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 그의 하루
<잃어버린 6분 30초>
“아아, 심심해!”
텔레비전도 볼 게 없고 자기는 왠지 싫고 후진 쌤한테는 연락이 없고 할 것도 없고 너무 심심했다. 침대 위에서 데구루루 구르며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 문자나 한번 보내 볼까, 할 때였다.
손안에서 진동이 두 번 세게 울려 나도 모르게 핸드폰을 놓치고 말았다. 김 선생님에게서 문자가 온 것이었다. 마음이 통했나 봐. 어깨를 움츠린 채로 쿡쿡대다가 문자함을 눌렀다.
[들ㄹ어와습ㄴㅣ다^ ^]
……뭐지? 웬 오타가 이렇게……. 취하셨나?
“으, 귀여워.”
얼마나 취하셨길래 문자를 이렇게 보내셨지? 이렇게 오타 내시는 거 처음 봐. 아, 귀여워. 우리 김 쌤 이렇게 귀여우셔서 어떡하지?
이렇게 감격스러운 순간을 놓칠 수는 없다는 생각에 통화 버튼을 눌렀다. 바로 받으실 거라는 생각과 다르게 신호음이 얼마간 이어지다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선생님. 집에 들어가셨어요?”
답을 기다렸으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핸드폰을 귀에서 떼고 통화가 끊기지 않았다는 걸 확인한 뒤 다시 귀에 붙였다.
“여보세요? 후진 쌤?”
-네.
묵직한 목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목소리 좋은 우리 김 쌤은 전화로 들으면 그 목소리가 한층 더 낮아져서 가끔 오싹해질 때가 있다.
“도착하셨어요?”
-응. 뭐해요.
“저 그냥 누워 있어요. 선생님한테 문자 보내려고 했는데, 먼저 보내셨더라고요.”
-내가?
“네. 기억 안 나세요?”
-아. 그랬나. 근데 뭐해요.
“아하하! 선생님 취하셨죠.”
-아니.
“얼마나 마시셨어요?”
-조금.
“조금?”
-많이.
입을 틀어막고 발을 굴렀다. 진짜 너무 귀여워서 못 참겠다. 침대 위를 굴러다니며 웃음을 참다가 헛기침을 해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집에 잘 도착한 거 맞으시죠?”
-그럼. 정 선생.
“네?”
-목소리가 예쁘네요.
나도 모르게 숨을 들이켠 채로 손가락을 움츠렸다. 수화기 너머로 색색 숨을 내쉬는 소리가 조용하게 들렸다. 가슴이 너무 두근거려서 침을 한 번 삼키고 숨을 크게 들이쉰 후에야 입을 뗄 수 있었다.
“김 쌤 목소리도 좋아요.”
저편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가슴이 간질거렸다.
-안 자고 뭐해요.
“선생님이랑 전화하고 있죠.”
-잘했어요.
“하하, 칭찬해 주시는 거예요?”
-응. 앞으로도 잘하고.
애들 대하는 것 같은 투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후진 쌤이 애들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할 때와 꼭 같은 투다.
가끔 선생님과 술을 많이 마시는 것도 나쁘지 않겠단 생각이 들었다. 쌤과 술을 마실 때면 항상 내가 먼저 취하는 것 같은데, 후진 쌤의 취한 모습을 직접 보고 싶었다. 아, 이렇게 귀여운 모습 누가 봤으면 어떡하지.
“다음에 저랑도 술 마셔요. 많이요.”
-조금 마셔야죠, 술은.
취하셨어도 엄한 목소리를 내시니 절로 웃음이 나온다. 혼자서 쿡쿡 웃다가 조용히 후진 쌤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취기 때문에 조금 흐트러지긴 했지만 듣기 좋은 소리였다.
-진아.
……아. 이번엔 정말 심장이 멎을 뻔했다.
-좋다.
“…….”
-넌 왜 이렇게 예쁘지.
나야말로. 좋다. 너무 좋다. 선생님이 너무 좋다.
너무 좋으니까 말도 안 나온다는 말이 이럴 때 쓰는 말인가 보다. 정말 목소리조차 안 나왔다. 가슴이 너무 벅차고, 심장 뛰는 소리가 귓가에 너무 크게 울렸다. 가슴을 손으로 짚고 다정하기 짝이 없는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숨소리마저 설레게 만드는 사람이다. 정말 좋다. 너무 좋아서, 선생님을 좋아하는 나까지 좋아진다. 잠들지 않고 기다린 시간이 좋고 따뜻하게 달아오르는 핸드폰마저 좋다.
숨소리가 일정해졌다. 조금 전과는 달라진 숨소리에 드디어 입을 열 수 있었다.
“선생님.”
너무 좋으니까 차마 좋다는 소리는 나오지 못해서, 나는 다른 말을 꺼냈다.
“좋은 꿈 꾸세요.”
달고 단 꿈을 꿔서, 내일 후진 쌤을 만날 때 후진 쌤이 다디단 얼굴을 하고 있길. 그리고 그 얼굴로 나를 좋아한다고 말해 줬으면. 그때는 가슴이 터져 나올 것같이 벅차도, 기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선생님 좋아해요, 하고.
<그날, 그 시간들>
-그 사람 때문이 아닙니다. 나 때문이죠. 어차피…… 나중에는 정 선생이 먼저 이별을 말하게 될 겁니다.
말문이 막혀 버렸다. 그간의 고민과 생각들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내가 이별을 말할 거라고.
이처럼 황당한 말이 어디 있을까. 나의 고민과 생각들을, 당신을 좋아했던 시간들을 모두 없던 것처럼 말하는, 나의 사랑을 고작 그 정도로 치부해 버리는 당신을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 제가 많이 우스우신가 봐요.”
-…….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네. 그렇게 하죠.”
화가 머리끝까지 치고 올라와서 두 번 생각하지 않고 내뱉어 버렸다. 당신이 그렇게 생각하면 그렇게 해야지. 내가 이별을 원하는 게 아니라 당신이 원하는 것 같은데. 내가 뭘 어쩌겠어.
전화를 끊고 핸드폰을 침대에 거칠게 내던지고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침대에 누워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한숨을 내쉬었다. 입 밖으로 나오는 숨이 잘게 떨렸다.
그날 선생님이 잠결에 하시는 말씀을 듣고, 참 많은 생각을 했다. 선생님에게는 형님이 한 분 계시는 걸로 알고 있는데, 누님이 있다는 말씀은 못 들었는데. 그때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이 딱 한 명 떠올랐다. 연상이었다는 첫사랑. 선생님을 두고 다른 사람을 만났다는.
