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동틀 녘
담배를 끊기로 했다. 이번엔 어느 누구 때문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
사실은 정 선생을 위해서였다. 그를 사랑하기에, 그와 함께할 것이기에 백해무익한 담배를 끊으려고 한 것이었지만, 이유를 그로 두어서 훗날 그를 원망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 언젠가 정 선생 때문에 다시 담배를 피우더라도 담배를 끊은 것이 너 때문이었는데, 하는 한심한 생각은 하지 않기 위하여.
내 금연 소식을 듣고 정 선생은 내게 사탕을 물려 주었다. 단맛보다는 입안을 시원하게 해 주는 것이 좋을 거라며 박하사탕을 가지고 다니면서 내게 하나씩 주었다. 박하사탕을 입안에서 굴리며 키보드를 두드렸다.
2학기 중간고사가 다가오고 있었다. 고등학교보다는 덜하지만 아무래도 요즘은 평가에 대해선 예민한지라 문제를 내는 데 공을 들일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
“네.”
“눈 안 아프세요?”
“난 괜찮은데. 피곤해요?”
“조금요. 으으, 평가 기준 맞춰 내려니까 머리가 너무 아파요.”
정 선생이 책상 위에 엎드려서 앓는 소리를 냈다. 뻗은 그의 손을 움켜쥐자 그가 고개를 들며 히히 웃는다.
우리는 구석진 곳에 있는 다목적실의 큰 책상 하나를 두고 마주 앉았다. 각자의 노트북을 들고 와 집중이 되지 않을 때는 종종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며 문제를 만들었다.
“이것만 하고 맛있는 거 먹으러 가죠. 저녁 대충 때웠으니까.”
“네. 저 떡볶이 먹고 싶어요!”
“떡볶이로 되겠어요?”
“그럼요. 즉석 떡볶이 먹으러 가요.”
“그래요.”
그는 금방 기운이 났는지 벌떡 일어나서 키보드를 두드렸다. 그 모습을 보고 웃음을 삼키며 노트북으로 시선을 돌렸다.
10분 정도 지난 뒤 우리는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났다. 정 선생의 안내대로 학교에서 멀지 않은 즉석 떡볶이집에 도착했다. 저녁에는 술을 팔아서 안주로도 성인들도 많이 찾을 수 있도록 해 놓은 집이었다.
“음, 맛있는 냄새 나요.”
“그렇게 좋아요?”
“가끔씩 이런 거 당길 때 있지 않나요? 달콤하고 매콤하고.”
그런 적은 없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피곤한 것과는 별개로 기분이 좋아 보였다.
“시험 끝나면 뭐 할까요.”
“음, 놀러 갈까요? 시험 끝나면 주말이니까 공기 좋은 곳 가서 한 밤 자고 와도 괜찮을 것 같은데. 아, 캠핑 갈까요?”
“캠핑? 괜찮네. 가 본 적 있어요?”
“학부생 때 두 번 정도요. 괜찮더라고요. 공기도 좋고, 맛있는 것도 먹고.”
“그래요. 정 선생만 믿고 가면 되겠네.”
내 말에 그가 어깨를 움츠리며 웃었다. 그가 웃으면서 맞닿은 신발 끝이 조금 흔들렸다.
재료를 담은 냄비가 버너 위에 놓였다. 보글보글 끓기 시작한 떡볶이를 보며 정 선생이 입을 열었다.
“제가 즉석 떡볶이를 고등학생 때 처음 먹어 봤거든요. 그때가 여름인가 가을이었을 거예요. 친구들이랑 먹으면서 이게 뜨겁고 매콤하니까 땀이 뻘뻘 나서 나중에 애인 생기면 이건 같이 먹지 말아야지, 했어요.”
“근데 나랑 먹게 되네요.”
“그래서 좀 천천히 먹으려고요.”
손끝으로 정갈하게 놓인 젓가락을 톡톡 두드리는 정 선생을 턱을 괸 채로 보다가 웃었다.
“땀 좀 나면 어때서.”
“막 헥헥대고 훌쩍이고 땀 뻘뻘 났었어요. 이마에 땀 한 방울 예쁘게 흘러내리는 게 아니라요.”
“괜찮아요. 내 앞인데, 뭐.”
오히려 귀여울 것 같은데. 원래 쉽게 볼 수 없는 무방비한 모습이 더 귀여운 법이니까 말이다.
“……그럼 후진 쌤도 그런 모습 보여 주실 거예요?”
“나? 어떤 모습.”
“그냥, 흐트러진 모습이요.”
“어떤 게 보고 싶은데요?”
국자로 국물을 휘저으며 물었다. 그러나 답이 들려오지 않아서 눈을 들었을 때, 정 선생은 손가락만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그런 그의 귀 끝이 발긋했다. 냄비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 때문인지 에어컨을 좀 세게 틀어 놓은 것 같긴 했다. 재킷을 벗어 건네주자 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안 추워요?”
“아뇨, 아뇨. 괜찮아요. 선생님 입으세요.”
재킷을 의자에 걸쳐 두고 직원을 불러 에어컨 온도를 높여 달라고 말한 뒤 불을 줄였다.
“이제 먹어도 되겠는데.”
“네.”
떡볶이는 매콤하다기보다는 달콤한 쪽에 더 가까웠다. 딱 아이들이 좋아할 것 같은 맛이었는데, 술이랑도 궁합이 나름대로 괜찮겠다 싶었다.
입에 잘 맞는지 땀은커녕 예쁘게 잘도 먹는 그를 보다가 문득 나는 학창 시절에 이런 걸 먹을 시간이 없었다는 것이 떠올랐다. 한참은 지난 일을 그에게 이야기해 위로를 받고 싶다는 생각을 했으나 한편으로는 너무 구질구질하다 싶어 물로 아쉬움을 달랬다.
떡볶이를 다 먹고 나와 차에 올라타니 정 선생이 내 입에 박하사탕을 넣어 주었다. 겉이 반들반들한 사탕을 입천장에 닿도록 굴리자 박하 향이 순식간에 입안을 채웠다.
“아, 빨리 시험이 끝났으면 좋겠는데 내일은 안 왔으면 좋겠어요. 출근할 생각하니까 힘들어요.”
“이제 적응 좀 됐나 봐요. 처음에는 학교 가고 싶어 했잖아요.”
“그때는…… 모든 게 새롭고 재밌었으니까요. 물론 지금도 재밌긴 한데, 아침에 일어나는 건 너무 힘들어요.”
“같이 가죠. 내일부턴 늦게 일어나요.”
이제 유예 기간 같은 건 두지 않으려고 한다. 끝이 언제 오든 짧은 시간이라도 더 같이 있으면 좋으니까. 끝이 언제 올지는 모르겠지만, 재고 따지지 않으려고 한다. 이제 더는 그를 상처 입히고 싶지 않으니까.
“정말요? 감사해요.”
그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그가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정 선생이 안기 더 편하게 몸을 돌린 뒤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머리칼이 손가락을 간질였다.
“후진 쌤.”
“네.”
“그냥 불러 봤어요.”
그가 장난스레 키득거렸다. 고개를 숙여 그의 귓가에 입을 맞추자 그가 어깨를 움츠리며 또 한 번 웃었다.
“너무 많이 먹었나 봐요. 배불러서 바로 못 잘 것 같아요.”
“속 안 불편할 때 자요. 잠은 내일 내 차에서 자도 되니까.”
“에이, 잘 시간이 어디 있어요. 쌤이랑 얘기해야지.”
내 어깨에 이마를 비비면서 애교를 부린다. 그의 귀에 다시 한 번 입술을 꾹 눌렀다 뗐다.
“그럼 씻고 전화할게. 얘기하다 자죠.”
“네, 좋아요.”
“들어가요.”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그가 차에서 내려 손을 흔들었다. 창문을 내려 손을 마주 흔들어 주고 출발했다.
불 꺼진 집 안은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낮에는 아직 덥지만 밤이 되면 금방 공기가 식었다. 불을 켜고 바로 욕실로 들어가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고 나왔다. 침대에 걸터앉자마자 정 선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조금 흐른 뒤에 그가 전화를 받았다.
-네, 선생님.
“씻었어요?”
-네, 방금 씻고 누웠어요.
“배불러서 못 자겠다면서 금세 누웠어요?”
-아, 그게요. 씻고 나오니까 쑥 내려간 거 있죠?
그의 능청에 웃음이 나왔다. 내가 웃자 그도 따라 웃었다.
-선생님은 안 피곤하세요? 일찍 주무실래요?
“불면증이 있어서. 괜찮아요.”
-불면증이요? 언제부터요? 심하세요?
걱정이 깃든 목소리는 꼭 어리광을 부리고 싶게 만든다. 뒤로 누워 이불에 젖은 머리칼을 비비며 입을 열었다.
“어릴 때부터 불면증이 있었어요. 그래도 어릴 땐 알바를 하느라 몸이 힘들어서 잠이 잘 오는 편이었는데, 성인이 되고 나서는 주기가 들쭉날쭉해요. 어느 때는 잘 자다가도 어느 때는 또 못 자고.”
-그럼 잘 못 주무시고 출근하시는 거예요? 몰랐어요. 힘드셨겠다.
“익숙해지면 괜찮아요.”
-그러고 보니까 그때도 못 주무셨다고 하신 거, 불면증 때문이었구나.
“그때?”
-제가 자연의 소리 드린 날이요. 그거 잘 듣고 계세요?
“아, 그거. 요즘엔 안 들었네요. 첫날 그거 들었을 때는 바로 잠이 오던데.”
-효과 좋죠? 그럼 오늘 그거라도 들어 보세요.
“소리보다는, 정 선생 목소리 때문에.”
그때는 정 선생을 좋아했던 것도 아닌데, 그의 목소리를 들으니 거짓말같이 잠이 솔솔 몰려왔었다. 어쩌면 그때부터 예견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를 좋아하게 된 것이.
-정말요? 흠, 그럼 오늘 제 목소리 듣다가 주무실래요?
“그래요. 사실 지금도 눈이 조금 감기는데.”
-잘됐다. 무슨 얘기할까요?
“어릴 때 얘기 해 줘요.”
-어릴 때요? 무슨 얘기를 할까. 아, 저 고등학교 때 연극부였거든요.
“연극을 했었어요?”
-네. 축제 때 한 번 나가서 공연하는 거였어요. 평소엔 거의 노는 동아리고.
“무슨 역 했습니까. 주인공 했을 것 같은데.”
-하하, 아니요. 조연이었어요.
만약 내가 관객이었다면 주인공보단 조연을 맡은 그에게로 더 눈길이 가지 않았을까. 그는 유난하게 생긴 편은 아니었으나 늘 눈길을 끌어당기는 무언가가 있었다.
-동성애자 역이었어요.
“동성애자?”
-네. 사실 전 그 역을 할 생각이 없었거든요. 아니, 하기 싫었어요. 좀 무서웠거든요.
“뭐가요.”
-그 역을 해서 제가 그쪽이라는 걸 들킬까 봐요. 사실 전 아무 생각 없었는데, 부원들이 이 역이 너랑 어울릴 것 같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무서웠어요.
고등학생 때의 그를 떠올렸다. 지금보다 앳되고 어릴 그를.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고 있고 숨겨야 함에도 정체성이 드러날지 모를 역을 맡게 된 기분은 어땠을까. 나라면, 못 했을 거란 결론에 다다랐다.
-근데 유난을 떨면 더 이상해 보일 것 같아서 그냥 했어요. 그런데, 생각보다 괜찮더라고요. 애들이 저를 동성애자 A로 보는데, 역겨워하지도 않고 싫어하지도 않고 이상하게 여기지도 않고. 그래서 너무 좋았어요. 그때는 진짜 저로 살아가는 느낌이었거든요.
“언제부터 알았어요?”
-제가 남자를 좋아하는 걸요?
“응.”
-음, 중학생 때부터 어렴풋이 느꼈던 것 같아요. 친구한테 드는 관심이, 일반적인 친구에게 드는 관심이랑은 좀 다르다는 걸 알았거든요. 그리고 고등학생 때 여러 일을 접하면서 자연스럽게 알았어요.
“힘들었겠네. 어릴 때 감당하기는 힘든 일이잖아요.”
-조금요. 나는 똑같은 사람인데, 똑같은 삶을 살고 있는데 내가 동성애자라는 걸 자각하는 순간부터 굉장히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기분이었어요. 주변은, 세상은 그대론데 내 안에서만 큰 파도가 이는 거죠. 막연히 무섭고 답답하고, 그런데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은 없고. 그래도 그 연극 이후로는 좀 괜찮아졌던 것 같아요.
그가 내 앞에 있었다면 안아 줬을 거다. 이제까지 이성애자로 살아왔던 나는, 적어도 사회가 정해 놓은 평범함에서는 벗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어린 날의 그가 어땠을지 어렴풋한 정도로밖에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래도 성인이 되면서 나아졌어요. 커밍아웃이란 것도 해 보고요.
