 그의 깔끔병 덕에 깨끗하게 탄 건지 작은 쓰레기 하나 없이 깨끗했다.

조용한 차 안에 가만히 앉아 있자니 잠이 솔솔 몰려왔다. 무거운 눈꺼풀을 애써 들어 올리며 앞차에서 흔들거리는 이상한 닭 인형에 시선을 고정했는데, 오히려 최면이라도 걸리는 듯 몸의 힘까지 빠지는 느낌이었다.

“비 오겠네.”

그의 말을 듣고서 번쩍 정신을 차리고 하늘을 보니 슬금슬금 기어 나온 먹구름이 좀 전까지만 해도 밝게 내리쬐던 햇살을 가리며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조용하다 싶었더니 룸미러에 비친 승아는 이미 귀에 어깨가 닿을 만큼 목을 꺾은 채 잠이 들어 있었다.

그는 나를 힐끔거리며 말했다.

“졸리면 자. 꾸벅꾸벅하다가 유리창에 머리 박지 말고.”

“안 졸려.”

“별걸 다 아니라고 해. 이 정도면 그냥 내가 하는 말은 다 싫다고 하는 거 아니야? 애꿎은 차, 단단한 머리로 치지 말고 그냥 의자 젖히고 자. 눈 풀렸어.”

“말짱하게 잘 뜨고 있다.”

주말을 맞아 열린 행사들 때문에 교통 통제 중이라 도로는 꽉 막혀 있었고, 당당하게 선전 포고를 한 것이 무색하게 얼마 가지 않아 다시 졸음이 몰려왔다. 허벅지를 두들겨도 보고 다리를 달달 떨어도 보았지만 제지당하는 바람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떨어지는 고개를 간신히 지탱하고 그의 손을 봤을 땐 또 열심히 상처를 내고 있었다. 주변에 날카로운 물건이 없어서 그런지 이젠 제 능력까지 쓰면서.

“취미 한번 살벌하네.”

그는 나의 말을 듣자마자 하던 행동을 멈추더니 창문을 열었다. 기껏 시원해진 차 안으로 미적지근한 공기가 섞여들기 시작했고, 그의 향으로 가득했던 코는 매연으로 폭격을 당했다. 건조해진 눈에 바람이 불면서 따끔거렸다.

“닫지 마.”

단호한 말투에 고개를 돌렸더니 도로에 시선을 고정한 채 손가락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잡은 핸들을 톡톡 두들겼다. 왜 이러나 싶어 구경하고 있으려니, 그의 입술을 훑는 혀에 닿은 이가 분명 날카롭게 튀어나오길 준비하고 있는 게 보였다.

한번 눈길이 가니 계속 힐끔거리게 되었다. 그의 목울대가 움직이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시선이 마주치는 바람에 힐끗거리기를 그만두었다.

동물원이 문제였다. 동물원이. 망할 놈들. 다음에 나타나면 진짜 다 끝내버려야지.

“……아직 한 달 남았어.”

그는 콧방귀를 뀌며 대답했다.

“알아. 괜한 걱정이나 할 생각이라면 그만둬. 가만 보니까 진짜 웃기네. 마음대로 하라고 소리 지르더니 이젠 또 혼자 설레발치고.”

“상기시켜준 거야. 까먹었을까 봐.”

“친절하네.”

얼마 가지 못해 비가 쏟아지는 바람에 차창을 닫았다. 거리 위의 사람들은 난데없이 쏟아지는 빗줄기에 몸을 피했고, 옷을 적신 빗물을 털어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동안은 어떻게 살았냐. 너한테 피를 바치겠다는 애들이 줄을 서서 기다렸어?”

“그런 취미 없어.”

“피 한 번 빠는 것도 감정 교류 같은 게 있어야 해?”

한참 동안 정면만 보고 있던 그가 되물었다.

“무슨 대답을 원하는 거야.”

“무력을 써서라도 배 채우기 위해 난리인 녀석들이 태반인데, 넌 왜 그 모양이냐고.”

“넌 그런 놈들한테서 돈을 받으며 내줄 때 무슨 생각을 했는데.”

예상치 못한 질문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습한 공기도 잠시, 강하게 틀어놓은 에어컨 바람에 춥기까지 했다.

“끈다. 애 감기 걸려.”

그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 입술을 핥고 깨물었는지 그의 입술은 이제 빨갛게 붓기 시작했다. 그러곤 그는 그만두었던 짓을 다시 시작했다.