그러자 그동안의 선생님이 전부 이해 갔다. 어딘지 가라앉아 보이는 얼굴, 생각이 많아 보이던 얼굴.
의구심이 들었다. 혹시 아직 마음이 남아 있으신 건가? 하지만 스무 살 때 만났던 사람이다. 10년이 훌쩍 지났고 그동안 다른 사람들도 만나 오셨다. 그러니 그럴 리 없다. 선생님은 지금 누구보다 나를 좋아하시고, 다른 사람을 마음에 품을 리 없다.
무슨 일이 있으셨나. 물어봐야겠다. 껄끄러운 이야기지만 확실히 하는 것이 좋겠다고 고민 끝에 결심했을 때, 선생님은 자기 혼자 이별을 생각하고 계셨다.
그동안의 내 고민과 생각은 전부 쓸데없어져 버렸다. 정말 많이 생각했는데. 어떻게 하면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상처받은 티를 내지 않을 수 있을지, 어떤 이야기가 들려와도 이해를 할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다독였는데.
머리가 아프다. 모르겠다. 하나도 모르겠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너무 화가 나고 얼굴도 보기 싫었다. 눈을 감았다. 그냥 푹 자고 일어나고 싶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다.
* * *
헤어졌다. 이별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았다.
이상했다.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이별을 겪는 사람들은 저러다 큰일 나는 것 아닐까 싶을 정도로 울던데, 나는 생각보다 아주 괜찮았다. 잠도 잘 잤고, 밥도 잘 먹었고, 텔레비전을 보면서 웃기도 잘 웃었다.
이 정도였나, 생각하니까 웃음이 나왔다. 이별이 이런 건 줄은 몰랐다. 친구 녀석들을 보면 많이 힘들어하던데. 나는 왜 이 정도지? 선생님을 이 정도밖에 사랑하지 않았다고?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내가 이 정도니까 선생님은 아무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내가 더 선생님을 좋아했다고 생각했는데, 이 정도라면 선생님은 정말 아무렇지 않을 거다. 그러니까 이별도 말한 거겠지.
-야, 뭐해.
“그냥 있어.”
-데이트 안 하냐? 안 하면 술이나 먹고.
“……어디서.”
-어디긴. 네가 올라와야지. 그 촌구석까지 내가 가냐?
“여기 촌구석 아니거든. 알았어, 갈게.”
-그래. 블루스로 와라.
자주 가는 호프집을 말한 지운이가 전화를 끊었다. 끊긴 전화를 내려다보다가, 무심코 통화 목록을 눌렀다. 나흘 전에 찍힌 수신 목록이 눈에 보였다. 기분이 이상해졌다. 가슴께가 뻐근해져 오는 느낌에 손으로 꾹 눌렀다가 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버스에 올라타 맨 뒷자리에 앉아 창밖을 보았다. 저녁임에도 해가 길어서 밖은 아직 밝았지만, 하늘이 흐린 낮처럼 마냥 밝지는 않았다. 저녁 시간이라 그런지 퇴근하는 사람들과 놀러 가는 사람들이 버스에 한데 모였다. 버스는 정류장마다 정차해서 사람을 태웠고 속도를 낼 참이면 멈추곤 했다.
문득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버스가 너무 느리게 굴러가서 그런 듯했다. 버스는 어느새 만원 버스가 되어 공백을 찾을 수 없이 사람들로 꽉 들어차 있었고, 그렇게 다닥다닥 붙어 있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에어컨이 지나치게 세게 나오고 있는데도 사람들이 많은 탓인지 답답하고 더운 느낌이 들었다. 창문을 열고 싶었지만 매너가 아닌 듯해서 가만히 있다가 결국 도착지보다 두 정거장 전에서 내렸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더운 기운이 훅 끼쳐 왔다. 습기가 장난 아니게 피부에 찰싹 달라붙었다. 불쾌하고 더웠다. 이럴 거면 좀 답답해도 버스에 있을걸, 하는 후회와 함께 조금 서둘러 걸었다. 걸음이 빨라지자 등에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불쾌했다.
호프집에 도착해 자리를 잡았다. 지운이는 없었다. 녀석은 상습범이라 없을 줄은 알고 있었다.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안주와 술을 미리 시켰는데, 안주와 술이 나왔을 때 녀석이 도착했다.
“늦었어.”
“미안.”
녀석이 성의 없는 사과를 하고 강냉이를 주워 먹었다. 그 모습이 얄미웠지만 한두 번도 아닌지라 소주병의 뚜껑을 뜯었다.
“알콩달콩 아주 살맛 나나 보다? 처음 갔을 때는 심심하다, 할 거 없다 징징댔으면서 이젠 연락도 뜸하고.”
앉자마자 아픈 데를 쿡 찌르니 할 말이 없어서 괜히 녀석을 흘겨보았다. 그러자 한쪽 눈썹을 삐딱하게 세운다.
“표정이 왜 그래? 뭔 일 있냐?”
“……헤어졌어.”
지운이는 중학교 동창으로 지금까지 연을 이어 온 녀석이다. 내 친구들 중 가장 오래 안 놈이고, 내가 가장 먼저 커밍아웃을 했음에도 떠나지 않은 친구다. 그리고 최근 김 선생님과 내 사이를 가장 잘 알고 있기도 했다. 그래서 그런지 이별 소식을 알리면서 입맛이 썼다.
“뭐? 갑자기? 그런 말 없었잖아.”
“그냥 그렇게 됐어.”
“……괜찮냐?”
녀석이 내 손에서 소주병을 빼앗아 들고 내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술잔을 내밀기에 잔을 부딪쳐 주고 원샷했다.
“괜찮아. 생각보다 정말.”
미심쩍은 눈길에 어깨를 으쓱했다. 자작을 하면 재수가 없다느니 저주를 하냐는 거니 하는 구시렁거림을 무시하고 내 술잔에 술을 따랐다.
“내가 생각해도 이상해. 원래 이런 거야? 난 진짜 김 쌤이 좋다고 생각했거든. 근데 아무렇지도 않아.”