“그때 봤던 그 친구, 말이죠.”
-네. 그 친구 말고도 몇 명이요. 세상이 제 마음대로 되지는 않더라고요. 소수에게 했는데, 극소수만 제 곁에 남았어요. 그래도 남아 줬다는 점은 참 감사하죠.
“용감했네요, 정 선생은.”
큰맘을 먹고, 라는 말로는 표현하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인생을 살면서 사람들이 조금씩 내는 용기를 그는 한꺼번에 끌어다 써야 하지 않았을까. 무섭고 힘들었을 것이다. 수학여행 마지막 날, 전화를 하다 문득 뒤를 돌아보곤 그대로 희게 굳어 버렸던 정 선생의 낯이 다시 떠올랐다. 그때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때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괜찮다며 그를 안아 주고 싶었다.
-사실은 용감하지 않아서 말한 건지도 몰라요. 거짓말을 늘어놓게 되는 순간들이랑, 진짜 나를 모르는 친구들과 웃고 떠드는 게 무서웠거든요.
“그래도 잘 버텼잖습니까. 고생했어요.”
-으흠, 후진 쌤한테 그런 말 들으니까 기분 좋네요.
“부모님은 모르시고요.”
-네. 사실 저희 어머니가 조금 개방적이시라고 해야 하나, 그렇거든요. 학생 때 너 여자 친구랑 잘 거면 콘돔 잊지 마라, 라고 직접적으로 말하시는 분이었어요. 그래서 괜찮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었어요. 그러다가 어느 날, 같이 장을 보고 돌아가는 길에 슬쩍 말했거든요. 엄마, 사람들은 사실 80퍼센트 정도가 양성애자래. 근데 사회적인 시선이나 틀 때문에 이성애자로, 이성애자인 줄 알고 살아가는 거래. 그런데 어머니가 그때 그러셨어요. 그래? 어우, 그래도 난 좀 싫다. 여자가 날 좋아한다고 하면.
코가 찡했다. 덤덤한 정 선생의 목소리에서 그날의 기분과, 이제까지 했을 고민들이 읽히는 것만 같아서.
-그래서 그날 말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남녀 관계에 개방적인 거랑, 동성애에 개방적인 거랑은 전혀 다르다는 걸 알았거든요.
“정 선생이 정 선생이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음, 무슨 뜻이세요?
“당신이 당신이라서 여기까지, 잘 왔다는 뜻.”
-……으으.
“왜 그래요.”
-선생님은 가끔, 말로 가슴을 찌르세요.
국어 선생이라 그런가 표현이 남다르다. 그저 웃음을 흘리고 있자 그가 헛기침을 하더니 화제를 돌렸다.
-후진 쌤 어릴 때 이야기도 듣고 싶어요.
그에게 하려고 했으나 미처 말하지 못했던 일들을 떠올렸다. 슬픔은 나누면 배가 되고, 해결할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의 어깨 위에 굳이 짐을 얹어 주고, 지리멸렬하고 형편없던 내가 지나온 길을 굳이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지난날을 말해 주었던 것처럼, 나 또한 그에게 내 속살을 보여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로를 받고 그에게 어리광을 부리고, 그럼으로써 내 삶을 내내 짓눌러 왔던, 계속 짓눌러 올 그것들을 조금이라도 털어 내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미뤄 두었던 기회를 지금 만들어 냈다. 그에게 나의 이야기를 했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그는 나라는 사람의 삶 또한 짊어지는 사랑을 해야 할 테고, 나는 그것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두려웠지만 그럼에도 입을 열었다. 진짜 나를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그의 손에 쥐여 주려 했다. 그 무게를 감당하는 건 그의 몫이지만, 그 무게를 짊어지게 될 그를 지탱하는 건 내 몫일 테다.
그는 내 이야기를 듣는 중간중간 한숨을 삼키거나 숨을 들이켰다. 그 소리가 너무 적나라하게 들려서 웃음이 나올 것 같았지만 산통을 깨진 않았다. 지리멸렬한 이야기를 하면서 이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웃음을 참으면서 할 수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게 다 그가 너무 귀여운 탓이다.
-저도 그 말, 돌려 드리고 싶어요.
내 이야기가 끝나자, 정 선생은 한숨을 푹 내쉰 뒤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이요.”
-당신이 당신이라서, 여기까지 왔구나. 잘하셨어요. 김 선생님이 김 선생님이라서 다행이에요.
그의 말이 내 가슴을 찌른다. 이제야 그가 무슨 이유로 그런 말을 한 건지 이해가 되어 웃음이 나왔다.
-저라면 버티기 힘들었을 거예요.
“버틴 게 아니라, 꾸역꾸역 살아온 쪽이죠.”
-어느 쪽이든요. 그래도 이렇게 살아서, 제 곁에 오셨잖아요. 버티지 않으셨다면 제 곁에도 없으셨을 거 아니에요. 그래서 감사해요.
내 삶에 감사를 말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누구에게도 감사를 들을 만큼 멋진 인생을 살지 못했다. 특히 그에게는, 오히려 사과를 말해야 할 만큼 어리석었는데.
눈이 시큰거렸다. 어렸을 때는 울 시간이 없어서, 울면서 내 인생을 한탄하기에는 너무 시간이 부족해서 울지 못했다. 성인이 되고 나서는 성인이 되었기 때문에, 한 명의 성인 남자가 울음을 터뜨리기에는 세상은 부드럽지 못해서.
네 살 어린 애인 앞에서 울고 싶다는 생각이 또 들었다. 내가 아이처럼 엉엉 울어도 그는 나를 감싸 안아 주겠지. 그런 확신이 들자 그가 그라서, 그가 내 곁에 있어서 무척이나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이런 나를 사랑해 준다면, 내가 나여서 다행이지 않을까. 내가 나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나였다면 더 좋았겠지만.
“정 선생 이야기 더 해 줘요.”
내 말에 그는 그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의 이야기가 끝나면 내 이야기를 했다. 우리는 핑퐁을 하듯 서로의 속살을 내보이고, 서로가 알지 못하는 과거를 공유했다. 그렇게 한참을 이야기하다 보니 서로의 이야기가 섞여 들어, 서로의 과거에 서로가 있는 듯했다. 내 시간에 그가 있어 준 듯했고, 그의 시간에 내가 있는 듯했다. 그간 걸어온 길에 그가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를 일찍 만났다면 좋았을 텐데. 내 첫사랑이 그였다면, 나는 조금 더 나은 내가 되지 않았을까. 사랑을 믿을 수 있지 않았을까. 마음껏 그를 사랑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녀들을 사랑했던 걸 후회하지는 않는다. 시간을 다시 돌려도, 나는 결국 그들에게 빠졌을 거다.
그래도 아쉬움이 든다. 정진이란 사람을 조금만 더 빨리 만났더라면 좋았을 텐데.
문득 창밖을 돌아보았을 때는 어느새 동이 트고 있었다. 그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다 보니 시간이 어느새 순식간에 흘러갔다.
출근을 해야 하는데, 걱정이 되지 않았다.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으면서 밤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죄책감이 들지 않았다. 다가올 아침이 벅차지 않았다.
-어, 벌써 해 떴어요.
“그러게요. 자야 했는데.”
-음……. 점심 먹지 말고 휴게실에서 잘까요?
“그래요.”
희뿌옇게 밝아지는 하늘이 예뻤다. 노랗게 익지 않은 햇빛이 검은 하늘을 몰아내고 푸름을 가져왔다.
동이 텄다. 그가 내 안에 들어왔다.
* * *
중간고사가 끝났다. 이번 시험엔 특별히 문제도 없었고 캠핑 때문에 기분 좋게 퇴근할 수 있었다. 정 선생이 가지고 있던, 그리고 주위에서 빌려 온 캠핑 용품들을 차에 싣고 마트로 향했다.
“음, 일단 밥이랑 고기랑 라면은 무조건 사요!”
“네, 네.”
고기라는 단어에 유독 강조를 하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선 카트를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즉석밥과 라면을 카트에 담고 정육 코너 앞에 서서 어떤 고기가 좋을지 고민을 하다 삼겹살과 목살을 샀다.
“야채도 사죠.”
“네. 쌈 야채랑 버섯, 양파, 마늘 정도면 되겠죠?”
“응. 과일도 살까요?”
“네. 과일은 뭐 좋아하세요?”
“안 깎아 먹는 건 다 잘 먹어요.”
“깎아 먹는 거 귀찮으신 거죠? 제가 깎아 드릴게요.”
어쩐지 게으른 남편이나 과일 하나 깎아 먹지 못하는 철부지 고등학생이 된 기분이라 멋쩍어 눈썹을 매만졌다. 그러자 그가 웃으면서 내 팔꿈치를 톡톡 쳤다.
“저거 먹어 봐요.”
정 선생이 카트 위에 얹힌 내 손을 끌고 소시지 시식 코너로 향했다. 그가 이쑤시개에 잘 구워진 소시지를 찍어 내 입가에 내밀었다. 소시지를 받아먹고 맛있다는 뜻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 형제가 사이가 좋네. 이렇게 같이 장도 보고.”
아주머니의 말에 둘 다 아차 싶어 눈을 마주쳤다. 정 선생이 혀를 씹은 채로 웃으며 돌아섰다.
“이거 맛있네요. 하나 주세요.”
“맛있죠? 구워 먹으면 아주 그만이야.”
“감사합니다.”
소시지를 카트에 넣고 우리는 시식 코너에서 멀어졌다. 정 선생이 짧게 웃었다.
“깜짝 놀랐어요. 생각 없이 손부터 나갔네요.”
“이 정도는 뭐 어때요.”
“좋으니까 아무 생각 못 했어요. 원래는 안 이러는데…….”
그가 콧등을 찡긋하며 입술을 비죽였다. 아무렇지 않게 흘리는 고백에 낯이 화끈해져서 머리를 정리하는 척하며 열 오른 뺨을 문질렀다.
“술도 살까요?”
“술은 조금.”
“저 그렇게 많이 안 마셔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는 주류 코너 앞에서 눈을 빛냈다. 수입 맥주 여러 개를 두고 끙끙 앓기에 결국 그가 탐내는 맥주는 모두 카트 안에 넣었다.
먹을 걸 잔뜩 사고 마트를 나왔다. 정 선생은 가는 내내 콧노래를 불렀다. 창문을 열고 싶어 했지만 10월에 들어서면서 저녁 바람이 점점 서늘해져 어쩔 수 없이 닫고 있어야 했다.
캠핑장은 경기도 변두리에 있는 공기 좋은 곳이었다. 드라마나 영화 촬영지로 유명해진 폭포 근처에 새로 생긴 캠핑장이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해가 지고 있었고 사람들이 꽤 많이 와 있었다.
우리는 텐트를 펴고 안에 짐을 넣은 뒤, 미니 난로를 켜고 간이 테이블을 세웠다.
“배고파요.”
“밥부터 빨리 먹죠.”
내가 그릴에 고기를 구울 때 그는 밥을 데우고 야채를 손질했다. 준비가 다 된 뒤에 고기가 얼추 구워져 그의 밥 위에 고기를 올려 주었다. 그는 그 고기를 쌈을 싸서 내게로 다시 돌려주었다.
“맛있죠.”
“응. 정 선생도 먹어요.”
“넵.”
고기가 대충 다 구워져서 불을 줄였다. 내가 고기를 굽는 동안 쌈을 싸 주던 정 선생이 편하게 젓가락을 들었다.
“맥주, 뭐 드실래요?”
“나는 그냥 기본으로.”
“네. 저는 자몽 맛 마실래요.”
캔을 따고 건배를 했다. 갈증이 났는지 그는 맥주를 꿀꺽꿀꺽 단숨에 삼켰다. 너무 빨리 비우는 듯싶어 그의 손목을 잡아 내렸다.
“천천히 마셔요.”
“시원해서…….”
그가 멋쩍게 웃으며 맥주 캔을 내려놓았다. 그러면서 주변을 흘금거리는 것에 그의 얼굴 앞으로 손을 흔들자 그가 시선을 내게로 돌렸다.
“어디 봐요.”
“저기 여자분들이 여기 계속 쳐다보시는 것 같아서요.”
“그래요?”
“네. 절 보는 것 같아요.”
“정 선생이 잘생겼으니까.”
“……아니에요.”
그가 얼굴을 감싸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의 밥 위에 고기를 올려 주고 있자니 그가 손 위로 눈을 빼꼼 내밀었다.
“사실 김 선생님 보는 것 같아요.”
“나? 정 선생이겠죠.”
“아니에요…….”
도리질을 하면서 또 얼굴을 감싸는 게 어쩐지 심란해 보여 젓가락을 내려놓고 그의 무릎을 톡톡 두드렸다.
“왜 그래요.”