애써 외면하려고 해도 자꾸 눈에 들어오는 그의 꼼지락거림에 상처가 반복해서 아물어가는 모습을 보다가 차를 때리는 빗소리를 배경음 삼아 잠이 들었다.

“그렇게 난리를 치더니, 침까지 흘리면서 자냐.”

깜짝 놀란 나는 눈을 뜨자마자 손등으로 입을 벅벅 닦았고, 승아는 그런 나를 보며 까르르 웃었다.

“그냥 깨우면 되지, 뭘 그렇게 보고 있어.”

“중얼거릴 시간 있으면 나와, 다 왔으니까. 사람 몰리기 전에 사고 나와야지.”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백화점이었다. 외출복 몇 벌에 막 신을 신발 한두 켤레 사면 되겠거니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나왔건만 백화점이라니.

다른 곳으로 가자고 하기도 그래서 무작정 아이들 옷을 파는 층으로 올라갔다. 내 옷을 사러 온 적도 한 번도 없는 곳을 돌아다니고 있으려니 머리가 멍해졌다.

“더럽게 넓네…….”

움직이는 족족 웅성거림이 들렸다. 몰래 사진을 찍는 이들도 심심찮게 있었고, 모른 척 뒤를 밟는 이들도 있었다. 원흉인 재혁은 그런 이들의 존재에 익숙한지 신경 쓰지 않고 제 갈 길을 갔다.

새삼 평범한 놈은 아니었구나 싶었다. 불편한 시선들이 의식되는 탓에 그와 거리를 벌리며 걷게 됐다. 재혁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를 안고서 끝까지 떨어지지 않고 따라왔다.

“이게 이번에 입소문 퍼진 신발인데, 아이들은 많이 뛰어놀잖아요? 그래서 그에 맞춰 활발한 활동에도 발이 편할 수 있게 나온…….”

신발을 사는 내내 분명 고르고 있는 건 나였건만 왜 판매원은 재혁에게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 건지.

“그리고 요즘 키 크는 게 굉장히 중요하잖아요. 이게 성장판을 자극해서…….”

“그냥 이걸로 하나 주세요.”

결국 적당한 가격대에 무난해 보이는 운동화를 한 켤레 사고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안겨 다니던 아이가 제 발로 걸어 다니는 것만으로도 큰 짐을 덜어낸 느낌이었다.

다만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뭐가 필요한 건지, 왜 필요한 건지 아는 건 없고, 설명에 홀려서 듣고 있자니 뭐 이렇게 살 건 많고 종류도 다양한지.

옷가게에 처음 온 건지 눈이 휘둥그레진 아이가 여기저기 구경을 다니고 있어 더 정신이 없었다.

“아직 아이가 쑥쑥 자랄 나이잖아요. 요 바지는 그냥 입어도 좋지만 조금 길다 싶을 때에는 이렇게 올려 입어도 투톤 컬러로 나와서 굉장히 예쁘게 나온 제품이거든요. 너무 인기가 많아서 지금 전국적으로 재고가…….”

“편하게 입을 수 있는 걸로 추천해주시겠습니까?”

재혁의 질문에 직원은 세상 행복한 영업용 미소를 띠며 잠시만 기다려보라더니 빨빨거리는 걸음으로 어디론가 사라졌다. 재혁은 정신없는 와중에 골라놓은 옷들을 뒤적이다가 얇은 반소매 티셔츠를 옷 더미에서 골라냈다.

“이제 여름인데 이 티셔츠는 사지 말고 얇은 옷으로 몇 벌 더 사. 속옷도 더 사고. 하나도 없잖아.”

“너무 많은 거 아니야?”

“자주 빨 시간도 없고 금방 더럽힐 게 뻔하니까 그냥 살 때 더 사놔. 네 성격에 다시 안 올 거 아니야.”

설득력 있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애는 어디로 갔나 싶어서 옷걸이 사이를 뒤지니, 아이는 비즈가 잔뜩 달린 알록달록한 옷을 쓰다듬고 있었다. 밋밋한 마네킹이 입고 있는데도 내 눈엔 과한 장식들이 달린 원피스였다.

“마음에 들어?”

“안 사도 돼요! 그냥 예뻐서 보기만 하는 거예요.”

아이는 강력한 부정 의사와 다르게 주변을 벗어나지 못하고 서성거리고 있었다.

