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권-Prologue (1/21)

******갠소 공금 재업금지 공유금지 [카레직작]

Prologue

앞에 앉은 40대 남자는 전투복이 터질 것 같은 우람한 근육을 자랑했다. 마치 인간의 몸으로 어디까지 몸을 키울 수 있는지 실험하는 듯했달까.

그는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증명하듯 이마부터 오른쪽 볼까지 크게 찢어진 상처를 갖고 있었고, 푹 파여 있는 모양이 그를 한 번이라도 본 이는 잊지 못할 정도였다.

“그래. 그래서 왜 쐈다고?”

이광호. 말 그대로 미친 호랑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그는 압수당한 나의 권총을 손가락에 끼고 빙빙 돌리며 물었다. 잘 때에도 곁에 두고 자는 나의 사랑 콜트가 팀장님의 손에 들어간 건 오늘 오전에 있었던 사건 때문이었다.

“뱀파이어잖아요.”

“백유운, 그전에 동료라는 인식은 없었어? 이게 대체 몇 번째야?”

동료라니. 목숨 걸고 일하는 현장에서 내 손목을 쥐어짜면서 피를 내놓으라며 발악하던 놈이?

“저를 갈기갈기 찢어 먹을 뻔했다니까요?”

“자네가 먼저 애를 굶주린 사자로 만들었겠지.”

“제가 동료 밥까지 챙길 의무가 어디 있습니까.”

1년 전 같은 이유로 박박 우기다가 협약 조항의 ‘흡혈 의무’ 사항을 읽은 적이 있긴 했지만, 분명 무기 소지 허가를 받을 땐 ‘위협이 되는 사항’에 해당할 때 사용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건 동료를 쏴서 기절시키는 게 아니라 작전 시 적을 향한 거라고 몇 번을 말해? 네가 아무리 현장에서 잘하고 다녀도 이런 짓을 벌이면…….”

“인간들한테 좋은 일이 아니라는 거잖습니까.”

“잘 아네?”

그는 약간 과장된 손짓과 함께 나를 나무랐고, 나는 그의 몸짓을 따라 하며 말했다.

“글쎄요? 전 군무원도 아닌데?”

열을 받을 대로 받은 그는 미간을 좁히며 ‘네 총은 일주일 동안 압수다!’라고 소리치겠지.

“네 총은 한 달 동안 압수다!”

응?

“한 달요? 그동안은 일주일이었잖아요!”

“알고 뒤통수친 죄.”

그렇게 나의 객기는 한 달간 총기류 압수와 시말서 형으로 돌아왔고, 나는 곧장 팀장실에서 쫓겨났다.

그럼 이제 현장에서 맨몸으로 대체 뭘 하라고! 다른 사람들처럼 앉아서 타자나 치라고?

인생의 절반을 바쳐 훈련한 나인데, 이론만 빠삭하게 외우고 들어온 이들과 왜 같은 취급을 받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억울한 마음에 애꿎은 벽을 발로 차고 있으니 커피를 홀짝거리며 복도를 걷고 있던 여자가 화들짝 놀라며 나를 피했다.

무기를 잃고 가벼워진 옷을 털며 책상 앞으로 돌아왔다. 너저분하게 구르는 빈 음료수 캔을 밀고 컴퓨터를 켜자 옆자리에 있던 표성이 껄껄 웃으며 불난 집에 부채질을 시작했다.

“내가 그래서 웬만하면 혈액 팩이라도 넉넉히 주라고 했잖아. 그거 먹고 만족할 놈은 아무도 없다니까.”

나보다 열 살은 많을 30대 중반의 남자는, 나와 동갑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젊어 보였다. 그는 손에 핸드크림을 치덕치덕 바르며 말을 이었다.

“거기다 넌 현장에 나가서 피 냄새를 폴폴 풍겨대니 얼마나 참기 힘들겠냐.”

“제가 타 올 수 있는 만큼 타 와서 준 겁니다. 혈액이 부족하다는 걸 증명하려고 허구한 날 변기에 버린 피가 얼마나 많은데요.”

“그러니까 버리지 말고 그냥 줘라. 아까워 죽겠네. 차라리 정기적으로 뽑아놓고 주든가. 왜 버려서 애들을 안달 나게 만들어.”

“으, 싫습니다. 끝을 모르는 놈들이잖습니까. 피 맛만 보면 무슨 발정 난 개새끼들처럼 붙어먹으려는 것도 짜증 나요.”

그는 아까보다 더 자지러지게 웃었다. 행정실에 그와 둘이 있는 게 다행이었다. 다른 이들의 귀에 들어가면 미친 호랑이가 아니라 티베트 여우라고 불리는 중대장의 귀에까지 들어가 훈련소에서 지옥을 경험했을 테니.

사실 그들이 콜트에 맞는다고 해도 목숨에 지장이 있는 건 아니었다. 살상이 아닌 무장해제용으로 만든 총이었기에, 제대로 명중시킨다고 해도 사흘간 사경을 헤매다가 일어나면 되는 일이었다.