“김 선생님은…… 질투심이 없으신가 봐요.”
“질투?”
갑자기 툭 튀어나온 단어에 웃음을 흘리자 그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왜 웃으세요.”
“아니, 생각지도 못한 단어라. 왜요. 내가 질투했으면 좋겠어요?”
그에게 물으면서 그의 그릇을 톡톡 두드리자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고기를 입에 넣었다. 정 선생이 우물거리면서 말했다.
“아니, 꼭 그런 건 아닌데요. 그냥…….”
“질투는 보통, 신뢰에 기반하는 거 아닙니까?”
“어, 전 후진 쌤 믿어요. 믿지만, 그거랑 질투랑은 다른 거라고 생각해요. 어떤 여자분이 와서 선생님한테 대시한다고 해도, 저는 선생님이 넘어갈 거라고는 생각 안 해요. 그래도 질투는 나요.”
정 선생이 미간을 좁히면서 이번엔 내 그릇을 두드렸다. 나는 입에 고기를 넣으면서 생각했다.
내가 처음으로 사랑했던 그녀가 나 말고 다른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말했을 때, 나는 그를 시기했다. 그래서 어떻게 했는가. 그녀에게 매달리고 구차하게 징징대고 그보다 내가 못한 게 뭐가 있냐 소리쳤다.
질투라는 감정은 독점욕이나 집착에서 비롯하는 감정이 아닌가. 내가 하는 질투라는 것은, 그와 같은 귀여운 감정이 아니다. 그를 옭아맬 것이고 구차하게 발목을 붙잡고 매달릴 것이고, 종내에는 그를 지치게 하고 내게 질리게 만들 것이다.
“정 선생이 다른 사람 만나도 난 괜찮아요.”
“……네?”
“날 떠나지만 않으면 되니까.”
아무렇지 않은 척, 정말 괜찮다는 척 말을 흘리고 고개를 돌려 맥주를 머금었다. 하지만 이젠 정말 괜찮다. 어린 날의 나는 그녀의 곁을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차지한다는 것을 견딜 수 없어 결국 그녀를 잃고 말았지만, 이제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을 수 있다. 그가 끝내 돌아오는 쪽이 나라면.
곁이 조용했다. 맥주 캔을 내려놓고 고개를 돌렸다. 그는 망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나는 순식간에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
화가 났나. 그러다 문득 내 말의 모순을 깨달았다. 버리지만 않으면 괜찮다는 말은, 버리지 말라고 애원하는 꼴이 아닌가.
또 구차해졌다. 그러자 문득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러나 이번엔 도망치지 않는다. 그를 먼저 떠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언제나 통보를 기다릴 것이다.
“저 좀 봐요.”
정 선생이 내 손목을 잡고 벌떡 일어났다. 나는 스툴을 뒤로 밀고 그를 따라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언뜻 보이는 그의 얼굴이 완벽히 굳어 있었다. 그가 잡은 손목이 화끈해졌다.
그는 나를 데리고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문을 닫자마자, 뒤돌아서 나를 안았다. 나는 뒤로 넘어지듯 누웠다. 그가 내 허리를 꼭 끌어안고 고개를 들었다.
“그런 말 하지 않기로 하셨잖아요.”
그가 짜증을 내듯 그러나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입이 움직이면서 그의 턱이 내 가슴에 툭툭 닿았다.
“음, 미안해요.”
“미안하지 않으시면서. 진심이셨죠?”
나를 너무 잘 알아 가면 곤란한데. 할 말이 없어 괜한 웃음만 흘리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저는 바람이나 피우는 파렴치한 사람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런 사람이랑 절 비교하지 마세요. 그때의 일을 지금 대입하실 필요도 없어요. 저는 저예요. 후진 쌤이 생각하는 저는, 그런 사람이에요?”
“아니요.”
“그러니까요. 그리고 질투해 주세요. 저도 질투받고 싶어요. 그건 사랑받는 기분이랑 똑같을 것 같으니까, 질투 많이 해 주세요. 제가 신는 신발까지 질투해 주세요.”
그가 장난스레 미간을 좁히고 내 가슴을 턱으로 톡톡 쳐 댔다. 자신이 신는 신발까지 질투해 달란 말이 더할 나위 없이 사랑스러워서 그의 허리를 마주 끌어안았다.
“키 큰 남자 좋아합니까?”
“네?”
“전시회 그 친구도 그렇고, 예전에 백화점 앞에서 봤던 그 친구도 그렇고. 다 크던데.”
어리둥절한 얼굴로 눈을 깜빡이던 정 선생의 얼굴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그가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코를 비볐다.
“아, 너무 좋아요.”
이렇게까지 좋아할 일인가 싶으면서도 이 정도까지는 괜찮은가 싶었다. 내 가슴에 딱 붙어 방금까지 표정을 굳혔던 건 없던 일처럼 쿡쿡 웃는 그를 보니 스멀스멀 밀려왔던 두려움이 순식간에 바스러졌다.
“그래서, 대답 안 해 줄 거예요?”
“네?”
“키 큰 사람이 좋아요?”
“음, 굳이 따지자면 작은 쪽보다는 큰 쪽이 더 취향이에요.”
“다행이네.”
“후진 쌤은 작아도 좋아했을 거예요.”
덧붙이는 상냥한 말에 그의 머리에서 손을 내려 그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그가 고개를 들었다.
“후진 쌤.”
“응.”
“좋아해요.”
“…….”
“나쁜 생각 하지 마세요. 좋은 생각만 해요. 그럴 수 있게 제가 옆에 있을게요. 도울 테니까요. 즐거운 생각만 해요, 우리.”
대책 없는 긍정은 좋지 않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이런 말이 필요했던 건가 싶어서 입매가 풀어지고 말았다. 대책이 없어도 나는 위로를, 사랑을 듣고 싶었나 보다.
그는 외로울 때 온전한 자신의 편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의 온전한 편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 그 또한 나의 온전한 편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욕심낸다.
나는 또 한 번 믿고 싶어진다. 또 한 번 스스로의 눈과 귀를 가리고 이번만큼은 괜찮을 거라 믿고 싶어진다. 안 된다고 스스로를 다잡아 봐도 밀려오는 물결을 어찌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는 언제나처럼 떠내려갈 뿐, 도착지는 언제나 사랑일 것이다. 절대 헤어 나올 수 없는.
고기를 먹다가 한바탕했더니 뭔가 부족한 느낌에 라면까지 끓여 먹고 커피를 한 잔씩 들었다. 퇴근을 한 뒤에 오기도 했고 해가 점점 짧아지고 있어서 밤은 금방 찾아왔다.
주변에 빛이 적어 밤하늘을 수놓는 별이 유난히 반짝였다. 우리는 나란히 앉아 담요를 같이 덮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별자리를 그렸다. 서로 자기의 별자리가 맞는다고 티격태격하다가 둘 다 아니라는 걸 뒤늦게 깨닫고 웃음을 터뜨렸다.
커피를 홀짝이다가 동시에 입을 떼면 서로 말하라고 한참을 실랑이를 벌이다가 또 웃음을 터뜨렸다. 주변이 아직 시끌벅적해서 우리의 나란한 웃음소리가 묻힐 수 있어 다행이었다.
붉은빛을 내는 난로와 따뜻한 커피 잔이 손을 덥혔다. 보는 눈들이 있어 손을 마주 잡을 수는 없었지만 이렇게 같이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손을 잡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내일은 뭐할까요?”
“우리 집 올래요?”
“좋아요. 맛있는 거 해 주실 거예요?”
“그러지, 뭐.”
“흠. DVD 빌려 갈까요?”
“좋아요.”
밤이 점점 깊어 갈수록 공기는 점점 차가워졌다. 우리는 자리를 정리하고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침낭에 몸을 누이고 손을 잡았다.
“후진 쌤.”
“네.”
“꿈꾸지 말고 푹 주무세요.”
“정 선생도.”
그의 엄지가 내 손등을 어루만졌다. 오랜만에 단잠을 청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새소리와 함께 눈을 떴다. 남색의 텐트가 보이자마자 고개를 돌렸다. 정 선생이 내 쪽으로 돌아누워 자고 있었다. 자는 동안 붙잡은 손은 여전했다.
얇지만 긴 속눈썹을 보다가 작게 벌어진 입술로 눈길을 돌렸다. 연붉은 입술 사이로 흰 이가 자그맣게 보였다. 잡티 하나 없는 매끄러운 볼을 보다 흘러내린 머리칼 사이로 그의 눈썹 위에 있는 자그마한 점을 발견했다. 아주 작아서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발견하지 못했을 점이었다.
엄지를 들어 눈썹과 함께 그 점 위를 쓸었다. 그러자 그가 눈썹을 꿈틀했다. 손을 내려 그의 뺨을 문질렀다. 닫혀 있던 눈꺼풀이 스르르 열렸다. 다갈색 눈이 내게로 향한다.
“……선생님?”
“네.”
“잘 주무셨어요?”
“덕분에.”
정 선생이 웃었다. 부스스한 웃음이었는데도 아침 햇빛같이 싱그러웠다. 그가 눈을 비비더니 내게 안겨 왔다. 나는 손을 들어 그의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내렸다.
“몇 시예요?”
“10시 다 됐어요.”
“오래 잤네요.”
“슬슬 일어나야죠.”
“네.”
우리는 일어나자고 말은 해 놓고 한참을 껴안고 누워 있었다. 밖에서 사람들이 아침을 먹고 자리를 정리하는 소리를 들으며 서로의 온기를 느끼고 있다가 이제 정말 일어나야겠다 싶어 일어났다.
자리를 정리하고 바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조금 걷기로 했다. 자갈길을 걸어 폭포로 향했다. 우거진 나무들을 지나쳐 폭포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갔다. 곱게 물든 단풍들 사이로 주상 절리에 둘러싸인 폭포가 보였다. 고인 물은 밤에 물든 하늘처럼 어두웠지만 한편으로는 맑은 빛을 냈다.
주위에 사람이 없었기에 손을 잡을 수 있었다. 맞잡은 손을 난간 위에 올려놓고 아래를 내려다보던 정 선생이 입을 열었다.
“후진 쌤.”
“네.”
“공기가 너무 좋죠.”
“네.”
“다음에 또 와요. 아니, 다음엔 다른 곳도 가요.”
“그래요.”
“약속이에요. 선생님이랑 저의.”
그는 약속을 말했고, 다음을 말했고, 그로써 미래를 말했다. 짧은 마디에 담긴 뜻을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그의 목소리는 상냥하고 다정했다.
나는 대답 대신 그의 손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그가 웃었다. 낭랑한 웃음소리가 단풍과 녹음이 짙은 이 공간 안을 울렸다.
집으로 돌아와 아침 겸 점심을 먹고 빌려 온 DVD를 보았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는 소파에 바짝 붙어 누워 잠을 잤다가 일어나서 저녁을 먹고 텔레비전 앞에 앉아 과일을 먹었다.
우리는 소파에 앉는 게 아니라 소파 아래에서 소파에 등을 대고 앉았다. 정 선생이 내 어깨 위에 머리를 기댔다. 주말 예능 프로는 연신 그의 웃음을 끌어냈고 나는 그의 웃음에 전염되어 나란히 웃음을 흘렸다.
예능 프로가 끝나고 보지 않던 주말 드라마까지 보고 나니 시간은 9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정 선생이 기지개를 켜며 시계를 보았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요.”
“자고 가요.”
기지개를 켜던 정 선생이 그대로 굳은 채로 고개만 홱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귀 끝이 발긋해졌고, 나는 그런 뉘앙스로 말한 것이 아님에도 어쩐지 당황해 버렸다.
분위기가 미지근해졌다. 그리고 미지근한 공기는 이내 스스로를 덥혀 갔다. 그가 허공으로 쫙 폈던 팔을 접었다. 긴 소매 아래로 언뜻 보였던 흰 손목이 내 시선을 앗아 갔다. 이내 벙긋하는 입술이 또 내 시선을 빼앗았다.
“자고 가요.”
이번에는 그런 뉘앙스로 다시 말했다. 덤덤하게 내뱉었다고, 꽤나 아무렇지 않은 척 어른스럽게 흘렸다고 생각한 스스로를 비웃듯 허공에 흘려진 내 목소리는 열기를 잔뜩 품고 있었다.
“어……. 옷, 있으세요?”
“빌려줄게요.”
“네…….”
정 선생이 부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얼핏 고개를 숙였고, 머리칼 아래로 드러난 흰 목덜미에 손가락이 꿈틀거렸다.
“그럼 저, 씻고 올게요.”
“응.”
그가 벌떡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욕실 문이 닫히자마자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럴 생각은 없었다. 이렇게 준비도 없이 갑작스럽게 섹스를 제안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한번 자각하자마자 그와 자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물들였다. 나는 성적으로 비교적 담백한 편이었고, 정 선생과의 스킨십도 잦았던 것이 아니라 너무 갑작스러웠나 하는 걱정이 들었다. 하지만 그만 괜찮다면 그를 내 품에 안고 싶었다.