“헤헤, 안 사도 되는데…….”

홍조 띤 얼굴로 뿌듯해하는 걸 보니 ‘그래. 자주 있는 일도 아닐 텐데 잘한 일일 거야’라고 생각했건만.

“72만5천200원……?”

“네. 손님 72만5천200원 결제해드리겠습니다.”

여전히 방긋거리는 직원에게 되물으니 확인 사살까지 해주었다. 뭔가 잘못됐나 싶었지만, 아이가 고른 원피스 가격을 보니 40만 원이 넘었다.

무슨 일을 벌인 걸까 생각할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잔액이 얼마였는지 계산하며 떨리는 손으로 카드를 꺼내 드는데, 직원은 이미 결제를 끝낸 카드와 영수증을 그에게 넘겼다.

“계산을 왜 네가 해? 결제 취소하고 이걸로 다시 해주…….”

그는 카드를 내미는 나의 손을 잡아 내렸고, 당황한 직원은 우리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됐어. 괜히 보는 눈도 많은데 소란 피우지 말고.”

그가 하는 행동이 나에게 곱게 보일 리 만무했다. 안 그래도 그에게 달라붙는 아이도 신경 쓰이고 그 좁은 집에 얹혀사는 것도 찝찝해 죽겠는데, 이젠 금전적인 영역까지 엮인다면 앞으로 내가 얼마나 더 불편하게 그를 대해야 할지.

“이 정도 낼 돈은 있어. 돈 자랑하려거든…….”

“꼬아 생각하지 마.”

“승아 때문이에요? 옷 필요 없어. 싸우지 마!”

항상 그에게 붙어 있던 아이는 내가 문제라고 생각했는지 나의 다리를 끌어안고 울먹거렸다. 불편하게 달라붙는 녀석 때문에 말을 멈추고 주위를 봤다. 다른 매대 직원들의 눈도 우리를 향해 있었다.

“선물 하나 줬다고 생각하고 그냥 넘어가. 이상한 의미 부여하지 말고.”

무의식적으로 흘러가는 생각들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면 이렇게 살고 있을 리가 없었다.

“……산타 할아버지 납셨네.”

승아는 내 말을 듣곤 주위를 둘러보며 수염이 무성한 할아버지를 찾기 바빴다.

“어디요? 아직 오려면 멀었는데!”

“세 번 다 울어서 네 눈엔 안 보이나 보다.”

“그럼 선물 못 받아요?”

“응. 올해는 물 건너갔다.”

“히잉…….”

하지만 아이는 생각보다 더 긍정적이었다.

“괜찮아요! 오늘 이렇게 예쁜 신발도, 옷도 받았으니까!”

아이는 시무룩한 얼굴도 잠시, 금세 방긋거리며 나를 앞서갔다.

뒤따라오던 녀석의 발걸음 소리가 들리지 않길래 봤더니 그는 느끼한 웃음을 장착한 채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괜히 구경하다가 눈이 마주쳤다. 괜히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려야 했다.

제아무리 빨리 가려고 해도 아이의 보폭이 짧아 나까지 종종걸음으로 가야 했다. 긴 다리로 우리를 따라잡은 재혁은, 내가 누른 버튼을 취소하고 지하 4층을 눌렀다. 바꾸어놓아도 똑같은 짓을 반복했다.

승아는 심지어 짐가방을 든 그에게 가려고 깔짝거렸고, 결국 지하 4층에 도착하자마자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짐 줘. 내가 들 테니까.”

“다 왔어. 문이나 좀 열어줘. 뒷좌석에 싣게.”

그는 익숙하게 아이의 안전벨트까지 매줬다. 아이를 다루는 게 왜 저렇게 능숙하고 또 아이와 잘 지내는 건지.

그는 멍청히 서 있는 나를 향해 고갯짓하며 말했다.

“뭐 해. 누가 봐도 의심 가득한 눈으로 보지 말고 타.”

자리에 올라타자마자 안전벨트를 하며 물었다.

“애 키웠어?”

“질문 한번 시원하다. 자식이 있어 보여?”

시동을 걸자마자 에어컨을 트는 재혁에게 다시 한 번 물었다.

“그럼 왜 이렇게 자연스러운 건데.”

그는 과자 봉지를 바스락거리는 아이를 계속 힐끔거렸다. 차마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먹고 있는 과자를 뺏을 수는 없었는지, 운전에 집중하며 대답했다.