처음 총을 받았을 때 가진 ‘왜 살상용이 아닐까’라는 의문은 총알을 발명, 제작한 곳이 어디인지 알았을 때 해결됐다. 아무리 사이가 좋다고 선전을 해도 자신들의 목숨을 위협하는 무기까지 넘겨줄 리가 없었달까.

1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뱀파이어는 환상 속 존재에 불과했다. 과거 그들은 불결하다는 이유로 사회에서 매장당해왔고, 그럴수록 더 어둡고 좁은 길을 파고들며 모습을 감춰왔기 때문이었다. 그런 시간이 계속 이어졌다면 세상은 여전히 평화롭기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괘씸하게도 그들은 기회를 엿보며 숨죽여 있다가 이를 드러냈다. 사람들은 대책 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고, 갑작스런 그들의 공격에 무너져 내려 자포자기한 상태로 살아갔다. 그들에게 굴복하거나 먹이가 되기를 자처하며 목숨을 연장하는 사람들까지 등장할 정도였다고 한다면,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할까.

그렇던 사회가 바뀐 건 인간들에게 친화적인 뱀파이어들이 등장하면서였다. 그들은 인간이 없으면 본인들도 존재할 수 없으며, 인간들과 상호 협정을 맺어 조화로운 삶을 살자는 주장을 하던 이들이었다.

본 내막이 종족 내 싸움인지 정말 거지같은 사회를 바꾸고 싶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들은 무분별하게 사냥을 하는 뱀파이어에게서 인간을 보호했고, 그 결과 자연스럽게 인간에게서 추앙을 받으며 힘과 권력을 쌓았다.

표성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걔네도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닐 텐데 너무 뭐라고 하지 마라. 불쌍하잖아~.”

“불쌍해서 그렇게 다 주세요?”

“아니? 내가 좋아서 주는 건데. 네가 잠깐 까먹었나 본데, 난 결혼한 지 1년도 안 된 몸이라고.”

표성은 손가락에 낀 반지를 자랑했다. 복도에서 만난 여자와 같은 반지였다. 몸을 부대껴서 사랑을 느끼는 건지, 사랑을 느껴 몸을 부대끼는 건지 고르라면 난 전자를 택할 것이다.

전국에 퍼져 있는 대원들만 봐도 답이 정해져 있는 문제였으니까.

인간들은 비친화적인 뱀파이어를 ‘제로’라고 칭하며 본격적인 싸움을 시작했고, 국가는 그들을 상대할 인원을 모집해서 제로를 몰살시키자는 이념 아래 ZAT부대를 설립했다.

군인과 경찰이 자리를 채우던 초창기와 달리 요즘은 사관학교를 설립해 인원을 충당했고, 청소년기부터 적합한 교육을 받은 이들은 성인이 되는 즉시 육군특수전사령부에 소속되어 ZAT부대원으로 활동했다.

ZAT는 소속만 군대로 되어 있을 뿐 운영은 완전한 독립체로 행하면서 서울과 부산, 제주도에 부대를 세우고 팀을 꾸려 활동을 했는데, 일단 지역이 결정된 순간 1:1 매칭을 통해 직접 현장에 나가 전투하는 이와 보조 임무를 수행하는 이가 한 팀이 되었다.

대개 전투는 뱀파이어의 피를 받은 놈이, 보조 임무는 인간이 수행했는데 ‘보조 임무’라고 해서 대단한 것도 아니었다. 사무적 일이나 싸움에 지친 그들에게 적절하게 피를 주는 것이 대부분이었고, 정말 드물게 현장에서 후방 지원으로 뛰는 경우가 있을 뿐이었다.

그렇기에 사실상 ZAT에 소속된 인간은 사관학교 출신이 없다시피 했다. 99.9%가 무식하게 공부만 하고 적당한 체력 검정을 넘어 공무원 신분을 따내려는 놈들이었다.

그리고 나는, 당연히 0.1%의 인간이었다.

애초에 돈이나 편한 노후 따위를 생각했다면 이런 곳에 발을 들여놓지도 않았을뿐더러, 그들이 득실거리는 학교에 자진해서 들어가 허구한 날 먹잇감이 되어 뜯기는 수모를 당하진 않았을 테니까!

제 몸만 믿고 현장에서 날뛰는 애송이 같은 놈들을 상대로 살아 있는 밥솥이 되느니, 차라리 상대의 목을 베어 오는 주체가 되는 게 낫지 않겠는가?

“저녁에 다 같이 호프 가기로 했는데. 오늘은 빠지지 말고 같이 가.”

표성은 제안도 아닌 통보를 했다.

“저 술 못 먹는 거 알잖아요.”

“오렌지주스든 탄산음료든 마시면서 자리라도 지키고 있어. 이번에 현승이도 그만둬서 분위기 너무 안 좋아. 팀 살리는 데 기여 좀 해라. 팀장님이 너 데리고 가면 회식비 전액 지원해준다고 하셨단 말이다.”

“제가 왜…….”

“네가 현장에서 얼마나 제멋대로 행동했는지 내가 다 보고 올려야 해? 아니면 네가…….”