그래도 좀 빠르긴 했지. 터치도 없이 키스에서 바로 섹스라니. 보통은 그런 일이 없었는데. 미간을 좁히며 옷을 챙겨야겠다는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팔과 반바지를 챙기면서 정 선생의 나이를 생각했다. 스물여덟이면 어리지 않은데, 내 나이와 비교해 보면 어리게도 느껴졌다. 어리지. 마냥 어른스럽다고만 생각하다가 이런 상황이 닥치니 나에 비해 훨씬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 선생이 알면 혼이 날 생각이다. 사실은 심장이 필요 이상으로 뛰어서, 스스로를 깎아내리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만 같았다.
어차피 벗을 건데 속옷은 필요 없지 않을까 생각하다 정 선생 입장에선 그게 아닐 것 같아 새 속옷을 준비해 욕실 문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고 나서 소파로 돌아와 앉았다. 손으로 허벅지를 쓸다가 스스로의 모습이 우스워 피식 웃음이 나왔다.
키스도, 섹스도 그리고 그런 것들에 떨려 하는 것도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그를 놓겠다 결심했던 일이 그리 오래전 일도 아닌데 마음을 바꾸자마자 이렇게 좋을 수가 있나 싶었다. 우스웠지만, 여전히 끝은 무섭지만, 지금은 그저 좋기만 했다. 그의 말대로 눈 감고 귀 막으면서 끝은 없다고 여기고 마음껏 사랑하고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언젠가 사무치게 후회할 것 같았다. 지금은 어떤 생각도 하지 않고 그에게 충실해야만 온전히 이 순간을 소중히 기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문이 달칵 열렸다. 손이 빼꼼 나와 옷을 가져간다. 문이 다시 닫히자마자 입가를 가리며 웃음을 흘렸다.
내 곁에 있을 수 있어 행운이라고? 전혀. 그 말은 오히려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이처럼 사랑스러운 그의 곁에 있는 나는 전생의 행운까지 끌어모았을 테다.
“저, 다 씻었어요.”
정 선생이 목덜미를 쓸어내리며 밖으로 나왔다. 내게는 딱 맞는 옷이 그에게는 약간 품이 컸다. 그는 원래 옷을 약간 크게 입는 터라 그의 옷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어떤 옷이든 소화를 잘하는구나 싶었다.
“드라이어 침실 서랍에 있으니까, 머리 말리고 있어요.”
“네.”
정 선생이 침실에 들어간 뒤 나도 욕실로 들어갔다. 옷을 벗으면서 반쯤 발기했다는 것을 알았다. 시작도 전에 이러는 꼴이 우습긴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샤워를 하는 내내 의식적으로 생각을 차단하고 몸을 꼼꼼히 씻었다. 거울로 얼굴과 몸을 한번 훑어본 뒤 머리에서 물이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수건으로 털고 욕실을 나왔다.
밖은 조용했다. 침실로 들어갔을 때, 침대에 걸터앉아 어색하게 눈을 굴리고 있는 정 선생이 보였다. 내가 들어서자 그가 작게 웃으면서 드라이어를 들었다.
“머리 말리세요.”
“괜찮아요.”
그에게서 드라이어를 건네받아 서랍 위에 올려놓고 그의 마른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가 내 허리에 손을 얹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막 말려 좀 들뜬 머리칼을 한 그의 온기가 어린 눈동자를 내려다보다 고개를 숙였다.
말캉한 입술이 닿았다. 그의 입술은 언제 닿아도 보드랍고 말캉했다. 입술을 조심스레 빨다가 조금씩 벌어지는 입술 안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촉촉한 혀가 성큼 다가왔다.
목덜미를 쓸어내리며 온기를 빨았다. 그의 손이 내 허리를 지분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따뜻한 살덩이를 비껴 나 입천장의 여린 벽을 문지르자 그가 비음을 흘렸다. 키스를 받으며 그는 뒤로 몸을 움직였다. 나는 그를 따라 침대 위에 무릎을 얹고 그의 어깨를 받쳤다.
입술을 떼고 그의 턱에 입을 맞추며 그의 옆구리를 쓸어내렸다. 키에 비해, 보이는 것과는 다르게 그의 선은 조금 가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나만 알고 싶은 사실이다.
그가 내 티셔츠를 들추고 등을 매만졌다. 자연스레 몸에 힘이 들어가자 그가 웃음을 흘렸다. 그 웃음에 그의 목덜미에 입을 쪽쪽 맞추었다. 어깨를 움츠리는 그의 티셔츠 밑단을 잡아 올렸다. 티셔츠를 벗기자 그의 손이 내 옷을 쥐었다. 티셔츠를 벗어 바닥에 휙 던지고 쇄골에 입을 맞췄다.
“후진 쌤 몸 좋으셔서, 저 좀 부끄러워요.”
“별게 다. 정 선생도 몸 좋아요.”
“칭찬이 더 부끄럽네요.”
“그럼 얼굴이 나보다 더 예쁘다고 합시다.”
그가 할 말을 잃은 듯 입술을 벙긋하기에 웃으면서 작게 선 유두를 톡 건드렸다.
“정 선생 몸은 다 정 선생을 닮았네요.”
“네?”
“그냥.”
귀엽다고. 뒷말은 뒤로 삼키며 작고 봉긋한 유두를 머금었다. 입술에 닿는 것을 혀로 내밀어 톡, 건드리자 있지도 않은 과즙이 입안에 터지는 것만 같았다. 그에게서 나와 같은, 내가 쓰는 보디 워시 향이 났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성기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아, 선생님…….”
꾹 눌러 참는 목소리에 입술을 떼어 내고 고개를 들었다.
“그 호칭, 바꾸는 게 좋지 않겠어요?”
“아.”
정 선생이 생각지 못했다는 듯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럼…….”
“이름으로 불러요.”
“후진 씨.”
“…….”
“이렇게요?”
“응. 그게 낫네요.”
입꼬리를 씩 끌어당기고는 입술을 다시 그의 가슴에 붙일 때였다.
“그럼 저는요?”
“음?”
“제 호칭이요.”
몇 번 빨았다고 부풀어 오른 유두를 보다가 기대 어린 그의 얼굴을 보며 웃음을 흘렸다.
“진아.”
“…….”
정 선생의 입가에 작게 남은 웃음기가 사그라들었다. 그의 귀가 발긋해지고, 뺨이 물들고, 그 색은 이내 목덜미까지 전염되었다. 그가 퍼뜩 눈을 내리깔며 웅얼거렸다.
“그, 저는 그냥 원래 부르던 대로 불러 주세요.”
“음, 그래요.”
덩달아 머쓱해진 나는 묵묵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입술을 꾹 깨물다가 내 목덜미를 끌어안고 입술을 부딪쳤다. 여린 살을 구석구석 문지르는 키스를 받아 내며 그의 바지 안으로 손을 넣어 말랑한 엉덩이를 쥐었다. 그가 허리를 휘어 사타구니를 내 쪽으로 바짝 맞붙였다.
“후진 씨.”
입술을 붙인 채로 그가 속삭였다. 늘 선생이라는 호칭이 붙은 이름만 듣다가 그에게서 온전한 이름을 듣자 기분이 이상해졌다.
목이 메는 기분. 나는 그의 연인임에도, 지금 이 순간 정말 그의 연인이 된 기분.
입술을 그의 배꼽 근처로 내리눌렀다. 나는 그와의 끈을 끊지 못했고, 끊지 않았고, 지금 이 순간 그 사실에 안심한다.
그의 바지를 벗기고 드러난 허벅지 안쪽 깊은 곳에 입술을 묻었다. 그의 체향과 시원한 보디 워시의 향이 함께 흘러들어 왔다. 그리고 그 사소한 일에 그를 사랑함을 다시 한 번 느낀다.
“콘돔이 없는데.”
“아, 저도 오늘은 준비를 못 해서…….”
“그럼,”
“비비기만…….”
아무렇지 않은 그 말이 왜 이렇게 야하게 들리는지 모르겠다. 예쁜 색으로 물든 그의 귀를 응시하다가 그의 속옷에 손을 댈 때였다.
“그, 후진 씨.”
“응.”
“저……. 놀라지 마세요.”
“음?”
“선생, 아니, 후진 씨랑 같은 거 있어요…….”
난 또 뭐라고. 머뭇거리는 그가 귀여워 참지 못하고 웃음을 흘리자 그의 귀 끝이 더 새빨갛게 물들었다.
“왜 그런 걸 걱정해요.”
“저는 같은 쪽이랑만 만나 봐서…….”
그러니까 이성애자랑은 처음이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를 사랑한 순간부터 이성애자가 아니게 되었는데.
그가 입고 있는 브리프를 단숨에 벗겼다. 움츠리려는 다리를 활짝 벌리게 한 뒤 발기한 성기에 입을 맞췄다. 그의 종아리에 힘이 들어간 것이 느껴졌다.
“다른 사람 얘기, 하지 말아요.”
그러고선 그와 내 성기를 맞붙였다. 내 것보다 조금 더 작고 색이 연한 것은 분명 여자의 것과는 확연히 달랐지만, 날 흥분시키기엔 전혀 모자라지 않았다. 이 순간 나는 처음으로 내게 감사했다. 그를 마음뿐만이 아니라 몸으로도 전부 사랑할 수 있어서.
그의 눈가에 입을 맞추며 허리를 움직였다. 단단한 것이 맞닿아 쓸리는 느낌은 손으로 쥐고 흔들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조금 더 직접적이고 적나라해서, 뜨거운 그의 것이 꿈틀거리는 것부터 핏줄과 둥글게 솟은 선단과 까슬한 음모 하나하나까지 다 느낄 수 있었다.
“하, 읏…….”
“정 선생.”
그에겐 미안하지만, 나도 온전한 그를 불러 보고 싶었다.
“진아.”
“아……!”
달뜬 숨이 내 뺨에 흩뿌려졌다. 발긋한 뺨에 달래듯 입을 맞추고 허리를 쳐올렸다. 잘게 떨리는 목덜미에 키스하고 허리를 쓸어내렸다.
“좋아해요.”
좋아합니다. 작게 속삭이고선 그의 입술을 머금었다. 그가 내 목덜미를 끌어안고 화답하듯 혀를 내밀었다. 그의 혀를 지근지근 빨면서 그의 성기를 내 것으로 짓누르듯 문질렀다.
그가 내 눈을 감기고 귀를 막는다. 나는 오로지 그에게 사랑만을 말할 수 있다. 끝이 없는 곳에서, 끝을 모르는 곳에서, 끝을 모른 체하며 그를 안는다. 살아 있어서, 그를 놓지 않아서, 그가 그라서, 그가 사랑하는 게 나라서 다행이라고 몇 번을 되뇌었다.
나는 그에게 사랑만을 말할 수 있는 사람처럼 사랑을 읊조렸다. 짧은 문장 몇 마디로는 이 순간의 기분을, 느낌을, 마음을 절대 담을 수 없을 것 같았지만 할 수 있는 게 그뿐이라, 지나치는 시간을 후회하지 않도록 마음껏 쏟아부었다.
마침내 절정에 달했을 때, 그가 나를 끌어안고 속삭였다.
내 사랑과 다르지 않은 말이었다.
그가 나를 사랑하고, 내가 그를 사랑한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사랑만으로 모든 것이 다 되었다. 그런 밤이었다.
* * *
지난번에 약속이 취소된 바람에 그 약속을 다시 지키기 위해 상호와 약속을 잡았다. 녀석은 가정이 있고 나는 정 선생이 있어서 술 약속이 아니라 저녁만 먹고 헤어지기로 했다.
상호가 잘 가는 갈비탕집에서 만나 자리를 잡고 앉았다. 녀석은 갈비탕이 나오자마자 숟가락을 들고 국물을 떠먹었다.
“어으, 살 것 같다.”
“어제 술 마셨어?”
“응.”
“요즘 술 자주 마시는 것 같다?”
“이것저것 약속도 많이 잡히고 회식도 많아서. 연말보단 덜하긴 하지.”
“그래. 아, 저번에 하영 씨랑은 잘 헤어졌고?”
“응. 귀걸이 예쁜 거 사 줬다. 나는 와이프랑 데이트했고.”
“잘했네.”
“잘하긴, 자식아. 그때 왜 그렇게 간 건데?”
상호가 미간을 좁히며 밥을 국물에 잔뜩 말았다. 배가 고팠는지 밥을 국물과 함께 후루룩 떠먹는 녀석을 보며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나, 다시 만나기로 했어.”
“에라이, 씨.”
녀석이 빈 숟가락을 탁 내려놓았다. 나를 못마땅하게 쳐다보는 녀석을 보며 할 말이 없어 밥을 국물에 대충 말았다.