“주말마다 보육원에 다녔었어. 원해서 간 건 아니었는데 한두 번 가니까 정도 들고 기다리는 애들도 있고 해서 몇 년 갔었고. 지금은 못 가고 있지만.”

“흠.”

흔한 일이었기에 놀랍지 않았다. 그들이 보육원에 정기적으로 간다는 건 자신들이 얼마나 이성적이고 관대하고 안전한 존재인지를 어필하기에 딱 좋은 행사였으니.

그는 나를 의식한 듯 변명을 늘어놓았다.

“대외용 이미지 때문에 가기 시작한 거 아니야. 어머니가 아이들을 워낙 좋아하시는데 같이 다니길 원하셔서 간 거였으니까…… 여기도 그런 뻔한 이유로 온 거 아니고.”

이번엔 입 밖으로 얘기하지 않은 것 같은데.

“왜 하필 3년이야.”

“그들이 원하는 기간이었어. 네 눈에 내가 어떻게 보였는지 모르겠지만, 난 권력에 관심 없고 사람들한테 주목받는 것도 좋아하지 않아. 내가 내키는 대로 살수록 다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불가피하게 조건에 동의하고 지키고 있을 뿐이야.”

“그들이 누군데.”

“네가 매일 말하는 할배들은 아니지.”

빗줄기가 점점 거세지면서 빠르게 빗물을 닦아내는 와이퍼도 속수무책이었다. 서늘해지는 차 안 공기에 몸이 으슬으슬했다. 그는 신호등에 걸린 사이 자신이 걸치고 있던 셔츠를 벗어 내밀며 물었다.

“넌 왜 여기서 그렇게 버텨가면서 일해. 그 배짱이면 다른 일도 하면서 충분히 살겠던데.”

식어가는 몸 때문에 반항 없이 받았더니 오히려 주는 놈이 더 놀라는 눈치였다.

왜냐니…….

처음 학교에 들어간 것 자체는 그녀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아버지를 죽인, 나를 다시 그녀의 손에 들어가게 만든 이들에 대한 복수심 때문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어렸을 때 있었던 일에 대한 분노라든가 혐오감은 없었다. 오히려 학창시절에, 뱀파이어들과 부대끼면서 지난 일들이 다시 떠올라 앞뒤 안 가리고 제로들을 다 처리해버려야겠다고 생각하게 됐지.

그렇게 본능적으로 쌓인 감정은 조금씩 뱀파이어라는 존재 자체에 대한 혐오로 확대되었고, 싫어하는 행위에 정당성까지 부여하며 비대해졌다. 평생을 그렇게 한 길만 보고 산 나에게 이 일은 내 전부였고, 이 일을 그만둔다는 건 내 인생을 부정하고 살아갈 이유를 없애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당한 거 다 갚으려고.”

“다 갚고 나선 뭐할 건데.”

때 아닌 폭우에 사고라도 났는지 시끄러운 사이렌 소리가 울렸고 구급차와 경찰차가 연달아 지나갔다. 먼 도로만 바라보고 있던 그는 이제 나에게 고개를 돌린 채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부담스럽게 바라보는 그의 시선을 피해 입에 과자를 문 채 잠이 든 아이를 봤다.

참 잘도 잔다.

“죽어야지.”

그는 한참 동안 대답이 없었다. 비도 잦아들고 강 너머로 뜨는 무지개는 선명했다. 때 탄 구름 사이로 떨어지는 햇빛을 보며 창틀을 받침대 삼아 턱을 괴었다. 이제는 익숙함에 무뎌진 향이 소매를 타고 퍼졌다.

그는 담담한 말투로 대답했다.

“허무한 결말이네.”

“지겹잖아.”

서로 더는 말을 걸지 않고 신경을 건드리지도 않았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시간이었지만 아마 싸우기도, 긴장감 속에 있는 것도 피곤해졌다고 하는 게 맞을 것 같았다.

쓸데없이 버티고 있을 이유도 없어서 관사에 도착하자마자 침대에 쓰러졌다. 차 안에서 에너지를 보충한 아이는 재혁에게 놀아달라고 매달렸고 나는 애써 모른 척하며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이불 끄트머리를 둘둘 말고 끌어안으니 간만에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 잡생각이 떠오를 틈도 없이 잠에 빠졌다.