그는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그의 말이라면 내가 여자라고 해도 철석같이 믿을 사람들이 이 건물을 채우고 있다는 사실이 원망스러웠다. 결국 그의 입을 틀어막으며 말했다.

“씨, 알았어요. 이제 협박까지……. 대체 그런 건 누가 가르쳐줬습니까?”

그의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곳에는 멀대같은 놈이 서 있었다. 뱀파이어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반반한 얼굴에 치사하게 남자답게 생기기까지 해서 처음 왔을 땐 타 부서의 여자 대원들이 그를 보기 위해 행정실 앞을 기웃거리는 일도 있었다.

그는 샤워하고 온 건지 하의만 대충 걸친 채 머리를 털었다. 그의 머리카락에서 탈출한 물방울이 사방으로 튀었다.

욱하는 마음에 버럭 소리를 질렀다.

“현태주, 머리 말리고 들어오라고 몇 번을 말해!?”

“남자 화장실에 드라이기 좀 한 대 더 달라고 하면 안 됩니까? 허구한 날 여자 샤워실에 말리러 들어가다가 두들겨 맞는 게 하루 이틀이 아니라서 피곤한데.”

그러니까 머리 말리러 여자 샤워실에 들어가는 변태가 어디 있냔 말이다!

태주는 태연하게 웃으면서 계속 머리를 털어댔다. 아주 대놓고 옆에 와서 탈탈대는 통에 얼굴이 축축해졌다. 땀도 안 흘리는 녀석이 왜 저 긴 머리까지 감고 왔는지…….

“야!”

태주는 어이쿠 하며 자리를 떴다. 뱀파이어라면 질색을 하는 나에게 겁 없이 깐족거리는 놈은 이 건물에서 태주가 유일했다.

힘 조절을 잘하지 못해 현장을 필요 이상으로 뒤엎는 녀석을 감당할 파트너가 불쌍해서 최대한 건들지 않고 있었는데, 녀석은 아마도 자신이 너무 대단해서 건들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태주의 파트너였던 현승이 이틀 전 그만두고 떠난 지금, 나에게 걸림돌은 하나도 없었다.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녀석에게 달려갈 준비를 하고 있으려니 표성이 내 어깨를 꾹 누르며 말했다.

“그러지 말고 너도 가서 씻고 와라. 지금 꼴이 말이 아니야. 네가 걸어온 길을 봐. 청소하시는 분이 널 매우, 아주, 정말 싫어하실 거다.”

표성의 말에 뒤를 돌아보자, 내 자리에서 시작된 흙먼지 길이 문밖까지 이어져 있었다. 아직 흙이 묻은 옷을 끌어당겨 냄새를 맡으니 아침까지만 해도 상큼한 향을 풍기던 것이 지금은 퀴퀴한 냄새가 진동했다.

“퇴근까지 세 시간 남았으니까 빨리 씻고 와서 시말서랑 보고서 써.”

“슬픈 일이지만 역시 오늘은 야근해야…….”

“안 돼. 넌 두 시간 안에도 쓸 수 있다는 거 뻔히 아니까 잔머리 굴릴 생각도 하지 말고. 지난번에 다섯 시간은 걸릴 것 같으니 안 된다고 하고서 한 시간 만에 끝내고 집에 가는 거 CCTV로 다 봤단 말이지.”

“……젠장.”

괜히 이것저것 하느라 빨라진 손 덕분에 얻은 건, 휴가가 아니라 더 많은 일거리였다.

바닥에 난 흔적을 따라 복도로 나가서 샤워실로 향했다.

다른 부대와 다르게 최신식으로 지어진 건물은, 자신의 종족이 다 쓰러져가는 건물에서 일하는 걸 가슴 아파하는 이들의 작품이었다. 마음에 안 드는 것투성이였지만 그래도 깨끗한 곳에서 씻을 수 있다는 것만큼은 마음에 들었다.

축축한 샤워실은 따뜻할 법도 했지만, 그들이 얼마나 찬물을 들이부었는지 한겨울에 발가벗고 있는 기분이었다. 목에서 달랑거리던 목걸이도 서서히 찬 기운을 머금기 시작했다.

땀도 별로 흘리지 않는 이들이 씻는 이유는 그저 햇살에 달궈진 몸을 식히기 위해서였다. 물을 아끼라고 종용할 게 아니라 선풍기 바람을 쐬라고 하는 게 더 효율적이지 않았을까.

“왁, 차가워!”

얼음장 같은 물을 피해 수도꼭지를 한껏 새빨간 쪽으로 돌리고 따듯해지길 기다렸다. 거울에 비친 몸은 내가 생각해도 정신없을 정도로 많은 문신과 테이프로 뒤덮여 있었다. 그간 얼마나 몸을 학대하며 뛰어다녔는지 고스란히 흔적으로 남아 있었다.

몸 구석구석을 닦으며 시말서에 뭐라고 써야 하나 고민했다. 이젠 하도 많이 써서 할 말이 없을 지경이었다.

파트너가 내 손목을 뽀각 꺾은 뒤 식사를 즐기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총을 겨눴다?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변명만 늘어놓는다고 퇴짜 맞을 게 뻔했다.