“그새 잘될 거 그렇게 궁상을 떨었냐?”
“뭐, 어쩌다 그렇게 됐네.”
“잘되긴 잘됐다만……. 어휴, 이 화상아. 이번에 헤어진다 어쩐다 하기만 해 봐. 너 같은 놈한테는 우리 처제가 아깝지.”
“그래. 하영 씨 좋은 사람이더라. 고맙다고 전해 줘.”
“왜?”
“그냥, 좋은 말 많이 들었거든.”
내 말에 하영 씨에 대한 칭찬과 유정 씨에 대한 칭찬이 줄줄이 이어 나온다. 자랑을 하고 싶어 안달이 난 녀석의 말을 흘려들으며 국물을 휘저었다.
“장난 아니야, 자식아. 이번엔 진짜 잘 잡아 봐, 좋은 사람 같던데. 비 온 뒤에 땅도 굳고 그러는 거지. 네 땅은 뭐 평생 말랑말랑하겠냐?”
“그래.”
이번에는 또 내 핀잔으로 넘어오는 말을 귀 기울여 들었다. 녀석은 잔소리가 많지만 하나하나 들어 보면 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경청하고 있자니 이런 말만 귀담는다며 또 핀잔이 날아왔지만.
상호와 저녁을 먹은 뒤 바로 헤어졌다. 동네로 와서 정 선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집 앞이라는 말에 그가 밖으로 나와 내 차에 올라탔다.
“맛있는 거 드시고 오셨어요?”
“네. 이거 마셔요.”
“어? 색 예쁘다. 뭐예요?”
“홍시 주스. 먹을 만해 보이길래.”
“와, 저 홍시 좋아하는 줄 어떻게 아시고. 이거 사거리에 새로 생긴 생과일주스집인가 봐요.”
“응. 거기서 사 왔어요.”
“후진 쌤 건 뭐예요?”
“난 사과. 마셔 볼래요?”
“네.”
컵을 그의 쪽으로 내밀자 그가 빨대를 쪽 빨았다. 그러더니 눈을 동그랗게 뜬다.
“생각보다 다네요. 맛있어요. 이거 드셔 보실래요?”
정 선생의 주스를 나도 마셨다. 생긴 것처럼 달았고, 맛있었다.
“맛있네요.”
“우리 산책할 때 자주 마셔요. 진짜 괜찮은데요?”
생과일주스가 정말 마음에 들었던 듯 그의 입술에 빨대가 파묻혔다. 웃으면서 그의 머리를 쓸어내리자 그가 고개를 들며 물었다.
“뭐 드시고 오셨어요?”
“갈비탕이요. 친구 놈 단골집이라.”
“음, 좋은 거 드시고 오셨네.”
“정 선생은 뭐 먹었어요.”
“저는 라면 먹고 싶어서 라면 먹었어요.”
“그걸로 되겠어요?”
“네, 괜찮아요. 그리고 이거 은근히 배가 차는데요?”
그가 배를 문지르며 빨대를 입에서 놓았다. 물기 묻은 손을 닦으라고 티슈를 건네주고 나서 입을 열었다.
“오늘 친구한테 잔소리 듣고 왔어요.”
“왜요?”
“또 헤어진다 뭐다 하면 알아서 하라고.”
“아하하!”
정 선생이 웃다가 콧잔등을 찌푸리며 나를 흘겨보았다.
“맞는 소리 하셨네요.”
“그러게. 오늘 생각해 보니까, 나한테 좋은 말 해 주는 사람이 꽤 많더라고요.”
“그중에 저도 포함이에요?”
“정 선생이 1등이죠.”
내 말에 그가 푸스스 웃음을 흘렸다. 주황빛 주스가 노란색 빨대를 타고 그의 입술 새로 흘러들어 갔다.
“살다 보니까, 유유상종이란 말이 어느 정도 맞는 말이더라고요.”
그가 엄지에 맺힌 물방울을 내 뺨에 묻히고 장난스레 웃었다.
“후진 쌤이 좋으신 분이니까, 주위에 좋으신 분들도 계신 거예요. 그리고 저도요.”
뒷말은 속삭이듯 말하던 그가 쑥스럽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손을 내밀자 그가 그 위에 손을 겹쳐 잡았다.
“아, 요즘 너무 겸손 안 떠나요?”
“언젠 떨었어요?”
“이젠 슬슬 떨려고요.”
그가 능청을 떨었고 우리는 눈을 마주하고 웃다가 자연스레 눈을 감고 입술을 맞댔다. 그의 입술에서 그가 방금까지 마신 홍시 주스의 맛이 났다.
“후진 쌤, 사과 맛 나요.”
그도 똑같은 생각을 했다. 우리는 똑같은 생각을 했다는 것을 알고 웃음을 터뜨린 나머지 키스를 이어 가지 못했다. 입술을 부딪쳤다가 몸을 떨며 웃다가 한참을 그러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출근을 위해 집으로 돌아갔다.
* * *
가을 소풍지는 어린이 대공원이었다. 소풍지가 알려지자마자 자신들이 어린이냐면서 유치하고 재미없다고 야유를 던지던 아이들이 막상 도착하니 물 만난 고기처럼 뛰어놀 준비를 했다.
아이들이 놀이공원으로 하나같이 달려갈 때 선생들도 각자 친한 사람들끼리 찢어졌다. 대부분이 자리를 잡고 쉬는 듯했지만 정 선생과 나는 좀 걷기로 했다.
“와, 진짜 여긴 정말 오랜만에 오는 것 같아요.”
“언제 와 봤어요? 나는 예전에 소풍으로 왔었는데.”
“어어, 학부생 때 왔었나?”
“학부생 때 여길 왔었습니까?”
“아. 네……. 어, 그냥 심심해서 왔었던 것 같아요.”
“혼자?”
내 물음에 그의 걸음이 멈칫한다. 그가 내 쪽으로 비스듬하게 고개를 돌리며 엉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의 반응을 보고 그가 혼자 온 게 아니라는 걸, 그리고 같이 온 상대가 말하기 껄끄러운 사람이란 것을 깨달았다.
생각보다……. 가볍게 연애를 했다고는 하지만, 생각보다 자주…….
“어? 후진 쌤, 저희 저거 줘요.”
그가 내 손목을 잡아끌고 먹이 자판기 앞으로 향했다. 신이 나서 자판기를 살피는 그의 낯을 보며 어쩔 수 없이 웃음을 흘렸다. 그는 자신이 신는 신발까지 질투해 달라고 말했지만, 정말 그렇게 애새끼처럼 굴 수는 없으니까.
그가 먹이를 한 봉지 뽑아 사슴이 있는 우리로 향했다. 저들끼리 놀던 사슴 두 마리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한 놈은 뿔이 있는 걸로 보아 수놈이었고 한 놈은 암놈이었다.
“와, 예쁘다.”
아이가 자기보다 작은 아기에게 귀엽다고 말하는 모습을 보는 것 같다. 그가 내 손에 먹이의 반을 털어 주고 제 손에 반을 담은 다음 우리 안으로 손을 내밀었다.
“아, 간지러워. 선생님도 해 보세요.”
그를 따라 우리 안으로 손을 내밀자 다가와 혀를 갖다 댄다. 손이 침 범벅이 되는 것이 느껴지면서도 잘 먹고 있어 손을 뺄 수 없었다.
“예쁘다. 눈망울이 진짜 예뻐요. 왜 사슴 눈망울이라고 하는지 잘 알 것 같죠.”
먹이를 주지 않는 손으로 사슴의 머리를 쓰다듬는 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다정함은 동물에게도 통하는가 보다. 사슴은 피하는 기색 하나 없이 그의 손길을 받으며 먹이를 모두 해치웠다.
손에서 먹이가 모두 사라졌으나 먹이 대신 침으로 범벅이 되었다. 정 선생이 웃으면서 손을 씻자고 해서 화장실로 향했다.
손을 씻고 나서 그의 머리가 조금 흐트러져 있기에 손질해 주었다. 내 손이 닿자 그가 눈을 감았다.
“정 선생 꼭 사슴 같네요.”
“네?”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머리 색도 그렇고, 눈도 그렇고.”
“에이, 뭐예요.”
그가 쑥스러운지 웃으면서 내 손목을 잡았다. 나는 그의 머리칼을 쓸어 올려 드러난 이마에 짧게 입을 맞추고, 머리를 다시 쓰다듬어 정리해 주었다.
“쌤.”
“응?”
“방금, 소풍 아니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그가 마치 못된 생각을 했다는 듯이 미간을 좁히며 웅얼거렸다. 투정 부리는 듯한 목소리가 귀여워 애써 정리한 머리를 한 번 헝클였다가 다시 정리해 주었다.
“다음에 또 와요. 그때는, 데이트로.”
“네, 좋아요.”
그의 얼굴이 금세 밝아졌다. 다른 사람과 왔던 그의 기억을 내 시간으로 덮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욕심은 내지 않기로 했는데, 그와 있으면 자꾸만 욕심이 생긴다. 그리고 욕심을 내도 괜찮을 거라는 자신감도. 근거 없는 자신감이라면 죽여야 마땅한데, 근거가 곧 그라서 차마 밟을 수가 없다.
“뭐할까요? 시간 많은데. 저도 놀이기구 타고 싶은데 애들 너무 많아서 안 되겠죠?”
“선생님!”
화장실을 나와 걷던 도중 멀리서 우리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지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세민이의 목소리였다.
“저희 사진 찍어요!”
세민이와 현서 그리고 우리 반 아이들 몇몇이 정 선생과 나의 팔을 잡아끌었다. 아이들의 힘이 보통이 아니었다. 큰 은행나무 앞으로 데려간 아이들이 우리를 가운데 두고 자리를 잡았다.
“사진은 누가 찍어?”
내 말에 세민이가 근처에 있는 남학생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남학생 무리가 우리에게로 다가와 세민이의 핸드폰을 받아 갔다.
“쌤! 활짝 웃으세요! 저번에 수학여행 단체 사진 때도 쌤만 웃는 둥 마는 둥 하셨어요.”
“그래, 그래.”
옆에서 정 선생이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아이들의 키에 맞춰 살짝 몸을 낮춰 준 채로 카메라를 보았다. 남학생이 하나, 둘, 셋 외침과 동시에 셔터음이 들렸다. 사진을 한 장 더 찍어 준 뒤에야 아이들에게서 풀려날 수 있었다.
“쌤! 정 쌤이랑 찍으세요. 저희가 찍어 드릴게요.”
세민이가 선심을 쓴다는 듯 제 핸드폰을 들고 우리 앞으로 갔다. 정 선생이 씩 웃으며 날 바라보았고, 나는 그의 어깨에 팔을 둘러 그를 끌어당겼다.
“쌤! 웃으세요! 하나아, 둘!”
찰칵, 소리와 함께 등 뒤로 내 옷자락을 잡은 그의 손에서 힘이 느껴졌다. 우리는 세민이가 핸드폰을 내리자마자 자연스레 떨어졌다.
“와, 쌤들은 그냥 찍어도 잘 나오네. 이거 보내 드릴게요!”
“그래. 재밌게 놀아라.”
“네에.”
놀이공원에서 놀던 아이들이 슬슬 동물원 쪽으로 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런 아이들을 피해 인적이 드문 곳으로 향했다.
그늘에 위치한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곧 점심시간이라 선생들끼리 모이기로 한 시간까지만 쉬다 가면 될 것 같았다.
정 선생이 손으로 벤치를 짚고 있었다. 카디건의 소매 끝으로 삐져나온 잘빠진 손가락을 보다가 그의 소맷부리를 잡았다. 정 선생이 의아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소매를 아래로 끌어내려 손이 안 보이게 한 뒤에 그의 손을 벤치 위에 내려놓고 소매 안으로 살짝 손가락이 들어가게 나도 벤치를 짚었다.
그의 손끝과 내 손끝이 닿았다. 누가 지나가다 보더라도 손을 잡고 있다거나 손이 닿았다는 생각은 못 할 것이다.
“후진 쌤.”
“네.”
“연애 좀 해 보셨나 봐요?”
정 선생이 건들대듯이 말했다.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에 웃음을 흘리자 그가 손가락을 내 손가락 위에 올려 손톱으로 긁듯이 건드렸다.
“집에 가서 맥주 한잔하실래요?”
“그래요. 우리 집 올래요?”
“이번엔 저희 집 오세요. 계란말이 해 드릴게요.”
“과일은 내가 깎고?”
“아하하! 넵. 분업입니다.”
그의 웃음은 여전히 듣기 좋았다. 하늘은 청명했고 공기는 평소보다 맑은 편이었다. 건너편에 있는 은행나무의 노란 은행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지연이가 죽고 난 뒤로 이렇게 마음속에 온전한 평화가 찾아온 것은 처음이었다. 내 곁에 있는 그, 내 옆에 앉은 그뿐 다른 생각은 나지도 않았다.
