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2. 사계 (14/15)

외전 2. 사계

<여름>

“선생님, 저 떨려요.”

정 선생이 가슴 위에 손을 올리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숨은 떨렸으나 눈은 소풍 가는 아이처럼 빛나는 것이 은근히 설레는 모양이라 웃으면서 그의 머리를 쓸어내렸다.

“잘할 거예요.”

“그럴까요?”

“그럼. 정 선생은 웃기만 해도 프리 패스지.”

아하하-. 내 말에 정 선생이 곧바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을 가뿐하게 귀에 담고 손을 내려 그의 뺨을 쓸다가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하던 대로 하고 와요. 떨지 말고.”

“넵. 행운의 키스 받았으니까 채용될 것 같아요.”

정 선생이 어깨를 으쓱이며 또 한 번 웃다가 차에서 내렸다. 차창 너머로 그에게 인사를 건네고 학교 안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1년의 계약 기간을 끝내고 정 선생은 임용이 아닌 대안 학교로 눈을 돌렸다. 그다운 선택이다 싶으면서도 결코 쉬운 길은 아니기에 조금 걱정스러웠지만, 역시 그이기에 잘할 것이라 믿고 있다.

시트에 몸을 묻고 학교 건물에 멍하니 시선을 두었다. 정 선생과 만난 지도 이제 1년이 다 되어 간다. 새삼 시간이 참 빠르다고 느낀다. 문득 그를 처음 보았을 때가 생각이 났다. 교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대학생인 줄 알았지. 새로 온 선생인 걸 알고 나서는 관심을 껐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나 싶다. 웃는 걸 보기만 해도, 웃음소리를 듣기만 해도 사람을 끌어당기는 남자인데. 아직도 옆에서 잠든 정 선생을 볼 때면 어디서 이런 사람이 굴러왔나 싶기도 하다.

룸 미러 속의 나와 눈이 마주쳤다. 호선을 그리는 입꼬리를 발견하고는 손으로 입가를 쓸었다. 한 해도 지났고 나이도 한 살 더 먹었으니 자제해야 할 텐데 갈수록 중증이 되어 가고 있는 것 같아 큰일이다. 그러나 한 발을 빼야겠다는 생각보다는 머리끝까지 잠겨도 좋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정 선생이 나올 시간이 다 되었다. 핸드폰으로 근처에 있는 음식점을 찾아보다가, 차창을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정 선생이 씩 웃으면서 문을 열었다.

“오래 기다리셨죠.”

“아니. 고생했어요.”

“저 잘하고 왔어요!”

“그래요?”

“네, 분위기 화기애애했어요. 연락 주실 것 같아요.”

“잘했네.”

정 선생이라면 잘할 거라고 생각했다. 워낙 서글서글하니 모난 데 없이 잘 지내고, 수업도 잘하고, 의욕도 있고, 교단에 섰던 1년간 제 목표도 나름대로 세웠으니 놓치기 아까운 인재일 테다. 안전벨트를 매는 그의 뺨을 가볍게 쓰다듬고선 운전대를 잡았다.

“맛있는 거 먹어야지. 뭐 먹을래요.”

“고생했으니까 고기 먹어요.”

고생의 주체에 저뿐만 아니라 나까지 포함하는 것에 웃음이 나왔다. 좀 전에 인터넷에서 보았던 고깃집이 생각나 차를 그리로 돌렸다. 평일 낮이었지만 아무래도 방학 기간이다 보니 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들부터 직장인들까지 꽤 많은 사람들이 자리에 있었다.

우리는 창가 자리에 앉았다. 햇볕이 강하지 않고 에어컨 바람이 서늘할 정도로 가게 안을 채우고 있어서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저 고민 있어요.”

“무슨 고민.”

정 선생이 고기를 불판에 올리자마자 콧잔등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간 고민이 있는 것 같진 않았기에, 처음 듣는 말이라 걱정이 생겼다.

“학교 되면 이사 가야 할 텐데, 밤에 쌤 보고 싶으면 어떡하죠?”

난 또 뭐라고. 웃음을 흘리자 정 선생이 짐짓 성이 난 듯 미간을 모았다.

“저 진심인데?”

“내가 가면 되지.”

“멀잖아요.”

“30분인데, 뭘. 정 선생 보러 가는데 그 거리면 짧은 편이죠.”

걸어서 5분이면 만날 수 있던 거리에서, 차로 30분이 걸리는 거리가 될 테니 아쉬운 건 사실이지만 그를 보러 가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다. 같은 도 안에 있어 다행이지, 그가 아예 다른 지역으로 가 버렸다면 전출을 신청했을지도 모르겠다.

다 익은 고기를 손가락을 꼼질거리고 있는 그의 앞으로 놔 주었다. 그가 젓가락을 들고선 입술로 물었다.

“저 차 살까요?”

“차?”

“장롱이지만 연습은 선생님이랑 하면 될 거고……. 살까요?”

사회 초년생인데 벌써 차를 사면 유지비로 다 나가서 안 된다며, 차는 최소한 서른다섯은 넘어야 생각해 보겠다고 했던 그였다. 아무래도 채용될 거라고 확신하여 조급한 마음이 든 모양이다. 그의 자신감과 또 그 뒤를 따라오는 사랑스러운 조급함에 머리를 쓸어 주고 싶었지만 보는 눈이 많아 참았다.

“내가 못 미더워요? 정 선생 보러 안 갈까 봐?”

“그게 아니라요. 어떻게 선생님만 오시라고 하겠어요, 피곤한데.”

“버스 타고 와요. 자고 가면 아침에 데려다줄게.”

타협안을 내놓자 정 선생이 배시시 웃었다. 마음을 놓은 것 같아 얼른 먹으라고 손짓을 하자, 그가 내게서 집게를 빼앗아 불판 위의 고기를 반은 제 접시로, 반은 내 접시에 올려 주었다.

정 선생이 덜 마른 머리를 손으로 헤집으며 거실로 나왔다. 근처에 살면서 왕래가 잦다 보니 이제 내 집에 그의 칫솔부터 시작해서 속옷이나 옷가지들도 전부 준비되어 있다. 그가 이사를 가도 서로의 집에서 자는 일은 흔할 테니 그의 물건들은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의 손에 맥주를 쥐여 주고 텔레비전을 켰다. 그가 보고 싶다고 했던 영화를 틀고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맥주 캔을 맞부딪쳤다.

“이거 4년 전 영화 아닌가?”

“맞아요. 4년 전이면…… 제가 스물다섯 때였거든요. 바빠서 못 봤을 거예요. 근데 갑자기 생각나더라고요.”

정 선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텔레비전으로 고개를 돌렸다. 물기가 남아 있는 머리칼이 손끝을 적셨다. 영화는 여름을 배경으로 한 일본 영화였다. 지나치게 잔잔한 감이 있었지만 그럭저럭 괜찮았는데, 아무래도 정 선생은 지루한 모양이었다. 그의 입에서 하품이 새어 나왔다.

“졸려요?”

“아……. 저 이렇게 지루한 영화인 줄은 몰랐어요.”

정 선생이 한숨을 내쉬고선 내 어깨에 뺨을 묻고 비볐다. 다시 손을 들어 얼추 마른 그의 머리칼을 헤집다가 슬며시 쥐고는 떼어 내 고개를 기울였다. 그가 기다렸다는 듯 입술을 내밀었다. 입술에 짧게 입을 맞추고 맥주 캔을 내려놓은 뒤 티셔츠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판판한 가슴을 매만지다가 보드라운 유두를 엄지로 문질렀다. 동시에 입술이 다시 맞붙었다.

그가 내 등 뒤로 손을 둘렀다. 단단한 손가락이 등허리를 더듬는 손길에 고양감이 찾아왔다. 가슴을 위로 밀어 올리듯 쥐자 잇새로 작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머리칼을 쥐던 손을 내려 그의 목덜미를 문지르곤 고개를 더 깊이 기울였다.

에어컨을 틀어서인지 닿는 살갗이 서늘했다. 그러나 입술 사이로 오가는 숨과, 숨을 담은 입술만은 따뜻해서 더욱 키스에 매달리게 되었다.

정 선생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소파가 그리 크지 않아 불편했지만 그를 눕히는 데는 충분했다. 입술을 내려 부드러운 목덜미에 입을 댔다. 이를 내어 가볍게 씹자 그가 간지러운 듯 웃으면서 내 어깨를 밀어냈다.

“자국 남기실 거예요?”

“아니.”

“남겨 주세요.”

그의 눈꼬리가 살갑게 접혔다. 내 티셔츠를 쥐고 끌어당기는 손길이 못내 사랑스러워 끌려가 주었다. 그의 티셔츠 안에서 움직이던 손을 빼내어 그의 콧등을 톡 쳤다.

“누가 보면 어떡하려고.”

“모기라고 하죠.”

“그걸 믿는 사람이 있나?”

“안 믿으면 어쩌겠어요. 그리고 애초에 제 목에 뭐가 났는지 관심도 없을걸요?”

그가 천연덕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내 애인이 언제 이렇게 뻔뻔해졌나 싶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는 어른 같다가도 애 같고, 어디로 튈지 잘 모를 남자다. 절로 웃음이 흘러나왔다.

“난 당신한테 상처 남길 생각 없는데.”

“음, 상처는 아니잖아요.”

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해맑게 웃는 걸 보면서도 아래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손을 아래로 내려 그의 허벅지를 잡아 벌렸다. 고간이 불룩하게 솟아오른 것이 보였다.

“그건 갑자기 왜.”

“그냥……. 궁금해져서요.”

“거친 걸 좋아하는 취향인 줄은 몰랐는데.”

하얀 허벅지 아래로 말려 올라간 바지를 훑었다. 손가락을 둥근 고환 아래로 밀어 넣어 틈을 문질렀다.