나를 따먹으려고 들러붙었기 때문에 방어 차원에서 총을 겨눈 거다? 그런 인권이 있었다면 이 기관 자체가 돌아가지 못했겠지.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이 뭔지 알 길이 없었다. 결국, 물의를 일으켜 죄송합니다, 앞으로 그들의 열렬한 에너지 드링크가 되어 이 한 몸 바쳐 일하겠습니다…… 를 줄줄이 길게 늘여 쓰기로 마음먹었다.

***

협박까지 하길래 얼마나 좋은 곳에 데리고 가나 했더니, 도착한 곳은 부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소고깃집이었다. 테이블마다 칸으로 나뉜 고깃집은 어디를 가도 눈에 띄는 그들에게 안성맞춤이었다.

허겁지겁 고기를 먹어치우는 이들에게 질려버린 나는 집게를 냅다 던지며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 먹을 거면 뭐 하러 불판에 올려? 그냥 나오는 거 바로바로 먹어치우지? 아니면 그냥 들판에 가서 소 한 마리를 잡아다가 뜯어 먹어!”

상 위에는 스물네 개의 빈 접시가 탑처럼 쌓여 있었고, 그들은 겉만 겨우 익은 고기를 흡입하고 있었다. 그렇게 시뻘건 고기를 먹고 있는 놈들이 조금 무서워 보였다.

먹는 양 말이다, 먹는 양.

태주가 고기를 질겅질겅 씹으며 물었다.

“서울에도 들판에서 소를 키우는 곳이 있어요? 제주도에는 그래도 꽤 있어서 가끔 잡아먹었는데. 그래도 겉을 살짝 익히는 게 좀 더 낫긴 해요. 바로 잡은 게 아니라서 신선도가 떨어지잖아요. 냄새가 구려요, 진짜.”

“대체 흡수되는 에너지도 없으면서 음식을 왜 먹는 거야?”

“맛있잖습니까. 인간들도 그렇게 설탕 먹지 마라, 소금 좀 먹지 마라 해도 기어코 잔뜩 먹고 몸 다 버리잖아요. 저흰 몸 버릴 일도 없는데 마음껏 먹고 싶은 거 먹고 사는 거죠. 왜요? 부러워요?”

“잘났다. 길 가다가 칼에나 안 찔리게 조심해.”

태주는 씩 웃으면서 소주를 병째 벌컥벌컥 마셨다. 이미 세 병째인데도 물을 마시듯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물이나 마실 것이지, 비싸기만 한 술로 왜 목을 적시는 건지. 녀석은 정말 안색 하나 변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들은 풀 한 포기 입에 대지 않고서 기름이 좔좔 흐르는 고기만 먹고 있었고, 표성은 그 와중에 제 부인을 챙긴다고 열심히 고기를 자르고 있었다. 표성이 주는 고기를 받아먹던 여자가 나를 힐긋거리며 말했다.

“유운 씨, 더 드세요.”

그녀는 홍서연으로, 망나니 같은 태주와 다르게 항상 긴 머리를 빳빳하게 묶고 곧은 자세를 유지했다. 원칙이라면 자기 신랑의 목도 쉽게 따버릴 서연이 나를 어려워한다니, 조금은 이상하달까.

“괜찮습니다.”

그들의 눈동자는 흥분하면 저마다의 색으로 변하곤 했다. 식사하는 지금도 다를 게 없었다. 비록 지금은 단순한 음식 섭취에 의한 변화이기에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미묘한 차이였지만, 싸울 때나 흡혈을 할 때면 심한 경우 겁에 질려 움직이지 못하는 인간들도 있을 정도이기에 마냥 좋게 볼 일은 아니었다.

10배수로 뽑는 수습 요원 중 80퍼센트가 그들의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그만두었으니 말 다 한 것 아니겠는가.

서른 개째 접시를 해치웠을 땐 이미 세 시간이나 지난 뒤였다. 엉덩이도 배기고 배도 부르고, 빨리 누워 자야겠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드디어 끝났구나 싶어 결제하는 사이에 관사로 돌아가려는데, 표성이 조건은 ‘맥줏집’이었다며 나를 질질 끌고서 바로 옆 호프집으로 들어갔다.

지은 지 한참 된 맥줏집은 주황색 조명에 요란한 비트가 울리는 최신 음악까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거기에 테이블은 얼마나 가까이 붙어 있는지, 화장실에 한 번 가려고 해도 ‘죄송합니다’를 세 번은 외쳐야 하는 곳이었다.

차라리 모르는 사람에게 사과하면 덜 피곤하겠지만, 주위엔 부대에서 마주치는 얼굴이 대부분이었다. 그건 잘못 걸리면 통성명을 한 뒤 근황까지 이야기해야 한다는 소리였다. 술 취한 상대를 두고 맨정신으로 대화한다는 건 기 빨리는 일이었다. 이곳에서 한 시간을 보내느니 모래사장을 다섯 시간 뛰는 게 더 나았다.

“……에서 잊힌 일들이 다시금 일어나는 것에…….”