불현듯 현재를 살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나의 시계가 비로소 지금의 시간에 맞추어 달려가고 있는 듯했다. 그제야 세상의 풍경이 제대로 눈에 들어오고, 세상의 소리가 제대로 귀에 들어오는 것 같았다.
손끝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겨울이 아니라, 겨울보다 조금 더 따뜻한 가을. 지금의 가을. 겨울이 오고 봄이 올 시간. 그 시간이 전부 다 느껴졌다.
“정 선생.”
“네?”
“날씨가 참 좋네요.”
손끝에 닿은 온기로 가을이 느껴졌고 그와의 시간이 느껴졌고 그의 사랑이 느껴졌다. 아주 사소한 접촉에, 이 자그마한 온기에 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음에도.
“그쵸. 전 김 쌤이랑 있어서 더 좋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니, 사실 그는 많은 말을 했다. 그는 내게 많은 시간을 보여 주었고, 그 시간 동안 한 번도 내게 소홀하지 않았으며, 그가 가지고 있는 온 마음을 내게 쏟아 주었다.
그가 포기하지 않고 켜켜이 내 앞에 쌓아 둔 것들이, 오늘에서야 내 가슴속으로 와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알로호모라. 언젠가 정 선생이 말했던, 잠긴 문을 여는 주문이 통한 것처럼. 나는 오늘에서야 잠겼던 문을 열고 그를 온전히, 그리고 그를 사랑하는 나를, 이 시간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가을이었다. 이제 곧, 겨울이 올 것이었다. 그리고 봄이 오겠지.
* * *
두 가지 일이 있었다. 나는 메신저를 다시 깔았고, 얼마 후에 그녀가 사라졌다. 아마 번호를 바꾼 것일 테다. 그녀는 10년이 넘게 가지고 있던 번호를 바꾸었다. 무언가를 털어 내고 싶었을 수도, 아니면 단순히 기종을 바꾸면서 번호를 바꿨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이제 나는 그녀에게 연락을 할 방법이 없고, 내가 따로 묻지 않으면 그녀의 근황을 알 길이 없다. 지금도 종종 그녀가 보고 싶을 때가 있지만, 더는 그에 흔들리지 않는다.
나머지 하나는, 지연이의 기일이 다가왔다. 1주기였고 나는 그녀에게 찾아가고 싶었다.
“미쳤냐? 거길 왜 가?”
상호가 내게 마른 오징어를 집어 던졌다. 내가 그것을 잡자 녀석이 얼굴을 더 일그러뜨렸다.
“지연이 친구들도 온다던데.”
“친구는 친구고, 네가 거길 뭐하러 가. 친구들 온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
“누님이랑 전화했어.”
“벌써 말 다 끝낸 거야? 뭐래. 오래?”
“오고 싶으면.”
상호는 답답하다는 듯 오징어를 질겅질겅 물었다. 나는 맥주를 한 모금 넘기고 시계를 보았다. 슬슬 자리를 정리해야 할 것 같았다.
“제수씨는. 알아?”
“물어봐야지.”
“가지 말라고 하면.”
“그럼 안 가고.”
녀석이 나를 미묘한 낯으로 쳐다보았다. 찌푸려진 이마를 보며 미지근하게 웃는 채로 맥주 캔을 비웠다.
퇴근길에 라디오를 작게 틀어 놓고, 정 선생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늘 그렇듯 오늘 하루 수업을 하면서, 반 아이들과 있었던 일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는 이야기를 하면서 내게 박하사탕을 물려 주었다. 담배를 완전히 끊은 지는 이제 좀 됐지만, 그는 내 입에서 박하 향이 나는 걸 꽤 좋아하는 듯했다. 키스를 할 때면 혀끝을 떨곤 했으니까.
기분이 좋은지 웃으면서 이야기를 하는 정 선생을 흘깃 보며, 상호가 왜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 알 것 같았다.
내가 과연 그 말을 꺼낼 수 있을까. 그 말을 꺼내면 정 선생이 내게 실망하지 않을까. 우리가 싸우지는 않을까.
물어보면, 그는 과연 가지 말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잘 모르겠다. 혹시 내가 말을 잘못 전달해서 이별의 빌미를 더 일찍 마련하게 되진 않을까, 두려움도 들었다. 그러나 그 몰래 다녀올 수는 없다. 그것 하나만은 분명했다.
“오늘 피곤해 보이세요. 내일 아침엔 제가 운전할까요?”
“아니, 괜찮아요. 그보다 할 말 있는데.”
“음, 무슨 말이요? 들어가실래요?”
“응. 잠깐이면 돼요.”
정 선생이 차에서 내려 나를 흘깃대며 집으로 향했다. 나는 그의 집으로 들어가 식탁에 앉아 그가 타는 커피를 기다렸다. 이내 그가 커피 잔을 내 앞에 내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무슨 말인데 그렇게 심각하세요. 저 조금 무서운데.”
“오해하지 말고 들어요.”
“…….”
“다음 주가 지연이 1주기예요.”
정 선생의 얼굴이 묘하게 굳었다. 가슴이 불안하게 뛰었지만, 화난 것은 아닌 듯해서 말을 이었다.
“가 볼까 해요.”
“음……. 이게 하시려던 말씀이에요?”
“어떻게 생각합니까. 내가, 가도 되겠어요?”
그가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의 다갈색 눈이 부엌을 한 바퀴 돌았다가, 내게로 다시 돌아온다.
“제 의사가 중요한가요?”
“지연이한테 어떤 미련도 없어요. 다만, 마지막으로 보고 싶을 뿐이에요. 그리고 나는 그걸 정 선생 몰래 하고 싶지도 않고, 정 선생이 싫어하는데 가고 싶지도 않아요.”
그는 내 말을 곱씹듯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커피 잔 안으로 빠뜨렸다.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그가 침묵을 지키는 동안 나는 그의 얼굴 곳곳을 훑으며 그의 말을 기다렸다.
길지 않은 시간이 흐르고, 그가 고개를 들었다.
“가셔도 돼요. 돌아가신 분이고, 마지막으로 보시겠다는데 제가 왈가왈부할 이유 없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입이 마르는 듯 그가 혀로 입술을 한 번 훑고는 단호한 낯으로 말했다.
“흔들리지 마시고, 어떤 영향도 받지 않을 수 있다고 저랑 약속하세요. 그럼 보내 드릴게요.”
그의 눈에서 불안이 읽혔다. 내 전적이 있기에 그는 고민했음에도 나를 믿고 보내 주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의 사랑에 보답하려면 어쩌면 평생을 걸쳐 갚아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할게요. 약속합니다.”
“저는 후진 쌤 믿어요. 그러니까, 돌아올 곳이 있다는 것만 기억해 주세요.”
“당연하죠.”
의자를 뒤로 밀고 팔을 벌렸다. 약간 우울한 기색을 띤 정 선생이 일어난 뒤 내게로 다가와 안겼다. 그를 내 위에 앉히고 그의 어깨 위에 턱을 얹은 뒤 그의 등을 토닥였다.
“선생님.”
“네.”
“자고 가세요.”
그의 말은 단순히 자고 가라는 말이 아니었다. 내 허리를 지분거리는 그의 손에는 성적 의미가 담겨 있었다.
우리는 그간 페팅을 즐겨 했고 끝까지 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는 어쩌면 끝까지 가자고 내게 말하는 건지도 몰랐다.
“그래요.”
“기다리세요. 좀 오래 걸릴지도 몰라요.”
그는 내게 짧게 키스한 뒤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그가 씻는 동안 나는 커피 잔을 정리하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의 준비는 그의 말대로 다소 오래 걸렸다. 드디어 문이 열렸을 때 그의 얼굴은 다소 상기되어 있었다. 욕실에서 열기가 쏟아져 나왔다.
“저 다 했어요.”
“이번엔 내가.”
그의 따뜻한 뺨에 입을 맞추고 살짝 젖은 그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은 뒤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를 한 뒤 수건을 아래에 걸치고 침실로 향했을 때, 정 선생은 침대 한가운데 무릎을 끌어 모은 채로 앉아 있었다.
내가 들어서자마자 그가 고개를 들었다. 나는 걸친 수건을 침대 밑에 던지고 침대 위로 올라가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그가 내 목덜미를 끌어안으며 호응해 왔다. 뜨거운 살덩이가 내 혀를 덮치며 열렬하게 입안 곳곳을 쓰다듬었다.
이미 작게 서 있는 유실을 문지르며 한 손으로는 그의 등허리를 쓸어내렸다. 오돌토돌하게 솟은 척추를 더듬거리자 그가 움찔거리며 달뜬 숨을 내쉬었다.
그를 천천히 눕히고 입술을 뗐다. 그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가에 입술을 내리누르자, 그가 눈을 감았다가 입술이 떨어지는 것에 맞추어 다시 눈을 떴다. 온기에 물든 색. 언제나 따뜻한 눈을 보다가 그의 뺨에 입을 맞추고, 목덜미에 입을 맞추고, 가슴에, 배꼽에, 그리고 그의 중심에 입을 맞추었다.
다소 단단해져 있던 것이 내 입맞춤 한 번에 힘을 받았다. 무릎을 세워 다리를 벌리게 한 뒤 귀두를 머금었다.
“아…….”
남자의 성기를 무는 건 처음이라는 생각보다는 그의 것을 입에 담는 것이 처음이라는 것이 떠올랐다. 서로의 몸을 만지고 빨았지만, 성기를 직접적으로 머금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의 체향이 더 짙게 나는 것만 같았다. 뜨거웠고, 귀엽기도 했고, 단 것 같기도 했다.
“흣.”
그의 성기를 좀 더 깊게 물었다. 입술을 오므려 조이면서 혀를 내밀어 기둥을 핥아 올렸다. 그의 것을 빨면서 그를 흘금 올려다보자, 귀 끝이 새빨개진 채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눈과 마주쳤다. 웃음을 흘리자 그가 입술을 꾹 깨문다. 부끄러워하는 것 같았다.
모양이 예쁜 고환을 만지작거리자 탄식을 흘렸다. 쿠퍼액을 흘리는 구멍을 파내듯 핥으며 이번엔 아주 깊게 그의 것을 머금었다. 입안을 꽉 채우는 것이 조금 버겁게도 느껴졌지만, 그가 허리를 들썩이며 시트를 바르쥐는 것으로 보아 기분은 좋은 모양이라 참을 수 있었다.
손을 뻗어 시트를 쥐는 그의 손에 깍지를 끼고 잡았다. 그리고 그가 박하사탕을 입에 넣어 주었을 때처럼 단단하게 선 성기를 빨아들였다. 그의 입에서 얼핏 내 이름이 흘러나온 듯했다. 야한 목소리였다.
“하으, 후진 씨…….”
엄지로 그의 손등을 애무하듯 문지르며 남은 한 손으로는 그의 옆구리를 지분거렸다. 늑골을 쓸어내리자 그가 몸을 뒤틀면서 그의 성기가 더 깊이 입안으로 처박혔다. 침을 삼키듯 입안을 조이자 그의 것이 여린 점막과 맞닿는다. 그가 우는 것처럼 신음을 흩뿌렸다.
“읏, 저, 안 돼요. 저, 흡, 그만할래요.”
사정하고 싶다는 말도 참 예쁘게 한다. 괜찮다는 의미로 그의 손등을 토닥이며 그의 것을 더 깊게 빨아들였다. 이내 그의 성기가 잔뜩 힘을 받으며 향도 색도 짙은 액을 토해 냈다.
협탁에 놓인 티슈를 뽑아 그의 정액을 뱉고 그의 성기에 남은 잔여물을 핥아 주었다. 그러고 나서 그를 올려다보자, 그는 목덜미까지 발갛게 물든 채로 제 눈을 팔로 가리고 있었다.
“미안해서 그러시는 거라면.”
“미안해서 그러는 게 아니라.”
눈을 가리는 그의 팔을 내렸다. 울 것처럼 일그러진 눈과 마주했다. 잠자리에서 빼는 성격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좀 많이 부끄러운가 보다.
“당신이 너무 예뻐서 그렇지.”
내 말에 그가 눈을 돌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화난 듯한 얼굴은 그러나 화낼 때와는 전혀 달랐다.
“저도…… 하고 싶어요.”
“뭐를.”
내 물음에 그가 몸을 일으켰다. 뒤로 물러나 앉자 그가 내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앉아 내 것을 쥐었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숙였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점막이 내 것에 달라붙었다. 상상 이상으로 좋은 감각이었다. 나는 생각보다 못했지만, 그는 생각보다 잘했다. 능숙하게 내 것을 물고 빠는 감각에 참지 못하고 신음을 흘렸다.
그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쓸어내리자 그가 슬쩍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에서 만족이 읽혔다. 지금 내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마음에는 드는 모양이었다.