“아니, 알고 있었다고 해야 하나.”

“…….”

“아픈 건 아래로 끝내야지. 아프게 할 생각도 없지만.”

내가 바지를 벗기자 그가 엉덩이를 들며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손 밖으로 나온 귓가가 붉어진 것이 보였다. 이내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좀 철없는 소리 한 것 같아요. 그쵸.”

“정 선생은 늘 어른스러워서, 내가 애처럼 느껴질 때가 많지.”

젤을 가져와 뜯으며 그의 티셔츠를 끌어 올리고 꼿꼿이 선 유두 근처로 입을 맞췄다. 그가 내 티셔츠의 밑단을 쥐기에 옷을 벗어 던졌다. 유두를 질근 물고선 달래듯 핥다가 젤을 손가락에 쏟았다.

“그러니까 철없는 소리 많이 해요. 둘뿐인데 뭐 어때.”

좁은 틈을 벌리고 손가락을 천천히 밀어 넣었다. 뜨거운 안이 움찔거리면서 손가락을 받아들였다. 그가 눈가를 찡그리며 손을 뻗었다. 몸을 기울여 주자 내 목을 끌어안는다. 그의 이마에 비스듬히 입을 맞추었다. 이내 웃음이 귓가로 달려들었다.

“쌤.”

“네.”

“내년에, 꼭 저희 학교 근처로 발령 나셨으면 좋겠어요.”

“연말에 같이 기도해야겠네.”

이마를 콩, 부딪쳤다. 맞닿은 이마 아래로 웃고 있는 눈을 응시했다. 콧등에 입을 맞췄다. 그가 웃음을 터뜨리며 내 목덜미를 끌어당겼다. 입술이 다시 진하게 맞닿았다.

손가락 하나를 더 넣어 가위질을 하듯 벌리는데도 속살이 쩍 달라붙으며 손가락을 감쌌다. 고개를 떼자마자 따라 올라오는 혀를 가볍게 빨자 그제야 힘이 좀 풀어진다. 고양된 숨을 밭게 내뱉는 그의 낯을 보자 반쯤 발기한 성기가 솟아오르는 게 느껴지면서 압박감이 심해졌다. 밑을 쑤시면서 바지를 다소 신경질적으로 벗어 던지자 정 선생의 손이 아래로 내려와 달래듯 속옷 위를 둥글게 문질렀다.

“음…….”

그의 손이 브리프 안으로 들어왔다. 기둥을 훑는 손길에 나도 모르게 움직임이 거칠어졌는지 정 선생이 눈가를 찌푸렸다. 고개를 옆으로 돌려 그의 눈가에 키스하고 손가락 하나를 느릿하게 넣었다.

쿠퍼액이 그의 손가락을 따라 아래로 흘렀다. 그가 젖은 손가락을 가져가더니 혀를 내어 핥았다. 나도 모르게 머릿속으로 욕설이 흘렀다. 눈을 반쯤 감고 입술을 꾹 무는 그를 응시하다가 참지 못하고 손가락을 한꺼번에 빼냈다.

“일부러 그래요?”

“……네?”

“아니.”

거추장스러운 브리프를 벗었다. 소파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의 골반을 잡아 끌어당겼다. 끌려온 그가 다리를 자연스레 내 허리에 감았다.

“당신이 작정하면 난 아무것도 못 하겠지.”

그가 뭐라 말할 것처럼 입을 벙긋거렸지만, 이내 그 입술 새로는 꽉 눌린 신음밖에 흘러나오지 않았다. 내 것이 그의 안을 완전히 뚫었다. 잔뜩 조이는 느낌에 이를 꽉 물었다가 그의 엉덩이를 부드럽게 주물렀다.

당장에라도 움직이고 싶었지만 손안에 잡히는 보드라운 살에 집중하며 억지로 참아 냈다. 평소보다 덜 풀었다는 자각이 있었다. 끊어질 듯 조이는 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괜찮아요?”

“음, 네……. 움직이셔도…….”

입술을 내려 그의 입을 막았다. 정 선생은 섹스 중에 뭐든 괜찮다고 말하는 경향이 있어, 조금만 끈을 놓으면 다치게 할지도 모른다는 염려를 늘 해야만 했다. 우리가 한두 살 먹은 어린애들도 아니고 험한 섹스를 할 일은 없지만, 그는 꽤 자주…….

“읏…….”

그가 내 팔뚝을 붙잡더니 허리를 슬금슬금 움직였다. 아래를 꽉 압박하며 붙잡고 있던 것이 쓸리면서 성기를 잔뜩 자극했다. 한껏 벌어진 입구가 움찔거리는 것을 응시하다가 참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쿠퍼액을 흘리고 있는 그의 성기를 손바닥으로 짓누르듯 문지르며 허리를 살며시 물렸다가 다시 처넣었다.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꽉 물고선 놔주지 않을 것처럼 조이는 안에 이맛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만족스러운 탄성이 흘러나왔다. 눈가를 찌푸린 채로 혀를 내밀어 내 입술을 할짝거리는 정 선생의 낯 곳곳을 훑다가 다시 한 번 허리를 움직였다.

“아……!”

아픈 얼굴은 아니다. 빨리 더 움직여 달라는 것처럼 혀가 재촉하듯 입술을 핥아 댔다. 눈을 내리깔았을 때, 그의 손가락이 제 가슴으로 향해 발딱 선 유두를 문지르고 있는 것을 보는 순간 참기가 힘들어졌다. 그와 몸을 바짝 붙여 입을 벌렸다. 곧장 혀가 들어왔다.

귓가로 그의 소리가 쏟아져 들어왔다. 허리를 움직여 그의 안에 내 것을 박아 넣을 때마다 따라 흔들리는 손바닥 아래의 성기는 뜨거우면서도 부드러웠다. 분명 그도 남자인지라 발기하면 딱딱해지고 핏줄이 도드라지도록 서는데도 불구하고, 서지 않아 말랑말랑한 성기를 손안에서 훑을 때처럼 사랑스러웠다. 아아, 그러니까 그는 사랑스럽지 않은 데가 없다.

“아, 흣, 쌤, 아, 좋아요……!”

그의 어깨에 이를 박았다. 꽉 조이던 곳이 어느새 눅진하게 풀려 버겁지 않을 정도로 따라왔다. 내 움직임에 따라 그가 엉덩이를 흔드는 게 느껴졌다. 눈앞이 시뻘게지는 기분이다. 어깨에 자국이 남지 않게 이로 긁어내리고선 그의 얼굴 곳곳에 입을 가져다 댔다.

한두 살 먹은 어린애도, 멋모르고 철없는 아이들도 아닌데 이 사람은 나를 자꾸만 그렇게 만든다. 아, 책임을 그에게 전가하는 것부터 어른스럽지 못하다는 소리겠지만. 천장에 번지는 형광등의 빛처럼 눈앞이 새하얗게 번져 갔다. 이를 악물자 그가 고개를 젖히더니 내 입술에 제 입술을 붙였다.

“하, 읏, 당신 진짜…….”

정신없이 흔들리는 와중에도 그가 풋풋한 웃음을 흘렸다. 그 웃음에 금방이라도 사정할 것만 같았다. 몸을 일으켜 허리에 감긴 그의 다리를 풀어내 허벅지를 내리눌렀다. 활짝 벌어진 다리 사이로 내 것을 끝까지 박아 넣었다.

바들바들 떨리는 허벅지 안쪽을 문지르다 그의 것을 쥐고 흔들었다. 에어컨 바람 소리로 간간이 서로의 숨소리가 섞여 들었다. 성기가 빠져나올 때마다 벌건 속살을 보이는 안을 짓이기며 뿌리 끝까지 들어가도록 허리로 그의 몸을 짓눌렀다. 안쪽이 경련하듯 성기를 조여 댔다.

“아……!”

판판한 배에 흰 정액이 후드득 떨어졌다. 눈가를 찌푸리고 잔뜩 조이는 그의 안을 느릿하게 쑤시다가 허리를 뒤로 물렸다. 성기가 툭, 빠져나옴과 동시에 정액을 토해 냈다. 잔뜩 굳은 허벅지를 더듬다가 눈을 제대로 떴다. 그의 배, 가슴, 뺨까지 튄 것을 보다가 손을 뻗었다.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대자 그가 눈을 반쯤 감은 채로 손바닥에 뺨을 비볐다. 묻은 것을 닦아 주고 입술에 짧게 입을 맞추자 눈을 떴다.

“하……. 후진 쌤.”

“응.”

불러 놓고 말이 없다. 올라간 입꼬리를 내 손바닥에 묻더니 계속해서 웃음을 터뜨린다. 손바닥이 간지러워서 그의 볼을 쿡 찔렀다.

“왜.”

“그냥요. 좋아서요.”

그는 알까. 그가 저런 말을 할 때마다 가슴이 꽉 조여든다. 아픈 건 아니고, 그냥 눈을 감아 버리고만 싶은 기분이다. 그렇다고 죽고 싶다는 건 아니다.

고개를 숙여 그의 이마에, 눈에, 코에, 입술에 천천히 입을 맞췄다. 입술이 닿는 순간 눈을 감았던 그가 입술이 떨어지자 이번엔 제 입술을 가져다 댄다. 내 이마에, 눈에, 코에, 입술에 그의 입술이 차례대로 닿았다. 눈을 뜨자 웃고 있는 그가 보였다.

그의 몸을 일으켜 내 다리 위에 앉혔다. 발긋한 선단에 맺힌 것을 엄지로 훑어 주자 그가 어깨를 움찔거렸다. 손을 위로 올려 색이 더 붉어진 유두를 문질렀다. 그의 입에서 옅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귀 끝의 색을 눈에 담고선 웃는 대신 혀를 내어 그의 가슴을 핥았다.