***

해는 넘어간 뒤였고, 관사는 조용했다. 낮에 너무 짜게 먹었는지 목이 탔다. 나란히 놓인 컵 중 하나를 꺼내 수돗물을 담아 마셨다. 머리가 찡 울리는 게 절로 얼굴이 찡그려졌다.

물이 반쯤 남은 컵을 주방에 두고 책상 서랍을 뒤졌다.

“의외로 단순하단 말이야.”

가지런히 들어 있는 담뱃갑이 반가웠다. 라이터까지 있었다면 좋았으련만……. 한 개비 꺼내 물곤 정리할 생각이 없던 가방을 뒤졌다. 라이터를 꺼내들곤 베란다로 몸을 옮겼다.

쾌적한 방 때문에 느끼지 못했던 습기가 피부를 간질였다. 급하게 불을 붙이고 한 모금 빠는데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잘못 들이마신 숨이 목구멍을 강타했다.

“으, 내, 콜록…… 목…….”

혼자 베란다에 서서 난리를 치니 아이가 곧장 내게로 달려오며 상태를 살폈다.

“아저씨!! 괜찮아?!”

연신 나오는 기침과 아이 때문에 결국 새것과 다름없는 담배를 꺼버렸다. 재혁은 허겁지겁 달려오더니 흙이 잔뜩 묻은 아이를 안아 올렸다. 이미 아이가 뛰어온 바닥은 흙으로 더러워졌고, 노란 러그는 갈색으로 물들어갔다.

“제발 씻고, 씻고 돌아다니자.”

절규하는 그의 손에 대롱대롱 매달린 아이는 나에게 흙 묻은 손을 쭉 폈다. 뭔가 했더니 새끼손톱만 한 달팽이가 잔뜩 움츠린 채 붙어 있었다.

“이거 봐봐요.”

아이는 겨우 나온 달팽이의 눈을 툭툭 치며 깔깔거렸다.

“달팽이를 왜 잡아 왔어. 다시 놔주고 와.”

“이름은 퐁퐁이예요. 아빠가 키워도 된댔어요. 내일 친구들한테 보여줄 거예요!”

“이제 아빠라고 좀 부르지 말고. 아빠 아니잖아. 함부로 그렇게 부르면……!”

재혁은 나와 아이의 대화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이를 안고 욕실로 향했다. 일어나자마자 하는 일이 바닥을 닦는 일이라니. 걸레를 대충 적셔 발로 질질 끌며 닦았다. 다행히 흙탕물이어서 쉽게 닦이는 게 다행이었다.

문제는 러그였다. 이걸 어떻게 닦아야 하나 고민을 하다가 바닥을 닦던 걸레로 뭉개는 바람에 물 자국들은 닦이긴커녕 영역을 확장해갔다.

“아니, 뭐 이런 걸 깔아놔서.”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수습하기 위해 난리를 치는데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물소리가 커졌다.

그는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바닥에 앉아서 뭐 해. 거긴 안 묻었어?”

“어?”

물에 젖은 옷을 빨래 통에 벗어 넣던 그는, 어정쩡한 자세로 러그를 깔고 앉은 나를 보고 다가왔다. 또 무슨 난리를 칠까 싶어 손사래까지 치면서 다가오는 그를 거부했다.

“어, 깨끗해.”

“……왜 이래?”

고장 난 로봇처럼 양손을 같은 방향으로 허우적거렸다. 양팔을 잡아 일으켜 세우는 그의 힘에 몸은 가뿐히 일어났다. 재빨리 발로 밟아 가리려고 했지만, 녀석의 눈이 더 빨랐나 보다.

“발 치워봐.”

“뭐야. 발도 내 마음대로 못 놔?”

……망했다.

변명할 시간도 없이 그의 발에 걸려 넘어진 몸뚱이는 발코니 유리창까지 단번에 밀려갔다. 등으로 받은 찌릿한 충격과 팔로 상체를 막아버린 녀석의 힘에 억 소리가 절로 났다. 그는 건조해진 목소리로 묻기 바빴다.

“일부러 그랬지?”

“이런 걸 일부러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닦을게. 아니, 내가 내일 세탁소에 맡길게. 뭐 좀 묻었다고 이렇게 폭력을 휘두를 일이야?”

마지막 말은 하지 말 걸 그랬다. 그의 팔목을 치고 벗어나는 순간, 잡힌 몸뚱이가 붕 떠선 소파 위로 떨어졌다. 조금만 잘못 떨어졌다면 아마 척추를 다쳐 다신 움직이지 못했을지도.