그는 힘들지도 않은지 내 성기를 뿌리 끝까지 머금었다. 꽉 조이는 감각에 입술을 물다가 그가 버거워 보여 허리를 조금 뒤로 뺐다. 그는 금방 입술을 물리고 선단을 사탕 굴리듯 빨았다.
입술을 움직일 때마다 꿈틀거리는 등허리와 작게 흔들리는 엉덩이를 보고 있자니 더는 참을 수 없을 것 같아 그의 어깨를 밀어내고 허리를 완전히 뒤로 물렸다. 그의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넣고 그를 일으킨 뒤 도로 눕히자 의아한 눈길이 따라온다.
“싫으세요?”
“급해서.”
그의 아랫입술을 빨며 준비해 뒀던 콘돔을 내 것에 씌웠다. 입술을 떼자마자 그가 협탁 위에 있는 상자를 가리켰다. 상자를 열자 젤 몇 개와 콘돔 몇 개가 있었다. 젤을 하나 뜯어 다물린 입구에 묻혔다.
“정 선생은 원래도 따뜻한 편인데, 오늘은 유독 더 그러네요.”
“사실 지금 좀 더워요.”
“여름이 아니어서 다행이네.”
그에게 다시 입을 맞추었다. 가지런한 앞니를 혀로 간질이듯 핥으며 검지를 다물린 입구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아주 빡빡할 줄 알았던 안은, 그의 오랜 준비 때문인지 부드러웠고 손가락이 꽤 매끄럽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다음부터는 처음부터 내가 하게 해 줘요.”
“어……. 풀어 주는 것부터라면, 네.”
그의 입술을 쪼듯이 맞추며 손가락 하나를 더 넣었다. 손가락 두 개가 들어가니 조금 벅찬 구석이 있었다. 내벽 구석구석을 문지르며 젤이 닿지 않는 곳이 없도록 했다. 그러면서 한구석을 꾹 누르자, 그가 어깨를 움찔했다.
손가락을 안으로 더 처넣어 그 부근을 비비자 그가 꾹 눌러 참는 신음을 흘렸다. 내 어깨를 쥐고 고양된 얼굴을 보고 있자니 참기가 조금 힘들어서 그의 턱을 약하게 깨물었다.
조이는 안을 풀어 주며 그가 느끼는 부근을 끈질기게 눌러 주었다. 손가락 하나가 더 들어가자 손가락이 들어갔다 나올 때면 그가 잘게 떨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안 힘들어요? 가늠이 잘 안 되는데.”
“그, 후진 씨는, 하나 더…… 필요할 것 같아요.”
그가 눈을 깜빡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미간을 움찔거리며 상기된 그의 낯을 보다 웃음을 흘렸다.
“왜 그렇게 부끄러워해요. 솔직해야 안 다치지.”
“그냥……. 흣, 그냥 좀 적응이 안 돼서…….”
어떤 적응을 말하는 건지는 감이 잡히지 않았지만, 펠라는 능숙하게 해내면서도 이럴 땐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을 보니 귀여워 그의 뺨에 입술을 맞추었다.
네 손가락을 한껏 모아 입구를 뚫었다. 조금 버거워 보여 입구를 넓히는 데 집중하며 그의 유두에 입을 댔다. 작게 선 것을 빨아들이자 예민해진 몸이 금방 반응한다. 아래가 벌름이면서 손가락을 꽉 조였다.
이 정도면 괜찮겠지, 싶어서 그의 허리를 쥐고 혀를 내밀어 유두를 핥으며 성기를 입구에 맞추었다. 선단이 입구를 뚫고 들어가는 것이 노골적으로 느껴졌다. 입구는 쉬웠지만, 그 안으로 들어갈수록 그의 안이 내 것을 부드럽게 그러나 넉넉하지 않게 조였다.
“조금만, 힘 빼요.”
“흐읏, 네…….”
그의 다리를 내 허리에 감게 하고 고개를 들어 그의 입술을 부드럽게 핥으며 성기를 끝까지 처넣었다. 그의 안과 내 것이 완벽하게 맞물렸다는 것이 느껴졌다.
“괜찮아요?”
“네.”
그가 고개를 재빨리 끄덕였고, 나는 손으로 그의 성기를 쥐고 허리를 천천히 물렸다가 약하지 않게 성기를 다시 처박았다. 그가 고개를 젖히며 약한 신음을 내질렀다.
상상 이상으로 따뜻했고, 조였고, 기분이 좋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품에 안는 기분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고, 그것이 그라는 사실에 이성이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았다.
거칠고 빠르게 허리를 흔들고 싶다는 욕심은 저 멀리 던져두고 부드럽게 허리를 쳐올렸다. 내 움직임에 맞추어 그가 작게 엉덩이를 움직였고 내 성기가 빠져나올 때면 그의 안이 내 것을 바싹 조여 왔다.
“흐윽, 읏, 아, 좋아요, 선생님, 아……!”
그는 흥분해 있을 때면 호칭이 중구난방이었다. 아무래도 의식적으로 부르는 내 이름보다는, 평소에 입에 붙은 호칭이 무의식중에 나오는 듯했다.
그의 귀두를 손바닥으로 감싸 돌리면서 이전보다 조금 더 강하게 허리를 쳐올렸다. 그때마다 벌어지다가 도로 다물어지는 입구와 내벽이 내 것을 강하게 자극했고, 그가 내 목을 바짝 끌어당겼다.
젤이 녹아 버린 안이 성기에 쓸리고, 타액과 쿠퍼액이 묻은 성기를 쥐고 흔드는 소리가 끈적하게 침실 안을 울렸다. 울듯이 흩뿌려지는 그의 신음에 내 열 오른 숨소리가 한데 섞여 아득한 기분이 들게 했다. 그러면서도 내 것을 강하게 조이는 그의 움직임과 내 피부에 맞닿는 살결의 뜨거움이 이것이 현실임을 깨닫게 했다.
“아! 방금, 흐, 거기, 그렇게……!”
“이렇게?”
“으읏, 네, 아흑…….”
그의 발끝이 잘게 떨리는 것이 다 느껴졌다. 빈손으로 땀 맺힌 그의 이마를 쓸어 올리며 매끈한 이마에 입을 맞추고 허리를 거의 완전히 뒤로 물렸다가 안으로 바짝 처넣었다.
“아아……!”
“진아, 힘, 읏, 조금만.”
쾌감점을 정확히 자극했을 때 지나치게 조이는 감이 있었다. 온몸에 힘이 잔뜩 들어간 것이 느껴져 그의 몸 이곳저곳에 입을 맞추며 그의 성기를 조금 더 빠르게 흔들었다. 그가 자지러지며 내 얼굴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그가 찾는 내 입술을 그의 입술에 대 주고선 이전보다 조금 더 느릿하게 움직였다.
눅진하게 풀린 내벽이 부드럽게 내 것을 감싸 안으며 조여 오자 점점 사정감이 몰려왔다. 잘게 떨리는 그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고선 터질 것만 같은 성기를 퍽퍽 몰아붙였다.
“아, 읏, 쌤, 흐읍……!”
그가 내 목을 바짝 끌어안았다. 그와 내 이마가 닿았다. 그의 콧등에 키스하며 입구에 걸치도록 빼낸 성기를 뿌리 끝까지 강하게 처박았다. 그가 눈을 질끈 감으며 사정했다. 내벽이 경련하듯 안을 무지막지하게 조여 왔고, 나는 그의 안에서 밀려오는 사정감을 참지 않고 흘려보냈다.
“하아, 하…….”
탈력이 몰려왔는지 잔뜩 힘이 들어갔던 그의 몸이 완전히 풀렸다. 그가 내 목덜미를 놓고 나를 올려다보며 아주 긴 숨을 내쉬었다.
“안 아팠어요?”
“……네. 좋았어요.”
그가 코를 훌쩍이며 내 어깨에 이마를 묻고 비볐다.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의 귓가에 입을 쪽, 쪽 맞추었다.
“후진 쌤.”
“응.”
“제가 많이 좋아해요.”
“그래요.”
그의 머리에서 목덜미 그리고 등허리로 내려와 땀에 젖은 살결을 쓰다듬으며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나도 당신 좋아하니까.”
“…….”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아주 무서울 정도로. 두려워서 포기하고 싶어질 정도로. 그렇지만 결국엔, 도저히 포기 못 할 정도로.
그 두려움을 조금이라도 덜어 내는 방법은, 아마 내 마음을 당신에게 온전히 쏟아붓는 방법밖에 없을 것이다. 그 사랑이 언제 당신을 숨 막히게 할지 모르겠지만, 당신이 내 눈을 가리고 내 귀를 막으니 계속해서 사랑할 수밖에.
“고마워요.”
내 감사 인사에 그가 작게 웃었다. 그 웃음의 의미는 알 수 없으나, 온기는 알 수 있었다. 그의 체온보다 더 높은 다정함이다.
* * *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부엌 안을 아담하게 울렸다. 뭐든 가리지 않고 잘 먹는 정 선생은 내가 차려 준 식사도 맛있게 비웠다. 자취 경력은 오래되었지만 요리를 그렇게 잘한다고는 할 수 없어서 그가 내가 해 준 밥을 잘 먹어 주는 게 마냥 예쁘고 고마웠다.
“식사 안 하시고 가도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네. 별로 배도 안 고프고, 무거운 쪽보다는 가벼운 쪽이 좋아서.”
“네. 편하신 대로 하셔야죠. 다 먹었으니까 정리는 제가 할게요.”
“내가 할게요. 우리 집이니,”
“어, 그거 우리 집 하자고 하신 거예요?”
정 선생이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웃었다. 내가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그가 나를 일으켜 현관 쪽으로 떠밀었다.
“정리하고, 기다리고 있을게요. 시간 늦었으니까 얼른 다녀오세요.”
그에게 등 떠밀려 신발을 신고, 돌아서 그를 품에 안았다. 그가 내 허리를 끌어안음으로 답했다.
“늦지 않게 오겠지만, 피곤하면 먼저 자요.”
“네, 그렇게 할게요. 다녀오세요.”
그가 내 뺨에 입을 맞추고 손을 흔들었다. 내 집에서 나를 배웅하는 그를 눈에 담은 뒤 집을 나왔다.
지연이의 본가는 여기서 두 시간 거리에 있었다. 라디오를 틀어 놓고 출발했다. 해가 빨리 지는 탓에 아직 7시인데도 주변이 깜깜했다. 그러나 도로로 나오자 주위 건물들의 네온사인들이 번쩍이며 길가를 밝혔다.
세상에 사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사연을 들으며 낯익은 길을 향했다. 지연이와는 결혼을 약속한 사이였기에 그녀의 본가에도 종종 방문하곤 했었다.
발인 이후 그녀를 보러 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그녀가 안치된 납골당을 그녀가 떠난 이후 한 번도 찾은 적이 없었다. 또 그녀의 빈소에 들어간 적도 없었다. 장례식이 이어지는 나날 동안 빈소 밖에서 하염없이 빈 복도만을 바라봤을 뿐이다.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를 원망할 용기, 그녀가 나를 떠났음을 인정할 용기, 그녀가 이 세상에 없음을 깨달을 용기.
그래서 자책하고 또 자책했다. 그녀를 원망하느니 나를 자책하는 편이 좋았다. 내게 잘못이 있는 편이 이해가 쉽고 인정이 쉬웠다. 그녀의 변심이 이유 없는 변심이기를 바라지 않았다. 내 잘못을 인정하고 나를 고쳐 볼 새도 없이, 그러니까 어찌할 바도 없이 떠나보낸 것이 아니기만을 바랐을 뿐이다. 결과적으로 그녀는, 내가 어찌할 틈도 없이 떠나고 말았지만.
두 시간을 달려 아파트에 도착했다. 불이 켜진 수많은 창문들을 올려다보다가 안으로 들어섰다. 엘리베이터에 올라 상승하는 숫자를 보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어쩐지 손이 저릿해서 손을 쫙 폈다가 쥐었다.
문 앞에 서서 벨을 누르자 곧 문이 열렸다. 작년에 보았을 때보다 더 마른 누님의 얼굴을 보고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들어오라는 말에 천천히 집 안으로 들어섰다.
거실에는 제사상이 있었고, 그 앞에서 어머님이 앉아 눈물을 훔치고 계셨다. 내가 들어서자마자 어머님이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어, 후진이 왔니?”
“네. 잘 지내셨어요.”
나를 보면 항상 내 손을 끌어다 맞잡고 웃으면서 내 손등을 쓸어내리시던 어머님은 이제 멀찍이 서서 어색한 인사를 건네셨다. 이제 나는 이 집의 불청객이다. 내 욕심으로 이곳을 찾았지만, 작년과 지금의 상황은 완벽히 달랐다.
모든 게 끝난 제사상 앞에 서 절을 하고 그녀의 사진을 바라보았다.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고 있는 저 사진은 나와 교제할 때 사진관에 가서 찍은 사진이었다.
