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악연 (1)
구호 소리만 가득했던 부대가 어딘가 부산스러웠다. 차량 통제가 이루어지던 여느 날과 달리 수많은 차가 부대로 들어가고 있었다. 묘하게 긴장된 분위기가 감도는 곳을 지나 부대 안으로 향했다.
아직 신병 선발이 이루어지는 4월이기에 운동장을 신명 나게 뛰고 있어야 할 사람들은 없고, 수상한 사람들만 가득했다. 뭔가 까먹은 행사가 있었나 싶어 나는 속도를 높여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아, 죄송합…….”
유리문을 미는 동시에, 양복을 입고 있는 이와 부딪쳤다. 자동으로 몸에 밴 사과의 말을 입에 올리며 고개를 들었는데, 상대는 곰이라도 해도 믿을 덩치를 자랑하며 실내에 어울리지 않는 선글라스를 끼곤 고개를 까딱였다. 문제는 이런 놈이 한둘이 아니고 열댓 명은 되어 보인다는 것이었다.
뭐 하는 놈인가 보고 있으니, 사방을 둘러보던 눈들이 나를 보기 시작했다. 죄가 없음을 증명하듯 손바닥을 보이며 복도를 걸어가는데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재혁도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나를 보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 소란스럽게 입을 열거나 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놀란 감정을 감추기 위해 더 속도를 높여서 걸을 뿐이었다.
저 새끼가 왜 여기 와 있는지, 오더라도 왜 이런 무지막지한 사람들을 이끌고 부대까지 쳐들어온 건지. 수많은 경우의 수를 생각하고 있으려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마른세수를 하며 3층에 있던 행정실로 들어가자 웅성거리던 사람들이 일제히 나를 바라봤다. 태주가 곧바로 나에게 속사포 랩을 구사하기 시작했다. 비트만 깔아주면 꽤 멋진 곡이 될 듯했다.
“유운 형, 현승이는 알고 있었답니까? 그래서 미리 나간 거래요? 재혁 님이 여길 왜 와요? 제주도로 가야 하는 거 아닙니까? 저희 팀 말고 자리 빈 곳 또 있대요? 그냥 신입 아무나 잡고 형 옆에 앉히면 안 돼요? 불길함이 감지됐습니다. 단연코 불길합니다. 그냥 감이 아니라 뱀파이어로서 느끼는 불길함입니다.”
절로 침이 꼴깍 넘어갔다. 뱀파이어인 이들이 이 정도 난리를 칠 놈이라면 자기가 원하는 파트너를 점찍어 활동할 수도 있을 텐데, 굳이 내가 버젓이 자리 잡은 우리 팀으로 올 리 만무했다.
“그놈이 여기로 올 일은 없어.”
“그걸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혹시 미리 알고 있었어요? 현승이한테 귀띔해준 사람이 형이셨습니까? 형, 그냥 저랑 파트너 맺으실래요? 어차피 저희 팀에 신입 들어오기로 예정되어 있으니까 신입이랑 재혁 님을 붙여놓진 않을 거 아닙니까.”
홀로 태평한 서연이 미친 속도로 타자를 두드리면서 말했다.
“이 건물에 있는 팀만 열 개는 됩니다. 지레짐작할 시간에 할 일을 하는 게 어떨까요. 5분 후부터 당장 훈련 일정 있으니까 몸이라도 푸는 게 좀 더 도움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같이 일을 하게 된다고 하면 좋은 일 아닌가요? 그분과 함께하는 것 자체가 영광입니다.”
……영광?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지만, 건물 입구에서 접했던 광경을 생각하면 그녀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이상해 보이진 않았다.
“부담스럽단 말이에요!”
태주는 제 머리를 쥐어뜯으며 절규했다.
“담배를 한 열 갑을 피우고 오는 길인가 보다.”
자리에 가서 앉으려는데 표성이 말을 붙였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지 않았는가, 웃는 얼굴로 표성의 어깨를 두드리며 앉는데 모니터에 비친 내 얼굴이 어딘가 얄미워 보였다.
“오늘은 좀 봐주세요.”
지겨운 잔소리를 늘어놓을 것 같았지만 표성은 의외로 아무 말 없이 넘어갔다. 그러더니 꽤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진짜 오면, 머리를 조아릴 상대야, 아니면 후임으로 대해야 하는 상대야?”
“그런 가정도 세우지 마십시오.”
끔찍하니까.
“가정이라니. 대비지. 팀장님이 지겹게 소리치는 단어잖아. 대비.”
수통에 물이나 채워 넣으면서 하루 일정을 확인했다. 허리춤을 더듬거렸으나 압수당한 총이 있을 리 만무했다. 서랍 위에 아무렇게나 놓인 표성의 권총을 훔쳐 가려다가 생체 인식 시스템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다시 곱게 내려놓았다.
사건이 터지지 않는다면 언제나 일정은 훈련과 체력 단련 시간으로 차 있었고, 드물게 이론에 관한 시간이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서연의 말대로 종일 몸을 써야 하는 시간뿐이었다. 가끔은 편하게 인간들 사이에서 훈련을 받을까 생각이 들긴 했지만, 현장에서 허무맹랑하게 죽지 않기 위해서라면 그럴 수는 없었다.
단체로 어수선하게 움직이며 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문을 두드리고 들어온 여자가 파일을 뒤적거리며 외쳤다.
“백유운 님, 부대장님이 호출하십니다.”
“네. 알겠습니다.”
갑자기 태주의 영혼이 나에게 넘어오기라도 한 듯 불길함이 몰려왔다.
“5층 회의실로 가시면 됩니다.”
회의실?
진짜 좆됐다. 하지만 사관학교에 발을 한 번이라도 담갔던 사람이라면 우리 둘 사이가 얼마나 개판인지 알 터였다. 미치지 않고서야 우리를 붙여놓을 리 없겠지.
이중으로 되어 있는 문 중 하나를 열고 들어가자 온통 새하얀 벽이 나를 맞이했다. 방음 처리까지 되어 먹먹한 공간을 걸었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문으로 다가갔다. 조금 뜸을 들이다가 숨을 삼킨 뒤, 문고리를 잡았다.
“부르셨…….”
그렇다. 부대장님은 사관학교에 발을 담근 적이 없으셨다.