“으.”

홧김에 뻗은 다리에 걸려 넘어진 녀석이 침대에 이마를 박고서 주저앉았다. 침대의 탄력에 그의 머리가 흔들거리는 모습을 보고 웃음을 참을 수 있다면 세상 어떤 고문을 받는다고 해도 다 버텨낼 인재일 터였다.

숨죽여 웃는 시간도 잠시, 그가 다리를 잡아당기는 덕에 주르륵 미끄러진 몸뚱이가 얼룩진 러그로 끌려 내려갔다. 그의 우락부락한 팔뚝을 잡는 순간 밀쳐지는 바람에 보기 좋게 깔렸다.

몸이 그의 손에 끌려가며 옷이 쓸려 올라가 배가 훤히 드러났다.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자세였다. 러그에 맨살이 닿은 등이 축축했다.

옷을 끌어 내리며 일어날 생각이 없는 녀석의 가슴팍을 밀쳐내며 말했다.

“이 자세 되게 좋아하네. 비켜, 일어나게.”

바윗덩어리라도 되는 것처럼 꿈쩍도 안 했다. 그때처럼 배 위에 걸터앉았으면 나았으련만, 어정쩡한 곳에 앉아 있는 바람에 엉뚱한 곳에 자극이 갔다.

빠져나오려고 꿈틀거릴수록 불편함만 가득해졌다. 눈매가 가늘어지는 게 아마 그도 내 신체 변화를 눈치챈 게 분명했다.

“네가 더 좋아하는 것 같은데.”

“아니, 이건 그냥 생리적인 현상이고…… 좀 비켜보……!”

“싸우지……!! 악!”

빠져나오기 위해 아등바등하다가 그의 가슴을 밀쳐내던 손목까지 잡혔는데, 그 순간 욕실에서 비명과 함께 둔탁한 소리가 났다.

아무리 난리를 쳐도 꼼짝도 하지 않던 녀석이 벌떡 일어났다. 아이가 소리를 질러줘서 다행이었다는 생각도 잠시, 큰일이라도 났나 싶어 따라갔다.

급하게 달려가 재혁과 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자, 아이는 우리를 보곤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수건으로 아이를 감싸 안았다. 바닥은 욕실용품들과 처음 보는 장난감들로 난리가 나 있었다.

“왜 그래?”

“다치진 않았는데, 물건들 쏟아지는 것 보고 놀란 것 같아.”

별일 아니구나 하고 가슴을 쓸어내리는데 아이는 울먹거리며 입을 열었다.

“퐁퐁이 없어졌어.”

“저기 위에…….”

조금은 발그레했던 재혁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압, 저씨.”

“앞접시?”

재혁은 의아한 듯 되물었다. 아마 그를 아빠라고 부르려다가, 아빠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던 나의 말을 떠올린 듯했다.

“……저씨가 안 오길래 승아가 찾으려고 어…… 여기 오리 위에 올려놓고 가려고 했는데 눈 깜박하니까 없어졌어.”

아이는 훌쩍거리느라 말도 제대로 못 했다. 어쩔 수 없이 바지를 걷어 올리고 물기 가득한 욕실로 들어가야 했다. 좁아터진 실내에 두 남자가 쪼그리고 앉아서 달팽이 한 마리를 찾는 진풍경을 구경해본 사람이 또 있을까.

아이는 새로 산 옷을 입고 문 앞에 서서 심각한 얼굴로 우리를 보고 있었다. 발을 동동 구르면서 10초에 한 번씩 찾았냐 물으며 우리를 닦달하는 덕에 괜히 마음이 조급해졌다.

“없어요?”

“얌전히 앉아 있으면 찾아서 갖다줄게. 거기 서 있지 말고 거실에라도 가서 기다리고 있어.”

“흐잉.”

나의 말을 들은 아이는 눈물 자국을 닦으며 한껏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말은 곧잘 듣는 편이라 터벅터벅 거실로 몸을 돌렸다.

장난감들과 바가지를 수없이 들었다 놨다 했지만 달팽이는 보이지 않았다. 이미 밟힌 건 아닌가 싶어 발밑을 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달팽이를 왜 가지고 와도 된다고 했대? 그렇게 싫으면 끝까지 안 된다고 하면 될걸.”

“……이렇게 될 줄 몰랐지. 여긴 없는 것 같은데.”

“네 코로 냄새라도 좀 맡고 찾아봐.”