아직도 그녀를 이해할 수 없다. 나와 결혼을 약속하고 내 앞에서 그리 행복하다는 듯 웃고 있었던 그녀가 왜 그랬는지. 나는 그녀의 동승자가 그녀의 전 연인이라는 것을 알았어도 그런 사이가 아니었을 것이다, 협박이라도 당한 것이 아니냐며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있었는데.
아니 사실 어떤 희망도 없었다. 그녀의 죽음 앞에서는. 그녀가 죽었는데 그녀가 나를 버린 것이든 아니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나는 차라리 수백 번 버림을 받아도 그녀가 다시 살아 돌아왔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수천 번 바라고 생각했었다.
그녀가 죽은 뒤 한동안은 일상을 영위할 수 없을 정도로 정신이 나가 있었지만, 나는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일상을 살며 새로운 사랑을 만났다.
내 사랑은 거기까지였나. 나는 그렇게 알량한 사랑을 가지고 그녀를 원망했나.
아니, 아니다. 내 사랑은 알량하지 않았다. 그녀가 떠나지 않았으면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그녀는 떠났고, 나는 새로운 사랑을 만났다. 그래서 그녀를 사랑했던 마음을 묻어 두었을 뿐이다.
산처럼 쌓아 뒀던 마음 위에 모래를 뿌리는 과정은 더뎠고 고통스러웠다. 그 더디고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 산처럼 쌓였던 마음은 점점 숨을 죽였을 뿐이다. 그리고 내가 새로운 사랑을 만날 수 있도록, 그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그녀가 떠나지 않았다면 정 선생을 사랑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떠나지 않았다 해도 정 선생을 사랑하게 되었을지 모른다.
그런 것이었다. 결국 그녀가 내 곁을 떠난 이유도 그러했을 것이다. 나를 여전히 사랑함에도 그 마음이 산처럼 쌓이지 않았을 수도, 혹은 산처럼 쌓였던 마음이 어느새 숨을 죽이고 있었을지도.
그러니까 사랑은 어쩌면 그러한 것인지도 모른다. 숨이 죽기를 기다리거나 숨을 죽이기 위한 과정. 끝은 정해져 있을 테고, 그러나 그 시기만이 정해져 있지 않은.
“후진아.”
“예, 어머니.”
“살이 좀 빠졌다. 밥은 먹고 다니니?”
“네. 잘 먹고 다녀요. 요즘 좀 바쁜 시기라 그런가 봐요.”
“그래.”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이던 어머님의 눈가가 끝내 일그러졌다. 어머님의 눈에 눈물이 차오르는 걸 보며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라는 걸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나는 그녀를 떠올리게 하는 존재고, 더불어 딸을 잃으신 어머님께 미안한 감정까지 불러일으키는 부담스러운 불청객일 것이다.
“후진아.”
어머님이 울면서 내 손을 끌어다 잡으셨다. 나는 참담한 심정으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이제 오지 마라. 응? 이제 지연이는 가슴에 묻고, 아니야. 가슴에 묻지도 마라. 가슴에 묻는 건 이 어미 하나로 족해.”
어머님은 내 가정사에 대해 모두 알고 계셨다. 결혼을 허락받으러 간 날, 나는 내 형편없는 가정사에 관해 모두 털어놓았고 어머님은 기꺼이 나를 끌어안으셨다. 그리고 내 어머니가 되겠다고 말씀해 주셨다.
“다 잊어라. 내가 전부 다 끌어모아 가슴에 묻을 테니까. 네 잘못은 하나도 없어. 그러니 없었던 시간처럼, 전부 훌훌 날려 보내. 그리고 다신 발걸음도 하지 말아.”
나를 품에 안으실 준비를 하셨던 어머님은 이제 나를 떠나보내시려 한다. 그녀가 죽은 뒤 1년간 단 한 번도 찾아뵙지 않고, 연락 한 통 하지 않고, 이 세상에서 나만 아픈 줄 알고 청승을 떨었던 못난 자식을.
세상에 나만 아픈 줄 알았으나, 어디 세상에 나만 아프겠는가.
나는 어머님께 차마 손수건 하나 건네 드리지 못하고, 1년 새 작아진 어머니를 끌어안아 드리지도 못했다. 그것이 서로에게 독인 걸 알기에.
고개를 깊게 숙인 채로,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천천히 집을 나왔다.
별이 빛났고, 별의 반짝이는 빛줄기 하나에도 생채기가 났다며 욱신거리던 가슴은 이제 묵묵히 그 빛을 받고 있었다.
이젠 인정할 수 있었다.
그녀는 나를 떠났다. 그리고 나는 그녀를 묻었다.
그녀가 나에게 미안해하지 않았으면 한다. 나도 그녀에게 미안해하지 않을 테다. 그녀에게 미안해하면 가슴 아파할 사람들을 위해.
집에 도착했을 때는 자정이 지나 있었다. 집 앞에 도착해 차에서 내렸을 때, 입구 앞에 있는 정 선생이 눈에 띄었다. 그가 쪼그려 앉아 있다가 나를 보자마자 활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각보다 일찍 오셨네요.”
“왜 나와 있어요, 추운데.”
“그냥 잠도 안 오고 해서요. 이쯤 되면 오실 것 같아서 나와 있었는데, 나온 지 얼마 안 돼서 오셨네요.”
거짓말은 아닌 듯 손바닥에 닿는 그의 뺨이 아직 따뜻했다. 그를 데리고 집으로 들어갔다. 방금까지 그가 있던 곳이라 그런지 온기가 풀풀 흘러나왔다.
“안 피곤하세요? 운전만 해도 엄청 힘들었을 것 같은데.”
“괜찮아요. 뭐하고 있었어요.”
“쌤 집 구석구석 구경하면서 텔레비전 보고 있었죠. 아, 근데 쌤 보니까 잠 올 것 같아요.”
“누워 있어요. 씻고 올게.”
“넵. 빨리 오세요.”
침실로 들어가는 그를 보다 욕실로 들어섰다. 따뜻한 물이 머리 위로 쏟아지자 피곤이 조금 풀리는 것만 같았다. 나도 모르게 몸에 힘을 많이 주고 있었는지 어깨가 뒤늦게 뻐근해져 왔다. 따뜻한 물을 맞으며 어깨를 풀었다.
정 선생이 불편하지 않게 머리까지 모두 말린 뒤에 욕실을 나왔다. 거실에 불을 끄고 침실로 들어갔다. 협탁에 놓인 스탠드만 켠 채로 정 선생이 이불을 나를 향해 들추고 있었다.
“들어오세요.”
“네.”
말 잘 듣는 어린아이처럼 고개를 끄덕이고 그의 옆에 누웠다. 그러자 그가 쿡쿡 웃으며 나를 끌어안았다.
“오늘 고생 많으셨어요.”
“응. 기다려 줘서 고마워요.”
“뭘요. 별일 없으셨어요?”
“어머님 뵙고 마지막으로 인사드리고 왔어요.”
내 대답에 정 선생이 내 등을 토닥였다. 말은 없었지만 의미는 분명한 위로에 웃음을 흘리며 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고마워요.”
“고마우시면 저랑 내일 데이트나 해 주시든가요.”
“데이트 말고 다른 건.”
“다른 것도요? 음, 두고두고 생각해 볼게요.”
그가 턱을 치켜들고 젠체하듯 목소리를 냈다. 웃음이 절로 나왔다. 내가 웃자 그도 따라 웃었다.
“마음껏 생각해요. 다 해 줄 테니까.”
“어어, 그러다가 큰코다치시는데?”
“다쳐도 괜찮으니까.”
내 등을 토닥이는 손길이 멎었다. 그가 몸을 뒤로 물려 나와 얼굴을 마주했다.
“선생님.”
“네.”
“아이들이요. 걸음마를 하잖아요.”
걸음마. 내 중얼거림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닥을 짚고, 고작 몇 걸음 걸었다가 주저앉고, 넘어지고, 그러다 울고……. 그래도 결국엔 해내잖아요. 걸어야 하니까, 앞으로 가고 싶으니까.”
그의 손이 내 얼굴을 감쌌다. 뺨을 매만지는 온기에 기대 그와 눈을 맞췄다.
“걸음마를 하는 것처럼 사랑하기로 해요, 우리.”
“…….”
“바닥을 짚고 일어나는 건 힘겨울 거예요. 비틀거리면서도 한 걸음씩, 용기를 내 내디뎌야 할 거고요. 그러다 넘어지는 일도 종종 있겠죠. 아프고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겠지만, 막상 걸음을 떼게 되면 어디든지 갈 수 있을 거예요.”
그가 얼굴을 내게로 바짝 붙였다. 그의 코끝과 내 코끝이 닿았다. 그가 장난스레 웃으며 고개를 흔들어 코끝을 비볐다.
“천천히 해요. 걸을 수 있을 때까지. 그래서 걸을 수 있게 되면, 저랑 손잡고 가고 싶은 곳을 가요.”
그가 콧잔등을 한 번 찌푸린 뒤 기습적으로 입술을 맞추고 얼굴을 뒤로 물리며 웃었다.
“그러니까 저한테 다 해 주지 마세요. 천천히 해 주세요. 그리고 제가 해 드리는 것도 받으시고요. 아시겠죠?”
스탠드의 노르스름한 빛을 받아 그의 눈의 온기가 그대로 드러났다. 그의 눈이 내 얼굴 곳곳을 훑는다. 나는 그 시선을 감상하고 음미하며 그의 목덜미를 끌어당겼다. 그가 눈을 감으며 웃었다. 흐드러지는 웃음 사이로 입술을 맞댔다.
그는 얼굴 곳곳에 퍼부어지는 내 키스를 받으며 잠이 들었다. 기다리느라 그도 많이 피곤했을 테다. 숨을 색색 내쉬며 자는 그의 뺨을 어루만지자 잠결에 손바닥에 뺨을 비빈다.
어깨 아래로 내려간 이불을 목 끝까지 덮어 주고 그의 얼굴을 감상했다. 흘러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볼록 솟은 이마와, 눈썹 위에 아주 작은 점, 숱이 적지만 가지런한 눈썹, 길고 얇은 속눈썹, 좁은 콧방울과 조금 더 도톰한 아랫입술을.
숨을 색색 내쉬는 것에 귀를 기울이다가 문득 웃음이 나왔지만, 그의 단꿈을 방해할까 싶어 목 뒤로 삼켰다.
예전에 상호가 한 말이 떠올랐다. 어디서 이런 게 뚝 떨어졌는지 모르겠다고, 자신의 아이를 보며 한 말이. 아이는 상호와 유정 씨가 낳은 것이지만, 이 사람은 정말 어디서 이렇게 뚝 떨어진 걸까. 그의 부모님께 감사해야 할 지경이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니, 기적이고 행운이다.
문득 방 안이 밝아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개를 들자, 창밖으로 동이 터 오는 것이 보였다. 그를 하염없이 감상하느라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몰랐다.
동이 틀 무렵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빛이 이렇게 벅찼던 적이 있던가. 아무런 일도, 어떤 생산적인 것도 하지 않고 그저 잠을 자기 위해 노력하며 무력하게 흘려보냈던 시간들 속에서, 나의 동틀 녘은 하루의 시작도 끝도 아니었다. 그저 출근을 위하여 잠에 빠져야 할 시간이었고, 얕은 잠 속에서 나는 제자리에만 머물러 있었다.
동이 트면 지난 과거에 얽매여 잠에 들지 못하는 나 자신을 보며 괴로워했고, 누군가에겐 시작일 시간에 혼자만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에 알 수 없는 자괴감과 죄책감을 느끼곤 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저 벅찼다.
햇빛이 내 곁에 누운 그의 얼굴을 밝혔다. 그의 단잠을 지켜 주기 위해 그의 머리를 내 품에 끌어안았다.
나는 아직 모든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산처럼 쌓인 사랑이 숨을 완전히 죽이기까지 나를 괴롭힐 것이고, 너무나도 지리멸렬하여 얽히고설킨 과거의 그림자가 내 발목을 옥죌 때도 있을 것이다. 나는 아직도 끝이 두렵고, 그가 나를 언젠가 버릴까 두렵고, 내가 그를 질리게 할까 두렵다.
모든 것이 나아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의 동틀 녘이 달라졌다.
이것을 시작으로, 그의 상냥한 말처럼 나는 걸음마를 떼기 시작할 것이다. 천천히 걷다 보면, 언젠가 끝이 오겠지. 같을 수도 있으나 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결말을 보기 위해 걸음을 떼는 것이 아니라, 그가 손을 맞잡아 주기에 걸음을 떼고 말 것이다.
동이 텄다. 아침이 시작되고 있었고, 나는 눈을 감았다. 아침 햇살과 함께 그가 내 안에 들어왔다.
完.