첫 이별이었다. 28년을 살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 왔지만, 이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친구들 사이에서 ‘금사빠’라고 불렸다. 사람들을 꽤 자주 만났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장점을 일찍 발견하고 호감을 느꼈고 관심을 주었다. 금방 사랑에 빠지는 사람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그러나 진짜 사랑을 한 건 아니었다. 스스로도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가볍게 만나고 가볍게 헤어졌다. 그리고 상대도 나를 그렇게 만났다. 그렇게 만날 수 있는 사람들과 만났다. 적당히 서로의 외로움을 달래고 서로의 시간을 채우고 서로의 취미를 즐기다가, 어느덧 서로에게 쓸 감정과 시간이 다 소모되었음을 느끼면 웃으면서 헤어졌다.
그러나 김 선생님은 달랐다. 후진 쌤을 처음 봤을 때는, 솔직히 말해 잘생겨서 좋았다. 키도 크고 어깨도 넓고 체격도 좋고 주위에서 마주치는 사람들 중 가장 잘생겼다고 생각했다. 그냥 그 정도였다. 내게 관심을 두지도 않고 시큰둥했기에 다가갈 생각을 하지도 못했고.
그런데 바지에 휴지를 넣고 다니는 게 담배꽁초를 버리기 위함이고, 관심이 없는 듯 굴면서도 아이들이 오면 언제나 무언가를 쥐여 주고, 급식을 먹을 때 나오는 요구르트를 안 마시면서 들고 다니다가 아이들에게 건네주고, 엄한 듯하면서도 따뜻한 말로 아이들을 대하고, 시큰둥한 얼굴로 앞서 걸으면서도 다리를 삐끗하는 선생님의 팔을 잡아 주고, 아픈 줄 몰랐던 아이가 아픈 걸 알아봐 주고. 그래서 좋았다. 좋아졌다. 선생님에 대해 알수록 좋았고, 알고 나니 더 좋았다.
헤테로인 걸 알면서도 좋아서, 그냥 옆에만 있는 걸로 만족하려고 했다. 내 마음을 들키고 나서는 한없이 우울했고 나를 혐오할까 두려워하면서도 한 발자국 나아가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선생님은 결국 잡아 주셨다.
가벼운 마음이 절대 아니었다. 그런데 모르겠다. 내가 선생님을 많이 좋아한 게 아니었나? 왜 아무렇지도 않지?
“아무렇지 않으면 좋은 거지. 근데 아무렇지 않은 거에 그렇게 고민하며 죽을상을 한다고? 네가?”
지운이가 신랄하게 비수를 꽂았다. 할 말이 없어 소주를 들이켜자 녀석이 혀를 찼다.
“세상엔 후폭풍이란 게 있어, 친구야.”
“후폭풍?”
“네가 내 말을 못 알아들어야 할 텐데…….”
고개를 저으며 혀를 쯧쯧 차는 지운이를 보며 소주를 잔에 따라 또 한 번 원샷했다. 자작 좀 그만하라는 핀잔을 무시하자 녀석이 안주를 내 입에 억지로 처넣었다.
알딸딸하게 취기가 올랐다고 생각이 들 때쯤 잔을 내려놓았다. 엉망으로 취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달달달 떨리는 버스에서 알코올 가득한 숨만 색색 내쉬면서 멍하니 정신을 놓고 있다가 정류장을 지나칠 뻔했다.
버스에서 내려서는 똑바로 걸었다. 걷는 게 조금 벅차게 느껴졌지만 비틀거리지는 않았다. 밤이라서 어두웠고 이 동네는 시내라고 불리는 사거리 정도가 아니면 가로등만이 빛을 밝히는 곳이었지만 으스스하지는 않았다.
더웠다. 추워 보이는 밤이 마냥 더웠다.
불그스름한 가로등이 밝히는 아무것도 없는 인도는 추워 보였는데, 보이는 것과는 다르게 피부에 와 닿는 공기는 습하고 더웠다.
그래서일까. 무언가가 허했다. 가슴이 허한 것 같기도 했고, 곁이 허한 것 같기도 했다.
이게 후폭풍인가?
이게?
* * *
일주일하고도 반이 흘렀다. 경하 쌤과 약속을 했던 날이라 옷을 챙겨 입고 집을 나왔다.
학교는 오랜만에 가는 것이었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도로를 지나치는 차들을 보았다. 수많은 검은 차들을 볼 때면 낯익은 그 차가 아닐까 싶어서 고개가 돌아갔다. 그러다가 문득 어떤 차를 찾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고개를 제자리에 두었다.
버스에 올라탔다. 출근 시간보다 조금 더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버스 안은 한산했다. 자리를 잡고 앉으면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날씨는 청명했지만 밖은 숨이 막힐 정도로 찜통이었다.
생각이 멍하니 흘러갔다. 언제 끝날까, 점심은 뭘 먹지 하는 쓸데없는 생각들뿐이었다. 요 며칠 마치 의식적으로 스위치를 내린 양 생각 없이 멍해졌다. 기운이 없고 뭘 해도 무기력하고 그냥 누워만 있다가 만나자는 연락도 다 무시했다. 방학이 오면 정말 알차게 살려고 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됐지.
버스에서 내려 교문을 통과하면서 끈적끈적해진 뺨을 쓸었다. 더웠다. 덥고 습한 건 싫어도 여름은 나름대로 좋아했던 것 같은데. 후진 쌤은 여름을 싫어한다고 했다. 더워서.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걸음이 주춤했다. 멍하니 내 다리를 내려다보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오랜만에 찾는 교무실 문을 열고 경하 쌤에게 인사를 했다. 간만에 보는 얼굴이 반갑다는 생각이 들 때, 시야에 걸리는 인영에 고개를 돌렸다.
숨이 막혔다.
막힌 숨을 뚫듯이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들었을 때, 선생님이 고개를 끄덕이셨다. 자리에 앉아 가져온 자료를 꺼내면서 고인 침을 꿀꺽 삼켰다.
무심한 얼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 여전히 첫눈에 호감을 느낄 만큼 멋있지만, 관심이라곤 한 톨도 없는 얼굴.
그 얼굴을 보자마자 내가 선생님을 보고 싶어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모르고 있었으나, 선생님을 보자마자 꾹꾹 눌러 왔던 그리움이 둑이 터지고 물이 쏟아지듯 그렇게 쏟아져 나왔다. 애써 구멍을 막으려 노력해 보아도, 막으려던 손을 시작으로 나는 그 물결에 쓸려 가고 말았다.
“정 쌤! 나가요.”
경하 쌤의 목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리고 자료를 들고 일어났다. 경하 쌤의 뒤를 따르면서 눈을 껌뻑였다.
일주일하고도 반이 흘렀다. 보고 싶은 건지 아닌 건지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헤어진 건지 아닌지도 모르겠고,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아서 내가 선생님을 정말 좋아한 게 맞나 하는 의구심도 들었다.