“개 취급하지 마.”

“이럴 때 쓰지 언제 써. 그냥 밖에서 한 마리 잡아 오는 걸로 하자. 비 와서 어차피 많이 나와 있을 거 아니야.”

“점액질로 길을 만들면서 이 안을 돌아다닌다고 생각해봐. 여길 벗어났다면…… 하, 느려서 아직 밖에 못 나갔을 거야. 문 좀 닫아봐.”

이렇게 쉽게 그를 골탕 먹일 방법을 찾아내다니.

그는 돌연 인상을 찌푸리며 나를 내쫓았다.

“아니, 그냥 좀 나가 있어줘. 집중이 안 돼.”

“내가 뭘? 그리고 이렇게까지 뒤졌는데 없는 거면 없는 거다. 달팽이 하나 가지고 이게 무슨 난리야.”

후련한 마음으로 나가기 위해 몸을 돌렸는데, 열린 문과 벽 사이에서 달팽이가 더듬이를 유유하게 빙빙 돌리며 열심히 움직이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가 세면대 밑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동안 조용히 달팽이를 손안에 쥐었다.

그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문 좀 닫고 나가보라고. 네 말대로 냄새라도 좀 제대로 맡아보게.”

“자기가 집중 못 하는 걸 왜 남 탓을 하고 그래. 그리고 개 맞네. 뭘 자꾸 아니래.”

이곳에서 쫓겨나는 게 아쉬울 것도 없었고 이미 잡은 달팽이가 욕실 안을 돌아다닐 리 없었다. 조금만 힘을 줘도 바스러질 것 같은 달팽이를 주먹 안에 고이 모시고 일어났다.

“잘 찾아봐라.”

갑작스럽게 잡아당기는 힘에, 하마터면 물이 흥건한 욕실에서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다. 몸에 밀린 욕실 문이 큰 소리를 내며 닫혔다.

“으, 잠깐 좀…… 왜…… 이래 진짜.”

문고리에 부딪힌 엉덩이가 얼얼했다.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녀석은 주먹 쥔 손가락 사이를 감싸 잡더니 힘을 주기 시작했다.

“손가락 부러지기 전에 펴봐.”

아이가 들어가 있던 욕조의 물에서 퍼지는 열기와 습기에 나까지 후끈해지는 느낌이었다.

“찾았어요?! 살아 있어요?!”

작은 발소리 뒤로 문을 쾅쾅 치는 소리와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힘을 꽉 줄 수도 없어서 어정쩡하게 쥐고 있던 주먹이 그의 손아귀 힘에 벌어지면서 달팽이가 데구루루 굴러 떨어졌다.

조금만 더 버티려고 했다면 손가락이 나무젓가락처럼 꺾여버렸을지도.

“…….”

괜히 찔려 큰 소리로 아이가 들을 수 있게 혼잣말을 했다.

“이런, 여기 있었네. 천장에서 떨어졌나 보다.”

“거기 있어요?!”

문을 열고 나가자 닦달을 하던 아이는 먹이라도 기다리는 새끼 새처럼 내 손에 시선을 고정하고 발을 동동 굴렀다.

“천장, 에서 떨어졌네. 잃어버리지 말고 잘 갖고 있…….”

“여기요!”

아이는 어디서 가지고 왔는지 모를 플라스틱 생수병을 들이밀었다. 나는 아직 그가 있는 욕실 문을 대차게 닫아버리며 물었다.

“이건 왜.”

“이제 잃어버리면 안 되잖아요. 집 만들어주세요, 집.”

집……?

달밤에 플라스틱 병을 껴안고 인터넷을 뒤졌다. 열심히 영상을 따라 하면 만들었건만 왜 결과물은 이리도 다른 건지. 그래도 아이는 고맙다며 꾸벅 인사까지 했다.

내 눈엔 그냥 쓰레기 속에 담긴 괴생명체 같아 보일 뿐이었지만, 아이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탁상에 놓고 침대에 누워 지켜보다가 졸기까지 했다.

“잘 자네.”

달팽이 집도 만들어주고 포장해온 음식을 우걱우걱 먹고 분리 수거까지 했건만 그는 욕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결국 무슨 일이라도 났나 싶어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다.

“적당히 하고 끝내.”

“나갈 거야. 다 했어.”