시끄러운 이들 사이에서 탄산이 터지는 포도 주스를 마시며 음악과 따로 노는 뉴스를 봤다. 뉴스는 실종된 어린이에 대한 내용으로 한창 떠들썩했고, 눈물을 훔치는 부모의 모습과 경찰의 모습이 번갈아 나오고 있었다.

한참 동안 집중해서 보고 있는데, 남의 음료수를 벌컥벌컥 마신 태주가 잔을 쾅 내려놓으며 말했다.

“순혈들은 모든 걸 거머쥐고 꿀 빨고, 잡놈들은 인간들이랑 다를 바 없이 편하게 살고! 어정쩡하게 우리만 이게 뭡니까. 말만 하프지 그냥 목숨 건 노동자잖아요. 목숨 걸고 동족이랑 싸우는데 월급쟁이니, 변태 새끼들이니 욕만 먹고…… 현장에 나가면 제로 놈들한테서 반역자라는 소리까지 듣는데 가끔은 진짜 내가 반역자 같다는 생각이 든다니까요. 안 그래요, 누나?”

서연은 나와 표성을 번갈아 보다가 대답했다.

“제각각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까 이런 평화가 찾아오는 거 아니겠습니까. 모두 편하게 살려고 하는 순간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우리가 만약 다 하고 싶은 걸 해서 떠난다고 생각해보세요. 온 동네가 쑥대밭이 되지 않겠어요? 우리의 힘을 좋은 곳에 쓸 수 있다는 걸 오히려 감사히 생각해야 하죠.”

태주는 그녀의 대답에 경악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지금 남편이 앞에 있다고 그러는 거 아니죠?”

“인간인 표성 씨랑 유운 씨도 불만 없이 일하는데, 저희가 불만이 있으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괜한 인간들이 껴서 피해를 보고 있는 건데.”

“자원이랑 강제 입대랑은 많이 다르잖아요! 그리고 인간들이 껴서 피해를 보다니요. 저희가 쥐 죽은 듯이 숨죽여 산 세월이 얼만데요!”

서연은 자신의 어머니가 인간이 아니었어도 당연히 지원해서 들어와 싸웠을 거라며 이곳에서 자신들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관해 이야기했다.

내가 이곳에 몸담지 않은 상태로 텔레비전에서만 그들을 접했다면, 나도 다른 인간들과 다를 바 없이 그들에게 박수갈채를 보내며 감탄을 할 법한 모범적인 내용이었다.

서연은 한참 동안 이야기를 하다가 텔레비전을 가리켰다.

“저분도 자원해서 들어오시는데.”

그녀의 손짓에 작은 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텔레비전에는 한글도 똑바로 쓰지 못하는 유치원생도, 공원에서 종일 바둑을 두고 앉아 있을 할아버지도 알 법한 익숙한 얼굴이 비쳤다.

한국인에게선 찾아보기 힘든 새빨간 머리에, 어디에 내놔도 뒤지지 않을 덩치와 세상 냉정해 보이는 저 표정으로 입만 웃는 놈. 좌로 보고 우로 봐도, 실눈을 뜨고 봐도 분명 그놈이었다.

전재혁?

“저…… 저분이 여길 왜 와요?”

태주는 적잖이 놀란 듯 말까지 더듬었다. 태주가 극존칭을 사용하면서 부르는 인물은 다름 아닌 그였다. 언제나 그들에 관해 나올 때면 핵심 인물로 소개되는 집안의 사진 중앙에 서 있던 아이. 사관학교에서 항상 상위권을 차지하면서 언제나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다니던 놈.

당연히 제 부모님을 따라 정치계로 흘러갈 것이라는 예상대로 양복을 갖춰 입고 뉴스에 등장하던 녀석이, 오늘은 군복을 입고선 플래시를 터트리는 카메라 앞에 여유 있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다른 놈들은 그를 보면서 눈을 반짝였지만 나는 짜증만 솟구쳤다. 그는 남들은 평생을 노력해도 가질 수 없는 것들을 거머쥐고, 모든 걸 바쳐 일궈낼 것을 손쉽게 이뤄내면서도 겸손할 줄 모르는 놈이었다.

졸업하면 보지 않겠다는 생각과 달리, 놈이 반반한 얼굴로 연예 활동을 하거나 시시콜콜한 사항까지 텔레비전에 나오는 탓에, 그의 근황을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됐었다. 그런데 이젠 같은 직종에 종사하는 근로자가 되었다니,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나도 모르게 끔찍이도 그를 숭배하는 이들 앞에서 막말을 던졌다.

“미친놈, 취미 활동 하나 늘렸나 보지.”

“말조심해라. 여기 있는 이들이 다 네 적이 되는 수가 있단 말이지.”

표성이 기겁을 하며 나에게 경고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정말 몇몇이 나를 힐끔거리고 있었고 웬만해선 동요하지 않는 서연도 나의 빈정대는 말투에 기분이 안 좋은지 눈썹을 움찔거렸다.

“유운 형 말하는 거 진짜 얄밉다. 형한테 맞는 놈들 보면 인간들도 저희 건들지 못하는 조항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그런데도 조항은 죄다 인간한테 맞춰서 만들어져서 진짜 생활하기 너무 힘들어!”