“내가 너무 급해서, 만져 주지도 못했네.”

아무래도 한 번으로는 부족한 듯싶었다. 유두를 입안에 넣고 굴리며 그의 엉덩이를 톡톡 두드렸다. 그러자 그가 엉덩이를 들어 올렸다. 젤이 묻어 반드르르한 엉덩이 사이를 문지르다 입구를 뚫고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눅진하게 풀린 곳이 우므러지면서 예민하게 반응했다. 손가락을 빼고 그의 엉덩이를 부드럽게 문질렀다.

“괜찮겠어요?”

“……선생님은 모르시죠.”

“뭘.”

정 선생이 내 어깨에 이마를 묻고선 다리를 벌렸다. 내 것을 품고 천천히 내려앉는 걸 허리를 문질러 주며 차분히 기다렸다. 뜨끈하게 달아오른 축축한 내벽이 성기를 부드럽게 감싸는 느낌에 탄성이 흘러나왔다.

“후진 쌤 얼굴 보면 다 괜찮아져요.”

웅얼거리는 소리에 웃자 그가 진짜라면서 내 어깨를 가볍게 물었다. 글쎄. 얼굴만 봐도 괜찮아지는 건 여기 있는 누구라서 말이지.

<가을>

“이제 슬슬 낮에도 안 더워. 살 것 같더라. 이번 여름 진짜 지독했다.”

상호가 진저리를 치며 맥주를 삼켰다. 선선하니 야외에서 맥주를 마시기 좋은 날씨였다. 가을이 되니 벌레도 자취를 감춰 불편할 일도 없었다. 다리를 테이블 아래로 뻗으며 사이다가 든 잔에 입을 댔다.

“거 대리 불러서 가지. 맛나냐?”

“달아.”

“단것도 안 좋아하는 놈이. 너도 참 잘한다. 하긴 잘해야지. 그 지랄을 떨어 놓고 다시 좋아 죽으니 말이야.”

상호가 구시렁거렸다. 내 어리석음으로 정 선생뿐만 아니라 상호 녀석도 걱정을 하게 한 전적이 있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 말도 안 하니 녀석이 더 신이 나서 1년이 지나도록 주절대는 게 흠이라면 흠이지만 말이다.

“그래서 언제 소개해 줄 건데? 만난 지 1년도 넘었잖아.”

“안 해.”

“야, 튕기지 말고.”

“진심인데.”

장난 그만하라는 듯 핀잔을 주던 녀석의 낯이 일순 서운한 감정으로 물들었다. 잔을 내려놓으며 눈썹 끝을 문질렀다.

“안 좋게 끝난 적이 한두 번도 아니고, 신중해질 때 됐지. 한 10년 지나면…….”

“야, 인마. 네가 그렇게 말하면 진짜 10년 뒤에나 소개해 줄 것 같다고.”

농담이라도 그런 소리 하지 말라는 말이 돌아왔지만, 농담은 아니었다. 이제 서른 중반을 향해 달려가고 있고, 연애 여부를 일일이 말하거나 정 선생을 꼭 소개해 줘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언젠가는 말할 테지만, 정 선생이 내 사람이고 내가 정 선생 사람이라는 걸 친구들이 모두 인정할 만큼의 시간을 기다릴 것이다. 인정하고 이해한 뒤라도, 직접 만났을 때 작은 눈짓 하나로도 그를 상처 입힐 수 있으니 섣부르게 행동할 생각은 전혀 없다.

“그래도 한 10년은 갈 생각인가 보다? 결혼은 안 하냐? 슬슬 결혼 생각 할 때 됐는데.”

“꼭 결혼을 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

“이야, 너 발전했다? 이걸 퇴보했다고 해야 하나. 넌 사랑하면 꼭 결혼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꼬꼬마였잖아.”

상호가 혀를 내둘렀다. 나를 놀리는 건지 아닌 건지 모를 말에 그저 웃음만 흘렸다.

분명 예전에는 그렇게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화목하지 않은 가정에서 사랑받지 못하고 자란 탓인지 번듯한 가정을 만들겠다는 로망이 있었고, 그 로망은 하나의 간절한 소망이기도 했다. 가족이 있긴 하지만 내 가족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기에 내 가족을 가지고 싶었고,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영원을 생각했으니 결혼은 당연히 도달해야 할 길이었다.

그러나 정 선생과는 결혼도 할 수 없고 아이도 낳을 수 없다. 제도나 핏줄이 아닌 오직 감정의 끈으로만 맺어져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불안하다거나 하지는 않다. 영원의 약속이, 결혼의 약속이 얼마나 허망한지는 이미 겪어 알고 있다. 정 선생은 나에게 영원을 약속하지 않았고, 나는 이제 사랑하는 그에게 영원을 바라지 않는다. 그의 말대로 현재를 사랑하며 살아갈 뿐이다.

“네 얘길 좀 해 봐.”

“인마, 너 만나면 하는 얘기가 늘 내 얘긴데.”

“민형이는.”

“하루가 다르게 쑥쑥 크지. 얼마나 예쁜지……. 너는 야, 이렇게 예쁜 조카를 뒀으면 선물이라도 사 들고 와라!”

아들 이야기를 하니 바로 신이 나는 걸 보니 웃음이 나왔다. 예쁜 신발을 사 가기로 약속하고 잔을 부딪쳤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밤이 깊어지기 전에 헤어졌다. 입안에 감도는 단맛을 지우기 위해 편의점에 들러 생수를 사 입을 헹궜다. 정 선생에게 문자를 넣어 놓은 뒤 곧바로 출발했다.

주말에는 나나 정 선생이 서로의 집으로 가고, 평일에는 적어도 일주일에 두 번은 만난다. 라디오를 듣거나 가끔 정 선생이 전화를 걸어 라디오를 대신해 주다 보면 딱 알맞게 도착하는 거리라 운전하는 시간이 지루하지 않았다. 나긋한 목소리의 디제이가 조곤조곤 사연을 읊어 주는 걸 듣다 보니 어느새 정 선생 집 앞에 도착했다.

시동을 끄는데 아파트 현관의 불이 켜지면서 정 선생이 나오는 것이 보였다. 아무래도 차 소리를 들은 모양이다. 종종 차 소리를 듣고서 저렇게 가벼운 옷차림으로 뛰어 나오곤 했다. 나와 산책을 하고 싶을 때마다 나온다는 걸 알기에 조수석에 둔 담요를 챙겨 나왔다.

“오셨어요?”

“응. 뭐하고 있었어요?”

“저 그때 주셨던 차 마시고 있었어요.”

“입에 맞나 보네.”

“네. 사실 커피 아니면 귀찮아서 잘 안 마시는데, 그건 달아서 계속 먹게 되더라고요.”

오래된 아파트는 밤이 깊어지면 밖에 돌아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정 선생의 어깨에 담요를 둘러 준 뒤 손을 잡고 걸어 놀이터에 도착했다. 아이들을 위해 만들어진 놀이터는 아이들이 잠이 들 시간이기에 아무도 없었다. 어른들을 위한 공간이 아니기에 어른들 또한 볼 수 없었지만, 우리는 그 틈을 타 이 공간을 빌리곤 했다.

빈 그네에 나란히 앉았다. 아파트는 오래되었지만 놀이터는 비교적 신식이었는데, 아마 아이들이 위험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일 테다. 그래서인지 알록달록한 놀이터 안에 있다 보면 종종 머쓱해지곤 했다.

“이제 진짜 가을인가 봐요.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이렇게 춥진 않았던 것 같은데.”

“그러니까 앞으로 따뜻하게 입고 나와요.”

“넵.”

정 선생이 장난스레 대답하며 그네를 앞뒤로 움직였다. 그냥 앉으면 무릎이 잔뜩 굽혀지는지라 나는 다리를 펴고 오른쪽 발을 왼쪽 발목 위에 얹었다. 날이 맑아서 그런지 별이 많이 보였다. 누런 달이 보름달이 되어 가고 있었다.

“우리 다음 주말에, 어? 토요일에 경하 쌤 결혼식이죠?”

“아.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네.”

“까먹을 뻔했어요. 서울에서 하니까 갔다가 놀면 되겠다. 오랜만에 연극 봐요.”

“그래요.”

무슨 연극을 보면 좋을지 기대에 차 있는 낯을 보다 머리를 쓸어내렸다. 그가 웃으면서 내 손바닥에 머리를 기댔다.

“오늘 학교는 어땠어요. 다가가기 어렵다던 그 애는 좀 괜찮아졌나?”

“아, 그 애요. 아무래도 절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아요.”

콧잔등을 찌푸리는 그의 얼굴에는 상처받은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손가락으로 그의 머리칼을 훑어 내렸다.

“왜 정 선생을 안 좋아할까.”

“제가 너무 치대서 그런가 봐요. 그래서 거리를 두려고요. 제 거리가 애한텐 너무 가까웠던 것 같아요.”

“속상했어요?”

“아뇨.”

정 선생이 씩 웃으면서 그네에서 일어났다. 그가 놀이터를 둘러보다가 내 앞으로 왔다. 내 다리를 사이에 두고 다리를 벌려 서고는 담요를 쥐고 어깨를 으쓱였다.

“저는 세상 사람들이 다 저를 싫어한다고 생각해서요.”

“왜 그런 생각을 해요.”

매사에 긍정적인 그가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있단 게 믿기지 않았다. 내가 보기엔 그를 좋아하는 사람이 대다수이고, 오히려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소수일 것 같은데. 손을 내밀자 그가 내 손끝을 잡았다.

“아, 그런 게 아니라요.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이 다 날 좋아하고 좋아해야 하는 게 아니라 싫어하는 게, 음, 일종의 진리?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내 손끝을 잡은 그의 손이 양옆으로 호선을 그리며 춤을 추었다. 팔이 그를 따라 가볍게 흔들렸다. 놀이터 밖에 세워진 가로등의 빛이 정 선생의 웃는 낯을 밝혔다.