“인사해라. 이번에 서울 C팀에 새로 들어오게 된 전재혁이다. 같은 학교 출신이더군. 사이좋게 조기 졸업을 한 사이이기도 하다지? 새로운 파트너이니 이번엔 사고 치지 말고 열심히 해보도록.”
“잘 부탁한다.”
재혁은 태연하게 손을 뻗으며 싱긋 웃었다. 절대 놀란 눈치가 아니었다. 알고 있던 게 분명했다. 심지어 파트너를 맺는 일이 뭐라고 부대장님을 중심으로 각 팀장이 주위에 빙 둘러 앉아 있었다. 조금씩 숨이 막혀왔다.
가지고 들어온 파일을 열어볼 필요도 느끼지 못하고 내려놓았다. 어쩌면 그가 전 부대에서 가장 좋은 평가를 받고 있고, 제일 최신 시설을 가진 서울에 오는 일은 당연할지도 몰랐지만…….
그래도 파트너는 좀 아니잖아!
“싫습니다.”
“결정권은 너한테 없다.”
“차라리 제가 다른 부대로 옮기겠습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결정권은 너한테 없다.”
“싫습…….”
“그만.”
부대장님은 가볍게 손을 들며 나를 제지했다. 평소라면 꼬리를 내리고 그냥 나갔겠지만, 오늘은 달랐다. 깨지더라도, 훈련소에 끌려가 지옥을 맛보더라도 발톱을 세우고 달려들어야 하는 날이었다.
“이놈과는 1초라도 같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런 놈과 파트너를 맺느니 그냥 이번에 새로 들어올 신입이나 붙여주십시오. 그게 더 나은 선택이란 거 증명해드릴 수 있습니다.”
재혁의 호칭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내가 그를 언급할 때마다 팀장님들의 미간엔 주름이 졌고, 항상 나의 편을 자처하던 미친 호랑이마저 부대장님의 의견을 지지했다.
“조항에 어긋나는 일이야. 지금 네가 현장에서 뛰고 있는 것도, 관사에서 홀로 지내고 있는 것도 다 네 편의를 봐서 눈감아주고 있는 거다. 애초에 다른 놈들이 너처럼 파트너를 대했으면 경고고 뭐고 내쫓았을 거다. 그동안은 네가 실력으로 뭐라 할 수 없는 놈이니까 두었지. 선을 넘고 제멋대로 굴면 나도 더는 네 편의를 봐줄 수 없어.”
“하지만 같이 일할 순 없습니다. 편의 봐주시지 않아도 됩니다. 관사에서 다른 이들과 함께 지내도 상관없고, 현…… 장에서 뛰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선을 넘는 일이 아닙니다. 정식으로 거절하고 있는 겁니다. 옆에 서 있는 놈이…….”
“불평불만을 늘어놓거나 하소연할 생각이라면 접어두는 게 좋을 거다.”
“옆에 서 있는 놈이 무슨 생각으로 이곳에 자원해서 들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저희보다 바쁘고 인력이 부족한 곳이라면 어디든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까지 미친 호랑이에게 정중하게 말한 적이 또 있나 싶었다.
“그만 징징대. 여기가 교실에서 짝꿍 따위를 정하는 자리야?”
“팀장님!”
“진심으로 부적절한 상황이라고 생각되면 사유를 써서 정식으로 요청하도록 해.”
왜 재혁이 웃는 낯짝으로 옆에 서 있는 건지, 녀석이 무슨 생각으로 사는 건지 통 알 길이 없었다.
“인사, 안 받아줘?”
나와 조금만 닿아도 똥이라도 밟은 것처럼 인상을 쓰던 놈이, 지금은 역겨운 평화주의자 행세를 하고 있었다.
“차라리 태주와 붙여주십시오! 이놈과 같이 뛴다면 작전이고 뭐고 다 망할 겁니다! 부대장님 말씀대로 같은 곳 출신이니 누구보다도 제가 이 녀석을 잘 알 것 아닙니까? 제가 장담할 수 있습……!”
“백유운.”
날아오는 단도를 잡지 못했다면 나는 그대로 실명을 했을 터였다. 칼날은 정확히 나의 눈을 향해 날아왔고, 하루하루 긴장하고 있는 나의 반사 신경이 몸뚱이의 안녕을 지켰다.
미친 호랑이도 이젠 부드럽게 대할 생각이 없는지 살기를 띠고 있었다. 그가 인간이라는 걸 몰랐다면 뱀파이어였다고 믿었을지도.
인간의 몸으로 뱀파이어가 득실거리는 저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만만찮은 눈빛으로 살아왔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만해.”
피라는 건, 인간이라는 건 뱀파이어들에게 마약 같은 존재이기도 했다. 한두 번으로 무슨 중독이 되나 싶어도 한번 맛봤던 인간이라면 처음 본 사람보다 본능적으로 더 끌려 했고, 많이 맛본 상대일수록 더욱 광적으로 찾았다.
그렇기에 콜트를 이어 나의 세컨드였던 단도인 잭을 되돌려 받았다고 좋아할 일이 아니었다. 이건 무언의 협박이었다. 그와 정식으로 파트너가 된다는 맹세를 하라는.
침착하던 눈들이 빛을 내며 나를 향했다. 아무리 뱀파이어 놈들과 부대끼며 살았다지만 만만히 볼 자리가 아니었다. 이미 수많은 세월을 살고 또 살아남은 이들이었다.
그들의 눈에는 난 한낱 애송이 같은 인간이겠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지만 조금 기가 눌렸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옆에 있는 놈이 손을 조금 더 내 쪽으로 들이밀었다. 그렇게 주저하는 나를 닦달했다.
“잘해보자고.”
그의 눈을 봤다. 여전히 나를 훑는 눈빛. 이젠 그런 눈빛이 열 쌍이나 넘게 나를 둘러싸고서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 다른 방법을 생각하려고 해도 떠오르는 방도가 없었다. 피할 곳도, 나의 말에 넘어갈 상대도 없었다.
더 이상의 거절은 무의미했다. 오로지 그들을 더 열받게 할 뿐이었다. 재혁도 그걸 알고 있을 터였다.
오른손으로 잭을 쥐었다. 손은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긴장해서도 아니고 무서워서도 아니었다. 이건 명백한 분노였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네가 원하는 게 이런 거야?”