태주는 화면에 나오는 재혁의 웃는 얼굴을 따라 하고 있었지만, 보는 사람의 입장으로선 사악하기 짝이 없었다. 저도 제 모습이 어이가 없었는지, 태주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나저나 진짜 세상 혼자 사네요. 잘생기고 능력 있고 집안도 빵빵하고……. 다른 형제분들보다 여기저기 얼굴도 많이 비치는 거 보면 확실히 더 잘나서 그런 거겠죠. 입대라니, 미리 지지층이라도 확보해놓으려고 하는 건가.”

500cc 맥주를 단번에 마신 서연이 여전히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재혁 님은 아무래도 제주도에서 활동하시겠죠? 본가가 그쪽이니.”

표성이 그녀의 물음에 대답했다.

“아마 그러지 않을까. 그래도 중요한 분이신데 덜 위험하고 편한 곳에 있을 테니.”

그들의 대화에 끼지 않고 포도 향만 남은 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차라리 텔레비전 속 환상의 동물처럼 보던 시절이 낫지, 다시금 나와 같은 땅을 밟고 사는 놈이 되었다는 생각이 드니 그 시절 주먹이라도 한 대 더 날리고 올 걸 하는 마음에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가자 태주가 나를 불러 세웠다.

“어디 가요!”

“담배. 안 피운 지 오래돼서 수전증 와.”

오래는 무슨, 들어오자마자 피우고 온 터라 30분도 채 안 되었을 때였다. 표성은 나에게 도망가는 거면 내일 큰일을 치르게 될 거라며 소리쳤다. 똑같이 언성을 높일 필요도 없이 담뱃값을 들어 흔들어 줬다. 곧 모양 빠지게 죄송하다고 외치며 의자 사이를 비집고 나가야 했지만.

낮엔 그렇게 뜨겁더니 해가 진 뒤엔 선선한 바람까지 불고 있었다. 자른 지도 오래되어 눈을 찌르며 날리는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넘겼다. 골목으로 들어갈 필요도 없이 다른 이들이 담뱃재로 잿더미를 만들어놓은 곳 옆에 서자, 다들 얼마나 많이 피워댔는지 가만히 서 있어도 냄새에 취할 것 같았다.

유리 너머로 가게 안을 보니 표성이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고, 태주도 따라서 나를 힐끔거렸다. 나는 퍼포먼스를 하듯 담배에 불을 붙였다.

더는 부담스러운 눈빛을 마주하기 싫어서 그들에게 등을 지고 섰다. 눈을 감고 있으니 옆에서 흘러오는 고깃집 특유의 역한 냄새와 숯 타는 냄새, 그리고 라벤더 향이 났다.

“아?”

……라벤더 향?

살짝 스치는 바람에 고개를 돌리는데 새빨간 눈과 마주쳤다. 암흑 속이지만 가게에서 비추는 옅은 빛에도 그의 눈은 분명 새빨갛게 반짝였다.

1초도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잠시 시간이 멈춘 듯 멍청하게 그를 봤다.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나를 무표정하게 보던 상대는 거만하고 익살스러운 미소를 띠며 나를 지나쳤다. 화면 속 입만 웃던 가식적인 놈과 똑같은 표정.

바로 그놈이었다.

“젠장. 저 새끼가 왜…….”

입에 문 담배 끝을 깨물다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설마 아니겠지. 닮은 놈이겠지.

간만에 자기최면을 걸며 뒤로 돌아섰다.

“……그래. 진짜구나.”

운치 있는 바에서 값비싼 양주나 들이켜고 있을 것 같은 사람은 정말 그였다. 차라리 내가 그를 기억하는 것만큼 그가 나를 기억하지 못했으면 했지만, 이 바닥에서 사관학교를 나온 놈이 나를 모를 리 만무했고, 저 표정은 분명히 나를 향한 것이었다.

신경질적으로 다 탄 담배를 즈려 밟고 새로운 담배를 꺼내 물었다.

보이지 않는 먹이사슬 사이에서 철없는 이들이 득실거리던, 잊었던 그 시절이 떠올랐다.

한 번은 그와 대련을 벌이다가 다친 상처로 생사를 넘나든 적이 있었다. 그는 그런 나를 향해 ‘냄새가 난다’는 말을 했고, 그 한마디에 나는 그의 추종자 놈들에게서 정액을 뒤집어써야 했다. 물론 가만히 참는 성격이 아닌지라, 그의 얼굴에 똑같이 피를 뒤집어씌워주는 복수를 했지만 말이다.

아직도 그 얼굴을 생각하면 얼마나 우스운지!

지금 별똥별이라도 떨어져서 소원을 빌어야 한다면 저놈이 절대 서울 지역에서 근무하지 않게 해달라는 것뿐이었다. 녀석을 떠올리면 좋은 기억이라곤 1초도 없었다. 녀석과 같은 곳에서 수시로 얼굴을 부딪치는 일이 일어난다면 거짓말하지 않고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나는 녀석을 죽여버릴 각오가 되어 있었다.