“그러면, 절 좋아해 주는 사람이 특별하고 소중해지는 것 같아요. 세상 사람들이 다 날 싫어하는데, 이 사람들은 날 좋아해 주네? 진짜 소중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제가 막 대단해 보여요. 아니, 원래라면 다들 싫어해야 하는데, 이렇게 좋아해 주잖아.”

정 선생이 가만두었던 손으로 코끝을 쓸며 눈가를 찡긋했다. 입가가 절로 벌어졌다. 참을 새도 없이 웃음이 터져 나왔다. 고개를 숙여 웃음을 털고는 다시 정 선생을 보았다. 누런 달빛이 그의 어깨 위로 내려앉은 것만 같았다. 그가 이 어둠을 밝히는 다른 빛들을 모두 흡수한 느낌. 그는 언제나 이렇게 반짝반짝 빛난다.

“좋은 생각이네. 나도 그렇게 생각할까요?”

“음, 꼭 제 생각을 따르실 필욘 없지만……. 그러면 좋죠. 제가 더 좋아지실 거 아니에요?”

그가 내 손을 놓고 내가 앉아 있는 그네 줄을 잡았다. 그의 몸이 내 쪽으로 약간 기울었다. 가까워지는 그의 뺨을 쓸어내렸다. 뺨이 서늘했다. 내 온도가 좋았는지 내 손에 뺨을 비빈다.

“아니, 세상 사람들이 다 날 싫어하는데도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은 날 좋아하는 거잖아? 그중에 최고로 나를 좋아하는 정 선생은 아주 사랑스러운 사람이네.”

내 목소리를 흉내 내는 건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정 선생의 귓가가 발긋하게 물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멋쩍은 웃음을 터뜨렸다.

“아……. 저 지금 좀 창피했어요.”

“왜. 내가 생각하는 그대로 생각하고 있는데.”

무릎을 세우고 그의 허리를 안아 끌어당겼다. 그가 내 무릎 위로 앉아 목덜미에 이마를 묻었다.

“반대로 생각하시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세상 사람들이 다 후진 쌤을 좋아하는데,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들이 이상한 거라고. 아니, 어떻게 이렇게 사랑스러운 쌤을 싫어할 수가 있지?”

얼굴이 안 보이니 더 뻔뻔해지는 모양이다. 그의 귓불을 만지작거리는데 그가 나를 따라 몸을 떨며 작게 웃었다.

“아무튼……. 어느 쪽으로든 그렇게 생각하면 누가 날 싫어하는 게 무섭지 않더라고요.”

“누가 정 선생을 싫어했어요?”

“아뇨. 그런 건 아닌데, 제 정체성을 알고 나서부터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누가 날 싫어할지도 모른다에 대한 대비. 전 그렇게 했거든요.”

“우리 정 선생은 의젓했네.”

내게 안긴 그의 등을 토닥였다. 언제나 밝고 해맑아 보이지만, 가끔 이렇게 그가 짊어져야 했던 무게가 느껴질 때가 있다. 그리고 나는 온전한 그의 무게를 느끼고 품는 것이 좋다. 그는 무게를 가지고 있지만 절대 아래로 가라앉지는 않는다. 그의 무게는 그의 한가운데로 들어가 그의 중심이 되었다.

나는 그를 닮고 싶다고 생각한다. 내 무게가 나를 가라앉히고 내가 손을 잡은 그까지 가라앉히지 않고, 쓰러지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중심이 되기를 바란다.

“들어갈래요?”

“넵. 더 추워지네요.”

다시 손을 맞잡고 놀이터를 빠져나왔다. 아파트 앞에 선 빛이 약한 가로등을 지나쳤다. 그 흔한 고양이 우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조용한 동네였다. 대부분의 가구의 불이 꺼져 있었다. 우리는 조용히 안으로 들어갔다.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정겹게 울렸다.

* * *

동료 선생의 결혼식에는 언제나 아는 얼굴이 많았다. 여기저기 아는 얼굴에 인사를 하고선 식이 시작될 시간이 다 되어 자리에 앉았다.

“아는 분들 오랜만에 보니까 되게 반갑네요.”

“아, 그렇겠네. 난 어제도 보던 얼굴들이라.”

“놀러 가고 싶어요. 쉴 때 놀러 갈 걸 그랬어요.”

“그러게. 그러고 보니까 어제 세민이가 묻더라고요. 정 선생 잘 지내냐고.”

“와, 세민이는 우리 반도 아니었는데 그렇게 절 챙겨요.”

뿌듯해하는 그의 뺨을 만지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대신 허벅지 위에 얹힌 그의 손을 스치듯 만졌다가 뗐다. 그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웃었다.

이내 식이 시작되었다. 요즘 결혼식은 주례가 없고 친구들이 축사를 대신해 주는 추세인지, 이번 식도 주례 없이 각 측의 부모와 친구들이 축사를 읊었다. 길게 늘어진 드레스가 반짝거렸다. 이 선생의 뺨에 어린 복숭앗빛 홍조가 그녀가 들고 있는 부케의 꽃을 닮았다.

언젠가 이런 결혼식을 꿈꿨던 날이 있었다. 내게는 가족이 없기에 화려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일생의 한 번뿐인 번듯한 결혼식. 지금은 그날을 준비했던 일이 마치 먼 과거처럼 느껴졌다. 씁쓸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내 곁에 정 선생이 있어 주기에 그런지 별다른 감상은 느껴지지 않는다.

사회자가 박수를 부탁한다고 할 때마다 열심히 박수를 보내고 있는 정 선생을 흘깃 보았다. 그는 이런 결혼식을 꿈꿔 본 적이 있을까. 성 지향성을 깨닫고 포기했을까, 아니면 그래도 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요즘에는 결혼식을 아예 안 하거나 아주 작게 하는 사람들도 있으니, 정 선생도 그렇게 생각하는 쪽일까. 그런 생각으로 시간을 흘려보내다 보니 어느새 식이 끝나 있었다.

사진을 찍고 이 선생에게 축하를 전한 뒤 식당으로 왔다. 팔뚝에 노란 스티커가 붙었는데, 정 선생이 내 팔을 보고 귀엽다며 히죽 웃었다. 누가 귀여운지는 모르는 모양이다.

접시에 음식을 담고 돌아서자 부장 선생이 우리 둘을 불렀다. 자리에 앉자마자 뒤늦게 도착해 이제야 정 선생을 본 선생들이 반갑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정 쌤 얼굴이 더 훤해지셨는데요?”

“아, 정말요? 좋은 공기를 먹고 있어서 그런가 봐요. 임 쌤이야말로…….”

정 선생이 임 선생을 향해 엄지를 치켜들었다. 나는 가끔 정 선생이 넉살이 좋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하곤 한다.

정말이지 이상한 일이다. 정 선생이 양성애자가 아니고 동성애자임을 알고 있음에도, 간혹 여성을 상대로 이런 마음이 들었다. 정 선생은 내가 나잇값을 못 하고 질투를 못 이겨 모난 말을 해도 지금 질투를 해 주셨다며 좋아하곤 하지만, 나는 이런 나를 볼 때마다 당혹스러움에 몸서리를 친다. 어른스러워지자고 늘 생각하는데도 영 먼 일인 듯싶었다.

이런 생각을 하던 와중에 정 선생과 눈이 마주쳤다. 그가 나를 향해 장난스레 씩 웃는다. 작년에 같은 학교에서 아무도 모르게, 아무도 알아서는 안 되는 비밀 연애를 했던 때가 떠올랐다. 그 간질간질함과 설렘이 새록새록 솟아오르는 걸 느끼며 마주 웃어 보였다.

* * *

연극을 보고, 늦은 저녁을 먹고 나니 하늘이 새까매져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해가 빨리 져서 밤이 길어지고 있다. 야외에서 데이트하기에는 낮보다는 밤이 좋은 편이라 나쁘진 않았다.

테이블마다 예쁜 조명이 놓여 있는 카페 루프톱에 앉아 야경을 내려다보며 커피를 홀짝였다. 정 선생은 녹차 프라페가 없다며 아쉬운 대로 녹차 라테를 주문했다. 역시나 휘핑크림은 잔뜩 올렸다.

“마지막에 주인공은 죽은 게 맞겠죠?”

“그런 것 같던데. 그래도 아버지는 산 것 같았어요.”

“그래요? 저는 아버지까지 죽었다고 생각했어요.”

미간을 모으고 왜 아버지가 죽었다고 생각했는지 심각하게 말하는 정 선생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었다. 듣다 보니 일리가 있는 말이라 고개를 끄덕이다가, 난 왜 아버지가 산 것 같다고 생각했는지 말해 주자 정 선생이 끄덕끄덕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쌤 말 들으니까 진짜 그런 것도 같네요. 암튼 진짜 좋았어요. 오랜만에 집중 엄청 한 것 같아요.”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그가 크림을 떠먹었다. 윗입술에 묻은 크림을 닦아 주고 내 몫의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예식장 꼭대기 건물에 뷔페 있던 거, 그게 피로연 음식이랑 똑같다고 하던데. 다음에 또 갈래요? 오늘 좋아했잖아.”

“정말요? 또 갈래요! 전 결혼식 뷔페 그렇게 맛있는 거 처음 먹어 봤어요. 어딜 가든 거기 생각만 날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해도 좋은지 정 선생이 손을 모으고 눈을 빛냈다. 어찌나 초롱초롱한지 눈이 부실 지경이다. 잊지 말고 다음에 꼭 데려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늘 경하 쌤 진짜 예쁘셨죠.”

“응. 좋아 보였어요.”