그에게 조용히 속삭였지만, 감각이 발달한 다른 이들의 귀에 들리지 않았을 리 없었다.
“글쎄, 잘 모르겠네. 말했잖아. 난 네가 그리웠다고.”
그의 당찬 목소리에 회의실 안이 만족스러운 감탄사로 잠깐 일렁였다. 주저 없이 잭을 들어 손바닥을 가르자, 울컥 솟구쳐 나온 피가 손바닥에 고였다.
그의 눈동자가 붉게 변했고, 고요하기만 했던 공기가 이젠 나를 짓눌렀다. 그 어떤 무력도 오가지 않았지만, 공간은 뜨겁게 가라앉고 있었으며 온전한 빛을 띠는 눈동자들이 탐욕과 절제로 얽혀왔다.
대리석 바닥으로 떨어지는 핏방울 소리가 청량하게 울렸다. 언제든 나의 목을 뚫고 몸을 종잇장처럼 내던져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가 감돌았다. 주먹을 꽉 쥐자 밀려 나오는 피가 바닥을 적셨다. 아마 이 공간에 있는 뱀파이어들뿐만 아니라 다른 층에 있는 놈들도 냄새를 맡았을 것이다.
여전히 허공에서 멈춰 있는 그의 손에 피에 젖은 손을 끼워 넣으며 말했다.
“후회하게 될 거야.”
상처가 벌어지면서 쓰라린 감촉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후회는 무슨. 잘해보자고 하는 내 말, 듣긴 했어?”
“윽!”
얼마나 나의 손을 세게 쥐었는지, 뼈가 어긋나 으득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똑같이 힘을 줄수록 출혈만 심해지고 그와 맞닿은 손바닥이 미끄러질 뿐이었다.
열 오른 손바닥에 닿는 그의 차가운 손이 소름 끼쳤다. 신경질적으로 그의 손을 뿌리치자 사방으로 핏방울이 튀었다. 바닥엔 꽤 많은 피가 고여 있었고 입술은 말라가고 있었다.
그는 나의 손목을 잡고 우악스럽게 끌어당겼다. 굳은살로 거친 손바닥에 그의 말캉한 혀가 지나갔다. 따끔거리면서도 간질대는 선명한 촉감이 신경을 타고 온몸을 훑었다.
애써 느껴지는 감촉을 무시하며 지켜보는 이들에게 말했다.
“만족스러우십니까?”
그의 혀가 지나간 손바닥을 옷에 비볐다. 당장이라도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조급해졌다. 회의실에 있는 뱀파이어들이 침을 삼키는 소리가 나에게도 들릴 지경이었다. 압박감에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나가봐.”
피가 흐르는 손으로 경례를 하곤 문고리를 잡았다. 문고리는 그의 손을 잡았을 때와 다를 바 없는 온도였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고, 애써 가볍게 놀리던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그의 멱살을 잡고 벽으로 밀쳐냈다.
“뭐 하는 짓이야? 네 선에서 끝냈어야 할 거 아니야.”
나의 말에 그의 눈매가 가늘어졌고, 나는 그런 상대의 맹렬한 눈동자를 피하지 않고 마주했다.
그는 바닥에 침을 뱉어냈다. 새빨간 농도 짙은 타액이 바닥을 더럽혔고, 그 선명한 색이 나의 일부였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는 주저 없이 송곳니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뭔가 착각하고 있나 본데, 나도 너 같은 놈이랑 같이 일하고 싶은 마음 없어.”
자신을 잡은 나의 손은 신경도 쓰이지 않는다는 듯 그대로 나를 밀어붙였다. 얼마 가지 않아 등이 벽에 닿았고, 서늘한 감촉에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놓을 생각 없는 그에게 경고했다.
“귀찮은 일 만들 생각이라면 지금 그만두는 게 좋을 거야.”
그는 나의 피가 잔뜩 묻은 제 손을 들더니 그대로 나의 얼굴에 대고 쓸었다. 비릿한 향이 코를 찔렀다.
“읏…….”
그는 나의 목을 똑같이 죄며 말했다.
“역겨운 네 피 간수나 똑바로 해.”
다시 나의 품으로 돌아온 잭을, 나를 잡은 그의 손목을 향해 휘둘렀다. 허공을 가른 칼은 그에게 상처를 만들어주진 못했지만, 나에게 소중한 산소를 공급해주었다. 칼칼한 목을 가다듬을 필요 없이 말했다.
“5년 동안 노인네들 얼굴마담을 자처하더니, 몸이 둔해졌어? 대가리도 비고.”
그는 귀찮다는 듯 팔을 휘두르면서도 나의 말에 열을 받기 시작했는지 급소를 노리며 반격을 시작했다. 냉정함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을 녀석의 동작에 감정이 실리기 시작했다. 싸우는 중 드러내는 감정은 자신에게 독이 될 뿐이었다.
“내 피 간수 잘하라는 거, 꼴려서 그랬나 봐?”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거렸다.
“그런 소리는 좀 더 노력한 뒤에 하는 게 어때.”
“굳이 너한테 노력까지 할 필요가 있나?”
지금이었다. 녀석에게 상처를 낼 수 있는…….
“헉! 백유운……!”
세상은 나에게 등을 진 게 분명했다. 그의 손바닥에 잭을 박아 넣자마자 문이 활짝 열렸고, 팀원들의 눈이 모두 한곳을 향해 돌아갔다.
“으, 설마 했더니 냄새…….”
태주는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고, 다른 이들은 입을 틀어막거나 헛기침을 하는 등 저마다의 놀라움을 표현하고 있었다. 그것도 잠깐뿐이었지만.
그들은 재혁을 보자마자 제 송곳니로 손가락을 찔러 아직 나의 핏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는 재혁의 손바닥에 핏방울을 떨궜다.
더 이상 엽기적일 수 없는 이 행위는, 당신을 존경하고 언제든 목숨 바쳐 일하겠다는 그들의 맹세이자 일종의 인사 행위였다. 재혁은 그런 예의를 지키는 이들에게 말했다.
“다음부터 이런 인사는 받지 않겠습니다. 다른 팀원들과 동등하게 대해줬으면 좋겠고요.”
꼴값 떤다.