그런데 선생님의 얼굴을 보자마자 의식적으로 차단해 왔던 생각들이 목을 눌러 왔다.
선생님을 너무 좋아하고, 너무 보고 싶었고, 너무 만나고 싶었는데…….
끝났구나.
끝났다.
그걸 이제야 알았다.
퇴근 시간보다 조금 일찍 나와서 버스는 올 때와 마찬가지로 한산했다. 사람이 없어서인지 버스 안은 에어컨이 틀어지지 않았고, 찬 바람을 쐬지 못해 더 몸이 늘어졌다.
버스에서 내려 걸었다. 집으로 가는 길이었는데, 꼭 처음 보는 길을 걷는 것만 같았다. 주변의 풍경들은 그대로였는데, 나는 이곳에 처음 오는 것만 같았다.
주변은 같은데, 나만 달라진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동성애자라는 걸 자각했을 때처럼. 그때보다는 느리게 폭풍이 몰아치는데, 그때보다는 바람 한 줄기에 통증이 더 심하게 올라왔다.
걸음 하나하나가 무거웠다. 발등을 누가 짓누르는 기분이었다. 걸음을 하나씩 떼면서, 주변의 풍경을 눈에 전부 담았다. 지금 이 순간이 달라지길 원하지 않았다. 늘 걷던 길이길 바랐다. 늘 보던 풍경들이 아프게 다가와서, 다시는 걷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마침내 집에 도착해서, 문을 힘겹게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문에 등을 대고 스르륵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 도저히 일어나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설 수 없었다.
문득 손에서 온기가 느껴져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내 손에 캔 커피 하나가 들려 있었다.
‘이 커피는 너무 달지 않나?’
‘이 정도가 정 선생 입에 맞는 단맛인가 보네요.’
단걸 즐기지 않지만 단 커피는 그런대로 마실 수 있다던 선생님은, 이 커피는 너무 달지 않으냐며 내가 쥐고 있던 커피를 가리켰다. 내게는 딱 좋다는 말에 선생님은 나를 사탕 좋아하는 아이를 보는 것처럼 다정하게 웃으셨다.
선생님은 도시락과 함께 캔 커피 세 개를 손에 들고 오셨다. 선생님한테는 지나치게 단맛인데도.
이 커피를 사 오신 것은 그냥 눈에 들어왔기 때문일까, 아니면 나를 위한 것일까.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그저 아무렇지 않게 여기며 놓칠 수 있는 다정이 가슴을 움켜쥔다. 사소하고 조용한 다정함에 반한 나에게, 선생님은 아무 관심 없는 예의 그 얼굴로 그 다정을 내게 보여 주었다.
그러나 이제 내 것이 아니다. 그 다정은 이제 나를 아프게 할 것이다. 우리가 헤어졌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헤어진 연인에게 그 다정함을 아무렇지 않게 보여 주는 사람인가. 아니면, 나를 그만큼 좋아하지 않아서, 헤어짐에도 다정을 보여 줄 수 있는 것일까.
-여보세요.
“야…….”
-왜?
“헤어졌어.”
-뭐?
“……헤어졌어?”
-…….
“이렇게 헤어지는 거야? 이렇게? 이렇게 끝나? 원래 이래? 원래 이렇게…….”
말을 차마 이을 수가 없었다. 여태까지 막아 왔던 둑을 누군가가 무너뜨리듯 눈물이 터져 나왔다. 쉴 새 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아 낼 생각도 하지 못하고 나는 아이처럼 엉엉 울어 버렸다. 지운이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혀를 차는 소리가 씁쓸하게 귓가를 울렸지만, 그 소리에 반응할 새도 없이 울음이 울음을 밀어내며 끝없이 쏟아져 나왔다.
이별은 아프다고 모두들 입을 모아 말했다. 그러나 모두들 극복할 수 있는 것처럼 말했다. 하지만 아무도 이렇게 아프다고는 말해 주지 않았다. 이렇게 내일이 오지 않을 것처럼,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하는 것처럼 아프다고는 아무도 말해 주지 않았다.
이렇게 끝이 나면 어떻게 해야 하지? 나는 아직도 이렇게 아프도록 좋은데, 당신은 나를 잊어버렸다고 하면 어떡하지?
나는 선생님을 아주 많이 좋아하는데, 선생님은 아직 그 정도는 아니었나 보다. 물론 내가 먼저 좋아했고 내가 더 좋아하는 건 당연하고, 선생님이 더 조심스러운 건 당연한 거다. 나는 남자고 선생님은 이성애자로 살아오셨고, 아픈 사랑을 겪으셨으니까 모든 게 조심스러운 게 당연했다.
내가 그걸 이해하지 못했다. 그걸 참지 못했다. 한순간의 화에 눈이 멀어 이별을 받아들였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좋아하는 만큼 잡았어야 했다.
후회가 아프게 눈을 찌른다. 그의 다정이 온몸을 짓누른다.
하지만 그가 남겨 준 다정이 내게 일말의 희망을 남겼다. 이 작은 캔 커피 하나가 아직 나를 좋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러니까 달려가야 한다고 등을 떠민다.
그런데 아니면 어떡하지?
아니면 정말로 나는 어떡하지?
언제까지나 이렇게 아파야 하나?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어떡하지? 나를 잊었다고 말하면?
헤어짐의 순간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쳤다. 그날로 돌아간다면 나는, 그렇게 말하지 말했어야 했다.
첫 이별이었다. 이런 게 이별인 줄 알았더라면 사랑만 했을 것이다. 당신의 사소한 다정을 손안에 꼭 쥐고 이별을 말하는 당신에게 나는 사랑을 말했을 거다. 그러니까, 단 한 번의 기회만 더 내게 돌아온다면.
-잡아. 못 잡겠으면, 잡히지 않으면 잊어. 시간이 결국 해결해 줄 거야.
시간이 해결해 준다는 그 말에, 나는 안도감이 아닌 두려움을 느꼈다. 나는 이 아픔을, 이 고통을 시간이 해결해 주길 바라지 않았다.
나는 이 아픔을 잊고, 그를 잊고, 그와 함께했던 시간을 묻고 싶은 게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서, 차오르는 감정을 흘리는 일밖에 할 수 없었다. 작은 캔 커피 하나가 구명줄이라도 되는 양 꼭 쥐고서. 그 온기가 당신에게 남은 온기이기만을 바라면서.