“제 친구 중에 한 명이 내년에 결혼하거든요. 저한테 사회 맡아 달라고 했는데, 벌써 걱정이에요. 친구들끼리만 있으면 재밌게 할 텐데, 어르신들도 있을 테니까.”

“정 선생이면 잘할 것 같은데. 1년 전부터 걱정해요?”

“그러니까요. 제가 너무 좋은 친구인 것 같아요.”

정 선생이 너스레를 떨며 어깨를 으쓱였다. 정말 그와 있으면 웃음이 멎을 일이 없다.

축복이 가득할 결혼식장에서 사회를 볼 정 선생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마 그 식장은 웃음이 끊이질 않을 것 같다. 신랑 신부가 주인공인데, 그에게로 시선이 끌려가면 어쩌지. 그러나 그는 배려심이 깊은 사람이라 남이 주인공인 자리에서는 철저한 조연이나 단역이 되어 물러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주인공인 곳은…….

“정 선생은…… 하고 싶다고 생각해요?”

“네? 뭐를요?”

“결혼식.”

“아아.”

내가 묻고도 괜스레 낯이 화끈했다. 말하고 보니 꼭 청혼을 에둘러 한 것만 같아서. 내가 아무리 형편없는 남자라도 이런 식으로 얼렁뚱땅 무언가를 할 정도는 아니다.

그러나 정 선생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뺨을 긁적였다. 그의 손가락이 라테가 든 잔을 훑었다.

“글쎄요. 저는 결혼식은 별로……. 그런, 의식이라고 해야 하나. 귀찮아서요.”

“귀찮아요? 의외네.”

어깨를 으쓱이며 웃던 그의 눈이 순간 동그래졌다. 그러더니 주위를 둘러보며 눈을 굴리다가, 나를 보고선 씩 웃는다.

“물론 전 상대한테 맞추는 타입이에요.”

마지막 말은 소곤거리면서 코를 찡긋해 보이는 게 사랑스러워 짐짓 뜻을 이해하지 못한 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물끄러미 시선이 따라왔다. 손끝으로 입술 끝을 가리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다시 정 선생을 보았다.

“나도 아쉽진 않지. 정 선생이 나한테 맞춰 주면.”

“흐음.”

정 선생이 웃음을 꽉 눌러 내리며 눈을 굴렸다. 그가 잔을 훑고, 쥐고, 양손으로 탁탁 내리쳤다가 슬금슬금 테이블 너머로 손을 뻗어 내 손끝을 톡, 건드렸다.

나란히 턱시도를 입고, 아무도 없는 곳 혹은 우리 사이를 아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축복을 받는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생각만 해도 황홀했다. 꼭 결혼식이 아니더라도, 나란히 앉아 좋은 경치를 보다가 서로 반지를 나눠도 좋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꼭 영원을 약속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서로의 현재를 함께하겠다는 하나의 의식이자 약속.

사람들이 조곤조곤 웃고 떠드는 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져 가는 느낌이었다. 정 선생이 내 손끝을 톡톡 건드려 대며 입술에 빨대를 묻고는 푸스스, 웃음을 터뜨렸다. 언덕을 따라 쌓인 건물들이 층층이 빛을 냈다. 꼭 수백만 마리의 반딧불이가 모여 이 밤을 밝히는 것만 같았다. 턱을 괴고 손을 더 뻗어 그의 손가락을 잡아챘다. 꼭 쥐자 그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 * *

“김 선생님, 오늘 약속 안 잊으셨죠?”

“아, 네.”

시계를 보고 있는데 하 선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실은 잊고 있었지만 안 잊은 체하고선 고개를 끄덕였다.

1학년 담임 중 나를 제외한 유일한 남선생인데, 올해 첫 부임인지라 내게 이것저것 의지를 많이 하고 있는 듯했다. 정 선생이 처음 학교에 왔을 때가 생각이 나기도 하고, 초임인 선생과 같이 있으니 요즘은 자극도 되는 것 같아 종종 어울리고 있다.

핸드폰을 들고 휴게실로 가서 정 선생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도 마침 시간이 되었는지 전화가 왔다.

“네.”

-왜 문자 하셨어요?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에 웃음이 흘러나왔다. 손으로 입가를 쓸면서 창밖으로 보이는 운동장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저녁 약속이 있어서. 오늘 못 갈 것 같아요.”

-술 약속이신가 보네요?

“응.”

-친구분이랑 드세요?

“아니, 동료 선생이랑.”

쉬는 시간에 잠깐 통화를 하는 것뿐인데도 긴 휴식을 취하는 것처럼 피로가 풀렸다. 휴게실 한편에 마련된 소파에 앉아 몸을 묻었다.

-아하. ……여선생님이랑요?

“아니. 그때 말했던 하 선생이랑.”

-아하. 잘 다녀오세요!

눈썹 끝이 절로 힐긋 올라갔다. 묘하게 달라진 뉘앙스에 귀에 댄 핸드폰을 검지로 톡톡 두드렸다.

“오늘 집에 있을 거예요?”

-네. 약속 없어요.

“알았어요. 봐서 되면 가고.”

-아니에요, 오지 마시고 쉬세요.

“응. 연락할게요.”

전화를 끊고 기지개를 켠 뒤 정수기에서 물을 따라 마시고 휴게실을 나왔다. 종이 칠 때가 다 되어서 그런지 복도는 그럭저럭 조용했다. 오늘은 수업이 오후에 몰려 있기에 오전에는 수업 준비를 하면서 여유롭게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술기운이 딱 괜찮을 정도로 올랐다. 하 선생과 헤어지고 집에 가자니 눈앞에 자꾸만 그의 얼굴이 아른거려서 결국 대리 기사를 불렀다. 차에 올라타 정 선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오래가기에 약속이 생겼나 싶었다. 그럼 당장 차를 돌려야 할 것이다. 전화를 끊을까 고민할 무렵 다행히도 신호음이 끊어졌다.

-네, 쌤. 저 씻고 있었어요.

“다 씻었어요?”

-넵. 집에 도착하셨어요?

“아니. 정 선생 보러 갈까 하는데.”

-네? 쉬세요. 술도 드셨는데, 대리 불러야 하잖아요.

“정 선생 보고 싶어서.”

너머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웃음에 몸이 풀어졌다. 차가운 차창에 손가락을 댔다. 손가락이 닿은 위치로 저 멀리 가로등이 스쳐 지나갔다.

“돼요, 안 돼요.”

-안 된다고 하면요?

“음, 차 돌려야지.”

-끈기가 없으신데?

“그럼 어떻게 할까?”

가로등 불빛이 이어지는 자리를 손가락으로 그었다. 차창에 비치는 내 얼굴이 새삼스러웠다. 언제부터 이렇게 웃음을 달고 살았을까. 별것도 아닌 사실이 우습고 쑥스러웠다.

-더 빨리 오세요. 저 외로워요.

정 선생이 장난스레 우는 소리를 냈다. 내가 운전하는 게 아니라 속도를 높일 순 없겠지만 액셀을 밟듯 마음이 급해졌다. 대신 전화를 끊지 않고 계속 통화를 하기로 했다. 그가 오늘 있었던 일을 조곤조곤 이야기해 주었다. 그가 겪은 일은 그저 평범한 일상인데도 듣고 있으면 꼭 옛날이야기나 동화 속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제 내 이야기를 해 달라는 말에 오늘 있었던 일들을 말해 주었다. ‘헉’ 하고 숨을 들이켜는 소리나, ‘정말요?’라고 되묻는 웃음기 서린 목소리나, 숨죽여 웃는 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그랑 있으면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일일이 말하게 된다.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어떤 이야기를 해 줄지 기대가 되었다.

“나 다 와 가요.”

-벌써요? 진짜 빨리 오셨네.

“가면서 전화 걸었거든.”

-아아. 끝까지 안전 운전 해 달라고 하세요.

웃으면서 전화를 끊고 난 지 얼마 안 되어 정 선생의 집이 눈앞에 보였다. 주차를 한 뒤 기사에게 돈을 지불하고 떠나보냈다. 글러브 박스에서 구강 청결제를 꺼내 입안을 헹구고 밖으로 나왔다.

아무래도 가로등의 빛이 너무 약하다. 민원을 넣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안으로 들어섰다. 계단을 올라 정 선생 집 앞에 도착했다. 문을 두드리려는 순간 문이 열렸다. 엘리베이터도 없고 아파트가 워낙 작다 보니, 차가 오고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다 들리는 덕에 이렇게 재빠르게 날 맞이하곤 했다.

“어서 오세요.”

정 선생이 내 허리를 끌어당기고 문을 닫았다. 그가 내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나를 꼭 안았다가 품에서 벗어났다.

“많이 안 드셨나 보네요?”

“가볍게 마셨어요.”

“잘하셨어요. 뭐 드릴까요?”

“아니, 괜찮아요.”

재킷을 벗고 소파에 앉았다. 정 선생이 내 옆에 앉고선 웃음을 흘렸다.

“왜 웃어요.”

“그냥요. 오늘은 못 볼 줄 알았으니까.”

웃는 정 선생을 보기 위해 소파 등받이에 팔을 대어 턱을 괴고선 몸을 그의 쪽으로 돌렸다. 그러자 그도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내일 일찍 가려면 힘드시겠어요.”

“괜찮아요. 오늘 일찍 자지, 뭐.”

“네. 우리 딱 한 시간만 얘기하다 자요.”

정 선생이 말을 하고선 웃음을 흘렸다. 내가 말이 많은 편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둘이 나란히 앉거나 누워 이야기를 하다 보면 밤을 새우기가 일쑤였다. 막 다시 연애를 시작했을 때는 밤을 새우는 일이 많다 보니 서로에게 금지령까지 내렸던 기억이 있다.

“내일은 뭐해요.”

“저 내일은 강아지 보러 가기로 했어요!”