내가 할 말은 그것뿐이었다. 나의 손은 여전히 찢겨 있건만, 그의 상처는 모든 인사가 끝날 즈음 전부 말끔히 나아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나를 걱정하는 건 표성뿐이었다.
“뭐야, 넌 얼굴이 왜 이래.”
그는 피 칠이 된 나의 얼굴 여기저기를 살폈고, 그 손길에 내 머리는 사방으로 흔들렸다. 어질어질한 시야에 손으로 벽을 짚다가 쓰라림에 움찔거리니, 그제야 나의 손을 본 표성이 나를 질질 끌고 의무실로 향했다.
계단을 내려가는 와중에, 내가 왜 피를 철철 흘리며 그들의 협박을 받으며 살아야 하는 건지 싶어 갑자기 울화가 치밀었다.
“아악!! 진짜!”
“왜?”
갑작스러운 호통에 표성이 화들짝 놀라며 나를 뒤돌아봤다.
“제가 뭘 그렇게 잘못했습니까? 하라면 하고 아무리 불공평한 대우라도 그냥 웃으며 넘어갔더니 그 결과가 이겁니까? 졸업하고 드디어 그놈한테서 벗어나나 싶더니 이젠 기약 없는 동행을 하라고 종용하는 게 어디 있습니까?”
“잘못한 거 없지.”
“근데 왜 다들 절 못 괴롭혀서 안달이래요?”
“원래부터 이런 곳이라는 거 알고 들어온 거잖아. 세상에 공평한 게 어디 있어. 서로 이득 보려고 경쟁하면서 겉치레나 하는 거지.”
“대체 그 새끼가 뭐라고!”
“음…… 인간과 뱀파이어 간의 협정을 이루는 데 한 획을 그은 집안의 아들내미? 그거 참 이상하단 말이야. 한 달 전만 해도 미국으로 나간다고 했었는데 왜 한국에 계속 머무르는지 의문…….”
눈치 없이 그의 집안에 대해 읊조리는 표성의 말을 잘랐다.
“이젠 절대 못 물러납니다. 제 자리는 제가 지킬 겁니다.”
스무 걸음 남짓한 짧은 복도를 걷는 동안에도 얼마나 많은 시선을 받아야 했는지. 이렇게 많은 주목을 받을 줄 알았으면 머리라도 깔끔하게 정리를 하고 올 걸 그랬다.
알코올 소독제 냄새가 가득한 의무실로 들어가자,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던 군의관이 벌떡 일어나 달려왔다. 마치 야동이라도 보다가 들킨 청소년 같았달까.
삐걱거리는 의자 소리에 신경이 곤두섰지만, 다행히도 푹신한 침대에 앉자 긴장감은 조금씩 누그러졌다.
그녀는 나의 손 밑에 커다란 양동이를 갖다놓았다. 160센티도 되지 않는 키에 북슬북슬한 머리카락을 풀어헤친 그녀는 마치 대형 푸들 같았다.
“바깥 분위기를 보아하니 새로 오신 분이랑 인사하고 온 것 같은데, 왜 이렇게 무식하게 찌르셨어요?”
목소리는 또 얼마나 카랑카랑한지.
거침없이 상처에 식염수를 들이붓는 탓에 몸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으…….”
“움직이지 마세요. 하루 이틀도 아니시면서 엄살은.”
엄살이 아니었다. 생살을 벌려 휘적거리고 있었으니까. 마취도 없이 차가운 철이 살덩이를 훑고 다니는 느낌은 적응하려야 할 수가 없는 고통이었다.
“허, 대기하고 있는 짐승들이 많아서 인심 좀 썼어요. 공평해야 하잖아요.”
나의 말에 표성이 펄쩍 뛰며 말했다.
“넌 왜 중간이 없냐! 그놈들 그렇게 흥분한 거 오랜만에 봤네.”
“이 정도로 소란스러워질 거였으면 다들 에너지 드링크 역 똑바로 안 했네! 뭐, 나보고만 뭐라고 할 게 아니었구먼.”
“그런 문제야, 이게?”
이를 악무니 마른 입술에서도 피가 배어 나왔다.
내가 한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고작 이런 상처에 복도에서 기웃거리는 놈들이 있다는 건 충분한 공급이 안 되었다는 거니까.
“뭐, 이 정도면 중간은 지키셨네요. 말끔하게 갈라놓으신 걸 보니.”
그녀의 칭찬 아닌 칭찬에 괜히 표성을 향해 어깨를 으쓱거리다가 한 대 맞을 뻔했다.
“또라이 떨구다가 상또라이와 함께할 줄 누가 알았냐고요.”
텅텅 빈 의무실을 둘러보았다. 심각한 상처가 아니라면 언제나 의무실에 와서 해결하곤 했는데, 당최 환자가 있는 꼴을 본 적이 없었다. 기껏해야 가끔 피곤하다며 수액을 맞으러 오거나 달리기를 하다 자빠져서 무릎이 까졌다며 찾아오는 사람들뿐이었으니…….
얼마나 물러터진 상태로 인간들이 이곳에 몸을 담고 있는지,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할까?
예쁘게 아물어야 한다며 정성스럽게 바느질을 하고 있는 이에게 물었다.
“이 정도면 혈액 팩 보급 얼마나 받을 수 있습니까.”
“결국 그거였냐.”
나의 말에 이마를 짚으며 경탄하는 표성과 다르게, 그녀는 깔깔거리며 대답했다.
“이번 달은 무사히 넘어가실 수 있겠네요. 진단서 써드릴 테니까 가지고 가세요.”
가뭄 속 단비 같은 소식이었다. 곧 다시 암울한 현실을 알려주는 말 때문에 기뻐할 시간도 없었지만.
“이번에야 다들 눈으로 확인했으니 이해할 테지만 계속 이렇게 눈속임만 하시다간 꼬리 밟히실 겁니다.”
“……제 편 맞죠?”
“뭐, 어느 정도는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붕대를 친친 감았다. 얼마나 열심히 감았는지 주먹 쥐는 일조차 쉽지 않았다.
당장 이곳을 나가면 그놈 얼굴을 다시 봐야 한다는 생각에 처음으로 의무실을 나가기 싫었다. 평소에는 맞고 가라고 해도 맞지 않던 수액을 하나라도 놔달라고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알아보지도 못할 글씨를 휘갈겨 쓰는 진단서를 기다리고 있는데, 호출 벨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타이밍 봐라.”