귀가 빨갛게 달아올라 있는 게 후덥지근한 곳에서 꽤 힘을 빼고 있었던 모양이다. 엉망이었던 물건들도 제자리를 찾아갔고, 난리 났던 물기도 깔끔하게 닦여 있었다.

그는 물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 군말 없이 욕실을 빠져나와 발까지 닦아냈다. 그가 나오자마자 몸 곳곳을 뻗으며 걸어간 곳은 다름 아닌 발코니였다.

아직 쌀쌀한 밤공기가 집 안으로 흘러들어왔지만, 그는 그게 좋은지 기지개를 쭉 켜고 있었다.

딱히 운동을 더 하는 것도 아니고 특별히 챙겨 먹는 것도 없어 보이는데 움직일 때마다 그의 등 근육은 보기 좋게 꿈틀거렸다. 나도 피를 챙겨 마셔볼까 충동이 일어날 정도였다.

“노출증이야, 뭐야…….”

상체를 훤히 드러내고 당당하게 머리카락을 털던 녀석이 난간 위에 놓여 있던 뭔가를 집어 들었다. 낯익은 물건이었다.

“아.”

그의 손에 있는 꽁초를 얌전히 가져가려는데 놔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건 또 무슨 심보인가 싶었다.

“애도 데려와놓곤, 이제 담배는 끊지.”

“많이 피우지도 않는데 뭘. 옥상에 가서 피우면 돼. 같은 흡연자끼리 야박하게 굴지 마라.”

“내가 싫다고 하면.”

“더 피워야지.”

피식 웃던 그는 집 안으로 눈을 돌렸고, 침대 밖으로 벗어나려던 아이는 데굴데굴 굴러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얌전히 침대 가운데에 자리를 잡은 아이를 보며 물었다.

“승아, 매일 저렇게 재울 생각이야?”

서로가 불편한 상황에서 일상에 지장이 가는 수준까지 고집을 부릴 생각은 없었고, 인정하긴 싫지만 아이에 대해서 빚을 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단번에 을이 되는 상황이 달갑진 않았지만, 함께 살아야 할 시간을 생각하면 모든 걸 원하는 대로 할 순 없었다.

“바닥에서 재워야지. 매일 뜬눈으로 밤을 지새울 순 없으니까. 침대에서 자. 내가 승아랑 바닥에서 잘게.”

고개를 끄덕이며 들어가는 놈을 불러 세웠다.

“왜.”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선 놈의 눈은 언제 봐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게 충족하지 못한 욕구에서 비친 일렁임이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정식으로 목숨을 내걸고 싸운다면 내 쪽이 형편없겠지. 정말 내가 오해라도 하고 있었던 것인지 모르겠다. 사리사욕만 채우기 위해 밀어붙이는 놈들과는 다르게, 그는 분명 선을 지키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었다.

불특정 다수에게 향한 화살을 그에게 조금 더 집중시켰던 사실을 부정할 순 없었지만 당한 일들을 생각하면 후회가 되진 않았다. 그는 가진 게 많으니까. 지켜줄 울타리가 많을 테니까.

다만 잘 지내보기 위해 노력하는 게 보일수록 내가 잘못 판단을 한 거였나, 내가 나쁜 거였나 하는 생각이 들어 불쾌하고 짜증이 났다. 그런 상대에게 나의 치부를 드러내고, 못 볼 꼴을 다 보였다고 생각하니 그것도 억울했다.

그런데 왜 지금 그런 놈에게 아이 하나 때문에 고맙다는 감정을 느끼고 있어야 하는 건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으니 녀석이 먼저 입을 열었다.

“말싸움이든 몸싸움이든 하려면 내일 걸어줘라. 네 동생, 너랑 똑같아. 같이 있기만 해도 기 빨리게 하는 재주가 있어. 세트로 있으니까 배로 피곤해.”

그는 언제나처럼 씩 웃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뭐, 고맙다거나 미안하고 말하려면…….”

“뭐래. 계좌번호나 달라고.”

그는 완전히 몸을 나에게 돌리며 물었다.

“그게 그렇게 찝찝해?”

“응.”

“그럼 그냥 앞으로 천천히 갚는다고 생각해. 이제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게.”

그는 눈썹을 꿈틀거리고 들어가버렸다. 태연하게 이부자리를 정리하며 바닥에 아이를 내려놓는 놈은 뒤통수부터 즐거워 보였다.

다르긴 무슨.

저런 놈한테 감사하는 마음이라니, 내가 죽을 때가 다 된 게 분명했다.

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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