* * *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지만 나는 지지부진하게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지운이가 한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시간은 이별의 아픔을 해결해 줄 것이다. 내일이 없을 것처럼 아파했던 나는 지금 어느 정도 괜찮아졌다.
그렇다고 시간의 흐름에 나의 아픔을 내맡기고 이별을 인정해서 내 사랑을, 우리의 시간을 그저 흘러가도록 두고 싶지 않았다.
나는 기다렸다. 처음 겪는 이별에 섣부르게 용기를 내서 망치고 싶지 않았다. 선생님이 말한 이별은 다소 성급했고 충동적인 면이 있었다. 그래서 기다렸다. 선생님이 조금 먼 거리에서 우리의 이별을 돌아볼 수 있기를.
선생님은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날의 일을 기억한다. 선생님의 손목을 붙잡고 울음을 터뜨린 조금 창피한 기억이지만, 그날의 공기와 그날의 분위기와 그날의 목소리를 전부 다 기억한다.
애틋했던 목소리와 따뜻했던 손길을 기억하고, 나에게 맞추어 천천히 내디뎠던 발걸음 또한 기억한다. 그래서 그것에 매달리기로 했다. 그렇게 기다리기로 했다.
선생님이 나를 좋아했다는 사실 하나는 명확했다. 짧은 시간이지만, 나는 선생님의 사랑을 받았다. 그러니 이별이 아프지 않았을 리가 없다. 선생님같이 다정한 사람이, 아무렇지 않았을 리 없다.
내게서 두 걸음 정도 떨어져 내 뒤를 천천히 따르며 내게서 시선을 놓지 않는 선생님의 모습이 유리창 너머로 비쳤다. 돌아보지 않았다면 몰랐을 다정이다. 그리고 나는 그걸 아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선생님이 붙잡아도 되는 사람이고 선생님을 붙잡고 싶은 사람이다.
내가 먼저 붙잡을 수도 있지만, 역시 나는 기다리기로 했다. 선생님이 먼저 이별을 말했기에 다시 시작을 말하는 쪽도 그여야 했다. 그것은 선생님이 잘못을 했기에 수습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가 다시 시작하려면 선생님이 산을 넘어야 했다. 그 길은 힘들겠지만 나는 선생님을 기다리고 있고, 그것을 말하지 않아도 그는 반드시 알아줄 테니까. 그는 그런 사람이니까.
만약 넘지 못한다면, 이라는 가정은 하지 않기로 했다. 선생님의 마음을 의심하고 그간의 시간은 도대체 뭐였냐며 스스로를 좀먹던 시간은 버리고 더 이상 반복하지 않기로 했다.
“조심해서 들어가요.”
이렇다니까. 우리 사랑스러운 후진 쌤은, 이렇게 나를 알아봐 주고 산을 넘을 준비를 하고 있다. 이런 사람한테 어떻게 반하지 않고, 이런 사람을 어떻게 놓을 수 있겠냐고.
나는 돌아서면서 시작을 준비했다. 그가 내게 온다면, 사랑만을 말할 준비를.
언제 올지 모를 그때를 기다리는 것이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결국 올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그라면.
<함박눈이 펑펑>
‘후진 쌤, 스노보드 탈 줄 아세요?’
‘네.’
‘어, 타 보셨어요?’
‘응. 2년 전에 탔던 것…… 같네요.’
나는 자연스레 그 2년 전이 언제인지, 선생님이 누구랑 보드를 타 보신 건지 알게 되었다. 하지만 모른 체했다. 우리는 조금 서툴러서, 종종 이런 실수를 하곤 했다. 서로 모른 체하지만 사실 아주 잘 알고 있는 게 조금 웃겼다.
아무튼 내 물음이 계기가 되어 우리는 스키장에 놀러 가기로 했다. 방학식 이후로 처음 놀러 가는 것이었다. 아니, 생각해 보면 선생님과 사귄 뒤로 처음 멀리 놀러 가는 게 아닌가 싶다.
선생님은 내 모자가 마음에 드셨는지 신호에 걸려 멈출 때면 모자에 달린 방울을 만지작거렸다. 그때마다 나는 선생님이 조금 더 쉽게 만질 수 있도록 고개를 기울였다.
“휴게소네. 뭣 좀 먹을래요?”
“네. 아점으로 간단히 해결하고 갈까요? 저녁 때 맛있는 거 먹고.”
“그래요.”
휴게소에 차를 세우고 밖으로 나왔다. 찬 공기가 바로 뺨에 닿았지만 날씨 하나만큼은 확실히 맑아서 좋았다.
식당 안에서 먹는 것보다 차 안에서 먹는 게 편할 것 같다는 생각에 어묵과 떡볶이, 통감자를 사서 차로 돌아왔다.
“이렇게 먹으니까 소풍 가는 것 같아요.”
“그러게. 급식 아니면 이런 거 잘 안 먹는데.”
“이거 드세요.”
꼬치로 감자를 작게 잘라 후진 쌤 입에 넣어 주고, 반 남은 것은 내가 먹었다. 주변 눈 신경 쓸 것 없이 편하게 먹을 수 있어서 차에서 먹기로 한 것이 좋은 선택인 것 같았다.
“근데 보드 너무 오랜만이라, 몸이 기억하고 있을지 모르겠어요.”
“보드 정도야, 뭐. 정 선생은 운동 신경이 좋아서 잘할 것 같은데.”
“사실 저 보드 처음 배울 땐 조금 많이 헤맸거든요. 스키는 쉬운데, 보드는 조금 어렵더라고요. 그래도 한번 타기 시작하니까 재밌었지만. 후진 쌤은 처음부터 잘 타셨어요?”
“음, 그렇게 어렵진 않더라고요.”
“역시, 우리 김 쌤.”
선생님은 내 말에 피식 웃었다. 후진 쌤은 내가 칭찬을 하거나 추어올리면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넘기는 버릇이 있으셨다. 언젠가 한번 종일 선생님 귓가에 선생님이 얼마나 좋은 사람이고 멋있는 사람인지 알려 주고 싶다.
간단하게 아점을 해결하고 다시 출발했다. 후식으로 준비한 박하사탕을 입안에서 굴리면서 창밖을 보았다. 볼 때마다 황량한 산만 가득했던 풍경이 점차 하얀색으로 포근해졌다.
스키장에 도착했다. 우리는 보드복과 보드를 대여하고 밖으로 나왔다. 옷이 두꺼워서인지 똑바로 걸어도 왠지 뒤뚱뒤뚱 걷는 것만 같았다.