진단서를 받아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두껍게 감아놓은 붕대는 풀어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 오늘은 격한 운동은 안 된다는 그녀의 말은 뇌리에서 자체 소거했다.
팀장실에 도착했을 때에는 전부 뒷짐을 진 상태로 대기 중이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그도 가운데에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나의 피로 얼룩진 옷은 사라지고 빳빳하게 각 잡힌 군복을 입은 채로 말이다.
팀장님은 나를 보고 손짓했고, 나는 그에게 손을 들어 괜찮음을 알렸다. 심각해 보이는 붕대를 풀고 손바닥을 겨우 덮을 반창고만 붙이고 온 게 다행이었다. 아니었으면 돌아가라고 했을 테니.
고개를 까딱거리는 그의 신호에 맞춰, 뒷짐을 진 채 앞을 봤다.
“2주 전 실종되었던 아이가 시체로 발견됐다. 위치는 경기도 포천시. 감식 결과 흡혈 흔적, 여러 바늘에 찔린 자국으로 보아 제로들 짓이라는 판단하에 우리에게 협조 요청이 들어왔다. 경찰 측에서 해결해보겠다고 일주일이나 미룬 뒤 넘겨온 탓에 증거가 남아 있을 가능성은 희박하겠지만 이렇게 된 이상 최선을 다하도록 한다.”
칠판엔 여섯 개의 점이 찍혀 있었고, 점을 기준으로 1킬로미터 반경에 빨간 원이 쳐져 있었다. 그는 세 개의 포인트를 찍으며 각자의 대기 위치를 알렸다.
“정해진 위치에서 하차 후, 범위를 좁혀가며 수색할 예정이다. 수상한 놈이 있으면 보고 뒤 지시에 따라 생포한다. 가장 중요한 건 주변에 있는 경찰 놈들한테 시비를 걸지 않는 일이다. 이상.”
그의 끝맺음 소리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들 기계처럼 튀어 나갔다.
전투복으로 갈아입자마자 통신 기기를 장착했다. 상대가 상대인 만큼, 보호구를 착용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평소라면 제일 먼저 무기를 찾았겠지만, 나에게 있는 거라곤 단도 한 자루가 다였다. 잭을 발목에 끼워두곤 마스크를 썼다. 몸 곳곳에 달려 있어야 할 총기류를 잃고 나니 몸 곳곳에 보호구를 잔뜩 찼는데도 가볍게만 느껴졌다. 이 정도면 맨몸으로 가는 것과 대체 뭐가 다른 건지.
“하아…….”
나 홀로 내적 비명을 질러대는 동안에도 다들 말없이 제 할 일을 할 뿐이었다. 채 3분도 안 되어 모든 인원이 준비를 끝마친 채 튀어 나갔고, 군복을 오래 벗었던 재혁도 별반 다를 바 없는 속도를 보였다.
표성을 제외하면 전부 누가 누군지 알아보기 힘든 수준으로 온몸을 감추고 있었다. 왜 하프들까지 이렇게 싸매야 하냐고 묻는다면, 인간의 경우 그들의 피에 감염된다고 하면 그저 통제실의 명령하에 목 보호대에 장착되어 있는 신경독을 퍼트려 죽여버리면 끝이었지만, 하프들의 경우에는 감염시킨 자의 명령에 복종하는 신세가 되기 때문이었다.
표성은 피 밴 반창고가 걱정되었는지 옆에서 스리슬쩍 말을 걸어왔다.
“나가서 뛰게? 오늘은 나랑 앉아 있지.”
“제가 앉아서 뭐 해요.”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할 만한 걸 못 찾았는지 한참을 고민하다가 말했다.
“엄…… 힐링?”
“힐링 두 번 하다가 숨 막혀 뒈지겠어요.”
당치도 않은 말을 상대하곤 차에 몸을 실었다. 화물칸 같은 차 안에서도 익숙하게 제자리를 찾아 앉자, 서로를 마주 보는 구도가 완성되었다. 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던 공간은 시동을 걸고 나서야 다시 밝아졌다.
오늘은 평소와 다른 어색한 공기가 가득 차 있었다. 다들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듯했지만, 재혁을 힐끔거리는 게 눈에 훤했다.
벗고 있어도 될 고글을 쓴 채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시간을 보냈다. 정적을 깬 건 다름 아닌 팀장님이었다.
“햄스터.”
“네.”
나의 대답에 키득거리는 소리가 인이어를 타고 들렸다. 보나 마나 재혁이겠지.
“정 나가서 뛰고 싶으면 백업 지켜.”
“예에?”
그는 나의 되물음을 상큼하게 무시했다. 가만히 있으라는 말보다 굴욕적인 백. 업.
“그리고 전재혁, 넌 이제 백곰이다.”
“큽.”
이건 내 코에서 튀어나오는 바람이었다.
“웃겨?”
팀장님의 진지한 말투에 고개를 들었다. 아무래도 내가 아니라 몸 전체를 들썩거리고 있는 표성에게 하는 말이었나 보다. 표성은 나를 째려보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이 괴상한 이름은 전부 팀장님의 작품이었다. 태주는 키가 크다며 기린, FM 같은 서연은 거미, 그리고 표성은 수영을 잘한다며 물개라고…….
잠깐, 그럼 나는 왜 햄스터야?
“그동안 생각해봤는데 햄스터는 제 이미지와…….”
“그럼 다람쥐?”
팀장님의 대답에 귀 안 가득 웃음소리가 찼고, 나는 그들에게 경고하며 입을 열었다.
“……그냥 햄스터 하겠습니다.”
비포장도로를 한 시간이나 달려 산속에 닿자 제일 먼저 차에서 내린 건 서연이었다. 표성과 눈인사를 나눈 그녀는 곧바로 산속에 몸을 숨겼다. 표성은 시간을 확인하며 팀원들이 준비할 수 있게 도왔다.
“10분 뒤 두 번째 하차 지점입니다.”
경찰들이 모여 있는 위치에서 태주와 팀장님까지 내리고 나니, 차 안은 더욱 불편한 공기로 가득해졌다. 태블릿을 보며 팀장님과 이야기를 나누기 바쁜 표성과 다르게 재혁은 턱을 치켜든 채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명상이라도 하나 싶어 가만히 보고 있는데, 갑작스레 고개를 돌리는 녀석 때문에 깜짝 놀라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다행히 차가 덜컹거리던 중이라 티가 안 났지, 평온한 도로였다면…….