줄담배를 뻑뻑 피우고 있으려니, 내가 왜 여기서 그딴 고민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야 하는 건가 싶었다. 이 정도면 그들의 요구에 맞춰 충분히 놀 만큼 놀아줬다고 생각했다. 자연스럽게 반쯤 피우다 만 담배를 물고서 그대로 직진했다.

아니, 하려고 했다.

“백유운.”

주춤거림도 잠시, 나의 뒤로 다가온 놈이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빼앗아갔다. 독한 담배 냄새를 뚫고서도 코에 박히는 라벤더 향이 역겨웠다.

진정한 승리자는 도발에 넘어가지 않고 의연하게 넘어갈 줄 아는 사람이라고 했다. 평소와 같은 속도와 움직임으로 걷기 위해 의식하는 나의 몸뚱이가 조금 짜증이 났지만 평온함을 유지하며 발걸음을 뗐다.

“몰골이 말이 아니네.”

평범한 회사원이었다면 회사 생활에 맞추어 알코올에 절어 있었을 테고, 나는 지금쯤 그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기 위해 이를 악물었을 터였다.

하지만 고작 저런 애송이 같은 놈에게 장단 맞춰 춤을 춰주기엔 나도 인생을 살면서 귀찮은 일을 만들지 않는 법을 배웠기에, 그저 묵묵히 길을 갔다.

딱 세 발자국.

“백유운, 고생 좀 했나 봐. 날 보고도 컵 속에 갇힌 파리 새끼처럼 날뛰지 않는 걸 보면.”

그는 5년 만에 대면했지만 하나도 변한 게 없었다. 날카로운 눈은 언제나 잡아먹을 듯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고, 굵직한 선들로 이루어진 얼굴은 창백하다 못해 석고로 뜬 것 같아 사람이라기보단 조각상 같았다.

텔레비전에서 보던 완벽한 모습은 아니었지만, 오히려 평범한 옷을 입고서도 감출 수 없는 키와 어깨의 소유자라 뱀파이어 사이에서도 눈에 띄었다.

다른 인간들이었다면 그런 그를 보고 얼굴을 붉히며 손 한번 잡아보기 위해 발악했겠지만, 나는 그저 피가 거꾸로 솟아 얼굴이 화끈거릴 뿐이었다.

그는 태연하게 말을 걸었다.

“하나도 안 변했어. 열받아 있는 걸 보니.”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서 나를 보고 있던 녀석은 대답이 없는 나에게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요즘에도 아무나하고 붙어먹고 다녀?”

“뭐?”

“아니야? 파트너한테 정착이라도 했나 보군.”

그는 콧김을 내뿜으며 비웃었다.

조명 곁을 벗어난 터라 어둠이 깔린 길이었지만 그의 눈엔 내 얼굴의 미묘하게 움직이는 근육 하나하나가 자세히 보일 게 뻔했다. 애써 표정 관리를 하려고 할수록 일그러지는 느낌이었다.

어둠에 적응하기 시작한 나의 눈에도 곧 그가 자세히 보이기 시작했다. 빠르게 뛰는 심장이 어서 제 속도를 찾아가길 바랄 뿐이었다.

“내 관심이 내심 그리웠어? 찌질하게 쫓아와서 주둥이나 놀리고 있는 걸 보면.”

감정을 죽이느라 목소리가 조금 잠겼지만 그리 거슬릴 정도는 아니었다고 장담할 수 있었다.

“조금은? 요즘엔 너같이 바퀴벌레처럼 날뛰는 새끼가 없어서 지루하던 참이었거든. 다들 나만 보면 슬슬 기느라.”

그는 초등학생이나 할 법한 말을 하며 거들먹거렸다. 슬금슬금 다가오는 그에게서 멀어지지 않고 발을 고정한 채 서 있으니 서서히 그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나도 키가 작은 편은 아니었지만 한참이나 고개를 젖혀야 했다. 얼핏 보이던 눈동자에 내 얼굴이 비쳐 보일 지경이었다. 나는 물러나지 않고 오히려 그에게 얼굴을 들이밀며 말했다.

“조용히 처마시고 집에 가서 잠이나 자. 네가 나한테 관심을 두는 건 고맙지만, 안타깝게도 난 네가 전혀 보고 싶지 않았거든.”

“왜? 내가 갔으면 좋겠어? 오랜만에 만난 동창한테 너무 차갑게 구는 거 아니야?”

“동창? 네가 날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조차 놀랍다. 순순히 돌아가기가 싫다면 내가 돌아가게 해줄 수도 있고.”

그는 언제나 거만하고 한심한 눈빛으로 나를 봤고, 내가 편안하게 사는 꼴을 보기 싫어했으며, 모든 걸 이겨도 하나라도 나에게 지는 게 있다면 악착같이 들러붙어 깔아뭉개 놓았다.

어쩌면 그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했는지도 모르겠다. 덕분에 악을 쓰면서라도 살아남는 법을 배웠고, 포기하지 않는 법을 익혔으니.