“강아지?”

그가 소파 팔걸이에 놓여 있는 핸드폰을 들더니 내 쪽으로 향해 액정을 내보였다. 메신저 창에 흰색 강아지가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는 사진이 있었다. 어디서 본 듯해서 고개를 기울이자 이내 대답이 돌아왔다.

“왜, 작년에요. 학교에 들어왔던 강아지 기억 안 나세요? 저 아는 형이 데려간.”

“아아. 많이 컸네. 아직도 작긴 하지만.”

“뽀삐예요. 보러 가기로 했어요. 그래서 내일은 못 볼 것 같아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스크롤을 내려 주르륵 나열된 강아지의 사진을 보여 주었다. 어찌나 많이 보냈는지 끝이 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예쁘죠.”

“응, 예쁘네.”

“제가…… 프리랜서를 해야 했어요. 그래야 키울 수 있었을 텐데.”

진심으로 아쉬워하는 정 선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나도 정 선생도 반려동물을 키울 만큼 시간이 나지 않는 곳에 몸을 담고 있으니 혹 같이 사는 날이 오더라도 키우기는 무리일 것이다.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 강아지 한 마리를 가족으로 두고…….

무의식적으로 그런 생각을 하다가, 너무 자연스럽게 먼 미래를 생각하고 있는 내가 낯설게 느껴져서 손가락을 움츠렸다. 내 마음을 알아챈 것은 아니겠지만, 정 선생이 손을 뻗어 내 손끝을 쥐었다.

“내일 뽀삐 먹을 거 많이 사 가기로 했어요. 근처에 좋은 산책로도 있대요. 제가 산책시키기로 했어요.”

그 형이라는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려 해 보았으나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대신 눈앞으로 정 선생과 얼굴이 보이지 않는 남자가 같이 산책을 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나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친한가 봐요.”

“그 형이랑요?”

“응.”

“네. 제가 스물하나 때 학교에서 만난 형이니까요. 대학 동……. 어…….”

“대학 동, 어……?”

그의 말을 장난스레 따라 하자 그가 멋쩍게 웃었다. 얼른 말하라는 뜻에서 내 손을 쥔 그의 손을 감쌌다.

“동아리에서 만났던 형이에요.”

“아, 동아리.”

“네.”

“근데 그걸 왜 망설이면서 말해요.”

정 선생은 대학 때 성 소수자 동아리에 든 적이 있다고 했다. 무언가 큰일을 한 건 아니었고, 그냥 교류 목적의 동아리였다고 한다. 그때 만났던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모양이다. 그가 말해 줘서 알고 있던 이야기라 대수롭지 않았다. 그 형이라는 사람이 그때 만난 사람이었던 줄은 몰랐지만. 손을 뻗어 정 선생의 얼굴에 가져다 대자 그의 손등이 그의 뺨에 닿았다. 손을 살살 흔들며 그의 손등이 뺨을 문지르게 했다.

“그냥 갑자기……. 불편하실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내가 왜 불편해요. 가만 보면 정 선생은 날 대할 때 이성애자를 대하는 것처럼 할 때가 있는 것 같아. 내가 사귀는 건 정 선생인데 말이에요.”

손을 떼고 그의 귓바퀴를 어루만졌다. 그가 간지러운 듯 고개를 잠깐 갸웃하다가 내 손목을 양손으로 쥐고 살살 문질렀다.

“만났어요?”

“아니요! 진짜 아무 사이 아니에요.”

다행이네. 만났던 사이라면 모난 생각을 할 뻔했다. 입 밖으로 내진 않았겠지만, 요즘 들어 마음이 너무 풀어진다. 그러니까 내게 마치 질투할 자격이 완전히 주어진 것처럼 느껴진다. 그가 나를 그렇게 만든다.

“아무래도……. 후진 쌤은 저 안 만나셨음 남자는 안 만났을 것 같아서 그런가 봐요.”

“물론 내가 정 선생 아닌 남자를 만날 일은 없는데…….”

엄지를 내어 그의 입술을 톡톡 두드렸다. 그러자 그가 씩 웃었다.

“여자도 만날 일 없어요.”

정 선생이 코를 찡긋하며 나를 보다가 내 품으로 달려들었다. 갑자기 얹힌 무게에 몸이 뒤로 기울었다. 그의 허리에 팔을 둘러 중심을 잡았다. 그가 내 어깨에 턱을 얹고선 내 등을 꽉 안았다. 보일러를 틀어서 그런지 방 안이 훈훈했지만 덥지는 않았다. 오히려 품에 온기가 안기니 살갗뿐만 아니라 그 안까지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말해 주셔서 감사해요. 저는 가끔…….”

“응.”

“제가 선생님한테 해 드릴 수 없는 게 생각나요.”

고개를 틀어 보드라운 머리카락에 입을 맞췄다. 내가 그에게 확신을 주지 못하는가 싶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정말 맹세코, 나는 그를 얻음으로 모든 걸 얻었다. 내가 할 수 없는 것들은 그와 만나 잃은 게 아니다. 애초에 가져 본 적도 없는 것들이니까. 그러니 아쉬움을 느끼지도 않는다. 아쉽다면 그와 못 하는 것들. 이를테면 그와의 아이라든가, 그와 법적으로 이어지는 일 같은 것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너무도 많다.

“아무것도 해 주지 마요. 정 선생이 나한테 해 줘야 하는 건 딱 하나야.”

나를 버리지 않는 것. 나를 두고 떠나지 않는 것.

겨우 1년이 지났을 뿐이다. 겨우 1년이 지났을 뿐인데, 그가 나를 버릴 것이라는 생각보다는 어쩌면 오랜 미래를 함께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싹을 틔웠다. 애초에 그가 나를 떠나고, 혼자 남겨질 것에 대한 대비는 할 수도 없다. 정 선생과 있으면 오직 그와의 시간에 집중하게 되니까.

“으으.”

그가 나를 껴안은 채로 몸을 양옆으로 흔들었다. 나는 마치 아이를 안은 것처럼 그를 따라 몸을 기울여 주었다. 정 선생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요.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결국엔 싹 다 날아가요. 전 후진 쌤 아니었으면 이렇게 절 좋아해 줄 사람은 평생 못 만났을 거예요.”

“나랑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네.”

귓가로 웃음이 스쳐 갔다. 그 웃음이 보고 싶어서 품에서 그를 떼어 냈다. 호선을 그리는 눈에 입을 맞췄다. 머쓱한지 찡긋거리는 콧등에 입을 맞추고, 작은 웃음을 흘리는 입술에 입을 맞췄다.

“선생님.”

“응.”

“오늘 일찍 자지 말까요?”

우리에게 일찍 자야겠다는 말은 어느새 지키지 못할 말이 되고 말았다. 그와 함께할 밤은 수많을 테고 또 길겠지만, 하루하루가 다른 밤이니 그 밤을 아깝게 흘려보낼 수는 없다.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환하게 웃으며 내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입술이 또다시 맞닿았다.

<겨울>

조모의 기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할머니가 눈을 감으시던 순간이 생각났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순간을 목격한 것은 아니었다.

아침 일찍 집에서 나가 학교에 갔다가, 일이 끝나면 지연이와 만나느라 저녁 늦게 들어오기를 반복했던 하루였으니 할머니를 집에서 보지 못하는 날은 많았다. 그러나 정말 직감이란 것이 있는지 여느 날과 같던 날, 갑자기 할머니의 방문을 열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사는 집에는 생활감이라는 게 있다. 이를 테면 개수대에 맺힌 물방울이라든지, 물기가 남은 화장실 바닥이라든지, 물을 마시고 식탁 위에 올려놓은 물컵 같은 것들. 단 하루였을 뿐이다. 그저 할머니가 외출을 하셨을 수도 있고, 일찍 주무셔서 흔적이 남지 않았던 것일 수도 있었으나 문을 열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거침없이 문을 열었다.

죽음의 냄새는 지극히 차갑다. 겨울의 시린 공기와는 전혀 다른 차가움이다.

우울은 예고도 없이 갑자기 머리 위로 내려앉곤 했다. 우울은 상황을 가리고 찾아오지 않는다. 행복하다고 해서 찾아오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현재의 내 삶이 기쁨으로 충만하다 해도 우울이 워낙 뿌리 깊었던지라 갑자기 찾아오는 부스러기들까지는 피할 수 없었다.

주말이라 일어나자마자 정 선생에게로 가기로 했으나, 가지 않는 것이 좋지 않을까 잠시 고민했다. 내 우울이 그의 옷자락이라도 적시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의 위로를 받고 싶었다. 구체적인 위로를 바란다기보다는, 그는 옆에 있기만 해도 위로가 되는 사람이라 지금의 우울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치워 줄 것 같았다.

때마침 손안에 든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발신인은 당연하게도 정 선생이었다. 그는 이렇게 꼭 내 마음을 아는 사람처럼 굴 때가 있다.

“일어났어요?”

-선생님…….

졸음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10시 반이 넘어가는데도 아직 침대 위인 모양이다. 두꺼운 이불을 뒤집어쓰고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을 정 선생이 눈앞으로 떠오르자 웃음이 나왔다.

“자요?”

-오시, 네, 아니요…….

“응?”

-전화하려고……. 오실 거죠? 오고 계세요?

“그럼. 이제 가려고요.”

수화기 너머로 작은 웃음소리가 흘러들어 왔다. 잠에 취했는데도 기뻐 보이는 웃음에 결국 그에게로 가기로 마음을 굳혔다.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면서 그를 재우고 전화를 끊었다.

정 선생이 없었으면 어떤 인생을 살았을까. 그가 없는 내 삶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눈앞이 아찔해졌다. 전생이란 게 있었다면, 나는 처절하게 죽이고 싶은 역적이 아닐까 생각했던 적이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영웅이 아니었을까 싶다. 나라를 구하진 못했더라도, 그에 준하는 일을 한.