“10분 뒤 세 번째 하차 지점입니다.”
[따로 다닐 생각 하지 마라.]
팀장님이 표성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경고했다.
“네, 알겠습니다.”
녀석의 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니라니!
나와 눈이 마주친 표성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들 독심술의 대가라도 되는 건가.
“3분 뒤 하차 지점입……!”
표성이 내 쪽으로 신호를 돌려서 소리쳤다.
[너 어디 가!]
그에게 인사를 날리고 숲 쪽으로 몸을 돌리며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햄스터 궁둥이 붙이고 있습니다! 하차 지역으로 가는 중이에요!”
[잘하는 짓이다.]
표성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체념한 목소리로 나를 놓아주었다.
“하루 이틀도 아닌데요, 뭘.”
[그래, 그래…….]
수풀이 짓밟히는 소리가 얼마나 경쾌한지, 부대에 앉아 종이에 펜만 끼적거리는 놈들은 절대 알지 못할 것이다.
애초에 같이 다닐 생각 따윈 없었다. 아무나 나의 눈에 걸려 샌드백이 되어주었으면 하는 마음만 있었다. 산엔 봄을 맞아 새싹이 돋고 있었고, 깊숙이 들어갈수록 햇볕이 차단되며 어둑해졌다.
숨을 죽이고 주위를 경계하며 산속 한가운데에 섰다. 흙냄새만 가득한 산속은 간간이 들리는 새소리와 바람에 부딪치는 나뭇잎 소리가 전부였다.
경찰이 만든 자료로 포인트를 잡아봤자 똑바로 일이 진행될 리 없었다. 허구한 날 시체 주변만 뒤지며 시간을 버릴 게 분명했다. 사흘이나 뒤지고 다녔는데 찾지 못하고 지원 요청을 때린 걸 보면 당연히 그 주변이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하는 게 아닌가?
조사 지역을 벗어나 그들의 흔적을 따라갔다.
[시체 한 구가 더 발견됐다. 수상한 점 있으면 혼자 돌아다니지 말고 바로 보고부터 하는 거 잊지 마.]
그들처럼 후각이나 청각이 발달한 것은 아니었지만 들짐승과는 다른 뱀파이어들의 발자국, 그리고 움직임의 패턴들이 나의 눈에는 훤히 보였다. 사람들이 많은 도시 지역이었다면 몰라도 산속으로 몸을 숨겼다면 완전히 흔적을 은폐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물론 내가 이런 좋은 정보를 혼자 꽁꽁 싸매고 다닌 것은 아니었다. 다른 이들에게 설명해줘도 머리로 이해할 뿐 실전에 적용하는 이는 만나본 적이 없었고, 간간이 물어오는 놈들도 그저 술자리에서 허풍을 떨 거리로나 물어보고 있었다는 걸 알고 나선 설명하기를 포기한 상태였을 뿐이었다.
“이런 곳에서 대체 어떻게 사냔 말이지.”
한참을 걸어 들어간 곳은 폐가 촌인지 이상하리만큼 조용했다. 열 집이 조금 넘게 있는 마을은 곧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쇠락해 있었고, 들짐승의 배설물이 사방에 널려 있었다.
몸을 숨기며 주위를 둘러봤다. 작은 창고 옆에 자연과 어울리지 않는 쓰레기들과 때 타지 않은 옷가지가 버려져 있었다. 문을 연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쓸린 자국과 짓눌린 꽃잎이 보였다. 조심히 문짝에 귀를 댔지만 인기척은 들리지 않았다. 호흡을 고르며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후…….”
주위를 둘러봐도 공허한 모랫바닥과 함께 안은 텅 비어 있을 뿐이었다. 나가려고 몸을 돌리는 순간 빛이 차단된 어둠 속에서 무언가 번쩍였다.
마이너?
“끼긱…….”
“햄스터. 제로 발견. 마이너 하나.”
보통 제로는 편의상 힘과 사고 능력 및 지배 여부에 따라 분류해 급을 나누어 지칭했다. 0~1급은 인간들과 다를 바 없는 행동 양상을 보이면서 상식 밖의 힘을 구사하는 이들을 가리키며, 2~4급으로 나뉘는 이들은 일부러 독을 주입해 만든 반강제적인 뱀파이어로 학습 능력은 남아 있는 놈들이었다.
마지막으로 분류되는 이들은 5급으로 우리가 작전을 하면서 가장 많이 만나는 상대인데, 마구잡이식 흡혈을 당해 태어난 놈들로, 제로 사이에서도 쓰레기 취급을 당하는 공격성만 남은 뱀파이어였다.
하지만 지금 나를 주시하고 있는 놈은 그런 분류에도 포함되지 못하는 수준인 마이너였다. 고작 일고여덟 살쯤으로 보이는 상대는 목을 기이하게 꺾은 채였는데, 자신의 몸을 통제하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다.
[C포인트 동쪽 10킬로미터.]
표성이 나의 위치를 알리자 팀장님은 그 소식에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너넨 왜 거기서 돌아다니고 있어? 백곰!]
[접선 중입니다.]
이런.
팀장님의 한숨 소리가 귓구멍을 통과했다.
“처리할까요?”
[일단 처리해. 끝나고 보자.]
뭐 어쩌겠는가. 눈앞에 닥친 일이나 신경 쓰기로 했다. 작은 실수라도 나의 하찮은 목숨이 끝장날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걸 알기에, 섣불리 뛰어들지 않고 마이너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기이한 울음소리로 나에게 경고를 내리는 듯하던 마이너는 갑자기 벽을 긁어대며 더 격렬하게 울어대기 시작했다. 언제든 달려들 자세로 간을 보고 있는 상대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똑같이 시선을 마주하며, 웅성거리는 소리로 시끄러운 인이어를 빼냈다.
기계가 달랑거리는 귀에 옅은 숨소리와 함께 목소리가 들렸다.
“별것 아니었군.”
“읏!”
“앞뒤 없이 휘두르네, 진짜.”
목을 노리고 휘두른 나의 잭을 막아냈다. 남은 손으로 나의 턱까지 우악스럽게 잡은 놈은, 재혁이었다.