***

표성의 경고를 무시하고서 들어온 관사는 조용했다. 그도 그럴 게 부대 바로 옆에 있는 관사는 파트너와 함께 살아야 한다는 조항 덕에 2인 1실을 원칙으로 쓰게 되어 있었는데, 달려드는 파트너 놈들을 핑계 삼아 한사코 우겨 독실을 얻어냈기 때문이었다.

개인 방이 있는 거라면 모를까, 애초에 친목을 도모하라고 만든 공간이었기에 사생활 따윈 꿈꿀 수도 없는 구조였다. 넓은 거실과 좁은 주방, 그리고 화장실이 전부인 관사에서 생판 모르던 두 사람이 지내야 했다.

심지어 침대마저 함께 써야 한다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조항이란 말인가.

크고 편한 길을 두고 지름길로 온답시고 불법 주차 차량이 가득한 골목길의 담벼락을 타고 넘어왔더니 목이 탔다. 코드조차 꽂아놓지 않은 냉장고를 뒤져봤자 나올 건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싱크대에 머리를 처박고 아리수를 벌컥벌컥 마셨다.

고기 냄새와 연기를 잔뜩 머금은 티셔츠와 바지를 벗어 빨래 통에 던져 넣었다. 거실 한복판에 놓인 넓은 침대에 몸을 던지니 폭신폭신 부드러운 게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평소보다 이른 시각에 침대에 누워 있자니 왠지 시간이 아깝게 느껴졌다. 오랜만에 여가 생활이나 즐겨볼까 싶어 주위를 둘러봐도, 텅텅 빈 집 안에 오락 거리라곤 서연이 읽어보라며 준 뱀파이어의 생태에 관한 책뿐이었다. 매번 반년도 채우지 못하고 떠나는 나의 파트너들을 이해해보라면서 사준 책이었지만 제대로 읽어본 적은 없었다.

애초에 기초 지식이라면 학창 시절에 충분히 듣고 몸소 느껴서 풍부하게 갖추고 있었기에 굳이 읽을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했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보는 건 가장 뒷장의 참고 문헌 표시 글이었다. 아무 정보도 없고 그저 출처만을 밝히는 3장은 나의 잠을 책임지는 요정 같은 존재랄까.

아직 첫 페이지를 읽는 중이었지만 몸도 정신도 피로한 하루는 금방 전신을 나른하게 만들었다. 씻고 자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몸은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으…….”

그런 몸의 노력을 부순 건 다름 아닌 전화벨 소리였다. 앓는 소리와 다르게, 언제 터질지 모르는 사건에 대비하도록 최적화된 몸은 귀찮음을 이기고 벌떡 일어났다. 풀어둔 손목시계와 휴대전화를 들고서 튀어 나가 신발을 신었다.

“받았습…….”

[여보세요? 유운아!]

예상치 못했던 여자의 목소리를 듣자 다리에서 힘이 턱 풀려 신발장 위에 주저앉았다. 애꿎은 폭행을 당한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며 물었다.

“이번엔 또 무슨 일입니까.”

[얘, 엄마한테 20만 원만 보내줘라.]

당당하게 돈을 요구하는 여자는 술이 심하게 취해 혀가 꼬이고 있었다.

차라리 전화를 한 게 그녀라서 다행이었다. 사고라도 쳐서 다른 사람에게 머리를 조아려야 한다든가 경찰서에 끌려가 보호자 노릇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였으니까.

“하…….”

[승아 이제 다섯 살 됐잖아. 어린이집 보내려는데 돈이 좀…….]

더 듣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언제나 연을 끊어버려야지 하며 매몰차게 굴려고 해도 가족이라는 이름이 뭔지 연락은 이어지고 있었다. 나의 친아버지는 10년 전에 세상을 떠났건만, 엄마라는 사람은 나의 졸업식에 갓난아이를 데려와 네 동생이라며 들이미는 여자였다.

오직 그녀의 손에서 자라난다는 이유만으로도 아이가 불쌍해 몇 번 도와주었지만, 그 일이 이렇게 나의 발목을 잡을 줄 몰랐다.

그녀는 언제나 돈이 궁할 때면 아이를 들먹거리며 나에게 금전을 호소했고, 알코올 중독을 치료해보겠다며 받아 간 돈도 결국은 술을 마시는 데 탕진했다. 심지어 지금은 아이를 그녀와 조금이라도 떨어트려놓기 위해 어린이집에 보냈던 돈을 빼돌리곤 다시 달라고 이야기하고 있다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답 없다, 진짜…….”

끊임없이 걸려오는 전화 때문에, 간신히 달빛만 들어차던 방 안이 번쩍이는 불빛으로 가득해졌다. 시끄러운 벨 소리에 전원을 꺼버렸으나, 한번 달아난 잠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꾸역꾸역 이불 속에서 뒤척이며 누워 있다가 괜히 일어나서 빨래를 돌리고 창틀을 닦아내고 거실 바닥에 엎드려 팔굽혀펴기도 해보며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달밤의 체조는 독이었다. 몸은 각성 상태로 접어들었고, 결국엔 평소보다 늦은 시각에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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