적응을 위해 초보 존에서 조금 놀다가 리프트에 탑승했다. 나란히 앉아 손을 잡았다. 장갑을 껴서 맨살이 닿지는 않았지만 깍지를 낀 채라 가까이 닿을 수 있었다.
“쌤은 겨울은 좋아하세요?”
“여름보단 나은데, 좋아하는 편은 아니에요.”
“정말요? 전 겨울은 눈 오는 게 좋아서 좋아해요.”
“난 군대 갔다 오고 나서 눈은 별로던데.”
“아, 맞다. 저도 그 생각만 하면……. 그래도 다 지난 일이니까요. 전 눈 밟을 때 뽀드득 소리 나는 거 제일 좋아해요. 그래서 눈 쌓이면 일부러 눈만 밟으면서 다닐 때 있어요.”
“정 선생이랑 살려면 신발 빨래 잘해야겠네.”
“하하-!”
몸을 떨며 웃다가 문득 ‘정 선생이랑 살려면’이라는 부분이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 이거 간접적인 청혼 아닌가……. 후진 쌤을 흘긋 보는데 미소를 띤 채로 나를 보고 계셨다. 아, 심장에 안 좋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웃는 후진 쌤의 얼굴은 정말, 정말로 심장에 좋지 않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자 내 손을 잡은 선생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우리 김 쌤은 힘도 참 좋으시다.
리프트가 도착해서 내렸다. 시원한 내리막길을 보며 우리는 눈을 마주치고 씩 웃었다.
“내려갈까요?”
“네.”
“먼저 도착한 사람이 소원 들어주기 해요. 시, 작!”
눈밭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시원하게 출발했다. 내 옆에서 후진 쌤이 나보다 조금 느리게 내려가는 것이 얼핏 보였다. 우리 김 쌤은 보드 타는 것도 멋지시다.
느리게 내려가는 사람들을 피해 S 자로 자국을 남기며 내려갔다. 찬 바람이 뺨을 스쳤지만 기분이 좋았다. 애인이랑 스키장에 오는 건 처음이었다. 그것도 후진 쌤이랑 같이 올 수 있어서 더 좋았다. 처음 후진 쌤을 봤을 때만 해도 이런 사이가 될 줄은 몰랐는데.
쿡쿡 웃으며 찬 바람을 즐기다 보니 어느새 아래에 도착했다. 선생님은 나보다 조금 느리게 도착하셨다.
“제가 이겼어요.”
“스포츠로는 우리 정 선생님 못 이기지.”
입술을 깨문 채로 웃었다. 후진 쌤이 우리 정 선생님, 할 때면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누가 들으면 오버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정말 그랬다. 우리 정 선생님, 하는 목소리와 말투에 나에 대한 사랑이 듬뿍 담겨 있었고 나는 그걸 여실하게 느낄 수 있었으니까.
기분이 너무 좋았다. 오랜만의 보드 타기도, 후진 쌤과의 데이트도.
어깨를 들썩이며 다시 리프트를 타기 위해 리프트 쪽으로 향할 때였다.
“어어!”
무언가가 휙, 지나치는 느낌과 함께 몸이 한 바퀴 빙글 돌았다. 속도를 줄이지 못한 아이가 스키를 타고 내 쪽을 지나치면서 선생님이 내 팔을 잡아챈 것이었다. 보드가 눈밭에 떨어지면서 동시에 나와 후진 쌤도 넘어졌다.
후진 쌤 위에 내가 안긴 채로 눈밭에 눕고 말았다. 키가 180이 넘는 성인 남자 둘이서 끌어안은 채로 누워 있는 게 누가 보면 우스워 보일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지만, 우리는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선생님의 체향이 연하게 선생님의 웃음소리와 함께 흘러왔다. 보는 눈만 없었으면 확, 키스했을 텐데.
해가 질 무렵에 우리는 저녁을 먹고 리조트로 들어왔다. 고층에 위치한 방은 스키장의 눈 덮인 전경이 한눈에 보였다. 크고 깨끗한 창문에 손을 대고 탄성을 흘리고 있는데, 뒤에서 팔이 튀어나와 허리를 끌어안았다. 어깨에 후진 쌤의 얼굴이 얹혔다.
“뭐 보고 있어요.”
“야경이요. 아직 야경이라고 하기엔 뭐하지만, 해 완전히 지면 예쁠 것 같죠.”
“응. 지금도 예쁘네.”
선생님이 고개를 들어 올림과 동시에 내 턱을 쥐어 돌렸다. 입술이 맞닿아 꾹 눌렸다. 턱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서 입술이 자연스레 벌려졌다. 그 사이로 혀가 들어왔다. 선생님의 키스는 힘이 있으면서도 다정했다. 마냥 부드럽지만은 않은데, 입안을 애무하는 혀는 언제나 그를 닮아 다정하고 섹시했다.
후진 쌤의 손이 더듬더듬, 가운 안으로 들어왔다. 따뜻한 손이 가슴을 지분거리다 유두를 톡 건드렸다. 부드러웠던 것이 그의 손끝에 꾹 눌리고 비벼지면서 작게 일어났다. 허벅지 사이로 탄탄한 다리가 들어왔다.
“흣…….”
허벅지가 둔부를 타고 내려가 고환을 눌렀다. 유리창에 닿은 손가락이 미끄러졌다. 빠듯한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선생님이 내 몸을 돌려세우고 무릎을 올려 다리로 성기를 꾹꾹 눌렀다. 아래가 점점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게다가 지근지근 문질러지는 가슴이 점점 예민해져서 어깨가 움찔거렸다. 입천장에 사르륵 닿는 혀에 아랫배가 간지러웠다.
그의 손이 거칠게 가운 끈을 풀어 헤쳤다. 가운이 흘러내려 떨어지면서 등에 차가운 유리가 닿았다. 입술이 목덜미로 내려왔다. 여린 살에 입술이 파묻히는 느낌이 선명했다. 가슴을 지분거리던 손이 내 것을 힘껏 쥐었다.
“하윽…….”
벌써 쿠퍼액이 흘러나왔다. 선생님의 크고 따뜻한 손은 단지 만지는 것만으로도 나를 잔뜩 흥분하게 만들었다. 기둥과 고환을 함께 쥐며 주물럭거리던 손이 더 아래로 내려와 물기가 남은 입구를 매만졌다.
“침대로 갈까요.”
“……네.”