재혁의 손을 떨쳐내기 위해 움직인 동작이 아까울 정도로, 재혁은 허무하리만큼 쉽게 거리를 벌렸다. 도망갈 생각도 하지 못하고 끼긱거리며 우는 마이너를 잡기 위해 달려가는데, 충격을 받고 박살 난 담벼락에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
“이게 뭔…….”
모래 바람에 막혔던 시야를 되찾자마자 눈에 들어온 건, 재혁의 손에 잡혀 벽에 짓이겨지는 마이너였다. 피부가 시멘트에 갈리고 새카만 피가 벽을 더럽혔다.
“끼이익…… 끼……!”
시끄럽게 울어대는 통에 귀가 찢어질 것 같았다. 인이어를 다시 끼자 마이크를 끄든가 빨리 처리하든가 하라는 팀원들의 원성이 울리고 있었다. 그들의 말을 들은 재혁은 가차 없이 마이너의 몸통에 손을 박아 넣었다. 심장이 뜯겨 나간 놈은 더 괴롭게 울부짖으며 발악했고, 태주는 악을 쓰며 소리를 질렀다.
[마이크 좀 어떻게 해주세요!]
회복할 시간도 없이 재혁에게 피를 빨린 마이너는 서서히 굳어가는 것도 모자라 말라비틀어졌다. 꿀꺽이는 목 넘김 소리가 귀에 선명히 들렸다. 그저 꼴깍거리는 소리였지만 닭살이 돋았다.
몸집이 작은 만큼 모든 일은 순식간에 끝났다. 바닥에 내던져진 시체는 괴이하게 관절이 꺾이고 얼굴이 갈려 제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으, 맛없어.”
입가를 닦아대는 그의 얼굴은 툴툴대는 것과 상관없이 상기되어 있었고, 각성 상태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걸 왜 처마셔? 모든 제로는 생포가 원칙인 거 몰라?”
“네 입에서 원칙을 지키라는 말이 나올 줄이야 누가 알았겠어.”
그는 빈정거리며 나를 봤고, 그에 나도 똑같이 응수해줬다.
“난 발전이란 걸 하는 사람이거든. 넌 어떤지 모르겠다만.”
“발전이라. 보면 알겠지.”
숨을 돌리는 것도 잠시, 그의 흔들리는 시선을 보지 못했다면 기습 공격에 손가락이 잘렸을지도.
사방에서 내리꽂는 공격에 방어하기 바빴다. 계속되는 충격에 상처가 터진 건지 왼손은 다시금 피를 내뿜었다. 본능적으로 총을 꺼내기 위해 가슴, 배, 다리를 모두 짚어도 손에 딸려 나오는 건 없었다. 현장에서 이렇게까지 총에 의지했었던가.
도와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는 재혁은 여유롭게 보고나 하고 있었다.
“백곰, 제로 발견. 4급 하나, 5급 둘.”
[기린 합류 5분 전.]
심지어 재혁은 손뼉을 치며 관람하기 시작했다.
허공을 가르는 손톱과 역겨운 이빨을 피하며 재혁을 향해 내달렸다. 의문 가득한 표정의 그를 방패 삼은 뒤, 그의 허벅지에 얌전히 붙어 있던 총을 빼내 그의 지문까지 찍었다.
“잘 쓸게.”
대비고 뭐고, 일단은 살아남아야 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활성화되는 총에 마음마저 가벼워졌다. 손뼉을 치던 재혁도 이제 재빠르게 움직이며 그들을 상대했다. 그나마 형태를 유지하던 벽들마저 무너져 사방이 모래 먼지로 가득 차 앞을 보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었다.
……!
먼지 속에서 눈앞에 나타난 놈의 턱을 후려갈기니, 공중으로 붕 떴다가 떨어졌다. 숨을 고르는 것도 잠시, 몸을 일으킨 적은 순간 이동을 한다고 해도 믿을 만한 속도로 달려왔고 나는 놈에게 칼을 내던졌다.
내던진 칼은 상대의 심장을 가르며 지나갔다. 곧바로 머리를 노려 총을 겨눴다. 모든 일을 처리하는 건 채 1초도 걸리지 않았다. 발작하듯 경련을 일으키는 놈을 확인하고 허공에 총을 한 번 더 쏘았다.
“날 죽이려고?”
재혁의 발끈하는 목소리가 선명했다.
“내가 쏘는 곳을 네가 막고 서 있었던 거지.”
그는 발버둥 치는 놈의 목을 잡고서 방패로 삼고 있었고, 내가 쏜 총알은 정확히 방패의 심장을 관통했다. 인정하긴 싫지만, 그는 꽤 좋은 반사 신경을 갖고 있었다.
말싸움도 잠시, 손쉽게 바닥에 널브러트린 놈들과는 다르게 유연한 몸동작과 정확한 몸놀림을 구사하던 제로는 인간인 내가 만만해 보이는 건지, 아니면 그저 피 냄새를 맡고 달려드는 건지 나만 끈질기게 노리며 손톱을 휘둘렀다.
자꾸 몸에 힘이 들어가는 탓에 상처는 점점 더 벌어지고 있었다. 몸이 점점 굼떠지는 게 느껴졌다. 지혈할 시간도 없었고 빠르게 움직이려고 할수록 눈앞이 하얗게 질리는 탓에 저도 모르게 인상을 쓰며 눈을 끔벅댔다. 눈을 한 번 감았다 뜰 때마다 사라진 적을 찾아 막느라 애를 먹었다.
무게 중심을 잡지 못해 비틀거리는 순간, 눈앞에서 번쩍임이 일었다.
“허풍을 그렇게 떨어대더니, 비틀거리는 꼴을 보니 네가 왜 햄스터인 줄 알겠네.”
혀를 차며 뛰어든 재혁은, 다음 순간 나의 뒷덜미를 잡고 있었다. 손톱을 세운 제로의 공격을 피하며 조금은 여유로운 움직임으로 나를 밀어붙였다.
“이거 안 놔?”
“놔줘야지.”
그는 말을 끝내기 무섭게 나를 집어 던졌다.
“이……!”
나를 물어뜯지 못해 안달이 난 새끼한테!
“……크윽!”