그에게로 가는 길, 마음이 조금 차분히 가라앉았다. 우울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그의 목소리를 듣고 나니 눌어붙었던 것이 그라는 물이 쏟아지면서 떠오른 것만 같았다.

자고 있다가 겨우 깨서 전화를 걸었을 생각을 하니 슬금슬금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는 자는 얼굴이 고운 것과는 반대로 잠버릇은 좀 고약한 편이다. 잠이 막 들었을 때나, 한참 자고 있을 때는 괜찮은데 일어나기 직전에는 침대 끝에서 끝까지 굴러다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품에 꼭 안고 잘 때는 괜찮은데, 자다가 자세가 달라져 품에서 벗어나면 아예 침대 끝에 매달려 있을 때도 있다.

아, 보고 싶다. 생각만 해도 보고 싶으니 곤란할 때가 많다. 예를 들면 다음 날 출근을 위해 잠자리에 누웠는데, 그가 생각나서 보고 싶을 때. 통화로 충족되지 않으면 그대로 새벽을 뚫고 그에게로 달려가고 싶을 때가 많다. 그도 그의 생활이 있는 데다 걱정을 할 것 같아 꾹 참아 내지만.

정 선생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그의 집 앞이었다. 차를 세우고 일부러 느릿하게 내려 현관으로 걸어갔다. 창문을 열고 내다보거나, 문을 열고 나와 계단을 내려오는 기색이 없는 걸 보니 아직도 잠에 푹 빠져 있는 모양이다. 평일에 이런저런 일로 잠을 많이 자지 못하다 보니 그는 주말이면 늦잠으로 피로를 푼다.

일부러 노크를 하지 않고 도어록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생일 네 자리는 너무 허술한 거 아니냐는 내 조언에 따라 내 생일과 그의 생일을 합해 여덟 자리가 되었다.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가자 역시나 침대 위에 나부라져 있는 그가 보였다. 오늘은 이불이 침대 끝에 매달려 있고, 그는 침대 한가운데서 웅크려 누워 있다. 침대 위로 올라가 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감긴 눈이 스르륵 열렸다.

“어?”

그가 눈을 반짝 뜨고 몸을 벌떡 일으켰다. 하마터면 얼굴이 부딪힐 뻔했다. 몸을 뒤로 물리고 웃자 그도 나를 따라 부스스한 낯으로 웃었다.

“벌써 오셨어요? 몇 시예요?”

“11시 좀 넘었어요. 잘 잤어요?”

“네. 아침 먹고 오셨어요?”

“아니.”

“그럼 제가 해 드릴게요!”

괜찮다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가 벌떡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그 뒷모습을 눈으로 좇다가 입술 끝을 매만지고선 소파에 앉았다. 코트를 벗어 팔걸이 위에 두고 물소리를 들으며 그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뽀얀 얼굴을 하고 나왔다.

“뭐 드실래요?”

“정 선생 잘하는 거. 하기 편한 거.”

내 대답에 그가 샐쭉 웃고선 부엌으로 들어섰다. 작은 부엌은 그만 들어갔는데도 꽉 차는 느낌이었다. 나는 식탁 앞에 앉아 요리를 하는 그를 지켜보았다.

식탁 위에 올라온 건 김치찌개와 계란말이였다. 김이 하얗게 올라오는 따끈한 음식들을 보자 마음이 포슬포슬한 달걀 같아졌다.

“푹 잤어요?”

“네, 꿈도 안 꾸고 잤어요. 개운하다.”

“잘했네.”

아침 겸 점심을 먹고 나서 정 선생이 원하는 대로 소파 밑에 앉았다. 그가 분주하게 움직이더니 부엌에서 귤이 든 바구니를 가져와 내려놓고, 침실에서 두꺼운 담요를 꺼내 왔다. 그러고선 내 다리 사이에 앉고 내 품에 등을 기댔다.

“이게 하고 싶었어요?”

“네. 귤 가져오면서 딱 이런 모습을 상상했거든요.”

두꺼운 담요와 내게 감싸인 그가 귤을 까고선 한 조각을 내 입에 넣어 주었다. 새콤달콤한 과즙이 입안에서 터졌다. 그가 편하게 내 품에서 늘어졌다.

“후진 쌤.”

“응.”

“무슨 일 있으셨어요?”

가만히 영화를 소개해 주는 프로그램을 보던 그가 고개를 힐긋 돌렸다. 그러면서 귤을 입가에 가져다 대는 것에 입을 벌려 주었다.

“왜. 무슨 일 있어 보여요?”

“조금……. 평소보다는 무거운 얼굴이신데.”

무겁다는 소리에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그저 작은 우울일 뿐인데, 이제 막 떠오르려고 하는 우울일 뿐인데 알아주는 그가 신기하면서도 내가 또 어른스럽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무슨 일이 있진 않아요.”

“아아.”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던 정 선생이 내 손을 꽉 붙잡고 옆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에게 맞춰 주다 보니 내 몸도 기울다가 이내 옆으로 눕게 되었다. 그가 내 품에 몸을 바짝 붙이고선 내 손을 들고 제 허리에 두르게 했다.

“이렇게 가만히 누워서 TV 보다가 뭐 먹고 싶음 먹고, 자고 싶음 자고, 저 만지고 싶음 만지세요.”

마지막 말은 선심 쓰듯이 말하는데, 정작 가장 원하는 것은 그것인 것 같아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가 따라 웃으면서 머리를 내 목덜미에 비볐다.

“우리 김 쌤은 우울할 때 이게 제일 좋을 것 같아서?”

“잘 아네. 지금 그거 같아요. 테라피?”

“앗, 정 선생 풀코스로 모시겠습니다.”

자기가 말하고 자기가 웃는다. 그 웃음이 내 웃음까지 끌어냈다. 품 안에서 흔들리는 몸을 가만히 안고 있다가 그의 머리에 턱을 대고선 가만히 눈을 감았다.

눈을 뜨자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내리뜨자 품 안에 잠든 정 선생이 보였다. 푹 잤다면서 또 잠이 든 것을 보니 왠지 기특하다는 마음이 들었다. 오르내리는 배를 토닥이다가 창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첫눈이었다.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나 창을 열고 발코니로 나갔다. 함박눈은 아니었지만 세상이 하얀 가루로 뒤덮이고 있었다.

“눈 와요?”

졸음이 묻어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자 정 선생이 눈을 비비면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가 발코니로 오더니 창밖을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첫눈이네요?”

“응, 첫눈이네요.”

“그거 기억나세요?”

“뭐가?”

“작년에요. 첫눈 오면 귤 먹자고 하지 않으셨나?”

기억을 돌이켜 보았다. 눈앞에 보이는 건 눈 내리는 스키장이었고, 리조트 안에서 정 선생을 품에 안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네.”

“영화는 프로그램으로 봤고 아침은 제가 했고 설거지는 쌤이 했고, 귤은 같이 먹었네요? 제 선견지명 보세요. 첫눈 올 줄 알고 그랬나 봐요.”

정 선생이 뿌듯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를 내 품으로 옮기고 그의 배에 팔을 둘렀다. 그가 창문을 열더니 바깥으로 손을 뻗었다. 손바닥으로 눈송이가 내려앉았다.

“그걸 다 기억해요?”

“그럼요. 제가 한 약속인데요.”

“약속.”

내 중얼거림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안은 팔에 힘을 주자 그가 웃으면서 손을 뒤로 올려 내 뺨을 쓰다듬었다.

“차갑잖아요.”

“아.”

정 선생이 물기가 남은 손바닥을 보더니 머쓱하게 웃었다. 농담으로 한 말이었기에 그의 턱을 쥐어 돌리곤 입을 맞췄다. 아랫입술을 진득하게 빨다가 티셔츠 안으로 손을 넣어 그의 배를 더듬었다.

입술이 떨어지자 그가 아쉽다는 듯 내 눈을 좇았다. 흐트러진 머리칼을 슥슥 쓰다듬어 정리해 주고선 이마에 입술을 붙였다 뗐다.

“정 선생.”

“네?”

“난 왜 이렇게…….”

당신이 좋지. 뒷말을 기다리며 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나 미안하게도 너무나 당연한 말이라, 고작 이따위 단어로는 지금의 내 마음을 절대 담아낼 수 없어서. 말을 하는 대신 입술을 맞붙였다.

주변을 맴돌던 작은 우울이, 그를 사랑하기 위한 거름이 된 것만 같았다. 부정적인 감정이 긍정적인 무언가를 만들 수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첫눈이 내리는 이 겨울이 온통 그 같았다. 겨울이 더는 허망한 삶을 대신하지 않았다.

<봄>

벚꽃이 만개했다. 재작년까지만 해도 별 감흥이 없던 벚꽃이었지만, 지금의 분홍빛 풍경을 보고 좋아할 누군가를 떠올리니 나까지 기분이 좋아졌다. 핸드폰의 사진첩을 뒤져 보면 벚꽃과 같이 찍은 작년의 그의 사진이 있을 것이다. 한동안 배경 사진으로 해 놓았다가, 겨울 바다 앞에서 찍은, 두꺼운 패딩 점퍼를 입은 그의 사진으로 바꾸면서 밀려났을 것이다. 아무래도 사진들을 인화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나저나 그 두꺼운 패딩 점퍼를, 뭐라고 했더라. 올록볼록한 솜 때문에 근육맨이라고 했던가. 팔을 들어 올리더니 자기가 근육맨이라고, 나를 지켜 주겠다며 귀여운 소리를 늘어놓았던 게 생각이 났다. 정말이지…….