침대에 눕혀지자마자 그가 유두를 물어뜯듯 씹으며 손으로는 성기를 애무했다. 아릿한 고통에 소리를 내지르자 달래듯 혀를 내밀어 부드럽게 핥아 주었다. 후진 쌤의 부들부들한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허리를 움직였다. 선생님의 따뜻한 손바닥 안에 성기가 비벼지는 느낌은 좋다는 말로도 부족했다.
다리를 들어 정강이로 그의 것을 문질렀다. 이미 반쯤 발기한 것이 내 다리가 닿자 더욱 단단해졌다. 그가 신음을 흘리며 유두를 느릿하게 빨았다. 엄지가 귀두를 강하게 지분거렸고 손바닥은 빠르게 기둥을 쓸었다. 위아래로 가해지는 자극에 발가락이 움츠러들었다.
“하아, 쌤…….”
손바닥이 선단을 쥐듯이 누르자마자 사정감이 느껴졌고, 결국에는 정액을 토해 냈다. 침실이 적당히 덥혀진 데다 흥분감에 얼굴에 열이 올랐다. 선생님이 내 뜨거워진 뺨에 쪽, 쪽 입을 맞췄다.
“후진 씨.”
“응.”
“저 소원 지금 들어주세요.”
“뭔데?”
“이거요.”
후진 쌤이 입고 있는 가운을 벗기고 그를 눕혔다. 가운을 가늘게 접고 선생님의 눈을 가리도록 얼굴에 둘러 묶었다. 그러자 후진 쌤이 피식 웃었다.
“이거?”
“네.”
후진 쌤 위에 엎드려 탄탄한 가슴을 짚고 유두를 핥았다. 그가 계속 웃어서 몸이 잘게 떨렸다.
“왜 웃으세요.”
“아니, 그냥……. 뭐라고 해야 되나.”
혀를 살짝살짝 움직이며 눈만 들어 그를 보았다. 가운에 가려져 눈을 볼 수 없는 게 조금 아쉬웠다.
“귀여워서.”
선생님이 더 귀여우시거든요, 하는 말을 삼키고 유두를 질근 깨물었다. 내가 나이가 더 적기 때문인지 선생님은 귀엽다는 말을 달고 다니시는 경향이 있다.
입술을 내려 배꼽 근처를 쪽쪽대다 크게 부풀어 오른 성기에 쪽, 입을 맞췄다. 머리 위에서 나른한 신음이 들려왔다. 성기에서 입을 떼고 내 손가락을 빨아 타액을 묻히고 다시 선생님의 것을 물면서 뒤로 손을 가져갔다.
소원을 이렇게 쓸 작정이었기에 안에 미리 젤을 묻혀 놔서 손가락 하나는 매끄럽게 들어갔다. 귀두를 부드럽게 핥다가 고개를 숙여 기둥을 반쯤 머금었다. 사실 후진 쌤 건 좀 커서 입으로 물 때면 내 얼굴이 어떻게 보일지 몰라 조금 그런데, 볼 눈이 없으니 평소보다 조금 더 강하게 빨아들였다.
“하아……. 진아.”
손가락 하나를 더 안으로 넣어서 안을 늘리며 눈을 들었다. 후진 쌤은 기분이 좋으면 내 이름만 부르곤 했다. 기분이 좋으시구나, 생각하며 고개를 조금 더 깊이 숙였다. 목구멍 가까이 처박힌 것이 조금 버거웠지만 바짝 조이며 뒤로는 손가락 하나를 더 넣었다. 세 개쯤 되니 조금 벅차졌다. 그래도 세 개로 끝낼 생각이었다. 그의 것은 세 개로는 조금 빡빡했지만, 네 개를 혼자 하기엔 좀 힘들었다.
쿠퍼액이 흘러나오는 곳을 핥자 꾹 눌러 참는 소리와 함께 큰 손이 내 머리에 얹혔다.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목덜미로 내려왔다. 그 손길이 기분 좋았다. 만약 내가 고양이나 강아지였다면 선생님이 쓰다듬기만 해도 소리를 냈을 거다.
선생님의 손이 점점 아래로 내려왔다. 척추를 쓸던 손이 더 아래로 내려와서……. 뒤를 풀고 있는 내 손과 닿았다.
아. 웬만하면 같이 하자고 하셨는데…….
“진아.”
귀두를 쪽 빨고 나서 손가락을 빼냈다. 고개를 들었을 때는 후진 쌤이 눈을 가린 가운을 풀고 나를 보고 있었다.
“쌤, 반칙이에요…….”
“언제까지 가리고 있으라는 말은 안 했으니까.”
선생님이 내 코를 톡, 건드리고 나서 일어나 나를 그대로 눕혔다. 그러고 나서 내 양 손목을 잡아 위로 올리더니 가운을 들고 얼굴 위로 묶었다. 그러니까……. 눈이 가려지면서 팔이 묶여서 앞도 안 보이고 손도 움직일 수 없었다. 사실 팔이야 힘만 주면 얼마든지 풀 수 있었지만, 차마 풀 수가 없었다.
“혼자서 다 하고. 너무 어른이네, 우리 정 선생은.”
선생님의 손이 내 다리를 들어 올리고, 허벅지를 쓸어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눈이 가려져서인지 그가 내 살결을 만지는 것이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아…….”
손가락이 젖은 입구를 비볐다. 그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몰라서 불안했다. 아니, 이 기분은 불안하다기보다는 애탄다고 하는 게 더 맞았다. 그가 어떤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을지 궁금하면서도 차마 가운을 풀지는 못했다.
둔부가 바짝 벌려지고, 무언가가 닿았다. 젤을 묻힌…… 손가락이 아니었다. 물컹하고 촉촉한 감각은 혀 같았다. 물컹한 살덩이가 입구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아…….”
생각지도 못한 것에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혀는 조금……, 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좋아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매끄럽게 내벽을 얕게 핥는 것에 허리가 절로 들썩여졌다.
“예쁘다.”
혀가 아래를 계속해서 부드럽게 핥자 입안에 절로 침이 고였다. 성기가 다시 단단히 서는 것이 느껴졌다. 예쁘다, 란 말을 끝으로 혀가 뒤로 물러났다.
그 뒤로는 정적이 흘렀다. 내 몸에 손도, 입술도 닿는 것이 없었다. 아래가 기대감으로 움찔거리는 것이 느껴지는데, 정작 닿아 오는 것이 없으니 애가 타 나도 모르게 허리를 살짝 들어 올렸다.
“후진 쌤…….”
“네.”
“왜, 뭐하세요.”