간발의 차이로 벌어진 입에 칼을 박아 넣어 날카로운 이빨에 물리는 사태는 면했지만, 손톱까지는 피하지 못했다. 팔뚝에 박힌 손톱을 빼낼 시간도 없이 이를 세우고 달려오는 재혁을 향해 불편하기 짝이 없는 팔을 내질렀다. 팔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제로가 좋은 방패막이가 되어주었다. 제로의 뜯긴 목 사이로 새까만 피가 튀었다.
“읍!”
얼굴을 적신 역겨운 액체에 코가 쓰라렸고, 피가 들어간 눈은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제정신이야, 이 좆같은 새끼야?!”
근육과 뼈를 긁고 지나가는 손톱을 그대로 느껴야 했다. 보호구가 아니었다면 겨드랑이까지 파고들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숨을 고르고 있으려니,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낸 재혁은 아랑곳하지 않고 제로의 입에 박힌 잭을 꺼내 내게 던졌다.
“자업자득이지. 먼저 총을 겨눈 놈이 할 말인가, 그게.”
받은 잭을 그대로 휘두르는 나를 막은 건 다름 아닌 태주였다.
“기…… 기린 현장 도착. 상황 종료입니다.”
상황이 다 끝나서야 속속 도착한 팀원들은 입을 다물지 못하고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고, 몇몇 경찰은 헛구역질까지 하며 자리를 피했다.
돌아가는 길엔 피 냄새에 자극을 받은 팀원들을 피해 경찰차에 옮겨 타야 했다.
***
“지금부터 할 말이 있으면 오른쪽 생포 불가 흡혈인부터 왼쪽 권총 탈취 팔 병신까지 3분간 발언권을 주겠다.”
“이건…….”
팀장님은 손가락을 들어 나를 제지했다. 하고 싶은 말이 턱밑까지 차올랐지만, 성대를 울릴 수 없어 입만 뻐끔거렸다. 분노로 인한 열감인지, 상처에서 퍼지는 열감인지 온몸이 화끈거렸다.
“생포 불가 흡혈인, 할 말 없나?”
그는 나를 힐끔거리더니 윗입술을 깨물었다. 내 꼴을 보기만 해도 웃기는지, 결국 놈답지 않게 고개를 푹 숙인 채 입을 열었다.
“……제 권총을 빼앗아 가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언제고 제 파트너가 당할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선택을 한 것뿐입니다.”
“제일 나은 선택이었다고 장담할 수 있나?”
고개를 든 그는 결국 뜸을 들이다가 대답했다.
“아닙니다.”
“권총 탈취 팔 병신?”
기다렸다는 듯이 머릿속에서 정신없이 돌아다니던 말들을 모아 나름대로 순서를 매겨 내뱉었다.
“인간인 제가 제로를 제압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까지 빼앗기고 적진에서 고군분투하는데, 제 파트너는 손뼉을 치며 구경만 하고 있었습니다. 비록 그의 무기를 탈취한 일은 잘한 일이라고 할 순 없으나, 제가 맡은 임무와 목숨이 걸려 있는 문제였기 때문에 다른 선택은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절 방패로 삼으며 이 팔에 구멍을 냈고, 덕분에 피를 뒤집어쓴 저는 지금 앞을 제대로 볼 수도 없습니다.”
시말서를 많이 써본 보람이 있다며 자화자찬을 하려던 순간, 팀장님이 반격을 시작했다.
“그럼 왜 지정 장소가 아닌 그런 곳에서 혼자 ‘고군분투’를 했나. 감만 있다면 명령 따위 복종하지 않아도 되고, 해결할 수 있다면 제멋대로 활개를 치면서 다녀도 돼?”
무슨 말을 해도 변명으로 들리겠지.
눈알만 요리조리 굴리며 점점 감각이 없어지고 있는 왼손을 톡톡 쳤다.
“……아닙니다.”
그냥 무조건 잘못했다고 비는 편이 더 나은 상황일까. 이젠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머리가 굴러가는 게 아니라 정말 내 머리통이 데굴데굴 구르는 것 같았다. 꽤 많은 출혈이 있었는지 순간 휘청거리는 몸을 바로 세웠다.
“앞으로 도움을 주기는커녕 서로의 목숨에 위협이 되는 행동을 했다간 각오해야 할 거다.”
“네. 알겠습니다.”
“둘 다 나가봐.”
“네.”
팀장님은 내가 걱정은 됐는지, 아니면 그새 다른 사고를 칠 것 같아서인지 콕 집어서 지시까지 내렸다.
“백유운, 나가자마자 시비 걸지 말고 바로 치료하러 내려가고.”
대체 내가 언제 먼저 시비를 걸었다는 건지?
피곤함에 군말 없이 그의 방을 나왔다. 구경하고 있던 이들이 재빨리 제자리를 찾아가는 소리로 시끌벅적했다.
“쓰레기 같은 피 좀 그만 쏟아. 네 냄새 때문에 머리가 깨질 것 같으니까.”
대놓고 혐오스럽다고 표현하는 그에게 가운뎃손가락을 뻗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서 의무실로 갔다. 따가운 시선은 여전했다. 정말 쓰레기 냄새라도 나는 건가 싶어 킁킁거리며 맡아봤지만 비릿한 냄새가 날 뿐이었다.
내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경악한 그녀는 아까와는 달리 한껏 구겨진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손을 쓰지 말라고 했더니만 아예 못 쓰는 상태로 만들어 오시다니. 정말 대단하긴 하네요. 제가 움직이지 말라고 하시면 못 움직이는 상태로 만들어 오실 겁니까?”
“몸을 못 움직이면 저는 뭐 하고 살아야 합니까.”
몸은 입을 다물라고 하고 있는데 입은 의식의 흐름대로 말을 내뱉었다. 그녀는 헛소리에 친절하게 대답을 해주었다.
“쥐꼬리만 한 연금도 못 받을 연차시니까 나라에서 주는 복지금으로 살아야 할 듯싶네요. 아, 복지금 안 나오나요? 죄송한데 그냥 입 좀 다물고 있어주세요.”
“으윽…….”
그녀가 지혈해둔 상처를 건들기 시작하자 붕대에 살점이 뜯겨 나가는 듯한 감각에 절로 비명이 튀어나왔다.
“어휴.”
이 정도 다쳐봤으면 안 아플 때도 되지 않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