혼자서 실없이 웃다가 시계를 보았다. 정 선생이 나를 기다린 지 한 시간이 다 되어 간다. 오늘은 잔업이 있어 늦게 끝나는 바람에 그가 나를 기다리게 되었다. 집에서 기다리라고 했지만 외식을 하고 싶다며 카페에서 기다리겠다고 했다.

작년에 한 그의 기도가 통했는지, 그의 집 근처에 발령을 받게 되었다. 학교는 차로 20분 걸리지만, 집은 그의 집과 걸어서 10분도 안 걸리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정 선생은 처음에 저 때문에 학교와 멀리 떨어져 집을 잡은 거냐며 걱정했지만, 학생과 학부모들과 떨어지고 싶은 내 생각을 듣고 금방 수긍했다.

차로 30분 걸리던 거리가 걸어서 10분이 되고 나니, 작년엔 도대체 어떻게 정 선생과 떨어져 있었나 싶을 정도로 장거리처럼 느껴졌다. 만약에 다음 학교를 더 멀리 발령받으면 못 참겠지 싶었다.

정 선생이 있다는 카페 건너편에 차를 세웠다. 가로수가 벚나무라, 카페 안에서 보는 풍경의 운치가 좋을 것 같았다. 횡단보도 앞으로 가 신호를 기다렸다. 마침 창가에 앉은 그가 보였다.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책을 가지고 왔는지, 테이블 위에 책이 있었는데 그 앞에는…….

여자가 있었다. 둘이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즐겁게 나누는지, 정 선생이 웃고 있었다. 얼마간 이야기를 하다가 여자가 명함 같은 것을 내밀고 계산대로 갔다. 아무래도 직원이었던 모양이다. 빨간불이 초록불로 바뀐 걸 보고도 선뜻 발을 내디디지 못했다. 정 선생이 명함을 거절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초록불이 깜빡거리기 시작해서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카페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정 선생이 고개를 들고 활짝 웃었다.

그의 앞으로 가 앉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웃으면서 재잘거리는 그를 보자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똬리를 트는 게 느껴졌다.

“여기 프라페 진짜 맛있어요. 먹어 보실래요?”

그가 휘핑크림이 잔뜩 올라 있는 녹차 프라페를 내 쪽으로 내밀었다.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는지 프라페 옆에 빈 잔이 있었다. 한 시간 동안 두 잔을 시킨 모양이다.

평소라면 먹어 보거나, 됐다고 사양을 할 텐데 딱 붙은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원인은 나도 뭔지 알고 있다. 제 연인이 눈앞에서 대시를 받는데 기분 좋을 사람은 없다는 건, 그가 가르쳐 주어서 알고 있고 내가 그렇게 느껴서 알고 있다.

그러나 평소였다면 무난하게 거절했을 그가 왜 명함을 받았는지……. 물론 명함만 받고 연락은 하지 않겠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 이상하다. 정 선생이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별일 아니라는 것도 아는데 마음이 모나지는 걸 느낀다. 그러면서 그 모난 마음을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라면 나를 미워하지 않을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이 들었다. 아니 사실은 근거가 그이기에…….

“우리 정 선생은 참, 인기가 많아요.”

결국엔 내뱉고 나서 후회를 한다. 그의 앞에서 철없는 어린애가 되는 것 같다는 건 이럴 때도 해당된다. 내뱉은 걸 주워 담을 생각도 들지 않는다.

“네?”

정 선생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 하겠다는 눈이 이내 카페 안을 훑다가 테이블 위에 올라간 명함으로 향했다. 후회가 짙어진다. 어른스럽지 못하다는 자각은 분명 있다.

“아, 이거요. 그런 거 아니고, 제가 달라고 했어요. 커피가 너무 맛있어서, 미리 주문하고 테이크아웃하는 일 많을 것 같아서요. 보세요. 카페 명함이에요.”

그가 내 눈앞에 대고 명함을 흔들었다. 그의 말대로 명함에는 카페 직원의 이름이 아니라 카페의 상호와 전화번호가 있었다. 그걸 가만히 보다가 눈을 내리깔고 프라페를 한 모금 넘겼다. 차갑고 쌉싸래한 액체가 정신을 얼얼하게 했다.

머리 위로 웃음소리가 들렸다. 애써 참으려는 듯 바람 빠지는 소리가 함께였다. 정 선생 쪽으로 잔을 밀고 나서 눈을 들었다. 그가 빨대를 입에 물고선 입꼬리를 씰룩였다. 기분이 좋은 듯 꼼지락거리는 손가락이 눈에 들어왔다.

한숨을 삼켰다. 애처럼 구는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은데, 대놓고 좋아하는 그를 보자 기분이 이상해진다. 이 기분은 늘 새삼스럽다. 차라리 익숙해지기라도 하면 나을 텐데, 그럴 기미는 없어 보인다.

“무슨 책 읽고 있었어요.”

“이거요. 그때 쌤이 추천해 주신 책.”

그가 책 표지를 보이며 웃었다. 기분이 들쭉날쭉할 때 보곤 했던 에세이였다.

“오늘 좀 우울했는데, 이거 보니까 나아지는 거 있죠.”

“무슨 일 있었어요?”

“그냥 애들 일 때문에요.”

정 선생이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테이블 위로 엎드렸다. 오른팔을 내 쪽으로 뻗고 그 위에 머리를 대고선 날 보았다. 겨울 방학에 짧게 잘랐다가 다시 기르고 있는 머리칼을 쓸어 주면서 턱을 괴었다.

“많이 힘들어요?”

“음……. 그냥요. 힘든 이유의 대부분이 제가 부족해서니까요. 그게 제일 힘들죠.”

그가 푸스스 웃으면서 손가락으로 내 팔을 톡톡 건드렸다. 창밖으로 바람이 부는지 벚나무가 가지를 흔들었다. 그 풍경에 잠시 시선을 빼앗긴 정 선생이 “예쁘다.” 하고 중얼거렸다.

“내가 보기엔 아주 잘하고 있는데, 정 선생이 느끼기엔 아쉬운가 보네.”

손가락에 감기는 머리카락이 보드라웠다. 계속 만지라고 한다면 시간이 지나는지도 모르도록 만질 수 있을 것만 같다.

“그쵸. 조금 내려놓는 게 좋을까요?”

“그러면야 좋겠지만, 정 선생은 안고 있어야 편한 사람이니까. 대신 나한테 덜어 내면 되지.”

정 선생이 나를 빤히 응시했다. 왜 그러냐는 뜻에서 눈썹을 들어 올리자 갑자기 팔에 얼굴을 묻으며 한숨을 푹 내쉰다. 웃음을 참지 않고 흘리고선 잔을 톡 건드렸다.

“녹는데.”

그러자 그가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짐짓 심각한 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미간을 찌푸리고 창밖을 응시하던 그의 눈이 다시 내게로 돌아왔다.

“후진 쌤.”

“응.”

“제가 요즘 계속 하는 생각이 있어요.”

“무슨 생각인데요.”

정 선생은 곧장 말하지 않고 다시 창밖을 노려보듯 빤히 보았다. 무슨 생각일까 궁금해하며 차분히 그의 말을 기다렸다.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이렇게 우울한 날에, 집에 돌아가면 선생님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요.”

대답을 해 주기 위해 벌어졌던 입이 도로 다물렸다. 마침 가게 안의 스피커를 타고 음악이 흘러나왔다. 휘파람이 선율을 타고 곁을 맴돌았다.

“선생님이 너무너무 보고 싶은 날에는, 전화를 걸까말까 고민하는 게 아니라 눈앞의 선생님을 끌어안는 생각이요.”

눈을 감았다가 떴다. 잔에 맺힌 물방울이나, 테이블 위에 떨어진 작은 휘핑크림이나, 얼음을 가는 소리, 창밖으로 흩날리는 벚꽃 잎. 그런 것들은 다 멀어지고, 오직 내 앞에 앉은 그만이 남았다.

나 또한 내내 했던 생각이다. 잠을 못 이루는 날, 그가 보고 싶으면 보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 눌러 내리는 게 아니라 잠든 그를 보는 생각. 우울이 느닷없이 찾아올 때면, 그의 품에 안겨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로지 숨만 내쉬는 생각. 집에 발을 들였을 때, 불 꺼진 집이 아니라 환한 집에서 그가 나를 맞이하는 생각. 반대로 그가 집에 발을 들였을 때, 불 꺼진 집에 쓸쓸하게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그 집을 지키는 나를 보며 환히 웃는 생각.

우리가, 함께 있는 생각.

“우리가, 늘 같이 있는 생각이요.”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던 것은, 나는 여전히 두려웠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언젠가 찾아올지 모르는 끝과 그것을 감당해야 하는 나. 너무 무거워지면 무서워지는 시간들. 벌써 내 집 이곳저곳에 가득한 그의 물건과 흔적. 간혹 꾸는 악몽과 눈을 뜨면 전혀 믿기지 않도록 행복한 현실. 그 간극 사이에서 헤엄치며 잠수해 죽을 나.

그러나……. 그런, 확실과 불확실 사이에서 어느 곳에 점을 찍을지 모르는 미래보다는 현재의 행복이 눈앞에 아른거리자 어떤 것도 돌아보지 않고 손을 내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매일 그가 내 품 안에서 잠이 들고, 눈을 뜨고, 같은 식탁에서 밥을 먹고, 나란히 서서 하루 세 번 양치를 하고, 그와 나의 집이 아니라 우리의 집이 되고, 우리의 시간이 되고, 우리의 공간이 되는. 그런 나날들.

따뜻한 봄이 왔다. 더운 여름이 오고, 서늘한 가을이 오고, 추운 겨울이 올 것이다. 계절은 소멸되지 않을 거고 내가 보내는 사계에 그가 있을 테다. 언젠가 그가 없는 계절이 올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결국 그마저 감당하고 싶을 정도로 그를 사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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