“아, 미안. 감상했어요. 안 보였지.”
“무슨 감상, 흐읏……!
곧바로 두꺼운 것이 입구를 뚫었다. 허벅지를 쥔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가서 다리가 아릿해졌다.
“덜, 풀었네.”
“흣, 괜찮아요…….”
입술 위로 물컹한 것이 내려앉았다. 그것이 입술이라는 것을 깨닫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입술이 가볍게 닿았다 떨어지기에 아쉬워 고개를 젖히니 웃음소리와 함께 입술이 다시 맞물렸다.
성기가 천천히 들어와 끝까지 처박혔다. 아래가 완전히 채워졌다는 만족감에 한숨을 흘렸다. 혀가 여린 살을 지분거리고, 성기가 뒤로 물러났다가 안을 바짝 쑤셨다.
보이는 것은 없고 손을 움직일 수 없으니 아쉬움에 침대 헤드를 긁자 손가락 사이사이로 후진 쌤의 손가락이 들어왔다.
내가 웃자 귓가에 똑같이 웃음이 흩뿌려졌다. 선생님이 부드럽게 허리를 움직였다. 빠져나가던 살덩이가 다시 안으로 처박혀 내벽을 지그시 누르는 것이 아주 노골적으로 느껴졌다. 눈앞이 캄캄해서 오로지 감각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선생님이 허리를 조금만 움직여도 아래가 바짝바짝 조여졌다.
“오늘, 읏, 예민한데.”
“후진 쌤, 좋아요, 아……!”
속살에 정확히 처박혀 꾹 짓누르는 성기의 온도까지 빠듯하게 느껴졌다. 눈앞은 분명 캄캄한데, 순간 빛이 자잘하게 터지는 것만 같았다.
안을 채우던 것이 뒤로 물러났다. 꼭 빠질 것처럼 크게 물러나서, 나도 모르게 다리를 굽혀 선생님의 허리에 감고 아래로 꾹 눌렀다. 그러자 성기가 안으로 퍽 처박혔다. 입이 벌어지면서 손끝이 잘게 떨렸다. 선생님의 것이 드나들 때마다 내벽이 뜨겁게 쓸리면서 연속해서 예민한 곳을 자극했다.
“흐윽, 읏, 아, 쌤…….”
얼굴 곳곳에 입술이 내려앉았다. 가운 위로, 감은 눈 위로 입술이 느껴졌다. 좋아해요, 라고 선생님이 작게 중얼거리는 것이 들렸다. 다리로 그의 허리를 바싹 조이며 엉덩이를 움직임에 맞추어 흔들었다.
입술에 입술이 닿았을 때 붙잡고 싶어 혀를 내밀었다. 선생님이 내 혀를 휘감으면서 내 머리 뒤로 손을 가져갔다.
순식간에 시야가 환해졌다. 고양되고 흥분된 얼굴이 나를 내려다보며 내게 키스하고 있었다. 어쩐지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아서 자유로워진 팔을 선생님의 목덜미에 감았다.
“아, 읏, 좋아요, 좋아요, 선생님, 아……!”
“눈이 예뻐서, 가리면 내가 손해야.”
그렇게 말하면서 후진 쌤이 내 눈가에 키스했다. 나는 선생님의 턱에 입을 맞추며 그에게 바짝 매달렸다. 안을 꽉 채우며 눌러 오는 것에 턱을 살짝 깨물었다. 끝도 없이 올라가는 쾌감에 손끝에 잔뜩 힘을 준 채로 사정했다. 탈력감에 한숨을 내쉬고 있는데 후진 쌤이 미간을 좁히며 내 뺨에 입을 맞췄다.
“미안해요.”
“네?”
“콘돔을 잊었네.”
“아……. 괜찮은데.”
“씻겨 줄게.”
후진 쌤이 허리를 뒤로 물리는데 내벽이 쓸렸다. 나도 모르게 움찔하자 그가 웃음을 흘리며 나를 일으켰다. 침대에서 내려오자마자 뜨뜻미지근한 액체가 허벅지를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어쩐지 민망해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목욕을 끝마치고 나왔을 때는 이미 한밤이었다. 목욕을 하면서도 한 번 더 해 버린지라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가운을 여미고 창 앞에 섰다. 바깥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함박눈이었다.
“쌤!”
“응.”
내 부름에 선생님이 천천히 다가와서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내 배 위에 얹힌 선생님의 손에 손을 얹고 창밖을 보았다.
“예쁘다. 그쵸.”
“응. 눈이 다 오네.”
“첫눈이에요. 강원도라 그런가, 첫눈도 펑펑 오네요.”
누구나 연인이 생기면 하고 싶은 일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나는 좀 많은 편이었는데, 그중에 하나가 첫눈을 같이 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첫눈이 딱 내리는 날 같이 있는 건 생각보다 힘든 일이니까. 그런데 이렇게 생각보다 쉽게 기회가 찾아올 줄은 몰랐다.
“후진 쌤.”
“응.”
“다음에 눈 내리는 날엔, 뭐하면 좋을까요?”
나는 자연스레 다음을 말하며, 선생님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니까 이건, 약속이었다. 다음 눈 내리는 겨울에도, 나와 같이 있어 달라는 약속.
“음, 영화를 하나 빌려 와서 불 다 끄고 귤을 먹으면서 볼까요.”
아주 아늑하고 소소하게 그려지는 미래에 푸스스, 웃음이 터져 나왔다. 선생님이 그리는 소소한 훗날은 언제나 따뜻하고 다정했다. 선생님을 닮아서.
“그럼 그 전엔 저녁을 먹어야겠죠. 제가 계란말이를 할 테니까 쌤은 김치찌개를 하세요.”
“과일은 정 선생이 깎고?”
“귤인데요?”
“응. 그러니까.”
“아하하! 넵. 제가 까서 입까지 손수 대령해 드릴게요.”
“그럼 내가 설거지도 하고, 빨래도 해야겠네.”
“다 하시게요?”
“정 선생 건 남겨 놨죠.”
“뭐요?”
“힘 뺄 거니까, 힘 아껴 두기?”
“하하-!”
선생님은 간혹 이렇게 허를 찌르실 때가 있다. 예상하지 못한 말로 내 기분을 하늘 위로 치솟게 만드시는 선생님을 볼 때면 너무 사랑스러워 참지 못하겠다.
결국 고개를 돌려 선생님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기다렸다는 듯 선생님도 내게 키스했다.
함박눈이 펑펑 내렸다. 이 겨울이 지나도 우린 함께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